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끊이지 않는 親日 논란… 2009년 발간 《친일인명사전》에 육당 이름 등재
⊙ 일제하에서도 자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집안에 보관
⊙ ‘어린이’, ‘한글’, ‘민족’ 등의 용어 최초 사용
⊙ 島山은 스승, 碧初는 정치적 동지, 春園은 문학적 동지, 정인보는 학문적 동지
六堂
⊙ 1890~1957. 일본 와세다 대학 중퇴.
⊙ 도산 안창호와 청년학우회 설립. 조선광문회 창설. 《소년》 《시대일보》 등 창간.
3·1운동 독립선언문 기초.
⊙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등 다수의 시와 소설 발표. 저서로 《백팔번뇌》 《시조유취》
《금강예찬》 《조선역사》 《삼국유사 해제》 등 있음.
崔學柱
⊙ 71세. 서울공대 졸업. 보스턴 터프츠 대학원 졸업.
⊙ 블럭 드러그(Block Drug·현 글락소스 미스클라인) 기술이사.
⊙ 일제하에서도 자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집안에 보관
⊙ ‘어린이’, ‘한글’, ‘민족’ 등의 용어 최초 사용
⊙ 島山은 스승, 碧初는 정치적 동지, 春園은 문학적 동지, 정인보는 학문적 동지
六堂
⊙ 1890~1957. 일본 와세다 대학 중퇴.
⊙ 도산 안창호와 청년학우회 설립. 조선광문회 창설. 《소년》 《시대일보》 등 창간.
3·1운동 독립선언문 기초.
⊙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등 다수의 시와 소설 발표. 저서로 《백팔번뇌》 《시조유취》
《금강예찬》 《조선역사》 《삼국유사 해제》 등 있음.
崔學柱
⊙ 71세. 서울공대 졸업. 보스턴 터프츠 대학원 졸업.
⊙ 블럭 드러그(Block Drug·현 글락소스 미스클라인) 기술이사.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개화기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였다. 한국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했고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를 펴내기도 했다. 육당은 조선 광문회(光文會)를 만들어 출판사업과 문화사업을 벌였다. 선대(先代)가 일군 가산(家産) 30만원(현재가치 300여억원)을 몽땅 그 일에 쏟아 부었다. 동시대를 산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육당은 일제의 단군 역사 말살 시도에 대항해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의 단군을 연구했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역사’를 위한 연구에 매진했다. 무엇보다 현대를 사는 우리 민족이 그의 이름을 좀 더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3·1 독립선언문>의 기초자라는 사실이다. 육당은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는 죄로 일제로부터 2년8개월 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육당은 살아서 조국 광복을 맞이했지만, 그의 사후(死後) 반(半)세기가 지난 후인 지난 2009년 소위 《친일인명사전》이라는 책에 이름이 수록됐다.
육당은 살아생전 세 번의 옥고를 치렀다. 첫 번째는 약관 16세 때 《황성신문》에 ‘일화배척(日貨排斥)’을 주장하는 투고를 했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한 달 동안 구류를 살았다. 그해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맺어진 해였다.
3·1 독립선언문 기초가 그를 두 번째 영어(囹圄)의 몸으로 만들었고, 세 번째 옥살이는 해방 후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 나이로 60세가 되던 1949년 2월에 반(反)민족행위처벌법과 관련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었다. 그해 6월 독립운동가 김구(金九) 선생이 피살됐고 8월에는 반민특위 활동이 종식됐다.
육당을 둘러싼 친일 논란은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세 번에 걸친 육당의 옥살이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엇갈리는 시선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六堂의 글을 마음대로 고친 손자
조국 광복 후부터 195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육당의 말년은 불우했다. 반민특위의 거센 바람이 지나가고 난 후 찾아온 6·25 전쟁을 거치면서 장녀는 인민군에 학살당하고 사위는 납북됐다.
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대 의대 교수였던 큰아들은 요절했고 좌익이었던 막내아들은 월북(越北)했다. 전쟁 와중에 우리말과 우리 역사 복원을 위해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17만권의 장서(藏書)가 잿더미로 변했다는 점도 그에게는 커다란 슬픔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있었다. 그렇지만 육당은 평생의 꿈이었던 《조선역사사전》 완성을 위한 발걸음을 쉬지 않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밤낮으로 사전 편찬 작업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그런 그였지만 손주에게는 어쩔 수 없는 할아버지였다.
1954년 일이다.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손자 하나가 육당에게 졸업생 고별사를 써 달라고 졸랐다. 손자가 졸업식에서 고별사를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대문호에게 철없는 손자가 대필 글을 졸랐던 것이다. 육당은 손자에게 초를 잡아 오면 고쳐 주겠다고 하다가 결국엔 응석에 못 이겨 200자 원고지 대여섯 장 정도 분량의 글을 써 주었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글을 자신의 글씨로 정서한 다음 졸업식장으로 갔다. 졸업식장에서 손자는 교장 선생님 옆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가 유명인사로 졸업식장에 초청받아 올 줄 몰랐던 손자는 긴장한 채로 졸업생 고별사를 읽었다. 옮겨 쓸 때는 몰랐던 한 문장이 너무 어려운 것 같았다. 나름대로 쉽게 풀어서 읽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육당은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얀 녀석. 내 글은 왜놈들도 함부로 고치지 못했는데 네가 내 글을 바꾸었구나!”
당대의 대문호 최남선의 글을 함부로 바꾼 손자는 장손인 최학주(崔學柱)씨다. 최씨는 육당이 ‘소원(素園)’이라고 이름 짓고 살던 우이동의 농장 겸 서원에서 자랐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육당이 고혈압과 중풍으로 자리에 눕자 그는 자신의 책상과 침구를 할아버지 병실로 옮겼다. 1957년 육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할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그는 병실에서 육당이 참고할 서책을 찾는다든가 하는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신문도 읽어 주고 청탁받은 원고를 구술하는 대로 받아 쓰는 일도 했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는 육당의 임종을 지켜봤다.
