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列傳] 모든 연극 장르 섭렵한 金星女 : 월간조선

부모는 연극인이었다. 극단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도 연극인이다. 이모들도, 형제들도, 그리고 자녀들도 연극을 한다. 의상 바구니가 침실이었고 무대는 놀이터였다. 먼지가 섞인 매캐한 극장 냄새가 그래서 그녀에겐 고향의 냄새다. 김성녀(金星女·64) 이야기다. 지금은 청소년들의 희망 직업 1순위가 연예인이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대중은 예술인들의 공연에 열광은 하되 사회적 존경을 보내지는 않았다.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광대(廣大)는 천민 가운데서도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관습이 아직 없어지지 않은 데다 전란(戰亂)을 겪은 어려운 시대를 예술인의 가족으로 살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공식기록에는 1950년 9월 16일 서울생이라고 나와 있네요. 9·28 수복 얼마 전에 태어난 건가요. 어머님이 만삭이라 피란도 못 가시고.

“그건 음력이고, 양력으로는 11월 생입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 아니고 목포입니다. 배 타고 피란 가시다가 갑자기 산통(産痛)이 와서 어머니가 선상(船上)에서 저를 낳으셨답니다. 초산(初産)이었고, 어머니 나이는 열일곱이었어요. 태어나자마자 서울로 올라왔으니까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적은 겁니다.”

김성녀의 어머니 박옥진(朴玉珍)은 당대의 인기 배우였다. 악극단과 여성국극(國劇) 같은, 서민들이 즐기던 유랑극단의 중심인물이었다. 아버지 김향(金鄕)은 어머니보다 열두 살 연상의 실향민(失鄕民)이었다.

“아버지는 6·25 때 월남(越南)하신 것이 아니고, 그 전에, 말하자면 1940년대 후반 ‘해방공간’ 때 월남하셨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당시 연인 관계였던 영화배우 윤인자(尹仁子) 선생님이랑 함께 탈출하셨답니다. 함경북도 성진이 고향인데, 북쪽에 계실 때 극작가 오영진(吳永鎭)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셨고 영화배우 장동휘, 황해 선생님과도 친분이 있었지요.”

여성國劇 시대

영화 등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에 사극을 소재로 한 여성국극은 인기가 높았다. 사진은 여성국극의 스타 임춘앵.

오영진은 조만식(曺晩植)이 주재하던 조선민주당 핵심 활동가였다. 가수 황금심의 남편이자 전영록의 아버지로 유명한 황해는 독립군의 연락책이었다.

“저희 아버지께서 정치활동을 하셨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이분들이랑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이 저희 집에 많았어요. 지금은 거의 다 없어졌지만.”

김향이 남쪽으로 넘어와 택한 생계수단이 악극단 연출이다. 악극단의 레퍼토리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종합공연이다. 단막극, 비극, 간단한 쇼와 다음 공연 안내를 겸한 막간(幕間), 희극, 집단 댄스인 레뷰 등을 하룻저녁에 모두 공연했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악극단에서 처음 만나셨다고 합니다. 연출가와 배우로 만나 연기지도도 받고 연극 이야기도 듣고 하다가 결혼으로 이어진 거지요. 아버지는 나중에 어머니와 둘이서 여성국극단을 만들고 <햇님 달님> 같은 작품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집필한 작품의 양이 상당했어요. 연속극 쓰듯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셨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요.”

여성국극은 6·25 동란을 전후해서 유행했던 공연 양식이다. 여성들이 남장(男裝)을 하고 무대에 섰다. 이야기의 주제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같은 야사(野史)나 설화(說話) 위주였는데, 재담(才談)과 창(唱)으로 대사를 했다. 전쟁 통이라 남자배우가 귀했고, 여성들만 출연했기에 상대적으로 과감한 애정표현(그래 봐야 포옹 신 정도였지만)이 가능했다.

“삼성(三星) 여성국극단이라고, 저희 어머니와 이모(박보아), 외숙모(조양금) 세 분이 주축 배우로 나왔고, 아버지가 극본을 쓰고 연출을 했습니다. 정말 인기가 좋았습니다. 돈을 가마니로 퍼 날랐다고 할 만큼 흥행성적이 좋았답니다. 제가 서대문 기와집에 살았는데 저희 부모님 소유의 집도 몇 채였고 그 옛날에 트럭도 몇 대 있었죠.”

—그걸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트럭을 개인이 갖는다는 건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니까,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네다섯 살 시절인데, 마당에 세워 둔 트럭 안에서 자기도 하고 소꿉놀이에 여행놀이를 하기도 하고, 신나게 놀았죠. 짐칸에 다다미 깔면 거기가 제 별장이 되는 겁니다.”

‘트럭’은 극단의 재산이었다. 대도구와 소품을 싣고 단원들을 태워 전국을 유랑하는 수단이었고, ‘골목돌기 가두선전’을 하는 홍보의 첨병이었다.

