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연구와 후덕으로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내고 법학 관련 학회장을 두루 거치며 학계에서 우뚝 섰다. 국제적 안목과 다방면의 행정 경험에서 오늘날 대학이 요구하는 학자이자 학교 경영마인드를 동시에 갖춘 소유자.”(정운찬 전 국무총리)
⊙ “성적보다 잠재력 기준으로 신입생 뽑는 게 가장 보람 있었다”
⊙ 총장 재임 중 기부금 1873억 모금. 국내대학 최초로 ‘기부자 권리 헌장’ 제정
⊙ 국제화 위해 해외출장 189일, 4536시간… 거리로 36만214km
⊙ 순혈주의는 고려대 망하는 길. 非 고려대 출신과 해외대 출신 등용
⊙ 취임 후 교양교육원, 사회봉사단, 약학대학, 디자인 스쿨, 미디어 스쿨 설립
李基秀
⊙ 1945년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법학석사, 독일 튀빙겐대 법학박사, 일본 와세다대·메이지대
명예법학박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명예법학박사, 연세대 명예교육학박사.
⊙ 고려대 법대 교수, 하버드 로스쿨 교환교수, 국가경쟁력연구원장, 한국상사법학회장,
한독법률학회장, 한국법학교수회장, 한국독일학회장, 한국저작권법학회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회장 역임.
⊙ “성적보다 잠재력 기준으로 신입생 뽑는 게 가장 보람 있었다”
⊙ 총장 재임 중 기부금 1873억 모금. 국내대학 최초로 ‘기부자 권리 헌장’ 제정
⊙ 국제화 위해 해외출장 189일, 4536시간… 거리로 36만214km
⊙ 순혈주의는 고려대 망하는 길. 非 고려대 출신과 해외대 출신 등용
⊙ 취임 후 교양교육원, 사회봉사단, 약학대학, 디자인 스쿨, 미디어 스쿨 설립
李基秀
⊙ 1945년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법학석사, 독일 튀빙겐대 법학박사, 일본 와세다대·메이지대
명예법학박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명예법학박사, 연세대 명예교육학박사.
⊙ 고려대 법대 교수, 하버드 로스쿨 교환교수, 국가경쟁력연구원장, 한국상사법학회장,
한독법률학회장, 한국법학교수회장, 한국독일학회장, 한국저작권법학회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회장 역임.
- 고려대 이기수 총장. 고려대의 교육·연구 인프라를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려대 이기수(李基秀·65) 총장과 젊은 시절 동문수학한 한국외국어대 이균성(李均成) 명예교수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아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비로운 붙임성과 친화력으로 누구와도 친분관계의 유대를 이루는 분.”
이기수 총장을 여러 차례 만나며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았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짙은 눈썹, 턱수염이 있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이 ‘안암골 큰 호랑이’에게 빨간 티셔츠를 입힌다면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뽕짝’이 밥상의 김치와 같은 존재라면 이 총장은 왠지 막걸리가 잘 어울릴 것 같다. 실제로 이 총장은 유년 시절(경남 하동군이 고향)부터 어머니가 주는 막걸리를 마셨다고 고백한다. 나이가 들어 안암골의 두주불사로 통했지만 몇 해 전 기공을 배우며 술 생각이 사라졌다고 한다. 덕분에 몸무게가 98kg(키는 170cm)에서 78kg으로 줄었다. 그래도 제자들과 교수들을 불러놓으면 막걸리를 마신다. 고려대 농대 교수들이 2009년에 소화 촉진 성분을 넣은 ‘고려대 막걸리’를 개발한 것도 이 총장이 지시했단다.
나훈아의 후계인 현철·태진아·송대관이 트로트 부흥운동을 펴 왔다면, 이 총장은 2008년 총장 부임 이래 고려대의 부흥을 위해 애써 왔다. 나훈아는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이 총장은 여전히 현역이다. 아니, 현역의 정점에 서 있다.
린위탕(林語堂)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12월 마지막 날에 연초에 결심했던 것을 되돌아보고 ‘지금까지 한 30%쯤 이루었구나’ 하며 아쉬워하는 데 있다.”
이 총장에게 꼭 어울리는 말이다. 이균성 교수 역시 “2011년부터 이 총장은 나머지 70%를 위해 왕성한 활약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 총장은 2011년 2월 28일 총장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정년퇴직한다.
양해를 구한 뒤 이 총장의 수첩을 뒤적여 보니 ‘끊임없는 도전’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비서실 직원은 “총장님은 ‘메모광’”이라고 귀띔했다. 손바닥 크기만한 ‘2010년 수첩’의 겉장은 너덜너덜했다.
―아직도 ‘도전’할 게 남았습니까.
이 총장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라며 이렇게 말했다.
“제 인생 삼모작 45년 계획을 세워 두었어요. 태어나 고려대 입학하는 스무 살까지가 일모작이었다면 스물부터 예순다섯 되는 2010년까지가 이모작이었습니다. 이모작은 고려대와 법학공부, 독일유학 등 3가지로 채웠습니다. 나머지 삼모작은 미국,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초빙교수로 학문연구와 강연, 사회봉사로 45년을 살렵니다. 삼모작이 끝나는 해에 제 나이 110세가 됩니다. 그해는 1905년 개교한 고려대가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2055년 세계 30대 명문대학으로 우뚝 선 고려대 개교기념일에 새로운 천 년을 향한 축사를 하고 싶습니다.”
이 총장의 수첩을 보니, 2011년 3월 1일 일정란에 오전 10시15분 발 워싱턴행 대한항공 예약번호가 적혀 있었다. 2월 28일 정년퇴임식을 한 다음날 출국이다. 언제 돌아올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조지워싱턴대 로스쿨에서 연구하며 삼모작의 첫 일정을 시작할 겁니다.”
“인생을 알아갈 때부터 삶의 축은 고려대였다”
작년 12월 3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이 총장의 제자들이 마련한 ‘정년논문집 봉정식’이 열렸다. 제자와 교수, 전·현직 관료, 정치인과 지인 등 650여 명이 참석했다. 박희태(朴熺太) 국회의장과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 이강국(李康國) 헌법재판소장,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 한승수(韓昇洙)·정운찬(鄭雲燦) 전 국무총리, 정몽준(鄭夢準) 전 한나라당 대표, 권오을(權五乙) 국회 사무총장이 눈에 띄었다. 고려대 출신인 박영준(朴永俊) 지경부 차관도 보였다.
정운찬 전 총리는 축사에서 “탁월한 연구와 후덕으로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내고 법학 관련 학회장을 두루 거치며 학계에서 우뚝 섰다. 국제적 안목과 다방면의 행정 경험에서 오늘날 대학이 요구하는 학자이자 학교 경영마인드를 동시에 갖춘 소유자”라고 평했다.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은 “연암 박지원 선생의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정신을 새로운 고대인 상으로 세우고 ‘세계를 향한 개척정신’을 바탕으로 창의적 인재 육성에 주력했다. 이 법고창신 인재상은 미래에도 고려대와 함께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법고창신’의 정신을 강조하며 “고려대를 민족혼과 개척정신을 담은 세계 선도대학으로 키우겠다”고 말했었다.
이날 정년논문 봉정식 말미에 이 총장은 연단에 올라 감개무량한 듯 고려대와 함께한 45년을 회고했다.
“어린 나이에 경남 진주로 나가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는 그저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고, 그 넓은 세상을 고려대로 선택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고대생이 되어 법학을 배웠고 독일유학에서 돌아와 고려대 교수가 되었으며 총장 선거 4번 만에 총장이 되었습니다. 가까이에서 힘이 되어 준 여러분, 그리고 고려대와 함께 45년을 보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아갈 때부터 제 삶의 축은 고려대였어요. 제 자신에게도, 여러분에게도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연설을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 세계 727개 대학과 협력·협정
이기수 총장의 고려대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국제화이다. 고려대는 지난 1월 11일 소비자가 뽑은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디지털조선 주관)에서 사립대학 부문 대상을 받았다. 선정이유가 흥미롭다. ‘글로벌 명품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년 전만 해도 고려대는 시골과 서민의 문화를 대변하는 ‘촌놈들의 학교’였다. 교수와 학생들도 스스로를 막걸리 대학이라고 불렀다. 안암골에서 글로벌 명품 인재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굳이 따지자면 글로벌에 관한 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한 연세대가 가장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대는 민족적, 연세대는 서구적’이라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고연전(연고전)에서도 고려대는 농악대를, 연세대는 서양식 고적대를 앞세워 왔다.
