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새마을운동을 유신 독재에 동원된 운동이라고 폄하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사실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국민운동이었습니다. 민주적 방식으로 마을의 회장을 선출하고, 모여서 토의하고, 자기 뜻과 맞지 않아도 마을의 중론을 좇을 줄 아는 훈련을 어디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인연 맺은 40년 새마을운동 역사의 산증인
⊙ 1970년대 ‘경제발전의 정신적 지주’가 朴正熙 대통령 서거 후 ‘유신 독재의 도구’로 폄하돼
⊙ 새마을운동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운동이라면, 뉴새마을운동은 성숙한 시민 의식 함양과
품격 높이기 운동
⊙ 국회가 4월 22일을 ‘새마을의 날’로 제정토록 하는 데 앞장
李在昌
⊙ 75세. 서울대 법학과 졸업. 한양대 행정대학원 도시행정학과 석사.
⊙ 행정고시 합격. 평택군수, 내무부 새마을교육과장·새마을담당관, 인천시장, 환경청장, 경기도지사,
환경처장관, 제15·16·17대 국회의원 역임.
⊙ 상훈: 홍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청조근정훈장.
⊙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인연 맺은 40년 새마을운동 역사의 산증인
⊙ 1970년대 ‘경제발전의 정신적 지주’가 朴正熙 대통령 서거 후 ‘유신 독재의 도구’로 폄하돼
⊙ 새마을운동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운동이라면, 뉴새마을운동은 성숙한 시민 의식 함양과
품격 높이기 운동
⊙ 국회가 4월 22일을 ‘새마을의 날’로 제정토록 하는 데 앞장
李在昌
⊙ 75세. 서울대 법학과 졸업. 한양대 행정대학원 도시행정학과 석사.
⊙ 행정고시 합격. 평택군수, 내무부 새마을교육과장·새마을담당관, 인천시장, 환경청장, 경기도지사,
환경처장관, 제15·16·17대 국회의원 역임.
⊙ 상훈: 홍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청조근정훈장.
광주광역시 신안동 모아타운은 180가구가 사는 전형적인 도시형 아파트 단지다. 이 아파트 단지에는 눈에 띄는 시설이 많다.
그중 하나는 지렁이 생태학습장이다. 주차장 한편에 마련된 나무상자 뚜껑을 열고 그 안의 고슬고슬한 흙을 들추면 검붉은 지렁이가 꿈틀댄다. 아파트 단지 주부들이 지렁이를 이용해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퇴비는 텃밭과 화단을 가꾸는 데 사용된다.
이곳 주민들은 주차장 형광등과 가로등, 현관 입구 전등까지 모두 LED등으로 바꾸었다. 집안의 조명등에는 반사갓을 설치했다.
그 결과 음식물 쓰레기가 20% 감량되었고, 에너지도 20% 절감할 수 있었다. 이웃 간의 교류가 돈독해지면서 주민들은 더 많은 일을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 모아타운은 지난해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추진하는 그린마을 가꾸기 우수사례로 선정됐다.
그린마을 가꾸기는 요즘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진행하고 있는 4대 중점운동 중 하나다. ▲녹색생활을 실천하는 그린 코리아 운동 ▲성숙한 시민의식 함양으로 나라 품격을 높이는 스마트 코리아 운동 ▲나눔 문화 확산으로 살맛나는 공동체를 만드는 해피 코리아 운동 ▲새마을운동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글로벌 코리아 운동 등이 4대 중점운동이다.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실천되고 있는 운동임에도 이것이 새마을운동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다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면 “아직도 새마을운동을 하고 있나?” 의아해하는 이가 많다. 심지어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나 하던 구시대 유물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다.
새마을운동은 외환위기 당시 빛을 발했던 금모으기운동과 국민저축운동 등의 형태로 꾸준히 지속돼 왔다. 전국에 새마을 지도자 및 회원이 207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여전히 조직도 건재하다. 그럼에도 대중 사이에 인식 수준이 낮은 것은 금 모으기 외에 추진한 많은 사업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회원들만의 리그’로 끝난 까닭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재창(李在昌)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이 ‘뉴새마을운동’을 주창하며 새마을운동 재건에 나섰다.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인 근면·자조·협동과 더불어 변화·도전·창조의 깃발을 들었다. 잘살기 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의 기존 개념도 시대 변화에 따라 ‘공정한 사회·행복한 공동체 만들기’로 업그레이드했다. 현재 진행 중인 4대 중점운동은 국민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한 ‘뉴새마을운동’의 코드이자 실천과제들이다.
이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가 이재창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이다. 그는 2009년 3월 제19대 회장에 취임한 직후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법안을 국회에 냈다. 이 법안이 지난 2월 1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올해부터 ‘새마을의 날’이 법정 기념일이 됐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이재창 회장을 서울 대치동에 있는 새마을운동중앙회 본부에서 만났다.
경북 청도의 신도리 마을이 새마을운동의 모태
“뉴새마을운동을 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주목할 만한 기념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 창립일인 4월 22일을 ‘새마을의 날’로 제정하게 됐지요. KBS <열린 음악회> 등 온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기념행사를 준비 중인데, 4월 27일이 재보선이어서 올해 행사는 5월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 회장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새마을의 날’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새마을운동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화를 겪어야 했다”며 “앞으로는 정권과 상관없이 지속되도록 법률로 제정되었다”고 말했다. 이번에 제정된 ‘새마을의 날’ 관련 법 조항에는 ‘새마을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국민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4월 22일을 새마을의 날로 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새마을운동이 걸어온 길은 한국 현대사를 보듯 곡절이 많았다.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인연을 맺어 ‘새마을운동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이 회장은 지난 40년의 굴곡진 역사를 단숨에 풀어놓았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 22일 제창되었지만, 그 태동은 수해가 심했던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여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경상도 일원을 기차를 타고 돌아봤다. 기차가 청도 부근을 통과하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은 차창 밖으로 스치는 한 마을(신도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난한 산골 마을인데도 마을 앞길이며 언덕이 깨끗하고 보기 좋게 가꾸어져 있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돈 들이지 않아도 주민이 잘 가꾸면 보기 좋은 마을이 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빠른 속도로 마을의 이모저모를 메모했고, 이듬해 4월 부산에서 열린 전국 지방장관 회의석상에서 이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그러곤 “청도의 한 마을처럼 주어진 여건 속에서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마을을 가꾸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벌이자”고 선포했다.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시작이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가꾸세~.”
박정희 작사·작곡의 이 노래에는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통해 잘사는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새마을운동의 취지가 그대로 담겨 있다.
