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통해 혁명지상주의의 한계 경고
⊙ “우리 삶에 거대한 영향을 준 사건이나 국제적 흐름 등에 대한 이해 소홀”
⊙ “비판적 사고 결여, 거짓이 통하고 감정적으로 솔깃한 것만 받아들이게 돼”
이인호
⊙ 75세. 서울대 사학과·美웨슬리대 사학과 졸업. 美하버드대 사학박사.
⊙ 고려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駐핀란드대사, 駐러시아대사,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역임. 現 서울대 명예교수, 명지대 석좌교수, KAIST 초빙석좌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 “우리 삶에 거대한 영향을 준 사건이나 국제적 흐름 등에 대한 이해 소홀”
⊙ “비판적 사고 결여, 거짓이 통하고 감정적으로 솔깃한 것만 받아들이게 돼”
이인호
⊙ 75세. 서울대 사학과·美웨슬리대 사학과 졸업. 美하버드대 사학박사.
⊙ 고려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駐핀란드대사, 駐러시아대사,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역임. 現 서울대 명예교수, 명지대 석좌교수, KAIST 초빙석좌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역사교육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2004년 《월간조선》(月刊朝鮮)이 고교(高校)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좌(左)편향성을 지적한 이래 7년 만인 올해 3월부터 새 교과과정이 시작되고 새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나왔지만 여전히 좌편향적인 서술이 적지 않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국사(國史)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언론과 정치권에서 호응을 얻고 있지만, ‘지금처럼 좌편향 역사교육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독(毒)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자유민주학회(회장 유동렬)는 국회에서 세미나를 열어 각종 국가고시의 현대사 관련 국사 문제 가운데서도 좌편향적인 문제가 적지 않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이 추진 중이지만, 좌파(左派)와 독립운동단체들의 반발에 부딪혀 ‘대한민국건국기념관’이라는 당초의 취지에서는 많이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인호(李仁浩) 교수를 만난 것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이 교수는 러시아사(史)를 전공하고 1980년대 초반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지식인과 저항》 등의 책을 번역, 소개해 지식인 사회에 자극을 주었던 서양사학자다. 주(駐)핀란드대사와 주러시아대사를 지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사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는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 이후에는 북한인권운동이나 좌편향교과서 바로잡기에 앞장서온 ‘행동하는 지성(知性)’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이인호 교수는 신형재 교보생명 회장을 찾아갔다. 교보문고가 천안함 관련 의혹들을 부풀리는 내용의 책을 ‘추천도서’로 올린 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뜻있는 지식인들이 교보문고 측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 교수가 나선 것이다. 노(老)교수의 설득에 얼마 후 문제의 책은 ‘추천도서’에서 사라졌다. 이 과정을 지켜본 강규형(姜圭炯) 명지대 교수는 올해 나이 75세인 이인호 교수를 가리켜 “영원한 청년”이라고 부른다.
이인호 교수를 만난 곳은 서울 경희궁공원 인근에 있는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실에서다. 기자가 이 교수를 찾은 날은 그가 이 연구원 이사장으로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어떻게 이사장을 맡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이 교수는 “이홍구(李洪九) 전 총리가 추천해서 맡게 됐다”고 짧게 대답했다. 정몽준(鄭夢準) 전 한나라당 대표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못내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 만남의 목적이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고, 함재봉(咸在鳳) 원장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유포하는데 무방비상태”
―얼마 전 교보문고에서 천안함 관련해서 얄궂은 책을 추천도서에 올린 것을 바로잡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천안함 사건 같은 것은 온 국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커다란 사건입니다. 외국 전문가들까지 참여한 조사단이 조사결과를 냈는데, 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책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에서 ‘추천도서’로 내세운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안에 대해 다른 의견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걸 ‘추천도서’로 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거기에 담겨 있는 논지가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습니다.”
이인호 교수는 이번 일을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과 관련된 문제로 해석했다.
“‘일어난 일로서의 역사’와 ‘읽어낸 결과로서의 역사’는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해석상의 차이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것과 의도적인 허위 왜곡을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유포를 하는 데 대해 우리 사회가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그다음은 역사를 볼 때 ‘누구를, 무엇을 중심으로 보느냐’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교육은 자국(自國)을 중심에 놓으면서, 국민들에게 그 나라 국민이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1차적인 목적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우리’의 시각에서 보는 게 아니라 ‘남의 시각’, 그것도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는 시각에서 보면서, 그쪽의 선전을 사실인 양 교과서 등을 통해 재(再)확산시키는 것은 문제입니다.”