최씨는 2011년 3월 1일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이라는 전기를 썼다. 최씨는 서울대 공대 화공학과를 졸업한 후 1967년 도미(渡美)해서 뉴욕에 정착했다. 미국 제약회사에서 정년퇴직한 후 2006년부터 할아버지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육당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와 가족의 일기와 편지, 육당의 저작 등 각종 사료(史料)를 집대성해 글을 썼다고 한다.
2011년 11월 말 ‘육당학 국제 학술대회’ 등에 참석차 귀국한 그를 만났다. 그가 학술대회 참석 외에도 고국을 방문한 또다른 이유는 《육당 최남선 전집-현대문역주》 출간 준비를 위한 목적도 있었다.
六堂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육당 최남선 전집-현대문역주》 출간 작업은 잘 진행하고 있습니까.
“2013년 하반기에 총 23권으로 출간할 예정으로 준비하고 있고 상당히 진척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고려대에서 발간한 《육당전집》 등이 있는데요.
“할아버지의 글을 널리 읽히기 위해서입니다. 1970년대 초반에 발간된 《육당전집》은 이미 오래돼서 일반 독자들이 구하기가 어렵기도 하고요. 또 그 전집은 글이 어렵고 한자가 많아서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학자들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글을 현재의 맞춤법에 맞춰서 읽기 쉽게 윤문해 새로운 형태의 전집으로 발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료 접근성과 가독력이 높아진 새로운 전집은 할아버지의 글을 실제 읽어 보지도 않고 비판만 하던 그간의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그간의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말씀은 육당을 둘러싼 친일파 논란을 지칭하는 겁니까.
“이제 친일파 소리를 들으면 저는 둔감해져서 별 감흥이 없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시류라고 생각합니다. 오해의 여지가 없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친일파라고 오해받는 부분보다는 그분이 했던 문화나 역사 분야에서의 작업들이 더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최씨는 할아버지가 친일파라는 주장을 중학교 시절 교사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병상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 곁에서 온갖 심부름을 했던 그에게 할아버지가 친일파라고 하는 말은 상당한 혼돈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육당은 친일파라는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할아버지가 말로써 반응하시는 걸 본 적은 없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친일 논란에 반박 글 기고
육당은 자신의 친일행위 논란과 관련, 반민특위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던 1949년 2월, 《자유신문》에 자신의 입장을 <자열서(自列書)>라는 제목으로 기고한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장 앞으로 보낸 글이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反民族)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終世)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다. (중략) 나는 분명히 일평생 일조로(一條路)를 일심(一心)으로 매진한 것을 자신하는 자이다. 중간에 간난(艱難)한 환경, 유약한 성격의 내외 양인(兩因)이 서로 합병하여서 내 의상에 흙을 바르고 내 행리(行履)에 올가미를 씌웠을지라도 이는 그때그때의 외적 변모일 따름이요, 결코 내 심여행(心與行)의 변전변환(變轉變換)은 아니었다. 이 점을 밝히겠다 하여 이 이상의 강변스런 말을 더 하지 않겠거니와 다만 조선사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열 벌 갈아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제는 언제고 종시일관(終始一貫)하게 민족정신의 심토(深討), 조국 역사의 건설 그것밖에 벗어 진 일 없었음은 천일(天日)이 저기 있는 아래 감연(敢然)히 명언하기를 꺼리지 않겠다. (하략)>
육당은 1928년 10월 무렵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참여했다. 일제가 조선역사를 그들의 통치 목적에 부합하도록 편찬하기 위해 만든 역사 연구기관이다. 육당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자 ‘변절’이라는 비난이 제기됐다.
―육당은 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을까요.
“할아버지가 가장 오해를 받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일제 학자들은 단군이라는 뿌리를 없애고 조선사를 만들려고 했어요. 역사 속의 단군이 아니라 신화 속의 단군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지요. 할아버지가 그곳에 가서 하시려던 일은 ‘조선의 단군’을 역사적 사실, 세계사적 사실로 정립하려는 것이었죠. 조선의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할아버지의 조선사편수행을 비판한 사람들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내 할아버지가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고 있던 이마니시(今西), 이나바(稻葉), 구로이다(黑板) 등 일본 학자들을 상대로 전개한 ‘진실투쟁’의 진상을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진실투쟁’을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조선사편수회의 회의록이 그 명백한 증거예요. 1932년 제6회 위원회에서 할아버지는 단군 문제를 제기했어요. ‘고구려 동명왕 부분에 인용된 《삼국유사》 기록 중 석유환국(昔有桓國)이 ‘천인(淺人)의 망필(妄筆)’로 석유환인(昔有桓人)으로 고쳐졌다’고 지적한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 ‘천인의 망필’이란 이마니시가 《삼국유사》를 교감(校監)할 때 ‘환국’을 ‘환인’으로 고친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마니시는 일본 학자 중에서도 단군을 가장 깊이 연구한 인물로 그의 주장은 단군이 고려 후기에 날조된 인물이라는 것이었죠.”
1934년 열린 제8회 위원회에서도 육당은 《조선사》에서 단군을 빼려는 일제 학자들의 주장에 이렇게 맞섰다.
“단군, 기자가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에 있어서 이를 수록해야 할 제1편에 수록하지 않고 있다. ‘잔무’를 정리할 경우에 정편(正編)이나 보편(補編)으로 하여 단군, 기자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여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육당은 일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사연수회에 참여해서 지키고자 했던 단군과 조선사를 지키지 못했다. 일제가 자신들의 방침대로 조선사 편찬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학병 권유 관련 姜英勳 전 총리의 증언
―그렇다고 해도 일제 말기 조선 학생들에 대한 학병(學兵) 참여 권유 연설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당시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봤습니다. 일본이 망한 뒤 우리 힘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면 군대를 아는 인재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죠.”
