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예
⊙ 53세.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7년 《라쁠륨》에 <상자속의 푸른 칼>로 등단.
⊙ 장편소설 : 《유혹 1~5권》 《4월의 물고기》 《붉은 비단보》 《아름다운 지옥1,2》.
⊙ 소설집 : 《퍼즐》 《꽃게무덤》 《폭소》 《꿈꾸는 마리오네뜨》.
⊙ 그림소설집 :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서른일곱에 별이 된 남자》.
⊙ 산문집 : 《권지예의 빠리, 빠리, 빠리》 《해피홀릭》.
⊙ 수상 : 2002년 이상문학상, 2005년 동인문학상 등.
⊙ 53세.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7년 《라쁠륨》에 <상자속의 푸른 칼>로 등단.
⊙ 장편소설 : 《유혹 1~5권》 《4월의 물고기》 《붉은 비단보》 《아름다운 지옥1,2》.
⊙ 소설집 : 《퍼즐》 《꽃게무덤》 《폭소》 《꿈꾸는 마리오네뜨》.
⊙ 그림소설집 :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서른일곱에 별이 된 남자》.
⊙ 산문집 : 《권지예의 빠리, 빠리, 빠리》 《해피홀릭》.
⊙ 수상 : 2002년 이상문학상, 2005년 동인문학상 등.
가을 빗줄기가 장어의 몸짓처럼 교태스럽게 느껴지는 건, 내 머릿속에 단편소설 <뱀장어 스튜>가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작가가 살고 있는 은평뉴타운 폭포동은 북한산 자락이 지척으로 가깝다. 산은 단비를 먹고 봄이라도 된 듯 붉고 노랗게 꽃피어 있다. 명산의 만개한 단풍은 차라리 꽃잎이었다.
새천년이 온 후 2013년 가을만큼 예쁘고 따뜻한 적이 있었을까! 아이러니하게 사람도 이렇게 외로운 적이 있었을까! 1층 아파트여서 전망이 별로일 줄 알았는데 건축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알고 보면 산도 1층부터 서 있지 않은가. 북한산 숲에 둘러싸인 창문마다 공작새 같은 단풍나무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거실에는 부부가 파리에서 8년을 살다 온 흔적들이 가득했다. 미술평론가인 남편과 여류 소설가가 사는 집은 공간 자체도 예술이었다. 휴양지 리조트에서 뿜어낼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제26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뱀장어 스튜>는 피카소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피카소의 마지막 여자였던 재클린이 피카소를 위해 만든 요리 이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그림을 보고 무한한 상상력에 빠졌다. 피카소의 입체적 기법을 소설에도 투여했는데, 그래서인지 불륜의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작중에서 그녀, 또는 여자는 동일한 화자이다. 그녀의 남편은 오랫동안 가출해서 돌아온 아내를 위해 삼계탕을 끓여 주기로 한다. 스튜냄비에 생닭을 넣고 타이머가 돌고 있는 동안 섹스를 한다. 섹스만큼 성스러운 용서의 의식이 없다는 듯. 하지만 그녀는 애인하고 만났던 순간과 섹스를 떠올린다.
“1960년 12월 3일 재클린이 점심식사로 만든 스튜를 위하여, 이 그림을 바침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만 하다면.”
왠지 이 ‘뱀장어 스튜’란 그림은 내게는 쓸쓸한 감동을 준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예술가의, 일상에 대한 경의와 마지막 여자에 대한 예의가 느껴진다. 인생이란 화려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장엄하지도 않으며, 다만 뱀장어의 몸부림과 같은 격정을 조용히 끓여 내는 것이 아닐까…. 스튜 냄비의 밑바닥처럼 뜨거움을 견디고 살아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신이 조절한 타이머에서 종소리가 날 때까지 말이다. 하긴 꼭 뱀장어 스튜가 아니면 어떤가. 삼계탕이나 곰탕, 뭐 이런 것들도 조용히 끓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한 여자가 떠올랐다. 이슬비 내리는 파리 근교의 낡은 아파트 부엌으로 조용히 들어서고 있는 그녀…. -본문에서
“食慾이든 性慾이든 살기 위한 본능”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뱀장어 스튜>는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상상한 건가요.
“프랑스에 있을 때 미술잡지를 볼 기회가 많았어요. 소설에서는 화집이라고 했지만 화집이 아니라 어느 미술 잡지에 피카소 특집이 실렸어요. 꽤 길었는데 피카소가 모델로 그렸던 여성들을 추적한 특집이었어요. 피카소가 연애했던 여자들은 거의 다 실려 있었어요. 그녀들의 얼굴과 사연이 나오고 일생이 쭉 펼쳐져 있더군요. 마지막 여자로 재클린이 나오는데 재클린의 레시피라고 하면서 뱀장어 스튜 그림과 요리기법이 있었던 거죠.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어요. 아, 인생을 화려하게 산 카사노바 남자도 결국에는, 마지막 여자에게서 남는 것은 밥이구나. 밥이 참 중요한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뱀장어를 통하여 식욕을 충족시키면 성욕(性慾)까지도 갈 수 있잖아요. 피카소는 재클린의 그런 배려에 감동했을 것 같아요.
“그랬겠죠. 여성의 욕망 같은 것도 해석할 수 있겠죠. 섹스도 그냥 막말로 하면 ‘먹는다’고 하잖아요. 식욕이든 성욕이든 다 살기 위한 본능인 거죠. 곧 죽게 될 뱀장어가 꿈틀대는 그림을 보면서 모든 게 삶의 처절한 몸짓 같아서 서글펐어요. 하물며 피카소의 인생조차도 그랬어요.
소설을 쓰면 뭐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있었어요. 그런데 한동안 전혀 쓸 수가 없었죠. 뭔가 될 것 같다는 확신만 있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굉장한 작품이 나올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접근해서 써야 할지는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설 맨 처음에 화집을 열어 본다 하면서 이야기 들어간 것은 일단은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들어갔어요. 작가가 화자로서 텍스트 내에 개입하면서 이중적인 내러티브 수법으로 쓰게 된 거죠. 이런 걸 메타픽션이라고 하는데 포스트 모더니즘 기법으로 해 놓고 다시 쓰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렸죠.”
—입체적인 기법이어서 혼동했는데,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인가요.
“네, 여자이기도 하고 작가가 바라본 여자이기도 한 거죠. 그래서 글을 잘못 읽으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할 수 있어요. 예전에 영어로 번역을 했는데, 번역자가 잘못 해석해서 앞부분에 아이(I)를 다 쉬(She)로 해 놨어요. 나중에 설명을 하니까 ‘아~’ 그러고 이해를 했어요.
그렇게 한 건 피카소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피카소의 그림이 입체적이라 옆모습인데 앞모습이랑 중첩되어 있잖아요.
소설도 단순하게 한 사람의 시점으로 계속 쓰는 것보다 그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 사건을 보고, 밖에서 객관적으로 보고 그랬을 때 어떻게 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그 당시 우리나라 소설을 보면 그때만 해도 리얼리즘적인 운동권 후일담 등 이런 것들이 많았어요. 저는 그게 좀 소설기법상 단순한 것 같고, 나는 독특하게 어떻게 좀 해볼까 하다 피카소의 그림을 소설 기법으로 써 보자는 결심이 섰어요. 피카소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제게 영감을 준 예술가죠.”
단순함보다 反轉을 좋아해
—수학을 잘했나 봐요.
“수학은 잘 못했는데 구성하는 거, 이야기를 이쪽으로 놓으면 어떨까 저쪽으로 놓으면 어떨까 이런 거에는 관심이 많아요. 미술관에 가도 바깥에 보이는 것보다는 그걸 준비하는 방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아요. 복도를 지나다가 미술관 창고 뒷문이 열려 있으면 저는 꼭 몰래 들어가 봐요. 무대 안과 무대 밖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죠. 그것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봤을 때 실체와 진실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항상 저는 반전(反轉), 단순하게는 쓰기 싫어서 늘 비틀거나 반전을 좋아해요.”
