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h혈액형 발견한 위너 교수와 CL혈액형 발견… 동물실험 마쳤다면 노벨상 수상했을 수도
⊙ 은퇴 후 법의학과 예술 가교 역할… 세계 처음으로 ‘법의탐적학’ 분야 새로 개척 중
⊙ 황적준, 박의우, 강신몽 교수 등 1세대 제자들 키워… 2013년 문 교수의 아호를 딴 ‘도상법의학상’
제정
文國鎭
⊙ 89세. 서울대의대 졸업. 서울대대학원 의학박사, 미 컬럼비아퍼시픽대대학원 법학박사.
⊙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고려대 법의학 교수, 미국 뉴욕대 법의학 객원교수,
대한법의학회회장 역임.
⊙ 저서: 《최신법의학》 《지상아》 《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
《美しき死體のサラン》 등 총 51권.
⊙ 상훈: 제1회 고려대 학술상, 대한민국 학술원상, 제9회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 現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고려대 명예교수, 일본 배상과학회 및
한국배상의학회 고문, 국과수 자문위원.
⊙ 은퇴 후 법의학과 예술 가교 역할… 세계 처음으로 ‘법의탐적학’ 분야 새로 개척 중
⊙ 황적준, 박의우, 강신몽 교수 등 1세대 제자들 키워… 2013년 문 교수의 아호를 딴 ‘도상법의학상’
제정
文國鎭
⊙ 89세. 서울대의대 졸업. 서울대대학원 의학박사, 미 컬럼비아퍼시픽대대학원 법학박사.
⊙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 고려대 법의학 교수, 미국 뉴욕대 법의학 객원교수,
대한법의학회회장 역임.
⊙ 저서: 《최신법의학》 《지상아》 《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
《美しき死體のサラン》 등 총 51권.
⊙ 상훈: 제1회 고려대 학술상, 대한민국 학술원상, 제9회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 現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고려대 명예교수, 일본 배상과학회 및
한국배상의학회 고문, 국과수 자문위원.
1970년 문국진(文國鎭)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은 15년간 근무한 국과수를 떠나 고려대로 자리를 옮겼다. 모든 변사체의 부검을 국과수에서 전담해서는 한국 법의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고,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해야겠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해 그는 전 세계 법의관들이 선망하는 뉴욕대 의대 법의학교실로 1년6개월간 연수를 떠났다.
뉴욕대 의대 법의학교실엔 당대의 법의학계 석학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법의병리학자로는 찰스 노리스(Charles Norris), 토머스 곤잘레스(Thomas A. Gonzales), 밀턴 헬펀(Milton Helpern) 등이 있었고, 법의혈청학자로는 알렉산더 위너(Alexander S. Wiener), 독물학자로는 알렉산더 게틀러(Alexander Gettler)가 법의학교실을 이끌고 있었다.
문 교수는 그곳에서 선진 시스템을 눈으로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문 교수는 뉴욕의 법의관이 경찰과 함께 변사 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검시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뉴욕은 뉴욕시의 독립기구로 법의관 사무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법의관을 ME(Medical Examiner)라고 부른다. 187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시작한 ME 제도는 1917년 뉴욕주에서 검시(檢屍)의 모든 과정을 법의학 지식과 경험이 있는 법의관 한 사람에게 전담시키는 제도로 발전했다.
문 교수는 “뉴욕대학 법의학교실이 세계의 법의학을 이끈 배경에는 법의학교실 주임교수를 뉴욕시 부시장으로 파격 대우하면서 위상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라며 “세계 어느 대학 연구소도 흉내 낼 수 없는 큰 규모에다, 뉴욕시에서 발생하는 ‘법의관 케이스(법의관에게 보고되는 살인사건이나 변사체)’ 가운데 하루 50건 이상을 18대의 부검대에서 처리하는 등 기능이나 작업량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했다.
“너희는 白丁 같다”
—현장에서 느낀 미국의 ME제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18대의 부검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법의관들이 변사체와 씨름을 합니다. 또 부검실 밖에서는 의사들이 장기(臟器)를 담을 용기를 들고 호출을 기다리는 진풍경을 연출합니다. 법의관들은 부검 때 조직검사와 독물검사를 위한 샘플을 여유 있게 채취하거든요. 예컨대 법의관이 ‘리버(liver·간)’라고 소리치면, 간을 구하려는 의사가 잽싸게 용기를 들이댑니다. 부검실은 이런 식으로 사건 해결뿐만 아니라 의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부검과 미국의 부검은 차이가 있던가요.
“귀국할 때 뉴욕의대 교수들이 ‘미국의 법의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너희는 백정 같다’고 했습니다. 미국 법의관들은 부검 하나를 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합니다. 그렇다 보니 하루에 변사체 서너 구를 처리하고 나면 기진맥진해서 연구할 엄두를 못 내요.
한국에선 사진사 한 사람에 두 사람의 조수가 도와가며 부검을 하는데, 미국의 법의관은 사진을 찍어가며 혼자 합니다. 게다가 법의관이 부검을 하면서 판단 내용을 녹음하는데, 이게 외국 의사들에게는 심한 스트레스입니다. 하지만 긴급을 요하는 사건일 때는 이들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하더군요.”
—예를 든다면요.
“뺑소니차가 보행자를 치고 달아난 사건 현장에 갔습니다. 법의관이 직접 옷을 벗기고 상처를 확인하고 경찰관에게 무전으로 뭔가를 열심히 알려줬습니다. 자동차에 치였다면 대개 3차 손상을 입어요. 1차 손상은 자동차 범퍼에 다리 쪽 손상을 입고, 2차 손상은 범퍼 앞쪽, 앞유리, 와이퍼 등과 충돌해서 생기죠. 그리고 3차로 땅으로 던져지는데, 이때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흙이 몸에 묻게 됩니다.
미국인 법의관은 변사자의 충돌 위치를 측정해 데이터로 금방 차종을 확인하더니, ‘우측 전조등에 피가 묻은 차량은 모조리 끌고 오라’고 고속도로 순찰대에 무전으로 전파하더군요. 법의관사무소로 시체를 들여와 부검을 진행하고 최종 사인을 ‘장기파열’로 가려낼 때쯤, 경찰차 경적소리가 나면서 뺑소니 용의자를 붙잡아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법의관이 사체의 피와 전조등에 묻은 피를 대조하자, 뺑소니 운전자가 고개를 푹 떨구더군요.”
문 교수는 “뉴욕은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에 법의관이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모든 권한이 ME에게 집중돼 있었다”며 “‘ME 라인’이 쳐 있으면, 대통령이라고 해도 차를 돌려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미국에서 ME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국가 단위의 법의학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ME가 되려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리전문의 자격을 딴 다음, 법의관사무실에서 2년간 전문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을 이수한 의사들은 ‘법의전문의’ 시험을 치르고, 국가는 이 시험을 통과해야 ‘메디컬 이그재미너(ME)’라는 라이선스를 줍니다. ME가 되면 모든 변사(變死)에 대해 경찰이나 검찰보다 앞서 변사체에 대한 보고를 받고 부검을 거쳐 법적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 법의학자 헬펀 교수 초청으로 渡美
문 교수는 1970년 무렵, 요코하마에서 열린 미일공동법의학회에서 “익사체에서 플랑크톤 확인을 통해 익사(溺死) 장소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법의학자들은 표류한 시체의 장기 가운데 혈액, 간, 신장, 골수 등에서 플랑크톤이 검출되면 익사한 것으로 본다.
플랑크톤이라는 단세포 생물은 지구상의 어떤 물에도 존재한다. 플랑크톤은 강물의 위치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 종류와 숫자가 다르다. 따라서 표류한 시체의 장기에서 어떤 종류의 플랑크톤이 얼마나 많이 검출되느냐에 따라 물에 빠진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문 교수는 국가대표 수영선수들을 상대로 몇 명을 체중별로 나눠 각각 다른 높이에서 물속에 뛰어들게 했다. 그랬더니 체중(40~80kg)이나 자세, 또 떨어진 높이에 상관없이 수면에서 355cm보다 더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익사하는 과정에서 마실 수 있는 물의 범위는 수면에서 물속 350cm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플랑크톤의 숫자나 종류에 있어 수면층(水面層)과 중간층(中間層)은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수저층(水底層)은 세 배나 그 숫자가 많았다. 수심이 350cm 이내인 강물에 빠진 익사체의 입수 장소를 정확히 가려내야 할 경우에는 대조수(對照水)를 수면이나 중간층에서만 채취할 것이 아니라, 수저층에서도 채취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문 교수의 발표를 일본의 미일법의학회에 참석해 인상 깊게 들은 밀턴 헬펀 뉴욕대 의대 교수는 “뉴욕 허드슨강에 익사체가 많이 떠오르는데, 도움을 받고 싶다”며 “객원교수로 초빙할 테니 뉴욕대에 와서 연구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제의했다.
문 교수는 “헬펀 교수가 미국의 외국 의학생 자격심사시험(ECFMG)만 통과하면 법의관으로 부검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며 “그 때문에 ECFMG 자격을 얻기 위해 미국의사시험(USMLE) 3단계를 패스하느라 무척이나 고생했다”고 했다. ECFMG는 외국의사들이 미국 내 인턴이나 전문의, 펠로십 등으로 미국 병원 내에서 환자를 볼 수 있게 자격을 주는 의사면허다.
1973년 문 교수는 뉴욕대에서 연수하면서 그 대학 법의혈청학자 알렉산더 솔로몬 위너 박사와도 만난다. 위너 박사는 1901년 ABO 혈액형을 발견한 오스트리아 출신 생리학자 카를 란드스타이너의 제자로서, Rh형 혈액형을 발견한 세계적인 혈청학자다. 위너 박사는 1940년 적혈구에 벵골원숭이(Rhesus)와 같은 혈액형 인자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연구해 벵골원숭이의 이름을 따서 Rh혈액형 체계를 발표했다.
Rh혈액형 발견자 위너 교수와의 만남
문 교수는 뉴욕대로 가기 전 그의 스승 후루하타 다네모토(古畑種基) 도쿄대 교수로부터 “식물 응집소(凝集素·적혈구, 세균 따위의 응집원과 응집 반응을 일으키는 항체)에 대해 연구해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후루하타 교수도 위너 박사처럼 ABO식 혈액형에서 서브 그룹에 해당하는 A1, A2혈액형 가운데 A1형을 발견한 사람이다.
“국과수 법의관 시절, 후루하타 교수와 미일공동법의학회에서 만났을 때, 그분이 ‘국과수 직원들과 함께 들로 다니며 풀을 뜯고 꽃을 키워 식물 응집소를 연구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혈액형 물질이 식물에도 존재하는데, 일본의 들에서는 식물 응집소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10여 명의 국과수 직원들과 함께 야외식물 2000여 점을 분석해 보니 정말로 응집소에 해당하는 물질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혈액형으로 밝혀질 정도까지 분석을 했는데, 그만 후루하타 교수님이 이듬해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아쉬움이 있던 차에 뉴욕에 갔더니 위너 교수가 운명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문 교수의 말이 이어진다.