“일본말로 ‘마치마와리’라고, 글자 그대로 동네를 도는 겁니다. 배우들이 다들 의상 차려입고서 트럼펫 불면서 장터나 사람 많이 다니는 길을 돌아다니는 거죠. 구경거리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저희 극단 트럭이 한 바퀴 돌고 나면 마을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습니다.”

—경험담입니까. 아니면 들은 얘기? 직접 해 본 적도 있나요.

“제 무대 데뷔가 다섯 살 때입니다. 어머니가 하시던 역할의 아역(兒役)을 도맡아 했어요. 1953년부터니까, 그걸 기준 하면 무대에서 생활한 지도 어언 60년이네요. 제 별명이 ‘불여우’였어요. 악사(樂士)가 박자 놓치면 춤추다 말고 눈 흘기고, 그 어린 것이 발로 무대 바닥을 쿵쿵 차며 박자 맞출 때까지 기다렸으니까.”

지금 기준으로는 형편없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1950년대 여성국극단은 공회당이나 영화관 같은 ‘실내’에서 주로 공연을 했다. 동물 단원들을 보유한 데다 곡예(曲藝)가 필살기인 서커스단은 천장이 높은 천막이 필요했고, 곡마단이나 악극단에 비해 ‘연극공연’ 위주로 특화(特化)한 여성국극은 상대적으로 소규모 인력 및 장비로 팀을 꾸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버라이어티 종합공연’ 중에서 ‘사극(史劇)형 멜로드라마’만을 떼어내 특화한 셈이다. 여성국극 전성기에 여러 단체가 지방을 돌고 다들 나름대로 수익을 올렸다는 것은 연극사회사의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의 영화제작 실패로 빚만 남아

“한 곳에서 2~3일 체류합니다. 그 정도면 볼 사람은 다 본다는 계산이었죠. 지금 영화 상영하듯이, 조조부터 심야까지 하루에 7~8번 공연했어요. 저녁 공연 때 제가 피곤해서 자고 있으면 어른들이 아이스케키로 유혹하고 깨워서 무대로 내보내곤 했습니다. 제 대사는 거의 없었고, 춤과 노래가 거의 다였으니까 힘들기보다는 재미있는 추억이 많지요. 배우들도 요즘 리얼리즘 연극 식으로 모든 대사와 동선을 치밀하게 연습해서 정밀하게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었고, 각자 개개인이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가지고 스토리 라인에 맞게 이야기를 끌어 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모두들 어려서부터 국악 훈련을 받은 분들이니 음악적 완성도가 나름대로 높은 편이어서 관객들도 다들 좋아하시고….”

상대적으로 넉넉했던 어린 시절은 이내 끝이 났다. 아버지가 영화를 제작했고, 흥행이 대실패로 끝나면서 트럭이 모두 없어졌다. ‘빚’만 남았다.

“아버지가 <대춘향전>이라는 여성국극 판소리영화를 제작하셨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춘향으로 나오고 이모 박옥란이 이도령. 총천연색 영화라서 돈이 엄청나게 들어갔는데 그야말로 처절하게 망했습니다. 여성국극 전성기인데다 총천연색으로 찍었으니, 우리를 보러 와 주던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와서 볼 것이라고 판단했다가…. 돈을 번 것이 아니라 빚만 남았죠. 나중에 임권택 감독님이 <춘향뎐>을 만들 때, <춘향전>을 각색해서 영화화한 역대 작품 목록이 신문에 났는데 그때 저희 아버지가 감독한 <대춘향전>도 들어있어서 감회가 새로웠지요.”

영화사료 수집가 정종화 선생은 김향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작·감독한 <대춘향전>의 정보를 들려준다. 1958년 작. 개봉관은, 지금은 없어진 코리아나 극장. 위치는 현 조선일보 미술관 자리였다고 한다.

형제자매들도 모두 예술인

영화 실패 후 극단은 깨지고 집도 날아갔다. 운니동 옆, 종로구 와룡동 114번지 단칸방으로 이사 와서 교동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폐인처럼 사시다 집을 나갔다.

—기록에는 부모님이 계속 같이 살았던 것으로 나옵니다만….

“그때 아버지가 아편을 하면서 영화를 찍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아편 흡입이 당시 지식층의 유행 비슷하게 잘못 인식되던 면이 없지 않아 있었고…. 집으로 빚쟁이들이 찾아오고 하니까 겸사겸사해서 가출하신 거죠. 가출은 자연스레 별거로 이어지고. 아버지는 다른 극단에 가서 일 봐주시고 용돈 얻어 쓰면서 그냥저냥 사셨어요. 누가 저희 자매한테 ‘너희들 아버지 어느 어느 당구장에서 봤다’ 그러면 저랑 제 동생이 당구장 유리창 너머로 아버지를 보기도 하고…. 가족들에 대한 책임은 어머니 몫이었어요. 저한테 아버지는 ‘한량(閑良)’의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김향의 가출은 몇 년 만의 귀가로 막을 내렸다. 이 흔적은 ‘동생들과의 터울’이 증명한다.