―1980년대 초반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등을 통해 혁명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사상과 고민을 소개했는데, 혹시 제정(帝政)러시아 지식인들의 의식과 오늘날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의식 사이에 닮은 부분은 없습니까?
“오늘날이라기보다는 1970~8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의식구조와 제정러시아 지식인들의 생각에 유사점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내가 러시아사를 전공하게 된 것도 러시아사 강의를 들으면서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고민이 우리가 고민하는 것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어떤 부분이 그렇게 닮았던가요.
“19세기 러시아나 내가 젊었을 때의 한국 모두 후진국으로서 선진적인 서양을 어떻게 따라잡느냐,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자기 정체성(正體性)을 잃지 않느냐 하는 근본적인 고민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지식인층이 형성되고, 그들의 눈에는 정부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게 보이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생각하듯이 권력을 쥔 소수(少數)가 자기들만 잘살겠다고 그러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거든요. 그들에게도 사회 전체가 잘돼야 하고 어떻게든지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은 있지만, 그게 어렵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그러다 보니 불만을 사게 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인호 교수는 “내가 《인텔리겐찌야와 혁명》을 번역, 소개한 것도 그러한 고민의 소산이었다”고 말했다.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원전(原典)이 나온 게 러시아혁명 8년 전인 1909년이었어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선언문을 썼던 사람들을 비롯해 혁명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한 책이었습니다.
‘암울한 현실을 바로잡아야 하지만,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못하면 더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 ‘불만스러운 현실을 거부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대안(代案)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는데, 그 하나하나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대두하고 있던 문제들과 아주 흡사했습니다.”
이인호 교수가 설명한 《인텔리겐찌야와 혁명》의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잘못된 정치체제에 항의하던 사람들이 권력에 의해 압살당하고 나면, 어린애들이 나서서 사회의 구세주(救世主) 역할을 자임한다. 이들은 인생의 경험이 많이 부족하면서도 구세주의 역할, 독선(獨善)에 빠진다. 젊은 나이에 한창 공부를 하고 사물을 직시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다 보니 여러 면에서 문제가 심각하고, 결국 ‘어린애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정의(正義)에 대한 갈구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진리와 정의를 혼동해서, 정의의 이름 아래 진리를 쉽게 무시한다. 말하자면 정의감에 솔깃하게 들리면 거짓도 쉽게 받아들인다.”
“악법(惡法)과 오랫동안 싸우다 보니까 법 자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모른다. 법이라는 것이 있어야 인간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인데, 악법을 거부한다고 법 자체를 등한시한다.”
“사회구조가 잘못됐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개인이 도덕적으로 인격을 연마하고 자기수련을 해야 하는 중요성을 간과한다.”
“혁명가가 되는 사람의 동기를 보면,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이기 때문에 자기가 누릴 수 있는 특권(特權)을 다 버리고 전체를 위해서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反)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입장에서, ‘이 사회가 뒤집혀야 내가 기회가 있다’고 해서 뛰어드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극(極)에서 극이지만, 혁명지상주의(革命至上主義)라는 전제 아래서 힘을 합쳐 일한다. 그래서 혁명이 성공했을 때, 누가 권력을 잡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는 쪽이 잡지, 이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지 못한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얘기들이었다. 혁명 후 스탈린의 대숙청을 겪은 러시아의 역사, 문화대혁명의 광풍(狂風)이 휩쓸고 갔던 중국의 역사는 100여 년 전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이 예고했던 것 그대로였다. 그들의 경고가 얼마나 적확(的確)한 것인가는 1987년 이른바 민주화 이후,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사회혼란과 정체성의 표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인호 교수는 “이 책을 낼 당시 ‘굉장히 명심해야 할 얘기’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소위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큰 과제가 남았는데 벌써 그에 대항해서 싸우는 세력의 힘을 빼느냐’하는 식의 욕을 먹을 수 있는 행위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나는 지금도 사회구조의 문제와 인격도야의 문제는 항상 같이 가야지, 아무리 좋은 구조라도 흉악한 사람이 들어가서 운영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건국혁명론
이인호 교수는 작년 11월 17일 ‘왜 우리는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가’라는 세미나에서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은 혁명이었다’라는 발제문을 통해 ‘건국혁명론’을 제기했다. 그는 이 글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1910년 이후 진정한 전환점이 있다면 1945년 광복에서 1948년 헌법제정과 정부수립 선포로 이어진 전 과정을 포함하는 대한민국 건국”이라며 “1948년 전이나 후나 학술적으로 보편성을 지니는 용어로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사건은 없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강조하는 주장은 많았지만, 이를 ‘혁명’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 교수가 처음이었다. 이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미국민들이 자신들의 독립을 ‘미국혁명’(American Revolution)이라고 칭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건국혁명론’을 접하고 상당히 공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학자·정치학자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아 왔다는 것이 뜻밖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1910년 일제(日帝)에 국권(國權)을 강탈당했을 때에 우리 국민들은 봉건신분제 사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제 35년이 지나고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1948년에 건국을 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권자가 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동등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를 ‘혁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남북으로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탄생이 ‘혁명’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을 세운 분들은 잘 알고 있었지요.”
