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세 시대’ 도래했지만, 국민 10명 중 7명은 “부정적” 혹은 “그저 그렇다”고 생각해
⊙ 창립 회원 20명에서 10년 만에 16만명으로 성장, 20대도 1만5000명 참여
⊙ 베이비붐 세대는 ‘house-richㆍcash-poor’
⊙ 창립 회원 20명에서 10년 만에 16만명으로 성장, 20대도 1만5000명 참여
⊙ 베이비붐 세대는 ‘house-richㆍcash-poor’
1970~2010년까지 우리의 생(生)은 매주 3.15일씩 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평균기대수명은 80세를 넘었고, 90~100세를 얘기하는 시대가 됐다. 2011년 초 고려대 통계학과 박유성 교수팀의 기대수명 연구결과에 의하면 현 50대 이하 한국인 중 절반이 100세까지 살 가능성이 크다. 2011년 12월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원도 “2020년이면 우리 사회가 사실상 100세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쯤 되면 “60은 소년, 70은 청년, 80은 중년”이라는 어느 보험사의 광고 문구가 단순히 선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부터 장수는 인간의 최대 관심사였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의 평균수명이 47세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현대인의 상당수가 당대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았던 ‘왕’보다 오래 살게 됐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며 선약(仙藥)을 찾던 시황제가 들으면 질투가 날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장수사회’를 마냥 반길 만한 입장이 아니다.
보험·금융기관이 은퇴 시장에 앞장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1년 6월 전국 30~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인생 100세 시대 대응 국민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28%만 ‘100세 시대’ 도래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했다. 응답자 10명 중 7명은 부정적이거나 ‘그저 그렇다’는 반응을 보였다. ‘잿빛사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2011년 12월 통계청은 ‘2010~ 2060 장래 인구 추계’에서 “2060년 총인구 4396만명 중 약 40%인 1798만명이 65세 이상 고령자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같은 시기 유소년층(0~14세)은 2010년(798만명)의 56% 수준으로 감소한 447만명이다. 통계청의 전망에 따르면 2060년의 대한민국은 피부양인구(2245만명)가 생산 가능 인구 2187만명을 넘는다.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단계에 있는 우리는 아직 ‘전(全) 국가적 노화’에 대한 방책이 마련돼 있지 않다. 직장 정년은 55세 안팎에 머물러 있다. 40대조차 ‘조기퇴직’ ‘명예퇴직’ 얘기에 가슴을 졸이는 게 요즘의 분위기다. 50대에 퇴직해도 자녀 학자금, 결혼자금 등을 지원해야 하므로 자신의 노후를 살필 여력이 없다. 은퇴 후 생활에 대해 고민한 경험도 많지 않다. 준비되지 않은 ‘장수사회’ ‘초고령사회’는 개인과 국가에 재앙일 뿐이다.
이런 시류에 맞춰 보험사나 금융기관은 5~6년 전부터 은퇴연구소를 만들어 시장 진출을 꾀했다. 현재 주위에서 은퇴 관련 상품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이들 상품은 재무적인 부분에만 치중할 뿐 아니라 ‘노후자금 10억원’ 등의 공포마케팅으로 사람들이 불안감과 박탈감을 느끼도록 조장하고 있다.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건강, 경력재활용 등을 포함하는 ‘은퇴문화’의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는 사회적 시스템 구축도 시급하다.
은퇴자협회에 20대도 1만5000명 가입
《월간조선》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은퇴(隱退)’란 화두를 붙들고 ‘한국형 은퇴문화’를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는 주명룡(朱明龍ㆍ66) 대한은퇴자협회(이하 KARP) 회장을 찾았다. KARP는 2002년 주(朱) 회장이 퇴직 전후(前後) 세대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회운동을 위해 설립한 단체다.
창립 회원 20명으로 시작했던 KARP는 2011년 현재 온ㆍ오프라인 회원이 16만명을 넘어섰다. 이 중에는 1980~90년대에 태어난 20대도 1만5000명 가까이 포함돼 있다. 이는 은퇴가 특정 연령대만이 아니라 전(全) 연령층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주 회장은 “고령화에 따라 사회구조가 급격한 변화를 하는 만큼 은퇴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지만 반(反)노인 정서는 심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 회장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의 반(反)노인 정서는 심화하고 있다.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 기간 당시 한 트위터 이용자와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나눈 대화 글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트위터 이용자는 “서울 노친네들 설득하기 힘드네요. 그래서 아부지랑 엄니한테 25일부터 27일까지 수안보 온천 예약해 드렸습니다. 제가 타국에 있어서리”라고 조 교수에게 글을 남겼다. 조 교수는 “진짜 효자”라며 치켜세웠다. 두 사람이 ‘반노(反老)’ 정서를 거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데는 전 사회적으로 ‘노인은 거추장스러운 퇴물’이라는 암묵적 공감대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론을 통해 볼 수 있는 노인 관련 기사는 온통 ‘고령화’ ‘부양비용’이란 단어만 눈에 띈다. 우리가 노인 인구의 증가를 두려워한다는 방증이다.
주 회장은 “정부, 사회학계, 기업 및 금융기관에서 고령사회에 대해 암울한 전망만 하는 것도 노인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은연중에 깔린 것”이라며 “고령자도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인식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요즘 60대는 노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젊고 건강합니다. 또 50대는 이전 세대와 비교하면 교육수준과 사회참여의식이 높습니다. 이런 고급 인적자원이 은퇴를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는 건 사회적 낭비입니다. 영어에서 은퇴를 이르는 ‘Retire’는 타이어(Tire)를 다시(Re) 갈아 끼우는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가 나이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 해결책 모색의 첫걸음입니다.”
2002년 KARP가 제안한 ‘연령차별금지법’ 7년 만에 시행
전(全) 세계 은퇴자운동의 교범(敎範)인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연령차별금지법(ADEA)’ ‘조기퇴직 종용 금지법’ 등을 입법 활동을 통해 법제화시켰다. 주명룡 회장도 KARP 설립 첫해인 2002년부터 서울 도심에서 혼자 피켓을 들고 ‘연령차별금지법’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는 “그동안 사회의 편견에 맞서 은퇴자와 노·장년층 권익 보호에 대한 정책 입안 활동에 집중해 왔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연령차별금지법은 2009년에 시행돼 40세 이상인 중·장년층이 취업에서 차별을 받지 않게 됐다. 50대에 공무원에 임용된 사람을 볼 수 있게 된 이면에는 KARP의 ‘7년 노력’이 숨어 있었다.
