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한 푼 못 받고 10년간 조선석유회사 관리인을 했다
⊙ 일본강점기 독학으로 화학공부… 6·25사변 후 불모지 울산에 정유공장 건설
⊙ 1953년 휴전협정 후 이승만 대통령이 석유사업 추진해 보라고 지시
⊙ 1966년 정유산업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2시간 동안 브리핑
⊙ 油公 이사에서 물러난 뒤 1970년대 전엔지니어링·신한기공·이수화학 설립
⊙ 1980년대 신군부 들어선 뒤 대우그룹으로 넘어가
⊙ 일본강점기 독학으로 화학공부… 6·25사변 후 불모지 울산에 정유공장 건설
⊙ 1953년 휴전협정 후 이승만 대통령이 석유사업 추진해 보라고 지시
⊙ 1966년 정유산업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2시간 동안 브리핑
⊙ 油公 이사에서 물러난 뒤 1970년대 전엔지니어링·신한기공·이수화학 설립
⊙ 1980년대 신군부 들어선 뒤 대우그룹으로 넘어가
이당(怡堂) 전민제(全民濟·90) 선생은 국내 엔지니어의 ‘할아버지’격인 인물이다. 6·25전란(戰亂)의 폐허 위에서 이승만(李承晩)·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설득해 허허벌판 울산에 정유공장을 지었고, 1970년대에는 엔지니어링 회사를 차려 현대나 대우·대림·삼환보다 앞서 해외 플랜트 건설 붐을 일으켰다.
그가 세운 전(全)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건설㈜은 회사라기보다 엔지니어 양성소였고, 직원들은 회사 동료라기보다 동창생에 가까웠다. ‘가혹한 상관’ 밑에서 배운 후배 엔지니어들은 현재 내로라하는 국내 제조업체의 고위직에 올라 있다.
화공학자이자 CEO인 그는 평생을 ‘일 중독’으로 살았다. 아내인 나영균(羅英均·83)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남편을 ‘곧이곧대로의 사람’, ‘일의 화신(化身)’이라 부른다. 취미란 것도 모르고 한창때, 1년 중 10개월을 중동의 모래바람과 아시아의 밀림 속에서 지냈다.
그의 서재엔 아직도 대한석유공사(大韓石油公社·현 SK그룹 지주회사)를 설립할 당시의 정부 회의록, 울산 정유공장 설계도와 각종 계약서, 북한의 흥남·함흥 산업단지의 공장 설계도 등 역사적 자료가 가득하다.
전민제씨는 “광복과 6·25전쟁, 피란, 환도, 파괴된 국토재건, 산업화, 근대화를 거치며 한 가지 집념으로 일생을 일한 결과가 정유공장이요, 울산공업단지요, 석유화학공업단지”라고 말한다. 누구나 열심히 일한다고 모두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고생은 했지만 행운아”였다.
과학공부가 민족운동이라 생각해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전민제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과학에 흥미가 있었다. 부모는 문과에 진학해 고등 문관시험에 합격하기를 원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오직 과학에만 관심이 쏠렸다”고 한다. 제일고보(경기중의 前身)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과학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어머니와 의견이 맞지 않아 옥신각신하는 바람에 원서접수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나마 동경 물리학교는 원서접수 시기가 늦어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고 만다. 물리학교 입학을 마뜩잖게 여기던 어머니가 “생활이 곤란하니 귀국해 취직자리나 구하라”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저는 왜정(倭政)관리가 되는 게 싫었고, 과학으로 이름을 올리는 일이 유일하게 가슴을 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법학을 공부하면 일본의 종노릇밖에 할 수 없지만, 과학공부를 하면 독립운동을 따로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동경 물리학교를 그만뒀지만 고집마저 꺾은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경성제대 화학과 일본인 교수의 조수가 된 것이다. 비록 정규수업을 받진 않았지만 어깨너머로 ‘그 좋은’ 화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아내인 나영균 명예교수의 말이다.
“남편은 경성제대 화학과 교수의 조수 노릇을 하며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요. 그 시절, 조수에게 맡긴 일이 많았다고 해요. 교수의 수업준비와 교재준비, 실험준비 및 실험과정을 직접 챙겼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어 교재를 복사해 학생들에게 나눠줘야 했는데, 요즘처럼 복사기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어서 일일이 독일어 교재를 골필(骨筆·먹지를 대고 복사할 때 쓰는 필기도구)로 옮겨 쓴 뒤 등사기로 밀었다고 해요. 그런 식으로 일주일에 책 한 권씩을 떼는 수업이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어요. 필사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데, 결국 일에 대해선 귀신이 되었다고 해요.”
전민제 선생은 1942년 독학으로 배운 화학과 화공학 지식을 바탕으로 여의도 뚝섬에 연구소를 개설했다. 연구소 이름이 거창했다. ‘종합과학연구소’는 스무 살 청년의 과학에 대한 꿈을 담은 곳이었다. 종합과학연구소는 광복 후 ‘종합과학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의 말이다.
“이름만 거창하지요. 처음은 미약했지만, 세계적인 종합과학연구소를 만들겠다는 바람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광복 후 국내에는 화학공업이 없다시피 하던 시절이었다. 또 공업에 사용할 수 있는 원료도, 화학제품에 대한 수요도 없었다. 서울시내 냉면집에서의 빙초산 수요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카바이드를 원료로 아세틸렌을 만들고, 그 아세틸렌에서 빙초산을 하루 1t 가량 생산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냉면집에서 빙초산을 사다가 물에 타서 식초로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수요가 하루 1t 정도였어요. 순도 99%의 빙초산을 1t씩 생산하면 그때까지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빙초산을 국내에 공급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빙초산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이 대남 전력공급을 중단해 졸지에 남한은 심각한 전력부족을 겪게 된 것이다. 빙초산 원료인 카바이드를 생산할 수 없어 연구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장 문을 닫은 상태에서 머리도 식힐 겸 공부나 계속하자는 생각이 들어” 1948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화공학 공부를 한다. 그가 석유화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광복 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접할 수 있게 된 외국문헌을 통해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됐지요. 2차대전의 패전국 독일에서는 아세틸렌 화학 분야가 연구의 중심이었지만, 승전국 미국은 석유화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향후 합성섬유, 합성고무, 합성수지 등을 생산하는 석유화학산업이 크게 일어설 것으로 예상했지요.”
