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列傳] 연극계의 차세대 에이스 韓明求 : 월간조선

현존하는 한국 연극연출가 가운데 가장 우뚝한 봉우리가 임영웅(林英雄·78)과 오태석(吳泰錫·74)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임영웅은 한국 신극사(新劇史)의 정통흐름인 리얼리즘 연출론의 계승자이며 오태석은 연극의 원초적인 놀이성과 신명을 우리 정서에 맞춰 되살리고 극대화한 창조적 파괴자다.

이 둘과 작업을 함께 했고 이 둘로부터 모두 극찬을 받는 배우, 놀이성과 지적(知的) 서사(敍事)와 진지함 같은 한 몸에 깃들기가 어려운 요소들을 두루 구비한 배우가 있다. 한명구(韓明求·54)다. 많은 연극평론가들은 한명구를 ‘차세대 한국연극의 에이스’로 꼽는다. ‘차세대’라지만 그도 벌써 50대 중반이다. 얼핏 보아 양립(兩立)하기가 쉽지 않을 듯한 두 거장(巨匠)의 연극세계를 누빈 한명구의 능력과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가 이번 인터뷰를 기획한 배경이다.

―먼저 호적조사를 좀 하겠습니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는지요.

“아버지 성함은 한서현(韓瑞鉉), 어머니 성함은 이화용(李花容)입니다. 아버지는 1929년생이시고 200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1933년생. 어머니는 결혼 전에 초등학교 교사를 잠깐 했고, 아버님은 직업군인이었죠. 육군 장교로 제대하고 오랫동안 재향군인회에서 근무했습니다.”

한명구는 군인가족이다. 백부는 소령 제대, 작은아버지들도 다 장교로 복무했다. 부친은 충북대 1학년 재학 중 6·25가 터지자 곧바로 자원 입대했고, 장교학교를 거쳐 수송부대 장교로 전선을 누볐다.

“그래서 어린 시절 제 꿈도 군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 사관학교 시험을 볼 수 없었고, 대학에 가서 ROTC를 하겠다고 생각하고 공대 진학을 목표로 했는데, 재수까지 하고서도 건축공학과 시험에 다 떨어졌죠.”

軍 입대 연기하기 위해 서울예전 진학

그렇다면, 연극은 언제 그에게 손을 내민 걸까. 어린 시절의 매혹(魅惑) 없이, 그는 어떻게 이 거칠고 험하며 무엇보다도 불확실하고 가난한 세계로 발을 들이민 걸까.

그가 대학에 떨어지자 부모는 아예 서울로 이사를 했다. 남영동에 있는 정일학원에서 재수를 했지만 또 떨어졌다.

“그때는 3수를 하면 바로 군(軍)입대를 해야 했습니다. 바로 군입대를 하지 않으려면 일단 어디든 대학에 적을 두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입시자료를 다 구해서 보고 서울예대 연극과를 선택했습니다. 합격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이 지원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서울예대 연극과는 2014년 현재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학하기 어려운 곳 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예대 연극과는 후기 전문대, 그것도 야간이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직장인들을 위한 배려였겠지만, 한명구로서는 경쟁률이 높지 않을 테니 상대적으로 입학이 수월하겠다고 계산했다고 한다. 서울예대 연극과 야간부 동기가 정원중·김병호, 같은 해 주간부로 입학한 동기가 홍원기와 이휘향이다.

―그럼 그 전까지는 정말로 연극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다른 배우들은 어린 시절 연극과 만나고 황홀경에 빠져든 마법 같은 순간에 대해 다 얘기를 하셨습니다.

“재수를 마칠 때까지는 연극을 본 적도, 한 적도 없습니다. 영화도 단체관람으로 이소룡 영화 몇 편을 본 정도죠. 굳이 예를 들자면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성극(聖劇)을 한 적은 있습니다. 그것도 나중에 인원이 부족해서 급거 합류한 경우고, 대사도 ‘그분 오십니다’ 딱 한 문장이었죠. 연출하던 선배가 ‘목소리가 좋다, 연극적이다’라고 칭찬해 준 건 기억이 납니다.

세광고에선 합창반 활동을 하며 4중창단 멤버이기도 했는데, 음악 선생님이 ‘넌 타고난 베이스다. 성악 한번 해 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적은 있습니다. 제가 청주 촌놈이라, 음악은 왠지 여성들이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냥 흘려들었지요.”

