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한국군 전력증강사업의 산증인 金容浩 전 록히드마틴 부사장 : 월간조선

2002년 8월 20일 오후 3시30분,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천비행장 5000피트 상공을 뒤덮었던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T-50을 하늘로 날려야 하는 비행통제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T-50은 시험지원기인 KF-16과 함께 활주로에 들어섰다.

먼저 KF-16이 하늘을 박차고 날아오르자 이어 황금빛으로 치장한 T-50 ‘골든 이글’이 경쾌한 비행음을 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T-50은 사천비행장의 파란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T-50 시제 1호기에 탑승한 시험비행사 조광제 중령은 비행통제실과 숨가쁜 교신을 했다. 계기판은 항공기 계통들이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40분이 지난 오후 5시4분, 랜딩기어를 편 T-50이 날렵하게 사천비행장에 착륙했다. 초도비행은 대성공이었다. 조 중령은 T-50에서 내리는 순간, 동료들로부터 샴페인 세례를 받았다. 마하 1.5의 초음속 비행기를 우리 손으로 개발한 것이었다. T-50의 비행 성공은 우리나라가 세계 12번째 고유모델 초음속 항공기 생산국이 됐음을 대내외에 공표하는 순간이었다.

그 역사적인 장소에 T-50 출생의 산파(産婆) 역을 담당했던 한 중년의 사나이가 감격스런 표정으로 첫 비행에 성공한 조 중령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1980년대 말 제너럴다이내믹스 한국지사장으로 T-50의 개발 아이디어를 냈던 김용호(金容浩) 박사였다.

“첫 국산 초음속 고등훈련기, 내 머릿속에서 출발”

2002년 8월 20일 경남 사천 공군기지에서 최초의 국산 초음속 항공기 T-50(별칭 ‘골든 이글’)이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작은 사진은 시험비행을 한 조광제 중령.

미국을 대표하는 항공기 제작사 록히드마틴에서 34년간 일하다 지난 4월 말 퇴임한 김용호 박사는 “첫 국산 초음속 고등훈련기가 내 머릿속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며 T-50 고등훈련기가 초도 시험비행을 위해 사천에서 이착륙한 시각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 박사는 “F-16 전투기 오프셋(절충교역) 매니저를 하면서 조국인 한국 항공산업의 자립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며 “F-16 전투기 절충교역 사업으로 T-50 고등훈련기 개발을 본사에 제안했던 일이 가장 보람으로 남는다”고 했다. 김 박사는 세계 제1의 군수분야 다국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근무하면서 한국군의 전력증강사업을 최전선에서 지켜본 인물이다. 김 박사는 록히드마틴의 전신인 제너럴다이내믹스(GD)에 근무하면서 52억 달러에 달하는 F-16 면허생산 계약을 따낸 것을 비롯해, 레이더, 무궁화호 인공위성, 장거리 대공미사일, 이지스구축함 전투체계, P-3C 대잠초계기, C-130 수송기 사업 등 수많은 무기도입 사업을 성사시켰다.

—방위산업 분야 다국적기업 CEO로서 35년간 근무는 최장수 기록 아닙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1979년 8월 18일 미국 제너럴다이내믹스에 입사해, 1989년 1월 한국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아 25년을 근무했습니다. 100년 전통을 가진 회사에서 아시아계로는 최고위직(부사장)까지 올라갔으니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김용호 박사는 1971년 2월 경기고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5월 해군 장교후보생(52기)으로 군에 입대했다. 박상은(朴商銀) 새누리당 의원, 안경률(安炅律)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 임성준(任晟準) 전 외교안보수석, 이순형(李舜珩) 세아그룹 회장이 동기다. 3년 6개월 복무를 마치고 서둘러 미국 유학을 떠날 참이었다. 항해 병과였던 그는 구축함(DD92)을 타다 1972년 국방과학연구소(ADD)로 파견근무를 가게 된다.

—현역 장교를 왜 ADD로 파견했답니까.

“1971년 7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국방부장관과 ADD 소장을 불러 놓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라’며 병기개발 사업을 지시합니다. 이른바 ‘번개사업’이죠.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침투와 북한의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터지면서 자주국방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마침 미국도 자국 방위의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는 닉슨독트린(1969년)을 발표하고, 미 7사단을 한국에서 철수(1971년)하는 등 안보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입니다.

