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아프리카 도움 위해 재능 기부하는 첼리스트 金仁敬 : 월간조선

지난해 핀란드의 헬싱키 공항에서 기자가 겪은 일이다. 비행편 경유를 위해 공항에서 대기하다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손을 씻다가 가만히 주위 사람들의 하는 양을 보니 손 씻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알았다.

핀란드인 등 북유럽 사람들의 경우 먼저 손에 비누를 묻혀 거품을 낸 다음 물을 틀어 최대한 빨리 손을 닦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아시아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물을 틀어 놓고 거품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들이 어느 나라 출신인지 정확히 조사한 것도 아니고, 과학적으로 구성비를 계산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잠깐 동안의 관찰 결과다. 후에 핀란드 정부가 20여 년간 물절약 캠페인을 진행해 물사용량의 약 40%를 감축했고, 심지어 핀란드 건식화장실(Dry toilet)협회라는 시민단체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3번의 음악회로 식수 펌프 11대 설치

첼리스트 김인경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문득 헬싱키 공항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아프리카를 다녀온 후에는, 화장실에서 누가 물을 틀어 놓은 것만 보면 가서 잠그고 싶어진다’는 김씨의 말이 기억에 남아서인 듯하다.

김인경씨가 이끄는 소울챔버오케스트라는 뜻을 함께하는 클래식 연주자들이 모인 비영리단체다. 1년에 한 번 공연을 해, 그 수익금으로 아프리카에 식수 펌프를 설치해 준다. 일종의 재능기부다. 지금까지 총 3번 공연을 열어 11대의 식수 펌프를 설치했다. 식수 펌프 1대 설치에는 보통 1만2000달러가 든다고 김씨는 설명했다.

소울챔버오케스트라는 2009년 첫 공연을 열 당시부터 지금까지 월드비전과 함께해 왔다. 수익금을 모아 월드비전에 기부하면, 월드비전 아프리카 지부는 그 돈으로 현지에 식수 펌프를 설치하는 식이다.

시작은 한 권의 책이었다. 김씨의 말이다.

“한 오륙 년 전쯤이었어요. 한비야씨가 쓴 《그건 사랑이었네》라는 책을 읽었는데 읽으면서 정말 많이 놀랐어요. 아프리카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읽으며 여러 생각을 했어요. 그때 제 아이가 5살이었거든요. 우리 아이들은 좋은 일을 해서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나고, 그 아이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그냥 태어난 건데 그리도 힘들게 살고 있다니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월드비전에 연락을 했어요. 무작정 게시판에 ‘나는 클래식 연주자인데 재능기부를 해서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글을 남겼어요.”

월드비전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업을 진행한 선례가 없었다고 한다. 김씨의 글은 부서를 넘어 돌고 돌다가 음악을 전공한 월드비전 직원에게 전달됐고, 그 후 음악회 기획이 시작됐다.

구호 사업 중에서 특별히 식수 펌프 사업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다.

“한비야씨 책을 읽고 나서 식수가 가장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들이 엔진오일 통 같은 물통을 들고 두세 시간씩 걸어서 물을 길어 온다는 거예요. 물을 길어 오면 하루 일과가 끝날 정도래요. 근데 그 떠 온 물도 깨끗하지 않은 거예요. 그 장면을 읽고 식수 펌프를 설치해 주자, 마음을 먹었어요.

공연할 때는 식수 펌프 대신 ‘우물’이라는 표현을 써요. ‘사랑의 식수 펌프 콘서트’라고 하면 어감이 조금 딱딱하잖아요.

그런데 우물이라고 하니까 ‘무슨 우물 하나 파는 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드냐’라고 하는 분들이 계세요. 아프리카에 제대로 된 식수 펌프 하나를 설치하려면 지반을 보통 150m가량 파야 된대요. 돈이 들 수밖에 없지요.”

“식수 펌프 설치, 아이들 인생 바뀌어”

2012년 아프리카 스와질란드를 방문해 현지에서 공연을 하는 김인경씨와 연주자들. 앞줄 가운데 첼로를 켜는 이가 김인경씨다.

