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공화당에서 民推協까지 芮春浩 전 국회의원(下) : 월간조선

1969년 9월 9일 헌법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이에 앞서 야당인 신민당은 소속 의원 중 44명을 제명처리하고 자진해산했다. 당시 헌법과 정당법에 의하면, 정당이 해산되면 국회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 단 제명된 경우는 예외였다. 당시 신민당 의원 중에서 3명이 개헌안에 찬성하고 있었다. 신민당은 이들의 국회의원직을 잃게 만들기 위해 소속 의원 제명 후 자진해산이라는 방법을 동원한 것이었다. 신민당은 이어 소속 의원들로 신민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나는 야당인 신민회 소속 의원들과 함께 국회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개헌 추진 세력은 마지막까지도 나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와 친하게 지내다가 개헌 추진 세력에 가담한 윤천주·정태성 의원이 집으로 찾아왔다. 잠시 집에 돌아와 있었지만, 그들을 그냥 돌려보냈다. 9월 12일에는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내가 집에 없다는 아내의 말에 그는 “꼭 연락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울산 출신인 이후락 실장은 동향이라고 늘 내게 잘해주었다. 1965년 제6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선출 항명파동이 벌어졌을 때에도 그는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예 의원은 아닙니다”라면서 나를 감싸주었다. 3선 개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나를 회유하겠다고 나서거나 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관계를 생각하니 마냥 모르는 척할 수는 없어 전화를 걸었다. 그는 무척 반가워하면서 말했다.

“예춘호, 너 사람이 달라졌다. 각하께서 너만은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아쉬워하고 계신데 그러지 마라.”

이 실장은 나보고 청와대로 오든지, 아니면 자기가 내가 있는 곳으로 갈 테니,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나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다만 당신에 대한 정리(情理)는 잊지 않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3선 개헌안 날치기 통과

1969년 9월 14일 새벽, 3선 개헌안이 날치기로 국회에서 통과된 후 김상현 의원은 투표함을 집어던지며 울분을 터뜨렸다.

나는 다시 국회 본회의장으로 갔다. 9월 13일, 정구영 전 공화당 당의장이 노구(老軀)를 이끌고 국회 본회의장에 나왔다. 모두들 환성을 올렸다. 야당의 맹장 서민호 의원은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갔다.

나는 야당 의원들 속에서 양순직 의원과 밤을 넘겼다. 내가 말했다.

“얼마 전 김 의장(JP)을 만났을 때, ‘양 의원도 결심했으니, 예 의원도 결심하라’고 하더군.”

양 의원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미친놈!”

우리는 파안대소했다. 언제 공화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으로 몰려 들어와 개헌안을 강행 통과시킬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그런 식으로 달래는 가운데 14일이 됐다. 일요일이었다. 야당 의원들은 자리를 깔고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고, 기자들도 삼삼오오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새벽 3시. “벌써 개헌안이 통과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설마’ 싶었다. 6·7대 국회에서 수많은 날치기 통과가 있었지만, 국회 본회의장 밖에서 표결 처리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갑자기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이놈들이 해치웠다!”

김상현 의원이었다. 김영삼 원내총무 등이 달려갔다. 김 의원은 “기자들이 제3별관에서 개헌안이 처리되었다고 해서 가보았더니, 이미 공화당 의원들이 표결을 마치고 나오고 있더라”고 말했다.

‘이제 망했구나’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통곡, 분노, 탄식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종규와의 식사

3선 개헌안은 그렇게 통과되었다. 개헌안을 확정하려면 국민투표를 거쳐야 했지만, 사실상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국민투표를 앞둔 어느 날, 박종규 경호실장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도 개헌안 표결 직전까지 사람을 보내 나를 설득하려 했었다. 내가 만남을 거절하자 그는 국회 여직원을 통해 내게 전화를 걸어달라는 전갈을 넣었다.

박종규 실장은 나와 가깝게 지냈지만,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충(不忠)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가만있지 않는 성격이었다. 끝내 3선 개헌 반대 입장을 고수한 내게도 험하게 나올지 몰랐다. 망설이다가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곳에는 김용태·신윤창·오학진 의원 등이 와 있었다. 3선 개헌에 반대하다가 결국 JP의 설득에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었다. 박 실장은 내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예 총장이 꼭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9월 13일 밤 국회에 사람을 보낸 것은 내 뜻이 아니었습니다. 각하께서도 ‘예 총장은 돌아올 사람인데…’라며 못내 아쉬워하며 기다리시는 눈치였습니다. 사모님(육영수 여사)께서 ‘예 총장은 그럴 분이 아닌데…’라면서 나보고 한번 만나보라고 하시기에, 내가 나설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런 겁니다. 알고나 계세요.”

비록 3선 개헌에 끝까지 반대하기는 했지만, 박 실장이나 육영수 여사의 마음 씀씀이는 고마웠다.