한국은 6개월 만에 카빈소총·기관총·수류탄·유탄발사기·박격포 등 여덟 종류를 베끼는 데 성공합니다.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2차 번개사업을 추진합니다. 그때 제가 육·해군, 해병대 장교 24명과 함께 서울 효자동 ADD로 파견돼 품질검사 요원으로 일했습니다. 4부1실에서 3.5인치 로켓발사기를 미국에서 받은 ‘밀 스펙(military specification)’ 규정에 따라 검사를 했습니다.”

김 박사는 “우리가 현재의 방산물자의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국방기술품질원(DTAQ)의 원조격인 셈”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의 방산육성 정책에 따라 당시 검사장교로 근무했던 공대 출신 장교들은 우수한 자원들이었다”고 했다.

1974년 2월 22일 해군훈련소 소속 해군·해경 훈련병 316명을 태운 해군 예인정이 풍랑으로 경남 통영 앞바다에 침몰해 훈련병 159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정원 150명의 예인정에 두 배가 넘는 인원을 태워 운항한 것으로, 세계 해군 사고사(事故史)에 기록되기도 했다. 김 박사는 훈련소 장교들이 대거 구속되는 바람에 전역 6개월을 남기고 졸지에 훈련소 중대장으로 차출된다.

서울工大 교과서의 저자, 파인 교수를 만나다

김용호는 미국 학기를 맞추기 위해 ADD에 시험을 치르고 민간인 연구원으로 1년간 근무한 다음 미국 유학을 떠난다. 1975년 월터 머피 펠로(Walter Murphy Fellow) 장학금을 받고 미국 중부 명문 노스웨스턴대학 재료공학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노스웨스턴대를 선택한 이유는 뭡니까.

“하버드와 MIT(매사추세츠공대)의 입학허가도 받았지만, 당시엔 장학금 없이 유학을 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서울대 금속공학과 재학 시절 노스웨스턴대 교수들이 집필한 원서(原書)들을 공부했던 게 크게 작용했습니다. 모리스 파인(Morris E. Fine) 교수가 교과서 편집장이었고, 〈Dislocation(금속 결정의 변형)〉, 〈Transformation (금속의 변태)〉 등 교과서 저자들을 만나 공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습니다.”

김용호의 해외 유학길은 험난했다. 그의 부친 김기수(金起洙) 박사는 시립아동병원(현 서울특별시 시립어린이병원) 원장이었다. 만주 출신인 김기수 원장은 일본인들조차도 ‘곰보라도 묻지 않고 딸을 준다’는 도쿄 제1고교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교토제대 의대를 나온 수재였다.

“유학을 떠나기 전 아버지께서 ‘내가 모아 둔 돈으로는 비행기 표를 사고 나면 하나도 남지 않는다’며 ‘홀트양자회로 미국 입양을 가는 아이 셋을 동반하면 무료로 미국을 갈 수 있다’고 하셨어요. 도쿄→알래스카→시애틀을 거쳐 종착지인 미네소타에서 아이들을 현지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에 인계하고 시카고로 가야 했습니다.

갓 돌 지난 아이 둘에 4살쯤 되는 남자아이를 데려가는데, 보모와 떨어지면서 까무러치게 울어요. 공항에 나오신 아버지가 당신의 못 이룬 꿈을 이루어 달라며 제 속도 모르고 ‘노벨상 받기 전엔 돌아오지 마라’고 하시는데, 얼마나 야속하던지….

도쿄에 내렸을 때, 미국인 여성들이 ‘May I?’ 하며 아이들 기저귀를 갈아주고, 신기하게도 4살짜리 사내아이는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를 불렀어요. 그 사내아이가 헤어질 때 그렇게 울었는데, 지금쯤 40대 초반의 중년으로 성장했을 겁니다. 아이들을 인계하고 시카고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렵사리 노스웨스턴에 도착한 김용호는 재료공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모리스 파인 교수를 지도교수로 해 3년 4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의 최단기간 학위 취득은 지금도 노스웨스턴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의 논문 <재료의 피로현상에 의한 균열의 이론적, 실험적 연구>는 1980년 미국 금속학회지가 주는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한국일보》(1975년 7월 20일자)에 따르면, 김용호 박사는 “아무리 단단한 쇠붙이라도 오랫동안의 운동을 통해 피로가 쌓이면 갈라지게 된다”며 “시카고 오헤어공항에서의 DC10기 추락사고 원인도 철강의 피로현상에 의한 균열(fatigue crack)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DC10기에 생긴 바늘귀만한 금이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커진 끝에 끝내는 비행기를 추락시키는 원흉이 됐다”며 “가장 단단한 금속재료를 사용해서 제작한 미국의 최신예 전투기 F-16도 8000시간 이상 비행하면 피로에 의한 균열현상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연구실을 떠나 F-16국제사업단으로

1971년 2월 서울공대 졸업식에서 부친 김기수 선생과 함께한 김용호.

