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文德
⊙ 62세. 연세대 전기공학과 졸업. 美 MIT대학원 원자력공학 석사.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 원장,
한국전력공사 부사장 역임. 現 한국서부발전 사장.
⊙ 은탑산업훈장 수훈.
⊙ 62세. 연세대 전기공학과 졸업. 美 MIT대학원 원자력공학 석사. 한국전력공사 전력연구원 원장,
한국전력공사 부사장 역임. 現 한국서부발전 사장.
⊙ 은탑산업훈장 수훈.
소년의 꿈은 서울대 음대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수준급의 트럼펫 실력을 발전시켜 멋진 연주자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효자(孝子)이자, 모범생이었던 그는 부모의 뜻을 꺾지 못했다. 때는 바야흐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공업 입국(立國)’을 표방하던 때였다. 그는 전기공학과에 진학했고, 대학 3학년 때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인연으로 졸업 후 한전에 입사했다. 동기생 몇몇은 건설회사에 들어가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을 찾았지만, 그는 전기(電氣)를, 한전과의 인연을 거부하지 못했다. 뜻밖에 시작된 운명이었다. 국내 산업의 패러다임은 건설업에서 종합상사, 중공업을 거쳐, 반도체·IT로 바뀌었지만 그는 묵묵히 한길을 걸었다. 이렇게 살아온 것이 올해로 37년째. 그는 최고 고참 현역이자, 전기업계의 산증인이 됐다. 김문덕(金文德) 한국서부발전 사장이다.
“제가 모범생 스타일입니다. 잔머리를 굴리지 못하고 내 일이 옳다고 생각되면 꾸준히 하는 편입니다. 중간에 곁눈질할 줄 모르고 하루하루 살다 보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기란 그냥 제 삶 자체였던 거지요.”
무표정한 얼굴, 꾸미지 않는 투박한 어투의 김 사장은 지난 세월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긴 사람이 한 업(業)에 30년 이상 몸담으려면, 어지간한 세파(世波)에 까딱하지 않는 무덤덤함은 필수일 것이다.
경쟁입찰 않고 해외 수주하는 노하우
김문덕 사장의 올 초 신년사는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리는 황금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의 성장 추세는 회사 역사상, 전력 그룹사 중 최고 수준이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CEO들이 세계 경기 침체의 장기화를 바탕에 깔고, 긴축경영, 위기의식을 고취하는 신년사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달라도 많이 다르다. 김 사장은 올해를 ‘제대로 된 과실을 따는 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발전 설비업은 호황입니다. 자원을 많이 가진 저개발 국가가 많은데 이들의 문제는 자원개발을 하고 싶어도, 전기가 없다는 겁니다. 미얀마, 인도의 전력성장률이 연간 15%입니다. 서부발전은 40년 이상 발전소를 짓고 운전하고, 정비한 노하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가스복합발전사업, 러시아 열병합발전소 건설·운영, 라오스 수력발전 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발전 설비 경기가 호황이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수주전에 뛰어들지 않습니까.
“해외에서는 경쟁입찰을 하지 않습니다. 경쟁입찰하면 남는 것이 없거든요. 서부발전이 가진 경쟁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국격을 활용하는 거죠.”
김문덕 사장은 ‘입찰경쟁 없는 해외물량 수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눈치였다. 국격을 활용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입찰 없이 해외 물량을 따낸다는 것인가. 김 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미얀마를 예로 들죠. 우리와 역사적 배경이 같습니다. 영국의 속국이었고, 내전(內戰)을 겪었고 군부독재 시절도 있었죠. 결과적으로 우리는 정치적으로 성공했고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공감대가 있죠. 또 우리 전기산업의 발전은 불과 30~40년 만에 이룬 것들입니다. 미얀마 사람들이 다른 선진국에 전기업을 질문하면, 답을 듣기 위해 할아버지 세대를 찾아가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현업에 있는 사람들이 불모지에서 오늘날의 성공을 이룬 과정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가진 고유의 경쟁력입니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미얀마에 제안합니다. 경쟁입찰을 할 때보다 가령 100억원은 더 비싸게 말입니다.”
—그게 먹힙니까.
“비싸도 우리한테 합니다. 같은 배경을 갖고 있고, 그들도 단기간에 우리처럼 성공하고 싶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 점을 활용하는 겁니다. 무턱대고 비싸게 받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건비가 비싸니까, 우리가 직접 미얀마에 진출하기보다 미얀마 사람들을 우리 쪽으로 불러 기술자로 양성해 되돌려보냅니다. 미얀마 입장에서는 경쟁입찰보다 100억원 비싼 그 비용이 자국(自國) 국민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데 쓰이고, 또 우리에 대한 신뢰의 비용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냅니다.”