최씨는 육당이 자신이 교수로 재직했던 만주 건국대 학생들에게 학병 지원과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전세(戰勢)의 귀추에 대해 속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후 세계의 새로운 질서 속에 조선 민족이 당연히 치러야 할 민족적 지위를 되찾고 민족자주독립 노선을 확보,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족 실력 배양이 선결조건이다. 그 실력의 핵심이 되는 군사력, 군사기술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무위로 보낼 수는 없다. 학병으로 출정하는 사람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겠지만, 살아서 귀환하는 사람들이 민족이 신운명을 개척하는 데 중요한 역군이 될 것임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강영훈(姜英勳) 전 국무총리의 증언도 최씨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강 전 총리는 학병을 다녀왔고 만주건국대를 나왔다.
“나는 일제 말기 학병(學兵)으로 나가서 1945년 8월 20일자로 소위가 됐다. 학병으로 나가기 전 나는 육당 최남선 선생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던 일이 있다. 그때 육당 선생은 이런 말씀을 했다.
‘학병을 나가는 것은 일본을 위해서도, 천황을 위해도 아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을 기르려면 군인이 필요하고 군대를 알아야 한다. 학병으로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살아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희생자의 주검을 딛고 일어나 그 사람들의 몫까지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실제로 광복 후에 일본군에 학병으로 나간 사람들이 국군을 창설할 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강 전 총리 외에도 5·16 이후 재야인사로 유명했던 장준하(張俊河)씨도 육당의 학병 권유 연설을 직접 듣고 학병에 참여했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육당 사후 바로 이듬해 《사상계(思想界)》 1월호를 ‘육당기념호’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을 역사가로 알아주길 원해
―전공이 이공계인데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을 보면 상당한 인문학적 소양이 드러나는데 특별한 노력을 한 건가요.
“그런 노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공계이기는 하지만 제가 이 책 저 책 보느라 한눈을 팔았던 것 같습니다. 미국 제약업계 현직에서 정년퇴임하면서 인문과학 서적들을 읽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역사학도 어차피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육당은 독립운동가입니까, 역사학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둘 다입니다. 할아버지는 역사학을 통해서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세웠고, 그 궁극적 목적은 민족의 정치적 독립과 조선사의 세계화였습니다. 그분은 당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무력 투쟁에 의한 독립보다는 제국주의의 필연적 붕괴와 식민지의 청산으로 세계 질서의 재편에 의해 국권회복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육당 본인은 어느 쪽에 더 무게 중심을 두었던 것 같습니까.
“당신의 말씀으로는 역사가였습니다. 역사가로 알아주기를 원하셨죠.”
육당은 1927년 출범한 우리 민족 최초의 좌우합작 운동체인 신간회 탄생의 숨은 주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랜 벗이었던 홍명희와 신석우(申錫雨)를 움직여 신간회의 출범을 도왔다는 것이다. 신간회는 1931년 해체됐다.
―육당이 신간회의 해체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까.
“직접 들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최초의 좌우합작 시도였던 신간회가 와해됨으로써 결국 남북 분단까지 이어졌고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신간회의 해체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짐작은 하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육당은 어떤 입장을 취했던 것 같습니까.
“할아버지는 두 이념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념이라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에게서 유일한 이념은 오로지 조선을 토대로 하는 정신문화인 조선주의였습니다. 서구에서 유래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할아버지의 조선주의와는 그 출발과 성격이 다릅니다.”
―육당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입니까.
“조선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정치적 독립, 민족문화의 부흥이었다고 봅니다.”
<독립선언서>의 의미
―육당은 3·1 운동 후 구속됐다가 풀려난 후 <백두산 근참기> <금강예찬> 등의 기행문을 주로 썼습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을까요.
“할아버지는 국토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했습니다. 관념적일 수 있는 민족정신, 민족애는 국토 사랑이라는 행위와 감정을 통해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죠. 그 점에서 할아버지의 국토 기행문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육당이 3·1운동 이전에도 기행문을 썼나요.
“그런 거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기행문도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조선사람에게 알리는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봅니다.”
1997년 문화재청은 3·1절을 맞아 <독립선언서>를 문화재로 지정한다고 사전 예고했다. 이때 사전 예고된 문화재 가운데는 《백범일지》도 있었다. 《백범일지》는 보물 제1235호로 지정됐지만 <독립선언서>는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친일파가 작성한 것이라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백범일지》는 문화재로 지정되고 <독립선언서>는 지정이 안됐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는지요.
“한마디로 역사의식의 빈곤이라고 봅니다. <독립선언서>는 누가 작성했든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독립’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탄압을 받던 그 시절에 ‘독립’을 선언한 헌장(憲章)인 <독립선언서>를 부정하는 것은 3·1운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입니다. 3·1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선언서>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을 다시 할 생각입니까.
“그게 제 생각이지만 그걸 제가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죠. 《백범일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독립선언서>는 그 영향력과 파급효과가 훨씬 더 지대했고 지금까지도 막중합니다. 3·1운동 정신을 전하기 위해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던 <독립선언서>가 문화재 지정에서는 왜 제외됐는지, 그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한국 학계에 묻고 싶을 따름입니다.”
―<독립선언서> 원본은 갖고 있습니까.
“네. 뉴욕 집에 소장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일기장을 정리하면서 거기에 껴 있던 것을 찾아낸 거죠. 일제 시대 내내 <독립선언서>를 집에 보관해 온 셈이죠. 원본이 두 장인데 또다른 하나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극비리에 직접 조판을 하시느라 선언문 첫머리에 ‘朝鮮’이 ‘鮮朝’로 돼 있는 것을 놓치셨죠.”
민족의식은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어린이’, ‘한글’, ‘민족’ 등의 용어를 최초로 쓴 분이 육당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근거가 있는 겁니까.