“제 바로 아래 동생이 성애(星愛). 판소리를 했죠. 둘째랑 셋째 성희(星姬) 사이의 나이 차가 바로 12년입니다. 성희는 지금 매니저처럼 저를 돌봐 주고 있습니다. 넷째가 유일한 남자인데 성일(星一). 요즘은 뮤지컬 안무가로 활동하는데, MBC 무용단장이었죠. 다섯째 성자(星子)는 거문고를 했습니다. 현재 오카리나 강사를 하고 있어요. 막내 성아(星娥)는 해금 전공으로 한양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별 성(星) 자를 돌림자로 쓴 그의 형제자매는 모두 예술에 종사했다. 예명이 아니라 모두 본명이라는데, 그렇다면 자녀들의 운명이 그쪽으로 흘렀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명(作名)을 했던 걸까.

어머니

1990년 김성녀는 중앙대에서 음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어머니 박옥진(왼쪽)은 유명한 국극배우였다.

“영화가 망하고 당장 쌀이 떨어질 지경이었죠. 어머니는 임춘앵 국극단 등 다른 단체로 가서 출연료로 빚 갚고 생활비도 마련하셨습니다. ‘야, 내가 어려서 지방순회 다닐 때는 흥행이 시원찮아서 단체가 숙박비 못 내고 그래서 인질로 많이 잡혀 있기도 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돈 받고 다니는 건데 너무 걱정 말아라’며 저희 자매를 안심시키곤 했습니다. 저는 집에서 살림하고, 동생들 도시락 챙겨 주면서 학교 다니고. 아, 언젠가 <김삿갓>이라는 영화에 아역으로 한 번 출연한 적이 있네요.”

김성녀는 그래서 ‘목포는 항구다’를 잊지 못한다. 어머니가 여관에 잡혀 있을 때 혼자 흥얼거리던 노래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머니 생각이 날 때면 나지막한 소리로 이 노래를 부른다. 여관 주인이 외상값 빨리 받겠다고 단체를 따라다니다 제작자로 변신하고 사업부 직원으로 일하던 시절의 ‘낭만과 애환’이 노랫가락에 실려 애잔하게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아서다.

학교는 진명(進明)여중·고를 나왔다. 경기(京畿), 이화(梨花), 숙명(淑明), 진명(進明), 창덕(昌德)이 5대 명문으로 꼽히던 시절이다.

“중·고교 때 공부를 제법 했어요. 어머니는 지방 공연 중이라 저 혼자 가서 시험 치고, 얌전하게 학교만 다녔죠. 동급생으로는 경희대에서 현대무용을 가르치는 박명숙 교수가 있습니다.”

‘평범하고 얌전하게 살겠다’는 소망은 고2 때 무너진다.

“1967년입니다. 어머니가 쓰러지셨어요. 그것도 일본에서. 재일교포 위문 일본 순회공연 중이었는데 남자 역을 맡아 칼춤을 추시다가 뒤로 넘어지셨답니다. 칼춤이, 보기보다 체력소모가 많거든요. 저희들 등록금 댄다고, 야참비 모아서 송금하고, 밥값도 현찰로 받아 아껴서 또 송금하고…. 늑막염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장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동생 성애가 가수를 하겠다고 오아시스 레코드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봤다. “펄 시스터즈, 바니걸스처럼 여성 듀엣이 대세이니 언니나 여동생이 있으면 같이 오라”고 해 같이 가서 곡을 받아 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했다. 그룹 이름은 ‘비둘기자매’. 1968년 2월에 나온 첫 음반 발표곡은 ‘그네 줄 내 사랑’. 다른 가수들과 연합음반을 내던 시절이라 ‘광주역의 밤비’ ‘댕기를 풀어놓고’ ‘낙동강 강바람’ ‘첫사랑 금반지’(1968) ‘멋쟁이 마도로스’ ‘항구의 그날 밤’ ‘마도로스의 딸’ ‘서귀포야 잘 있거라’ ‘비오는 목포항구’(1969) ‘연평도의 탄식’ ‘한양도령’ ‘명동의 남매’(1972)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대니보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던 이일수씨가 매니저 역할을 맡아 도움을 주었다.

대중들이 기억하는 비둘기자매의 최고 히트곡은 ‘까투리 사냥’(1972)이다. 가사 내용을 둘러싼 금지곡 논란도 당시의 화제였다.

“까투리가 암꿩이잖아요, 근데 암꿩은 사냥금지 대상이었거든. 이 점이 문제가 돼서 가사심의에 걸리고, 제작사가 ‘그럼 민요 가사를 바꾸라는 말이냐’고 받아치고…. 이 논란으로 오히려 인기가 상승했습니다.”

—가수를 계속했어도 좋았을 텐데요.