3선 개헌안이 통과된 후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여러 경로로 나에게 함께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유진산 신민당 당수, 김영삼 원내총무, 양일동 의원 등이 3선 개헌 과정에서 나의 고생을 높이 평가하면서 입당을 제안해 왔다. 유진산 당수는 다음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 자리를 내주겠다고 시사(示唆)했다.

하지만 “정치를 안 하면 안 했지, 야당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비록 JP의 몰락, 3선 개헌 등을 거치면서 공화당을 통해 실현하려던 나의 꿈이 무산되기는 했지만, 공화당은 그래도 내가 창당요원으로 몸담았던 정당이었다. 나를 사무총장으로 중용해 준 곳도 공화당이었다. 정치적으로 좌절되었다고 해서 이 당 저 당 기웃거리는 것은 사내가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양순직 의원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였던 박종태 의원은 신민당에 입당했지만, 공천을 받지 못했다. 계파 간 이해가 날카롭게 부딪히고, 그 과정에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는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도 냉혹한 동네였다.

김계원과 이후락

3선 개헌이 마무리된 후, 3선 개헌에 앞장섰던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경질됐다. 그건 이만섭 등 공화당 의원들이 3선 개헌에 찬성하기로 하면서 내세운 조건이기도 했다.

후임 중정부장으로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계원 장군이 임명됐다. 그는 6・3사태 당시 육참총장 공관에서 얼핏 본 적이 있었다. 1970년 초 어느 날, 김계원 중정부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로 나갔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김 부장이 말했다.

“예 의원도 이제 개헌을 둘러싼 일들은 모두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옛날로 돌아가서 박 대통령을 모시고 잘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후의에 감사한다”는 정도로만 대답했다. 김 부장도 더 권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정구영 선생이 제7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기 전에 독일(서독)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아들들이 월북(越北)한 아픔을 안고 있는 정구영 선생은 평소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김계원 부장에게 부탁해 정구영 선생의 편의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김 부장은 흔쾌히 도와주었다.

정구영 선생이 독일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 나는 일본으로 마중을 나갔다. 당시 주일대사는 이후락 전 비서실장이었다. 나와 만난 그는 얼마 전 한국에 다녀온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가서 당신들 보스(JP)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놓고 왔소. 당신들 보스는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무슨 소린가 했다. 얼마 후 JP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그제야 이후락 대사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復黨

1970년 말,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이 만나자고 요청해 왔다. JP와 육사 동기(8기)이자 5·16 주체였던 그는 원래 JP계였지만, 당시에는 김성곤(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진만(원내총무), 백남억(정책위 의장) 등과 함께 4인 체제의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전임자인 당신이 제명되어 무척 가슴이 아팠다”면서 복당(復黨)을 제의해 왔다. “각하의 승낙도 얻은 일”이라고도 덧붙였다.

이어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과도 만났다. 그도 간곡하게 복당을 권했다. 그와는 정치 생활을 하면서 내내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이 굵은 사람이었다. 항명파동으로 제명당한 후 기자회견을 할 때에도 곁을 지키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그들의 설득에 나와 양순직 의원은 결국 공화당으로 복당했다. ‘우리가 만들었던 정당으로 돌아가 소신대로 정치를 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제8대 총선은 이미 코앞에 닥쳐와 있었다. 공천을 받았지만, 선거는 쉽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은 물론이고, 전에 내가 만들고 관리했던 지구당 당원들도 냉담했다. 나는 그래도 3선 개헌 반대 등 소신정치를 해온 것을 평가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유권자나 당원들은 ‘한번 떠났으면 그만이지, 다시 돌아오는 건 또 뭐냐’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명색이 여당 후보였음에도 ‘여당 프리미엄’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손’이 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뿐이 아니었다. 양순직 의원은 물론이고, 정성태 의원 등 처음에는 3선 개헌에 반대하다가 나중에 돌아선 의원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결국 나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양순직, 정성태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공화당이 우리에게 복당을 권유했던 것은, 일견 관용을 베푸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야당 후보로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판단을 했던 데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복당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당(黨)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공화당 脫黨

1969년 9월 3선 개헌이 통과되기 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하는 개헌반대파 의원들. 뒷줄이 정구영·예춘호, 앞줄은 서민호·양순직 의원(왼쪽부터).

1971년 총선과 대선이 끝나자 우리는 그야말로 찬밥 신세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維新)을 선포했다. 공화당이라는 정당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해 보려던 나의 꿈은 더 이상 설 땅이 없게 됐다.