戰亂의 흥남 공업단지에서 각종 공장설계도 가져와
6·25사변으로 어수선한 1950년 11월 중순, 육군 병기행정본부장 이종찬(李鍾贊) 준장의 주선으로 북한 흥남과 함흥 일대 산업시설을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 당시 북한의 공업수준은 남한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특히 흥남 공업지구는 일제시대 일본 군수물자의 40%를 생산할 정도로 산업이 발달했다. 또 흥남항은 북한 최대의 화학공업지구인 ‘함흥 공업지대’의 관문으로 함흥시에서 약 20km 거리에 있었다. 그는 “1945년 남북 분단 직후, 북한이 흥남 비료공장에서 남쪽으로 내려보내던 화학비료 공급을 끊어버리자, 남한의 토지는 각종 병해충으로 흉작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전민제 선생은 흥남 공업단지를 본다는 생각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폭격으로 대부분의 공장이 폐허로 변했지만 광복 직후 서울대 공대 학장으로 있던 이승기(李升基) 박사가 몇몇 제자를 이끌고 6·25 때 월북해 비닐 아세테이트, 비닐알코올 공장을 세웠을 정도로 석유화학산업이 발달해 있었다. 또 6·25 전만 해도 원산의 정유공장에서 7000배럴의 정유를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이 패망할 때, 북한이 일본 기술자를 붙잡아두고 화학공장을 다 짓고 귀국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한보다 월등히 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란으로 많은 시설이 파괴되긴 했어도 공장의 수도 많고, 봐야 할 시설도 많았습니다. 이승기 박사는 월북 후 알코올을 가수분해(加水分解·유기화합물이 물과 반응하여 분해되는 일)해 만든 실인 ‘비날론’이란 합성섬유를 발명한 후 이를 대량생산해 북한에 공급했어요. 이북 여성들이 인조섬유 한복을 입게 된 것도 비날론 덕분이지요.”
그는 각종 공장 설계도를 찾았다. 그리고 “파괴된 공장에 있던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대로 긁어모은 뒤 고스란히 남한으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승만, 美 밴 플리트 장군 통해 석유사업 타진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그는 북삼화학㈜의 상무이사직을 맡았다. 북삼화학은 카바이드를 만드는 국영기업이었다. 광복 전후 그가 카바이드로 빙초산을 만드는 공장을 세웠던 이력을 인정받아 취업한 것이다.
같은 시기, 그는 이승만 정부로부터 총기 제작기계를 사기 위해 일본에 다녀오라는 위촉을 받게 된다. 흥남과 함흥 일대 공업시설을 시찰할 당시 병기행정본부와 인연을 맺은 것이 계기였다. 일본에 자주 출장을 가며 석유화학산업에 확신을 갖게 됐다고 한다.
미국은 이미 1930년대에 석유화학제품인 나일론을 생산하고 있었고 1945년경에는 폴리에틸렌 생산기술을 개발한 상태였다. 일본은 1925년 무렵 정유시설을 갖췄으나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됐었다. 전후 재건 과정에서 석유화학산업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론적으로 석유화학산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에 구체적인 일본의 실상을 접할 수 있었다”며 “동경대 생산기술연구소의 다카하시 다케오(高橋武雄) 교수의 주선으로 많은 이를 만나고 석유화학산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응용화학과 교수로 있다가 종전 후 동경제대 교수가 된 인물이다.
전민제 선생의 머릿속에서 정유산업의 꿈이 구체적인 형체를 갖게 될 무렵,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金活蘭) 박사의 주선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6·25로 파괴된 경제를 살리는 길은 한국의 공업화뿐이며 공업화를 위해선 석유를 만드는 정유공업과 석유화학공업을 꼭 일으켜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이 대통령은 공업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셔서 제 얘기를 흥미롭게 들으시고 저를 ‘조선석유회사 관리인’으로 임명하셨지요. 그러나 전쟁 중인데다가 석유에 관한 한미 간 협정문제나 자금 관계 등 복잡한 현안 탓에 걸림돌이 많았어요.”
1953년 휴전협정 후 이 대통령은 그를 불러 석유사업을 추진해 보라고 지시했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석유사업의 전망에 관한 가능성을 타진한 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또 이 대통령은 “외국 정유회사들에 우리 계획을 알려야 하니 영문으로 계획안을 작성해 제출하라”는 지시를 그에게 내렸다.
그렇게 해서 전민제 선생은 <울산 정유공장 계획>과 <울산 정유공장에 대한 기초공정 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 “만약 울산에 정유공장이 세워지면 다른 나라에 정유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게 돼 연간 925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고, 여기다 파라핀 왁스, 바셀린, 아스팔트와 같은 정유 부산물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보고서에 담았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이 대통령은 이 보고서를 미국의 여러 정유회사에 보냈어요. 그분은 정유공장을 어떻게든 성사시키려는 의지가 강하셨습니다. 이 대통령의 편지를 받고 밴 플리트 장군이 ‘참여할 회사를 찾는 일을 돕겠다’고 제의할 정도였어요. 오늘날 정유산업의 기초는 이 대통령이 닦은 셈입니다.”
조선석유회사 관리인으로 10년간 무급으로 일해
1954년 그는 ‘조선석유회사 관리인’이 되어 1962년 10월 대한석유공사 설립과 이듬해 12월 울산 정유공장을 완공(첫 가동은 1964년 5월 7일)할 때까지 10년간을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조선석유회사 관리인 자리는 “월급 한 푼 안 나오고 사무실도 없이 책임만 중한 자리였다”고 한다.
―아니, 왜 무급이었나요?
“정부가 돈이 없었으니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시절, 고생 많이 했어요. 주머니에 돈이 없어 버스도 못 타고 먼 길을 걸어다니곤 했어요.”
―관리인인데 월급도 안 주던가요?
“대한석유공사가 출범할 때까지 그렇게 10년을 견뎠습니다. 이화여대 교수였던 아내의 월급으로 살았어요.”
곁에 있던 나 교수가 이렇게 거들었다.
“집념의 사나이니까 견뎠지 그걸 누가 해요? 안 하지… 보통사람 같으면 했겠어요? 남편은 가족의 생활이 어떤지, 끼니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하는 현실적 문제에 완전히 일탈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은 가족으로서 힘든 일이었어요. 제가 대학에 나가기는 했지만, 그 월급이란 것이 일가(一家)의 생활을 꾸려가기엔 너무나 약소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기안한 직후인 1961년 8월,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출석하라는 통지를 받는다. “정유산업에 대해 브리핑을 하라”는 것이었다. 전민제 선생은 지금까지의 경위를 사실대로 얘기하고 정유공장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또 “정유공장을 지을 경우 국영기업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민영으로 돌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다 이야기하고 나니 후련하기도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어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최고회의는 제 얘기를 헛되이 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이하 최고회의 의원들은 제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국영으로 정유산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지요. 저는 필요한 입법을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해 대한석유공사 설립에 깊숙이 참여하게 됐습니다.”
