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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발발 50주년 인터뷰

맹호부대 재구대대 중대장으로 참전한 徐慶錫 장군

“朴正熙 대통령의 참전결정 재평가 받아야”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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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에서 지휘통일은 기본… 한·미·월 3국, 美 주도로 전투했더라면 전쟁양상 달랐을 것”
⊙ 주월한국군 최초의 ROTC 출신 소총 중대장… 베트남전 전투경험 모아 《전투감각》 펴내
⊙ 盧泰愚 당시 재구대대장과 인연… 회고록에 “적들에게 소문 날 정도로 무서운 장교”라고 평가
⊙ 총상 입은 마이 여인의 안타까운 죽음… “귀국 후 GOP 대대장 시절에도 꿈에 나타나”
⊙ “朴正熙 대통령, 파병 지렛대로 한미동맹 강화하고 경제성장의 기틀 마련”

徐慶錫
⊙ 72세. 고려대 사학과 졸업. 경남대 대학원 경영학과 졸업. 1965년 ROTC 3기 임관.
⊙ 파월 맹호부대 소대장·중대장, 17사단 102연대장, 특전사 참모장, 5공수 여단장(준장),
    17사단장(소장), 교육사령부 참모장, 6군단장(중장) 역임.
⊙ 고려대에서 ‘전쟁과 국가’ ‘지도자론’을 강의. 동티모르 대사 역임.

취재지원 : 劉旿相 月刊朝鮮 인턴기자
  올해로 베트남전 발발 50주년을 맞는다.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하노이 인근 해역 통킹만에서 미국 해군 구축함이 두 차례에 걸친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자, 미군 전폭기들이 북위 17도선 북쪽에 위치한 항구시설과 초계정 기지 등을 64차례나 맹폭(猛爆)하며 베트남전은 막이 올랐다.
 
  한국은 베트남 정부의 파병요청으로 1964년 9월 130명의 이동외과병원 장병들과 10명의 태권도 교관 등으로 구성된 비전투병을 베트남에 보낸 데 이어 이듬해 9월 한국군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과 전투부대인 청룡부대(해병 2여단)와 맹호부대(수도사단)를 보냈고, 1966년 백마부대(9사단)가 합류토록 함으로써 사상 초유의 해외파병 기록을 세우게 됐다.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사이공을 함락하고 남베트남 정권을 무너뜨리면서 1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은 공산화로 막을 내렸다.
 
  1973년 3월 23일 우리 군이 완전 철수하기까지 8년6개월 동안 우리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연인원 31만2853명을 파병했다.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000회의 소규모 단위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5099명이 전사하고 1만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베트남전 기간 동안 맹호부대 소대장·중대장으로 생사를 넘나든 서경석(徐慶錫) 전 6군단장(ROTC 3기·예비역 육군중장)을 지난 2월 6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오피스텔에서 만나 베트남전 참전의 의미와 전투 체험담을 들었다.
 
  1968년 베트남에 간 서경석 장군은 맹호부대(수도사단) 1연대 3대대(재구대대) 중대장으로 26개월간 전투를 수행한 ‘베트남전의 산 증인’이다. 그는 전투경험이 없는 후배 장교들을 위해 월맹 정규군과 베트콩과의 수많은 전투 내용을 기록으로 정리해 1991년 6월 《전장감각》(샘터사), 《전투감각》(샘터사)으로 펴냈다. 1996년 6군단장으로 전역한 그는 10여 년간 모교인 고려대에서 ‘전쟁과 국가’ ‘지도자론’을 강의하다 2009년부터 3년간 동티모르 대사를 역임했다.
 
  서경석 장군의 10평(33m²) 남짓한 오피스텔은 그가 피운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기자가 사진기자와 함께 오피스텔에 들어서자, 기자의 ‘기습’에 베트남전의 ‘용장(勇將)’은 놀란 표정으로 “사진기자가 올 줄 알았으면 폼 나게 입을 걸 그랬지” 하며 멋쩍게 담뱃불을 비벼 껐다.
 
  170cm의 키에 단단해 보이는 체구가 72살의 노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서 장군은 “베트남에선 긴장을 풀기 위해 시레이션(C-ration)에 담긴 화랑, 윈스턴, 말보로 등을 하루에 한 갑 정도 피웠다”며 “집사람 성화로 담배를 끊기로 했는데, 갑작스레 끊기 어려워 경비원에게 하루 서너 개비를 얻어 피운다”고 했다.
 
  서경석 장군은 올 초부터 베트남전 특강으로 바쁘다. 얼마 전 해병대 장병들 특강에 이어 올 3월 임관 예정인 학군사관후보생 장교들에게 ‘전투감각-베트남전 경험을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특강했다고 한다. 그는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 천신일(千信一) 전 세중나모 회장, 유준상(柳晙相) 한국정보기술연구원장 등과 함께 고려대 61학번 동기들의 모임인 ‘육일회’ 멤버다.
 
 
  파병은 독자적 결정
 
젖꼭지 모양의 산이라 일명 젖바위산으로 불린 해발 1000m의 푸캇산. 워낙 우뚝 솟아 있어 자신의 위치를 모를 때 지도판독의 기점으로 사용했다. 산이 깊어 월맹군이 은거지로 활용했다.
  베트남전 참전에 비판적인 세력들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어들였으니 “한국군은 피의 보상을 노린 미제(美帝)의 용병(傭兵)”, “청부전쟁에 이용당한 침략전쟁의 동조자”, “전쟁과 무관한 양민을 학살했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서경석 장군은 “전체적으로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주월미군의 작전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전개했고, 우리 스스로 결정한 파병이었다는 점에서 ‘용병’ 운운하는 것은 과장과 억지”라고 잘라 말했다.
 
