[격정 토로] 陳承錄 전 서울법대 학장의 再審 준비 중인 딸 陳美卿 아주대 교수 : 월간조선

1961년 5월 새벽, 진미경(陳美卿․ 59)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아버지 진승록(陳承錄․1905~1985) 서울법대 학장이 5․16 군사정변 직후 수사관들에게 붙잡혀 가는 모습을 5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7살에 불과했던 진 교수는 그날 아버지의 강제연행 모습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은 듯했다.

진승록 교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끝에 간첩과 간첩방조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2년을 복역하다 1963년 석방됐다. 이후 누명을 벗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군사정권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1983년에 변호사 자격을 회복하였으나 얼마 후 1985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 29일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진미경 교수는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한밤중에 혼잣말로 ‘원통하다, 억울하다’고 탄식하시는 소릴 들었다”며 “공산당이라면 치를 떤 아버지가 간첩이라니 기가 막혀 눈물도 안 나온다”고 했다. 진 교수 옆에는 남편 이수철(李秀哲․62) 용인대 경영대학원장도 자리해 부연설명을 했다.

진미경 교수는 “5․16 군사정변 직후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적 이유로 옥고를 치른 일로 인해 진승록 교수의 업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진승록 교수는 법과 원칙에 준거한 법전을 편찬해 국정안정과 국가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역설한 한국 최초의 민법학자였다”고 했다.

朝鮮人 최초, 와세다大 법학부 수석 졸업

1952년 11월부터 1955년 2월까지 고시위원장 시절의 진승록 교수.

옥계(玉溪) 진승록은 진치삼(陳致三)과 이춘화(李春花)의 4남매 중 장남으로, 1905년 강원도 강릉 옥계면에서 출생했다. 진 교수는 법률가 집안 출신이다. 진 교수의 남동생은 일본 중앙대 법대를 졸업했고, 여동생은 김병리(金秉离) 대검중수부장의 부인이 됐다. 김병리 검사는 1964년 인혁당(人革黨) 사건 때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를 하지 못하겠다며 사표를 제출한 ‘소신 검사’였다.

부인 공명길(孔明吉․1913~1989)은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강령리 출신으로, 평양의 서문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해 동경미술전문학교 자수과를 거쳐 제국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다. 서문여고 동기생으로는 대통령 비서실장, 주미대사 등을 지낸 김경원(金瓊元)씨의 모친 이춘란(李春蘭)씨가 있고, 동경미술전문대학 동창생으로는 성신여대를 설립한 이숙종(李淑鍾) 총장 등이 있다.

진미경 교수는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덕성여대 전신인 근화여학교를 설립한 차미리사(車美理士)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동해 유학을 결심하고 와세다대 법학부에 입학했다”고 했다. 진승록 교수는 와세다대 법학부 재학 시 한국인 최초로 학생회장을 역임했고, 1934년 졸업할 때 일본 학생들을 제치고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진미경 교수는 “와세다대 법대의 민법전공 오오하마 노부모토(大濱信泉․1981~1976) 교수는 진승록이 조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성품과 총명함에 끌려 총애했다”면서 “진승록은 오오하마 교수를 진심으로 존경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국경을 초월한 진정한 사제관계가 형성됐다”고 했다. 후에 오오하마 교수는 와세다대 총장을 3번이나 연임했다. 한양대학교 설립자인 김연준(金連俊) 총장은 오오하마 총장을 1965년 초청해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이때 진 교수는 김포 공항에서 스승 오오하마 교수를 영접해 학위수여식에 참석했다.

보성전문 民法 교수로 스카우트

진승록은 와세다대 법학부 재학 시 조선인 최초로 학생회장을 역임했고, 1934년 와세다대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와세다대 법학부 학생들이 1934년 1월 18일 졸업을 앞두고 아카사카에서 사은회를 가졌다. 진승록 학생(‘나’라고 표기)과 스승인 오오하마 노부모토 교수(아래에서 둘째 줄 중앙)가 보인다.

진승록 교수는 와세다대 졸업 후 일본 문부성에서 시행하는 대학교수 자격증(법학, 경제학)을 취득하고, 동경고등상공학교(現 히토츠바시大)에서 잠시 강사 생활을 했다. 당시 와세다대 상과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운영하던 인촌(仁村) 김성수(金性洙․․1891∼1955) 선생은 와세다대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진승록을 눈여겨보다 1936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전격 스카우트한다.

이철승(李哲承) 헌정회 원로회의의장은 “인촌 선생이 초빙한 교수들은 전공분야에서 매우 우수한 학자임은 물론이고 반일정신이 투철한 민족주의자, 자유민주주의자여야 했다”면서 “인촌은 와세다대 후배인 진승록 교수에 대해 잘 알고 계셨을 것”이라고 했다.

인촌 김성수는 와세다대 후배였던 진승록 교수를 보성전문으로 스카우트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법학자였던 진 교수(오른쪽)는 보전에서 민법을, 안호상 교수는 철학을 가르쳤다.

