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옻칠 佛畵展 연 불교계 원로 예술僧性坡 스님 : 월간조선

“스님, 서울에서 왔습니다.”

“할 말이 없는데 왜 왔소.”

지난 2월 말, 서운암(瑞雲庵·경남 양산 소재)에 도착한 건 저녁 무렵이었다. 서운암은 국내 삼보(三寶)사찰 중 하나인 통도사(通度寺)의 대표암자다. 봄을 앞둔 영축산 자락의 겨울 뒤끝은 여전히 매서웠다. 밤하늘에는 보름을 앞둔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스님, 내일이 정월대보름인데 고향에 들르기 전에 한 말씀 듣고자 왔습니다.”

조계종 원로 성파(性坡) 스님은 불교계에서는 대표적인 예술승(僧)이다. 그러나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의 말이 떠올랐다.

“충분히 자신을 높여도 되는 분인데도 말씀이 전혀 없어요. 스님 앞에 서면 자연히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성파 스님은 스스로를 ‘예술가’라 말하지 않는다. 전통문화를 생활 속에서 재현하며 수행(修行)하는 ‘중’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스님은 세수(世壽) 마흔에 1400년 된 고찰(古刹) 통도사의 주지를 지냈다. 조계종 사회부장, 규정부장, 중앙종회의원 등 조계종 주요 보직도 역임했다. 속칭 ‘힘 있는’ 스님이었다. 하지만 통도사 주지 이후 지금까지 30여 년간 전통문화에 천착하며 통도사의 종부(宗婦) 역할을 해 왔다. 출가 후 통도사에서만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說法

전통문화 발전에 천착하고 있는 성파 스님은 서예, 도자, 염색, 옻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스님은 향이 깊은 고엽차 한 잔을 내놓았다.

“뭐가 궁금하오.”

—서예와 그림은 물론이고 옻칠로 온갖 생활공예품을 만들고 천연염색으로 한지(韓紙)와 다채로운 옷감도 만듭니다. 서운암 앞마당에는 스님이 직접 담근 수천 개의 간장·된장 독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왜 하십니까.

“그거야 간단하지. 말로 하는 설법(說法)보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설법이 필요한 거야. 말로 하는 것은 인간의 가식(假飾)이 들어가 있어 감동이 짧아요. 눈으로 보는 설법은 대자연의 살아있는 생명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어 감동과 여운이 길지요.”

—16만 도자(陶磁)대장경을 만든 이유도 그 때문입니까.

스님은 10년에 걸쳐 16만 도자대장경을 만들었다. 해인사에 있는 목판(木版) 팔만대장경을 도자기 형태로 그대로 옮긴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양면에 불경(佛經)이 새겨져 있으나 도자대장경은 한 면에만 작업을 할 수 있어 경판 수가 16만장으로 늘어났다. 도판에 팔만대장경 영인본을 새겨 유약을 바른 후 섭씨 1200도의 불에 구워 내 만들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이 땅에 처음 만들어진 게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오. 거란족 침입을 받았을 때 대장경을 만들어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염원이 들어있지.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때 제작한 팔만대장경도 마찬가지요. 지금 우리 민족에게 남아 있는 숙제는 뭐겠소. 나는 통일이라고 생각하오. 국민의 뜻을 모을 수 있는 대장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만든 겁니다. 문명의 발전 속도와 정반대로 한자를 읽고 쓰는 활용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여러 가지를 생각했을 때 도자대장경은 우리 민족의 큰 역사를 만들어갈 것이라 확신해요.”

16만 도자대장경은 900m² 규모의 장경각에 보관돼 있다. 서운암 가장 위쪽에 위치한 장경각은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창살 크기를 달리해 자연통풍이 잘된다고 한다.

성파 스님은 통도사의 대표적인 암자인 서운암을 중창(重創)한 후 1985년부터 5년간 3000불상(佛像)을 흙으로 구워 도자삼천불(陶磁三千佛)도 만들었다.

