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필로 민족 자긍심을 이끌었던 잡지언론의 선구자
⊙ “왜놈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 땅과 집을 팔아서까지 《개벽》을 이끌며 일제에 대항해
⊙ “왜놈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 땅과 집을 팔아서까지 《개벽》을 이끌며 일제에 대항해
“(돌아가신 지)66년 만에 훈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차웅렬(車雄烈·87)씨의 말이다. 그는 1920년 민족지 《개벽》을 창간한 고(故) 차상찬(車相瓚·1887~1946) 선생의 막내아들이다. 정부는 지난 2010년 11월 1일 ‘제45회 잡지의 날 기념식’에서 언론인 차상찬 선생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追敍)했다.
3월 2일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만난 차웅렬씨는 기자에게 묵직한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그의 부친에 대한 자료가 가득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리기 위해 한 노력의 무게만큼 서류봉투는 무거웠다.
그는 “《개벽》 《별건곤》 《학생》 등 여러 잡지를 통해 민족문화 발전과 독립운동에 힘쓴 선친이 아직 국가유공자에도 오르지 못한 채 잊혀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차상찬 선생은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기간을 대표하는 전문 잡지인이다. 그의 글은 모두 민족과 독립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언론인으로서 펜을 들고 일제에 맞선 우국지사였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그를 독립운동가로 기억해 주지 않는다.
1926년 8월. 일본인 형사들이 개벽사(開闢社)로 들이닥쳤다. 일본 경찰은 인쇄된 잡지를 모두 수거해 수레에 싣고 종로경찰서 뒷마당으로 갔다. 그곳에서 작두로 잡지를 썰어서 폐지로 내다버렸다. 《개벽》지의 슬픈 종말이었다.
1926년 8월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된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에 창간해 통권 72호를 낸 당시까지 언론종합잡지였다. 일제 치하 35년간 발행된 잡지 중 가장 혹독한 탄압과 희생을 치른 잡지다. 6년간 발매금지 34회, 발행정지(정간) 1회, 벌금처분 1회, 기사 삭제 92회의 수난을 당했다.
“일제 치하에서 열악한 재정난, 혹독한 검열과 필자 난 등으로 창간호를 내고 폐간하는 잡지가 많았습니다.”
개벽 창간호를 호외로 발행
정진석 교수의 말이다. 반포에 마련된 정 교수의 연구실 책장에는 《개벽》 《어린이》 《조광》 등 손때 묻은 잡지 영인본(影印本)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정 교수는 기자에게 《개벽》을 보여주면서 “개벽은 천도교를 배경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다른 잡지에 비해 정신적·경제적으로 기초가 확고했다”고 했다. “하지만 혹독한 검열은 개벽도 피해 갈 수 없었죠”라고 정 교수는 《개벽》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벽》은 창간호부터 발매와 반포금지를 당했다고 한다. “창간호는 문제 된 부분을 삭제하고 세 번을 다시 찍고 나서야 ‘호외’로 발행할 수 있었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거의 매호를 압수당하던 《개벽》은 1925년 8월호에 정간을 당했다. 〈이역 풍상에 기체 안녕(氣體安寧)하신가〉라는 제목의 기사 때문이었다. 해외에 망명해 독립투쟁을 벌이는 독립운동가 12명(이동휘 서재필 유동열 이승만 김규식 노백린 이시영 안창호 이동녕 남만춘 박은식 신채호)을 특집으로 편집한 기사였다. 기사에서는 그들을 ‘국사(國士)’ 또는 ‘지사’라고 칭하며 높였다. 총독부는 《개벽》 8월호 광고가 실린 《동아일보》 8월 1일 자까지 압수 처분했다.
《개벽》의 정간은 10월에 해제됐다. 그러나 이듬해 1926년 8월, 총독부는 《개벽》 폐간 명령을 내렸다. 총독부의 누적된 불만과 6·10만세 운동 직후 《개벽》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문화정치를 표방한 이래 총독부가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한 잡지를 폐간한 것은 《개벽》이 두 번째였다. 최초로 폐간된 잡지는 1923년 1월에 발행정지된 《신생활》이었다.
신문학 등단무대
“당시 신문학을 대표했던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개벽을 통해 성장했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1922),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70호),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4~16호)도 모두 개벽을 통해 발표된 작품들입니다.”
실제로 당시 《개벽》은 지면의 3분의 1을 신문학에 할애했다. 김소월은 30여 편의 시를 《개벽》에 실었다. 이외에도 현진건, 최서해, 박영희 등 사회주의적 또는 동반자 작가적 성향을 지닌 문인들도 《개벽》에 초기작을 발표했다. “개벽은 종합잡지로서 문예지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정 교수는 말했다. 1932년 《개벽》의 편집부장을 맡기도 했던 문학평론가 백철(白鐵·1908~1985)은 “개벽은 우리 신문학 운동의 귀한 발상지”라고 평가했다.
