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의 演藝, 人 ② 필모그래피로 추적한 곽경택 감독에 대한 연대기적 고찰 : 월간조선

단편영화는 단편소설과 참 많이 비슷하다. 무엇보다 결말이 신통치 않다. 가령 단편소설이라면 끝이 이런 식이다.

〈… 그는 조금씩 자신이 지금 막 저지른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사람을 죽인 거다. 그것도 따져 보면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어떤 예감처럼 하얀 빛이 쿨럭쿨럭 쏟아져 들어왔다.〉

장담컨대, 이 문장은 여운(餘韻)을 남기기 위해 전략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니다. 역량이 부실하다 보니 끝을 시원하게 맺을 수 없어 항상 이렇게 모호하게 끝나는 게 단편소설의 엔딩이다.

단편영화도 비슷하다. 단편영화들의 특징이 있다. 일단 내러티브가 신통찮다. 대개는 주인공의 내면(內面)을 다룬다. 그의 행동은 인과(因果)관계가 불분명하다. 충분하고 납득할 만한 설명 대신 관객의 성실한 이해에 의존한다. 그래서 느리고 졸립다. 캐릭터도 박제(剝製)다. 죽어 있다. 몽롱하거나 몽환적(夢幻的)이거나 둘 중 하나다.

1995년에 만난 단편영화 〈영창 이야기〉가 신선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시작과 끝이 명료했고 전체 이야기 틀도 좋았다. 물론 캐릭터도 훅훅 더운 김을 내뿜고 있었고. 그때 ‘곽경택’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

단편영화를 잘 만든 감독이 장편영화에서 꼭 성공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장편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감독 중에 단편이 ‘후진’ 감독은 없다. 그런 이유로 당시 영화 기획자들은 단편영화를 자주 보러 다녔다. 재능 있는 감독을 발견하는 데 그게 제일 빠르고 좋은 방법이었다. 감독들이 재능 있는 배우를 찾기 위해 대학로를 헤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당시 충무로에서 일하던 필자도 곽경택 감독을 찍어 놓기는 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물먹은 목욕탕 이야기 〈억수탕〉

레이더에 잡혔으니 동선(動線)은 파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장편이 궁금했다. 그의 첫 장편 영화는 1997년에 나온 〈억수탕〉이었다. 목욕탕 이야기란다. 목욕탕 들여다보는 데, 아니 훔쳐보는 데 흥미 못 느끼는 사람은 없다. 좋은 기획이다 싶었다.

막상 영화를 보니 아니올시다였다. 여배우의 가슴은 처음 한두 번 눈길을 끌었을 뿐 반복해서 나오다 보니 그냥 무덤덤했다(이것은 포르노를 장시간 보다 보면 초반의 감흥이 계속 떨어지는 한계효용 법칙과 정확히 일치한다). 내러티브도 허술했다. 무엇보다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성립요건인 동력(動力)이 없었다.

영화는 ‘어떤 사람이 뭔가를 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력하는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뭔가를 추구하는데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매우 강고해야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진다. 전문 용어로는 프로타고니스트(주인공)와 안타고니스트(적대자)가 제대로 격돌해야 그때부터 그게 영화다. 그래서 서울대 나와서 삼성전자 들어가는 이야기가 제일 재미없다.

〈수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가 있다. 전설의 야구단인 ‘삼미 수퍼스타즈’에 얼결에 들어간 실업팀 투수의 이야기다. 회사에서 야구단을 창단했는데 마침 왼손잡이 투수가 없어서 이른바 아리랑볼이라는 시속 100km 미만의 공을 던지는 아마추어가 프로야구단에 입단을 하게 된다는, 그야말로 거짓말 같은 설정의 영화다. 더 기가 찬 건 주인공인 감사용의 욕망이다. 전혀 소박하지가 않다. 100km 겨우 던지는 주제에 그는 당대 최고의 투수인 박철순과 대결하여 이기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인물이다. 그리고 패전(敗戰)투수로 밥값만 겨우 하던 감사용에게 정말 박철순과 붙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 이런 게 바로 영화인 것이다.