시멘트 사용처 놓고 토론
1971년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전국 3만5000여 마을에 시멘트를 지원했다. 1개 마을당 시멘트 335포대씩이었다. 이재창 회장은 이 무렵 경기도 평택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시멘트가 마을마다 도착했는데, 주민들은 어디에 쓸지 몰라 쳐다보기만 했다”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당시 촌에서는 시멘트가 아주 귀했습니다. 마을 어귀마다 시멘트가 쌓였는데, 지키는 사람도 없고 하니까 동네 아낙들이 밤중에 한 바가지씩 퍼가곤 했습니다. 흙으로 되어 있는 부엌 부뚜막을 시멘트로 바꿔보고 싶은 욕심에서였죠. 시멘트 포대가 뜯겨 엉망이 되니까 마을 사람들이 ‘이래선 안 되겠다’며 함께 모여 시멘트를 어디에 쓸 것인지 토론을 벌였습니다.”
시멘트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을 총회가 생긴 셈이다. 주민들은 ‘한 포대씩 나누어 부엌부터 고치자’, ‘흙으로 되어 있어 비에 자꾸 쓸리는 마루 앞 기단을 고치자’ 등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다 개인이 아닌 마을을 위해 쓰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배급된 시멘트를 어디에 써야 할지 막막해 하는 마을을 위해 정부에서도 기본 가이드라인을 예시했다. 마을 앞 수로를 콘크리트로 복개해 좁은 진입로를 넓히기, 비만 오면 산사태가 나는 마을 뒷산과 언덕에 콘크리트 축대 쌓기 등이었다.
“마을마다 시멘트 사용처는 달랐습니다. 마을 전체를 위해 사용한 곳도 있지만 집마다 나누어 개인 용도로 쓴 곳도 있었지요. 정부는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나중에 잘된 곳과 잘못된 곳을 평가했습니다. 그러곤 잘된 곳에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추가로 지원해 경쟁을 붙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의 의의
추가 지원을 받은 마을은 신이 나서 마을 가꾸기에 더욱 열심이었다. 같은 지역에 있는 마을이라도 주민이 공동체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마을 외양에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새마을운동에 무관심하던 마을도 앞다투어 주민 총회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잘살기 운동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이 회장은 “새마을운동의 큰 의의는 마을마다 총회가 생긴 것”이라며 새마을운동이 몰고온 변화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마을 부녀자들이 총회에 참여하면서 여성에게도 발언권이 생겼다. 당시 농촌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잔존해 있어 여성들의 경우 집안일이라 해도 앞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군수나 면장이 마을을 방문해도 부엌으로 숨기 바쁠 정도로 외간남자를 경계했다. 이런 여성들이 마을 총회에 참여해 의견을 개진했고, 마을을 가꾸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여성이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하는 계기이자 밑거름이 됐다.
둘째, 지주든 머슴이든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마을 공동사업에 똑같이 참여함으로써 신분이나 계층 간의 벽이 허물어졌다. 부자라고 해서 일을 덜하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소득 분배를 덜 받지 않았다. 공동사업을 하는 과정에 우리 사회에서 ‘쟁이’로 폄하되어 오던 기술자들이 재평가를 받게 되기도 했다. 마을에서 손재주 있는 사람을 귀히 여기게 된 것이다.
셋째, 군대 문화의 강점인 공공성과 조직력의 힘이 그대로 마을에 유입, 일의 효율화가 촉진됐다. 군 전역자가 마을의 리더가 되면서 분업을 통한 공동작업이 빠르게 정착된 것이다.
이 회장은 “소득 증대와 기초 환경 개선이라는 새마을운동의 가시적 효과 이면에는 사회 변혁의 힘이 꿈틀거리고 있었다”며 “이런 변화가 새마을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분배의 공정성, 즉 일한 만큼 돌아온다는 인식도 공동작업을 통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 원동력이 된 것이죠.”
이렇게 짧은 시간에 빠르게 변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관(官)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 당시에는 적어도 군수가 뭔가 하려고 하면 군민들은 ‘군수가 우리에게 불이익한 일을 하겠느냐’며 믿고 따랐다고 한다. 이 회장은 “당시의 농민들은 벼 몇 포기 더 심기 위해 논두렁을 깎고 깎을 정도로 땅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며 “그들이 마을 안길을 위해 보상도 없이 땅을 내놓은 것은 관을 깊이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평택군수 시절, 이 회장은 조선시대 판관처럼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생기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불려다녔다고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한번은 평택 서북쪽에 있는 한 면의 면장이 “며칠 후 김모씨 집에서 군수님을 모시고 조반(朝飯)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연유를 물으니 “마을 안길을 넓히려고 하는데, 땅 주인이 동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군수라고 해서 마을 안길을 위해 문전옥답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난감했다.
고민만 하다 어느덧 약속한 날이 되었다. 이 회장은 새벽 일찍 김모씨 집에 당도했다. 그리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마을 유지들과 막 식사를 마쳤는데, 그날 조반을 마련한 김모씨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영감님, 제 논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동의를 못 했는데, 마을 안길 넓히는 데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그 일 때문에 오신 거죠?”
그 시절에는 군수가 조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많았다. 이 회장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2년에는 새벽같이 이 마을 저 마을로 조반 하러 다닐 일이 많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새마을 화보 만들기 위해 에드워드 김 초빙
1973년 11월 20일, 전남 광주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을지도자회도 ‘평택군수 시절의 추억’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사건이다. 전국 2500명의 지도자가 참석하는 이 대회에 그는 평택 지역 인솔자로 참가했다.
“대회 하루 전날 일행을 태운 버스가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네요. 지도자들은 대회 참가용으로 나누어준 카키색 유니폼과 모자를 착용한 채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옷감이 얇았는데도 대통령 유시(諭示) 현장에 참여한다는 긍지와 자부심 때문에 추운 줄도 몰랐습니다.”
그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고, 광주 시내는 전국에서 몰려온 카키색 군단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숙박시설이 동이나 일행은 연탄을 피우는 여인숙에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 회장은 밤새 한숨을 못 잤다고 한다. 지도자들이 혹여 연탄가스에 중독될까 봐 밤새도록 여인숙을 순시한 것이다.
새마을 지도자 하면 떠오르는 카키색 유니폼과 모자가 이 대회를 통해 첫선을 보였다.
이재창 회장은 이듬해 내무부로 자리를 옮겨 법무관으로 근무했다. 이 무렵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새마을교육에 참석해 교육을 받았는데, 1년 후에는 자신이 교육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1975년 내무부 새마을교육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 무렵에는 새마을 사업이 본격화돼 해외에서도 시찰하러 오는 인사들이 많았어요. 새마을교육과장이었던 저는 해외에서 오는 VIP 인사들을 현장에 안내하는 한편, 해외용 홍보물을 제작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주문으로 세계에서 사진 화보를 가장 잘 만든다는 에드워드 김을 영입했지요. 그는 동양인 최초 내셔널지오그래픽 편집장 출신이었습니다.”
