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英善
⊙ 66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美 워싱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同국제문제연구소장·미국학연구소장 역임. 現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위원.
⊙ 저서: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2》《역사 속의 젊은 그들》 등.
⊙ 66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美 워싱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同국제문제연구소장·미국학연구소장 역임. 現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위원.
⊙ 저서: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2》《역사 속의 젊은 그들》 등.
동아시아 정세가 불안하다. 중국의 부상(浮上)으로 인한 미·중의 대립 가능성, 일본의 아베(安倍) 내각 이후 두드러지는 침략역사 부정(否定)과 자위권 재해석 등 우경화, 이웃나라들과의 영토 마찰, 그리고 그런 일본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는 미국과 일본의 안보협력지침 개정 등 여러 징후 때문이다. 우리 한국은 이러한 변화에 얼마나 잘 대처하고 있느냐 하는 걱정도 떨칠 수 없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총동창회(회장 임성준)는 지난 9월 26일 아침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를 초청한 조찬 강연회를 열었다. 하 교수의 특강 제목은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과 한일 신시대의 모색’이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하 교수가 비춰 보인 첫 번째 슬라이드(사진)는, 그가 지난 8월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 옆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에서 보았다는 ‘올해의 퍼빌리언(Pavilion 2013)’으로, 일본인 건축가 후지모토 소스케(藤本壮介, 1971년생)의 작품이었다. 이 갤러리는 1년에 한 번씩 전 세계 건축가들 가운데 가장 창의적 상상력이 풍부한, 주목되는 한 사람을 선정하여 이곳에 전시용 (임시) 건축물을 짓게 하는데, 후지모토는 올해 13년째가 되는 이 ‘서펜타인 갤러리 퍼빌리언’의 초청 건축가로, 그것도 여기 초청된 건축가들 가운데 역대 최연소의 나이(42세)로 선정된 것이다.
하 교수가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말하기 위해 왜 이 젊은 일본 건축가 후지모토의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했는지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나는 하 교수의 9월 26일 강연 내용과 그가 평소 주장해 온 복합그물(complex network) 정책이 좀 더 널리 세상에 알려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후 10월 8일과 11월 4일, 이틀간 합쳐서 5시간여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다음은 그 내용들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東아시아 질서, 제5기 진입
―왜 ‘동아시아의 신질서 건축’을 말합니까?
“긴 역사를 요약해 보면, 지금 동아시아의 질서는 제5기라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秦)·한(漢) 통일 무렵부터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천하(天下)질서’가 2000년을 이어왔습니다. 그것이 제1기였다고 할 수 있죠. 그러다가 19세기 들어 유럽 중심의 근대 국제질서가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들어와 동아시아에서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와 만나는 게 제2기였습니다. 제3기는, 좀 빠른 속도로 유럽 근대 국제질서를 받아들인 일본이 짧은 시간 동안에 지역 제국주의 형태로 나갔던 20세기 전반(前半)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결과는 일본의 실패로 끝났습니다. 1945년 이후 미(美)·소(蘇) 중심의 냉전시대 질서가 반세기 이어졌던 것이 제4기였고, 지금은 냉전 이후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건축이 시작되는 제5기에 해당합니다.
이미 미국과 중국이 제5기 신질서 건축에 나서고 있는데, 한국은 같은 시공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최근 일어나는 변화의 의미를 잘 보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도 부족합니다. 그저 19세기 근대 국제질서의 연장 또는 소박한 탈(脱)냉전 시대의 시각으로 보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동아시아에서 상당히 복잡한 건축물이 설계되고 이미 건축 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차 하면 무대의 주인공 중 일부는 살아남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어요.
우리는 19세기 중반에 ‘천하질서’가 무너지고 제2기의 유럽 국제질서가 들어올 때 적응하지 못해 결국 나라를 잃었습니다. 제3기에도 일본 제국이 천년만년 갈 것으로 착각하고 친일(親日)을 했던 개인과 집단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지금 한반도 주변은 여전히 냉전시대적 질서가 남아 있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새로운 건축이 시작되고 있는데, 냉전적 질서로만 파악해서는 새 건축물 속에서 내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하겠습니다.”
―동아시아 질서가 역사적으로 제5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결국 중국의 부상(浮上) 때문입니까.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GDP(국내총생산) 국가는 지난 50년간 일본이었습니다. 그 자리가 2010년 이후에 중국으로 바뀌고 일본은 GDP 3위 국가로 떨어졌습니다. 중국은 30년 전 GDP가 세계 9위였으나, 2000년에 세계 6위, 2005년 세계 5위, 2010년 세계 2위로 껑충껑충 뛰어올랐어요<그림 1>.”
―그러면 미국부터 보죠.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그리는 기본 설계도는 어떤 것입니까?
美의 東아시아 전략
“그것은 이른바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시(重視)하겠다는 재(再)균형론(rebalancing)입니다.
오바마 행정부 1기 때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였던 커트 캠벨(Kurt Campbell)은, 미국이 종래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다수의 국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특정 국가의 우월적 지위를 예방·저지하기 위해 서로 세력의 균형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19세기 이래의 국제정치적 원리 또는 정책)적 발상만으로는 21세기 새 외교정책을 준비하기 어렵고, 그 대신 균형을 이루어낼 수 있는 힘(power of balance)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의 힘도 전보다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국제 관계가 전개되는 무대도 훨씬 복잡해지고 있고, 연기력도 전쟁/평화라는 이분법(二分法)보다 훨씬 복잡하게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재균형론의 기본 문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2011년 11월 《포린 폴리시》에 기고했던 ‘미국의 태평양 세기(America’s Pacific Century)’입니다. 여기서 힐러리는 ‘6개의 핵심 행동지침(six key lines of action)’을 제시했습니다. 그 가운데 3개는 국제 관계에서의 주인공(actors)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3개는 무대(stages)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는 여러 양자(兩者)동맹국과의 관계를 강화한다는 것이죠. 아·태 지역에서는 일본·한국·호주 등이 양자동맹국들입니다. 이야기가 좀 벗어나지만, 지금 일본의 대외 전략은 그저 이 단계에 머물러 있어요. 미국과의 동맹 관계만 튼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선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둘째는 중국 등 새로 떠오르는 강국들과의 관계를 심화한다는 것입니다. 소련이 없어진 자리에 중국이 떠오르고 있는데, 중국이 만일 미국이 바라는 문명 표준으로 변화해 올 수 있다면 파트너로 맞이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는 유연한 입장입니다.
셋째는 지역적 다자(多者)기구들과의 관계 확대입니다.
넷째는 무역과 투자를 확대한다는 경제 중시 정책입니다.
다섯째는 경제 무대에서 판을 짜려면 군사 무대의 비중을 계속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태 공간에서의 전통적 군사질서보다 훨씬 더 유연하게, 경제적으로 효율성이 있으면서 군사적으로 신속히 움직일 수 있는 방식으로 군사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정치제도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형태의 질서를 건축하는 것이 아·태 전체의 질서 운영에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고민
―힐러리가 그런 방침을 밝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닙니까?
“그냥 상식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죠. 우리는 아직도 국제 관계에 어떤 일이 생기면 대개 양자적(兩者的)으로, 평면적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미·일 관계든, 미·중 관계든, 그런 식으로만 보려고 들어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짜려는 판은 냉전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위의 6개 방침을 가지고 전체적 구조라는 청사진을 그려나가려는 것이며, 따라서 전보다 훨씬 더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중국의 21세기 대외 전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지금 중국은 두세 가지 큰 도전에 당면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와 같은 고도 경제성장을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느냐,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가 그런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점이죠.
가령 한국은 1960~70년대의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1980년대에 민주화 과정을 겪었는데, 현재 1인당 GDP가 5000~6000달러 선인 중국이 2020년경 1인당 1만 달러 선을 넘는 이른바 전면적 소강(小康)사회로 넘어간다면 정치·사회적 질서는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또 하나를 더 들자면, 중국이 그 같은 성장에 맞추어 글로벌한 차원에서 스스로의 권리·의무를 어떻게 조정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져야 할 책임이 그만큼 커지겠죠.