1974년 1월 7일, 나는 정구영 선생과 함께 공화당 탈당(脫黨)을 선언했다. 정구영 선생은 탈당 성명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구현코자 민주공화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초대 총재가 되었다. 그 뒤 당초의 창당이념에 위배되는 소위 3선 개헌이 나왔을 때, 나는 이를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지치 못한 채 그대로 당적(黨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사태는 당원으로서의 소신을 밝힐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마저 잃은 채 조국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서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므로 나는 오랜 자책 끝에 드디어 당과 결별하기로 결심하였다.…〉

나의 심정도 정구영 선생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의 탈당 선언이 나가자, 공화당 대변인은 즉각 “조국의 현실을 무시한 지극히 위선적이며 배신적 행위”라고 비난했다. 정구영 선생은 “배신은 누가 당했는지 묻고 싶다”며 씁쓸해 했다.

우리가 탈당 성명을 낸 그날은 공교롭게도 이희승 선생 등 문인 61명이 유신체제에 반대해 개헌서명에 나선 날이었다. 나도 이후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해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출범했다. 천관우·강원룡·함석헌 등 각계 인사들이 참여한 국민회의는 비(非)정치적 범(汎)국민 운동을 표방했다. 와병(臥病) 중이던 정구영 선생은 이 단체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정 선생은 오랜 친구인 윤보선 전 대통령은 물론, 김수환 추기경과도 이 단체 참여를 의논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정구영 선생은 김대중(DJ)과도 자주 접촉했다. DJ에 대한 정구영 선생의 평가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처음에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던 것이, ‘큰 재목’ ‘퍽 기대되는 인물’로 변해갔다.

JP와의 再會

재야(在野)는 물론이고 청년·학생들의 반유신 운동은 나날이 거세져 갔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로 맞섰다.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해도, 정부를 비판하기만 해도 붙잡혀갔다.

1978년 초 나는 박종태・양순직・정성태・조종호 등과 함께 헌정동지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정권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단체의 이름으로 어떤 의미 있는 민주화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우리 사이에서 무소속으로 제10대 총선에 출마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적어도 합동연설회를 할 때에는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정부 욕이나 실컷 해보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한 20여 명 정도가 출마할 의사를 피력했다.

이렇게 결의를 다지고 있는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1978년 5월 22일 정구영 선생이 돌아가신 것이다. 향년 83세. 그분은 내게는 영원한 스승이었고, ‘시대의 양심’이었다.

나는 양순직 등과 함께 빈소를 지켰다. 빈소에는 JP도 찾아왔다.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참 오랜만입니다.”

“집안 다 무고합니까? 고생이 많지요?”

이렇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잠시 손을 꽉 잡았는데,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한때는 JP나 정구영 선생, 나 모두 한배를 탄 사이였지만, 여러 일을 겪으면서 서로 너무 멀어져 버렸다.

장지(葬地)인 충북 옥천까지 따라 내려온 윤보선 전 대통령은 우리 손을 잡으며 “장례 일을 모두 거둔 뒤, 집에 한번 들려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냥 인사치레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윤 전 대통령께 인사를 드리러 가니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윤 전 대통령은 “앞으로는 정구영 선생을 찾듯이 나를 찾아달라”면서 재야와의 연대(連帶)를 특히 강조했다.

어떤 의미에서 나의 재야 활동은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동환・한완상・이문영・이우정・박형규・문익환・고은 등과 특히 자주 접촉했는데, 그들의 헌신은 정말 존경스러웠다. 재야인사들 중에는 나나 양순직・박종태 등 공화당에서 정치를 하다가 참여한 사람들을 조금 불신(不信)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정치인 중에서도 정직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올바로 살려는 사람 아니냐? 우리와는 같이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곤 했다.

연금된 DJ, 돈 달라 요청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나는 7년여 만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옛날과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선거운동본부를 꾸리려고 했지만, 대부분 손사래를 쳤다. 나를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정상적인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새벽부터 거리로 나가, 문이 열려 있는 집을 보면 “예춘호입니다!”라고 외쳤다. 뛰어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와서는 주위를 돌아본 후 반갑다는 표정만 짓고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인간적으로 배신감을 맛본 경우도 있었다. 6대 선거 때 내 선거사무장을 했고, 내 도움도 많이 받았던 모(某)씨는 공화당 후보 선거 사무장을 맡은 것으로도 모자라 사퇴를 강권했다. “당선되어도 어차피 당선 무효가 될 것”이라는 협박까지 들었을 때에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럴수록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합동연설회가 열렸다. 나는 제일 마지막 차례였다. 내가 연단에 올랐을 때에는, 쌀쌀한 가을 날씨에 비까지 내려 많은 사람이 자리를 떴다. 그동안 받은 탄압 때문에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나에게만 이런 탄압이 가해지는 이유가 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밖으로 나갔던 청중이 유세장 안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것이 아닌가? 날은 춥고 비는 내리니 몸이나 덥히려고 밖에서 한잔 걸치고 있다가 내 차례가 된 데다가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니까 뭔 일인가 싶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신이 난 나는 더 목소리를 높여서 정권을 비판했다. 청중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그동안 억눌렸던 민심이 폭발한 것이다. 대세가 내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내 비서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나와 아내까지 고발했다. 결과는 나의 압승이었다.

