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자본에 대한 죄의식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번 작품으로 또 한 번 투자자의 자본에 손해를 입힌다면 상업영화를 이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同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現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이준익 감독(52)은 행운아다. 강우석, 박찬욱, 봉준호 감독과 함께 건국 이래 한국 영화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감독 대열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기 자신의 색채로 만든 영화로 천만 관객 돌파의 대기록을 이뤄내면서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감독은 소위 말하는 ‘트렌드’를 좇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강렬한 영상미나 기술력, 잔인함으로 시선을 끌겠다는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그의 영화 이야기는 늘 삶의 한구석에서 시작된다. 관객 1200만명을 동원한 <왕의 남자>(2005)는 광대들의 이야기였다. 또 다른 히트작 <라디오 스타>(2006)는 한물간 록가수와 매니저가 주인공이었다. <황산벌>(2003)에 이어 이번 <평양성>도 장군보다는 졸개들이 본 전쟁을 코미디물로 그렸다. 여기에 지역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 왕과 장군들의 권위주의까지 깨버렸다. 영화배우 수애에게 대종상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님은 먼 곳에>(2008)도 1971년의 베트남을 배경으로 당대를 주름잡던 가수 김추자의 노래를 살려내 만든 영화이다.
묵은 냄새가 나는 영화소재
보면 단박에 알겠지만 그의 영화소재는 다른 감독들이 경쟁적으로 택할 그런 화려함과 세련미를 갖고 있지 않다. 고물상에서 찾아낸 물건처럼 묵은 냄새가 난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에 이준익식의 내러티브를 입혀 관객을 울리고 웃기며 명품 앤티크로 만들어낸다. 그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블록버스터 취향도 아니고 작가주의적 입장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영화계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이다.
그의 영화가 늘 볼 만한 것은 영화 속에 ‘인간애’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는 자극적 잔혹함이나 섹슈얼리티로 관객들의 눈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 뚝배기 가득 담아주는 맛난 된장국을 한 그릇 잘 먹고 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속에 자신의 세태 풍자 메시지를 담아서 뒷맛의 여운도 함께 곱씹어 보게 한다.
그가 “흥행에 실패하면 상업영화를 떠나겠다”고 벼르며 만든 이번 <평양성>도 마찬가지였다. 나당연합군에 패망하는 고구려의 이야기를 희화적으로 해석해 놓았다. 600년대 이야기인데도 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가 낯설지 않은 건, 오늘날 정치인들의 속성이 차용됐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그의 스타일이다.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그의 영화적 특색에 대해 평론가 정성일씨는 이렇게 평한다.
“영화에서 활동하는 세 개의 선, 시선, 동선, 그리고 감정선. 결국 영화는 선의 연결이다. 종종 이준익을 비평적으로 다룰 때 그의 미장센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혹은 신(scene)의 내용이 섬세하지 않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준익은 신 안에서 오직 감정선만 따라간다. 열 번째 신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그 앞의 아홉 개의 신은 그 눈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정성일, 한국영화비평활극 《필사의 탐독》 바다출판사, 2010)”
평론가들에게 비판받는 이런 부분이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친절한 준익씨’로 보이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는 관객들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눈과 신경을 혹사해야 하는 축약적 스토리 라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이런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영화광고를 만들던 사람이다. 관객들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에서 영화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 보낸 세월보다 수입/배급, 제작자로 보낸 세월이 더 먼저니 돈 무서운 것부터 깨달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를 자기도취적 시각에서 바라볼 여지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가 상업적 마인드의 감독이 된 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더군다나 그는 그 흔한 영화아카데미 한번 가본 적 없는 독학파 감독이다.
서울극장 선전부장으로 영화계 뛰어들어
서울 출생에 세종대학교 미대 동양화과를 다닌 이 감독은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정부종합청사 수위에서 날품팔이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5년 《주부생활》 미술부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당시 《여성자신》의 편집장이던 이세룡 감독을 만난 것이 큰 인연이 됐다. 이 감독이 서울극장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선전부장 겸 도안사로 영화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일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1987년 아예 영화광고 대행사 ‘씨네씨티’를 창립했다. 씨네씨티는 젊은 영화인들의 사랑방이었다. 많은 영화인이 모여들었고, 그때 그의 운명적 파트너인 (주)‘영화사 아침’의 고(故) 정승혜 대표, (주)‘타이거 픽처스’의 조철현 대표를 만나게 된다. 그는 1500편이 넘는 영화광고를 만들어냈다. 당시 한 달에 집에 천만원을 갖다줄 만큼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1992년 영화 제작·홍보·수입·배급사인 씨네월드를 창립해 이준익·조철현·정승혜 3인방시대를 열었다. 영화계에서는 이들을 유비(이준익), 제갈공명(조철현), 관우(정승혜)라 일컬었다.
이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간첩 리철진> <달마야 놀자> <황산벌>뿐 아니라 <키드캅> <아나키스트> <공포택시> 같은 실패작까지 독창적 기획이었다는 점에서는 인정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피> <벨벳 골드마인> <메멘토> <헤드윅> <제너럴> 등 수입작들의 면면 또한 시네월드적 색채를 그대로 띠고 있다.
씨네월드를 창립한 다음 해 이 감독은 첫 작품 <키드캅>을 만들었지만 실패했다. 시나리오 작성법부터 배우면서 찍은 작품인데 성공했다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10년은 감독 일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런 그를 다시 감독의 세계로 끌어들인 사람이 바로 강우석 감독이다.
“제가 <키드캅> 시나리오를 써서 감독 데뷔를 하던 1993년에, 영화감독 경험과 영화적 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투자자들이 저에게 차라리 제작을 맡고 감독을 찾아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강우석 감독을 찾아갔더니, <투캅스> 제작 중이라 못한다고 했어요. 그게 인연이 됐지요. 결국 제가 직접 <키드캅> 감독을 맡았는데, 염려대로 첫 작품을 은퇴작으로 만들어버렸어요.”(웃음)
이 감독은 이후 10년간 제작사 일에만 매진했다. 그러던 중 2003년 <황산벌> 시나리오를 들고 맡아줄 감독을 찾아다니다가 강 감독과 다시 만나게 됐다.
“다들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라고 거절했어요. 그래서 내가 다시 감독을 하기로 마음먹고 강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더니, 선뜻 전액 투자를 해줬어요. 그때 강 감독이 투자해 주지 않았다면, <황산벌>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이어 2005년 <왕의 남자> 때도 투자자 찾기가 힘들었는데, 강 감독이 투자해 줘서 분에 넘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죠. 이런 엄청난 인연이 어디 있겠어요?”
애매한 영화는 만들지 않는 원칙
강 감독 역시 영화계에서 본인이 가장 잘한 일로 ‘이준익 감독을 다시 영화감독으로 불러들인 일’을 꼽는다.
씨네월드 3인방은 회사를 더 확장해 나가는 방법으로 2003년 분사를 결정한다. 이 감독은 씨네월드 대표로 남았다. 명 카피라이터인 정승혜 이사는 (주)‘영화사 아침’을 차려 독립했고,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조철현 대표는 (주)‘타이거 픽처스’를 만들어 나갔다. 이런 결정은 각자 자신의 업무에 독립성을 조금씩 더 갖기로 한 데 있었다. 이 감독은 영화감독 일에 좀 더 몰두하고, 정 대표는 외부 일도 맡을 수 있는 느슨한 구조로 재편한 것이다.
이들 삼인의 합작 관계가 깨지지 않은 것은 그간 세 사람의 공동작업이 꾸준히 진행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번 <평양성>도 조철현 대표가 시나리오에 참여했고, 타이거 픽처스와 영화사 아침이 제작을 맡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2009년 정승혜 대표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 이들 트리오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1200만 관객 신화를 일궈낸 <왕의 남자>를 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감독은 이번 <평양성>을 만들면서 정 대표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고 한다.
