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17년간 100억 투자해 《한국사 대사전》 완간한 楊澈愚 교학사 회장 : 월간조선

올해로 미수(米壽)를 맞은 양철우(楊澈愚·88) 교학사 회장은 출판계의 원로이자 ‘현역’이다. 지난 7월 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교학사 본사에서 만난 양 회장은 책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돋보기 너머로 기자를 올려보고는 이내 반색을 했다. 섭씨 36도가 넘는 무더위에 그는 에어컨도 없이 낡은 선풍기 한 대로 버티고 있었다.

양 회장은 ‘2012~2013 특성화고 상업·정보계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목록’을 보고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양장본의 두툼한 사전 한 권을 내밀었다. 지난 4월 말 출간한 《교학 한국사 대사전》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교학 한국사 대사전》이군요?

“필생의 작업이라고 할까요. 권당 3kg 정도니까 전질(全帙)의 무게가 30kg이나 됩니다. 좋은 종이를 썼더니 조금 무거워요. 우리가 수교하고 있는 189개국 대학도서관에 꼭 한 질씩 비치되면 좋겠습니다. 한국에도 이런 역사가 있다는 것을 전 세계 젊은이들이 알아야 하니까요.”

—《교학 한국사 대사전》을 출간하게 된 계기는 뭡니까.

“저는 ‘출판은 곧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말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교과서 시장 점유율 1위인 야마카와(山川)출판사를 비롯해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과 쇼가쿠칸(小學館)도 역사사전을 이미 출간했습니다. 전교조의 왜곡된 역사교육에 분개해 교사들의 역사 재교육 자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양 회장은 우리 역사 재인식에 초점을 맞춰 초·중·고생, 대학생, 일반인, 역사 전공자 등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전을 제작하기로 마음먹고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교학 한국사 대사전》은 변태섭(邊太燮) 서울대 교수와 강우철(康宇哲) 이화여대 교수를 중심으로 편찬위원 17명, 감수위원 10명, 집필위원 568명, 편집인원 41명, 사진작가 3명 등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추천으로 참가한 교수들이 교정을 보는 데만 1년이 걸렸다고 한다.

“비용 늘어나자 내외에서 제작 반대 의견 나와”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교학사 본사 건물.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도 쉽게 손대기 힘든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자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이 프로젝트는 IMF 사태 당시 1년 동안 제작이 중단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는 사이 제작비용만 100억원을 훌쩍 넘겼다.

50억원 정도로 예상했던 제작비가 100억원이 넘게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자, 제작을 포기하고 출판을 백지화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한다. 갈수록 수익성이 악화되는 출판시장에서 제아무리 업계 선두를 달리는 교학사라 할지라도 갈수록 불어나는 제작비용은 큰 부담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17년의 제작 기간 중 두 번에 걸쳐 2년 동안 집필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제작을 총괄했던 강우철 교수와 변태섭 교수는 《한국사 대사전》의 완간(完刊)을 보지 못하고 각각 2000년과 2009년 눈을 감았다.

내부 반대도 심했다고 한다. 양 회장은 “‘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활용해 정보를 얻는 시대에 과연 시장성이 있을까’하는 우려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교학 한국사 대사전》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죽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작업”이라는 양 회장의 ‘고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민족은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역사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집대성(集大成)한 출판물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어렵사리 빛을 보게 된 《교학 한국사 대사전》은 수록 항목만 7만 개, 문화재 관련 이미지 자료만 1만3000여 점, 총 페이지는 1만 쪽이 넘는다. 역사 용어에서부터 고고학, 민속학, 국문학, 지리학, 종교와 미술 등 관련 영역을 총망라하고 있다.

—현재 판매 상황은 어떻습니까.

“보급의 가치를 판단해 달라는 의미에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 서남수(徐南洙) 교육부장관에게 한 질씩 기증하려 합니다. 외교부와 해외공관에 비치하는 문제도 논의 중입니다. 하버드와 예일대, 도쿄대 등 미국과 일본의 주요 명문대학을 중심으로 구입 문의가 오고 있어요. 인천순복음교회 최경주 목사도 이스라엘 역사 대신, 우리 역사를 활용해 설교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며 2질을 구입했습니다.”

敎學相長

교학사의 글짓기 강좌 수련장과 표준수련장.