얼마 후,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용을 들인 새마을운동 화보가 영어·불어·스페인어 판으로 발간됐다. 그는 이 화보 발간을 끝으로 잠시 새마을 관련 업무에서 손을 떼었다.
이 회장이 다시 새마을운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9년,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다. 지방행정국장 수하에 있던 자리지만 새마을 전담 부서였고, 당시까지만 해도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던 터라 임무가 막중한 자리였다.
“새마을 관련 사업들을 점검하고 진행 과정을 매월 대통령께 보고하는 중책이었습니다. 전국에 숨어 있는 새마을 우수 마을을 발굴해 대통령께 보고하면 격려도 해주시고, 사업비도 주셨지요. 대통령께서는 그때까지도 새마을 사업에 애착이 많았습니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비화
각 부처 예산에 쉽게 사인을 하지 않던 경제기획원 예산국도 새마을 관련 예산은 함부로 깎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각 부처 사업 중에는 ‘새마을’자가 붙은 것이 많았다. 보사부에서 하는 간이 급수 사업은 ‘새마을 급수’로, 상공부에서 하는 농어촌 전기 사업은 ‘농어촌 새마을 전기 사업’으로 이름 붙이는 식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0·26 사건이 터졌다. 이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새마을’자 붙은 사업은 내용이 무엇이든 무조건 예산이 삭감됐다. 게다가 김영삼(金泳三) 당시 신민당 총재는 새마을운동을 ‘유신(維新) 운동’으로 몰아갔다. 새마을운동을 보는 정계의 눈이 싸늘해졌다. 의기소침해져서 ‘앞으로 새마을운동은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고 있는데, 하루는 이상희(李相熙) 내무부 기획관리실장이 그를 불렀다. 그러곤 “새마을운동은 잘될 것 같아?”라고 물었다. 그가 “어렵다”고 하자 이상희 실장은 “그래도 하기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어떻게 하면 계속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당시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김준(金準) 원장과 상의해 보고하기로 했다. 이 회장의 이야기다.
“그날 밤 김준 원장과 상의한 끝에 ‘새마을운동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새 연수원을 지어 새마을 지도자를 더 많이 양성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수원 농민회관에 있던 연수원은 너무 좁고 작아 새마을 지도자 양성에 한계가 많았거든요. 며칠 후 이상희 실장님을 만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재정국장과 상의해 예산을 만들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보름도 채 되지 않아 12·12 사태가 터졌고, 김종환(金鍾煥) 합참의장이 내무부 장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군에 계셨던 분이 새마을운동에 대해 얼마나 알겠는가’ 싶어 연수원 신축 건은 물건너간 것으로 단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초 김종환 장관이 그를 불러 “새마을사업 지금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일선에서는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며 “장관께서 새마을사업 현장을 한번 순회하면 큰 힘이 될 것 같다”고 조심스레 건의했다. 김 장관은 뜻밖에도 “그러지”라고 답했고, 곧 이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강원도와 경북 일대를 돌았다. 이때다 싶어 그가 연수원 건립 얘기를 꺼냈고, 김 장관이 흔쾌히 동의했다. 얼마 후 그는 김 장관과 함께 헬기를 타고 연수원 건립 후보지를 물색했다. 그 결과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이 낙점됐다. 이 회장의 말이다.
“분당 신도시가 건설되기 전이라 당시만 해도 현재의 연수원 자리는 오지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연수원이 들어설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김종환 장관께서 ‘멀지 않은 곳에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이 있으니 언젠가는 개발될 지역’이라며 낙점하시더군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해 8월 김종환 장관은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이 회장은 경기도 부지사(이사관)로 발령이 났다. 내무부 장관이 위원장이었던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는 이후 존폐 위기에 처했다가 민간 기구인 사단법인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변신하며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초대 본부장은 김준 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장이 맡았다.
이재창 회장은 “지금의 새마을운동중앙회 조직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지도자 중심의 기관으로 끌어가기 위해 중앙회나 시·도 지부 및 지회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현재 새마을운동 조직은 중앙회를 중심으로 5개 단체 중앙회가 있고, 17개의 시·도 지부와 232개의 시·군·구 지회로 꾸려져 있다.
새마을운동의 시련
이재창 회장은 경기도 부지사에 이어 인천시장, 환경청장, 교통부차관, 경기도지사 등을 거쳐 환경처장관을 끝으로 1994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 국회의원(경기 파주) 3선(選)을 하는 동안 새마을운동과는 멀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운명인 듯 2009년 3월 제19대 새마을운동중앙회장에 선출, 깊은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그는 취임사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다시 한 번 해보자’는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하는 국민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며 “새마을운동이 국민통합에 기여해 경제 살리기와 국민의식 선진화운동,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녹색실천운동에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실천 중인 뉴새마을운동의 4대 중점운동을 이미 구상하고 있었던 듯 취임사에 기본 골자가 모두 담겨 있었다.
1980년 이후 오랫동안 봉사단체 정도로 축소 위축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1970년대 못지않은 국민운동으로 부흥시켜야 하는 임무가 그에게 주어졌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새마을운동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과거처럼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민주화 바람이 몰아친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부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박정희 정권의 유신 통치를 위한 도구’로 평가절하했다. 그 가운데 4대 회장을 지낸 전경환(全敬煥)씨의 횡령 비리 사건이 터지자 새마을운동의 위상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울러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정권의 힘을 업고 군림하는 조직으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김영삼 정부는 ‘새마을운동은 유신 독재를 위한 체제’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새마을운동의 범위를 축소해야 한다”며 당시 시청과 구청 안에 있던 새마을운동 사무실을 밖으로 내쫓았다. 또한 계양돼 있던 새마을기(旗)도 모두 내리게 했고, 정부 지원도 대폭 축소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 제2 건국운동이라는 것이 생겨 국민들은 새마을 조직을 협의의 봉사 개념 단체로 인식했다. 그런데다 진보 성향의 교과서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비교하며 폄하했다. 그러다 보니 새마을운동 회원들조차 봉사활동이 본연의 임무인 것으로 착각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까지 지속됐다.