정 대표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영화사 아침’은 이정재 이사가 대표를 맡아 이어가고 있다. 이 감독이 맡은 씨네월드는 곧 문을 닫고 타이거 픽처스나 영화사 아침과 일을 해나갈 계획이다.
이들 3인방이 씨네월드를 만들 때 약속한 다섯 가지 기획의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은 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사라져도 이들 중 누군가가 영화계에 남아 있는 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첫째, 새롭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둘째, 나의 경쟁자는 전 국민이다(영화계 안에서 싸우지 않겠다는 말). 셋째, 확실한 카피가 나오지 않는 한 영화는 하지 않는다(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모르는 애매한 영화는 안 한다는 말). 넷째, 행복해지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영화현장 분위기가 즐겁고 신나야 한다는 말). 다섯째, 돈이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영화를 만든다(영화의 상업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함께 판단해야 오래가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말).
이 감독의 영화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한 말이 또 있을까? 이 관점에서 이 감독의 영화를 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이제 겨우 8편. 가뭄인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 감독이 영화를 계속 만들게 하기 위해서 관객들은 <평양성>을 봐주든지, 아님 은퇴를 못하게 하든지, 어떤 격려든 보내줘야 할 것 같다.⊙
이준익 감독 인터뷰
“나는 영화계의 아나키스트”
이준익 감독이 이번 작품 <평양성>이 손익분기점인 관객 270만명을 넘기지 못할 경우 상업영화감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해서 화제다. 8타석 3안타(8편의 영화 중 3편이 히트)로 거의 4할대에 가까운 안타제조기인 그가 상업영화를 그만둔다는 건 사실 물고기가 물을 떠난다는 말로 들린다. 바로 전 영화로 흥행성적 최하위를 기록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에서 겪은 쓰라림을 잊지 못해서 아닐까?
인터뷰를 해보니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용광로처럼 끓고 있었다. 단지 관객들의 외면을 두려워할 뿐.
그를 홍익대 상상마당 앞 사무실에서 만났다. 푹신한 소파와 몇 가지 악기가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는 옥탑방형 사무실은 아늑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 선율을 줄이고 두 시간 동안 쉼 없이 공방전 같은 인터뷰를 나눴다.
상업영화 포기 여부의 기로에 섰다
―<평양성>이 실패하면 다시는 상업영화를 안 하겠다고 했어요. 영화 홍보성 발언인가요?
“저는 처음 영화계에서 일을 시작할 때, 1986년 마케팅 분야부터 했어요. (현장에서 시작하는) 다른 감독들과는 반대방향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거죠. 그래서 자본과 작품의 상관성에 (다른 감독들에 비해) 예민하게 반응하다 보니까, 최근의 연속적 상업적 수익창출 실패가 굉장한 괴로움으로 작용하더라고요. 저는 자본에 대한 죄의식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번 작품으로 또 한 번 투자자의 자본에 손해를 입힌다면 상업영화를 이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에요.”
―그래도 어느 정도 흥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예상 분기점은 넘어섰나요?
“270만명이 들어야 손익분기점이 되는데, 못 넘을 것 같아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상업영화를 포기함으로써 제가 뱉어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요.”
―영화에서 아예 손을 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집단 작업이고, 지금까지 함께해 온 동료와 후배들과의 연장선상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영화 테두리 안에 남겠다는 것은 분명하네요.
“그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불확실하죠.”
―영화계 입장에서는 <왕과 나>와 같이 한국영화사에 엄청난 흥행업적을 남긴 감독을 쉽게 놔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겨우 여덟 작품 중에서 그런 작품이 나온다는 건 대단한 기록이잖아요.
“결과적으로 과도한 성과가 났는데, 그 성과는 저 혼자만의 업적이 아니에요. 공(功)과 과(過)를 감독의 입장에서 모두 지게 되기 때문에 (영화계에서는) 공을 유지시키려는 입장은 있겠죠. 그런데 (은퇴결정은) 저 스스로의 선택에 있는 것 같아요. 현재 상영작을 영화관에서 내리고 나면 심리적 변화가 또 생기겠죠. 하지만 내일 일은 장담할 수 없으니까 (제가 무엇을 할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난 인물을 우상화하지 않아
―<황산벌>에 이어 삼국전쟁을 주제로 한 <평양성>을 또 만들었는데, 왜 이 시기에 집착하는지요?
“<황산벌>은 신라와 백제의 전쟁으로, 남한사회가 가진 동서(東西) 간의 지역감정을 풍자한 영화고, <평양성>은 남북(南北) 간의 이념에 대한 풍자예요. 소재의 연결성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 거죠.
2003년의 가장 큰 이슈는 노무현 정권의 탄생에 따른 지역감정이었어요. 선거철에 극대화되는 좌우 지역감정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통했던 거죠. <평양성>은 고구려가 주체이기 때문에 현재와 비교하면 자연히 남북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관객들은 북한을 인식하지 않아요. 분단이 60년인데, 근래에 극장을 찾는 주요 관객들은 20, 30대 초중반이니까 그들에게 북한은 거의 없는 나라로 인식되는 거죠.
오천 년 역사에서 60년간 분단이 이어지고 있고, <평양성>에서 남북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그리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놀랍게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서) ‘아, 나에게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는데, 허상을 꿈꾸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정치인들 캐릭터는 현대적이던데요?
“<평양성>은 2011년도의 현재를 반영하기 위한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영화예요. <황산벌>도 2003년도의 정치상황을 풍자하는 장면(scene)과 상징으로 가득 채운 영화예요. 두 영화는 모두 현대정치 풍자극이에요.”
―우리가 아는 역사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했던 기득권층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감독의 두 작품은 전쟁이라는 역사를 민초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려는 일종의 신문화적 해석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지엄한 왕의 입에서 지역방언이 나오게 함으로써 표준어가 내포한 권위를 깨버리는 것도 그렇고요. 또 아무리 살벌한 권위주의 시대라 해도 장군의 한마디에 민초들이 아무 생각 없이 전장으로 몰려나왔을 것이 자명한데, 사실 무시됐던 그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제 의도를 정확한 시선으로 바라본 관점입니다. 서양사극은 어느 계층이 주인공이 되던 영웅주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집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민중의 존재감이 고유의 문화를 지켜온 에너지인데, 영화라는 매체는 서양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 구조를 답습하는 과정에서 영웅주의적인 것이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저는 탈이데올로기, 반(反) 영웅주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어 답습을 깨려고 합니다. 제 작품에서는 인물들을 우상화시키지 않아요. 한반도 역사 안에서는 영웅이 나라를 지킨 적이 한 번도 없고, 지배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천한 적도 없어요. 자체만의 완성도로 본다면 <황산벌>보다 <평양성>이 여러 가지 면에서 진화된 작품이거든요. 그런데 스코어상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준익의 네거티브 서사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어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가장 애착
―관객의 반응은 예측 없이 밀려오는 파도 같은 것 아닌가요? 항상 유동적이지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젊은 여성관객들은 ‘<왕의 남자> 같은 작품을 이준익이 다시 찍어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나이 든 남성관객들은 ‘<라디오 스타> 같은 작품을 다시 만들어줄 것이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감독의 입장에서는 제가 <왕의 남자>나 <라디오 스타> 같은 작품을 다시 찍으면 제 똥을 제가 먹는 것과 같은 거라고 봐요. 저는 대중의 심리적 코드를 (영화에) 역설적으로 반영해서 영화를 찍어왔는데, 그 역설이 이제 안 통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는 이제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유효가치가 끝났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감독의 의도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건 좌절이지요?