김 박사는 모리스 파인 교수와 함께 재학시절 3년 반 동안 16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파인 교수는 김 박사에게 “미국에서 교수로 크려면 리서치 펀드를 따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업체의 생리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국 이민국에 이야기해 비자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김 박사는 1979년 8월 당시 F-16사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제너럴다이내믹스(GD)의 재료연구실 연구원으로 첫 출발을 했다. 김 박사는 “당시엔 연구생활에 심취해 재료공학 분야의 권위 있는 전문지에 논문을 가장 많이 낸 사람으로 기록되자는 심정으로 일에 몰두했다”며 “당시 GD 사상 가장 큰 200만 달러짜리 리서치 프로젝트를 따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 연구실의 프로젝트 중 하나는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기술 개발이었다고 한다. 이 사업은 철저한 보안과 통제 속에서 은밀히 진행됐기 때문에 회사 내 다른 부서 사람들의 접근도 완전히 차단돼 있었다. 김 박사는 “이 기술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실용화 단계를 거쳐 걸프전과 이라크전에서 응용됐다”며 “미국의 5세대 전투기인 F-35와 최신예 전투기 F/A-22의 기본개념이 됐다”고 했다.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81년 무렵, 주영복(周永福) 국방부장관이 F-16 구매를 타진하기 위해 GD 포트워스 본사를 방문했다. 그들은 기술적 문제로 한국말을 하는 엔지니어를 찾았고,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김 박사는 통역으로 차출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 정부는 F-16 구매를 타진했으나 카터 대통령이 한국의 인권(人權)을 트집 잡으며 판매를 하지 않았습니다. 전 대통령이 취임 후 미국을 방문하면서 레이건 대통령에게 요청해 36대를 직접 구매하게 됐다는 겁니다.

주영복 장관 방미 통역을 계기로 GD의 F-16국제사업단이 한국과 스위스의 F-16 공동생산 담당 책임자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해 왔습니다. 공학도로서 외도(外道)의 길로 들어선 셈이죠.”

1982년 F-16국제사업단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88년 GD 한국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을 때까지 6~7년간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국 정부가 F-16 36대를 직구입하는 사업(피스브릿지I)에 이어 추가로 120대의 전투기를 입찰로 구매하는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 구매사업(KFP)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KFP는 GD의 F-16과 노스롭의 F-20의 2파전이었습니다. F-20은 F-5 E/F 제공호를 변형한 F-5G였습니다. 한국 측에서 ‘F-5 E/F의 이름만 고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일자, 노스롭은 마케팅을 위해 F-16보다 숫자를 높여 F-20으로 내놓았습니다. F-20은 괜찮은 비행기였으나, F-16에 ‘끝발’에 살짝 밀려 F-16이 1000여대의 주문을 확보할 동안 한 대도 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노스롭은 전 대통령의 보스인 박종규(朴鐘圭) 전 청와대 경호실장을 에이전트로 썼습니다. 불행하게도 노스롭은 시제기 3대를 만들어 에어쇼에서 무리한 기동을 하다 세 대 모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시제기는 성남비행장에서 국방장관이 관람하는 가운데 추락했습니다. 노스롭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타월을 던졌습니다. 사람에게도 운명이 있듯 비행기에도 운명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럼, 단군 이래 최대의 사업이라 불린 KFP사업에서 F-16이 단독으로 입찰하게 된 것이군요.

“그렇지 않아요. F-20이 탈락하자 한국에서는 ‘GD의 콧대가 높아지면 가격이 올라갈 것’이라며 ‘경쟁을 시키자’고 합니다. 맥도널더글러스(MD·현 보잉)의 F-18이 등장합니다. MD 스스로도 자신들을 ‘들러리’라고 했고, 실제로 F-18은 해군의 항모용 비행기였으니까요. F-18은 항모용이라 랜딩기어가 크고 부식(腐蝕)을 우려해 기체 소재를 알루미늄 대신 티타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무게가 무겁고 값이 비쌉니다.”

청와대와 국방부·공군의 싸움

1974년 8월 해군훈련소 중대장 근무시절의 김용호 박사(가운데).