〈억수탕〉엔 아무 것도 없었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주인공도 없고 등장인물들의 야망은 고만고만해서 몰입하기 힘들었다. 뭐 이해할 수 있다. 첫 작품이 바로 대박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일단 감독이 상업영화라는 큰 작업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주변의 지인들에게 밥이나 사 먹이면서 찍을 수 있는 아마추어 영화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또 한 번의 실패작 〈닥터K〉

감독이 현장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연출이 아니다. 현장을 장악하고 통제하는 일이다. 기술 스태프들은 애초부터 수동적인 존재다. 이들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1차로 감독이고 2차로 배우들이다. 그래서 현장 분위기가 나쁘다고 하면 감독과 스태프들이 겉돌게 된다. 연출은 그 다음이다. ‘초보라서 아마 둘 다 잘하진 못했을 것이다. 해서 두 번째 작품까지는 봐주자’, 뭐 그런 생각이었다(하긴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억수탕〉을 이은 작품은 〈닥터 K〉(1998년)였다. 〈억수탕〉도 그렇겠지만 대개의 경우 아마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영화일 것이다. 주연은 차인표와 김혜수였다. 차인표가 초능력자로 나왔다. 그는 가끔 물속에 들어가 잠수한 채로 시간을 보내는 인물이다.

목욕탕에 이어 이번에는 수영장이라. 개인적으로 물을 좋아하나 보다 했다. 흥행에서 물을 먹었다. 아무리 싹이 보여도 장편 영화 두 편 말아먹으면 그때부터는 수습이 안 된다. 머릿속에서 곽경택이라는 인물의 지표는 흐릿해졌다. 문학에서도 데뷔작 하나 쓰고 나면 오래 침묵하는 작가들이 있다. 가지고 있는 콘텐츠를 다 털어서 그렇다. 첫 장편을 쓰면 경험과 아는 것의 70% 이상이 날아간다. 고민 끝에 자전적(自傳的) 소설을 선택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지막 자산인 그거까지 쓰고 나면 그때부터는 진짜 입이 안 떨어지고 손이 안 나간다. “데뷔가 빠른 게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라고 학생들에게 일러주는 이유다. 곽경택 감독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오랫동안 준비한 단편 하나가 전부였나 보다 했다. 대박이 터졌다. 2001년이다.

곽 감독 아버지, “이제 좀 볼 만하네”

818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곽경택 감독의 히트작 〈친구〉.

“고마해라, 마이 묵으따 아이가.”

영화가 관객 수 백만을 넘기면서 부산 사투리라서 알아듣기 힘들었던 대사가 무슨 뜻이지 알려주는 기사들이 뜨기 시작했다. 깡패 영화 〈친구〉 (2001년)였다. 사실 캐스팅은 불안했다. 유오성은 톱(top)으로 나서기에는 대중적인 호감과 인지도가 떨어졌고 장동건은 영화계에서 ‘버린 재목’이었다. ‘인물만 좋지 연기가 통~’ 다들 그렇게 생각하던 배우였다. 그 장동건이 쇳소리가 나는 부산 사내를 연기했고 강렬했으며 새로웠다. 영화 속에서 나머지 두 친구였던 까불이와 범생이도 톡톡히 제 몫을 했다. 800만명 동원으로 한국 영화 흥행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곽경택은 이렇게 말했다.

“〈친구〉는 제가 나고 자란 자갈치 시장과 영도다리, 삼일극장을 누비는 부산 사나이들의 이야기죠. 영화 애호가이자 가장 신랄한 조언자였던 아버지에게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이제 좀 볼 만하네, 잘 썼네’라는 평가를 들었어요. 돈만 있으면 투자하고 싶다는 말씀까지.”

“이제 좀 볼 만하네”라고 했던 곽경택 감독의 아버지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아들이 뭐하는지 전화를 해서는 시나리오 쓴다고 대답하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남들은 1분도 거짓말하기 어려운데 2시간짜리 하느라 욕본다. 수고해라.”

반응이 다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겨우 깡패 영화가 대한민국 흥행 톱 영화가 되는 것이 마땅찮은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당시 영화배우 출신 국회의원 신성일은 국회 대(對)정부 질문에서 총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총리는 〈친구〉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더 화제가 되었다. 신성일의 아들 강석현은 아버지의 앞뒤 없는 질문 덕분에 주변의 전화 공세에 시달렸다. 대체로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우리 아버지한테 따지지 왜 나한테 야단이야.”