얼떨결에 진학한 대학이었지만, 서울예대의 수업은 한명구에게 신세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예대는 매 학기 공연을 하거든요. ‘실기와 결합된 공부’가 그렇게 신나고 즐거울 수가 없는 겁니다. 재수를 하면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다 풀리고, 고통이 해소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입학 후에 탈춤반에 가입했는데, 제 몸이 다른 친구들보다 유연하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초등학교 때 육상과 핸드볼 선수를 했거든요. 1학기 때 <리투아니아>, 2학기 때 몰리에르 작 <할 수 없이 의사가 되어>를 공연하면서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정직한 연극

한명구는 2011년 제21회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에서 수상자 배우 한명구씨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으로부터 상패를 받고 있다.

양정현·유인형 두 교수가 한명구를 눈여겨봤다. 유치진(柳致眞) 선생의 딸인 유인형 교수는 한명구에 대해 “하나하나 성실하게 계산을 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줬던 학생”으로 기억한다. 1984년 졸업작품인 유치진의 대표작 <소>를 연출하고 주인공 국서 역까지 맡아서 한 배우라서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한명구에게 유인형 교수의 평가를 들려주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보기에도 재능이 출중한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예고 출신이나 고등학교 때 연극반 활동을 했던 친구들은 저보다 많이 앞서 있었어요. 잘하는 친구들의 연기가 멋있어 보이는데, 제가 바로 그 단계까지 점프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정직하게 연극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작품을 더 열심히 분석하고, 연습장에도 가장 먼저 나가고, 발성(發聲)연습·신체훈련 남들보다 조금 더 하고…. 벽돌을 한장 한장 쌓듯이 차곡차곡 공부를 한 겁니다. 튀는 재능도 없고 출발도 늦었으니 모든 걸 성실하게 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 방식이었죠. 교수님들도 그런 점을 좋게 봐 주신 것 아닐까요?”

연극 <아프리카>가 준 충격

‘일단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맘 편하게 제대로 연극을 해 보자’ 생각하고 해군에 지원했는데 ‘안경 쓰고 수영하는 해군 봤느냐’는 한마디에 뜻을 접었다. 전투경찰이 지원병이라 바로 입대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망설이지 않고 원서를 냈다. 서울 근무를 희망했는데, 제주도에 남제주 서귀포전경대가 새로 창설되면서 제주도로 발령이 났다. 북제주군 전경대에서 해안초소를 경비하며 31개월을 지내는 동안 연극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졌다. ‘배우의 몸’을 만들어 제대하겠다는 생각으로 몸관리 열심히 하면서 생활했다.

1983년 12월에 제대를 하고 이듬해 복학을 했다. 제대 후에는 집에도 가지 않고, 거의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며 연극에 빠져들었다. 방학 때도 탈춤반에서 하루 종일 춤추고 공연도 했다. 졸업작품을 제대로 해 보고 싶어서 미리 적역이다 싶은 배우들을 섭외해서 <소>를 공연했다. 한명구는 이 작품으로 서울예대 학생이라면 누구나가 선망하는 ‘예술의 빛’ 상을 받았다.

―오태석과의 만남은 졸업 이후가 되겠군요.

“고등학교 때 제 목소리가 좋다고 칭찬했던 성극 연출가가 KBS 성우 김태웅 선배입니다. 집에다 ‘졸업 후엔 안정된 직장을 찾겠다’고 약조를 했거든요. 방송국 성우 시험을 봤습니다. 최종까지 가서 낙방했는데, 잘됐다 싶었죠. 최선을 다하고 떨어진 거니까 집에다 드릴 말씀도 있고, ‘이제는 연극을 마음껏 해도 되겠구나’라는 안도감도 들고.

졸업 전에, 당시 목화 단원이었고 지금은 아동극을 하는 탈춤반 1기 송인현 선배가 동아리 방으로 찾아왔습니다. 1984년 12월에 공연한 극단 목화의 창단 공연 <아프리카>의 티켓을 팔았어요. 공연 보고 ‘와, 이런 연극이 다 있구나’라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非)사실주의 연극이 이렇게까지 내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니! 졸업하고 반드시 극단 목화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금은 마임을 하는 유홍영 선배에게 연락하고 졸업식 직전에 홍원기와 둘이서 목화 연습실을 찾아갔습니다.”