브리핑을 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유공장 건설을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상공부 장관 산하 ‘정유공장 건설위원회’다. 전민제 선생은 위원으로 참여했고 상공부 고석윤(高錫尹) 공업국장, 오원철(吳源哲) 화학과장도 위원회 멤버로 관여했다고 한다.
“위원회에서 한 일은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계약 체결, 국내 실태조사, 원유 구매자금 문제연구와 대책 강구, 한미석유협정에 의한 석유법 검토, 정유산업 운영에 대한 대비, 에너지 자원으로서 석유 및 기타 연료의 비교조정, 석유제품에 대한 세제검토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정유공장 건설위원회는 1962년 8월 대한석유공사로 전환한다. 초대 유공 사장은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이성호(李成浩)씨, 부사장은 역시 해군 장성 출신으로 해군공작창장을 역임한 장호근(張瑚根)씨였다. 그는 유공 이사로 부임했다.
“아무리 조사해도 울산만 한 데가 없더라”
그 무렵, 그에게 정유공장 후보지를 물색하고 입지여건을 결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울산, 부산, 여수, 인천, 군산 등 전국 7곳을 후보지로 선정하고 별도조사를 거쳐 울산을 최종 입지로 정했다.
“아무리 조사해도 울산만 한 데가 없더군요. 울산만은 수심이 깊어 대형 유조선이 정박하기에 유리했고, 일본강점기에 만들어놓은 정유공장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이 과정에서 로비를 받은 적은 없었나요?
“사람들이 저보고 꿈 같은 짓을 한다고 비웃던 시절이었습니다. 국회의원의 지시나 로비 같은 것도 없었고, 항구도시들 역시 유치운동을 할 만한 여력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현대식 대형 공장건설에 경험이 있는 국내 기능공이 거의 없었다. 1950년대 국내 공장이라야 벡텔(Bechtel)이 세운 2만5000kw 규모의 발전기 4기, 충주 비료와 나주 비료, 문경 시멘트공장이 전부였다. 기능공은 물론 용접공까지 모두 외국에서 데려다 썼다고 한다.
울산 정유공장 건설은 미국의 플로어(Flour Corp)라는 회사가 맡았다. 플로어사(社)는 이승만 대통령의 언질을 받은 밴 플리트 장군을 통해 정유공장건설 계획안을 제출했던 터였다.
“울산 정유공장은 1963년 3월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건설과정에서 플로어사와 많은 갈등을 빚었어요. 기술상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해결하고 조정하기 위해 거의 하루걸러 서울과 울산 사이를 왕래했어요. 새벽 비행기로 부산으로 내려가 트럭이나 지프로 털털거리는 비포장 길을 3시간 달려 울산에 가서 일을 본 후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했지요.”
그러나 정유공장 공사대금을 제때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급기야 경제기획원은 “외화사정 악화로 공사비를 지불할 수 없으니 이 사업을 외국 석유회사에 넘기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반대했다.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앞에서 이 문제를 두고 1시간가량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저는 경제기획원 제안에 반대했어요.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거치며 5년간의 준비와 2년간의 건설노력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차관을 교섭해 올 테니 외국석유회사에 정유공장을 넘기지 말라’고 주장했어요. 결국 유공의 책임하에 차관을 얻어다 공장건설을 계속 추진하되, 외국회사의 지분은 25%로 제한한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제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차관교섭에 나서 에쏘(Esso), 칼텍스, 셸, 모빌, 걸프오일 등 5개 정유회사를 상대로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걸프오일이 25%의 자본 참여를 약속했고 2000만 달러의 차관에도 동의했다.
“이 계약에 의하면, 유공은 경영권을 갖고 걸프는 3명의 임원과 1명의 감사를 파견하되 보수는 걸프에서 부담한다는 것이었어요. 또 차관 조건은 미국의 관행보다 저렴한 연 4.5%의 이자로 제공하고, 원유공급은 일본 이데미쓰(出光興産)가 사오는 값과 같은 가격으로 한다는 것이었죠. 이러한 계약조건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유리한 것이었어요.”
결국 1963년 12월 14일 울산 정유공장을 완공했고 이듬해 5월 7일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했다. 공장이 돌아가자마자 석유류 공급가격이 종전의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처음 생산규모는 하루 3만5000배럴. 당시 수요량은 1만3000배럴 정도여서 처음 6개월은 생산 초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수요는 얼마 안 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만 2년이 지나자 3만5000배럴로는 공급이 부족해 5만5000배럴로 확장했다. 또 1968년에는 시설량이 3배가 넘는 11만5000배럴에 달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유화학공업 브리핑
그는 1966년 포항제철 사장이던 박태준(朴泰俊)씨의 알선으로 청와대를 찾아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유화학공업과 산업 전반에 관해 브리핑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박태준은 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장으로 있을 때부터 정유산업에 대한 그의 포부를 귀기울여 들어주곤 했다.
“2시간 브리핑 동안 박 대통령은 시종 눈을 감고 앉아 있었어요.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모를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하자니 거북하고 불안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브리핑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제게 하나하나 따져가며 꼼꼼히 질문을 하는 것이었어요. 매우 진지하신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브리핑 내용을 조금도 안 놓치고 다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태준씨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
“박 회장은 포항에서 제철소를 짓고 있었고, 저는 울산에서 정유공장을 위해 뛰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정유공장을 짓는 데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고 박 대통령에게도 저를 소개해 주었지요.”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그 시절 아는 사이였다면서요?
나영균 교수가 말을 받았다.
“정 회장은 우리 집에 새벽 4시반쯤 문을 두드리곤 했어요. 남편은 저를 시켜 ‘집에 안 들어왔다’고 말하라고 했지만, 정 회장은 ‘밤새 집 앞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 하느냐’고 반문했지요.”
―집엔 왜 찾아왔나요?
“정유공장 건설문제로 찾아온 것이지요. 보통 때는 안 만나주니까… 오늘날 대성하신 분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중상모략으로 유공에서 물러나
전민제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이었던 김성곤(金成坤)씨는 정치자금으로 걸프오일 측으로부터 1966년 100만 달러, 70년 300만 달러 등 모두 4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걸프오일이 한국 정계에 뿌린 부적절한 금전거래는 결국 1975년 미국 의회에 보고돼 걸프오일 회장이 청문회에 출석하기에 이른다.