김용호 박사는 당시 GD 텍사스 포트워스를 방문했던 한국의 수많은 VIP들 중 이기백(李基百) 국방부장관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1983년 미얀마의 아웅산 폭파사건으로 중상을 입고 10개월간 입원했다 퇴원한 이기백 장관은 장관이 되자 “텍사스 포트워스의 GD 공장을 방문하기 전에 한국에서 F-16 전투기를 꼭 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

이 장관은 비행을 위한 신체검사와 몇 주간의 체력보강 훈련을 받았다. 회사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력의 여섯 배를 감당해야 하는 6G 기동(F-16은 인간의 한계라는 9G까지 가능)까지 경험했다.

“전투기에서 내렸을 때, 이기백 장관은 얼굴의 실핏줄 일부가 터졌고 붉게 상기돼 있었습니다. 전투기 트랩에서 내리면서도 흥분된 표정으로 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경쟁이 절정에 달하던 1988년, 스탠리 페이스 GD 회장은 한국 문화와 언어에 능통한 사람에게 책임을 맡겨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페이스 회장은 고위 경영진에게 김 박사를 한국 지사장으로 발령하는 것이 어떤지 물었다. 미국 본사의 일부 이사진은 “한국인이 미국의 다국적 기업, 그것도 군수업체의 대표로 임명되는 것이 적합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세계 최대 군수업체인 미국 GD의 한국지사장으로 40세 초반의 한국인이 임명된다는 것 자체가 뉴스였습니다. 더구나 한국의 전력증강사업 사상 최대 액수였던 50억 달러 규모의 사업을 놓고 업계 라이벌인 MD와 피 말리는 경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반대하는 쪽은 지사장이 한국 정부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적인 상황, 외국회사로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한국 정부의 불필요한 압력, 또는 이해가 상충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페이스 회장은 저를 1989년 1월 한국지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미 F-18로 전세가 기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부임하고 나니 언론 보도라든가 한국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습니까.

“공군이 국방부 이상훈(李相薰) 장관에게 단발엔진과 쌍발엔진에 대해 보고한 것을 보니 완전히 편파적이었습니다. 그때 김송웅(金松雄) 신한시스템 대표(작고)를 통해 청와대에서 GD의 자료를 보내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나는 국방부와 공군을 뛰어넘어 청와대 안보수석실의 김희상(金熙相) 국방비서관, 정광호(鄭光鎬) 과장에게 직접 데이터를 만들어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히 물어봐도 정성스럽게 책자로 만들어서 갖다 주니 그쪽 분들이 반했다고 들었습니다.

MD의 에이전트들은 ‘김용호의 경기고 선배인 김종휘(金宗輝) 외교안보수석이 GD사를 봐주려고 재검토를 지시한다’는 소문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김 수석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은 이후 율곡 감사에서도 밝혀졌습니다.

아무튼 그때까지는 공군·국방부는 F-18, 청와대는 F-16 지지로 팽팽하게 맞서 있었습니다. 두세 번의 재검토 지시 끝에 결국 이상훈 국방장관, 정용후(鄭用厚) 공군참모총장, 최동환(崔東煥) 전투기사업단장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에게 이 결과를 보고했고, 1989년 12월 F-18로 공식 결정됐습니다. 노 대통령이 ‘F-16으로 하려면 국방부장관과 공군총장의 합의를 얻어 오라’고 하는 바람에 김종휘씨가 손을 들었답니다.”

—F-18에 패한 결정적인 요인은요.

“MD는 들러리라고 하면서도 우리와 달리 에이전트 회사를 2개나 동원해 로비를 펼쳤고, ‘싼 게 비지떡’이라고 F-16에 대해 흑색선전을 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엔진이었습니다. F-18은 쌍발엔진이고, F-16은 단발엔진입니다. 실제 사고율은 거의 차이가 없는데도 심리적으로 공군, 특히 조종사와 가족들은 F-18을 선호했습니다.

면허생산으로 엔진을 생산하게 될 삼성항공도 엔진을 120대 만드는 것보다 240대를 만드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대놓고 F-18을 밀었습니다. 처음 단독 드리블 상황에서 ‘어어~’ 하다가 당한 거죠. 사람들은 ‘식모가 주인마님 내쫓고 안방을 차지한 드라마’라고 했습니다.”

김용호 박사는 “삼성항공이 KFP사업의 주계약자로 선정된 것도 GD에 크게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회고했다.

“1986년 당시 KFP 주계약자 경쟁에서 한국국방연구원(KIDA)이나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실사를 통해 대우, 대한항공, 삼성항공 순으로 평가서를 올렸습니다. 이때 삼성그룹의 이병철(李秉喆) 회장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이 회장이 전 대통령을 찾아가 ‘이 몸은 암에 걸려 1~2년도 못 사는 시한부 인생인데, 마지막 소원이 국책사업인 KFP 주계약을 따서 국가에 봉사하게 해 달라’고 읍소했다고 합니다.