  서 장군은 ‘청부전쟁에 이용당한 침략전쟁의 동조자’라는 주장에 대해, “당시 세계가 미소(美蘇)로 갈렸던 냉전기였고, 한국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했던 최전선(最前線)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양민의 희생이 있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베트남전은 기본적으로 정규군 간의 정면대결이 아니라 군인이 양민으로 가장해 양민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적군을 공격하고 달아나는 게릴라전이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양민이 희생당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서경석 장군은 “베트남전쟁에서 우리는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 6·25전쟁 때 진 빚도 갚아야 한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파병에 동의했다”면서 “그러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내심 파병을 지렛대 삼아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그대로 묶어 두면서 국가안보를 확실히 하고 전투부대 파병을 대가로 최대한의 경제적 실익을 챙기겠다는 치밀한 계산을 했던 것”이라고 했다.
 
  우리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우며 받은 달러는 꼬박꼬박 한국으로 송금돼 ‘한강의 기적’을 이룬 종잣돈이 됐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1965~1973년 군사원조 증가분 10억 달러, 기술이전 및 수출진흥 지원 20억 달러 등 총 50억 달러의 외화획득 효과가 있은 것으로 분석됐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빈곤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한 단계 격상되는 계기를 맞았고, 1970년대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투경력 쌓으려 베트남행
 
1968년 월맹 정규군 3사단 18연대 3대대와의 전투에서 M79 유탄발사기로 적을 사살했다. 시체 15구를 한군데 모아놓고 M16 소총을 착검시켜 논바닥에 거꾸로 박고 철모를 얹은 채 고개 숙여 명복을 빌었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학군사관후보생(ROTC) 3기로 임관한 그는 15사단 38연대 소대장을 거쳐 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으로 근무하다 1968년 2월 베트남으로 떠났다. 연대 작전주임 손동호 소령(대령 예편)이 “고려대를 나와 장기복무를 신청했으니 전망이 좋다”며 “육사 출신들에 비해 전투경험이 밀릴 수 있으니, 베트남에 가서 경력을 쌓는 것이 좋겠다”며 파병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부모님께서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반대는 무슨… 단번에 ‘가라’고 하셨어요. 부모님은 ‘아들 셋이면 하나는 나라에 바쳐야 한다’고 했어요. 좀 깬 분들이야. 3남2녀의 장남으로서 교사의 박봉으로 자녀들 등록금 때문에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돕고도 싶었고요.
 
  월남 가면 1년치 봉급을 일시불(월 6만원×12=72만원)로 주고, 추가로 전투수당 명목으로 월 120~130달러를 받았어요. 게다가 주월한국군사령관 표창을 받으면, 제너럴일렉트릭(GE)의 100달러짜리 텔레비전을 사서 본국에 보낼 수 있도록 통관을 면제해 주었어요. 이걸 팔면 동생들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야. 파월 전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던 아내(백순휘씨)를 만났는데, 베트남에서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죽인다’고 ‘협박 편지’를 꾸준히 보내 도망을 못 가게 했어요(웃음).”
 
  —첫 번째로 적과 조우해 벌인 전투가 기억납니까.
 
  “적정(敵情)을 파악하라는 까다로운 임무라서 기억이 나요. 1968년 6월 말경 매복에서 돌아와 벙커에서 쉬고 있을 때 1연대 2대대장 김영규 중령(갑종 15기)이 벙커를 직접 찾아오셔서 ‘푸캇산에 적정이 많이 발견돼 사단 또는 연대 규모의 작전을 전개하기 어려우니 자네가 침투해 확인해 오게’라고 말씀을 하세요. 고약한 임무라서 말라리아 걸렸다고 둘러대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 많은 소대장 중 저를 뽑아 주셔서 영광입니다’라고 헛말이 나갔어요(웃음).”
 
  서경석 장군은 “처음 소대원을 인솔해 지역 내 수색정찰을 나가기 전날, ‘내가 이제 전투를 하는구나, 사람을 총으로 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흥분해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갈등이 심했겠지요.
 
  “똑같죠. 그런데 전투가 시작되면 그건 한가한 생각이라는 걸 알게 돼요. 시무룩하고 말수가 적던 병사들도 총탄이 빗발치면 눈에서 불을 쏴요. 전투는 서로 죽이려는 집단이 부딪쳐 죽이기 시합을 하는 것이죠. 다 사살하면 나와 내 부하가 살아남고 나라도 지키나, 그러지 못하면 나도 부하도 죽고 나라도 빼앗기는 겁니다.”
 
월맹군의 침투로인 호찌민 루트와 보급로.
  —전투가 시작되면 신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매복작전에서 적 첨병(尖兵·행군의 선두에서 경계·수색하는 임무를 맡은 병사)을 통과시키고 적 본대를 ‘살상지대’까지 유인하려면 공포심이 최고조에 달하죠. 신기하게도 손가락에 살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감각이 사라져 버려요. 오로지 적을 찾기 위해 신경이 눈과 귀에 쏠리고, 초능력자가 된 것처럼 천리 밖의 소리도 들을 정도예요.”
 
  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 서경석 중위는 소대원을 이끌고 이틀간의 수색정찰 예행연습을 마치고 군장검사를 거쳐 푸캇산에 침투했다. 일명 ‘젖바위산’이라고 불리는 해발 1000m의 푸캇산은 밤낮으로 관측할 수 있어 방향유지를 한다거나 지도판독의 기점으로 이용했다.
 
