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벤처신화’ 朴尙一 대표가 털어놓은 국내 벤처 성공의 조건 : 월간조선

“정부가 말하는 벤처기업 육성정책은 엔젤투자 활성화, 벤처 투자에 대한 세제(稅制) 혜택 등 자금에 대한 얘기가 많습니다. ‘2부 리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코스닥 시장을 거래소에서 분리시킨다는 것도 벤처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겠죠. 다 중요하고 좋은 얘기입니다. 하지만 벤처 생태계의 3대 축인 자금, 인력, 기술 중에 자금에만 집중된 정책입니다. 더욱 절실한 것은 인력과 기술입니다.”

박상일(朴尙一) (주)파크시스템스 대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벤처기업 육성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는 지금, 그는 하고픈 말이 많아 보였다. 그의 푸념 섞인 말에 주목한 이유는 그가 미국 실리콘밸리와 한국에서 잇달아 벤처기업을 만들어 성공시킨 전력이 있어서다.

박 대표는 1988년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중에 하숙집 차고에 회사를 차렸다 성공시켜, 9년 뒤에 이 회사를 1700만 달러(170억원)를 받고 매각한 적이 있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다시 ‘파크시스템스’라는 벤처회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18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능력 있는 엔지니어가 창업(美) Vs. 교수(韓) 선택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벤처기업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는 그가 벤처기업의 성공조건으로 꼽은 것은 ‘인력, 기술력, 자금력’이다.

“벤처기업이 성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우수한 인재입니다. 최고의 엘리트, 톱클래스 엔지니어들이 벤처기업을 창업하든지, 벤처기업에 합류해야 합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수한 인재들이 창업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의 이공계 박사 출신 중에 ‘교수와 벤처기업 중 무엇을 할까’를 재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공대 교수가 안정적이지만 역동적인 직업은 아니죠. 하지만 벤처는 리스크가 큰 만큼 성공할 경우 큰 보상이 돌아오는 프로의 세계라고 인식합니다. 정말 능력 있는 사람들은 자기 사업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정반대예요. 능력이 되면 교수 하고, 교수가 안 되면 공기업이나 대기업에 취업하고, 그것도 안 되면 중견기업, 벤처기업에 입사한다고 생각하더군요. 이런 사회적인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벤처기업은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회사를 운영하면서 인재 선발에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수없이 겪었죠. 우수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같은 벤처회사는 아예 고려의 대상이 아니더군요. 친분이 있는 교수 실험실에 유난히 손재주가 좋은 학생이 있어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더니, 지도교수가 말렸습니다. ‘저 학생은 학교로 갈 수 있을 텐데 눈독 들이지 말라’면서요. 어렵사리 인재를 우리 회사에 합류시키면 이번에는 부모들이 나서서 말립니다. ‘장가라도 가려면 그럴싸한 명함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처음에 마음을 다잡고 우리 회사에 입사했던 직원들도 시간이 지나면 죄송하다며 떠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우리나라 벤처를 바라보는 현실이 바로 이겁니다.”

—그들을 탓할 수 없잖습니까. 엘리트들을 억지로 벤처회사에 합류시킬 수도 없고요.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서 스스로 벤처회사를 선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중 하나는 금전적인 보상입니다. 벤처기업 중에 대기업 수준의 연봉을 줄 수 있는 곳이 흔치 않습니다. 대신 그들이 나중에 한번에 큰돈을 거머쥘 기회는 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잘되면 대기업 연봉의 몇 배를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은 스톡옵션 제도뿐입니다. 저는 스톡옵션제가 인재들을 벤처회사로 끌어올 수 있는 강력한 유인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스톡옵션 제도는 이상하게 변질되어 사실상 무용지물입니다.”

—어떻게 변질됐습니까.