실사팀이 3위로 평가한 삼성정밀이 주계약자로 발표되고 삼성정밀은 삼성항공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GD와 관계가 좋았던 이동복(李東馥) 사장은 물러나고 MD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신훈철(申勳澈)씨가 사장에 임명됩니다. 이때부터 삼성항공은 MD사의 F-18을 본격적으로 밀게 됩니다.”

F-18, 35% 인상된 가격 요구로 탈락

모리스 파인 교수(가운데)의 95세 생신 때 에반스톤 일리노이를 찾은 김용호 박사 부부.

—그로부터 1년 3개월 후 F-16으로 사상 초유의 기종결정 번복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MD사가 제공한 F-18 가격은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했습니다. 전 세계에 공급되는 F-18의 가격은 F-16보다 약 50~60% 고가인데, 유독 한국에 제안한 가격은 약 20%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반면, F-16의 가격자료는 항상 일정해 가격 신뢰도가 높았습니다. 계약할 때 대폭적으로 MD가 가격인상을 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판단해 청와대와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실제로 MD는 1990년 6월 계약 과정에서 50억 달러가 아닌 68억 달러를 요구했다. 처음 금액보다 35% 인상된 금액을 부른 것이다. 경제기획원은 “지금 어느 때인데 18억 달러를 더 내놓으라고 하느냐”며 예산을 줄 수 없다고 국방부에 통보했다. 50억 달러로 80대의 F-18을 사느냐, 120대의 F-16을 사느냐의 싸움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 언론도 “정해진 예산 안에서 가격도 저렴하고 체공시간이 긴 전투기가 선정돼야 한다”며 “한국은 F-16 선정이 국익에 훨씬 유리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종구(李鍾九) 장관은 공군이 “어떤 기종이든지 공군 전력상 꼭 120대 전투기를 구매해 달라”고 하자, 1990년 9월 재입찰을 지시했다.

MD는 “한국 정부가 가격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라며 “재검토해도 바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언론에 얘기하다 이종구 장관에게 경고를 받기도 했다. GD도 “한국 정부가 쇼를 하는 것이니 제안서를 다시 쓸 필요가 있느냐”며 MD와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김용호 박사는 “데인 행칵 사장과 함께 회사 중역들에게 분명하게 우리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며 강하게 읍소한 끝에 겨우 100만 달러 이하의 최소한의 제안서를 내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결국 1991년 3월, 정부는 KFP 사업자로 GD를 선정했다. 1년 3개월 만의 번복 결정이었다.

—드라마틱한 순간이었을 텐데, 본사에서 어떤 전문(電文)이 날아왔습니까.

“데인 행칵 사장이 ‘I will never say never(절대 안될 거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겠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보내 왔습니다. 본사 간부들은 UPI, AP 등에서 한국 정부가 F-16으로 기종을 변경했다고 전 세계로 타전할 때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청와대에서 F-16을 밀었던 김종휘 수석과 김희상 보좌관, 정광호 과장(1993년 위도 서해페리호 전복으로 사망)은 정말 국가와 민족을 위해 F-16을 밀었던 분들입니다.”

—GD사는 다 놓쳤던 사업을 잡은 셈인데, 특별한 대우를 받았겠습니다.

“보너스로 1만 달러를 받았는데, 지금 1만 달러 주고 그 일 하라면 못할 겁니다(웃음). GD는 43세인 저를 최연소 아시아계 본사 부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당시로서 파격적인 승진을 시켜 준 거지요. 1993년 록히드가 GD의 항공분야 인수, 샌더스 전자회사 인수, 록히드와 마틴 마리에타 합병, 로랄과의 합병 등 네 번에 걸친 합병 과정에서 한국 지사 대표로 임명한 것도 큰 특혜를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YS 정부의 율곡감사, 애국자에서 피의자로 몰려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 전두환 정권이 피스브릿지 사업으로 직구매한 F-16이 잠실 주경기장을 비행하고 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전 정부와의 차별화를 시도합니다. 하나회 숙청에 이어 율곡감사를 벌이면서 F-16 선정 문제도 감사대상이 됐지요.

“F-18을 선정할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정용후씨가 노태우 정권 말기에 인사비리로 전역식도 없이 옷을 벗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정용후씨는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인사비리와 관련 없고, F-16파에게 총을 맞았던 것’이라고 해서 율곡감사가 시작됐습니다. F-18의 에이전트들도 원격조종을 통해 감사원에 투서질을 해댔습니다.