“가수, 훌륭한 직업이죠. 하지만 제 성격엔 잘 안 맞았어요. 저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이야기가 길게 펼쳐지는 것을 즐깁니다. 가수는, 제 기준으로 보자면, 공연 시간이 다소 짧은 거죠.”

박귀희에게 가야금 배워

김성녀의 스승인 국악인 박귀희.

—그래서 연극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까.

“연극으로는 그야말로 물 흘러가듯 스며들었습니다. 가수도 싫고, 뭐랄까, 삶의 에너지가 방전되었다고 할까. 그래서 집에 은둔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달밤에 가야금을 타면 참 운치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동생이 박귀희(朴貴姬) 선생님께 다니고 있었기에 청을 넣었죠.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운당여관으로 찾아뵈었는데, ‘박옥진 딸이라면 볼 것도 없다. 남들 10년 걸릴 것 너는 3년이면 된다’고 바로 받아 주셨습니다.”

이날 이후 김성녀는 박귀희 문하에서 장기간 수련했다. 그래서 인간문화재 박귀희의 1호 후계자는 안숙선(安淑善) 명창, 2호 후계자가 바로 김성녀다. 3호 후계자는 강정숙 명창.

“그 전까지는 가야금을 전혀 연주할 줄 몰랐습니다. 박귀희 선생님이 정말 열심히 가르쳐 주셨죠. 예술가는 마스크가 좋아야 한다고, ‘광대는 얼굴치레가 반’이라는 말도 있다고, 저를 국악계의 스타로 만들고 싶어하셨어요. 제가 저희 또래치고는 키도 큰 편이고 하니까. 다른 전수자들이 질투할 만큼 저를 아껴 주셨습니다.”

—그런데 국악계에 남지 않고 연극으로 건너가셨네요.

“그것도 우연인데,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겠지만…. 박귀희 선생님 문하에 김동애라는 언니가 있었어요. 이분이 극단 민예 소리선생이었는데, 오영진 선생님의 유작 <한네의 승천>을 민예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975년 초연 때 주인공은 이주실(李周實). 그 당시 민예의 대표가 허규(許珪) 선생님이었는데, 1976년 재공연 때는 국악을 좀 더 많이 넣고 싶다고 그러셨대요. 동애 언니가 ‘내가 아는 애 중에 국악을 하는 친구가 있다. 엄마도 국악을 하시고’. 그랬더니 ‘데려 와 봐라’, 그렇게 된 거죠.”

<한네의 승천>으로 연극 데뷔

연출가인 남편 손진책(왼쪽)은 함께 연극을 하는 동지이기도 하다.

아현동 민예극단 사무실로 처음 찾아간 날 허규는 탈을 깎고 있었고, 구석에 앉아 있던 더벅머리 눈 까만 문학청년을 초연 때 연출가라며 인사를 터 줬다. 그 청년이 지금의 남편 손진책(孫振策)이다.

<한네의 승천>은 손진책의 연출 데뷔작이고, 김영동이 음악을 맡았으며 정병호 교수가 무용을 담당하고 서울대 국악과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직접 국악 생음악으로 연주를 들려줬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공연이었다.

허규와 손진책은 그 자리에서 김성녀를 바로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다들 놀랐죠. 저도 어안이 벙벙하고. 허규 선생님이 ‘보면 알아. 주인공 해도 돼. 부모님 보면’이라고 재확인까지 하셔서 아무도 더 말을 못했습니다. 오승명, 정현, 이도련, <에쿠우스> 공연 중에 유명을 달리한 김흥기 등이 출연했고 공연 장소는 명동 예술극장. 그 작품이 명동 예술극장 폐관(廢館) 작품이었습니다.”

일제시대 명치좌(明治座)였고 해방 후에는 국립극장이었으며 장충동 국립극장 완공 후에는 국립극장 별관 명동 예술극장으로 쓰이다 공무원연금 예산의 변제를 위해 대한투자금융에 매각되었던 이 유서 깊은 공간은 우여곡절을 거쳐 이명박 정부 시절 연극 공연장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한네의 승천>으로 돌아가 보자. 1977년 하길종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의 줄거리를 그대로 옮긴다.

<토속적인 무속마을에 제사굿이 행해질 무렵 한네라는 여인이 선녀당에서 죽음을 기도하다가 머슴 만명의 구원을 받는다. 만명은 한네에게 애정을 쏟지만 마을에서는 제사굿에 부정이 탄다고 쫓아내자고 한다. 마을에서 제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탈을 쓴 재수 마님 윤필주가 한네를 범하고 마는데, 과거에 만명의 어머니도 윤필주의 욕정의 재물이 되었던 것이다. 한네는 필주 사건으로 선녀당에서 떨어져 죽으며, 자신이 필주의 아들임을 알게 된 만명도 한네의 뒤를 따라 선녀당에서 죽음을 택한다.>

<한네의 승천>에서 1人3役

“만명 역이 바로 유인촌이었습니다. 저는 한네, 만명의 어머니, 술집 여자 일인삼역(一人三役)이었죠. 79년에도 공연하고 문화체육관에서도 공연하고…. 나중에 김영동씨가 <한네의 승천> 음반을 냈는데, ‘사랑가’ ‘삼포가는 길’ ‘어디로 갈꺼나’ 등이 실린 명반(名盤)이죠. 다른 곡은 몰라도 ‘한네의 이별’만큼은 김성녀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만삭인 채로 녹음실 가서 취입을 했습니다.”