세 사람을 살린 영화

꼼꼼히 뜯어보면 〈친구〉는 대단히 통속적인 웰메이드(well-made) 영화다. 감독은 애초부터 주먹질, 칼질로 승부 볼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건 그냥 양념이다. 〈친구〉의 원래 첫 신(scene)은 교복 입은 양아치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그걸 아이들이 소독차를 따라가는 고색창연한 장면으로 바꿨다. 향수(鄕愁)를 입힌 거다. 중장년층 관객들은 극장에서 눈물을 훔쳤다. 극중에서 고등학교 양아치 소녀가 ‘연극이 끝나고 난 뒤’를 부르는 장면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울었다는 사람도 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는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했던 곡인데 당시 노래치고는 세련됐다. 로버트 파머가 부른 ‘bad case of lovin' you’도 흥행에 일조를 했다. 교복 입은 아이들이 가방을 옆에 끼고 내달리는 장면은 이후 하나의 클리셰(Cliche'·‘진부한 표현’ ‘상투어’를 뜻하는 비평용어)가 됐다.

이 영화로 세 사람이 살았다. 곽경택, 유오성, 장동건. 곽경택은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는 얘기고, 두 배우는 티켓 파워를 인정받아 캐스팅 순위에서 급상승을 했다는 뜻이다. 곽경택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닥터 K〉 끝나고는 정말 힘들었어요. 영화 관계자들도 나를 피하고 곽경택은 한물간 감독으로 취급받았으니까요. 〈친구〉는 그 와중에 만들게 돼서 뭐 두려울 게 없었죠. 실패를 ‘찐하게’ 경험해 보니까 별로 겁나는 게 없었죠. ‘망하면 얼마나 더 망하겠어?’ 이런 마음이었죠.”

이런 자세가 흥행작을 만든다. 원래 잃을 것이 없어야 뭐가 터져도 터진다. 〈친구〉가 성공을 거두면서 비화(祕話)도 많이 나왔다. 실제 이야기를 다뤄서 부산 조폭들이 감독에게 저작권료 조로 돈을 요구했다느니 같은 건 빼자. 영화 속 뒷이야기를 한두 개 하자면 유오성이 ‘마이 웨이’를 부르기 전 등장하는 카페 마담은 실제 트렌스젠더다. 극 중에서 화자(話者)로 나오는 서태화가 마약 중독에 빠진 유오성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이런 대사가 나온다(아주 정확하지는 않고 그냥 뉘앙스다).

“약 하면 좋나?”

원래 대사는 유오성이 벽에 걸린 외국 풍광을 담은 그림을 가리키며 “약을 하면 저 안에서 신나게 놀 수 있다” 하는 것이었는데 사회적 파장 및 모방을 걱정해서 삭제했다고 한다. 의외로 영화의 사회적 책임에 예민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관객들을 납득시키지 못한 영화 〈챔피언〉

영화 〈챔피언〉 촬영현장에서 제작 지휘를 하고 있는 곽경택 감독. 하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어느 감독이나 그렇지만 이렇게 대박이 터지면 다음 영화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곽경택 감독이 후속작으로 고른 것은 복싱 이야기 〈챔피언〉 (2002년)이었다. 1982년 미국에 가서 경기 끝에 죽은 프로복싱 선수 김득구의 이야기다.

사실 김득구의 이야기는 예전에도 한번 만들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김득구 역은 이계인이 맡았었고 제목은 〈울지 않는 호랑이〉(1984년, 이혁수 감독)인가 그랬다. 비장한데 웃기는 아주 묘한 영화로 기억한다.

〈친구〉로 상생(相生)의 인연을 만들었지만 〈챔피언〉에서는 좋지 않았다. 배우 유오성 이야기다. 감독과 분쟁이 났고 앞서 설명한 대로 현장 분위기가 나빴으니 영화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내용도 문제였다. 관객들은 김득구가 싸우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가난은 충분히 좋은 소재지만 그것도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국제시장〉은 그 좋은 예다. 복싱으로 가난을 극복하려는 주인공의 심리는 스크린 안에서만 작동했고 마지막 김득구의 죽음 앞에서도 관객들은 이게 울어야 하는 타이밍인가,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겨우 180만명의 관객들만이 극장을 찾았다. 무슨 얘기냐. 입소문이 없었다는 뜻이다. 영화 흥행은 입소문이다. 좋게 본 관객 하나가 관객 둘, 셋을 끌어온다. 미디어도 침묵했다. 할 얘기가 없었다. 여기서 할 얘기란 호평(好評)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악평(惡評)도 홍보에는 도움이 된다. 감정적인 악평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은다. 인간이 참 이상한 멘탈을 가진 존재라서 나쁘다고 하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 꼭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욕하고 나오더라도 중요한 건 어쨌든 표는 샀다는 거다.