당시 진 교수와 같이 보성전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인 교수들은 안호상(安浩相) 초대 문교부장관, 장덕수(張德秀) 한민당 정치부장, 유진오(兪鎭午) 초대 법제처장, 최태영(崔泰永) 전 서울법대 학장 등이었다. 이들은 조선 최고의 지성으로,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이 충만해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진승록 교수는 민법을, 안호상 교수는 철학을, 유진오 교수는 헌법을 가르쳤다.

진미경 교수는 “아버지는 운동도 좋아해, 빙상부장, 승마부장, 정구부장 등도 지냈다”며 “특히 겨울방학 때는 평안북도 강계에서 합숙훈련도 했고, 인촌 선생의 둘째 아들이며 후에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김상기(金相琪)씨가 빙상부 선수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진미경 교수는 “아버지는 민족주의자며 자유민주주의 사상가였다”면서 “아버지는 창씨개명은 물론 징병과 징용을 독려하는 일체의 연설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진승록 교수는 백범(白凡) 김구(金九) 선생이 광복 후 신생 독립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47년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에 학계에서는 안호상 교수와 함께 5인의 상무위원으로 참여했다.

김구 선생은 암살되기 직전인 1949년 2월, 진승록에게 ‘月到千虧餘本質, 柳經百別又新枝(월도천휴여본질, 유경백별우신지: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질이 남아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는 뜻의 휘호를 직접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문인인 신흠(申欽)이 지은 이 한시(漢詩)는 앞 두 연이 ‘桐千年老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동천년노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뜻이어서, 독립운동가들이 애송(愛誦)했다고 한다.

“신탁통치는 일제 식민지보다 가혹”

해방 공간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는 신탁(信託)과 반탁(反託)이었다. 진미경 교수는 “반탁운동을 벌여 신탁통치를 거부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자유민주국가로 탄생했고,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과 경제발전이 가능했다”고 했다.

진승록 교수는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 안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되자, 해방공간의 국가적인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신탁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철승 헌정회 의장에 따르면, 진승록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려대에 신탁법(信託法) 강의를 개설해 신탁문제를 법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 “신탁통치는 민법상의 문제”라고 정의하고,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를 확신을 갖고 다음과 같이 전개했다.

“신탁은 아버지가 준 재산을 아들이 관리할 능력이 없을 때 국가나 제3자가 맡아서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강대국이 우리민족에 대해서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사고는 민법상의 이론을 국제법적으로 잘못 확대 해석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하여 건국하고 국가를 이끌어갈 충분한 자치 능력이 있으므로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 민족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처럼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의 신탁통치를 받는다면 일본 한 국가의 통치를 받는 것보다 더욱 가혹하게 당할 것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이라는 한 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일도 통탄할 일인데, 신탁통치는 4개국의 지배를 강요하고 있다. 이는 조선 민족의 독립 열망을 완전히 짓밟는 행위이므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이 우리 민족을 보존하고 우리가 세운 자주독립국가가 번영케 하는 길이다.”

진미경 교수는 “그 이후 아버지는 반탁의 입장에 서게 됐다”면서 “신탁과 반탁의 개념을 확실히 모르는 학생들과 국민들에게 강단과 강연장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반탁 운동을 전 국민들에게 확산시켰다”고 했다.

이철승 의장은 “진 교수는 조소앙(趙素昻), 신익희(申翼熙), 안호상 등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신탁통치의 부당성을 알리는 강연을 많이 했다”면서 “진승록 교수는 광복 후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의 출범을 방해할 때 반탁이론가로 활동하면서 자유 대한민국 건국에 큰 공로를 세운 분”이라고 했다.

반탁운동의 결과로 신생 대한민국의 독립 안이 통과되었을 때, 진 교수는 《민법총론(1949, 대성출판사)》 서문에서 대한민국이 태어난 날짜까지 기록하면서 건국(建國)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단기 4281년(1948년) 12월 8일 ‘42 대 6’, 동 12일 ‘48 대 6’, 이는 국련소총회(國聯小總會)와 전체총회의 대한민국 독립승인의 세기적인 숫자로, 이로써 신생 대한민국은 국제적 환시리(環視裡)에 독립국가로서 뚜렷하고 엄연부동(儼然不動)한 존재로 확인됐다.”

진미경 교수는 “아버지는 38선 이남에서만 독립국가가 탄생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했다”며 “특히 서문에 ‘38이남 - 이 문구는 민족적 최대 불행사다’라고 적었다”고 했다. 진승록 교수의 반탁운동은 김구 선생을 모시고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면서 제2단계로 들어서게 된다. 진승록 교수는 안호상 교수와 함께 5인의 상무위원으로 참여했다. 이승만(李承晩) 박사는 1947년 김구 선생이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에 같이 참여했고, 이 양성소를 중심으로 신생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동량(棟梁)도 양성하고 반탁운동도 함께 전개했다.

