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列傳] 비현실적 카리스마의 배우 金學喆 : 월간조선

압도적인 현장감(現場感)을 보여주는 배우가 있다. 얼굴과 목소리와 몸짓의 총합이 독특한 카리스마와 비현실적 존재감을 내뿜는다. 연출가들은 그를 ‘역사의 현장에서 막바로 걸어나온 듯한 배우’라고 얘기한다. 김학철(金學喆) 이야기다.

—1959년 대전 출생이네요. 부모님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대전에서 가게를 하셨죠. 제가 4남2녀 6남매의 막내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식구들이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경동시장 한쪽에 경동극장이라는 영화관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일용직 목수도 하시고 노점상도 하시고…. 나중에 돈을 벌어서 대전상회라는 건어물 가게를 하셨죠. 지금도 경동시장에 가면 ‘누구누구 아들 아니냐’고,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 건네는 상인들이 몇 분 계십니다.”

예술가의 생애를 더듬어 가면, 유년시절의 기억이나 특별한 경험이 그의 생애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마법’이 아니고, 예술가 내면에 이미 깃들어 있던 어떤 자질이나 가능성이 알맞은 때와 장소를 찾아 살짝 모습을 내비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론(作家論)을 연구하는 학자나 비평가들은 예술가들의 어린 시절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면, 김학철이 유년을 보낸 대전(大田)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영화 <빠삐용> 보며 펑펑 울어

“도농(都農)이 공존하던 곳이죠. 대전역 앞 번화가가 있고 거기서 조금만 가도 바로 논밭이 나오고. 대전역 앞 중앙시장에 대전극장과 아카데미극장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영화팬이셨어요. 어머니 치마꼬리 잡고 자주 다녔죠. <꼬마신랑>과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제 유년의 영화입니다. 서울 와서는 청계천 아세아극장, 오스카극장, 대왕극장이 제 단골 출입처였죠. 중3 겨울방학 때 <빠삐용>을 보고 마지막 장면에서 통곡을 하듯 펑펑 울었습니다.”

—그렇게 영화관이 떠나가도록 울면 같이 갔던 친구들이 민망해하지는 않던지요.

“혼자 다녔어요. 혼자 가야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집중을 해야 하거든요. 저만의 세계를 스크린 이쪽에서 혼자 짓고 허물고, 나름대로 반응하고 때로는 대응도 해야 하니까.”

부모님이 하던 가게 옆에 극장 관계자들이 영화 포스터를 붙이고 갔다. 사례는 ‘포스터권’이라 불리던 초대권 2매. 그래서 김학철은 국내 개봉한 거의 모든 영화를 두 번씩 다 봤다.

“다른 형제들이 다행히(?) 영화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 연기(?)를 더 재미있어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고 온 영화를 식구들 앞에서 재연(再演)하곤 했거든요. ‘이번 일이 잘되면 다이아가 문제가 아냐. 마담, 심심한데 우리 뽀뽀나 할까?’ 제가 허장강(許長江) 선생님 연기를 흉내 내면 다들 박수치고 좋아하고. 초대권 독점부터 밥상머리 재연극(再演劇) 관객 동원(?)에 이르기까지, 제가 막내의 특권을 좀 많이 누렸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영화는 <마부>”

김학철이 가장 인상적인 영화로 기억하는 김승호(왼쪽) 주연의 <마부>.

—그렇게 영화를 많이 보았다면, 김학철이 꼽은 ‘내 인생의 영화’는 어떤 작품입니까.

“방금 이야기한 <빠삐용>(1973)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입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교도소에 수감된 범죄자가 정신병원으로 이감(移監)되면 좀 편할 것 같아서 일부러 미친 척하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정신병원에서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그 상황이 현대사회에 대한 강력한 풍자 같았습니다. 수간호사는 빅브러더(big brother)고 주인공 잭 니컬슨은 우리 자신이고.