심리적 逆轉현상
―엄연히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주장이 지식인 사회의 주류적인 주장처럼 되어 버리고, 그런 주장이 교과서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이상(理想)으로 하고 있습니다. 국체(國體)를 지키기 위해서 공산주의 혹은 친북(親北)으로 기운 것으로 의심받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하기는 했어도 전체적으로는 열린 사회를 지향해 왔습니다. 반면에 스탈린체제를 이어받은 북한은 선전선동에 매우 능한 체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체제가 기본적으로 취약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정쩡한 정책을 폈던 것이 오늘날 이렇게 세(勢)가 뒤집히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가 나쁘면 왜 나쁜지 가르쳐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공산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도 문제 삼았어요. 그런 걸 보면서 ‘이렇게 가면 큰일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둘째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 북한에 공산당이 있다는 건 우리에게 공부 열심히 하게 만들려고 그런 거죠?’, 이런 소리를 해요.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 대학에 가서는, 공산주의는 나쁘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는데 정치적 자유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심리적인 역전(逆轉)현상이 일어난 거죠. 이를 틈타 친공적(親共的)인 세력이 파고들기 시작한 거죠.”
이인호 교수는 1970~80년대 젊은이들을 의식화시킨 리영희(李泳禧), 박현채(朴玄埰) 교수 등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서양에서는 아무리 공산주의자라 해도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책임 있는 수준의 책을 씁니다. E.H 카, 에릭 홉스봄, 이런 사람들의 책을 보면 정말 공부할 것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책은 금서(禁書)가 됐어요. 반면에, 옛날 스탈린시대 때 나온 굉장히 편향되고 잘못된 이론에 기초한, 서양에서는 책으로 통용될 수도 없는 내용을 담은 리영희 교수나 박현채 교수의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볼 능력이 없었고, 미운 정부가 얘기하는 것과 다른 얘기를 하니까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게 됐고요.”
無識의 代價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그랬다 치고, 1987년 이후 민주화가 됐으면, 이제 지식인 사회에서 자정(自淨)작용이 일어날 법도 한데 그게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판단하는 능력은 그렇게 쉽게 갖춰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는 부분은 유한(有限)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살 수 없으니까요. 교육, 매체, 간접체험을 통해서 직접적인 체험을 보완하는 노력을 상당히 집중적으로 해야만 편견에 싸이지 않고 사물을 공정하게 바로 보는 능력이 생깁니다. ‘비판적 사고(思考)’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4년간의 대학시절이 그런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시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1970~80년대 내내 그 소중한 시기를 데모하는 데 다 바쳤잖아요. 그러다 보니 안정된 선진국 학생들의 독서량과 우리나라 학생들의 독서량은 비교가 안됩니다.
결국 무식의 대가죠. 자기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을 기초로 해서 스스로 생각을 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누가 허튼소리를 하면 ‘아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되었을 때 감히 말도 안되는 것들이 행세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기초가 너무 안되어 있다 보니 거짓이 통하고 감정적으로 솔깃한 것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이인호 교수는 우리 국사학계 일각의 분단사학(分斷史學)이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통일지상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했다.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비극의 상당부분이 분단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분단만 극복하면 모두 해결된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 한 나라였다고 하더라도 50~60년 다른 길을 걸어왔으면, 한 나라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아무리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고 해도 여러 해 지나면 서로 달라지고, 재산 때문에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법정싸움까지 갈 수도 있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물며 두 개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한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화합이 될 수 있겠어요?
이런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고, 지금의 불만스러운 현실을 타개하는 방법이 통일밖에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냥 거기에 휩쓸려 갑니다.”
