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列傳] 연극가족 이룬 전무송 : 월간조선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그 시절을 살아온 한국인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 ‘아버지’다.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주의, 전쟁 그리고 참전병사, 술주정과 폭력, 가족에 대한 무한책임, 과묵함, 쓸쓸한 어깨, 자식들에게 보내지만 받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의사표시, 어딘지 모르게 서툴고 모호한 애정표현, 연민, 사회적 체면, 웃거나 공공장소에서 감정을 절대로 드러내선 안 된다고 철저하게 교육받은 무표정한 사내들, 진정한 자아(自我)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 방법도 없었던 불쌍한 남자, 앙상한 뒷모습,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

그렇다. 이 땅의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느낌들을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서 모두의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 새겨 넣은 한국인의 심상(心象)이다.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아버지’와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접점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한다.

“독일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일본이 ‘아자세 콤플렉스’라면, 우리는 어떨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콤플렉스’다. 도무지 부정할 만한 아버지조차 없다는 이야기다. 허약한 아버지는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했다. 독립도 남의 도움으로 겨우 가능했다. 그런데 곧바로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며 싸웠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서로 죽일 듯 째려보고 있다. 도무지 헷갈리는 것은, 한민족이라는데 도대체 서로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인데, 저쪽은 죽어라고 ‘어버이 수령님’만 외쳐댄다. 아주 환장한다.

상징적 친부(親父) 살해는 물론, ‘형제애’조차 꿈꿀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TV에 부모가 헷갈리는 ‘막장 드라마’가 끊이지 않는 거다. 막장 드라마는 분단이 남긴 정신분석학적 상처라는 게 내 생각이다. 전 세계에 유일한 이 어처구니없는 분단 현실이 어떠한 집단 심리학적 상처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은 심리학자로서 너무 안이한 태도다.”

<세일즈맨의 죽음>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데, 내 마음속에선 존재 여부가 알쏭달쏭했던 사람. 분명히 우리 곁에 있었으되, 마냥 자랑스럽지만은 않았던 누구. 한국 사람들은 미안함, 부끄러움, 옛 시절의 추억, 편집된 기억 등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아버지의 이미지’를 만들고, 누군가가 무대에서, TV에서, 스크린 위에서 자기 머릿속의 이미지를 온몸으로 구현해 주기를 기대하고 갈망한다. 그래서 전무송(全茂松·72)이다. 전무송은 연극무대 위에서 피어난 ‘아버지의 형상’이므로.

1949년 미국 초연, 한국에서는 1983년 초연된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의 고전 <세일즈맨의 죽음>은 배우 전무송이 가장 많이 출연했던 작품 중 하나다. 주인공 윌리 로만은 이미 60세가 넘은 세일즈맨이다. 한때 날리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교통비도 건지지 못할 정도로 판매실적이 부진하다. 그의 능력이 쇠잔한 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시대가, 풍습이, 그리고 생활환경이 너무나 빠르게 바뀌어 버린 것이 원인이다. 적응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과업이다. 어려서부터 배운 모든 기술과 관습이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윌리 로만에겐 아직도 납부해야 할 보험과 월부금이 남아 있다. 예컨대, 집, 의료보험, 그리고…. 활동을 멈추면, 돈 낼 길도 끊어진다. 그래서 일을 그만둘 수도 없다.

어느 날, ‘누적 판매실적’이라는 숫자앞에서 윌리 로만은 현실을 직시한다. 피할 수도 도망갈 길도 다 없는 막다른 길에서 그는 전직(轉職)을 희망한다. 윌리 로만에게 돌아온 대답은 ‘해고(解雇)’다. 아들에게 걸었던 꿈도 처참하게 무너진다. 그에게 남은 선택은? 가족이 자신의 사망보험금을 타게 하기 위해 자동차를 몰고 ‘사고사로 위장한 자살’을 감행하는 것.

전무송과 이순재의 <아버지>

<세일즈맨의 죽음>을 번안한 연극 <아버지>. 전무송과 이순재는 각기 다른 한국의 아버지상을 보여줬다.