하지만 제 인생 최고의 영화는 따로 있습니다. 나중에 DVD로 구해 본 <마부>(1961)입니다. 김승호(金勝鎬·1918~1968) 선생님의 연기를 보면서 탄복했습니다. 저것이 한국적인 아버지다. 시댁에서 쫓겨난 딸한테 ‘죽어도 시집 귀신이 돼라’고 다시 내쫓잖아요? 그 딸이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잖습니까. 그 딸 장례를 치르면서 ‘야 이년아, 내가 너를 죽으라고 했냐, 잘살라고 내쫓았지’라며 흐느끼는 장면이 있습니다. 애절하죠. 그런데 그 안에 경쾌한 속도와 리듬감이 살아 있는 겁니다. 울다가 말을 내뱉다가 탄식하다가 숨막혀하다…. 그 짧은 순간에 온갖 감정을 다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슬프지만, 전혀 질척거리지 않아요. 가위 신(神)의 경지에 오른 연기죠. 허장강, 이예춘(李藝春) 선생님의 연기도 제가 흠모하는 모델입니다.”

두 분의 자제인 허기호, 이덕화는 그래서 김학철의 팬이다. 자기 아버지의 연기를 기억하고 평가하며 재연까지 해 주기 때문이다.

“나를 배우로 이끈 건 재개봉관의 객석”

“저를 배우로 이끈 건 재개봉관의 객석입니다. 저걸 해야겠다, 중학교 이후에는 늘 배우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었어요. 연기를 하려면 기초를 닦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했습니다.”

78학번 선배가 박상원, 79학번 동기가 김혜옥, 80학번 후배가 이휘향, 한명구, 정원중, 홍원기다. 대학에서는 유진 오닐의 <긴 귀향로(路)>, 유치진 작 <소>, 안민수 연출의 <병사 보이체크> 등에 출연했다. 그렇게 하고 싶던 일이었는데, 이내 슬럼프가 찾아왔다.

“연기(演技)의 세계에 들어왔는데, ‘길’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만만치 않구나, 갈 길이 아득하구나,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절망하던 시절이었죠.”

한 학기를 남기고 군(軍)에 입대했다. 38사단 원주(原州) 문예선전대(문선대)가 그의 근무지다.

“수백 회 공연을 했습니다. 군의 특성상 별 일을 다 해야 하니까 MC도 보고 드라마 집필도 하고 연출에 연기에 장내 정리까지 다 했습니다. 횡성극장에선 군·관·민 위문공연도 하고 군인가족들만을 상대로 특별공연을 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하나도 귀찮거나 힘들지 않은 겁니다. ‘이 길이 내 길이 맞는 거로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생생한 무대감각도 기를 수 있었고. 이때의 경험은 지금도 큰 자산입니다.”

1983년 7월 말 제대를 하고 사흘 만에 학교가 있던 남산으로 올라갔다. 마침 제7회 대한민국 연극제에 참가한 오태석(吳泰錫) 작 김우옥(金雨玉) 연출의 <자전거> 연습이 진행 중이었다. 연출의 배려로 ‘거위집 아버지 한씨’ 역을 받았다. 그의 성인무대 데뷔작이다. 김학철은 <자전거>와 한 번 더 만난다. 극단 목화의 오태석 연출본 <자전거>(1987)에선 황석구 역을 맡아 열연했다.

“참여하고 싶다니까 김우옥 선생님이 바로 대본을 주시며 캐스팅을 해 주셨습니다. ‘군대 가기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면서. 감격해했습니다. 즉석 캐스팅은 이미 저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요.

같이 공연했던 박영규 선배도 잊을 수 없는 분이죠. <자전거> 끝나고 곧바로 84년에 공연한 동랑레퍼터리 정기공연 안민수 연출의 <리어왕>에도 함께 출연했는데 저에게 연극의 열정을 가르쳐 준 분입니다. 버스 타러 남산자락 내려가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학철아, 오른발부터 옮기는 것이 무게중심을 통제하는 데 유리하다’, 이러면서 즉석시범을 보이는 겁니다. 이 두 작품이 저를 연극세계의 ‘붙박이’로 만들었습니다. <리어왕>에서는 최종원, 윤승원, 이희도, 정승호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한무대에 선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어요.”

김학철의 성인무대 데뷔는 그 몇 년 전이 될 수도 있었다.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우기는 해야겠는데 그때만 해도 연기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땅한 곳을 찾다가 1978년에 극단 현대극장에 4기 연구생으로 입단했습니다. 재수할 때였죠. 6개월인가, 3개월마다 연구생을 뽑았는데, 1977년 1기 연구생 중에 한 분이 김갑수 선배입니다.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말(馬)의 앞다리’ 역을 받고 매일 뚝섬 경마장에 출근을 하더라고요. 말의 움직임을 연구하기 위해서. 선배들이 ‘저 친구는 뭐가 돼도 될 것’이라고 뒤에서 칭찬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태>에서 박팽년 역

1986년 공연한 연극 <태>의 대본.