미디어를 통한 홍보전만 놓고 본다면 기자로 하여금 할 말이 많게 만드는 영화가 흥행에 유리하다. 그래서 이런 법칙도 있다. ‘20년 전 이야기를 만들어라.’ 한국 영화계의 법칙은 아니고 미국 흥행사들이 주로 하는 말이라는데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 싶다. 20년 전이면 보통의 기자들이 학생이었을 때다. 자신이 겪었던 가장 예민한 시기를 다루느니만큼 할 말이 많아진다. 그때 진짜 그랬다는 둥 사실과 다르다는 둥.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흥행작 하나면 감독은 세 작품은 연달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작품이 날아갔다.

정우성·장동건을 수렁으로 끌어들이다

정우성 주연의 〈똥개〉. 도회풍의 정우성을 시골로 데려간 것은 패착이었다.

정우성은 〈구미호〉(1994년)로 데뷔한 배우다. 사지(四肢)가 길고 머리는 작아 전형적인 ‘외계인 체형’인데 연기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곽경택이 〈챔피언〉의 차기 작에서 고른 배우는 정우성이었다.

그런데 날랜 수트를 입혀 도시에 세워 놔야 하는 배우를 시골로 데리고 갔다. 이건 누가 뭐래도 다소 패착이다. 정우성은 최소 지능만 가진 캐릭터로 등장했고 예전 캐릭터에서 계승한 것은 타고난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것 하나 정도였다. ‘연기 변신(變身)’과 ‘연기 배신(背信)’은 다르다. 관객들은 배우의 다양한 변신을 바라기는 하지만 배우가 자기 이미지를 깎아먹는 것까지 즐기지는 않는다. 정우성이 딱 그랬다. 정우성이 커다란 ‘다라이’에 빨래를 넣고 밟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긴 다리는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니었다. 139만명이 극장을 다녀갔다. 도회파(都會派) 배우 정우성을 시골에 데려가서 제목은 〈똥개〉(2003년)라고 지었으니 그만하면 선전(善戰)했다.

〈친구〉도 그렇고 〈억수탕〉도 그렇고 〈똥개〉도 그렇고 곽경택의 정서를 관통하는 것 중의 하나가 ‘마이너리티’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다. 이 부분은 소생의 관점이 아니라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의 지적이다. 그는 곽경택 감독과의 대담(對談)에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마이너리티에 집착하는가.”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그 지적에 수긍했다.

야심작 〈태풍〉도 날아가고…

장동건이 탈북자 출신 해적두목으로 나온 〈태풍〉. 100억원을 들인 이 영화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어렸을 때 생일파티를 안 해 주는 분위기였거든요. 어느 날 어머니 곗날하고 제 생일이 겹쳤어요. 어차피 하는 음식, 친구들 좀 부르라 하더군요. 생각했어요. 누굴 부를까 고민하다가 반에서 생일파티에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을 것 같은 아이들만 불렀어요. 나중에 어머니가 물으시데요. ‘쟤들하고 제일 친하나?’ 아니라고 하고 이유를 말씀 드렸어요. 딴 애들은 많이 가 봤을 것 같고 쟤들은 못 가 봤을 것 같아서 그냥 불렀다고. 들으시더니 잘했다, 하시더라고요.”

어쨌거나 또 한 작품이 날아갔다. 물론 영화를 오로지 흥행만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문제는 작품성 면에서도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곽경택 감독의 지론은 좀 다르다.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마도 콘텐츠와 영화산업 비즈니스를 구분하여 말한 것 같은데 100% 동의하기는 어렵다).

다음 작품은 감독에게 야심작이었다. 〈친구〉의 소울 메이트 장동건을 앞세워 제작비 100억을 들여 〈태풍〉 (2005년)을 선보였다. 영화를 보다 보면 김성종 원작을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흑수선〉(2001년)과 자꾸 헛갈리는 그런 이상한 영화였다. 관객 동원 수 410만명. 물론 전작(前作)들보다 나은 스코어였지만 CJ에서 배급을 맡아 거의 전국의 극장을 도배했던 작품이니 결코 좋은 성적이 아니었다.

감독의 면(面)이 상하는 것은 또 있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한국 영화에 박스 오피스 1위 자리를 내준 것이다. 〈연애의 정석〉이라는 영화였다.

“장동건 나오는 100억짜리 영화가 송일국 나오는 30억짜리 영화에 밀렸다.”

당시 영화계에서 수군거리던 뒷담화다(송일국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이렇게 삼진 아웃.

