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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詩

김소연

詩가 발생하는 장소들에 대한 小考

글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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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敍事의 장소가 아름다운 유적지로 자리 잡는 경우 많아… 슬픔이 아름다움이라는 걸 그런
    장소들이 증명
⊙ 가장 지독한 슬픔을 채취해 기록하는 일이 詩의 일. 시의 슬픔은 슬픔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이기도
⊙ 방에서 혼자 아침을 보내고 있는, 별거 없는 그런 때 詩가 내게 찾아와… 단절감으로 휘감긴 장소는
    도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지

金素延
⊙ 47세. 가톨릭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 겨울호로 등단.
⊙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 출간.
⊙ 노작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자주 가던 단골집들은 언제고 반드시 문을 닫았다. 임대료는 높아지는데 가게 주인은 양심적으로 자기 가게의 품목에 가격을 매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망하거나 더 변두리로 이사를 간다. 주인과 안면도 트고 친구들에게 소개도 해 가며 좀 더 자주, 좀 더 많은 이들과 드나들려고 노력을 해도 언제고 반드시 문을 닫았다.
 
  십대 때부터 줄곧 살아왔고 지금도 약속은 거기서 잡곤 하는 홍대 앞도 마찬가지다. 방향감각이 좀 부족한 나는 ‘무슨 가게 모퉁이를 돌면 그 골목’ 하는 식으로 그 장소를 기억하는데, 홍대 앞에선 그 기억법이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가게가 자꾸만 바뀌기 때문이다. 매번 간판이 달라진 골목을 걸으며 생각한다.
 
  ‘아, 옛날에는 이 동네에 카페가 딱 두 군데였는데….’
 
  친구들 집은 다 가게가 되었다. 그 친구들은 어디로 이사를 갔을까. 가끔 반 아이들을 불러모아 라면을 찜통 가득 끓여 주시던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 댁은 마당에 야외 테이블을 내다 놓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되어 있고, 마당에 유실수가 유난히 많아서 그게 참 자랑이었던 내 짝꿍의 집은 옷가게가 되어 있다.
 
  성장기의 이야기들이 녹아 있는 모든 장소는 다 변해 버렸다. 사람이 살던 집들은 모두 영업을 하는 가게가 되어 갔다. 나는 두 겹의 골목을 걷는다. 한 겹은 기억 속의 골목이고 또 한 겹은 변해 버린 지금의 골목이다. 나와 연루된 거의 모든 장소가 그러하다. 고향인 경주에 여행을 가도, 내가 살던 집 마당에는 노래방으로 메워져 있었는데, 그 노래방은 다시 카페가 되어 있다. 같은 장소에 찾아갔지만, 그곳은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럴 때에 나는 기억을 애써 형상으로 제작한다. 희미해졌지만, 아스팔트가 깔린 사거리에 우체통처럼 서서, 코흘리개들이 마구 뛰어다니며 온갖 놀이를 즐기던 골목길을 떠올려 본다.
 
 
  변해 버린 광화문 거리
 
나는 변두리인이다. 그래서 시를 적는다.
  20대의 나는 광화문을 자주 찾았다. 광화문에 가기 위해 망원동 제일약국 앞에서 132번 버스를 탔다. 광화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안국동로터리를 거쳐 정독도서관 쪽으로 걸어가서 인사동 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스터디도 했고, 데이트도 했다. 책도 사고 공책도 샀다. 계절이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물러서는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차를 마시기도 했다. 종로2가에서, 길 건너 종로서점을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렸다.
 