주 회장이 ‘연령차별금지법’을 주장한 데는 노년층의 경제력 확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베버리지는 ‘장·노년층의 최대 고민은 경제적 문제’라고 했다. 2011년 5월 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100세 시대의 걱정거리는 ▲건강(89.2%) ▲생활비(76.8%) ▲일자리(17.7%) 순이었다. 주 회장은 “빈곤, 질환, 역할 상실, 소외감 등의 ‘노년기 4대 고충’은 퇴직으로 인한 경제력 상실과 사회연결 통로 차단 등이 1차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우리나라 노년층의 빈곤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10년 우리 노인 가구 중 45.1%가 중간소득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OECD 국가 중 최하위로 평균(15.1%)의 약 3배가 된다. 그만큼 우리나라 노인들의 삶이 빈한(貧寒)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여유로운 은퇴 생활은 기대하기 어렵다.
2010년부터 은퇴행렬에 가담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도 상황이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고, 1~2명인 자식에게 ‘물질적 풍요’를 전해준 첫 세대다. 2010년 4월 통계청이 낸 ‘사회조사를 통해 본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에 따르면 자녀의 대학교육비와 결혼비용에 대해 부모가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 99.1%, 90%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노후 대비 자산 준비에 대해서는 미흡한 답뿐이었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이들이 63세 되는 해부터 받을 평균 국민연금 수령액은 45만8000원이다.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대상은 전체의 33.8%인 256만7000명에 불과했다.
자식들에게 노후를 기댈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현재 우리 청소년과 대학생들의 부모에 대한 의존도는 심각하다. 2007년 여성부의 ‘청소년 의식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대학 학자금을 부모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93%)” “결혼비용을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87%)” “결혼할 때 부모가 집을 사주거나 전세자금을 줘야 한다(74%)”고 답했다.
스스로 노후를 책임져야 할 이들이 가진 것은 달랑 집 한 채뿐이다. KB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 280만 가구의 평균 자산은 3억3775만원이다. 이 중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8000만원 정도다. 총 자산의 76.3%인 2억5785만원이 부동산에 묶여 있다. 주명룡 회장은 이를 두고 집 부자(house-rich)ㆍ텅 빈 주머니(cash-poor) 현상이라고 표현한다.
“상속보다 老後가 중요”
2009년 국민연금연구원이 조사한 바로는 50세 이상 장·노년층의 월간 노후 최소생활비로 혼자 살 경우 76만원, 부부의 경우 121만원이 필요하다. 또 노후에 평균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경우에는 독신(獨身)은 111만원, 부부의 경우 174만원이 든다고 한다. 부부가 30년 동안 함께 살면서 평균적인 생활을 할 경우의 비용은 6억2640만원이다. 이자율 4%인 상황에서 연 5000만원을 10년 동안 넣어야 만들 수 있는 금액이다. 집을 팔아도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최대 12년이다.
주명룡 회장은 공적(公的)연금 수혜 비중이 작고, 가족부양과 자녀교육 등으로 노후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 장·노년층의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 2007년 종신지급형 주택연금 제도를 주택금융공사에 제안했다. 주택연금은 현금성 자산이 부족한 이들이 보유 주택을 담보로 죽을 때까지 매달 일정액의 연금을 지급받는 제도다. 상환은 보유자 사망 시 주택으로 하고, 잔존가액이 있다면 상속인에게 양도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주 회장은 “상속이라는 관습과 자식에 대한 미안함으로 주택연금 가입을 주저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자녀에 대한 상속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노후라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평균 장례비용이 700만~800만원인데, 이것만 남기고 다 쓰고 가자”고 제안했다.
주택연금 가입 건수는 ▲2007년(7~12월) 515건 ▲2008년 695건 ▲2009년 1124건 ▲2010년 2016건 ▲2011년 12월 6일 현재 2653건 등 총 7003건이다. 1951년생의 경우 베이비붐 세대 가구의 부동산 자산(주택) 2억5785만원으로 종신지급연금을 신청하면 월 61만원의 연금이 나온다. 여기에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을 합치면 부부의 최소생활비는 나온다는 게 주 회장의 계산이다. 그는 퇴직하는 베이비붐 세대에게 재취업, 창업,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주문했다. 금전적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삶의 활력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은퇴하면 먹고 자고 산책해도 하루 10시간 남아
하지만 장·노년층이 그리는 노후 생활은 주 회장의 제언과는 거리가 있다. 교보생명과 시니어파트너즈가 2010년에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문대상자(40~69세 남녀 1000명) 중 62.1%가 ‘안정되고 풍요로운 여가생활’을 은퇴 후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로 꼽았다. 주 회장은 “많은 사람이 ‘은퇴 후 생활’을 휴가로 여기다가 돈과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남은 시간을 놀다 가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은퇴자협회를 찾는 사람들이 ‘퇴직 후 놀러다닐 생각에 들뜨기도 했는데 몇 달 지나니까 무료함을 못 견디겠더라’고 자주 말합니다. 은퇴 후에 남는 것은 시간뿐입니다. 하루 24시간 중 먹고, 자고, 화장실 가고, 산책하는 등의 생활시간은 13시간 정도입니다. 직업이 없으니까 나머지 시간은 여가로 볼 수 있죠. 55세에 퇴직해 30년을 더 산다면 여가만 12만 시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허락되면 봉사활동을 하고, 그렇지 않다면 파트타임(part-time)이라도 죽을 때까지 일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길입니다.”
주 회장은 “재취업을 위해, 세상에 일찌감치 실망하고 은퇴자 스스로 마음가짐을 바꿔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관리·지시만 하고 실무는 아랫사람에게 시키는 습관 ▲나이가 들면 연봉과 지위가 높아져야 한다는 고정관념 ▲큰 조직에 있어야 체면이 선다는 허영심 등을 버리는 것이다.