2012년 5월, 원작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번안한 작품 <아버지>에서도 전무송은 주인공을 맡았다. 이순재(李純才)와의 더블 캐스팅. 전 문화부 장관 김명곤이 연출한 이 작품은 ‘한국의 현 시대상을 아프도록 정밀하게 담고 있다’는 평을 받으며 매진(賣盡) 사태를 빚었다. 금년 들어서는 지난 2월 15일부터 6월 15일까지 부산·구리·여수 등 아홉 군데 도시를 돌며 앙코르 공연을 열기도 했다. 공연 내내 객석 곳곳에서 흐느낌이 들려온 건 전국 공통이다. 눈물이 흘러내릴까 봐, 공연 중간부터 천장을 바라보는 남성 관객이 다수 발견되는 점도 마찬가지다.

—많은 관객이 전무송을 통해 ‘아버지’를 느낀다고 합니다.

“영광이지. 하지만 부담스러워요. 내가 ‘한국의 아버지상을 구현한 배우가 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연극을 한 것이 아니니까. 다만, <세일즈맨의 죽음>을 할 때 우리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던 건 사실이에요. 최근엔, 내 아이들, 젊은이들 생각을 하면서 무대에 섭니다. 대사를 하는데, 해 드리고 싶은 걸 다 못해 드렸고, 해 주고 싶은 걸 다 못해 주었다는 저릿한 슬픔이 실시간으로 자꾸 올라와서 실제로 울컥하기도 해요.”

필자 생각에 한국 문학사에서 ‘아버지’를 형상화한 작가로 세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황순원(黃順元: 1915~2000)과 최인훈(崔仁勳·77), 그리고 이문열(李文烈·65). 급격한 근대화의 와중에서 황순원이 농경사회(農耕社會) 쪽에 방점(傍點)이 찍힌 아버지를 보여준다면 최인훈은 산업화(産業化) 쪽으로 살짝 중심이동을 한, 그러나 여전히 전통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고향과 관습을 차마 밀어내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다. 이문열의 아버지는 사상과 이념이 부딪치는 정치공간에서 북(北)으로 가 버린 ‘부재(不在)하는 아버지’다.

황순원이 빚어 놓은 아버지상(像)의 모델은 김승호(金勝鎬·1918~1968)를 통해 최불암(崔佛岩·73)으로 이어지고, 최인훈의 아버지는 김진규(金振圭·1923~1998)를 거쳐 전무송으로 흐른다. 실제로, 전무송과 김진규 사이에는 개인적인 인연이 칡넝쿨처럼 얽혀 있다. 전무송의 얘기다.

代打에서 主演으로

젊은 시절 전무송을 거두어 주었던 배우 김진규.

“1965년 10월에 유치진 작(作) <마의태자> 공연이 드라마센터에서 있었어요. 등장인물도 화려하고, 무대장치에도 상당한 제작비를 투입한 대작이었죠. 김보애·남미리·신구·민지환…. 그때 ‘마의태자’로 캐스팅된 분이 당대의 톱배우 김진규 선생이었어요. 나는 김진규 선생이 사정으로 공연하기 어려운 날 대타(代打)로 투입되는 언더 스터디였습니다.”

—기록에 보면 출연자 명단에 김진규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데요.

“공연 며칠 전, 연출가 유치진 선생님이랑 김진규 선생님 두 분이 나를 부르셨어요. 거기서 김 선생이 ‘이 친구 하는 걸 보니까 썩 마음에 들어. 이 역할, 첫 공연부터 네가 다 해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때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멍하고 황홀한 기분, 책임감, 두려움…. 또 하나는 좀 엉뚱한데…, 사실 난 보름 공연하는 동안 김진규 선생님이 거의 다 하시길 바랐죠. 한두 번 기회가 오면 전력을 다해 연기하자는 것이 내 목표였습니다. 당대의 최고 배우와 한번 비교될 기회를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황송하고 짜릿했는지, 다른 사람은 모를 겁니다. 내가 더 잘하겠다, 뛰어넘겠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어느 점이 어떻게 달랐다, 어느 점은 모자랐고 어떤 점은 독특했다, 그런 말을 연출가와 평론가한테 들어보겠구나, 하는 기대…. 그런데, 그런 구상이 다 무너진 겁니다. 물론 좋은 쪽으로. 공연 끝나고 차범석(車凡錫) 선생이 ‘연극아카데미에서 좋은 배우들이 나올 듯하다’고 신문평을 썼습니다. 그래서 많은 용기를 얻었지요.”