지금은 극작가이자 배우로 활동하는 홍원기는 입학 후 바로 군대를 다녀온 3수생 출신의 복학생으로, 당시 직책은 탈춤반 반장이었다. 목화의 연습실은 서초동 삼익상가 5층에 있었다.

MBC는 창사 30주년 기념 프로젝트로 두 가지 공연을 기획한다. 하나가 1930년대 소설을 뮤지컬로 꾸미는 것. 또 하나는 전통의 현대화. 전자(前者)는 오태석에게 의뢰해서 2년에 걸쳐 <메밀꽃 필 무렵>과 <봄 봄>으로 이어졌고, 후자(後者)의 결과물인 마당극은 주관 단체가 바뀌기는 했지만 30년 넘게 꾸준히 공연을 거듭하고 있다.

오태석이 이때의 연출료로 마련했던 공간이 지금은 재개발로 헐려 없어진 서초동 삼익상가 5층의 연습실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바로 아래층인 4층을 빌려 처음 포교를 시작했던 ‘도심 속 사찰’도 훗날 크게 번성한다. 능인선원이다.

한명구와 홍원기는 오태석에게 즉석에서 캐스팅된다.

“1985년 2월 <아프리카> 재공연 때 일인다역(一人多役)으로 출연한 것이 제 성인무대 데뷔입니다. <메밀 꽃 필 무렵>에서는 나귀 뒷다리와 앙상블. 다리 하나에 사람이 들어가서 직접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이 제 역할이었죠. 뒷다리니까 뒷발차기도 하고.

그해 9월에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작인 <필부의 꿈>에서 오 선생님이 단독 신을 하나 주셨습니다. 몸 파는 여자 셋을 거느린 포주에 한량 역이었죠. 1986년 5월에 대학로 바탕골소극장 개관작으로 <춘풍의 처>를 공연했는데, 나중에 TV사극 <왕건(王建)>에서 박술이 장군 역을 맡아 유명해진 김학철과 부자(父子)로 출연했습니다.”

<춘풍의 처>

1987년 서울연극제에서 신인연기상 수상 후 동기들과(오른쪽에서 두 번째).

고전과 현대물, 몽환적 실험극을 넘나들면서 한명구는 오태석에게 다시 한 번 매료된다.

“<춘풍의 처(妻)>는 고전소설 <이춘풍전(李春風傳)>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바람 피운 남편을 직접 잡으러 가는 여자이야기’입니다. 시대배경은 조선인데 이야기는 지극히 현대적인 거죠. 이 충돌을 ‘놀이’로 풀어 가는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풍류가 있고 해학이 있고, 배우들도 장면 장면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변신해야 합니다. 춤과 노래도 옛 가락과 현대적 색채를 섞어야 하고. 이 충돌을 왁자지껄하게, 그러나 신명나면서도 무리없게 이끌어 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 선생님의 다른 모습을 본 거죠.”

그해 9월 8일부터 12일까지 극단 목화는 대한민국연극제에 <태(胎)>를 가지고 참가했다. 한명구의 배역은 사육신(死六臣)이었다. 9월 20일부터 10월 12일까지는 바탕골소극장에서 <춘풍의 처>를 앙코르 공연했다. 공연이 끝나는 날 사단이 터졌다.

“종(終)파티 때 조상건(趙相虔) 선배가 상을 엎었죠. 빡빡한 일정이 이어졌으니 다들 신경이 날카로웠고, 가벼운 의견차이가 소동으로 번진 겁니다. 목화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인, 일종의 생활공동체 같은 동인제(同人制) 극단이라 서로 계약으로 묶이거나 그런 관계가 아니거든요. ‘야, 이거 잘못하면 이대로 극단이 깨지겠다’ 싶었습니다. 저랑 홍원기, 김학철 셋이서 김학철의 신혼 단칸방으로 몰려가 울분을 달래면서 밤을 새우다 새벽녘에 겨우 눈을 붙였습니다.”