—해외 수주라고 하면 치열하게 눈치작전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접근법이 전혀 다르군요.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접근했습니다. 한번은 미얀마 대사 주최 만찬에 갔더니 어르신 한 분이 새마을운동 배지를 달고 있더군요. 무형(無形)인 우리 새마을운동이 수출되고 있습니다. 국격이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죠. 국격 위에 삼성, LG 등 대기업의 활약이 더해져 우리 서부발전의 위상 또한 덩달아 높아졌습니다. 우리 회사만의 경쟁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업, 국가 등 우리의 강점을 세일즈 포인트에 모두 접목시켰습니다. 해외에서 물량을 한 건씩 수주할 때마다 말합니다. 제일 고마운 것은 국가라고요(웃음).”
원전 금지한 독일, 프랑스에서 비싼 돈 주고 전기 사와
한국서부발전은 해외에 전기와 신재생 에너지 발전소 건설 노하우만 수출하는 것이 아니다. 전기의 송배전 손실률을 줄이는 방법, 전력의 품질 높이기 노하우 등 전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있다. 이는 37년째 전기업에만 몸담아온 김문덕 사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해외 클라이언트와 만나면 그들의 가려운 구석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과거에 겪고 감내해야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러시아 사람들하고 얘기를 하는데 전기 손실률(발전기에서 생산된 전기가 수요자에 도달하기까지 흐르면서 손실되는 양)이 30%라며 걱정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도 같은 때가 있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전기 손실률이 1961년에 30%였는데, 10년 만에 10%대로 줄였고, 지금은 4% 미만이라고요. 러시아 사람들이 얘기를 듣더니 놀라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발전소를 짓는 것 이외에 노하우를 팔 길이 생긴 거죠.”
—해외에 A라는 상품을 팔고자 갔다가, 오히려 B를 파는 경우가 있겠군요.
“저는 해외 국가들에 우리가 얼마나 발전기를 잘 건설하는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의 우리나라 전력산업에 대해 얘기합니다. 제가 살아온 현장 경험 말이지요. 얘기를 듣다 그들이 먼저 사업 제안을 합니다. 단기간에 성공한 것뿐 아니라, 우리의 전력 품질은 세계 최고니까요. 미국, 유럽을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전기에 있어서 세계 최고는 우리나라입니다.”
김문덕 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세상 곳곳을 밝히는 전기가 다 같은 전기가 아니다. 품질 높은 전기가 있고, 품질 낮은 전기가 있다. 전기업에서 바라보는 전기 품질은 ▲얼마나 자주 정전되느냐 ▲정전 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 ▲전압과 주파수가 일정한가 등의 정전, 전압, 주파수로 결정된다. 우리의 전기 품질은 40년 전에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최고 전기는 우리나라, 일본, 프랑스 등이 갖고 있다. 미국, 캐나다,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은 적어도 전기에 있어서는 강국(强國)이 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 어젠다 설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오늘날 원자력을 주변국에 엄청나게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입니다. 독일은 원자력발전을 금지시켰고, 그 결과 국민이 춥게 살 수밖에 없죠. 독일은 프랑스에서 전기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원자력발전소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쳤습니다. 그 결과 부결됐고, 현재 이탈리아는 프랑스보다 2배 비싼 전기를 수입해 쓰고 있습니다. 국가적 정책이 잘못됐던 거죠.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반대고요.”
공기업 권위주의는 창의성의 敵
한국서부발전은 한전의 자회사다. 지난 2001년에 한전에서 분사했고, 현재 태안, 평택, 서인천, 군산 등 총 4개 발전단지에서 국내 총 발전설비 용량의 10.3%(8409MW)를 담당하고 있다. 지난 2011년을 기준으로 자산 5조2500억원, 매출 5조2000억원이다. 기존의 태안, 평택 발전소를 추가 건설하고 있고, 태양열, 조력을 이용한 신재생 에너지 개발에 열심이다. 해외 국가들에 대한 발전소 신규 건설 및 컨설팅 사업도 활발하다. 김문덕 사장은 지난 2010년 이곳 사장으로 부임했다. 그가 사장으로서 가장 관심을 쏟은 것은 ‘권위주의 탈피’와 ‘혁신’이었다. 그는 서부발전 직원들을 부하 직원이기에 앞서 후배라고 생각한다.