은인 김진규

인천중학교 야구부 시절의 전무송(화살표).

서울예술대학이 ‘연극아카데미’였던 시절이다. 이 공연이 끝나고, 유치진은 김진규에게 이 유망한 ‘청년배우’의 앞길을 부탁한다. 충정로 김진규의 집으로 들어가라는 이야기였다. 당장 하루 한 끼 밥 먹는 일이 막연했던 전무송에게, 하루 세 끼와 잠자리가 생긴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처음엔, 영화 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던 김진규 선생에게 매니저와 비서를 겸하는 누군가가 필요하구나 생각했어요.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였지. 한데, 이미 그런 인력은 다 갖추고 계시더라고. 나보고는, 연기 연습에만 전념해라, 그 말씀이 다였습니다. 아무런 ‘의무’도 없었어요. 말 그대로, 식객(食客)이었던 거지. 약수동으로 이사가실 때도 따라가고, 내가 군대 갈 때까지 그로부터 2년간 김진규 선생 댁에서 숙식을 해결했으니…. 은인도 그런 은인이 없어요. 김보애 여사랑 가족들과도 아직까지 연락하며 지냅니다.”

—연기 연습만 했습니까.

“언젠가, 김진규 선생이 <전장(戰場)과 여교사>(1966)라는 영화 촬영 현장에 따라나서라고 하셨습니다. 6·25 때 대한민국이 승전한 첫 전투와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어느 여교사의 실화를 극화한 영화였어요. 내 테스트 기회까지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김진규, 엄앵란, 박암, 이경희 등이 출연한 영화인데…, 그날 현장에서 군복 입고 육군소위 역으로 바로 투입됐어요. 대사도 한두 마디 하고. 완성본에서도 내 출연 장면은 살아남았어요. 말하자면, 이 작품이 내 영화 데뷔작인 셈이죠.”

이 작품 이후 이런저런 단역(端役) 출연 제의가 이어졌지만, 전무송은 ‘제대로 훈련을 하고 실력을 기르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굳힌다. 그래서 병역의무를 마쳐야 본격적인 수련이 가능할 것 같아 군에 입대한다. 1967년이다. 병과는 보병이었는데, 가끔 연예병사 비슷한 일도 했다.

1968년 유치진 선생의 추천으로 지방 도시 순회연극에 캐스팅되어 연극을 했다. 이듬해에는 북한 고위층의 실태를 그린 이한구 작 <이 거룩한 땅에>에 출연했다. 제대 무렵엔 원주에서 강릉으로 옮겨 복무하고 있었는데, 김진규 선생이 제작한 방첩영화에 캐스팅되어 현역군인 신분으로 영화도 찍었다. 전부 ‘고뇌하는 지식인’ 역할이었다.

—배우가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내 연극의 출발점은 허영입니다. 남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기대 말입니다. 말하자면 톱스타들의 화려하게 보이는 삶을 동경한 거지요.”

누군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연처럼 보이는 몇 장면이 본인의 기질, 시대상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창조적으로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전무송의 경우, 소방경찰이던 이모부 앞으로 수많은 영화 초대권이 답지했고, 어린 전무송은 인천 동방극장과 인영극장을 제 집처럼 드나든 것이 ‘필연’의 서막이다.

“내 생애 첫 영화는 존 웨인이 나오는 <역마차>입니다. 6·25 전쟁영화 <순동이> <쿼바디스> <애수> <진홍의 도적> 등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인천중 시절엔 야구를 했습니다. 포지션은 2루수였고. 1학년 때 3학년 선배로 투수를 보던 사람이 나중에 동산고에 진학, 1955년, 57년 제10회, 12회 청룡기 고교야구 우수투수상을 수상한 신인식(申仁植)입니다.”

고등학교 진학 무렵 가세가 기운 탓에 전무송은 ‘졸업 즉시 취업’을 목표로 인천공고에 진학했다. 한데, 거기서 밴드부에 가입하고 클라리넷을 불었다.

