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사리크, 1차 대전 당시 외교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쟁취
⊙ 知性, 독선적 성격, 기독교 신앙, 반공주의, 親美反蘇 노선 측면에서 유사한 점 많아
⊙ 건국 후 민주주의 주장하면서도 귄위주의적 통치로 흐른 점도 비슷
⊙ 동맹외교 실패로 체코는 마사리크 死後 50년간 후퇴, 한국은 李承晩의 韓美방위조약에
힘입어 자유·번영 구가
김학은
⊙ 67세. 서울대 농과대학 졸업. 美피츠버그대 경제학 박사.
⊙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역임. 現연세대 명예교수.
⊙ 저서 : 《이승만과 마사리크》 《루이 헨리 세브란스-그의 생애와 시대》
《화폐와 금융-불확실성의 경제학》 《정합경제이론》.
⊙ 知性, 독선적 성격, 기독교 신앙, 반공주의, 親美反蘇 노선 측면에서 유사한 점 많아
⊙ 건국 후 민주주의 주장하면서도 귄위주의적 통치로 흐른 점도 비슷
⊙ 동맹외교 실패로 체코는 마사리크 死後 50년간 후퇴, 한국은 李承晩의 韓美방위조약에
힘입어 자유·번영 구가
김학은
⊙ 67세. 서울대 농과대학 졸업. 美피츠버그대 경제학 박사.
⊙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역임. 現연세대 명예교수.
⊙ 저서 : 《이승만과 마사리크》 《루이 헨리 세브란스-그의 생애와 시대》
《화폐와 금융-불확실성의 경제학》 《정합경제이론》.
10월 28일은 체코의 독립기념일이다. 20년 전인 1993년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하기 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었다. 체코든 체코슬로바키아든, 1919년 이전에는 아예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던 나라였다. 유럽에서조차 체코의 한 지방인 보헤미아는 알아도 체코나 슬로바키아는 알지 못했다.
15세기 초 프라하대학 총장이었던 얀 후스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후 체코는 100여 년간 동란(動亂)에 휩싸였다. 30년 전쟁 중인 1620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군대에 항복하면서 체코는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改宗)당했다. 이후 300년 동안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제(諸)민족의 봄’이라고 하는 1848년 유럽혁명이 일어났을 때 체코도 봉기했지만 혁명에 실패했다.
오랫동안 존재조차 잊혔던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묶어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를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토마시 마사리크(Tom´as Garrigue Masaryk·1850~1937)다.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영국으로 망명해 외교와 선전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마사리크의 독립운동은 이승만(李承晩·1875~1965)을 비롯한 당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마사리크는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오늘날에도 체코에서는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프라하의 프라하성(城)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그러고 보면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많다. 해외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던 망명(亡命) 독립지사, 개혁가, 언론인, 박사, 교수, 학자, 저술가, 외교가, 웅변가, 평화주의자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외교를 통해 독립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정치사상(민족자결주의)에 크게 기대했다. 마사리크가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방략(方略)을 주장했을 때 그것이 돈키호테의 무모한 도박이라고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듯이, 이승만의 방략을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개의치 않고 초지일관(初志一貫)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기의 노력으로 당대 최고 수준의 지성인으로 올라섰다. 이유는 달라도 두 사람 공히 사형(死刑)선고를 목전에 둔 적이 있었다. 외국인 부인을 둔 점도 흡사하다. 개신교 입국론(立國論)을 주장한 점도 공통적이다. 두 인물 모두 청년기에는 기울어져 가는 기존질서를 거부하는 개혁가·이단아였다. 장년기에는 미래를 내다보고 제자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노년기에는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제자들을 데리고 망명정객으로 외교독립운동을 했다는 점도 닮았다.
이승만과 마사리크를 비교하는 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유사점에 대한 흥미 때문만은 아니다. 인물비교는 일종의 귀납법(歸納法)에 속한다. 한 개인만을 관찰할 때 발견할 수 없는 어떤 보편성을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분분한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나라세우기, 그리고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시 마사리크
토마시 마사리크는 1850년 3월 7일 모라비아(체코의 한 지방)의 호도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슬로바키아인(人)으로 농노(農奴) 출신 마부(馬夫)였다. 어머니는 모라비아인 하녀 출신이었다.
마사리크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으로 이주하면서 일찍부터 여러 언어를 습득했다. 영주(領主)의 허락을 받아 기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마사리크는 고향으로 돌아와 대장간에서 일했다. 이를 동정한 예전 선생님의 소개로 초등학교에서 무급(無給)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마사리크는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식의 피아노 연주로 간신히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마사리크는 김나지움(Gymnasium·중등교육기관) 진학을 위해 라틴어 사전을 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했다.
김나지움을 수석으로 졸업한 마사리크는 빈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강사생활을 거쳐 1882년 프라하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가 1878년에 쓴 《자살론》은 이 문제를 다룬 최초의 저술이었다. 오늘날 마사리크는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마사리크는 오랜 식민지배로 생기를 잃어버린 체코가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진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1884년 《학술진흥》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세르비아 등 발칸 국가의 학생들까지 그의 강의를 들으러 프라하로 유학을 왔다.
“사실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당시 체코에서는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9세기경에 쓰였다고 하는 체코 서사시(敍事詩)가 19세기 초에 발견되었다. 많은 체코인이 이에 대해 민족적 자긍심(自矜心)을 느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이 서사시는 위작(僞作) 논쟁에 휘말렸다. 1886년 마사리크가 발간하는 《학술진흥》은 문제의 서사시가 위작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게재했다.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많은 체코 언론과 학자들은 마사리크를 공격했다. 마사리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자존심과 교육이 거짓 위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은 과거에 휩쓸려 있는 한, 우리 역사는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다.”