그들을 깨운 건 한 통의 전화다. 한 신문사에서 대한민국연극제 무대미술상을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장난인 줄 알았죠. 선배들이 ‘야, 너 MBC 드라마에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연극제 신인상 받았다는데?’ 뭐 이런 식으로 평소에 농을 건넸거든요. ‘학철이 형, 이거 또 선배들 장난이야’라고 답했더니 ‘아냐, 진짠가 봐. 우리들 한자(漢字)이름 불러 달래. 진지해’ 그러는 겁니다. 술이 확 깼습니다. 학철이 형이 가판대에 가서 스포츠 신문을 사 왔는데, 거기 기사가 나왔더라고요.”

조상건은 남자연기상을 탔다. 극단의 위기가 다 해소되고 오히려 조직력이 단단해졌다. 세 청년은 각자의 ‘취업한 친구’들에게 부탁해 3일 연속 소주집에서 축하파티를 했다.

“오태석 선생님은 원래 미대(美大)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림을 참 잘 그리세요. 무대 디자인도 직접 하시고. 저희 셋은 선생님 하라는 대로 염색도 하고, 세트도 꾸몄을 뿐이죠. 형식과 규정을 따라야 하니까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신청서에 미술담당으로 이름을 올린 건데 그것이 수상(受賞)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그 무렵까지도 제 재능을 스스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열정과 재능은 다른 것이잖습니까. 무엇보다도, 연극배우는 미래가 불투명한 직업이고. 그래서 3년 내에 주인공을 하지 못하면 연극을 사랑하되 직접 하지는 않는 생활인으로 살자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로 첫 주연 맡아

한명구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자전거>. 한명구는 이 작품에서 윤서기 역을 맡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주인공 역할이 주어졌다. 1987년에 공연한 <자전거>다. <자전거>는 한국연극사를 대표하는 명작 가운데 하나다. 자전거를 몰고 퇴근하던 길에 소에 받혀 쓰러져 보름 남짓 출근하지 못한 시골 공무원이, 결근계를 작성하기 위해 동료와 ‘그날 밤’ 기억을 회상하는 가운데, 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6·25의 집단학살과 그날 밤에 일어났던 방화(放火)사건, 밀도살, 피해자 가족들의 위령비 건립, 제삿날이 같은 마을 곳곳의 풍경이 절묘하게 중첩되는 걸작이다.

“1983년에 김우옥(金雨玉) 연출이 초연이고, 작가 자신인 오태석 연출로는 그 공연이 처음이었죠. 주인공 배역은 맨 마지막에 발표했는데, 아무리 지나도 제 이름이 불리지 않더군요. ‘주인공은 밖에서 데려오시는구나’라고 생각하던 참에 ‘명구는 다른 역 할 것이 없어, 윤서기밖에’라고 오 선생님이 발표하시더군요. ‘다른 단원을 무마하려고 선생님께서 그렇게 에둘러 말씀하시는 거로구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전율했습니다. 더구나 윤서기와 대화상대인 구서기를 하나로 묶은 큰 역을 받은 거니까요.”

―주인공을 맡으면 어떤 점이 달라집니까.

“두렵죠. 단역만 하다가 생애 처음으로 주인공을 하는 거니까요. 중간배역을 거치고 올라가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라 연습장 갈 때부터 바짝 긴장하고 스트레스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자전거>는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에 한명구는 배우로서의 자신감을 획득하고 곧이어 잊지 못할 ‘생애 최고의 작품’을 만난다.

TOGA 연극제 참가

“스즈키 다다시가 인구 600명의, 폭설이 내리기로 유명한 일본 산골 마을에 연극촌(演劇村)을 만들고 1982년부터 동계·하계 연극제를 개최합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TOGA 연극제입니다. 공연만 세계 각국에서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도 여러 나라에서 몰려듭니다.

극단 목화는 87년 8월 7일부터 이틀간 <춘풍의 처>를 공연했습니다. 제 역할은 주인공 이춘풍 역이었고요. 저로서는 이때가 첫 해외방문입니다. 설렜죠. 무엇보다도, 세계 수준에 오른 여러 나라의 연극을 아주 가까이에서 밀착해 관찰하고 제작과정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작은 마을에서 각국 배우와 연극인들이 다 함께 숙식하며 지내거든요. 밥도 기숙사에서처럼 같이 먹고, 서로서로 공연도 다 보러 다니고.”