학장용 관용지프 獻納하며 눈물 흘려

광복 이후 좌우익은 이념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서울대학교도 좌익의 준동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진 교수가 상임고시위원으로 재직하던 중, 서울대 최규동(崔奎東) 총장(납북 후 병사)이 “서울대학교를 좌익들로부터 안정시키기 위해 법대 학장으로 와 달라”고 간청한다. 수차례의 간청에 결국 진승록 교수는 배은희(裴恩希) 고시위원장의 허락을 받고 서울대 법대 학장직을 수락한다.

6․25 사변은 서울대법대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진승록에게 큰 불행을 안겼다. 전쟁이 발발하자, 진 교수는 학교를 지키기 위해 학교로 출근해 공포에 떨고 있는 교직원들과 학생들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서울대 법대 1학년 학생이었던 서울대 법대 박병호 서울법대 명예교수가 진미경 교수에 들려준 상황이라고 한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하루나 이틀 지난 뒤에 학교에 갔어요. 교직원 5~6명과 법대 학생 20여명이 학교에 나와 있더군요. 진승록 학장은 현관 앞에 도열해 있는 교직원들과 학생들에게 ‘전쟁이 나서 군수물자가 부족합니다. 인민군을 무찌르기 위해 학장에게 배정됐던 지프를 전선으로 보냅니다. 우리 모두 박수로 환송합시다’라고 말했어요.

진 학장은 눈물을 글썽이며 교직원들, 학생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군인들은 박수를 받으며 지프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나는 진 학장이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을 보고 진 학장의 불타는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나는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던 진승록 학장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진승록의 고대 법대 교수시절 제자로는 해방 후 반탁운동을 이끌었으며 고려대 학생회장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7선 의원 이철승,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김진웅(金振雄) 교수 등이 있다. 서울대법대 제자로는 서울대법대 학장과 숭실대 총장을 지낸 김치선(金致善) 교수, 여성 최초의 판사인 황윤석(黃允石) 등이 있다. 황윤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판사로 서울대법대를 졸업하고, 진승록씨가 고등고시위원장으로 있던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으나, 불행히도 1961년 4월 자택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拉北 직전 서울역서 기적적 상봉

진승록 학장이 1960년 《육군》지에 쓴 ‘6․25의 수난’을 보면 납북에서 탈출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부를 발췌해 본다.

〈1950년 6월 28일에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자 법대 좌익 학생인 김근모 등 4명에 의해 납치당해 종로내무서(옛 종로경찰서 자리)로 끌려갔다. 나의 죄상은 악질 반동분자라는 것이다. 나는 그 학생에게 반문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는 것이 반민족이 되느냐. 그것이 대학교육을 받은 자의 말이냐”고 했더니, 그 학생들은 “잠잠히 있으라”고 했다.

이곳에서 3일후- 그 동안 나는 서울 중앙 소방소 3층에서 학생들한테 신문을 받고 또 다시 종로 내무서로 끌려왔다. 7월 삼복더위 긴긴 해도 저물자, 그들은 나를 끌고 정치보위부(국립도서관 옆 대한산업 붉은 벽돌 건물)에 감금했다. 꼼짝없이 들어가 보니 시멘트 바닥이었다. 후끈한 더운 김이 썩은 땀 냄새와 섞여 코를 찔렀다. 나는 시멘트 위에 펄썩 주저앉았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속이 메스꺼웠다.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고 옆을 훑어봤다. 옆에는 초대 심계원장(현 감사원장)을 지낸 명제세(明濟世)씨를 비롯해 강낙원(姜樂遠, 연세대 교수), 백상규(白象圭, 국회의원), 방응모(方應謨, 조선일보 사장), 고봉경(高鳳京, 경무국 초대 여경과장), 원희득(元喜得, 서울대 교수)씨 등 모두들 아는 분들이 쭈그리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거물급이었다. 이곳에 갇혀있는 분들이 긴 한숨 소리와 공산당에게 퍼붓는 비통한 항변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묵묵히 정물처럼 쭈그리고 있었다. 밤은 깊어 책상 옆에서 눈을 부쳤을 때, “진승록!”하고 수차 부르는 소리에 그 소리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여기서 또 심문을 받았다. 나는 애써 나의 과거를 감출 필요가 없었다. 20~30년 간 교육계에 종사하였고, 지금은 법과대학 학장이라는 것, 과거 고려대학의 14년간의 교원생활, 막부 삼상결정과 신탁통치(Trusteeship) 반대운동을 하던 일, 그리고 고시위원회 상임고시위원, 서울대 법대 학장이라는 것을 모조리 말했다.

내가 현재의 연합신문사 뒤에 위치한 정치보위부에서 그들에게 그렇게 대담하고도 직접적인 조건으로서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정치보위부에 감금된 지 불과 3일 만에 납치행 열차에 피랍을 당하는 슬픈 운명을 먼저 걷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자탄과 증오와 체념과 비운의 감정으로 묵묵히 그들이 요구하는 지시대로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발총 실탄을 장치한 그들 앞에 쓸데없는 반항을 함으로서 가치 없는 죽음을 당하기는 정말 싫었다. 나는 모든 것을 체념했다.