“개벽은 살아 있다”
《개벽》지가 폐간된 후 다른 간부들이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개벽은 살아있다”고 외친 이가 있었다. 당시 편집국장 차상찬이다. 그는 수건을 풀어 머리에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 전지 한 장에 ‘혁명 투쟁 개벽 7년, 8월 1일 오후 사시 환원(革命鬪爭 開闢 七年, 八月 壹日 午后 四時 還元·독립투쟁을 한 개벽지가 7년째인 8월 1일 오후 4시에 순국했다는 의미)’이라 쓰고 사원 전원이 그 앞에 모여 “개벽은 살아 있다”고 외치게 했다. 그때의 사진이 증거로 남아 있다.
차상찬은 《개벽》 창간 동인 중 한 명으로, 초기부터 편집국장을 맡았다. 창간 동인은 이돈화, 차상찬, 김기전, 박달성, 이두성, 민영순 등 6명이다.
차상찬이 창간호에 청오(靑吾)라는 필명으로 실은 한시(漢詩) <경주회고(慶州懷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활자가 지워진 채 출간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차상찬은 불안감 속에서도 《개벽》 편집국장으로서 사명감을 잊지 않았다. 1923년 조선 13도 각지를 차례로 답사해 도민의 생활현황을 조사하고 고적과 풍물을 특집으로 소개하자는 편집 계획을 세웠다. ‘조선문화(朝鮮文化)의 기본조사(基本調査)’가 그것이다. 차상찬은 편집국 일을 몇 사람에게 나눠 맡기고 몇 달 간격으로 직접 답사에 나섰다. 이 기획은 1923년 4월호(통권 34호)부터 1925년 12월호 전라북도 특집까지 3년간 이어졌다.
1926년 《개벽》이 폐간되자, 차상찬은 곧바로 다음 잡지를 계획했다. 석 달 후인 1926년 11월 취미잡지 《별건곤》(別乾坤)을 창간했다. 처음에는 개벽사 광고부장 이을(李乙)을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하고 자신은 편집실무를 맡았다. 2년 후부터는 자신이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이외에도 개벽사는 《부인》(婦人) 《어린이》 《학생》(學生) 등을 창간했다. 《부인》(婦人)은 1922년 6월에 창간해 1923년 9월에 제호를 《신여성》(新女性)으로 바꿨다. 《어린이》는 1923년 3월에, 《학생》은 1929년 3월에 각각 창간됐다.
하지만 이 잡지들의 운명도 순탄치 못했다. 1931년 청오와 힘을 모아 개벽사를 운영해 가던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이 민영순과 이두성에 이어 타계했다. 박달성과 송계월도 쓰러지고, 김기전마저 결핵으로 몸져 눕게 된다. 결국 차상찬 혼자 개벽사 전체의 관리를 도맡게 되었다. 당시 개벽사는 어려운 재정상태로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차상찬은 흔들리지 않았다. 1931년 3월에는 시사종합잡지 《혜성》(彗星)을 창간했고, 1932년에는 《제일선》(第一線)과 《신경제》(新經濟)를 창간했다. 모두 차상찬이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다양한 잡지를 연이어 발행하면서도 차상찬은 《개벽》에 대한 애정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1934년 11월 1일 차상찬은 《개벽》이라는 동일 제호로 복간을 꾀했다. 폐간된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춘천의 땅을 팔고 가회동 자택을 은행에 잡혀서 돈을 마련했다. 자신이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개벽》의 부활은 연이은 재정난에 부딪혀 4호(1935년 2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한학에 능했던 아이
차상찬은 1887년(고종 24년) 2월 12일에 강원도 춘천시 송암동에서 성균진사 차두엽과 청주한씨 사이의 5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6년 당시 신설학교였던 보성중학교에 입학, 검정 물감을 들인 옷을 입고 다녔다. 18세 때 상학(셋째 형), 상준(넷째 형)의 두 형과 함께 진보회에 가입해 천도교 ‘갑진개혁 운동’에 참가했다(상학은 《만세보》(萬歲報) 기자로 활동했으며,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 초대 주간을 거쳐 사장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다루는 문장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차웅렬씨는 말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부친의 중학교 1학년 작문노트를 보면 자신도 감탄한다고 했다. “창간호에서 편집된 <경주회고>(慶州懷古)도 중학교 재학시절 수학여행으로 갔던 경주에서 지은 작품이라고 합니다.”
차씨는 “청오(靑吾·청정한 나)라는 호도 중학생 시절부터 쓴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경주회고>는 어린 시절부터 차상찬의 한시 작문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鵲散鷄飛事己休(탈해의 까치 계림의 닭이 날아 흩어져 만사는 끝났구나)
東都王氣冷氣秋(서라벌 왕기는 차갑기 가을 같다)
山河不盡英雄恨(영웅의 한탄이 산하를 덮고)
天地猶餘故國羞(망국의 수치감이 하늘땅에 넘치네)
(후략)
1910년 차상찬은 전교 1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는 보성전문학교(법과 6회)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고 차웅렬씨가 말을 이었다. 당시 신익희 선생과 김병로 선생 등이 차상찬과 함께 보성전문에 근무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차상찬이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불행이 닥쳤다. 홍천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넷째 형과 셋째 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차웅렬씨의 설명이다.