결국 문제의 서사시는 위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비슷한 시기에 한 유대인 청년이 ‘종교적 의식(儀式)’을 위해 체코 처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사리크는 유대인에게는 그러한 의식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 그 청년을 변호했다. 가톨릭교회 등이 마사리크를 심하게 공격했지만, 그는 “체코가 미신(迷信)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며 맞섰다.
19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은 1867년 헝가리인들의 독립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황제를 공동의 군주로 하되, 헝가리에 내정자치권을 부여하는 이중 제국으로 전환했다)이 53명의 크로아티아 지도자들을 반역혐의로 기소했다. 마사리크는 아그람(오늘날 자그레브)에 내려가 그 사건을 조사한 후, 이 사건이 외무성의 조작임을 폭로했다.
여기서 보듯 마사리크는 항상 ‘사실’을 추구했다. 평생 그의 좌우명(座右銘)은 “사실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였다. 그가 만든 정당의 이름은 사실주의자당(Realist Party)’이었다.
1차 대전 발발 후 영국 亡命
마사리크는 이러한 경험을 거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90년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제국의회에서 피(被)압박민족의 자결권(自決權)을 부인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권(强權)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제국의회 내에서 소수(少數)민족의 목소리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1897년 의원직을 사임하고 대학으로 돌아갔다가 1907년 다시 의회로 복귀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반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마사리크는 의회에서 합병반대 연설을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무리한 팽창주의는 ‘제국의 자살(自殺)’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사리크는 런던으로 망명했다. 당시 제국의회에서 체코 출신 의원은 약 100명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해외로 망명한 사람은 마사리크가 유일했다. 이 사실은 후일 그의 권위의 원천이 됐다. 국외로 망명하기 전, 마사리크는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의 시종(侍從)을 비롯해 각계각층에 정보망을 구축했다.
마사리크는 런던과 파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다행히 영국과 프랑스에는, 저명한 학자이자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활동해 온 그에게 공감하는 언론인·지식인·정치인들이 있었다.
30살에 불과한 유능한 제자 에드바르트 베네시(제2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와 슬로바키아 출신 프랑스 장교 밀란 스테파니크가 그를 보좌했다. 베네시는 외교, 스테파니크는 군사 부문에서 활약했는데, 특히 스테파니크의 존재는 슬로바키아인들의 마음을 끄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마사리크는 1916년 프랑스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국민회의를 결성했다. 그의 활동은 사실 누구로부터 위임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정당한 대표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은 자신의 활동을 통해 대표성을 획득해 나갔다. 후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대표성은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나중에 저절로 우리에게 왔다.”
“거짓과 과장은 가장 나쁜 선전”
1915년 마사리크는 런던대학 킹스 칼리지 슬라브 학부에서 <유럽위기에 있어서 약소국(弱小國)의 문제>라는 강연을 했다. 그는 “유럽지도에 (인위적인) 국민국가(state)만 있지 (자연적인) 민족국가(nation)가 없다는 사실이 유럽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이 강의를 토대로 마사리크는 《비망록》을 만들어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소책자에서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하고 그에 예속된 아래 7개의 지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나라들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앞세워 발칸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방파제로 해야 독일의 패권주의(覇權主義)를 무력(無力)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와 함께 마사리크는 체코 민족을 향해, 같은 슬라브족으로 헝가리의 지배 아래 있던 슬로바키아를 통합해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를 세우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마사리크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연합국 지도자들에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민주주의 대(對) 전제주의’의 싸움임을 강조했다. 마사리크는 유럽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15세기 얀 후스의 종교개혁의 예를 들면서, 유럽과 미국을 향해 자유와 인본주의(人本主義), 민주주의의 전통을 자랑하는 체코는 중부유럽에서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마사리크는 이런 식으로 연합국의 전쟁 명분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명분을 일치시키면서 이를 열강(列强)의 여론에 호소하는 데 성공했다. 마사리크는 특히 선전전(宣傳戰)에 대해 능했다. 그가 제시한 선전의 원칙은 경청할 만하다.
“나에게는 선전에 관해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인들을 악용(惡用)하지 말아야 하고, 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고, 사실을 왜곡해서도 안 되며, 교만해서도 못쓴다. 헛된 약속을 하지 말 것이며, 애걸은 더욱 안 된다. 사실 그 자체가 말하도록 하라. 사실에 입각해서 당신들의 이해는 이러한 것이며, 따라서 당신의 의무도 뒤따른다는 점을 지적하면 그만이다. 발상과 토론을 하는 데 배경을 잊지 말며, 그리고 한 가지 더, 불법방해하지 마라. 거짓과 과장은 가장 나쁜 선전이다.”
체코軍團
외교와 선전을 통해 독립운동을 벌이는 한편으로 마사리크는 건국에 대비해 군사력 확보에 나섰다.
당시 러시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징집당해 러시아전선에 투입됐다가 투항한 체코와 슬로바키아 병사들이 다수 있었다. 마사리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과 교섭해 1917년 2월 이들을 독립된 군단으로 편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들을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데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으로 병력 손실이 컸던 프랑스와 혁명의 와중에서 정신이 없던 러시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바로 ‘체코군단’이다. 처음 2만명으로 시작한 이들은 나중에 7만명으로까지 그 숫자가 늘어났다.