극단 현대극장과는 1990년 이윤택 연출의 <청부>를 하며 ‘마음의 빚’을 갚았다. 김갑수와는 연극 <길 떠나는 가족>(1991)에서 재회했고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2000년 4월~2002년 2월)에서 궁예의 책사 종간(김갑수)과 왕건의 오른팔 박술희(김학철)로 다시 만났다.

극단 목화는 김학철의 출발점이다. 1984년 창단멤버로 입단, 6년간 매일 여덟 시간씩 연습하며 연극에 열정을 불태우던 곳이다. 박영규가 ‘오태석 선생은 천재다’라며 입단을 권유했다. 김학철은 <아프리카> <필부의 꿈> <춘풍의 처> <태(胎)> <자전거> <부자유친(父子有親)> <비닐하우스> <불의 나라> 등에 참여했다.

—목화 시절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태>입니다. 제 역은 박팽년(朴彭年)이었는데, 사극(史劇)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제 연기의 자양분(滋養分) 역할을 한 명작입니다.

언젠가 이 작품을 제 방식대로 해석해서 공연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예컨대 신숙주(申叔舟)를 동성애자로 묘사하면 신숙주와 그의 친구들인 사육신(死六臣) 사이의 정신적 갈등이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을까요. 표정은 온화한데 말이 섬뜩하거나 반대로 말은 온화한데 눈빛이 강렬하면 그 불일치에서 오는 대비가 관객들을 긴장시키겠지요. 저처럼 독특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 냉혹한 동성애자를 연기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네요.

<비닐하우스>도 잊을 수 없습니다. 연극을 한다기 보다는 일상생활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희한한 체험이었는데, 역설적으로 연극성이 가장 뚜렷했던 작품이라고 기억합니다.”

“단원 모두 상상력을 중시하는 극단 목화”

1989년 3월 동숭아트센터 개관기념으로 공연한 <비닐하우스>는 객석에 불을 켠 채 관객들을 맞았고, 배우들이 나름대로 쾌적해 보이는 수용소에 누워 관객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종이곽을 던지며 한동안 자기들끼리 놀다가 자연스레 이야기 속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김학철 연출의 <태>는 상상만 해도 흥미진진합니다. 오태석 선생께 이 아이디어를 말씀드린 적이 있나요. 오태석은 어떤 연출가입니까.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 선생님의 상상력은 제 상상력과는 급과 격이 다르니까요. 족탈불급(足脫不及)입니다. 오 선생님은 존재 자체가 연극적인 분입니다. 술자리 가면 옆 사람을 꼬집으세요. 지금도 그러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바로 옆자리는 앉지 마세요. 하하. ‘삼천포아가씨’가 애창곡이시죠. 그분 부친이 6·25 때 납북되었는데, 저는 오 선생님의 개인사와 ‘이제 가면 오실 날짜 일 년이요 이 년이요’라는 가사 내용이 자꾸 겹쳐지더군요.

오 선생님의 ‘진실이 가질 수 있는 치장마저 버려라. 그것이 바로 연극의 원초적인 힘이다. 항상 의외성을 찾아라. 관객들로 하여금 저 인물이 왜 저기서 저렇게 움직이나, 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말씀은 지금도 제 배우 생활의 지침입니다.”

—극단 목화는 지금 거의 국내 유일의 동인제(同人制) 극단입니다. 목화의 장점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단원들 모두가 상상력을 중요시합니다. 연습을 끊임없이 하고, 정말 엄격하게 하고, 공연을 하면 개막 직전까지 대사와 동선(動線)을 고치죠.

매일 공연이 끝나면 오 선생님의 ‘메모’를 받는데, 목화 배우들은 그래서 결과적으로 매번 ‘다른’ 공연을 합니다. 부분적인 수정으로 그치는 날도 있지만, 아예 결말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형이 동생을 죽이는 이야기가 동생이 형을 죽이는 이야기로, 둘 다 죽는 비극으로, 둘이 화해하는 해피엔딩으로 바뀌는 식이죠. 결론을 바꾸려면 중간의 극적 교차로들도 다 손봐야 하니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는 겁니다. 실수가 동료들 전체에게 피해를 주니까 깜빡하는 날은 정말 쥐구멍이 따로 없어요. 그런 심정으로 무대 위에서 연극의 나머지 부분을 연기하며 관객들을 상대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두 번 다시 실수를 하려야 할 수 없게 됩니다.”