“제가 전기라는 외길 인생을 걸어온 선배잖습니까.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부터 나중에 우리 후배들에게 좀 더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는 데 일조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공기업 직원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있고 자기 업무에 대한 의무감은 강한데, 권위주의 문화에 젖어드는 취약함이 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와서 누구보다 그걸 잘 알잖습니까. 그것부터 과감하게 깨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과거 발전회사 공기업 사장이 발전소 현장 순시에 나서면, 관행상 사업소장들은 톨게이트까지 영접을 나왔다. 사업소에 들어서면 소장 이하 직원들이 일제히 도열해서 사장에게 90도로 절을 했다. 김문덕 사장은 그게 싫었다. 그가 공기업 직원으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점이었고, 미국 MIT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체험한 다른 문화 때문이었다.
“전기공학 계통에서 유명한 교수가 수업을 할 때였습니다. 석사 과정 학생이 맨 앞에 앉아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한 손에 콜라를 들고 수업을 듣더라고요. 나중에는 콜라를 다 마시더니 교수 옆에 있는 휴지통에 빈 캔을 던지고요. 처음에 그 모습을 봤을 때는 ‘어디 저런 말종이 있나’ 싶었죠.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한다고 교수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타이완에 사업차 갔을 때 보니까 상하(上下) 관계인 직원이 경계 없이 서로 토론하더군요. 단순히 그것들이 표면적 문제였다면 권위주의를 없애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살펴보니 권위주의는 결국 말단 직원의 창의성을 짓밟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직원들의 창의력을 막는 거군요.
“권위주의가 굳어지면 말단 직원이 그 위의 직원에게 보고하고, 그 직원이 상사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누락되고 왜곡됩니다. 말단 직원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도 사장에게 보고되는 과정에서 공(功)은 전부 빠집니다. 소통의 부재는 결국 권위주의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자와 카카오톡으로 업무현황 보고받아
김문덕 사장은 관행상 있어 오던 대면(對面) 보고의 상당부분을 문자, 카카오톡(스마트폰 그룹채팅)을 이용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인터뷰 중에 카카오톡을 보여줬다. 12명이 한 그룹인데, 발전기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인터뷰 중에도 직원들의 현황보고로 짐작되는 문자가 계속 들어왔다. 어찌 보면 효율적이고,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안착되는 데 1년 남짓 걸렸다고 한다.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처음에 문자로 보고하랬더니 ‘사장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내용은~’ 이렇게 보내더군요. 문자메시지는 80자 내에서 간결하게 써야 하는데 이런 사설을 쓰면 어쩝니까. 정말 괜찮으니 용건만 간단히 쓰라고 했습니다. 발전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그걸 일일이 전화하고 보고서 만들어 올리면 얼마나 비효율적입니까. 문제 생긴 곳 사진 한 장 찍어서 카카오톡에 올리면 모든 직원이 공유하고 문제점을 해결합니다. 인식의 전환이라는 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배웠지요(웃음).”
그는 요즘 평균 40~50개의 문자,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는다. 그는 여전히 신속하고, 정보의 왜곡이 없다는 점에서 이런 보고 체계를 선호한다.
그는 올 초부터 협력회사와 업무 협약을 체결하는 계약서에서 ‘갑’, ‘을’이라는 명칭을 없애고 위탁자와 수탁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갑을’이라는 어감이 주는 위계 체계가 싫어서다. 또 회사의 목표를 ‘영&다이내믹(Young&Dynamic)’으로 정했다. 본사와 사업소, 관리자와 현장 직원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젊은이들과 같은 발상의 전환을 지향하자는 뜻에서다.
김 사장은 “작은 습관부터 바꾸다 보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기술적 혁신 활동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했다.
—서부발전을 비롯해, 결국 발전회사들이 민영화 수순을 밟겠지요.
“국민들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그렇게 흘러갈 겁니다. 그런데 전기는 공공재입니다. 수급 불균형이 일어나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전기산업의 숙명입니다. 지난 2003년 뉴욕 정전사태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다. 이틀 동안 정전됐을 때 어떻게 됐습니까. 원자력발전소가 가동을 중단했고, 비행기 이착륙이 불가능했죠. 승강기가 멈추고,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인출할 수 없었습니다. 휴대전화, 인터넷 통신이 정지되고 생활이 마비됐습니다. 미국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제가 한전 계통계획실장이라 청와대에 보고를 갔습니다. 미국의 정전사태가 우리에게 생길 확률은 낮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입니다. 전기는 이처럼 공공재이고, 발전회사가 민영화돼도 공적인 규제를 해야 합니다.”
—우리도 9·15 정전사태가 있었죠.
“결과적으로 해당 부처 간 소통의 부재로 인해 생긴 일이었죠. 오히려 향후 발생할 대형사고를 막는 대비 체제를 갖춘 계기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미국에서는 하루에 1~2시간 정전되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우리는 스키 리프트가 40초가량 멈췄다고 신문에 날 정도이니 얼마나 수준 높은 겁니까. 국민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요즘도 내복 입기 운동, 실내온도 적정수준 유지하기 등 대(對) 국민 홍보가 많던데요.