편성 당시 우크라이나에 있던 체코군단은 시베리아철도 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뒤, 거기서 배편으로 유럽으로 오기로 했다. 체코군단이 이렇게 먼 길을 택한 것은 러시아혁명의 혼란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급적 체코군단의 귀국을 늦춰 인명손실을 막기 위해서였다. 마사리크는 이들을 독립 체코슬로바키아 국군의 근간으로 삼고자 했다.
이 때문에 마사리크는 체코군단에 러시아 내전(內戰)에 끼어들지 말도록 엄명했다. 1918년 2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출발한 체코군단은 마사리크의 당부와는 달리 러시아 내전에 휘말리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들은 1920년 11월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전 이들은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우리 독립군들에게 무기를 팔았다. 그 덕분에 우리 독립군은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國父
마사리크의 노력으로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르자 프랑스·영국·미국은 체코슬로바키아국민회의를 ‘사실상의 교전(交戰)정부’로 인정했다. 독립 후의 일이지만 신생 체코슬로바키아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도 정식으로 초청받았다. 중동부 유럽의 신생국들 가운데 파리강화회의에 초청을 받은 나라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유일했다. 마사리크의 외교력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체코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도 마사리크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918년 종전(終戰)을 앞두고 마사리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초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의 여론은 독일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지만, 유럽의 노(老)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존속시키는 것이 중부유럽이나 발칸반도의 안정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그렇게 되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은 물 건너 가는 것이었다.
마사리크는 미국 조야(朝野)를 상대로 제1차 세계대전의 단초를 연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는 점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연합국의 대의명분에 부합하는 것임을 널리 알렸다. 윌슨 대통령과도 만났다. 결국 윌슨 대통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하기로 결심하고, 영국·프랑스 등 다른 연합국들도 설득했다.
그해 10월 18일 마사리크는 미국 워싱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선언했다.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1세는 이를 수용했다. 10월 28일은 이후 체코의 독립기념일이 됐다. 두 달 후인 12월 21일 마사리크는 ‘국부(國父)’가 되어 프라하로 돌아왔다. 가족도 놔두고 도망치듯 망명한 지 4년 만이었다.
귀국 후 마사리크는 건국 후의 혼란 속에서 국가건설에 매진했다. 그는 민주주의자를 자처했지만, 민주주의의 전통이 박약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권위주의 통치, 측근정치로 흐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1920년 개헌(改憲)을 통해 연임(連任)제한을 받지 않는 종신(終身)대통령이 됐지만, 1935년 건강이 악화되자 베네시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사임했다. 1937년 9월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李承晩과 마사리크
앞에서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이승만과 마사리크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여기서는 이승만의 생애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해 그에 대한 기술(記述)은 생략하고, 두 사람의 공통점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강렬한 독립정신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조국의 독립을 믿었다. 특히 식민 종주국의 과도한 팽창주의가 그들의 몰락과 조국의 독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사리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강제합병이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거쳐 영국·프랑스·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이는 서곡이 되어 체코에 독립의 기회를 줄 것으로 보았다. 이승만도 일본제국의 한국 강제합병이 만주사변을 거쳐 중국, 종국에는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일 것이며, 그 결과 한국은 독립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2. 평화주의자/공화주의자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무력(武力)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이자, 시대를 앞서서 왕조의 해체를 주장했던 공화주의자였다. 두 사람 모두 칸트의 영구평화사상을 신봉했으며, 이를 자신의 정치사상으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일본내막기》에서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라고 밝혔다. 마사리크도 그의 저서 《국가창설》에서 “체코의 구원자는 시저가 아니라 예수”라고 말했다.
3. 문필가/지성인
이승만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미몽(迷夢)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순한글로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마사리크도 비슷한 목적으로 체코어로 된 《체코 역사의 의미》를 썼다(당시 체코의 지식인들은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승만은 박사학위 논문 《미국 영향하의 중립》으로 주목을 받았고, 마사리크는 《러시아 정신》으로 당대 유럽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출판하여 일본제국의 도발과 몰락을 예견했듯이, 마사리크도 《사회현안》과 《자살론》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을 예측했다.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와 하버드대학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당대 최고의 지성(知性)이었다. 마사리크는 빈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오늘날 사회학의 개척자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의 석학(碩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 신문, 잡지, 서적, 개인적 친분, 각종 회의를 적극 이용했다.
4. 독선적 성격
이승만은 독선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들었다. 마사리크도 비슷했다. 그는 ‘조건 없는 충성’을 요구했다. 윌슨은 마사리크에 대해 “비판에 지나치게 민감하여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평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지적(知的) 독선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반대파가 등장했고 고립됐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에 굴하지 않는, 타협을 모르는 원칙주의자였다.
5. 미국을 적극 활용
일제(日帝)시대에 많은 독립운동가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전통 때문에 중국에 의존했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후에는 소련에 환상을 품는 이도 많이 생겼다. 마사리크가 활동하던 시기에 많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가들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 3중 제국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했다. 범(汎)슬라브주의에 기울어져 제정(帝政) 러시아에 기대를 거는 목소리도 높았다. 양쪽 모두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이러한 주된 흐름을 거부했다. 그들은 세계 대세를 정확하게 읽고 미국을 이용하여 조국을 독립시키는 ‘외교독립’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미국은 오늘날과 같은 강대국이 아니었음을 상기한다면, 두 사람 모두 대단한 혜안(慧眼)의 소유자였다.
이승만은 미국 조야에 중국·러시아·일본 간의 세력균형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마사리크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간의 세력균형과 유럽평화를 위해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미국에 강조했다.