뉴새마을운동의 핵심
이명박(李明博)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도 참석하고, 청와대에 전국 회장단을 초청해 격려해 주기도 했다. 덕분에 새마을 지도자들이 힘을 얻어 정부의 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국민운동으로 지속 발전시키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재창 회장은 “새마을운동은 좌우 이데올로기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운동이었다”며 “지난 정부 시절 봉사 개념으로 굳어진 새마을운동을 국민운동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지금이야말로 새마을운동의 힘이 필요할 때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시대에 맞게 주창한 국민운동이 뉴새마을운동이다. 이 회장의 설명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핵심이 가난에서 벗어나기였다면, 오늘의 뉴새마을운동은 선진국 진입을 위한 성숙한 시민 의식 함양과 품격 높이기가 핵심입니다. 선진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걸림돌은 소득 격차와 그로 인한 갈등과 분열 현상이죠. 이 문제는 정부 정책이나 사회 안전망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새마을 가꾸기 운동 당시 신분에 상관없이 한마음으로 뭉쳤던 마을 주민들처럼 이웃과 함께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풀 수 있는 문제죠.”
녹색산업은 집에서 시작
올해는 뉴새마을운동 시작 2년차. 지난해의 경우 캠페인 중심의 국민 홍보에 역점을 두었다면 올해는 캠페인과 더불어 실천에 옮김으로써 뉴새마을운동의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계획이라고 한다.
먼저 그린 코리아 운동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그린 마을’을 공모선정해 육성할 계획이다. 지난해의 경우 48개 마을을 선정해 육성했고, 올해는 그 두 배인 96개 마을을 선정해 육성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미래 경제발전 동력인 저탄소 녹색산업은 생활 속에서 지구온난화 현상이 우리 각자에게 닥친 현실임을 인식하는 순간 시작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각 가정에서 내복 입기와 자전거 타기 운동으로 친환경 에너지 절약을 실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구온난화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기업에서 생산하는 친환경 제품은 제조 공정상 일반 제품보다 비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죠. 결국 좀 비싸더라도 친환경 제품을 쓰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기업은 소비자를 보고 이 분야 연구개발에 과감하게 투자하게 되죠.”
지난해 캠페인을 통해 준비한 스마트 코리아 운동과 해피 코리아 운동은 올해가 실천 원년이다. 이 회장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끼리 인사 잘하고, 서로 칭찬하고, 배려하다 보면 마을은 물론 국가 전체의 품격이 올라간다”고 말했다. 그는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아 생긴 좋은 예화를 최근 한 신문에서 읽었다”며 소개했다.
“서울의 어느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차 문제로 두 여성이 멱살잡이까지 했답니다. 주위 사람이 말려 겨우 싸움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데, 알고 보니 위아래 층에 사는 이웃이었답니다. 이후 만날 때마다 민망하고 곤혹스러워서 결국 서로 사과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평소에 인사만 하고 살았어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멱살잡이까지 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다문화 가족 껴안기 운동도 펼친다. 그는 “지난해 여성가족부 협력으로 이민여성과 새마을 부녀 회원의 결연 맺기 캠페인을 벌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다문화 가족의 특징은 남편이나 시부모가 이민여성을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 도중 가출하고 도망치는 이민여성이 너무 많아 집안에 감금하다시피 하는 거죠. 그 때문에 이민여성을 상대로 한 교육이나 행사가 참석률 저조로 취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같은 마을의 부녀 회원이 멘토가 되어 동행하니까 가족도 안심하고 보내주더군요.”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지난해 행안부 후원으로 결혼여성이민자의 친정부모 60명을 초청해 6박7일 동안 한국문화를 체험하며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다. 이 행사는 올해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글로벌 새마을
글로벌 코리아 운동은 전 세계를 상대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금까지 몽골·에티오피아·인도네시아·우간다·중앙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의 저개발국가 103개국에서 4만9000여 명이 한국을 방문해 새마을 교육을 받고 갔다. 이 중 10개국 17개 마을에서 새마을 협력 사업이 진행 중이다. 1970년대 한국 새마을운동의 핵심이었던 생활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가 주요 사업 내용이다.
이재창 회장은 “새마을운동 전파는 물고기가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라 정부나 일반 민간단체의 원조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사실 선진 국가의 원조에 익숙한 일부 저개발 국가들의 경우 자력갱생의 의지를 상실하는 등 부작용이 만만찮다. 저개발 국가 주민 중에는 일은 하지 않고 원조만 바라보고 사는 이가 상당수다. 이 회장의 이야기다.
“국내에서 저개발 국가에 원조하는 단체도 상당수입니다. ODA(개발원조위원회) 자금으로 규모가 큰 프로젝트 방식의 지원을 하는 코이카(KOICA)가 대표적이죠. 그런데 이렇게 규모가 큰 경우 정부 대 정부가 진행하는 것이어서 주민에게 혜택이 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새마을운동은 마을 단위에서 주민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을 지원하기 때문에 규모는 크지 않지만 혜택이 바로바로 간다. 또한 현지 주민들과 함께 가꾼 시범마을을 통해 ‘이렇게 하면 돈을 버는구나’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자립교육을 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원조 단체가 많아지면서 걱정거리가 생겼다. 정부 기관이든 종교 단체든 한국에서 지원하는 경우 새마을 사업으로 얘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현지 주민들 입장에서는 새마을운동의 경우 교육받을 때는 분명히 자립운동이었는데, 이것도 원조인지 혼선이 있다”고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새마을사업도 원조의 일환으로 생각해 자꾸 더 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솔직히 각 기관에서 각자 하다 보니 투입에 비해 효과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정부 입장에서는 가닥이 여럿이라 통제도, 이미지 관리도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인지 작년에 총리실에서 ‘어차피 원조 규모로는 중국이나 일본을 따라갈 수 없으니 액수가 작더라도 고맙게 받을 수 있는 종합농촌 개발 모델을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새마을이라는 직접적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종합농촌 개발 모델을 만들겠다’고 한 만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는 4월이면 모델이 나올 겁니다.”
올해는 저개발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접목해 주는 맞춤형 지원도 추가할 예정이다. 가령 새마을운동으로 나무 심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몽골의 경우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식목(植木)·육림(育林) 기술이다. 빠른 속도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몽골은 토질이 척박해 나무를 심기도 어렵지만 심어도 고사(枯死)하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다. 이 회장의 설명이다.
“몽골은 5월 15일을 식목일로 정하고 나무 심기 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식목과 육림 기술이 없어서 심는 족족 나무가 죽어버린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가 몽골 새마을 지도자 19명을 초청했습니다. 이들은 지난 2월 28일부터 9박10일 일정으로 산림청 임업기술자에게 묘목 생산 기술, 산림녹화 정책 등의 교육을 받았지요.”
代價를 받지 않는 지도자
이재창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이 추진 중인 뉴새마을운동 사업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이 회장은 “4대 중점운동 틀 안에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실천해야 할 과제를 선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려면 조직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의 말이다.