그 때문에 검찰에 출두해 52시간 피의자로 조사도 받고 예금계좌 추적도 받았습니다만, 결국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종구 장관도 GD 사람들의 예방을 받고 커피를 세 차례나 사준 게 전부라고 공언했습니다.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조사 때 또 한 번 대검 중수부의 조사를 받았고, 미국 회계감사원(GAO)과 연방수사국(FBI)의 조사도 받았습니다. 군이 100% 깨끗하다고 말할 만큼 군을 잘 알지도 못하지만, 여러 직업집단 가운데 상대적으로 깨끗한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록히드마틴은 회사 정책상 에이전트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록히드마틴은 1993년 30여개 회사가 합병을 한 대규모 기업집단입니다. 록히드마틴에 속한 대부분의 회사들은 에이전트를 고용해 커미션을 줍니다. 하지만 GD 포트워스(항공분야)만 회사 정책으로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에이전트에게 커미션을 주면 주변에 인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부정의 원천이라고 보는 겁니다. 1970년대 초 록히드-다나카 스캔들 이후 미국은 해외부정부패방지법(FCPA)을 제정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공정성·투명성·도덕성을 요구합니다. 커미션을 쓰지 않아야 살아남는 법입니다.”

김용호 박사는 “솔직히 보수정권이라고 불리던 시절 방산업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YS(김영삼) 정부는 군인들을 ‘부패집단’으로 취급했고 율곡사업 비리를 감사한다면서 방산업체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격이었다”고 했다.

“MB(이명박) 정부도 공공연하게 ‘방위산업체는 20% 정도의 리베이트가 존재한다’면서 ‘이러한 거품만 제거해도 예산 범위 내에서 무기도입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김영삼 대통령은 면허 생산된 KF-16의 롤아웃(roll-out·출고) 행사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친북좌파 정권으로 불리던 김대중(金大中),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시절에는 F-15K나 이지스함, 잠수함 등 대형 프로젝트들이 순조롭게 굴러 갔습니다.”

—국내 방위산업을 육성하려면 정부가 어떤 스탠스를 가져야 할까요.

“지금 방위산업계는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대기업도 방위산업에서 손을 떼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방산 종사자들을 우대하며 온갖 세제혜택에 금융혜택을 주면서 육성했습니다. YS 정부는 군을 부패한 집단으로 몰았고, 이회창(李會昌)씨는 감사원장 때 정치적 야심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는 바람에 군의 이미지까지 더욱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율곡사업에서 비리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이를 언론에 바로 알리지 않아 국민의 머릿속에는 ‘율곡사업=비리’라는 등식이 성립된 겁니다.

YS나 MB처럼 대통령이 방산업계를 비리집단으로 몰면, 그 밑의 권력기관장들은 총대를 메고 방산을 뒤지고, 뒷거래가 안 나오면 원가 부풀리기나 보안 누설로 얽어매니 방산업계 종사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는 겁니다. 정부가 방산을 바로 세우려면 우선 군(軍)을 믿어야 합니다.”

T-50 고등훈련기, 미국시장 석권 가능성 높아

F-16에 탑승한 이기백 국방부장관(위). 김용호 박사가 텍사스 GD 본사를 방문한 이기백 장관에게 브리핑을 하고 있다.

—GD의 오프셋 매니저로서 고등훈련기 T-50 개발을 제안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미국은 훈련기(trainer) 시장이 데드마켓(dead market)입니다. 우리가 F-16 도입을 계기로 록히드마틴에서 설계와 개발기술을 가져오면, 우리가 미국 훈련기 시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실제로 미국은 T-X 프로그램으로 30년이 지난 T-38훈련기를 교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300~600대 정도의 수요가 예상되고 있고, 대당 200억원씩만 잡아도 10조 사업입니다. KAI가 지금 인도네시아에 T-50 판매에 성공하고 이스라엘, 터키, 아랍에미리트(UAE), 싱가포르와 타진하고 있는 것도 미국의 T-X사업을 염두에 둔 브릿지 사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현재 미국의 시퀘스터(sequester·연방정부의 예산 자동삭감)로 사업이 연기되고 있지만, 록히드마틴을 앞세우면 사업 성공 확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이미 경쟁사인 이탈리아 알레니아 아에르마키가 M-346을 앞세우고 보잉사와 팀을 이뤄 사업 참여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미 공군이 우리 훈련기를 사게 되면 T-50은 전 세계의 훈련기로 부상할 겁니다.”