6. 반공주의
이승만은 1920년대 초 《태평양잡지》에 기고한 <공산주의 당 부당(當不當)>이라는 글을 통해 공산주의의 모순을 지적했다. 그는 소련 체제가 들어서기 이전에도 러시아의 영토욕에 대해 젊은 시절부터 경계해 왔다. 마사리크는 《사회현안》에서 마르크스 철학과 마르크스주의에 내포된 폭력성을 비난했는데, 이는 마르크스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저서 중 하나로 꼽힌다. 레닌은 “마사리크가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마사리크는 러시아 전제주의와 후진성도 철저히 비판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공히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추구했다. 그럼으로써 이승만은 조국을 대륙세력이 아니라 해양세력과 손을 잡도록 이끌었다. 마사리크도 범슬라브주의에 환상을 갖는 동포들과는 달리 전(全) 유럽 내지 세계 속에서 조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존재의미를 찾으려 했다.
7. 외교를 통한 독립노선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외교를 통한 독립을 일관되게 추구했다. 이승만이 간전기(間戰期·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했던 것은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나 폭력을 혐오하는 국제적 분위기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마사리크도 열강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존재 자체에 대해 무지하고, 중동부 유럽 약소국의 독립에 대해 미온적인 상황에서 선전과 외교에 주력했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와 별도로 워싱턴에 구미(歐美)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했다. 마사리크도 파리 임시정부(체코슬로바키아국민회의) 본부와 별도로 런던사무소에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마사리크는 초기에 합스부르크 왕조의 주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각 민족자치정부에 의한 연방제를 주장하다가, 제정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치하 슬라브연방제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는 이승만이 3·1운동 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주장했다가 곤경에 처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럼 이승만은 마사리크와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아마 꽤 많이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을 도와주었던 미국인 인맥(人脈)은 마사리크의 미국 인맥과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마사리크를 도왔던 허버트 밀러 교수는 이승만의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로 후일 건국훈장을 받았다. 마사리크를 윌슨에게 소개한 국제기독청년회(YMCA)의 존 모트 총재는 이승만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내건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었다.
외교독립노선을 통한 마사리크의 성공은 이미 당대에 ‘전설(傳說)’이 되어 한국에도 알려졌다. 윤치호의 1919년 12월 20일 자(字) 일기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는 마사리크의 활약을 찬양하는 국내 인사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들은 유럽의 정치를 발칵 뒤집어 놓은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마사리크든 다른 어느 누구든 간에 체코슬로바키아에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또 체코슬로바키아는 지적으로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과 국제정세를 완벽하게 이용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1931년대 백낙준은 《동광》에 <첵크 국부 마사릭 박사> <건국시대의 마사릭> 등의 글을 기고하고 있다.
8. 건국과 민주주의
이승만의 귀국 첫 일성(一聲)은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였다. 마사리크 역시 국내에 있는 여러 노선의 지도자들에게 ‘뭉친 모습’을 연합국에 보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승만은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민주공화국’을, 마사리크는 ‘중부유럽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 정부’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두 사람은 귀국 후 국내 정치세력과 갈등을 빚었고, 민주주의의 뿌리가 약한 상황 속에서 결국은 다소간 권위주의적 통치로 나아갔다. 두 사람 모두 민주주의 신봉자였지만 당시 국민들의 수준으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기 어려우며, 자신들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사리크는 자신의 통치를 ‘관리(管理)민주주의’라고 포장했다.
이승만은 한민당 등의 내각책임제 헌법제정 시도를 무산시키고,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만들었다. 1918년 임시헌법에 의해 명목적 지위의 대통령으로 추대된 마사리크는 1920년 개헌을 통해 수상과 장관 임면권(任免權), 의회해산권 등을 확보하면서 ‘강력한 대통령’이 됐다.
이승만이 헌병사령부를 동원한 친위(親衛)쿠데타인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의회의 압박에서 벗어난 것처럼, 마사리크는 폴란드의 피우수츠키 원수(元帥)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인 1926년 베네시 등과 함께 친위 쿠데타를 모의했다.
이승만은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을 철폐함으로써 종신대통령이 되려 했다. 마사리크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개헌을 통해 종신대통령이 됐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지방의원의 3분의 1 임명권을 손에 넣고,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을 금지하는 법률도 제정했다.
이승만이 말년에 측근정치, 비서정치에 의존했던 것처럼, 마사리크는 ‘궁성(宮城·Hrad)’과 ‘금요인사(金曜人士·Patecnici)’라고 하는 초(超)헌법적인 측근정치 시스템을 마련했다.
이승만이 여순반란 사건 이후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공산주의를 진압한 것처럼, 마사리크도 공산주의자들의 정권탈취 음모가 있은 후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4·19로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반면, 생전에 ‘민주주의의 챔피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마사리크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9. 동맹외교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는 모두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이었다. 마사리크는 독립 후 안전보장을 위해 국제연맹의 집단안보 체제를 기대하는 한편,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 등 인근 중동부 유럽 신생국들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이는 히틀러의 야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사리크가 죽은 다음 해 히틀러는 독일계(系) 주민이 많이 사는 주데텐 할양(割讓)을 체코슬로바키아에 요구했다. 마사리크의 후임인 베네시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그의 희망은 배신당했다(뮌헨협정). 주데텐을 합병한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도 모두 집어삼켰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다시 독립을 회복했고, 좌우합작(左右合作) 정부가 들어섰다. 좌우합작 정부 아래서 공산주의자들은 경찰과 군대, 노조를 장악해 나가다가, 1948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화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얀 마사리크(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는 의문사(疑問死)했다. 토마시 마사리크의 후계자인 베네시는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공산화되어 가는 조국을 바라보다가 그해 6월 사임했고, 9월에 세상을 떠났다.
