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신이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면 인간은 자유를 박탈당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신의 고차원적인 섭리일 수가 있어요. 힘과 권한을 가진 분이 자꾸 내 앞에 얼쩡거리면 얼마나 부담스러워요”
⊙ 神은 숨바꼭질하는 존재.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알 듯 모를 듯 존재하는 분
⊙ 고통과 슬픔, 이별과 죽음은 ‘생명의 몸살’ 내지 자연발생적 현상
⊙ 신부도 신의 소명(召命)을 받았다 착각하는 기만적인 소명이 있을 수 있어
車東燁
⊙ 서울대 공대, 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오스트리아 빈대학 사목신학 박사.
⊙ 인천가톨릭대 교수, 천주교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 저서: 《무지개 원리》, 《통하는 기도》, 《뿌리 깊은 희망》, 《행복 선언》, 《바보 ZONE》 외
다수.
⊙ 神은 숨바꼭질하는 존재.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알 듯 모를 듯 존재하는 분
⊙ 고통과 슬픔, 이별과 죽음은 ‘생명의 몸살’ 내지 자연발생적 현상
⊙ 신부도 신의 소명(召命)을 받았다 착각하는 기만적인 소명이 있을 수 있어
車東燁
⊙ 서울대 공대, 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오스트리아 빈대학 사목신학 박사.
⊙ 인천가톨릭대 교수, 천주교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 저서: 《무지개 원리》, 《통하는 기도》, 《뿌리 깊은 희망》, 《행복 선언》, 《바보 ZONE》 외
다수.
말년(末年)의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은 다급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神)에 대한 절박한 의문을 풀고 싶어 했다. 한국천주교의 절두산 성지(聖地) 박물관장이었던 박희봉 신부를 거쳐 정의채(鄭義采) 몬시뇰 신부에게 연락이 닿았다. 정 몬시뇰은 “그냥 대화하면 서로 초점이 안 맞을 수 있으니 미리 질문서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얼마 후 24개의 질문이 배달됐다.
처음 준비한 질문은 40개였다고 한다. 이 회장이 직접 줄이고 줄였다는 것이다. 그즈음, 이 회장은 정 몬시뇰과의 만남을 무척 서둘렀다고 전한다. 급하게 날짜를 잡았다. 그러나 만남을 코앞에 두고 다급한 연락이 왔다.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갑자기 병세가 악화된 것이었다. 이 회장은 질문의 답을 듣지 못한 채 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정 몬시뇰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허탈감 때문에” 이 회장의 질문지를 그냥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 사이 세월이 흘러 ‘4장의 질문지’는 서강대 손병두(孫炳斗) 전 총장을 거쳐 인천교구 차동엽(車東燁) 신부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꼭 24년 만인 작년 12월, 질문에 대한 답은 《잊혀진 질문》이란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24가지 질문이 24년 만에 빛을 본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고인의 질문은 시종 진지했다.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고통받는 ‘나’의 질문이자 무심한 하늘에 대한 ‘우리’의 삿대질인지도 모른다. 차동엽 신부는 “그 물음들은 한 인간이 죽음에 직면한 ‘삶의 자리’에서 던진 가장 절박한 물음”이라고 했다.
차 신부의 ‘난문쾌답(難問快答)’, 《잊혀진 질문》은 마치 고통의 닫힌 문 앞에서 여벌의 열쇠를 손에 쥔 것처럼 넉넉하게 느껴진다. 그 열쇠를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 슬픔을 이겨낼 것만 같다.
神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나?
차동엽 신부의 답은, 실망스럽게도 “No!”다. 그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도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순수이성은 인간의 유한성 탓에 무한한 실재(實在)인 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증명되지 않는 것이 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자연과학에서 개미는 2차원을 사는 곤충, 코끼리는 3차원적 존재라고 합니다. 개미는 과연 코끼리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까요? 평생 코끼리 몸통을 기어다녀도 ‘코끼리’라는 실체를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신이 자신을 드러내도, 또 실지로 드러냈지만, 인간은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답답한 채로 감(感)을 잡을 뿐이죠. 편린(片鱗)만 보는 것입니다.