“이름만 들었던 위너 교수가 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죠. 위너 교수의 비서에게 ‘한국에서 식물 응집소를 연구해 개똥나무(누리장나무)에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은 혈액형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위너 교수가 ‘그 데이터를 한국에서 당장 가져올 수 있느냐’고 했고, 난 ‘그렇다’고 했습니다.
제스처가 멋진 위너 교수는 나와 공동연구를 하는 헬펀 교수(부시장급 수석법의관)의 선배라는 지위를 이용해 부검장에 내려와 ‘닥터 문을 모시러 왔다’며 부검이 끝나기를 기다려 나를 납치하듯 자신의 연구실로 데려갔습니다. 부검장의 스태프들이 ‘코리아’에서 온 무명의 노랑이 사내를 자기네 원로 교수가 환대하는 것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더군요.”
문국진 교수는 새로운 혈액형인 CL형을 발견하고 위너 박사를 공동 연구자로 해 1976년 국제학회에 논문을 발표했다. 혈액형을 감별하는 방법은 12가지에 이른다. 그러나 체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ABO식 혈액형뿐이었다. 그런데 문 교수가 발견한 CL혈액형도 침이나 땀, 정액, 콧물, 눈물, 대소변을 통해 감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백혈구형 혈액형이 나오고, 유전자형 혈액형이 나오면서, ‘적혈구형 혈액형’ 시대는 저물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당시 임상연구만 이뤄졌다면 노벨상 수상에 가까웠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CL형 혈액도 CL±형이 있다. CL이란 한국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리장나무의 학명인 ‘클레로덴드룸 트리코토뭄(Clerodendrum trichotomum)’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이 누리장나무 씨앗에서 추출한 응집소를 사람의 피에 넣었을 때, 응집되면 CL+형, 응집이 되지 않으면 CL-형이다. 문 교수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대한민국 학술원 종신회원이 됐다.
“위너 박사가 한국의 누리장만 응집소 성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습니다. 전문용어로 ‘지역성(local specificity)’을 띠는 거죠. 그래서 한국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인가 봅니다. 혈액형 연구하느라 6개월 더 머무는 바람에 2년간 뉴욕대 의대에 객원교수로 근무한 겁니다.
귀국하기 전 그분의 별장에서 식사를 하면서 위너 박사가 ‘닥터 문, 누리장 종자를 내 별장 주변에 심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흔쾌히 승낙하고 그분과 함께 별장에 누리장을 가득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위너 교수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위너 교수는 당신의 백혈병 치료를 위해 누리장을 심었던 것이죠. 지금도 위너 교수 별장 주변에는 누리장이 검푸른 열매와 함께 눈부신 꽃들을 피우고 있을 겁니다.”
사람 대신 책을 부검하다
195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창립멤버인 문 박사는 1990년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부검을 계속하고 있다. 다만, 부검의 대상을 사람에서 책이나 그림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이른바 북오톱시(Book Autopsy)다. 세계적인 문호나 예술가의 사인과 작품을 의학적 관점에서 규명하고 해석하는 ‘법의탐적학(法醫探跡學·Medicolegal Pursuitgraphy)’이다.
그의 서울 여의도 자택에는 40년 넘게 유럽미술관 곳곳을 다니며 모아온 도록(圖錄) 100여 권이 있다. 문 교수는 “1960년대부터 외국 학술대회에 나갈 때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미술관은 꼭 찾아다녔다”며 “신문을 읽다 보면 어떤 음악가들은 사인이 일곱 가지나 되는 경우를 보고, 그 사람에 대한 책을 수집해서 시체를 해부하는 식으로 책을 부검해 사인을 밝히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문 교수는 “법의학 지식을 갖고 그림을 보면, ‘이 기가 막힌 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하고 생각이 든다”면서 “젊을 때 의학을 하면서 예술가들을 ‘딴따라’라고 했는데,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니 이것이 인간이 해야 할 분야지, 의학은 시시하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문 교수가 처음으로 북오톱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러시아 음악가 차이콥스키(P.I. Tchaikovsky·1840~1893)였다. 러시아 정부는 그가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문 교수가 차이콥스키의 북오톱시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했다.
문 교수는 차이콥스키 문헌 40여 권을 입수해 분석에 들어갔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된 ‘비창’의 초연을 지휘하고 나서 9일째 되는 날인 1893년 11월 6일 사망했다. 그가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것이 러시아 정부의 공식 발표였다. 차이콥스키가 콜레라에 감염된 것은 11월 1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텔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그대로 마신 것이 원인으로 돼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사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의 자살설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작곡한 ‘비창’에 대한 반응이 시원치 않은 것에 대해 차이콥스키가 낙담했다는 것이다. 그가 일종의 강요된 자살을 했다는 설도 나왔다. 차이콥스키박물관의 기록보관소에 근무하던 한 여직원이 발설한 것이다. 문 교수는 이 여직원에 주목했다고 한다.
차이콥스키 毒殺 처음으로 밝혀
그는 1940년 차이콥스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기념행사를 준비하다 한 통의 이상한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주치의가 차이콥스키의 동생에게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필요 이상으로 상세하고 세밀하게 설명하면서 병사(病死)임을 납득시키려는 편지였다.
그러나 문 교수는 콜레라의 증상에 주목했다. 콜레라는 전염병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의하면 차이콥스키는 격리되지도 않았고, 면회가 자유로웠으며, 특히 그가 사망한 후에 조문객들이 줄을 지어 그의 손이나 이마에 입맞춤하는 것이 허용됐다는 것이다.
여직원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차이콥스키가 당시 권문세가(權門勢家)였던 스텐보크 훼르모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당시 극형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였던 동성애를 저지른 사실이 밝혀지자, 훼르모 공작은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처벌해 줄 것을 진정했고, 황제는 처벌을 당시 검찰부총장이던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야코비에게 명령했다는 것이다.
야코비 부총장은 실은 차이콥스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 1회 동기생이었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대법관,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동기생 7명을 모아 상의했고, “차이콥스키 같은 유명한 음악가를 누명을 씌워 죽일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결국 동기생인 차이콥스키에게 사형이나 시베리아 유형(流刑)보다 ‘명예재판’을 열어 비밀리에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문 교수의 설명이다.
“차이콥스키는 동기들 앞에서 순순히 사약을 받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는 콜레라의 주요한 증상 가운데 하나인 쌀뜨물과 같은 설사(water stool)를 했다고 병상일지(病床日誌)에 나오는데, 과연 그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독물이 있는가가 문제였습니다. 법의학에서 주로 무색·무취·무미한 특성을 갖고 있어, 독살에 주로 사용하는 비소(砒素)를 적당량 복용할 경우 콜레라와 똑같은 증상을 보인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정부는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발표하기에 앞서 상당한 의학적 검토를 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문 교수는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규명하면서 용기백배 힘을 얻었다. 그는 2009년 2월부터 ‘음악, 법의학자를 만나다’라는 시리즈 음악 콘서트를 통해 차이콥스키(비소 독살), 베토벤(알코올성 간경변증), 모차르트(수은중독설), 슈베르트(매독) 등의 질병과 사인을 분석했다.
그는 “당시 음악회에서 니르바나 솔리스트 앙상블과 바리톤 김재일씨가 슈베르트의 주옥같은 5중주곡 ‘송어’, 가곡 ‘마왕’ 등을 연주하는 가운데, ‘슈베르트 만년의 걸작들은 그의 뇌를 침범한 매독균의 활동에 힘입어 탄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설을 하니 관객들이 놀라더라”고 했다.
“18~19세기 한때는 유럽 인구의 15%가 매독환자였죠. 매독이 3기에 이르러 균이 대뇌에 침범하면, 처음엔 불가사의하게도 의식이 명료해지며, 정서적인 극치감이나 천재적인 창의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병마가 한 인간에게 유익할 수만은 없죠. 실의에 빠진 젊은이를 그린 연가곡 ‘겨울 나그네’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 병마와 싸운 처절한 절규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毒酒 즐긴 고흐, 노란색에 집착
2002년부터 문국진 교수는 음악가보다 명화(名畫)를 중심으로 화가의 삶에 대한 연구로 전환한다. 의학과 예술의 만남을 다룬 서적을 2002년 《명화와 의학의 만남》을 시작으로, 《반 고흐 죽음의 비밀》 《명화로 보는 사건》 《미술과 범죄》 《예술작품의 후각적 감상》 《법의학자의 눈으로 본 그림 속 나체》 《모차르트의 귀》 《법의학이 찾아내는 그림 속 사람의 권리》 등 30권이 넘는 책을 잇달아 펴냈다. 관록 있는 법의학자의 시선으로 그림의 미학 너머의 숨은 사연과 내막을 파헤친 것이다.
문 교수는 “고대 동굴의 벽화를 보면 의학과 미술은 한곳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태고적 인간이 동굴에서 수렵생활 할 때 주술(呪術)과 기원(祈願)이 함께 이뤄졌고, 주술이 ‘의학’이라면 기원은 곧 ‘미술’인 것”이라고 했다.
정확한 사실이 규명되지 않은 수많은 미스터리를 가설과 근거를 나열한 뒤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직접적인 사인을 찾는 작업이었다.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정말 살리에르였을까? 고흐의 자살에 사용된 권총을 가져다 놓은 것이 과연 고갱이었을까? 베토벤의 진짜 사인은?…. 문 교수가 거실 벽에 걸린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고흐를 가장 좋아합니다. 고흐는 압생트라는 독주(毒酒)에 중독되면 노란색이 잘 보인다는 걸 알고는 이 술에 절어 지냈습니다. 원래 프랑스 의사가 환자치료용으로 처방한 것이 주류업체로 흘러들어가 ‘악마의 술’로 둔갑했습니다. 당시 수많은 예술가가 오후 5시 정도만 되면 삼삼오오 모여 압생트를 즐겼습니다. 그는 이 때문에 황시증(黃視症·xanthopia)에 시달렸습니다. 노란색에 집착하는 병이지요.
이것은 그를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기기묘묘한 노랑과 파랑조의 찬란한 빛에 가득 취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불후의 명작 <해바라기>도 압생트 중독의 결과였지요. 고흐는 또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다행히 ‘레이’라는 좋은 레지던트 의사를 만나게 되는데, 사후에 명작이 된 <의사 레이의 초상>도 이때 탄생한 겁니다. 화가들은 천재성과 예리한 감수성도 있지만,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무서운 집착이 있습니다. 주위의 도덕적 좌표와는 상관없이 화가는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책만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으로 사인을 밝힌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요.