지금은 ‘챔버오케스트라’지만 처음에는 11명의 현악기 연주자들이 모인 ‘스트링(String)’이었다. 김씨의 설명이다.

“첫 공연 때는 연주자가 총 11명이었어요. 현악기들만 모인 스트링이었죠. 2회 공연에는 관악기가 함께해서 30여 명이 모였어요. 그때부터 챔버오케스트라라고 이름을 바꿨어요.”

챔버오케스트라는 15명에서 30여 명 규모의 실내관현악단을 뜻한다. 김씨는 “이제는 챔버오케스트라에서 어엿한 오케스트라 규모로 연주자 수가 늘었다”고 했다.

“이번 2월에 4회 공연을 열어요. 이번엔 하프까지 합류해서 총 55명이 됐어요. 50명이 넘으면 챔버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오케스트라’로 불러도 되는데 이름을 자주 바꾸는 게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바꾸지 않으려고요.

첫해부터 그랬지만 연주자를 모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소울챔버오케스트라는 연주자들 중 절반이 대학에서 강의하는 분들이에요. 비영리 공연이지만 공연 수준이 높다고 자부하는 이유지요. 한 번 참여한 연주자는 공연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계속 참여해요. 공연 시기가 2월인 이유도 이분들 때문이에요. 클래식 연주자들에게는 이때가 비수기거든요. 연말에 하면 알리기도 좋겠지만 이때는 도저히 연주자들이 모일 수 없어요.”

보통 클래식 공연은 초대권을 받아서 간다는 인식이 있다. 공연의 한 회 수익금이 궁금했다.

“저희는 초대권 배포를 안 해요. 전좌석 모두 유료 판매예요. 재정을 투명하게 하고 싶어서 티켓 예매 사이트를 통해서 사시라고 권해요. 한 번 공연을 하면 2000만원에서 3000만원가량 수입이 들어와요. 여기에 협찬 조로 조금 더 모이고요. 그러면 4000만에서 5000만원가량을 월드비전에 전달해요. 이 돈으로 식수 펌프 서너 대를 설치할 수 있어요.”

—식수 펌프를 설치하는 지역은 어떻게 선정하나요.

“월드비전에서 미리 짜 놓은 계획이 있어요. 여기에 맞춰서 파는 거예요. 1회 공연 마치고 스와질란드에 식수 펌프 4대, 2회 공연 수익금으로는 우간다에 3대를 설치했어요. 3회 공연 수익금으로는 스와질란드에 4대를 설치해서 현재까지 총 11대를 설치했어요.”

—스와질란드를 두 번이나 도운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스와질란드는 우리나라 강원도 정도만한 나라예요. 남아공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지요. 주민들이 밀집돼 있어서 식수 펌프를 설치하면 효과가 높다고 하더라고요.

재작년에는 스와질란드를 직접 방문했어요. 현악기 연주자들 4명이 같이 가서 현지에서 현악4중주 공연도 했어요. 연주자들도 처음에는 막연한 호기심으로 갔는데, 갔다 오니까 저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지더라고요.

그곳에 가 보니 어른이 없어요. 에이즈로 일찍 사망하는 거예요. 그냥 애들끼리 사는 경우가 많아요. TV에 나오는 구호프로그램 속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돼요. 엄마 없이 아이들끼리 풀을 뜯어서 끓여 먹고 그래요.

그런데 물이 있으면 이 아이들의 삶이 많이 달라져요. 일단 물을 뜨러 안 가도 되니까 학교에 갈 수 있어요. 그리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으니까 병에 안 걸려요. 연주자들이 몇 달만 고생하면 아프리카 아이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거예요.”

식수 펌프는 마을과 마을 중간에 설치한다고 한다. 여러 마을이 같이 이용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다. 펌프 1대를 몇천 명이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신혼여행 생략하고 식수 펌프 기증하는 사람들

식수 펌프를 이용하는 스와질란드 시펑웨니 마을 주민들의 모습. 식수 펌프 한 대를 설치하면 많게는 수천 명이 이용한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취지지만 돈을 내고 가는 공연이라면 공연의 질도 중요할 텐데요.