“아버지는 큰아버지께서 못다 한 일을 맡기로 결심하고 교수직을 그만두셨다고 하더군요. 당시 아버지는 곧바로 청년 교리강연부의 이돈화(李敦化)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에서 간부로 일하셨는데, 그 인연이 아버지의 운명을 바꿔 놓은 셈이죠.”
실제로 이돈화와 함께 일하던 차상찬은 ‘천도교소년회’ 편집부에서 창간한 《개벽》의 창간 동인으로 언론계에 발을 내딛게 됐다. 이후 그는 17년간 기자, 한시인(漢詩人), 논객, 사학자, 민속학자, 잡지 발행인 및 편집 주간으로 줄곧 개벽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잡지언론계의 들보
극작가 박진은 자신의 수필집 《세세년년》에서 청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줄이어서 원고만 쓰는 청오였다. 역사, 인물만평, 사회풍자, 재치가 있는 잡종기사를 두루 쓰니 개벽사에서 나오는 잡지에 그의 글이 안 실리는 데가 없고 안 실리는 호가 없었다. … 소파가 기둥이라면 청오는 들보였고, 청오가 기둥이라면 소파는 들보로 이 두 사람이 없이는 개벽사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차웅렬씨의 말이다.
“방정환 선생과 아버지는 친형제처럼 가까웠다고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린이 운동도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실제로 차상찬과 방정환은 천도교 소년회 창설위원으로 어린이 운동을 함께 이끌었다.
차씨는 부친의 다양한 필명이 적힌 종이를 보여주면서 “많은 필명을 사용하신 것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차상찬은 청오라는 아호를 포함해 수춘산인(壽春山人), 사외사인(史外史人), 가회동인(嘉會洞人) 등 30여 개의 필명(筆名)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양한 필명으로 많은 글을 게재했지만, 그의 글의 주제는 ‘일제타도’ 하나였다. 차씨의 말이다.
“모두 아버지가 잡지인으로서 글만 썼다고 생각하지만, 일제의 언론탄압에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셨죠. 아버지께서 나라를 위한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차상찬은 일제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인들이 결성한 애국언론단체 ‘무명회(無名會)’의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24년 6월 20일에는 이상재, 안재홍과 함께 ‘언론탄핵 궐기대회’를 도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경찰에 의해 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를 포함한 실행위원들은 모두 강제 연행됐다. 차웅렬씨는 “1925년에는 ‘전 조선기자대회’의 실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전 조선기자대회’는 1925년 4월 15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죽어 가는 조선을 붓으로 구해 보자’는 구호 아래 개최된 일제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이었다.
차씨는 “아버지는 첫날 회의에서 서기를 맡아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가 경무국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으셨다고 했다”며 “제가 태어나던 1926년에는 《신인간》에 <동학란>을 집필했다가 왜경에 끌려가 옥고(獄苦)를 치렀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차씨는 인터뷰 동안 줄곧 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을 강조했다.
민족정신을 일깨우다
차상찬은 다양한 글을 통해 일본강점기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다. 전국 13도를 다룬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를 통해서는 일본의 경제침략과 문화침략의 실황을 알리고자 했다. 창간 5주년 기념호(1925년 7월호)의 <조선의 자랑 특집> 때는 3년간 조선 13도를 돌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지리적 특징을 소개했다. 당시 그의 글은 독자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얻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전략) 조선민족은 군사력이 강할 때, 중국을 국토로 하여 태평을 누렸다. 기후가 온화하여 인간생활에 맞고 문화발전의 가능성을 갖추었다. … 조선은 이처럼 천연의 지리가 양호한 고로 인문이 또한 일찍이 발달하였으므로 삼국시대는 소위 조선의 황금시대로 천문학 미술 음악 정치학 법률 병학 등이 모두 발달하였다. (후략)>
차웅렬씨는 부친의 역사기록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한 1926년, 차상찬은 《개벽》 6월호에 <회고 5백년 조선>을 특집으로 계획했다. 18개 소제목으로 나누어 조선 왕조 5백년을 회고한 글이었다. 약 60쪽에 이르는 원고를 혼자서 도맡아 며칠 밤을 새우며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 차상찬이 정리했던 18개의 소제목을 보면 그가 역사에 얼마나 해박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이외에도 <사회와 당쟁> <이 태조의 건국 백화> <5백년간의 혁명운동> <5백년간 3대 외란> 등 역사 관련 글들을 연이어 게재했다.
“아버지는 개벽사를 나온 후에도 《조광》과 《여성》 등 여러 언론지에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셨어요.” 차웅렬씨는 원고를 쓰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
차씨는 “아버지께서는 주로 야사(野史)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실제로 차상찬은 《야담》지에 야화를 연재하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희빈>을 연재하기도 했다. 일장기 말살 사건 때문에 <장희빈>을 끝까지 연재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인해 폐간됐다.