  “새벽녘에 지친 나머지 산비탈에 걸터앉아 닭고기와 국수깡통을 먹고 있는데, 눈이 크고 광대뼈가 유난히 옆으로 벌어진 비쩍 마른 남자가 맨손으로 걸어왔어요. 자다가 용변을 보러 오는 것 같았어요. 쏠까 말까 망설이는데, 그놈이 나를 쳐다보고 놀라 그 자리에 굳어 버려요. 순간, ‘탕’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어요. 내 우측 경계병이 좌측 가슴을 조준, 심장을 꿰뚫어 버린 거지요.
 
  나는 순간 접적지역을 이탈해야 한다고 판단해 소대원들에게 ‘날 따라오라’고 소리치고는 3명 1개조로 조별사격을 가하며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속도로 달렸어요. 새벽 잠결에 움막에서 적들이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것을 집중적으로 사격을 해대니 적이 코앞에서 픽픽 쓰러졌어요. 아군의 105mm 포 사정권 내로 들어와 포병사격을 요청하면서 대원 12명 모두 무사하다는 보고를 했죠.
 
  최초 부여된 임무를 완벽하게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사진촬영병이 일제 니콘 자동카메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와서 움막집 첩보사항으로 보고해 그런 대로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국방색 군복을 입은 적으로 미뤄 월맹 정규군이 분지를 중심으로 산속에 전술적으로 배치돼 있다는 것을 파악했죠.
 
  그런데 나는 소총만 들고 뛰는 바람에 철모를 쓰지 못하고 뛰어 내려왔던 거예요. 소대장인 나만 철모를 쓰지 않고 있으니 그렇게 무안할 수가 없었어요. 누가 철모를 치우지 않았다면 철모의 위장포는 다 썩었더라도 아직 산속에 외롭게 있을 것입니다.”
 
 
  선임하사 딸에게 쓴 편지
 
월맹군 정규 3사단 야전병원 수색작전을 수행하던 중 병사의 군화에 'ㅂ'자형 뚜껑을 덮은 인공동굴을 발견했다(왼쪽). 백린연막탄을 소진해 세열수류탄을 넣어 적을 제압하고 포로를 끌어올리고 있다. 사진은 기어나오는 동료를 끌어당겨 주는 여자 포로. 파편상으로 부분대장에게 업혀 후송됐던 여성이다.
  —사지(死地)에서 부하들에게 명령하려면, 소대장은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햇병아리 소대장으로 베트남에 처음 가면 값비싼 대가를 치러요. 나무 덩굴이 전부 부비트랩 인계철선처럼 보이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뢰가 터질 것 같고, 풀숲에서는 적이 총을 쏘며 튀어나올 것 같아요. 소대장이 선임하사와 2개 분대씩 나눠 수색정찰을 하면 병사들은 신참 소대장이 전투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불안해해요.
 
  전장에서 발생하는 사항들을 조치하는 능력은 스스로 터득해야 하지만 고생을 덜기 위해선 소대원끼리 서로 가르쳐 주어야 해요. 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터득한 그들의 경험을 존중해 주었고, 이해하면서 병사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솔선수범을 하지 않으면 부하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불만을 갖게 되죠. 리더십의 핵심은 부하들에게 정성을 쏟는 것이고, 정성이 없으면 신뢰도 생기지 않아요.”
 
  —당시 파월된 병사들의 학력이 높지 않아 대학을 졸업한 소대장들과 불협화음은 없었습니까.
 
  “파월 장병들 80% 정도가 국졸이었어요. 시골에서 소 끌고 쟁기질하던 친구들이지만, 똘똘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소대장의 하루 일과가 끝나면 소대원들 집에 편지 서너 통을 쓰는 게 일이에요. 처음 1연대 2대대 2소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나보다 8살이나 위인 34살의 소대 선임하사가 ‘소대장 길들이기’를 하는 거예요.
 
  소대장 적응기간에 더럽게 가르쳐 주는 거야. 예를 들면, 작전지도를 주머니에서 꺼내거나 전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거나, 무전병을 옆에 데리고 다니는 행위는 모두 적에게 포착된다며 소대장 무전병의 P-77 무전기 안테나를 빼 버리고 선임하사 무전기로만 통신을 하라는 거야.
 
  정찰 나가면 소대장조와 선임하사조로 나눠 가다 우리 조가 길을 잘못 들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병사들 앞에서 ‘고려대 나온 소대장이 독도법(讀圖法)도 모른다’고 개망신을 줘요. ‘소대장 시체 치우기 싫다’며 공공연히 이야기를 하는데,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해요.
 
  부하 가족들에게 편지를 쓸 때, 선임하사의 젊은 부인에게 편지를 쓰기도 뭣해 국민학교 학생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네 아빠는 총알이 피해 가는 귀신이니 염려 마라’며 아빠의 활약상을 한껏 치켜주면서, 이동 PX에서 간단한 학용품을 사서 보내 주었죠. 딸이 아빠에게 편지를 보낼 때 소대장 이야기를 했을 건데, 자존심 강한 선임하사가 말이 없더라고요.”
 
  —그 이후에 선임하사의 태도가 바뀌었나요.
 
  “한 번은 수색을 하는데, 바나나 잎이 총알에 뚫리는 소리가 ‘타타탁’ 하고 들려요. 상탄(총의 반동으로 총구가 들어올려져 총알이 위로 날아가는 현상)이 난 거야. 그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바로 엎드리지 못하면 죽는 거지. 난 반사적으로 바나나 나무 옆 퇴비 더미에 코를 박았어요. 냄새가 말도 못하지.
 
