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詩] 김재홍 : 월간조선

앞을 보면 문이 없고
옆을 보면 이미 부서진 망루의 밤

- 전동균, ‘촛불 미사’ 중에서

그날은 휴일이었다. TV를 보는 게 직업이었던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한껏 등을 뒤로 젖힌 채 딱히 무엇을 애써 찾아보아야 할 것도 없이 그저 멀뚱멀뚱 눈만 꿈벅이고 있었다. 화면에는 독수리 이니셜이 붙은 주황색 헬멧을 쓴 채 그 아래 다시 모자를 쓴 한 외국인 선수가 타석에 서기 전 야구 방망이를 들고 연습 스윙을 몇 번째 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아이 하나는 보행기를 타고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다른 하나는 엄마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무언가 보채고 있었다.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과 그들의 우렁찬 함성소리는 고스란히 TV를 빠져나와 거실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시집 《메히아》와 《다큐멘터리의 눈》.

그 선수는 방망이를 머리 위까지 들어올려 꼭 눈앞의 통나무에 도끼질을 하려는 사람처럼 보였고, 두 다리는 고속으로 질주하는 말 등에 올라탄 사람처럼 기마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의 헛스윙과 몇 번의 파울 끝에 2루타를 쳤다. 화면은 외야수 사이로 크게 떠서 날아가는 공을 보여주다 2루까지 달려 숨을 몰아쉬는 선수의 검게 붉게 얽은 얼굴을 클로즈업했고, 연이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들의 모습을 와이드 샷으로 잡았다. 일순간 잠실야구장은 치열한 전투 끝에 북과 꽹과리를 치며 잔치를 벌이는 수만 병사들의 승리의 향연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가쁜 숨을 몰아쉰 선수는 모자를 고쳐 쓰고 헬멧을 꾹 눌러 쓴 다음 다시 경기에 몰입했으나 나의 의식은 2루 베이스를 밟고 선 그의 얼굴에서 멈췄다. 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모자를 두 개나 썼을까. 저 친구는 왜 저렇게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쟤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으면서 운동하고 있는 걸까. 왜 저렇게 말랐지. 왜 저렇게 순해 보이지. 왜 저렇게 불쌍해 보이지.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야구 선수 로베르토 메히아는 국내 프로야구 리그에서 단 30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타율 0.259에 3홈런 13타점의 초라한 기록은 용병 메히아를 더는 한국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떠난 그의 몇 안 되는 귀한 경기 장면을 나는 그날 보았던 것이다. 소파에 벌러덩 눕다시피 앉아 소란스런 아이들 틈에서 무심히 두 눈만 꿈벅이며 보았다. 그리고 2루 베이스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2003년 《중앙일보》 제4회 중앙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메히아’로 나타났다.

메히아*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시민인 그는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선 아시아의 작은
공화 정부의 취업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야구장 타석에 섰다
(왜 중남미 선수들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를 하는지 몰라)

메시아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검게 붉게 얽은 얼굴을 하고 그는 처음에
야구공과 방망이를 손난로처럼 품고
한겨울 국제공항 청사를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며 나왔을 것이다
(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

그는 당당하게 2루타를 쳤다
베이스를 밟고 선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수천 개 눈동자가 일순간 그의 몸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파도처럼 술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거대한 솥단지가 되어 펄펄 끓다가
더 작은 체구의 다음 타자가 안타를 칠 수 있을지 의심한다
(관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

비쩍 마른 붉은 눈의 게바라를 읽고 싶었다
국경을 뛰어넘는 공화국의 깃발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작았고 액정 화면에 잡힌 그의 헬멧에는
국적 불명의 독수리 이니셜만 코를 벌름거리며 박혀 있었다

멕시코와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출신의 운수 좋은 메이저리거들도
타석에 서면 구부정하게 허리 굽히고
꼭 말 타는 자세로 방망이를 든다

*국내 프로야구팀 ‘한화 이글스’의 외국인 선수(2003년)