1989년 벨벳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주화를 달성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소외받아 왔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슬로바키아가 독립을 요구했다. 결국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갈라섰다. 마사리크 사후 50여 년간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는 시련과 후퇴의 연속이었다.
반면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냈고, ‘벼랑 끝 외교’ 끝에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냈다. 1953년 8월 8일 이 조약이 가조인(假調印)된 다음 날인 1953년 8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의 후손들은 앞으로 누대(累代)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말처럼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인한 안전과 안정을 바탕으로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승만 이후 50여 년간 한국은 유례없는 자유와 번영을 이룩했다.
마사리크의 동상은 다시 섰는데…
그러나 오늘날 체코와 한국에서 마사리크와 이승만은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마사리크는, 나치 점령기나 공산정권 시절에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禁忌)시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슬로바키아가 분리독립한 후 마사리크는 재(再)조명받고 있다.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방법으로 그(마사리크)의 정치개념을 시도해 보자”면서 마사리크 재조명에 앞장섰다. 나치 치하와 공산정권 시절 철거됐던 마사리크의 동상(銅像)도 프라하성 앞에 다시 세웠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을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논란이 되고 있다. 그와 그의 업적을 평가하려는 시도는 ‘역사왜곡’이라고 매도당한다. 4·19 때 철거된 이승만의 동상은 아직도 민가 마당에 방치되어 있다.⊙
15세기 초 프라하대학 총장이었던 얀 후스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후 체코는 100여 년간 동란(動亂)에 휩싸였다. 30년 전쟁 중인 1620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군대에 항복하면서 체코는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改宗)당했다. 이후 300년 동안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제(諸)민족의 봄’이라고 하는 1848년 유럽혁명이 일어났을 때 체코도 봉기했지만 혁명에 실패했다.
오랫동안 존재조차 잊혔던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묶어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를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토마시 마사리크(Tom´as Garrigue Masaryk·1850~1937)다.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영국으로 망명해 외교와 선전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마사리크의 독립운동은 이승만(李承晩·1875~1965)을 비롯한 당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마사리크는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오늘날에도 체코에서는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프라하의 프라하성(城)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그러고 보면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많다. 해외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던 망명(亡命) 독립지사, 개혁가, 언론인, 박사, 교수, 학자, 저술가, 외교가, 웅변가, 평화주의자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외교를 통해 독립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정치사상(민족자결주의)에 크게 기대했다. 마사리크가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방략(方略)을 주장했을 때 그것이 돈키호테의 무모한 도박이라고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듯이, 이승만의 방략을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개의치 않고 초지일관(初志一貫)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기의 노력으로 당대 최고 수준의 지성인으로 올라섰다. 이유는 달라도 두 사람 공히 사형(死刑)선고를 목전에 둔 적이 있었다. 외국인 부인을 둔 점도 흡사하다. 개신교 입국론(立國論)을 주장한 점도 공통적이다. 두 인물 모두 청년기에는 기울어져 가는 기존질서를 거부하는 개혁가·이단아였다. 장년기에는 미래를 내다보고 제자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노년기에는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제자들을 데리고 망명정객으로 외교독립운동을 했다는 점도 닮았다.
이승만과 마사리크를 비교하는 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유사점에 대한 흥미 때문만은 아니다. 인물비교는 일종의 귀납법(歸納法)에 속한다. 한 개인만을 관찰할 때 발견할 수 없는 어떤 보편성을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분분한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나라세우기, 그리고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시 마사리크
토마시 마사리크는 1850년 3월 7일 모라비아(체코의 한 지방)의 호도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슬로바키아인(人)으로 농노(農奴) 출신 마부(馬夫)였다. 어머니는 모라비아인 하녀 출신이었다.
마사리크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으로 이주하면서 일찍부터 여러 언어를 습득했다. 영주(領主)의 허락을 받아 기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마사리크는 고향으로 돌아와 대장간에서 일했다. 이를 동정한 예전 선생님의 소개로 초등학교에서 무급(無給)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마사리크는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식의 피아노 연주로 간신히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마사리크는 김나지움(Gymnasium·중등교육기관) 진학을 위해 라틴어 사전을 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했다.
김나지움을 수석으로 졸업한 마사리크는 빈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강사생활을 거쳐 1882년 프라하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가 1878년에 쓴 《자살론》은 이 문제를 다룬 최초의 저술이었다. 오늘날 마사리크는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마사리크는 오랜 식민지배로 생기를 잃어버린 체코가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진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1884년 《학술진흥》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세르비아 등 발칸 국가의 학생들까지 그의 강의를 들으러 프라하로 유학을 왔다.
“사실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당시 체코에서는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9세기경에 쓰였다고 하는 체코 서사시(敍事詩)가 19세기 초에 발견되었다. 많은 체코인이 이에 대해 민족적 자긍심(自矜心)을 느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이 서사시는 위작(僞作) 논쟁에 휘말렸다. 1886년 마사리크가 발간하는 《학술진흥》은 문제의 서사시가 위작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게재했다.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많은 체코 언론과 학자들은 마사리크를 공격했다. 마사리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자존심과 교육이 거짓 위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은 과거에 휩쓸려 있는 한, 우리 역사는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다.”