“큰 회사에서 억대 연봉을 받던 임원도 퇴직하는 순간 스스로 기대치를 낮춰야 합니다. 자질구레한 일도 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이 정도 마음만 먹어도 일자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재취업을 할 때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덤으로 약간의 수입까지 올린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복입니다. 명함이 있어야 활력이 돌고 젊게 살 수 있는 겁니다.”
이 밖에도 주 회장이 말하는 재취업의 장점은 ▲금전적 스트레스 감소로 인한 정신건강 제고 ▲건강관리를 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 마련 ▲대외활동공간 확보 등이다. 주 회장은 “행복한 은퇴생활의 조건 중 하나로 부부갈등이 이슈로 등장했는데, 일을 하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은퇴남편신드롬
최근 은퇴남편신드롬(Retired Husband Syndrome)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이는 남편의 은퇴와 함께 아내의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지면서 몸이 자주 아프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증상이다. 남편은 전업주부로서 아내의 고민과 생활양상을 알지 못한다. 아내도 남편의 고민, 일에 대해 모른다. 바깥일만 하고 살아온 50대 이상의 남성들은 퇴직 후 가정에서 설 자리가 없다. 집에서 밥 먹는 것조차 눈치가 보이지만, 나갈 곳은 마땅치 않다. 우스개지만 “하루 한 끼도 집에서 먹지 않으면 영식(零食)님, 한 끼만 먹으면 일식(一食)군, 두 끼를 먹으면 두식이, 세 끼를 먹으면 삼식(三食)이 XX”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내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낯설고 한정된 공간에서 접촉빈도가 높아지면 서로 생활방식에 대해 간섭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 공연히 황혼이혼의 단초를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각자 대외활동영역을 가짐으로써 관심사를 분산해야만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일하기 위한 제1조건은 건강이다. 예기치 않은 병에 걸리면 은퇴자산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펴낸 보고서 ‘베이비붐 세대의 건강실태 및 장기요양 이용의식 수준’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의 19.2%가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비붐 세대는 서구식 식생활 패턴에 익숙해 고혈압, 비만, 당뇨의 발생 위험이 크다. 흡연율(남성 46%, 여성 3.5%)과 음주율(남성 76.8%, 여성 50.2%)도 높지만, 10명 중 3명은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또 2명 중 1명은 자살을 생각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2010년 50대 사망원인 암(42.8%), 자살(9.5%), 간질환(7.4%)과 생활습관이 상당한 연관성을 갖는다. 주명룡 회장은 “고령이 되면 아무리 건강을 자부해도 20~40대처럼 에너지가 타오르지 않는다”며 “항상 건강에 유념하면서 업무량과 운동량을 조절하고, 섭생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퇴 전에 餘生 계획서를 작성해야
노후에 어떤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막연하다. 주 회장은 “여생 계획서를 작성해 은퇴 후 활동에 대해 상세히 기록할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냐’는 질문부터 시작해 ‘남은 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쓰고 지우는 작업을 2~3개월 동안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그쪽으로 가면 무엇이 있을까 ▲나는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 ▲나는 진정 이 길을 갈 준비가 돼 있나 등의 질문을 자신에게 계속 던져야 한다. 주 회장은 “사람들이 자기검열을 통해 ‘이 나이에 뭘…’이라며 망설이는데 젊어서 못하고 미뤘던 일을 골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그는 “이전 세대도 마찬가지지만 베이비붐 세대도 ‘배우지 못한 한(恨)’이 크다”며 공부를 강조했다.
‘사회조사를 통해 본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 중 자신이 원하는 단계까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64.2%로 나타났다. 이 중 80%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배우지 못했다고 밝혔다.
“퇴직과 함께 찾아온 소중한 ‘권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매일 수천 가지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인생 2막에 대해서는 수동적으로 떠밀려 가는 겁니까. ‘생(生)의 선택’(Life Choice)은 오로지 본인의 몫입니다. 맥도널드 햄버거 체인을 만든 레이 크록은 55세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을 설립한 커널 샌더스는 65세에 창업했고요. 나이가 변화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은퇴자가 가진 것은 시간이므로 과감히 도전하십시오. 배우고 싶다면 방송통신대, 사이버대 등에 등록하고 공부하십시오. 더 용기를 내서 직접 캠퍼스를 누비는 대학생이 되는 것도 좋습니다.”
한편 주명룡 회장은 “은퇴문제에서 개인의 노력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기업 및 전 사회적 관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정부는 고령자 취업 환경 조성, 노후소득 보장, 평생학습 기반 확충을 해야 한다. 기업은 잡셰어링, 정년 연장 등을 도입하고 은퇴교육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주 회장은 “은퇴교육은 ‘제2의 인생’에서 초등교육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며 “최소한 정년 5년 전부터 고용주가 의무적으로 퇴직자 전원에게 전직 훈련을 제공하고, 비용 일부를 정부가 보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 회장은 “지난 10년 동안 이런 내용을 주장했지만, 정ㆍ관ㆍ재계에서 제대로 된 정책이나 변화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며 “KARP의 힘이 아직 미약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美은퇴자, 유권자의 20%
당초 주명룡 회장의 목표는 KARP를 AARP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AARP는 1947년 설립자 에델 페르시 앤드루스의 주방 식탁에서 몇몇 친구들이 회의를 한 것이 시작이었다. 앤드루스는 1944년 교사직에서 퇴직함과 동시에 의료보험 가입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는 퇴직자에 대한 형편없는 처우에 분개해 1947년 전국퇴직교사협회를 결성했다. 정부와 보험회사 등을 상대로 끈질긴 투쟁을 벌인 끝에 1955년 단체의료보험 가입을 관철했다. 이후 앤드루스는 전(全) 퇴직자들이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1958년 비영리단체 AARP를 만들었다.
정관(定款)과 회비(會費) 없이 시작한 AARP의 미국 내 규모와 영향력은 다른 어떤 단체보다 우월하다. 현재 평균연령 65세의 은퇴자 4000만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이는 미국 전체 유권자의 20%를 차지하는 규모다. 회원의 연령대는 50~105세로 평균 65세이고, 연평균 신규 회원은 150만명이다. 지역지부 2200개에, 연(年) 예산 규모 1조원을 자랑한다. 예산은 ▲회비 ▲상표사용료 ▲정부프로젝트 등으로 자금원이 고르게 분포돼 있다.