김학철은 오태석을 ‘최초의 관객으로서 배우들의 모든 행위, 즉 연습과 공연을 즐겁게 진행하도록 이끄는 탁월한 거장(巨匠)’으로 묘사했다.

“<춘풍의 처>를 공연할 때 2층 객석에서 선생님이 발을 구르며 폭소를 터뜨리시는데, 배우들이 전부 자신감이 증폭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없이 우리 연기를 지켜본 연출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건 일도 아니겠다 싶었던 겁니다.”

지난달 ‘배우열전’의 주인공 한명구는 대학도 목화도 김학철의 1년 후배다.

“대사 외우며 망우리 공동묘지 지나”

부산 용두산공원에서 아내와 함께. 아내는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보고 김학철의 성실함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제대 후 친구 소개로 중소기업에 다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김학철은 ‘소박하고, 내 얘기에 엄청나게 웃어 주던 사람’으로 연애시절을 추억한다.

“공연 때마다 찾아와서 삼계탕 사 주고 삼겹살 구워 주고, 저를 정말 많이 격려해 주었습니다. 제가 들고 다니던 <자전거>의 너덜너덜한 대본과 양은도시락을 보고 ‘이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구나’ 확신을 했답니다. 도시락밥을 이등분해서 점심·저녁을 라면 국물에 말아 먹던 시절이었는데, 그게 또 그렇게 가슴이 아팠다네요.”

처가에서 반대는 없었다. 장녀(長女)가 예비사위를 인정했으니, 그 결정을 존중한다는 분위기였다.

—결혼 전엔 연극에 전념하다가 결혼 후에 가족이 생기고 나면 배우들의 1차 방황이 시작됩니다. 연극배우라는 것이 안정적인 직업이 아닌 데다 전망이 뚜렷한 일도 아니니까요.

“저도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버스에서 옥편(玉篇)을 팔기도 했죠. ‘기사님의 안전운행을 빌면서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수원 사시던 저의 10대조께서 과거에 낙방하시고…’ 판소리 사설을 주욱 늘어놓는 겁니다. 버스 소음이 심하면 일부러 입만 벙긋거려서 승객들이 더 쳐다보게 만들었죠. 원가는 950원, 봉투값 50원, 판매가는 2000원이었습니다. 첫날 40권을 팔았습니다.

이태원에서 망우리 신혼집 단칸방까지 걸어간 적도 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네 시더군요. 오태석 선생님이 쓰신 뮤지컬 <메밀 꽃 필 무렵> 대사를 외우며 한겨울에 공동묘지를 통과했습니다. ‘마누라가 몸 판 돈을 다 써 버렸으니 집에 갈 수도 없고, 에라 이놈의 거, 엽전 두 냥 남은 걸로 약이나 사, 내가 죽는 게 낫지.’ 차비도 없는 제 처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대사인데, 비참하면서도 눈물 대신 오히려 흥이 나더라고요.”

카페 하면서 인간유형 연구

김학철은 연극 <청부>로 1991년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다. 뒷줄 왼쪽이 김학철.

그래도 일단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친구들에게 100만원씩 빌리고, 일수도 써 가며 카페를 열었다. 불교방송 옆 ‘유리핀’이라는 가게였다.

“‘유리핀’은 ‘유리로 만든 핀’이라는 뜻입니다. 신데렐라 구두를 상상하면서 지은 상호입니다.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주방 아주머니 한 분 두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1994년 KBS 주말드라마 <남자는 외로워> 이후 수입이 늘면서 카페를 정리했지요.”

카페는 김학철에게 인간유형을 연구하는 실험실이었다. 술 취하기 전 점잖던 분들이 취해 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주인인 그가 온갖 주정을 다 받아줘야 했다. 단골이던 대기업 송(宋) 이사님은 강아지가 죽었다고 밤새워 우시고, 목포백작으로 불리던 조폭은 젠틀했고, 형사반장이 찾아와 사건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한편, 불교방송 기자들은 취재 뒷얘기를 털어놓았다.