이인호 교수는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제작을 비롯해 좌편향 역사교과서를 바로잡기 위한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그런 그에게 이번 학기부터 사용하게 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역사교육은 인간교육”
“직접 새 교과서를 보진 못했지만, 감수 과정에 참여한 분들로부터 얘기를 들었고, 신문기사도 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역사교과서 편찬지침부터가 굉장히 잘못됐습니다. 이른바 민중사관(民衆史觀)이 지나치게 중시되고 있어요.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도, 위정자(爲政者)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도 같이 가야 합니다. 민중사관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우리의 삶에 거대한 영향을 준 사건이나 국제적 흐름 등에 대한 이해는 소홀히 하고, 무슨 민중의 요구를 담는 사건 같은 것들은 침소봉대(針小棒大)되는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그런 문제를 고친다고 고쳤지만, 근본적으로 교과서지침을 고치지 못하고 조금 수정하는 데 그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국사교육을 필수화하자는 주장은 어떻게 봅니까.
“역사교육은 인간교육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인지, 실제 인간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대한 감각을 생기게 하는 것이 역사를 가르치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역사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이는 정치적인 편향과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좌편향적인 역사교육이라면,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역사교육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자기의 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거기서 힘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고통스러웠던 것, 성공적인 것을 제대로 가르쳐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역사교육입니다.
과거 좌우대립 상황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경우도 헤아리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걸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6·25 때 대한민국 국민이 당한 수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국군이나 미군의 잘못, 6·25 때 북한 평양주민들이 입은 피해, 이런 것들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침서에는 ‘민간인 학살 사례를 북한이 저지른 것하고 이쪽이 저지른 것하고 같은 수로 넣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건 말이 안되는 얘기죠.”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은 배치되지 않아”
이인호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추진위원 중 한 사람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노무현 정권 시절 좌편향 역사교육에 문제의식을 느낀 뉴라이트운동 계열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와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보여주는 건국기념관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성공의 역사”라며 “이 역사가 기록되고 새롭게 이어질 수 있도록 현대사박물관을 짓겠다”고 선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에 시동을 걸었다. 2009년 4월 16일 국립대한민국관건립위원회(이하 건립위·후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로 개칭)가 구성됐다.
하지만 건립위는 건립기본계획을 발표하기도 전에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좌파와 독립유공자단체들에서 ‘건국’이라는 표현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논란은 2008년 건국 60주년기념사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건국절(建國節)’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결국 건립위가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대주제(大主題)에서 ‘건국’이라는 표현은 실종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우려를 전하자 이인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우려가 상당히 있습니다. 추진위원들 자신부터 우리 현대사에 대한 감각이 뚜렷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반대세력 눈치 보기도 있어, 생각했던 대로 잘 진행되지는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을 주장해 온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그런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이 나라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걸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죠.”
이인호 교수는 “건립추진위원 중에서도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고, 학자라는 사람 가운데서도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이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황당하다”고 말했다.
“나라 없는 설움을 극복하고 떳떳한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새로 태어난 것이 1948년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1948년 건국을 얘기한다고 해서 그게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탄생했겠어요?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면서 독립을 갈구했던 모든 분의 염원이 합해져서 생긴 것이 대한민국인데, 독립운동세력과 대한민국이 배치(背馳)되는 것 같이 주장하는 것은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입니다.”
핀란드化
이인호 교수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핀란드 대사를 지냈다. 과거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과 두 차례 전쟁을 벌여 영토의 일부를 잃었다. 이후 냉전 시대 동안 핀란드는 동유럽국가들처럼 소련의 위성(衛星)국가로 전락하는 것은 면하고 내정에서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낼 수 있었지만, 외교적으로는 소련에 종속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이를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고 한다. 근래 중국이 대국으로 굴기(?起)하면서 작가 복거일씨 등은 ‘한국의 핀란드화’를 우려한다.
―핀란드대사를 지낸 입장에서 핀란드화를 평가한다면요.
“국제정치학자들이 핀란드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를 떠나서 그냥 순수하게 인간적인 차원에서 ‘핀란드식 처신, 방법’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서방세계와 공산주의체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독립을 잃지 않고, 내실을 기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가장 많이 확보할 것이냐 하는 고민의 소산이 이른바 핀란드화입니다.”
이 교수는 핀란드인들의 고민을 보여주는 사례로 1956~1981년 대통령을 지낸 케코넨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케코넨 대통령은 집권기간 동안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양 극단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대단한 강권통치를 했습니다. 민족주의가 대두해서 소련을 건드려도 안 되고, 그렇다고 공산주의자로 흘러도 안 되었으니까요.”