연극과 야구와 밴드부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신체를 활용한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남 앞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한 사람들만이 잘할 수 있는 분야라는 것. 그렇다면, ‘배우가 되고 싶다’는 유년의 꿈은 아주 사라졌던 걸까?

연극 <햄릿>의 戰慄

1977년 <햄릿>을 번안한 <하멸태자>에서 하멸태자 역을 맡아 열연하는 전무송.

“아니죠. 어쨌거나 한양대 연극영화과 1기로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했습니다. 한데 집에 등록금이 있을 턱이 없었죠. 상심한 나는 쥐약을 삼켰어요. 인생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거지. 다음날 새벽에 죽지 않고 깨어났습니다. 알고 보니 내가 먹은 게 쥐약이 아니었어요. 희한한 건, 그렇게 깨어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죽어도 죽지 말자’ 다짐하고 좋은 자리에 추천을 받아 취직을 했는데, 공구로 기계를 깎다가 불현듯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라는 느낌이 왔어요, 일주일 만에.”

낮에는 신문배달, 밤에는 서라벌예대에 진학한 친구들과 대폿집에 모여 연극 얘기를 했다. 아예 공연을 하나 해 보기로 작정하고 조심스레 가불(假拂)을 청했다. 거기서, 우연이 다시 손짓을 했다. 인천에 있는 서울신문 보급소 총무가 당시 그의 직업이다. 보급소장의 딸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안내원을 하고 있었던 건 우연이다. 소장은 ‘그런 일에 관심이 있었느냐’며 연극 초대권 두 장을 내밀었다.

“1962년 4월 13일 드라마센터 개관 공연으로 막을 올린 <햄릿>. 극장은 황홀한 공간이었어요. 연극은 황홀한 시간체험을 내게 허락했어요. ‘아,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하는 감격이 밀려왔죠. 김동원(金東園·1916~2006) 선생이 햄릿이었고, 장민호(張民虎·1924~2012) 선생이 왕, 황정순(黃貞順·88) 선생이 왕비로 나왔어요. 연출은 유치진(柳致眞·1905~1974) 선생이었죠.”

기록에 의하면, 이 공연은 한반도에서 막을 올린 첫 번째 <햄릿>이다.

유치진, “먼저 인간이 돼라”

평생의 스승 유치진 선생.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연기를 넋놓고 지켜봤어요. 표 한 장을 아껴 놓았다가 다음 날에도 인천에서 남산까지 먼 길을 달려갔습니다. 두 번째 관극할 때 구입한 연극 프로그램이 또 내 운명을 바꿨습니다. 맨 뒷페이지에 실려 있던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아카데미 학생모집 공고였죠. 망설일 것이 없었습니다. 선반에서 꿀단지를 내리다가 깨트리는 장면을 표현하라는 것이 입학 오디션 과제였습니다. 드라마센터 연극과에 입학했을 때가 1962년 4월 말이었는데, 신구·민지환·이호재·김기수·반효정이 동기들이었습니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연극아카데미 원장 유치진은 전무송의 영원한 스승이다.

“연극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작업한다는 속성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수시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젊은 시절, 나는 떼도 부리고, 어깃장도 놓고, 무대 위에서 행패 비슷한 짓도 마다하지 않던 배우였습니다. 그 당시엔, 그렇게 하는 것이 배우의 자존심을 살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럴 때마다 유치진 선생이 그를 호출했다. “배우로서 네 무기는 관객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힘”이라는 가르침과 “무대에서 배우가 말을 하는 데 10년 걸리고, 제대로 연기를 하려면 또 10년이 걸린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지금도 전무송은 잊지 못한다.

유치진 선생이 그의 예명을 지어 줄 뻔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졸업 무렵 네 명의 남학생을 호출한 동랑(東朗·유치진의 호)은 ‘며칠 고민했는데, 전무송, 이호재 너희 둘은 본명을 그대로 쓰라’고 하고, 민지환에겐 ‘민우공(閔牛公)’이라는 예명을 건넸다. 민지환은 본명 ‘민승환’에서 한 글자만 바꾼 예명을 쓰기로 가족들과 상의해서 결정했다며 고사했다. 결국 유치진의 그날 작명(作名) 가운데 오래갈 구(久) 자를 집어넣은 ‘신구(申久)’가 가장 오래 살아남아 널리 쓰이고 있다.