스님은 우리네 전통문화의 여러 분야를 재해석하고 혁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옻칠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이다. 16만 도자대장경을보관한 장경각도 옻칠로 마감했다. 스님의 작업도량에는 식기부터 식탁, 의자 심지어 냉장고까지 옻칠이 돼 있다.

—옻칠에 몰입하는 이유는 뭔가요.

“‘꿈에 스님만 봐도 옻 오른다’는 옛말이 있어요. 그만큼 우리나라 불교와 옻의 인연은 1000년 넘게 오래됐지. 옻칠문화는 바로 불교문화야.”

살균력과 내구성 뛰어난 옻칠

전통염색 기법으로 제작한 韓紙와 불화를 그리고 있는 성파 스님.

1613년 발간된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에는 마른 옻에 대해 ‘어혈, 경맥불통, 적취를 풀어 주고 장의 움직임을 활발히 하며 기생충을 죽이고 피로를 다스린다’고 돼 있다. 나무의 내구성과 보존력을 높여 주는 뛰어난 재료가 바로 옻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옻칠은 수령(樹齡) 20년이 넘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천연 추출물을 말하는데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는 옻 추출물은 소량에 불과하다.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다. 미술평론가 윤범모씨에 따르면, 옻은 전통적으로 훌륭한 미술재료로 사용돼 왔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미술 작품의 재료는 안료와 아교를 섞은 것인데 여기에다 옻칠을 입힌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나무로 된 칠기가 발굴되는 것도 옻칠의 뛰어난 살균력과 내구성 덕이다.

성파 스님이 옻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공부를 늦게 시작했지만 국내외 대가(大家)들과의 교류와 연구를 통해 전문가의 반열에 비교적 빨리 올랐다.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작가에게 배웠어요. 칭화대 교수로 있는 분인데 칠화, 칠공예 쪽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였지. 국내 옻칠 전문가인 권순섭 동방대학교대학원 교수도 이 작가에게 배웠어. 중국 불교도 옻칠문화가 발달돼 있는데 불상에도 옻칠을 입히는 경우가 많아요. 중국에서 옻칠을 공부하면서 사라져 가는 우리 옻칠문화를 꼭 복원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연스럽게 우리네 절에 있는 평범한 것들을 다시 유심히 보게 된 거야. 우리 불교 사찰에도 옻칠은 흔히 쓰였는데 탁자, 주장자(지팡이), 목탁 등 옻칠을 안 입힌 것이 없었어. 일반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모르겠지만 불교계에서 봤을 때는 옻칠을 복원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전통불교의 예술을 그대로 잇는 일이지.”

성파 스님은 옻을 통해 사찰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전통문화를 승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에게 옻칠을 가르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운암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옻칠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준다. 옻칠 공방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데 국내 사찰에서는 유일하다. 교육 수준 또한 대학원 수준이라고 한다.

겨울 끝자락 서운암에서 가진 성파 스님과의 대화는 옻칠 얘기로 마감했다.

“3개월 후 서울에서 ‘옻칠불화전’을 열 생각이오. 불화(佛畵)를 옻칠로 그리는 것이지. 세계 불교 미술사에서 전혀 시도되지 않았던 거요. 불교미술의 새로운 기법과 재료를 사용한다는 데 의미가 있어. 불화는 다른 나라에도 있지만 옻칠을 재료로 한 불화는 없지요. 우리나라 불화는 원래부터 채색화였는데 동양화의 출발은 불화에서 비롯됐어. 옻칠로 불화를 그리면 수천 년이 흘러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

스님은 “옻칠불화전을 앞두고 수십 점을 그려야 한다”며 “많은 시간을 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가난이 절(寺)로 가게 해”

옻칠로 그린 佛畵 석가삼존도.

성파 스님을 다시 만난 건 지난 5월 27일 서울 조계종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였다. 스님이 옻칠로 그린 불화 26점이 전시되는 날이었다.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이 오프닝 행사에 참석해 “수행과 예술혼을 불사르는 성파 스님의 작품 세계는 경의(敬意)를 이끌어 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일주일 동안의 전시회가 끝나고 성파 스님의 말씀을 다시 들었다. 법명 ‘성파(性坡)’의 의미에 대해 여쭸더니 “자기의 심성을 항상 깨치고 살라는 뜻”이라고 했다.