AARP는 전체 회원 중 28%가 연회비(2007년 기준 12.5달러)를 납부하고, AARP 소유 매체(TV, 라디오, 신문, 잡지)에서 광고 수입을 올린다. 특히 이들이 발행하는 격월간지 《AARP Magazine》은 발행부수 2343만5000부로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AARP가 은퇴자들의 권익을 위한 단체인 만큼, 주로 노령 은퇴자들을 위한 내용을 담아 무료배포한다. 주명룡 회장에 따르면 2000년 당시 이 잡지 한 면에 광고하기 위해서는 12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또 기업들의 상품을 소개하고 수수료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오가는 돈의 흐름은 해마다 공표해 투명한 재무관리를 꾀하고 있다.
“워싱턴에서 두 번째로 힘이 센 사람은 AARP 사무총장”
AARP는 ▲세무상담 ▲운전지도 ▲음식ㆍ의복 수집 ▲독거노인관리 ▲청소년 학습지도 ▲저소득가정 재정관리 등 다양한 자원봉사 사업을 통해 회원은 물론 지역주민에게 지지를 얻는다. 미국 정가도 ‘사람’과 ‘돈’이 있는 단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주 회장에 따르면 평균연령의 영향으로 AARP는 미국 내에서 투표율 높은 ‘보수’ 단체로 분류되는데, 고령자 대책에 따라 정치인 등급을 매겨 투표가이드를 회원들에게 배포한다. 따라서 “AARP에 찍히면 정치 생명이 위험하다”는 평을 듣는다. 《워싱턴포스트》가 “워싱턴에서 두 번째로 힘이 센 사람은 AARP 사무총장”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쓸 정도다.
그 때문에 미국 대선후보들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 AARP다. 그들은 자청해서 ‘은퇴자 관련 정책’ 설명회를 갖고 AARP의 검증을 받는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건강보험법을 개정한 것도 “건강보험 혜택을 확대하라”는 AARP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국 의회에는 150여 명의 AARP 로비스트가 상주(常駐)하면서 상ㆍ하 의원 500명을 담당한다. 이들은 의원과 보좌진에게 압력을 넣고, 회유하면서 ‘법 개정’을 요구한다. 대(對)의회 로비예산만 우리 돈으로 230억원이다.
주 회장은 “AARP는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보수단체라는 것이 미국 사회의 통념”이라면서도 “정관에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나 친밀감을 표시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AARP는 정당이 아닌, 회원들의 욕구나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지지한다”고 언급했다. 주 회장은 “2001년 AARP모임에 초청돼 댈러스에 갔을 때 3500만명째 회원에게 회원증을 주는 장면을 보고 감동했다”며 “당시 나도 서울에 가면 저런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33초당 1명씩 늘어나는 50대
하지만 이는 KARP에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주 회장의 한결같은 고민은 늘 부족한 ‘돈’과 ‘인재’다. ‘유능한’ 단체장은 기업에서 후원 받고, 대기업 사외이사도 겸임해서 돈을 끌어 온다. 정부의 각종 제도를 이용해 운영의 ‘묘’를 꾀하는 BRINGO(‘Brief Case’를 들고 정부 기관을 쫓아다니는 NGO)도 있다. 주 회장은 “정부와 기업을 감시해야 할 NGO가 돈을 받다 보면 본연의 기능을 못 할 수 있다”며 “대부분의 NGO는 몇몇 이사나 열성회원에게 기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KARP의 경우 주 회장이 귀국 당시 가져온 돈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다. 회원 16만명 중 연회비 3만원을 내는 회원이 1000명 미만이다. 주 회장은 “회원들의 후원이 절실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서 이렇게 토로했다.
“고령자 취업이 가능한 ‘연령차별금지법’, 역모기지론을 시행하게 했지만, 회원들은 혜택을 체감하지 못합니다. 실질적으로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는 게 없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에게 베풀거나 사회에 봉사한다는 생각도 별로 없고요. ‘섬김을 받지 않고 사회에 봉사하자’는 목표 아래 회원들이 참여하는 AARP처럼 되려면 멀었습니다.”
주 회장은 베이비붐 세대의 ‘대량은퇴’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는 “올해를 기준으로 은퇴연령인 50대가 33초에 1명씩 늘어나고 있다”며 “베이비붐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교육수준이 높고, 사회참여욕구가 강해 KARP의 새로운 활력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국무총리실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는 총 713만명 중 취업자 비율이 77.5%(553만명)다. 이 중 정규직 근로자는 193만명으로 향후 8년 동안 연평균 24만명이 퇴직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 인구 4800만명 중 만 50세 이상 연령층이 1423만명으로 30%를 차지하는 것도 주 회장이 기대를 거는 부분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표(票)’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다. 고령화로 인해 투표율이 높은 노년층 유권자 비중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른바 ‘그레이 파워(Grey Power)’의 시대가 도래하면, 향후 정국에서 ‘은퇴자 권익’이 주요 이슈로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은퇴자들 스스로 ‘정치세력화’를 꾀할 수도 있다.