가난한 배우의 아내

아내 이기순과의 약혼 기념사진.

어려울 때마다 기적처럼 다가왔던 손길 중에 아직도 그가 잊지 못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때는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구하지 못하고 쉬고 있던 어느 날 오후.

“학교에서 졸업시험을 보라고 연락이 왔어요. 누가 등록금을 대신 내준 겁니다. 그 당시 드라마센터에서 미8군악단 오디션을 봤어요. 누군가 내 딱한 사정을 듣고 도움을 주신 거지요. 미8군에서 노래했던 경상도 여자 분이고, 김 아무개로 기억해요. 나중에 KBS ‘TV는 사랑을 싣고’를 통해서도 알아보고, 혹시 몰라서 미국 공연 갔을 때 교포신문에 광고도 냈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언제라도 정말 꼭 만나고픈 은인입니다.”

전무송은 가족에겐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딸 현아가 태어났을 때 우윳값이 없어서 본가의 신세를 졌다. 아내는 먹고살기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옷감 짜는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다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았고, 남대문시장의 도매점에서 날품을 팔기도 했다.

“정말 연극을 그만두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 혼자 살 때는 그나마 버텼는데 결혼은 현실 아닌가요. 8년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집사람은 내 여동생 친구입니다. 사실은, 내가 수입이 없으니 혼기가 다 지나도록 나를 무작정 기다려 준 겁니다.

결혼하면서 피아노를 하나 들여놓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트럭이 와서 그 피아노를 싣고 가 버렸어요. 첫딸 현아를 낳고 얼마 안됐을 때죠. 어떻게 된 거냐고 했더니 ‘빚내서 먹다가 피아노를 팔아서 갚는 거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사실 그 피아노는 사연이 많은 물건입니다. 아내가 처녀 시절 우리 단원들한테 밥도 사 주고 그랬는데, 처가에선 왜 월급이 비냐고 하고, 비는 것이 아니라 결혼 적금 붓는다고 둘러대고, 결혼 후에 ‘그 돈이 이거다’라고 증명할 필요가 있어서 무리를 해서 월부로 들여놓은 것이 바로 그 피아노였어요.

‘그걸 팔아?’라며 갖고 있던 대본을 막 집어던지면서 ‘연극 그만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내가 장사라도 나서면 세 식구 못 먹고 살겠어?’ 그런데 집사람이 엉엉 울면서 ‘배우 전무송하고 결혼했지, 장사꾼 전무송하고 결혼 한 거 아니다’라고 해서 무너졌어요.”

셋방살이 면케 해 준 영화 <만다라>

빈곤을 벗어나게 해 준 것은 한 편의 영화였다. 본인 자신이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던 김성동(金聖東·66)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만다라>다. 1981년 단성사 단관 개봉으로 40만명을 동원, 20회 대종상에서 감독상, 남우조연상, 편집상, 조명상,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기념비적 영화다. 임권택 감독 본인이 꼽는 자신의 대표작이다. 2008년 미국 CNN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과 함께 역대 최고의 아시아 영화 18편 가운데 하나로 선정한 명작이다.

“어느 날 전화가 걸려 왔어요. 영화를 할 생각이 있냐고. 배우에게 알리지도 않고, 임권택, 정일성, 조명감독 세 사람이 분장실로 찾아왔어요. ‘공연 잘 봤다’면서 함께 작업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때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에 출연 중이었던 나는 ‘소설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답했습니다.”

두어 번의 거절 후에, 처음 100만원을 부른 개런티가 300만원까지 올라갔다. 톱스타가 한 편에 300만~500만원을 받고, 국립극단 단원 월급이 10만원이던 시절이다. 집에 수표를 가져다줄 때 손이 떨리던, 빚 모두 갚고 셋방살이 청산하고 전세로 옮기게 해 준 고마운 인연이었다.