단기적 전망만 해도 2015년이면 중국 GDP는 대략 11조 달러 선으로 일본의 2배에 이를 것이며, 2022년쯤에는 미국(현재 15조 달러, 2015년 18조 달러)을 따라잡을 것입니다.
이런 전망에 맞추어 중국은 ‘신형 국제 관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시진핑(習近平)이 몇 차례 이 말을 썼는데, 여기서 상정되는 관계의 공간은 크게 네 부류입니다.
첫째가 신형 대국 관계, 즉 미국과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주변 관계, 즉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의 관계라 할 수 있죠. 셋째는 지구상 발전도상국들 전반과의 관계이고, 넷째는 지역 다자기구들과의 관계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신형 대국 관계죠. 이 말은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되기 전인 2011년 부주석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젠 공식 정책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그것의 3원칙을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지난 9월 20일 워싱턴 방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연설에서 밝혔습니다. 첫째, 불충돌 불대항, 즉 미국과 중국은 서로 (군사적으로) 맞싸워서는 안 된다. 둘째, 상호존중. 셋째, 서로 유익하도록 협력(win-win cooperation)한다. 이 3원칙을 구체화함에 있어서 왕 부장은 미국과 아·태 공간에서의 협력 강화에 중점을 두겠다고 했습니다.”
10년 內 美·中 全面충돌 없을 것
―현실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재균형론과 중국의 신형 대국 관계론이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중 관계에 대한 우리 국내의 전망은 대개 세 부류로 나뉩니다. 양국은 근본적 대립 관계이기 때문에 살얼음판과 같아서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견해와, 양국 경제의 상호의존성이 이미 대단히 커졌기 때문에 충돌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견해, 그리고 좀 더 복잡하게 생각하는 견해로, 양국 관계는 예단하기 어려우며, 양국 간 가치 공유가 어느 정도로 진전될 것이냐에 따라 충돌이냐 협력·공생이냐 갈림길을 맞게 되리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론적·관념적 이야기이고, 구체적으로 중국 정책결정권자들의 이야기를 봐야 합니다. 시진핑이 18차 당대회 이래 줄곧 이야기하는 것을 봐도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역시 ‘선(先)경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이래 국가목표라 할 소강사회의 건설을 1인당 GDP 1만 달러 이상의 경제라고 본다면, 지금 5000~6000달러인 경제를 거기까지 올리는 것이 우선이고, 그때까지는 신형 대국 관계로 간다는 것입니다.
왕이 외교부장은 브루킹스 연설에서 ‘세계사에서 기존질서 주도 국가에 도전하는 신흥대국이 나타난 것이 15차례였는데, 그중 11차례는 충돌했다’면서, 지금 미국과 중국은 충돌하지 않는 ‘신형’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진핑이 말하는 ‘화평 발전’을 위해서는 미국과 전면적으로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적어도 향후 10여 년간 미·중의 군사적 전면충돌 위험성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전통적, 냉전적 시각으로 과거의 미·소 대립 관계 보듯이 한다면 오판할 수 있습니다. 군사적 공간에서는 ‘불충돌 불대항’이죠. 물론 어느 시기가 지난 이후에 어떻게 될지를 예단하기는 곤란하지만요.
그러나 중국이 상호존중하자고 하는 다른 무대들, 예컨대 경제 무대에서만 해도 각자의 카드가 있기 때문에 서로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전통적인 군사·경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무대들, 이를테면 환경, 문화, 지식 등 다른 무대들, 특히 새로운 표준을 설정해야 하는 무대들에서는 중국도 쉽사리 양보할 수 없다는 자세로 나갈 것이고, 따라서 미·중이 치열한 경쟁과 각축을 벌일 거라고 봐야 합니다.
미·중 관계가 무대에 따라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므로, 단순하게 요약해서 보려는 것은 곤란합니다.”
美, 中·日분쟁 개입 안 할 것
―미·중 관계 다음으로 중국이 그리는 ‘주변 관계’는 어떤 모습입니까?
“왕이 부장은 연설에서, 중국은 아·태 공간에서 미국의 전통적·현실적 이익을 존중할 테니, 미국도 이곳에서 중국의 핵심 이익을 존중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예를 들면서 그는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는 민감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언급하지 않았으나, 대만은 중국의 주권·영토에 관한 문제이니 중국 입장을 존중해 달라고 했고, 특이하게 북핵 문제도 이 범주에 넣어, 미·중이 협력해 풀어보자고 했습니다.
중국의 ‘주변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일본과의 관계입니다. 중국의 생각은 이럴 겁니다. 즉 중·일 관계가 만일 갈등으로 치달을 경우, 미국이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 한, 중국은 상당히 강한 입장을 밀고 나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중국이나 일본이 서로 일정한 착각을 갖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가령 센카쿠 열도에서 중·일 충돌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을 상정해 본다면, 일본은 미국을 확실히 껴안음으로써 미국이 자신의 일처럼 전면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센카쿠 열도 문제에 대한 3원칙, 즉 ①행정 관리의 권한은 일본에 있다 ②영토·주권 문제는 미국이 누구의 편을 들지 않는다 ③외교 협상으로 원만히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부터 견지해 오고 있습니다. 중국은 미국이 그런 원칙에 따라 중·일 분쟁에 너무 깊이 개입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합니다.
미·중 관계는 1972년 이전까지는 적대 관계였습니다. 미국에 중국은 ‘에너미(enemy)’, 즉 ‘적(敵)’이었죠. 1972년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통한 화해 이후 그것은 ‘애드버서리(adversary)’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생사(生死)를 결판하는 적이 아니라, 경기의 상대편 정도의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적으로 되돌아가느냐 아니면 친구(friend)로 가느냐가 관심사죠.
미국으로서는, 중국이 미국의 친구가 되려면 가치와 제도에서 미국과 비슷하게 접근해 와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도 사실은 미국 위주의 스탠더드 아니냐’고 내심 생각할 것이고, 더 이상 ‘미국이 갑(甲), 중국이 을(乙)’이 아닌 ‘제3의 표준’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따라서 미·중이 완전히 친구로 가기는 쉽지는 않겠지만, 과연 어떻게 될지, 큰 실험을 21세기에 겪게 될 겁니다.
요약하면, 미·중을 적대적(敵對的) 관계로 전망할 경우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의외로 클지 모르고, 친구가 될 거라고 봤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군사적으로 충돌하지 않되, 경제를 비롯한 다른 무대들에서는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다양한 모습을 보일 것이므로, 무대에 따라 우리도 조심스레 대비해야 합니다.”
美, 日에 ‘주니어 파트너’ 역할 기대해
―미국과 중국이 서로 직접 상대방에 대해 어떤 수를 두려고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아태(亞太)지역에서 미·중 모두에 가장 중요한 제3의 요인은 역시 일본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겠지요.
“그렇습니다. 미·중 두 설계자가 서로 합의되지 않은 다른 설계도로 동아시아의 판을 짜려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미국은 동맹 관리를 어떻게 해야 아·태 공간에서 주(主) 설계자로 계속 남을 것이냐가 최대 관심사일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동맹국 다루기가 중요합니다.
미·일은 1997년 개정된 안보협력지침을 재개정하기 위해 지난 10월 3일 도쿄에서 양국 외교·국방장관이 참여한 이른바 ‘2+2’ 회담을 가졌는데, 이 회담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배경 브리핑을 살펴보면 일본에 대한 미국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그때는 미국이 신흥대국이었죠. 북미 대륙을 서쪽으로 관통하고 처음으로 아시아·태평양 공간에 들어왔을 때, 조선에서는 이미 청(淸)이 떨어져 나가고, 러시아마저 일본에 패전한 상황에서 미국은 태프트(Taft)-가쓰라(桂) 협약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배타적 영향력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100년 지난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미·소 중심의 냉전 질서에서 소련이 주저앉고, 대신 중국이 신흥대국으로 등장했죠.