이 교수는 “핀란드인들이 우리와 크게 달랐던 것은 밖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보느냐를 의식하기보다는 내실을 중시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핀란드화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핀란드나 우리나라 같이 강대한 이웃에 에워싸인 작은 나라는 물론이고, 초대강국이라는 미국이나 중국도 제멋대로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다른 나라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기들의 행동의 자유에도 어느 정도 제약을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어요. 핀란드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런 부분을 어떻게 슬기롭게 이용하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핀란드화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핀란드는 냉전 시대에 독립을 유지하면서, 시장경제의 이점과 복지국가의 이상을 잘 배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국제정치에서도 떵떵거리는 큰 나라는 아니지만 아주 실속 있게 존경받는 나라죠.”
김평일과 박의춘
이인호 교수가 핀란드대사로 근무할 당시 핀란드주재 북한대사는 김정일의 이복(異腹)동생인 김평일(金平一)이었다.
―김평일과는 만난 적이 있습니까.
“대통령 관저 등에서 외교행사 때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김평일이나 그 부인 모두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늘 감시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더 가깝게 접촉할 기회는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3월, 이 교수는 주러시아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공교롭게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소련주재 북한대사로 온 사람이 박의춘 현 외무상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신임장을 제정했는데, 박의춘이 7번째, 이 교수가 10번째였다고 한다.
―박의춘과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까.
“그때는 북한이 국제무대에서 특히 위축되어 있을 때였어요. 외교행사 같은 데서 말을 좀 붙여보려고 하면 피하더군요. 한번은 ‘핀란드에 있던 김평일 대사는 지금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난 그런 사람 알지도 못한다’고 잡아떼더군요.”⊙
이인호(李仁浩) 교수를 만난 것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이 교수는 러시아사(史)를 전공하고 1980년대 초반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지식인과 저항》 등의 책을 번역, 소개해 지식인 사회에 자극을 주었던 서양사학자다. 주(駐)핀란드대사와 주러시아대사를 지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사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는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 이후에는 북한인권운동이나 좌편향교과서 바로잡기에 앞장서온 ‘행동하는 지성(知性)’이기도 하다.
얼마 전 이인호 교수는 신형재 교보생명 회장을 찾아갔다. 교보문고가 천안함 관련 의혹들을 부풀리는 내용의 책을 ‘추천도서’로 올린 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뜻있는 지식인들이 교보문고 측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 교수가 나선 것이다. 노(老)교수의 설득에 얼마 후 문제의 책은 ‘추천도서’에서 사라졌다. 이 과정을 지켜본 강규형(姜圭炯) 명지대 교수는 올해 나이 75세인 이인호 교수를 가리켜 “영원한 청년”이라고 부른다.
이인호 교수를 만난 곳은 서울 경희궁공원 인근에 있는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실에서다. 기자가 이 교수를 찾은 날은 그가 이 연구원 이사장으로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어떻게 이사장을 맡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이 교수는 “이홍구(李洪九) 전 총리가 추천해서 맡게 됐다”고 짧게 대답했다. 정몽준(鄭夢準) 전 한나라당 대표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못내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 만남의 목적이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고, 함재봉(咸在鳳) 원장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유포하는데 무방비상태”
―얼마 전 교보문고에서 천안함 관련해서 얄궂은 책을 추천도서에 올린 것을 바로잡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천안함 사건 같은 것은 온 국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커다란 사건입니다. 외국 전문가들까지 참여한 조사단이 조사결과를 냈는데, 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책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에서 ‘추천도서’로 내세운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안에 대해 다른 의견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걸 ‘추천도서’로 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거기에 담겨 있는 논지가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습니다.”
이인호 교수는 이번 일을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과 관련된 문제로 해석했다.
“‘일어난 일로서의 역사’와 ‘읽어낸 결과로서의 역사’는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해석상의 차이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것과 의도적인 허위 왜곡을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유포를 하는 데 대해 우리 사회가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그다음은 역사를 볼 때 ‘누구를, 무엇을 중심으로 보느냐’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교육은 자국(自國)을 중심에 놓으면서, 국민들에게 그 나라 국민이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1차적인 목적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우리’의 시각에서 보는 게 아니라 ‘남의 시각’, 그것도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는 시각에서 보면서, 그쪽의 선전을 사실인 양 교과서 등을 통해 재(再)확산시키는 것은 문제입니다.”
―1980년대 초반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등을 통해 혁명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사상과 고민을 소개했는데, 혹시 제정(帝政)러시아 지식인들의 의식과 오늘날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의식 사이에 닮은 부분은 없습니까?