각종 영화자료는 <만다라>의 줄거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출가한 지 6년이 넘는 법운(안성기)은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영주(방희)에 대한 미련과 번뇌로 방황을 계속하고 있다. 육체적인 고행을 계속하고 있던 그는 승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땡중 지산(전무송)을 만난다. 술취한 속세의 잡인 같지만 누구보다 세상과 불교에 대한 논리적 명쾌함을 지닌 지산에게 끌린 법운은 그를 따라 길을 떠난다. 잠깐 머물기로 했던 암자에서 마을로 내려간 지산이 돌아오지 않자 법운은 지산을 찾으러 길을 나선다. 그리고 눈 속에서 쓰러져 있는 지산을 발견한다. 불교와 인간고뇌의 심연으로 번민하다 평온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지산. 법운은 하산하여 서울에서 어머니와 영주를 찾는다. 그는 지산이 잊지 못하던 옥순을 만나고 인연의 무상함을 깨닫는데….>

‘지산’ 스님의 탄생

전무송은 1981년 영화 <만다라>에서 지산 스님역을 맡으면서 널리 알려졌다.

촬영 첫날, 전무송은 또 다른 인연의 손짓을 느낀다. 임권택 감독이 물었다.

“‘영화 처음이냐’고 임 감독이 묻기에 ‘아니다. <전장의 여교사>라는 작품이 있었다’고 했어요. 임 감독은 ‘그거, 내가 초년병 시절에 감독했던 작품인데’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구면이었던 겁니다.”

전무송의 말이다.

“<만다라>는 스님들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세계에 대해 뭘 알아야 연기를 하지요. 고민을 거듭하는데 지산의 실제 모델이 서울 어느 절에 계시니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들었어요. 약속을 정하고, 내일이면 만나기로 한 전날 밤 꿈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어떤 꿈이었나요.

“승복을 입은 승려가 낡은 바랑을 어깨에 메고 산을 올라가는 이미지였어요. 그건 내가 대본을 거듭 읽어 가며 그리던 지산의 모습이었죠. 그런데, 돌연 꿈속 인물의 복장이 바뀌더라고요. 평상복에 비닐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모습으로. 꿈속에서도,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물건들이 무언지를 알겠더라고요. 오전 연습이 끝나면 지하 보일러실에서 연탄불에 끓여 먹을 점심용 라면 한 봉지, 트레이닝복 한 벌, 여섯 개비들이 담뱃갑…. 그 사내가 들어간 곳은 절이 아니고 드라마센터였습니다. 그건 바로 전무송, 바로 나 자신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꿈에서 깼어요. ‘바로 이거다!’ 지산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10년 만행(卍行)을 합니다. 그렇다면, 배우의 길은 만행의 길과 무엇이 다른가, 약속은 정중히 취소했습니다. 누군가를 모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자고 마음먹었죠.

촬영을 하면서 가끔 임 감독이 지나는 듯 말했습니다. ‘이상하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잘 안 보이고 자꾸 지산이만 보인다.’”

지산이 전무송이고 전무송이 지산이었다. 자기 자신이면서 등장인물이기도 한 이미지를 전무송은 그날부터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자연스레 표현하고 부드럽게 구축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역할이든지 무리없이 소화하며 롱런하는 비결이다.

오태석과 이호재

1999년 극단 신협의 창작극 <툇자 아저씨와 거목>에서 연기하고 있는 연극계 황금 콤비 전무송(왼쪽)과 이호재.

전무송에게는 친구이자 스승 같은 존재도 있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태석(吳泰錫·73)과 이호재(李豪宰·72)이다. 그 둘과 어울리며 <이식수술> 〈LUV〉 <고도를 기다리며> <물보라> <천 년의 수인(囚人)> <용호상박> 등 숱한 작품을 함께했다. 〈LUV〉(1971. 2.1-15, 3.27-4.6 드라마센터) 때는 세트의 아내들이 무대 위에 함께 올라 고사(告祀)를 지내기도 했다.

한국적 연출론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오태석과의 작업은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나중엔 한없이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전무송의 말이다.

“오태석은 모든 각도에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훨훨 날아다니는데, 그것이 무작정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전후좌우의 인과관계가 단단하게 매듭져서 굴러가는 겁니다. 그래서 오태석과 작업할 때면 나 스스로가 연(鳶)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아요. 아주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지만, 얼레와 실 하나로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오태석과 나 사이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난 본가가 황해도 해주(海州)고 외가가 충청도 서산(瑞山)이에요. 6·25 때 피란 가서 서산에서 한 2년 살기도 했지요. 그때의 정서적 경험이 내 배우생활의 밑천입니다. 그런데, 오태석도 본가 충남 서천(舒川)에서 두어 해 피란살이를 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경험이 서로 통하는지도 모르죠.