우리 피랍자 일행은 서울역에 이르렀다. 나는 우리들의 인솔자가 먹을 물을 떠오라는 지시에 의해 물을 뜨러 가다 감시의 눈을 피해 어느 젊은이에게 나의 돈암동 집주소를 일러주고, “내가 북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을지도 모르니 내 가족에게 연락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피랍자 80명은 화물차 속에 개돼지처럼 실렸다. 차는 아직 떠나지 않고, 구슬픈 기적만 울었다. 나의 마음은 초조했다. 그 젊은이가 집으로 연락하여 주었으면 마지막으로 가족의 얼굴이나 볼 수 있으련만. 그러나 가족이 여기까지 오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당시 나의 집은 돈암동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마구 흘렀다. 열차는 공중의 비행기 폭음소리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밖을 살피고 있을 때, 내자와 흡사한 뒷모습의 여인이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무조건 “혜순아”하고 큰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여인은 이름 소리를 듣고 급히 뒤돌아보았고, 나의 시선과 마주쳤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 나의 내자가 아닌가. 나의 눈시울은 뜨거웠다.

기약 없는 마지막 결별을 고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 슬프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아니 일대 행복이었다. 나는 전부터 부모님의 비석을 세우기 위해 얼마간의 돈을 배에 차고 다녔었다. 배에 찼던 전대(纏帶)를 아내에게 끌러주며 “이 돈을 더 보태 부모님의 비석을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목 메인 음성으로 “내, 내가 죽더라도 아이들을 잘 길러주오”라는 말을 던지고 나는 흐느꼈다.

北 재판관과 신탁통치 贊反 논쟁

비오는 7월 16일, 납북자 일행 80여명은 평양에 도착했다. 전쟁이 휩쓸고 간 공포와 폐허의 거리 평양 시가를 바라보면서 평양형무소(그들은 교화소라 부름)에 닿았다. 정거장에서 교화소까지 가는 길, 나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교원 생활 20여 년 간의 나의 손에 채워진 철제의 수갑! 만감이 교차하였다. 밤새껏 움츠리고 앉았던 다리를 겨우 펴서 감옥 문을 거쳐 감방에 들어섰다.

나는 4사(舍) 5호 감방에 수감됐다. 두 평 남짓한 감방에 30여명이 수감됐다. 돼지우릿간보다도 못하였다. 그들이 주는 썩은 콩 보리 또는 조(粟)밥을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40일이란 날짜를 인간 지옥, 괴로움 속에서 보냈다.

내가 수감된 곳에는 조만식(曺晩植) 선생님의 아들(차남 조연창)도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조만식 선생님이 감옥 지하실에 수감돼 있다는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생지옥 속에서 죄 없는 죄인 노릇을 언제까지나 하려는지 아득했고, 하루가 천년 아니 만년 같았다.

8월 25일, 우리는 평양 감옥에서 끌려나와 대동강을 지나 트럭을 타고 중화읍의 인민학교 건물의 정치보위부에 도착했다. 각계에서 거물급 60여 명이 끌려나와 재판을 받는 것이었다. 김동원(金東元, 국회부의장, 소설가 김동인의 兄), 황신덕(黃信德, 여성 교육인), 서상천(徐相天, 동양 제일의 力士), 명제세, 옥선진(玉璿珍, 대검찰청 차장)씨 등이 재판을 받는 것이다. 그중에는 5명의 여류인사도 끼어 있었다. 소위 정치보위부의 조사관 7~8 명이 V자형으로 둘러 앉아 나에 대한 예심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캐비넷 같은 장 속에 가득 꽂혀있는 호적대장과 같은 두꺼운 장부를 꺼냈다. 한문으로 ‘민족반역자명부(民族叛逆者名簿)’라고 씌어 있었다. 내가 남한에서 일하던 일거일동이 그 책에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 당시 서울시 성북동 삼선교에서 강연회를 한 일, 강연내용은 물론 참석 인원수까지 명백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나의 죄상은 ▷고려대학에서 14년간 근무(좌익학생을 탄압했다는 것), ▷대통령 특파강연(이 강연에서 경상북도 일대 좌익분자를 처단하고,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애국애족의 강연한 정신을 가질 것 등을 주장했다고 함), ▷고시위원회 상임위원(많은 자가 법조계에 판․검사로 등용돼 좌익학생 처단에 최선봉이 됐다는 것),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당시 문교부장관 xxx씨는 ‘덜랭이’였으나, 나는 두뇌가 명철해 남한 학생의 반탁운동을 총 조종을 했다는 것) 등이었다.

나는 재판관에게 따졌다. “반탁운동이 무엇이 나쁘냐. 법률에 신탁법(Law of Trusts)과 막부(莫府,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는 다르지만,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8․15 해방이란 무엇이냐? 우리는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부르짖어 많은 희생 끝에 찾은 완전 해방이라고 본다. 일제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 정책 밑에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4개국의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일제 1개국 통치보다도 더 심한 구속과 억압을 받는 것이다. 완전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정기에 어그러진다. 그래서 나는 반탁운동을 했다.”