“새마을운동은 갖은 풍파에도 40년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대단한 생명력이지요. 결속력이나 사명감이 그만큼 강한 반면 폐쇄적인 성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조직이 관료화된 부분도 있고요. 회원이 되고 싶어도 가입 조건이 까다로워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대가 변했는데도 새로운 동력을 얻지 못했지요. 젊은 회원이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는 수평 구조로 고령화된 조직을 수직 구조로 바꾸기 위해 대학생을 해외 새마을 시범마을에 파송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가 하면, 지부건 지회건 회장직을 연임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했다. 또한 지역 제약 없이, 중앙회라 할지라도 누구든 원하면 가입해 활동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할 계획이다.
“이만한 조직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서 새마을중앙회를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 고대 동문회 등과 더불어 불가사의한 조직으로 꼽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어느 조직이든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빗장을 풀고 젊은 피를 받아들여야 건강한 조직으로 지속성장할 수 있지요.”
새마을 지도자는 무보수 명예직이다. “지도자가 금전적 대가를 받으면 리더십이 없어진다. 마을을 위해 헌신하니까 주민들이 따르는 것이지, 대가를 받고 일한다고 하면 누가 따르겠는가”라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이었다고 한다. 대신 박 대통령은 새마을 지도자로서 명예와 자부심을 갖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이재창 회장은 새마을운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어떤 이는 새마을운동을 유신 독재에 동원된 운동이라고 폄하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사실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국민운동이었습니다. 민주적 방식으로 마을의 회장을 선출하고, 모여서 토의하고, 자기 뜻과 맞지 않아도 마을의 중론을 좇을 줄 아는 훈련을 어디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중 하나는 지렁이 생태학습장이다. 주차장 한편에 마련된 나무상자 뚜껑을 열고 그 안의 고슬고슬한 흙을 들추면 검붉은 지렁이가 꿈틀댄다. 아파트 단지 주부들이 지렁이를 이용해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퇴비는 텃밭과 화단을 가꾸는 데 사용된다.
이곳 주민들은 주차장 형광등과 가로등, 현관 입구 전등까지 모두 LED등으로 바꾸었다. 집안의 조명등에는 반사갓을 설치했다.
그 결과 음식물 쓰레기가 20% 감량되었고, 에너지도 20% 절감할 수 있었다. 이웃 간의 교류가 돈독해지면서 주민들은 더 많은 일을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 모아타운은 지난해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추진하는 그린마을 가꾸기 우수사례로 선정됐다.
그린마을 가꾸기는 요즘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진행하고 있는 4대 중점운동 중 하나다. ▲녹색생활을 실천하는 그린 코리아 운동 ▲성숙한 시민의식 함양으로 나라 품격을 높이는 스마트 코리아 운동 ▲나눔 문화 확산으로 살맛나는 공동체를 만드는 해피 코리아 운동 ▲새마을운동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글로벌 코리아 운동 등이 4대 중점운동이다.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실천되고 있는 운동임에도 이것이 새마을운동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다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면 “아직도 새마을운동을 하고 있나?” 의아해하는 이가 많다. 심지어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나 하던 구시대 유물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다.
새마을운동은 외환위기 당시 빛을 발했던 금모으기운동과 국민저축운동 등의 형태로 꾸준히 지속돼 왔다. 전국에 새마을 지도자 및 회원이 207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여전히 조직도 건재하다. 그럼에도 대중 사이에 인식 수준이 낮은 것은 금 모으기 외에 추진한 많은 사업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회원들만의 리그’로 끝난 까닭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재창(李在昌)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이 ‘뉴새마을운동’을 주창하며 새마을운동 재건에 나섰다.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인 근면·자조·협동과 더불어 변화·도전·창조의 깃발을 들었다. 잘살기 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의 기존 개념도 시대 변화에 따라 ‘공정한 사회·행복한 공동체 만들기’로 업그레이드했다. 현재 진행 중인 4대 중점운동은 국민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한 ‘뉴새마을운동’의 코드이자 실천과제들이다.
이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가 이재창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이다. 그는 2009년 3월 제19대 회장에 취임한 직후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법안을 국회에 냈다. 이 법안이 지난 2월 1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올해부터 ‘새마을의 날’이 법정 기념일이 됐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이재창 회장을 서울 대치동에 있는 새마을운동중앙회 본부에서 만났다.
경북 청도의 신도리 마을이 새마을운동의 모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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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 위해 전국 새마을 회원들이 서명운동을 벌여 105만명의 서명 실적을 거두었다. |
이 회장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새마을의 날’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새마을운동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화를 겪어야 했다”며 “앞으로는 정권과 상관없이 지속되도록 법률로 제정되었다”고 말했다. 이번에 제정된 ‘새마을의 날’ 관련 법 조항에는 ‘새마을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국민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4월 22일을 새마을의 날로 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새마을운동이 걸어온 길은 한국 현대사를 보듯 곡절이 많았다.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인연을 맺어 ‘새마을운동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이 회장은 지난 40년의 굴곡진 역사를 단숨에 풀어놓았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 22일 제창되었지만, 그 태동은 수해가 심했던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여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경상도 일원을 기차를 타고 돌아봤다. 기차가 청도 부근을 통과하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은 차창 밖으로 스치는 한 마을(신도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난한 산골 마을인데도 마을 앞길이며 언덕이 깨끗하고 보기 좋게 가꾸어져 있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돈 들이지 않아도 주민이 잘 가꾸면 보기 좋은 마을이 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빠른 속도로 마을의 이모저모를 메모했고, 이듬해 4월 부산에서 열린 전국 지방장관 회의석상에서 이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그러곤 “청도의 한 마을처럼 주어진 여건 속에서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마을을 가꾸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벌이자”고 선포했다.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시작이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가꾸세~.”
박정희 작사·작곡의 이 노래에는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통해 잘사는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새마을운동의 취지가 그대로 담겨 있다.
시멘트 사용처 놓고 토론
1971년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전국 3만5000여 마을에 시멘트를 지원했다. 1개 마을당 시멘트 335포대씩이었다. 이재창 회장은 이 무렵 경기도 평택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시멘트가 마을마다 도착했는데, 주민들은 어디에 쓸지 몰라 쳐다보기만 했다”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당시 촌에서는 시멘트가 아주 귀했습니다. 마을 어귀마다 시멘트가 쌓였는데, 지키는 사람도 없고 하니까 동네 아낙들이 밤중에 한 바가지씩 퍼가곤 했습니다. 흙으로 되어 있는 부엌 부뚜막을 시멘트로 바꿔보고 싶은 욕심에서였죠. 시멘트 포대가 뜯겨 엉망이 되니까 마을 사람들이 ‘이래선 안 되겠다’며 함께 모여 시멘트를 어디에 쓸 것인지 토론을 벌였습니다.”