미국은 글로벌 세력으로서 아·태 질서를 주도하려고 할 때 일본의 역할에 어디까지 임무를 부여할 것이냐가 당면 과제입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직후 일본을 응징하기 위해 군사력과 돈을 없애서 완전히 불구(不具)국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금방 냉전 질서가 전개되면서 소련을 적대하려니까, 일본에 대해 군사력 완전 폐지가 아니라 자위대를 유지하도록 하고, 재벌 완전 해체가 아니라 일본 경제를 전후 폐허에서 회복시키는 길로 밀어주었습니다.
지금 소련은 없어지고 중국이 신흥대국으로 등장한 마당에, 미국으로서는 미·중 관계에 비추어 미·일 동맹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데, 우선은 미·중 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미국에 중국은, 냉전처럼 적대 관계는 아니지만, 친구로까지 가기엔 공유 가치의 확대가 쉽지 않은 관계입니다.
미국은 중동전 이후 군사비를 감축하는 상황을 맞아, 아태 지역에서 정치적 주도권은 전처럼 유지하기를 희망하지만, 경제적 부담은 가급적 덜면서 효율적으로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미국이 일본이란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경제적으로 아·태 질서 유지 비용을 일본이 최대한 부담하게 하면서도 군사적으로 갈등을 유발하지 않을 정도의 주니어 파트너로서 남게 하여 최종 결정권은 미국이 갖도록 함으로써,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최종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합니다.”
日의 발상력은 19세기 수준
―미국과 중국의 그러한 판 짜기에 대한 일본의 대응 태세는 어떻게 봅니까.
“일본은 지금까지 중국의 군사력을 내심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공식 발표한 금년도 국방비는 1100억 달러이고, 미국 국방부는 이것이 실제로는 2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봅니다만, 액면 그대로 1100억 달러라고 해도 일본 600억 달러의 두 배입니다<그림 2> (한국의 국방비는 350억 달러). 이런 추세가 한두 해가 아니고 앞으로 계속 간다면 일본에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으로서는 경제적으로 ‘잃어버린 20년’에 중국의 정치·경제·군사적 부상까지,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친 딜레마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 나갈 것인지가 최대의 과제일 겁니다.
그런데 이 딜레마를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발상력은 내가 보기에 여전히 19세기적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본의 비극이지요.
19세기에 서양의 근대 국제질서가 동아시아에 다가왔을 때, 동아시아 국가들의 생존전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은 《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예의만 찾고 있을 것이냐. 4000년래의 동아시아 질서가 뒤집히고 있는데, 살아남으려면 균세(均勢)와 자강(自强)을 빨리 챙겨라. 자강이 빨리 안 되면 균세라도 서둘러라’고 충고했습니다.
경제건설을 빨리 하지 못한다면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정치의 원리라도 빨리 파악하고 대처하라는 말이었죠. 그가 중국에 대해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조선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언을 해준 셈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자강은커녕 구체적으로 누구와 손잡고 어떻게 균세를 도모할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자강과 균세에 단기적으로 성공했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방어적 민족주의에서 공격적·제국적 민족주의로 전환하여, 결국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패전을 겪지 않았습니까.
10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국가안보전략’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마련하고 자위력 증강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짜려고 합니다. 총리실이 직접 주관하여 두 개의 간담회를 요즘 계속 열고 있는데, 하나는 국가안보전략과 군사력, 또 하나는 집단 자위와 연관된 법적 기반의 문제를 다룹니다. 간담회가 어떤 최종 결과를 내놓을지는 우선 외무성과 자위대 등이 공식 토론자료로 내놓은 보고서들을 살펴보면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첫째, 동아시아에서 힘의 배분이 바뀌고 있는데 우리(일본)는 힘을 어떻게 키울 것이냐 하는 자강의 과제를 지적하고 있고, 둘째로는 우리(일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길은 일·미(日美)동맹 강화가 가장 핵심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 신흥대국(emerging power, 즉 중국)과의 파트너십(partnership) 도모를 이야기하는데, 일본은 19세기에 했던 그들의 전략, 즉 지역적·지구적 차원에서 가장 센 국가와 동맹을 맺고(英日동맹) 나머지 국가들을 상대하면 된다는 생각의 연장선, 다시 말해 미국만 확실히 잡으면 중국과 한국을 상대해 나가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설계도로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아베 총리가 지난 7월 싱가포르 방문 때 행한 연설에서는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과는 같이 가자고 역설하면서도,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한 문장 정도로 국한했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가치와 제도를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야 협력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사실상 선을 긋는 태도를 보였고, 한국에 대해서는 역사 문제에 우리(일본)는 할 만큼 했으니 한국 태도를 기다려보겠다는 식의 입장이었습니다.
일본이 21세기 동아시아 질서를 건축하려는 미국이나 중국의 판 짜기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19세기 근대 국제질서나 20세기 냉전질서에서보다는 좀 더 복잡하게 생각해야 할 텐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경제를 금융・재정・성장전략이라는 ‘3개의 화살’로 풀어가려 한다면, 정치·군사 공간에서의 비용 지출을 최소화할 방식으로 가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미일동맹이라는 바탕만으로는 굉장히 어렵다고 봅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영·일(英日)동맹에 의존하면서, 이웃 한 나라(조선)는 식민지로 병합했고, 다른 한 나라(중국)는 침공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미국만 붙잡는 것 갖고는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에 살아남기 어려울 겁니다. 미국만 붙잡지 말고, 한국에 대해 과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첫 단추를 과감히 꿰고, 일·중 관계도 원만히 끌고 가면서 3개의 화살을 잘 관리하는 것이 21세기 일본의 생존방식일 텐데, 그렇게 못 보고 있습니다.
일본 총리가 건축가 후지모토 소스케 같으면 좋을 텐데, 일본 정치인들의 시공간(時空間) 상상력이 이렇게 빈약한가 싶어 안타깝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시공간 상상력으로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를 어떻게 영위해 나가겠습니까. 그러니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 선생이 100년 전 당시의 일본 정치인들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새삼 떠오르지 않을 수 없지요.”
다섯 가지 그물
하 교수는 지난 9월 26일 조찬 강연을, 안중근 의사의 한시(漢詩) 옥중(獄中) 유묵(遺墨) 한 편(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었다.
東洋大勢思杳玄(동양대세사묘현)
有志男兒豈安眠(유지남아기안면)
和局未成猶慷慨(화국미성유강개)
政略不改眞可憐(정략불개진가련)
동아시아 대세를 생각하니 암담하도다,
뜻있는 남아가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으랴.
화평한 판을 이루지 못하니 원통하고 슬프다,
(일본)정략이 고쳐지지 않으니 참으로 애달프도다.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에 관한 미국, 중국, 일본의 현재 입장을 살펴보았습니다마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살길은 무엇입니까. 그냥 친미(親美)에만 머물러서도 곤란할 것 같고, 그렇다고 미국을 버리고 친중(親中) 일변도로 기울어져서도 안 될 것 같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 전망은 요원할뿐더러, 지금처럼 가다가는 자칫하면 한국이 언젠가 일본과 충돌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듭니다만….
“한국은 미국·중국·일본·러시아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데, 그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오히려 그들 것보다 훨씬 복잡한 설계도 없이는 우리가 설 땅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덩치는 작아도 안목은 훨씬 넓고 길게 보는 설계를 해야 합니다. 판이 바뀌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한가롭게 있을 때는 아닙니다. 나는 종종 다섯 가지의 그물을 복합적으로 짜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첫째로, 미·중이 짜는 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이 최대의 과제이고, 그것에 보족적(補足的)으로 한·미·일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남북 관계를 풀어나갈 방도를 찾아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셋째로는, 대국들은 자강만으로도 살아나가기가 쉽지만, 크기가 작은 한국은 자강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구 전체를 넓게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해야 합니다.
넷째는 사이버(cyber) 공간에서 우리가 두각을 나타내도록 매진하는 일이고, 다섯째는 국내적으로 소모적 대결을 지양하고 개혁과 통합을 이루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들 다섯 가지 그물을 어떻게 잘 짜느냐가 우리에게 굉장히 큰 숙제입니다.