고등학교 1학년 봄 난생 처음 참가한 백일장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모두 낙방한 가운데 홀로 받은 입선(入選) 상으로부터 거의 20년 동안 나는 이른바 등단을 위해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생활을 했다. 가끔씩 문예반 앞을 어슬렁거리게 된 그 순간을 저주하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시인의 삶이란 얼마나 고귀하고 고결한가를 상상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한 가지 변함없는 시적 자세는 언제 어디서고 시를 찾아가는 의욕(意慾)이었다. 반드시 좋은 시를 쓰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반드시 시보다 먼저 시에 대한 절망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야구 선수 메히아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시를 향한 향일성의 간절함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2루타를 치고 베이스 위에서 그 큰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야구 선수의 몸동작 하나하나는 곧 시였다. 황급히 종이와 볼펜을 찾아 보이는 모습 그대로 적어 나갔다. 연습 스윙을 하던 모습, 말 탄 기사(騎士)처럼 우스꽝스럽던 타격 자세, 모자를 쓰고 다시 헬멧을 쓴 작은 머리통, 울퉁불퉁한 검은 얼굴….

2003년 프로야구팀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던 도미니카 출신의 로베르토 메히아 선수. 시인은 작은 체구에 겁먹은 얼굴을 한 그에게서 등단작 ‘메히아’의 시상(詩想)을 떠올렸다.

이어서 그의 조국 도미니카와 중남미, 낯선 인천국제공항을 빠져나오는 장면, 체 게바라의 흑백 사진과 중미 해안의 왠지 비릿한 느낌이 나는 풍경, 안타깝게도 박찬호로부터 곧잘 홈런을 쳐내던 블라디미르 게레로라는 선수, 그 역시 도미니카 출신으로 드물게 타격용 장갑을 끼지 않고 타석에 서던 선수였다.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쿠바 출신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들의 기이한 자세들까지…. 특별히 고심할 것도 없이 무언가를 애써 표현하려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나갔다.

첫 연의 4행은 메히아가 잠실야구장 타석에 서기 위해 필요한 제반 요건을 간략히 다루었고, 2연의 4행은 그가 한국 프로야구 등록 선수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를 메히아와 메시아의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해 적었다. 그리고 3연은 이 시의 착상이 된 TV 속 경기 장면을 말 그대로 거두절미하고 기록했다. 나머지 4연과 5연은 좀 더 당당하고 배짱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실어 그동안 보고 들었던 몇 가지 정보를 보태 적었다. 불과 십수 분 만에 5연 24행의 시가 눈앞에 나타났다.

수고스럽지 않게 뼈대를 갖추고 살을 붙이고 옷까지 챙겨 입혔으나 이상하게도 밋밋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락이든 표현이든 내용이든 형식이든 시란 모름지기 새로운 기운으로 생동해야 한다는 교과서적 기준을 생각할 때 그 상태로 마감할 수는 없었다. 거기서 잠깐 멈춰 있는데 ‘메히아란 선수는 왜 그럴까’ 하는 솔직한 질문을 그대로 적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순간 떠올랐다. 1연부터 3연까지의 마지막 행마다 괄호 안에 넣은 ‘왜 중남미 선수들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를 하는지 몰라’ ‘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 ‘관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는 주로 묘사를 통해 전개되는 시의 전반적 흐름과는 이질적인 내면적 독백의 표현들이다. 밋밋한 전개에 물음표가 빠진 질문이 괄호 속에 들어가자 색다른 맛이 났다.

이렇게 하여 20여 년 소망하던 나의 등단작은 불과 십수 분 동안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솔직히 이놈이 시인지, 시라 하더라도 얼마만큼 구색을 갖춘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시란 언제나 내가 먼저 찾아가야 살짝 얼굴을 보여주던 감질나는 존재였는데 이처럼 덜컥 나타나는 것도 못미더웠고, 선배 세대의 문학적 고뇌와 시적 전범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자부하던 터라 스스로도 그 모양새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그해 나의 응모작은 모두 8편이었는데, 앞세운 작품은 사실은 ‘메히아’가 아니었다.