“오늘날이라기보다는 1970~8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의식구조와 제정러시아 지식인들의 생각에 유사점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내가 러시아사를 전공하게 된 것도 러시아사 강의를 들으면서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의 고민이 우리가 고민하는 것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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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호 교수가 1981년 번역, 소개한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
“19세기 러시아나 내가 젊었을 때의 한국 모두 후진국으로서 선진적인 서양을 어떻게 따라잡느냐,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자기 정체성(正體性)을 잃지 않느냐 하는 근본적인 고민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지식인층이 형성되고, 그들의 눈에는 정부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게 보이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생각하듯이 권력을 쥔 소수(少數)가 자기들만 잘살겠다고 그러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거든요. 그들에게도 사회 전체가 잘돼야 하고 어떻게든지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은 있지만, 그게 어렵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그러다 보니 불만을 사게 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인호 교수는 “내가 《인텔리겐찌야와 혁명》을 번역, 소개한 것도 그러한 고민의 소산이었다”고 말했다.
“《인텔리겐찌야와 혁명》 원전(原典)이 나온 게 러시아혁명 8년 전인 1909년이었어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선언문을 썼던 사람들을 비롯해 혁명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한 책이었습니다.
‘암울한 현실을 바로잡아야 하지만,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못하면 더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 ‘불만스러운 현실을 거부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대안(代案)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는데, 그 하나하나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대두하고 있던 문제들과 아주 흡사했습니다.”
이인호 교수가 설명한 《인텔리겐찌야와 혁명》의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잘못된 정치체제에 항의하던 사람들이 권력에 의해 압살당하고 나면, 어린애들이 나서서 사회의 구세주(救世主) 역할을 자임한다. 이들은 인생의 경험이 많이 부족하면서도 구세주의 역할, 독선(獨善)에 빠진다. 젊은 나이에 한창 공부를 하고 사물을 직시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다 보니 여러 면에서 문제가 심각하고, 결국 ‘어린애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정의(正義)에 대한 갈구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진리와 정의를 혼동해서, 정의의 이름 아래 진리를 쉽게 무시한다. 말하자면 정의감에 솔깃하게 들리면 거짓도 쉽게 받아들인다.”
“악법(惡法)과 오랫동안 싸우다 보니까 법 자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모른다. 법이라는 것이 있어야 인간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인데, 악법을 거부한다고 법 자체를 등한시한다.”
“사회구조가 잘못됐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개인이 도덕적으로 인격을 연마하고 자기수련을 해야 하는 중요성을 간과한다.”
“혁명가가 되는 사람의 동기를 보면,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이기 때문에 자기가 누릴 수 있는 특권(特權)을 다 버리고 전체를 위해서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反)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입장에서, ‘이 사회가 뒤집혀야 내가 기회가 있다’고 해서 뛰어드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극(極)에서 극이지만, 혁명지상주의(革命至上主義)라는 전제 아래서 힘을 합쳐 일한다. 그래서 혁명이 성공했을 때, 누가 권력을 잡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는 쪽이 잡지, 이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지 못한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얘기들이었다. 혁명 후 스탈린의 대숙청을 겪은 러시아의 역사, 문화대혁명의 광풍(狂風)이 휩쓸고 갔던 중국의 역사는 100여 년 전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이 예고했던 것 그대로였다. 그들의 경고가 얼마나 적확(的確)한 것인가는 1987년 이른바 민주화 이후,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사회혼란과 정체성의 표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인호 교수는 “이 책을 낼 당시 ‘굉장히 명심해야 할 얘기’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소위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큰 과제가 남았는데 벌써 그에 대항해서 싸우는 세력의 힘을 빼느냐’하는 식의 욕을 먹을 수 있는 행위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나는 지금도 사회구조의 문제와 인격도야의 문제는 항상 같이 가야지, 아무리 좋은 구조라도 흉악한 사람이 들어가서 운영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건국혁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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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건국60주년기념학술대회에 참석한 이인호 교수(왼쪽). 오른쪽은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
―‘건국혁명론’을 접하고 상당히 공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학자·정치학자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아 왔다는 것이 뜻밖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1910년 일제(日帝)에 국권(國權)을 강탈당했을 때에 우리 국민들은 봉건신분제 사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제 35년이 지나고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1948년에 건국을 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권자가 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동등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를 ‘혁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남북으로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탄생이 ‘혁명’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을 세운 분들은 잘 알고 있었지요.”