—어떻게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됐습니까.

“가난이 절(寺)로 가게 했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가 1939년생이야. 일제 때 동네 어른들이 일본군에게 끌려가던 일이 생생해.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6·25가 터졌어. 우리 동네에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는데 실제 전투장면도 기억이 나. 우리 가족들은 산으로 피란을 갔지.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경험해서인지 이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전쟁 중에는 빨갱이로 오해받아 고통을 받던 사람도 기억이 나고 반대로 국군으로 몰려 죽을 뻔한 사람도 있었어.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시대였지.”

—학교는 제대로 다녔나요.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마당에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 동네(경남 합천 가야)에 서당(書堂)이 하나 있었어. 정규 교육기관을 택하는 대신 서당엘 갔지. 어릴 때부터 농사 지으며 서당에 다녔어요. 지금의 한자 실력은 그때 배운 거야.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열심히 독송(讀誦)했어. 해인사가 집에서 가까웠는데 절에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싶더라고. 먹을 것도 해결할 수 있어서 좋았고. 그런데 집에서 가까운 절보다는 멀리 떨어진 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통도사로 간 거야. 훌륭한 은사 스님을 만났지.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월하 스님께서 내게 항상 ‘중 노릇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가르치셨지.”

성파 스님은 어릴 적 배운 한자 덕에 불경을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금강경, 화엄경 등 불경공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통도사 승가대학을 마치고 여느 승려처럼 스님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에게 일찍 기회가 왔다.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에 통도사 주지를 맡게 됐지요. 세상 나이로 60은 돼야 주지를 할 수 있는데 말이야. 큰스님들께서 맡으라고 하시니 안 할 수도 없었어. 4년 임기를 끝내고 재고(再考)할 틈도 없이 주지를 그만뒀어요. 연임을 할 수 있었거든. 인생공부를 한 연후에 주지를 해야지, 너무 젊은 나이에 하는 건 도움이 안 돼. 주지를 그만둔 후 새로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원효대사의 말씀대로 ‘출출가(出出家)’를 한 거야. 중이 출가를 다시 한다는 의미지. 그 길로 일본 교토로 갔어. 1985년 일이야.”

스님은 일본으로 가기 전부터 전통 불교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1983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금니(金泥)사경전’을 처음 열었다. 금가루와 아교를 섞은 재료로 불경을 기록한 것인데 개인전 형식은 국내에서 최초였다. 금니사경은 고대 문헌에도 기록돼 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중국을 압도했다고 한다. 스님은 금니사경전 이후 성파 옷염색전, 서법전, 천연 옻 염색전, 성파산수화전, 성파칠화전 등을 수십 차례 열었다.

일본 渡來문화, 중국 산수화·옻칠 섭렵

“눈앞에 보이는 게 모두 스승이고 못난 사람도 스승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성파 스님.

1985년, 일본으로 건너간 성파 스님은 현지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문화(渡來文化)을 접하게 된다.

“일본 사람들 성씨(姓氏) 중에 ‘오다(織田)’가 있어요. 한반도에서 옷감, 직물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의 후손이지. 이를 연구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들이 정말 많더라고. 그때부터 옻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일본 속 한국문화를 일본에서 공부한 거야. 일본의 사찰경제에 대해서도 공부 좀 했어요. 일본은 절의 경제력이 대단해. 사찰이 각종 수익사업도 하거든. 그렇게 4년 넘게 한국과 일본을 오갔어요.”

—중국문화는 어떻게 접하게 된 겁니까.

“사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알려면 중국과 일본을 비교해야 가능해요. 일본에 가 보니 중국에도 반드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1990년대 이후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었지요. 중국어도 배우고 중국 산수화와 옻칠문화도 공부했어.”