첫째 과제부터 봅시다. 친미냐 친중이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소박한 생각일 뿐이고, 미국도 품고 중국도 품자는 식의 이야기보다도 훨씬 더 나아간 고민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그리는 동아시아 신질서의 설계도가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이미 한·미의 전통적 동맹 관계와 한·중의 신흥 관계 가운데서 택일하고 나머지를 포기하는 식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현실에 와 있습니다.
미·중은 군사적으로는 적어도 향후 10년 내에 충돌하지 않을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협력해 나갈 것이고, 나머지 다른 분야들에서는 치열한 각축을 벌일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미국이냐 중국이냐 택일한다는 생각도 구닥다리이고, 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위험을 피해 나간다(hedge)는 발상도 비현실적입니다.
한국版 滿鐵 조사부 만들자
100년 전, 일본이라는 조그만 섬나라가 거대한 중국을 쳐들어가기 위해 ‘만철(滿鐵) 조사부’란 걸 만들었습니다. 가장 많을 때는 2천명의 우수 두뇌들이 팀으로 움직였던, 일본의 20세기 최대의 싱크탱크(think-tank)였고, 오늘의 일본을 형성한 토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학계, 언론, 관(官)이 다 보따리장사 수준에 머물러 있고, 그나마 재계가 좀 나은 편일 뿐입니다.
100년 전 일본의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되었던 ‘만철 조사부’를 우리가 오늘날 따라 하기에는 이름이나 발상부터가 좋지 않다고 한다면, 가령 좋은 의미의 한국판(版) ‘유라시안(Eurasian) 철도 조사부’ 같은 것은 어떻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우수한 인력들을 대거 투입하여 방대한 연구·조사를 하고, 동아시아 신질서를 어떻게 건축해 나가야 우리의 살길과 공간의 확보는 물론 다른 모든 나라가 함께 조화롭고 평화롭게 발전해 나갈 수 있겠는지, 멋진 그림을 그려내야 합니다.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신질서 설계도를 미국이나 중국, 일본에 가서 찾으려 할 게 아니라 한국에 가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투자를 해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으로 갈등하게 되면 우리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겁니다. 하지만 당분간 그러지 않을 유예기간 동안에 우리가 미·중의 군사적 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역할 공간을 찾고 동아시아 신질서가 바람직한 모습으로 건축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제 분야는 물론, 그 외의 신흥 무대들, 가령 문화, 환경, 지식 등의 무대에서는 우리가 굉장히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런 무대들은 단순히 미국이나 중국에 줄을 서는 무대가 아니고, 그것 때문에 오해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은 어차피 군사나 경제만으로는 우뚝 설 수 없으며, 따라서 다른 무대들에서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보따리장사 식으로 해서는 가령 문화 무대에서도 소박한 한류(韓流)에 자족하는 선을 넘기 어려울 겁니다.”
일본이 첫 단추 꿰어야
―미·중이 짜는 판 속에서 우리의 살길도 중요하지만, 한·일 관계도 중요한데,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지금 한·일 문제는 남북한 사이의 문제보다 훨씬 더 풀기가 어렵게 돼 있습니다. 미국은 미·중 신형 대국 관계 속에서 한·미·일을 엮으려 하고, 우리도 한·미·일이 중국과 적대적으로 가지 않는 한 나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자국 중심의 좁은 차원에서 21세기 생존번영 전략을 짤 경우, 한·일 문제는 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독도, 종군위안부, 역사교과서 등 여러 쟁점을 일본이 그냥 덮어두기만 해도 다행일 텐데, 자신들의 국내정치 상황 때문에 자꾸만 자국중심주의로 재해석하려고 하니 한국으로서는 용인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돌파구를 어떻게 찾을 것이냐? 일본이 첫 단추를 꿸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현안 문제들이 일본의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지나치게 정치화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일본이 보여야 할 진정성의 부분이죠. 일본은 종종 ‘우리(일본)는 충분히 노력했는데…’라고 말하지만, 이런 문제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주관적 느낌보다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겁니다.
둘째로, 한·일 관계나 일·중 관계도 미국이 중간 중재 입장을 서겠다는 정도에서 한·일 또는 중·일 쌍방이 문제를 키우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가령 일·중이 ‘무력(武力) 불사(不辭)’ 같은 언사를 주고받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한·중·일 모두가, 도저히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은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도록 동결시켜 두고, 서로 갈등하지 않는 나머지 무대들에서의 협력을 최대한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현재 동아시아의 상황을 말하자면, 경제 분야 정도에서 각 나라가 상생 윈-윈(win-win)하려 할 뿐, 다른 분야에서는 가령 ‘동아시아 사회’조차 제대로 안 만들어져 있다고 하겠고, 하물며 ‘동아시아 공동체’란 것은 전혀 실체가 없는 개념에 불과합니다.
유럽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라의 국민이면서 유럽이라는 하나의 큰 덩치의 일원(一員)이기도 하다는 이른바 복합 정체성(正體性)을 시도해 온 지 몇십 년이 되는 것과 달리, 동아시아 사람들은 아직 각각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일원이라는 ‘2중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갈등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현안들을 당장 풀기는 어렵다는 것에 대해 여러 나라가 솔직하게 합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문제들은 자꾸 건드려서 악화시키지 말고 뒷전으로 밀어두고, 협력 가능한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조금씩 복합 정체성 인식의 확산으로 나아간다면, 지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그때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日이 말하는 ‘적극적 평화’의 실체는?
―일본 아베 내각이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과 군사력 강화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일본은 19세기 자강과 균세에서, 자강을 넘어서서 이웃나라들의 안정과 평화에 심대한 피해를 주는 잘못된 길을 걸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갖지 말라는 벌을 받았습니다. 다시 군사력을 키워도 과거와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느냐, 군사력을 어떻게 키우면 다시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 것이냐, 이런 문제들에 대해 세련된 준비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우려에 대해 일차적으로는 미국이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있어 왔지만, 만약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한·일 관계 또는 중·일 관계에서 권력각축적인 양상이 벌어진다면, 사태는 대단히 어려워질 겁니다. 그런 점에서 주변 세력들의 우려는 정당성이 있습니다. 일본은 ‘다른 나라들이 다 하는 것을 우리도 하려는 것인데, 왜 우리만 갖고 이러냐’고 하겠지만….
가상(假想)해 봅시다. 만약 일본의 국익, 즉 나라의 이익이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이익에도 굉장히 봉사하는 형태로 움직인다면, 가령 일본 군사력이 동아시아 평화군으로만 운용된다면, 그런 군사력의 강화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일본에서 그 같은 발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日의 집단적 自衛 주장이 박수 받지 못하는 이유
집단적 자위권의 개념에 대해 상대방이 불안해한다면 그걸 푸는 길은 뭘까요?
일본 정부는 ‘국제협조주의에 기반한 적극적 평화’를 추진한다고 말합니다. 평화 이론의 대가인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Johan Galtung)에 의하면, ‘소극적 평화’란 전쟁의 부재(不在) 상태인 반면, ‘적극적 평화’는 나와 타자의 이해(利害)가 하나 되도록 하는 사회적 통합을 통해 성취되는 평화라고 정의했는데, 일본이 말하는 ‘적극적 평화’는 그런 개념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진정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를 위한 집단 자위라면 모든 나라가 박수를 칠 텐데, 왜 박수가 없을까요?