“‘어린이’라는 말은 할아버지가 1914년 《청춘》 창간호에서 처음으로 쓰셨어요. 이 잡지에 <어린이의 꿈>이란 시를 발표하셨죠. ‘어린이’는 어린아이를 높여 부른 것이라고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죠.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20년 《개벽》에 발표한 <어린이 노래>보다 6년이나 앞선 것이죠. ‘한글’은 1920년대 조선광문회 시절 ‘언문’ 대신 우리말의 고유 이름으로 사용할 것을 제창했고 이를 국문학자들이 동의함으로써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이라는 말은 육당이 쓰기 이전부터 사용하던 용어였던데요.
“‘민족’은 1908년 할아버지가 일본 유학 시절 《대한유학생회 회보》에 쓴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글에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란 의미로 처음 쓰셨습니다. 그 이전에 쓰인 민족이란 말이 더러 있긴 해도 그 의미는 ‘인민’과 ‘족속’의 한자적 조합일 뿐 겨레, 동포라는 의미의 민족이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육당은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신라와 고구려가 같은 언어를 썼을까 궁금했던 소년 최학주는 육당이 우리나라 상고사의 무대를 답사한 후 쓴 <송막연운록>을 읽으면서 육당과 나눈 대화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신라인은 고구려인을 이민족(異民族)으로 여겼나요.
“아니다. 평양이 자체의 내분으로 자멸하고 7년 나당(羅唐) 전쟁 중에 신라는 고구려 유민과 동맹했다. 많은 경우 고구려에서 회수한 땅이 한때는 신라가 지배했던 고토이기도 했지만 대동강 이남 지방군제 재편에서 신라는 말갈과 백제인을 포함해 차별하지 않았다.”
―일통삼한론(一統三韓論)은 통일 당시 신라인의 의식인가요, 아니면 고려조에 들어 김부식이 신라 정통론을 세우기 위한 명분에 의한 건가요.
“전자이다. 당대 지나(支那) 쪽 기록에도 백제를 마한으로 지칭한 것들이 있다. 당나라 때의 삼한은 삼국이 있던 땅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신라의 김씨가 삼한의 주인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일통삼한 의식으로 신라의 정통성은 확립됐지만, 고구려의 정체성은 상실된 것인가요.
“아니다. 역사를 통해 한 민족이 같은 시대에 두 개 이상의 국가를 경영했던 예는 얼마든지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함락 후 고구려 유민의 진국(震國·발해)이 그 정체성을 계승했고, 당에 합류한 고구려인 고선지(高仙芝)와 이정기(李正己)는 당 제국 건설에 적극 참여했으며, 백제인 흑치상지(黑齒常之)도 마찬가지이다. 한민족의 정체성은 구성원이 공유하는 기억과 문화로 정의된다. 조선 민족이 세우고 발전에 동참한 국가는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발해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인가요.
“물론이다. 발해는 이름이 잘못되었다. 압록강 이북에 남아 있던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국가의 이름은 진(震)이었다. 발해는 지방명일 뿐이다. 진의 부족 하나가 금(金)이 되고 금이 청(淸)이 된 것이다. 청국의 조상이 진국의 통치를 받았다 해서 진국의 역사가 지나사(支那史)가 될 수는 없다.”
―진국과 신라는 200년 이상을 동북아시아에서 공존했는데 할아버지는 왜 그 시대를 조선의 남북조시대라고 정의하지 않았나요.
“남조(南朝)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북조(北朝) 만주를 회수하지 못해서인 것도 있지만, 《고려사》 편찬 당시 이씨왕조의 지나를 향한 정치적 굴복에도 이유가 있다. 《고려사》 편찬 책임자인 정인지(鄭麟趾)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정치가였다.”>
육당은 삼국시대부터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홍명희는 공산당 아니다
육당은 신문화 운동을 하면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홍명희, 이광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육당은 도산, 벽초, 춘원, 위당과 교류를 가졌는데 그들과는 각각 어떤 관계였습니까.
“육당과 도산은 제자와 스승, 육당과 벽초는 정치적 동지, 육당과 춘원은 문학적 동지, 위당과는 학문적 동지 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동지라는 벽초는 월북했는데요.
“제가 할아버지의 얘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어요. ‘홍명희는 공산당이 될 수 없다’ 하는 말씀이었죠. 자유당 시절 할아버지가 병상에 계실 때였다고 기억합니다. 벽초는 해방 후 할아버지에 대한 친일파 논란이 일자 각종 글을 통해서 할아버지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죠.”
―혹시 육당은 춘원을 문학적 라이벌로 의식하지는 않았습니까.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었습니다. 나이 차도 많았고요. 어느 시기가 돼서 춘원의 연애 사건 등 때문에 할아버지가 춘원을 야단치시기도 했죠.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기보다는 춘원이 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시다가 경고를 하시는 입장이었어요.”
―위당 정인보 선생과는 학문적 교류를 계속 가졌나요.
“정인보 선생을 서울로 불러들인 분이 할아버지입니다. 연세대학교에 한국학 교수로 취임시킨 것도 할아버지고 생활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 점은 정인보 선생의 가족들도 증언하고 있어요.”
육당의 이력 중 독특한 것 하나가 해방 후 해군전사편찬 작업에 관여한 일이다. 육당은 1954년 해군 전사편찬실에서 《한국해양사》를 출판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육당의 살아온 길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작업이지만 실상 그는 오래 전부터 해양(海洋)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육당은 1908년 《소년》 창간호부터 2년 동안 12회에 걸쳐 <해상대한사(海上大韓史)>라는 글을 썼다. 육당이 쓴 최초의 논문으로 요지는 해양 입국을 통해 대한제국의 발전을 기하자는 것이었다. 육당이 스무 살도 안된 때였다. 《소년》 창간호에 발표한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쓸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할 만하다.
“할아버지는 중화주의 등 대륙만을 향해 있던 조선의 시선이 바다로 돌려져야 근대 문명의 성취가 가능했다고 본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국가의 부강도 바다의 자원을 활용할 줄 알아야 가능하다고 하셨죠. 《한국해양사》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한국의 구원은 오직 바다에 있고, 나아가 건국 자체도 ‘바다에 서는 나라로 고쳐 만들기’여야 한다고 주장하셨죠.”