平床

일흔을 넘겨 다들 호상이라고 말하던
절름발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재건중학교 다니다 말고 목수가 된
막내 삼촌이 만들었다

침針장이 욕심보 할아버지가
가끔 강원도 고향 언저리 떠올리시라고
조용히 대문 앞에 놓여 있었다
햇살 잠시 어른거리다 떠나고
장맛비가 와서 철벅거리며 뛰어 놀다 가고
나도 쿵쾅거리며 친구들과 씨름하곤 했다

동네 아이나 중늙은이에게나 항시 깍듯한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외할머니가
저녁마다 앉아 산나물을 다듬는다

그게 벌써 20년 넘어
닳고 닳은 다리는 절반으로 줄었다

그해 나의 응모 표제작인 이 시는 ‘메히아’와 달리 오랜 탐색과 추적 끝에 완성한 전형적인 ‘찾아가는 시’였다. 외할아버지가 강원도를 떠나 울산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야음동이었는데 거기 집 앞 골목에 어른 두세 명이 나란히 앉으면 꽉 차는 평상이 하나 있었다. 외할머니는 여기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물을 다듬고 벗들과 간식을 나눠 먹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얘기를 손주들에게 전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보아 온 그 평상은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뒤에도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그 사이 외할머니께서는 거의 ‘ㄱ’ 자로 구부러지셨고 평상도 다리가 닳고 닳아 거의 땅바닥에 닿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외할머니의 노년과 임종까지, 나의 성장기와 결혼까지 모두 지켜본 평상이었기에 남다른 감회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시인 지망생으로서 이것에 대한 시적 표현 욕구는 다른 것과 비교되지 않았다. 겨우겨우 썼다가 찢어 버리고 다시 썼다가 찢어 버리고, 외할아버지를 절름발이와 욕심쟁이로 표현하는 것의 윤리적 정당성과 그 좁은 평상에선 아이들과 씨름하며 논 적이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 대한 부담까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표현 장애는 극도로 커졌다. 그리하여 시시콜콜 모든 것을 담은 30행이 넘는 초고로부터 15행으로 줄어들기까지 10여 년이 흘렀다.

2003년 《중앙일보》 등단 시상식에서 이시영 선생님(사진왼쪽)과 함께.

시적 모티브가 어느 순간 촉발되기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서서 무언가를 시 형식에 담으려는 주체적 욕망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모름지기 그 주체성이 빚어 낸 그야말로 주옥 같은 작품은 한두 편이 아닐 것이다.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정신이야말로 군대에서보다 시 세계에 더 어울리는 말이다. 그러나 ‘平床’은 내게 아무래도 ‘메히아’의 신선감과 말 재미를 따라가지 못한다. 마음의 절실함에 어울리는 옷을 입히지 못했다고 여긴다.

아무튼 ‘메히아’ 이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메히아’가 등단작이 되고 난 이후 나는 결코 시를 쓰기 위해 시적 순간을 스스로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애써 시를 찾아가지 않고 가만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시가 찾아왔다. 나는 그(녀)가 불러 주는 언어를 받아 적기만 했다. 선배 시인들의 작품을 찾아 읽거나 또래와 후배들의 시를 유심히 살펴봤을 뿐 회사원으로서의 생활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메히아’는 ‘기다리는 시’의 의미를 일깨워 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를 쓰지 않고 받아 적는다고 말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습작기의 말투와 형식으로부터 좀 다른 지점에 도달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물론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이다. 가령 2003년 《중앙일보》 지면에 ‘메히아’와 함께 게재된 ‘처용암에서’란 작품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2연과 4연에 담고 있다.

보름 되기 전에도 달은 부서져
물너울을 타고 물결이 되어
부서진 조각들 빈 마을을 향하고
뱃머리가 묶인 발동선은 원을 그리며
떠나야 할 거리를 재고 있다

삼촌을 버린 여자와
삼촌이 버린 세상의 끝에서
처마는 돌담에 기대어 주인을 추억하고
바다는 지치지도 않고 밤새
마을이 끝난 곳에서 주름져 있다

그러나 아직 발표하지 않은 최근작 가운데 ‘사이’란 작품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그대로 옮겨 와 시랍시고 내세웠다.