말을 이어 가던 차씨가 기자에게 전달했던 서류뭉치에서 작은 종이뭉치를 꺼내 보였다. 표지에는 커다란 X자와 함께 《조선백화집》(朝鮮百話集)이라고 적혀 있었다. 차씨는 “1942년에 우리나라의 재밌는 사화 100편을 골라 엮은 책인데, 총독부 검열 때문에 출간하지 못한 비운의 책”이라며 책에 대해 설명했다.
차씨는 “아버지는 《조선백화집》 이외에도 다양한 역사 관련 저서를 집필했다”고 했다.
차상찬은 《통속 조선 4천년 비사》 《해동염사》(海東艶史) 《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 《한국야담사화》(韓國野談史話) 등 다양한 역사서를 썼다.
차씨는 “《통속 조선 4천년 비사》는 당시 학생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인간 차상찬
“짜증을 내거나 책망을 하는 일이 없이 항상 자애하신 분이었어요.”
차웅렬씨는 차상찬이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회고했다. 2남3녀의 막내였던 차웅렬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았다. 차웅렬씨가 태어나던 1926년에는 《개벽》이 폐간하고, 언론투쟁 활동으로 차상찬에 대한 경찰의 감시가 심할 때였기 때문이다. 성장기에는 《개벽》의 복간을 위해 차상찬이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에 함께할 기회는 더욱 적었다. 게다가 당시 자금 마련을 위해 시골 땅과 가회동 집을 저당 잡혔기 때문에 집안형편도 어려웠다. 아버지가 원망스럽진 않았을까. 차웅렬씨는 “가족 중 누구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말했다.
차웅렬씨의 기억 속 아버지는 부지런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차상찬은 아침 일찍 산책하러 가서 약수와 아침산보로 항상 몸을 다지곤 했다. 약주를 많이 한 날에도 새벽까지 원고를 다 마감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냉방의 아랫목에서 잉크를 녹여 가며 글을 쓰던 아버지 모습을 차웅렬씨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차상찬이 집안 김장거리 장만을 위해 돈을 구하러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가불한 10원을 돌아오는 길에 연극연출가 박진 선생과 술값으로 다 써 버린 것이었다. 그해 가족들은 단무지로 김장을 대신해야 했다.
“저희 집은 언제나 개벽사 편찬위원들과 문인들로 북적였습니다.”
당시 차상찬이 살던 가회동 집은 개벽사와 가까웠다. 그래서 그의 집은 개벽사 식구들의 숙소이자 밥집이었다고 한다. “당시에 손병희, 현상윤, 한용운 등 많은 언론인과 문인들이 자주 찾아왔습니다. 김정일의 장모인 김원주(성혜림의 母, 당시 《개벽》 기자로 활동)씨도 집에 자주 놀러 왔었죠.”
차웅렬씨, 20년째 독립유공자 인정 신청
독립운동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 부었던 탓일까. 차상찬은 1945년 조국이 해방된 지 1년 만인 1946년 3월 24일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차상찬의 별세 소식이 알려졌을 때 각계의 인사들은 “한국 제일의 잡지인이 떠났구나. 펜 하나로 일제와 싸워 온 그가 반쪽이나마 해방된 땅에 묻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백철(白鐵)은 《대한일보》(1969년)에 차상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그는 개벽사에서 내는 4개의 잡지에 매월 많은 글을 썼다. …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뛰어난 센스와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가 요즘 같은 시세를 만났다면 제일류의 저널리스트로 대우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 여로는 너무나 비참했다.”
2000년대에 들어선 지금도 차상찬의 인생은 불행하다. 그는 여전히 역사 속에 묻힌 인물로 남아 있다. 아들 차웅렬씨는 벌써 20여 년째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보훈처에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다리라’는 답변뿐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차웅렬씨는 보훈처의 태도를 한탄했다.
“보훈처 근처에는 뚜쟁이들이 많아요. 그들은 친일파였던 사람도 유공자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의 유공자 처리 문제로 보훈처를 자주 방문하는 차씨에게도 뚜쟁이들이 많이 접근해 온다고 했다.
“얼마 전 (보훈처를)찾아갔더니 (올해) 3월에는 힘들고, 8월 광복절까지 더 기다려 보라고 하더군요. 장담할 수 없으니 막막합니다.”
차웅렬씨는 “아버지 일을 꼭 마무리 지어야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차웅렬(車雄烈·87)씨의 말이다. 그는 1920년 민족지 《개벽》을 창간한 고(故) 차상찬(車相瓚·1887~1946) 선생의 막내아들이다. 정부는 지난 2010년 11월 1일 ‘제45회 잡지의 날 기념식’에서 언론인 차상찬 선생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追敍)했다.
3월 2일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만난 차웅렬씨는 기자에게 묵직한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그의 부친에 대한 자료가 가득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리기 위해 한 노력의 무게만큼 서류봉투는 무거웠다.