“전기산업의 수요, 공급 예측이 간단치 않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예비력이 80% 이상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수요가 100인데, 180이 확보된 상황이었죠. 그때는 ‘필요 없는 발전기를 지은 것이 아니냐, 결국 그 이자비용이 국민의 세금’이라고 해서 한전 직원들이 검찰 조사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모자라서 난리잖습니까. 지금 예비율이 3% 정도입니다. 2014년 정도까지 빠듯한 상황이 이어지다 그 이후에는 풀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30개를 놓고 영업하는 냉면 가게에 늘상 손님 28명이 차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너무 줄거나, 줄지어 늘어서는 것보다는 늘 꽉꽉 차는 상황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결국 국민들의 도움이 전력산업을 발전시키는 가장 기본입니다.”
변전소장이 동네 유지였던 시절
김문덕 사장이 기억하는 전기는 ‘옆집과 나눠 쓰던 재화’다. 어렸을 때 셋방에 살면서, 벽면에 구멍을 뚫어 옆집과 전기를 나눠 썼다. 밤이 되면 으레 그의 부모는 ‘이제 불 꺼도 돼요?’라고 옆 집에 물었다. 변전소 소장이 한 동네의 유지였던 시절이다.
“극장에서 영화가 한참 돌아가는데 전기가 불안정하게 공급돼 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변전소 소장한테 ‘우리 전기 잘 넣어달라’고 아부하는 겁니다(웃음). 전기라는 재화를 마음 놓고 쓰지 못하던 시절이었죠. 그게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과거에 있었다면 실감납니까?”
그가 한전에 입사한 1977년 국내 총 전기 수요는 380만KW였다. 지난해 우리의 전기는 7500만KW, 그의 입사 때보다 20배가 늘었다.
신입사원 때 해외 연수를 가면 한전 직원들은 반(半)스파이였다. 교육을 받는 중간에 어쩌다 미국 발전 회사의 도면이 나오면 몰래 사진 찍기 바빴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양적인 성장에만 치중하던 때였다.
김 사장은 ‘어떤 건물을 지으면 변전소 하나 짓고, 뒤돌아서서 변압기 놓고, 또다시 발전소 짓기를 반복했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변전소 하나를 짓다가 5~6명의 직원이 죽은 적도 있다. 안전보다는 외형, 공사기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때 우리에게 ‘동경전력주식회사’는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운 롤모델이었다.
김 사장은 우리의 지난 40년에 대해 “우리 전력사업은 모범적이었다. 경제발전이 빠르고, 전기 수요 증가율이 큰 나라의 산업을 무사히 백업했다. 간혹 진통이 있었지만 우리 국민의 빠른 대처로 큰 사고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공기업과 민간기업의 차이
김 사장은 그렇게 한전에서 계통계획실장, 배전처장, 부사장을 거쳐 자회사인 한국서부발전 수장이 됐다. 그는 이 회사에 취임하기 전에 심사위원으로부터 받았던 질문을 여전히 기억한다.
“한 심사위원이 ‘서부발전은 한전 자회사인데 한전에서 하라는 것과 정부의 주문이 다르면 어떻게 할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좀 얄미운 질문이었죠. 그런데 질문을 막상 받아 보니 답이 1초도 안 돼서 나왔습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어떤 것이 이익인지 따지겠다’고요. 공기업은 국민의 편의가 존재의 이유잖습니까.”
—오늘날 공기업 경영자로 민간 출신이 선임되는데요.
“타이완공사 사장이 한번은 묻더군요. ‘민간 출신 CEO랑 공기업 출신이랑 어때요’라고요. 그때 답을 하면서 스스로 정리가 됐습니다. 민간 출신은 확실히 매출, 수익을 최우선으로 따집니다. 숫자가 늘고 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더군요. 민간기업은 목표지향적, 공기업은 주변지향적이라고 말해 줬습니다. 공기업은 무작정 수익만 생각할 수 없어요. 공기업 경영은 아트입니다.”
—아트요.
“민간기업이 오너가 있고 수익을 최우선으로 치는 단순한 구조라면, 공기업은 갖가지 문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풀어내느냐가 핵심입니다. 매년 국정감사를 받아야 하고 민간 발전회사와 경쟁하고, 협력회사와 동반성장하고, 사회공헌 활동을 해야 합니다. 수익구조는 취약하지만 적자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죠. 공기업 CEO 자리에 앉아 보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핵심은 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무리수 없이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공기업에 줄서기 문화, 파벌주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공기업 인사 문제는 제가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승진시키는 것은 당연히 원칙이고요, 이외에 지역별, 학교별 안배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우리 서부발전은 제가 서울, 감사는 충청, 기술본부장은 호남, 관리본부장은 영남 출신입니다(웃음). 참 다양하죠. 하지만 이렇게 해야 모든 직원이 차별받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고 일에 매진합니다.”