“<평양성>에서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들이 휘발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작품에서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모두 겉도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사극을 만드는 감독의 입장에서 영화에 담긴 것은 현실이거든요. 중국의 황하문명은 고려시대 이후부터 영향을 받은 거고, 이전에 우리나라는 동북쪽에서 내려온 몽골리안 문명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흐름을 교과서가 정리해 내지 못하고, 어느 사학자도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성에 대한 가치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행한 거예요. 저는 자신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멸시한 민족은 망해도 싸다고 생각하거든요.”
―17년간 총 8편의 작품을 만들었죠. 이 감독의 영화를 한번 분류해 보면 어떻습니까?
“1993년 데뷔작 <키드캅>은 제가 ‘함량미달인 선무당이 낳은 사생아’라고 자평했어요. 감독으로서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잔인한 자평을 한 거죠. 그 10년 후인 <황산벌> 이후부터는 8년간 일곱 작품을 찍었기 때문에 연대기별로 정리가 안 될 것 같은데… 단기간에 상업 자본을 기반으로 이렇게 많은 작품을 찍은 전적은 전 세계적으로 없을 겁니다. 7편 중 사극이 5편이나 돼요. 그런데 사극은 현대극보다 더 많은 수고가 들기 때문에, 그렇게 짧은 기간에 완성해 냈다는 것이 저 자신도 신기할 정도예요. (단기간에 많은 작품을 찍다 보니) 한 작품이 끝나고 리셋(reset-머릿속을 지우고 다시 시작한다는 뜻)을 하지 않으면 다음 작품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어요.
굳이 나누자면 역사적으로 <황산벌>과 <평양성>은 고대사, <왕의 남자>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중세사, <님은 먼 곳에>는 현대사극,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은 동시대 현대물인 거죠. (지금 나눠보니까) 작품의 배경이 고대, 중세, 현대, 현재로 나눌 수 있네요. 1300년 전부터 현재까지를 거쳐온 거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이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1500년대 임진왜란 직전 상황을 다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찍은 영화 중 가장 적은 관객의 호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명배우한테 많이 거절당해 이제는 제안조차 안 해
―이 감독은 유명배우들을 잘 쓰지 않지요?
“왜요, 많이 거절당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애초에 제안을 안 하게 되는 거죠.”
―특히 대부분의 여자배우가 양념 격인데요. 여주인공도 관객들에게는 관심인데, 그 부분은 의식하지 않나 봐요?
“저는 ‘인간의 뇌 회로는 인간의 삶의 경로에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세대는 여자와 함께 성장할 기회가 적었어요. 특히 저는 남자형제(이 감독은 아들 3형제의 막내다.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으나, 어릴 때 사망했다)만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고, 중고등학교도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 나왔고, 군대와 사회 모두 남자들과만 생활했어요. 대학 때 여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여자들과의 자리가 어색하니까 남자들끼리만 어울려 다니곤 했어요. 제 인생에서 여자와 함께한 시간은 제 영화 속에 담긴 여배우들의 분량만큼인 것 같아요.”(웃음)
―결혼도 했잖아요?
“결혼했다가 2003년에 이혼했죠. 아들, 딸은 모두 결혼해서 지금은 24개월짜리 외손자가 있는 할아버지예요.”
―이혼한 것도 여성존중사상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께서 한학자셨기 때문에 왜놈과 양놈을 굉장히 싫어하셨고,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교육도 거의 못 받고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죠. 저희 아버지는 무능력하게 현대시대를 견뎌내신 분이시죠. 조선시대 가부장제가 현대사회 남자들의 왜곡된 사회의식으로 이어진 것이 저희 세대까지인 거죠. 저희 세대가 마지막인 것 같아요. 386세대는 50년대생보다는 유연성이 있어요. 386세대는 광장문화를 스스로 창출해 냈기 때문에 합리를 가장한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50년대생들은 표출하지 못하고 억눌려 청춘을 보냈기 때문에 비뚤어지고 왜곡된 남성주의적 신념이 강해요. 386세대 이후부터가 조선시대 가부장적 인식에서 많이 빠져나온 세대죠. 영화는 인성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치장을 해서 감춰보려고 해도 감독의 무의식과 본성은 영화에 반영될 수밖에 없어요.”
―특별히 영화공부를 안 했는데, 시나리오도 쓰고 영화를 수입/배급하는 안목도 출중합니다. 어떻게 습득한 건가요?
“저는 모르면 잘 물어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능력이에요. 우리나라는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선배들이 밥 사주면서 다 알려주잖아요. 그대로만 하면 칭찬받고. 나중에는 아예 일을 맡겨주면 그걸 통해서 나만의 색을 내고, 그러면 다른 곳에서 일이 들어오고 하는 거죠. 일의 본질을 파악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 쪽에는 전문가들이 많으니까 물어보면 다 알려줘요.”
돈은 영화를 찍는 기초단위
―영화 광고에서 시작해서 수입/배급과 제작, 감독까지 모든 분야의 일을 다 섭렵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 그중 가장 편하고 진심으로 즐거웠던 일은 어떤 건가요?
“감독이 가장 즐거웠죠. 존재와 가치를 믹스 매치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발견하는 쾌감이 개인이 만들어낸 어떤 창조보다 더 강렬합니다. 집단성이라는 영화장르의 특성에서 오는 특징이지요. 작품을 하면서 주어지는 많은 선택(배우, 장소 캐스팅, 의상 선택 등)에서 오는 놀라운 현상들이 연결되어서 생기는 집단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엄청난 쾌감이에요. 계획된 것 안에서 생기는 많은 우연을 개연성 있게 몰아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질리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대중의 인정을 받을 때는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있죠.”
―예전 인터뷰에서 ‘빚은 영화를 만드는 나의 원동력이다’라고 말했더라고요. 지금도 그런가요?
“<공포택시>라고 자체 제작한 영화가 있었는데, 전국에서 5000명이 봤어요. 그래서 그 작품으로 12억원의 빚을 졌죠. 하지만 그 작품을 만회하기 위해 <달마야, 놀자>를 찍게 됐어요. 결핍이 욕망으로 돌변하는 순간 폭발적인 에너지가 발산되는 거죠. 또 제가 수입한 영화 중 해리슨 포드 주연의 <케인즈 나인티>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걸로 30억원의 빚이 생겼어요. 그때는 해리슨 포드가 정말 미웠어요(웃음). 그래서 그걸 갚기 위해 죽어라고 찍은 작품이 <왕의 남자>예요.
예전에는 영화가 돈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현재는 영화보다 기업논리가 앞선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돈이 영화를 만들어요. 어떤 누구도 돈 앞에 장사 없듯이, 현재의 상업영화는 돈 중심으로 영화를 사고해야 하는 것이 현재 한국영화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만드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돈에 대한 자기검열이 생기게 돼요. 그것을 잘 맞춰내면 돈도 벌고 관객에게도 호감을 얻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고, 못 맞추면 무능한 감독이 되는 것이 자본주의 영화계의 현실이에요. 그래도 저는 <왕의 남자>의 흥행으로 성공을 거둔 굉장히 행복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죠.”
―제작자들이 좋아하는 감독 아닌가요? 제작비를 깨끗하게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항상 예산 안에서 영화를 찍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작자 출신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 외국영화 수입하러 미국에 갔다가 영화전문서적대에서 영화 관련 책을 두 권 산 적이 있어요. 《나는 할리우드에서 100편의 영화를 찍어도 1달러도 손해 보지 않는다》와 《예산계획(budget scheduling)》이란 책이었어요. 제작비를 확보하지 않고는 영화를 크랭크인 할 수 없기 때문에, 돈은 영화를 찍는 가장 기초단위이기 때문에, 엄격히 엄수하려고 하죠. 영화를 찍다가 안 찍어도 될 것 같은 장면은 뺍니다. 스케줄을 줄여서 예산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죠.”