양철우 회장은 1951년 교학사를 설립했다. 62년간 초중고생을 위한 학습도서와 교과서, 대학교재 등 교육서적 출간이란 한 우물만 팠다.

교과서 출판은 1964년 제2차 교육과정에 따른 검인정 교과서로 ‘국어 쓰기’, ‘글짓기’, ‘도덕(바른 생활)’, ‘서예’ 등 4종의 초등 교과서를 내놓은 것이 시작이다. 현재는 검정교과서 39종 등 총 143종의 교과서를 발행하고 있다. 교학사가 출판한 중·고교 학습참고서는 ‘뉴 프론티어’, ‘파우어 시리즈’, ‘챌린지’, ‘필승 시리즈’ 등 총 40여 종이다.

—언제부터 출판사업에 뛰어들게 됐습니까.

“광복 후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상경해 이항성(李恒星) 화백이 운영하는 ‘문화교육사’란 출판사에서 출판 일을 배웠습니다. 문맹퇴치를 위해 유행가 악보집을 길거리에서 팔았는데,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소공동에 있는 상공회의소 사무실을 빌려 ‘교육과학사’라는 이름으로 3학년 초등생을 위한 ‘수련장’을 만들었는데, 그만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90일 동안 신공덕동 지하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1·4후퇴 때 대구로 피란을 가 그곳에서 ‘대입 종합수학 완성’이라는 책을 매엽(每葉) 인쇄기로 찍어 사업의 기반을 마련했어요. 전쟁 이후에는 장준하(張俊河) 선생의 《사상계》를 우리가 인쇄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서점으로 몰려들어 잡지를 사보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처음부터 아이들을 위한 교재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겁니까.

“초창기에는 솔직히 일하느라 바빠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점점 출판을 하다 보니 교과서에까지 손을 대게 됐죠. 그리고 20년 전부터 도감(圖鑑)을 만들게 됐고, 지금은 사전이나 컴퓨터 책, 아동도서 등 종합출판사가 됐습니다.”

정원식 전 총리는 오천석 문교부장관의 비서 시절 양철우 회장과 함께 교학신서 시리즈를 발간했다. 2009년 12월 8일 ‘2009 올해의 스승상’ 시상식에서 심사경위를 설명하는 정 전 총리.

—교학사라는 출판사 이름은 회장님이 직접 지은 겁니까.

“중국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 편에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침으로써 성장하고, 제자는 배움으로써 진보한다는 뜻입니다. 원문을 보면 ‘좋은 안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먹어보아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극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왜 좋은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배워본 이후에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 있으며, 가르친 후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한다고 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의미가 하도 삼삼해 출판사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교학사 이름으로 가장 처음 만들었던 책이 무엇입니까.

“《펜맨십(penmanship·書法)》이라고 하는 펜글씨 교본을 처음 만들었습니다. 그다음 초등학교 아이들이 쓸 수 있는 참고서적부터 만들다 단계를 높여 중학교, 고등학교로 옮아갔습니다.”

—출판이 불황이라지만, 단행본 전문 출판사들이 베스트셀러를 내놓아 ‘돈방석’에 앉는 케이스들이 적지 않습니다. 단행본 출판은 왜 하지 않았습니까.

(양 회장은 “교학사는 교학사의 역할이 있고, 단행본 전문 출판사는 그들 나름의 역할이 있는 것”이라며 과거 단행본을 출간했던 일을 회고했다.)

“예전에 한국의 대표적 교육자인 오천석(吳天錫·1901~1987) 박사(제2공화국에서 문교부 장관 역임)께 세배하러 가서 ‘아이들 교양을 쌓게 해주는 책을 만들었으면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이때 용기를 얻어 정원식(鄭元植) 전 총리(당시 장학관으로 오 장관의 비서)가 주축이 돼 《교학신서(敎學新書)》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학문적으로 명망이 있는 유명 교수들과 매월 한 차례씩 종로의 ‘계향’이란 한정식집에 모여 《교학신서》 저자 발굴, 제작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등 정성을 기울였는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양 회장은 40대 전후 세대에게는 기억에 생생한 초등학생용 《표준전과》와 《표준수련장》을 출간했다. 교학사를 대표하는 《표준전과》는 “학습을 위해서는 좋은 참고서가 있어야 한다”는 양 회장의 신념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표준전과》의 탄생

40대 이상 국민들에게 교학사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표준전과》. 현재는 학부모들이 선호하지 않는데다 저작권료 부담으로 폐간 위기에 있다. 사진은 교학사가 발행한 원색도감.