만약 신이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면 인간은 자유를 박탈당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신의 고차원적인 섭리일 수가 있어요. 힘과 권한을 가진 분이 자꾸 내 앞에 얼쩡거리면 얼마나 부담스러워요. 그러니까 피해주시는 겁니다. 언뜻 존재만 슬쩍 보이면서 피해주시는 것이죠. 그걸 모르고 인간은 나타나라, 나타나라 하는데, 나타나면 인간은 주눅 들어 살 수가 없어요.”
차 신부는 소설가 박완서의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에 나오는 글을 예로 든다.
<…나는 내 눈으로 한번 똑똑히 분꽃이 피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봉오리가 활짝 벌어질 줄 알았는데 지키고 앉았으니까 왜 그렇게 안 벌어지는지요. 나는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약간 느슨해진 꽃봉오리를 손으로 펴려고 했습니다. 잘 안 되더군요. 인내심이 부족한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잠깐 자리를 떴다 와보니 분꽃은 용용 죽겠지, 하는 얼굴로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쎄 내가 억지로 펴려 했던 꽃봉오리만 피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지 뭡니까. 어른들한테 일렀더니 손독이 올랐다고 하더군요. 내 어린 손도 독이 되는데 어떤 인자한 힘이 꽃을 피웠을까요?
그건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내 최초의 경이였습니다.>
차 신부는 “신은 숨바꼭질하는 존재”라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알 듯 모를 듯 존재하는 분이 신”이라고 설명한다.
神은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사람은 누구나 고통 앞에 초연할 수 없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 죽음을 주었을까.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서일까. 이병철 회장은 생전 이렇게 물었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차동엽 신부는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고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단 고통은 신의 조화가 아니라 철저히 자연현상임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물리적인 것이고, 심리적인 것이며, 자연발생적인 것입니다. 이미 삶의 조건 안에 고통이 있어요. 지진과 해일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그 지진과 해일이 엄연한 자연현상임을 보여줍니다. 이혼과 이별, 사고, 상처 등은 모든 인간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생명의 몸살’로 겪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입니다.”
차 신부는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신은 태초에 고통을 허락했는가?’, ‘왜 전능한 신이 내 고통을 막아주지 않는가’ 원망한다”고 주장한다.
“‘왜 하필 나에게…’라고 신에 호소합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반응이죠. 그런데 답이 없어요. 수많은 인류가 역사 이래로 계속 던져온 질문이지요. 그러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이 고통 속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이냐고요. ‘왜’라는 질문을 승화해 나가면 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부터 신이 개입(介入)을 합니다. 도와주고 힘이 되어주고 구원(救援)을 합니다. 제가 아는 한 그렇습니다.”
차 신부는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분류하면 3가지가 있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첫째는 시쳇말로 ‘개죽음’과 같은 ‘의미 없는 고통’이 있어요. 고통을 겪고도 승화시키지 못하면 의미 없는 고통으로 가는 겁니다. 원망만 하다가 죽게 되는 고통이지요. 그런 고통이 수도 없이 많아요.
둘째는 ‘시련으로서의 고통’이 있습니다. 시련은, 말하자면 유격훈련, 태릉선수촌과 같은 거예요. 이 고통을 인생의 단련으로 생각하고 나를 더 강한 존재로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만 잘해도 성공이지요.
셋째는 ‘세상을 구하는 고통’이 있어요. 꼭 종교적으로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남을 위한 희생과 사랑으로서의 고통, 이것은 착한 열매를 맺어요. 이 사회를 위해 자신을 던지면 사회가 선하고 밝아집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이병철 회장에게도 고통과 불행,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였다. 차 신부는 “고인의 전제, 그러니까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이라는 전제로 미뤄보건대, 묻는 이는 어렴풋이 그 답이 사랑에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직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기적은 일어날까?