당선 후 재야 원로와 동지들에게 두루 인사를 다녔다. DJ도 찾아갔다. 당시 DJ는 동교동 자택에 연금(軟禁) 중이었다. 그래도 현역 국회의원이어서인지 출입을 막지는 않았다.

DJ는 반갑게 맞았다. 당시 그는 형편이 어려웠다. DJ는 “선거운동도 그리 많이 하지 않고 당선이 됐으니(민심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당선됐다는 의미), 선거자금이 많이 남지 않았느냐?”면서 “좀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선거해 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말하면서도, 힘닿는 대로 조금 도움을 주었다. 이후 우리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제10대 총선 결과는 묘했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 뽑는 선거였는데, 무소속 의원이 21명이나 당선됐다. 그중 나·한병채·오세응·김현규 등 8명이 친야(親野) 성향이었고, 이후락·최치환·김진만 등 나머지는 친여(親與) 성향이었다.

무소속으로 의정 활동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무소속 의원들은 성향을 떠나 민정회라는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회장은 이후락 의원이 맡았다. 어색한 동거(同居)가 시작됐다. 친야 성향 의원들은 자기들 소신대로 일을 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민정회의 의사 결정은 친여 성향 의원들의 뜻대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선명(鮮明)야당’을 내세운 YS가 ‘중도통합론’을 주장하던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을 꺾고 총재가 됐다. 재야의 DJ도 YS의 당선을 적극 지원했다.

하루는 DJ가 만나자고 해서 동교동으로 갔다. DJ는 대뜸 “신민당에 입당해 주어야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영삼 총재와 합의를 했는데, 재야가 대거 신민당에 입당해서 당을 강화하기로 했어요. 재야 몫으로 부총재 1석, 정무위원 5석, 상임위원 50석을 할당받기로 약속받았어요.”

黨職 배분을 둘러싼 갈등

1979년 12월 13일 아침 중앙청에 진주한 신군부 측 병력. 12·12사태는 신군부 쿠데타의 출발점이었다.

DJ는 내가 부총재를 맡고, 이문영·한완상·문동환·양순직·박종태 등이 정무위원을 맡았으면 한다는 뜻을 YS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민당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이리저리 당을 옮겨다니는 건 정치인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결심을 재촉하는 일이 생겼다. 공화당에서 친여 성향 무소속 의원들을 데려가 버린 것이다. 민정회는 껍질만 남게 되어버렸다. 친야 성향 의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나로서는 함께하던 친야 성향 의원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결국 나는 8명의 친야 성향 의원들과 함께 신민당에 입당했다. 그런데 신민당 입당을 결행한 임호, 변정일 두 의원이 다음날, 뜻을 바꿔 공화당 입당을 선언했다. 밤새 공작과 압박이 들어간 것이다.

신민당에 입당은 했지만, 나는 재야에서 신민당으로 잠정 파견된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 후 DJ를 만났더니, “YS를 만나 지난번에 말했던 당직 배분 문제를 확정지어 오라”고 했다.

YS를 만났더니, 잡담만 할 뿐 당직 배분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얘기가 없었다. “DJ와 얘기했던 문제에 대해 회답을 달라”고 했지만, YS는 ‘언제 그런 약속을 했던가’ 하는 표정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이듬해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1980년 ‘서울의 봄’ 때 DJ가 신민당 입당을 거부하고 YS와 갈라서는 빌미가 됐을 뿐만 아니라, 동교동계가 두고두고 YS를 불신하는 단초가 됐다.

이후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YH사건, 김영삼 총재 권한 정지 가처분, 김영삼 의원 국회 제명, 부마사태 등이 이어졌다.

그리고 10월 26일. 김재규 중정(中情)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경호실장 차지철도 김재규의 총에 죽었다. 내 귀에도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갈등을 빚고 있는데, 김 부장이 차 실장에게 밀린다는 얘기는 들려오던 차였다. 소식을 접하는 순간, 1969년 3선 개헌을 앞두고 정구영 선생댁 앞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다투던 일이 생각났다.

세 사람 모두 한때 나와 가까웠던 사이였지만, 감상(感傷)에 젖을 때는 아니었다. 그때는 ‘드디어 독재정권이 끝났다’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재야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게 우선이었다.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올랐지만, 물밑에서는 그에 역행하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保安司 사람들이 도움을 청한다”

이명영 성균관대 교수.