내가 배우가 된 데는 외삼촌의 영향이 큽니다. 농사꾼이었던 외삼촌은 정말 탁월한 이야기꾼이었어요. 그 자체가 한 편의 일인극(一人劇)이던 공포괴담을 주로 했어요. 그 이야기의 박자와 맥락, 정조가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을 아직도 느낍니다.”

—이호재는요.

“내가 다다를 수 없는, 한없이 유연하게 굽이치는 연기를 보여주는 친구죠. 그와 함께 무대에 서면, 나는 늘 말할 수 없는 자극을 받아요.”

“소나무 같은 배우”

동년배 연극 평론가인 서연호(徐淵昊·72) 전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전무송과 이호재를 이렇게 비교한다.

“전무송은 존재감이 확실한 배우입니다. 관객들에게 특정한 느낌을 조금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모르게 분명한 이미지를 허물지 않는, 그 선을 지키면서 그는 등장인물들을 창조합니다. 자기 쪽으로 모든 작중인물들을 끌어들여 새로운 모습을 빚어 내는 배우죠. 반면에, 이호재는 존재감을 무화(無化)해서 어디든 존재하는 독특한 연기자입니다. 지적인 성직자와 야비한 폭력배를 동시에 연기해도 둘 다 자연스러울 수 있는 배우요. 전무송이 소나무라면 이호재는 물(水)입니다.”

연출가 임영웅(林英雄·77)도 소중한 인연이다. 오태석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각도에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임영웅은 철두철미하고 정확하게 나갈 길을 탐색하는 지도제작자 같은 연출가다.

“임영웅이 배우들의 발걸음 하나, 심지어는 1, 2초 사이의 시선처리까지 통제한다며 ‘너무 배우를 옭아매는 것 아니냐’고 불편해하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그와 여러 작품을 함께 해 본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늘 임영웅이 옳았어요.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동기를 낱낱이 분석해서 ‘이 사람, 이런 상황에 놓인 이런 성격의 인물이라면 여기서는 이렇게 움직였겠구나’라고 판단을 하고 그 자료를 임영웅의 연출 플랜과 비교하곤 했습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임영웅이 몇 달 전에 말한 내용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탐험을 했는데, 신천지라고 생각했던 땅이 사실은 임영웅이 예전에 탐색을 끝내 놓고 구획정리까지 마쳐 놓은 지역이었다는 느낌?”

연극인 가족

사위 김진만(왼쪽), 딸 현아(오른쪽)와 함께.

전무송은 딸, 아들, 사위가 모두 연극을 한다. 장녀 현아는 극작과 연기, 아들 진우는 연기, 사위 김진만은 연출이 주특기다. 한 번도 아이들에게 연극을 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 딸이 연극을 하겠다고 결심을 밝혔을 때도 처음엔 반대했다. ‘아버지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을 하지 않았느냐’는 딸의 공격에 무너졌다. 대신, ‘스타가 되고 싶어 연극을 하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 보고, 정말 연극이 좋아서 하는 얘기라면, 하고 싶은 일이니 마음껏 하되 그 대신 ‘제대로 하라’고 기준선을 그었다. 아들은 ‘누나’의 전례(前例)를 무기로 아버지를 압박했다. 딸과 연극인 사위의 결혼을 허락한 것은 장문(長文)의 편지 공격에 져서였다.

—자녀들이 연극을 하게 된 것은, 조기교육의 영향 아니었나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내는 장사하러 나가고, 아이들만 집에 둘 수 없으니 연습장엘 자주 데리고 간 것은 사실이지요. 하지만, 자기들의 적성과 성격에 맞았으니까 이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생각해요. 난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어요. 연기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도 매정하게 뿌리쳤죠.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예술인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내 연기를, 습관을 아들 딸이 모방한다는 건 정말 상상하기 싫었으니까요.”