“(문 교수가 기자를 정색하듯 쳐다보며) 가능하니까 시작한 것 아니겠소! 유명한 예술가들의 경우에는 진료 기록도 많이 남아 있고, 또 전기 작가들이 그들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해서 기록을 남기니까요. 당시는 법의학적 지식이 부족해 사인을 밝히지 못했더라도 문헌적 ‘증거’는 많다고요. 지금도 외국에 나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서 예술가의 현지 박물관과 동네 화랑까지 들러 자료를 꼼꼼하게 수집하죠. 그다음, 작품 속에 나타난 화가의 능력, 기술, 문화적 상황 등을 살피죠.”
—퇴임 후 법의학과 예술을 연결시키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학생이나 현역들에게는 정열을 갖고 자기 일에 미치라고 하고, 정년에 가까운 후배들에게는 이모작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한 학문을 마스터한 후 다른 분야를 접하면, 그쪽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의학은 실험을 하지 못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정년퇴임을 하고 나니 실험할 대상이 없잖아요.
시체를 부검해 사인을 알아내는 것처럼 책을 갖고 부검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 좋게도 ‘법의탐적학’을 하는 의사가 전 세계에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씨를 뿌리고 가야 할 분야라고 믿습니다.”
고야의 ‘마하’ 주인공, 200년의 미스터리
스페인의 거장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가 그린 <벌거벗은 마하(Naked Maja)>의 실제 주인공은 누구인가? 역사 속에서 종교재판까지 불러일으켰던 이 그림은 1945년 유골 감정까지 했지만, 지금껏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문 교수는 2012년 10월 26일 충남대의대에서 개최된 제36차 법의학회 학술대회에서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됐던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 교수는 마하의 실제모델은 지금까지 알려졌던 알바 공작부인이 아니라, 당시 최고 세력가인 재상 고도이의 정부였던 페피타 츠도우라고 밝혔다.
논란의 출발은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야는 <벌거벗은 마하>(1800), <옷을 입은 마하>(1805) 두 작품에서 ‘마하’를 그렸다. 그러나 벌거벗은 마하가 문제가 됐다. 가톨릭국가였던 스페인의 사회상과 맞물려 고야는 이단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모델로 거론된 한 사람은 스페인 최고의 명문 귀족부인이며, 다른 한 사람은 거리의 여인이었다. 재판과정에서 고야는 끝내 모델의 신분을 함구하고 ‘마하’(스페인어로 함부로 자란 시골처녀를 뜻함)라고만 밝힌다.
이때부터 실제모델의 신원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다. 고야와 알바 공작부인이 연인관계로 알려지면서 ‘마하’는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해졌다. 한편에서는 당시 실권자였던 재상 마누엘 고도이의 애인이었던 페피타 츠도우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 그림이 고도이의 누드 컬렉션에 포함돼 있다가 후세에 알려졌고, 이 작품의 최종 소장자였기 때문이다. 호색한이었던 고도이가 애인의 누드화를 거실에 걸어놓고 즐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야 사망 후 연인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알바 공작부인상>(1797)이 20년 만에 세상에 나오면서 논란의 중심은 다시 알바 공작부인으로 옮겨졌다. 고야가 끝까지 이 그림을 간직했던 점도 한몫했고, 알바 부인은 ‘알바 고야(Alba Goya)’란 반지를 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집게손가락이 모래 위에 새겨놓은 ‘오직 고야뿐(Solo Goya)’이라는 글씨를 가리키고 있었다.
결국 스페인의 명문가인 알바 가문은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1945년 공작부인 유골을 발굴해 법의학자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때 군인들이 보물을 약탈하면서 유골을 훼손해 정확한 감정을 할 수 없었고, 오히려 마하는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검시관들의 뒷얘기만 떠돌게 됐다. 이 논란은 고야의 유명세에 힘입어 세계적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문 교수는 고야가 그린 ‘마하’와 알바 공작부인 초상화, 로페즈가 그린 페피타 츠도우 그림을 대상으로 생체정보연구팀의 도움을 받아 얼굴 부분의 생체정보적 분석을 했다.
분석 대상 그림 가운데 얼굴의 생체정보적 분석을 위해 촬영 각도가 유사한 얼굴을 선택해 3차원 얼굴형상으로 복원했으며, 복원한 얼굴을 모두 정면으로 회전해 랜드마크 비교검사·얼굴계측지수 비교검사·얼굴인식프로그램 비교검사를 시행한 결과, 페피타가 알바 부인보다 마하와의 유사성이 높게 나타났다.
특히 중첩 비교검사 결과에서는 마하의 얼굴이 페피타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 결과가 신뢰성을 높이는 것은 알바 부인 초상화는 고야가 그린 것이지만 마하와 유사점이 없는 데 반해, 페피타의 그림은 다른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고야가 그린 마하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문국진 교수는 “늦게나마 마하의 실제 주인공이 알바 부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져 다행”이라며 “200여 년간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시달린 알바 가문이 이제나마 떳떳해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마하’의 신원에 관한 논란을 법의탐적학적인 접근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밧세바의 ‘공포배란’
문국진 교수는 성경(聖經) 스토리를 배경으로 한 명화에도 주목했다. 유대의 왕 다윗이 부하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에 반해 궁으로 불러들여 겁탈하고 아내로 삼는 대목이다. 한 나라의 통치자이며 군 통수권자인 유부남이 유부녀를 탐내 그 남편인 장수 ‘우리야’를 최전방 전장으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류 최초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殺人)’이다. 솔로몬의 어머니이자 다윗왕의 아내인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모습은 유명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다.
“중세시대에는 마녀사냥을 포함해 여자의 개성과 특성은 음험하고 미천한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습니다. 밧세바도 화가 장 레옹 제롬(1824~1904)에 의해 천하의 요부(妖婦)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정말 밧세바가 요부 또는 팜므파탈(femme fatale)인가, 아니면 운명에 순응한 비극의 여인인가를 판단하기 위해 ‘다윗의 도성(The city of David)’ 전망대에 올라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도성에서 밧세바의 주택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기드론 골짜기(Kidron Valley)는 수백 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다윗이 망원경도 없이 먼 거리의 여인을 보고 한눈에 반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양치기 출신이라 시력이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지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왜 밧세바가 그날 저녁 목욕을 하게 됐느냐는 것이지요. 율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달거리가 끝나면 몸이 부정하게 되니 정결례(淨潔禮)로 몸을 씻어야 했다는 겁니다. 사실 밧세바는 월경을 막 마친 후였고, 율법대로 부정함을 씻기 위해 정결례로 목욕을 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몸을 깨끗이 하거나 왕을 유혹하기 위해 목욕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밧세바를 요부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단 한 번의 관계로 임신이 가능했을까요.
“아마도 밧세바는 막 월경이 끝났기 때문에 임신은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을 겁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공포배란(恐怖排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밧세바가 다윗왕과의 육체적 관계에서 무언가 공포와 불안을 느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공포배란으로 임신이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공포배란이 뭔가요.
“말 그대로 공포를 느끼면 배란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단 한 번의 성교로 임신이 가능한가의 문제는 강간사건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동물은 배란 형태가 각기 달라요. 야생 토끼나 낙타는 수컷이 교미 동작을 취해야만 배란이 되고, 평소에는 배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숭이처럼 공포를 느껴야 비로소 배란이 되는 동물도 있어요. 그 때문에 수컷 원숭이는 교미 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암컷이 안고 있는 새끼를 빼앗아 던지고 때려 새끼 원숭이가 비명을 지르게 합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 암컷 원숭이는 배란이 되고 발정해 교미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 교수는 “이러한 ‘공포배란’ 현상이 사람에게도 나타나고, 특히 강간과 같이 공포 분위기에서 배란이 되는 여성이 있다”며 “단 한 번의 강간으로 임신이 됐다는 케이스는 종종 법정에서 판사들에게 증언해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예수의 심장은 오른쪽?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는 그림인 책형도(磔刑圖)도 문 교수의 관심을 끌었는가 보다. 그는 1300년대 작품인 조토(1267~1337)의 <십자가의 예수>나 1400년대 작품인 조반니 벨리니(1430~1516)의 <피에타>의 가슴의 상처가 한결같이 오른쪽에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대 최고로 훈련받은 로마 병사가 치명상을 목적으로 예수의 오른쪽에서 창으로 찌른 것이다.
“통상 심장은 왼쪽에 있어 이곳을 창으로 찌르면 한번에 많은 피가 쏟아져 나와 급사(急死)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른쪽 가슴에는 폐만 있기 때문에 굵은 혈관이 찔리지 않는 한, 출혈은 왼쪽보다 훨씬 적고 동시에 죽는 시간도 한참 늦을 겁니다. 그러나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즉 내장역위증(內臟逆位症·Situs inversus)이라고 내부 장기의 일부 또는 전부가 반대에 위치한 기형입니다. 특히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기형을 우흉심(右胸心)이라고 해요. 내장역위증은 대체로 유전되고, 어떤 경우에는 내장역위증이라는 것을 평생 모르고 살다 사후 부검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이름난 많은 화가의 단골 소재였다.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피에타>에는 예수의 오른쪽 가슴에 기다란 창상(創傷)이 있고, 그 주변에 출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이탈리아 화가인 조토가 그린 <십자가의 예수>를 보면, 예수의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마치 분수처럼 솟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림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의 심장 또는 큰 혈관이 찔려서 생긴 출혈로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우흉심이었다는 뜻이에요. 우흉심은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그린 <성모자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그린 <성모자상> 역시 많은 유명 화가가 오른쪽 가슴에 안고 있더군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들은 아이를 자신의 심장 가까운 곳에 안아요. 아이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고 자라기 때문에 어머니의 심장박동 소리는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니까요. 이탈리아 화가 야코포 벨리니(1400~1470)가 1450년 그린 <성모자상>이나 산치오 라파엘로(1483~1520)가 1505년에 그린 <성모자상과 요셉>을 보면 예수와 마리아가 우흉심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 교수는 “예수가 우흉심일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 매스컴을 타니 특정 종교에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며 “그들은 예수가 우주인이라 인간과 달리 오른쪽에 심장이 있다고 주장하더라”고 했다.
엉덩이의 권리
문 교수는 “앙투안 바토의 그림 <파리스의 심판>에서처럼 서양화에 등장하는 인간의 엉덩이는 예술성이 매우 높다”면서 “법의학자로 평생 죽은 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살아왔지만, 오늘날 이른바 ‘둔권(臀權)’이 땅에 떨어져 안타깝다”며 웃었다.
“엉덩이는 인간을 상징하는 부위입니다. 원래 네 발 달린 동물은 모두가 골반을 지녔으나 기어다니는 동물은 상체의 무게를 받지 않아 골반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가깝다는 원숭이나 고릴라도 엉덩이는 빈약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상체를 지탱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골반도 구조적으로 위는 넓고 밑은 좁은 원추 모양으로 변하게 됐고, 골반 뒷부분에 살과 지방이 듬뿍 끼어 엉덩이가 형성됐습니다. 그 때문에 여성들에게 산고(産苦)가 생겼어요. 동물의 골반은 원주상(圓柱狀)이기 때문에 새끼를 쉽게 낳을 수 있지만, 사람은 산도(産道)가 밑으로 내려가며 좁아지고 구부러져 태아는 네 번 정도 몸을 뒤틀며 나와야 하기 때문에 산모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는 겁니다.”