1979년 12월 12일. 중정국장이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했다. 그는 거의 매일같이 내게 만나자고 했다. 그를 만나면 별다른 일 없이도 몇 시간이 훌쩍 갔다. 나를 감시하자는 건지, 발을 묶어 놓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무렵 그와 헤어져 반포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군인들이 제3한강교(한남대교)를 차단하고 있었다. 성수대교로 돌아오다 보니 4시간 가까이 걸렸다. 육참총장 공관에서 군인들끼리 충돌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때로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박세경 변호사로부터 묘한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 제3·4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당시 재야에 몸담고 있었지만, 각종 국내외 정보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군(軍)에서 시국을 바로잡기 위해 1년만 집권하려는데, 그들이 예 의원이 협조해 주었으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시느냐”며 응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젊은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이명영 성균관대 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다. ‘김일성 연구’로 유명한 그는 정보기관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보안사(保安司) 사람들이 좋은 일로 자네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응하고 말고는 자네 마음이지만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나?”라고 말했다. 나는 “미친놈들!” 하며 일축했다.

12・12사태가 발생하기 전인 1979년 11월 24일, YMCA 위장결혼식 사건이 발생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반대하는 재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해 집회를 가진 것이었다. 행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참석자들이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연행되어 갔다. 보안사로 잡혀간 김상현 의원, 백기완씨 등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나도 얼마 후 궁정동의 한 안가로 불려가서 보안사 요원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나는 현역 국회의원이라 큰 곤욕을 당하지는 않았다.

후일 DJ는 이 사건에 대해 신군부가 자기를 함정에 몰아넣기 위해 앞뒤 가리지 못하는 일부 재야인사들을 이용해 만든 조작극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일부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이 사건을 주도했던 윤보선·함석헌 등 재야 원로들이나,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백기완씨 등을 생각하면, 그런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DJ는 온건, 투쟁적인 것은 YS

1980년 3월 DJ가 복권되자 YS는 축하인사차 동교동을 방문했다. 머지않아 두 사람은 결별했다.

이런 수상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래도 민주화의 큰 흐름을 거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긴급조치는 해제되었고, DJ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사면·복권이 되어 정치 활동을 재개(再開)했다.

1980년 3월 16일, DJ는 YWCA에서 유신 이후 첫 대중연설을 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이후 그가 신민당에 입당할 것인가 하는 것이 초미(焦眉)의 관심사가 됐다. 재야 안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DJ와 재야는 그 전해, 5·30 전당대회 당시 YS와 했던 당직 배분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 때문에 YS를 불신하고 있었다. 재야의 원로 윤보선 전 대통령은 DJ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당 안에 있어야 한다”면서 신민당 입당을 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DJ는 그해 4월 신민당 입당 포기 선언을 하고 말았다.

4월 어느 날 DJ는 내게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말했다. 그 무렵 YS도 신민당 부총재 자리를 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부산 출신인 나는 YS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특히 1969년 권오병 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을 둘러싼 항명파동 때나 3선 개헌 반대투쟁 과정에서 가까이 지냈다. 하지만 유신 시절 재야 활동을 하면서 나는 DJ에게 기울어졌다. 재야의 전반적 분위기가 DJ 편이었던 이유가 컸을 것이다.

YS는 주로 제도권 안에서 활동한 반면, DJ는 재야에서 투쟁했기 때문에 흔히들 DJ를 과격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회의원으로 지켜본 바로는 DJ가 온건했고, 투쟁적인 것은 오히려 YS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DJ는 연구소를 연 첫 야당 국회의원이었다. 명석하고 학구적이었다. 그가 경제·사회 문제에 진보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도 내겐 좋게 보였다.

DJ는 왜 내게 비서실장 자리를 제안했을까? 아마 집권 공화당의 사무총장을 했던 내 경력을 높이 샀기 때문 아니었을까. 나는 DJ의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고분고분하지 않고 뿔따구가 있어서 비서실장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재야에 있는 한은 돕겠지만, 나는 곧 정치와는 멀어질 사람이니 내게 너무 많이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한국민주제도연구소 이사장

박종규 전 경호실장.

DJ는 그 뒤에도 몇 차례 내게 비서실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비서실과 경호요원들의 명단을 건네주기도 했다. 계속 거절하자 5월 10일경에는 우리 집으로 직접 찾아왔다. 나는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署理)를 겸직했다. 신군부 세력이 정권 장악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이에 저항하는 학생시위는 날로 격화됐다.

재야도 열심히 움직였다. 5월 1일 DJ의 동교동 자택에 함석헌·이태영·박세경·김관석·문익환·이문영·고은·한완상·계훈제·김종완·장기표·심재권 등 재야인사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민주화를 요구하기 위해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이 자리에서 일종의 싱크탱크로 한국민주제도연구소를 만들기로 결정됐다. DJ는 나를 연구소 이사장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다음날 재야인사들의 모임에서 문익환 목사는 국민운동본부 결성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대신 ‘민주화촉진국민대회선언’을 하기로 했다. 서명을 받는 작업은 나와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가 맡기로 했다.