  그때 선임하사가 내 무전병에게 ‘소대장 머리 콱 쳐박아! 소대장 죽으면 널 죽일 거야!’라고 소릴 질렀어요. 사실, 그 무전은 내가 받고 있었거든요. 선임하사가 머쓱해하면서 ‘적 기관총 진지는 내가 우회해서 처리하겠다’고 해요. 적을 처리하고 악수를 건네자, 그가 ‘딸이 아빠의 건강뿐 아니라 소대장님의 건강도 챙기더라’고 말하더군요. 표현방식이 투박해서 그렇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선임하사구나 생각했지요.”
 
  —전장에서 원칙을 지키지 않고 만용을 부리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요.
 
  “흔히 소대장으로 부임해 3개월만 총 맞지 않고 견디면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했어요. 내 경험으로 보면 정반대예요. 약 3개월 정도 지나 수색정찰, 매복 등을 몇 번 다녀오면 작전회의 시간에 아는 체를 하고, 고집을 부리고 우쭐대기 시작해요. 이때가 제일 위험하고 죽기 꼭 알맞은 시기예요. 새로 전입 온 육사 럭비부 출신 박모 소위는 3개월이 지나자 자만에 빠지더니 작전회의 석상에서 신중론을 펴는 선배 소대장들에게 ‘겁 좀 내지 말라’며 나무라기까지 하더군요. 푸캇산 작전에서 그는 철모도 쓰지 않고 미제 빵모자만 쓰고는 소대 첨병에게 ‘전진 속도가 느리다’며 첨병보다 앞장서 산을 기어오르다 정수리에 저격탄을 맞고 말 한마디 못한 채 전사했습니다.”
 
 
  재구대대장 盧泰愚 중령과의 인연
 
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 시절, 소대원들과 함께한 서경석 중위(가운데 철모 쓴 이).
  대위로 진급한 서경석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과 베트남에서 인연을 맺는다. 1969년 초 노태우 중령이 1연대 3대대(재구대대) 대대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서 중위는 노태우 중령에게 “소대장이라도 좋으니 재구대대에 넣어 달라”고 졸랐으나, 노 중령은 서 중위를 잘 알지 못했다. 노 중령은 서 중위의 소속 대대장인 김영규 중령에게 평판을 물었고, 김 중령은 “무조건 데려다 쓰라”고 추천했다. 서경석 대위는 맹호부대 1연대 3대대 11중대장으로 부임한다.
 
  맹호 1연대 3대대는 육사16기 강재구(姜在求) 소령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본받기 위해 ‘재구대대’로 불렀고, 그들이 평정한 마을을 ‘재구촌’이라 불렀다. 재구대대는 맹호부대의 최북방을 담당했다.
 
  1번 도로를 끼고 있으면서 동쪽으로 전략요충인 해발 1000m의 푸캇산을 안고 있었다. 대대는 넓은 고보이 평야와 푸캇 비행장을 감제(瞰制·좀 더 높은 지점으로부터 관측 등에 의해 적의 활동을 통제하는 것)해야 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이 철수하자 과거 식민지라는 명분으로 프랑스가 재진주하면서 시작된 베트남 독립전쟁에서 프랑스 정규군 1개 대대가 푸캇산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에서 베트남군에게 전멸당한 곳으로, 당시까지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노태우 회고록》(조선뉴스프레스)을 보면, 노 대통령은 서경석 중위와의 만남을 이렇게 적었다.
 
  <연대 PX 장교를 하던 서경석 중위는 고려대 ROTC 출신이다. 대위 진급을 앞둔 그는 전투중대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루는 나를 찾아와 “대대장님 밑에서 근무하고 싶습니다. 소대장이라도 좋으니 꼭 시켜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모습은 무뚝뚝해도 군인답게 생겼기에 “대위를 달게 되면 소대장은 안 되고 중대장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자리가 없으니 기다려 보게. 기억하고 있겠네” 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대대의 11중대장이 귀국하게 되어 후임으로 서 중위를 요청했다. 그는 무척 기뻐했다. 1969년 4월 5일 중대장으로 부임해 한 달쯤 지났을까, 야간 매복에서 전과를 내기 시작하는데, 흔한 말로 ‘겁나게’ 잘했다. 부하들을 무척 아끼는 그는 적들에게도 소문이 날 정도로 무서운 장교였다. 내가 대대장을 그만둘 때까지 대대 전과(戰果)의 반 이상을 서 중위가 이끄는 중대에서 올렸다.>
 
  —노태우 중령의 재구대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겁이 많고 사람 좋은 선임하사 제모 중사가 매복을 나갔다가 전투음어(陰語)를 분실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어요. 당시 베트남전에는 북괴군 고문관이 월맹군 측에 참전해 우리의 무전교신을 도청하면서 월맹군 작전을 지원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돼 전투음어를 제작해 사용하고 있었죠. 제 중사는 전날 밤 중대기지에서 약 4km 떨어진 숲에서 매복하다 혼자 오는 적에 클레이모어를 눌러 사살해 크게 망신을 당했어요. 우리 중대는 혼자 앞서 오는 용감한 첨병을 쏘는 사람을 겁쟁이로 취급했어요.
 
  전투음어를 잃어버린 장소로 가 보니 월맹군 시체도 없어지고, 음어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적들이 시체를 챙겨 가며 음어도 주운 거지요. 음어를 찾지 못하면 중대장인 나와 제 중사는 군법회의에 회부돼요. 중대에 돌아와서 노태우 대대장께 ‘이틀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어요. 노 중령님은 나를 믿어 주셨고, 중대원을 풀어 4km나 되는 캇숀 계곡을 완전히 틀어막고 매복을 세웠습니다.
 