엉덩이는 외형이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성기를 포함한 복잡한 기능을 가진 장기가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늘 옷에 가려 살아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지요. 게다가 잘못을 저지르면 엉덩이가 몽둥이 찜질을 당합니다. 엉덩이는 미추(美醜), 정중동(靜中動)의 절제와 쾌락을 간직했다가 적절한 때 발산해 드라마를 만드는 생산적인 내부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90세를 넘긴 노 교수의 엉덩이 옹호론은 거침이 없다.
“엉덩이에도 종류가 있어요. 골반 주위에 근육은 있으나 지방이 끼지 않아 빈약한 엉덩이를 우리말로는 ‘방둥이(유약둔·幼若臀)’라고 해요. 사춘기 이전 사람의 엉덩이는 모두 방둥이에 해당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여성의 경우 골반이 넓어지고 평평해지며 지방이 축적돼 엉덩이에 아름다운 곡선미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렇게 성숙되고 아름다운 엉덩이가 좁은 의미의 ‘엉덩이(성숙둔·成熟臀)’로, 여성미의 심벌이 됩니다. 나이가 들어 탄력을 잃고 힘없이 처진 엉덩이를 ‘궁둥이(하수둔·下垂臀)’라고 합니다.”
문 교수는 “프랑수아즈 부셰(1703~1770) 등 근대 프랑스 화가들이 그린 <오달리스크>(Odalisque·이슬람 권력자 술탄의 궁중 백인노예)를 보면 유난히 아름다운 엉덩이를 갖고 있다”며 “여성들은 ‘둔부하수증’을 막기 위해서라도 30대부터 필요한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했다.
奇運女
문 교수는 현역 법의관 시절 2500건의 부검을 했다고 한다. 문 교수는 막 부검을 하고도 ‘내장탕’을 먹으러 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비위가 좋은 편이다. 그는 ‘부패하거나 불에 탄 시체를 부검할 때 내키지 않은 적은 없느냐’고 하자, “부검은 사인을 가리기 위한 일일 뿐, 그 외적 요소에는 신경을 쓰면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부검을 물었더니 그는 메모지에 유성펜으로 ‘기운녀(奇運女)’라고 썼다.
“여자들 가운데 음모가 전혀 없는 무모증(無毛症)이 있는데, 항간에서는 백판(白板)이라고도 합니다. S여인은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설악산을 놀러갔다 귀가가 늦어져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때 S여인이 백판이란 것을 알게 된 남자가 ‘백판과 결혼하면 죽는다’며 하룻밤도 지내지 않고 파혼을 했습니다.
상심한 S여인은 직장도 그만두고 지냈는데, 얼굴이 워낙 예뻐 동네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결국 동네 이발사 청년과 사귀었습니다. 이미 한 번의 아픔을 겪은지라 S여인은 남자에게 ‘백판인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남자는 ‘내 직업이 털을 깎는 일인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했답니다. 결국 S여인은 이발사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습니다. 그 후 여인은 아들 딸 낳고 잘 살았죠.
그런데 난데없이 동네에 ‘이발소 여편네는 백판’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발사는 소문의 진원지가 자기 부인과 파혼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남편은 아내를 추궁했고, S여인은 한때 약혼한 적은 있으나,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반실성했고, 견디다 못한 여인은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S여인은 스스로 목을 맸기 때문에 법의학적으로는 ‘자살’이지만, 심리부검상으로 가해자는 그녀가 백판임을 알고 파혼했던 남자로, 그는 말하자면 그녀를 두 번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타살성 자살’이라고 합니다. 남성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음부 무모증은 여성에게만 있고, 남성에게는 없습니다. 대신, 남성들에게는 대머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호르몬 문제입니다. 남성이 대머리여서 장가를 못 가고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백판인 여성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 언론 기고문을 보니, 요즈음 의사들은 사망진단서도 제대로 못 쓴다고 지적하셨더군요.
“옛날엔 사망진단서를 ‘아무개가 죽었다’라는 하나의 ‘메모’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망진단서에 사인 세 가지를 써야 합니다. 물론 앓다가 죽었다(병사)라는 자연사(自然死)라면, 병명 하나만 쓰면 됩니다만, 외인사(外因死)라면 직접사인, 중간 선행사인, 선행사인을 순서대로 써야 해요.
가령, 심장 총창을 당하면 흉곽 안에 피가 가득 차 심장을 압박해 사망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심장총창(선행사인)→혈흉(중간 선행사인)→심정지(직접사인)로 기록해야 합니다. 총창도 관통 총창이냐 맹관(총탄 박힘)이냐를 구분해야 합니다. 구분하려면 X-Ray를 찍든지, 가슴을 열어봐야죠. 지금 이것을 의사들이 구분하지 못합니다.”
—의대 교육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사국가고시에 법의학 과목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퇴직 후 자신들 밥그릇 챙기려고 그러는지, 의사국가고시에 병원 개설과 신고사항을 다루는 행정법인 ‘의료법규(醫療法規)’만 들어가고, 법의학(法醫學)은 쏙 빼놓은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요즘 아직도 의사들은 환자가 치료를 자신들에게 ‘위임(委任)’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법원에서는 의사면허를 가진 의사와 환자는 ‘아이고, 배야’하며 침대에 드러눕는 순간, ‘계약 의료’가 시작됐다고 봅니다. 만약 치료를 하면서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전단적(專斷的) 진료’가 잘못돼 의료 사고로 ‘과오(過誤)’가 발생하면, 법원은 ‘과실(過失)’을 인정해 의사를 처벌하게 됩니다.”
문국진의 제자들
—제자들을 키울 때는 어떤 면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2011년 SBS를 통해 방영해 25.5%의 평균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싸인> 이후 법의학에 대한 국민 인식도 높아지고, 법의학을 하겠다는 의사들도 늘고 있습니다. 나는 지망생이 오면 이것저것 잰다든가 꾀가 있는 사람은 택하지 않았어요. ‘왠지 법의학이 끌린다’고 하는 우직한 친구들은 사명감을 가진 친구들입니다. 나는 ‘따지지 말고 이유 없는 좋음을 택하라’고 해요. 법의학은 불의와 타협하면 안 되니까요.”
—우리나라 법의학이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많은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황적준(黃迪駿) 고려대 의대 교수, 박의우(朴宜雨) 건국대 의대 교수, 강신몽(姜信夢) 가톨릭대 의대 교수 등 1세대 제자들이 잘 따라주었지요.(대한법의학회는 2013년 문국진 교수의 아호를 딴 ‘도상법의학상’을 제정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맡은 황적준 교수만 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을 지녔죠. 박종철 사건 당시 황 교수는 국과수 법의과장이었어요. 경찰 책임자가 ‘책상을 쾅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며 부검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필사적으로 저지했지만, 황 교수는 영장이 나오면 부검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죠. 부검해서 폐를 살펴보니 익사였습니다.
경찰과 정부는 부검 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게 압력을 행사했지만, 황 교수는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익사라고 발표했습니다.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왔고, 6·29선언으로 군사정권이 무너졌죠. 혹 어용 법의학자가 부검했더라면, 심장마비로 사망원인을 발표했을지도 모릅니다.”
—시신에 칼을 대는 행위는 ‘두벌죽음’이라 여기는 고정관념 때문에 변사자의 16~20%만 부검하는 현실입니다. 현대그룹 정몽헌(鄭夢憲) 당시 회장도 부검을 하지 않았고요.
“의혹을 해소하려면 부검은 절대적으로 해야 합니다. 뉴욕대 법의관으로 근무할 때, 위암으로 죽은 아버지의 사인을 정확하게 가려서 자식들이 대비해야 한다는 의사 아들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불효막심한 놈’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현명한 친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검시만 하고 부검을 하지 않은 장준하(張俊河·1918~1975)씨 변사 사건의 경우 40년 지난 지금 유골을 파헤친들 사인을 규명할 수 있습니까.”
“죽음은 편안한 것”
—인간이 죽음에 이르려면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까.
“몸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거나 혈액 순환이 되지 않거나, 심장이 멎을 수 있는 조건이면 다 죽습니다. 고무총으로 맞아 심장 쇼크만 받아도 사망합니다. 요즘엔 연수(延髓)라는 호흡중추가 살아 있다면 호흡이나 혈액 순환이 안 되더라도 뇌사(腦死)라고 해서 죽음으로 보지 않습니다만. 생물학적 연명만 하고 의식이 없으니까 인간의 존엄은 없지요.”
—의사들이 사망진단을 한 후 가장 먼저 보는 게 뭡니까.
“맥박을 봅니다. 심장에 청진기를 대보고, 눈꺼풀을 열어 ‘동공(瞳孔) 반사’를 확인합니다.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눈꺼풀을 열면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커져요. 의사들이 환자 눈꺼풀을 열고 플래시로 ‘탁탁’하고 비추는 것이 순간적인 반사를 보려는 것이죠.”
—그로테스크한 질문입니다만, 죽음 가운데 가장 고통이 덜한 죽음은 어떤 겁니까.
“의사로서 말한다면, 목을 매는 게 가장 고통이 적습니다. 목을 매면 뇌로 올라가는 목 양쪽의 경동맥이 순간적으로 체중에 의해 졸려지기 때문에 급격한 뇌빈혈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빈혈이 오면 ‘어이쿠’ 하지요. 그런 증상이 일시적으로 오면 목이 졸려 답답함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혼수상태에 빠지는 겁니다. 본인은 호흡이 멎는지도 모를 겁니다.”
—군(軍)에서는 자살자들의 팬티를 확인해 정액을 흘린 경우 자살자로 분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맞아요. 뇌가 갑작스레 기능을 못 하니까 각종 반사신경이 이완되면서 괄약근이 풀어지는 바람에 변을 보거나, 남자들의 경우엔 정액을 방출하지요. 목을 매는 것이 고통이 덜하다니까 생각이 나네요. 미국 뉴욕대 의대에 법의관으로 근무할 때, 하루는 현장에 가보니 젊은 남자가 목욕탕에서 액사(縊死·목매 죽음) 했더군요. 그런데 목욕탕 바닥을 보니 남녀가 키스하고 성교하는 각종 에로틱한 사진들이 널려 있어요.
이 친구가 의자를 놓고 목을 맨 채 혼수상태의 기분을 즐긴 것 같았어요. 너무 즐거움에 빠져 현실로 돌아오지 못해 목숨을 잃은 거지요. 뉴욕 법의관이 ‘우리나라에는 이런 사건이 흔하다, 너희 나라는 없느냐’고 해요. 당시엔 우리나라가 국민소득이 낮아 독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시대여서 그런 일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30년 전 미국의 일이 지금 우리나라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호기심 갖지 마세요, 하하.”