“취객에는 대략 네 유형이 있습니다. 같은 사람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돌변형, 계속 웃는 실소(失笑)형, 하염없이 우는 낙루(落淚)형, 중언부언형, 이렇게. 취객의 성격과 유형에 맞춰 적절하게 응대해야 단골도 되고 매상도 오릅니다. 저는 거기서 모든 인간유형에 대한 리액션을 배운 거죠. 자기 연기, 즉 액션보다는 남의 연기에 반응하기, 즉 리액션을 잘하는 배우가 좋은 배우 아닐까요? 저는 카페에서 리액션의 다양한 경우를 실습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연출가 이윤택(李潤澤)이 <청부> 대본을 들고 출연을 청했다. 동독(東獨) 극작가 하이네 뮐러가 통일 직전에 발표한, 혁명에 대한 고찰을 담은 작품이다.

<춘풍의 처>로 동아연극상 수상

“이 선생이 극단 목화의 <춘풍의 처>를 부산으로 초청한 적이 있거든요. 제 연기를 보고 머릿속에 담아 놓으셨답니다. 대본을 보는데 바로 전율했습니다. 아, 이건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작품이다. 바로 한다고 그랬죠.”

김학철은 이 작품으로 1991년 동아연극상을 받았다. 이윤택과의 인연은 강부자의 아들이자 맞상주로 나섰던 <오구>, 손숙의 아들로 출연했던 <어머니>, <우리 시대의 리어왕>, 극단 유의 창단공연 <문제적 인간 연산> 등을 거치며 6년간 이어졌다.

—이윤택은 한국 연극계에서 자기세계를 완성한 몇 안 되는 연출가 가운데 한 분입니다. 같이 작업하면서 어떤 점이 인상적이던가요.

“연출라인이 확고하고, 잘 고치지 않습니다. 오태석 선생님과는 작업방향이 정반대인 셈이지요. 이윤택 선생은 배우의 잠재력과 장기를 최대치까지 뽑아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눈물의 여왕>의 이혜영·전도연, <길 떠나는 가족>의 김갑수, <문제적 인간 연산>의 유인촌, <청부>의 김학철, 다 배우들의 대표작 아닙니까. 제게는 ‘극 전체의 리듬과 템포, 에너지를 세심하게 배분하라’고 주문했죠. 오태석, 이윤택, 두 분 모두 열정의 화신(化身)이라는 점은 공통입니다.”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한 채윤일(蔡允一) 연출의 <불의 가면>(1993)은 매회 공연 거의 만석을 기록한 작품이다. 극작가 나연숙과 운군일 PD가 우연히 공연을 보러 왔다가 ‘감동했다’며 분장실까지 찾아왔다. 이 인연으로 김학철의 TV시대가 열린다.

“채윤일 선생은 저의 개성을 존중하고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도록 격려한 분입니다. 대사에 호흡을 섞어서 저미는 호흡을 해 보라, ‘말 반(半), 공기 반으로 해 보라는 말씀도 해 주시고.”

적군파 테러리스트로 誤認받기도

‘개성(個性)’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깐 말머리를 돌려 보자. 얼마 전 북한의 생활상을 소개하는 모(某) 종편TV 프로그램에서 탈북자들이 김학철을 북한의 인민배우 최창수와 닮았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북한 영화 <임꺽정>인지를 방송국에서 자료화면으로 구해다 보여주는데, 제가 보기에도 형제지간처럼 생겼더라고요. 누구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듣습니다.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 조직인 적군파(赤軍派) 수괴와 닮았다고, 다른 단원은 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는데 저만 혼자 공항에 억류된 적도 있고, 중국에서는 폭력조직 삼합회(三合會) 보스 아니냐며 공안(公安)이 불러 세워 조사를 한 적도 있어요.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아니었죠. 오죽하면 제가 연극상 탄 신문기사 오려서 수첩에 넣고 다니면서, 거기 제 사진도 실렸거든요, 검문 걸리 때마다 ‘이게 바로 나’라며 자체증명을 했겠습니까?”

극작가 나연숙(羅蓮淑)은 주말극 <남자는 외로워>에 전도사 역으로 김학철을 추천했다. 거의 준(準) 주인공 급의 꽤 비중이 있는 역이었다.

—TV는 그 작품이 처음입니까.