김 박사는 “그런 측면에서 이번에 KFX사업도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5세대급 하이레벨 전투기를 개발하면 미국산 전투기와 붙어 승산이 없기 때문에 로레벨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며 “로레벨 시장이 바로 T-50 시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시점에 영어로 ‘sharpen the pencil’을 해야 합니다. T-50을 T-X사업으로 보내고, KFX사업을 로 엔드(low end)급으로 F-16 전투기에 플러스 알파기능을 갖추도록 하는 겁니다. 섣불리 스텔스 성능을 갖춘 비행기를 만들자고 하는 건 투자 효과 면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어설프고 편협한 애국입니다.”

김 박사는 “정부는 항공 발전 장기 마스터플랜을 국민들에게 알려주고 이를 정권이 바뀌더라도 변경하지 말아야 한다”며 “항공산업은 100% 국산화·자립화한다는 것은 비용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항공기를 어느 단계까지 자립할 것인가 최적화(optimization)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23억5000만 달러(약 2조6261억원)의 무기를 수출해 세계 10위권에 올라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술을 전수했던 나라들과 경쟁을 벌이며 세계 무기시장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탄약에서부터 자주포, 함정, 초음속 훈련기에 이르기까지 수출 품목도 다양화했다고는 하지만, 내실을 들여다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무기수출 실적 자체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완제품 멘털리티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일본은 외국의 무기체계를 도입하면서도 영리하게도 기초체력을 늘리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무기수출의 핵심은 키(key)가 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 능력을 갖추는 겁니다.

록히드마틴은 하드웨어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삽니다. 록히드마틴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숫자가 마이크로소프트(MS)사보다 많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소프트웨어가 ‘권력’입니다. 미국 방산업체들은 수리 부분의 노하우는 전해 주더라도 소프트웨어 기술은 절대로 내놓지 않습니다.

우리 방산업계가 살려면 핵심부품을 개발하는 소위 ‘니치 마켓(niche market·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23억 달러를 수출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핵심기술을 보유하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나라가 전투기의 핵심 부품을 만들고 있다면, 미국은 전투기 오프셋 프로그램에 선뜻 협력할 겁니다. 결국 미국이 보호하려는 기술은 보호하도록 인정하고, 우리는 어떤 핵심기술을 개발해야 할지 정해서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러시아의 군사기술이 발달돼 좋은 무기체계들이 나오고 있는데도, 전세계적으로 팔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러시아와 미국의 멘털리티 차이죠. 러시아는 기초과학 기술이 발달해, 예컨대 인공위성을 해상 1~2km 반경 안에 떨어뜨리도록 합니다. 미국은 그 정도의 실력은 있지만,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관심이 많아 100~200km 반경에만 떨어지면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러시아는 에어쇼에서 수호이-35 코브라 기동을 보여주며 관객들을 환호하게 하지만, 미국은 전투시 취약한 코브라 기동을 위한 기체설계를 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와 달리 록히드마틴이나 보잉 등 미국 방산업체들은 피를 말리는 경쟁을 통해 자기 발전을 이룩합니다. 자동차에서는 2등 업체가 더 작은 파이를 먹으면서 살 수 있지만, 군수업은 달라요. ‘모 아니면 도(all or nothing)’입니다. 노스롭그루먼의 F-20 성능이 F-16에 못지않았음에도 2등이었기 때문에 사라졌습니다.”

최후의 만찬

김용호 박사는 1992년 연세대 최고경영자과정에서 <군수산업 미래에 대한 전략적 사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은 1993년 1만개에 달하는 미국 방산업체들의 통폐합 과정과 그 이후 주가 변동상황을 고찰한 것이다. 1993년 7월 레스 에스핀과 윌리엄 페리 차관은 미국 굴지의 군수업체 대표들을 펜타곤 만찬에 초대해 ‘최후의 만찬(Last Supper)’을 벌이면서 “국방예산 대폭 삭감과 난립하고 있는 군수업체들을 스스로 정리하는 혁명적 생존방안을 자발적으로 모색하라”고 촉구했다.

김 박사는 “당시 국방부는 ‘사든가 팔든가(buy or sell)’를 선택하라며 통폐합을 강하게 권유했다”며 “통폐합 과정에서 남들보다 한발 앞서 대책을 세운 기업들은 역경을 뚫고 더 좋아졌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했다.

—현재 미국의 시퀘스터 정책으로 방산업계가 다시 얼어붙고 있는 것 아닙니까.