한국서부발전은 태안 9, 10호기와 평택복합2단계, 동두천 복합이 준공되는 2016년에 국내 최대 발전회사로 발돋움할 예정이다.
김문덕 사장에게 전기는 삶이다. 어린 시절에는 마음껏 써보지 못한 동경의 대상이었고, 전기회사에 몸담으면서는 선배들로부터 전기에 대한 무한 책임을 배웠다. 한전을 떠나 한전 자회사의 수장으로 취임하던 날에는, 그 강하다는 전력회사 노조 위원장으로부터 출근 환대를 받았다.
아련한 추억이 됐지만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은 훌륭한 음악가였다. 김 사장은 분기마다 ‘CEO와 함께 찾아가는 자선음악회’를 열어 트럼펫을 연주한다. 어린 시절에 꿈꿨던 악기 연주라는 아트를 그는 오늘날 공기업 CEO로서 하고 있다.⊙
“제가 모범생 스타일입니다. 잔머리를 굴리지 못하고 내 일이 옳다고 생각되면 꾸준히 하는 편입니다. 중간에 곁눈질할 줄 모르고 하루하루 살다 보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기란 그냥 제 삶 자체였던 거지요.”
무표정한 얼굴, 꾸미지 않는 투박한 어투의 김 사장은 지난 세월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긴 사람이 한 업(業)에 30년 이상 몸담으려면, 어지간한 세파(世波)에 까딱하지 않는 무덤덤함은 필수일 것이다.
경쟁입찰 않고 해외 수주하는 노하우
김문덕 사장의 올 초 신년사는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리는 황금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의 성장 추세는 회사 역사상, 전력 그룹사 중 최고 수준이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CEO들이 세계 경기 침체의 장기화를 바탕에 깔고, 긴축경영, 위기의식을 고취하는 신년사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달라도 많이 다르다. 김 사장은 올해를 ‘제대로 된 과실을 따는 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발전 설비업은 호황입니다. 자원을 많이 가진 저개발 국가가 많은데 이들의 문제는 자원개발을 하고 싶어도, 전기가 없다는 겁니다. 미얀마, 인도의 전력성장률이 연간 15%입니다. 서부발전은 40년 이상 발전소를 짓고 운전하고, 정비한 노하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가스복합발전사업, 러시아 열병합발전소 건설·운영, 라오스 수력발전 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발전 설비 경기가 호황이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수주전에 뛰어들지 않습니까.
“해외에서는 경쟁입찰을 하지 않습니다. 경쟁입찰하면 남는 것이 없거든요. 서부발전이 가진 경쟁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국격을 활용하는 거죠.”
김문덕 사장은 ‘입찰경쟁 없는 해외물량 수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눈치였다. 국격을 활용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입찰 없이 해외 물량을 따낸다는 것인가. 김 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미얀마를 예로 들죠. 우리와 역사적 배경이 같습니다. 영국의 속국이었고, 내전(內戰)을 겪었고 군부독재 시절도 있었죠. 결과적으로 우리는 정치적으로 성공했고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공감대가 있죠. 또 우리 전기산업의 발전은 불과 30~40년 만에 이룬 것들입니다. 미얀마 사람들이 다른 선진국에 전기업을 질문하면, 답을 듣기 위해 할아버지 세대를 찾아가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현업에 있는 사람들이 불모지에서 오늘날의 성공을 이룬 과정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가진 고유의 경쟁력입니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미얀마에 제안합니다. 경쟁입찰을 할 때보다 가령 100억원은 더 비싸게 말입니다.”
—그게 먹힙니까.
“비싸도 우리한테 합니다. 같은 배경을 갖고 있고, 그들도 단기간에 우리처럼 성공하고 싶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 점을 활용하는 겁니다. 무턱대고 비싸게 받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건비가 비싸니까, 우리가 직접 미얀마에 진출하기보다 미얀마 사람들을 우리 쪽으로 불러 기술자로 양성해 되돌려보냅니다. 미얀마 입장에서는 경쟁입찰보다 100억원 비싼 그 비용이 자국(自國) 국민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데 쓰이고, 또 우리에 대한 신뢰의 비용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냅니다.”