—그런 기법이 소설의 기품을 살려주는 것 같아요
“제가 남들보다 특이한 경험을 한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진부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새롭게 보이고 재밌게 빠져들게 할 수 있을까, 그런 거를 고민하다 보니 독특한 기법으로 쓰게 돼요. 다행히 고급독자인 경우에는 이야기를 재밌게 봐요. 그런데 일반독자들은 어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작가들이나 문학공부 하는 분들은 제 작품을 좋아하는데 대중들은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재밌었는데 고급독자인가요.
“(웃음) 물론이죠.”
—뱀장어 스튜가 우리나라 말로는 장어탕이죠.
“그렇죠. 저는 프랑스에서 뱀장어 스튜를 못 먹어 봤어요. 글을 쓰면서도 ‘뱀장어 스튜라는 것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하다 보니 뱀장어 스튜처럼 모든 걸 우려가지고 몸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는 것이 우리나라에는 삼계탕이 있어요. 그래서 작중에 삼계탕을 소재로 쓴 건데,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장어탕이죠. 저는 우리나라에 장어탕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왜 장어를 구워만 먹나 생각했죠.
그런데 여수에 있는 소설가 한 분이 저보고 ‘아니 권지예씨는 뱀장어 스튜라고 이름만 외국어로 멋지게 소설을 쓰고 장어탕은 안 먹어 봤냐’면서 장어탕을 사 줬어요. 그런데 정말 맛있었어요. 그때부터 그분이 저보고 장어부인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작중에서 왜 여자는 정자(亭子) 같은 애인에게는 정착을 못하는 걸까요.
“사실 여자는 애인의 아이를 가졌을 때 둥지나 집을 원했어요. 하지만 애인은 한 여자만 책임지는 타입이 아니었고 결혼도 원치 않았어요. 그러면서 자신은 정자이니 언제든지 와서 쉬었다 가라고 하는데, 이 여자는 안정적인 집을 원했어요. 정자라는 것은 벽은 없고 기둥만 있어요. 여자는 집에 대해 굉장히 강박적인 안정감을 추구하죠. 남편이라는 사람도 그런 점에서 안정적이지 않았어요. 경제적 안정감을 주는 생활력이 없고요.”
한국 여자의 집단無의식
—결국, 애인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작가의 윤리성에 대한 한계 때문이었나요.
“제 소설 여주인공들이 초기에는 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중에는 안 돌아가요.(웃음) 그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 나이와도 상관이 있어요.
저는 맏딸인데 아들 같은 장녀로 자랐어요. 부모님의 기대나 의지도 컸고요. 그래서인지 제가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인데도 불구하고 장녀 모범생으로 자라다 보니까 항상 어떤 한계를 느껴 요. 그게 소설에도 투영되어 윤리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이 나오기도 하고, 마음속의 억압이나 한계를 벗어나서 마음껏 사는 주인공이 나오기도 하죠. 후반에 쓴 소설에서는 아예 집으로 안 돌아가는 것이 더 많아요.”
—누구보다 영혼이 자유로워야 할 작가마저도 윤리 앞에서는 무너져야 하는 건가요.
“프랑스에서 박사논문 쓰기 전에 한국 작가 김유정을 연구해서 논문을 쓴 적이 있어요. 김유정 작가는 저랑 너무 다른 소설을 쓰기 때문에 제가 무척 존경하는 작가예요. 안타깝게 요절했지만 슬픈 것도 해학적으로 표현하는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분의 소설에 보면 아내들이 너무 가난해서 병에 술을 넣어 광주리에 들고 다니면서 술을 팔고 몸을 파는 장면이 나와요. 남편한테 구박 받고 몸 팔고 사기를 치고 사는 것도 다반사인데, 결국 모든 게 자신의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한 안간힘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논문에다 우리나라 윤리성 운운하며 쓴 건데,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너는 왜 그렇게 윤리적이냐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 역시도 그걸 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죠. 그때가 30대였는데 뭔가 명분이 없으면 불륜을 저지르면 안 될 것 같고, 불륜을 저질렀다고 해도 남편을 용서할 수 있으면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데 김유정 소설에서도 확인되니까, 아, 이게 어쩔 수 없는 한국여자의 집단무의식적인 윤리의식인가 보다, 그래서 논문도 그런 식으로 풀어 나갔는데 저한테도 약간 그런 면이 있어요.”
—프랑스 사람에게는 의아한 말이겠네요.
“프랑스에서는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우리는 ‘불륜’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결혼한 사람의 사랑은 무조건 불륜이죠.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가 볼 때는 무책임할 수도 있는데 사랑을 했다가도 사랑이 식으면 금방 이혼하고 그러죠. 우리 집 옆에 사는 프랑스인 부부가 사랑하는데도 결혼을 17년 동안이나 안 하고 동거만 해요. 자식까지 낳고도. 30대 때는 그런 게 이해가 잘 안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좀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뭐 그렇게 살든 다 각자의 선택이지 별거 있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곡된 性이 이상한 것이지 섹스는 본능”
—그림이나 요리가 소설 쓰기 영감의 원천인가 봐요.
“제 작품에, 특히나 초기작에는 그림과 음식에서 영감을 얻어서 쓴 게 정말 많아요. 그리고 제가 그거를 잘 연결해서 썼어요.
유학을 가서 음식을 정말 많이 했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친정 엄마가 음식을 주로 해다 주셨는데, 외국에 가니까 거기는 배달음식은 아예 없고 식당음식 값은 턱없이 비쌌어요. 식재료가 싱싱하고 싸서 거의 사다가 해 먹었던 거죠. 남편은 충청도 시골남자라 청국장도 있어야 하고 김치도 있어야 했어요.
한국에서는 한 번도 안 해 봤던 김치를 거기 가서 담가 먹었어요. 네덜란드산 배추를 사다가 한 달에 한 번씩 꼬박 다섯 포기씩 김치를 담갔어요. 청국장 된장도 한국에서 부쳐 오면 끓여 먹다가 나중에는 메주를 공수 받아 제가 된장도 직접 담갔고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제가 꽤 요리를 잘하더라고요.(웃음)
뭐든 집중적으로 하면 어느 순간에 도가 튼다고 할까, 요리책도 전집으로 사 가져갔어요. 낯선 나라에서 할 일은 한정되어 있고 유익한 취미거리로서 요리가 최고였어요. 요리하는 시간을 통하여 뭔가 인생을 연결시켜서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요리소설이 됐던 거고요.
그림은 남편이 미술을 전공했어요. 일도 젊은 나이 때부터 미술관 책임자로 있었어요. 남편이 그림에도 관심이 많고 전시에도 관심이 많고 하다 보니까, 저도 어깨너머로 관심을 가진 거죠. 그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직업적인 남편하고는 다를 테고요.
그런데 프랑스에 가니까 전시가 좋은 게 많았어요. 그림을 이용한 디자인도 많고 작은 미술관도 많고요. 자연스레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사고방식 자체가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이 들고, 그림의 어떤 주제나 기법에 영감을 얻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나오게 됐죠.”
—‘불륜의 서사’를 통하여 성관계를 형상화시킨 작품이 다수 있어요.
“사랑은 허기지만 섹스는 음식이다, 이게 저의 모토예요. 인간이 사랑 없이는 못 살아요. 늘 허기지고 외롭고, 그게 사랑의 욕구라면 섹스는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음식이고 먹는 건데, 그게 일상적인 거죠. 삶의 에너지를 주는 거고. 그래서 저는 섹스를 건강한 에너지라고 봐요. 이거를 이상하게 보는 게 사실 이상한 거죠. ‘왜곡된 성’이 이상한 거지, 섹스는 인간의 이상이고 본능이에요. 먹어야 사니까요. 섹스는 건강한 삶의 에너지다 이거죠.(웃음)”
남편 때문에 파리 유학
—파리에서 8년을 살았네요. 가게 된 동기와 체류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파리에 가게 된 데에 제 의지는 전혀 없었어요. 저는 그때 순위고사에 합격해 임용된 7년 차 공립중학교 교사로 65세까지 보장이 된 안정된 직장이 있었죠. 남편은 현대미술관 책임자였고.