“아닙니다.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 대하드라마 <임진왜란> 편에서 ‘군사2’로 나왔습니다. 대사는 ‘장군, 피하시오’라는 한마디였습니다. 2001년에 박술희 장군 역을 맡으면서 아내에게 ‘병졸에서 승진해서 별 다는 데 15년 걸렸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1992년 2월 설날 특집극 선우완 연출 <어두운 손>이 본격적인 방송 데뷔작입니다. 극본을 쓰신 이환경 선생님이 저를 뽑아 주셨습니다. ‘저한테 남성적 풍모가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영혼과 의식의 자유를 추구하는 도예가 얘기였어요. 도예가인 아버지 전무송의 아들 역이었죠.”

이환경과 장영철

이환경 작가는 김학철을 자신이 쓰는 작품에 3회 연속 캐스팅해 준 ‘은인’이다. <야인시대>의 조병옥 역, 기업인들의 이야기 <영웅시대> 등 무려 7~8년을 함께 일했다. ‘3연속 기용’으로는 <대조영> <자이언트> <돈의 화신>에서 연속 기회를 준 장영철 작가도 잊을 수 없다. 작가 말고도 김학철의 연기를 주목한 사람이 더 있다. 운군일(雲君一) 전 SBS 드라마국장이다. 그는 김학철을 이렇게 평가한다.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선 굵은 연기를 하더군요. 1996년에 <레미제라블>을 번안한 16부작 <도둑>의 박 반장(자베르의 번안)은 한진희씨가 연습 중이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대타를 찾아야 했습니다. 제가 김학철씨를 추천했지요. 결과가 좋아서 저도 체면이 섰습니다. 이듬해 주말극 <꿈의 궁전>에도 자신 있게 천거했는데, 조폭 보스 왕곰 역을 맡아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 주었어요. 김학철은 제가 보기에 카멜레온 같은 배우입니다. 선악(善惡)을 초월해서 표현이 가능하고, 생활 면에서도 준비와 약속에 철저한 사람입니다. 대인(對人)관계가 좋아서 제작진을 뭉치게 만드는 힘이 있고요. 그래서 처음 봤을 때부터 ‘아, 이 배우 오래가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둑>의 열연은 <태조 왕건>으로 이어진다. 평균 시청률 40%, 궁예가 죽을 때 60.2%의 기록적 시청률을 찍은 국민사극이다. 궁예의 ‘안대’가 백화점에서 판매될 정도였다. 여기서 김학철이 맡은 역은 왕건의 오른팔 박술희 장군, 적장(敵將)인 견훤의 여동생 대주낭자와 사랑에 빠지는 인물이다. 김종선 PD가 김학철의 이력서를 들고 사장단을 찾아가 ‘서류심사’ 끝에 캐스팅을 확정했다는 일화가 있다.

<왕건>의 박술희 맡으면서 삭발

사극 <태조 왕건>에서 박술희 역을 맡은 김학철은 이후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박술희가 왕건이 임종할 때 바로 옆에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받은 인물이잖아요. 그런 큰 역을 맡기에는 제 경력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김 PD가 윗분들을 설득하신 겁니다. 이분도 제 은인이죠.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분들은 다 제 은인이십니다. 오늘날의 저를 만드는 데 다들 적지 않은 도움을 주셨으니까요. <태조 왕건> 대본을 읽자마자 ‘삭발한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처음엔 연출이 반대했습니다. 궁예가 삭발을 했으니까 이미지가 겹치잖아요. 작가에게 허락을 받으면 오케이라길래 이환경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이 드라마 2년 간다. 삭발하면 다른 작품은 아무 것도 못할 텐데 괜찮겠나?’라시더군요. ‘전념하겠습니다’라고 답 드리고 바로 머리 잘랐습니다.”

모든 육고기를 좋아하고 개미나 두꺼비도 마다않는 호탕한 식성에 적장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독특한 인물이니 보통의 헤어스타일로는 표현이 어렵겠다고 본 것이다. 러브라인은 처음에 1회용 에피소드였는데 ‘너무나 재미있는 상황’이어서 길게 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예상이 맞았다.

“분장팀이 좋아했죠. 주요 배역이 둘이나 삭발을 해서 일거리를 줄였으니까요. 다만 궁예와 구분을 하기 위해 호랑이 수염을 붙였습니다. 박술희 장군의 호방한 웃음은 매일 남산에 올라 연습한 결과물입니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자 면천 박씨 문중에서 ‘우리 문중을 빛내 줘서 고맙다’고 연락이 왔다.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님 소원이 김학철 님에게 술 한 잔 대접하라’는 것이었다며 종손(宗孫)이 찾아와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사 줬다.