“와 진작 말을 안 했노”

영화 〈사랑〉은 〈친구〉 이후 모처럼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었다.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던 곽경택은 〈태풍〉 이후 2년 만인 2007년 그리 크지는 않지만 히트작을 내놓는다. 주진모·박시연 주연의 〈사랑〉이었다. 〈사랑〉은 참 재미있는 영화다.

남자에게는 초등학교 때 첫눈에 반한 여자가 있다. 여자애 집이 경제적으로 박살나는 바람에 헤어지고 고등학교 시절에 재회한다. 여자애의 엄마는 막대한 빚을 여자애에게 물려주고 남자는 여자를 지키려다 감옥에 간다.

그렇게 세월은 한참 흐르고 남자와 여자애가 다시 만나는데, 하필 여자애는 남자가 모시는 ‘보스’의 여자가 되어 나타난다. 둘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도망갈 계획을 세운다. 계획은 탄로나고 남자는 죽음 직전에 몰린다. 여자애는 보스에게 그간의 사연을 털어놓는다. 보스의 반응이 압권이다.

“와 진작 말을 안 했노.”

그런 가슴 아픈 인연이 있었으면 자기가 다 알아서 놓아 주고 맺어 주었을 텐데 바보 같은 것들이라며 타박한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재미있는 영화인가. 보스의 여자를 사랑하는 콘셉트는 흔한 이야기 틀이다.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이 그렇고 우리 영화로는 이병헌 주연의 〈달콤한 인생〉(2005년)이 그렇다. 〈달콤한 인생〉에서 보스는 이병헌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게 모욕을 줬어.”

그런데 난데없이 “말하지 그랬냐”니 그 보스 참….

〈사랑〉에서 돋보인 배우는 두 사람이다. 하나는 박시연의 오빠로 나온 차도진이다. 〈사랑〉이 데뷔작이었다는데 연기가 너무 살아 있어서 연극판의 숨은 인재인 줄 알았다. 현재 활동은 좀 지루하다. 또 하나는 김민준이다. 극중에서 건달로 나오는데 영화가 끝나고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까지도 김민준인 줄 몰랐다. 그만큼 치권이라는 극 중 건달을 완벽하게 소화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김민준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곽경택 감독님이 새로운 영화를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곽경택 감독님과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었죠. 그래서 감독님을 만나 단역이라도 꼭 하고 싶다고 했어요. 시나리오 분석까지 마치고 감독님을 만났는데 감독님께서 유례없는 악역(惡役)을 만들고 싶다고 하시데요. 그렇게 출연한 영화가 〈사랑〉이에요. 영화 홍보도 하지 않고, 나라는 것도 밝히지 않고 연기를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영화관에 찾아갔는데 정말 내가 출연한 줄 모르더라고요.”

영화의 주제는 요샛말로 하면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다. 사랑을 지키지 못한 한 남자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로 곽경택 감독은 겨우 숨을 돌린다.

다시 한번 사랑 이야기에 도전했지만…

2011년 곽경택은 또 한 번 사랑 이야기에 도전한다. 권상우·정려원 주연의 〈통증〉이다. 유전자에 무슨 구멍이 뚫렸는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와 혈우병으로 통증에 민감한 여자가 나온다. 이 설정은 비과학적인 설정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육체적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병사들을 육성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곽경택 감독이 의대 중퇴다.

“좀 민망하고 간지러웠어요. 동현이(여자 주인공) 같은 경우만 해도 전에는 제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청순가련 아니면 와일드밖에 없었는데 여기선 살아 있죠. 저도 변하려고 애를 썼어요. 젊었을 때는 혈기왕성한 기운으로 시나리오 7, 8고 내리 쓰고 현장에서 고함치고 살아 왔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도 잘 흡수하고 하나를 버리면 얻을 게 더 많다는 지혜가 생겼죠. 고집스럽게 제 이야기만 하려는 게 아니라 관객들이 원하고 보고 싶어하는 이야기로 타협점을 넓히자 했어요. 고집을 많이 빼고 나니까 제가 보이는 게 아니라 영화가 보이더라고요.”

그의 열 번째 작품이었던 〈통증〉은 그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쓴 시나리오로 찍은 작품이다.

감독이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로 작품을 하는 경우는 세 가지다. 하나는 남이 쓴 거지만 너무 잘 써서, 그래서 자기가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어서. 둘은 아이디어 고갈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빌린 경우. 셋은 중심을 잃고 판단력이 흐려진 경우. 짐작 가는 것은 불행히도 세 번째다.