고통과 슬픔, 이별과 죽음이 ‘생명의 몸살’ 내지 자연발생적 현상이라면 기적(奇跡)은 무엇인가. 기적의 실체란 존재하는 것일까. 기적은 인간사의 운(運)일까. 고통에 아파하는 사람에게 신의 손길이 과연 미치는 것일까.
차 신부는 “신이 개입한다”고 단언한다.
“개입을 합니다. 언제 하느냐? 일종의 ‘자유의지 게임’입니다. 나는 스스로 자유를 지닌 존재지만, 자발적으로 ‘제 자유를 당신께 반납하겠습니다’ 하는 순간, 기적의 통로가 열리기 시작하지요. 이것을 종교적 귀의(歸依)라고 합니다. 귀의가 뭐냐?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당신 뜻이 뭔지 헤아리고 소통하면서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신은 ‘로봇’ 부리는 것을 싫어해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은 싫지만 맹서(盟誓)를 하면서 ‘당신 원하는 것을 제 기쁨으로 삼겠다’고 하면 받아들여 줍니다. 이것이 자유의지의 심오한 부분이자 가톨릭만이 아닌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신적 개입이 시작되고, 기적이 일어나지요.”
―종교를 믿지 않아도 기적이 일어나나요?
“그것을 ‘초대(招待)’라고 하지요. 기적을 통해 어떤 이를 깨달음으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죠. 신적인 선택인 셈입니다. ‘저 친구, 살아가는 모습 속에 나름 너무 애를 써. 나하고 소통하면 좋을 텐데’ 하며 ‘스카우트’하는 것입니다.”
차 신부는 그러나 “신이 기적을 행할 때, 자연을 거스르며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패스(Bypass·기업이 부서 간 근거리·장거리 통신을 할 때, 전화회사를 통하지 않고 하는 접속 체계)를 통해 행한다”고 설명한다.
“원래 자연이 있는데, 자연 옆에 바이패스가 있어요. 인간이 모르는 바이패스로 무한 가능성을 인간에게 주었지요. 인간은 누구에게나 꿈이 있습니다. 꿈이라는 무한 가능성을 창세기 때부터 인간에게 준 거예요. 그러고 보면 인간에게는 ‘목표 추적 장치’가 있습니다. (신을) 잘 믿으면 작동이 잘되는 유리한 조건이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도 목표 추적 장치가 있어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지요. 교주(敎主)가 되기도 하고….
“있지요. 너무 잘나서…. 신은 그냥 내버려두는 겁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도토리 키재기니까….”
왜 악인 중에서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이가 많은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세상이다. 나쁘게 돈을 벌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졸부(猝富)를 보면 화가 치민다. 이야말로 불공정사회다.
직장에서는 또 어떤가. 성실하지도 않고 아이디어도 없으면서 상사에게 아부해 승진하는 이를 보면 세상 살맛을 잃는다. 은수저 물고 태어나 떵떵거리는 ‘세습자’들에게 야유를 보내고 싶다. 왜 신은 천하의 악인을 살찌우는가?
차 신부는 “초간편 답을 하자면, 신은 벌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현세에서는”이라고 덧말을 붙인다.
“신은 상선벌악(賞善罰惡)으로 인간행위에 보응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상선벌악의 시행은 궁극적으로는 사후 또는 종말의 때에 이뤄진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현세에서 중간평가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죠.”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죄인 또는 악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한 신의 신비가 그 이유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언젠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을 고쳐먹기를 기다려주는 신의 자비가 바로 그 답답한 침묵의 이유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또 이렇게 질문한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는가?’
차 신부는 “죄(罪)란 어원을 쫓아가 보면 과녁, 그러니까 기준을 벗어난 것을 뜻한다”며 “죄는 상대적인 것도 있고 절대적인 것도 있지만 대개의 고등 종교에서는 호환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그 과녁에 해당하는 것이 십계명이다.
“아프리카 부족에서 죄가 되는 것이 문명사회에서는 죄가 안 되는 것은 죄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등 종교에서는 죄의 기준이 비슷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의 죄를 놓고 볼 때 거의 그래도 중첩이 됩니다.