그냥 살아도 별 큰 어려움 없이 사는 건데, 느닷없이 남편이 공부를 하고 싶대요. 프랑스로 출장을 갔다가 너무 뿅 갔다는 거죠. 틈만 나면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안 된다고 버텼죠. 나중에는 남편이 꿈을 깨지 못하고 거의 협박조로 나왔어요.
그때는 교사생활 7년 한 상태인데, 교사가 나한테 100% 천직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이게 나의 이상적인 직업이라면 항상 아이들을 사랑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교사의 올바른 상(像)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예술가형인 거예요. 교사로서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기보다 내 자아가 충만하지 않은 상태라 늘 허전한 거예요. 내 안의 에너지를 내 스스로 응축해서 표현하고 싶은 게 강한 사람이란 걸 깨닫자, ‘아, 내가 교사를 평생 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는데, 남편 소원이라는데 그거를 들어주지 않으면 평생 욕을 먹게 생겼고, 그래서 조건을 걸고 떠나기로 했죠. 3년 안에 박사를 따고 돌아오기로 하고요.
그런데 결국 3년이 7년 반 8년 가까이 돼서, 휴직을 하고 떠났던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중간에 학교로 잠깐 다시 돌아갔는데, 저도 프랑스 맛을 보고 나니까 학교에 적응이 안 되는 거예요. 결국 교사를 포기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죠.”
—거기서 공부를 한 거죠.
“사실 나는 공부할 생각이 없었어요. 불문과는 아니고, 파리 7대학에서 일본·한국·중국 문학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과가 있어요. 거기서 한국문학을 가지고 불어로 논문을 써서 결국 박사학위를 받게 된 거죠. 등단하고 2~3년 동안은 박사논문 쓰느라고 소설을 쓰지 못했어요.”
—남편이 불륜 소재를 다룬 소설을 보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나요.
“처음에는 신이 나서 다 얘기해 주고 하더니 나중에는 기분 나쁜지 안 읽어요. 저 역시 유학할 때는 심심하기도 하고 남편이 유일한 독자니까 다 보여줬어요. 작가가 되기 전에는 남편 얘기가 그럴듯해서 귀 기울여 들었는데 나중에는 듣지 않았어요. 제가 말을 안 들으니까 제 작품을 몰래 고쳐 놓기도 했어요. 그때부터는 아예 안 보여줬어요. 지금은 관심도 없지만요.(웃음)”
꽃게 먹다가 영감 얻어 미친 듯 소설 써
—동인문학상 <꽃게무덤>은 이성 간 집착적인 사랑의 심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징성도 강하고요.
“그 무렵 소설이 너무 안 써졌어요. 이상문학상을 타고 한동안 청탁이 집중적으로 들어와 무척 바빴어요. <꽃게무덤>은 마감을 넘겼는데도 쓰지 못하고 있었죠. 날마다 소설이 써지지 않아 끙끙 앓고 있었어요.
그때 친구들이, ‘야, 강화도에 놀러나 가자’ 해서 거길 따라갔어요. 강화도 외포리 부근에 총각 작가가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어요. 그분의 추천으로 꽃게탕을 먹으러 갔죠. 노총각 작가가 꽃게를 함께 먹으면서 석모도의 함초밭이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괜히 멋있고 어떤 조각 그림들이 떠오르는 거예요.
저도 꽃게를 좋아하지만 제 친구 한 명도 꽃게를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예전에 저는 먹는 게 귀찮아서 엄마가 파 주면 먹고 그랬어요. 그날도 끝까지 잘 못 먹고 있는데, 그 친구는 젓가락으로 너무도 빨리 깔끔하게 꽃게를 까먹는 거예요. 기술자도 그러지는 못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먹는 친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뭔가 감성을 자극하더라고요.
게를 파먹는 행위를 무척 집착적으로 하고 스토리도 집착적인 사랑 이야기로하자, 그런 영감이 떠오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날 돌아오자마자 작업실에 가서 안 자고 안 먹고 며칠 만에 정신없이, 미친 듯이 <꽃게무덤>을 써서 냈어요. 제 정신으로 쓴 거 같지 않은 소설이었어요. 정말 몰아치듯이 썼죠.”
—그랬군요. 밤중에도 맨몸으로 꽃게를 먹는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친구가 꽃게를 먹는 모습에서, 뭐랄까 어떤 형상이 떠올랐어요. 꽃게 딱지에서 국물이 팔꿈치로 흐르면 혀끝으로 핥아 먹을 수 있나, 혼자서 연습도 해 보니까 가능했어요.
때로는 생각만 해서 쓰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당시 석모도의 함초 밭을 안 가 보고 생각만 해서 묘사를 했어요. 강화도령 노총각 작가의 말만 듣고 쓴 거죠. 인천공항에 가다 보면 서해바다 쪽으로 보라색이 쫙 펼쳐지는 게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게 바로 함초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모습을 상상해서 소설에다 멋지게 묘사를 해 놓았는데, 독자들이 이 소설을 보고 석모도에 가면 그런 장관을 볼 수 있는 줄 알고 많이들 갔다고 해요. 실은 영종도의 함초 풍경이죠.”
수집광 남편
—남편이 수집을 좋아한다면서요.
“수집광이에요. 젊은 나이 때부터 그랬어요. 대학 때에 만나 연애를 하는데, 하루는 자취방을 갔더니 온 벽이 다 책인 거예요. 저는 결혼할 때 이 책을 다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어요. 가난한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 책 때문에 방을 두 칸짜리로 가야 했어요. 큰 집 얻을 돈이 없다 해서 결국은 제가 돈을 보태 책을 모시고 살았어요. 유학 가서도 계속 책을 사는 거예요. 처음에는 몰랐죠. 저 몰래 책을 사서 어딘가에 사 놓고 나중에 귀국 짐 쌀 때 사람들에게 맡겼던 책 짐을 가져오는 거예요.
남편은 책이고 뭐고 갖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고야 마는 남자예요. 예전부터 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이었어요. 책이든 물건이든 버리질 않아요. 그래서 지금도 골치 아픈 면이 많아요.”
—부부가 책을 같이 좋아하면 더 좋지 않나요.
“아니요,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남편이 출판기획사를 차린 지 거의 7~8년 됐는데, 이제는 출판해서 못 팔고 남는 책들 있잖아요. 그런 책들까지 쌓이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사무실 근처에 창고를 따로 얻어 가지고 이제는 비싼 돈 주고 책을 모시고 사는 꼴이 된 거예요. 제가 집에는 절대 책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거든요. 더 이상 집에 가져오면 쫓아낸다고 했거든요. 그래도 남편이 워낙 버리는 걸 싫어하니까 자꾸 뭐가 쌓여요. 그런데 저도 욕하면서도 닮는다고 물건하고 사람은 잘 못 버리겠더라고요.”
—소설에서 거침없는 성적 대사와 문장마다 좋은 비유들이 많습니다. 평소에도 대화할 때 말투가 화끈하십니까.
“네, 그런 편이에요. 사람들이 제가 가만히 있으면 얌전하게, 아주 얌전하게 봐요. 저도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조용조용하고 말이 없는데 좀 친해지고 나면 굉장히 화끈하게 얘기하는 면이 있어요. 엉뚱 발랄한 면이 있다고 해요. 도발적으로 툭툭하기도 하고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기도 해요. 그게 친한 사람 앞에서만 그래요. 작품 쓸 때만은 작가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때는 무장해제가 되어야죠. 뭔가 부자연스러우면 안 되니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속이 시원하니까요.”