첫째로, 일본이 말하는 집단 안보가 실제로 아·태 평화에 기여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누가 결정하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말과 행동에는 신뢰와 투명성이 부족합니다. 그만큼 한국과 중국의 불신을 푸는 일본의 비군사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일본의 군사력이 설혹 방위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일본 방위성/자위대 예산이 좋은 의도로 증가된다고 하더라도, 일본 자위대의 장기적 증강이 동아시아에 가져올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해 한국과 중국은 걱정할 겁니다. 그것이 전혀 불필요한 걱정이거나 오해라면, 그런 인식의 차이를 없애려는 일본의 노력이 시급한데, 그런 게 보이질 않아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주변국들의 논란 자체가 일본의 대외 역사의 과오를 반영하는 것인 만큼, 지금 일본에 ‘국가전략보고서’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일본 스스로 오해의 소지를 만드는 것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신뢰와 투명성을 강화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총동창회(회장 임성준)는 지난 9월 26일 아침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를 초청한 조찬 강연회를 열었다. 하 교수의 특강 제목은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과 한일 신시대의 모색’이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하 교수가 비춰 보인 첫 번째 슬라이드(사진)는, 그가 지난 8월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 옆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에서 보았다는 ‘올해의 퍼빌리언(Pavilion 2013)’으로, 일본인 건축가 후지모토 소스케(藤本壮介, 1971년생)의 작품이었다. 이 갤러리는 1년에 한 번씩 전 세계 건축가들 가운데 가장 창의적 상상력이 풍부한, 주목되는 한 사람을 선정하여 이곳에 전시용 (임시) 건축물을 짓게 하는데, 후지모토는 올해 13년째가 되는 이 ‘서펜타인 갤러리 퍼빌리언’의 초청 건축가로, 그것도 여기 초청된 건축가들 가운데 역대 최연소의 나이(42세)로 선정된 것이다.
하 교수가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말하기 위해 왜 이 젊은 일본 건축가 후지모토의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했는지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나는 하 교수의 9월 26일 강연 내용과 그가 평소 주장해 온 복합그물(complex network) 정책이 좀 더 널리 세상에 알려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후 10월 8일과 11월 4일, 이틀간 합쳐서 5시간여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다음은 그 내용들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東아시아 질서, 제5기 진입
―왜 ‘동아시아의 신질서 건축’을 말합니까?
“긴 역사를 요약해 보면, 지금 동아시아의 질서는 제5기라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秦)·한(漢) 통일 무렵부터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천하(天下)질서’가 2000년을 이어왔습니다. 그것이 제1기였다고 할 수 있죠. 그러다가 19세기 들어 유럽 중심의 근대 국제질서가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들어와 동아시아에서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와 만나는 게 제2기였습니다. 제3기는, 좀 빠른 속도로 유럽 근대 국제질서를 받아들인 일본이 짧은 시간 동안에 지역 제국주의 형태로 나갔던 20세기 전반(前半)이었습니다. 그 역사적 결과는 일본의 실패로 끝났습니다. 1945년 이후 미(美)·소(蘇) 중심의 냉전시대 질서가 반세기 이어졌던 것이 제4기였고, 지금은 냉전 이후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건축이 시작되는 제5기에 해당합니다.
이미 미국과 중국이 제5기 신질서 건축에 나서고 있는데, 한국은 같은 시공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최근 일어나는 변화의 의미를 잘 보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도 부족합니다. 그저 19세기 근대 국제질서의 연장 또는 소박한 탈(脱)냉전 시대의 시각으로 보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동아시아에서 상당히 복잡한 건축물이 설계되고 이미 건축 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차 하면 무대의 주인공 중 일부는 살아남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어요.
우리는 19세기 중반에 ‘천하질서’가 무너지고 제2기의 유럽 국제질서가 들어올 때 적응하지 못해 결국 나라를 잃었습니다. 제3기에도 일본 제국이 천년만년 갈 것으로 착각하고 친일(親日)을 했던 개인과 집단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지금 한반도 주변은 여전히 냉전시대적 질서가 남아 있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새로운 건축이 시작되고 있는데, 냉전적 질서로만 파악해서는 새 건축물 속에서 내 공간을 확보하기 어렵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하겠습니다.”
―동아시아 질서가 역사적으로 제5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결국 중국의 부상(浮上) 때문입니까.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GDP(국내총생산) 국가는 지난 50년간 일본이었습니다. 그 자리가 2010년 이후에 중국으로 바뀌고 일본은 GDP 3위 국가로 떨어졌습니다. 중국은 30년 전 GDP가 세계 9위였으나, 2000년에 세계 6위, 2005년 세계 5위, 2010년 세계 2위로 껑충껑충 뛰어올랐어요<그림 1>.”
―그러면 미국부터 보죠.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그리는 기본 설계도는 어떤 것입니까?
美의 東아시아 전략
“그것은 이른바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시(重視)하겠다는 재(再)균형론(rebalancing)입니다.
오바마 행정부 1기 때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였던 커트 캠벨(Kurt Campbell)은, 미국이 종래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다수의 국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특정 국가의 우월적 지위를 예방·저지하기 위해 서로 세력의 균형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19세기 이래의 국제정치적 원리 또는 정책)적 발상만으로는 21세기 새 외교정책을 준비하기 어렵고, 그 대신 균형을 이루어낼 수 있는 힘(power of balance)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의 힘도 전보다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국제 관계가 전개되는 무대도 훨씬 복잡해지고 있고, 연기력도 전쟁/평화라는 이분법(二分法)보다 훨씬 복잡하게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재균형론의 기본 문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2011년 11월 《포린 폴리시》에 기고했던 ‘미국의 태평양 세기(America’s Pacific Century)’입니다. 여기서 힐러리는 ‘6개의 핵심 행동지침(six key lines of action)’을 제시했습니다. 그 가운데 3개는 국제 관계에서의 주인공(actors)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3개는 무대(stages)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는 여러 양자(兩者)동맹국과의 관계를 강화한다는 것이죠. 아·태 지역에서는 일본·한국·호주 등이 양자동맹국들입니다. 이야기가 좀 벗어나지만, 지금 일본의 대외 전략은 그저 이 단계에 머물러 있어요. 미국과의 동맹 관계만 튼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선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뒤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둘째는 중국 등 새로 떠오르는 강국들과의 관계를 심화한다는 것입니다. 소련이 없어진 자리에 중국이 떠오르고 있는데, 중국이 만일 미국이 바라는 문명 표준으로 변화해 올 수 있다면 파트너로 맞이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는 유연한 입장입니다.
셋째는 지역적 다자(多者)기구들과의 관계 확대입니다.
넷째는 무역과 투자를 확대한다는 경제 중시 정책입니다.
다섯째는 경제 무대에서 판을 짜려면 군사 무대의 비중을 계속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태 공간에서의 전통적 군사질서보다 훨씬 더 유연하게, 경제적으로 효율성이 있으면서 군사적으로 신속히 움직일 수 있는 방식으로 군사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정치제도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형태의 질서를 건축하는 것이 아·태 전체의 질서 운영에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고민
―힐러리가 그런 방침을 밝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닙니까?
“그냥 상식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죠. 우리는 아직도 국제 관계에 어떤 일이 생기면 대개 양자적(兩者的)으로, 평면적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미·일 관계든, 미·중 관계든, 그런 식으로만 보려고 들어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짜려는 판은 냉전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위의 6개 방침을 가지고 전체적 구조라는 청사진을 그려나가려는 것이며, 따라서 전보다 훨씬 더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중국의 21세기 대외 전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지금 중국은 두세 가지 큰 도전에 당면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와 같은 고도 경제성장을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느냐,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가 그런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점이죠.
가령 한국은 1960~70년대의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1980년대에 민주화 과정을 겪었는데, 현재 1인당 GDP가 5000~6000달러 선인 중국이 2020년경 1인당 1만 달러 선을 넘는 이른바 전면적 소강(小康)사회로 넘어간다면 정치·사회적 질서는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또 하나를 더 들자면, 중국이 그 같은 성장에 맞추어 글로벌한 차원에서 스스로의 권리·의무를 어떻게 조정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져야 할 책임이 그만큼 커지겠죠.
단기적 전망만 해도 2015년이면 중국 GDP는 대략 11조 달러 선으로 일본의 2배에 이를 것이며, 2022년쯤에는 미국(현재 15조 달러, 2015년 18조 달러)을 따라잡을 것입니다.