노인의 정치세력화
실례(實例)로 이스라엘에는 ‘은퇴자당’이 있다. 전직(前職) 모사드(Mossad) 요원이었던 라피 아이탄이 2005년 창당한 ‘기말림(Gimalyim·은퇴자들)당’은 연금확대 등 은퇴자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 이슈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이들은 2006년 총선에서 7석을 차지하고, 라피 아이탄이 연금부장관으로 입각하면서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정당이 2011년 10월에 생겼다. 새희망노인권익연대(대표위원 윤영오)는 창당취지문에서 “2012년 총선, 대선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경험과 경륜을 갖춘 노장세력들이 국민화합과 국가위기 극복을 위한 애국적인 국가중추세력을 결집해야 할 때가 왔다”며 “새로운 삶의 활력을 가지고 국가와 국민에게 마지막 봉사하는 마음으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참여하는 기회를 쟁취하는 운동에 동참하자”고 밝혔다. 현행 정당법상 중앙선관위로부터 정당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5개 이상의 시ㆍ도 당과 함께 관할구역 내 주소를 둔 1000명 이상의 당원을 갖춰야 한다. 새희망노인권익연대는 2011년 7월부터 서울시당 및 각 지역 도당 창당작업에 들어가 선관위로부터 ‘중앙당등록증’을 받았다. 새희망노인권익연대는 올해 양대 선거에서 “정년을 넘은 1000만 노장세대가 모든 분야에서 참여할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와,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법으로 보장하겠다”는 ‘노인권익 보호’ 공약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이 같은 시각에서 KARP가 벌인 ‘사회변화운동’도 ‘정치’와 연관성이 높다. KARP는 각 선거 과정에서 은퇴자들의 주장을 각 후보에게 전달하고 정책 반영을 요구했다. 대선후보들의 복지정책 담당자를 모두 불러 공약에 대한 토론회도 가졌다. 작년엔 정부의 고령사회 정책을 감시하는 ‘중장년권익선봉단’을 조직했다. KARP를 ‘정치세력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주 회장에 따르면 KARP 회원들의 행사 참여도나 협회에 대한 충성도는 다른 곳에 비해 높은 편이다. KARP의 회원 16만명 중 74%인 12만명이 서울에 거주하는데, 강남ㆍ서초 3만3000명(28%)을 비롯해 강동ㆍ송파 1만6800명(14%), 광진ㆍ성동 1만명(10%) 등으로 고르게 분포돼 있다. 전국에 지부도 21곳이나 있다. KARP가 정당으로 변화를 시도하거나, 다른 정당의 연대단체로서의 조건은 갖춘 셈이다.
“NGO 역할은 하지만 정당은 멀리할 것”
주 회장에 따르면 KARP는 새희망노인권익연대로부터 2차례 ‘러브콜’을 받은 상태이고, 다른 노인 단체에서도 주 회장에게 창당을 권유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게다가 주명룡 회장은 재미(在美) 당시 미주(美洲)한인식품협회장,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준(準) 정치인이다.
주명룡 회장은 “뉴욕한인회장 출신 중 정계(政界)로 진출한 사람이 있고, 지난 총선에도 뉴욕한인회장 출신 인사가 공천 신청을 했다가 탈락한 사례도 있어서 간혹 의사를 물어 오는 경우가 있다”면서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음은 주 회장의 말이다.
“제가 50대에는 뉴욕 중심가에서 대형 맥도널드 매장 4개를 운영했고, 뉴욕한인회장을 했습니다. 정치에 뜻이 있었다면 ‘돈’과 ‘자리’를 갖고 있던 그때 벌써 움직였을 겁니다. NGO는 정치와 가까워서는 안 됩니다. 정당에 대한 지지를 금하는 AARP의 방침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사실 저는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정책을 제안하고, 제도개혁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것도 일종의 정치 아닙니까. 올해 있을 총선과 대선에서 정당과 후보들의 장·노년층 대상 복지 공약을 면밀히 검증해 NGO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대한은퇴자협회를 장·노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주축(主軸)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시킬 계획입니다.”⊙
예부터 장수는 인간의 최대 관심사였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의 평균수명이 47세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현대인의 상당수가 당대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았던 ‘왕’보다 오래 살게 됐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며 선약(仙藥)을 찾던 시황제가 들으면 질투가 날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장수사회’를 마냥 반길 만한 입장이 아니다.
보험·금융기관이 은퇴 시장에 앞장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1년 6월 전국 30~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인생 100세 시대 대응 국민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28%만 ‘100세 시대’ 도래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했다. 응답자 10명 중 7명은 부정적이거나 ‘그저 그렇다’는 반응을 보였다. ‘잿빛사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2011년 12월 통계청은 ‘2010~ 2060 장래 인구 추계’에서 “2060년 총인구 4396만명 중 약 40%인 1798만명이 65세 이상 고령자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같은 시기 유소년층(0~14세)은 2010년(798만명)의 56% 수준으로 감소한 447만명이다. 통계청의 전망에 따르면 2060년의 대한민국은 피부양인구(2245만명)가 생산 가능 인구 2187만명을 넘는다.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단계에 있는 우리는 아직 ‘전(全) 국가적 노화’에 대한 방책이 마련돼 있지 않다. 직장 정년은 55세 안팎에 머물러 있다. 40대조차 ‘조기퇴직’ ‘명예퇴직’ 얘기에 가슴을 졸이는 게 요즘의 분위기다. 50대에 퇴직해도 자녀 학자금, 결혼자금 등을 지원해야 하므로 자신의 노후를 살필 여력이 없다. 은퇴 후 생활에 대해 고민한 경험도 많지 않다. 준비되지 않은 ‘장수사회’ ‘초고령사회’는 개인과 국가에 재앙일 뿐이다.
이런 시류에 맞춰 보험사나 금융기관은 5~6년 전부터 은퇴연구소를 만들어 시장 진출을 꾀했다. 현재 주위에서 은퇴 관련 상품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이들 상품은 재무적인 부분에만 치중할 뿐 아니라 ‘노후자금 10억원’ 등의 공포마케팅으로 사람들이 불안감과 박탈감을 느끼도록 조장하고 있다.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건강, 경력재활용 등을 포함하는 ‘은퇴문화’의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는 사회적 시스템 구축도 시급하다.
은퇴자협회에 20대도 1만5000명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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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명룡 회장은 2002년 1월 미국은퇴자협회(AARP)를 본떠 대한은퇴자협회를 설립했다. 오른쪽 여성은 당시 AARP 회장 테스 켄자 씨. |
창립 회원 20명으로 시작했던 KARP는 2011년 현재 온ㆍ오프라인 회원이 16만명을 넘어섰다. 이 중에는 1980~90년대에 태어난 20대도 1만5000명 가까이 포함돼 있다. 이는 은퇴가 특정 연령대만이 아니라 전(全) 연령층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주 회장은 “고령화에 따라 사회구조가 급격한 변화를 하는 만큼 은퇴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지만 반(反)노인 정서는 심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 회장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의 반(反)노인 정서는 심화하고 있다.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 기간 당시 한 트위터 이용자와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나눈 대화 글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트위터 이용자는 “서울 노친네들 설득하기 힘드네요. 그래서 아부지랑 엄니한테 25일부터 27일까지 수안보 온천 예약해 드렸습니다. 제가 타국에 있어서리”라고 조 교수에게 글을 남겼다. 조 교수는 “진짜 효자”라며 치켜세웠다. 두 사람이 ‘반노(反老)’ 정서를 거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데는 전 사회적으로 ‘노인은 거추장스러운 퇴물’이라는 암묵적 공감대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론을 통해 볼 수 있는 노인 관련 기사는 온통 ‘고령화’ ‘부양비용’이란 단어만 눈에 띈다. 우리가 노인 인구의 증가를 두려워한다는 방증이다.