먼저, 외국 관객들이 극단 목화의 공연에 열광했다. 그래서 자신감을 얻었다. 다른 공연을 보면서, 우리의 연극과 연기가 세계 수준에 그다지 뒤처져 있지 않다는 확신이 생겼다.

“결국 연기는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고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잖아요? 한국 배우들이 정서적 표현에 뛰어나고 무엇보다도 디테일에 강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TOGA 연극제 참가가 배우로서의 자신감을 키워 준 계기라면, 그해 9월 29일부터 10월 7일까지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초연한 <부자유친(父子有親)>은 한명구에게 ‘예술가의 확신’을 가져다준 작품이다.

사도세자에 憑依

“일본 다녀와서 일주일 휴가를 받고 청주 집에 내려가 있었죠. 제 대학 입학 후에 부모님이 다시 이사를 했거든요. 2년 정도 묵은 여성지를 보는데, ‘비운의 사도세자, 야차(夜叉)는 영조(英祖)였다’라는 기사가 있더군요. 부제(副題)가 ‘400년 만에 발굴한 비사(秘史)-현장을 드나들던 사관(史官)의 기록’이었습니다. 사관의 후손들이 독에 묻어 놓았던 자료를 발굴했다는 내용이었죠. 단숨에 읽고 스크랩을 했습니다. 극단 연습을 재개하는데 오 선생님이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작으로 <부자유친>을 내놓으신 겁니다.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였습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는 거죠. 술술 읽혔어요. ‘사도세자(思悼世子)는 나다, 성격분석이고 뭐고 할 것도 없다’는 감이 왔습니다. 빙의(憑依)가 실재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니까요.”

간절한 바람대로 사도세자 역이 그에게 주어졌다. 사도세자라는 인물을 이미 가슴속에 담고 있었기에 친숙하고 편안하게 연습을 했다. 연습기간 틈틈이 사도세자의 묘도 가 보고, 《한중록(閑中錄)》도 읽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신나게 연기했다.

오늘의 한명구를 만든 <부자유친>

<부자유친>에서 한명구는 사도세자 역을 맡아 광기 어린 열연을 했다.

“운명처럼 다가온 작품입니다. 무대를 경사지게 꾸며 놓은 데다 80분 내내 춤추고 봉술(奉術)에 과격한 춤사위까지, 매일 상처를 달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아픈 줄 몰랐습니다. 황홀했죠. 사도세자가 저였고 제가 곧 사도세자였으니까요.”

필자 역시 이 공연을 관람했다. 한이 많은 여인인 혜경궁 홍씨(정원중 역)는 얼굴을 백지로 가린 무표정으로 연기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영조(정진각)와 사도세자는 마치 ‘병원 폐기물 처리용 쓰레기통’처럼 생긴 뒤주를 사이에 놓고 정신병자처럼 광기 어린 몸싸움을 벌였다.

관객들은 이 파격에 잔뜩 긴장해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고, ‘절반 쯤 질린 침묵’이 객석을 지배했을 뿐이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의 커튼콜도 없이 그대로 나가 버려서, 관객들은 한참을 기다리며 눈치를 보다 웅성웅성 퇴장했다.

“그것도 설정이었죠. 왕과 세자라는 사람들이 사각팬티만 입고 광기(狂氣) 어린 에너지를 토하는 동안 관객들, 특히 남성 관객들이 이 연극을 다들 자기들 얘기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부자지간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물건이기에 갈등이 저 지경까지 가나? 이런 질문을 관객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던졌던 것은 아닐까요? 체력소모가 극심했지만, <부자유친>은 오늘날의 한명구를 만들었고, 저를 배우로 평생 살도록 해 준 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배우사관학교 극단 목화

한 평론가가 ‘<부자유친>에 왜색(倭色)이 보인다’고 평을 했다. 이른바 ‘왜색시비’다. 배우들은 분노했다. 직접 가서 따지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연극제 대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서 항의계획은 유야무야됐다. 한명구는 신인연기상을 받았고, 평론가는 연말에 다른 지면을 빌려 ‘진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며 유감을 표했다. 이 작품의 막내가, 군대 가기 전 휴학한 틈에 출연한, 지금은 영화배우로 널리 알려진 성지루다.