그렇게 매정했던 아버지에게, 딸 아들 사위가 프로젝트 하나를 불쑥 들이밀었다. 2012년 11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 ‘전무송 연극배우 데뷔 50주년 헌정공연’ <보물>. 딸이 희곡을 쓰고 사위가 연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서 연기를 했다. 친구 오영수와 몇몇 후배가 힘을 보탰다. 그 공연에서도 전무송은 ‘아버지’ 역을 맡았다. 한때 정점을 찍었으되 이제는 기억하는 이가 드물어진 노배우.

“나는 무대 위가 정말 편하다”

“난 환갑잔치, 생일잔치 안 챙기고 살았어요. 후배들이 칠순기념 공연을 하자고 했을 때도 손사레를 쳤지요. 나보다 선배도 많이 계시는데…. <보물>은 내 얘기라서 공연을 승낙한 것이 아닙니다. 가족끼리, 일반 공연하듯 작품을 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서 시작한 겁니다.

난 아이들에게 ‘배우’ 전무송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아가 가져온 대본에 내 평소 습관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더라고요. 입 밖에 낸 적이 없는, ‘그때 이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속마음까지 들어가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속절없이 들켜 버린 거니까.”

—자, 이제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훌륭한 배우란 어떤 사람인가요? 자식들이 어떤 배우가 되기를 희망합니까.

“작가와 연출가의 의도를 100% 이상 끌어내 표현하는 것이 좋은 배우입니다.”

—전무송 연극의 출발점은 허영이라고 말했죠. 지금은 어떤가요.

“나에게 연극은 인격도야와 품성향상, 그러니까 평생 공부를 하는 도구입니다. 연극배우란, 모든 인생을 맛보고, 섭렵해 보고, ‘실제로’ 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이에요. 나이 먹으면 좋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타인(他人)의 시선과 평가가 어떤지에 더 이상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죠. 난 무대 위가 정말 편합니다.”

6·25의 기억

—후학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은인들로부터 고비마다 도움을 받고 여기까지 온 내 인생이 그 증거죠. 사람 일은 모르죠. 사실은, 이미 벌어진 일도 잘 모릅니다.

6·25 때, 9·28 수복 다음 날이었어요. 라디오를 듣고 은신해 있던 우익인사들이 다들 읍내로 나왔어요. 근데 좌익들은 어쩐 일인지 방송을 못 들은 겁니다. 우익들은 당연히 좌익들이 도망갈 걸로 예상했는데, 좌익들 입장에선 뜬금없는 일이 벌어진 거지요. 아직 좌익들이 물리력을 장악하고 있던 때라 그 사람들, 우익 인사 하나를 쌀뒤주에 가둬 넣고 톱으로 썰었어요.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피가 번져 나오고…. 다행히 목숨은 건졌는데, 탈출한 우익들이 이웃 군(郡)에서 지프차에 지원병력을 태워 들이닥쳤어요. 그제서야 사태파악이 된 좌익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고…. 그걸 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열한 살쯤 됐을 때예요.

어떤 일을 할 땐 국익(國益)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아래 세대에겐, 삶이 가정이 나라가 뿌리째 뽑혀 흔들리는 불행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보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해요. 애국(愛國)해야 합니다. 그러면 실수를 많이 줄일 수 있죠.”

인터뷰 말미, 노배우의 입에 실려 전해지는 ‘국익’과 ‘애국’의 의미와 무게가 묵직하게 필자의 마음을 관통했다. 이건 바로, 우리네 ‘아버지’들의 육성이요 음성이며 생생한 당부가 아니겠는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문자를 넣었을 때, 전무송은 ‘그대 말씀 거역할 수 없지. 저녁 늦게 전화주시게’라며 답신을 보내 왔다. ‘끝나고 저녁도 함께 하시죠, 막걸리 한잔 모시겠습니다’라는 회답엔 ‘좋지 좋아!***’라는 답글이 들어왔다.

평생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고, 딸 아들 사위까지 모두 연극에 입문해서 글자 그대로 ‘연극일가(演劇一家)’를 이룬 대배우의 건강함이 느껴지는 문자였다. 필자는 그래서 그 문자를 아직 보관 중이다. 전무송은 삶에 대한 긍정과 사회를 바라보는 따뜻한 에너지가 충만한 예술가였다. 전무송은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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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가족 이룬 전무송

“내 연극의 출발점은 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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