그 기준으로 말하자면, 어떤 절대자의 의지나 계율을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그럼 그 계율은 뭘까요? 절대자는 왜 그런 계율을 주었을까요? 굳이 종교를 언급하지 않아도, 죄를 탐색해 보면 생명파괴와 상관이 있습니다. 자기도, 남도, 세상도 파괴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을 복귀시키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왜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나요?
“그 문제는 자유의지에서 출발합니다. 소설가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에서 ‘인간이 죄지을 것을 알고 자유의지를 준 것은 신의 책임이 아니냐’고 따집니다. 수준이 낮은 질문이지만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유의지에서 사랑의 본질, 사랑의 깊이를 인식하게 합니다. 사랑을 깊이 음미해 보면, 사랑에는 강요나 억압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자유의지를 주었나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심오합니다. 인식이 안 되면 설득이 안 됩니다. 대화의 한계이지요. 오늘날에도 얼마나 미숙한 사랑이 많습니까. 소유하려 하고, 구속하려 하고,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지요.”
성경은 죄를 짓는 주체는 인간이지만, 인간을 죄짓도록 유인하는 악마, 곧 사탄이 있음을 언급한다. 차 신부는 “사탄의 가장 큰 유혹은 ‘죄가 없다’고 하는 신념을 갖도록 기만하는 것”이라며 “그것이 어떤 유혹보다 치명적인 까닭은 그럼으로써 인간이 마음껏 죄를 짓도록 조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착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가?
이병철 회장은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하고 묻는다. 그러면서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반문한다.
차 신부는 “구원에는 3단계의 섭리가 진화해 왔다”며 “사람의 양심과 유대인의 율법, 그리고 믿음이 구원섭리이자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강조한다.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양심입니다. 사도(使徒) 바오로(개신교에서는 바울)가 쓴 《로마서》 2장 16절에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양심만으로는 구원에서 탈락한다고 믿는 사람은 공부를 안 한 사람이거나 편협하게 공부한 사람입니다. 양심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너무 펑퍼짐하다고 할까요? 양심은 주관적이어서, 이래도 가책을 느끼고 저래도 가책을 느끼게 하니까요. 독학(獨學)한 사람이 아주 어렵게 대학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확률이 낮으니까요.
위험한 비유지만, ‘율법’은 공립학교와 같아요. 율법의 기준은 객관적이고 분명해서 양심보다는 통과하기가 쉽지요. 그러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으로 의인(義人) 인정을 받은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죠.
그러나 ‘믿음’이라는 기준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니 수월합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Good News·福音)인 것이죠. 비유하자면 예수는 족집게 과외 선생님이지요. 족집게 과외로 배우면 합격 확률이 높아집니다.”
―양심으로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교회 근본주의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양심을 이야기한 바오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네 조상을 거부하는 것과 같지요. 사람들은 자기가 읽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멀쩡한 사람’을 지옥 보내겠다는 것은 할 짓이 아니죠. 확률이 낮다고 얘기해야지….”
―확률의 의미가 뭔가요?
“그것만으로는 (구원의) 담보가 안 된다는 것이죠. 불안하면, 더 좋은 방법을 택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죠. 더 좋은 방법이 ‘초대’입니다.”
지구의 종말이 오긴 오는 걸까?
이병철 회장은 지구의 종말(終末)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날이 올까. 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올까.
상상해 보자. 만일 종말이 진짜 찾아온다면 종말 직전 인간의 모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에서부터 대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 임종을 앞둔 노인까지 종말에 처한 위치와 조건이 모두 다를 것이다. 차 신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날을 한평생 기다려오던 희망의 사람들에게는 환희의 날이지만, 그날을 부정하고 두려워하는 역천(逆天)의 사람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날이라는 사실입니다.”
―오긴 오는 건가요?
“정답은 오긴 오되, ‘언제,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고 적고 있어요.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 역사의 종말이든, 종말의 때는 신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회가 ‘단 한 번’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종말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단 한 번’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라는 얘기죠.”