심리적 逆轉현상
―엄연히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한민국에 반대하는 주장이 지식인 사회의 주류적인 주장처럼 되어 버리고, 그런 주장이 교과서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이상(理想)으로 하고 있습니다. 국체(國體)를 지키기 위해서 공산주의 혹은 친북(親北)으로 기운 것으로 의심받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하기는 했어도 전체적으로는 열린 사회를 지향해 왔습니다. 반면에 스탈린체제를 이어받은 북한은 선전선동에 매우 능한 체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체제가 기본적으로 취약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정쩡한 정책을 폈던 것이 오늘날 이렇게 세(勢)가 뒤집히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가 나쁘면 왜 나쁜지 가르쳐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공산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도 문제 삼았어요. 그런 걸 보면서 ‘이렇게 가면 큰일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둘째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 북한에 공산당이 있다는 건 우리에게 공부 열심히 하게 만들려고 그런 거죠?’, 이런 소리를 해요.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 대학에 가서는, 공산주의는 나쁘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는데 정치적 자유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심리적인 역전(逆轉)현상이 일어난 거죠. 이를 틈타 친공적(親共的)인 세력이 파고들기 시작한 거죠.”
이인호 교수는 1970~80년대 젊은이들을 의식화시킨 리영희(李泳禧), 박현채(朴玄埰) 교수 등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서양에서는 아무리 공산주의자라 해도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책임 있는 수준의 책을 씁니다. E.H 카, 에릭 홉스봄, 이런 사람들의 책을 보면 정말 공부할 것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책은 금서(禁書)가 됐어요. 반면에, 옛날 스탈린시대 때 나온 굉장히 편향되고 잘못된 이론에 기초한, 서양에서는 책으로 통용될 수도 없는 내용을 담은 리영희 교수나 박현채 교수의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볼 능력이 없었고, 미운 정부가 얘기하는 것과 다른 얘기를 하니까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게 됐고요.”
無識의 代價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그랬다 치고, 1987년 이후 민주화가 됐으면, 이제 지식인 사회에서 자정(自淨)작용이 일어날 법도 한데 그게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판단하는 능력은 그렇게 쉽게 갖춰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는 부분은 유한(有限)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살 수 없으니까요. 교육, 매체, 간접체험을 통해서 직접적인 체험을 보완하는 노력을 상당히 집중적으로 해야만 편견에 싸이지 않고 사물을 공정하게 바로 보는 능력이 생깁니다. ‘비판적 사고(思考)’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4년간의 대학시절이 그런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시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1970~80년대 내내 그 소중한 시기를 데모하는 데 다 바쳤잖아요. 그러다 보니 안정된 선진국 학생들의 독서량과 우리나라 학생들의 독서량은 비교가 안됩니다.
결국 무식의 대가죠. 자기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을 기초로 해서 스스로 생각을 하는 능력이 있어야만, 누가 허튼소리를 하면 ‘아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되었을 때 감히 말도 안되는 것들이 행세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기초가 너무 안되어 있다 보니 거짓이 통하고 감정적으로 솔깃한 것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이인호 교수는 우리 국사학계 일각의 분단사학(分斷史學)이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통일지상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했다.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비극의 상당부분이 분단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분단만 극복하면 모두 해결된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 한 나라였다고 하더라도 50~60년 다른 길을 걸어왔으면, 한 나라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아무리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고 해도 여러 해 지나면 서로 달라지고, 재산 때문에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법정싸움까지 갈 수도 있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물며 두 개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한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화합이 될 수 있겠어요?
이런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고, 지금의 불만스러운 현실을 타개하는 방법이 통일밖에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냥 거기에 휩쓸려 갑니다.”
이인호 교수는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제작을 비롯해 좌편향 역사교과서를 바로잡기 위한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그런 그에게 이번 학기부터 사용하게 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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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4월 20일 재외공관장회의에 참석한 이인호 주러시아대사 (오른쪽에서 5번째). |
“역사교육은 인간교육”
“직접 새 교과서를 보진 못했지만, 감수 과정에 참여한 분들로부터 얘기를 들었고, 신문기사도 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역사교과서 편찬지침부터가 굉장히 잘못됐습니다. 이른바 민중사관(民衆史觀)이 지나치게 중시되고 있어요.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도, 위정자(爲政者)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도 같이 가야 합니다. 민중사관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우리의 삶에 거대한 영향을 준 사건이나 국제적 흐름 등에 대한 이해는 소홀히 하고, 무슨 민중의 요구를 담는 사건 같은 것들은 침소봉대(針小棒大)되는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그런 문제를 고친다고 고쳤지만, 근본적으로 교과서지침을 고치지 못하고 조금 수정하는 데 그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국사교육을 필수화하자는 주장은 어떻게 봅니까.
“역사교육은 인간교육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인지, 실제 인간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대한 감각을 생기게 하는 것이 역사를 가르치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역사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이는 정치적인 편향과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좌편향적인 역사교육이라면,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역사교육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자기의 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거기서 힘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고통스러웠던 것, 성공적인 것을 제대로 가르쳐서 앞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역사교육입니다.