이 일로 걸프오일 회장은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걸프는 유공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바꿔버렸다. 걸프 측은 2500만 달러를 증자해 50%의 주주가 되는 동시에 직접 경영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와중에 어떤 인사가 박정희 대통령께 저를 중상모략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제가 걸프오일과 짜고 운영권을 걸프오일에 넘겨주었다는 것이었어요. 그의 중상모략은 매우 교묘했던 모양입니다. 박 대통령은 저를 유공을 팔아먹은 비열한으로 생각하고 저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지요.”
그를 구속하기 위한 절차로 감사원 감사가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중앙정보부 조사까지 이어졌으나 구속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계속 유공에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1970년 8월 유공을 그만두었다. 울산 석유화학단지 조성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다행히 대통령과 가까웠던 비서실장 김정렴(金正濂),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 내무부 장관 윤치영(尹致暎), 최고회의 재경위원장 출신의 이주일(李周一)씨 등이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었어요. 걸프오일을 등에 업고 자리를 탐한 것이 아니라고요. 김재규씨와의 인연은 그분이 호남비료 사장으로 있을 때 제가 고문으로 일하면서 약 2년 동안 함께 일하던 사이였고, 김정렴씨는 그분이 상공부 장관으로 계실 때 유공 설립을 위해 뛰어다니면서 자주 만나 알게 된 사이입니다. 두 분 모두 공사가 분명한 존경할 만한 분이었어요. 중상모략으로 인한 저에 대한 박 대통령의 오해는 그분들 덕분에 풀렸고 후일 대통령이 저를 다시 찾게 된 계기를 만들어주었지요.”
미련 없이 유공에서 물러난 그는 1971년 5월 ‘전(全)엔지니어링’이란 회사를 세웠다. 정유공장 건설에 참여한 노하우를 살려 여러 개의 기초 화학 공장을 설계하고 직접 건설에도 관여했다. 그가 유공을 떠난 뒤 걸프오일이 경영권을 행사하자, 많은 중견 엔지니어가 그의 회사로 모여들었다. 무(無)에서 시작하는 그를 따라온 것이었다.
“전엔지니어링은 회사라기보다 학교와도 같은 엔지니어 양성소였어요. 선배들이 후배 사원을 위해 화공설계, 배관설계, 장치설계를 가르쳤고, 일부 유공 엔지니어들도 퇴근 후에 찾아와 우리 직원들에게 공학이론과 배관설계에 대한 강의를 해주기도 했지요.”
당시 전엔지니어링이 손을 댄 분야는 석유, 석유화학, 비료, 화학약품, 플라스틱, 수지(樹脂), 공업용 가스, 각종 금속, 펄프와 종이 등 다양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에콰도르, 홍콩, 사우디, 쿠웨이트, 이란, 카타르 등지에 정유공장을 지었고 이란에 석유화학공장, UAE에 정유공장과 담수화 공장을 지었다.
1973년에는 아예 신한기공건설㈜을 설립, 해외공사를 전담하도록 했다. 해외 공장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건설회사였다고 한다.
“현대, 대림, 삼환 등이 동남아 시장에 진출해 고속도로와 주택을 건설할 때 신한기공은 정밀기술이 필요한 석유화학, 정유, 담수 플랜트 분야에 진출했어요. 또 대우건설이 해외건설에 참여한 것이 1980년대였으니 비교가 안 되지요. 제가 국내 다른 기업보다 빨리 중동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관계 일을 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비의 동생인 카말 아담 씨 등과 같은 유력 인사들과 안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 두 회사는 기술설계와 건설 양면으로 순조롭게 성장해 갔지요.”
신한기공은 해외 수주실적을 인정받아 1974년 3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아내인 나영균 교수의 회고다.
“남편이 경영하던 전엔지니어링이 한참 잘나갈 때는 신문에 최고 납세기업으로, 톱10에 들 정도였습니다. 삼성도 현대도 럭키(지금의 LG)도 대우도 효성도 다 제치고 남편 회사가 들어간 것입니다. 아무리 잘나가던 때라 해도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 ‘명예’는 곧이곧대로 에누리없이 수익을 신고하고 세금을 낸 결과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전민제 선생은 이화여대가 소유하고 있던 이수화학의 경영권도 갖게 됐다. 이수화학은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가 ‘이화 사위들의 모임’인 ‘이수회’의 이름에서 딴 학교재단 수익업체였다. 울산에 세워진 이수화학의 경성(硬性) 세제 원료공장은 주요 설계와 자재 구매를 제외하고 전엔지니어링과 신한이 공장 건설 시공 일체를 도맡아 1970년대 초에 완공했다. 생산규모는 연간 1만3000t이었다고 한다.
몰락과 재기
승승장구하던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 이수화학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출범 이후 주춤하게 된다. 게다가 그해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공사비 450만 달러를 받지 못해 큰 손실을 보았다. 이 와중에 신군부는 해외 건설 관련 법령을 개정, 공사실적이 1억5000만 달러 이하 업체는 원칙적으로 해외건설 면허를 취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해외건설업자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대기업들이 신군부에 접근, 이런 결정을 제안했던 것”이라고 했다.
당시 신한기공은 실적이 1억3500만 달러로 기준액에 1500만 달러가 부족했다. 결국 면허를 취소당하고 해외건설에 참여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1983년 10월, 그는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 이수화학을 대우그룹에 모두 넘기고 ‘두 손 털고’ 나왔다. 인수조건은 대우가 빚을 모두 떠안는 것이었다. 당시 3개 회사의 빚은 50억원 정도였다고 한다.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어떤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나요?
“아닙니다. 무슨 정치적이라거나 외부의 압력은 전혀 없었어요. 압력받을 만큼 부채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요. 상업은행에서 돈을 빌려 썼는데 우리 회사 경리담당자가 좀 무리한 거래를 한 것이 원인이었어요. 당시 미국 셰브런(Chevron)에서 이수화학을 2000만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해서 상업은행 측에다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바득바득 빚을 갚으라고 우겨서 그냥 줘버렸습니다. 이수화학을 팔았다면 부채 50억원을 갚고도 몇 곱절 남는 금액이지요. 상업은행이 결국 판단을 잘못한 것이죠.”
―상업은행에서 왜 그렇게 빚 독촉을 했을까요?