—연출가와 배우의 결혼. 부모님의 경우를 그대로 따라 했네요.

“민예에서 죽 활동을 했으니까 자주 마주쳤죠. 제가 연극 경험이 없으니까, 처음엔 다른 단원들 사이에서 서러운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꼭 대학 나와야 연극할 수 있는 건가요?’라고 푸념을 한 적도 있으니까. 사실은 제 자격지심도 섞여 있었겠지요. 제 하소연을 들어 주고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해 주신 분이 윤문식 선배십니다.”

민예 소속으로 각시 역을 맡아 참가한 <물도리동>이 1977년 제1회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하회탈을 깎는 허도령 이야기였다.

“원래는 제 출산 예정일에 맞춰서 공연 날짜를 잡았어요. 출산 후 한 달 쉬고 연습해서 공연하는 것으로. 초산이라 그랬는지 아이가 예정보다 늦게 나오는 바람에 딱 두 주만 쉬고 연습해서 공연했습니다.”

허규의 권유로 창극단으로 옮겨

허규 전 국립극장장.

민예 대표(1973~81)를 하다 나중에 국립극장장을 역임(1981~89)한 허규가 김성녀를 불렀다. 1978년 어느 날이다.

“국립창극단으로 가라는 겁니다. 더 큰 배우가 되려면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며 권유를 하시더군요. ‘다른 사람은 가고 싶어도 실력과 경력이 모자라 못 간다, 정극(正劇)과 창극(唱劇)을 넘나들 수 있는 배우는 너밖에 없다’고 간곡히 권하셨어요. 박귀희 선생님 제자여서 창극단 입단이 가능했습니다. 그때까지 박귀희 선생님께 계속 배우러 다니고 있었거든요.

선생님은 제가 연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네가 너희 엄마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 연극과는 달리, 국악은 나이 먹어도 대접받으며 할 수 있다. 연극보다 예술가의 생명이 길다. 그러니 연극 하지 마라’는 말씀도 하시고 제가 결혼할 무렵에는 ‘너희 엄마도 연극쟁이 만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라며 살펴 주셨어요. 선생님 연세가 저희 어머니보다 열세 살 위니까 ‘아이고, 저거 이제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었던 거지요.”

창극단에 들어가 보니 ‘소리’에 바탕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다. 죽어라고 노력했다. 먼저 입단해 있던 ‘동애 언니’가 큰 의지가 됐다.

“동애 언니랑 저는 다 키가 커서 별명이 ‘쌍촛대’였어요. 지금은 간암으로 돌아갔죠. 요즘도 언니 생각을 많이 합니다.”

—국립창극단 시절의 대표작이라면 어떤 작품을 꼽을 수 있나요.

“<춘향전>이죠. 제가 춘향을 맡았고 이도령에 김동현, 어사가 조상현, 향단이가 안숙선. <광대가> <강릉매화전> 등도 의미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국립창극단에서 3년을 채우고 1981년 국립극단으로 이적했다. 나중에 뮤지컬과 마당극에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니, 김성녀는 정극과 창극 등 거의 모든 연극공연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한 배우인 셈이다.

“연극에도 쪽대본 있어”

“창극단에서 뭔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재능들이 모여 있는데, 레퍼토리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죠. 그 점이 마음에 걸렸어요. 새로운 작품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제 체질이거든요.”

국립극단에서는 1983년까지 활동했다.

—국립극단 시절의 대표작이라면 뭐가 있을까요.

“제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서 옮겼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오태석(吳泰錫)의 연출이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공연 끝날 때마다 배우들한테 메모를 해서 주고, 대사랑 동선(動線)이 매일 조금씩 바뀝니다. 연극에서도 ‘쪽대본’이 있는 거죠. 아예 중요한 스토리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그게 너무 좋은 겁니다. 제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면서 일종의 재미있는 과제를 풀어 가는 게임 같다는 느낌?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따라가며 끊임없이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오태석 연출로는 1981년 11월 <한만선>이 첫 인연인데, 1982년 <장화를 신은 고양이>, 1983년 <나래섬>은 국립극단 작품이었고, 아직 극단 목화가 창단되기 전에 이른바 ‘오사단’이 공연한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에도 참여했죠. 조상건, 박영규와 함께 공연했습니다. 판 소극장 개관기념 작이었습니다. 1993년 2월에 초연한 극단 목화의 <백마강 달밤에>에도 출연했는데, 그 작품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개관 기념작이었네요.”