—8년간 파리생활을 한 아이들은 한국에서 적응을 잘했습니까.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지금은 적응 잘하고 있어요. 지금 한국 온 지가 벌써 14년쯤 됐으니까요. 그때 큰애는 우울증까지 왔던 것 같아요. 지금은 명문대 졸업하고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통·번역 관련 일도 꽤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들은 적응하는 데 좀 힘들었어요. 프랑스에서 태어났는데, 돌아와서는 딱 유치원에 갈 시기였죠. 6살짜리가 군대 가는 것도 두려워하고 학교 가는 것은 더 두려워했어요. 그러던 녀석이 지금은 거의 한국사람 다 됐어요.”
—아들이 다시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았나요.
“한동안 가고 싶어했죠. 아들이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으며 방황을 좀 했어요. 공부도 너무 안 하고 프로게이머가 된다는 둥 가방에 책 한 권도 없고 마우스만 달랑 하나, 그것도 최고 좋은 걸 가방에 넣고 게임방을 전전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부모로서는 골치가 아팠죠. 아예 공부는 손을 놓더라고요.
아들이 고1 무렵 프랑스 독일 스페인 쪽으로 참가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번역원에서 그걸 신청했는데 제가 됐어요. 마침 방학중인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갔죠. 사진에 관심이 많은 아이한테 가서 너의 고향인 프랑스와 엄마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어요. 카메라도 좋은 걸로 사 주고 잘 찍으면 아빠가 미술출판 하니까 책출판이나 사진전이랑 이런 것을 해 줄 듯이 꼬셨죠. 그랬더니 아이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프랑스를 갔더니 얘가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바람과 공기부터가 다르다고 하면서요. 음식도 너무 맛있다고 하고.
그렇게 보름 동안 프랑스에 있으면서 예술이 뭔가를 느꼈나 봐요. 그때부터 사진작가로 사는 건 어떨까 하면서 그동안의 방황을 접고 삶의 목표의식을 갖더라고요. 지금은 사진을 제법 잘 찍고 그쪽 길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어요. 잠시 방황은 했지만, 아들을 끝까지 믿고, 특히 파리로 데리고 간 건 정말 현명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뱀장어 스튜〉가 나오기까지
—때로 파리가 그립지 않으세요.
“저는 2010년도에 3개월간 갔었는데, 그때가 진짜 파리 생활 같았어요. 그 전에는 별로 그립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너무 고생을 했거든요. 제 인생에서 너무 힘든 시기였어요. 30대 때 돈도 별로 많지 않은 상태에서 유학을 한 거였고 아주 작은 집에서 둘째까지 낳았어요.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외국에 살면서 느끼는 온갖 스트레스까지 있었어요. 살림에, 육아에, 공부까지에 정말 지쳐 버렸어요.
제 눈에 비친 프랑스 사람들은 자유로워 보이는데, 한국여자만 결혼하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책임감에 사는 것 같더라고요. 생활의 파리지 낭만의 파리가 아니었어요. 한국에 와서도 여행을 하게 되면 파리가 아닌 다른 곳을 가게 되는 거죠.
그런데 한 10년이 넘으니까 살던 곳에 한 번 가 보고는 싶더라고요. 아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정말 그야말로 혼자 3개월을 파리에 있어 본 거죠. 마음껏 영화도 보고 박물관도 가고 다른 나라로 여행도 가 보고, 정말 싱글처럼 혼자 있으면서 소원성취를 했어요. 그때 3개월이 좋지 예전의 파리는 별로 좋지 않아요. 하지만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사는 그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러워요. 파리의 상쾌하고 건조한 여름은 참 좋았어요.”
—그런데 소설에서는 남편과 애인들이 왜 그렇게 관대해요.
“그래요?(웃음) 그건 관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요.”
—등단 5년 만에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는데, 파리에 계실 때인가요.
“귀국하고 받았어요. 귀국 후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어요. 5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죠. 그때 너무 우울했었는데, 그 기간에 <뱀장어 스튜>를 완성했어요. 초고를 얼추 써 놓고 논문 쓰느라고 다듬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저는 나름 작품이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이게 과연 될까’ 그런 의구심도 있었어요.
그런데 작품을 실어 주겠다는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많이 우울해하니까 남편이 《문학사상》에 표지 그리는 화가를 알고 있는데 그 화가에게 선을 대서 이 작품을 실어 보라고 부탁을 해 보겠다고 하면서 작품을 가져갔는데, 그 화가가 그만두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문학사상》에는 불발이 됐어요.
그러다 퇴원하고 다음해에 제가 대학에 시간강사로 나가게 됐어요. 저한테 강의하라고 하는 과목이 ‘성과 문학’이었어요. 그때 어떤 분의 소설작품을 텍스트로 쓰게 되었는데, 그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실리게 됐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김윤식 평론가가 평론을 꽤 길게 써 주셨어요. 그때부터 더 주목을 받게 됐지요. 그러고 나서 겨울에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거예요. 그게 찬밥 신세가 됐던 특이한 <뱀장어 스튜>의 운명이었어요.
신인이 갑자기 큰 상을 받게 되니까 ‘그 여자 누구야’ 하며 언론의 조명도 무지 받았어요. 여성지 표지모델도 하고요. 그 당시 편의점에서 김밥 사서 차에서 먹으며 다음 스케줄 소화하고 그랬어요. 그게 한 달쯤 간 것 같아요. 무명생활에서 갑자기 정신이 없더라고요.”
—도움을 주려던 남편은 결국 무용지물이었네요.
“무용지물은 아니죠. 남편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자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다고 말하죠. 자기가 나를 힘들게 하고 외롭게 했기 때문에 글을 통해서 저를 승화시켰다고 해요. <뱀장어 스튜>도 자기 화집이 없었으면 어떻게 썼겠냐고 해요. 자기가 무척 외조를 했다고 생각하죠. 일정 부분은 동의해요.”
—시간의 흐름상 문학스승이 없었겠네요.
“네, 저는 소설을 혼자 썼으니까 스승이 없는 셈이죠. 대학도 문창과를 나온 것이 아니라 영문과를 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 대학 영문과에서는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잖아요. 저는 혼자 소설을 공부한 거예요.
어떤 때는 선생님이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요. 대학 다닐 때는 소설로 상도 많이 받았어요. 학교 잡지에 여러 번 실렸고요. 프랑스에서 혼자 쓸 때는 이게 맞는 건지 소설이 되는 건지 누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어요.”
잠 못 잘 때 머릿속으로 이야기 만들어
—고등학교 때 이상문학상 시상식장에서 당시 제1회 수상자 김승옥 작가를 보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불태웠다고 했던데요.
“저는 굉장히 뭔가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에요. 어릴 때도 티브이나 라디오 드라마를 보거나 들으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저 혼자 이야기를 꾸며 갔어요. 어릴 때 굉장히 몸이 약해서 먹는 것도 잘 안 먹고, 신경이 예민하니까 잠을 잘 못 잤어요. 잠이 안 오면 심심하니까 그런 식으로 혼자 이야기를 만들다 지쳐 잠들었어요. 그게 한편은 스토리텔러적인 훈련이었어요.
어린 저는 너무 힘들었지만 이야기를 지어 내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서도 수필이나 이런 것보다는 콩트나, 뭔가 짧은 이야기를 지어 내고 쓰는 것이 더 편했어요.
그래서 소설가에 대한 막연한 꿈을 꾸고 있는데, 이상문학상 시상식에서 구체적으로 꿈을 가지게 된 거죠. 지금은 제가 어린 시절의 꿈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만족감이 커요. 게다가 이 일은 정년도 없고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래서 소설쓰기는 저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학교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는 않나요.