시멘트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을 총회가 생긴 셈이다. 주민들은 ‘한 포대씩 나누어 부엌부터 고치자’, ‘흙으로 되어 있어 비에 자꾸 쓸리는 마루 앞 기단을 고치자’ 등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다 개인이 아닌 마을을 위해 쓰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배급된 시멘트를 어디에 써야 할지 막막해 하는 마을을 위해 정부에서도 기본 가이드라인을 예시했다. 마을 앞 수로를 콘크리트로 복개해 좁은 진입로를 넓히기, 비만 오면 산사태가 나는 마을 뒷산과 언덕에 콘크리트 축대 쌓기 등이었다.
“마을마다 시멘트 사용처는 달랐습니다. 마을 전체를 위해 사용한 곳도 있지만 집마다 나누어 개인 용도로 쓴 곳도 있었지요. 정부는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나중에 잘된 곳과 잘못된 곳을 평가했습니다. 그러곤 잘된 곳에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추가로 지원해 경쟁을 붙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의 의의
추가 지원을 받은 마을은 신이 나서 마을 가꾸기에 더욱 열심이었다. 같은 지역에 있는 마을이라도 주민이 공동체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마을 외양에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새마을운동에 무관심하던 마을도 앞다투어 주민 총회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잘살기 운동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이 회장은 “새마을운동의 큰 의의는 마을마다 총회가 생긴 것”이라며 새마을운동이 몰고온 변화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마을 부녀자들이 총회에 참여하면서 여성에게도 발언권이 생겼다. 당시 농촌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잔존해 있어 여성들의 경우 집안일이라 해도 앞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군수나 면장이 마을을 방문해도 부엌으로 숨기 바쁠 정도로 외간남자를 경계했다. 이런 여성들이 마을 총회에 참여해 의견을 개진했고, 마을을 가꾸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여성이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하는 계기이자 밑거름이 됐다.
둘째, 지주든 머슴이든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마을 공동사업에 똑같이 참여함으로써 신분이나 계층 간의 벽이 허물어졌다. 부자라고 해서 일을 덜하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소득 분배를 덜 받지 않았다. 공동사업을 하는 과정에 우리 사회에서 ‘쟁이’로 폄하되어 오던 기술자들이 재평가를 받게 되기도 했다. 마을에서 손재주 있는 사람을 귀히 여기게 된 것이다.
셋째, 군대 문화의 강점인 공공성과 조직력의 힘이 그대로 마을에 유입, 일의 효율화가 촉진됐다. 군 전역자가 마을의 리더가 되면서 분업을 통한 공동작업이 빠르게 정착된 것이다.
이 회장은 “소득 증대와 기초 환경 개선이라는 새마을운동의 가시적 효과 이면에는 사회 변혁의 힘이 꿈틀거리고 있었다”며 “이런 변화가 새마을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분배의 공정성, 즉 일한 만큼 돌아온다는 인식도 공동작업을 통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 원동력이 된 것이죠.”
이렇게 짧은 시간에 빠르게 변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관(官)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 당시에는 적어도 군수가 뭔가 하려고 하면 군민들은 ‘군수가 우리에게 불이익한 일을 하겠느냐’며 믿고 따랐다고 한다. 이 회장은 “당시의 농민들은 벼 몇 포기 더 심기 위해 논두렁을 깎고 깎을 정도로 땅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며 “그들이 마을 안길을 위해 보상도 없이 땅을 내놓은 것은 관을 깊이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평택군수 시절, 이 회장은 조선시대 판관처럼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생기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불려다녔다고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한번은 평택 서북쪽에 있는 한 면의 면장이 “며칠 후 김모씨 집에서 군수님을 모시고 조반(朝飯)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연유를 물으니 “마을 안길을 넓히려고 하는데, 땅 주인이 동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군수라고 해서 마을 안길을 위해 문전옥답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난감했다.
고민만 하다 어느덧 약속한 날이 되었다. 이 회장은 새벽 일찍 김모씨 집에 당도했다. 그리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마을 유지들과 막 식사를 마쳤는데, 그날 조반을 마련한 김모씨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영감님, 제 논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동의를 못 했는데, 마을 안길 넓히는 데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그 일 때문에 오신 거죠?”
그 시절에는 군수가 조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많았다. 이 회장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2년에는 새벽같이 이 마을 저 마을로 조반 하러 다닐 일이 많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새마을 화보 만들기 위해 에드워드 김 초빙
1973년 11월 20일, 전남 광주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을지도자회도 ‘평택군수 시절의 추억’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사건이다. 전국 2500명의 지도자가 참석하는 이 대회에 그는 평택 지역 인솔자로 참가했다.
“대회 하루 전날 일행을 태운 버스가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네요. 지도자들은 대회 참가용으로 나누어준 카키색 유니폼과 모자를 착용한 채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옷감이 얇았는데도 대통령 유시(諭示) 현장에 참여한다는 긍지와 자부심 때문에 추운 줄도 몰랐습니다.”
그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고, 광주 시내는 전국에서 몰려온 카키색 군단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숙박시설이 동이나 일행은 연탄을 피우는 여인숙에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 회장은 밤새 한숨을 못 잤다고 한다. 지도자들이 혹여 연탄가스에 중독될까 봐 밤새도록 여인숙을 순시한 것이다.
새마을 지도자 하면 떠오르는 카키색 유니폼과 모자가 이 대회를 통해 첫선을 보였다.
이재창 회장은 이듬해 내무부로 자리를 옮겨 법무관으로 근무했다. 이 무렵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새마을교육에 참석해 교육을 받았는데, 1년 후에는 자신이 교육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1975년 내무부 새마을교육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 무렵에는 새마을 사업이 본격화돼 해외에서도 시찰하러 오는 인사들이 많았어요. 새마을교육과장이었던 저는 해외에서 오는 VIP 인사들을 현장에 안내하는 한편, 해외용 홍보물을 제작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주문으로 세계에서 사진 화보를 가장 잘 만든다는 에드워드 김을 영입했지요. 그는 동양인 최초 내셔널지오그래픽 편집장 출신이었습니다.”
얼마 후,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용을 들인 새마을운동 화보가 영어·불어·스페인어 판으로 발간됐다. 그는 이 화보 발간을 끝으로 잠시 새마을 관련 업무에서 손을 떼었다.
이 회장이 다시 새마을운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9년,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다. 지방행정국장 수하에 있던 자리지만 새마을 전담 부서였고, 당시까지만 해도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던 터라 임무가 막중한 자리였다.