―많은 감독이 예산 때문에 제작자들과 다투는데 그런 적은 없겠어요?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스태프들은 이제 그만 제작자 마인드를 버리고 감독 마인드를 가지고 장면에 욕심을 내라고 하소연을 하죠. 예를 들어 영화에서는 같은 날인데 실제 영화를 다른 날짜에 찍게 되면 저는 날씨가 달라도 그냥 스케줄대로 진행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편집과정에서 밸런스를 맞추느라 고생하는 경우가 있죠. 어떤 감독들은 날씨가 안 맞으면 촬영 접고 다른 날 찍거든요. 그런데 그러면 하루예산 1000만원가량이 그냥 날아가거든요. 그리고 밥값은 계속 나가고, 스케줄은 길어지기 때문에 예산은 점점 늘어나는 거죠.”
시나리오는 物理고 연기는 化學
―연출하면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요?
“인물의 감정이에요. 이야기는 이미 시나리오상에서 다 반영된 거고, 연출이라는 것은 연기를 끄집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시나리오에 있는 것에 지배받지 않고, 시나리오상에 있는 이야기에 맞춰 캐스팅된 배우가 선택하는 감정과 감독이 주문하는 감정이 가장 중요한 거죠. 시나리오는 물리고, 연기는 감정이고 화학이니까요.”
―현재 활동하는 감독 중에서 라이벌을 꼽자면? 꼭 우리나라 감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는 특정 라이벌을 선정하지 않아요. (라이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오만한 성격을 가진 거죠. 부러워야 누군가와 경쟁을 하는 건데, 저는 누구를 부러워하지를 않아요.”
―영화를 독학으로 배운 감독으로서 가지는 장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전 한국영화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거죠. 영화를 배운 감독들은 외국의 걸작들에 대한 오마주(hommage-존경하는 사람의 작품을 답습함)에 영광스러운 마음과 자부심을 가지겠지만, 저는 그런 것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아요. 저도 해외걸작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따라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전 영화 중에서 <왕의 남자>나 <황산벌> 같은 작품은 없었거든요. 이전 영화들을 따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가 영화를 제작하면서 스스로 지키고 싶은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영화 아이디어는 주로 어떤 과정에서 얻나요?
“제가 영화를 집단적 지성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료가 많기 때문이에요. 저와 ‘타이거 픽처스’에서 함께 일하는 조철현 대표는 걸어다니는 인문학사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박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제 영화적 자양분이 되는 역사, 문학, 철학 등의 인문학 상식에 많은 도움을 주지요. 그 외에도 다양한 스태프의 도움에 힘입어서 아이디어를 얻는 거죠. 저는 스피커일 뿐이에요. 다양한 스태프의 아이디어와 목소리가 스피커인 저를 통해 나가는 겁니다. 8편의 작품이 이준익이라는 개인의 사관이나 지식체계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힘을 모아서 스피커로 날리고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죠.”
―아이디어가 아직도 무궁무진한 것 같은데, 상업영화를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습니다.(웃음)
“하루에도 2~3편의 시나리오를 썼다가 엎었다가 해요. 고조선부터 SF까지 수십 번도 왔다갔다 합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저는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대기업의 자본을 손실시킨 감독은 자격 박탈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흥망성쇠 거치니 이제 영화가 무섭다
―하지만 <왕의 남자>에서처럼 그 손해가 한 번의 대박으로 보상이 가능한 게 영화산업 아닌가요?
“제가 제작한 총 8편의 수익들을 놓고 보면 저는 아직까지는 수익이 난 감독이죠. <왕의 남자>로 몇백억 원을 벌어들였기 때문에 이후의 작품들로 몇십억 원씩 까먹어도 손해는 없어요. 하지만 투자자가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기업의 자본을 손실시킨 곳도 있으니까요. 한창 성공가도를 달릴 때는 영화가 신나고 자신만만했어요. 하지만 흥망성쇠를 몇 번 거치다 보니 무서워지더라고요.”
―이 감독의 영화는 사극이든, 현대극이든 거리에서 시작해 거리에서 끝나는데요, 공간에 집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 세대는 광장을 잃어버린 세대예요. 길거리에서 세상을 배우고 광장에서 방황했던 세대는 광장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그래서 제 영화는 모두 끝과 시작 중 하나가 광장입니다. <라디오 스타>는 콘서트에서 시작해서, 방송국 마당에서 끝이 나고, <님은 먼 곳에>, <황산벌>, <평양성>은 모두 전쟁터라는 광장에서 펼쳐지고, <왕의 남자>는 마당에서 줄타기로 시작해서, 궁 마당에서 끝나잖아요. 광장을 잃어버린 지금의 시대에는 극장이 광장이에요. 개인의 사적인 생활을 훔쳐보는 관음적인 심리의 마음으로 극장을 찾게 하는 영화들도 있겠지만, 제 영화는 광장이라는 극장에 모여서 더 큰 광장을 내다보자는 거예요. 하지만 현재의 관객들은 광장이야기보다는 미세한 남녀의 이야기나 잔혹한 살인마의 사소한 과거 이야기 등을 보고 싶어하니까, 저는 상업적으로 점점 불리하게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초기 작업의 스승을 꼽자면?
“한두 명이 아니고 다양한데… 이세룡, 이황림, 원정수 감독 등 무수히 많아요. 귀동냥으로 들은 것까지 치면 오백여 명 정도 될 거예요. 영화제작 일을 하면서 수많은 감독을 만났으니까요.”
―영화 현장에서 이 감독의 리더십은 어떤 유형인가요?
“지시형이 아니라 솔선수범형이에요. 배우에게도 먼저 연기를 보여줘요. 물론 연기를 못하니까 대충 동선을 설명해 주면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을 파악해서 연기하는 거죠.”(그는 배우로서 자신의 영화 <라디오 스타>(2006)에서 주방장 역으로 출연했고,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2010)에서는 정 사장 역으로 나왔었다.)
―직접 영화시장을 다닌 것으로 아는데, 몇 편이나 수입했습니까. 타율로 보면 얼마나 되나요?
“50~60편 정도 수입했어요. 타율은 2할 정도 될 거예요. 수입/배급으로 저는 70억원이나 손해를 봤어요. (미국 영화수입 시장에서 한국이 가진) 구매조건의 불리함 때문에 국내수입업자들은 초이스가 많지 않아요. 보따리 장사일 뿐이에요. A급은 직배사들이 가져가고, B급은 대기업이 가져가니까 C급만으로 초이스가 한정되는 거예요. 완전 레드오션인 거죠.”
미국의 영화 제국주의에 오바이트 날 정도
―그래도 수입영화 중 히트작이 있지요?
“<러시아워2>, <나인 야드>, <메멘토>, <헤드윅> 등등 많죠.”
―한국영화계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요?
“비관적입니다. 고급인력을 영입하거나 잡아둘 수 없을 정도로 스태프에 대한 처우가 너무나 형편이 없어요.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들이 영화계로 잘 안 와요. 온다고 해도 처음에는 왔다가 2~3년 만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가죠. 젊은 피를 수혈받아야만 영화생산의 연속성이 유지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최근에는 영화작업 현장에서 인원수를 맞추기가 힘들 정도로 인력이 모자라요.”
―앞으로 영화계의 후배들에게 어떤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남고 싶은가요?
“한국 상업영화는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학습 되고, (일본이 물러간 이후에는) 할리우드 영화에 중독돼서 그것을 답습해 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껴왔어요. 작가주의적 라인은 한때 유럽영화에 심취했던 ‘프랑스문화원’ 출입자 출신들의 영화에 대한 열망을 작가적 가치에 대한 증명을 통해 성취감을 느껴온 것이고요. 그 두 가지가 한국영화의 양대 산맥으로 해서 이어져 왔는데, 저는 두 방향이 다 싫었어요.