—오태석은 어떤 연출가입니까.

“배우를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연출가죠. 처음에는 배우들을 다 풀어 주고 같이 웃다가 나중에는 자기 스타일로 정돈해 갑니다. 동원 가능한 배우 개개인의 장점을 관찰하는 것 아닐까요? 오태석 선생이 ‘김성녀는 그날그날의 흐름을 타는 배우다’라고 하셨는데, 고맙고 황송한 평가죠.”

TV드라마 <토지> 등 출연

2002년 마당놀이 <심청전>에 출연했을 때의 김성녀, 윤문식, 김종엽(왼쪽부터). 이 세 사람은 30년 동안 마당놀이를 함께 했다.

언젠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이탈리아의 극작가 다리오 포의 일인극 <여자의 역할> 연출을 오태석에게 부탁한 적이 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언젠가 꼭 하고 싶은 작업 가운데 하나다.

—TV도 몇 작품 출연하셨죠.

“첫 출연은 <전원일기>의 금동이 엄마였어요. 김회장네 업동이의 생모. 멸치장사하는 아줌마. 첫 고정배역은 1983년 KBS 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입니다. 그때 신상옥 최은희 납치사건이 있었잖아요? 최은희 역으로 특별출연했다가 고정배역이 되면서 할 수 없이 국립극단에 사표를 냈습니다. 김병기씨가 김정일이랑 너무 닮아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죠.”

<일월>에서 기생엄마, 1990년 주현, 김애경 등이 독특한 어투를 선보이며 인기를 모았던 <서울 뚝배기>에서는 설렁탕집 사장 오지명의 재혼부인으로 나왔다.

“<토지(土地)>의 조중구 마누라 역도 잊을 수 없죠. 엄청난 악역이었으니까. 상대역이었던 연규진씨가 ‘그렇게 독하게 하면 나중에라도 CF 하나도 안 들어와요’라고 농담할 정도였으니까요. 시골에 가면 실제로 돌팔매도 맞고 그랬습니다.”

김성녀라면 마당놀이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다. 마당놀이는 30년이 넘도록 이어지며 스스로의 생명력을 증명한 공연이다. 탈춤의 장점을 흡수해서 대중성을 가미하고, 우리 전통공연의 개방성을 바탕으로 서구의 장점을 혼합해 창조한 ‘새로운 장르’라는 점도 의미가 적지 않다. 그 중심에 김성녀가 있다.

“민예에서 <서울말뚝이> <토선생전> 같은 전통요소가 흠씬 들어간 공연을 많이 했어요. 마당극 탄생의 직접적인 계기는 둘입니다. 하나는 1979년에 마당 세실극장에서 공연한 <놀부뎐>입니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최인훈(崔仁勳) 선생의 한 페이지짜리 장편(掌篇)을 각색한 작품인데, 놀부에 김종엽, 흥부에 윤문식, 소리를 제가 맡아서 공연했거든요. 소품도 거의 없이 가는 한 시간 십 분 남짓한 짧은 공연인데, 첫날부터 객석의 반응이 폭발적인 겁니다. 깜짝 놀랄 만큼.”

마당놀이

마당놀이는 배우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는 공연이다. 사진은 마당놀이 <심청전>.

<놀부뎐>은 놀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간 작품이다. 흥부의 횡재는 땅에 묻어 놓은 남의 재물을 캐낸 결과이며, 놀부는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따질 것은 확실히 따지는 현대적 인간으로 나온다. 공연 중간중간에 ‘형님, 돈 좀 꿔주쇼. 난 갚는다면 갚는 놈이여!’, ‘못 갚으면 못 갚았지 안 갚지는 않을 테니’ 같은 정치적 풍자에 관객들은 열광했고, 막 쥐포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얘들아, 형님 오셨다. 산해진미 내오고, 마지막으로 쥐포를 너무 타지 않게 구워서’라는 시류(時流)를 적극 반영한 대사에 관객들은 연신 폭소를 터뜨렸다.

“‘국풍 81’이라고, 5공 출범 직후 정부 주도로 여의도에서 진행한 야외 축제 행사가 있었거든요. 그 행사를 전후해서 MBC에서 창사특집 문화프로그램을 공모했습니다. 마당 세실극장을 하시던 이영윤 선생이 민예 멤버이기도 해서 손진책씨랑 ‘가장 한국적인 연극을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했죠. <놀부뎐> 식으로 현실 풍자도 하고 우리 전통연희에서 하던 대로 길놀이도 넣고 흥겹게 큰 판으로 가 보자고 제안서를 넣었는데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하자’고. ‘마당놀이’는 이때 만든 신조어(新造語)입니다.”

마당놀이 30년 역사 중 김성녀는 29년을 함께했다.

—문화체육관에서 막을 올린 초연 <허생전> 때는 출연 명단에 없네요.