“미국의 스톡옵션제처럼 하면 되는데 우리는 미국 식도 아니고, 우리 식도 아니고 애매하게 규정을 바꿔버렸습니다. 미국의 몇몇 상장회사가 유능한 CEO를 데려오기 위해서 스톡옵션을 준 것이 지난 2000년을 전후해 개정됐습니다. 원래 CEO에게 스톡옵션을 나눠준 취지는 회사 경영을 잘해서 주가(株價)가 올라가면 그만큼 CEO가 이득을 본다는 취지였습니다. 하지만 몇몇 회사는 오히려 주가가 떨어져, 회사에서 그 CEO에게 손해만큼 책임 추궁을 하기가 뭣한 상황이 된 겁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미국에서 스톡옵션 제도에 대해 손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역시 미국을 따라 스톡옵션 제도를 손보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에도 없는 규정들이 삽입됐습니다.”

—어떤 규정 말입니까.

“개정된 스톡옵션에는 과잉 규제가 분명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스톡옵션 개정안을 적용시키는 회사를 상장 법인으로 국한시켰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장회사, 비(非)상장회사 모두 개정된 스톡옵션을 적용토록 했습니다. 상장사와 비상장회사는 회사의 볼륨이 다릅니다. 그런데 타이트한 개정안을 양측에 모두 적용시켰죠. 좋은 인재들에게 스톡옵션을 주고 데려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거 벤처기업을 운영했던 선배 중에 롤모델이 없어서 벤처를 선택하지 않는 건 아닐까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벤처 1세대인 이민화(李珉和) 전(前) 메디슨 대표가 좌초한 것은 정말 마음 아픕니다. 벤처 선배들이 끝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탓도 분명 있습니다.”

대기업이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들 수 없는 이유

박상일 대표가 운영하는 회사가 만드는 것은 ‘원자현미경(AFM)’이라는 제품이다. 물질의 표면 형상을 나노미터(nm·10억분의 1미터)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장치다. 이 현미경은 그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착안해 세상에 내보인, 세상에 없던 특수 현미경이다. 손을 싹 베는 면도칼도 이 현미경으로 보면, 칼끝이 뭉뚝하고 둥근 모습이라고 한다. 세상에 없던 제품을 탄생시킨 사람답게, 그는 ‘R&D’가 벤처기업 성공의 두 번째 열쇠라고 했다.

“기술은 개별 기업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소기업은 현실적으로 기술개발 능력이 떨어집니다. 누군가가 도와야 하는 겁니다. 미국에는 ‘SBIR(Small Business Innovative research)’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직원 숫자가 몇백 명 이하인 회사에 한해 R&D 자금을 지원해 주는 제도예요. 우리나라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이례적으로 큽니다. 이제는 인위적으로라도 그 격차를 줄여야 할 때입니다.”

—너무 반(反) 시장주의적인 것 아닙니까.

“국내 대기업이 오늘날 이렇게 커진 것은 그들의 기술력이 앞섰거나 경영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광복 이후에 원조 물자를 받고 외자(外資)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개발 연대 시절에 엄청난 특혜를 일부 기업에 줬기 때문입니다.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소수의 민간(民間) 기업을 선정해 그들에게 자원을 집중 지원한 것 아닙니까. 지금과 같은 재벌을 탄생시키려고 했던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한국 정부가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경제를 표방했기 때문에 민간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사실상의 공기업을 차명 육성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 결과는 극심한 양극화로 결론지어졌습니다. 과거 정부 주도로 재벌을 탄생시킨 만큼 이제 파격적으로 중소기업을 키워야 합니다.”

—어떤 의도에서 탄생했든 오늘날 대기업이 한국 경제의 주요 축입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주당 150만원을 넘기는 것은 기술을 세련되게 정제해서 가능해진 일입니다. 불량률을 낮추는 등 프로세스 테크놀로지를 잘해서 수익을 높이고, 가격 경쟁력을 통해 세계 1위가 된 겁니다. 처음 시작은 ‘카피캣(잘나가는 제품을 그대로 모방한 것을 폄하해 부르는 말)’이죠.”

—애플이 ‘아이폰’이라는 세상에 없는 제품을 내놨지만, 어느새 삼성전자의 기술이 앞선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국가 자원을 독점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애플이 일개 회사라면, 삼성은 대한민국의 리소스를 모두 가져다 쓰는 회사입니다. 삼성 엔지니어 숫자와 애플 엔지니어가 비교가 됩니까. 그들이 모여서 5인치, 10인치짜리 제품을 내놓고, 수십 개의 모델을 내놓으니 소비자 입장에서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선택의 기회가 많으니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래서 삼성의 점유율이 높아진 겁니다. 애당초 불공정한 게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불이익을 주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대기업을 재벌 총수의 개인적인 이해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보유 사업에 치중하도록 하자는 얘기예요. ‘삼성이 애플보다 잘나가는 것이 국가에 나쁜 것이냐’고 묻는다면, 제 답은 ‘모르겠다’입니다. 분명한 것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신사업을 할 수 있는 곳은 벤처회사뿐이라는 겁니다.”