소비자들이 고려대를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로 지목한 이유가 된 ‘글로벌 명품 인재’라는 콘셉트(개념)는 이기수 총장이 직접 내놓은 것이다. 이 총장이 말하는 글로벌 명품 인재란 리더십, 능력, 어학 실력에 민족혼과 개척정신까지 겸비한 세계 선도인이다. 동양과 서양, 한국과 세계 그리고 고전과 현대를 함께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세계의 지도자인 셈이다.
그 내용은 이 총장이 청사진으로 제시해 온 이른바 ‘2030 프로젝트’에 잘 나와 있다. 2030 프로젝트란 글로벌 명품인재 육성을 통해 고려대를 2030년까지 세계 50대 명문에 진입시키겠다는 약속이다.
78개국 727개 대학과 MOU
이 총장은 2008년 2월부터 2010년 12월 말까지 무려 189일 동안 해외출장을 다녔다. 공휴일을 포함해 재임기간 중 20% 이상 해외에서 근무한 셈이다. 일본, 중국, 인도, 타이완, 홍콩, 베트남을 비롯해 미국, 캐나다, 러시아, 독일, 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UAE 등 전 세계를 망라한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 대학과도 교류를 성사시킬 계획이다. 마일리지는 36만214km. 지구를 거의 열 바퀴나 돈 셈이다. 그 결과, 78개국 727개 대학과 양해각서·학생 및 학술교류 협정 등을 체결했다.
글로벌 명품 인재를 기르기 위해 영어강의 비율을 계속 높여 2010년 현재 37.6%까지 끌어올렸다. 경영대학은 66.6.%다. 외국인 전임교수도 132명으로 늘렸다. 전체 전임교수의 8.32%에 달한다.
지난 2004년 281명으로 시작한 고려대 국제하계대학은 2008년 1405명으로 늘어났고 2009년 1580명, 2010년 1430명이 참가했다. 지금까지 국제하계대학을 거쳐 간 국내교포 및 외국인 학생이 총 7627명에 이른다.
그런 자신감에서 이 총장은 2009년 5월 ‘2009 유니버시타스 21(U21) 세계대학총장 연례 심포지엄을 주관했다. U21은 미국 버지니아대, 영국 버밍엄대, 호주 멜버른대 등 세계 명문대학 간의 네트워크로 1997년 설립됐다. 고려대는 2004년 국내대학 최초로 17번째 가입했으며 전 세계 14개국 21개 회원교가 있다. 세계 대학총장회의를 한국의 대학이 주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총장은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세계를 누비며 고려대를 소개하고 양해각서(MOU)를 체결, 학생들이 해외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기회를 늘렸고, 외국인 학생이 고려대로 찾아오게 했다. 비단 대학만 찾은 것이 아니다. 세계의 다국적 기업과 국제기구를 돌며 인턴계약을 맺고 졸업생들의 취업길을 텄다. 이 총장은 말한다.
“고려대 건학이념이 교육구국(敎育救國)입니다. 민족 고대만으로도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 글로벌 무대에서 힘을 키우고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죠. 민족 고대를 뛰어넘어 세계 명문대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육구국이라는 건학이념을 구현한다는 사명감으로 국제화에 열을 올렸던 것이지요.”
어문학 계열, 해외에서 1학기 공부 안 하면 졸업 못해
연세대가 송도국제화복합단지(송도 GAC)를 토대로 국제하계대학, 연세어학당, 외국인학부 예비과정을 개설할 때 고려대는 아예 해외에 캠퍼스를 만들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캐나다 UBC대, 영국 로열할레웨이대, 중국 런민대학에다 전략 거점 캠퍼스를 세운 것이다. 학생들이 유학서류를 떼느라 별도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 기숙사나 하숙집을 구하려고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 총장은 문과대 어문학 계열은 1학기 이상 해외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졸업을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대신 해외 교환대상 학교 수를 최근 두 배 이상 늘렸다. 유학 경비는 국내 등록금으로 가능하다. 부족한 돈은 대학이 책임진다. 한때 국제화에 앞섰던 연세대의 장점을 고려대의 장점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이 총장의 말이다.
“국제화가 아무리 좋아도 한국적 혼이 빠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글로벌을 하더라도 한국 국적을 갖자’라는 게 제 모토였어요. 해외로 학생을 내보내는 것과 함께 외국인 학생을 데려오는 전략을 동시에 세웠습니다. 그래야 고려대가 세계 명문대학이 될 수 있습니다. 고려대는 4·19의거보다 앞서 4·18의거를 이룬 학교입니다. 그런 선구자적 정신에서 세계적 대학으로 키우고자 애썼어요. 그 결과, 대학의 국제화, 교수의 질, 학생의 실력 면에서 경쟁대학을 압도했다고 자부합니다.”
2008년 12월 중순, 고려대가 일간지에 광고를 실었다.
<당연히 고대 경영이 서울대보다 좋아요!>
사실 여부를 떠나 이 문안은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고려대 경영전문대학원 김 모 교수의 말이다. “흔히 ‘연상고법(연세대는 상대, 고려대는 법대가 간판)’이라 생각하는데, 로스쿨이 생기면서 고려대 법대의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어요. 고려대의 간판 학과가 없어지게 된 셈이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오래전부터 다각도로 노력해 왔으며 이 총장이 부임하면서 가속도가 붙게 됐고 그 결과가 ‘서울대보다 낫다’였습니다.”
그 일환의 하나로 ‘고경(고대 경영)’을 밀었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LG포스코 경영관을 건립했다. 연세대 경영대학이 이에 자극받아 건물을 신축하자 고려대는 아예 하나를 더 짓고 있다. 이른바 현대자동차 경영관이다. 1만5533㎡(4700평) 부지에 420억원을 들여 지상 5층 지하 4층 규모로 짓는다.
세계 명문 서열 한국 1위
김 교수의 설명이다. “이 총장의 지시로 고3 학생들과 대학 1학년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봤습니다. 대학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답이 나왔어요. 대학 선배가 좋다거나 전통이 있다거나 이런 게 아니더라고요. 학교 시설이 좋고, 장학금이 많고, 취직이 잘되기 때문이래요. 그래? 그렇다면 3박자를 확실히 다지자고 했어요. 대학원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고, 학부 학생에게는 졸업할 때까지 50% 이상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어요(고려대 경영대학은 58%가 장학생). 글로벌 다국적 기업에 인턴 길을 열고 취업 길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자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의 주머니를 털었어요.”
이 총장에게 “고대 경영의 우수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달라”고 하니 이렇게 답했다.
“우선 정부가 심사하는 ‘BK 21 평가’에서 고대 경영이 3년 내리 1등을 했어요. 한경비즈니스의 전국 경영대학 평가역시 4년째 1등이고요. 전 세계 경영대학 학장들이 뽑은 세계의 명문 서열에서도 한국 1위에 올랐습니다. 최근의 모든 평가에서 고대 경영이 서울대 경영을 제쳤습니다. SCI 논문 등재에서는 다른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어요. 이 대목은 서울대 경영 교수들이 잘 인정하고 있죠. 그뿐인가요? 세계의 경영학 인증기구인 AACSB와 EQUIS로부터 국내 최초로 공인을 받았으며 지금은 또 국내에서 유일하게 재인증까지 받고 있습니다.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자 수 또한 1등입니다.”