그는 “《개벽》 《별건곤》 《학생》 등 여러 잡지를 통해 민족문화 발전과 독립운동에 힘쓴 선친이 아직 국가유공자에도 오르지 못한 채 잊혀 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차상찬 선생은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기간을 대표하는 전문 잡지인이다. 그의 글은 모두 민족과 독립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언론인으로서 펜을 들고 일제에 맞선 우국지사였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그를 독립운동가로 기억해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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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벽》 창간호에 실렸던 <경주회고> 원문과 일제 검열로 삭제된 원고. |
1926년 8월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된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에 창간해 통권 72호를 낸 당시까지 언론종합잡지였다. 일제 치하 35년간 발행된 잡지 중 가장 혹독한 탄압과 희생을 치른 잡지다. 6년간 발매금지 34회, 발행정지(정간) 1회, 벌금처분 1회, 기사 삭제 92회의 수난을 당했다.
“일제 치하에서 열악한 재정난, 혹독한 검열과 필자 난 등으로 창간호를 내고 폐간하는 잡지가 많았습니다.”
개벽 창간호를 호외로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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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벽》 창간호 표지. |
정 교수는 기자에게 《개벽》을 보여주면서 “개벽은 천도교를 배경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다른 잡지에 비해 정신적·경제적으로 기초가 확고했다”고 했다. “하지만 혹독한 검열은 개벽도 피해 갈 수 없었죠”라고 정 교수는 《개벽》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벽》은 창간호부터 발매와 반포금지를 당했다고 한다. “창간호는 문제 된 부분을 삭제하고 세 번을 다시 찍고 나서야 ‘호외’로 발행할 수 있었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거의 매호를 압수당하던 《개벽》은 1925년 8월호에 정간을 당했다. 〈이역 풍상에 기체 안녕(氣體安寧)하신가〉라는 제목의 기사 때문이었다. 해외에 망명해 독립투쟁을 벌이는 독립운동가 12명(이동휘 서재필 유동열 이승만 김규식 노백린 이시영 안창호 이동녕 남만춘 박은식 신채호)을 특집으로 편집한 기사였다. 기사에서는 그들을 ‘국사(國士)’ 또는 ‘지사’라고 칭하며 높였다. 총독부는 《개벽》 8월호 광고가 실린 《동아일보》 8월 1일 자까지 압수 처분했다.
《개벽》의 정간은 10월에 해제됐다. 그러나 이듬해 1926년 8월, 총독부는 《개벽》 폐간 명령을 내렸다. 총독부의 누적된 불만과 6·10만세 운동 직후 《개벽》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문화정치를 표방한 이래 총독부가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한 잡지를 폐간한 것은 《개벽》이 두 번째였다. 최초로 폐간된 잡지는 1923년 1월에 발행정지된 《신생활》이었다.
| ▣ 개벽 《개벽》은 신문지법의 허가를 받아 발행된 최초의 종합잡지다. 모태는 천도교청년회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개벽》은 1922년 9월 22일 자로 신문지법의 허가를 받았다. 1919년 12월 20일에 신문지법에 의한 잡지발행의 허가원을 총독부에 제출하고 3년 만의 허가였다. 1920년부터 2년간은 ‘출판법’의 허가에 맞춰 발간해 왔다. ‘신문지법’의 허가는 시사문제를 다루어도 좋다는 허가로서, 《개벽》이 종합잡지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개벽은 일본강점기에 처음으로 신문지법에 의해 발행된 잡지라는 점에서 한국 잡지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크다”며 “또한 개벽은 일제에 저항한 대표적인 잡지”라고 강조했다. |
신문학 등단무대
“당시 신문학을 대표했던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개벽을 통해 성장했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1922),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70호),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4~16호)도 모두 개벽을 통해 발표된 작품들입니다.”
실제로 당시 《개벽》은 지면의 3분의 1을 신문학에 할애했다. 김소월은 30여 편의 시를 《개벽》에 실었다. 이외에도 현진건, 최서해, 박영희 등 사회주의적 또는 동반자 작가적 성향을 지닌 문인들도 《개벽》에 초기작을 발표했다. “개벽은 종합잡지로서 문예지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정 교수는 말했다. 1932년 《개벽》의 편집부장을 맡기도 했던 문학평론가 백철(白鐵·1908~1985)은 “개벽은 우리 신문학 운동의 귀한 발상지”라고 평가했다.
“개벽은 살아 있다”
《개벽》지가 폐간된 후 다른 간부들이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개벽은 살아있다”고 외친 이가 있었다. 당시 편집국장 차상찬이다. 그는 수건을 풀어 머리에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 전지 한 장에 ‘혁명 투쟁 개벽 7년, 8월 1일 오후 사시 환원(革命鬪爭 開闢 七年, 八月 壹日 午后 四時 還元·독립투쟁을 한 개벽지가 7년째인 8월 1일 오후 4시에 순국했다는 의미)’이라 쓰고 사원 전원이 그 앞에 모여 “개벽은 살아 있다”고 외치게 했다. 그때의 사진이 증거로 남아 있다.