—대기업은 못 합니까.

“대기업은 관료화되고 보수적으로 변합니다. 대기업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히트 친 사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보너스 정도예요. 반대로 아이디어를 냈는데 실패하면 본인만 조직 내에서 손해를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새로운 것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벤처기업은 달라요. 새로운 일을 창조해서 대박이 날 수도, 빈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창조하는 것에 따른 리스크를 안을 수 있는 곳은 벤처회사뿐입니다.”

—벤처기업의 R&D를 위해 어떤 혜택을 줘야 할까요.

“미국보다 훨씬 파격적인 R&D 자금을 중소기업에 지원해 주고, 대기업에는 일절 주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의 체제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습니다. 경쟁을 철저하게 집행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강제적 힘이 필요합니다. 대기업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우리나라의 기업 환경에서 정부가 필사적으로 중소기업 편에 서서 대기업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시대적 사명 다한 국책연구소 해체해야

박상일 대표는 대기업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그가 사업을 하면서 호되게 겪은 탓이기도 하다. 대기업에서 구두(口頭)로 박 대표의 원자현미경을 사겠다고 했다가 일방적으로 그쪽에서 취소를 하는 바람에 손해를 본 적도 있다고 한다. 대기업의 대금 결제 방식 때문에도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 그가 만드는 원자현미경은 기계 값이 1억원이 넘는 고가(高價)의 장비다. 그의 제품은 대기업, 학교, 연구소에 주로 납품한다. 그런데 대금 결제 부문에서 대기업이 가장 후진적인 행태를 보인다고 한다.

“지난해 대기업에 납품해 보니 납품한 지 한 달 뒤에 6개월짜리 전자 어음을 끊어주더군요. 본인들 사규에 1억원이 넘는 결제는 6개월짜리 어음을 사용한다 합니다. 몇십 조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대기업에 왜 이런 제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국책 과제를 수행하는 학교나 연구소는 한 달 안에 현금 결제를 했습니다. 중소기업은 두어 달 안에 주고, 대기업은 납품 한 달 뒤에 6개월짜리 어음을 준다는 의미가 뭘까요. 제 눈에는 한 달이라도 더 돈놀이를 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같은 제품을 납품했다고 하면 결제 방식이 어떤가요.

“보통 인보이스(invoice·대금청구서)가 나가고 30일, 늦어도 60일 이내에 수표를 주든지 인터넷으로 송금합니다. 우리 대기업의 결제 방식은 정말 후진적입니다.”

박상일 대표가 벤처기업 성공의 두 번째 조건으로 꼽은 ‘R&D’에는 정부가 파격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것 외에, 국가 R&D 정책에 대한 대대적인 재편이 선결조건이다. 박 대표는 “정부의 주도하에 태어난 국책연구소의 존재 이유를 다시 살펴봐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1960~70년대에 국가의 기간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만든 정부 출연 연구소가 너무 많습니다. 필요에 따라 기계산업 육성할 때 기계연구원, 전자부품산업을 일으켜야 할 때 전자부품연구소, 화학연구소, 재료연구소 등 정말 많죠. 내부를 보면 그들이 하고 있는 일 중에는 민간 기업에서 해야 할 몫이 더 많습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정부 출연 연구소에 대한 대폭적인 조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식으로 재편돼야 할까요.