《표준전과》의 발간 역사는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 회장은 광복 직후인 1945년 서울사대부속 초등학교 교사들을 집필자로 초빙해 전과를 만들었으나 6·25전쟁으로 소멸되고 만다.

—전과(全科) 사업은 교학사가 먼저 시작했나요?

“아니죠, 동아출판사가 1년 정도 먼저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40대 이상의 국민들은 교학사를 떠올리면 《표준전과》를 연상할 정도로 ‘교학사 전과’를 보고 자란 세대들입니다. 전과사업으로 재미 좀 봤습니까.

“《표준전과》는 교학사의 효자(孝子) 아이템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한 반에 70명씩 공부할 때였고, 지금처럼 참고서가 다양하지도 않아 《표준전과》나 《동아전과》가 한 해 20만~30만 부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렸어요. 《표준전과》는 동아출판사의 《동아전과》와 경쟁했습니다. 훗날 문호사의 《문호전과》와 민중서림의 《국민전과》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표준전과》와 《동아전과》만 살아남아 지금껏 경쟁해 오고 있습니다.”

—《표준전과》가 60년이 넘도록 명성을 탄탄히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뭡니까.

“《표준전과》는 ‘제2의 교과서’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말해주듯 참고서 이상의 의미를 담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집필은 일선 교사와 장학사, 교육연구사 등 전문가가 진행하는 한편, 제작 실무는 전직 교사 출신을 영입해 전문성을 극대화해 온 것이죠. 무엇보다 ‘고객 신뢰’에 모든 초점을 맞췄고, 제본까지 완료한 전과도 본문에 오탈자가 하나라도 확인되면 폐기하고 다시 인쇄하는 등 품질 관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즘도 《표준전과》가 잘 팔립니까.

“판매가 부진해요. 요즘 아이들은 학습 도움을 받을 곳이 많아요. 학원에 다니는 건 기본이고, 과목별로 참고서가 많이 나왔습니다. 게다가 학부모들도 전 과목을 한데 모은 두툼한 전과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저작권법 적용이 까다로워져 매년 저작권료로 몇억이 들어가는 등 수지가 맞지 않아 서서히 접고, 과목 단위의 참고서로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교학사 주관으로 열린 소천아동문학상 시상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양철우 회장.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아동문학상인 소천아동문학상은 2000년부터 교학사에 의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소천아동문학상은 강소천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아동문학 발전을 위해 1965년 제정됐다.

—143종의 교과서, 40여 종의 학습참고서를 발행하다 보면 기억에 남는 필자도 있을 텐데요?

“유경로(兪景老)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 명예교수, 정창희(鄭昌熙) 서울대 명예교수, 이원식(李元植) 서울대 사대 화학과 교수 같은 분들은 정말 선비 정신을 가진 분들입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요. 한번은 교과서 검토위원으로 일선 여교사를 불렀더니 이원식 교수를 보고 기가 죽어 ‘검토를 못 하겠다’고 그래요. 이 교수가 여교사에게 ‘내 책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야. 내 책이라고 생각지 말고 선생으로서 아이들 눈높이에서 적합한가 아닌가만 보라고. 나란 사람을 버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학습참고서 저자들도 직접 발굴하셨을 텐데, 요새 말로 뜬 분들이 있습니까.

“천재교육의 최용준(崔容準) 회장이 그런 분입니다. 어느 날 진학 잡지의 광고부장이 ‘앞으로 사람을 기르라’며 서울대 사대 수학과를 나오고 성실하다며 최 회장을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최 회장과 《해법수학》을 만들어 히트를 쳤습니다. 그 후 6년 정도 책을 만들다가 최용준 회장은 독립했고, 오늘날 천재교육을 만들어 참고서 시장을 석권하고 있습니다.”