차상찬은 《개벽》 창간 동인 중 한 명으로, 초기부터 편집국장을 맡았다. 창간 동인은 이돈화, 차상찬, 김기전, 박달성, 이두성, 민영순 등 6명이다.
차상찬이 창간호에 청오(靑吾)라는 필명으로 실은 한시(漢詩) <경주회고(慶州懷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활자가 지워진 채 출간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차상찬은 불안감 속에서도 《개벽》 편집국장으로서 사명감을 잊지 않았다. 1923년 조선 13도 각지를 차례로 답사해 도민의 생활현황을 조사하고 고적과 풍물을 특집으로 소개하자는 편집 계획을 세웠다. ‘조선문화(朝鮮文化)의 기본조사(基本調査)’가 그것이다. 차상찬은 편집국 일을 몇 사람에게 나눠 맡기고 몇 달 간격으로 직접 답사에 나섰다. 이 기획은 1923년 4월호(통권 34호)부터 1925년 12월호 전라북도 특집까지 3년간 이어졌다.
1926년 《개벽》이 폐간되자, 차상찬은 곧바로 다음 잡지를 계획했다. 석 달 후인 1926년 11월 취미잡지 《별건곤》(別乾坤)을 창간했다. 처음에는 개벽사 광고부장 이을(李乙)을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하고 자신은 편집실무를 맡았다. 2년 후부터는 자신이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이외에도 개벽사는 《부인》(婦人) 《어린이》 《학생》(學生) 등을 창간했다. 《부인》(婦人)은 1922년 6월에 창간해 1923년 9월에 제호를 《신여성》(新女性)으로 바꿨다. 《어린이》는 1923년 3월에, 《학생》은 1929년 3월에 각각 창간됐다.
하지만 이 잡지들의 운명도 순탄치 못했다. 1931년 청오와 힘을 모아 개벽사를 운영해 가던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이 민영순과 이두성에 이어 타계했다. 박달성과 송계월도 쓰러지고, 김기전마저 결핵으로 몸져 눕게 된다. 결국 차상찬 혼자 개벽사 전체의 관리를 도맡게 되었다. 당시 개벽사는 어려운 재정상태로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차상찬은 흔들리지 않았다. 1931년 3월에는 시사종합잡지 《혜성》(彗星)을 창간했고, 1932년에는 《제일선》(第一線)과 《신경제》(新經濟)를 창간했다. 모두 차상찬이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다양한 잡지를 연이어 발행하면서도 차상찬은 《개벽》에 대한 애정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1934년 11월 1일 차상찬은 《개벽》이라는 동일 제호로 복간을 꾀했다. 폐간된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그는 춘천의 땅을 팔고 가회동 자택을 은행에 잡혀서 돈을 마련했다. 자신이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개벽》의 부활은 연이은 재정난에 부딪혀 4호(1935년 2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한학에 능했던 아이
차상찬은 1887년(고종 24년) 2월 12일에 강원도 춘천시 송암동에서 성균진사 차두엽과 청주한씨 사이의 5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6년 당시 신설학교였던 보성중학교에 입학, 검정 물감을 들인 옷을 입고 다녔다. 18세 때 상학(셋째 형), 상준(넷째 형)의 두 형과 함께 진보회에 가입해 천도교 ‘갑진개혁 운동’에 참가했다(상학은 《만세보》(萬歲報) 기자로 활동했으며,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 초대 주간을 거쳐 사장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한문을 다루는 문장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차웅렬씨는 말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부친의 중학교 1학년 작문노트를 보면 자신도 감탄한다고 했다. “창간호에서 편집된 <경주회고>(慶州懷古)도 중학교 재학시절 수학여행으로 갔던 경주에서 지은 작품이라고 합니다.”
차씨는 “청오(靑吾·청정한 나)라는 호도 중학생 시절부터 쓴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경주회고>는 어린 시절부터 차상찬의 한시 작문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鵲散鷄飛事己休(탈해의 까치 계림의 닭이 날아 흩어져 만사는 끝났구나)
東都王氣冷氣秋(서라벌 왕기는 차갑기 가을 같다)
山河不盡英雄恨(영웅의 한탄이 산하를 덮고)
天地猶餘故國羞(망국의 수치감이 하늘땅에 넘치네)
(후략)
1910년 차상찬은 전교 1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는 보성전문학교(법과 6회)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고 차웅렬씨가 말을 이었다. 당시 신익희 선생과 김병로 선생 등이 차상찬과 함께 보성전문에 근무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차상찬이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불행이 닥쳤다. 홍천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넷째 형과 셋째 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차웅렬씨의 설명이다.
“아버지는 큰아버지께서 못다 한 일을 맡기로 결심하고 교수직을 그만두셨다고 하더군요. 당시 아버지는 곧바로 청년 교리강연부의 이돈화(李敦化)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에서 간부로 일하셨는데, 그 인연이 아버지의 운명을 바꿔 놓은 셈이죠.”