“시원찮은 놈들이니까… 엔지니어링 기업의 중요성을 모르고 은행이 고리대금업자 역할을 한 것이지요. 제가 빚을 많이 지게 된 것은 이란에서의 미수금 등으로 자금압박을 심하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대우 김우중(金宇中) 회장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그는 또다시 무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재기를 꿈꾸며 ‘전인터내셔널’이란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비록 무로 돌아왔지만, 앞으로도 세계를 상대로 일을 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흔의 나이가 되었지만, 요즘도 현역처럼 활동 중이다. 광화문에 있는 사무실에 아내와 함께 매일 출근하고 있고 대한화학회 회장, 한국재료학회 명예회장, 기술용역협회 회장, 과학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등의 직함으로 부지런히 학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강박적인 독서가’로 지금도 영국, 미국, 일본의 학술 정기간행물을 챙겨 읽는다. 청력이 떨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 한국의 산업화에 앞장선 엔지니어지만, 겉으론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는 눈치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이뤄진 일입니다. 대한석유공사가 출범하기까지 한국전쟁 후 10여 년간 전혀 화려하지 않은 그 시간이, 이후 정유공장이 들어서고 석유화학산업이 일어나던 때보다 훨씬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 직원들은 대우가 망한 뒤 각 방면에 진출해 엔지니어로 이름을 높였다고 한다. ‘가혹한 상관’이었던 그를 못 잊어 요즘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그 시절을 회고한다고 한다. 아내 나영균 교수의 말이다.
“사실 엔지니어링보다 스케일이 더 큰 ‘인터내셔널’이란 이름을 이 조그만 컨설팅 회사에 굳이 붙인 남편의 고집은 쓴웃음을 자아낼 만하지요. 하지만 그 큰 좌절에도 석유공사를 비롯한 여러 기업체를 인생의 이정표로 보아 넘길 수 있는 그는,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요.”⊙
그가 세운 전(全)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건설㈜은 회사라기보다 엔지니어 양성소였고, 직원들은 회사 동료라기보다 동창생에 가까웠다. ‘가혹한 상관’ 밑에서 배운 후배 엔지니어들은 현재 내로라하는 국내 제조업체의 고위직에 올라 있다.
화공학자이자 CEO인 그는 평생을 ‘일 중독’으로 살았다. 아내인 나영균(羅英均·83)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남편을 ‘곧이곧대로의 사람’, ‘일의 화신(化身)’이라 부른다. 취미란 것도 모르고 한창때, 1년 중 10개월을 중동의 모래바람과 아시아의 밀림 속에서 지냈다.
그의 서재엔 아직도 대한석유공사(大韓石油公社·현 SK그룹 지주회사)를 설립할 당시의 정부 회의록, 울산 정유공장 설계도와 각종 계약서, 북한의 흥남·함흥 산업단지의 공장 설계도 등 역사적 자료가 가득하다.
전민제씨는 “광복과 6·25전쟁, 피란, 환도, 파괴된 국토재건, 산업화, 근대화를 거치며 한 가지 집념으로 일생을 일한 결과가 정유공장이요, 울산공업단지요, 석유화학공업단지”라고 말한다. 누구나 열심히 일한다고 모두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고생은 했지만 행운아”였다.
과학공부가 민족운동이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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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민제 선생과 부인 나영균 교수. |
“저는 왜정(倭政)관리가 되는 게 싫었고, 과학으로 이름을 올리는 일이 유일하게 가슴을 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법학을 공부하면 일본의 종노릇밖에 할 수 없지만, 과학공부를 하면 독립운동을 따로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동경 물리학교를 그만뒀지만 고집마저 꺾은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경성제대 화학과 일본인 교수의 조수가 된 것이다. 비록 정규수업을 받진 않았지만 어깨너머로 ‘그 좋은’ 화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아내인 나영균 명예교수의 말이다.
“남편은 경성제대 화학과 교수의 조수 노릇을 하며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요. 그 시절, 조수에게 맡긴 일이 많았다고 해요. 교수의 수업준비와 교재준비, 실험준비 및 실험과정을 직접 챙겼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어 교재를 복사해 학생들에게 나눠줘야 했는데, 요즘처럼 복사기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어서 일일이 독일어 교재를 골필(骨筆·먹지를 대고 복사할 때 쓰는 필기도구)로 옮겨 쓴 뒤 등사기로 밀었다고 해요. 그런 식으로 일주일에 책 한 권씩을 떼는 수업이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어요. 필사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데, 결국 일에 대해선 귀신이 되었다고 해요.”
전민제 선생은 1942년 독학으로 배운 화학과 화공학 지식을 바탕으로 여의도 뚝섬에 연구소를 개설했다. 연구소 이름이 거창했다. ‘종합과학연구소’는 스무 살 청년의 과학에 대한 꿈을 담은 곳이었다. 종합과학연구소는 광복 후 ‘종합과학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의 말이다.
“이름만 거창하지요. 처음은 미약했지만, 세계적인 종합과학연구소를 만들겠다는 바람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광복 후 국내에는 화학공업이 없다시피 하던 시절이었다. 또 공업에 사용할 수 있는 원료도, 화학제품에 대한 수요도 없었다. 서울시내 냉면집에서의 빙초산 수요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카바이드를 원료로 아세틸렌을 만들고, 그 아세틸렌에서 빙초산을 하루 1t 가량 생산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냉면집에서 빙초산을 사다가 물에 타서 식초로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수요가 하루 1t 정도였어요. 순도 99%의 빙초산을 1t씩 생산하면 그때까지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빙초산을 국내에 공급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빙초산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이 대남 전력공급을 중단해 졸지에 남한은 심각한 전력부족을 겪게 된 것이다. 빙초산 원료인 카바이드를 생산할 수 없어 연구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장 문을 닫은 상태에서 머리도 식힐 겸 공부나 계속하자는 생각이 들어” 1948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화공학 공부를 한다. 그가 석유화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광복 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접할 수 있게 된 외국문헌을 통해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됐지요. 2차대전의 패전국 독일에서는 아세틸렌 화학 분야가 연구의 중심이었지만, 승전국 미국은 석유화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향후 합성섬유, 합성고무, 합성수지 등을 생산하는 석유화학산업이 크게 일어설 것으로 예상했지요.”
戰亂의 흥남 공업단지에서 각종 공장설계도 가져와
6·25사변으로 어수선한 1950년 11월 중순, 육군 병기행정본부장 이종찬(李鍾贊) 준장의 주선으로 북한 흥남과 함흥 일대 산업시설을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 당시 북한의 공업수준은 남한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특히 흥남 공업지구는 일제시대 일본 군수물자의 40%를 생산할 정도로 산업이 발달했다. 또 흥남항은 북한 최대의 화학공업지구인 ‘함흥 공업지대’의 관문으로 함흥시에서 약 20km 거리에 있었다. 그는 “1945년 남북 분단 직후, 북한이 흥남 비료공장에서 남쪽으로 내려보내던 화학비료 공급을 끊어버리자, 남한의 토지는 각종 병해충으로 흉작을 겪었다”고 회고했다.