형,
말 등에 손을 얹었습니다
이 말은 2200년 전에는 살아 꿈틀대는 엉덩이를 가졌었습니다
용갱의 말 엉덩이에 손을 얹고
형께 문자를 보냅니다
여기는 부암동,
부침바위가 아이들 셋을 한번에 점지한 곳입니다
거북과 해태가 골목에서 빗돌을 지키는 밤
저는 형의 얼굴과 흰 머리와 어깨를 생각하며
맨해튼이라든가 롱아일랜드라든가 브룩클린을 떠올립니다
형은 곧 떠나시지만
저는 다시 컴컴한 골목에서
문자를 보내겠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춥고 아이들은
그래도 애비라고 늦도록 기다립니다
눈앞의 진실 앞에 진실해지겠습니다
형의 건강과 행복과 아름다운 영화를 위하여
형의 또 다른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소서!

길상호 시인이 “작품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이유를 뭔가”라고 묻자 김재홍 시인은 “정보와 팩트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시적 의미가 태동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받아 적는 것은 시적 자아(自我)의 주체성을 인위적으로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도한 주체성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성과 오도(誤導)된 생태주의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되살리는 일이다. 수만 년 공들여 쌓아 온 인류의 문명을 그 간절한 취지대로 인정하고, 우리 스스로 한낱 인간에 불과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쓰기’가 아니라 ‘적기’는 세포 바깥에서 감각 재료가 공급되어야 시스템이 작동되기 시작하는 자연법칙에 부합하는 행위이다. 어떤 인간도 자연의 인과율에 역행하여 ‘쓸’ 수 없으며 창작할 수 없다. ‘계몽의 그물로 짐짓 세상을 구제하려 하지 않고, 주어진 눈앞의 현실을 진실의 심안으로 기록하는 것이 시인의 소명’이라는 생각을 시집 《다큐멘터리의 눈》에서 밝힌 바 있다.

찾아가지 않고 기다리니 받아 적는 행위는 더 이상 고역이 아니라 아리따운 여인과의 설레는 만남과 같았다. 그렇다고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약화된 것도 아니고 훌륭한 작품을 얻겠다는 욕심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으므로 오랫동안 그(녀)가 불러 주지 않을 때에는 불안하기도 했다. 등단 후 나는 짧은 설렘과 긴 불안 사이를 늘 길항(拮抗)했다. 이것이야말로 ‘종착점이 죽음인 시인의 숙명’인지 모른다.⊙

詩人이 만난 詩人

삶이 다큐멘터리이자 詩다

⊙ ‌포장마차 끌며 생활비 번 어머니와, 오빠 위해 대학 포기한 여동생들이 시인의 심리적·정서적 基底 형성
⊙ “주관성 배제하고 대상이 주는 사실관계 속에서 시적 맥락 만들고 싶어”

시인은 1994년부터 지금까지 회사 수첩에 하루하루의 일정을 모두 기록해 왔다. 수첩에 기록한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는 시인의 모습에서 그만의 엄격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직장이 위치한 상암동은 철길을 중심으로 해서 양쪽에 서로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한쪽으로는 야산과 함께 나지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또 한쪽으로는 방송국과 아파트 호텔 등 높다란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곳. 그는 아침저녁으로 두 세계를 가로질러 출퇴근을 하고 있단다. 출퇴근이 마치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넘나드는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늘 지나온다는 철길 밑 굴다리가 궁금했다. 더불어 두 개의 세계를 오가며 펼쳐지고 있을 그의 다큐멘터리도 어서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는 두 권의 시집 《메히아》(2009년)와 《다큐멘터리의 눈》(2013년)으로 우리 시단에 또 하나의 특색을 더하는 시인으로 평가를 받았다. 우선은 그의 일상과 시를 만나게 되는 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청했다.

“저는 방송사에 다니고 있는 직장인입니다. 1997년 울산MBC에 입사해 방송심의, 홍보, 방송정책, 문화사업 등의 업무를 했고 2010년 서울MBC로 이동해 전시·공연담당 프로듀서, 정책홍보 업무 등을 보고 있지요. 신입사원 시절에 하던 일이 TV를 보는 일이었어요. 그때는 노동으로 생각되니까 TV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 예를 들어 뉴스가 나오면 첫 꼭지는 뭐였고, 마지막 꼭지는 뭐였고, 정치 분야 기사는 몇 개고, 문화 분야는 또 몇 개고, 이런 걸 통계를 내야 했거든요. MBC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인 선호와는 관계없이 집중해서 보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독서에 육박하는, TV를 통한 학습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스포츠나 다큐멘터리가 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들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저의 경우 의도해서가 아니라 생활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시의 틀 안으로 이런 것들이 들어오게 된 것 같아요.”