—최근 유체이탈이라든가,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한 경험들이 매스컴에 소개됩니다만, ‘사후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생에 대한 강한 애착과 함께 죽음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는 거부감 때문입니다. 특히 사후세계는 현재 종교와 철학만이 그 영역을 독점해 설명하고 있고요. 19세기 말 알프스를 등반하다 조난당해 체외이탈을 경험한 스위스 지질학자 알베르트 하임(1849~1937)이 체외이탈 연구를 처음으로 시작했고, 근래에 들어서야 과학이 드디어 ‘죽음의 이미지 체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임사체험자들의 경험을 종합하면, 영혼의 체외이탈→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터널체험→빛과의 만남→저승 도착→지나온 생에 대한 반성적 회고→장벽과의 만남→육체로의 회귀다. 특히 이들 경험자들은 촉감은 있지만, 아픈 것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문 교수는 “이때까지 보고된 체외이탈이나 임사체험 경험에 대해 그것이 현실세계에서 실제적 체험이건, 단지 뇌에서 느낀 환각이나 환상이건 간에 그것을 보고 느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의견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문 교수의 설명이다.
“의학적으로 체외이탈과 임사체험을 묶어 ‘임사현상(Near Death Phenomena)’으로 부릅니다.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1450~1516)는 <가장 높은 하늘로의 승천>이라는 그림에서 임사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임사 체험자들은 한결같이 ‘저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워 이승과 비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읍니다.
그러나 자살 미수자들은 체외이탈을 경험한 후 아주 캄캄한 곳에 있었으며, 아무도 자기를 돌보지 않아 강한 고립감이 들었고, 빛의 존재를 만난 적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죽음의 과정에서는 고통이 없고,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문국진 교수는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재벌이나 정치인, 지식인과 같이 살아 있을 때 자기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분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돈이고 명예고 다 필요 없다’며 울부짖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는데, 그런 걸 생존시에 깨달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문 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국수다. 그는 지금도 매일 저녁식사를 국수로 한다. 그는 “밀국수도 좋고, 메밀국수도 좋고, 요즘은 날이 더워 콩국수에 비빔국수, 이열치열로 잔치국수도 즐겨 먹는다”며 “스트레스 받지 말고 속 편하게 뇌가 시키는 대로 하되, 운동은 빼놓으면 안 된다”고 했다.⊙
뉴욕대 의대 법의학교실엔 당대의 법의학계 석학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법의병리학자로는 찰스 노리스(Charles Norris), 토머스 곤잘레스(Thomas A. Gonzales), 밀턴 헬펀(Milton Helpern) 등이 있었고, 법의혈청학자로는 알렉산더 위너(Alexander S. Wiener), 독물학자로는 알렉산더 게틀러(Alexander Gettler)가 법의학교실을 이끌고 있었다.
문 교수는 그곳에서 선진 시스템을 눈으로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문 교수는 뉴욕의 법의관이 경찰과 함께 변사 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검시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뉴욕은 뉴욕시의 독립기구로 법의관 사무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법의관을 ME(Medical Examiner)라고 부른다. 187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시작한 ME 제도는 1917년 뉴욕주에서 검시(檢屍)의 모든 과정을 법의학 지식과 경험이 있는 법의관 한 사람에게 전담시키는 제도로 발전했다.
문 교수는 “뉴욕대학 법의학교실이 세계의 법의학을 이끈 배경에는 법의학교실 주임교수를 뉴욕시 부시장으로 파격 대우하면서 위상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라며 “세계 어느 대학 연구소도 흉내 낼 수 없는 큰 규모에다, 뉴욕시에서 발생하는 ‘법의관 케이스(법의관에게 보고되는 살인사건이나 변사체)’ 가운데 하루 50건 이상을 18대의 부검대에서 처리하는 등 기능이나 작업량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했다.
“너희는 白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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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뉴욕대 의대 법의학교실 객원교수 시절의 문국진 명예교수. |
“18대의 부검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법의관들이 변사체와 씨름을 합니다. 또 부검실 밖에서는 의사들이 장기(臟器)를 담을 용기를 들고 호출을 기다리는 진풍경을 연출합니다. 법의관들은 부검 때 조직검사와 독물검사를 위한 샘플을 여유 있게 채취하거든요. 예컨대 법의관이 ‘리버(liver·간)’라고 소리치면, 간을 구하려는 의사가 잽싸게 용기를 들이댑니다. 부검실은 이런 식으로 사건 해결뿐만 아니라 의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부검과 미국의 부검은 차이가 있던가요.
“귀국할 때 뉴욕의대 교수들이 ‘미국의 법의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너희는 백정 같다’고 했습니다. 미국 법의관들은 부검 하나를 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합니다. 그렇다 보니 하루에 변사체 서너 구를 처리하고 나면 기진맥진해서 연구할 엄두를 못 내요.
한국에선 사진사 한 사람에 두 사람의 조수가 도와가며 부검을 하는데, 미국의 법의관은 사진을 찍어가며 혼자 합니다. 게다가 법의관이 부검을 하면서 판단 내용을 녹음하는데, 이게 외국 의사들에게는 심한 스트레스입니다. 하지만 긴급을 요하는 사건일 때는 이들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하더군요.”
—예를 든다면요.
“뺑소니차가 보행자를 치고 달아난 사건 현장에 갔습니다. 법의관이 직접 옷을 벗기고 상처를 확인하고 경찰관에게 무전으로 뭔가를 열심히 알려줬습니다. 자동차에 치였다면 대개 3차 손상을 입어요. 1차 손상은 자동차 범퍼에 다리 쪽 손상을 입고, 2차 손상은 범퍼 앞쪽, 앞유리, 와이퍼 등과 충돌해서 생기죠. 그리고 3차로 땅으로 던져지는데, 이때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흙이 몸에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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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고려대 의대 법의학교실과 뉴욕대 의대 법의학교실이 자매결연을 맺었다. 왼쪽부터 문국진 교수, 뉴욕대 법의학교실 주임교수 밀턴 헬펀, 뉴욕대 의대 학장. |
문 교수는 “뉴욕은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에 법의관이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모든 권한이 ME에게 집중돼 있었다”며 “‘ME 라인’이 쳐 있으면, 대통령이라고 해도 차를 돌려야 할 정도였다”고 했다.
—미국에서 ME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국가 단위의 법의학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ME가 되려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리전문의 자격을 딴 다음, 법의관사무실에서 2년간 전문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을 이수한 의사들은 ‘법의전문의’ 시험을 치르고, 국가는 이 시험을 통과해야 ‘메디컬 이그재미너(ME)’라는 라이선스를 줍니다. ME가 되면 모든 변사(變死)에 대해 경찰이나 검찰보다 앞서 변사체에 대한 보고를 받고 부검을 거쳐 법적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 법의학자 헬펀 교수 초청으로 渡美
문 교수는 1970년 무렵, 요코하마에서 열린 미일공동법의학회에서 “익사체에서 플랑크톤 확인을 통해 익사(溺死) 장소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법의학자들은 표류한 시체의 장기 가운데 혈액, 간, 신장, 골수 등에서 플랑크톤이 검출되면 익사한 것으로 본다.
플랑크톤이라는 단세포 생물은 지구상의 어떤 물에도 존재한다. 플랑크톤은 강물의 위치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 종류와 숫자가 다르다. 따라서 표류한 시체의 장기에서 어떤 종류의 플랑크톤이 얼마나 많이 검출되느냐에 따라 물에 빠진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문 교수는 국가대표 수영선수들을 상대로 몇 명을 체중별로 나눠 각각 다른 높이에서 물속에 뛰어들게 했다. 그랬더니 체중(40~80kg)이나 자세, 또 떨어진 높이에 상관없이 수면에서 355cm보다 더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익사하는 과정에서 마실 수 있는 물의 범위는 수면에서 물속 350cm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플랑크톤의 숫자나 종류에 있어 수면층(水面層)과 중간층(中間層)은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수저층(水底層)은 세 배나 그 숫자가 많았다. 수심이 350cm 이내인 강물에 빠진 익사체의 입수 장소를 정확히 가려내야 할 경우에는 대조수(對照水)를 수면이나 중간층에서만 채취할 것이 아니라, 수저층에서도 채취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문 교수의 발표를 일본의 미일법의학회에 참석해 인상 깊게 들은 밀턴 헬펀 뉴욕대 의대 교수는 “뉴욕 허드슨강에 익사체가 많이 떠오르는데, 도움을 받고 싶다”며 “객원교수로 초빙할 테니 뉴욕대에 와서 연구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제의했다.
문 교수는 “헬펀 교수가 미국의 외국 의학생 자격심사시험(ECFMG)만 통과하면 법의관으로 부검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며 “그 때문에 ECFMG 자격을 얻기 위해 미국의사시험(USMLE) 3단계를 패스하느라 무척이나 고생했다”고 했다. ECFMG는 외국의사들이 미국 내 인턴이나 전문의, 펠로십 등으로 미국 병원 내에서 환자를 볼 수 있게 자격을 주는 의사면허다.
1973년 문 교수는 뉴욕대에서 연수하면서 그 대학 법의혈청학자 알렉산더 솔로몬 위너 박사와도 만난다. 위너 박사는 1901년 ABO 혈액형을 발견한 오스트리아 출신 생리학자 카를 란드스타이너의 제자로서, Rh형 혈액형을 발견한 세계적인 혈청학자다. 위너 박사는 1940년 적혈구에 벵골원숭이(Rhesus)와 같은 혈액형 인자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연구해 벵골원숭이의 이름을 따서 Rh혈액형 체계를 발표했다.
Rh혈액형 발견자 위너 교수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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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혈청학자인 알렉산더 위너 박사(왼쪽)와 1940년 적혈구에 Rh혈액형 인자가 있음을 확인시켜 준 벵골원숭이(오른쪽). |
“국과수 법의관 시절, 후루하타 교수와 미일공동법의학회에서 만났을 때, 그분이 ‘국과수 직원들과 함께 들로 다니며 풀을 뜯고 꽃을 키워 식물 응집소를 연구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혈액형 물질이 식물에도 존재하는데, 일본의 들에서는 식물 응집소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10여 명의 국과수 직원들과 함께 야외식물 2000여 점을 분석해 보니 정말로 응집소에 해당하는 물질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혈액형으로 밝혀질 정도까지 분석을 했는데, 그만 후루하타 교수님이 이듬해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아쉬움이 있던 차에 뉴욕에 갔더니 위너 교수가 운명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문 교수의 말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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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장나무와 그 열매. 문국진 교수가 발견한 CL혈액형의 응집소 물질을 갖고 있다. |
제스처가 멋진 위너 교수는 나와 공동연구를 하는 헬펀 교수(부시장급 수석법의관)의 선배라는 지위를 이용해 부검장에 내려와 ‘닥터 문을 모시러 왔다’며 부검이 끝나기를 기다려 나를 납치하듯 자신의 연구실로 데려갔습니다. 부검장의 스태프들이 ‘코리아’에서 온 무명의 노랑이 사내를 자기네 원로 교수가 환대하는 것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더군요.”