  오늘도 광화문에 갈 일이 있었다. 카메라를 멘 중국인들이 더 많이 활보하고 있는 거리. 세종대왕의 위용이 광화문의 지붕선을 가리고 있는 그 거리. 그곳은 이제 세월호 유가족들이 마지막 간절함을 다해 모여 있는 장소가 됐다. 노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지지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애감과 말로 다하지 못할 가녀린 희망을 함께 감각하는 장소. 제대로 된 애도가 발생되어 제대로 된 인간성을 회복해야만 하는 상징적 장소가 되어 가고 있다. 광화문이라는 장소에 대하여 시를 쓰게 된다면, 내가 알던 시의 그릇이 너무 작을 것이다. 데이트 장소였던 20년 전의 광화문과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노란 리본이 출렁이는 광화문과의 그 간격을 모두 헤아리는 일은 드넓고 가없다. 그에 담긴 이야기의 총량을 가늠하는 일은 목성의 쇼크를 겪는 일과 흡사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지에서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여행지에서 나는 이방인이 된다.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다. 모든 것을 낯설게 감각하기 때문에 내가 나로부터 우선 낯설어진다. 가이드북을 참고하여 카메라를 들고 가장 오래된 장소를 찾아가 구경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 광화문에서 보았던 중국인들처럼 말이다. 관광지를 걷는 한 명의 이방인으로서, 표피적이라면 표피적이라고 해야 할 나의 산책은 어떤 것이 파괴됐고 변해 왔는지 그 동네 사람처럼 잘 알지를 못한다.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옛날 옛날 그 장소가 처음 자리를 잡은 첫 이야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곳을 유적지라고 부르고 그곳의 옛날 이야기를 처음 실감하는 낯선 사람이 될 수 있다.
 
 
  동굴의 도시 괴뢰메에서
 
나는 오래된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모으려 서울 망원동을 비롯해 국내외 여러 재래시장을 들렀다. 지난 봄 어느 날, 일본 도쿄 우에노시장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터키의 괴뢰메는 도착하자마자 내게 감기를 선물해 주었다. 겨우 감기일 뿐이었지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낯선 나라에서 혼자 열이 올라 끙끙 앓는 일은 약간의 두려움을 주었다. 걸어서 갈 거리에 약국은 없었고 병원을 가려면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 외딴 마을이었다. 순전히 내 몸 스스로가 자기 복원력으로 감기를 다 물리칠 수 있을 때까지 잠을 자고 볕을 쬐며 기다려야만 했다.
 
  열이 깨끗하게 사라진 어느 날에, 드디어 유적지를 방문할 수 있게 됐다. 금지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삼백 년이 넘도록 숨어 살던 곳. 거기서 밥을 먹고 자식을 낳으며 기도를 했던 곳.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살던 그곳.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용암이 분출해서 가장 뜨겁고 괴이한 지형으로 변해 버렸던 그곳. 사람들을 은닉해 줄 수 있을 만큼 외졌고 황폐했던 그곳. 그러니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어서 숨어서 사는 것이 가능했던 그곳. 울퉁불퉁하고 하얀 바위산에는 조그맣게 뚫린 구멍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동굴 안에 서서 그 구멍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슬프다고 한다면 한없이 슬프고 위대하다고 한다면 한없이 위대한 그곳을 유적지로 보존하면서, 그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잇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그 장소처럼, 한없이 슬픈 서사의 장소가 한없이 아름다운 유적지로 자리 잡게 되는 일이 많다. 그런 장소들은 슬픔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걸 증명해 낸다. 그런 곳에 도착해 있을 때에 나는 더 시를 믿게 된다. 가장 지독한 슬픔을 채취하여 기록해 두는 일이 시의 일이기 때문이다. 시의 슬픔도 오직 슬픔이 아니다.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여행자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러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시집 《수학자의 아침》에서

 
 
  누군가 SNS로 지금 자기가 사는 동네에 폭설이 내리고 있다며 근사한 눈 사진을 올리고 있고, 누군가 제주도의 강정마을에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누군가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며 병상일기를 블로그에 올린다.
 
  나는 내 방에 앉아 있다. 책상에 앉아 다만 인터넷에 접속했을 뿐이다. 그들의 소식을 접하는 나는 그들에게 전할 안부가 없다. 겨우 아침잠에서 깨어나 커피를 내려 책상 앞에 앉아 봄볕을 창문 바깥으로 내다볼 뿐이다. 하지만, 그런 때에, 그 모든 소식들을 전해 듣는 나를 어떻게든 표현해 두고 싶어져 또 한 편의 시를 쓰게 된다. 다른 장소에서 도착한 안부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는 내가 있는 장소. 각기 다른 장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내가 있는 장소. 장소들은 안부의 힘으로, 서로 격리되지 않고 관여된다. 직접적일 리 없고 가시적일 리 없지만, 그 관여에 관하여 시를 씀으로써 나는 서로 다른 장소들의 관여에 관여한다.
 