드라마와 현실을 넘나든 지점에서 밥을 사 준 사람이 한 분 더 있다.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이다.

<야인시대>에서 조병옥 역 맡아

“<야인시대>를 보시고 비서를 통해서 전화를 주셨어요. ‘조병옥 박사랑 어찌 그리 목소리와 외모가 비슷하냐’시더니 63빌딩 중식당으로 작가와 연출, 주연배우들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조 박사가 서거 사흘 전에 나한테 국제전화를 하셨다. 그때 내가 동아일보 정치부 초년병 기자였는데, 이봐, 만섭이, 수술 잘 끝났어. 여기 미국이야. 3일 후에 귀국하니 걱정하지 마. 우리 용금옥(추어탕집)에서 한잔 하자구, 그러셨거든. 조 박사 서거 후 내가 통곡을 했어요’라며 옛일을 회상하시더군요. 조병옥 박사는 음성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 몸짓이나 말투가 우연히 조병옥 박사의 동작과 어투와 비슷했던 것이겠지요.”

—<태조 왕건>이 대중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첫 작품이죠.

“1회 방송이 나가고 시청자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남대문 시장에 갔는데 손님, 상인 다 난리가 났습니다. 그전하고 확실히 달랐죠. CF도 다섯 개나 찍고, 상도동에 아파트도 한 채 구입했습니다. 제 노력으로 돈을 벌어서 집을 샀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자식에게 집 사 주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싶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김학철을 두고 대중들이 기억하는 또 다른 이미지는 <대조영>에 나오는, ‘대조영의 오른팔’ 흑수돌이다. 역사에 실존하는 인물은 아니고 드라마의 설정이다.

“그래서 제 별명이 ‘오른팔 전문배우’입니다. 흑수돌은 유행어도 있죠. ‘간나쉐끼, 날래 덤비라우.’ 작가와 연출이 ‘대본을 참 맛깔나게 소화한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문경(聞慶) 촬영장에 초등학생들이 단체견학을 오곤 했는데 저보고 그 말 한마디만 해 달라는 부탁이 끊이질 않았죠. 귀찮다기 보다, 관객과 공감하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연극무대에서 느꼈던 희열을 다시 맛보기도 했고요.”

“변학도, 리어왕, 이성계 해 보고 싶어”

1998년 연극 <까리귤라>에서의 김학철(오른쪽).

—사극에 주로 출연한 이유가 있습니까.

“워낙 사극 이미지가 강해서 그쪽 일이 거듭 들어왔습니다. 현대물도 많이 했어요. KBS 일일드라마 <우리가 남인가요>(2001)는 나훈아 가객(歌客)이 생애 최초로 드라마 주제가를 쓰고 직접 부르기도 해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입니다. 배종옥씨와 듀엣으로 부른 ‘아담과 이브처럼’이라는 노래였죠.”

김학철은 리액션이 탁월한 배우로 주현(朱玄)을 꼽는다.

“<우리가 남인가요>에서 제 형님으로 나오셨습니다. 녹화 끝나고 거의 매일 어울렸어요.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이분이 월남전에 참전한 장교 출신인데,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주변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십니다. 여기에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던지는 즉흥대사까지…. 그 빛나는 연기력을 꼭 배우고 싶습니다. 제가 정말 인복(人福)이 많은 사람이죠?”

—인복 이야기를 하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이정재씨가 ‘나는 김학철 선배에게 연기를 배웠다’고 하더군요.

“<모래시계> 끝나고, 이정재씨가 방위병으로 근무할 때 저한테 와서 ‘연기지도’를 받았죠. 왜? 둘 다 스케줄이 없었으니까. 친해지기는 <남자는 외로워>에 같이 출연한 것이 계기입니다. 오태석 선생님 작품 <자전거>와 <아프리카> 대본을 놓고 편안하게 대사 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중에 이정재씨가 저 연극할 때마다 티켓을 사 주고, 제가 영화 <본 투 킬>을 할 때 의상 열두 벌을 대여해 주기도 했습니다. <은행나무 침대> 시사회 때는 제 옆에 앉아서 관객들 다 들으라고 ‘여기 병원장님 앉아 계시네’라고 큰 소리로 말하기도 하고….”

—영화는 더 안 하나요.