이런 전망에 맞추어 중국은 ‘신형 국제 관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시진핑(習近平)이 몇 차례 이 말을 썼는데, 여기서 상정되는 관계의 공간은 크게 네 부류입니다.
첫째가 신형 대국 관계, 즉 미국과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주변 관계, 즉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의 관계라 할 수 있죠. 셋째는 지구상 발전도상국들 전반과의 관계이고, 넷째는 지역 다자기구들과의 관계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신형 대국 관계죠. 이 말은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되기 전인 2011년 부주석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젠 공식 정책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그것의 3원칙을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지난 9월 20일 워싱턴 방문 때 브루킹스 연구소 연설에서 밝혔습니다. 첫째, 불충돌 불대항, 즉 미국과 중국은 서로 (군사적으로) 맞싸워서는 안 된다. 둘째, 상호존중. 셋째, 서로 유익하도록 협력(win-win cooperation)한다. 이 3원칙을 구체화함에 있어서 왕 부장은 미국과 아·태 공간에서의 협력 강화에 중점을 두겠다고 했습니다.”
10년 內 美·中 全面충돌 없을 것
―현실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재균형론과 중국의 신형 대국 관계론이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중 관계에 대한 우리 국내의 전망은 대개 세 부류로 나뉩니다. 양국은 근본적 대립 관계이기 때문에 살얼음판과 같아서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견해와, 양국 경제의 상호의존성이 이미 대단히 커졌기 때문에 충돌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견해, 그리고 좀 더 복잡하게 생각하는 견해로, 양국 관계는 예단하기 어려우며, 양국 간 가치 공유가 어느 정도로 진전될 것이냐에 따라 충돌이냐 협력·공생이냐 갈림길을 맞게 되리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론적·관념적 이야기이고, 구체적으로 중국 정책결정권자들의 이야기를 봐야 합니다. 시진핑이 18차 당대회 이래 줄곧 이야기하는 것을 봐도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역시 ‘선(先)경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이래 국가목표라 할 소강사회의 건설을 1인당 GDP 1만 달러 이상의 경제라고 본다면, 지금 5000~6000달러인 경제를 거기까지 올리는 것이 우선이고, 그때까지는 신형 대국 관계로 간다는 것입니다.
왕이 외교부장은 브루킹스 연설에서 ‘세계사에서 기존질서 주도 국가에 도전하는 신흥대국이 나타난 것이 15차례였는데, 그중 11차례는 충돌했다’면서, 지금 미국과 중국은 충돌하지 않는 ‘신형’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진핑이 말하는 ‘화평 발전’을 위해서는 미국과 전면적으로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적어도 향후 10여 년간 미·중의 군사적 전면충돌 위험성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전통적, 냉전적 시각으로 과거의 미·소 대립 관계 보듯이 한다면 오판할 수 있습니다. 군사적 공간에서는 ‘불충돌 불대항’이죠. 물론 어느 시기가 지난 이후에 어떻게 될지를 예단하기는 곤란하지만요.
그러나 중국이 상호존중하자고 하는 다른 무대들, 예컨대 경제 무대에서만 해도 각자의 카드가 있기 때문에 서로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전통적인 군사·경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무대들, 이를테면 환경, 문화, 지식 등 다른 무대들, 특히 새로운 표준을 설정해야 하는 무대들에서는 중국도 쉽사리 양보할 수 없다는 자세로 나갈 것이고, 따라서 미·중이 치열한 경쟁과 각축을 벌일 거라고 봐야 합니다.
미·중 관계가 무대에 따라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므로, 단순하게 요약해서 보려는 것은 곤란합니다.”
美, 中·日분쟁 개입 안 할 것
―미·중 관계 다음으로 중국이 그리는 ‘주변 관계’는 어떤 모습입니까?
“왕이 부장은 연설에서, 중국은 아·태 공간에서 미국의 전통적·현실적 이익을 존중할 테니, 미국도 이곳에서 중국의 핵심 이익을 존중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예를 들면서 그는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는 민감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언급하지 않았으나, 대만은 중국의 주권·영토에 관한 문제이니 중국 입장을 존중해 달라고 했고, 특이하게 북핵 문제도 이 범주에 넣어, 미·중이 협력해 풀어보자고 했습니다.
중국의 ‘주변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일본과의 관계입니다. 중국의 생각은 이럴 겁니다. 즉 중·일 관계가 만일 갈등으로 치달을 경우, 미국이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 한, 중국은 상당히 강한 입장을 밀고 나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중국이나 일본이 서로 일정한 착각을 갖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가령 센카쿠 열도에서 중·일 충돌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을 상정해 본다면, 일본은 미국을 확실히 껴안음으로써 미국이 자신의 일처럼 전면적으로 개입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센카쿠 열도 문제에 대한 3원칙, 즉 ①행정 관리의 권한은 일본에 있다 ②영토·주권 문제는 미국이 누구의 편을 들지 않는다 ③외교 협상으로 원만히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부터 견지해 오고 있습니다. 중국은 미국이 그런 원칙에 따라 중·일 분쟁에 너무 깊이 개입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합니다.
미·중 관계는 1972년 이전까지는 적대 관계였습니다. 미국에 중국은 ‘에너미(enemy)’, 즉 ‘적(敵)’이었죠. 1972년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통한 화해 이후 그것은 ‘애드버서리(adversary)’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생사(生死)를 결판하는 적이 아니라, 경기의 상대편 정도의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적으로 되돌아가느냐 아니면 친구(friend)로 가느냐가 관심사죠.
미국으로서는, 중국이 미국의 친구가 되려면 가치와 제도에서 미국과 비슷하게 접근해 와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것도 사실은 미국 위주의 스탠더드 아니냐’고 내심 생각할 것이고, 더 이상 ‘미국이 갑(甲), 중국이 을(乙)’이 아닌 ‘제3의 표준’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따라서 미·중이 완전히 친구로 가기는 쉽지는 않겠지만, 과연 어떻게 될지, 큰 실험을 21세기에 겪게 될 겁니다.
요약하면, 미·중을 적대적(敵對的) 관계로 전망할 경우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의외로 클지 모르고, 친구가 될 거라고 봤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군사적으로 충돌하지 않되, 경제를 비롯한 다른 무대들에서는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다양한 모습을 보일 것이므로, 무대에 따라 우리도 조심스레 대비해야 합니다.”
美, 日에 ‘주니어 파트너’ 역할 기대해
―미국과 중국이 서로 직접 상대방에 대해 어떤 수를 두려고 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아태(亞太)지역에서 미·중 모두에 가장 중요한 제3의 요인은 역시 일본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겠지요.
“그렇습니다. 미·중 두 설계자가 서로 합의되지 않은 다른 설계도로 동아시아의 판을 짜려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미국은 동맹 관리를 어떻게 해야 아·태 공간에서 주(主) 설계자로 계속 남을 것이냐가 최대 관심사일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동맹국 다루기가 중요합니다.
미·일은 1997년 개정된 안보협력지침을 재개정하기 위해 지난 10월 3일 도쿄에서 양국 외교·국방장관이 참여한 이른바 ‘2+2’ 회담을 가졌는데, 이 회담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배경 브리핑을 살펴보면 일본에 대한 미국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그때는 미국이 신흥대국이었죠. 북미 대륙을 서쪽으로 관통하고 처음으로 아시아·태평양 공간에 들어왔을 때, 조선에서는 이미 청(淸)이 떨어져 나가고, 러시아마저 일본에 패전한 상황에서 미국은 태프트(Taft)-가쓰라(桂) 협약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배타적 영향력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100년 지난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미·소 중심의 냉전 질서에서 소련이 주저앉고, 대신 중국이 신흥대국으로 등장했죠.
미국은 글로벌 세력으로서 아·태 질서를 주도하려고 할 때 일본의 역할에 어디까지 임무를 부여할 것이냐가 당면 과제입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직후 일본을 응징하기 위해 군사력과 돈을 없애서 완전히 불구(不具)국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금방 냉전 질서가 전개되면서 소련을 적대하려니까, 일본에 대해 군사력 완전 폐지가 아니라 자위대를 유지하도록 하고, 재벌 완전 해체가 아니라 일본 경제를 전후 폐허에서 회복시키는 길로 밀어주었습니다.