“가장 좋은 것은 출연 연구소가 자연스럽게 해체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거기에 소속된 인원들이 실직이 되니까 다른 해결책을 내놔야 합니다. 가령 출연 연구소에 과제를 주면서, 그 과제를 받은 연구원은 그 과제를 같이 잘 수행할 수 있는 기업체로 이전하는 겁니다. 아니면 스스로 창업을 통해 사업화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숱한 반발이 있겠지만, 필요하다면 결단을 내리는 것이 정부의 몫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지적 재산권을 더 강화해야 벤처기업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박 대표는 문득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특허 분쟁이 붙으면 승률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특허 문제로 법원에 가면 80%는 대기업이 이깁니다. 한때 한국 특허 무용론까지 나왔습니다. 대기업은 중소벤처기업이 가진 기술을 몰래 도용하다 들켜도 그 기술사용료만 내면 끝입니다. ‘돈 내고 써야 하는데 안 냈으니 그거 내라’고 하면 끝입니다. 세금 탈루한 것과 똑같이 취급합니다. 불법으로 남의 것을 도용하다가 들켰는데 그에 대한 페널티를 물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훔친 죄를 준엄하게 물어야죠. 중소벤처기업들의 지적 재산권에 대한 특허 제도를 더욱 강화시켜야, 벤처기업들이 특허 기술을 만들고 나아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요.

“중소기업이 소송이 끝날 때까지 존재할 수나 있을까요. 대기업이 막강한 법조팀, 자금력을 앞세워서 법원에 나올 때 중소기업은 질 높은 법률서비스 없이 허덕이다 끝납니다. 나중에 대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했다고 해도 자기들이 받아야 할 특허 사용료만 받고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돈으로 변호사 비용 내면 끝입니다. 법정 싸움을 하는 동안 중소기업은 이미 문닫고 거덜나는 겁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문제는 결국 법률서비스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박상일 대표의 말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대기업 대(對) 중소기업의 법정 소송이 우리나라처럼 거의 일방적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법정에서만큼은 몸집이 큰 기업이나, 몸집이 왜소한 기업이나 비슷한 수준의 언쟁을 한단다. 그 이유는 중소기업도 대기업에 못지않은 실력 있는 변호사를 쉽게 고용할 수 있어서다.

“미국은 법률서비스가 굉장히 발달해 있어서 작은 벤처기업이라고 해도 창업 초기부터 고급 법률서비스를 사용합니다. 회사의 정관 작성, 고용계약서, 비밀유지계약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변호사가 개입합니다. 비록 작은 벤처회사지만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변호사 수준은 대기업 변호사와 동등한 수준인 겁니다. 대기업의 입장에서 함부로 중소기업의 기술을 사용해서 법정에 갈 경우, 거의 같은 조건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박 대표만 그런 톱클래스 변호사를 쓴 건 아닙니까. 그들을 고용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실리콘밸리에서 벤처를 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중요한 문서를 작성할 때는 한 시간에 500~600달러를 부르는 비싼 변호사를 쓰고, 작은 일에는 주니어 변호사를 씁니다. 미국 변호사들은 시간을 10분 단위로 쪼개서 수임료를 청구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비싸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국내에서 변호사를 선임하면 10분 전화 상담을 했는데, 한 시간이 기본이라면서 한 시간 분량을 청구하더군요. 심지어 검찰에 나갈 때 변호사 이동거리까지 전부 비용으로 청구해서 많이 싸웠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없어서 벤처캐피털에서 투자받은 대다수의 벤처회사들은 고급 법률서비스를 받습니다.”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꽃피우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법률서비스 때문이란 거군요.

“이유 중 하나죠. 재벌그룹이 ‘김&장’을 고용하듯이 벤처회사가 그들을 고용할 수 있다면 적어도 부당한 대우가 많이 줄어들 겁니다. 우리 같은 작은 회사에는 큰 로펌이 붙지 않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지만요.”

“능력 없어 중소기업 하는 게 아니다”

박상일 대표가 미국에서 유학을 했을 때 처음부터 사업가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그 스스로도 “만일 국내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면 벤처기업을 하겠다는 것은 꿈조차 꾸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응용물리학을 전공한 박 대표는 나노 세계의 원자와 분자를 탐구하다가, ‘원자현미경’이라는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을 하게 됐다. 현미경 제조를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품을 팔면 어떨까’에 생각이 미쳤다. 영어가 능숙지 않은 이방인, 동양인 유학생이 이런 꿈을 꾸게 됐던 것은 그가 살았던 지역이 미국 벤처의 핵심인 실리콘밸리여서였다. 바야흐로 1980년대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 이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Bill Gates) 등이 벤처회사를 시작하면서 ‘살아 있는 전설’들이 있던 시절이었다. 박 대표의 얘기다.