스포츠 선수에 내재한 시적 素材

내친김에 독자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는지 물었더니, 방송사 종사자답게 그는 다큐멘터리 제목들을 거침없이 풀어 놓았다. 또한 그가 다큐멘터리를 시로 풀어 가는 방식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시리즈로 이어지는 EBS의 ‘세계테마기행’이 있고요. 근래에 방송된 ‘빛의 물리학’은 마침 요즘 대박이 나고 있는 영화 인터스텔라와 관련된 상대성 이론 등을 다룬 과학 다큐멘터리인데요, 과학의 세부적인 정보를 몰라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해하기 쉬워 좋았던 것 같아요. 다들 아시겠지만 KBS의 ‘차마고도’ ‘이카로스의 꿈’ ‘슈퍼피쉬’, 또 MBC는 ‘북극의 눈물’ ‘남극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과 같은 눈물 시리즈가 있지요. 제가 자주 보는 다큐멘터리는 ‘세계테마기행’입니다. 다큐멘터리로서의 수준이 높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좀처럼 가기 어려운 구석진 나라들을 자주 보여주니까요. 제 두 번째 시집을 보면 ‘알튼아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에는 키르기스스탄의 7살 정도 되는 아이가 등장하죠. 저도 강원도에서 태어나 편도 15리가량을 걸어 학교에 다녔어요. 그랬는데 이 아이도 그러고 있더라는 거죠.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시차(時差)는 나지만 동질감 같은 걸 느낄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TV를 보며 시를 쓰면 소재만 가지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뒤에 카메라를 따라가는 연출자, 작가, 오디오맨 등의 움직임까지 생각하니까 브라운관 바깥까지 이야기를 하게 돼요.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인 ‘다큐멘터리의 눈’ 같은 경우 카메라맨의 이야기도 불쑥불쑥 들어가 있거든요. TV 모니터 바깥의 좀 더 넓은 부분을 본다는 게 방송사 종사자로서의 시선 차이가 될 것 같아요.”

두 권의 시집에서는 다큐멘터리뿐 아니라 스포츠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도 엿볼 수 있다. 스포츠를 통해 그가 어떻게 시적 영감을 얻는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들 그렇겠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좋아했어요. 사실은 신입사원 시절에 야구 동아리 만들어서 총무도 했고요. 비록 한 번 쓰고 그냥 쌓아 두고 있긴 하지만, 유니폼도 스파이크도 글러브도 타격용 장갑도 다 갖추고 있어요. 그런데 야구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요. 어느 날부터인가 스포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배구, 농구, 복싱, 축구는 당연하고, 스케이팅, 또 수영 이야기도 담게 되었지요. 그리고 시집에 들어가 있진 않지만 세 번째 시집에는 골프 이야기도 들어가게 될 거고요. 그것이 단순히 레저거나 허세 취미가 아니라는 것을 선수들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이것도 또한 대부분의 경우 방송을 통해 보게 된 거예요. 의도해서가 아니라 직장이 그렇다 보니 TV를 보게 되고, 다큐멘터리나 스포츠를 대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진실성에 공감하게 되면서 어떤 소재도 장애요소 없이 받아들이게 된 거죠.”

시인의 사생활과 시적 세계

시인은 포장마차를 하며 생활비를 댔던 어머니와, 자신으로 인해 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여동생들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채무를 졌다고 가슴 아파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우리는 몇 번이고 자리를 옮겨야 했다. 덕분에 방송국의 이곳저곳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마침 방송국 앞마당에 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어 많은 사람이 어울려 얼음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사진을 찍으며 머리를 식히고 다시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대화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시집에 잘 드러나지 않은 시인의 사적인 생활 부분에 접근해 보았다.

“성장기, 청소년기의 대표적인 일은 1982년에 아버지가 집을 나간 사건이었죠. 1998년도에 서울 구로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무연고 사망자가 있으니 신원확인을 해 달라고 했죠. 물론 이 사이에 세 번 정도는 뵌 것 같은데, 그래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이 예민한 시기에 아버지가 안 계셨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학교생활에서 주눅이 들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은 물론이고 심리적으로 자꾸 위축되었던 것 같아요.