지금 소련은 없어지고 중국이 신흥대국으로 등장한 마당에, 미국으로서는 미·중 관계에 비추어 미·일 동맹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데, 우선은 미·중 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미국에 중국은, 냉전처럼 적대 관계는 아니지만, 친구로까지 가기엔 공유 가치의 확대가 쉽지 않은 관계입니다.
미국은 중동전 이후 군사비를 감축하는 상황을 맞아, 아태 지역에서 정치적 주도권은 전처럼 유지하기를 희망하지만, 경제적 부담은 가급적 덜면서 효율적으로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미국이 일본이란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경제적으로 아·태 질서 유지 비용을 일본이 최대한 부담하게 하면서도 군사적으로 갈등을 유발하지 않을 정도의 주니어 파트너로서 남게 하여 최종 결정권은 미국이 갖도록 함으로써,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최종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합니다.”
日의 발상력은 19세기 수준
―미국과 중국의 그러한 판 짜기에 대한 일본의 대응 태세는 어떻게 봅니까.
“일본은 지금까지 중국의 군사력을 내심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공식 발표한 금년도 국방비는 1100억 달러이고, 미국 국방부는 이것이 실제로는 2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봅니다만, 액면 그대로 1100억 달러라고 해도 일본 600억 달러의 두 배입니다<그림 2> (한국의 국방비는 350억 달러). 이런 추세가 한두 해가 아니고 앞으로 계속 간다면 일본에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으로서는 경제적으로 ‘잃어버린 20년’에 중국의 정치·경제·군사적 부상까지,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친 딜레마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 나갈 것인지가 최대의 과제일 겁니다.
그런데 이 딜레마를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발상력은 내가 보기에 여전히 19세기적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본의 비극이지요.
19세기에 서양의 근대 국제질서가 동아시아에 다가왔을 때, 동아시아 국가들의 생존전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은 《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예의만 찾고 있을 것이냐. 4000년래의 동아시아 질서가 뒤집히고 있는데, 살아남으려면 균세(均勢)와 자강(自强)을 빨리 챙겨라. 자강이 빨리 안 되면 균세라도 서둘러라’고 충고했습니다.
경제건설을 빨리 하지 못한다면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정치의 원리라도 빨리 파악하고 대처하라는 말이었죠. 그가 중국에 대해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조선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언을 해준 셈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자강은커녕 구체적으로 누구와 손잡고 어떻게 균세를 도모할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자강과 균세에 단기적으로 성공했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방어적 민족주의에서 공격적·제국적 민족주의로 전환하여, 결국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패전을 겪지 않았습니까.
10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국가안보전략’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마련하고 자위력 증강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짜려고 합니다. 총리실이 직접 주관하여 두 개의 간담회를 요즘 계속 열고 있는데, 하나는 국가안보전략과 군사력, 또 하나는 집단 자위와 연관된 법적 기반의 문제를 다룹니다. 간담회가 어떤 최종 결과를 내놓을지는 우선 외무성과 자위대 등이 공식 토론자료로 내놓은 보고서들을 살펴보면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첫째, 동아시아에서 힘의 배분이 바뀌고 있는데 우리(일본)는 힘을 어떻게 키울 것이냐 하는 자강의 과제를 지적하고 있고, 둘째로는 우리(일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길은 일·미(日美)동맹 강화가 가장 핵심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 신흥대국(emerging power, 즉 중국)과의 파트너십(partnership) 도모를 이야기하는데, 일본은 19세기에 했던 그들의 전략, 즉 지역적·지구적 차원에서 가장 센 국가와 동맹을 맺고(英日동맹) 나머지 국가들을 상대하면 된다는 생각의 연장선, 다시 말해 미국만 확실히 잡으면 중국과 한국을 상대해 나가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설계도로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아베 총리가 지난 7월 싱가포르 방문 때 행한 연설에서는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과는 같이 가자고 역설하면서도,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한 문장 정도로 국한했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는 가치와 제도를 공유하는 부분이 늘어야 협력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사실상 선을 긋는 태도를 보였고, 한국에 대해서는 역사 문제에 우리(일본)는 할 만큼 했으니 한국 태도를 기다려보겠다는 식의 입장이었습니다.
일본이 21세기 동아시아 질서를 건축하려는 미국이나 중국의 판 짜기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19세기 근대 국제질서나 20세기 냉전질서에서보다는 좀 더 복잡하게 생각해야 할 텐데,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경제를 금융・재정・성장전략이라는 ‘3개의 화살’로 풀어가려 한다면, 정치·군사 공간에서의 비용 지출을 최소화할 방식으로 가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미일동맹이라는 바탕만으로는 굉장히 어렵다고 봅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영·일(英日)동맹에 의존하면서, 이웃 한 나라(조선)는 식민지로 병합했고, 다른 한 나라(중국)는 침공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미국만 붙잡는 것 갖고는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에 살아남기 어려울 겁니다. 미국만 붙잡지 말고, 한국에 대해 과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첫 단추를 과감히 꿰고, 일·중 관계도 원만히 끌고 가면서 3개의 화살을 잘 관리하는 것이 21세기 일본의 생존방식일 텐데, 그렇게 못 보고 있습니다.
일본 총리가 건축가 후지모토 소스케 같으면 좋을 텐데, 일본 정치인들의 시공간(時空間) 상상력이 이렇게 빈약한가 싶어 안타깝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시공간 상상력으로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를 어떻게 영위해 나가겠습니까. 그러니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 선생이 100년 전 당시의 일본 정치인들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새삼 떠오르지 않을 수 없지요.”
다섯 가지 그물
하 교수는 지난 9월 26일 조찬 강연을, 안중근 의사의 한시(漢詩) 옥중(獄中) 유묵(遺墨) 한 편(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었다.東洋大勢思杳玄(동양대세사묘현)
有志男兒豈安眠(유지남아기안면)
和局未成猶慷慨(화국미성유강개)
政略不改眞可憐(정략불개진가련)
동아시아 대세를 생각하니 암담하도다,
뜻있는 남아가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으랴.
화평한 판을 이루지 못하니 원통하고 슬프다,
(일본)정략이 고쳐지지 않으니 참으로 애달프도다.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에 관한 미국, 중국, 일본의 현재 입장을 살펴보았습니다마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살길은 무엇입니까. 그냥 친미(親美)에만 머물러서도 곤란할 것 같고, 그렇다고 미국을 버리고 친중(親中) 일변도로 기울어져서도 안 될 것 같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 전망은 요원할뿐더러, 지금처럼 가다가는 자칫하면 한국이 언젠가 일본과 충돌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듭니다만….
“한국은 미국·중국·일본·러시아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데, 그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오히려 그들 것보다 훨씬 복잡한 설계도 없이는 우리가 설 땅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덩치는 작아도 안목은 훨씬 넓고 길게 보는 설계를 해야 합니다. 판이 바뀌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한가롭게 있을 때는 아닙니다. 나는 종종 다섯 가지의 그물을 복합적으로 짜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첫째로, 미·중이 짜는 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것이 최대의 과제이고, 그것에 보족적(補足的)으로 한·미·일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남북 관계를 풀어나갈 방도를 찾아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셋째로는, 대국들은 자강만으로도 살아나가기가 쉽지만, 크기가 작은 한국은 자강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구 전체를 넓게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해야 합니다.
넷째는 사이버(cyber) 공간에서 우리가 두각을 나타내도록 매진하는 일이고, 다섯째는 국내적으로 소모적 대결을 지양하고 개혁과 통합을 이루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들 다섯 가지 그물을 어떻게 잘 짜느냐가 우리에게 굉장히 큰 숙제입니다.
첫째 과제부터 봅시다. 친미냐 친중이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소박한 생각일 뿐이고, 미국도 품고 중국도 품자는 식의 이야기보다도 훨씬 더 나아간 고민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그리는 동아시아 신질서의 설계도가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이미 한·미의 전통적 동맹 관계와 한·중의 신흥 관계 가운데서 택일하고 나머지를 포기하는 식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현실에 와 있습니다.