—해외 수주라고 하면 치열하게 눈치작전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접근법이 전혀 다르군요.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접근했습니다. 한번은 미얀마 대사 주최 만찬에 갔더니 어르신 한 분이 새마을운동 배지를 달고 있더군요. 무형(無形)인 우리 새마을운동이 수출되고 있습니다. 국격이 높아졌기에 가능한 일이죠. 국격 위에 삼성, LG 등 대기업의 활약이 더해져 우리 서부발전의 위상 또한 덩달아 높아졌습니다. 우리 회사만의 경쟁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업, 국가 등 우리의 강점을 세일즈 포인트에 모두 접목시켰습니다. 해외에서 물량을 한 건씩 수주할 때마다 말합니다. 제일 고마운 것은 국가라고요(웃음).”
원전 금지한 독일, 프랑스에서 비싼 돈 주고 전기 사와
 |
| 지난 2012년 3월 14일, 러시아 간담회 자리에서 메드베데프 당시 대통령과 함께. |
“한번은 러시아 사람들하고 얘기를 하는데 전기 손실률(발전기에서 생산된 전기가 수요자에 도달하기까지 흐르면서 손실되는 양)이 30%라며 걱정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도 같은 때가 있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전기 손실률이 1961년에 30%였는데, 10년 만에 10%대로 줄였고, 지금은 4% 미만이라고요. 러시아 사람들이 얘기를 듣더니 놀라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발전소를 짓는 것 이외에 노하우를 팔 길이 생긴 거죠.”
—해외에 A라는 상품을 팔고자 갔다가, 오히려 B를 파는 경우가 있겠군요.
“저는 해외 국가들에 우리가 얼마나 발전기를 잘 건설하는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의 우리나라 전력산업에 대해 얘기합니다. 제가 살아온 현장 경험 말이지요. 얘기를 듣다 그들이 먼저 사업 제안을 합니다. 단기간에 성공한 것뿐 아니라, 우리의 전력 품질은 세계 최고니까요. 미국, 유럽을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전기에 있어서 세계 최고는 우리나라입니다.”
김문덕 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세상 곳곳을 밝히는 전기가 다 같은 전기가 아니다. 품질 높은 전기가 있고, 품질 낮은 전기가 있다. 전기업에서 바라보는 전기 품질은 ▲얼마나 자주 정전되느냐 ▲정전 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 ▲전압과 주파수가 일정한가 등의 정전, 전압, 주파수로 결정된다. 우리의 전기 품질은 40년 전에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최고 전기는 우리나라, 일본, 프랑스 등이 갖고 있다. 미국, 캐나다,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은 적어도 전기에 있어서는 강국(强國)이 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 어젠다 설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오늘날 원자력을 주변국에 엄청나게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입니다. 독일은 원자력발전을 금지시켰고, 그 결과 국민이 춥게 살 수밖에 없죠. 독일은 프랑스에서 전기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원자력발전소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쳤습니다. 그 결과 부결됐고, 현재 이탈리아는 프랑스보다 2배 비싼 전기를 수입해 쓰고 있습니다. 국가적 정책이 잘못됐던 거죠.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반대고요.”
공기업 권위주의는 창의성의 敵
 |
| 지난 2011년 8월 12일 사랑의 식당 봉사에 나선 김문덕 사장. |
“제가 전기라는 외길 인생을 걸어온 선배잖습니까.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부터 나중에 우리 후배들에게 좀 더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는 데 일조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공기업 직원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있고 자기 업무에 대한 의무감은 강한데, 권위주의 문화에 젖어드는 취약함이 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와서 누구보다 그걸 잘 알잖습니까. 그것부터 과감하게 깨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과거 발전회사 공기업 사장이 발전소 현장 순시에 나서면, 관행상 사업소장들은 톨게이트까지 영접을 나왔다. 사업소에 들어서면 소장 이하 직원들이 일제히 도열해서 사장에게 90도로 절을 했다. 김문덕 사장은 그게 싫었다. 그가 공기업 직원으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점이었고, 미국 MIT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체험한 다른 문화 때문이었다.
“전기공학 계통에서 유명한 교수가 수업을 할 때였습니다. 석사 과정 학생이 맨 앞에 앉아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한 손에 콜라를 들고 수업을 듣더라고요. 나중에는 콜라를 다 마시더니 교수 옆에 있는 휴지통에 빈 캔을 던지고요. 처음에 그 모습을 봤을 때는 ‘어디 저런 말종이 있나’ 싶었죠.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한다고 교수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타이완에 사업차 갔을 때 보니까 상하(上下) 관계인 직원이 경계 없이 서로 토론하더군요. 단순히 그것들이 표면적 문제였다면 권위주의를 없애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살펴보니 권위주의는 결국 말단 직원의 창의성을 짓밟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직원들의 창의력을 막는 거군요.