양철우 회장은 “1974년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건’ 때 《해법수학》 광고를 《동아일보》에 게재해 혼이 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건’은 《동아일보》가 1974년 10월 24일 보도금지된 시위·집회 현장을 보도하고 개헌문제에 대한 사설을 취급하자, 정부가 기업체와 기관에 압력을 행사해 무더기로 광고를 해약하도록 해 《동아일보》 지면이 백지로 발행된 사건이다.

“1974년 12월, 《해법수학》을 발행해 신문광고를 할 때였습니다. 《동아일보》에 계속 광고를 냈는데, 어느 날 중앙정보부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당신, 계속 광고를 내면 회사를 사찰할 거야’라고 협박을 해요. 덜컥 겁이 나 그 다음 날부터 광고를 중단했지요. 지인들이 ‘중정의 서슬이 시퍼런데 광고를 내다니, 당신 배짱 한번 대단하다’고 한마디씩 합디다(웃음).”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출판인들

《해법수학》으로 혜성같이 등장해 《수학의 정석》과 함께 수학참고서 시장을 양분한 최용준 회장.

교학사는 공익(公益) 출판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도감 시리즈를 꾸준히 내놓고 있는 것이다. 《한국식물도감》, 《한국어류도감》, 《한국의 자연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다.

양철우 회장은 “도감류는 출판 비용에 비해 판로가 한정돼 있어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하지만 출판으로 국가와 민족에 기여한다는 창업정신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출판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도감류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쉽게 할 수 없는 책인데, 도감류 출판을 고집하는 이유가 뭡니까.

“교학사는 구로디지털산업단지에 인쇄공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곳에 정밀 윤전기들이 있는데, 그 공장을 활용해 도감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했어요. 일본 도감을 보고 벤치마킹을 한 겁니다. 돈만 바라고 하는 출판은 시정잡배나 하는 일이지 출판인이 취할 자세는 아닙니다. 나는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 단 한 권의 책이 필요하다면 그 책을 찍어야 하는 게 출판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양철우 회장은 “우리나라 출판 1세대인 조상원(趙相元) 현암사 회장(2000년 작고), 정진숙(鄭鎭肅) 을유문화사 회장(2008년), 최덕교(崔德敎) 창조사 회장(2008년), 김익달(金益達) 학원사 고문(1985년) 등을 존경한다”며 “그분들은 광복 직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출판계에서 민족문화를 담은 저작을 쏟아낸 출판계의 주역들”이라고 했다.

2005년 창립 60주년을 맞이해 언론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고 정진숙 을유문화사 회장.

양 회장은 “광복 후 이희승(李熙昇), 이극로(李克魯) 선생 등이 정진숙 회장을 찾아와 《우리말 큰 사전》 원고를 내던지며 ‘이걸 일본 출판사에서 펴내야 하느냐’고 큰소리치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출판인의 사명감을 느꼈다”며 “정 회장이 ‘1년에 10권 미만 팔린다고 해서 불필요한 책이라 할 수 없다. 문제는 책으로 낼 가치가 있느냐에 달렸다’, ‘출판은 기업 이상의 것이다. 책 한 권 낼 때 쏟아야 하는 노력과 정성을 감안하면, 돈벌이로 출판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고 했다.

—원로 출판인들 근황이 궁금합니다.

“김상문(金相文) 동아출판사 회장(2011년 작고)은 1955년 벤톤(Benton) 활자조각기를 도입해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하던 서체를 출판사들이 자립하도록 한 분입니다. 초등학생용 《동아전과》와 중학생용 《완전정복》 등을 펴내며 국내 참고서 시장을 주름잡았지만, 1983년 참고서로 번 돈 대부분을 투자해 펴낸 《동아 원색 세계대백과사전(전 30권)》이 실패하면서 동아출판사를 두산그룹에 넘겨주고 말았지요.

이병준(李炳俊) 민중서관 회장은 사서류를 전문으로 출판하다 계열 기업인 민성전자의 투자 실패로 1977년 회사를 접었습니다. 최남선(崔南善) 선생의 차남 최한웅(崔漢雄) 동명사 회장은 자신의 아들이 같은 출판인의 아들과 학교에서 다툼을 벌이다 죽었는데도 탄원을 해 가해학생을 벌을 받지 않도록 했습니다.