“하고 싶습니다. 인연이 이어지질 않았을 뿐이죠. 제가 장현수 감독의 <본 투 킬>로 1996년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좋은 작품을 더 남겨야 한다는 마음의 빚이 남아 있죠. 영화는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보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인간의 희로애락을 극소(極小)에서 극대(極大)까지 표현하는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춘향전>의 변학도, <햄릿>의 클로디어스, <리어왕>의 리어가 ‘제 마음속의 배역’입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성계(李成桂)도 한 번쯤은 연기하고 싶습니다.”

—김학철에게도 연기가 어렵습니까.

“그럼요. 연기를 쉽게 생각하는 배우는 없습니다. 쉬운 것과 편안한 것은 다르죠. 어머니한테 ‘엄마, 왜 연기가 잘 안 되지?’라고 하소연한 적도 있습니다. ‘관객이나 카메라가 엄마라고 생각하고, 엄마에게 얘기하듯이 해 봐. 엄마 앞에서 떠는 사람은 없잖냐’가 대답이셨어요. 진지하게 말씀드립니다. 엄마의 잔소리에 보물이 숨어 있어요. 연기를 잘하려면, 잔소리를 관찰하세요.

또 하나 방법이 있다면, 대본을 손으로 쓰는 겁니다. ‘작가가 이런 심정으로 이 대사를 썼겠구나’라고 상상하면서. 그 느낌이 인쇄대본에서 원고지로, 글자를 적어 나가는 손끝에서 머릿속으로 또 가슴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틈이 날 때마다 셰익스피어를 필사(筆寫)하곤 합니다.”

“죽을 때까지 연극할 것”

1997년 상연한 러시아 정통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김학철은 첫째 아들 드미트리 역을 맡았다. 왼쪽부터 김학철, 정경순, 추상미.

—김학철이 생각하는 좋은 연기란 어떤 겁니까.

“흐르는 물 같은 연기죠. 물살에 내 몸을 맡겨야 자연스러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살을 거스르지도 말고 너무 힘주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잠겨 있어서도 곤란합니다.”

—연기에 관한 최고의 조언을 들려주신 분이 어머니시로군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죠?

“<대조영> 찍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날 PD가 빨리 가 보라고, 제가 나오는 장면을 ‘몰아찍기’ 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분장도 못 지우고 빈소로 달려갔어요. 배우의 숙명이죠. 대하드라마가 좋은 건, 빈소에 200명 이상 문상을 오더라는 겁니다. 그때 읽던 책이 브레히트의 시집(詩集)이었는데, ‘어머니’라는 시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녀는 거의 땅을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가벼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인가.’ 정말 좋은 글은, 연극은, 드라마는 시공과 국적을 초월한다는 걸 느낀 구절입니다.”

—한동안 연극을 하지 않았습니다.

“2013년에 명동예술극장에서 <햄릿>을 했죠. 12월 4일부터 29일까지 전회 매진이었습니다. 오경택 연출, 제 역은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우스였죠. 고향에 돌아온 듯하고 정말 좋았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연극을 할 겁니다. 연극 출연이 뜸했던 건 까닭이 있습니다. 충분한 연습 없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 연극에 대한 불경(不敬)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역을 잘하는 배우가 롱런한다”

김학철의 다음 프로젝트는 드라마다. 8월 초순에 방영하는 OCN 10부작 드라마(천정명, 김소현 주연)의 김 회장 역이다. 아들을 잃고 복수를 꿈꾸는 사업가다.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입니까.

“액션보다 리액션이 좋은 배우, 남의 연기를 잘 받아들이는 배우죠. 보편적 역을 잘하는 배우도 좋은 배우죠. 남자배우라면, 아버지 역을 잘하는 배우가 롱런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발언 부탁 드립니다.

“제 작은할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신데 105세십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하면, 제 연기인생은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터키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에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중략) 최고의 나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제 생애 최고의 배역은 아직 받아 보지 못했고, 대표작은 미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이 인터뷰가 자기점검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김학철이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매로 안광(眼光)을 뿜으며, 그러나 부드럽고 살가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105세 작은할아버지시라면 혹시 <1박2일>에 최고령 시청자로 뽑혔던 그분? 나중에 전화로 확인해 보니 필자의 추측이 옳았다. 그러고 보니 김학철의 가족 중에 유명인이 두 분이나 있는 셈이었다. 작은할아버지와 그의 둘째 형인 김창수 전 국회의원. 필자는 105세 최고령 현역배우 김학철의 모습을 혼자 상상하며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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