과거 좌우대립 상황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경우도 헤아리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걸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6·25 때 대한민국 국민이 당한 수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국군이나 미군의 잘못, 6·25 때 북한 평양주민들이 입은 피해, 이런 것들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침서에는 ‘민간인 학살 사례를 북한이 저지른 것하고 이쪽이 저지른 것하고 같은 수로 넣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건 말이 안되는 얘기죠.”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은 배치되지 않아”
이인호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추진위원 중 한 사람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노무현 정권 시절 좌편향 역사교육에 문제의식을 느낀 뉴라이트운동 계열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와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보여주는 건국기념관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성공의 역사”라며 “이 역사가 기록되고 새롭게 이어질 수 있도록 현대사박물관을 짓겠다”고 선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에 시동을 걸었다. 2009년 4월 16일 국립대한민국관건립위원회(이하 건립위·후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로 개칭)가 구성됐다.
하지만 건립위는 건립기본계획을 발표하기도 전에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좌파와 독립유공자단체들에서 ‘건국’이라는 표현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논란은 2008년 건국 60주년기념사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건국절(建國節)’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결국 건립위가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대주제(大主題)에서 ‘건국’이라는 표현은 실종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우려를 전하자 이인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우려가 상당히 있습니다. 추진위원들 자신부터 우리 현대사에 대한 감각이 뚜렷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반대세력 눈치 보기도 있어, 생각했던 대로 잘 진행되지는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을 주장해 온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그런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이 나라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걸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죠.”
이인호 교수는 “건립추진위원 중에서도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고, 학자라는 사람 가운데서도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이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황당하다”고 말했다.
“나라 없는 설움을 극복하고 떳떳한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새로 태어난 것이 1948년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1948년 건국을 얘기한다고 해서 그게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탄생했겠어요?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면서 독립을 갈구했던 모든 분의 염원이 합해져서 생긴 것이 대한민국인데, 독립운동세력과 대한민국이 배치(背馳)되는 것 같이 주장하는 것은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입니다.”
핀란드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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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익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핀란드의 독립을 유지한 케코넨 대통령. |
―핀란드대사를 지낸 입장에서 핀란드화를 평가한다면요.
“국제정치학자들이 핀란드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를 떠나서 그냥 순수하게 인간적인 차원에서 ‘핀란드식 처신, 방법’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서방세계와 공산주의체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독립을 잃지 않고, 내실을 기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가장 많이 확보할 것이냐 하는 고민의 소산이 이른바 핀란드화입니다.”
이 교수는 핀란드인들의 고민을 보여주는 사례로 1956~1981년 대통령을 지낸 케코넨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케코넨 대통령은 집권기간 동안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양 극단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대단한 강권통치를 했습니다. 민족주의가 대두해서 소련을 건드려도 안 되고, 그렇다고 공산주의자로 흘러도 안 되었으니까요.”
이 교수는 “핀란드인들이 우리와 크게 달랐던 것은 밖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보느냐를 의식하기보다는 내실을 중시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핀란드화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핀란드나 우리나라 같이 강대한 이웃에 에워싸인 작은 나라는 물론이고, 초대강국이라는 미국이나 중국도 제멋대로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다른 나라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기들의 행동의 자유에도 어느 정도 제약을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어요. 핀란드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런 부분을 어떻게 슬기롭게 이용하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핀란드화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핀란드는 냉전 시대에 독립을 유지하면서, 시장경제의 이점과 복지국가의 이상을 잘 배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국제정치에서도 떵떵거리는 큰 나라는 아니지만 아주 실속 있게 존경받는 나라죠.”
김평일과 박의춘
이인호 교수가 핀란드대사로 근무할 당시 핀란드주재 북한대사는 김정일의 이복(異腹)동생인 김평일(金平一)이었다.
―김평일과는 만난 적이 있습니까.
“대통령 관저 등에서 외교행사 때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김평일이나 그 부인 모두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늘 감시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더 가깝게 접촉할 기회는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3월, 이 교수는 주러시아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공교롭게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소련주재 북한대사로 온 사람이 박의춘 현 외무상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신임장을 제정했는데, 박의춘이 7번째, 이 교수가 10번째였다고 한다.
―박의춘과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까.
“그때는 북한이 국제무대에서 특히 위축되어 있을 때였어요. 외교행사 같은 데서 말을 좀 붙여보려고 하면 피하더군요. 한번은 ‘핀란드에 있던 김평일 대사는 지금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난 그런 사람 알지도 못한다’고 잡아떼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