이 총장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고경의 역사는 고려대 설립연도인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보성전문이 법과와 상과로 출범했습니다. 상학이나 경영학, 경제학의 역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었지요 하버드대와 비교해도 별로 처지지 않아요.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훌륭한 졸업생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단일학과로는 CEO를 가장 많이 배출해 왔습니다. 그러나 고경은 하나의 예일 뿐 고려대의 다른 단과대학과 학과들도 세계의 명문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경영대학뿐 아니라 고려대 전체 수준이 크게 올라갔다고 자부합니다.”
‘3년간 2000억원 모금 가능’
이 총장은 고려대의 ‘막걸리 네트워킹’을 세계로 확대하는 일을 추진했다. 전 세계를 미주와 유럽, 아시아태평양 지역 등 3대 권역으로 나눠 총연합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 총장은 “단순한 친목 도모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사회에 기여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새로 만든 글로벌 네트워크는 졸업생뿐 아니라 교민과 현지인까지 포괄하면서 지구촌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감정적 응집을 넘어 협동하는 모범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속한 지역사회나 직능사회에서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하고자 합니다. 교우회 활동은 교우 개인에게서 보면 본업의 밖에 있는 과외활동입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친목도모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사회에 기여하는 시도가 되기를 고대인은 바라고 있어요.”
이 총장은 29만 고려대 교우를 등에 업고 2008년부터 7년 계획으로 대학발전 기금 1조원 조성운동을 펴고 있다. 고려대만이 꿈꿀 수 있는 액수다. 지난 3년 실적은 1873억원이다. 약정액까지 합치면 재임기간 2000억원 모금은 가능하리란 게 그의 판단이다.
“제 재임 기간에 연평균 기부금은 630억원인데 이는 취임 전 연평균 기부금보다 약 100억원이 많은 금액이고 특히, 2010년 4월 ‘천년 고대, 감사와 전진의 밤’에서 3시간 만에 202억원의 약정 을 받았아요.
우리는 외국 대학처럼 모금 전문회사의 컨설팅을 받아 타당성을 검증한 뒤 캠페인을 시작했고 기부금을 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발전에 대해 진지한 의사소통을 하는 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어요. 국내대학 최초로 ‘기부자 권리 헌장’을 제정, 공포해 모금에서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고 있지요.”
충북 오송에 의·생명공학연구소 건립 중
이 총장은 단과대학별로 나뉜 교양교육을 대학 차원에서 집중 관리하는 교양교육원을 세우고, 사회봉사단을 만드는 것 외에 약학대학, 디자인 스쿨, 미디어 스쿨을 신설하는 등 새로운 교육 개혁안도 마련했다. 지금까지 고려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뒤집어 말해 자연과학이나 공과대학이 상대적으로 뒤진다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인문학도 분야 간 통섭을 통해 새로운 학문적 가치를 창출하려는 총장의 의지를 담았다.
예를 들어 미디어 스쿨은 기존 언론학부를 확대, 개편해 영화나 인터넷 등 뉴미디어까지 총괄해 다루게 되며 디자인 스쿨은 기존의 조형학부에 산업디자인, 패션디자인, 조경학까지 합쳤다. 약학대학은 기존의 의학, 생명과학에 약학까지 연결, 올해부터 세종캠퍼스에서 첫 신입생을 뽑는다.
“전통적인 학문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학문과정을 도입, 대학의 외연을 넓히고자 합니다.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 변화에 좀 더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대학이 되고자 합니다. 아울러, 충북 오송 생명과학단지 내 3만3000㎡ 터에 450억원을 투자, 의·생명공학연구소를 건립 중입니다. 신약개발과 줄기세포 연구 등 차세대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기반이 될 거예요.”
생명공학은 21세기 산업을 이끌어갈 분야다. 이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산업현장에 신선한 학문역량이 유입되고, 산업현장에 축적된 경험이 학문세계에 유입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이 총장은 “의·생명공학연구소는 지역의 산업적·기술적 기반과 대학의 학문역량을 결합해 새로운 산학연(産學硏)연합체의 모델로 만들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성공의 법칙
이기수 총장은 광복되던 해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지리산 밑 산골에서 자랐다. 친구들과 어울려 마을 뒷산에서 해가 질 때까지 소몰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산골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에 나가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울며 말리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혈혈단신 도회지로 유학을 떠났다.
“제 삶을 되돌아볼 때, 처음으로 꿈을 품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당시 너무 어려 인생의 목표니 하는 거창한 이름은 못 붙이지만,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어린 아들이 걱정돼 만류하던 어머니를 뒤로하고 저는 겁도 없이 도회지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지요. 50년이 흐른 지금, 제가 그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가끔 되돌아봅니다. 아마 평생 농사를 짓고 살지 않았을까요?”
이 총장은 진주 배영초등학교로 전학해 진주중 3년을 보태 4년간을 진주에서 살았다. 이후 부산 동아고로 유학해 4촌 형님 집에서 3년을 지냈다. 그리고 1965년 고려대 법대로 진학하며 상경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로 부지런하다. 그 역시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일어나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 이런 ‘얼리버드(early bird)’ 습관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익혔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오후 하동의 집을 찾아 어머니를 뵙고 월요일 새벽 4시반쯤 진주행 버스를 타야 했다.
“몇 시에 잠자리에 들었든 새벽 3시에 눈을 뜨고 책상 앞에 앉아 그날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계획합니다. 대략 오전 7시까지 저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결혼한 뒤 얼마 동안은 아내조차 제가 새벽에 일어나는지 몰랐죠.”
―새벽에 하는 일은요.
“젊은 시절엔 제 전공인 상법(商法)과 관련된 글을 쓰거나 《고시계》 등에 원고를 썼어요. 그 원고들이 차곡차곡 쌓여 연구서가 됐지요. 지인들이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사람이 언제 책을 썼느냐’며 깜짝 놀라지요. 요즘엔 하루 동안 처리해야 하는 업무 편지나 이메일 답신, 강의 준비를 하고 연설문도 살펴봅니다.”
백지 위에 자신의 미래상을 적어 보라
그는 늘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아주 소소한 부분이라도 메모한다.
“수첩에다 세세한 일일계획표를 세우고 항상 가슴에 품고 끊임없이 진행상황을 체크합니다. 전에 만났던 사람에 대한 기록을 해 두면 다시 만날 때에 개인적인 상황을 알게 돼 더욱 친근감을 갖게 되지요. 또 만남의 목표를 잘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됐어요. 어떤 사안에 대한 시비가 있을 경우에도 기록은 그 무엇보다도 좋은 길잡이가 됩니다.”
이 총장은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다. 장기, 단기계획을 세우고 착실히 준비하며 도전한다. 그래서 바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만만치 않아요. 젊은 시절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만약 현실을 벗어나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싶다면 이런 방법을 제안하고 싶어요.
첫째, 지금 당장 종이를 꺼내 자신이 꿈꾸는 3년 후의 미래, 5년 후의 미래, 10년 후의 미래상을 적어 보세요. 그리고 각각의 옆에는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적으세요.
둘째, 각각의 미래상 옆에 적어 넣은 ‘필요한 노력’을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세요. 인생을 바꾸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제가 굳게 믿는 것 중 하나는, 운명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불가항력으로 정해진 일이란 없으며, 운명이란 사람이 만들어낸 실체 없는 개념일 뿐입니다. 언제나 노력한 만큼 되돌아오는 것이니 꿈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노력이 부족함을 탓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일은 오늘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어요.
셋째, 오늘부터 실천에 옮기는 그것은 나에게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이어야만 하고 더불어 현실성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아마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실패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곧바로 훌훌 털어버리세요.”
아내·아들·딸, 며느리·사위까지 고려대 패밀리
이 총장의 어머니가 어린 그에게 ‘고려대’ 이야기를 자주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화다. 자연스레 ‘고대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어 왔고 “대한민국엔 고려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공부는 곧잘 했으나 시험 때면 나타나는 ‘방랑벽’ 때문에 대입에 실패, 1년 재수해 1965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 꿈을 이뤘다.