“저한테 그렇게들 많이 물어보는데, 저는 자유로운 것이 좋아요. 학교에 얽매여 있으면 경제적 안정감은 있을 수 있지만 대신에 소설을 쓰기 힘들었을 거예요. 작가 수입이 들쑥날쑥하지만 정신적인 만족감도 중요해요. 대체적으로 만족해요.”
—신작은 언제 발표합니까.
“제가 작년 5월 《문화일보》에 연재했던 《유혹》이라는 5편짜리 장편을 완간했어요. 그거를 2년 연재하고 났더니 몸이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작정을 하고 좀 쉬자 한 게 벌써 1년인데, 너무 쉬니까 다른 일들이 치고 들어와서 1순위가 자꾸 밀리는 거예요. 부모님도 건강이 안좋고 하니까. 올 겨울쯤 지나면 독하게 어디로 좀 떠나 볼까 생각도 하고 있어요.”⊙
새천년이 온 후 2013년 가을만큼 예쁘고 따뜻한 적이 있었을까! 아이러니하게 사람도 이렇게 외로운 적이 있었을까! 1층 아파트여서 전망이 별로일 줄 알았는데 건축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알고 보면 산도 1층부터 서 있지 않은가. 북한산 숲에 둘러싸인 창문마다 공작새 같은 단풍나무가 그림처럼 걸려 있다. 거실에는 부부가 파리에서 8년을 살다 온 흔적들이 가득했다. 미술평론가인 남편과 여류 소설가가 사는 집은 공간 자체도 예술이었다. 휴양지 리조트에서 뿜어낼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제26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뱀장어 스튜>는 피카소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피카소의 마지막 여자였던 재클린이 피카소를 위해 만든 요리 이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그림을 보고 무한한 상상력에 빠졌다. 피카소의 입체적 기법을 소설에도 투여했는데, 그래서인지 불륜의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작중에서 그녀, 또는 여자는 동일한 화자이다. 그녀의 남편은 오랫동안 가출해서 돌아온 아내를 위해 삼계탕을 끓여 주기로 한다. 스튜냄비에 생닭을 넣고 타이머가 돌고 있는 동안 섹스를 한다. 섹스만큼 성스러운 용서의 의식이 없다는 듯. 하지만 그녀는 애인하고 만났던 순간과 섹스를 떠올린다.
“1960년 12월 3일 재클린이 점심식사로 만든 스튜를 위하여, 이 그림을 바침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만 하다면.”
왠지 이 ‘뱀장어 스튜’란 그림은 내게는 쓸쓸한 감동을 준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예술가의, 일상에 대한 경의와 마지막 여자에 대한 예의가 느껴진다. 인생이란 화려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장엄하지도 않으며, 다만 뱀장어의 몸부림과 같은 격정을 조용히 끓여 내는 것이 아닐까…. 스튜 냄비의 밑바닥처럼 뜨거움을 견디고 살아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신이 조절한 타이머에서 종소리가 날 때까지 말이다. 하긴 꼭 뱀장어 스튜가 아니면 어떤가. 삼계탕이나 곰탕, 뭐 이런 것들도 조용히 끓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한 여자가 떠올랐다. 이슬비 내리는 파리 근교의 낡은 아파트 부엌으로 조용히 들어서고 있는 그녀…. -본문에서
“食慾이든 性慾이든 살기 위한 본능”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뱀장어 스튜>는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상상한 건가요.
“프랑스에 있을 때 미술잡지를 볼 기회가 많았어요. 소설에서는 화집이라고 했지만 화집이 아니라 어느 미술 잡지에 피카소 특집이 실렸어요. 꽤 길었는데 피카소가 모델로 그렸던 여성들을 추적한 특집이었어요. 피카소가 연애했던 여자들은 거의 다 실려 있었어요. 그녀들의 얼굴과 사연이 나오고 일생이 쭉 펼쳐져 있더군요. 마지막 여자로 재클린이 나오는데 재클린의 레시피라고 하면서 뱀장어 스튜 그림과 요리기법이 있었던 거죠.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어요. 아, 인생을 화려하게 산 카사노바 남자도 결국에는, 마지막 여자에게서 남는 것은 밥이구나. 밥이 참 중요한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뱀장어를 통하여 식욕을 충족시키면 성욕(性慾)까지도 갈 수 있잖아요. 피카소는 재클린의 그런 배려에 감동했을 것 같아요.
“그랬겠죠. 여성의 욕망 같은 것도 해석할 수 있겠죠. 섹스도 그냥 막말로 하면 ‘먹는다’고 하잖아요. 식욕이든 성욕이든 다 살기 위한 본능인 거죠. 곧 죽게 될 뱀장어가 꿈틀대는 그림을 보면서 모든 게 삶의 처절한 몸짓 같아서 서글펐어요. 하물며 피카소의 인생조차도 그랬어요.
소설을 쓰면 뭐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있었어요. 그런데 한동안 전혀 쓸 수가 없었죠. 뭔가 될 것 같다는 확신만 있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굉장한 작품이 나올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접근해서 써야 할지는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설 맨 처음에 화집을 열어 본다 하면서 이야기 들어간 것은 일단은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들어갔어요. 작가가 화자로서 텍스트 내에 개입하면서 이중적인 내러티브 수법으로 쓰게 된 거죠. 이런 걸 메타픽션이라고 하는데 포스트 모더니즘 기법으로 해 놓고 다시 쓰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렸죠.”
—입체적인 기법이어서 혼동했는데,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인가요.
“네, 여자이기도 하고 작가가 바라본 여자이기도 한 거죠. 그래서 글을 잘못 읽으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할 수 있어요. 예전에 영어로 번역을 했는데, 번역자가 잘못 해석해서 앞부분에 아이(I)를 다 쉬(She)로 해 놨어요. 나중에 설명을 하니까 ‘아~’ 그러고 이해를 했어요.
그렇게 한 건 피카소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피카소의 그림이 입체적이라 옆모습인데 앞모습이랑 중첩되어 있잖아요.
소설도 단순하게 한 사람의 시점으로 계속 쓰는 것보다 그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 사건을 보고, 밖에서 객관적으로 보고 그랬을 때 어떻게 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그 당시 우리나라 소설을 보면 그때만 해도 리얼리즘적인 운동권 후일담 등 이런 것들이 많았어요. 저는 그게 좀 소설기법상 단순한 것 같고, 나는 독특하게 어떻게 좀 해볼까 하다 피카소의 그림을 소설 기법으로 써 보자는 결심이 섰어요. 피카소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제게 영감을 준 예술가죠.”
단순함보다 反轉을 좋아해
—수학을 잘했나 봐요.
“수학은 잘 못했는데 구성하는 거, 이야기를 이쪽으로 놓으면 어떨까 저쪽으로 놓으면 어떨까 이런 거에는 관심이 많아요. 미술관에 가도 바깥에 보이는 것보다는 그걸 준비하는 방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아요. 복도를 지나다가 미술관 창고 뒷문이 열려 있으면 저는 꼭 몰래 들어가 봐요. 무대 안과 무대 밖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죠. 그것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봤을 때 실체와 진실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항상 저는 반전(反轉), 단순하게는 쓰기 싫어서 늘 비틀거나 반전을 좋아해요.”
—그런 기법이 소설의 기품을 살려주는 것 같아요
“제가 남들보다 특이한 경험을 한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진부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새롭게 보이고 재밌게 빠져들게 할 수 있을까, 그런 거를 고민하다 보니 독특한 기법으로 쓰게 돼요. 다행히 고급독자인 경우에는 이야기를 재밌게 봐요. 그런데 일반독자들은 어렵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작가들이나 문학공부 하는 분들은 제 작품을 좋아하는데 대중들은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재밌었는데 고급독자인가요.
“(웃음) 물론이죠.”
—뱀장어 스튜가 우리나라 말로는 장어탕이죠.