미·중은 군사적으로는 적어도 향후 10년 내에 충돌하지 않을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협력해 나갈 것이고, 나머지 다른 분야들에서는 치열한 각축을 벌일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미국이냐 중국이냐 택일한다는 생각도 구닥다리이고, 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위험을 피해 나간다(hedge)는 발상도 비현실적입니다.
한국版 滿鐵 조사부 만들자
100년 전, 일본이라는 조그만 섬나라가 거대한 중국을 쳐들어가기 위해 ‘만철(滿鐵) 조사부’란 걸 만들었습니다. 가장 많을 때는 2천명의 우수 두뇌들이 팀으로 움직였던, 일본의 20세기 최대의 싱크탱크(think-tank)였고, 오늘의 일본을 형성한 토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학계, 언론, 관(官)이 다 보따리장사 수준에 머물러 있고, 그나마 재계가 좀 나은 편일 뿐입니다.
100년 전 일본의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되었던 ‘만철 조사부’를 우리가 오늘날 따라 하기에는 이름이나 발상부터가 좋지 않다고 한다면, 가령 좋은 의미의 한국판(版) ‘유라시안(Eurasian) 철도 조사부’ 같은 것은 어떻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우수한 인력들을 대거 투입하여 방대한 연구·조사를 하고, 동아시아 신질서를 어떻게 건축해 나가야 우리의 살길과 공간의 확보는 물론 다른 모든 나라가 함께 조화롭고 평화롭게 발전해 나갈 수 있겠는지, 멋진 그림을 그려내야 합니다.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신질서 설계도를 미국이나 중국, 일본에 가서 찾으려 할 게 아니라 한국에 가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투자를 해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으로 갈등하게 되면 우리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겁니다. 하지만 당분간 그러지 않을 유예기간 동안에 우리가 미·중의 군사적 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역할 공간을 찾고 동아시아 신질서가 바람직한 모습으로 건축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제 분야는 물론, 그 외의 신흥 무대들, 가령 문화, 환경, 지식 등의 무대에서는 우리가 굉장히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이런 무대들은 단순히 미국이나 중국에 줄을 서는 무대가 아니고, 그것 때문에 오해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은 어차피 군사나 경제만으로는 우뚝 설 수 없으며, 따라서 다른 무대들에서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보따리장사 식으로 해서는 가령 문화 무대에서도 소박한 한류(韓流)에 자족하는 선을 넘기 어려울 겁니다.”
일본이 첫 단추 꿰어야
―미·중이 짜는 판 속에서 우리의 살길도 중요하지만, 한·일 관계도 중요한데,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지금 한·일 문제는 남북한 사이의 문제보다 훨씬 더 풀기가 어렵게 돼 있습니다. 미국은 미·중 신형 대국 관계 속에서 한·미·일을 엮으려 하고, 우리도 한·미·일이 중국과 적대적으로 가지 않는 한 나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자국 중심의 좁은 차원에서 21세기 생존번영 전략을 짤 경우, 한·일 문제는 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독도, 종군위안부, 역사교과서 등 여러 쟁점을 일본이 그냥 덮어두기만 해도 다행일 텐데, 자신들의 국내정치 상황 때문에 자꾸만 자국중심주의로 재해석하려고 하니 한국으로서는 용인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돌파구를 어떻게 찾을 것이냐? 일본이 첫 단추를 꿸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현안 문제들이 일본의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지나치게 정치화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일본이 보여야 할 진정성의 부분이죠. 일본은 종종 ‘우리(일본)는 충분히 노력했는데…’라고 말하지만, 이런 문제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주관적 느낌보다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겁니다.
둘째로, 한·일 관계나 일·중 관계도 미국이 중간 중재 입장을 서겠다는 정도에서 한·일 또는 중·일 쌍방이 문제를 키우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가령 일·중이 ‘무력(武力) 불사(不辭)’ 같은 언사를 주고받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한·중·일 모두가, 도저히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은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도록 동결시켜 두고, 서로 갈등하지 않는 나머지 무대들에서의 협력을 최대한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현재 동아시아의 상황을 말하자면, 경제 분야 정도에서 각 나라가 상생 윈-윈(win-win)하려 할 뿐, 다른 분야에서는 가령 ‘동아시아 사회’조차 제대로 안 만들어져 있다고 하겠고, 하물며 ‘동아시아 공동체’란 것은 전혀 실체가 없는 개념에 불과합니다.
유럽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라의 국민이면서 유럽이라는 하나의 큰 덩치의 일원(一員)이기도 하다는 이른바 복합 정체성(正體性)을 시도해 온 지 몇십 년이 되는 것과 달리, 동아시아 사람들은 아직 각각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일원이라는 ‘2중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갈등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현안들을 당장 풀기는 어렵다는 것에 대해 여러 나라가 솔직하게 합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문제들은 자꾸 건드려서 악화시키지 말고 뒷전으로 밀어두고, 협력 가능한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조금씩 복합 정체성 인식의 확산으로 나아간다면, 지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그때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日이 말하는 ‘적극적 평화’의 실체는?
―일본 아베 내각이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과 군사력 강화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일본은 19세기 자강과 균세에서, 자강을 넘어서서 이웃나라들의 안정과 평화에 심대한 피해를 주는 잘못된 길을 걸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갖지 말라는 벌을 받았습니다. 다시 군사력을 키워도 과거와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느냐, 군사력을 어떻게 키우면 다시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 것이냐, 이런 문제들에 대해 세련된 준비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우려에 대해 일차적으로는 미국이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있어 왔지만, 만약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한·일 관계 또는 중·일 관계에서 권력각축적인 양상이 벌어진다면, 사태는 대단히 어려워질 겁니다. 그런 점에서 주변 세력들의 우려는 정당성이 있습니다. 일본은 ‘다른 나라들이 다 하는 것을 우리도 하려는 것인데, 왜 우리만 갖고 이러냐’고 하겠지만….
가상(假想)해 봅시다. 만약 일본의 국익, 즉 나라의 이익이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이익에도 굉장히 봉사하는 형태로 움직인다면, 가령 일본 군사력이 동아시아 평화군으로만 운용된다면, 그런 군사력의 강화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일본에서 그 같은 발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日의 집단적 自衛 주장이 박수 받지 못하는 이유
집단적 자위권의 개념에 대해 상대방이 불안해한다면 그걸 푸는 길은 뭘까요?
일본 정부는 ‘국제협조주의에 기반한 적극적 평화’를 추진한다고 말합니다. 평화 이론의 대가인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Johan Galtung)에 의하면, ‘소극적 평화’란 전쟁의 부재(不在) 상태인 반면, ‘적극적 평화’는 나와 타자의 이해(利害)가 하나 되도록 하는 사회적 통합을 통해 성취되는 평화라고 정의했는데, 일본이 말하는 ‘적극적 평화’는 그런 개념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진정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를 위한 집단 자위라면 모든 나라가 박수를 칠 텐데, 왜 박수가 없을까요?
첫째로, 일본이 말하는 집단 안보가 실제로 아·태 평화에 기여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누가 결정하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의 말과 행동에는 신뢰와 투명성이 부족합니다. 그만큼 한국과 중국의 불신을 푸는 일본의 비군사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일본의 군사력이 설혹 방위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일본 방위성/자위대 예산이 좋은 의도로 증가된다고 하더라도, 일본 자위대의 장기적 증강이 동아시아에 가져올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해 한국과 중국은 걱정할 겁니다. 그것이 전혀 불필요한 걱정이거나 오해라면, 그런 인식의 차이를 없애려는 일본의 노력이 시급한데, 그런 게 보이질 않아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주변국들의 논란 자체가 일본의 대외 역사의 과오를 반영하는 것인 만큼, 지금 일본에 ‘국가전략보고서’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일본 스스로 오해의 소지를 만드는 것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신뢰와 투명성을 강화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