민교사의 민장식(閔壯植) 회장(문교부 차관 역임·1990년 별세), 탐구당의 홍석우(洪錫禹) 회장(2007년 작고), 일조각의 한만년(韓萬年) 회장(2004년 작고), 박영사의 안원옥(安洹玉) 회장(1992년 작고), 법문사 김성수(金性洙) 회장(오양수산 회장·2007년 별세) 등은 우리 출판계에서 기억해야 할 분들입니다.”

‘한국사능력시험’도 처음으로 시도

양철우 회장은 유복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해 전국의 중학교 교사를 선발해 하와이대에 연수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가운데가 양 회장.

양 회장은 ‘대한민국 역사 지킴이’를 자임하고 있다. 양 회장은 2005년부터 교학사 주관으로 처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시작했고, 정부 예산을 지원받기 시작한 5회 시험 이전까지 매년 3억원에 가까운 경비와 교육 노하우를 제공했다.

양 회장은 “8년 전 류영렬(柳永烈) 국사편찬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 역사교육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었다”면서 “‘한국사능력시험’을 보게 해 아이들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성을 심어주자고 의기투합해 시험이 시작됐던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교학사 주관으로 시험을 실시하고 있나요?

“교학사에서 2006년부터 1년 반 정도 시행하고 있을 때, 국회의원 한 분이 느닷없이 ‘국가의식을 고취하는 한국사능력시험을 왜 민간이 주도하느냐’며 법을 발의해 정부가 주관하게 됐습니다. 그때까지 교학사가 2억원 비용을 들였습니다. 한국사능력시험은 역사의 줄거리 속에서 시험문제를 출제해 역사의 흐름을 깨우치고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를 온전하게 보도록 짜여 있습니다.”

—중고교에서 한국사 과목이 ‘필수’가 아닌 ‘선택’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육계가 역사인식이 없습니다.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은 역사에 대해 자녀 세대에게 심도 있는 학습을 시킵니다. 글로벌 시대에 세계사와 국사 공부는 ‘필수’입니다. 가령 체코에 간다면 체코의 역사 정도는 알고 가야죠. 이런 얘기를 나 같은 장사꾼이 하면 교수들은 돈벌이를 하려 한다고 말하는데, 대한민국을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역사교과서는 ‘검인정(檢認定)’이 아니라 ‘국정(國定)’으로 가야 합니다.”

—민주당과 좌파 인사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권희영(權熙英)·정영순(鄭永順) 교수 등이 집필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지난 5월 국사편찬위 검정을 통과하자, “김구(金九) 선생과 안중근(安重根) 의사를 테러활동을 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5·16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고, 4·19혁명을 ‘학생운동’으로 깎아내렸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제주 4·3사건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반란이나 폭동으로 규정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교과서에는 민주당이 주장하는 것 같은 내용이 없습니다. 현재 중고교 현대사 교육은 좌파 성향 학자들이 쓴 교과서가 거의 독점하고 있어요.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뒤 교학사에 항의전화를 걸고, 교학사의 다른 교과서들까지 불매(不買) 운동을 벌이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민주당 김태년(金太年) 의원은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들의 연구비와 해외 출장 내역까지 요구하고 나서는 등 전 방위로 압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5·18 관련 단체 요구사항 교과서에 반영”

보수 성향의 집필진 2명이 참여했다며 좌파 교육감·전교조가 ‘극우 교과서’로 몰며 주장한 내용과 다음 아고라에 좌파 성향의 네티즌들이 교학사 책 불매운동을 하자고 올린 글.

—좌파 세력들은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를 본 것처럼 주장하는데, 공개한 적이 있나요?

“그들 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단지 추측한 내용들을 언론에 흘려 여론을 조성하려는 겁니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교육과정, 집필과정, 심사과정에 맞아 1차 검정에 합격한 교과서입니다. 자기들 입맛에 안 맞는 책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학자로도 정치인으로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국회의원이 어떻게 책의 내용을 보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5·18광주민주화운동 부분도 해당 단체의 요구사항을 공문으로 받아 저자들에게 그대로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요구대로 다 해주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몰상식한 사람들입니다.”