실제로 이돈화와 함께 일하던 차상찬은 ‘천도교소년회’ 편집부에서 창간한 《개벽》의 창간 동인으로 언론계에 발을 내딛게 됐다. 이후 그는 17년간 기자, 한시인(漢詩人), 논객, 사학자, 민속학자, 잡지 발행인 및 편집 주간으로 줄곧 개벽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잡지언론계의 들보
극작가 박진은 자신의 수필집 《세세년년》에서 청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줄이어서 원고만 쓰는 청오였다. 역사, 인물만평, 사회풍자, 재치가 있는 잡종기사를 두루 쓰니 개벽사에서 나오는 잡지에 그의 글이 안 실리는 데가 없고 안 실리는 호가 없었다. … 소파가 기둥이라면 청오는 들보였고, 청오가 기둥이라면 소파는 들보로 이 두 사람이 없이는 개벽사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차웅렬씨의 말이다.
“방정환 선생과 아버지는 친형제처럼 가까웠다고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린이 운동도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실제로 차상찬과 방정환은 천도교 소년회 창설위원으로 어린이 운동을 함께 이끌었다.
차씨는 부친의 다양한 필명이 적힌 종이를 보여주면서 “많은 필명을 사용하신 것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차상찬은 청오라는 아호를 포함해 수춘산인(壽春山人), 사외사인(史外史人), 가회동인(嘉會洞人) 등 30여 개의 필명(筆名)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양한 필명으로 많은 글을 게재했지만, 그의 글의 주제는 ‘일제타도’ 하나였다. 차씨의 말이다.
“모두 아버지가 잡지인으로서 글만 썼다고 생각하지만, 일제의 언론탄압에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셨죠. 아버지께서 나라를 위한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차상찬은 일제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인들이 결성한 애국언론단체 ‘무명회(無名會)’의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924년 6월 20일에는 이상재, 안재홍과 함께 ‘언론탄핵 궐기대회’를 도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경찰에 의해 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를 포함한 실행위원들은 모두 강제 연행됐다. 차웅렬씨는 “1925년에는 ‘전 조선기자대회’의 실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전 조선기자대회’는 1925년 4월 15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죽어 가는 조선을 붓으로 구해 보자’는 구호 아래 개최된 일제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이었다.
차씨는 “아버지는 첫날 회의에서 서기를 맡아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가 경무국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으셨다고 했다”며 “제가 태어나던 1926년에는 《신인간》에 <동학란>을 집필했다가 왜경에 끌려가 옥고(獄苦)를 치렀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차씨는 인터뷰 동안 줄곧 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을 강조했다.
민족정신을 일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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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총독부 검열로 출간이 취소된 《조선백화집》. |
<(전략) 조선민족은 군사력이 강할 때, 중국을 국토로 하여 태평을 누렸다. 기후가 온화하여 인간생활에 맞고 문화발전의 가능성을 갖추었다. … 조선은 이처럼 천연의 지리가 양호한 고로 인문이 또한 일찍이 발달하였으므로 삼국시대는 소위 조선의 황금시대로 천문학 미술 음악 정치학 법률 병학 등이 모두 발달하였다. (후략)>
차웅렬씨는 부친의 역사기록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한 1926년, 차상찬은 《개벽》 6월호에 <회고 5백년 조선>을 특집으로 계획했다. 18개 소제목으로 나누어 조선 왕조 5백년을 회고한 글이었다. 약 60쪽에 이르는 원고를 혼자서 도맡아 며칠 밤을 새우며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 차상찬이 정리했던 18개의 소제목을 보면 그가 역사에 얼마나 해박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이외에도 <사회와 당쟁> <이 태조의 건국 백화> <5백년간의 혁명운동> <5백년간 3대 외란> 등 역사 관련 글들을 연이어 게재했다.
“아버지는 개벽사를 나온 후에도 《조광》과 《여성》 등 여러 언론지에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셨어요.” 차웅렬씨는 원고를 쓰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
차씨는 “아버지께서는 주로 야사(野史)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실제로 차상찬은 《야담》지에 야화를 연재하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희빈>을 연재하기도 했다. 일장기 말살 사건 때문에 <장희빈>을 끝까지 연재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인해 폐간됐다.
말을 이어 가던 차씨가 기자에게 전달했던 서류뭉치에서 작은 종이뭉치를 꺼내 보였다. 표지에는 커다란 X자와 함께 《조선백화집》(朝鮮百話集)이라고 적혀 있었다. 차씨는 “1942년에 우리나라의 재밌는 사화 100편을 골라 엮은 책인데, 총독부 검열 때문에 출간하지 못한 비운의 책”이라며 책에 대해 설명했다.
차씨는 “아버지는 《조선백화집》 이외에도 다양한 역사 관련 저서를 집필했다”고 했다.