이후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고려대로 돌아왔다. 학생처장, 기획처장 등을 맡아 온 이 총장은 한국법학교수회장, 한국독일학회장, 한국저작권법학회장 등을 맡는 등 학회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특히 그는 “사람이 자산(資産)”이라며 폭넓은 인맥을 쌓아 온 것으로 유명하다. 4년 선배인 이명박 대통령과 대선(大選) 당일 통화할 정도로 절친하지만 주차장 정리요원, 식당 직원 등 학교 직원과도 마주칠 때마다 악수를 청한다.
강의를 끝낼 때 제자들에게 “언제 어딜 가든 나한테 연락해 해결될 것 같다 싶으면 연락하라”고 당부해 제자들 사이에는 ‘인심 후한 맏형’이란 소리도 듣는다.
고려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가족들도 모두 ‘고대 동문’으로 만들었다. 아들 딸은 물론, 며느리 사위까지다. 서울대를 나온 아내 조효임(曺效任) 서울교대 교수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나와 결국 ‘고대 가족’이 됐다.
“고려대에 입학하면 돈이 필요 없어요. 선배들이 술, 밥을 다 사주니까요. 막걸리를 마시며 고려대 교가부터 응원가까지 다 가르칩니다. 그런 끈끈함이 몸에 배어서 단결력으로 표출됩니다. 글로벌 사회에서도 네트워킹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요? 그런 점에서 고려대는 다른 대학과 다르죠.”
순혈주의는 고려대 망하는 길
―고려대의 끼리끼리 순혈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죠.
“고려대 교수 중에서 고려대 학부출신이 몇 %인지 아세요? 아니, 연세대는 얼마인지 아세요? 78%쯤 됩니다. 서울대는 90%가 넘지요. 고려대는 안암캠퍼스 60.9%, 세종캠퍼스 50.8% 안팎입니다. SKY 대학 중에서 고려대가 타대학 출신에 대해 가장 개방적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고려대 순혈주의 타파를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유전학에 근친교배라는 말이 있지요.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대 출신들로만 교수를 구성하면 서로 비판을 하지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발전을 못합니다. 새로운 이론과 학설을 받아들일 여지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지요. 교수를 채용할 때 고려대 학부 출신은 최대한 억제하고 그 대신 한국대학 중에서 비 고려대 출신과 해외대학 출신을 집중적으로 뽑았습니다. 순혈주의는 단과대학 중에서도 의과대학이 가장 심한데, 이 역시 고려대 출신을 가급적 배제하고 해외에서 공부하지 않은 이는 페널티를 주려고 해요.”
―반발은 없습니까.
“왜 없겠어요. 외국 서적도 국내에서 다 보고, 해외 학술지에 논문도 쓰니 외국에 갈 필요가 없다는 식인데, 일본의 예를 들어 볼게요. 제가 1970년대에 독일에 유학 가서 공부해 보니, 1800년대 말 일본 학자들이 독일로 유학 가 박사논문을 많이 썼더군요. 와세다대의 경우 126년 전에 독일인 교수 7명이 영어로 수업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은 그렇게 노력했어요. 그런데 요즘 일본 대학의 논문을 보면, 참고문헌이 미국이나 독일 서적 하나 정도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어요. 대개가 자기들끼리 서로 주고받는데 우물 안 개구리가 됐어요. 국제적 기준이 뭔지 모르게 된 것이지요.
저는 의대교수들에게 이대로 가다간 나라 망한다고 말합니다. 고려대 의대 망하고, 대한민국 의료 다 망하고, 나라도 망해요. 스스로 세계 최고라 생각해서 제자를 외국에 안 보내고 고려대 출신들끼리 먹고살겠다? 이것은 안 됩니다.”
이 총장은 독일 유학시절을 잊지 못한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장학생으로 1977년 9월 튀빙겐대에 진학했다. 32살 때의 일이다.
장학금만으로 생활을 꾸려 가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와 동생의 도움을 받았지만 충분하지 못해 여름방학 때는 6주씩 세 번 벤츠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해 책값을 벌었다.
“15년이 지난 뒤 아들 역시 튀빙겐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딸과 사위 역시 튀빙겐대에서 1년간 수학하기도 했어요. 저랑 아들이랑 지도교수가 같아요. 부자(父子)가 같은 대학, 같은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연은 온 세상을 둘러봐도 흔하지 않을 겁니다. 아내 역시 튀빙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죠. 우리 가족 모두 튀빙겐에서 공부한 동창입니다.”
상법·기업법 영역에서 독보적 위치
이 총장은 독일에서 귀국해 1989년 어음수표법을 시작으로 회사법, 상법총칙, 상행위법 등 상법 관련 여러 학술서를 집필했고 특히 독일의 상법이론을 국내에 본격 소개했다. 전통적인 상법 이외에 경제법, 국제거래법, 지적재산권법 등 기업 관련 법 영역에서도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다.
그러나 선거와 인연이 적었다. 총장 선거에 네 번이나 도전했다. 선거를 치르며 동료 교수들과 송사(訟事)를 겪기도 했다. 결국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저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현실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좋은 행동일지라도 자신의 능력범위 밖의 일이라면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나지 않아요. 총장 예비선거에서 1등을 하고도 결선에서 진 일이 있어요. 저를 도와준 동료 교수들이 펑펑 울며 낙담했지만, 오히려 제가 달래야 했어요. 아무리 실패해도 나쁘게만 보지 않으려 했어요.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함께하는 법이니까요. 실패만 바라보지 말고 긍정적인 면을 보려 노력했어요.”
이 총장은 이런 말도 했다.
“실패는 성공의 전제조건과 같아요. 실패해 보지 않은 사람은 성공할 수 없고, 설사 운이 좋아 단번에 성공하더라도 머지않아 다시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우리는 젊은 시절, 되도록 많은 실패를 해 봐야 합니다. 실패를 여러 번 해 보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길을 알 수 있게 돼요. 그래서 조상들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젊어 실패는 사서도 한다. 그러나 같은 것으로 두 번 실패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보니, 이 총장에겐 실패의 경험이 적지 않다. 고교 입시에서 1차에 낙방했고 대입도 재수했다. 사법시험에 도전해 떨어진 경험도 있다. 유학도 남들보다 늦어 서른둘에 갔다. 거기다, 총장 선거 4수(修)까지 그의 일생은 실패와 도전으로 가득하다.
“젊은이들에게 ‘실패해도 절대 좌절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좌절은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지만 실패했다고 무너지면 그때야말로 진짜 실패자로 사라져 갑니다. 역사의 위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서 결국 성공을 이뤄낸 사람들입니다.”
그의 좌우명은 만도내근(萬道耐勤)이다. 모든 일을 행함에서 인내와 근면, 성실로 임한다는 뜻이다.
“제 삶이 항상 꿈과 일치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어요. 제 삶은 도전과 실패, 그리고 간혹 있었던 성공이 함께 어우러진 것입니다. 전 좌절하거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늘 ‘만도내근’이란 글귀를 새기고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꿈에 다가가는 지름길입니다.”
누가 들어갔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나왔느냐를 따지는 시대
이 총장이 생각하는 인재상은 3가지다. ‘꿈을 이루는 미래인, 소통하는 세계인, 배려하는 지도자’다.
―총장취임 후 새롭게 마련한 입시제도는 무엇인가요. 그 결과, 우수 학생들이 얼마나 진학했는지 궁금합니다.
이 총장은 현재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도 겸하고 있다. 대학교육의 관리자이기도 한 것이다.
“대학 입학 제도는 단순히 대학의 신입생을 선발하는 연례 행사일 수 없습니다. 전국의 모든 초·중·고교의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이 대입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들이 어떤 방식으로 선발을 하느냐 하는 것은 이 나라 교육의 방향을 좌우하는 실로 중차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대입제도에는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심오한 교육철학이 담겨야 한다고 봅니다. 총장 취임 후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 것이 입학사정관 제도를 본격 도입했다는 사실입니다.”
―입학사정관 전형에 어떤 교육철학이 담겨 있나요.