그들은 나의 이론에 분개하였는지 “악질”이라고 소리치며 이 자리에서 반탁 연설을 하라고 했다. 나는 굴하지 않고 열렬하게 30분 동안 연설했다. 그들은 끝내 내게 “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라”며 “그러면 너의 생명을 살려 준다”고 말했다. 나는 극력 반대했다. “좌익 이론도 모르는 사람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좌익이 된다는 것은 거짓이다. 만일 내가 다시 산다면 훈장이 될 사람으로, 어찌 지조를 굽힐 수 있겠느냐.”나는 재판장에게 이론 정연하게 대어 들었다.

특무대 장교인 서울법대 제자 만나 銃殺 면해

함태영 부통령과 함께한 진승록 고시위원장 부부. 왼쪽 뒷모습을 보이는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다.

때는 10월 초순, 중화읍에서 다시 평양으로-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는 5사(舍) 4호 감방으로 왔다. 나는 이곳 감옥의 정치부 조사관이 나의 중학 동창 박xx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중학 동창은 이북의 거물급이었다. 벽돌담 안에서 심문을 받은 사람은 십중팔구 총살(銃殺)이라는 말을 인민군으로부터 들었다. 조사관은 내를 위로하였다.

10월 9일 야밤 12시 이후- 조사관은 나를 불러내 위로해 주며 사실 자기는 좌익을 반대한다는 눈치를 던지며 날 보고 “어서 빨리 탈주하라”고 권유했다. 나는 형세가 불리해 그들이 퇴각하면서 우리를 총살하는 줄 알았다. 내가 이곳에 납북돼 왔다는 것을 박xx가 알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옥문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평양 시가(市街) 화신 앞에서 보전 법과 출신 황xx과 그 후 연전출신 박xx 인민군 대위를 만났다.

“선생님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살아계시군요.” 황xx은 나를 기림리에 피신시켜 놓고 위로 했다. 그도 피신 중에 있었다. 여기서 다시 피신해 나는 대동군 임원면 기암리 산중 토굴 속에서 거지 생활을 했다. 낮에는 토굴 속에 숨고 밤에는 인가에 내려와 밥을 얻어 먹었다.

이때 국군이 평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산골에서 같이 피신하던 노파를 평양까지 내보냈다. 아군 K장군이 왔다고 하거든 “진승록이가 이곳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숨어 있으니, 속히 구출해 달라”고 전하라고 했고, 만일 K장군이 오지 않았으면 평남도지사 K씨에게 가서 또는 아군에게 가서 신변을 증명할 각서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노파는 서북의용대장, 우리 민족진영 명의로 발행한 증명서 두 장을 가지고 왔다. 나는 너무 기뻐 아침 식사를 먹고 정신을 차리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사격소리가 들려오면서 머리에 띠를 두른 서북의용대원 이하 5명이 나를 좌익분자 박xx로 오인해 체포하려 했다. 나는 평양 시내에 주둔하고 있는 아군 특무대로 가 조사를 받게 됐다.

이때 그곳에 내 제자인 서울대 법과대학 2년생이 특무대 연락장교 중위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나를 붙들고, “학장 선생님, 살아계십니까?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하고 나를 붙들고 흐느꼈다. 여기서 나는 박xx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 받게 됐다. 그 제자와의 상봉으로 나는 총살을 면하게 됐다. 중학동창 박xx는 인민공화국의 검사라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는 연전 출신이다. 또한 그가 나를 구해준 사람의 한 사람이니 살려주라고 했다.

9․28 서울 수복 후 국군 특무부대가 평양으로 진격하였고, 그 특무부대 장교인 서울 법대 제자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다. 나는 중앙여고 설립자인 황신덕 교장과 함께 김영일(金永逸) 특무대장(육군소장 역임)의 주선으로 국군이 제공한 군용 지프를 타고 서울로 생환(生還)했다.

‘인제 나는 내 소망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나의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나는 마음을 도사려 잡았다.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은 내가 아니냐. 지프는 남으로 남으로 내리 달렸다. 아! 자유의 하늘 아래 자유의 땅, 그 가운데 자유의 태양은 환히 밝아오고 있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치하의 서울살이를 생생하게 묘사한 국사학자 김성칠(金聖七) 서울대 교수(작고)의 유고 일기 《역사 앞에서(창작과비평사, 1993)》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진승록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보성전문에서 교편을 잡았었고, 6․25 때는 법과대학 학장으로 있었다. 그는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의 손에 붙잡혀가서 역시 자기가 가르친 학생의 구원으로 살아나왔다 한다. 교원생활의 슬픔도 기쁨도 이러한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천신만고 끝에 북에서 탈출한 진승록 학장은 서울대법대 학장을 그만두고 1952년부터 1955년까지 고시위원장을 역임했다. 이후 반공 판검사 1000여 명을 배출했다.

성균관대 총장 발표 직전 간첩 혐의로 구속

고시위원장 시절 국무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사진 중앙) 사이에 진승록 위원장이 서 있다. 고시위원장은 정부서열 4위였다. 홍진기 법무장관, 변영태 외무장관, 김병로 대법원장의 모습도 보인다.