“너도나도 벤처에 대해 꿈을 꾸던 때였습니다. 대학에서 프로젝트를 하다가 뭔가 되면 ‘만들어서 팔아보자’며 아이템을 들고 나가 사업하던 시기였습니다. 스탠퍼드 졸업생 중에 창업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죠. 저도 우연히 원자현미경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창업하는 쪽으로 생각이 모였습니다.”

30대 초반인 박 대표의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사업으로 방향을 잡아갔지만 가족들, 지도교수들의 반응은 영 달랐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나서느냐’며 이구동성으로 말렸다. 그의 마음도 많이 흔들렸다. 하지만 시대적인 사명과 분위기는 그를 사업가의 길로 이끌었다.

박 대표는 1988년 7월,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번 돈 2만 달러(2000만원), 미국 1.5세대 친구의 돈 2만 달러를 합쳐 4만 달러로 회사를 차렸다. 사무실은 그가 하숙했던 집 주차장이었다. 거기서 박 대표는 현미경 도면을 그리고, 부품을 일일이 납땜하면서 세상에 없는 제품을 출시할 꿈을 키워갔다. 그간 공부하면서 학회 등에서 만난 몇몇의 지인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렸다. 일본NTT연구소, 스탠퍼드의 표면물리학 교수 등이 그에게 제품 제작을 요청했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현미경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일주일 정도가 소요됐다. 제품 성능 테스트를 거듭한 끝에 창업한 지 반년 만에 그의 첫 제품이 나왔다. 1988년 말이었다.

박 대표의 소식은 지역 신문을 통해 전해졌고, 한 엔젤투자자가 그의 가능성을 믿고 자금을 지원한 덕분에 회사 자본금이 반년 만에 18만 달러(1억8000만원)로 늘었다.

사업을 하고 위기에 봉착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거듭한 끝에 박 대표가 이끌었던 ‘PSI’는 창업 9년 만에 자본금 300만 달러(30억원), 직원 80여 명을 거느린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그는 1997년, 회사를 1700만 달러(170억원)에 미국 회사에 매각했다.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한다는 것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두 번째 벤처를 꿈꿨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성공을 알고 있는 지인들조차, 그의 두 번째 도전을 말렸다. ‘한국 환경을 만만히 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박 대표가 사업에 성공한 것은 미국이어서 가능한 것이지,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다’는 거였습니다. 저보고 한국 중소기업 사장 스타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인들이 말하는 것은 한국은 되는 일도 없고, 또 안 되는 일도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 오히려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박 대표는 1997년 본인 돈 3억7500만원과 8억원의 외부 자금을 끌어들여, 자신의 이름을 딴 ‘파크시스템스’를 만들었다. 한국에서의 사업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한다. 그의 눈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기업 환경은 미국에 비해 모호하고, 관공서·금융권의 협조가 적었다고 한다. 편법과 관행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것이 박 대표의 얘기다.

“세무서에서 찾아오면 용돈류를 주는 것이 관행이라고 했습니다. 그건 원칙이 아니기에 거절했습니다. 한번은 소방서에서 찾아와 천장의 스프링클러 간격을 문제 삼기에 뜯어고쳤습니다. 주위에서는 괘씸죄에 걸린다고들 했지만, 이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중소 벤처기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사업 시작한 이후에 적어도 관가에는 돈 한 푼 준 적 없습니다.”

박상일 대표는 본인이 대표로 있는 회사 경영 이외에 국내 벤처기업의 생태계 저변을 변화시키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벤처를 꿈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미국에서 벤처회사 명함을 내밀며 벤처회사를 한다고 하면 주위에서 높이 평가해 줬습니다. 한국에서 명함을 내밀어 보니 정반대더군요. 능력이 없어서 중소기업을 하는 양, 얼마나 지속될 만한 회사일까라는 의구심을 보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벤처기업인을 폄하하면 훌륭한 벤처기업이 나올 수 없습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겠다며 도전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바라볼 때 진정한 벤처 강국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