서명을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사람은 반드시 서명해 주겠거니’ 하고 찾아갔지만, “이번만은 빠져야겠다”며 거절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진보 진영’에서 원로 대접을 받는 이들 중에는그때 서명을 거절한 사람도 있다. 그들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했던 역할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항상 용기 있게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 지금 ‘진보 진영’의 원로격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어렵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건 지적해 두고 싶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민주화 운동 보상’이라는 것도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사람이 자기 소신에 따라 한 행동에 대해 꼭 보상을 받아야 하는 건지….

바로 그 무렵, 박종규 전 경호실장에게서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전두환 등 하나회 인맥(人脈)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당분간 조용히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55일간 中情 지하실에서 조사받아

1980년 8월 14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첫 공판에 나온 관련자들. 앞줄은 김대중·문익환·이문영·둘째 줄은 고은·예춘호(오른쪽부터).

5월 16일 DJ의 집에서 DJ-YS의 만남이 있었다. 이문영 교수와 내가 입회인이 됐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민주화 투쟁에 함께 앞장서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음날 신군부가 ‘계엄확대조치’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나는 결혼식 주례를 서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부산역에서 붙잡혀 그 길로 비행기편으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나는 중정 지하실에서 55일간 ‘내란음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DJ의 비서실장으로 DJ와 재야의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했고, 한국민주제도연구소 이사장으로 김대중 집권 시 과도내각의 총리를 맡기로 했다는 것이 내게 씌워진 혐의였다.

물론 그건 사실과 전혀 달랐다. 조작된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면 돌아오는 건 매질이었다. “야, 이 XX야! 경상도 놈이 왜 전라도 놈을 돕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그때 당한 폭행으로 고막이 상하고 눈 옆이 함몰됐다.

1980년 9월 11일, 1심 공판에서 검찰은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나는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 자신에게 관대한 처분이 있기를 구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김대중의 처벌만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 한 사람의 생명, 특히 나라의 정치 지도자를 죽인다는 것은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불행한 일이니 심사숙고해 처리하기를 바란다.”

9월 17일 1심 선고 공판에서 내게는 징역 12년이 선고됐다. 이후 나는 육군교도소, 원주교도소 등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시간이 나면 주로 경제학 책 등을 읽었다.

윤보선, “전두환은 박정희와 다르다”

1982년 3월 1일. 나는 형(刑)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아내와 아이들, 양순직・박종태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석방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고 있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왔다. 손님들을 보낸 후, 안국동으로 달려갔다. 윤 전 대통령은 자상하게 나를 위로해 준 후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예 의원이 석방되는 데에는 이규동 회장(전두환 대통령의 장인. 당시 대한노인회장)이 힘을 많이 썼어요. 그들과도 한번 만나서 대화를 해보시오.”

천만뜻밖의 얘기였다. 내 놀라움에는 아랑곳없이 윤 전 대통령은 “전두환은 박정희와는 다르다”면서 “막무가내로 반독재 투쟁만 할 게 아니라, 때로는 대화로 슬기롭게 시국을 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가깝던 왕년의 투사 김정례씨, 그의 비서 출신으로 나와 가깝던 조종호 의원은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이 되어 있었다. 올곧은 민주화 투사였던 윤 전 대통령은 왜 그렇게 변한 것일까?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깝기만 하다.

DJ의 渡美

재야시절 DJ와 함께. DJ는 1980년 봄 자신의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1982년 12월 어느 날, DJ 부인 이희호 여사, 안병무 교수의 부인 박영숙씨 등이 나를 찾아왔다. 이 여사가 말했다.

“안기부장을 만났더니, ‘외국에 나가서 치료를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하네요. 그런데 그분(DJ)은 ‘다른 동지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나만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고 고집이네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내가 감옥살이를 해봐서 아는데, 그 안에 있다가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무조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오는 것도 좋은 일이고요.”

나는 그런 뜻을 적은 메모를 이희호 여사에게 주고, DJ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청주로 내려갔던 이 여사가 다시 찾아왔다. 이 여사는 “DJ가 이미 생각을 바꾸어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서울대 병원으로 옮겼다”고 전했다. 그해 12월 23일 DJ는 미국행(行) 비행기에 올랐다.

이희호 여사는 내게 DJ의 뜻이라면서, “그분이 없는 동안 동교동계의 일은 예 이사장님이 총괄해 달라”고 했다. 이후 DJ가 귀국하기까지 2년 동안 박성철(DJ의 경호실장, 예비역 해병소장)·김옥두·한화갑 등 동교동 식구들은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YS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에 들어갔다. 전두환 정권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었고, 재야인사들도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민주화 운동의 나아갈 바를 모색하고 있을 때였다. YS의 단식은 그런 노력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예춘호가 DJ 조직을 YS에게 팔아먹으려 한다”

나는 재야 세력, 박성철·한화갑·김옥두 등 동교동 가신들, 김상현 등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물론, 최형우·김동영 등 상도동계 정치인들과도 자주 만났다. 이들 못지않게 자주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정보기관 사람들이었다.