“새마을 관련 사업들을 점검하고 진행 과정을 매월 대통령께 보고하는 중책이었습니다. 전국에 숨어 있는 새마을 우수 마을을 발굴해 대통령께 보고하면 격려도 해주시고, 사업비도 주셨지요. 대통령께서는 그때까지도 새마을 사업에 애착이 많았습니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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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을운동중앙회 직속 연수원인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성남시 분당구 율동 소재). |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0·26 사건이 터졌다. 이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새마을’자 붙은 사업은 내용이 무엇이든 무조건 예산이 삭감됐다. 게다가 김영삼(金泳三) 당시 신민당 총재는 새마을운동을 ‘유신(維新) 운동’으로 몰아갔다. 새마을운동을 보는 정계의 눈이 싸늘해졌다. 의기소침해져서 ‘앞으로 새마을운동은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고 있는데, 하루는 이상희(李相熙) 내무부 기획관리실장이 그를 불렀다. 그러곤 “새마을운동은 잘될 것 같아?”라고 물었다. 그가 “어렵다”고 하자 이상희 실장은 “그래도 하기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어떻게 하면 계속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당시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김준(金準) 원장과 상의해 보고하기로 했다. 이 회장의 이야기다.
“그날 밤 김준 원장과 상의한 끝에 ‘새마을운동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새 연수원을 지어 새마을 지도자를 더 많이 양성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수원 농민회관에 있던 연수원은 너무 좁고 작아 새마을 지도자 양성에 한계가 많았거든요. 며칠 후 이상희 실장님을 만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재정국장과 상의해 예산을 만들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보름도 채 되지 않아 12·12 사태가 터졌고, 김종환(金鍾煥) 합참의장이 내무부 장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군에 계셨던 분이 새마을운동에 대해 얼마나 알겠는가’ 싶어 연수원 신축 건은 물건너간 것으로 단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초 김종환 장관이 그를 불러 “새마을사업 지금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일선에서는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며 “장관께서 새마을사업 현장을 한번 순회하면 큰 힘이 될 것 같다”고 조심스레 건의했다. 김 장관은 뜻밖에도 “그러지”라고 답했고, 곧 이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강원도와 경북 일대를 돌았다. 이때다 싶어 그가 연수원 건립 얘기를 꺼냈고, 김 장관이 흔쾌히 동의했다. 얼마 후 그는 김 장관과 함께 헬기를 타고 연수원 건립 후보지를 물색했다. 그 결과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이 낙점됐다. 이 회장의 말이다.
“분당 신도시가 건설되기 전이라 당시만 해도 현재의 연수원 자리는 오지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연수원이 들어설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김종환 장관께서 ‘멀지 않은 곳에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이 있으니 언젠가는 개발될 지역’이라며 낙점하시더군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해 8월 김종환 장관은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이 회장은 경기도 부지사(이사관)로 발령이 났다. 내무부 장관이 위원장이었던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는 이후 존폐 위기에 처했다가 민간 기구인 사단법인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변신하며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초대 본부장은 김준 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장이 맡았다.
이재창 회장은 “지금의 새마을운동중앙회 조직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지도자 중심의 기관으로 끌어가기 위해 중앙회나 시·도 지부 및 지회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현재 새마을운동 조직은 중앙회를 중심으로 5개 단체 중앙회가 있고, 17개의 시·도 지부와 232개의 시·군·구 지회로 꾸려져 있다.
새마을운동의 시련
이재창 회장은 경기도 부지사에 이어 인천시장, 환경청장, 교통부차관, 경기도지사 등을 거쳐 환경처장관을 끝으로 1994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 국회의원(경기 파주) 3선(選)을 하는 동안 새마을운동과는 멀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운명인 듯 2009년 3월 제19대 새마을운동중앙회장에 선출, 깊은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그는 취임사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다시 한 번 해보자’는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하는 국민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며 “새마을운동이 국민통합에 기여해 경제 살리기와 국민의식 선진화운동,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녹색실천운동에 앞장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실천 중인 뉴새마을운동의 4대 중점운동을 이미 구상하고 있었던 듯 취임사에 기본 골자가 모두 담겨 있었다.
1980년 이후 오랫동안 봉사단체 정도로 축소 위축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1970년대 못지않은 국민운동으로 부흥시켜야 하는 임무가 그에게 주어졌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새마을운동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과거처럼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민주화 바람이 몰아친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부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박정희 정권의 유신 통치를 위한 도구’로 평가절하했다. 그 가운데 4대 회장을 지낸 전경환(全敬煥)씨의 횡령 비리 사건이 터지자 새마을운동의 위상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울러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정권의 힘을 업고 군림하는 조직으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김영삼 정부는 ‘새마을운동은 유신 독재를 위한 체제’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새마을운동의 범위를 축소해야 한다”며 당시 시청과 구청 안에 있던 새마을운동 사무실을 밖으로 내쫓았다. 또한 계양돼 있던 새마을기(旗)도 모두 내리게 했고, 정부 지원도 대폭 축소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 제2 건국운동이라는 것이 생겨 국민들은 새마을 조직을 협의의 봉사 개념 단체로 인식했다. 그런데다 진보 성향의 교과서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비교하며 폄하했다. 그러다 보니 새마을운동 회원들조차 봉사활동이 본연의 임무인 것으로 착각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까지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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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1월 24일 경기 수원에서 열린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맹형규 행안부장관을 비롯한 국내외 인사 및 새마을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진 일류국가를 향한 뉴새마을운동의 힘찬 전진을 다짐하고 있다. |
뉴새마을운동의 핵심
이명박(李明博)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도 참석하고, 청와대에 전국 회장단을 초청해 격려해 주기도 했다. 덕분에 새마을 지도자들이 힘을 얻어 정부의 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국민운동으로 지속 발전시키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재창 회장은 “새마을운동은 좌우 이데올로기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운동이었다”며 “지난 정부 시절 봉사 개념으로 굳어진 새마을운동을 국민운동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지금이야말로 새마을운동의 힘이 필요할 때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시대에 맞게 주창한 국민운동이 뉴새마을운동이다. 이 회장의 설명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핵심이 가난에서 벗어나기였다면, 오늘의 뉴새마을운동은 선진국 진입을 위한 성숙한 시민 의식 함양과 품격 높이기가 핵심입니다. 선진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걸림돌은 소득 격차와 그로 인한 갈등과 분열 현상이죠. 이 문제는 정부 정책이나 사회 안전망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새마을 가꾸기 운동 당시 신분에 상관없이 한마음으로 뭉쳤던 마을 주민들처럼 이웃과 함께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풀 수 있는 문제죠.”
녹색산업은 집에서 시작
올해는 뉴새마을운동 시작 2년차. 지난해의 경우 캠페인 중심의 국민 홍보에 역점을 두었다면 올해는 캠페인과 더불어 실천에 옮김으로써 뉴새마을운동의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계획이라고 한다.