〈통증〉은 감독의 목소리가 실종된 영화였다. 거칠지도 섬세하지도 않았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영화를 재미있게 볼 관객은 없다.

집중이 안 되는 영화 〈친구2〉

〈친구2〉는 관객의 입장에서 집중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이야기를 끝맺을 때가 됐다. 2009년 MBC에서 〈친구〉를 〈친구, 우리들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미니시리즈화했을 때부터 우려는 있었다.

“이러다가 〈친구2〉 나오는 거 아니야?” 대부분 그렇지만 우려는 기어이 현실로 나타난다. 2013년 곽경택은 〈친구2〉를 발표한다. 〈친구2〉는 구조가 참 이상한 영화다. 〈친구〉의 프리퀄(prequel·유명한 책이나 영화에 나온 내용과 관련하여 그 이전의 일들을 다룬 속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속편도 아닌 어정쩡한 모양새다.

게다가 시제(時制)가 세 개나 나온다. 유오성이 출감하여 새로운 피 김우빈을 데리고 부산을 접수하는 현재와, 장동건을 ‘작업’하라고 지시했던 과거와, 유오성의 아버지 이야기인 대과거까지. 이렇게 시제가 동거하다 보니 영화는 오락가락한다. 나빴다는 얘기가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고 했다는 얘기다. 이 경우 관객의 입장에서는 집중이 어렵다. 김우빈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영화는 일제(日帝)시대로 간다. 일제시대인가 했더니 다시 현재다. 재미있는 것과 집중이 잘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친구2〉는 재미는 있는데 집중이 안 되는 영화였다(개인적으로는 김우빈이 하도 눈을 부라리고 나오는 바람에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유오성의 아버지 이야기는 다음 회로 미뤘어야 했다. 물론 〈친구2〉가 호응을 얻었을 때 이야기다.

연어도 돌아오고 오디세이도 돌아온다. 둘의 운명은 다르다. 연어는 돌아와 죽고 오디세이는 산다. 그래서 예술에서 ‘오디세이 테마’라는 것은 있지만 ‘연어 테마’라는 것은 없다. ‘오디세이 테마’는 주인공이 산전수전을 다 겪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다루는 것을 말한다. 있는 곳은 같지만 그 세월 동안 주인공도 변했고(물론 긍정적으로) 있던 곳도 변했다.

예술은 변화를 추구한다. 곽경택은 연어일까 오디세이일까. 현재로서는 연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친구〉에서 출발해서 〈친구〉로 돌아왔다. 영화 속 이야기를 따져 보자. 유오성은 과거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온다. 그는 변했는가. 〈친구2〉는 그런 점에서 아쉽다. 유오성의 변화는 없다. 다만 세상만 변했다. 변한 공간에서 변하지 않은 인물이 행동하는 건 각이 안 맞는다. 〈친구2〉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이유다. 유오성은 그런 의미에서 곽경택의 페르소나다.

新作〈극비수사〉는 〈친구〉 이후 사실상 첫 작품

2015년 현재 개봉을 앞둔 곽경택의 신작은 〈극비수사〉다. 1978년 실제로 일어났던 유괴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형사와 도사(道士)가 함께 수사에 뛰어들어 화제를 모았던 희한한 사건이다. 형사 역은 김윤석이고 도사 역은 유해진이다. 알아서 연기하는 배우가 둘이다. 이쯤 되면 감독 입장에서는 ‘날로 먹는’ 부분이 반 이상이다. 본인 입으로도 그렇게 말했다.

“이번만큼은 캐스트에 자신 있어요. 촬영할 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죠. 이렇게 거저먹어도 되나. 연기에 손댈 필요가 없으니까 미술 같은 다른 파트에 눈을 돌리게 되더군요.”

연기에 손댈 필요가 없다면 남은 것은 미술 같은 파트가 아니다. 물론 미술을 맡은 전인한 감독은 명장(名匠)이다. 그것도 신경 쓸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다. 살아 있는 캐릭터다. 집중하고 또 집중하여 감동을 배가시키는 것이 감독의 몫이다. 그래서 〈극비수사〉는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친구〉 이후 곽경택의 첫 번째 작품이기 때문이다. 기대는 비과학적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그에게는 적어도 뚝심이란 게 있다. 영화인생 20년 동안 2년에 한 작품 꼴로 꾸준하게 소화한 것은 충무로에서 아주 흔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