“사람들이 자선음악회라고 하면 ‘한 번 가 준다’ 정도로 생각하는데 사실 굉장히 수준이 높은 연주회예요. 그래서 이번 공연부터는 공연의 이름 자체를 ‘더 기프트(The gift)’라고 브랜드처럼 만들고 공연 포스터도 바꿨어요. 아프리카 아이들 사진이 아니라 클래식 공연 자체의 성격을 강조하는 걸로요.

선곡은 되도록 듣기에 어렵지 않은 곡들로 하려고 해요. 그래서 연주곡을 정할 때 저는 남편한테 물어봐요. 일반 회사원인 남편이 ‘들어 본 적 있다’고 하면 통과지만, 못 들어 봤다고 하면 탈락이에요.”

김씨가 식수 펌프 사업을 시작한 후 가정에도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김씨의 말이다.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이젠 비싼 명품가방 같은 건 엄두도 못 내겠어요. 아이들한테 고가의 패딩도 선뜻 못 사 주겠어요.

제 아이들도 기부를 가까운 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루는 큰아들이 자기 통장에 있는 백여만 원을 모두 인출해 달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어요. 알고 보니 학교에서 불우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하는데 거기에 전액을 다 내겠다고 하더라고요.

제 여동생도 아이 돌잔치를 요란하게 여는 대신 간소하게 치르고 대신 그 돈으로 아프리카에 식수 펌프 한 대를 설치했어요. 식수 펌프를 설치하면 그 앞에 현판을 설치하거든요. 현판에 ‘이 펌프는 누구누구의 기부로 만들어졌다’고 써 놓아요. 제 여동생은 자신의 아이 이름으로 펌프를 설치했어요. 얼마나 아이에게 큰 선물이 되겠어요? 마음이 기쁘더라고요.

그런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신혼여행 비용을 아껴서 그 돈으로 식수 펌프를 설치한 부부도 있더라고요.”

펌프 100대 설치가 목표

김씨는 “자선도 자선이지만, 나아가 물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인터뷰 내내 여러 번 강조했다.

“아프리카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화장실에 갔어요.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나오는데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게 되더라고요.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기에서 나아가 지나치게 물을 낭비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나라도 유엔(UN) 기준으로 볼 때 물부족 국가예요. 이런 추세라면 50년, 100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김씨의 아버지는 정치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金重權) 전 민주당 대표가 그의 아버지다. 아버지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물었다.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세요. 아버지 지인들께 공연 표를 팔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저에게 ‘음악’이라는 재능을 심어 주신 게 부모님이시잖아요. 저희 3자매가 모두 음악을 전공했거든요. 저희 부모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세요. 세 자매가 교회에서 찬송가 연주봉사를 하는 게 어머니의 꿈이었어요.”

목표는 뭘까. 김씨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펌프 100대 설치’라고 했다.

“펌프 100대 설치가 목표예요. 이제 89대 남았어요. 한 번 공연할 때마다 3대 정도 설치하니까 공연을 19번 정도 더 해야 하겠죠. 그러면 19년 걸린다는 얘기잖아요. 안타까워요.

사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아쉬웠어요. 반년 전부터 공연 기획을 시작해요. 그런데 한 번의 공연으로 끝내는 게 아쉬운 거예요. 서울 외의 다른 지방에서도 하면 좋을 텐데, 문제는 비용이에요.

아무런 돈도 안 받고 참여하는 연주자들에게 교통비, 체류비 등등을 스스로 내라고 하기도 힘들고, 또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도 지금 제 혼자 힘으로는 감당이 안 되고요. 그래서 기업과 함께 파트너십을 맺어서 안정적으로 공연을 여러 번 하는 게 제 소망이에요.”

소울챔버오케스트라의 네 번째 공연은 2월 8일 한전아트센터에서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