주 회장은 “정부, 사회학계, 기업 및 금융기관에서 고령사회에 대해 암울한 전망만 하는 것도 노인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은연중에 깔린 것”이라며 “고령자도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 인식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요즘 60대는 노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젊고 건강합니다. 또 50대는 이전 세대와 비교하면 교육수준과 사회참여의식이 높습니다. 이런 고급 인적자원이 은퇴를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는 건 사회적 낭비입니다. 영어에서 은퇴를 이르는 ‘Retire’는 타이어(Tire)를 다시(Re) 갈아 끼우는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가 나이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 해결책 모색의 첫걸음입니다.”
2002년 KARP가 제안한 ‘연령차별금지법’ 7년 만에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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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5월 대한은퇴자협회 회원들이 서울 탑골공원에서 연령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 |
주 회장이 ‘연령차별금지법’을 주장한 데는 노년층의 경제력 확보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베버리지는 ‘장·노년층의 최대 고민은 경제적 문제’라고 했다. 2011년 5월 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100세 시대의 걱정거리는 ▲건강(89.2%) ▲생활비(76.8%) ▲일자리(17.7%) 순이었다. 주 회장은 “빈곤, 질환, 역할 상실, 소외감 등의 ‘노년기 4대 고충’은 퇴직으로 인한 경제력 상실과 사회연결 통로 차단 등이 1차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우리나라 노년층의 빈곤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10년 우리 노인 가구 중 45.1%가 중간소득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OECD 국가 중 최하위로 평균(15.1%)의 약 3배가 된다. 그만큼 우리나라 노인들의 삶이 빈한(貧寒)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여유로운 은퇴 생활은 기대하기 어렵다.
2010년부터 은퇴행렬에 가담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도 상황이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고, 1~2명인 자식에게 ‘물질적 풍요’를 전해준 첫 세대다. 2010년 4월 통계청이 낸 ‘사회조사를 통해 본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에 따르면 자녀의 대학교육비와 결혼비용에 대해 부모가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 99.1%, 90%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노후 대비 자산 준비에 대해서는 미흡한 답뿐이었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이들이 63세 되는 해부터 받을 평균 국민연금 수령액은 45만8000원이다.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대상은 전체의 33.8%인 256만7000명에 불과했다.
자식들에게 노후를 기댈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현재 우리 청소년과 대학생들의 부모에 대한 의존도는 심각하다. 2007년 여성부의 ‘청소년 의식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대학 학자금을 부모가 모두 책임져야 한다(93%)” “결혼비용을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87%)” “결혼할 때 부모가 집을 사주거나 전세자금을 줘야 한다(74%)”고 답했다.
스스로 노후를 책임져야 할 이들이 가진 것은 달랑 집 한 채뿐이다. KB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 280만 가구의 평균 자산은 3억3775만원이다. 이 중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8000만원 정도다. 총 자산의 76.3%인 2억5785만원이 부동산에 묶여 있다. 주명룡 회장은 이를 두고 집 부자(house-rich)ㆍ텅 빈 주머니(cash-poor) 현상이라고 표현한다.
“상속보다 老後가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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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국내 노인 가구의 빈곤율은 45.1%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
주명룡 회장은 공적(公的)연금 수혜 비중이 작고, 가족부양과 자녀교육 등으로 노후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 장·노년층의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 2007년 종신지급형 주택연금 제도를 주택금융공사에 제안했다. 주택연금은 현금성 자산이 부족한 이들이 보유 주택을 담보로 죽을 때까지 매달 일정액의 연금을 지급받는 제도다. 상환은 보유자 사망 시 주택으로 하고, 잔존가액이 있다면 상속인에게 양도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주 회장은 “상속이라는 관습과 자식에 대한 미안함으로 주택연금 가입을 주저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자녀에 대한 상속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노후라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평균 장례비용이 700만~800만원인데, 이것만 남기고 다 쓰고 가자”고 제안했다.
주택연금 가입 건수는 ▲2007년(7~12월) 515건 ▲2008년 695건 ▲2009년 1124건 ▲2010년 2016건 ▲2011년 12월 6일 현재 2653건 등 총 7003건이다. 1951년생의 경우 베이비붐 세대 가구의 부동산 자산(주택) 2억5785만원으로 종신지급연금을 신청하면 월 61만원의 연금이 나온다. 여기에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을 합치면 부부의 최소생활비는 나온다는 게 주 회장의 계산이다. 그는 퇴직하는 베이비붐 세대에게 재취업, 창업,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주문했다. 금전적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삶의 활력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은퇴하면 먹고 자고 산책해도 하루 10시간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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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장·노년층의 62.1%는 ‘안정되고 풍요로운 여가생활’을 은퇴 후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로 꼽았다. |
“은퇴자협회를 찾는 사람들이 ‘퇴직 후 놀러다닐 생각에 들뜨기도 했는데 몇 달 지나니까 무료함을 못 견디겠더라’고 자주 말합니다. 은퇴 후에 남는 것은 시간뿐입니다. 하루 24시간 중 먹고, 자고, 화장실 가고, 산책하는 등의 생활시간은 13시간 정도입니다. 직업이 없으니까 나머지 시간은 여가로 볼 수 있죠. 55세에 퇴직해 30년을 더 산다면 여가만 12만 시간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허락되면 봉사활동을 하고, 그렇지 않다면 파트타임(part-time)이라도 죽을 때까지 일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길입니다.”
주 회장은 “재취업을 위해, 세상에 일찌감치 실망하고 은퇴자 스스로 마음가짐을 바꿔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관리·지시만 하고 실무는 아랫사람에게 시키는 습관 ▲나이가 들면 연봉과 지위가 높아져야 한다는 고정관념 ▲큰 조직에 있어야 체면이 선다는 허영심 등을 버리는 것이다.