진승록 교수가 고시위원장으로 재직할 때인 1954년, 이승만 정부에서 한글 파동(일명 한글간소화 파동)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법학자로서의 학식과 고시위원장으로서의 행정능력을 높게 평가해 진승록 위원장에게 문교부장관 직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고시위원장을 한 뒤에 바로 문교부 장관으로 전직한 경우는 진승록 교수의 전임 고시위원장인 김법린(金法麟)의 사례가 있었다.

진미경 교수는 “아버지는 자신의 소신을 굽혀 대통령의 뜻에 따를 수 없다며, 문교부 장관직을 수락하지 않았다”면서 “그 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검찰총장, 법무장관, 내무장관 직을 제안했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승만 정권의 장관직 제의를 거절한 진 교수는 1957년 교육계로 복귀했다. 그는 영등포에 금성중학교(現 장훈고)를 설립하고 영신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해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진미경 교수는 “아버지는 심산(心山) 김창숙(金昌淑) 선생을 모시고 건국실천원양성소에서 일하면서 김창숙 선생의 총애를 받았다”면서 “1961년 5․16 군사정변 직전 성균관 관장이었던 김창숙 선생은 아버지를 1961년 5월 성균관 대학교 총장으로 내정했고, 며칠 후면 아버지는 총장으로 취임할 예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취임을 불과 며칠 앞두고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5․16은 진승록 일가를 질곡(桎梏)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말았다. 당시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부세력은 박정희의 좌익성향을 의심하는 국민들과 우방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로 내세우면서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마구잡이로 구속하고 처벌했다.

―민일, 진승록 교수가 성균관대 총장으로 가셨다면, 군부에서 잡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가 현직 총장이셨다면 아무리 군부정권이라고 해도 연행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아버지를 성균관대 총장으로 내정하시던 날, 아버지는 대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며 매우 좋아하셨어요.”

—진 교수는 반공주의자이며 보안법을 위반한 적이 없었으나, 졸지에 정치적 희생양이 된 셈이군요? (진미경 교수의 남편 이수철 교수가 말을 받았다.)

“당시 군부정권은 검찰에 침투한 좌익세력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법무부 검찰국장 위청룡(韋靑龍)까지 간첩혐의를 씌워 구속했습니다. 그는 수사과정에서 사망했고, 얼마 전 재심청구를 통해 무죄를 받았어요. 쿠데타 세력은 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일제 때 3대 인권변호사로 명망 있는 이인(李仁) 법무부장관도 공산주의자로 월북한 동생 이철(李哲)을 문제 삼아 잡아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인 장관이 장인을 찾아와 이야기 한 것처럼, 이인 장관은 워낙 거물이라 고시위원장인 장인을 차선으로 택했다고 합니다.”

반공검사로 이름을 날린 이태희(李太熙) 전 검찰총장은 “군부 세력이 자신의 좌익 경력을 변색, 정당화시키려는 수단으로 의도적으로 반공을 내세워 수많은 무고한 인사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그의 장남 이대황(李大晃․74)씨는 증언하고 있다.

진미경 교수는 “이대황씨는 증언에서, 쿠데타 세력은 처음에는 이태희 전 검찰총장을 공금횡령 및 독직(瀆職) 그리고 용공(容共) 행위로 처벌하려고 군 검찰에 압력을 가했는데, 조사결과 횡령과 독직 사실도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건국 이래 반공 사상검사로서 남로당 핵심 이주하(李舟河)와 김삼룡(金三龍)을 검거하고 거물 여간첩 김수임(金壽任)을 체포한 점을 들어 범죄 성립이 안 된다는 군 검찰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며 “마지막으로 반혁명죄를 적용하라고 지시했으나 이마저 검찰총장으로서 정당한 직무수행이므로 기소 불가능하다는 의견으로 석방됐다”고 했다.

북에서 온 처남 孔圭珉

고시위원장 집무실 앞 기념촬영. 진미경 교수는 태어나기 전으로, 진승록 위원장과 부인 공명길 여사가 관용차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1961년 7월 5일,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일명 ‘학원간첩단사건’을 발표해 진승록 학장과 그의 부인 공명길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진승록 부부에게 적용된 혐의는 1950년 6․25사변 때 북에 끌려가 있는 동안 북에 포섭됐고, 1954년 황해도 옹진에서 온 처남 공규민(孔圭珉)에게 지령을 수수했고, 북한 간첩 이 소좌 등을 수차례 만나 공작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진미경 교수는 “1954년 외삼촌 공민규가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와 마주쳤고, 이북의 처남을 본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어머니에게 ‘당장 내보내라’고 했다”면서 “아버지는 즉시 집을 나가 어머니가 운영하던 종로국민학교 앞 문방구에서 처사촌 한의수(서울대 상대생)과 하룻밤을 잤고, 이튿날 김장흥(金長興) 내무부 치안국장(경찰청장)에게 신고까지 했다”고 했다.