“그렇죠. 저는 프랑스에서 뱀장어 스튜를 못 먹어 봤어요. 글을 쓰면서도 ‘뱀장어 스튜라는 것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하다 보니 뱀장어 스튜처럼 모든 걸 우려가지고 몸의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는 것이 우리나라에는 삼계탕이 있어요. 그래서 작중에 삼계탕을 소재로 쓴 건데,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장어탕이죠. 저는 우리나라에 장어탕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왜 장어를 구워만 먹나 생각했죠.
그런데 여수에 있는 소설가 한 분이 저보고 ‘아니 권지예씨는 뱀장어 스튜라고 이름만 외국어로 멋지게 소설을 쓰고 장어탕은 안 먹어 봤냐’면서 장어탕을 사 줬어요. 그런데 정말 맛있었어요. 그때부터 그분이 저보고 장어부인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작중에서 왜 여자는 정자(亭子) 같은 애인에게는 정착을 못하는 걸까요.
“사실 여자는 애인의 아이를 가졌을 때 둥지나 집을 원했어요. 하지만 애인은 한 여자만 책임지는 타입이 아니었고 결혼도 원치 않았어요. 그러면서 자신은 정자이니 언제든지 와서 쉬었다 가라고 하는데, 이 여자는 안정적인 집을 원했어요. 정자라는 것은 벽은 없고 기둥만 있어요. 여자는 집에 대해 굉장히 강박적인 안정감을 추구하죠. 남편이라는 사람도 그런 점에서 안정적이지 않았어요. 경제적 안정감을 주는 생활력이 없고요.”
한국 여자의 집단無의식
—결국, 애인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작가의 윤리성에 대한 한계 때문이었나요.
“제 소설 여주인공들이 초기에는 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중에는 안 돌아가요.(웃음) 그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 나이와도 상관이 있어요.
저는 맏딸인데 아들 같은 장녀로 자랐어요. 부모님의 기대나 의지도 컸고요. 그래서인지 제가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인데도 불구하고 장녀 모범생으로 자라다 보니까 항상 어떤 한계를 느껴 요. 그게 소설에도 투영되어 윤리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이 나오기도 하고, 마음속의 억압이나 한계를 벗어나서 마음껏 사는 주인공이 나오기도 하죠. 후반에 쓴 소설에서는 아예 집으로 안 돌아가는 것이 더 많아요.”
—누구보다 영혼이 자유로워야 할 작가마저도 윤리 앞에서는 무너져야 하는 건가요.
“프랑스에서 박사논문 쓰기 전에 한국 작가 김유정을 연구해서 논문을 쓴 적이 있어요. 김유정 작가는 저랑 너무 다른 소설을 쓰기 때문에 제가 무척 존경하는 작가예요. 안타깝게 요절했지만 슬픈 것도 해학적으로 표현하는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분의 소설에 보면 아내들이 너무 가난해서 병에 술을 넣어 광주리에 들고 다니면서 술을 팔고 몸을 파는 장면이 나와요. 남편한테 구박 받고 몸 팔고 사기를 치고 사는 것도 다반사인데, 결국 모든 게 자신의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한 안간힘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논문에다 우리나라 윤리성 운운하며 쓴 건데,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너는 왜 그렇게 윤리적이냐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 역시도 그걸 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었죠. 그때가 30대였는데 뭔가 명분이 없으면 불륜을 저지르면 안 될 것 같고, 불륜을 저질렀다고 해도 남편을 용서할 수 있으면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데 김유정 소설에서도 확인되니까, 아, 이게 어쩔 수 없는 한국여자의 집단무의식적인 윤리의식인가 보다, 그래서 논문도 그런 식으로 풀어 나갔는데 저한테도 약간 그런 면이 있어요.”
—프랑스 사람에게는 의아한 말이겠네요.
“프랑스에서는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우리는 ‘불륜’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결혼한 사람의 사랑은 무조건 불륜이죠.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가 볼 때는 무책임할 수도 있는데 사랑을 했다가도 사랑이 식으면 금방 이혼하고 그러죠. 우리 집 옆에 사는 프랑스인 부부가 사랑하는데도 결혼을 17년 동안이나 안 하고 동거만 해요. 자식까지 낳고도. 30대 때는 그런 게 이해가 잘 안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좀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뭐 그렇게 살든 다 각자의 선택이지 별거 있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곡된 性이 이상한 것이지 섹스는 본능”
—그림이나 요리가 소설 쓰기 영감의 원천인가 봐요.
“제 작품에, 특히나 초기작에는 그림과 음식에서 영감을 얻어서 쓴 게 정말 많아요. 그리고 제가 그거를 잘 연결해서 썼어요.
유학을 가서 음식을 정말 많이 했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친정 엄마가 음식을 주로 해다 주셨는데, 외국에 가니까 거기는 배달음식은 아예 없고 식당음식 값은 턱없이 비쌌어요. 식재료가 싱싱하고 싸서 거의 사다가 해 먹었던 거죠. 남편은 충청도 시골남자라 청국장도 있어야 하고 김치도 있어야 했어요.
한국에서는 한 번도 안 해 봤던 김치를 거기 가서 담가 먹었어요. 네덜란드산 배추를 사다가 한 달에 한 번씩 꼬박 다섯 포기씩 김치를 담갔어요. 청국장 된장도 한국에서 부쳐 오면 끓여 먹다가 나중에는 메주를 공수 받아 제가 된장도 직접 담갔고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제가 꽤 요리를 잘하더라고요.(웃음)
뭐든 집중적으로 하면 어느 순간에 도가 튼다고 할까, 요리책도 전집으로 사 가져갔어요. 낯선 나라에서 할 일은 한정되어 있고 유익한 취미거리로서 요리가 최고였어요. 요리하는 시간을 통하여 뭔가 인생을 연결시켜서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요리소설이 됐던 거고요.
그림은 남편이 미술을 전공했어요. 일도 젊은 나이 때부터 미술관 책임자로 있었어요. 남편이 그림에도 관심이 많고 전시에도 관심이 많고 하다 보니까, 저도 어깨너머로 관심을 가진 거죠. 그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직업적인 남편하고는 다를 테고요.
그런데 프랑스에 가니까 전시가 좋은 게 많았어요. 그림을 이용한 디자인도 많고 작은 미술관도 많고요. 자연스레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사고방식 자체가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이 들고, 그림의 어떤 주제나 기법에 영감을 얻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나오게 됐죠.”
—‘불륜의 서사’를 통하여 성관계를 형상화시킨 작품이 다수 있어요.
“사랑은 허기지만 섹스는 음식이다, 이게 저의 모토예요. 인간이 사랑 없이는 못 살아요. 늘 허기지고 외롭고, 그게 사랑의 욕구라면 섹스는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음식이고 먹는 건데, 그게 일상적인 거죠. 삶의 에너지를 주는 거고. 그래서 저는 섹스를 건강한 에너지라고 봐요. 이거를 이상하게 보는 게 사실 이상한 거죠. ‘왜곡된 성’이 이상한 거지, 섹스는 인간의 이상이고 본능이에요. 먹어야 사니까요. 섹스는 건강한 삶의 에너지다 이거죠.(웃음)”
남편 때문에 파리 유학
—파리에서 8년을 살았네요. 가게 된 동기와 체류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파리에 가게 된 데에 제 의지는 전혀 없었어요. 저는 그때 순위고사에 합격해 임용된 7년 차 공립중학교 교사로 65세까지 보장이 된 안정된 직장이 있었죠. 남편은 현대미술관 책임자였고.
그냥 살아도 별 큰 어려움 없이 사는 건데, 느닷없이 남편이 공부를 하고 싶대요. 프랑스로 출장을 갔다가 너무 뿅 갔다는 거죠. 틈만 나면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안 된다고 버텼죠. 나중에는 남편이 꿈을 깨지 못하고 거의 협박조로 나왔어요.