문국진 교수는 새로운 혈액형인 CL형을 발견하고 위너 박사를 공동 연구자로 해 1976년 국제학회에 논문을 발표했다. 혈액형을 감별하는 방법은 12가지에 이른다. 그러나 체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ABO식 혈액형뿐이었다. 그런데 문 교수가 발견한 CL혈액형도 침이나 땀, 정액, 콧물, 눈물, 대소변을 통해 감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백혈구형 혈액형이 나오고, 유전자형 혈액형이 나오면서, ‘적혈구형 혈액형’ 시대는 저물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당시 임상연구만 이뤄졌다면 노벨상 수상에 가까웠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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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법의학자 밀턴 헬펀 뉴욕의대 법의학교실 주임교수는 뉴욕시 수석법의관 겸 뉴욕시 부시장 대우를 받았다. |
“위너 박사가 한국의 누리장만 응집소 성분을 갖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습니다. 전문용어로 ‘지역성(local specificity)’을 띠는 거죠. 그래서 한국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인가 봅니다. 혈액형 연구하느라 6개월 더 머무는 바람에 2년간 뉴욕대 의대에 객원교수로 근무한 겁니다.
귀국하기 전 그분의 별장에서 식사를 하면서 위너 박사가 ‘닥터 문, 누리장 종자를 내 별장 주변에 심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흔쾌히 승낙하고 그분과 함께 별장에 누리장을 가득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위너 교수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위너 교수는 당신의 백혈병 치료를 위해 누리장을 심었던 것이죠. 지금도 위너 교수 별장 주변에는 누리장이 검푸른 열매와 함께 눈부신 꽃들을 피우고 있을 겁니다.”
사람 대신 책을 부검하다
195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창립멤버인 문 박사는 1990년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부검을 계속하고 있다. 다만, 부검의 대상을 사람에서 책이나 그림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이른바 북오톱시(Book Autopsy)다. 세계적인 문호나 예술가의 사인과 작품을 의학적 관점에서 규명하고 해석하는 ‘법의탐적학(法醫探跡學·Medicolegal Pursuitgraphy)’이다.
그의 서울 여의도 자택에는 40년 넘게 유럽미술관 곳곳을 다니며 모아온 도록(圖錄) 100여 권이 있다. 문 교수는 “1960년대부터 외국 학술대회에 나갈 때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미술관은 꼭 찾아다녔다”며 “신문을 읽다 보면 어떤 음악가들은 사인이 일곱 가지나 되는 경우를 보고, 그 사람에 대한 책을 수집해서 시체를 해부하는 식으로 책을 부검해 사인을 밝히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문 교수는 “법의학 지식을 갖고 그림을 보면, ‘이 기가 막힌 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하고 생각이 든다”면서 “젊을 때 의학을 하면서 예술가들을 ‘딴따라’라고 했는데,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니 이것이 인간이 해야 할 분야지, 의학은 시시하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문 교수가 처음으로 북오톱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러시아 음악가 차이콥스키(P.I. Tchaikovsky·1840~1893)였다. 러시아 정부는 그가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문 교수가 차이콥스키의 북오톱시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했다.
문 교수는 차이콥스키 문헌 40여 권을 입수해 분석에 들어갔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된 ‘비창’의 초연을 지휘하고 나서 9일째 되는 날인 1893년 11월 6일 사망했다. 그가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것이 러시아 정부의 공식 발표였다. 차이콥스키가 콜레라에 감염된 것은 11월 1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텔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그대로 마신 것이 원인으로 돼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사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의 자살설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작곡한 ‘비창’에 대한 반응이 시원치 않은 것에 대해 차이콥스키가 낙담했다는 것이다. 그가 일종의 강요된 자살을 했다는 설도 나왔다. 차이콥스키박물관의 기록보관소에 근무하던 한 여직원이 발설한 것이다. 문 교수는 이 여직원에 주목했다고 한다.
차이콥스키 毒殺 처음으로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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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 당초 콜레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동성애의 형벌로 명예재판을 받고 사약을 먹고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
그러나 문 교수는 콜레라의 증상에 주목했다. 콜레라는 전염병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의하면 차이콥스키는 격리되지도 않았고, 면회가 자유로웠으며, 특히 그가 사망한 후에 조문객들이 줄을 지어 그의 손이나 이마에 입맞춤하는 것이 허용됐다는 것이다.
여직원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차이콥스키가 당시 권문세가(權門勢家)였던 스텐보크 훼르모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당시 극형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였던 동성애를 저지른 사실이 밝혀지자, 훼르모 공작은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처벌해 줄 것을 진정했고, 황제는 처벌을 당시 검찰부총장이던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야코비에게 명령했다는 것이다.
야코비 부총장은 실은 차이콥스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 1회 동기생이었다. 그는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대법관,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동기생 7명을 모아 상의했고, “차이콥스키 같은 유명한 음악가를 누명을 씌워 죽일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결국 동기생인 차이콥스키에게 사형이나 시베리아 유형(流刑)보다 ‘명예재판’을 열어 비밀리에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문 교수의 설명이다.
“차이콥스키는 동기들 앞에서 순순히 사약을 받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는 콜레라의 주요한 증상 가운데 하나인 쌀뜨물과 같은 설사(water stool)를 했다고 병상일지(病床日誌)에 나오는데, 과연 그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독물이 있는가가 문제였습니다. 법의학에서 주로 무색·무취·무미한 특성을 갖고 있어, 독살에 주로 사용하는 비소(砒素)를 적당량 복용할 경우 콜레라와 똑같은 증상을 보인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정부는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발표하기에 앞서 상당한 의학적 검토를 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문 교수는 차이콥스키의 사인을 규명하면서 용기백배 힘을 얻었다. 그는 2009년 2월부터 ‘음악, 법의학자를 만나다’라는 시리즈 음악 콘서트를 통해 차이콥스키(비소 독살), 베토벤(알코올성 간경변증), 모차르트(수은중독설), 슈베르트(매독) 등의 질병과 사인을 분석했다.
그는 “당시 음악회에서 니르바나 솔리스트 앙상블과 바리톤 김재일씨가 슈베르트의 주옥같은 5중주곡 ‘송어’, 가곡 ‘마왕’ 등을 연주하는 가운데, ‘슈베르트 만년의 걸작들은 그의 뇌를 침범한 매독균의 활동에 힘입어 탄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설을 하니 관객들이 놀라더라”고 했다.
“18~19세기 한때는 유럽 인구의 15%가 매독환자였죠. 매독이 3기에 이르러 균이 대뇌에 침범하면, 처음엔 불가사의하게도 의식이 명료해지며, 정서적인 극치감이나 천재적인 창의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물론 병마가 한 인간에게 유익할 수만은 없죠. 실의에 빠진 젊은이를 그린 연가곡 ‘겨울 나그네’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 병마와 싸운 처절한 절규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毒酒 즐긴 고흐, 노란색에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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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흐의 <자화상>과 그의 작품 <해바라기>. |
문 교수는 “고대 동굴의 벽화를 보면 의학과 미술은 한곳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태고적 인간이 동굴에서 수렵생활 할 때 주술(呪術)과 기원(祈願)이 함께 이뤄졌고, 주술이 ‘의학’이라면 기원은 곧 ‘미술’인 것”이라고 했다.
정확한 사실이 규명되지 않은 수많은 미스터리를 가설과 근거를 나열한 뒤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직접적인 사인을 찾는 작업이었다.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정말 살리에르였을까? 고흐의 자살에 사용된 권총을 가져다 놓은 것이 과연 고갱이었을까? 베토벤의 진짜 사인은?…. 문 교수가 거실 벽에 걸린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고흐를 가장 좋아합니다. 고흐는 압생트라는 독주(毒酒)에 중독되면 노란색이 잘 보인다는 걸 알고는 이 술에 절어 지냈습니다. 원래 프랑스 의사가 환자치료용으로 처방한 것이 주류업체로 흘러들어가 ‘악마의 술’로 둔갑했습니다. 당시 수많은 예술가가 오후 5시 정도만 되면 삼삼오오 모여 압생트를 즐겼습니다. 그는 이 때문에 황시증(黃視症·xanthopia)에 시달렸습니다. 노란색에 집착하는 병이지요.
이것은 그를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기기묘묘한 노랑과 파랑조의 찬란한 빛에 가득 취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불후의 명작 <해바라기>도 압생트 중독의 결과였지요. 고흐는 또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다행히 ‘레이’라는 좋은 레지던트 의사를 만나게 되는데, 사후에 명작이 된 <의사 레이의 초상>도 이때 탄생한 겁니다. 화가들은 천재성과 예리한 감수성도 있지만,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무서운 집착이 있습니다. 주위의 도덕적 좌표와는 상관없이 화가는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책만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으로 사인을 밝힌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요.
“(문 교수가 기자를 정색하듯 쳐다보며) 가능하니까 시작한 것 아니겠소! 유명한 예술가들의 경우에는 진료 기록도 많이 남아 있고, 또 전기 작가들이 그들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해서 기록을 남기니까요. 당시는 법의학적 지식이 부족해 사인을 밝히지 못했더라도 문헌적 ‘증거’는 많다고요. 지금도 외국에 나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서 예술가의 현지 박물관과 동네 화랑까지 들러 자료를 꼼꼼하게 수집하죠. 그다음, 작품 속에 나타난 화가의 능력, 기술, 문화적 상황 등을 살피죠.”
—퇴임 후 법의학과 예술을 연결시키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학생이나 현역들에게는 정열을 갖고 자기 일에 미치라고 하고, 정년에 가까운 후배들에게는 이모작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한 학문을 마스터한 후 다른 분야를 접하면, 그쪽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의학은 실험을 하지 못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정년퇴임을 하고 나니 실험할 대상이 없잖아요.
시체를 부검해 사인을 알아내는 것처럼 책을 갖고 부검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 좋게도 ‘법의탐적학’을 하는 의사가 전 세계에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씨를 뿌리고 가야 할 분야라고 믿습니다.”
고야의 ‘마하’ 주인공, 200년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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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화가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 고야는 1800년 이 그림을 그린 후 이단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이후 200년 동안 모델의 주인공이 알바 부인인가 재상 고도이의 정부인 페피타인가를 놓고 무덤까지 파헤치는 진실게임을 벌였다. |
문 교수는 2012년 10월 26일 충남대의대에서 개최된 제36차 법의학회 학술대회에서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됐던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 교수는 마하의 실제모델은 지금까지 알려졌던 알바 공작부인이 아니라, 당시 최고 세력가인 재상 고도이의 정부였던 페피타 츠도우라고 밝혔다.