“우선 초·중·고교의 공교육을 정상화하자는 취지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대학들은 오랫동안 수능을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해 왔습니다. 수능은 그 자체로는 좋은 시험입니다. 문제는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많은 학생이 학원이나 과외 등 사교육 쪽에 의존한다는 사실입니다. 밤늦게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정작 학교에 와서는 피곤한 나머지 졸게 되는 것이지요. 학교 선생님에 대한 존경도 사라지고 인성교육 또한 제대로 할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학교교육, 즉 공교육을 살리지 않고서는 우리의 미래가 없습니다. 공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학교생활의 내용이 입시에 그대로 반영돼야 합니다. 입학사정관 제도는 선생님들이 작성한 생활기록부와 학교 내신 성적을 위주로 학생을 선발합니다. 입학사정관 제도가 완전하게 확립되면 사교육은 사라지고 공교육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점수보다는 잠재력을 위주로 뽑는다는 취지도 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지금 우리는 산업화 시대를 넘어 지식과 창의, 그리고 감성이 승부를 좌우하는 후기 지식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기계로 움직이던 산업화 시대에는 점수 1~2점의 차이가 중요할 수도 있어요. 지금은 아닙니다. 물론 점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다양한 특성과 숨겨진 잠재력, 그리고 창의성 등도 매우 중요해요. 이런 것들은 정량 평가로 점수화하기 어렵습니다. 각 개인의 장점을 충분히 반영해 미래의 인재를 뽑자는 것이 입학사정관 제도의 취지죠.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유럽 등 거의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입학사정관 제도를 확대 실시하고 있어요.”
―입학사정관 제도 도입 이후 신입생들의 성적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내신등급이나 수능성적을 기준으로 보면 입학사정관제로 입학한 신입생들의 성적이 정시 입학생보다 떨어집니다. 성적보다는 잠재력이나 창의성 또는 인성을 보고 뽑았으니까요. 입학사정관제로 선발된 학생들의 대학 입학 후 평점에는 매우 의미 있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즉, 1학년 때에는 수능 위주의 정시모집 학생보다 다소 낮지만 향상 속도가 빨라 2학년 이후에는 정시모집 신입생보다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고교등급제는 결코 하지 않았다”
고려대는 2009학년도 수시 2-2학기 전형에서 외국어고 등 특목고 학생들을 우대해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실시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사건은 손해배상 소송으로 이어져 지난해 1심에서 부분 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총장으로선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대교협(당시 회장은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자체조사 뒤 “고교등급제는 안 한 것으로 판단한다”며 고려대의 손을 들어줬고, 교과부도 대교협 관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총장의 말이다.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전형과정은, 정확히 따지면 수십대 1에 달하는 지원자를 학교생활부를 기준으로 17배수 정도로 가리는 1단계 절차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고려대는 이 과정에서 수험생의 출신 고교를 차별한 사실이 일절 없습니다. 고교별로 다른 점수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고교등급제라는 일부의 지적에 동의할 수 없어요. 잘 아시는 대로 교육과정개편(7차 교육과정)으로 요즘 고교는 선택과목이 많습니다. 서로 다른 과목이다 보니 등급도 천차만별이죠. 교사에 따라 시험문제를 쉽게, 또는 어렵게 출제하는 바람에 표준편차에서도 큰 차이가 납니다. 이를 과목별로 표준화했는데, 불합격한 24명의 학부모들이 이의를 제기해 소송에 이른 것입니다. 이들은 내신등급이 높은데도 1단계에서 떨어졌다면서 항의하고 있지만 학생부상에 기재되어 있는 내신 성적기준 등급과 과목별 표준화를 거친 내신등급은 서로 다른 것이고 또한 당시 1단계 전형에서는 내신등급과는 무관한 비교과도 10%를 반영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교육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말씀드리지만 고교등급제는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마다 학력 격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를 입학사정에서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은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입학사정관제가 과연 공정한가를 두고 말들이 있습니다.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 대학들도 우리 사회에서 대학의 결정과 절차를 그대로 받아들여 줄지를 내심 걱정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입학사정관들이 원래의 취지대로 자신의 판단을 믿기보다는 객관적인 수치나 실적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입학사정관제를 거친다면 외부에서 보기에 비슷한 수준의 대학이라고 하더라도, 상반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포용성을 갖춰야 합니다. 그것은 과정의 공정성이지 결과의 공정성이 돼서는 안 됩니다.”
대학에 맡기는 게 가장 이상적 입시제도
고려대는 올해 입시의 지역우수인재 전형에서 지난해 학교별 1명이던 추천인원을 2명으로 늘렸다. 또 입학사정관 전형 비율을 늘리는 대신 복잡한 전형 수도 줄였다.
“우리 대입제도는 여러 주체의 의견에 영향을 받다 보니 너무 복잡해진 것이 문제입니다. 고려대만 해도 2011학년도 전형방식이 스무 개가 넘습니다. 수험생 입장에서 볼 때, 3~4개 대학, 3~4개 학과군을 생각한다 해도 최소 100여 개의 전형절차를 따져 봐야 합니다. 여기에 드는 시간적·금전적 비용이 상당합니다.
그런 전형절차를 거친 학생들이 단순한 절차를 거쳤던 과거보다 얼마나 우수한지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전형의 다양성과 학생들의 선택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국 대학 차원에서 표준화된 몇 가지 절차를 마련해 두고, 이를 대학마다 선택해서 사용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입시제도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대학에 맡기는 것이지요. 대학의 건학이념에 맞는 인재를 뽑는 게 가장 좋지요. 고려대는 교육구국이 건학이념이니까 당장의 실력보다는 리더십과 학창시절의 독자성, 자기개발 노력을 중심으로 뽑고 싶어요.”
―교육당국의 ‘3불’(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본고사 금지) 정책과 관련, “대입 완전자율화를 위해 폐지 논의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되면 고교등급제와 본고사의 의미가 퇴색될 겁니다. 논란이 되는 것은 기여입학제입니다. 저는 기여입학제 도입이 시급하다는 생각입니다. 기여입학제라고 해서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는 수험생이나 그 부모로부터 돈을 받고 입학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죠. 고려대에 커다란 기부를 하신 분 중에는 고려대와 특별한 연관이 없는데도 선뜻 나서신 분도 있어요. 이런 분들에 대해 대학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2세, 3세 중에 우리 대학에 입학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으면, 정원외로 입학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물론 기본 수학(修學)능력은 갖춰야겠지요. 이런 조건과 상황에 맞는 이들이 몇 명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원천적으로 막아 놓고 있으면 대학기부를 활성화하는 데 정서적인 융통의 여지가 없게 됩니다.”
“요즘 경쟁과 효율 이야기하는 사람 왜 없나”
대교협은 2011학년도 4년제 대학 모집단위별 예상 합격선 정보를 공개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대교협 회장인 이 총장의 결단으로 가능했다.
대교협은 학생 수능성적과 내신 등을 입력한 뒤 특정 학과를 검색하면 해당 학과의 4년제 대학 예상 합격선과 합격 가능 여부, 상·하위 평균점수 등을 알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했다.
―각 대학과 학과별 수능 합격점, 학생부 합격기준, 평균점수 등을 공개하고 전형료도 내리겠다고 했는데요.
“고려대는 입시설명회를 통해 관련점수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도 대학서열화 논란이 뒤따르면서 쉽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수험생들이 대학이나 일선 고교보다 빠릅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대입 합격자들이 자신의 내신등급, 수능점수, 기타 비교과목 실적 등을 공개해 일종의 합격선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전형료의 경우 미래로 KU 전형이나 교육기회균등 전형은 전액 면제했고, 전형별로 합격단계에 따라 전형료 일부를 환불해 주고 있습니다. 다만, 전형료 인하는 전국대학 차원에서 고려해야 합니다. 입시과정과 운영에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큰 비용이 들어갑니다.”