  제 중사는 그가 인솔했던 매복조를 데리고 동일한 장소에 매복을 서게 했어요. 그 길로 놈들이 다시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죠. 새벽 2시경 제 중사 매복장소 상공에 적과의 접촉을 알리는 수타식 적색 조명탄이 떠올랐어요. 살상지대로 적 10여 명을 유인해 모두 사살했어요. 적 시체를 샅샅이 수색하니 적의 지갑 속에 제 중사가 분실했던 그 음어가 들어 있었어요. 기적이 일어난 거죠! 음어는 클레이모어 파편에 구멍이 났고, 선혈이 흥건하게 묻어 있었어요. 우리 중대는 주월한국군 최초로 전투음어를 분실해 유명해졌고, 또 분실한 음어를 바로 그 장소에서 분실한 장본인이 다시 찾아내 더욱 유명해졌어요.”
 
  —노태우 대통령과 인연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습니까.
 
  “귀국해 결혼할 때도, 딸을 낳았을 때도 인사를 드렸어요. 사모님(김옥숙 여사)이 ‘이렇게 잘생긴 서 대위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다니 믿기지 않아요’라고 하셨죠. 1986년 17사단 연대장을 할 때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노태우 당시 민정당 의원에게 고려대생들이 데모가 심하니 고려대 학군단장을 시킬 고려대 출신 장교가 없느냐고 물었고, 노 의원은 나를 떠올리셨답니다. 그 바람에 연대장 임기(24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15개월 만에 고려대 학군단장으로 호출을 당했어요. 맹호부대에 소대장과 중대장까지 26개월을 하다 보니 노태우 대대장은 10개월 만에 떠나시고, 박희도(朴熙道) 대대장(육사12기·육군참모총장 역임)까지 모시게 됐어요.”
 
 
  포로를 학대하지 말라
 
우마차길 옆 동굴 속에서 잡은 16~17살 가량의 나이 어린 포로들을 심문하는 서경석 중위. 월맹 정규군으로부터 대민심리전 전문교육을 받은 공작요원들이었다.
  서경석 대위의 1연대 3대대 11중대는 미군 전투기비행장을 방어하기 위해 월맹군 대대급 규모의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날은 서 대위가 중대장이 된 지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 전투에서 화기소대장 이성수 상사가 적 저격병의 집중사격 8발을 받고 쓰러졌다. 교전이 끝나고 적 포로 5명을 잡았다.
 
  화기소대원들은 이 상사의 시신을 판초우의에 말아 헬기로 후송할 때 “선임하사님, 우릴 대신해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이륙한 헬기가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서경석 대위는 거수경례로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때 서 대위 뒤편에서 “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서경석 장군의 말이다.
 
  “화기소대원들이 대검과 정글도로 포로들을 무릎 꿇려 놓고 어깨와 무릎을 찌르고 있는 거야. 30초도 되지 않은 순간에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야. 제네바협약은 포로는 누구나 인도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고, 전투지대 내에서는 최소한 지체한 후 곧 후방으로 신속히 후송시켜 상급부대 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하도록 명시돼 있어요.
 
  내가 현장에서 병사들 따귀를 때리며 제지했고, 포로들을 압박붕대로 싸서 헬기로 후송했어요. 사단사령부 육군정보대(MIG·Military Intelligence Group)에서 포로를 심문하면서 학대 사실이 밝혀졌지요.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됐어요. 당시 고려대 동기인 유지담(柳志潭) 사단 검찰관(대법관 역임)이 중대장의 조직적 지시 여부를 조사할 때, 포로들은 중대장이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을 구했다고 진술했고, 결국 우발적 사건으로 결론이 났어요. 나와 병사들은 불명예 귀국조치는 면했지만, 그 때문에 을지무공훈장이 충무무공훈장으로 강등되고, 미국 훈장과 베트남 훈장은 취소됐어요.”
 
작전후 중대원들과 전술토의를 하고 있는 서경석 중대장. 그날 전투상황에 대해 솔직한 의견교환을 하고 팀워크를 다진다.
  1950년 10월 19일 평양 입성 시가전에서 1사단 소속 소대장이 북한군 저격병에 쓰러지자 소대원들이 투항하는 적을 향해 사격을 했습니다. 포병사령관 윌리엄 헤닉 대령이 백선엽(白善燁) 1사단장에게 “투항하는 적에게 사격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고 항의했고, 백 장군은 “적을 무찌른 것은 전공(戰功)으로 칭송되나 자칫 잘못 판단하면 만행(蠻行)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며 사격중지를 명령했던 사례도 있습니다.
 
  “적이 비무장일 때 저항의지가 없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사살하지 말고 생포해서 적이 갖고 있는 첩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해요. 포로를 잘 대우하느냐, 거칠게 대우하느냐 하는 것은 그날의 전투상황에 달려 있어요. 한번은 수중 동굴에서 월맹군 포로 6명을 잡았는데, 우리는 하나도 안 죽었어요. 그때 포로들이 얼마나 예쁘던지. 커피를 끓여 주고 업어 주고 싶더라니까. 그런데 아군 사상자가 하나라도 생기면 아무리 소대장이 주의를 줘도 발로 차고 거칠게 다뤄요. 그러나 포로는 절대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포로를 잡으면, 남자 포로와 여자 포로의 태도는 어떻게 다릅니까.
 
  “스스로 손을 들고 항복한 경우가 아니면 우리를 안심시키고 도주할 기회를 노리는 게 포로들의 공통된 습성이죠. 남자 포로들은 모든 것을 쉽게 포기했고, 환심을 사기 위해 수다스럽고 비굴하게 행동했는데, 여자들은 오히려 말이 없고 침착했어요. 남자들은 하의를 벗겨 놓고 총구로 중요 부위를 툭툭 건드리며 땅바닥에 총을 발사하면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서 줄줄이 다 불어요.
 