“불참했어요. 산적(윤문식) 부인 역으로 연습하다가 뮤지컬 <에비타>에 출연하게 돼서. 국립극단 쫑파티 때 제가 라틴 노래를 부른 적이 있는데, 그걸 보신 극단 현대극장의 김의경(金義卿) 대표께서 캐스팅을 하셨습니다. 조영남이 체 게바라로 나오고 유인촌, 김진태 등이 출연한 호화 배역이었습니다. 연출은 김상렬 선생님, 저는 이경애씨와 더블캐스팅으로 에비타 역, 가수 윤복희 선배가 저한테 서양 뮤지컬 발성을 개인지도해 주셨어요.”

마당놀이에 나타나는 地域色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린 <에비타>는 딱 사흘 공연하고 막을 내렸다. 정치적인 이유였다. 검열의 위세가 대단하던 시절이다.

“그 공연이 장기공연에 돌입하고 흥행에 성공했더라면 지금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마당놀이는 처음엔 한 해만 하고 끝날 것 같았는데, 관객들의 호응이 이어지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첫해에는 MBC 창사기념일인 12월 2일에 개막해서 무료로 이틀간 공연했고, 마당놀이가 인기를 얻으면서 공연기간도 늘어나고 전국순회 지방공연도 이어졌다. 올림픽 경기장 옆 천막극장에서 한 달을 공연하기도 했다. 매년 서울에서 10만, 지방에서 20만명을 동원했으니 30년 3000회 누적 관객 수는 도대체 얼마일까.

“처음엔 뮤지컬 식이었다가 차츰 길놀이, 고사(告祀), 탈놀이, 뒤풀이 구조로 발전해 나갔죠. 평단은 외면했지만 관객들은 전국 어디서나 호응을 해 주셨어요. 초창기 청년 관객들이 지금은 자녀들 손을 잡고 오시죠.”

—30~40년대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고 만주까지 돌았던 고설봉 선생님은 ‘지역마다 관객 성향과 반응이 다 달랐다. 예컨대 평안도 관객들은 잘하면 열광적인 갈채를 보내다가도 조금만 공연이 늘어지면 무대 위로 방석을 집어던지곤 했다. 배우들 은어로 오늘 방석 날랐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고 증언했습니다. 지금도 지역별로 관객 반응에 차이가 있는지요.

“마당놀이 5년 차부터는 차이가 거의 없어졌고, 마당놀이 초창기만 해도 지역별 특색이 있었어요. 호남 관객들은 2~3시간 전부터 미리 와서 기다리세요. ‘굿 보러 일찍 왔어’가 그분들의 인사입니다. 못하면 박수 안 치고 ‘소리 제대로 해’ 고함 지르고, 길놀이 때는 신명에 겨워 배우들 엉덩이를 때리기도 하고. 귀 명창들이 많으니까 배우 입장에서는 호남 공연 끝나면 ‘아이고, 금년 공연 이제 다 했다’는 말이 나오죠. 영남 관객들은 잘 웃고 박수 잘 치고 반응이 적극적입니다. 공연 중간에 엿을 판 적이 있는데 판매량 1위는 늘 영남이었습니다. 충청도는 점잖으세요. 돌아가신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이 ‘이분들은 아마 집에 가서 웃을 것’이라고 농담하신 적이 있거든요. 남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실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갈림길에 선 마당놀이

—마당놀이는 지금 화석화된 장르가 되느냐 미래지향적 예술로 거듭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처음엔 1회성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만해도 선전(善戰)한 거지만…. 초창기 배우들이 세대교체 없이 거의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건 장점이자 약점이죠. ‘마당놀이 배우’라는 말은 연극계에서는 참여자들을 약간 비하하는 뜻으로 쓰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마당극이 ‘전통을 재창조한 가장 한국적인 음악극’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서민들의 축제 같은 연극, 21세기형 마당극이 다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안호상 국립극장장께 말씀드려서 12월에 오영진 선생의 <맹진사댁 경사>를 극작가 배삼식이 각색한 <시집가는 날>을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합니다. 초창기 멤버 중에는 저만 남고 나머지 배역은 젊은 배우들을 쓰기로 했습니다. 국수호 안무, 박범훈 작곡, 손진책 연출. 요즘 결혼 풍속도 집어넣고 현대적 감각으로 가 보는 거지요.”

김성녀의 현직은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다. 중대에선 학장과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정통극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콤플렉스, 제 연기를, 노래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해서 다듬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85년에 학력고사 보고, 단국대 천안캠퍼스 국악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석사는 중대에서 5년 걸려서 했고. 강사들이 다 제 제자여서 에피소드가 많은데, 알려진 사람이라 봐주기가 곤란하다고 해서 제대로 수업 듣고 논문 쓰고 그랬죠.”

김성녀는 2012년 3월부터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마당놀이가 맞이한 ‘위기와 기회’는 창극에도 그대로 해당하지 않을까?