저는 ‘세상의 모든 상은 사라져야 한다’는 아나키스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요. 상을 줄 자격을 누가 정한 겁니까? 저는 아카데미 영화들을 수입하기 위해 느꼈던 수치심이 너무 크고, 전 세계의 영화를 미국의 영화 제국주의에 줄서게 하는 그 권력이 오바이트(overeat)가 날 만큼 거부감이 들어요. 만약에 제가 영화 산업의 메커니즘을 모르고 순수 영화 창작만을 해왔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겠지만, 해본 사람으로서 관객들의 돈을 모아 그런 외국영화들을 사다 날랐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관객들에게 너무 죄스러워요. 그래서 제가 더 사극에 배팅을 하는 것 같아요. ‘인간의 뇌 회로는 인간의 삶의 경로에 비례한다’는 제 생각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이 감독은 소위 말하는 ‘트렌드’를 좇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강렬한 영상미나 기술력, 잔인함으로 시선을 끌겠다는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그의 영화 이야기는 늘 삶의 한구석에서 시작된다. 관객 1200만명을 동원한 <왕의 남자>(2005)는 광대들의 이야기였다. 또 다른 히트작 <라디오 스타>(2006)는 한물간 록가수와 매니저가 주인공이었다. <황산벌>(2003)에 이어 이번 <평양성>도 장군보다는 졸개들이 본 전쟁을 코미디물로 그렸다. 여기에 지역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 왕과 장군들의 권위주의까지 깨버렸다. 영화배우 수애에게 대종상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님은 먼 곳에>(2008)도 1971년의 베트남을 배경으로 당대를 주름잡던 가수 김추자의 노래를 살려내 만든 영화이다.
묵은 냄새가 나는 영화소재
보면 단박에 알겠지만 그의 영화소재는 다른 감독들이 경쟁적으로 택할 그런 화려함과 세련미를 갖고 있지 않다. 고물상에서 찾아낸 물건처럼 묵은 냄새가 난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에 이준익식의 내러티브를 입혀 관객을 울리고 웃기며 명품 앤티크로 만들어낸다. 그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블록버스터 취향도 아니고 작가주의적 입장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영화계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이다.
그의 영화가 늘 볼 만한 것은 영화 속에 ‘인간애’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는 자극적 잔혹함이나 섹슈얼리티로 관객들의 눈을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 뚝배기 가득 담아주는 맛난 된장국을 한 그릇 잘 먹고 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속에 자신의 세태 풍자 메시지를 담아서 뒷맛의 여운도 함께 곱씹어 보게 한다.
그가 “흥행에 실패하면 상업영화를 떠나겠다”고 벼르며 만든 이번 <평양성>도 마찬가지였다. 나당연합군에 패망하는 고구려의 이야기를 희화적으로 해석해 놓았다. 600년대 이야기인데도 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가 낯설지 않은 건, 오늘날 정치인들의 속성이 차용됐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그의 스타일이다.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그의 영화적 특색에 대해 평론가 정성일씨는 이렇게 평한다.
“영화에서 활동하는 세 개의 선, 시선, 동선, 그리고 감정선. 결국 영화는 선의 연결이다. 종종 이준익을 비평적으로 다룰 때 그의 미장센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혹은 신(scene)의 내용이 섬세하지 않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준익은 신 안에서 오직 감정선만 따라간다. 열 번째 신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그 앞의 아홉 개의 신은 그 눈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정성일, 한국영화비평활극 《필사의 탐독》 바다출판사, 2010)”
평론가들에게 비판받는 이런 부분이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친절한 준익씨’로 보이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는 관객들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눈과 신경을 혹사해야 하는 축약적 스토리 라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이런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영화광고를 만들던 사람이다. 관객들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에서 영화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 보낸 세월보다 수입/배급, 제작자로 보낸 세월이 더 먼저니 돈 무서운 것부터 깨달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를 자기도취적 시각에서 바라볼 여지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가 상업적 마인드의 감독이 된 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더군다나 그는 그 흔한 영화아카데미 한번 가본 적 없는 독학파 감독이다.
서울극장 선전부장으로 영화계 뛰어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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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익 감독과 함께 ‘씨네월드 3인방’ 시대를 구가했던 조철현 대표와 정승혜 전 이사. |
이 일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1987년 아예 영화광고 대행사 ‘씨네씨티’를 창립했다. 씨네씨티는 젊은 영화인들의 사랑방이었다. 많은 영화인이 모여들었고, 그때 그의 운명적 파트너인 (주)‘영화사 아침’의 고(故) 정승혜 대표, (주)‘타이거 픽처스’의 조철현 대표를 만나게 된다. 그는 1500편이 넘는 영화광고를 만들어냈다. 당시 한 달에 집에 천만원을 갖다줄 만큼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1992년 영화 제작·홍보·수입·배급사인 씨네월드를 창립해 이준익·조철현·정승혜 3인방시대를 열었다. 영화계에서는 이들을 유비(이준익), 제갈공명(조철현), 관우(정승혜)라 일컬었다.
이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간첩 리철진> <달마야 놀자> <황산벌>뿐 아니라 <키드캅> <아나키스트> <공포택시> 같은 실패작까지 독창적 기획이었다는 점에서는 인정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피> <벨벳 골드마인> <메멘토> <헤드윅> <제너럴> 등 수입작들의 면면 또한 시네월드적 색채를 그대로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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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벌〉. |
“제가 <키드캅> 시나리오를 써서 감독 데뷔를 하던 1993년에, 영화감독 경험과 영화적 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투자자들이 저에게 차라리 제작을 맡고 감독을 찾아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강우석 감독을 찾아갔더니, <투캅스> 제작 중이라 못한다고 했어요. 그게 인연이 됐지요. 결국 제가 직접 <키드캅> 감독을 맡았는데, 염려대로 첫 작품을 은퇴작으로 만들어버렸어요.”(웃음)
이 감독은 이후 10년간 제작사 일에만 매진했다. 그러던 중 2003년 <황산벌> 시나리오를 들고 맡아줄 감독을 찾아다니다가 강 감독과 다시 만나게 됐다.
“다들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라고 거절했어요. 그래서 내가 다시 감독을 하기로 마음먹고 강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더니, 선뜻 전액 투자를 해줬어요. 그때 강 감독이 투자해 주지 않았다면, <황산벌>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이어 2005년 <왕의 남자> 때도 투자자 찾기가 힘들었는데, 강 감독이 투자해 줘서 분에 넘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죠. 이런 엄청난 인연이 어디 있겠어요?”
애매한 영화는 만들지 않는 원칙
강 감독 역시 영화계에서 본인이 가장 잘한 일로 ‘이준익 감독을 다시 영화감독으로 불러들인 일’을 꼽는다.
씨네월드 3인방은 회사를 더 확장해 나가는 방법으로 2003년 분사를 결정한다. 이 감독은 씨네월드 대표로 남았다. 명 카피라이터인 정승혜 이사는 (주)‘영화사 아침’을 차려 독립했고,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조철현 대표는 (주)‘타이거 픽처스’를 만들어 나갔다. 이런 결정은 각자 자신의 업무에 독립성을 조금씩 더 갖기로 한 데 있었다. 이 감독은 영화감독 일에 좀 더 몰두하고, 정 대표는 외부 일도 맡을 수 있는 느슨한 구조로 재편한 것이다.
이들 삼인의 합작 관계가 깨지지 않은 것은 그간 세 사람의 공동작업이 꾸준히 진행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번 <평양성>도 조철현 대표가 시나리오에 참여했고, 타이거 픽처스와 영화사 아침이 제작을 맡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2009년 정승혜 대표가 대장암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 이들 트리오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1200만 관객 신화를 일궈낸 <왕의 남자>를 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감독은 이번 <평양성>을 만들면서 정 대표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고 한다.
정 대표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영화사 아침’은 이정재 이사가 대표를 맡아 이어가고 있다. 이 감독이 맡은 씨네월드는 곧 문을 닫고 타이거 픽처스나 영화사 아침과 일을 해나갈 계획이다.