1961년 12월 13일 진승록 교수는 중앙계엄고등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1962년 6월 5일 육군보통군법회의 관할관 김종오(金種五) 육군대장은 사형을 무기로 감형했고, 이어 1962년 10월 26일 중앙계엄 고등군법회의(2심)는 진 교수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1962년 11월 9일 육군고등군법회의 관할관 김종오 장군은 또다시 징역 10년으로 감형한다.

함태영(咸台永) 전 부통령은 1962년 10월 육군본부 법무감실로 진정서를 제출해 “수십 년 간 대한민국 교육계와 행정부 요직에 근무하며 투철한 반공사상가인 진승록과 그의 부인(공명길)이 간첩 및 간첩방조죄로 극형 및 10년 징역을 각각 선고받고 다소 감형 조치돼 현재 옥중에서 죄인의 몸이 돼 연소한 여식 4명만 눈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면서 “진승록이 반공사상가로 활동해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진미경 교수는 함 부통령이 당시 작성한 진정서를 기자에게 내밀었다.

〈과거 진승록은 고려대 교수, 서울대 법과대학장, 대한민국 고시위원장을 역임할 시 경남 진주 통영 마산 등지에 파견돼 공산주의의 무자비성과 납치 중의 생생한 처참양상을 수천의 민중과 학생에게 폭로한 일과, 시내 영등포에 소재한 피고인과 그의 부인이 육성한 금성중학교의 수천 평의 운동장 부지 작업에 육군 당국의 특별한 협조를 얻은 일, 특히 신탁통치 문제가 대두될 때 진승록은 보전 교수로 있으면서 신탁법리론에 국제공법상의 위임통치론 중의 후견론을 가미해 새로 반탁론으로 전국 교육자나 학생에게까지 이를 이해시켜 전국반탁연맹의 반탁론의 법리론을 기초로 삼는 극렬한 반공반탁 투사를 배출시킨 일도 있다.

고시위원장 재직 시는 국가의 예산을 절약해 타 부처와는 상이하게 국고에 반환 조치시킨 일도 있으며, 1960년 6월 20일 육군당국에서 발간하는 육군 잡지에 ‘6․25 수난기’를 진승록이 쓴 것만 보더라도 동인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진정인은 사료된다.

그의 처 역시 대한민국 교육계(서울여상 교사, 금성중학교 교장)에서 활동한 것이 클 뿐만 아니라 대한부인회 종로지부장으로 계실 때는 국군의 일선장병을 위문한 일도 있으며, 동 부부는 참으로 인간성이 남 못지않은 훌륭한 분들이라고 진정인은 믿어왔다. 동인 등과 다정히 지내오던 중 의외로 지상(紙上)을 통해 동인 등의 참상을 알고 당황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확인해 보니 납북됐을 당시 사상이 전향돼 간첩의 지령을 받고 월남해 그 후 남파된 처남과 접선했다고 하나, 이는 당시 동인이 아군 특무대에 구출된 경위부터 그 후 대한민국에서 북한 괴뢰의 죄상을 여실히 폭로하며 요직에서 일해 왔다는 점을 보더라도 진정인은 피고인 등이 적(敵)을 위해 일했다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1963년 5월 9일 대법원은 진 교수의 상고를 기각했고, 1963년 6월 21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진미경 교수는 “1963년 대법원에 상고할 때, 변호사는 오제도(吳制道) 변호사, 김갑수(金甲洙) 전 대법관이었다”면서 “오제도 변호사는, 대법원에서 처음 무죄를 선고했으나 대법원에 파견된 조정관(중정 요원)이 다시 심리를 요구해 결국 2심인 10년형으로 확정됐다는 사실을 알고 ‘대한민국 대법원이 판결을 어떻게 고칠 수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당시 선고를 한 방순원(方順元) 대법관도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진미경 교수는 “사형선고까지 했던 아버지를 불과 2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어주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일”이라며 “1977년 5월 육군고등군법회의 검찰부는 형집행정지를 결정했고, 1978년 12월 27일 아버지는 국방부장관의 특별사면을 받았다”고 했다.

수사관, “남편에게 모든 죄를 넘겨라”

1951년, 6·25전쟁으로 납북됐다 탈출한 진승록 교수가 이시영 부통령(앞줄 중앙)과 함께했다.

진미경 교수는 “어머니의 사촌동생인 한의수로부터 1954년 외삼촌 공규민이 아버지를 방문한 사건이 그 당시 무죄처리 됐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지난 4월에, 1954년 공규민이 진승록 일가를 방문한 건에 대해 수사한 서울 성북경찰서를 방문해 1954년과 1955년의 수사기록을 찾았으나 보존기간이 지나 모두 폐기처분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진미경 교수는 “권오선이라는 원주경찰서 소속 사찰계 형사가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중앙정보부로 파견돼 진승록의 간첩혐의를 수사한 후 무혐의로 수사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군 검찰과 군법회의에서는 무슨 근거로 사형선고를 하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권오선이라는 경찰을 만나면 결정적인 증언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분을 만나보셨나요.