  여자 포로들이 오히려 담배를 얻어 피우며 비굴하게 구는 남자 포로들에게 호통을 쳐요. 아마도 전우를 지키려는 모성애(母性愛)라고 생각해요. 사단에서 심문이 끝나면 포로들을 베트남군에 인계했어요. 다행스럽게 한국군이 베트콩이나 월맹군에 공식적으로 포로로 잡힌 적은 한 건도 없었습니다.”
 
 
  쑤병장의 굴욕
 
중대원 180여명과 함께 생활한 1연대 3대대 11중대기지(왼쪽). 대대본부에서 10km 떨어진 벌판에 위치해 수색, 정찰, 매복, 마을 평정작전 등을 수행했다. 베트콩의 가루폭약 공격으로 무너졌던 중대기지의 관망대. 중대기지 주위의 평지 대부분을 관측할 수 있다(오른쪽).
  —전투현장에서 여군 포로를 잡게 되면, 혈기왕성한 병사들과 성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까.
 
  “다른 부대에선 적 포로에게 사고를 친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 중대에선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결국 아무리 전투 중이라도 남자들이라 장난기가 발동할 때는 있습니다. 우리 중대는 ‘쑤병장’ 사건이 있었어요. 복부 총상을 입은 월맹 여군 포로를 동굴에서 잡았는데, 내장 파열로 출혈이 심해 중대본부까지 업어서 후송했습니다. 복부 총상은, 실탄에 맞으면 창자 사이로 피해 가지만, 파편상은 날카로운 모서리 때문에 대부분 장기가 파열돼 총상보다 더 위험해요.
 
  16세 가량의 눈이 크고 꽤나 예쁘장한 포로였는데, 배꼽 우측 수류탄 파편상으로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어요. 계급이 높은 분대장과 부분대장이 경쟁적으로 번갈아 가며 업더군요. 젖가슴이 등에 밀착되고 여성의 땀 냄새가 솔솔 풍기니까 전투에 찌든 병사들이라 엉뚱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여군 포로를 업은 병사의 양손은 여자의 둔부에 닿게 되고, 호기심과 함께 만져보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했나 봅니다. 두 녀석은 만져서는 안 될 여자의 은밀한 부분을 서로 번갈아 가며 만지작거렸어요. 부분대장이 개울을 뛰어넘으려고 껑충 뛰는 순간, 여자포로가 복부의 통증으로 다리를 오므렸고, 이 때문에 부분대장은 균형을 잃고 3m 아래의 뾰족한 바위로 추락하고 말았어요.
 
  부끄러웠던 부분대장은 소대장인 제게 포로가 도주해서 잡으러 가다 바위에서 실족해 부상을 당했다고 둘러댔으나, 병사들이 ‘쑤시개 병장’이라며 ‘쑤병장’이라고 수군대는 바람에 탄로가 났어요. 목수 출신의 힘 좋은 그는 ‘쑤병장’이라고 불러도 싱글벙글하며 중대원들과 잘 어울리다 귀국했습니다.”
 
 
  월맹군과 육박전으로 M16 소총 개머리판 부러져
 
월맹군의 머리를 내리칠 때 부러진 M16 소총을 살펴보고 있는 노태우 재구대대장(오른쪽). 이 총은 주월한국군사령부 기념관에 ‘서경석 대위가 적과 싸우다가 백병전에서 부서진 총’이라는 설명과 함께 전시됐다.
  —중대작전을 하면서 적과 백병전을 해 봤습니까.
 
  “중대장 부임 100일이 되던 날, 고지에서 백일기념으로 시레이션을 까먹는데, 월맹 정규군 400여 명이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내려와 우리 책임구역을 통과하고 있는 게 포대경에 잡혔어요. 우리 중대 책임구역으로 들어와 사라진 그놈들을 잡게 해 달라고 노태우 대대장에게 작전투입을 요청했지요. 89명의 중대원을 차출해 임무지역에서 대나무 터널식 숙영지를 발견해 교전에 들어갔어요. 놀란 적들은 산 위로 도망갔고, 그중 30여 명이 중대가 형성해 놓은 포위권으로 들어왔어요.
 
  적을 추격하던 선임하사가 적탄 8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고, 선임하사의 전사소식을 듣고 병사들과 화기소대 병력이 적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었어요. 적과 아군 각각 12명이 뒤엉켜 광란의 난장판을 벌였어요. 영화에서나 보던 백병전이 눈앞에서 전개됐어요.
 
  참으로 이상한 게 적도 착검까지 했는데, 우리 병사들이 거세고 무섭게 달려드니까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총을 든 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막으면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겁니다. 기선을 제압당한 거지요.
 
  저도 도주하던 월맹군을 뒤쫓았어요. 어깨에 거총했으나 찰칵 소리만 나고 실탄이 나가지 않았어요. 총탄이 다 떨어졌던 거죠. 착검도 돼 있지 않은 총에 탄창을 갈아 끼우려고 뛰어가며 탄입대 뚜껑을 열어 탄창 한 개를 꺼내려 했으나 잘 빠지지 않았어요.
 
  논 둑방을 따라 죽기 살기로 쫓아가다 논두렁 아래로 뛰어내리는 순간, M16 소총 개머리판으로 뒤통수 우측을 내려쳤어요. 소총 개머리판이 힘없이 툭하고 부러져요. 순간 적의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면서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어요. 피를 흘리면서 물이 흥건히 고인 논바닥에 철퍼덕 나가자빠졌어요.
 
  무전병이 흥분해 ‘우리 중대장님이 이겼다’고 소리소리 지르며 대대에 상황 보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적은 착검도 돼 있었고, 약실에 실탄이 장전된 채 방아쇠 안전장치도 풀려 있었어요. 쫓기다 돌아서서 내게 방아쇠만 당겼으면 나는 그때 죽었지요.”
 