이들 3인방이 씨네월드를 만들 때 약속한 다섯 가지 기획의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은 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사라져도 이들 중 누군가가 영화계에 남아 있는 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첫째, 새롭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둘째, 나의 경쟁자는 전 국민이다(영화계 안에서 싸우지 않겠다는 말). 셋째, 확실한 카피가 나오지 않는 한 영화는 하지 않는다(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모르는 애매한 영화는 안 한다는 말). 넷째, 행복해지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영화현장 분위기가 즐겁고 신나야 한다는 말). 다섯째, 돈이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영화를 만든다(영화의 상업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함께 판단해야 오래가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말).
이 감독의 영화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한 말이 또 있을까? 이 관점에서 이 감독의 영화를 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이제 겨우 8편. 가뭄인 한국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이 감독이 영화를 계속 만들게 하기 위해서 관객들은 <평양성>을 봐주든지, 아님 은퇴를 못하게 하든지, 어떤 격려든 보내줘야 할 것 같다.⊙
이준익 감독 인터뷰
“나는 영화계의 아나키스트”
이준익 감독이 이번 작품 <평양성>이 손익분기점인 관객 270만명을 넘기지 못할 경우 상업영화감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해서 화제다. 8타석 3안타(8편의 영화 중 3편이 히트)로 거의 4할대에 가까운 안타제조기인 그가 상업영화를 그만둔다는 건 사실 물고기가 물을 떠난다는 말로 들린다. 바로 전 영화로 흥행성적 최하위를 기록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에서 겪은 쓰라림을 잊지 못해서 아닐까?인터뷰를 해보니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용광로처럼 끓고 있었다. 단지 관객들의 외면을 두려워할 뿐.
그를 홍익대 상상마당 앞 사무실에서 만났다. 푹신한 소파와 몇 가지 악기가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는 옥탑방형 사무실은 아늑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 선율을 줄이고 두 시간 동안 쉼 없이 공방전 같은 인터뷰를 나눴다.
상업영화 포기 여부의 기로에 섰다
―<평양성>이 실패하면 다시는 상업영화를 안 하겠다고 했어요. 영화 홍보성 발언인가요?
“저는 처음 영화계에서 일을 시작할 때, 1986년 마케팅 분야부터 했어요. (현장에서 시작하는) 다른 감독들과는 반대방향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거죠. 그래서 자본과 작품의 상관성에 (다른 감독들에 비해) 예민하게 반응하다 보니까, 최근의 연속적 상업적 수익창출 실패가 굉장한 괴로움으로 작용하더라고요. 저는 자본에 대한 죄의식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번 작품으로 또 한 번 투자자의 자본에 손해를 입힌다면 상업영화를 이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에요.”
―그래도 어느 정도 흥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예상 분기점은 넘어섰나요?
“270만명이 들어야 손익분기점이 되는데, 못 넘을 것 같아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상업영화를 포기함으로써 제가 뱉어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아요.”
―영화에서 아예 손을 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집단 작업이고, 지금까지 함께해 온 동료와 후배들과의 연장선상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영화 테두리 안에 남겠다는 것은 분명하네요.
“그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불확실하죠.”
―영화계 입장에서는 <왕과 나>와 같이 한국영화사에 엄청난 흥행업적을 남긴 감독을 쉽게 놔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겨우 여덟 작품 중에서 그런 작품이 나온다는 건 대단한 기록이잖아요.
“결과적으로 과도한 성과가 났는데, 그 성과는 저 혼자만의 업적이 아니에요. 공(功)과 과(過)를 감독의 입장에서 모두 지게 되기 때문에 (영화계에서는) 공을 유지시키려는 입장은 있겠죠. 그런데 (은퇴결정은) 저 스스로의 선택에 있는 것 같아요. 현재 상영작을 영화관에서 내리고 나면 심리적 변화가 또 생기겠죠. 하지만 내일 일은 장담할 수 없으니까 (제가 무엇을 할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난 인물을 우상화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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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성〉. |
“<황산벌>은 신라와 백제의 전쟁으로, 남한사회가 가진 동서(東西) 간의 지역감정을 풍자한 영화고, <평양성>은 남북(南北) 간의 이념에 대한 풍자예요. 소재의 연결성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 거죠.
2003년의 가장 큰 이슈는 노무현 정권의 탄생에 따른 지역감정이었어요. 선거철에 극대화되는 좌우 지역감정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통했던 거죠. <평양성>은 고구려가 주체이기 때문에 현재와 비교하면 자연히 남북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관객들은 북한을 인식하지 않아요. 분단이 60년인데, 근래에 극장을 찾는 주요 관객들은 20, 30대 초중반이니까 그들에게 북한은 거의 없는 나라로 인식되는 거죠.
오천 년 역사에서 60년간 분단이 이어지고 있고, <평양성>에서 남북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그리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놀랍게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서) ‘아, 나에게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는데, 허상을 꿈꾸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정치인들 캐릭터는 현대적이던데요?
“<평양성>은 2011년도의 현재를 반영하기 위한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영화예요. <황산벌>도 2003년도의 정치상황을 풍자하는 장면(scene)과 상징으로 가득 채운 영화예요. 두 영화는 모두 현대정치 풍자극이에요.”
―우리가 아는 역사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했던 기득권층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감독의 두 작품은 전쟁이라는 역사를 민초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려는 일종의 신문화적 해석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지엄한 왕의 입에서 지역방언이 나오게 함으로써 표준어가 내포한 권위를 깨버리는 것도 그렇고요. 또 아무리 살벌한 권위주의 시대라 해도 장군의 한마디에 민초들이 아무 생각 없이 전장으로 몰려나왔을 것이 자명한데, 사실 무시됐던 그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제 의도를 정확한 시선으로 바라본 관점입니다. 서양사극은 어느 계층이 주인공이 되던 영웅주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집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민중의 존재감이 고유의 문화를 지켜온 에너지인데, 영화라는 매체는 서양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그 구조를 답습하는 과정에서 영웅주의적인 것이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저는 탈이데올로기, 반(反) 영웅주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어 답습을 깨려고 합니다. 제 작품에서는 인물들을 우상화시키지 않아요. 한반도 역사 안에서는 영웅이 나라를 지킨 적이 한 번도 없고, 지배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천한 적도 없어요. 자체만의 완성도로 본다면 <황산벌>보다 <평양성>이 여러 가지 면에서 진화된 작품이거든요. 그런데 스코어상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준익의 네거티브 서사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어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가장 애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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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젊은 여성관객들은 ‘<왕의 남자> 같은 작품을 이준익이 다시 찍어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나이 든 남성관객들은 ‘<라디오 스타> 같은 작품을 다시 만들어줄 것이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감독의 입장에서는 제가 <왕의 남자>나 <라디오 스타> 같은 작품을 다시 찍으면 제 똥을 제가 먹는 것과 같은 거라고 봐요. 저는 대중의 심리적 코드를 (영화에) 역설적으로 반영해서 영화를 찍어왔는데, 그 역설이 이제 안 통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는 이제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유효가치가 끝났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감독의 의도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건 좌절이지요?
“<평양성>에서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들이 휘발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작품에서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모두 겉도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사극을 만드는 감독의 입장에서 영화에 담긴 것은 현실이거든요. 중국의 황하문명은 고려시대 이후부터 영향을 받은 거고, 이전에 우리나라는 동북쪽에서 내려온 몽골리안 문명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흐름을 교과서가 정리해 내지 못하고, 어느 사학자도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성에 대한 가치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행한 거예요. 저는 자신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멸시한 민족은 망해도 싸다고 생각하거든요.”
―17년간 총 8편의 작품을 만들었죠. 이 감독의 영화를 한번 분류해 보면 어떻습니까?