박영규, 정진각, 김학철, 김세동, 정원중, 김병옥, 손병호, 정은표, 김병춘, 성지루, 황정민, 박희순, 장영남 등 숱한 배우들이 극단 목화를 거쳐 갔다. 오태석이 주재하는 극단 목화는 그래서 배우사관학교로 불리기도 한다.

―극단 목화의 특징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치열한 곳이죠. 치열함에서 오는 무서운 분위기가 있습니다. 13시부터 22시까지 매일 연습하면서도 풀어지지 않고 버티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아주 가까이서 지켜보신 경험에 기대서 말하자면, 극단 목화를 주재하는 오태석은 어떤 예술가입니까.

“연극에 미친 분이죠. 연극을 하지 않았더라면 무얼 하고 사셨을까 의문이 들 만큼 연극에 흠뻑 빠지신 분입니다. 바로 그 점이 그분의 천재성을 배가(倍加)시키는 듯합니다. 어떻게 저런 상상을 하지? 기발하고 때로는 기괴한 상상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데, 나중에 그 상상을 형상화한 뒤에는 사소한 조각들이 다 보편성을 가진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마법의 현장에 직접 참가하는 느낌이죠.

선생님이 먼저 새 작품 구상을 마치고, 배우들과 스토리에 대해 편하게 말을 나눕니다. 인물의 일관성이나 재미있는 요소에 대해 배우들이 의견을 내면 오 선생님이 그걸 구체적으로 작품에 녹여 넣습니다. 95%는 선생님이 만드시고, 나머지 5%를 배우들이 장식하는 정도?

오 선생님은 하나의 ‘단서’를 연극적으로 완성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분입니다. 생각을 하나하나 작품으로 빚어 내는데, 가끔 미완성 대본을 가지고 연습할 때가 있거든요. 내일은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까가 너무 궁금해서 잠이 안 올 때도 있을 정도였죠. 5층 연습실에서 지하 수퍼마켓까지 심부름을 다녀올 때는 그 사이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100m 달리기하듯 뛰어다녔어요. 하루에 스무 번도 넘게 왕복달리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오태석은 세계 최고의 배우훈련가”

신혼시절 처가에서. 왼쪽 끝이 아내 이미영 현 국민대 무용과 교수.

―연극계 일각에서는 오태석의 연극은 실험정신이 충만해서 배우들이 소화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전혀. 인물을 정서적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죠. 표면이 실험이라도 내면적으로는 배우와 ‘인물’ 사이에 ‘정서적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오 선생님은 인물과 상황의 정서를 배우들에게 전달하고 설명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극도의 슬픔과 극도의 기쁨이 엇갈리는 상황을 생각해 봐라. 6·25 때 죽은 아기를 등에 업고 남편 시신을 찾아다니던 반(半)미치광이 아낙이 있는데 시신을 찾고 나서 웃고 박수치고 난리가 난다. 그러고는 온전해 뵈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 이제 죽어도 돼. 저승 가서 남편 만나면 내 할 일 다 하고 왔어요, 라고 얘기할 수 있거든.’

이런 이야기를, 그것도 새로운 이야기를 매일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목화 배우들은 그렇게 인물의 심리와 심상과 상상을 에둘러 표현하는 훈련을 합니다. 여기에 연극적 놀이성을 가미하죠.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요소들을 무대로 끌어내는 겁니다. 그만큼 이야기와 연기술이 깊어진다고 믿습니다. 오태석 선생님은 세계 최고의 배우훈련가입니다.”

―아무리 연극이 좋아도, 많은 배우가 생계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뜻을 꺾습니다.

“저는 행운아죠. 서울 살던 고모님이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한동안 그렇게 지냈는데, 나태해지는 것 같아서 독립을 했습니다. 목화 단원이던 고(故) 김명환 선배가 ‘태(胎)’라는 카페를 운영했는데, 거기서 먹고 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23일간 라면만 먹고 지낸 적도 있습니다.

구세주는 친구들이었죠. 청주 출신 친구들이 하숙을 했는데, 직장인이라 하숙집에서 밥 먹을 일이 드무니 비싼 돈 내고 하숙을 하는 의미가 없잖습니까. 제 자취방에서 친구가 10만원 내고 잠만 자고, 저는 그 돈으로 쌀 사고 반찬 사고 살림하면서 지냈죠. 자취방 동료 바꿔 가면서 그렇게 5년을 보냈습니다. 1988년 3월 국립단체이던 88서울예술단이 <새 불>이라는 뮤지컬을 공연할 때 객원출연료 60만원을 받은 것으로 또 오래 버텼고.”