전민제 선생은 흥남 공업단지를 본다는 생각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폭격으로 대부분의 공장이 폐허로 변했지만 광복 직후 서울대 공대 학장으로 있던 이승기(李升基) 박사가 몇몇 제자를 이끌고 6·25 때 월북해 비닐 아세테이트, 비닐알코올 공장을 세웠을 정도로 석유화학산업이 발달해 있었다. 또 6·25 전만 해도 원산의 정유공장에서 7000배럴의 정유를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이 패망할 때, 북한이 일본 기술자를 붙잡아두고 화학공장을 다 짓고 귀국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한보다 월등히 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란으로 많은 시설이 파괴되긴 했어도 공장의 수도 많고, 봐야 할 시설도 많았습니다. 이승기 박사는 월북 후 알코올을 가수분해(加水分解·유기화합물이 물과 반응하여 분해되는 일)해 만든 실인 ‘비날론’이란 합성섬유를 발명한 후 이를 대량생산해 북한에 공급했어요. 이북 여성들이 인조섬유 한복을 입게 된 것도 비날론 덕분이지요.”
그는 각종 공장 설계도를 찾았다. 그리고 “파괴된 공장에 있던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대로 긁어모은 뒤 고스란히 남한으로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승만, 美 밴 플리트 장군 통해 석유사업 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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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공을 나온 뒤 설립한 전엔지니어링 사장 시절의 전민제 선생. |
같은 시기, 그는 이승만 정부로부터 총기 제작기계를 사기 위해 일본에 다녀오라는 위촉을 받게 된다. 흥남과 함흥 일대 공업시설을 시찰할 당시 병기행정본부와 인연을 맺은 것이 계기였다. 일본에 자주 출장을 가며 석유화학산업에 확신을 갖게 됐다고 한다.
미국은 이미 1930년대에 석유화학제품인 나일론을 생산하고 있었고 1945년경에는 폴리에틸렌 생산기술을 개발한 상태였다. 일본은 1925년 무렵 정유시설을 갖췄으나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됐었다. 전후 재건 과정에서 석유화학산업이 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론적으로 석유화학산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에 구체적인 일본의 실상을 접할 수 있었다”며 “동경대 생산기술연구소의 다카하시 다케오(高橋武雄) 교수의 주선으로 많은 이를 만나고 석유화학산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다카하시 교수는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응용화학과 교수로 있다가 종전 후 동경제대 교수가 된 인물이다.
전민제 선생의 머릿속에서 정유산업의 꿈이 구체적인 형체를 갖게 될 무렵,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金活蘭) 박사의 주선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6·25로 파괴된 경제를 살리는 길은 한국의 공업화뿐이며 공업화를 위해선 석유를 만드는 정유공업과 석유화학공업을 꼭 일으켜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이 대통령은 공업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셔서 제 얘기를 흥미롭게 들으시고 저를 ‘조선석유회사 관리인’으로 임명하셨지요. 그러나 전쟁 중인데다가 석유에 관한 한미 간 협정문제나 자금 관계 등 복잡한 현안 탓에 걸림돌이 많았어요.”
1953년 휴전협정 후 이 대통령은 그를 불러 석유사업을 추진해 보라고 지시했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석유사업의 전망에 관한 가능성을 타진한 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또 이 대통령은 “외국 정유회사들에 우리 계획을 알려야 하니 영문으로 계획안을 작성해 제출하라”는 지시를 그에게 내렸다.
그렇게 해서 전민제 선생은 <울산 정유공장 계획>과 <울산 정유공장에 대한 기초공정 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 “만약 울산에 정유공장이 세워지면 다른 나라에 정유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게 돼 연간 925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고, 여기다 파라핀 왁스, 바셀린, 아스팔트와 같은 정유 부산물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보고서에 담았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이 대통령은 이 보고서를 미국의 여러 정유회사에 보냈어요. 그분은 정유공장을 어떻게든 성사시키려는 의지가 강하셨습니다. 이 대통령의 편지를 받고 밴 플리트 장군이 ‘참여할 회사를 찾는 일을 돕겠다’고 제의할 정도였어요. 오늘날 정유산업의 기초는 이 대통령이 닦은 셈입니다.”
조선석유회사 관리인으로 10년간 무급으로 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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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민제 선생은 서울대 공과대학이 개교 60주년을 맞아 한국공학한림원(원장 윤종용)과 함께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포함됐다. 사진은 2006년 12월 시상식에서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두 번째)과 함께한 전민제 선생. |
―아니, 왜 무급이었나요?
“정부가 돈이 없었으니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시절, 고생 많이 했어요. 주머니에 돈이 없어 버스도 못 타고 먼 길을 걸어다니곤 했어요.”
―관리인인데 월급도 안 주던가요?
“대한석유공사가 출범할 때까지 그렇게 10년을 견뎠습니다. 이화여대 교수였던 아내의 월급으로 살았어요.”
곁에 있던 나 교수가 이렇게 거들었다.
“집념의 사나이니까 견뎠지 그걸 누가 해요? 안 하지… 보통사람 같으면 했겠어요? 남편은 가족의 생활이 어떤지, 끼니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하는 현실적 문제에 완전히 일탈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은 가족으로서 힘든 일이었어요. 제가 대학에 나가기는 했지만, 그 월급이란 것이 일가(一家)의 생활을 꾸려가기엔 너무나 약소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기안한 직후인 1961년 8월,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출석하라는 통지를 받는다. “정유산업에 대해 브리핑을 하라”는 것이었다. 전민제 선생은 지금까지의 경위를 사실대로 얘기하고 정유공장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또 “정유공장을 지을 경우 국영기업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민영으로 돌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다 이야기하고 나니 후련하기도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어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최고회의는 제 얘기를 헛되이 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이하 최고회의 의원들은 제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국영으로 정유산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지요. 저는 필요한 입법을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해 대한석유공사 설립에 깊숙이 참여하게 됐습니다.”
브리핑을 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유공장 건설을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상공부 장관 산하 ‘정유공장 건설위원회’다. 전민제 선생은 위원으로 참여했고 상공부 고석윤(高錫尹) 공업국장, 오원철(吳源哲) 화학과장도 위원회 멤버로 관여했다고 한다.
“위원회에서 한 일은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계약 체결, 국내 실태조사, 원유 구매자금 문제연구와 대책 강구, 한미석유협정에 의한 석유법 검토, 정유산업 운영에 대한 대비, 에너지 자원으로서 석유 및 기타 연료의 비교조정, 석유제품에 대한 세제검토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정유공장 건설위원회는 1962년 8월 대한석유공사로 전환한다. 초대 유공 사장은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이성호(李成浩)씨, 부사장은 역시 해군 장성 출신으로 해군공작창장을 역임한 장호근(張瑚根)씨였다. 그는 유공 이사로 부임했다.