―지상의 삶이 평가를 받나요?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시간을 잘 쓰면서 준비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신부는 다 옳은가?
신부 중에서도 ‘가짜 신부’가 존재할까. 신으로부터 진정한 소명(召命)을 받지 않고서도 받은 것처럼 속이고 신부가 된 경우는 없을까.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추기경 시절, “소위 기만적인 소명이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참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닌 소명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부 중에서 자신이 신의 소명을 받았다고 착각한 사람도 있나요?
“신부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신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의 뜻을 물어봐야 해요. 너무 경직되게 자기의 소명이나 임무를 천편일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신부님은 매일 묻습니까.
“매일 물어요. 물으니까 왕복운동이 이뤄져요. 나갔다가 물러서고, 물러섰다가 나가고, 그러는 가운데 일관되게 나아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차 신부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오늘이 있습니다. 오늘은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새로운 시작이자 기회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불만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학교·직장·집·가족·친구 중 못내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오늘’이 주어졌습니다. 이 오늘은 매일 주어지는 ‘덤’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오늘이 있고, 내일은 내일의 오늘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오늘이 매일 주어질 터이니 더는 꿈을 이룰 기회가 없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 준비한 질문은 40개였다고 한다. 이 회장이 직접 줄이고 줄였다는 것이다. 그즈음, 이 회장은 정 몬시뇰과의 만남을 무척 서둘렀다고 전한다. 급하게 날짜를 잡았다. 그러나 만남을 코앞에 두고 다급한 연락이 왔다.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갑자기 병세가 악화된 것이었다. 이 회장은 질문의 답을 듣지 못한 채 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정 몬시뇰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허탈감 때문에” 이 회장의 질문지를 그냥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 사이 세월이 흘러 ‘4장의 질문지’는 서강대 손병두(孫炳斗) 전 총장을 거쳐 인천교구 차동엽(車東燁) 신부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꼭 24년 만인 작년 12월, 질문에 대한 답은 《잊혀진 질문》이란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24가지 질문이 24년 만에 빛을 본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고인의 질문은 시종 진지했다.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고통받는 ‘나’의 질문이자 무심한 하늘에 대한 ‘우리’의 삿대질인지도 모른다. 차동엽 신부는 “그 물음들은 한 인간이 죽음에 직면한 ‘삶의 자리’에서 던진 가장 절박한 물음”이라고 했다.
차 신부의 ‘난문쾌답(難問快答)’, 《잊혀진 질문》은 마치 고통의 닫힌 문 앞에서 여벌의 열쇠를 손에 쥔 것처럼 넉넉하게 느껴진다. 그 열쇠를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 슬픔을 이겨낼 것만 같다.
神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나?
차동엽 신부의 답은, 실망스럽게도 “No!”다. 그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도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순수이성은 인간의 유한성 탓에 무한한 실재(實在)인 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증명되지 않는 것이 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자연과학에서 개미는 2차원을 사는 곤충, 코끼리는 3차원적 존재라고 합니다. 개미는 과연 코끼리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까요? 평생 코끼리 몸통을 기어다녀도 ‘코끼리’라는 실체를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신이 자신을 드러내도, 또 실지로 드러냈지만, 인간은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답답한 채로 감(感)을 잡을 뿐이죠. 편린(片鱗)만 보는 것입니다.
만약 신이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면 인간은 자유를 박탈당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한 신의 고차원적인 섭리일 수가 있어요. 힘과 권한을 가진 분이 자꾸 내 앞에 얼쩡거리면 얼마나 부담스러워요. 그러니까 피해주시는 겁니다. 언뜻 존재만 슬쩍 보이면서 피해주시는 것이죠. 그걸 모르고 인간은 나타나라, 나타나라 하는데, 나타나면 인간은 주눅 들어 살 수가 없어요.”
차 신부는 소설가 박완서의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에 나오는 글을 예로 든다.