“창극에도 변화 필요”

“판소리가 전통을 지키는 장르라면 창극은 시대와 더불어 새롭게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리’를 매개로 정통 판소리 가락에 합창, 화성(和聲) 같은 요소를 다 넣는 거죠. 창극 전문 연출가도 나와야 하고. 드라마만 안다고 창극 연출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 ‘소리 속’이라는 말이 있어요.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꼭 살려야 하는 멜로디, 예를 들어 심청이가 밥 빌러 가는 노래는 심청이의 ‘첫 노래’인데, 이걸 중간에서 끊으면 드라마는 스피디하게 살아날지 몰라도 음악적 연결성은 단절됩니다. 그래서 소리, 춤, 연기를 두루 가르치는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여기서 전문인력을 양성하길 희망합니다.”

—최근에 국립창극단이 공연한 <장화홍련>이나 <메디아>는 ‘전통을 파괴했다’, <서편제>에서는 ‘창극 공연에 양방언의 피아노 연주가 웬 말이냐’는 논란이 있었는데요.

“제 목표는 ‘창극을 안 보던 사람들을 창극 팬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꺼이 논란의 중심이 되어 보겠다는 각오가 있어요. <장화홍련>은 매진이었고, 유료 관객이 70~80%였습니다. 창극사상 처음이죠. 자체 분석 결과 연극과 뮤지컬 관객이 많이 오셨어요. 역시 매진 사례였던 창극 <메디아>는 오페라 관객들이 건너오셨고. 창극이 공연계의 중심에서 서양 명작들을 재해석해서 공연하고, <장끼전> <강릉매화전> <숙영낭자전> 같은 유실된 판소리도 다시 살려내고….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그런 소망을 품고 <내 이름은 오동구>라는 씨름선수 이야기를 창극으로 공연하고 11월에는 세계적인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이 내한해서 <춘향전>을 연출합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딸은 뮤지컬 배우

1인극 <벽 속의 요정>에서 김성녀는 1인 32역을 소화했다.

—배우로서 김성녀의 계획도 있죠.

“2011년에 초연하고 지금도 무대에 올리는 1인극 <벽 속의 요정>에서 32역을 소화했습니다. 스페인 내전 때 ‘벽 속으로 숨어든’ 아버지를 두고 딸이 성장해 가면서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죠. 8월에는 저하고 50년생 동갑내기 연출가인 한태숙이 작업하는 <유리 동물원>에 출연합니다. 장소는 명동 예술극장. <벽 속의 요정> 이후 3년 만의 신작이라 시집가기 전날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수는 2015년에 정년퇴임이니까, 창극단 예술감독 해촉(解囑) 후에는 좋은 작품을 순례하면서 무대 위에서 배우로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 꿈입니다.”

손진책과 김성녀의 큰딸 손지원은 10년 차 뮤지컬 배우다. <그리스> <42번가>에서 주연으로 활약했고, 영국으로 건너가 카메론 메킨토시사의 <미스 사이공> 순회 프로덕션에 출연했다. 지금은 서울예대에서 예술치료를 가르치고 공부한다. 손진책이 창단한 극단 미추의 첫 작품 <지킴이>(정복근 작)에서 제주(祭主)의 5세 손자로 나왔던 아들 손지형은 중국, 미국, 일본에서 공연하고 올 10월 연출가로 데뷔한다. 재일동포 극작가 정의신이 쓴 여배우 셋이 나오는 소품 뮤지컬 <요요현상>을 게릴라극장에서 공연한다. 김성녀 자신은 6월 11일부터 국립창극단이 무대에 올리는 고선웅 작 <변강쇠 점찍고 옹녀>의 준비를 위해 분주하다. 김성녀에게 손자 손녀가 생긴다면, 그들도 운명처럼 연극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술적 방랑’

김성녀는 2010년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했다. 부부가 모두 이 상을 받은 것은 손진책-김성녀 부부가 처음이다.

—마무리 질문입니다. 좋은 배우란 어떤 존재입니까.

“진정성을 가지고 연기하는 사람이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자기와 남의 인생을 모두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

—배우는 재능입니까, 노력입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참고 견디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부부가 따로따로 이해랑연극상을 받은 건 저희 커플이 최초인데, ‘아, 내가 인생을 헛되이 산 것이 아니로구나, 누군가가 나의 예술적 방랑을 높이 평가해 주셨구나’ 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자기에게 투자하라, 자기를 아끼고 긴 호흡으로 시간을 견디라는 말을 후배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남 탓할 시간이 없어요. 부정적 시각으로 세월을 보내면 자기발전은 없는 겁니다.”

하루를 25시간처럼 살았다는 김성녀의 결론이었다. 거친 세월을 필사적으로 견뎌 온 남사당패와 여성국극과 국악인들의 질기고 귀한 생명력이 그녀의 미소를 뚫고 살짝 즐겁게 모습을 보이는 듯했다. 김성녀는 ‘부드럽게 강인한’ 여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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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긴 호흡으로 시간을 견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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