“아버지가 풀려나오신 다음, 권오선씨가 아버지를 찾아와 ‘진승록 교수님이 사형선고가 내려져 하도 이상해 수사기록을 뒤져보니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작성한 무혐의 취지의 수사기록이 사라지고 다른 수사기록으로 대체돼 있더라’고 했답니다. 그분이 남긴 명함을 들고 지난해 가을 원주를 찾았더니 이미 30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밖에 무죄를 입증할 만한 것들은 없습니까.

“판결문을 보면, 외삼촌 공규민과 이 소좌(판결문에 이름 나오지 않음)가 우리 집에 다섯 차례 찾아오는 것으로 돼있습니다. 사실은 공규민은 단 한 번만 찾아왔습니다. 판결문에 1955년 돈암동 집으로 찾아온다는 대목이 나와요. 그런데 1955년 저희는 돈암동이 아니라 신문로에 살았습니다. 조작이란 것이 드러난 거지요. 신문로 동사무소에 가니 다행히 동적부(洞籍簿)가 남아있었습니다. 주민등록 생기기전 전출입을 기록하던 거랍니다. 제가 1955년생인데 신문로 집에서 태어났거든요.”

김원표(87)씨는 재심신청을 위한 진술서에서 “사촌누님 부부가 구속돼 어머니가 누나네 집에 가 아이들을 돌봤는데, 누님은 1년 여 만에 출소했다”면서 “친정이 북에 있는 누님이 더 크게 당해야 하는데, 뜻밖에도 매형이 누님보다 중형을 받은 것에 놀랐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누님이 출소해 집으로 찾아가니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동생 공규민이 북에서 왔다갔다는 사실만으로, 친정이 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억울하게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매형이 누님보다 중형을 받은 사실이 궁금해 물어보니 ‘수사관이 부부 모두 사형을 당하거나 무기징역을 살아야한다’면서 ‘죄를 남편에게 모두 넘기면 당신을 풀어주고 남편은 사형만은 당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해서 ‘애들을 돌봐야한다는 생각에 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다’며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김원표씨는 “조카 진미경 교수가 부모님의 판결문을 구해 읽고 나를 찾아와 이 소좌라는 북한 간첩이 찾아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금괴, 현금, 외화를 전달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면서 “1989년 76세로 돌아가신 누님은 출소한 지 30년을 사시면서 우리 가족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간첩이 집에 찾아왔다거나 금괴나 금품을 받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김씨는 “공산당에 박해당해 정든 고향을 등진 월남가족에게 형제가 북한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간첩죄를 뒤집어씌우면, 월남 피난민은 다 간첩이란 말이냐”고 반문했다.

진미경 교수는 “어머니의 동생 공규민은 1963년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것으로 돼 있다”면서 “어머니가 중정에서 수사 받을 때, 수사관들이 공규민을 전향시키면 공규민을 포함한 모든 관련자를 살려준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는 동생을 만나 전향해서 서울서 함께 살자고 했다”면서 “그러나 동생은 ‘고향에 노부모가 살아계신데 나 혼자 살겠다고 전향할 수는 없다’면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외삼촌이 사형 당했다면,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했나요?

“아니요, 연락조차 못 받았습니다. 간신히 육군본부에서 ‘사형집행서’를 찾았죠. 참고사항에는 ‘연고자가 없으므로 유언을 전하지 못했다’고 적혀 있더군요. 간첩단에 함께 들어간 누이와 매형이 엄연히 있는데, 연고자가 없다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진미경 교수는 “부모님 내외는 그 후 평생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며 사셨다”면서 “아버지는 올곧은 선비로서 평생 공산주의를 배척하며 국가에 봉사하는 삶을 사셨는데, 사람들과 교류도 끊고 조용히 집에서만 지내시다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광복 이후 1947년 한글로 쓴 민법서적 《민법총칙 상권》을 주재황(朱宰璜) 전 대법관의 《채권각론강의》보다 2년 앞서 국내 최초로 저술하며 왕성하게 연구활동하던 진 교수는 석방 후에 심적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해 연구를 계속하지 못했으며, 사회활동도 금지 당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사면을 받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 1985년 1월에 타계했다.

―지난 정부 시절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재심청구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안하셨습니까. 당시 조봉암(曺奉岩) 진보당 위원장은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59년에 처형됐다가 50여년만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막내인 제가 유품을 소장하게 됐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가 억울하게 다른 죄도 아닌 간첩, 간첩방조죄라 저도 충격을 많이 받아 용기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자녀 교육을 핑계로 미루며 아버지의 신원(伸寃)에 소홀한 것이 후회막급입니다. 당신이 건국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일조한 자유 대한민국에서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정치군인들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몰려 옥고를 치러야만 하는 현실은 심신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충격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납북되었다 살아 돌아와서 쓰신 ‘6․25의 수난’ 첫 머리에 ‘따뜻한 조국의 품 안으로 살아 돌아오게 해준 국군장병에게 뜨거운 감사를 올린다’고 하셨는데, 군인들에 의해 억울하게 옥고를 치루셨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흔히들 아버지가 ‘분단의 희생양’이라고 하는데 그런 추상적인 언어로는 아버지가 겪은 실제적인 고난을 대변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