 
  그런 것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창문 바깥에서가 아니라 저 멀리 대관령에서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빨래를 널고 창문을 열어두고 바깥에 앉아 볕을 쬐고 있을 때 고양이가 다가와 내 그림자의 테두리를 몇 걸음 걸었고 저쪽에 웅크렸다
 
  ‌꿈에서 일어난 일들이 쏟아져 내렸다 허벅지에 떨어진 동그란 핏방울이었고 그다음 양철 주전자였고 그다음 도살장 옆 미루나무였다
 
  ‌단식을 감행했다 내가 아니라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저 먼 제주도에서
  ‌아침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많이 아팠다 내가 아니라 저 먼 시베리아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가
 
  ‌할머니는 선지를 좋아했고 엄마는 할머니를 좋아했다 나는 심부름을 좋아했다
  ‌자박자박 붉은 물기를 밟으며 도살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한 발씩 한 발씩 서늘해졌다 검은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물들은 걸려 있거나 누워 있었다 질질 끌려 우리집 앞을 지나간 건 어제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쪼그려 앉아 선지를 먹었다 아주 오래전 그 집에서가 아니라 조금 전 꿈속에서
  ‌멀리서 날아온 빈혈들이 할머니의 은수저에 얹혀 있었다 할머니의 은빛 정수리처럼 똬리를 튼 채로
 
  아침은 이런 것이다
  ‌도착한 것들이 날갯죽지를 접을 땐 그림자가 발생한다 바로 거기에서
  ‌나무가 있었다면 새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사람이 아니라 저기 빈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가
 
  - 시집 《수학자의 아침》에서

 
 
  나는 분명 내 방에 혼자 있었고 그저 그런 아침을 보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별거 없는 장소에서의 별거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번번이 별거 없는 그런 때에만 시가 나에게 찾아온다. 별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별거 없는 그런 때에 나는 가장 투명한 육체가 된다. 투명해서 안팎의 이야기들이 제멋대로 드나든다. 어떤 때의 단절감은 감각하는 능력이 가장 먼 곳까지 확장되는 힘으로 작용될 때가 있다.
 
  단절감이 반드시 고립감일 리는 없다. 고립감은 잘못된 연결에 대한 우리의 최종적인 감각일 뿐, 진짜 단절은 아닌 것이다. 차라리 단절의 반대에서 시작되는 작용점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오롯하게 모든 것을 감각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감각될 모든 것을 티끌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게 한다. 포착한 것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최종적인 포착은 우리가 어디에 연루되어 있고 어느 만큼 관여하고 있는지를 감각하게 한다. 이 장소는 도착지가 아니라 출발지가 된다.⊙
 

  詩人이 만난 詩人 김소연 시인께 전하는 편지
 
  “나는 변두리人… 詩를 그래서 적는다”
 
  ⊙ ‌고교 1년 때 학교 앞 서점에서 1500원에 산 詩集. 졸업 때까지 가방에 넣고 다녀
  ⊙ 학생운동 하다 찾아온 혼란. 文學이라는 변두리로 탈출
  ⊙ “상식이 붕괴된 사회에 대한 암담함을 어떻게든 詩로 기록하고 싶어”
 
 
   선생님을 만난 것은 지난 수요일(10/29)이었습니다. 오후 3시에 만나 6시까지 3시간 동안 저로서는 온 힘을 모아 시인 김소연의 입체적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인터뷰에 앞서 준비한 질문은 모두 스무 가지이며, 그 질문들은 상당수 범주가 넓은 것이어서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어느 만큼은 윤곽을 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만남 전후로 시집 4권을 모두 읽었으니 한 시인의 이력과 시적 지향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만남 이후 3일 동안 한 글자도 적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의 다채로운 경험과 예민한 시적 관심을 적절하게 옮길 수단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며칠의 고민과 난독증에 가까운 시집 읽기를 마친 후 이제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앉고 보니 탁 트입니다. ‘시인 김소연이 얘기한 것을 그 진의에 부합하도록 기록하면 된다.’
 