“아무리 조사해도 울산만 한 데가 없더라”
그 무렵, 그에게 정유공장 후보지를 물색하고 입지여건을 결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울산, 부산, 여수, 인천, 군산 등 전국 7곳을 후보지로 선정하고 별도조사를 거쳐 울산을 최종 입지로 정했다.
“아무리 조사해도 울산만 한 데가 없더군요. 울산만은 수심이 깊어 대형 유조선이 정박하기에 유리했고, 일본강점기에 만들어놓은 정유공장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이 과정에서 로비를 받은 적은 없었나요?
“사람들이 저보고 꿈 같은 짓을 한다고 비웃던 시절이었습니다. 국회의원의 지시나 로비 같은 것도 없었고, 항구도시들 역시 유치운동을 할 만한 여력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현대식 대형 공장건설에 경험이 있는 국내 기능공이 거의 없었다. 1950년대 국내 공장이라야 벡텔(Bechtel)이 세운 2만5000kw 규모의 발전기 4기, 충주 비료와 나주 비료, 문경 시멘트공장이 전부였다. 기능공은 물론 용접공까지 모두 외국에서 데려다 썼다고 한다.
울산 정유공장 건설은 미국의 플로어(Flour Corp)라는 회사가 맡았다. 플로어사(社)는 이승만 대통령의 언질을 받은 밴 플리트 장군을 통해 정유공장건설 계획안을 제출했던 터였다.
“울산 정유공장은 1963년 3월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건설과정에서 플로어사와 많은 갈등을 빚었어요. 기술상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해결하고 조정하기 위해 거의 하루걸러 서울과 울산 사이를 왕래했어요. 새벽 비행기로 부산으로 내려가 트럭이나 지프로 털털거리는 비포장 길을 3시간 달려 울산에 가서 일을 본 후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했지요.”
그러나 정유공장 공사대금을 제때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급기야 경제기획원은 “외화사정 악화로 공사비를 지불할 수 없으니 이 사업을 외국 석유회사에 넘기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반대했다.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앞에서 이 문제를 두고 1시간가량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저는 경제기획원 제안에 반대했어요.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거치며 5년간의 준비와 2년간의 건설노력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차관을 교섭해 올 테니 외국석유회사에 정유공장을 넘기지 말라’고 주장했어요. 결국 유공의 책임하에 차관을 얻어다 공장건설을 계속 추진하되, 외국회사의 지분은 25%로 제한한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제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차관교섭에 나서 에쏘(Esso), 칼텍스, 셸, 모빌, 걸프오일 등 5개 정유회사를 상대로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걸프오일이 25%의 자본 참여를 약속했고 2000만 달러의 차관에도 동의했다.
“이 계약에 의하면, 유공은 경영권을 갖고 걸프는 3명의 임원과 1명의 감사를 파견하되 보수는 걸프에서 부담한다는 것이었어요. 또 차관 조건은 미국의 관행보다 저렴한 연 4.5%의 이자로 제공하고, 원유공급은 일본 이데미쓰(出光興産)가 사오는 값과 같은 가격으로 한다는 것이었죠. 이러한 계약조건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유리한 것이었어요.”
결국 1963년 12월 14일 울산 정유공장을 완공했고 이듬해 5월 7일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했다. 공장이 돌아가자마자 석유류 공급가격이 종전의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처음 생산규모는 하루 3만5000배럴. 당시 수요량은 1만3000배럴 정도여서 처음 6개월은 생산 초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수요는 얼마 안 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만 2년이 지나자 3만5000배럴로는 공급이 부족해 5만5000배럴로 확장했다. 또 1968년에는 시설량이 3배가 넘는 11만5000배럴에 달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유화학공업 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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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5월 7일 대한석유공사 울산 정유공장 준공식을 마친 뒤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과 전민제 선생(오른쪽 세 번째)이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
“2시간 브리핑 동안 박 대통령은 시종 눈을 감고 앉아 있었어요.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모를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하자니 거북하고 불안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브리핑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제게 하나하나 따져가며 꼼꼼히 질문을 하는 것이었어요. 매우 진지하신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브리핑 내용을 조금도 안 놓치고 다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태준씨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
“박 회장은 포항에서 제철소를 짓고 있었고, 저는 울산에서 정유공장을 위해 뛰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정유공장을 짓는 데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고 박 대통령에게도 저를 소개해 주었지요.”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그 시절 아는 사이였다면서요?
나영균 교수가 말을 받았다.
“정 회장은 우리 집에 새벽 4시반쯤 문을 두드리곤 했어요. 남편은 저를 시켜 ‘집에 안 들어왔다’고 말하라고 했지만, 정 회장은 ‘밤새 집 앞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 하느냐’고 반문했지요.”
―집엔 왜 찾아왔나요?
“정유공장 건설문제로 찾아온 것이지요. 보통 때는 안 만나주니까… 오늘날 대성하신 분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중상모략으로 유공에서 물러나
전민제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이었던 김성곤(金成坤)씨는 정치자금으로 걸프오일 측으로부터 1966년 100만 달러, 70년 300만 달러 등 모두 4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걸프오일이 한국 정계에 뿌린 부적절한 금전거래는 결국 1975년 미국 의회에 보고돼 걸프오일 회장이 청문회에 출석하기에 이른다.
이 일로 걸프오일 회장은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걸프는 유공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바꿔버렸다. 걸프 측은 2500만 달러를 증자해 50%의 주주가 되는 동시에 직접 경영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와중에 어떤 인사가 박정희 대통령께 저를 중상모략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제가 걸프오일과 짜고 운영권을 걸프오일에 넘겨주었다는 것이었어요. 그의 중상모략은 매우 교묘했던 모양입니다. 박 대통령은 저를 유공을 팔아먹은 비열한으로 생각하고 저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지요.”
그를 구속하기 위한 절차로 감사원 감사가 나올 정도였다. 심지어 중앙정보부 조사까지 이어졌으나 구속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계속 유공에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1970년 8월 유공을 그만두었다. 울산 석유화학단지 조성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다행히 대통령과 가까웠던 비서실장 김정렴(金正濂),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 내무부 장관 윤치영(尹致暎), 최고회의 재경위원장 출신의 이주일(李周一)씨 등이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었어요. 걸프오일을 등에 업고 자리를 탐한 것이 아니라고요. 김재규씨와의 인연은 그분이 호남비료 사장으로 있을 때 제가 고문으로 일하면서 약 2년 동안 함께 일하던 사이였고, 김정렴씨는 그분이 상공부 장관으로 계실 때 유공 설립을 위해 뛰어다니면서 자주 만나 알게 된 사이입니다. 두 분 모두 공사가 분명한 존경할 만한 분이었어요. 중상모략으로 인한 저에 대한 박 대통령의 오해는 그분들 덕분에 풀렸고 후일 대통령이 저를 다시 찾게 된 계기를 만들어주었지요.”