<…나는 내 눈으로 한번 똑똑히 분꽃이 피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봉오리가 활짝 벌어질 줄 알았는데 지키고 앉았으니까 왜 그렇게 안 벌어지는지요. 나는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약간 느슨해진 꽃봉오리를 손으로 펴려고 했습니다. 잘 안 되더군요. 인내심이 부족한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잠깐 자리를 떴다 와보니 분꽃은 용용 죽겠지, 하는 얼굴로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쎄 내가 억지로 펴려 했던 꽃봉오리만 피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지 뭡니까. 어른들한테 일렀더니 손독이 올랐다고 하더군요. 내 어린 손도 독이 되는데 어떤 인자한 힘이 꽃을 피웠을까요?
그건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내 최초의 경이였습니다.>
차 신부는 “신은 숨바꼭질하는 존재”라며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알 듯 모를 듯 존재하는 분이 신”이라고 설명한다.
神은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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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경사를 통해 옮겨쓴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지. |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차동엽 신부는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고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단 고통은 신의 조화가 아니라 철저히 자연현상임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물리적인 것이고, 심리적인 것이며, 자연발생적인 것입니다. 이미 삶의 조건 안에 고통이 있어요. 지진과 해일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그 지진과 해일이 엄연한 자연현상임을 보여줍니다. 이혼과 이별, 사고, 상처 등은 모든 인간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생명의 몸살’로 겪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입니다.”
차 신부는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신은 태초에 고통을 허락했는가?’, ‘왜 전능한 신이 내 고통을 막아주지 않는가’ 원망한다”고 주장한다.
“‘왜 하필 나에게…’라고 신에 호소합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반응이죠. 그런데 답이 없어요. 수많은 인류가 역사 이래로 계속 던져온 질문이지요. 그러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이 고통 속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이냐고요. ‘왜’라는 질문을 승화해 나가면 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부터 신이 개입(介入)을 합니다. 도와주고 힘이 되어주고 구원(救援)을 합니다. 제가 아는 한 그렇습니다.”
차 신부는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분류하면 3가지가 있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첫째는 시쳇말로 ‘개죽음’과 같은 ‘의미 없는 고통’이 있어요. 고통을 겪고도 승화시키지 못하면 의미 없는 고통으로 가는 겁니다. 원망만 하다가 죽게 되는 고통이지요. 그런 고통이 수도 없이 많아요.
둘째는 ‘시련으로서의 고통’이 있습니다. 시련은, 말하자면 유격훈련, 태릉선수촌과 같은 거예요. 이 고통을 인생의 단련으로 생각하고 나를 더 강한 존재로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만 잘해도 성공이지요.
셋째는 ‘세상을 구하는 고통’이 있어요. 꼭 종교적으로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남을 위한 희생과 사랑으로서의 고통, 이것은 착한 열매를 맺어요. 이 사회를 위해 자신을 던지면 사회가 선하고 밝아집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이병철 회장에게도 고통과 불행,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였다. 차 신부는 “고인의 전제, 그러니까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이라는 전제로 미뤄보건대, 묻는 이는 어렴풋이 그 답이 사랑에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직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기적은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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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 회장의 생전 모습. 고인은 생전 신에 대한 절박한 질문 24개를 만들어 천주교 정의채 몬시뇰에게 보냈다. |
차 신부는 “신이 개입한다”고 단언한다.
“개입을 합니다. 언제 하느냐? 일종의 ‘자유의지 게임’입니다. 나는 스스로 자유를 지닌 존재지만, 자발적으로 ‘제 자유를 당신께 반납하겠습니다’ 하는 순간, 기적의 통로가 열리기 시작하지요. 이것을 종교적 귀의(歸依)라고 합니다. 귀의가 뭐냐?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당신 뜻이 뭔지 헤아리고 소통하면서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신은 ‘로봇’ 부리는 것을 싫어해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은 싫지만 맹서(盟誓)를 하면서 ‘당신 원하는 것을 제 기쁨으로 삼겠다’고 하면 받아들여 줍니다. 이것이 자유의지의 심오한 부분이자 가톨릭만이 아닌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신적 개입이 시작되고, 기적이 일어나지요.”