결국 문제의 서사시는 위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비슷한 시기에 한 유대인 청년이 ‘종교적 의식(儀式)’을 위해 체코 처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사리크는 유대인에게는 그러한 의식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 그 청년을 변호했다. 가톨릭교회 등이 마사리크를 심하게 공격했지만, 그는 “체코가 미신(迷信)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며 맞섰다.
19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은 1867년 헝가리인들의 독립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황제를 공동의 군주로 하되, 헝가리에 내정자치권을 부여하는 이중 제국으로 전환했다)이 53명의 크로아티아 지도자들을 반역혐의로 기소했다. 마사리크는 아그람(오늘날 자그레브)에 내려가 그 사건을 조사한 후, 이 사건이 외무성의 조작임을 폭로했다.
여기서 보듯 마사리크는 항상 ‘사실’을 추구했다. 평생 그의 좌우명(座右銘)은 “사실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였다. 그가 만든 정당의 이름은 사실주의자당(Realist Party)’이었다.
1차 대전 발발 후 영국 亡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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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리크의 제자이자 후계자였던 에드바르트 베네시. |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반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마사리크는 의회에서 합병반대 연설을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무리한 팽창주의는 ‘제국의 자살(自殺)’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사리크는 런던으로 망명했다. 당시 제국의회에서 체코 출신 의원은 약 100명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해외로 망명한 사람은 마사리크가 유일했다. 이 사실은 후일 그의 권위의 원천이 됐다. 국외로 망명하기 전, 마사리크는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의 시종(侍從)을 비롯해 각계각층에 정보망을 구축했다.
마사리크는 런던과 파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다행히 영국과 프랑스에는, 저명한 학자이자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활동해 온 그에게 공감하는 언론인·지식인·정치인들이 있었다.
30살에 불과한 유능한 제자 에드바르트 베네시(제2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와 슬로바키아 출신 프랑스 장교 밀란 스테파니크가 그를 보좌했다. 베네시는 외교, 스테파니크는 군사 부문에서 활약했는데, 특히 스테파니크의 존재는 슬로바키아인들의 마음을 끄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마사리크는 1916년 프랑스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국민회의를 결성했다. 그의 활동은 사실 누구로부터 위임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정당한 대표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은 자신의 활동을 통해 대표성을 획득해 나갔다. 후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대표성은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나중에 저절로 우리에게 왔다.”
“거짓과 과장은 가장 나쁜 선전”
1915년 마사리크는 런던대학 킹스 칼리지 슬라브 학부에서 <유럽위기에 있어서 약소국(弱小國)의 문제>라는 강연을 했다. 그는 “유럽지도에 (인위적인) 국민국가(state)만 있지 (자연적인) 민족국가(nation)가 없다는 사실이 유럽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이 강의를 토대로 마사리크는 《비망록》을 만들어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소책자에서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하고 그에 예속된 아래 7개의 지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나라들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앞세워 발칸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방파제로 해야 독일의 패권주의(覇權主義)를 무력(無力)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와 함께 마사리크는 체코 민족을 향해, 같은 슬라브족으로 헝가리의 지배 아래 있던 슬로바키아를 통합해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를 세우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마사리크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연합국 지도자들에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민주주의 대(對) 전제주의’의 싸움임을 강조했다. 마사리크는 유럽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15세기 얀 후스의 종교개혁의 예를 들면서, 유럽과 미국을 향해 자유와 인본주의(人本主義), 민주주의의 전통을 자랑하는 체코는 중부유럽에서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마사리크는 이런 식으로 연합국의 전쟁 명분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명분을 일치시키면서 이를 열강(列强)의 여론에 호소하는 데 성공했다. 마사리크는 특히 선전전(宣傳戰)에 대해 능했다. 그가 제시한 선전의 원칙은 경청할 만하다.
“나에게는 선전에 관해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인들을 악용(惡用)하지 말아야 하고, 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고, 사실을 왜곡해서도 안 되며, 교만해서도 못쓴다. 헛된 약속을 하지 말 것이며, 애걸은 더욱 안 된다. 사실 그 자체가 말하도록 하라. 사실에 입각해서 당신들의 이해는 이러한 것이며, 따라서 당신의 의무도 뒤따른다는 점을 지적하면 그만이다. 발상과 토론을 하는 데 배경을 잊지 말며, 그리고 한 가지 더, 불법방해하지 마라. 거짓과 과장은 가장 나쁜 선전이다.”
체코軍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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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코군단은 2년여에 걸쳐 철도편으로 시베리아를 횡단해 조국으로 돌아갔다. |
당시 러시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징집당해 러시아전선에 투입됐다가 투항한 체코와 슬로바키아 병사들이 다수 있었다. 마사리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과 교섭해 1917년 2월 이들을 독립된 군단으로 편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들을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우는 데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으로 병력 손실이 컸던 프랑스와 혁명의 와중에서 정신이 없던 러시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바로 ‘체코군단’이다. 처음 2만명으로 시작한 이들은 나중에 7만명으로까지 그 숫자가 늘어났다.
편성 당시 우크라이나에 있던 체코군단은 시베리아철도 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뒤, 거기서 배편으로 유럽으로 오기로 했다. 체코군단이 이렇게 먼 길을 택한 것은 러시아혁명의 혼란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급적 체코군단의 귀국을 늦춰 인명손실을 막기 위해서였다. 마사리크는 이들을 독립 체코슬로바키아 국군의 근간으로 삼고자 했다.