  이대부속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고 했습니다. 김소연 학생은 생일을 맞았지만 그때는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그래서 생일 파티를 할 수 없었다고요. 혼자 하교(下校)를 하다가 ‘내 생일에 나에게 생일 선물을 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화여대 정문 앞에 있는 작은 서점에 들어갔어요. 주머니엔 1500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서점 주인에게 1500원짜리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죠. 서점 주인은 시집들이 빽빽하게 꽂힌 곳으로 나를 데려갔어요. 수많은 시집 중에서 유독 《고통의 축제》(정현종)가 눈에 들어왔죠.”
 
  선생님은 시집의 제목에 매혹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작품들은 너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었다고요.
 
  “뜻은 몰라도 매혹의 강도는 드높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읽고 또 읽었죠. 낮에도 밤에도 잠잘 때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날 이후 《고통의 축제》는 졸업할 때까지 늘 가방에 넣고 다녔고요. 친구들에게 주는 선물도 주로 시집이었고요. 《사랑의 기교》(오규원) 《대설주의보》(최승호) ….”
 
  경주 목장집 큰딸로 태어나 사람보다 소 등에 업혀서 자란, 그래서인지 눈이 소를 닮아 고장 난 조리개처럼 느리게 열리고 닫히는 어린 김소연. 이후 ‘무덤의 도시’를 떠나 서울 망원동으로 이주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도착한 서울에서 3~4년 동안은 서울사람들이 차갑게 느껴졌고 불편했다고요. 사투리를 쓴다고 반 아이들이 놀려서 학교에선 벙어리로 지낸 적도 있었지요. 우기(雨期) 때마다 입은 비 피해가 어린 정신에 우울의 물때를 남기던 나날, 어린 김소연은 집에서 서울 말 연습을 했습니다. 서울 애들의 깍쟁이 같은 말투가 싫었지만 녹음기까지 동원해 연습을 했다고 했습니다. 고향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는 5~6장은 족히 채웠지요. 벙어리에게도 언어의 곳간은 넘치게 차올라 그렇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고 또 편지를 쓰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몸은 서울로 이사를 왔지만 마음은 경주의 논밭을 함께 뛰어 놀던 아이들 곁에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소 등에 업혀 살던 김소연은 망원동의 주변인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한 셈입니다.

 
 
2012년 여름날, 터키 카파도키아 괴뢰메에 2주간 머물렀다. 괴뢰메는 박해를 피해 암벽을 파고 은거했던 초기 기독교인의 유적이 남아 있는 성지(聖地)다. 발길 닿는 대로 간 여행지는 나에게 생(生)의 젊음을 주곤 한다.
  “도서 대출카드 첫 칸에 이름 쓰는 걸 좀 즐겼다”는 국문과 김소연 학생은 도서관을 즐겨 찾았다. 그러고는 대출카드가 텅 비어 있기 일쑤였던 시집들을 섭렵했다. 그렇다고 문예 동아리에 들지는 않았다. 시를 좋아하긴 했지만 시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리타분하거나 오그라드는 어떤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86학번 김소연 학생은 또래 대학생들이 대개 그렇듯 전공 학습보다는 거리의 공부에 더 익숙했다. 그렇다고 시위를 조직하고 후배들을 학습시키고 이끌어 가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쩌면 주변의 주변, 변두리의 변두리였는지 모른다. 현장의 단선적 구호를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한 개인의 선의도 끊임없이 반성하고 회의하는 한 개인에겐 번뇌를 배가하는 장소였다.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계속 두려움에 떨며 고백을 하는 <시편>의 다윗처럼.
 
  “무척 혼란스러웠다”는 대학생 김소연. 몸은 시위 현장에 함께 있었어도 생각이 완전히 일치된 건 아니었다. 번뇌하고 흔들리고 의심하던 김소연은 대학 3학년 때 동인(同人)을 결성해 문학이라는 변두리로 탈출했다. <투시와 반영>이란 동인지를 냈다. 그로부터 5년 후 김소연 학생은 시인으로 등단했다.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다가와 편지를 건네주고 갔어요. 봉투를 열어 보니 그 안에 시가 씌어 있었어요. 그 친구가 쓴 시였는데, 부제로 ‘소연에게’라고 쓰여 있었어요. 헌시를 받게 된 거죠.”
 