1984년 3・1절을 앞두고 재야, YS, DJ 등 민주화 운동 세력은 전두환 정권을 ‘불법찬탈 정권’이라고 규정하면서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국내외적으로 그 파장은 컸다. 우리는 그 여세를 몰아 정치권 인사들을 모아 민주화 운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DJ계와 YS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양측의 해묵은 갈등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특히 DJ계 사람들의 불신은 심각했다. 심지어 “예춘호가 DJ 조직을 YS에게 팔아먹으려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보기관의 감시 때문에 호텔에서 만나기 어려워 상도동 YS 자택에서 모임을 갖자고 했더니 DJ계 사람들이 펄쩍 뛰었다. “우리가 먹히는 것 아니냐”면서…. 다행히 DJ의 경호실장 박성철 장군이 동교동계를 달래는 데 많은 노력을 해주었다.

우리는 야당 원로인 윤제술 선생의 회고록 간행위원회 모임을 빙자해서 자주 만났다. DJ계에서는 나·김녹영·박영록이, YS계에서는 이민우·최형우·김명윤 등이 대표로 나섰다. 당초 YS는 상도동계 대표로 나서지 않으려 했는데 DJ 측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그도 대표로 나왔다. DJ 측에서는 김상현 전 의원이 추가로 나섰다.

1984년 4월 26일 우리 집에서 첫 모임이 열렸다. 모임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느냐부터 논란이 됐다. YS는 명칭에 강경한 투쟁의지를 담자고 했다. 김상현 전 의원은 민주화간담회 정도로 하자고 했다. 내가 양쪽의 뜻을 절충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제안했다.

민추협 공동의장은 당연히 YS와 DJ가 맡기로 했다. 문제는 미국에 있는 DJ를 대신할 의장 권한 대행을 누가 맡느냐 하는 것이었다. DJ는 “김상현은 믿을 수 없다”면서 내게 권한 대행을 맡으라고 권해왔다. 하지만 재야에서는 정치인 중심의 모임인 민추협과는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게는 재야로 복귀해달라고 요청해 왔다. 나는 그 뜻을 받아들였다. 결국 김상현이 DJ를 대신해 권한 대행이 됐다.

미국의 DJ는 민추협을 만들 때부터 내내 미온적이었다. 그는 “민추협을 하면 결국 공(功)은 YS에게 넘어가는 것 아니겠느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나는 “이건 재야의 뜻이기도 하니, 믿고 지지해 달라”고 했다.

김종완·박영록 등은 민주헌정동지회를 재건하겠다면서 민주헌정연구회를 만들었다. 민추협에 미온적인 DJ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民推協 부의장

1985년 3월 1일 제66주년 삼일절을 맞아 光州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강연을 했다.

1985년 2월 8일, DJ가 귀국했다. 그의 귀국과 함께 민추협 재편 논의가 나왔다. YS와 DJ는 한참 줄다리기를 했다. 결국 DJ도 민추협 공동의장을 맡았다.

얼마 후 다시 민추협 개편이 있었을 때, 나는 민추협 부의장을 맡았다. DJ, YS 모두 내게 양측이 원활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다고 했지만, 양측의 알력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성명서를 낼 때면, YS와 DJ 중 누구를 앞세우느냐를 놓고도 티격태격했다. 회의를 하고 나면 DJ계와 YS계는 따로따로 모임을 갖고 상대방을 성토했다. 전혀 융합이 안 됐다.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해 한번은 두 김씨에게 “회의가 끝나고 문밖으로 나가면 다른 소리가 안 나오게 두 분이 조율을 잘 해달라”고 싫은 소리를 했다.

DJ는 잠자코 있었지만, YS가 발끈했다. 그는 내 인생에 잊지 못할 모욕적인 얘기를 했다. 나도 “내가 못할 얘기를 했느냐? 이런 식으로 하면 나도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게 1986년 3월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후 나는 민추협 활동에서 점점 멀어졌다.

귀국한 DJ도 나를 실망시켰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였다. 미국에 가서 그를 만나고 돌아온 문동환·한완상 등이 “DJ가 달라졌다”는 말을 했다. “이상한 사람들이 DJ에게 달라붙기 시작해서, DJ를 돕고 싶어도 더 돕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란 예컨대 박지원씨 같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보기에 DJ 주변에서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김상현씨였다. 하지만 DJ는 그를 배척했다. 나중에 DJ가 공천을 줄 때도 보면 재야에서 고생한 사람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엉뚱한 사람들이 공천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돈을 싸들고 가서 도와주겠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싶었다.