―현 정부의 교육정책 기조가 대학 자율화, 규제 완화입니다. 실제 대학이 느끼는 체감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현 정부 출범 당시 기조는 경쟁과 효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경쟁·효율을 얘기하는 사람이 적어요. 마이스터고 졸업생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게 하라는 말밖에 없더군요. 고대생만이라도 경쟁과 효율을 통해 수월성 교육을 하고 싶어요. 삼성 이건희 회장 말대로 똑똑한 한 명이 십만, 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그런 인재를 키우는 대학을 만들고 싶어요. ‘똔똔이’ 인재 만들면 뭐가 되겠어요.”
“대통령 만든 대학 총장답다”
―대통령을 배출한 대학의 총장인데, 정부에 답답한 점이 많은가 봅니다.
“국민들이 530만 표 차로 대통령을 만들어 줬고, 국회도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도록 했는데 국민의 염원은 어디 가고 야당에 끌려다니는 형편입니다. 쇠고기 파동도 그렇지요. 답답해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대통령 만든 대학 총장답다’고 말합니다.
(교육이) 수월성 제고(提高)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 자율이 어딨나요. 등록금도 올리지 마라, 입시전형료 낮춰라, 등록금 카드 분할납부하라, 전부 규제만 합니다.”
화제를 바꿔 정치이야기를 꺼냈다. 그에게 “무상급식 논란이 크다”고 하자 “(무상급식 공약을 내는) 후보를 떨어뜨리는 국민운동이 전개돼야 한다”고 했다.
―유럽에선 복지정책을 놓고 경쟁합니다. 우리도 벌써 복지 논쟁이 불붙었는데요.
“눈앞의 이익을 좇아선 국가부채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입니다. 선진국 문턱에서 쓰러진 많은 외국 선례가 있지 않나요? 쇠고기 파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자들은 다 거짓말인 줄 알았지만, 소용돌이에 매몰돼 버리고 말았어요. 서울시의회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 3분의 2를 차지하는데 오세훈(吳世勳) 시장이 소신을 펼치는 모습이 자랑스러워요. 그런 정치인이 많아야 합니다.”
오 시장도 고려대 법대 출신이다. 상법 전공인 이 총장이 민사소송법을 전공한 오 시장을 직접 가르치진 않았다고 한다. 이 총장은 “정말 국민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할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야 한다”고 했다.
이 총장은 고려대 출신 고시 합격자 친선모임인 ‘겸선회(兼善會)’에 참석해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겸선회 회장은 이귀남(李貴男) 법무장관이다.
“쇠고기 파동과 관련, 재판부가 ‘고의성이 없어’ 일부 무죄 판결을 했더군요. 전 어떻게 그런 판결을 할 수 있느냐고 했어요. 이래선 선진사회, 공정사회가 되기 어렵다, 당신들 제 역할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한다고 했어요. 지난 6·2 지방선거를 보세요. 그때 여당 찍으면 전쟁 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 유언비어가 표심에 영향을 줬습니다. 뭐하고들 있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하지만, 어디든 그렇지만, 잘 뭉친다는 고려대도 정치권에 들어가서는 여야로 나뉘어 반목하며 갈등하는 게 현실이다.
―고려대도 다 잘 뭉치는 것은 아닌가 보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있기 마련이지요.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에 가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출석을 잘 안 합니다. 출석을 해도 잠시 있다가 사라져요. 그런데 민주당 4명, 자유선진당 1명, 민노당 1명, 상임위원장 1명 등 7명의 야당 의원들은 끝까지 상임위를 지키고 보충질의까지 합니다. 상임위를 하는 데 3시간을 끄는데 그동안 한나라당 의원들은 한두 명이 있을까 말까입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만들어줬는데, 여당은 상임위는 물론 국정감사도 안 합니다. 그런데도 늘 바쁘다고 해요. 국회의원이 국회 일 말고 더 바쁜 게 있나요? 국가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질문도 안 하는 선량은 떨어뜨려야 합니다. 만일 기회가 닿으면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장을 하고 싶어요. 일 안 하는 국회의원 다 떨어내게요.”
‘고려대 學’을 강의
고려대가 2010년 2학기부터 고려대학교의 정신과 역사를 가르친다는 취지에서 ‘고려대 학(學·Korea University Studies)’ 과목을 개설했다. ‘고려대 학’은 선택 교양 강좌로, 강의는 고려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인권환 명예교수가 주로 맡고 있다. 그러나 과목 개설 아이디어를 낸 이기수 총장 역시 강단에 올라 몇 차례 수업을 진행했다.
전 학년 대상이며 주 50분간 수업하는 1학점짜리다. 학점은 매기지 않고 ‘합격 또는 불합격(pass or fail)’으로만 평가한다. 이를 두고 “대학교가 무슨 학문이냐”는 논란이 있었다.
―한국인에게 ‘고려대’는 어떤 대학입니까. ‘고려대 학’이란 우리 사회에서 어떤 학문이고, 어떤 학문이어야 합니까.
“이번에 개설한 ‘고대의 역사, 전통과 미래’는 전 사회를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고대생들에게 자신이 다니고 있고, 앞으로 마음의 고향이 될 고려대를 배우고 알아 가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 제시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 역사를 배워 한 민족의 흔적을 찾듯 고대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마련했어요. 그러한 강의 속에서 학생과 교수가 토론하고 연구하면서 ‘고려대 학’의 모습이 갖춰지리라 기대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고려대는 정의와 지성의 보람이며, 열정의 원천지라고 자부합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고려대가 국민에게 인식되기를 바라며, 모자란 점이 있다면 고려대는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고려대의 현재는 과거와 어떻게 다릅니까. 또 현재의 고려대는 또 어떤 미래를 꿈꿉니까.
“고려대의 미래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과거가 남긴 전통을 이어나가고 거기에 미래가 요구하는 정신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선진화의 시대로 나가고 있고, 지구촌은 글로벌화되었습니다. 이 속에서 고려대는 민족혼과 개척정신을 담은 세계 선도대학으로서 굳건히 전진할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고려대 입학한 지 두 달밖에 안된 김연아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자 “내가 고대 정신을 주입시킨 결과이며 고대가 김연아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서 조금 시끄러웠습니다. ‘고대 정신’이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나요.
“제가 김연아 선수에게 고려대에 오라고 권했더니 연아 부모님께서 ‘연아가 가고 싶은 대학에서 연락이 오니 기쁘고 너무 행복하다’고 하더군요. 대학은 교육기관이자 지도자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저는 연아에게 ‘스타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체육지도자의 길을 가라’고 했어요. 개척정신을 가르치는 고려대에서 지도자의 길을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교생 김연아’와 ‘고대생 김연아’는 전혀 다르지요. 고대생이 되어 빛을 발한 것이니 ‘이기수가 3개월 만에 애를 낳았다’고 언론에서 얘기하더라고요. 하하하.”
이 총장은 지난해 9월 6일 ‘고려대 학’ 첫 강의에서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기독교 교리전파 수단으로 만든 대학이다. 서울대는 일본이 침략의 방편으로 만든 관립대학”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러 왔었다.
“서울대는 일제 식민지의 역사적 아픔을 딛고 오늘날 세계적인 대학이 된 것이고,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종교적인 사명감에서 출발해 명문대학을 이루었습니다. 그에 비춰 고려대는 민족적인 성원과 교육구국 의지에서 출발했기에 그들과는 다른 자긍심을 가져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제자 오영식·신계륜·정재관·손창일 기억나
총장 집무실 책장에는 그가 쓴 상법 관련 서적이 가득했다. 그에게 상법학자로서의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퇴임 후 미국과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에서 각각 1년씩 보내 5년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제 인생 3모작의 45년 중 5년은 그렇게 연구하며 이후 40년을 준비하겠습니다. 기업을 둘러싼 민사, 상사(商事), 노동, 국제거래, 지적재산 등 모든 법률을 통틀어 종합서를 내는 게 학자로서의 꿈입니다.”