가족 중에서 아버지는 한마디로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생각하고, 절대로 우리 아버지와 반대로만 살면 아이들이나 처(妻)한테는 괜찮은 아빠, 남편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살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달라요.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죠. 아들이고 맏이이고 하니 저는 대학교를 가고 동생들은 실업고를 갔어요. 동생들이 먼저 회사생활을 하니까 오빠 학비를 보태 주었죠. 어머니는 겨우 30대셨는데 남편 나가고 어린 자식 셋을 위해 재가(再嫁)하지 않으시고 막일부터 참 많은 일들을 하셨어요. 지금은 현대모비스가 되었는데, 옛날 현대정공에서 잡역부로 일하시면서 퇴근 후에는 사거리에서 포장마차를 해서 교대근무를 나오는 사람들에게 된장찌개를 판 거예요. 그런 것들이 제 대학 학비였고 제가 먹은 밥의 재료였고 그런 거죠. 그게 제가 어머니와 가족에게 진 평생토록 갚을 수 없는 채무입니다.”

청소년기의 상처들이 시인의 심리적·정서적 배경에 깔려 있다면, 대학과 대학원 시기의 ‘학습’은 지적 체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80년대 후반 학번으로서 저도 운동권 학생이라고 봐야겠죠. 분단국가에 산다는 점, 또 독점 자본주의 체제라는 점,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이라는 점, 이런 것들에 대한 저항적 태도로서 지적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일부 저작도 읽어 보고, 주체사상 그런 것들이 막 출판되던 때라 그것도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논리와 논거가 허술하고 우리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무튼 그런 책들을 보면서 지적 배경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적으로는 대학 1~2학년 때 이시영 선생님께서 강의를 하러 오셔서 시가 무엇인지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셨죠. 끊임없이 시를 쓰라고, 어떤 시를 읽어야 한다고, 우리 문단의 선배 시뿐만 아니고 영미(英美) 시들도 적극적으로 소개해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제 시의 은사(恩師)를 이시영 선생님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시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문면으로만 뵙고 감화를 받았지만 유종호 선생님도 시적 스승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선배 시인들, 만해, 소월, 지용, 미당, 백석 등등 많은 분들이 자극을 주셨죠.”

다큐적 보도방식

다시 시로 돌아와 그의 시는 기존에 접하던 시와는 분명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찾자면 대부분의 시들이 대상에 대한 감정을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풀어 가는 데 비해, 그의 시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 그대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려 한다는 점이다. 이종섶 시인은 어느 잡지에서 ‘다큐적 보도방식’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화법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아보았다.

“저도 사실은 미당 선생님이라든지, 청록파 등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선배 시인들, 또 대학교 때 접했던 많은 서정 시인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살아왔어요. 메히아라는 야구선수에 대해 공감하고 시를 쓰게 되면서 조금씩 비유나 묘사로부터 멀어졌지만요. 비유라는 것은 시인의 고유한 관점이나 어법이 대상에 투사되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의 주체적 개입이고 주관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가급적 대상의 정보를 사실대로 전달하되, 제시하는 정보와 팩트 사이에 자연스레 시적 의미가 태동하도록 해 보자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관적 감정 투사가 그 뿌리에 낭만주의적 인간관을 담고 있고, 그것은 이른바 주체적 계몽주의란 점을 생각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인의 주관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대상이 주는 사실관계 속에서 시적 맥락이 발생되도록 해 보고 싶다는 의욕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시집은 비유적 요소를 더욱 배제하고, 의식적으로 1960년대 하드보일드 소설과 같이 좀 더 건조하고 사실의 전달자적 역할에 집중해 볼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가 늘 가지고 다닌다는 회사 수첩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깨알같이 적혀 있는 메모들은 결국 현실에서 반드시 실천하고 만단다. 대학원에 입학하던 1994년부터 지금까지 지켜 오는 일이라는데,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그 모습이 그의 시에 더욱 큰 신뢰를 준다. 그리고 해마다 바뀐다는 그의 수첩에 2015년 또 어떤 다큐멘터리들이 적히게 될지 벌써 궁금해진다.⊙

〈글 길상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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