“큰 회사에서 억대 연봉을 받던 임원도 퇴직하는 순간 스스로 기대치를 낮춰야 합니다. 자질구레한 일도 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이 정도 마음만 먹어도 일자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재취업을 할 때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덤으로 약간의 수입까지 올린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복입니다. 명함이 있어야 활력이 돌고 젊게 살 수 있는 겁니다.”
이 밖에도 주 회장이 말하는 재취업의 장점은 ▲금전적 스트레스 감소로 인한 정신건강 제고 ▲건강관리를 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 마련 ▲대외활동공간 확보 등이다. 주 회장은 “행복한 은퇴생활의 조건 중 하나로 부부갈등이 이슈로 등장했는데, 일을 하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은퇴남편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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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노인 일자리 경진대회’에 몰린 인파. 주 회장은 “파트타임(part-time)이라도 죽을 때까지 일하겠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
일하기 위한 제1조건은 건강이다. 예기치 않은 병에 걸리면 은퇴자산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펴낸 보고서 ‘베이비붐 세대의 건강실태 및 장기요양 이용의식 수준’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의 19.2%가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비붐 세대는 서구식 식생활 패턴에 익숙해 고혈압, 비만, 당뇨의 발생 위험이 크다. 흡연율(남성 46%, 여성 3.5%)과 음주율(남성 76.8%, 여성 50.2%)도 높지만, 10명 중 3명은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또 2명 중 1명은 자살을 생각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2010년 50대 사망원인 암(42.8%), 자살(9.5%), 간질환(7.4%)과 생활습관이 상당한 연관성을 갖는다. 주명룡 회장은 “고령이 되면 아무리 건강을 자부해도 20~40대처럼 에너지가 타오르지 않는다”며 “항상 건강에 유념하면서 업무량과 운동량을 조절하고, 섭생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퇴 전에 餘生 계획서를 작성해야
노후에 어떤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막연하다. 주 회장은 “여생 계획서를 작성해 은퇴 후 활동에 대해 상세히 기록할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냐’는 질문부터 시작해 ‘남은 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쓰고 지우는 작업을 2~3개월 동안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그쪽으로 가면 무엇이 있을까 ▲나는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나 ▲나는 진정 이 길을 갈 준비가 돼 있나 등의 질문을 자신에게 계속 던져야 한다. 주 회장은 “사람들이 자기검열을 통해 ‘이 나이에 뭘…’이라며 망설이는데 젊어서 못하고 미뤘던 일을 골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그는 “이전 세대도 마찬가지지만 베이비붐 세대도 ‘배우지 못한 한(恨)’이 크다”며 공부를 강조했다.
‘사회조사를 통해 본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 중 자신이 원하는 단계까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64.2%로 나타났다. 이 중 80%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배우지 못했다고 밝혔다.
“퇴직과 함께 찾아온 소중한 ‘권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매일 수천 가지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인생 2막에 대해서는 수동적으로 떠밀려 가는 겁니까. ‘생(生)의 선택’(Life Choice)은 오로지 본인의 몫입니다. 맥도널드 햄버거 체인을 만든 레이 크록은 55세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을 설립한 커널 샌더스는 65세에 창업했고요. 나이가 변화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은퇴자가 가진 것은 시간이므로 과감히 도전하십시오. 배우고 싶다면 방송통신대, 사이버대 등에 등록하고 공부하십시오. 더 용기를 내서 직접 캠퍼스를 누비는 대학생이 되는 것도 좋습니다.”
한편 주명룡 회장은 “은퇴문제에서 개인의 노력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기업 및 전 사회적 관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정부는 고령자 취업 환경 조성, 노후소득 보장, 평생학습 기반 확충을 해야 한다. 기업은 잡셰어링, 정년 연장 등을 도입하고 은퇴교육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주 회장은 “은퇴교육은 ‘제2의 인생’에서 초등교육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며 “최소한 정년 5년 전부터 고용주가 의무적으로 퇴직자 전원에게 전직 훈련을 제공하고, 비용 일부를 정부가 보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 회장은 “지난 10년 동안 이런 내용을 주장했지만, 정ㆍ관ㆍ재계에서 제대로 된 정책이나 변화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며 “KARP의 힘이 아직 미약하기 때문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美은퇴자, 유권자의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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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갑을 넘긴 나이에 남서울대에 재학 중인 조경희씨. 주명룡 회장은 “젊어서 못했던 일을 하라”고 권한다. |
정관(定款)과 회비(會費) 없이 시작한 AARP의 미국 내 규모와 영향력은 다른 어떤 단체보다 우월하다. 현재 평균연령 65세의 은퇴자 4000만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이는 미국 전체 유권자의 20%를 차지하는 규모다. 회원의 연령대는 50~105세로 평균 65세이고, 연평균 신규 회원은 150만명이다. 지역지부 2200개에, 연(年) 예산 규모 1조원을 자랑한다. 예산은 ▲회비 ▲상표사용료 ▲정부프로젝트 등으로 자금원이 고르게 분포돼 있다.
AARP는 전체 회원 중 28%가 연회비(2007년 기준 12.5달러)를 납부하고, AARP 소유 매체(TV, 라디오, 신문, 잡지)에서 광고 수입을 올린다. 특히 이들이 발행하는 격월간지 《AARP Magazine》은 발행부수 2343만5000부로 ‘세계 최대’를 자랑한다. AARP가 은퇴자들의 권익을 위한 단체인 만큼, 주로 노령 은퇴자들을 위한 내용을 담아 무료배포한다. 주명룡 회장에 따르면 2000년 당시 이 잡지 한 면에 광고하기 위해서는 12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또 기업들의 상품을 소개하고 수수료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오가는 돈의 흐름은 해마다 공표해 투명한 재무관리를 꾀하고 있다.
“워싱턴에서 두 번째로 힘이 센 사람은 AARP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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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대 잡지인 ‘AARP Magazine’은 노령 은퇴자들을 위한 내용을 담아 격월로 회원에게 무료배포한다. |
그 때문에 미국 대선후보들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 AARP다. 그들은 자청해서 ‘은퇴자 관련 정책’ 설명회를 갖고 AARP의 검증을 받는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건강보험법을 개정한 것도 “건강보험 혜택을 확대하라”는 AARP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국 의회에는 150여 명의 AARP 로비스트가 상주(常駐)하면서 상ㆍ하 의원 500명을 담당한다. 이들은 의원과 보좌진에게 압력을 넣고, 회유하면서 ‘법 개정’을 요구한다. 대(對)의회 로비예산만 우리 돈으로 230억원이다.