―평생을 가르치며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가 오영식(吳泳食) 군이에요. 총학생회장 출신인데 노무현 정부 때 국회의원을 했어요. 스승의 날이 되면, 꽃 한송이라도 들고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신계륜(申溪輪) 군도 생각이 나네요. 제가 육사 교관을 마치고 고려대로 돌아와 상법을 가르칠 때 처음 만났어요. 그 인연으로 ‘신계륜 후원회장’을 5년이나 했어요. 정재관 군 역시 1992년 총학생회장 출신입니다. 제가 학생처장 시절 만났는데, 학문하는 자세를 갖춘 학생이었어요. 제가 그 친구를 볼 때마다 공부하라고 권했더니 결국 학문의 길로 들어서 현재 조지워싱턴대 정치학과 교수로 있어요. 손창일 군도 총학생회장 출신입니다. 고려대 역사상 처음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이었어요. 법대를 다녔는데, 그에게도 늘 공부하라고 했었어요. 위스콘신 매디슨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헌법재판소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부 총학생회장 출신들이 우선 기억나네요.”
이 총장은 꿈을 향해 실패와 도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삶이란 늘 자신이 꾸는 꿈과 일치할 수 없는 법이다. 이 총장은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꿈과 현실 사이에서 늘 새로운 시도를 즐겨 왔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그 치열한 과정이야말로 펄떡이는 생의 오롯한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꿈을 지녀야 할까요? 세상에는 꿈과 목표를 완전히 상실한 채 그날그날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꿈에 한 발짝씩 더 다가가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우리의 삶을 갈라 놓는 열쇠입니다.”⊙
“아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비로운 붙임성과 친화력으로 누구와도 친분관계의 유대를 이루는 분.”
이기수 총장을 여러 차례 만나며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았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짙은 눈썹, 턱수염이 있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이 ‘안암골 큰 호랑이’에게 빨간 티셔츠를 입힌다면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뽕짝’이 밥상의 김치와 같은 존재라면 이 총장은 왠지 막걸리가 잘 어울릴 것 같다. 실제로 이 총장은 유년 시절(경남 하동군이 고향)부터 어머니가 주는 막걸리를 마셨다고 고백한다. 나이가 들어 안암골의 두주불사로 통했지만 몇 해 전 기공을 배우며 술 생각이 사라졌다고 한다. 덕분에 몸무게가 98kg(키는 170cm)에서 78kg으로 줄었다. 그래도 제자들과 교수들을 불러놓으면 막걸리를 마신다. 고려대 농대 교수들이 2009년에 소화 촉진 성분을 넣은 ‘고려대 막걸리’를 개발한 것도 이 총장이 지시했단다.
나훈아의 후계인 현철·태진아·송대관이 트로트 부흥운동을 펴 왔다면, 이 총장은 2008년 총장 부임 이래 고려대의 부흥을 위해 애써 왔다. 나훈아는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이 총장은 여전히 현역이다. 아니, 현역의 정점에 서 있다.
린위탕(林語堂)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12월 마지막 날에 연초에 결심했던 것을 되돌아보고 ‘지금까지 한 30%쯤 이루었구나’ 하며 아쉬워하는 데 있다.”
이 총장에게 꼭 어울리는 말이다. 이균성 교수 역시 “2011년부터 이 총장은 나머지 70%를 위해 왕성한 활약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 총장은 2011년 2월 28일 총장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정년퇴직한다.
양해를 구한 뒤 이 총장의 수첩을 뒤적여 보니 ‘끊임없는 도전’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비서실 직원은 “총장님은 ‘메모광’”이라고 귀띔했다. 손바닥 크기만한 ‘2010년 수첩’의 겉장은 너덜너덜했다.
―아직도 ‘도전’할 게 남았습니까.
이 총장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라며 이렇게 말했다.
“제 인생 삼모작 45년 계획을 세워 두었어요. 태어나 고려대 입학하는 스무 살까지가 일모작이었다면 스물부터 예순다섯 되는 2010년까지가 이모작이었습니다. 이모작은 고려대와 법학공부, 독일유학 등 3가지로 채웠습니다. 나머지 삼모작은 미국,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초빙교수로 학문연구와 강연, 사회봉사로 45년을 살렵니다. 삼모작이 끝나는 해에 제 나이 110세가 됩니다. 그해는 1905년 개교한 고려대가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2055년 세계 30대 명문대학으로 우뚝 선 고려대 개교기념일에 새로운 천 년을 향한 축사를 하고 싶습니다.”
이 총장의 수첩을 보니, 2011년 3월 1일 일정란에 오전 10시15분 발 워싱턴행 대한항공 예약번호가 적혀 있었다. 2월 28일 정년퇴임식을 한 다음날 출국이다. 언제 돌아올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조지워싱턴대 로스쿨에서 연구하며 삼모작의 첫 일정을 시작할 겁니다.”
“인생을 알아갈 때부터 삶의 축은 고려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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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수 총장은 메모광이다. 늘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일상의 모든 일을 메모한다. |
정운찬 전 총리는 축사에서 “탁월한 연구와 후덕으로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내고 법학 관련 학회장을 두루 거치며 학계에서 우뚝 섰다. 국제적 안목과 다방면의 행정 경험에서 오늘날 대학이 요구하는 학자이자 학교 경영마인드를 동시에 갖춘 소유자”라고 평했다.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은 “연암 박지원 선생의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정신을 새로운 고대인 상으로 세우고 ‘세계를 향한 개척정신’을 바탕으로 창의적 인재 육성에 주력했다. 이 법고창신 인재상은 미래에도 고려대와 함께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법고창신’의 정신을 강조하며 “고려대를 민족혼과 개척정신을 담은 세계 선도대학으로 키우겠다”고 말했었다.
이날 정년논문 봉정식 말미에 이 총장은 연단에 올라 감개무량한 듯 고려대와 함께한 45년을 회고했다.
“어린 나이에 경남 진주로 나가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는 그저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고, 그 넓은 세상을 고려대로 선택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고대생이 되어 법학을 배웠고 독일유학에서 돌아와 고려대 교수가 되었으며 총장 선거 4번 만에 총장이 되었습니다. 가까이에서 힘이 되어 준 여러분, 그리고 고려대와 함께 45년을 보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아갈 때부터 제 삶의 축은 고려대였어요. 제 자신에게도, 여러분에게도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연설을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 세계 727개 대학과 협력·협정
이기수 총장의 고려대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국제화이다. 고려대는 지난 1월 11일 소비자가 뽑은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디지털조선 주관)에서 사립대학 부문 대상을 받았다. 선정이유가 흥미롭다. ‘글로벌 명품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년 전만 해도 고려대는 시골과 서민의 문화를 대변하는 ‘촌놈들의 학교’였다. 교수와 학생들도 스스로를 막걸리 대학이라고 불렀다. 안암골에서 글로벌 명품 인재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굳이 따지자면 글로벌에 관한 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한 연세대가 가장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대는 민족적, 연세대는 서구적’이라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고연전(연고전)에서도 고려대는 농악대를, 연세대는 서양식 고적대를 앞세워 왔다.
소비자들이 고려대를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로 지목한 이유가 된 ‘글로벌 명품 인재’라는 콘셉트(개념)는 이기수 총장이 직접 내놓은 것이다. 이 총장이 말하는 글로벌 명품 인재란 리더십, 능력, 어학 실력에 민족혼과 개척정신까지 겸비한 세계 선도인이다. 동양과 서양, 한국과 세계 그리고 고전과 현대를 함께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세계의 지도자인 셈이다.
그 내용은 이 총장이 청사진으로 제시해 온 이른바 ‘2030 프로젝트’에 잘 나와 있다. 2030 프로젝트란 글로벌 명품인재 육성을 통해 고려대를 2030년까지 세계 50대 명문에 진입시키겠다는 약속이다.
78개국 727개 대학과 M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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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수 총장은 ‘영원한 맞수’ 연세대로부터 명예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른쪽은 김한중 연세대 총장. |
글로벌 명품 인재를 기르기 위해 영어강의 비율을 계속 높여 2010년 현재 37.6%까지 끌어올렸다. 경영대학은 66.6.%다. 외국인 전임교수도 132명으로 늘렸다. 전체 전임교수의 8.32%에 달한다.