“권위주의가 굳어지면 말단 직원이 그 위의 직원에게 보고하고, 그 직원이 상사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누락되고 왜곡됩니다. 말단 직원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도 사장에게 보고되는 과정에서 공(功)은 전부 빠집니다. 소통의 부재는 결국 권위주의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자와 카카오톡으로 업무현황 보고받아
김문덕 사장은 관행상 있어 오던 대면(對面) 보고의 상당부분을 문자, 카카오톡(스마트폰 그룹채팅)을 이용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인터뷰 중에 카카오톡을 보여줬다. 12명이 한 그룹인데, 발전기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인터뷰 중에도 직원들의 현황보고로 짐작되는 문자가 계속 들어왔다. 어찌 보면 효율적이고,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안착되는 데 1년 남짓 걸렸다고 한다.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처음에 문자로 보고하랬더니 ‘사장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내용은~’ 이렇게 보내더군요. 문자메시지는 80자 내에서 간결하게 써야 하는데 이런 사설을 쓰면 어쩝니까. 정말 괜찮으니 용건만 간단히 쓰라고 했습니다. 발전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그걸 일일이 전화하고 보고서 만들어 올리면 얼마나 비효율적입니까. 문제 생긴 곳 사진 한 장 찍어서 카카오톡에 올리면 모든 직원이 공유하고 문제점을 해결합니다. 인식의 전환이라는 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배웠지요(웃음).”
그는 요즘 평균 40~50개의 문자,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는다. 그는 여전히 신속하고, 정보의 왜곡이 없다는 점에서 이런 보고 체계를 선호한다.
그는 올 초부터 협력회사와 업무 협약을 체결하는 계약서에서 ‘갑’, ‘을’이라는 명칭을 없애고 위탁자와 수탁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갑을’이라는 어감이 주는 위계 체계가 싫어서다. 또 회사의 목표를 ‘영&다이내믹(Young&Dynamic)’으로 정했다. 본사와 사업소, 관리자와 현장 직원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젊은이들과 같은 발상의 전환을 지향하자는 뜻에서다.
김 사장은 “작은 습관부터 바꾸다 보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기술적 혁신 활동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했다.
—서부발전을 비롯해, 결국 발전회사들이 민영화 수순을 밟겠지요.
“국민들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그렇게 흘러갈 겁니다. 그런데 전기는 공공재입니다. 수급 불균형이 일어나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전기산업의 숙명입니다. 지난 2003년 뉴욕 정전사태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다. 이틀 동안 정전됐을 때 어떻게 됐습니까. 원자력발전소가 가동을 중단했고, 비행기 이착륙이 불가능했죠. 승강기가 멈추고, 은행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인출할 수 없었습니다. 휴대전화, 인터넷 통신이 정지되고 생활이 마비됐습니다. 미국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제가 한전 계통계획실장이라 청와대에 보고를 갔습니다. 미국의 정전사태가 우리에게 생길 확률은 낮지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입니다. 전기는 이처럼 공공재이고, 발전회사가 민영화돼도 공적인 규제를 해야 합니다.”
—우리도 9·15 정전사태가 있었죠.
“결과적으로 해당 부처 간 소통의 부재로 인해 생긴 일이었죠. 오히려 향후 발생할 대형사고를 막는 대비 체제를 갖춘 계기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미국에서는 하루에 1~2시간 정전되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우리는 스키 리프트가 40초가량 멈췄다고 신문에 날 정도이니 얼마나 수준 높은 겁니까. 국민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요즘도 내복 입기 운동, 실내온도 적정수준 유지하기 등 대(對) 국민 홍보가 많던데요.
“전기산업의 수요, 공급 예측이 간단치 않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예비력이 80% 이상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수요가 100인데, 180이 확보된 상황이었죠. 그때는 ‘필요 없는 발전기를 지은 것이 아니냐, 결국 그 이자비용이 국민의 세금’이라고 해서 한전 직원들이 검찰 조사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모자라서 난리잖습니까. 지금 예비율이 3% 정도입니다. 2014년 정도까지 빠듯한 상황이 이어지다 그 이후에는 풀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30개를 놓고 영업하는 냉면 가게에 늘상 손님 28명이 차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너무 줄거나, 줄지어 늘어서는 것보다는 늘 꽉꽉 차는 상황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결국 국민들의 도움이 전력산업을 발전시키는 가장 기본입니다.”