“1993년 데뷔작 <키드캅>은 제가 ‘함량미달인 선무당이 낳은 사생아’라고 자평했어요. 감독으로서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잔인한 자평을 한 거죠. 그 10년 후인 <황산벌> 이후부터는 8년간 일곱 작품을 찍었기 때문에 연대기별로 정리가 안 될 것 같은데… 단기간에 상업 자본을 기반으로 이렇게 많은 작품을 찍은 전적은 전 세계적으로 없을 겁니다. 7편 중 사극이 5편이나 돼요. 그런데 사극은 현대극보다 더 많은 수고가 들기 때문에, 그렇게 짧은 기간에 완성해 냈다는 것이 저 자신도 신기할 정도예요. (단기간에 많은 작품을 찍다 보니) 한 작품이 끝나고 리셋(reset-머릿속을 지우고 다시 시작한다는 뜻)을 하지 않으면 다음 작품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어요.
굳이 나누자면 역사적으로 <황산벌>과 <평양성>은 고대사, <왕의 남자>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중세사, <님은 먼 곳에>는 현대사극,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은 동시대 현대물인 거죠. (지금 나눠보니까) 작품의 배경이 고대, 중세, 현대, 현재로 나눌 수 있네요. 1300년 전부터 현재까지를 거쳐온 거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이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1500년대 임진왜란 직전 상황을 다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찍은 영화 중 가장 적은 관객의 호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명배우한테 많이 거절당해 이제는 제안조차 안 해
―이 감독은 유명배우들을 잘 쓰지 않지요?
“왜요, 많이 거절당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애초에 제안을 안 하게 되는 거죠.”
―특히 대부분의 여자배우가 양념 격인데요. 여주인공도 관객들에게는 관심인데, 그 부분은 의식하지 않나 봐요?
“저는 ‘인간의 뇌 회로는 인간의 삶의 경로에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세대는 여자와 함께 성장할 기회가 적었어요. 특히 저는 남자형제(이 감독은 아들 3형제의 막내다.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으나, 어릴 때 사망했다)만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고, 중고등학교도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 나왔고, 군대와 사회 모두 남자들과만 생활했어요. 대학 때 여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여자들과의 자리가 어색하니까 남자들끼리만 어울려 다니곤 했어요. 제 인생에서 여자와 함께한 시간은 제 영화 속에 담긴 여배우들의 분량만큼인 것 같아요.”(웃음)
―결혼도 했잖아요?
“결혼했다가 2003년에 이혼했죠. 아들, 딸은 모두 결혼해서 지금은 24개월짜리 외손자가 있는 할아버지예요.”
―이혼한 것도 여성존중사상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께서 한학자셨기 때문에 왜놈과 양놈을 굉장히 싫어하셨고,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교육도 거의 못 받고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랐죠. 저희 아버지는 무능력하게 현대시대를 견뎌내신 분이시죠. 조선시대 가부장제가 현대사회 남자들의 왜곡된 사회의식으로 이어진 것이 저희 세대까지인 거죠. 저희 세대가 마지막인 것 같아요. 386세대는 50년대생보다는 유연성이 있어요. 386세대는 광장문화를 스스로 창출해 냈기 때문에 합리를 가장한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50년대생들은 표출하지 못하고 억눌려 청춘을 보냈기 때문에 비뚤어지고 왜곡된 남성주의적 신념이 강해요. 386세대 이후부터가 조선시대 가부장적 인식에서 많이 빠져나온 세대죠. 영화는 인성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치장을 해서 감춰보려고 해도 감독의 무의식과 본성은 영화에 반영될 수밖에 없어요.”
―특별히 영화공부를 안 했는데, 시나리오도 쓰고 영화를 수입/배급하는 안목도 출중합니다. 어떻게 습득한 건가요?
“저는 모르면 잘 물어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능력이에요. 우리나라는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선배들이 밥 사주면서 다 알려주잖아요. 그대로만 하면 칭찬받고. 나중에는 아예 일을 맡겨주면 그걸 통해서 나만의 색을 내고, 그러면 다른 곳에서 일이 들어오고 하는 거죠. 일의 본질을 파악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 쪽에는 전문가들이 많으니까 물어보면 다 알려줘요.”
돈은 영화를 찍는 기초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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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남자>의 배우 감우성(오른쪽), 이준기(왼쪽)씨와 함께. |
“감독이 가장 즐거웠죠. 존재와 가치를 믹스 매치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발견하는 쾌감이 개인이 만들어낸 어떤 창조보다 더 강렬합니다. 집단성이라는 영화장르의 특성에서 오는 특징이지요. 작품을 하면서 주어지는 많은 선택(배우, 장소 캐스팅, 의상 선택 등)에서 오는 놀라운 현상들이 연결되어서 생기는 집단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엄청난 쾌감이에요. 계획된 것 안에서 생기는 많은 우연을 개연성 있게 몰아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질리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대중의 인정을 받을 때는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있죠.”
―예전 인터뷰에서 ‘빚은 영화를 만드는 나의 원동력이다’라고 말했더라고요. 지금도 그런가요?
“<공포택시>라고 자체 제작한 영화가 있었는데, 전국에서 5000명이 봤어요. 그래서 그 작품으로 12억원의 빚을 졌죠. 하지만 그 작품을 만회하기 위해 <달마야, 놀자>를 찍게 됐어요. 결핍이 욕망으로 돌변하는 순간 폭발적인 에너지가 발산되는 거죠. 또 제가 수입한 영화 중 해리슨 포드 주연의 <케인즈 나인티>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걸로 30억원의 빚이 생겼어요. 그때는 해리슨 포드가 정말 미웠어요(웃음). 그래서 그걸 갚기 위해 죽어라고 찍은 작품이 <왕의 남자>예요.
예전에는 영화가 돈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현재는 영화보다 기업논리가 앞선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돈이 영화를 만들어요. 어떤 누구도 돈 앞에 장사 없듯이, 현재의 상업영화는 돈 중심으로 영화를 사고해야 하는 것이 현재 한국영화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만드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돈에 대한 자기검열이 생기게 돼요. 그것을 잘 맞춰내면 돈도 벌고 관객에게도 호감을 얻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고, 못 맞추면 무능한 감독이 되는 것이 자본주의 영화계의 현실이에요. 그래도 저는 <왕의 남자>의 흥행으로 성공을 거둔 굉장히 행복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죠.”
―제작자들이 좋아하는 감독 아닌가요? 제작비를 깨끗하게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항상 예산 안에서 영화를 찍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작자 출신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 외국영화 수입하러 미국에 갔다가 영화전문서적대에서 영화 관련 책을 두 권 산 적이 있어요. 《나는 할리우드에서 100편의 영화를 찍어도 1달러도 손해 보지 않는다》와 《예산계획(budget scheduling)》이란 책이었어요. 제작비를 확보하지 않고는 영화를 크랭크인 할 수 없기 때문에, 돈은 영화를 찍는 가장 기초단위이기 때문에, 엄격히 엄수하려고 하죠. 영화를 찍다가 안 찍어도 될 것 같은 장면은 뺍니다. 스케줄을 줄여서 예산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죠.”
―많은 감독이 예산 때문에 제작자들과 다투는데 그런 적은 없겠어요?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스태프들은 이제 그만 제작자 마인드를 버리고 감독 마인드를 가지고 장면에 욕심을 내라고 하소연을 하죠. 예를 들어 영화에서는 같은 날인데 실제 영화를 다른 날짜에 찍게 되면 저는 날씨가 달라도 그냥 스케줄대로 진행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편집과정에서 밸런스를 맞추느라 고생하는 경우가 있죠. 어떤 감독들은 날씨가 안 맞으면 촬영 접고 다른 날 찍거든요. 그런데 그러면 하루예산 1000만원가량이 그냥 날아가거든요. 그리고 밥값은 계속 나가고, 스케줄은 길어지기 때문에 예산은 점점 늘어나는 거죠.”