마침내 성파 스님은 2005년 중국 화단의 심장부인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성파 산수화전’을 연다. 중국화단 베이징화원의 왕원팡을 스승으로 삼아 3년 동안 그림을 배운 것이다. 당시 중국의 평론가 쑨커는 성파 스님의 그림에 대해 “강호의 강하고 고집스러우며 날카로운 것에서 멀리 벗어나 있으며 섬세하고 아부하는 속세의 분위기와도 격이 다르다”고 평가했다.

스님은 그림 제목을 달 때 고심을 많이 한다고 한다.

‘산머리 머리 봉우리 봉우리가 모두 스승의 모습.’

스님이 자신의 그림에 붙인 제목이다. 제목 하나 하나가 명언(名言)인 것이다.

스님은 전통문화를 공부하며 고려시대 예술의 위대함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한다.

“고려문화를 잘 봐야 해요.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로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널리 퍼져 불평등사회였지만 고려 때는 남자와 여자의 지위가 동등했어요. 고려 팔만대장경을 봐도 알 수 있지요. 불교에서는 부부(夫婦)를 ‘양주(兩主)’로 표현하는데 팔만대장경에는 남편과 아내의 이름을 동등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고려시대의 차(茶)문화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경남 양산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다방마을이 있어요. 지명이 ‘다방마을’이야. ‘차마골’이라는 곳도 있지요. 일본에 전해진 차문화는 바로 고려의 다도(茶道)였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차문화는 사라지고 술(酒)문화가 발전하면서 주막이 생겨났지.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불교문화는 크게 쇠락했지요. 그런 와중에도 차문화는 사찰 내에 명맥을 이어 왔어. 절에는 지금도 ‘다각실’이 있어요.”

“옛것은 예술과 쓰임이 분리되지 않아”

—염색도 고려시대 때부터 발전했나요.

“불교 장식물에는 온갖 색상이 많이 들어가요. 각종 문양과 불교 기자재에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지. 연등회, 팔관회 때 종이로 만든 화려한 꽃들을 봐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염색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어. 흔히 우리 민족을 백의(白衣)민족이라 하는데 사실은 컬러민족이야. 우리에게는 컬러문화인의 피가 흘러. 고려 이전 삼국시대 문화를 봐도 그래요. 우리는 다양한 색깔을 사용해 왔어.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화려한 색상을 즐겨 썼지. 백의문화는 400~500년에 불과해.”

—그렇다면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즘 우리의 환경이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기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오. 일상생활과 예술이 단절돼 있어. 옛것에는 예술과 쓰임의 경계가 없었지. 일상생활에서 ‘아름다운 쓰임’을 만들어 간 거야. 한옥 풍경을 봐요. 천 년의 숨결이 흐르고 있는 통도사를 소리 없이 걸어 보시게.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실용적인가. 전통 옷도 마찬가지예요. 기능성과 품격을 갖춘 최고의 옷이지. 예술과 실용이 서로 분리되면서 우리의 삶이 각박해진 거야. 생활 속의 예술을 만들어 내야 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한데 현실이 안타까워요. 옻칠공예품을 열심히 만드는 이유도 생활 속에서 전통문화를 쉽게 접하게 하기 위함이지. 누구나 쉽게 소장하고, 선물도 할 수 있는 그런 공예품을 만드는 거야.”

—전통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30년 전에 만든 ‘성파시조문학상’과 ‘영남시조백일장’은 영남지역에서 꽤 유명한데요.

“시조야말로 토종 문학, 우리 문학이지요. 내가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한문공부를 하며 시조를 많이 읽어 왔어요. 한시(漢詩)도 많이 지었고. 시조가 좋다 보니 상을 만든 거예요. 올해가 햇수로 30년째네. 세월이 참 빠르긴 하네.”

—스님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생약재(生藥材)를 첨가해 전통 약된장과 간장을 개발·보급하고 있고, 우리나라 전통 염색기법인 쪽염색기법을 재현했지요. 또 서운암 인근에 100여 종의 야생화 수만 송이도 심었습니다. 스님의 손은 흙과 옻칠, 염색물로 물들어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손이 언제나 ‘기도하는 손’이라는 점이지요.