주 회장은 “AARP는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보수단체라는 것이 미국 사회의 통념”이라면서도 “정관에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나 친밀감을 표시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AARP는 정당이 아닌, 회원들의 욕구나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지지한다”고 언급했다. 주 회장은 “2001년 AARP모임에 초청돼 댈러스에 갔을 때 3500만명째 회원에게 회원증을 주는 장면을 보고 감동했다”며 “당시 나도 서울에 가면 저런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33초당 1명씩 늘어나는 5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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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7월 의료보험개혁계획에 대해 AARP와 논의하기 위해 본부를 찾은 미 오바마 대통령. 회원 4000만명의 AARP는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자랑한다. |
KARP의 경우 주 회장이 귀국 당시 가져온 돈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다. 회원 16만명 중 연회비 3만원을 내는 회원이 1000명 미만이다. 주 회장은 “회원들의 후원이 절실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서 이렇게 토로했다.
“고령자 취업이 가능한 ‘연령차별금지법’, 역모기지론을 시행하게 했지만, 회원들은 혜택을 체감하지 못합니다. 실질적으로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는 게 없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에게 베풀거나 사회에 봉사한다는 생각도 별로 없고요. ‘섬김을 받지 않고 사회에 봉사하자’는 목표 아래 회원들이 참여하는 AARP처럼 되려면 멀었습니다.”
주 회장은 베이비붐 세대의 ‘대량은퇴’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는 “올해를 기준으로 은퇴연령인 50대가 33초에 1명씩 늘어나고 있다”며 “베이비붐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교육수준이 높고, 사회참여욕구가 강해 KARP의 새로운 활력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국무총리실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는 총 713만명 중 취업자 비율이 77.5%(553만명)다. 이 중 정규직 근로자는 193만명으로 향후 8년 동안 연평균 24만명이 퇴직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 인구 4800만명 중 만 50세 이상 연령층이 1423만명으로 30%를 차지하는 것도 주 회장이 기대를 거는 부분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표(票)’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다. 고령화로 인해 투표율이 높은 노년층 유권자 비중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른바 ‘그레이 파워(Grey Power)’의 시대가 도래하면, 향후 정국에서 ‘은퇴자 권익’이 주요 이슈로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은퇴자들 스스로 ‘정치세력화’를 꾀할 수도 있다.
노인의 정치세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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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희망노인권익연대의 서울시당 창당식 모습. 이 당은 ‘1000만 노장세대의 참여기회 보장’ 등을 내걸고 올해 양대 선거에 참여할 계획이다. |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정당이 2011년 10월에 생겼다. 새희망노인권익연대(대표위원 윤영오)는 창당취지문에서 “2012년 총선, 대선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경험과 경륜을 갖춘 노장세력들이 국민화합과 국가위기 극복을 위한 애국적인 국가중추세력을 결집해야 할 때가 왔다”며 “새로운 삶의 활력을 가지고 국가와 국민에게 마지막 봉사하는 마음으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참여하는 기회를 쟁취하는 운동에 동참하자”고 밝혔다. 현행 정당법상 중앙선관위로부터 정당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5개 이상의 시ㆍ도 당과 함께 관할구역 내 주소를 둔 1000명 이상의 당원을 갖춰야 한다. 새희망노인권익연대는 2011년 7월부터 서울시당 및 각 지역 도당 창당작업에 들어가 선관위로부터 ‘중앙당등록증’을 받았다. 새희망노인권익연대는 올해 양대 선거에서 “정년을 넘은 1000만 노장세대가 모든 분야에서 참여할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와,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법으로 보장하겠다”는 ‘노인권익 보호’ 공약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이 같은 시각에서 KARP가 벌인 ‘사회변화운동’도 ‘정치’와 연관성이 높다. KARP는 각 선거 과정에서 은퇴자들의 주장을 각 후보에게 전달하고 정책 반영을 요구했다. 대선후보들의 복지정책 담당자를 모두 불러 공약에 대한 토론회도 가졌다. 작년엔 정부의 고령사회 정책을 감시하는 ‘중장년권익선봉단’을 조직했다. KARP를 ‘정치세력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주 회장에 따르면 KARP 회원들의 행사 참여도나 협회에 대한 충성도는 다른 곳에 비해 높은 편이다. KARP의 회원 16만명 중 74%인 12만명이 서울에 거주하는데, 강남ㆍ서초 3만3000명(28%)을 비롯해 강동ㆍ송파 1만6800명(14%), 광진ㆍ성동 1만명(10%) 등으로 고르게 분포돼 있다. 전국에 지부도 21곳이나 있다. KARP가 정당으로 변화를 시도하거나, 다른 정당의 연대단체로서의 조건은 갖춘 셈이다.
“NGO 역할은 하지만 정당은 멀리할 것”
주 회장에 따르면 KARP는 새희망노인권익연대로부터 2차례 ‘러브콜’을 받은 상태이고, 다른 노인 단체에서도 주 회장에게 창당을 권유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게다가 주명룡 회장은 재미(在美) 당시 미주(美洲)한인식품협회장,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준(準) 정치인이다.
주명룡 회장은 “뉴욕한인회장 출신 중 정계(政界)로 진출한 사람이 있고, 지난 총선에도 뉴욕한인회장 출신 인사가 공천 신청을 했다가 탈락한 사례도 있어서 간혹 의사를 물어 오는 경우가 있다”면서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음은 주 회장의 말이다.
“제가 50대에는 뉴욕 중심가에서 대형 맥도널드 매장 4개를 운영했고, 뉴욕한인회장을 했습니다. 정치에 뜻이 있었다면 ‘돈’과 ‘자리’를 갖고 있던 그때 벌써 움직였을 겁니다. NGO는 정치와 가까워서는 안 됩니다. 정당에 대한 지지를 금하는 AARP의 방침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사실 저는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정책을 제안하고, 제도개혁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것도 일종의 정치 아닙니까. 올해 있을 총선과 대선에서 정당과 후보들의 장·노년층 대상 복지 공약을 면밀히 검증해 NGO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대한은퇴자협회를 장·노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주축(主軸)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시킬 계획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