먼저 그린 코리아 운동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그린 마을’을 공모선정해 육성할 계획이다. 지난해의 경우 48개 마을을 선정해 육성했고, 올해는 그 두 배인 96개 마을을 선정해 육성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미래 경제발전 동력인 저탄소 녹색산업은 생활 속에서 지구온난화 현상이 우리 각자에게 닥친 현실임을 인식하는 순간 시작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각 가정에서 내복 입기와 자전거 타기 운동으로 친환경 에너지 절약을 실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구온난화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기업에서 생산하는 친환경 제품은 제조 공정상 일반 제품보다 비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죠. 결국 좀 비싸더라도 친환경 제품을 쓰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기업은 소비자를 보고 이 분야 연구개발에 과감하게 투자하게 되죠.”
지난해 캠페인을 통해 준비한 스마트 코리아 운동과 해피 코리아 운동은 올해가 실천 원년이다. 이 회장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끼리 인사 잘하고, 서로 칭찬하고, 배려하다 보면 마을은 물론 국가 전체의 품격이 올라간다”고 말했다. 그는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아 생긴 좋은 예화를 최근 한 신문에서 읽었다”며 소개했다.
“서울의 어느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차 문제로 두 여성이 멱살잡이까지 했답니다. 주위 사람이 말려 겨우 싸움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데, 알고 보니 위아래 층에 사는 이웃이었답니다. 이후 만날 때마다 민망하고 곤혹스러워서 결국 서로 사과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평소에 인사만 하고 살았어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멱살잡이까지 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다문화 가족 껴안기 운동도 펼친다. 그는 “지난해 여성가족부 협력으로 이민여성과 새마을 부녀 회원의 결연 맺기 캠페인을 벌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다문화 가족의 특징은 남편이나 시부모가 이민여성을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 도중 가출하고 도망치는 이민여성이 너무 많아 집안에 감금하다시피 하는 거죠. 그 때문에 이민여성을 상대로 한 교육이나 행사가 참석률 저조로 취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같은 마을의 부녀 회원이 멘토가 되어 동행하니까 가족도 안심하고 보내주더군요.”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지난해 행안부 후원으로 결혼여성이민자의 친정부모 60명을 초청해 6박7일 동안 한국문화를 체험하며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다. 이 행사는 올해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글로벌 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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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몽골 새마을회가 몽골 사막화 방지를 위해 1인 1그루 나무심기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그린 몽골리아 선포식에 참석한 이재창 중앙회장. |
이재창 회장은 “새마을운동 전파는 물고기가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라 정부나 일반 민간단체의 원조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사실 선진 국가의 원조에 익숙한 일부 저개발 국가들의 경우 자력갱생의 의지를 상실하는 등 부작용이 만만찮다. 저개발 국가 주민 중에는 일은 하지 않고 원조만 바라보고 사는 이가 상당수다. 이 회장의 이야기다.
“국내에서 저개발 국가에 원조하는 단체도 상당수입니다. ODA(개발원조위원회) 자금으로 규모가 큰 프로젝트 방식의 지원을 하는 코이카(KOICA)가 대표적이죠. 그런데 이렇게 규모가 큰 경우 정부 대 정부가 진행하는 것이어서 주민에게 혜택이 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새마을운동은 마을 단위에서 주민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을 지원하기 때문에 규모는 크지 않지만 혜택이 바로바로 간다. 또한 현지 주민들과 함께 가꾼 시범마을을 통해 ‘이렇게 하면 돈을 버는구나’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자립교육을 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원조 단체가 많아지면서 걱정거리가 생겼다. 정부 기관이든 종교 단체든 한국에서 지원하는 경우 새마을 사업으로 얘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현지 주민들 입장에서는 새마을운동의 경우 교육받을 때는 분명히 자립운동이었는데, 이것도 원조인지 혼선이 있다”고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새마을사업도 원조의 일환으로 생각해 자꾸 더 달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솔직히 각 기관에서 각자 하다 보니 투입에 비해 효과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정부 입장에서는 가닥이 여럿이라 통제도, 이미지 관리도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인지 작년에 총리실에서 ‘어차피 원조 규모로는 중국이나 일본을 따라갈 수 없으니 액수가 작더라도 고맙게 받을 수 있는 종합농촌 개발 모델을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새마을이라는 직접적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종합농촌 개발 모델을 만들겠다’고 한 만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는 4월이면 모델이 나올 겁니다.”
올해는 저개발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접목해 주는 맞춤형 지원도 추가할 예정이다. 가령 새마을운동으로 나무 심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몽골의 경우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식목(植木)·육림(育林) 기술이다. 빠른 속도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몽골은 토질이 척박해 나무를 심기도 어렵지만 심어도 고사(枯死)하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다. 이 회장의 설명이다.
“몽골은 5월 15일을 식목일로 정하고 나무 심기 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식목과 육림 기술이 없어서 심는 족족 나무가 죽어버린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가 몽골 새마을 지도자 19명을 초청했습니다. 이들은 지난 2월 28일부터 9박10일 일정으로 산림청 임업기술자에게 묘목 생산 기술, 산림녹화 정책 등의 교육을 받았지요.”
代價를 받지 않는 지도자
이재창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이 추진 중인 뉴새마을운동 사업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이 회장은 “4대 중점운동 틀 안에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실천해야 할 과제를 선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려면 조직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의 말이다.
“새마을운동은 갖은 풍파에도 40년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대단한 생명력이지요. 결속력이나 사명감이 그만큼 강한 반면 폐쇄적인 성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조직이 관료화된 부분도 있고요. 회원이 되고 싶어도 가입 조건이 까다로워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대가 변했는데도 새로운 동력을 얻지 못했지요. 젊은 회원이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는 수평 구조로 고령화된 조직을 수직 구조로 바꾸기 위해 대학생을 해외 새마을 시범마을에 파송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가 하면, 지부건 지회건 회장직을 연임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했다. 또한 지역 제약 없이, 중앙회라 할지라도 누구든 원하면 가입해 활동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할 계획이다.
“이만한 조직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서 새마을중앙회를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 고대 동문회 등과 더불어 불가사의한 조직으로 꼽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어느 조직이든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빗장을 풀고 젊은 피를 받아들여야 건강한 조직으로 지속성장할 수 있지요.”
새마을 지도자는 무보수 명예직이다. “지도자가 금전적 대가를 받으면 리더십이 없어진다. 마을을 위해 헌신하니까 주민들이 따르는 것이지, 대가를 받고 일한다고 하면 누가 따르겠는가”라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이었다고 한다. 대신 박 대통령은 새마을 지도자로서 명예와 자부심을 갖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훈장을 수여했다.
이재창 회장은 새마을운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어떤 이는 새마을운동을 유신 독재에 동원된 운동이라고 폄하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사실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국민운동이었습니다. 민주적 방식으로 마을의 회장을 선출하고, 모여서 토의하고, 자기 뜻과 맞지 않아도 마을의 중론을 좇을 줄 아는 훈련을 어디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