차상찬은 《통속 조선 4천년 비사》 《해동염사》(海東艶史) 《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 《한국야담사화》(韓國野談史話) 등 다양한 역사서를 썼다.
차씨는 “《통속 조선 4천년 비사》는 당시 학생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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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8월 1일 《개벽》 폐간 기념 사진.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는 사람이 차상찬이다.(원안) |
인간 차상찬
“짜증을 내거나 책망을 하는 일이 없이 항상 자애하신 분이었어요.”
차웅렬씨는 차상찬이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회고했다. 2남3녀의 막내였던 차웅렬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았다. 차웅렬씨가 태어나던 1926년에는 《개벽》이 폐간하고, 언론투쟁 활동으로 차상찬에 대한 경찰의 감시가 심할 때였기 때문이다. 성장기에는 《개벽》의 복간을 위해 차상찬이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에 함께할 기회는 더욱 적었다. 게다가 당시 자금 마련을 위해 시골 땅과 가회동 집을 저당 잡혔기 때문에 집안형편도 어려웠다. 아버지가 원망스럽진 않았을까. 차웅렬씨는 “가족 중 누구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말했다.
차웅렬씨의 기억 속 아버지는 부지런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차상찬은 아침 일찍 산책하러 가서 약수와 아침산보로 항상 몸을 다지곤 했다. 약주를 많이 한 날에도 새벽까지 원고를 다 마감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냉방의 아랫목에서 잉크를 녹여 가며 글을 쓰던 아버지 모습을 차웅렬씨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차상찬이 집안 김장거리 장만을 위해 돈을 구하러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가불한 10원을 돌아오는 길에 연극연출가 박진 선생과 술값으로 다 써 버린 것이었다. 그해 가족들은 단무지로 김장을 대신해야 했다.
“저희 집은 언제나 개벽사 편찬위원들과 문인들로 북적였습니다.”
당시 차상찬이 살던 가회동 집은 개벽사와 가까웠다. 그래서 그의 집은 개벽사 식구들의 숙소이자 밥집이었다고 한다. “당시에 손병희, 현상윤, 한용운 등 많은 언론인과 문인들이 자주 찾아왔습니다. 김정일의 장모인 김원주(성혜림의 母, 당시 《개벽》 기자로 활동)씨도 집에 자주 놀러 왔었죠.”
| ▣ 차상찬 선생의 행적을 만날 수 있는 방법 서울 여의도에 있는 잡지정보관에 가면 고(故) 차상찬 선생의 유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잡지정보협회는 차상찬 선생이 ‘개벽사’에 주간으로 재직 당시 《개벽》 《신여성》 《별건곤》 《농민》 《학생》 등의 잡지를 편찬한 공을 인정해 유품을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차상찬의 유품은 정보관 ‘특별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은 유고 <조선4천년사> <해동염사> <조선사외사> <조선백화집> <한국야담설화>와 육필 원고 <장희빈>, 보성전문 당시의 사진, 소파 방정환의 친필 엽서 등이다. 잡지정보관은 2002년 3월 21일 사단법인 잡지정보협회에서 개관했으며, 여의도 잡지정보협회 지하 1층에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관하며, 관람료는 무료다. 주말과 공휴일은 휴관한다. 잡지정보관에는 잡지전시관(현대잡지 총 3600여종 전시), 잡지박물관(희귀잡지 300여종 전시), 특별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잡지정보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www.kmpa.or.kr/museum)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차웅렬씨, 20년째 독립유공자 인정 신청
독립운동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 부었던 탓일까. 차상찬은 1945년 조국이 해방된 지 1년 만인 1946년 3월 24일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차상찬의 별세 소식이 알려졌을 때 각계의 인사들은 “한국 제일의 잡지인이 떠났구나. 펜 하나로 일제와 싸워 온 그가 반쪽이나마 해방된 땅에 묻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백철(白鐵)은 《대한일보》(1969년)에 차상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그는 개벽사에서 내는 4개의 잡지에 매월 많은 글을 썼다. …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뛰어난 센스와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가 요즘 같은 시세를 만났다면 제일류의 저널리스트로 대우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 여로는 너무나 비참했다.”
2000년대에 들어선 지금도 차상찬의 인생은 불행하다. 그는 여전히 역사 속에 묻힌 인물로 남아 있다. 아들 차웅렬씨는 벌써 20여 년째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보훈처에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다리라’는 답변뿐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차웅렬씨는 보훈처의 태도를 한탄했다.
“보훈처 근처에는 뚜쟁이들이 많아요. 그들은 친일파였던 사람도 유공자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의 유공자 처리 문제로 보훈처를 자주 방문하는 차씨에게도 뚜쟁이들이 많이 접근해 온다고 했다.
“얼마 전 (보훈처를)찾아갔더니 (올해) 3월에는 힘들고, 8월 광복절까지 더 기다려 보라고 하더군요. 장담할 수 없으니 막막합니다.”
차웅렬씨는 “아버지 일을 꼭 마무리 지어야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