시나리오는 物理고 연기는 化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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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 스타〉. |
“인물의 감정이에요. 이야기는 이미 시나리오상에서 다 반영된 거고, 연출이라는 것은 연기를 끄집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시나리오에 있는 것에 지배받지 않고, 시나리오상에 있는 이야기에 맞춰 캐스팅된 배우가 선택하는 감정과 감독이 주문하는 감정이 가장 중요한 거죠. 시나리오는 물리고, 연기는 감정이고 화학이니까요.”
―현재 활동하는 감독 중에서 라이벌을 꼽자면? 꼭 우리나라 감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는 특정 라이벌을 선정하지 않아요. (라이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오만한 성격을 가진 거죠. 부러워야 누군가와 경쟁을 하는 건데, 저는 누구를 부러워하지를 않아요.”
―영화를 독학으로 배운 감독으로서 가지는 장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전 한국영화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거죠. 영화를 배운 감독들은 외국의 걸작들에 대한 오마주(hommage-존경하는 사람의 작품을 답습함)에 영광스러운 마음과 자부심을 가지겠지만, 저는 그런 것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아요. 저도 해외걸작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따라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전 영화 중에서 <왕의 남자>나 <황산벌> 같은 작품은 없었거든요. 이전 영화들을 따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가 영화를 제작하면서 스스로 지키고 싶은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영화 아이디어는 주로 어떤 과정에서 얻나요?
“제가 영화를 집단적 지성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료가 많기 때문이에요. 저와 ‘타이거 픽처스’에서 함께 일하는 조철현 대표는 걸어다니는 인문학사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박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제 영화적 자양분이 되는 역사, 문학, 철학 등의 인문학 상식에 많은 도움을 주지요. 그 외에도 다양한 스태프의 도움에 힘입어서 아이디어를 얻는 거죠. 저는 스피커일 뿐이에요. 다양한 스태프의 아이디어와 목소리가 스피커인 저를 통해 나가는 겁니다. 8편의 작품이 이준익이라는 개인의 사관이나 지식체계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힘을 모아서 스피커로 날리고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죠.”
―아이디어가 아직도 무궁무진한 것 같은데, 상업영화를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습니다.(웃음)
“하루에도 2~3편의 시나리오를 썼다가 엎었다가 해요. 고조선부터 SF까지 수십 번도 왔다갔다 합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저는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대기업의 자본을 손실시킨 감독은 자격 박탈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흥망성쇠 거치니 이제 영화가 무섭다
―하지만 <왕의 남자>에서처럼 그 손해가 한 번의 대박으로 보상이 가능한 게 영화산업 아닌가요?
“제가 제작한 총 8편의 수익들을 놓고 보면 저는 아직까지는 수익이 난 감독이죠. <왕의 남자>로 몇백억 원을 벌어들였기 때문에 이후의 작품들로 몇십억 원씩 까먹어도 손해는 없어요. 하지만 투자자가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기업의 자본을 손실시킨 곳도 있으니까요. 한창 성공가도를 달릴 때는 영화가 신나고 자신만만했어요. 하지만 흥망성쇠를 몇 번 거치다 보니 무서워지더라고요.”
―이 감독의 영화는 사극이든, 현대극이든 거리에서 시작해 거리에서 끝나는데요, 공간에 집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 세대는 광장을 잃어버린 세대예요. 길거리에서 세상을 배우고 광장에서 방황했던 세대는 광장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그래서 제 영화는 모두 끝과 시작 중 하나가 광장입니다. <라디오 스타>는 콘서트에서 시작해서, 방송국 마당에서 끝이 나고, <님은 먼 곳에>, <황산벌>, <평양성>은 모두 전쟁터라는 광장에서 펼쳐지고, <왕의 남자>는 마당에서 줄타기로 시작해서, 궁 마당에서 끝나잖아요. 광장을 잃어버린 지금의 시대에는 극장이 광장이에요. 개인의 사적인 생활을 훔쳐보는 관음적인 심리의 마음으로 극장을 찾게 하는 영화들도 있겠지만, 제 영화는 광장이라는 극장에 모여서 더 큰 광장을 내다보자는 거예요. 하지만 현재의 관객들은 광장이야기보다는 미세한 남녀의 이야기나 잔혹한 살인마의 사소한 과거 이야기 등을 보고 싶어하니까, 저는 상업적으로 점점 불리하게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초기 작업의 스승을 꼽자면?
“한두 명이 아니고 다양한데… 이세룡, 이황림, 원정수 감독 등 무수히 많아요. 귀동냥으로 들은 것까지 치면 오백여 명 정도 될 거예요. 영화제작 일을 하면서 수많은 감독을 만났으니까요.”
―영화 현장에서 이 감독의 리더십은 어떤 유형인가요?
“지시형이 아니라 솔선수범형이에요. 배우에게도 먼저 연기를 보여줘요. 물론 연기를 못하니까 대충 동선을 설명해 주면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을 파악해서 연기하는 거죠.”(그는 배우로서 자신의 영화 <라디오 스타>(2006)에서 주방장 역으로 출연했고,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2010)에서는 정 사장 역으로 나왔었다.)
―직접 영화시장을 다닌 것으로 아는데, 몇 편이나 수입했습니까. 타율로 보면 얼마나 되나요?
“50~60편 정도 수입했어요. 타율은 2할 정도 될 거예요. 수입/배급으로 저는 70억원이나 손해를 봤어요. (미국 영화수입 시장에서 한국이 가진) 구매조건의 불리함 때문에 국내수입업자들은 초이스가 많지 않아요. 보따리 장사일 뿐이에요. A급은 직배사들이 가져가고, B급은 대기업이 가져가니까 C급만으로 초이스가 한정되는 거예요. 완전 레드오션인 거죠.”
미국의 영화 제국주의에 오바이트 날 정도
―그래도 수입영화 중 히트작이 있지요?
“<러시아워2>, <나인 야드>, <메멘토>, <헤드윅> 등등 많죠.”
―한국영화계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요?
“비관적입니다. 고급인력을 영입하거나 잡아둘 수 없을 정도로 스태프에 대한 처우가 너무나 형편이 없어요.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들이 영화계로 잘 안 와요. 온다고 해도 처음에는 왔다가 2~3년 만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가죠. 젊은 피를 수혈받아야만 영화생산의 연속성이 유지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최근에는 영화작업 현장에서 인원수를 맞추기가 힘들 정도로 인력이 모자라요.”
―앞으로 영화계의 후배들에게 어떤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남고 싶은가요?
“한국 상업영화는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학습 되고, (일본이 물러간 이후에는) 할리우드 영화에 중독돼서 그것을 답습해 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껴왔어요. 작가주의적 라인은 한때 유럽영화에 심취했던 ‘프랑스문화원’ 출입자 출신들의 영화에 대한 열망을 작가적 가치에 대한 증명을 통해 성취감을 느껴온 것이고요. 그 두 가지가 한국영화의 양대 산맥으로 해서 이어져 왔는데, 저는 두 방향이 다 싫었어요.
저는 ‘세상의 모든 상은 사라져야 한다’는 아나키스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요. 상을 줄 자격을 누가 정한 겁니까? 저는 아카데미 영화들을 수입하기 위해 느꼈던 수치심이 너무 크고, 전 세계의 영화를 미국의 영화 제국주의에 줄서게 하는 그 권력이 오바이트(overeat)가 날 만큼 거부감이 들어요. 만약에 제가 영화 산업의 메커니즘을 모르고 순수 영화 창작만을 해왔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겠지만, 해본 사람으로서 관객들의 돈을 모아 그런 외국영화들을 사다 날랐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관객들에게 너무 죄스러워요. 그래서 제가 더 사극에 배팅을 하는 것 같아요. ‘인간의 뇌 회로는 인간의 삶의 경로에 비례한다’는 제 생각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