 
  대학 3학년 때 선생님께 헌시(獻詩)를 보내 준 그 친구를 기억하시겠지요. 답장을 아무리 써 보아도 시원치가 않아 결국 시에는 시로써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셨지요.
 
  “그게 자발적으로 처음 써 본 시였어요.”
 
  친구의 진실한 마음에 대한 화답의 형식으로 시를 택하신 건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생애 최초로 쓴 김소연 학생의 그 시는 그해 가톨릭대학 학내 문학상 당선작이 되었지요. 참 특별한 시작입니다. 그때부터 선생님께서는 본격적으로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마음을 먹고 습작(習作)을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김소연 시인,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 겨울호에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와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이 있다.
 
 
  이상은 선생님의 네 번째 시집 《수학자의 아침》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폐간되어 나오지 않는 《현대시사상》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소논문들이 자주 소개되어 그 자료들을 읽어 보고 싶어서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투고를 해 보았다고 했습니다.
 
 
  김소연 시인은 그해 겨울에 신춘문예 특집이 실려 있는 신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조선일보》를 펼치는데, ‘심보선’ 세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망원동의 그 아이? 내 동생과 한 반이었던 그 친구? 맞았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심보선은 그의 동네 후배였다. 바로 전화를 했다. 그때부터 김연수(그때까지 시를 썼음), 심보선과 한동안 정기적으로 만나 시에 대해 토론하며 지냈다. 심보선 시인과는 ‘21세기 전망 동인’에도 함께 참여했다. 함민복 유하 허수경 함성호 박용하 차창룡 등의 시인들이 참여하던 동인이었다. 거의 매일 이들과 만났다. 시인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 선배들을 통해 처음 제대로 알게 됐다. 시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대화하느라 만날 때마다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시가 되기 때문에 내 삶에 대해 더 많이 고민을 합니다.”
 
  저는 인터뷰 당일 ‘시력 21년, 시의 화두’는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삶이 곧 시가 되게 하기 위해 삶과 시를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고요. 그래서 삶과 시에 대하여 동시에 긴장하며 살고 있다고요. 화두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그날 유난히 변두리인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시’라는 옷을 입고 살다가 벌거벗겨진 느낌에 사로잡혀 있어요. 변두리인으로서 저는 시가 비루해서 좋았어요. 비루하지만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시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비루하지도 않고 성스럽지도 않게 다가와요. 시는 무엇인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고 있어요.”
 
  선생님, 그날 선생님께선 질문 스무 가지가 적힌 저의 질문지를 마주 앉아서 보셨지요? 거기 16번째 질문은 세월호 참사, 평택 쌍용차 해고노동자 문제, 제주 강정마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경주 방폐장,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용산 참사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가진 생각을 여쭙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먼저 ‘현실 참여’란 용어를 안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문제’라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지요.
 
  “사람들은 흔히 윤리라고 말하지만, 저는 윤리라고 말할 것도 없고 단지 상식의 문제로 파악할 때가 더 많습니다.”
 
  상식이냐 몰상식이냐가 기준이라는 말씀은 오늘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점이며 상식이 붕괴된 상황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인권, 그리고 복지, 안전 시스템이 없는 우리 사회가 암담하다고 했지요. 동의합니다. “이윤학 시인의 시집 제목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처럼 본능적인 행동이고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의 곁에 어떻게든 있어야겠기에 ‘304낭독회’에 참여 중이라고 했습니다.

 
 
  시인이 쓴 에세이에 따르면, ‘가장 지독한 슬픔을 채취하여 기록해 두는 일이 시의 일이며, 그럼으로써 시는 아름다움이 깃든 장소가 될 수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터키의 괴뢰메 같은 곳에 가면, 슬픔이나 재앙을 거친다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편집자 注: 터키 카파도키아의 괴뢰메는 박해를 피해 암벽을 파고 은거했던 초기 기독교인의 유적이 남아 있는 聖地)
 
  “시를 위엄 있고 거룩한 거라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를 만만하게 친근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샤워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듯, 누구나 아무 때에 시를 읽고 썼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김소연 시인이 독자를 향해 마지막 남긴 말은 ‘누구나의 시를 위하여’였다.⊙
 
  〈글 김재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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