<새 불>은 오태석이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전국 8도의 불을 모아다 합친다는 신화적(神話的) 상상력이 들어간 작품인데, 목화의 단원들이 많이 참여했다. 한명구는 여기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제 처(李美瑛·현 국민대 무용과 교수)가 용왕의 메신저인 제비소녀 역이었는데 발목을 다쳐서 제가 연습 때 대역(代役)을 했습니다. 자리 잡고 동선 체크하고, 오 선생님이 대사 발성법도 가르치라고 해서 자연스레 따로 만났죠.

그때 88예술단 단원 중에 후배 남경주가 있었는데, 연습실 시설이 정말 좋았거든요. ‘30분만 일찍 나와서 한국무용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진짜 전문가가 따로 있다며 강사를 소개해 주는데 그게 또 제 처였습니다.”

‘대사 발성법’과 ‘춤’을 서로 가르치다 연애가 성립했다. 한명구는 첫 만남을 1988년 1월 3일, 결혼을 1992년 1월 5일이라고 ‘정확하게’ 기억한다.

“제 처 이야기가, 제 눈빛이 뭐 하나 꼭 할 것 같았답니다. 처가의 반대가 없지 않았죠. 아내는 결혼적령기를 거의 흘려보내는 지공(遲攻)작전을 선택했습니다.

나중에 장인어른이 한번 만나자고 해서 지방공연 중이던 전주에서 처음 뵈었죠. ‘내 딸 사랑하나? 내 딸도 사랑한다고 했나? 딸에게 확인해 보겠네.’ 딱 5분 걸렸습니다. 1주일 후에 전화 주셔서 상견례하고 바로 날 잡았습니다.”

임영웅과의 만남

1990년 3월의 <운상각>도 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의견이 엇갈려 고참 단원들이 거의 극단을 떠났다.

“목화에서 10년을 채우자는 것이 제 다짐이었습니다. 평론가 한상철 선생님이 ‘한명구가 대극장을 장악할 만큼 성장했다. 좋은 배우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기명기사를 실어 주셔서 용기백배했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인사들과 연극계가 한명구를 인정해 주었다. 1991년에 공연한 <백구야 껑충 나지 마라>는 그에게 동아연극상을 안겨 주었다.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갔죠. 군 동기들과 술 먹다가 수상 소식을 들었는데, 연극만으로 먹고살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처가에 체면도 서고. 2011년 이해랑연극상 수상 소식은 차 몰고 강의하러 가다가 들었는데, 사고 날 뻔했습니다.”

1993년 초 연출가 임영웅이 한명구를 찾았다. 2인극 <우리, 테오와 빈센트 반고흐>의 출연제의였다.

“목화 후배들에게 길을 터 줘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고 싶었습니다. 연극을 하는 맥락과 환경을 확 바꾸면 다소 느슨해진 긴장의 끈을 다시 조일 수 있지 않을까. 오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바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2005년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할 때의 모습. 오른쪽부터 연출가 임영웅, 배우 한명구(블라디미르 역), 박용수(에스트라공 역).

한명구가 생각하는 임영웅의 대표 연출작은 <고도를 기다리며>다. 1994년 9월 처음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한 이래, 한명구는 1996, 1997, 1999, 2000, 2001, 2002, 2003, 2005, 2006, 2008, 2009, 2010, 2011, 2012년의 프로덕션에 참가하며 한국과 일본과 아일랜드와 유럽의 관객을 만났다.

“18년간 저도 고도와 함께한 거죠. ‘노벨상을 수상한 난해한 작품’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부담감이 엄청났습니다. 처음엔 도무지 대본을 읽을 수가 없겠더군요. 이야기의 흐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지 않는 누군가를 정체불명의 두 남자가 마냥 기다린다는 설정도 납득하기 어렵고, 도무지 해석이 안 되더군요. 막상 몸으로 부딪쳐 보니 어렵지 않았습니다.”

―‘고도’는 누구입니까.