―종교를 믿지 않아도 기적이 일어나나요?
“그것을 ‘초대(招待)’라고 하지요. 기적을 통해 어떤 이를 깨달음으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죠. 신적인 선택인 셈입니다. ‘저 친구, 살아가는 모습 속에 나름 너무 애를 써. 나하고 소통하면 좋을 텐데’ 하며 ‘스카우트’하는 것입니다.”
차 신부는 그러나 “신이 기적을 행할 때, 자연을 거스르며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패스(Bypass·기업이 부서 간 근거리·장거리 통신을 할 때, 전화회사를 통하지 않고 하는 접속 체계)를 통해 행한다”고 설명한다.
“원래 자연이 있는데, 자연 옆에 바이패스가 있어요. 인간이 모르는 바이패스로 무한 가능성을 인간에게 주었지요. 인간은 누구에게나 꿈이 있습니다. 꿈이라는 무한 가능성을 창세기 때부터 인간에게 준 거예요. 그러고 보면 인간에게는 ‘목표 추적 장치’가 있습니다. (신을) 잘 믿으면 작동이 잘되는 유리한 조건이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도 목표 추적 장치가 있어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지요. 교주(敎主)가 되기도 하고….
“있지요. 너무 잘나서…. 신은 그냥 내버려두는 겁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도토리 키재기니까….”
왜 악인 중에서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이가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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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리언셀러 《무지개원리》 저자로 유명한 차동엽 신부. 신자들과 함께한 모습. |
직장에서는 또 어떤가. 성실하지도 않고 아이디어도 없으면서 상사에게 아부해 승진하는 이를 보면 세상 살맛을 잃는다. 은수저 물고 태어나 떵떵거리는 ‘세습자’들에게 야유를 보내고 싶다. 왜 신은 천하의 악인을 살찌우는가?
차 신부는 “초간편 답을 하자면, 신은 벌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현세에서는”이라고 덧말을 붙인다.
“신은 상선벌악(賞善罰惡)으로 인간행위에 보응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상선벌악의 시행은 궁극적으로는 사후 또는 종말의 때에 이뤄진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현세에서 중간평가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죠.”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죄인 또는 악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한 신의 신비가 그 이유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언젠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을 고쳐먹기를 기다려주는 신의 자비가 바로 그 답답한 침묵의 이유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또 이렇게 질문한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는가?’
차 신부는 “죄(罪)란 어원을 쫓아가 보면 과녁, 그러니까 기준을 벗어난 것을 뜻한다”며 “죄는 상대적인 것도 있고 절대적인 것도 있지만 대개의 고등 종교에서는 호환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그 과녁에 해당하는 것이 십계명이다.
“아프리카 부족에서 죄가 되는 것이 문명사회에서는 죄가 안 되는 것은 죄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등 종교에서는 죄의 기준이 비슷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의 죄를 놓고 볼 때 거의 그래도 중첩이 됩니다.
그 기준으로 말하자면, 어떤 절대자의 의지나 계율을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그럼 그 계율은 뭘까요? 절대자는 왜 그런 계율을 주었을까요? 굳이 종교를 언급하지 않아도, 죄를 탐색해 보면 생명파괴와 상관이 있습니다. 자기도, 남도, 세상도 파괴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을 복귀시키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왜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나요?
“그 문제는 자유의지에서 출발합니다. 소설가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에서 ‘인간이 죄지을 것을 알고 자유의지를 준 것은 신의 책임이 아니냐’고 따집니다. 수준이 낮은 질문이지만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유의지에서 사랑의 본질, 사랑의 깊이를 인식하게 합니다. 사랑을 깊이 음미해 보면, 사랑에는 강요나 억압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자유의지를 주었나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심오합니다. 인식이 안 되면 설득이 안 됩니다. 대화의 한계이지요. 오늘날에도 얼마나 미숙한 사랑이 많습니까. 소유하려 하고, 구속하려 하고,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지요.”