논란의 출발은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야는 <벌거벗은 마하>(1800), <옷을 입은 마하>(1805) 두 작품에서 ‘마하’를 그렸다. 그러나 벌거벗은 마하가 문제가 됐다. 가톨릭국가였던 스페인의 사회상과 맞물려 고야는 이단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모델로 거론된 한 사람은 스페인 최고의 명문 귀족부인이며, 다른 한 사람은 거리의 여인이었다. 재판과정에서 고야는 끝내 모델의 신분을 함구하고 ‘마하’(스페인어로 함부로 자란 시골처녀를 뜻함)라고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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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국진 교수는 고야가 그린 4명의 여성과 로페즈가 그린 한 명의 여성(맨 오른쪽 상단)을 생체정보 분석을 통해 대조, <벌거벗은 마하>의 주인공과 일치하는 결과를 얻어냈다. 즉 <벌거벗은 마하>의 모델은 알바 부인이 아니라 고도이의 정부인 페피타임이 확인된 것이다. |
그러나 고야 사망 후 연인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알바 공작부인상>(1797)이 20년 만에 세상에 나오면서 논란의 중심은 다시 알바 공작부인으로 옮겨졌다. 고야가 끝까지 이 그림을 간직했던 점도 한몫했고, 알바 부인은 ‘알바 고야(Alba Goya)’란 반지를 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집게손가락이 모래 위에 새겨놓은 ‘오직 고야뿐(Solo Goya)’이라는 글씨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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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와 알바 부인의 얼굴 그림(왼쪽)과 마하와 페피타의 얼굴 그림(오른쪽) 중첩비교검사 결과. 오른쪽 페피타의 얼굴 그림이 정확히 일치한다. |
문 교수는 고야가 그린 ‘마하’와 알바 공작부인 초상화, 로페즈가 그린 페피타 츠도우 그림을 대상으로 생체정보연구팀의 도움을 받아 얼굴 부분의 생체정보적 분석을 했다.
분석 대상 그림 가운데 얼굴의 생체정보적 분석을 위해 촬영 각도가 유사한 얼굴을 선택해 3차원 얼굴형상으로 복원했으며, 복원한 얼굴을 모두 정면으로 회전해 랜드마크 비교검사·얼굴계측지수 비교검사·얼굴인식프로그램 비교검사를 시행한 결과, 페피타가 알바 부인보다 마하와의 유사성이 높게 나타났다.
특히 중첩 비교검사 결과에서는 마하의 얼굴이 페피타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 결과가 신뢰성을 높이는 것은 알바 부인 초상화는 고야가 그린 것이지만 마하와 유사점이 없는 데 반해, 페피타의 그림은 다른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고야가 그린 마하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문국진 교수는 “늦게나마 마하의 실제 주인공이 알바 부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져 다행”이라며 “200여 년간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시달린 알바 가문이 이제나마 떳떳해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마하’의 신원에 관한 논란을 법의탐적학적인 접근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밧세바의 ‘공포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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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레옹 제롬의 작품 <밧세바>(1889). 망루에서 다윗이 밧세바를 훔쳐보고 있다. |
“중세시대에는 마녀사냥을 포함해 여자의 개성과 특성은 음험하고 미천한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습니다. 밧세바도 화가 장 레옹 제롬(1824~1904)에 의해 천하의 요부(妖婦)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정말 밧세바가 요부 또는 팜므파탈(femme fatale)인가, 아니면 운명에 순응한 비극의 여인인가를 판단하기 위해 ‘다윗의 도성(The city of David)’ 전망대에 올라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도성에서 밧세바의 주택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기드론 골짜기(Kidron Valley)는 수백 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다윗이 망원경도 없이 먼 거리의 여인을 보고 한눈에 반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양치기 출신이라 시력이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지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왜 밧세바가 그날 저녁 목욕을 하게 됐느냐는 것이지요. 율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달거리가 끝나면 몸이 부정하게 되니 정결례(淨潔禮)로 몸을 씻어야 했다는 겁니다. 사실 밧세바는 월경을 막 마친 후였고, 율법대로 부정함을 씻기 위해 정결례로 목욕을 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몸을 깨끗이 하거나 왕을 유혹하기 위해 목욕을 한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밧세바를 요부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단 한 번의 관계로 임신이 가능했을까요.
“아마도 밧세바는 막 월경이 끝났기 때문에 임신은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을 겁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공포배란(恐怖排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밧세바가 다윗왕과의 육체적 관계에서 무언가 공포와 불안을 느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공포배란으로 임신이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공포배란이 뭔가요.
“말 그대로 공포를 느끼면 배란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단 한 번의 성교로 임신이 가능한가의 문제는 강간사건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동물은 배란 형태가 각기 달라요. 야생 토끼나 낙타는 수컷이 교미 동작을 취해야만 배란이 되고, 평소에는 배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숭이처럼 공포를 느껴야 비로소 배란이 되는 동물도 있어요. 그 때문에 수컷 원숭이는 교미 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암컷이 안고 있는 새끼를 빼앗아 던지고 때려 새끼 원숭이가 비명을 지르게 합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 암컷 원숭이는 배란이 되고 발정해 교미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 교수는 “이러한 ‘공포배란’ 현상이 사람에게도 나타나고, 특히 강간과 같이 공포 분위기에서 배란이 되는 여성이 있다”며 “단 한 번의 강간으로 임신이 됐다는 케이스는 종종 법정에서 판사들에게 증언해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예수의 심장은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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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토의 작품 <십자가의 예수>(1320~1325).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뮌헨. 라파엘로의 작품 <성모자상과 요셉> (1505). 에스미타슈미술관 소장,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리아가 예수를 오른쪽 가슴에 안고 있다. |
“통상 심장은 왼쪽에 있어 이곳을 창으로 찌르면 한번에 많은 피가 쏟아져 나와 급사(急死)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른쪽 가슴에는 폐만 있기 때문에 굵은 혈관이 찔리지 않는 한, 출혈은 왼쪽보다 훨씬 적고 동시에 죽는 시간도 한참 늦을 겁니다. 그러나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즉 내장역위증(內臟逆位症·Situs inversus)이라고 내부 장기의 일부 또는 전부가 반대에 위치한 기형입니다. 특히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기형을 우흉심(右胸心)이라고 해요. 내장역위증은 대체로 유전되고, 어떤 경우에는 내장역위증이라는 것을 평생 모르고 살다 사후 부검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이름난 많은 화가의 단골 소재였다.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피에타>에는 예수의 오른쪽 가슴에 기다란 창상(創傷)이 있고, 그 주변에 출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이탈리아 화가인 조토가 그린 <십자가의 예수>를 보면, 예수의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마치 분수처럼 솟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림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의 심장 또는 큰 혈관이 찔려서 생긴 출혈로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우흉심이었다는 뜻이에요. 우흉심은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그린 <성모자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그린 <성모자상> 역시 많은 유명 화가가 오른쪽 가슴에 안고 있더군요.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들은 아이를 자신의 심장 가까운 곳에 안아요. 아이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고 자라기 때문에 어머니의 심장박동 소리는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니까요. 이탈리아 화가 야코포 벨리니(1400~1470)가 1450년 그린 <성모자상>이나 산치오 라파엘로(1483~1520)가 1505년에 그린 <성모자상과 요셉>을 보면 예수와 마리아가 우흉심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 교수는 “예수가 우흉심일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 매스컴을 타니 특정 종교에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며 “그들은 예수가 우주인이라 인간과 달리 오른쪽에 심장이 있다고 주장하더라”고 했다.
엉덩이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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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즈 부셰의 <오달리스크>(1745). 루브르박물관 소장, 파리. 오달리스크는 술탄이 총애하는 여자로,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는 나라에서 상납된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은 미녀들이었다. |
“엉덩이는 인간을 상징하는 부위입니다. 원래 네 발 달린 동물은 모두가 골반을 지녔으나 기어다니는 동물은 상체의 무게를 받지 않아 골반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가깝다는 원숭이나 고릴라도 엉덩이는 빈약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상체를 지탱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골반도 구조적으로 위는 넓고 밑은 좁은 원추 모양으로 변하게 됐고, 골반 뒷부분에 살과 지방이 듬뿍 끼어 엉덩이가 형성됐습니다. 그 때문에 여성들에게 산고(産苦)가 생겼어요. 동물의 골반은 원주상(圓柱狀)이기 때문에 새끼를 쉽게 낳을 수 있지만, 사람은 산도(産道)가 밑으로 내려가며 좁아지고 구부러져 태아는 네 번 정도 몸을 뒤틀며 나와야 하기 때문에 산모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는 겁니다.”
엉덩이는 외형이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성기를 포함한 복잡한 기능을 가진 장기가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늘 옷에 가려 살아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지요. 게다가 잘못을 저지르면 엉덩이가 몽둥이 찜질을 당합니다. 엉덩이는 미추(美醜), 정중동(靜中動)의 절제와 쾌락을 간직했다가 적절한 때 발산해 드라마를 만드는 생산적인 내부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90세를 넘긴 노 교수의 엉덩이 옹호론은 거침이 없다.
“엉덩이에도 종류가 있어요. 골반 주위에 근육은 있으나 지방이 끼지 않아 빈약한 엉덩이를 우리말로는 ‘방둥이(유약둔·幼若臀)’라고 해요. 사춘기 이전 사람의 엉덩이는 모두 방둥이에 해당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여성의 경우 골반이 넓어지고 평평해지며 지방이 축적돼 엉덩이에 아름다운 곡선미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렇게 성숙되고 아름다운 엉덩이가 좁은 의미의 ‘엉덩이(성숙둔·成熟臀)’로, 여성미의 심벌이 됩니다. 나이가 들어 탄력을 잃고 힘없이 처진 엉덩이를 ‘궁둥이(하수둔·下垂臀)’라고 합니다.”
문 교수는 “프랑수아즈 부셰(1703~1770) 등 근대 프랑스 화가들이 그린 <오달리스크>(Odalisque·이슬람 권력자 술탄의 궁중 백인노예)를 보면 유난히 아름다운 엉덩이를 갖고 있다”며 “여성들은 ‘둔부하수증’을 막기 위해서라도 30대부터 필요한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했다.
奇運女
문 교수는 현역 법의관 시절 2500건의 부검을 했다고 한다. 문 교수는 막 부검을 하고도 ‘내장탕’을 먹으러 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비위가 좋은 편이다. 그는 ‘부패하거나 불에 탄 시체를 부검할 때 내키지 않은 적은 없느냐’고 하자, “부검은 사인을 가리기 위한 일일 뿐, 그 외적 요소에는 신경을 쓰면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부검을 물었더니 그는 메모지에 유성펜으로 ‘기운녀(奇運女)’라고 썼다.
“여자들 가운데 음모가 전혀 없는 무모증(無毛症)이 있는데, 항간에서는 백판(白板)이라고도 합니다. S여인은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설악산을 놀러갔다 귀가가 늦어져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때 S여인이 백판이란 것을 알게 된 남자가 ‘백판과 결혼하면 죽는다’며 하룻밤도 지내지 않고 파혼을 했습니다.