—교학사가 고교 역사교과서를 검인정으로 5년 단위로 출판하다 언제 탈락했나요?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와서 탈락했습니다. 우리가 펴내는 중학교용 한국사 교과서는 이번에 채택이 됐습니다. 좌파세력들은 지난 정권 때 금성출판사의 좌편향 교과서 등 모든 고교 교과서가 좌편향으로 채택됐다가 이번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교과서가 등장하니까 위기감이 느껴지나 봅니다. 예전에는 교육과학부에서 직접 교과서를 심사하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면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용역을 주면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이때부터 심사위원으로 좌편향된 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대표 집필자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양 회장은 “전교조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며 “하루빨리 한국교원대학을 교사들의 재(再)교육장으로 역할을 변경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는 “아무리 교과서가 좌편향에서 우측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교사들의 교수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학생들의 교육은 정상화되기 어렵다”며 “학교도 전교조가 후원한 출판사(디딤돌·비상)가 펴낸 교과서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는 교과서란 사실을 알면서도 돈벌이만을 위해 출판하려는 출판인들에게 좌파 성향의 교과서를 출판하지 말라고 권고할 생각은 없습니까.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회에서 교과서를 출판하는 사람은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돈을 벌고 싶으면 교과서를 만들지 말고 돈 놀이를 하라고 노골적으로 말해요. 그런데도 다들 들은 척도 안 합니다.”

—좌파세력들이 협박전화에다 불매운동으로 압박하고 있는데 겁이 나지 않나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당신들 마르크스 사상과 나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누가 우월한지 직접 사무실에서 토론하자고 했습니다. 나도 젊었을 때 칼-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읽었지만, 오늘날 이데올로기 대결은 종언을 고한 것 아닌가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출간돼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역사가도(歷史街道)》라는 잡지처럼 역사 무크지(誌)를 발행할 생각도 있습니다.”

국가기관이 참고서 만들어 파는 나라

출판인들의 친목모임인 사간회 30년사를 편찬한 것을 기념해 원로 출판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양철우 회장은 지금도 매일 아침 출근하면 주요 신문의 칼럼과 사설을 읽고, 《닛케이신문》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독서습관을 갖게 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일본은 아침 독서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모든 초중고생이 수업하기 전 10분씩 책을 읽게 해서 독서습관을 길러줘야 합니다. 그렇게 매일 10분씩 12년 동안 독서하는 습관을 들이면 대학에 가서도 스스로 책을 보게 되죠. 독서인구의 저변 확대는 국가에서 책임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아동들을 위한 책을 지금껏 만들어 오면서 어떤 철학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책은 근본적으로 계몽적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윤만을 추구해 비싼 값을 매기기보다 적정가로 이윤추구도 하면서 독자들과 더불어 가는 지식 전달 사업자로 남아야 합니다. 아이들 교재로 시작한 출판업이라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좋은 독서를 해야 자라서도 좋은 독서습관과 충효사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책 표지를 보면 글자를 무질서하게 배열해 모양을 내는데, 크게 잘못됐다고 봅니다. 흐트러진 글자나 표지는 아이들의 마음을 비뚤게 할 수 있다는 게 내 철학입니다. 지금도 교학사의 책 표지는 항상 정자(正字)로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학습서 출판계의 불황은 어디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간단해요. 사교육을 없앤다고 EBS라는 국가기관이 책을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교육부장관이 그 책에서 수능시험 문제를 70% 낸다고 그 책을 사보라고 광고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학부형이나 학생들이 전부 EBS, EBS 합니다. EBS도 우리처럼 만든 책을 검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사고력을 죽이는 ‘교육 획일화’도 문제지만, 그러니 출판계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또 문학, 사회과학, 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로 책을 읽지 않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 어려움이 있는 거지요.”

—출판사들이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성이 있으니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종합출판보다는 전문출판으로 가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건강이면 건강만 전문으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아이디어로 먹고사는 벤처사업이라 좋은 아이디어를 만나면 팔리게 돼 있습니다.”

—요새 특별히 어느 분야에 관심이 있습니까.

“현재 학생 수가 줄고 대신 노령층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어 실버들을 위한 책을 구상 중입니다. 또 전자책이 종이책을 밀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전자책이 편리하니 종이책을 등한시하게 되고 결국 출판문화가 주저앉고 있습니다.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출판인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양철우 회장은 “아이들이 와서 마음대로 뛰놀며 독서하는 빌딩을 짓는 게 꿈”이라며 “3대가 함께 보는 《교학 한국사 대사전》을 출간한 것이 가장 큰 보람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