성경은 죄를 짓는 주체는 인간이지만, 인간을 죄짓도록 유인하는 악마, 곧 사탄이 있음을 언급한다. 차 신부는 “사탄의 가장 큰 유혹은 ‘죄가 없다’고 하는 신념을 갖도록 기만하는 것”이라며 “그것이 어떤 유혹보다 치명적인 까닭은 그럼으로써 인간이 마음껏 죄를 짓도록 조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착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가?
이병철 회장은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하고 묻는다. 그러면서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반문한다.
차 신부는 “구원에는 3단계의 섭리가 진화해 왔다”며 “사람의 양심과 유대인의 율법, 그리고 믿음이 구원섭리이자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강조한다.
“율법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양심입니다. 사도(使徒) 바오로(개신교에서는 바울)가 쓴 《로마서》 2장 16절에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양심만으로는 구원에서 탈락한다고 믿는 사람은 공부를 안 한 사람이거나 편협하게 공부한 사람입니다. 양심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너무 펑퍼짐하다고 할까요? 양심은 주관적이어서, 이래도 가책을 느끼고 저래도 가책을 느끼게 하니까요. 독학(獨學)한 사람이 아주 어렵게 대학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확률이 낮으니까요.
위험한 비유지만, ‘율법’은 공립학교와 같아요. 율법의 기준은 객관적이고 분명해서 양심보다는 통과하기가 쉽지요. 그러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으로 의인(義人) 인정을 받은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죠.
그러나 ‘믿음’이라는 기준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니 수월합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Good News·福音)인 것이죠. 비유하자면 예수는 족집게 과외 선생님이지요. 족집게 과외로 배우면 합격 확률이 높아집니다.”
―양심으로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을 교회 근본주의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양심을 이야기한 바오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네 조상을 거부하는 것과 같지요. 사람들은 자기가 읽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멀쩡한 사람’을 지옥 보내겠다는 것은 할 짓이 아니죠. 확률이 낮다고 얘기해야지….”
―확률의 의미가 뭔가요?
“그것만으로는 (구원의) 담보가 안 된다는 것이죠. 불안하면, 더 좋은 방법을 택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죠. 더 좋은 방법이 ‘초대’입니다.”
| ▣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자신의 존재를 왜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는가?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1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駱駝)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17.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왜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폴란드 등 동구 제국, 니카라과 등.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21.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24.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
지구의 종말이 오긴 오는 걸까?
이병철 회장은 지구의 종말(終末)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날이 올까. 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올까.
상상해 보자. 만일 종말이 진짜 찾아온다면 종말 직전 인간의 모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에서부터 대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 임종을 앞둔 노인까지 종말에 처한 위치와 조건이 모두 다를 것이다. 차 신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날을 한평생 기다려오던 희망의 사람들에게는 환희의 날이지만, 그날을 부정하고 두려워하는 역천(逆天)의 사람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날이라는 사실입니다.”
―오긴 오는 건가요?
“정답은 오긴 오되, ‘언제,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고 적고 있어요.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 역사의 종말이든, 종말의 때는 신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회가 ‘단 한 번’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종말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단 한 번’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라는 얘기죠.”
―지상의 삶이 평가를 받나요?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시간을 잘 쓰면서 준비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신부는 다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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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동엽 신부의 저서 《잊혀진 질문》. |
―신부 중에서 자신이 신의 소명을 받았다고 착각한 사람도 있나요?
“신부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신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의 뜻을 물어봐야 해요. 너무 경직되게 자기의 소명이나 임무를 천편일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신부님은 매일 묻습니까.
“매일 물어요. 물으니까 왕복운동이 이뤄져요. 나갔다가 물러서고, 물러섰다가 나가고, 그러는 가운데 일관되게 나아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차 신부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오늘이 있습니다. 오늘은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새로운 시작이자 기회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불만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학교·직장·집·가족·친구 중 못내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오늘’이 주어졌습니다. 이 오늘은 매일 주어지는 ‘덤’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오늘이 있고, 내일은 내일의 오늘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오늘이 매일 주어질 터이니 더는 꿈을 이룰 기회가 없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임정석
(201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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