  —의식을 잃었을 텐데,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으면 안 됩니까.
 
  “전투에서는 상대방이 살면 내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어요. 전투에서 총상이나 자상을 당하면 금방 죽지 않아요. 전투가 끝나면 꼭 쓰러진 적을 향해 교범대로 확인사살을 해야 합니다. 물론 손을 들고 투항을 하면 포로로 잡아야지요. 죽은 시체에 확인사살을 하는 것을 사람들은 꺼립니다.”
 
 
  전리품 나눠 주며 부하들 독려
 
고지에 착륙하는 시누크 헬기. 착륙할 때 적의 부비트랩이나 지뢰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교리는 교범에서, 전술전기는 훈련을 통해 익힐 수 있지만, 전투현장에 대한 감각만은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익히기 어렵기 때문에 전투참여가 군인들에게는 큰 경험일 것 같습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아내는 것이죠. 지형이 그걸 말해 줘요. 부대가 행군 중에 이상한 느낌이 들면 사전정찰을 해서 상황이 확실할 때만 전진해야 해요. 조금이라도 귀찮아하고 게으르면 죽음이 찾아와요. 우리 사단 작전지역에 베트남군이 프랑스군 1개 대대를 몰살시킨 ‘죽음의 계곡’을 지날 때면 정말 으스스해요. 부득이한 경우 좌우측 능선을 사전에 점령한 다음, 인접 전우의 관측과 사격의 엄호하에 상향수색을 해야 합니다. 적의 저격은 근거리에서 조준사격을 하기 때문에 ‘땅’ 하고 한 발의 총소리가 나면 꼭 한 사람이 쓰러집니다. 이것이 가장 두려워요. 적의 저격 표적이 되지 말아야 하고 설령 발견되더라도 초탄에 쓰러지지 않아야 해요.”
 
  서경석 장군은 “작전이 끝나면 소대원들을 모아 놓고 전술토의를 꼭 해야 한다”면서 “이번 전투에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고백도 하고 칭찬도 하는 자리를 가져야 전투력이 배가된다”고 했다.
 
  —적에게도 배울 게 있지요.
 
  “적 지휘관은 미군과 맹호부대의 책임구역의 경계에 있는 ‘취약지역’을 귀신같이 꿰뚫고 있었어요. 게다가 은거지를 숨기기 위해 대변, 밥 찌꺼기, 담배꽁초 등 흔적을 남기지 않았죠. 그들은 냄새구역(smelling pocket)을 형성하지 않을 만큼, 전장군기가 매우 훌륭했어요. 그 바람에 적 야전병원으로 의심되는 지역을 수색하다 부비트랩에 걸려 병사 한 명이 희생을 당하기도 했어요.
 
  결국 산 밑에서 정밀수색 끝에 대변의 깊이가 2m인 변소통을 발견해 이것을 단서로 100여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월맹군 야전병원을 찾아낸 적이 있어요.”
 
  —매일 반복되는 작전 속에 모두가 ‘나도 언젠가는’이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까.
 
  “중대는, 1개 소대는 매복, 1개 소대는 기지방어, 1개 소대는 휴식 개념이에요. 매복은 통상 일주일에 4차례 나갑니다. 소대장 중대장도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전에서 내가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그 때문에 전리품은 전부 반납해야 한다는 군 규정이 있지만, 나는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부하들에게 모두 나눠 줬어요. 전투가 끝나면 월맹이나 베트콩들은 물자를 조달해 먹고 입기 위해 군용 더플백에 베트남 돈과 미군의 군표(밀리터리 달러)를 잔뜩 넣고 다녔어요. 전공 순서에 따라 양심껏 정렬하라고 하고, 돈을 세지 않고 한 주먹씩 쥐어 병사들에게 나눠줬어요. 상부에는 클레이모어 폭발로 다 못 쓰게 됐다고 보고하는 거죠. 죽음을 곁에 둔 삭막한 전쟁터에서 그것으로 병사들에게 전투의 공포를 잊게 하는 것이죠.”
 
  —베트남전은 남베트남의 내전입니까, 아니면 월맹의 침략전쟁입니까.
 
  “월맹의 침략전쟁이죠. 소련이나 중공은 베트남 국민들이 체제를 부정하고 스스로 봉기한 내전이라고 선전하면서 미국 등 강대국의 군사개입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이죠.”
 
동굴 내부에서 노획한 적 화기와 장비를 둘러보는 서경석 대위.
  —매복에 걸려 죽은 마이(Mai)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1969년 10월, 사단·연대급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캇숀 계곡을 수색했습니다. 그때 23살의 나이에 두 아이의 엄마였던 마이 부인은 베트콩 남편을 따라 첨병으로 우리 경계지역에 들어왔습니다. 마이 부인은 눈이 새카맣고 컸으며, 검은색 아오자이를 아래위로 입고, 머리를 기다랗게 늘어뜨린 전형적인 베트남 미인이었어요.
 