六堂은 한국의 토머스 제퍼슨
―<독립선언서> 등 육당의 유품들은 연구 자료로서도 가치를 지니는데 계속 개인 소유로 둘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은 누구의 개인소유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청계천가에 무너진 광문회 건물이 복원되면 원래 거기에 있었던 유물들을 같은 자리에 영구히 비치할 생각입니다.”
―미국에 정착한 이유가 혹시 육당에 대한 세간의 일부 평가와 무관하지는 않습니까.
“전혀 무관합니다. 잘못된 인식은 언젠가는 바로잡히게 되겠죠.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저대로 열심히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한 5년만 공부하고 거기에 5년 더 실무 경영을 배우고 귀국할 생각이었는데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40여년 동안 한국여권을 갖고 다니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자제분들은 육당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자신들의 증조부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우리 아이들은 자신들의 증조부가 한국의 제퍼슨이라고 생각합니다.”
―육당의 손자로서 산다는 것은 영광이었습니까, 불편함이었습니까.
“영광이었습니다. 불편한 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불편함까지 포함해서 영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육당은 일제의 단군 역사 말살 시도에 대항해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의 단군을 연구했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역사’를 위한 연구에 매진했다. 무엇보다 현대를 사는 우리 민족이 그의 이름을 좀 더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3·1 독립선언문>의 기초자라는 사실이다. 육당은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는 죄로 일제로부터 2년8개월 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육당은 살아서 조국 광복을 맞이했지만, 그의 사후(死後) 반(半)세기가 지난 후인 지난 2009년 소위 《친일인명사전》이라는 책에 이름이 수록됐다.
육당은 살아생전 세 번의 옥고를 치렀다. 첫 번째는 약관 16세 때 《황성신문》에 ‘일화배척(日貨排斥)’을 주장하는 투고를 했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한 달 동안 구류를 살았다. 그해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을사늑약이 맺어진 해였다.
3·1 독립선언문 기초가 그를 두 번째 영어(囹圄)의 몸으로 만들었고, 세 번째 옥살이는 해방 후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 나이로 60세가 되던 1949년 2월에 반(反)민족행위처벌법과 관련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었다. 그해 6월 독립운동가 김구(金九) 선생이 피살됐고 8월에는 반민특위 활동이 종식됐다.
육당을 둘러싼 친일 논란은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세 번에 걸친 육당의 옥살이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엇갈리는 시선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六堂의 글을 마음대로 고친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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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당 최남선. 홍명희, 이광수와 더불어 ‘조선 3대 천재’로 불렸다. |
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대 의대 교수였던 큰아들은 요절했고 좌익이었던 막내아들은 월북(越北)했다. 전쟁 와중에 우리말과 우리 역사 복원을 위해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17만권의 장서(藏書)가 잿더미로 변했다는 점도 그에게는 커다란 슬픔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있었다. 그렇지만 육당은 평생의 꿈이었던 《조선역사사전》 완성을 위한 발걸음을 쉬지 않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밤낮으로 사전 편찬 작업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그런 그였지만 손주에게는 어쩔 수 없는 할아버지였다.
1954년 일이다.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손자 하나가 육당에게 졸업생 고별사를 써 달라고 졸랐다. 손자가 졸업식에서 고별사를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대문호에게 철없는 손자가 대필 글을 졸랐던 것이다. 육당은 손자에게 초를 잡아 오면 고쳐 주겠다고 하다가 결국엔 응석에 못 이겨 200자 원고지 대여섯 장 정도 분량의 글을 써 주었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글을 자신의 글씨로 정서한 다음 졸업식장으로 갔다. 졸업식장에서 손자는 교장 선생님 옆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가 유명인사로 졸업식장에 초청받아 올 줄 몰랐던 손자는 긴장한 채로 졸업생 고별사를 읽었다. 옮겨 쓸 때는 몰랐던 한 문장이 너무 어려운 것 같았다. 나름대로 쉽게 풀어서 읽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육당은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얀 녀석. 내 글은 왜놈들도 함부로 고치지 못했는데 네가 내 글을 바꾸었구나!”
당대의 대문호 최남선의 글을 함부로 바꾼 손자는 장손인 최학주(崔學柱)씨다. 최씨는 육당이 ‘소원(素園)’이라고 이름 짓고 살던 우이동의 농장 겸 서원에서 자랐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육당이 고혈압과 중풍으로 자리에 눕자 그는 자신의 책상과 침구를 할아버지 병실로 옮겼다. 1957년 육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할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그는 병실에서 육당이 참고할 서책을 찾는다든가 하는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신문도 읽어 주고 청탁받은 원고를 구술하는 대로 받아 쓰는 일도 했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는 육당의 임종을 지켜봤다.
최씨는 2011년 3월 1일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이라는 전기를 썼다. 최씨는 서울대 공대 화공학과를 졸업한 후 1967년 도미(渡美)해서 뉴욕에 정착했다. 미국 제약회사에서 정년퇴직한 후 2006년부터 할아버지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육당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와 가족의 일기와 편지, 육당의 저작 등 각종 사료(史料)를 집대성해 글을 썼다고 한다.
2011년 11월 말 ‘육당학 국제 학술대회’ 등에 참석차 귀국한 그를 만났다. 그가 학술대회 참석 외에도 고국을 방문한 또다른 이유는 《육당 최남선 전집-현대문역주》 출간 준비를 위한 목적도 있었다.
六堂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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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 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시절의 육당. 기결수 번호 757이 선명하다. |
“2013년 하반기에 총 23권으로 출간할 예정으로 준비하고 있고 상당히 진척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고려대에서 발간한 《육당전집》 등이 있는데요.