“제 ‘바람’이죠. 몸이 안좋을 때는 건강, 궁핍할 때는 금전, 세월호 사고가 터졌을 때는 안전한 나라. 극 중에서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만, 또 고도가 누군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고도가 삶의 동력을 만들어 주는 무언가라는 것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지 않지만, 고도가 오기를 바라는 바로 그 욕망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노력을 하게 되니까요. 우리를 자꾸 무엇인가 하도록 만들고, 최선을 다하도록 이끄는 무언가가 바로 제가 생각하는 ‘고도’죠. 그래서 저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할 때마다 인생을 필터링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 존재를 돌아보게 만드는 삶의 씻김굿이죠. 이것이 고도가 저에게 주는 선물 아닐까요?”

“영화는 야유회 가는 느낌”

―임영웅 연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굵고 섬세하다는 점이죠. 오태석 연출의 핵심이 배우들을 정서적으로 고양시켜 스스로 피어나게 하는 것이라면, 임영웅 연출의 핵심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정서의 변화를 연출가가 디테일하게 계산한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배우가 정서적 훈련을 거치지 않아도 관객들이 정서적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겁니다.

오태석 선생님이 원초적 놀이성과 흥겨움, 예측 불가능한 돌발적 상황을 가지고 연극적 접근을 한다면, 임영웅 선생님은 끊임없이 작품의 문학적 깊이를 통찰하며 진지하고 무겁게 문학적 접근을 한다고 할까요.”

―영화도 몇 편 했죠.

“노효종 감독의 <인디언 썸머>(2001)가 첫 작품이고, 임권택 감독님의 <취화선(醉畵仙)>(2003)에서는 장승업의 스승인 역관 이응헌, <미인도>(2008)에선 정조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가 재미있기는 한데, 제 개인적으로는 무대만큼 매력은 없었습니다. 관객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작업을 하니 매일 야유회 가는 느낌이 들던데요. 연극은, 영화로 치자면 배우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풀 샷에서 클로즈업까지 다 조절할 수 있고, 관객을 끌고 가면서 직접 창작과 소통에 나설 수 있다는 대체 불가능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명구는 2003년부터 충북 음성의 극동대에서 연극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용인대에 편입해 학사와 석사를, 성균관대에서 박사를 했다. 그렇다면, 이 변신은 소신인가?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무엇일까가 궁금했다.

“연기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이론으로 정립해 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방법론에 제 경험을 첨가해서, 일단 제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을 찾고 싶었죠.

연기에도 유행(流行)이 있고 진화(進化)가 있습니다. 예술가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제 개인적 소신과, 낡은 것이 아니라 최신 흐름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다는 욕구가 합쳐져서 매년 두세 작품씩은 꼭 공연에 참가하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습니다.

잘 가르치는 비결은, 제 경우에는 현장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문학자들이 제자들의 지적인 성취에 흐믓해하는 것처럼, 저도 제자들이 무언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인터뷰를 마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배우들에게 던진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도 건넸다.

―좋은 배우란 어떤 존재입니까.

“인물의 심상(心象)을 잘 녹여서 표현하는 사람이죠.”

―한명구에게 연기란 무엇입니까.

“삶입니다. 숨쉬기 같은.”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요.

“조급해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똑똑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똑똑한 겁니다. 자기를 빨리 드러내고 싶은 것이 조급함의 본질인데, 그런 태도를 가지면 딴짓을 하고 연극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살아남는다는 건 긴 시간을 견디는 것이고 그만큼 인물들을 탐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求道者 같은 배우

한명구는 금년 4월에 <과부들>을 했고 6월 8일까지 심벌즈 연주자의 이야기인 <챙!>을 공연했다. 8월 17일에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고전 <가을 소나타>에 출연한다. 9월에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지방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꽉 짜인 그의 일정표가 구도자(求道者)의 일기처럼 보였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는 류현진, 고등학교 때 비로소 축구를 시작해 국가대표 축구팀의 주전으로 10년 이상을 활약한 늦깎이 선수들의 대부(代父) 조광래, 《논어(論語)》에 나오는 자기수련의 정도(正道) ‘다잡기[約]’의 장점을 모두 아우른 연극적 표본이 어쩌면 한명구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이 이야기를 건네자 한명구는 손사레를 치며 여전히 안정된 저음(低音)으로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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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계의 차세대 에이스 韓明求

“내게 연기는 삶, 숨쉬기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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