변전소장이 동네 유지였던 시절
김문덕 사장이 기억하는 전기는 ‘옆집과 나눠 쓰던 재화’다. 어렸을 때 셋방에 살면서, 벽면에 구멍을 뚫어 옆집과 전기를 나눠 썼다. 밤이 되면 으레 그의 부모는 ‘이제 불 꺼도 돼요?’라고 옆 집에 물었다. 변전소 소장이 한 동네의 유지였던 시절이다.
“극장에서 영화가 한참 돌아가는데 전기가 불안정하게 공급돼 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변전소 소장한테 ‘우리 전기 잘 넣어달라’고 아부하는 겁니다(웃음). 전기라는 재화를 마음 놓고 쓰지 못하던 시절이었죠. 그게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과거에 있었다면 실감납니까?”
그가 한전에 입사한 1977년 국내 총 전기 수요는 380만KW였다. 지난해 우리의 전기는 7500만KW, 그의 입사 때보다 20배가 늘었다.
신입사원 때 해외 연수를 가면 한전 직원들은 반(半)스파이였다. 교육을 받는 중간에 어쩌다 미국 발전 회사의 도면이 나오면 몰래 사진 찍기 바빴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양적인 성장에만 치중하던 때였다.
김 사장은 ‘어떤 건물을 지으면 변전소 하나 짓고, 뒤돌아서서 변압기 놓고, 또다시 발전소 짓기를 반복했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변전소 하나를 짓다가 5~6명의 직원이 죽은 적도 있다. 안전보다는 외형, 공사기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때 우리에게 ‘동경전력주식회사’는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운 롤모델이었다.
김 사장은 우리의 지난 40년에 대해 “우리 전력사업은 모범적이었다. 경제발전이 빠르고, 전기 수요 증가율이 큰 나라의 산업을 무사히 백업했다. 간혹 진통이 있었지만 우리 국민의 빠른 대처로 큰 사고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공기업과 민간기업의 차이
 |
| 지난 2012년 1월 신년음악회에서 트럼펫을 불고 있는 김문덕 사장. |
“한 심사위원이 ‘서부발전은 한전 자회사인데 한전에서 하라는 것과 정부의 주문이 다르면 어떻게 할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좀 얄미운 질문이었죠. 그런데 질문을 막상 받아 보니 답이 1초도 안 돼서 나왔습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어떤 것이 이익인지 따지겠다’고요. 공기업은 국민의 편의가 존재의 이유잖습니까.”
—오늘날 공기업 경영자로 민간 출신이 선임되는데요.
“타이완공사 사장이 한번은 묻더군요. ‘민간 출신 CEO랑 공기업 출신이랑 어때요’라고요. 그때 답을 하면서 스스로 정리가 됐습니다. 민간 출신은 확실히 매출, 수익을 최우선으로 따집니다. 숫자가 늘고 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더군요. 민간기업은 목표지향적, 공기업은 주변지향적이라고 말해 줬습니다. 공기업은 무작정 수익만 생각할 수 없어요. 공기업 경영은 아트입니다.”
—아트요.
“민간기업이 오너가 있고 수익을 최우선으로 치는 단순한 구조라면, 공기업은 갖가지 문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풀어내느냐가 핵심입니다. 매년 국정감사를 받아야 하고 민간 발전회사와 경쟁하고, 협력회사와 동반성장하고, 사회공헌 활동을 해야 합니다. 수익구조는 취약하지만 적자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죠. 공기업 CEO 자리에 앉아 보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핵심은 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무리수 없이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공기업에 줄서기 문화, 파벌주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공기업 인사 문제는 제가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승진시키는 것은 당연히 원칙이고요, 이외에 지역별, 학교별 안배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우리 서부발전은 제가 서울, 감사는 충청, 기술본부장은 호남, 관리본부장은 영남 출신입니다(웃음). 참 다양하죠. 하지만 이렇게 해야 모든 직원이 차별받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고 일에 매진합니다.”
한국서부발전은 태안 9, 10호기와 평택복합2단계, 동두천 복합이 준공되는 2016년에 국내 최대 발전회사로 발돋움할 예정이다.
김문덕 사장에게 전기는 삶이다. 어린 시절에는 마음껏 써보지 못한 동경의 대상이었고, 전기회사에 몸담으면서는 선배들로부터 전기에 대한 무한 책임을 배웠다. 한전을 떠나 한전 자회사의 수장으로 취임하던 날에는, 그 강하다는 전력회사 노조 위원장으로부터 출근 환대를 받았다.
아련한 추억이 됐지만 그의 어린 시절의 꿈은 훌륭한 음악가였다. 김 사장은 분기마다 ‘CEO와 함께 찾아가는 자선음악회’를 열어 트럼펫을 연주한다. 어린 시절에 꿈꿨던 악기 연주라는 아트를 그는 오늘날 공기업 CEO로서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