“할아버지의 글을 널리 읽히기 위해서입니다. 1970년대 초반에 발간된 《육당전집》은 이미 오래돼서 일반 독자들이 구하기가 어렵기도 하고요. 또 그 전집은 글이 어렵고 한자가 많아서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학자들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글을 현재의 맞춤법에 맞춰서 읽기 쉽게 윤문해 새로운 형태의 전집으로 발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료 접근성과 가독력이 높아진 새로운 전집은 할아버지의 글을 실제 읽어 보지도 않고 비판만 하던 그간의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그간의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말씀은 육당을 둘러싼 친일파 논란을 지칭하는 겁니까.
“이제 친일파 소리를 들으면 저는 둔감해져서 별 감흥이 없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시류라고 생각합니다. 오해의 여지가 없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친일파라고 오해받는 부분보다는 그분이 했던 문화나 역사 분야에서의 작업들이 더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최씨는 할아버지가 친일파라는 주장을 중학교 시절 교사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병상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 곁에서 온갖 심부름을 했던 그에게 할아버지가 친일파라고 하는 말은 상당한 혼돈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육당은 친일파라는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할아버지가 말로써 반응하시는 걸 본 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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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선언서> 원본. 육당은 급한 상황에서 극비리에 직접 조판까지 하느라 선언문 첫머리에 ‘朝鮮’이 ‘鮮朝’로 돼 있는 것을 놓쳤다. |
서대문형무소에서 친일 논란에 반박 글 기고
육당은 자신의 친일행위 논란과 관련, 반민특위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던 1949년 2월, 《자유신문》에 자신의 입장을 <자열서(自列書)>라는 제목으로 기고한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장 앞으로 보낸 글이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反民族)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終世)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다. (중략) 나는 분명히 일평생 일조로(一條路)를 일심(一心)으로 매진한 것을 자신하는 자이다. 중간에 간난(艱難)한 환경, 유약한 성격의 내외 양인(兩因)이 서로 합병하여서 내 의상에 흙을 바르고 내 행리(行履)에 올가미를 씌웠을지라도 이는 그때그때의 외적 변모일 따름이요, 결코 내 심여행(心與行)의 변전변환(變轉變換)은 아니었다. 이 점을 밝히겠다 하여 이 이상의 강변스런 말을 더 하지 않겠거니와 다만 조선사편수위원,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열 벌 갈아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제는 언제고 종시일관(終始一貫)하게 민족정신의 심토(深討), 조국 역사의 건설 그것밖에 벗어 진 일 없었음은 천일(天日)이 저기 있는 아래 감연(敢然)히 명언하기를 꺼리지 않겠다. (하략)>
육당은 1928년 10월 무렵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참여했다. 일제가 조선역사를 그들의 통치 목적에 부합하도록 편찬하기 위해 만든 역사 연구기관이다. 육당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자 ‘변절’이라는 비난이 제기됐다.
―육당은 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을까요.
“할아버지가 가장 오해를 받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일제 학자들은 단군이라는 뿌리를 없애고 조선사를 만들려고 했어요. 역사 속의 단군이 아니라 신화 속의 단군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지요. 할아버지가 그곳에 가서 하시려던 일은 ‘조선의 단군’을 역사적 사실, 세계사적 사실로 정립하려는 것이었죠. 조선의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할아버지의 조선사편수행을 비판한 사람들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내 할아버지가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고 있던 이마니시(今西), 이나바(稻葉), 구로이다(黑板) 등 일본 학자들을 상대로 전개한 ‘진실투쟁’의 진상을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진실투쟁’을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조선사편수회의 회의록이 그 명백한 증거예요. 1932년 제6회 위원회에서 할아버지는 단군 문제를 제기했어요. ‘고구려 동명왕 부분에 인용된 《삼국유사》 기록 중 석유환국(昔有桓國)이 ‘천인(淺人)의 망필(妄筆)’로 석유환인(昔有桓人)으로 고쳐졌다’고 지적한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 ‘천인의 망필’이란 이마니시가 《삼국유사》를 교감(校監)할 때 ‘환국’을 ‘환인’으로 고친 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마니시는 일본 학자 중에서도 단군을 가장 깊이 연구한 인물로 그의 주장은 단군이 고려 후기에 날조된 인물이라는 것이었죠.”
1934년 열린 제8회 위원회에서도 육당은 《조선사》에서 단군을 빼려는 일제 학자들의 주장에 이렇게 맞섰다.
“단군, 기자가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에 있어서 이를 수록해야 할 제1편에 수록하지 않고 있다. ‘잔무’를 정리할 경우에 정편(正編)이나 보편(補編)으로 하여 단군, 기자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여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육당은 일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선사연수회에 참여해서 지키고자 했던 단군과 조선사를 지키지 못했다. 일제가 자신들의 방침대로 조선사 편찬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학병 권유 관련 姜英勳 전 총리의 증언
―그렇다고 해도 일제 말기 조선 학생들에 대한 학병(學兵) 참여 권유 연설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당시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봤습니다. 일본이 망한 뒤 우리 힘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면 군대를 아는 인재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죠.”
최씨는 육당이 자신이 교수로 재직했던 만주 건국대 학생들에게 학병 지원과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전세(戰勢)의 귀추에 대해 속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후 세계의 새로운 질서 속에 조선 민족이 당연히 치러야 할 민족적 지위를 되찾고 민족자주독립 노선을 확보,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족 실력 배양이 선결조건이다. 그 실력의 핵심이 되는 군사력, 군사기술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무위로 보낼 수는 없다. 학병으로 출정하는 사람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겠지만, 살아서 귀환하는 사람들이 민족이 신운명을 개척하는 데 중요한 역군이 될 것임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강영훈(姜英勳) 전 국무총리의 증언도 최씨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강 전 총리는 학병을 다녀왔고 만주건국대를 나왔다.
“나는 일제 말기 학병(學兵)으로 나가서 1945년 8월 20일자로 소위가 됐다. 학병으로 나가기 전 나는 육당 최남선 선생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던 일이 있다. 그때 육당 선생은 이런 말씀을 했다.