“항상 부끄러운 마음으로 중 노릇 하고 있을 뿐이오.”

조물주의 無盡藏

성파 스님은 불교미술사에서 최초로 옻칠로 佛畵를 그렸다. 지난 5월 27일 조계종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성파불화전이 열렸다.

—서운암에는 장독대가 5000, 감나무도 5000, 야생화 단지 면적도 5만 평입니다. 5자가 많은데 무슨 연유라도 있나요.

“특별히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한 가지 밝혀 둘 게 있지요. 나는 무소유를 말하지 않아요. 많이 가졌다가 남기고 가면 좋은 것이고 부족하여 못 남기면 그것도 좋은 것이지. 소동파의 적벽부에 이런 대목이 있지요.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물건은 각각 주인이 있나니,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비록 터럭 하나라도 취하면 안 되느니라. 강 위의 시원한 바람과 산간의 명월(明月)은, 귀로 그것을 들으면 음악이 되고 눈으로 보면 아름다움을 이루나니, 그것을 취해도 누가 막지 않고 사용해도 마르지 않나니, 이것이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이니라.’ 소유의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어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생각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잘 몰라요. 온돌문화를 봐도 그래요. 이게 얼마나 과학적이고 훌륭한 난방시스템인지 외국사람들이 인정하는데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해요. 속이 알차야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법이지. 지금 우리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었어. 속이 꽉 차야 해. 그래야 1등 국민이 되고 1등 문화국이 되는 거야. 우리 속을 채우는 것 그것을 위해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할 거야. 내 나이 70을 넘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돼.”

—일반 스님들은 대부분 수행지를 옮겨 다니는데 스님은 통도사에서 평생을 계셨습니다.

“통도사 주지를 끝내고 일본, 중국에서 문화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수행지는 여전히 통도사였어요. 물론 암자에 은거하고 있는 거지. 사회인으로 치면 은퇴한 후 뒷방에 물러나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나 스스로 통도사의 종부(宗婦)가 되고자 했지요. 된장·간장을 담그는 것도 그 때문이오. 종가집 종부라면 전통음식 특히 그 집안의 된장·간장은 제대로 담글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오.”

가까운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먼 것을 알겠는가

—왜 세상을 향해 말하지 않습니까.

“종부는 말을 삼가고 점두(点頭·윗분의 말씀을 따르며 머리를 끄덕거림)만 하면 되는 거요. 그냥 머리만 끄덕이며 장이나 담그고 사는 게 종부 역할 아니겠소. 옛말에 사마불침(死馬不針)이란 말이 있어요. 죽은 말에는 침을 놓지 않는다는 뜻이지. 근자불심(近者不審)이니 언감언원(焉敢言遠)이리오. 가까운 것도 살피지 못하거늘 어찌 감히 먼 것을 말하리요. 눈앞에 보이는 게 모두 스승인 거야. 못난 사람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지.”

스님은 ‘소처자지풍(巢處者知風) 혈처자지우(穴處者知雨)’라는 말도 기자에게 풀이해 줬다.

“나무에 작은 처소를 지어 사는 놈은 바람이 언제 부는 줄을 알고, 구멍에 사는 놈은 비가 언제 오는 줄을 아는 법이네.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야 하네. 타력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삶은 의미가 없어. 깊이 그리고 반복해서 모든 사물을 살피다 보면 세상이 보이게 돼. 자력(自力)을 얻으려면 모든 것에 숙련돼야 해요. 숙련된 사람은 무의식 중에 넘어져도 다치지 않지. 단련하려면 끝없이 반복해야 해. 만 권의 서적을 읽고 만 리를 행(行)하면 경지에 이를 수 있지요.”

반복교육을 통해 지식과 경험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성파 스님. 세상 모든 이들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스님에게서 해맑은 어린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스님의 청량(淸亮)한 웃음소리에 세상의 욕심 또한 내려놓게 된다. 세상말로 ‘젊어서 잘나갈 때’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암자에 파묻혀 수행하는 스님의 길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