미련 없이 유공에서 물러난 그는 1971년 5월 ‘전(全)엔지니어링’이란 회사를 세웠다. 정유공장 건설에 참여한 노하우를 살려 여러 개의 기초 화학 공장을 설계하고 직접 건설에도 관여했다. 그가 유공을 떠난 뒤 걸프오일이 경영권을 행사하자, 많은 중견 엔지니어가 그의 회사로 모여들었다. 무(無)에서 시작하는 그를 따라온 것이었다.
“전엔지니어링은 회사라기보다 학교와도 같은 엔지니어 양성소였어요. 선배들이 후배 사원을 위해 화공설계, 배관설계, 장치설계를 가르쳤고, 일부 유공 엔지니어들도 퇴근 후에 찾아와 우리 직원들에게 공학이론과 배관설계에 대한 강의를 해주기도 했지요.”
당시 전엔지니어링이 손을 댄 분야는 석유, 석유화학, 비료, 화학약품, 플라스틱, 수지(樹脂), 공업용 가스, 각종 금속, 펄프와 종이 등 다양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에콰도르, 홍콩, 사우디, 쿠웨이트, 이란, 카타르 등지에 정유공장을 지었고 이란에 석유화학공장, UAE에 정유공장과 담수화 공장을 지었다.
1973년에는 아예 신한기공건설㈜을 설립, 해외공사를 전담하도록 했다. 해외 공장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건설회사였다고 한다.
“현대, 대림, 삼환 등이 동남아 시장에 진출해 고속도로와 주택을 건설할 때 신한기공은 정밀기술이 필요한 석유화학, 정유, 담수 플랜트 분야에 진출했어요. 또 대우건설이 해외건설에 참여한 것이 1980년대였으니 비교가 안 되지요. 제가 국내 다른 기업보다 빨리 중동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관계 일을 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비의 동생인 카말 아담 씨 등과 같은 유력 인사들과 안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 두 회사는 기술설계와 건설 양면으로 순조롭게 성장해 갔지요.”
신한기공은 해외 수주실적을 인정받아 1974년 3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아내인 나영균 교수의 회고다.
“남편이 경영하던 전엔지니어링이 한참 잘나갈 때는 신문에 최고 납세기업으로, 톱10에 들 정도였습니다. 삼성도 현대도 럭키(지금의 LG)도 대우도 효성도 다 제치고 남편 회사가 들어간 것입니다. 아무리 잘나가던 때라 해도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 ‘명예’는 곧이곧대로 에누리없이 수익을 신고하고 세금을 낸 결과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전민제 선생은 이화여대가 소유하고 있던 이수화학의 경영권도 갖게 됐다. 이수화학은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가 ‘이화 사위들의 모임’인 ‘이수회’의 이름에서 딴 학교재단 수익업체였다. 울산에 세워진 이수화학의 경성(硬性) 세제 원료공장은 주요 설계와 자재 구매를 제외하고 전엔지니어링과 신한이 공장 건설 시공 일체를 도맡아 1970년대 초에 완공했다. 생산규모는 연간 1만3000t이었다고 한다.
몰락과 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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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싱가포르 정유공장을 견학 중인 전민제 선생(왼쪽 세 번째). 한국의 산업화를 위해서는 석유화학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
당시 신한기공은 실적이 1억3500만 달러로 기준액에 1500만 달러가 부족했다. 결국 면허를 취소당하고 해외건설에 참여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1983년 10월, 그는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 이수화학을 대우그룹에 모두 넘기고 ‘두 손 털고’ 나왔다. 인수조건은 대우가 빚을 모두 떠안는 것이었다. 당시 3개 회사의 빚은 50억원 정도였다고 한다.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어떤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나요?
“아닙니다. 무슨 정치적이라거나 외부의 압력은 전혀 없었어요. 압력받을 만큼 부채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요. 상업은행에서 돈을 빌려 썼는데 우리 회사 경리담당자가 좀 무리한 거래를 한 것이 원인이었어요. 당시 미국 셰브런(Chevron)에서 이수화학을 2000만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해서 상업은행 측에다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바득바득 빚을 갚으라고 우겨서 그냥 줘버렸습니다. 이수화학을 팔았다면 부채 50억원을 갚고도 몇 곱절 남는 금액이지요. 상업은행이 결국 판단을 잘못한 것이죠.”
―상업은행에서 왜 그렇게 빚 독촉을 했을까요?
“시원찮은 놈들이니까… 엔지니어링 기업의 중요성을 모르고 은행이 고리대금업자 역할을 한 것이지요. 제가 빚을 많이 지게 된 것은 이란에서의 미수금 등으로 자금압박을 심하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대우 김우중(金宇中) 회장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그는 또다시 무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재기를 꿈꾸며 ‘전인터내셔널’이란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비록 무로 돌아왔지만, 앞으로도 세계를 상대로 일을 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흔의 나이가 되었지만, 요즘도 현역처럼 활동 중이다. 광화문에 있는 사무실에 아내와 함께 매일 출근하고 있고 대한화학회 회장, 한국재료학회 명예회장, 기술용역협회 회장, 과학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등의 직함으로 부지런히 학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강박적인 독서가’로 지금도 영국, 미국, 일본의 학술 정기간행물을 챙겨 읽는다. 청력이 떨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 한국의 산업화에 앞장선 엔지니어지만, 겉으론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는 눈치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이뤄진 일입니다. 대한석유공사가 출범하기까지 한국전쟁 후 10여 년간 전혀 화려하지 않은 그 시간이, 이후 정유공장이 들어서고 석유화학산업이 일어나던 때보다 훨씬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 직원들은 대우가 망한 뒤 각 방면에 진출해 엔지니어로 이름을 높였다고 한다. ‘가혹한 상관’이었던 그를 못 잊어 요즘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그 시절을 회고한다고 한다. 아내 나영균 교수의 말이다.
“사실 엔지니어링보다 스케일이 더 큰 ‘인터내셔널’이란 이름을 이 조그만 컨설팅 회사에 굳이 붙인 남편의 고집은 쓴웃음을 자아낼 만하지요. 하지만 그 큰 좌절에도 석유공사를 비롯한 여러 기업체를 인생의 이정표로 보아 넘길 수 있는 그는,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