그때는 교사생활 7년 한 상태인데, 교사가 나한테 100% 천직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이게 나의 이상적인 직업이라면 항상 아이들을 사랑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교사의 올바른 상(像)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예술가형인 거예요. 교사로서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기보다 내 자아가 충만하지 않은 상태라 늘 허전한 거예요. 내 안의 에너지를 내 스스로 응축해서 표현하고 싶은 게 강한 사람이란 걸 깨닫자, ‘아, 내가 교사를 평생 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는데, 남편 소원이라는데 그거를 들어주지 않으면 평생 욕을 먹게 생겼고, 그래서 조건을 걸고 떠나기로 했죠. 3년 안에 박사를 따고 돌아오기로 하고요.
그런데 결국 3년이 7년 반 8년 가까이 돼서, 휴직을 하고 떠났던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중간에 학교로 잠깐 다시 돌아갔는데, 저도 프랑스 맛을 보고 나니까 학교에 적응이 안 되는 거예요. 결국 교사를 포기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죠.”
—거기서 공부를 한 거죠.
“사실 나는 공부할 생각이 없었어요. 불문과는 아니고, 파리 7대학에서 일본·한국·중국 문학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과가 있어요. 거기서 한국문학을 가지고 불어로 논문을 써서 결국 박사학위를 받게 된 거죠. 등단하고 2~3년 동안은 박사논문 쓰느라고 소설을 쓰지 못했어요.”
—남편이 불륜 소재를 다룬 소설을 보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나요.
“처음에는 신이 나서 다 얘기해 주고 하더니 나중에는 기분 나쁜지 안 읽어요. 저 역시 유학할 때는 심심하기도 하고 남편이 유일한 독자니까 다 보여줬어요. 작가가 되기 전에는 남편 얘기가 그럴듯해서 귀 기울여 들었는데 나중에는 듣지 않았어요. 제가 말을 안 들으니까 제 작품을 몰래 고쳐 놓기도 했어요. 그때부터는 아예 안 보여줬어요. 지금은 관심도 없지만요.(웃음)”
꽃게 먹다가 영감 얻어 미친 듯 소설 써
—동인문학상 <꽃게무덤>은 이성 간 집착적인 사랑의 심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징성도 강하고요.
“그 무렵 소설이 너무 안 써졌어요. 이상문학상을 타고 한동안 청탁이 집중적으로 들어와 무척 바빴어요. <꽃게무덤>은 마감을 넘겼는데도 쓰지 못하고 있었죠. 날마다 소설이 써지지 않아 끙끙 앓고 있었어요.
그때 친구들이, ‘야, 강화도에 놀러나 가자’ 해서 거길 따라갔어요. 강화도 외포리 부근에 총각 작가가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어요. 그분의 추천으로 꽃게탕을 먹으러 갔죠. 노총각 작가가 꽃게를 함께 먹으면서 석모도의 함초밭이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괜히 멋있고 어떤 조각 그림들이 떠오르는 거예요.
저도 꽃게를 좋아하지만 제 친구 한 명도 꽃게를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예전에 저는 먹는 게 귀찮아서 엄마가 파 주면 먹고 그랬어요. 그날도 끝까지 잘 못 먹고 있는데, 그 친구는 젓가락으로 너무도 빨리 깔끔하게 꽃게를 까먹는 거예요. 기술자도 그러지는 못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먹는 친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뭔가 감성을 자극하더라고요.
게를 파먹는 행위를 무척 집착적으로 하고 스토리도 집착적인 사랑 이야기로하자, 그런 영감이 떠오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날 돌아오자마자 작업실에 가서 안 자고 안 먹고 며칠 만에 정신없이, 미친 듯이 <꽃게무덤>을 써서 냈어요. 제 정신으로 쓴 거 같지 않은 소설이었어요. 정말 몰아치듯이 썼죠.”
—그랬군요. 밤중에도 맨몸으로 꽃게를 먹는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친구가 꽃게를 먹는 모습에서, 뭐랄까 어떤 형상이 떠올랐어요. 꽃게 딱지에서 국물이 팔꿈치로 흐르면 혀끝으로 핥아 먹을 수 있나, 혼자서 연습도 해 보니까 가능했어요.
때로는 생각만 해서 쓰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당시 석모도의 함초 밭을 안 가 보고 생각만 해서 묘사를 했어요. 강화도령 노총각 작가의 말만 듣고 쓴 거죠. 인천공항에 가다 보면 서해바다 쪽으로 보라색이 쫙 펼쳐지는 게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게 바로 함초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모습을 상상해서 소설에다 멋지게 묘사를 해 놓았는데, 독자들이 이 소설을 보고 석모도에 가면 그런 장관을 볼 수 있는 줄 알고 많이들 갔다고 해요. 실은 영종도의 함초 풍경이죠.”
수집광 남편
—남편이 수집을 좋아한다면서요.
“수집광이에요. 젊은 나이 때부터 그랬어요. 대학 때에 만나 연애를 하는데, 하루는 자취방을 갔더니 온 벽이 다 책인 거예요. 저는 결혼할 때 이 책을 다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어요. 가난한 남자와 결혼을 하는데 책 때문에 방을 두 칸짜리로 가야 했어요. 큰 집 얻을 돈이 없다 해서 결국은 제가 돈을 보태 책을 모시고 살았어요. 유학 가서도 계속 책을 사는 거예요. 처음에는 몰랐죠. 저 몰래 책을 사서 어딘가에 사 놓고 나중에 귀국 짐 쌀 때 사람들에게 맡겼던 책 짐을 가져오는 거예요.
남편은 책이고 뭐고 갖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고야 마는 남자예요. 예전부터 박물관을 만드는 게 꿈이었어요. 책이든 물건이든 버리질 않아요. 그래서 지금도 골치 아픈 면이 많아요.”
—부부가 책을 같이 좋아하면 더 좋지 않나요.
“아니요,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남편이 출판기획사를 차린 지 거의 7~8년 됐는데, 이제는 출판해서 못 팔고 남는 책들 있잖아요. 그런 책들까지 쌓이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사무실 근처에 창고를 따로 얻어 가지고 이제는 비싼 돈 주고 책을 모시고 사는 꼴이 된 거예요. 제가 집에는 절대 책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거든요. 더 이상 집에 가져오면 쫓아낸다고 했거든요. 그래도 남편이 워낙 버리는 걸 싫어하니까 자꾸 뭐가 쌓여요. 그런데 저도 욕하면서도 닮는다고 물건하고 사람은 잘 못 버리겠더라고요.”
—소설에서 거침없는 성적 대사와 문장마다 좋은 비유들이 많습니다. 평소에도 대화할 때 말투가 화끈하십니까.
“네, 그런 편이에요. 사람들이 제가 가만히 있으면 얌전하게, 아주 얌전하게 봐요. 저도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조용조용하고 말이 없는데 좀 친해지고 나면 굉장히 화끈하게 얘기하는 면이 있어요. 엉뚱 발랄한 면이 있다고 해요. 도발적으로 툭툭하기도 하고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기도 해요. 그게 친한 사람 앞에서만 그래요. 작품 쓸 때만은 작가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때는 무장해제가 되어야죠. 뭔가 부자연스러우면 안 되니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속이 시원하니까요.”
—8년간 파리생활을 한 아이들은 한국에서 적응을 잘했습니까.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지금은 적응 잘하고 있어요. 지금 한국 온 지가 벌써 14년쯤 됐으니까요. 그때 큰애는 우울증까지 왔던 것 같아요. 지금은 명문대 졸업하고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통·번역 관련 일도 꽤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들은 적응하는 데 좀 힘들었어요. 프랑스에서 태어났는데, 돌아와서는 딱 유치원에 갈 시기였죠. 6살짜리가 군대 가는 것도 두려워하고 학교 가는 것은 더 두려워했어요. 그러던 녀석이 지금은 거의 한국사람 다 됐어요.”
—아들이 다시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았나요.