DJ가 미국에 가 있을 때, JP도 한동안 미국에 나가 있었다. 그 무렵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그도 새로운 정치적 모색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나는 “도울 수는 있지만, 내게 명분을 달라”고 했다. 한마디로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JP는 내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단일화 실패

이후 1987년으로 접어들면서 박종철군 고문치사(致死) 사건, 전두환 정권의 4・13호헌 선언, 6월 항쟁, 6・29선언 등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재야와 함께하면서 힘을 보탰다.

유신 이래 국민의 여망이었던 직선제(直選制) 개헌이 성사되자, 대권(大權)을 앞에 놓고 DJ와 YS는 다시 경쟁하기 시작했다. 민주화를 갈망해 온 국민들은 두 사람에게 ‘단일화’를 주문했다. 두 사람도 ‘단일화’의 필요성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얘기하는 ‘단일화’는 자기가 후보가 되는 ‘단일화’였다. 1980년과 똑같았다.

재야도 더 이상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다. 인연에 따라,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누구는 DJ에게, 누구는 YS에게로 갔다. 한동안 후보 단일화 운동을 한다고 뛰어다녔지만,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그해 12월 19일 대선에서 군사정권의 계승자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 잠시 2선으로 후퇴해 있던 DJ가 평민당(평화민주당) 대표를 맡아달라고 제안해 왔다. 다른 한편으로 두 김씨의 행태에 실망한 재야인사들과 젊은 운동권 출신들, 소장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나와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나는 제정구·유인태·원혜영·박찬종·홍사덕·조순형·이철·장을병·이수인 등과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총선에 나섰다. 하지만 노태우의 민정당, YS의 민주당(통일민주당), DJ의 평민당, JP의 신민주공화당 등이 지역을 등에 업고 각축전(角逐戰)을 벌이는 마당에 우리가 설 땅은 없었다. 고향에서 다시 출마한 나도 “예춘호는 본적(本籍)이 전라도”라는 마타도어에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이후 나는 정치계를 떠났다. 한동안 한겨레사회연구소・영도장학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을 했지만, 오래전에 활동을 접었다. 낚시에 취미를 붙여 관련 책을 몇 권 내기도 했지만, 요즘은 집안에서 붓글씨를 쓰면서 소일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름 소신을 지키면서 한평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바람에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모나게 군 것은 아닌지, 그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후회는 없는 인생이었다.⊙

[취재후기]
JP에게는 여전히 애정, 박정희에 대해서는 愛憎

지난 3월 초 편집장이 “예춘호씨를 만나보라”고 했다. 순간 ‘그분이 아직도 살아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박정희 시대의 수많은 인물 중에서도 3공화국 초기의 인물에 속했기 때문이다.

경기도 수원시 보정동에 있는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예춘호 선생은 “TV에서 많이 보던 분”이라며 반가워했다. 그는 귀는 어두웠지만, 기력은 정정했다. 젊은 시절의 사건들, 이를테면 제6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선거 당시 이효상·정구영 후보의 득표 숫자까지 기억했다.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문예춘추》를 읽고 있었고, 자본주의 발달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아베 정권과 미국의 밀착,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 복지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다.

3차례 만나 장시간 얘기를 하면서 ‘JP에 대한 애정이 참 강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 JP의 능력을 극찬하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는 “후반의 JP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다”면서 “아는 사람들이 돈 문제 등 JP의 이런저런 잘못을 지적하는 얘기를 할 때에는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내가 알고 있는 JP에 대해서는 좋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JP는 이분이 자기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준다는 것을 알까? JP는 이렇게 자기를 생각해 주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고 실망시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애증(愛憎)이 엇갈렸다. 3공 초 청와대로 자신을 불러 술잔을 나누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말할 때에는 “형님 같은 분이었다”며 그리움에 젖기도 했지만, 유신 이후의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독재자’라고 단언했다. 그는 “JP는 낭만적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꼼꼼했다”면서 “박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1960년대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했던 가난을 몰아낼 수 있었을까 싶다”고 말했다. 정구영 선생에 대해 얘기할 때에는 ‘경애(敬愛)의 정(情)’이 그대로 느껴졌다.

DJ에 대해서는 “김상현을 비롯해 정말 고생한 사람들은 챙기지 않고, 엉뚱한 사람들에게만 공천을 주더라”고 비판했다. YS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억도, 감정도 없는 듯했다.

세속적 의미에서만 말한다면 예춘호 선생의 삶은 30대 중・후반에 집권당 사무총장, 국회의원으로 잠깐 권력을 누렸을지 몰라도, 이후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런 시련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소신껏 인생을 산 데 대한 자부심과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여유가 느껴졌다. 거기에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전히 지적(知的)으로 녹슬지 않고 있었다.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