‘학병을 나가는 것은 일본을 위해서도, 천황을 위해도 아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을 기르려면 군인이 필요하고 군대를 알아야 한다. 학병으로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살아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희생자의 주검을 딛고 일어나 그 사람들의 몫까지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실제로 광복 후에 일본군에 학병으로 나간 사람들이 국군을 창설할 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강 전 총리 외에도 5·16 이후 재야인사로 유명했던 장준하(張俊河)씨도 육당의 학병 권유 연설을 직접 듣고 학병에 참여했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육당 사후 바로 이듬해 《사상계(思想界)》 1월호를 ‘육당기념호’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을 역사가로 알아주길 원해
―전공이 이공계인데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을 보면 상당한 인문학적 소양이 드러나는데 특별한 노력을 한 건가요.
“그런 노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공계이기는 하지만 제가 이 책 저 책 보느라 한눈을 팔았던 것 같습니다. 미국 제약업계 현직에서 정년퇴임하면서 인문과학 서적들을 읽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역사학도 어차피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육당은 독립운동가입니까, 역사학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둘 다입니다. 할아버지는 역사학을 통해서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세웠고, 그 궁극적 목적은 민족의 정치적 독립과 조선사의 세계화였습니다. 그분은 당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무력 투쟁에 의한 독립보다는 제국주의의 필연적 붕괴와 식민지의 청산으로 세계 질서의 재편에 의해 국권회복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육당 본인은 어느 쪽에 더 무게 중심을 두었던 것 같습니까.
“당신의 말씀으로는 역사가였습니다. 역사가로 알아주기를 원하셨죠.”
육당은 1927년 출범한 우리 민족 최초의 좌우합작 운동체인 신간회 탄생의 숨은 주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랜 벗이었던 홍명희와 신석우(申錫雨)를 움직여 신간회의 출범을 도왔다는 것이다. 신간회는 1931년 해체됐다.
―육당이 신간회의 해체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까.
“직접 들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최초의 좌우합작 시도였던 신간회가 와해됨으로써 결국 남북 분단까지 이어졌고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신간회의 해체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짐작은 하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육당은 어떤 입장을 취했던 것 같습니까.
“할아버지는 두 이념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념이라는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에게서 유일한 이념은 오로지 조선을 토대로 하는 정신문화인 조선주의였습니다. 서구에서 유래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할아버지의 조선주의와는 그 출발과 성격이 다릅니다.”
―육당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입니까.
“조선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정치적 독립, 민족문화의 부흥이었다고 봅니다.”
<독립선언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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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백두산 정상에 선 육당(맨왼쪽). 육당은 백두산을 우리 문화의 연원으로 봤다. |
“할아버지는 국토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했습니다. 관념적일 수 있는 민족정신, 민족애는 국토 사랑이라는 행위와 감정을 통해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죠. 그 점에서 할아버지의 국토 기행문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였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육당이 3·1운동 이전에도 기행문을 썼나요.
“그런 거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기행문도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조선사람에게 알리는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봅니다.”
1997년 문화재청은 3·1절을 맞아 <독립선언서>를 문화재로 지정한다고 사전 예고했다. 이때 사전 예고된 문화재 가운데는 《백범일지》도 있었다. 《백범일지》는 보물 제1235호로 지정됐지만 <독립선언서>는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친일파가 작성한 것이라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백범일지》는 문화재로 지정되고 <독립선언서>는 지정이 안됐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는지요.
“한마디로 역사의식의 빈곤이라고 봅니다. <독립선언서>는 누가 작성했든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독립’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탄압을 받던 그 시절에 ‘독립’을 선언한 헌장(憲章)인 <독립선언서>를 부정하는 것은 3·1운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입니다. 3·1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선언서>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을 다시 할 생각입니까.
“그게 제 생각이지만 그걸 제가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죠. 《백범일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독립선언서>는 그 영향력과 파급효과가 훨씬 더 지대했고 지금까지도 막중합니다. 3·1운동 정신을 전하기 위해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던 <독립선언서>가 문화재 지정에서는 왜 제외됐는지, 그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한국 학계에 묻고 싶을 따름입니다.”
―<독립선언서> 원본은 갖고 있습니까.
“네. 뉴욕 집에 소장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일기장을 정리하면서 거기에 껴 있던 것을 찾아낸 거죠. 일제 시대 내내 <독립선언서>를 집에 보관해 온 셈이죠. 원본이 두 장인데 또다른 하나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급박한 상황에서 극비리에 직접 조판을 하시느라 선언문 첫머리에 ‘朝鮮’이 ‘鮮朝’로 돼 있는 것을 놓치셨죠.”
민족의식은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어린이’, ‘한글’, ‘민족’ 등의 용어를 최초로 쓴 분이 육당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근거가 있는 겁니까.
“‘어린이’라는 말은 할아버지가 1914년 《청춘》 창간호에서 처음으로 쓰셨어요. 이 잡지에 <어린이의 꿈>이란 시를 발표하셨죠. ‘어린이’는 어린아이를 높여 부른 것이라고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죠.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20년 《개벽》에 발표한 <어린이 노래>보다 6년이나 앞선 것이죠. ‘한글’은 1920년대 조선광문회 시절 ‘언문’ 대신 우리말의 고유 이름으로 사용할 것을 제창했고 이를 국문학자들이 동의함으로써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이라는 말은 육당이 쓰기 이전부터 사용하던 용어였던데요.
“‘민족’은 1908년 할아버지가 일본 유학 시절 《대한유학생회 회보》에 쓴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글에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란 의미로 처음 쓰셨습니다. 그 이전에 쓰인 민족이란 말이 더러 있긴 해도 그 의미는 ‘인민’과 ‘족속’의 한자적 조합일 뿐 겨레, 동포라는 의미의 민족이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육당은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신라와 고구려가 같은 언어를 썼을까 궁금했던 소년 최학주는 육당이 우리나라 상고사의 무대를 답사한 후 쓴 <송막연운록>을 읽으면서 육당과 나눈 대화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신라인은 고구려인을 이민족(異民族)으로 여겼나요.