이 때문에 마사리크는 체코군단에 러시아 내전(內戰)에 끼어들지 말도록 엄명했다. 1918년 2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출발한 체코군단은 마사리크의 당부와는 달리 러시아 내전에 휘말리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들은 1920년 11월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전 이들은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우리 독립군들에게 무기를 팔았다. 그 덕분에 우리 독립군은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國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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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
1918년 종전(終戰)을 앞두고 마사리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초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의 여론은 독일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이었지만, 유럽의 노(老)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존속시키는 것이 중부유럽이나 발칸반도의 안정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그렇게 되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은 물 건너 가는 것이었다.
마사리크는 미국 조야(朝野)를 상대로 제1차 세계대전의 단초를 연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는 점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연합국의 대의명분에 부합하는 것임을 널리 알렸다. 윌슨 대통령과도 만났다. 결국 윌슨 대통령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하기로 결심하고, 영국·프랑스 등 다른 연합국들도 설득했다.
그해 10월 18일 마사리크는 미국 워싱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선언했다.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1세는 이를 수용했다. 10월 28일은 이후 체코의 독립기념일이 됐다. 두 달 후인 12월 21일 마사리크는 ‘국부(國父)’가 되어 프라하로 돌아왔다. 가족도 놔두고 도망치듯 망명한 지 4년 만이었다.
귀국 후 마사리크는 건국 후의 혼란 속에서 국가건설에 매진했다. 그는 민주주의자를 자처했지만, 민주주의의 전통이 박약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권위주의 통치, 측근정치로 흐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1920년 개헌(改憲)을 통해 연임(連任)제한을 받지 않는 종신(終身)대통령이 됐지만, 1935년 건강이 악화되자 베네시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사임했다. 1937년 9월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李承晩과 마사리크
앞에서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이승만과 마사리크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여기서는 이승만의 생애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해 그에 대한 기술(記述)은 생략하고, 두 사람의 공통점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강렬한 독립정신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조국의 독립을 믿었다. 특히 식민 종주국의 과도한 팽창주의가 그들의 몰락과 조국의 독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사리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강제합병이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거쳐 영국·프랑스·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이는 서곡이 되어 체코에 독립의 기회를 줄 것으로 보았다. 이승만도 일본제국의 한국 강제합병이 만주사변을 거쳐 중국, 종국에는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일 것이며, 그 결과 한국은 독립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2. 평화주의자/공화주의자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무력(武力)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이자, 시대를 앞서서 왕조의 해체를 주장했던 공화주의자였다. 두 사람 모두 칸트의 영구평화사상을 신봉했으며, 이를 자신의 정치사상으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일본내막기》에서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라고 밝혔다. 마사리크도 그의 저서 《국가창설》에서 “체코의 구원자는 시저가 아니라 예수”라고 말했다.
3. 문필가/지성인
이승만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미몽(迷夢)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순한글로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마사리크도 비슷한 목적으로 체코어로 된 《체코 역사의 의미》를 썼다(당시 체코의 지식인들은 독일어로 저술활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승만은 박사학위 논문 《미국 영향하의 중립》으로 주목을 받았고, 마사리크는 《러시아 정신》으로 당대 유럽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출판하여 일본제국의 도발과 몰락을 예견했듯이, 마사리크도 《사회현안》과 《자살론》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을 예측했다.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와 하버드대학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당대 최고의 지성(知性)이었다. 마사리크는 빈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오늘날 사회학의 개척자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의 석학(碩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 신문, 잡지, 서적, 개인적 친분, 각종 회의를 적극 이용했다.
4. 독선적 성격
이승만은 독선적이라는 비난을 많이 들었다. 마사리크도 비슷했다. 그는 ‘조건 없는 충성’을 요구했다. 윌슨은 마사리크에 대해 “비판에 지나치게 민감하여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평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지적(知的) 독선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반대파가 등장했고 고립됐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에 굴하지 않는, 타협을 모르는 원칙주의자였다.
5. 미국을 적극 활용
일제(日帝)시대에 많은 독립운동가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전통 때문에 중국에 의존했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이후에는 소련에 환상을 품는 이도 많이 생겼다. 마사리크가 활동하던 시기에 많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가들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 3중 제국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했다. 범(汎)슬라브주의에 기울어져 제정(帝政) 러시아에 기대를 거는 목소리도 높았다. 양쪽 모두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이러한 주된 흐름을 거부했다. 그들은 세계 대세를 정확하게 읽고 미국을 이용하여 조국을 독립시키는 ‘외교독립’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미국은 오늘날과 같은 강대국이 아니었음을 상기한다면, 두 사람 모두 대단한 혜안(慧眼)의 소유자였다.
이승만은 미국 조야에 중국·러시아·일본 간의 세력균형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마사리크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간의 세력균형과 유럽평화를 위해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미국에 강조했다.
6. 반공주의
이승만은 1920년대 초 《태평양잡지》에 기고한 <공산주의 당 부당(當不當)>이라는 글을 통해 공산주의의 모순을 지적했다. 그는 소련 체제가 들어서기 이전에도 러시아의 영토욕에 대해 젊은 시절부터 경계해 왔다. 마사리크는 《사회현안》에서 마르크스 철학과 마르크스주의에 내포된 폭력성을 비난했는데, 이는 마르크스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저서 중 하나로 꼽힌다. 레닌은 “마사리크가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마사리크는 러시아 전제주의와 후진성도 철저히 비판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공히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추구했다. 그럼으로써 이승만은 조국을 대륙세력이 아니라 해양세력과 손을 잡도록 이끌었다. 마사리크도 범슬라브주의에 환상을 갖는 동포들과는 달리 전(全) 유럽 내지 세계 속에서 조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존재의미를 찾으려 했다.