“시퀘스터는 균형예산과 관련한 법에 따라, 재정적자 규모가 다음 회계연도에 허용된 최대 재정적자 규모를 초과하면, 지출예산을 처음에 설정한 목표치에 따라 자동 삭감되도록 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치 이후 록히드마틴의 주가는 오히려 오르고 있습니다. 다른 업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방산업체들이 10년 주기로 반복되는 불황에 대비해 대책을 수립한 결과입니다. 1993년 7월 ‘최후의 만찬’ 이후 10년 만에 9·11테러로 방산업계가 다시 살아났고, 다시 10년 만에 시퀘스터 조치가 시작됐습니다. 겸손하게 자구노력을 하면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김 박사는 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올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쟁쟁한 회사가 소리없이 명멸하는 경우를 들려줬다. 김 박사는 “항공 분야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라는 F-4 팬텀과 F-15 이글을 개발하고 제작했던 MD가 대표적”이라고 했다.

MD는 세계 최강으로 불리는 최초의 스텔스기 개발 프로젝트에서 GD에 패한 이후, 미국 역사상 최대 액수인 2000억 달러 규모의 차세대 합동 타격전투기(JSF) 사업 경쟁에 뛰어들었다가 최종 후보 두 회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탈락함으로써 보잉사에 흡수돼 그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JSF 사업은 이후 록히드마틴과 보잉의 경쟁 끝에 결국 록히드마틴의 승리로 끝났다.

“전략무기, 가격으로 결정해선 안돼”

—박근혜 정부는 지난 대선 때 복지공약을 실천한다면서 무기도입 사업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영토를 지키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가치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죠. 우리는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가진 이지스함을 3척이나 보유하고 있지만, 미사일방어(MD) 능력이 없습니다. 눈은 있는데, 주먹이 없는 꼴입니다. 남북관계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미국의 MD망에 들어가지 않은 결과입니다. 일본의 이지스함은 적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스탠더드 미사일(SM-3)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8조3000억원이 투입되는 공군 F-X(차기 전투기) 사업에서 3개 후보 기종 중 유일한 5세대 스텔스 전투기인 미 록히드마틴사의 F-35A가 최종 입찰과정에서 사업 예산을 초과해 사실상 탈락하면서 F-X 사업이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스텔스 성능 기준에 맞추자니 돈이 부족하고, 돈에 맞추자니 스텔스 전투기를 희망하는 공군의 요구를 맞추기 어렵게 된 겁니다. 방위사업청은 공군 요구대로 할 경우 F-35만 합격선에 들고 F-15SE(보잉)나 타이푼(EADS)은 탈락할 수밖에 없어 ‘단독 드리블’을 막기 위해 스텔스 요구조건을 대폭 완화했어요. 사업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겁니다.”

—지금 상황에선 아직 개발되지도 않은 F-15SE만 예산 범위 내 가격을 제안해 9월 중 기종 선정을 위해 열릴 방위사업추진위(방추위)에 사실상 단독 후보로 올라갔습니다만.

“지금 방사청은 일류무기를 배제하고 이류무기를 사기 위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자국산 첨단 무기들은 FMS(대외군사판매)를 통해서만 판매합니다. F-35도 마찬가지입니다. 텔레비전을 사더라도 이모저모 따져 보고 구입을 하는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전략무기 구입을 가격만으로 결정한다는 건 난센스입니다. 스텔스 전투기로 무장한 동북아 주변국 상황을 보더라도 5세대 전투기의 도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과거 F-16 도입 때처럼 F-X 사업을 할 때, 오프셋을 잘 활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F-16 때의 경험을 살려 우리나라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 그리고 미국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합리적으로 판단해 요구해야 할 겁니다. 방사청은 국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기술습득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용호 박사는 F-16 오프셋 매니저로 항공기 대형부품을 제조하는 필수 장비인 ‘5축 가공기’를 국내에 도입한 인물이다. 김 박사는 “1980년대 초반 한국 항공산업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며 “그 당시 대한항공의 제공호(F-5 E/F) 최종조립과 삼성정밀(삼성항공에서 삼성테크윈으로 바뀜)의 엔진조립 정도였고, 한국중공업의 4축 가공기가 가장 현대식 장비였다”고 했다.

김용호 박사는 방산업체에 근무하는 34년 동안 세 차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F-16이 패했을 때와 역전 드라마를 펼쳤을 때, 고등훈련기 T-50이 사천비행장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하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기자가 “한국인으로서 다국적기업 CEO를 지내면서 이른바 ‘이해관계의 충돌’은 없느냐”고 하자, 김 박사는 “록히드마틴 한국지사장으로 근무하면서 ‘wear Korean hat(한국인으로 활동한다는 뜻)’이란 자세로 한국인들과 호흡했던 것이 서로에게 윈윈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