“아니다. 평양이 자체의 내분으로 자멸하고 7년 나당(羅唐) 전쟁 중에 신라는 고구려 유민과 동맹했다. 많은 경우 고구려에서 회수한 땅이 한때는 신라가 지배했던 고토이기도 했지만 대동강 이남 지방군제 재편에서 신라는 말갈과 백제인을 포함해 차별하지 않았다.”
―일통삼한론(一統三韓論)은 통일 당시 신라인의 의식인가요, 아니면 고려조에 들어 김부식이 신라 정통론을 세우기 위한 명분에 의한 건가요.
“전자이다. 당대 지나(支那) 쪽 기록에도 백제를 마한으로 지칭한 것들이 있다. 당나라 때의 삼한은 삼국이 있던 땅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신라의 김씨가 삼한의 주인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일통삼한 의식으로 신라의 정통성은 확립됐지만, 고구려의 정체성은 상실된 것인가요.
“아니다. 역사를 통해 한 민족이 같은 시대에 두 개 이상의 국가를 경영했던 예는 얼마든지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함락 후 고구려 유민의 진국(震國·발해)이 그 정체성을 계승했고, 당에 합류한 고구려인 고선지(高仙芝)와 이정기(李正己)는 당 제국 건설에 적극 참여했으며, 백제인 흑치상지(黑齒常之)도 마찬가지이다. 한민족의 정체성은 구성원이 공유하는 기억과 문화로 정의된다. 조선 민족이 세우고 발전에 동참한 국가는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발해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인가요.
“물론이다. 발해는 이름이 잘못되었다. 압록강 이북에 남아 있던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국가의 이름은 진(震)이었다. 발해는 지방명일 뿐이다. 진의 부족 하나가 금(金)이 되고 금이 청(淸)이 된 것이다. 청국의 조상이 진국의 통치를 받았다 해서 진국의 역사가 지나사(支那史)가 될 수는 없다.”
―진국과 신라는 200년 이상을 동북아시아에서 공존했는데 할아버지는 왜 그 시대를 조선의 남북조시대라고 정의하지 않았나요.
“남조(南朝)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북조(北朝) 만주를 회수하지 못해서인 것도 있지만, 《고려사》 편찬 당시 이씨왕조의 지나를 향한 정치적 굴복에도 이유가 있다. 《고려사》 편찬 책임자인 정인지(鄭麟趾)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정치가였다.”>
육당은 삼국시대부터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홍명희는 공산당 아니다
육당은 신문화 운동을 하면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홍명희, 이광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육당은 도산, 벽초, 춘원, 위당과 교류를 가졌는데 그들과는 각각 어떤 관계였습니까.
“육당과 도산은 제자와 스승, 육당과 벽초는 정치적 동지, 육당과 춘원은 문학적 동지, 위당과는 학문적 동지 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동지라는 벽초는 월북했는데요.
“제가 할아버지의 얘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어요. ‘홍명희는 공산당이 될 수 없다’ 하는 말씀이었죠. 자유당 시절 할아버지가 병상에 계실 때였다고 기억합니다. 벽초는 해방 후 할아버지에 대한 친일파 논란이 일자 각종 글을 통해서 할아버지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죠.”
―혹시 육당은 춘원을 문학적 라이벌로 의식하지는 않았습니까.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었습니다. 나이 차도 많았고요. 어느 시기가 돼서 춘원의 연애 사건 등 때문에 할아버지가 춘원을 야단치시기도 했죠.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기보다는 춘원이 하는 일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시다가 경고를 하시는 입장이었어요.”
―위당 정인보 선생과는 학문적 교류를 계속 가졌나요.
“정인보 선생을 서울로 불러들인 분이 할아버지입니다. 연세대학교에 한국학 교수로 취임시킨 것도 할아버지고 생활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 점은 정인보 선생의 가족들도 증언하고 있어요.”
육당의 이력 중 독특한 것 하나가 해방 후 해군전사편찬 작업에 관여한 일이다. 육당은 1954년 해군 전사편찬실에서 《한국해양사》를 출판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육당의 살아온 길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작업이지만 실상 그는 오래 전부터 해양(海洋)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육당은 1908년 《소년》 창간호부터 2년 동안 12회에 걸쳐 <해상대한사(海上大韓史)>라는 글을 썼다. 육당이 쓴 최초의 논문으로 요지는 해양 입국을 통해 대한제국의 발전을 기하자는 것이었다. 육당이 스무 살도 안된 때였다. 《소년》 창간호에 발표한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쓸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할 만하다.
“할아버지는 중화주의 등 대륙만을 향해 있던 조선의 시선이 바다로 돌려져야 근대 문명의 성취가 가능했다고 본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국가의 부강도 바다의 자원을 활용할 줄 알아야 가능하다고 하셨죠. 《한국해양사》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한국의 구원은 오직 바다에 있고, 나아가 건국 자체도 ‘바다에 서는 나라로 고쳐 만들기’여야 한다고 주장하셨죠.”
六堂은 한국의 토머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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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10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육당의 영결식. 영정을 들고 있는 이가 최학주씨로 당시 경기고 1학년이었다. |
“아닙니다. 그것들은 누구의 개인소유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청계천가에 무너진 광문회 건물이 복원되면 원래 거기에 있었던 유물들을 같은 자리에 영구히 비치할 생각입니다.”
―미국에 정착한 이유가 혹시 육당에 대한 세간의 일부 평가와 무관하지는 않습니까.
“전혀 무관합니다. 잘못된 인식은 언젠가는 바로잡히게 되겠죠.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저대로 열심히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한 5년만 공부하고 거기에 5년 더 실무 경영을 배우고 귀국할 생각이었는데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40여년 동안 한국여권을 갖고 다니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자제분들은 육당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자신들의 증조부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우리 아이들은 자신들의 증조부가 한국의 제퍼슨이라고 생각합니다.”
―육당의 손자로서 산다는 것은 영광이었습니까, 불편함이었습니까.
“영광이었습니다. 불편한 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불편함까지 포함해서 영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