7. 외교를 통한 독립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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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은 1933년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제네바를 방문했다. |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와 별도로 워싱턴에 구미(歐美)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했다. 마사리크도 파리 임시정부(체코슬로바키아국민회의) 본부와 별도로 런던사무소에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마사리크는 초기에 합스부르크 왕조의 주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각 민족자치정부에 의한 연방제를 주장하다가, 제정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치하 슬라브연방제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는 이승만이 3·1운동 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주장했다가 곤경에 처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럼 이승만은 마사리크와 그의 독립운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아마 꽤 많이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을 도와주었던 미국인 인맥(人脈)은 마사리크의 미국 인맥과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마사리크를 도왔던 허버트 밀러 교수는 이승만의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로 후일 건국훈장을 받았다. 마사리크를 윌슨에게 소개한 국제기독청년회(YMCA)의 존 모트 총재는 이승만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내건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었다.
외교독립노선을 통한 마사리크의 성공은 이미 당대에 ‘전설(傳說)’이 되어 한국에도 알려졌다. 윤치호의 1919년 12월 20일 자(字) 일기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는 마사리크의 활약을 찬양하는 국내 인사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들은 유럽의 정치를 발칵 뒤집어 놓은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마사리크든 다른 어느 누구든 간에 체코슬로바키아에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또 체코슬로바키아는 지적으로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과 국제정세를 완벽하게 이용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1931년대 백낙준은 《동광》에 <첵크 국부 마사릭 박사> <건국시대의 마사릭> 등의 글을 기고하고 있다.
8. 건국과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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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 후의 마사리크 대통령(가운데)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신생 조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이승만은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민주공화국’을, 마사리크는 ‘중부유럽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 정부’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두 사람은 귀국 후 국내 정치세력과 갈등을 빚었고, 민주주의의 뿌리가 약한 상황 속에서 결국은 다소간 권위주의적 통치로 나아갔다. 두 사람 모두 민주주의 신봉자였지만 당시 국민들의 수준으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기 어려우며, 자신들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사리크는 자신의 통치를 ‘관리(管理)민주주의’라고 포장했다.
이승만은 한민당 등의 내각책임제 헌법제정 시도를 무산시키고,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만들었다. 1918년 임시헌법에 의해 명목적 지위의 대통령으로 추대된 마사리크는 1920년 개헌을 통해 수상과 장관 임면권(任免權), 의회해산권 등을 확보하면서 ‘강력한 대통령’이 됐다.
이승만이 헌병사령부를 동원한 친위(親衛)쿠데타인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의회의 압박에서 벗어난 것처럼, 마사리크는 폴란드의 피우수츠키 원수(元帥)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인 1926년 베네시 등과 함께 친위 쿠데타를 모의했다.
이승만은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을 철폐함으로써 종신대통령이 되려 했다. 마사리크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개헌을 통해 종신대통령이 됐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지방의원의 3분의 1 임명권을 손에 넣고,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을 금지하는 법률도 제정했다.
이승만이 말년에 측근정치, 비서정치에 의존했던 것처럼, 마사리크는 ‘궁성(宮城·Hrad)’과 ‘금요인사(金曜人士·Patecnici)’라고 하는 초(超)헌법적인 측근정치 시스템을 마련했다.
이승만이 여순반란 사건 이후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공산주의를 진압한 것처럼, 마사리크도 공산주의자들의 정권탈취 음모가 있은 후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이승만이 4·19로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반면, 생전에 ‘민주주의의 챔피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마사리크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9. 동맹외교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는 모두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이었다. 마사리크는 독립 후 안전보장을 위해 국제연맹의 집단안보 체제를 기대하는 한편,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 등 인근 중동부 유럽 신생국들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이는 히틀러의 야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사리크가 죽은 다음 해 히틀러는 독일계(系) 주민이 많이 사는 주데텐 할양(割讓)을 체코슬로바키아에 요구했다. 마사리크의 후임인 베네시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그의 희망은 배신당했다(뮌헨협정). 주데텐을 합병한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도 모두 집어삼켰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다시 독립을 회복했고, 좌우합작(左右合作) 정부가 들어섰다. 좌우합작 정부 아래서 공산주의자들은 경찰과 군대, 노조를 장악해 나가다가, 1948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화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얀 마사리크(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는 의문사(疑問死)했다. 토마시 마사리크의 후계자인 베네시는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공산화되어 가는 조국을 바라보다가 그해 6월 사임했고, 9월에 세상을 떠났다.
1989년 벨벳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주화를 달성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소외받아 왔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슬로바키아가 독립을 요구했다. 결국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갈라섰다. 마사리크 사후 50여 년간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는 시련과 후퇴의 연속이었다.
반면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 냈고, ‘벼랑 끝 외교’ 끝에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냈다. 1953년 8월 8일 이 조약이 가조인(假調印)된 다음 날인 1953년 8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의 후손들은 앞으로 누대(累代)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말처럼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인한 안전과 안정을 바탕으로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승만 이후 50여 년간 한국은 유례없는 자유와 번영을 이룩했다.
마사리크의 동상은 다시 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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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성 앞에 서 있는 마사리크의 동상(왼쪽). 반면에 4·19때 철거된 이승만의 동상은 서울시내 한 민가의 마당에 뒹굴고 있다(오른쪽). |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을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논란이 되고 있다. 그와 그의 업적을 평가하려는 시도는 ‘역사왜곡’이라고 매도당한다. 4·19 때 철거된 이승만의 동상은 아직도 민가 마당에 방치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