  우리 병사가 쏜 실탄에 복부 총상을 입은 마이 부인은 얼굴이 하얗게 돼 와들와들 떨면서 ‘따이한~ 따이한~’이라고 외치며 ‘아들과 딸이 있으니 꼭 살려 달라’고 애걸했어요. 야간에 마이 부인을 데리고 복귀할 수 없어서 날이 밝으면 헬기로 후송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출혈이 심해 밤새 앓는 소리만 하다 새벽녘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소리 지르는 것이 걱정돼 소화제와 말라리아 예방약을 지혈제라고 주었더니 ‘고맙다’고 한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거머리를 막으려고 몸을 둘둘 말았던 판초우의에 마이 여인을 둘둘 말아 땅에 묻었죠. 남편도 이튿날 부인이 총격을 받은 위치로 ‘마이, 마이’를 부르면서 접근하다가 클레이모어에 사살됐습니다. 마이 여인 남편의 호주머니를 뒤지니 지갑 속에 비상금과 가족사진이 있었어요. 마이 여인과 어린아이들, 그리고, 넥타이를 맨 남자의 환하게 웃는 모습! 사체를 끌어다가 마이 여인을 묻었던 자리를 파고 합장을 해 주었어요.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머리 쪽에 박아 놓았어요.”
 
  —귀국하고 나서 꿈에 떠오르지는 않았나요.
 
  “마이 여인의 죽음은 트라우마로 남아 귀국 후에도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거리를 지나다 마이 여인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만 보면 당시 애처로운 죽음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났어요. 전방 대대장 시절, GOP에서 순찰을 돌고 지친 몸으로 새벽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하얀 베트남 소복을 입은 여자가 나타나 ‘살려 달라’고 애걸하다가 별안간 드라큘라 같은 귀신으로 변해 달려드는 바람에 놀라서 침대에서 떨어진 일도 있어요. 그런 날 밤은 소주 한 병을 벌컥벌컥 들이켜야 잠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美軍의 단일지휘 체제로 싸웠다면
 
베트남 독립전쟁에서 프랑스 정규군 1개 대대가 베트남군에게 전멸당한 푸캇산의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서경석 대위가 부대를 인솔하고 있다. 계곡 수색 때는 반드시 능선의 우군 엄호를 받아야 한다.
  —파월 직전 한국군은 파월 미군사령관의 작전통제하에 예속되는 것으로 미·월 양국군 간에 합의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가 미국에 협조하고 베트남을 돕는다는 참뜻이 명실상부하게 부각되려면, 한·미·월 3군이 동등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작전권 단독행사를 관철시켰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통제를 받게 되면 주권국가로서의 체면과 위상은 추락할 뿐만 아니라 한국이 베트남을 돕고자 하는 국제적 명분이 사라지는 거죠. 당시 북한을 비롯해 공산권 국가들은 한국군이 미 제국주의자들의 주구(走狗)로 베트남 침략전쟁에 가담하고 있고, 용병으로 청부전쟁을 하고 있다고 악선전을 했어요. 독자적 작전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이러한 악선전에 휘말리는 동기를 제공한다고 하자, 웨스트 모얼랜드 미 베트남군사원조사령부(MAC-V) 사령관은 작전권 단독행사를 허용했습니다.”
 
  서경석 장군은 “국가가 싸우려면 지휘는 통일돼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6·25전쟁 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우리가 단독작전을 행사한 경험이 없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에게 통합지휘를 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참으로 지혜가 있는 지도자”라고 했다. 그는 “베트남전에서 한·미·월 3군은 자국 이기주의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협동과 협조가 부족했다”며 “차라리 미군의 단일 지휘로 3군이 움직였더라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연합을 했더라면 패망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패전은 다른 문제이고, 전투는 훨씬 효율적으로 전개했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만약 연합을 했다면 1000km에 달하는 ‘호찌민 루트’를 공격할 수 있었을 겁니다. 월맹은 베트남전을 내전양상으로 유도해 한·미·월 3군은 남베트남 내부의 베트콩과 싸우게 하고, 자신들은 호찌민 루트를 이용해 보급과 군사력을 남베트남에 편리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거죠.
 
  6·25전쟁 때 빨치산 토벌 경험이 있는 우리는 민심을 잡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한미가 연합했더라면 큰 효과가 있었을 겁니다. 채명신(蔡命新) 사령관은 ‘100명의 적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지키라’고 했어요. 적이 마을에서 박격포를 쏘아도 절대로 마을을 향해 대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민과 지방 게릴라는 물과 고기의 관계라 주민의 마음속에서 떠난 게릴라는 말라 비틀어져 죽고 마는 법입니다.”
 
  —우리는 베트남전에서 1100여 회의 대대급 이상 대부대 작전, 57만여 회의 소부대 작전을 펼치며 4만여 명의 적을 사살했고, 2만여 점의 각종 화기를 노획했고, 7000여km의 평정효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안케(An Khe) 패스, 망양(Mang Yang) 패스 경계작전, 성마(星馬) 작전 등은 베트남군의 반격작전에 큰 힘이 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맹호와 백마, 청룡 모두 베트남전에서 잘 싸웠어요. 그러나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의 ‘호찌민 루트’를 이용해 저항 없이 내려오다가 해안가의 주요도시를 송곳처럼 찔러 버리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 일명 뱀 토막내기 작전(snake cutting operation)을 했습니다. 그 바람에 베트남군은 부대 간 연계가 끊겨 패닉상태에 빠졌어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전선이 그랬고, 1950년 11월 평남 군우리에서 미 2사단이 중공군에게 인디언 태형(gauntlet)을 당한 것을 연상케 하는 작전입니다. 우리 한국군은 그것을 깨트리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고요.”
 
  —육사 27기들이 마지막으로 베트남전에 소대장으로 참전한 것을 놓고 보면, 현재 우리 군 수뇌부에는 전투경험자들이 전무한 실정입니다. 전투경험이 없는 군대는 실제상황 대처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 아닌가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6·25전쟁, 베트남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이미 ‘싸우는 법(how to fight)’에 대한 노하우를 확립해 놓았다고 생각해요. 선배들의 전투경험은 우리 군에 DNA처럼 유전되고 있다는 거죠. 제2연평해전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숨이 넘어가면서도 총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을 보면 마음 든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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