상심한 S여인은 직장도 그만두고 지냈는데, 얼굴이 워낙 예뻐 동네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결국 동네 이발사 청년과 사귀었습니다. 이미 한 번의 아픔을 겪은지라 S여인은 남자에게 ‘백판인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남자는 ‘내 직업이 털을 깎는 일인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했답니다. 결국 S여인은 이발사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습니다. 그 후 여인은 아들 딸 낳고 잘 살았죠.
그런데 난데없이 동네에 ‘이발소 여편네는 백판’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발사는 소문의 진원지가 자기 부인과 파혼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남편은 아내를 추궁했고, S여인은 한때 약혼한 적은 있으나,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반실성했고, 견디다 못한 여인은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S여인은 스스로 목을 맸기 때문에 법의학적으로는 ‘자살’이지만, 심리부검상으로 가해자는 그녀가 백판임을 알고 파혼했던 남자로, 그는 말하자면 그녀를 두 번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타살성 자살’이라고 합니다. 남성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음부 무모증은 여성에게만 있고, 남성에게는 없습니다. 대신, 남성들에게는 대머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호르몬 문제입니다. 남성이 대머리여서 장가를 못 가고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백판인 여성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 언론 기고문을 보니, 요즈음 의사들은 사망진단서도 제대로 못 쓴다고 지적하셨더군요.
“옛날엔 사망진단서를 ‘아무개가 죽었다’라는 하나의 ‘메모’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망진단서에 사인 세 가지를 써야 합니다. 물론 앓다가 죽었다(병사)라는 자연사(自然死)라면, 병명 하나만 쓰면 됩니다만, 외인사(外因死)라면 직접사인, 중간 선행사인, 선행사인을 순서대로 써야 해요.
가령, 심장 총창을 당하면 흉곽 안에 피가 가득 차 심장을 압박해 사망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심장총창(선행사인)→혈흉(중간 선행사인)→심정지(직접사인)로 기록해야 합니다. 총창도 관통 총창이냐 맹관(총탄 박힘)이냐를 구분해야 합니다. 구분하려면 X-Ray를 찍든지, 가슴을 열어봐야죠. 지금 이것을 의사들이 구분하지 못합니다.”
—의대 교육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사국가고시에 법의학 과목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퇴직 후 자신들 밥그릇 챙기려고 그러는지, 의사국가고시에 병원 개설과 신고사항을 다루는 행정법인 ‘의료법규(醫療法規)’만 들어가고, 법의학(法醫學)은 쏙 빼놓은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요즘 아직도 의사들은 환자가 치료를 자신들에게 ‘위임(委任)’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법원에서는 의사면허를 가진 의사와 환자는 ‘아이고, 배야’하며 침대에 드러눕는 순간, ‘계약 의료’가 시작됐다고 봅니다. 만약 치료를 하면서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전단적(專斷的) 진료’가 잘못돼 의료 사고로 ‘과오(過誤)’가 발생하면, 법원은 ‘과실(過失)’을 인정해 의사를 처벌하게 됩니다.”
문국진의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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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법의학을 개척한 문국진 교수가 지도한 제자들. 왼쪽부터 황적준 전 고려대 의대 교수, 박의우 건국대 의대 교수, 강신몽 가톨릭의대 교수. |
“2011년 SBS를 통해 방영해 25.5%의 평균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싸인> 이후 법의학에 대한 국민 인식도 높아지고, 법의학을 하겠다는 의사들도 늘고 있습니다. 나는 지망생이 오면 이것저것 잰다든가 꾀가 있는 사람은 택하지 않았어요. ‘왠지 법의학이 끌린다’고 하는 우직한 친구들은 사명감을 가진 친구들입니다. 나는 ‘따지지 말고 이유 없는 좋음을 택하라’고 해요. 법의학은 불의와 타협하면 안 되니까요.”
—우리나라 법의학이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많은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황적준(黃迪駿) 고려대 의대 교수, 박의우(朴宜雨) 건국대 의대 교수, 강신몽(姜信夢) 가톨릭대 의대 교수 등 1세대 제자들이 잘 따라주었지요.(대한법의학회는 2013년 문국진 교수의 아호를 딴 ‘도상법의학상’을 제정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맡은 황적준 교수만 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을 지녔죠. 박종철 사건 당시 황 교수는 국과수 법의과장이었어요. 경찰 책임자가 ‘책상을 쾅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며 부검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필사적으로 저지했지만, 황 교수는 영장이 나오면 부검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죠. 부검해서 폐를 살펴보니 익사였습니다.
경찰과 정부는 부검 결과를 발표하지 못하게 압력을 행사했지만, 황 교수는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익사라고 발표했습니다.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왔고, 6·29선언으로 군사정권이 무너졌죠. 혹 어용 법의학자가 부검했더라면, 심장마비로 사망원인을 발표했을지도 모릅니다.”
—시신에 칼을 대는 행위는 ‘두벌죽음’이라 여기는 고정관념 때문에 변사자의 16~20%만 부검하는 현실입니다. 현대그룹 정몽헌(鄭夢憲) 당시 회장도 부검을 하지 않았고요.
“의혹을 해소하려면 부검은 절대적으로 해야 합니다. 뉴욕대 법의관으로 근무할 때, 위암으로 죽은 아버지의 사인을 정확하게 가려서 자식들이 대비해야 한다는 의사 아들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불효막심한 놈’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현명한 친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검시만 하고 부검을 하지 않은 장준하(張俊河·1918~1975)씨 변사 사건의 경우 40년 지난 지금 유골을 파헤친들 사인을 규명할 수 있습니까.”
“죽음은 편안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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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가장 높은 하늘로의 승천>(1500~1504). 두칼레궁전, 베네치아. 선택된 자의 영혼이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천사들의 도움으로 천상으로 올라가고 있다. 그 과정의 터널은 물리적 터널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한 깔때기꼴의 터널로서 죽은 이들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터널 출구에 임사체험자들의 증언처럼 눈부신 빛이 보인다. |
“몸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거나 혈액 순환이 되지 않거나, 심장이 멎을 수 있는 조건이면 다 죽습니다. 고무총으로 맞아 심장 쇼크만 받아도 사망합니다. 요즘엔 연수(延髓)라는 호흡중추가 살아 있다면 호흡이나 혈액 순환이 안 되더라도 뇌사(腦死)라고 해서 죽음으로 보지 않습니다만. 생물학적 연명만 하고 의식이 없으니까 인간의 존엄은 없지요.”
—의사들이 사망진단을 한 후 가장 먼저 보는 게 뭡니까.
“맥박을 봅니다. 심장에 청진기를 대보고, 눈꺼풀을 열어 ‘동공(瞳孔) 반사’를 확인합니다.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눈꺼풀을 열면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커져요. 의사들이 환자 눈꺼풀을 열고 플래시로 ‘탁탁’하고 비추는 것이 순간적인 반사를 보려는 것이죠.”
—그로테스크한 질문입니다만, 죽음 가운데 가장 고통이 덜한 죽음은 어떤 겁니까.
“의사로서 말한다면, 목을 매는 게 가장 고통이 적습니다. 목을 매면 뇌로 올라가는 목 양쪽의 경동맥이 순간적으로 체중에 의해 졸려지기 때문에 급격한 뇌빈혈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빈혈이 오면 ‘어이쿠’ 하지요. 그런 증상이 일시적으로 오면 목이 졸려 답답함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혼수상태에 빠지는 겁니다. 본인은 호흡이 멎는지도 모를 겁니다.”
—군(軍)에서는 자살자들의 팬티를 확인해 정액을 흘린 경우 자살자로 분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맞아요. 뇌가 갑작스레 기능을 못 하니까 각종 반사신경이 이완되면서 괄약근이 풀어지는 바람에 변을 보거나, 남자들의 경우엔 정액을 방출하지요. 목을 매는 것이 고통이 덜하다니까 생각이 나네요. 미국 뉴욕대 의대에 법의관으로 근무할 때, 하루는 현장에 가보니 젊은 남자가 목욕탕에서 액사(縊死·목매 죽음) 했더군요. 그런데 목욕탕 바닥을 보니 남녀가 키스하고 성교하는 각종 에로틱한 사진들이 널려 있어요.
이 친구가 의자를 놓고 목을 맨 채 혼수상태의 기분을 즐긴 것 같았어요. 너무 즐거움에 빠져 현실로 돌아오지 못해 목숨을 잃은 거지요. 뉴욕 법의관이 ‘우리나라에는 이런 사건이 흔하다, 너희 나라는 없느냐’고 해요. 당시엔 우리나라가 국민소득이 낮아 독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시대여서 그런 일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30년 전 미국의 일이 지금 우리나라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호기심 갖지 마세요, 하하.”
—최근 유체이탈이라든가,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한 경험들이 매스컴에 소개됩니다만, ‘사후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생에 대한 강한 애착과 함께 죽음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는 거부감 때문입니다. 특히 사후세계는 현재 종교와 철학만이 그 영역을 독점해 설명하고 있고요. 19세기 말 알프스를 등반하다 조난당해 체외이탈을 경험한 스위스 지질학자 알베르트 하임(1849~1937)이 체외이탈 연구를 처음으로 시작했고, 근래에 들어서야 과학이 드디어 ‘죽음의 이미지 체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임사체험자들의 경험을 종합하면, 영혼의 체외이탈→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터널체험→빛과의 만남→저승 도착→지나온 생에 대한 반성적 회고→장벽과의 만남→육체로의 회귀다. 특히 이들 경험자들은 촉감은 있지만, 아픈 것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문 교수는 “이때까지 보고된 체외이탈이나 임사체험 경험에 대해 그것이 현실세계에서 실제적 체험이건, 단지 뇌에서 느낀 환각이나 환상이건 간에 그것을 보고 느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의견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문 교수의 설명이다.
“의학적으로 체외이탈과 임사체험을 묶어 ‘임사현상(Near Death Phenomena)’으로 부릅니다.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1450~1516)는 <가장 높은 하늘로의 승천>이라는 그림에서 임사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임사 체험자들은 한결같이 ‘저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워 이승과 비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읍니다.
그러나 자살 미수자들은 체외이탈을 경험한 후 아주 캄캄한 곳에 있었으며, 아무도 자기를 돌보지 않아 강한 고립감이 들었고, 빛의 존재를 만난 적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죽음의 과정에서는 고통이 없고,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문국진 교수는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재벌이나 정치인, 지식인과 같이 살아 있을 때 자기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분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돈이고 명예고 다 필요 없다’며 울부짖는 모습을 수없이 보았는데, 그런 걸 생존시에 깨달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문 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국수다. 그는 지금도 매일 저녁식사를 국수로 한다. 그는 “밀국수도 좋고, 메밀국수도 좋고, 요즘은 날이 더워 콩국수에 비빔국수, 이열치열로 잔치국수도 즐겨 먹는다”며 “스트레스 받지 말고 속 편하게 뇌가 시키는 대로 하되, 운동은 빼놓으면 안 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