“한동안 가고 싶어했죠. 아들이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으며 방황을 좀 했어요. 공부도 너무 안 하고 프로게이머가 된다는 둥 가방에 책 한 권도 없고 마우스만 달랑 하나, 그것도 최고 좋은 걸 가방에 넣고 게임방을 전전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부모로서는 골치가 아팠죠. 아예 공부는 손을 놓더라고요.
아들이 고1 무렵 프랑스 독일 스페인 쪽으로 참가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번역원에서 그걸 신청했는데 제가 됐어요. 마침 방학중인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갔죠. 사진에 관심이 많은 아이한테 가서 너의 고향인 프랑스와 엄마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어요. 카메라도 좋은 걸로 사 주고 잘 찍으면 아빠가 미술출판 하니까 책출판이나 사진전이랑 이런 것을 해 줄 듯이 꼬셨죠. 그랬더니 아이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프랑스를 갔더니 얘가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바람과 공기부터가 다르다고 하면서요. 음식도 너무 맛있다고 하고.
그렇게 보름 동안 프랑스에 있으면서 예술이 뭔가를 느꼈나 봐요. 그때부터 사진작가로 사는 건 어떨까 하면서 그동안의 방황을 접고 삶의 목표의식을 갖더라고요. 지금은 사진을 제법 잘 찍고 그쪽 길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어요. 잠시 방황은 했지만, 아들을 끝까지 믿고, 특히 파리로 데리고 간 건 정말 현명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뱀장어 스튜〉가 나오기까지
—때로 파리가 그립지 않으세요.
“저는 2010년도에 3개월간 갔었는데, 그때가 진짜 파리 생활 같았어요. 그 전에는 별로 그립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너무 고생을 했거든요. 제 인생에서 너무 힘든 시기였어요. 30대 때 돈도 별로 많지 않은 상태에서 유학을 한 거였고 아주 작은 집에서 둘째까지 낳았어요.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외국에 살면서 느끼는 온갖 스트레스까지 있었어요. 살림에, 육아에, 공부까지에 정말 지쳐 버렸어요.
제 눈에 비친 프랑스 사람들은 자유로워 보이는데, 한국여자만 결혼하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책임감에 사는 것 같더라고요. 생활의 파리지 낭만의 파리가 아니었어요. 한국에 와서도 여행을 하게 되면 파리가 아닌 다른 곳을 가게 되는 거죠.
그런데 한 10년이 넘으니까 살던 곳에 한 번 가 보고는 싶더라고요. 아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정말 그야말로 혼자 3개월을 파리에 있어 본 거죠. 마음껏 영화도 보고 박물관도 가고 다른 나라로 여행도 가 보고, 정말 싱글처럼 혼자 있으면서 소원성취를 했어요. 그때 3개월이 좋지 예전의 파리는 별로 좋지 않아요. 하지만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사는 그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러워요. 파리의 상쾌하고 건조한 여름은 참 좋았어요.”
—그런데 소설에서는 남편과 애인들이 왜 그렇게 관대해요.
“그래요?(웃음) 그건 관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요.”
—등단 5년 만에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는데, 파리에 계실 때인가요.
“귀국하고 받았어요. 귀국 후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어요. 5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죠. 그때 너무 우울했었는데, 그 기간에 <뱀장어 스튜>를 완성했어요. 초고를 얼추 써 놓고 논문 쓰느라고 다듬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저는 나름 작품이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이게 과연 될까’ 그런 의구심도 있었어요.
그런데 작품을 실어 주겠다는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많이 우울해하니까 남편이 《문학사상》에 표지 그리는 화가를 알고 있는데 그 화가에게 선을 대서 이 작품을 실어 보라고 부탁을 해 보겠다고 하면서 작품을 가져갔는데, 그 화가가 그만두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문학사상》에는 불발이 됐어요.
그러다 퇴원하고 다음해에 제가 대학에 시간강사로 나가게 됐어요. 저한테 강의하라고 하는 과목이 ‘성과 문학’이었어요. 그때 어떤 분의 소설작품을 텍스트로 쓰게 되었는데, 그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실리게 됐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김윤식 평론가가 평론을 꽤 길게 써 주셨어요. 그때부터 더 주목을 받게 됐지요. 그러고 나서 겨울에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거예요. 그게 찬밥 신세가 됐던 특이한 <뱀장어 스튜>의 운명이었어요.
신인이 갑자기 큰 상을 받게 되니까 ‘그 여자 누구야’ 하며 언론의 조명도 무지 받았어요. 여성지 표지모델도 하고요. 그 당시 편의점에서 김밥 사서 차에서 먹으며 다음 스케줄 소화하고 그랬어요. 그게 한 달쯤 간 것 같아요. 무명생활에서 갑자기 정신이 없더라고요.”
—도움을 주려던 남편은 결국 무용지물이었네요.
“무용지물은 아니죠. 남편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자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다고 말하죠. 자기가 나를 힘들게 하고 외롭게 했기 때문에 글을 통해서 저를 승화시켰다고 해요. <뱀장어 스튜>도 자기 화집이 없었으면 어떻게 썼겠냐고 해요. 자기가 무척 외조를 했다고 생각하죠. 일정 부분은 동의해요.”
—시간의 흐름상 문학스승이 없었겠네요.
“네, 저는 소설을 혼자 썼으니까 스승이 없는 셈이죠. 대학도 문창과를 나온 것이 아니라 영문과를 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 대학 영문과에서는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잖아요. 저는 혼자 소설을 공부한 거예요.
어떤 때는 선생님이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요. 대학 다닐 때는 소설로 상도 많이 받았어요. 학교 잡지에 여러 번 실렸고요. 프랑스에서 혼자 쓸 때는 이게 맞는 건지 소설이 되는 건지 누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어요.”
잠 못 잘 때 머릿속으로 이야기 만들어
—고등학교 때 이상문학상 시상식장에서 당시 제1회 수상자 김승옥 작가를 보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불태웠다고 했던데요.
“저는 굉장히 뭔가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에요. 어릴 때도 티브이나 라디오 드라마를 보거나 들으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저 혼자 이야기를 꾸며 갔어요. 어릴 때 굉장히 몸이 약해서 먹는 것도 잘 안 먹고, 신경이 예민하니까 잠을 잘 못 잤어요. 잠이 안 오면 심심하니까 그런 식으로 혼자 이야기를 만들다 지쳐 잠들었어요. 그게 한편은 스토리텔러적인 훈련이었어요.
어린 저는 너무 힘들었지만 이야기를 지어 내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서도 수필이나 이런 것보다는 콩트나, 뭔가 짧은 이야기를 지어 내고 쓰는 것이 더 편했어요.
그래서 소설가에 대한 막연한 꿈을 꾸고 있는데, 이상문학상 시상식에서 구체적으로 꿈을 가지게 된 거죠. 지금은 제가 어린 시절의 꿈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만족감이 커요. 게다가 이 일은 정년도 없고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래서 소설쓰기는 저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학교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는 않나요.
“저한테 그렇게들 많이 물어보는데, 저는 자유로운 것이 좋아요. 학교에 얽매여 있으면 경제적 안정감은 있을 수 있지만 대신에 소설을 쓰기 힘들었을 거예요. 작가 수입이 들쑥날쑥하지만 정신적인 만족감도 중요해요. 대체적으로 만족해요.”
—신작은 언제 발표합니까.
“제가 작년 5월 《문화일보》에 연재했던 《유혹》이라는 5편짜리 장편을 완간했어요. 그거를 2년 연재하고 났더니 몸이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작정을 하고 좀 쉬자 한 게 벌써 1년인데, 너무 쉬니까 다른 일들이 치고 들어와서 1순위가 자꾸 밀리는 거예요. 부모님도 건강이 안좋고 하니까. 올 겨울쯤 지나면 독하게 어디로 좀 떠나 볼까 생각도 하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