지난 2004년 281명으로 시작한 고려대 국제하계대학은 2008년 1405명으로 늘어났고 2009년 1580명, 2010년 1430명이 참가했다. 지금까지 국제하계대학을 거쳐 간 국내교포 및 외국인 학생이 총 7627명에 이른다.
그런 자신감에서 이 총장은 2009년 5월 ‘2009 유니버시타스 21(U21) 세계대학총장 연례 심포지엄을 주관했다. U21은 미국 버지니아대, 영국 버밍엄대, 호주 멜버른대 등 세계 명문대학 간의 네트워크로 1997년 설립됐다. 고려대는 2004년 국내대학 최초로 17번째 가입했으며 전 세계 14개국 21개 회원교가 있다. 세계 대학총장회의를 한국의 대학이 주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총장은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세계를 누비며 고려대를 소개하고 양해각서(MOU)를 체결, 학생들이 해외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기회를 늘렸고, 외국인 학생이 고려대로 찾아오게 했다. 비단 대학만 찾은 것이 아니다. 세계의 다국적 기업과 국제기구를 돌며 인턴계약을 맺고 졸업생들의 취업길을 텄다. 이 총장은 말한다.
“고려대 건학이념이 교육구국(敎育救國)입니다. 민족 고대만으로도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가 글로벌 무대에서 힘을 키우고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죠. 민족 고대를 뛰어넘어 세계 명문대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육구국이라는 건학이념을 구현한다는 사명감으로 국제화에 열을 올렸던 것이지요.”
어문학 계열, 해외에서 1학기 공부 안 하면 졸업 못해
연세대가 송도국제화복합단지(송도 GAC)를 토대로 국제하계대학, 연세어학당, 외국인학부 예비과정을 개설할 때 고려대는 아예 해외에 캠퍼스를 만들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캐나다 UBC대, 영국 로열할레웨이대, 중국 런민대학에다 전략 거점 캠퍼스를 세운 것이다. 학생들이 유학서류를 떼느라 별도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 기숙사나 하숙집을 구하려고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 총장은 문과대 어문학 계열은 1학기 이상 해외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졸업을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대신 해외 교환대상 학교 수를 최근 두 배 이상 늘렸다. 유학 경비는 국내 등록금으로 가능하다. 부족한 돈은 대학이 책임진다. 한때 국제화에 앞섰던 연세대의 장점을 고려대의 장점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이 총장의 말이다.
“국제화가 아무리 좋아도 한국적 혼이 빠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글로벌을 하더라도 한국 국적을 갖자’라는 게 제 모토였어요. 해외로 학생을 내보내는 것과 함께 외국인 학생을 데려오는 전략을 동시에 세웠습니다. 그래야 고려대가 세계 명문대학이 될 수 있습니다. 고려대는 4·19의거보다 앞서 4·18의거를 이룬 학교입니다. 그런 선구자적 정신에서 세계적 대학으로 키우고자 애썼어요. 그 결과, 대학의 국제화, 교수의 질, 학생의 실력 면에서 경쟁대학을 압도했다고 자부합니다.”
2008년 12월 중순, 고려대가 일간지에 광고를 실었다.
<당연히 고대 경영이 서울대보다 좋아요!>
사실 여부를 떠나 이 문안은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고려대 경영전문대학원 김 모 교수의 말이다. “흔히 ‘연상고법(연세대는 상대, 고려대는 법대가 간판)’이라 생각하는데, 로스쿨이 생기면서 고려대 법대의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어요. 고려대의 간판 학과가 없어지게 된 셈이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오래전부터 다각도로 노력해 왔으며 이 총장이 부임하면서 가속도가 붙게 됐고 그 결과가 ‘서울대보다 낫다’였습니다.”
그 일환의 하나로 ‘고경(고대 경영)’을 밀었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LG포스코 경영관을 건립했다. 연세대 경영대학이 이에 자극받아 건물을 신축하자 고려대는 아예 하나를 더 짓고 있다. 이른바 현대자동차 경영관이다. 1만5533㎡(4700평) 부지에 420억원을 들여 지상 5층 지하 4층 규모로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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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수 총장은 항상 한 학기 강의를 끝낼 무렵, 제자들에게 “언제 어딜 가든 힘들 때 연락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제자들에게 ‘인심 후한 맏형’이란 평가를 받는다. |
세계 명문 서열 한국 1위
김 교수의 설명이다. “이 총장의 지시로 고3 학생들과 대학 1학년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봤습니다. 대학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답이 나왔어요. 대학 선배가 좋다거나 전통이 있다거나 이런 게 아니더라고요. 학교 시설이 좋고, 장학금이 많고, 취직이 잘되기 때문이래요. 그래? 그렇다면 3박자를 확실히 다지자고 했어요. 대학원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고, 학부 학생에게는 졸업할 때까지 50% 이상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어요(고려대 경영대학은 58%가 장학생). 글로벌 다국적 기업에 인턴 길을 열고 취업 길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자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의 주머니를 털었어요.”
이 총장에게 “고대 경영의 우수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달라”고 하니 이렇게 답했다.
“우선 정부가 심사하는 ‘BK 21 평가’에서 고대 경영이 3년 내리 1등을 했어요. 한경비즈니스의 전국 경영대학 평가역시 4년째 1등이고요. 전 세계 경영대학 학장들이 뽑은 세계의 명문 서열에서도 한국 1위에 올랐습니다. 최근의 모든 평가에서 고대 경영이 서울대 경영을 제쳤습니다. SCI 논문 등재에서는 다른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 있어요. 이 대목은 서울대 경영 교수들이 잘 인정하고 있죠. 그뿐인가요? 세계의 경영학 인증기구인 AACSB와 EQUIS로부터 국내 최초로 공인을 받았으며 지금은 또 국내에서 유일하게 재인증까지 받고 있습니다.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자 수 또한 1등입니다.”
이 총장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고경의 역사는 고려대 설립연도인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보성전문이 법과와 상과로 출범했습니다. 상학이나 경영학, 경제학의 역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었지요 하버드대와 비교해도 별로 처지지 않아요.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훌륭한 졸업생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단일학과로는 CEO를 가장 많이 배출해 왔습니다. 그러나 고경은 하나의 예일 뿐 고려대의 다른 단과대학과 학과들도 세계의 명문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총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경영대학뿐 아니라 고려대 전체 수준이 크게 올라갔다고 자부합니다.”
‘3년간 2000억원 모금 가능’
이 총장은 고려대의 ‘막걸리 네트워킹’을 세계로 확대하는 일을 추진했다. 전 세계를 미주와 유럽, 아시아태평양 지역 등 3대 권역으로 나눠 총연합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 총장은 “단순한 친목 도모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사회에 기여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새로 만든 글로벌 네트워크는 졸업생뿐 아니라 교민과 현지인까지 포괄하면서 지구촌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감정적 응집을 넘어 협동하는 모범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속한 지역사회나 직능사회에서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하고자 합니다. 교우회 활동은 교우 개인에게서 보면 본업의 밖에 있는 과외활동입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친목도모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사회에 기여하는 시도가 되기를 고대인은 바라고 있어요.”
이 총장은 29만 고려대 교우를 등에 업고 2008년부터 7년 계획으로 대학발전 기금 1조원 조성운동을 펴고 있다. 고려대만이 꿈꿀 수 있는 액수다. 지난 3년 실적은 1873억원이다. 약정액까지 합치면 재임기간 2000억원 모금은 가능하리란 게 그의 판단이다.
“제 재임 기간에 연평균 기부금은 630억원인데 이는 취임 전 연평균 기부금보다 약 100억원이 많은 금액이고 특히, 2010년 4월 ‘천년 고대, 감사와 전진의 밤’에서 3시간 만에 202억원의 약정 을 받았아요.
우리는 외국 대학처럼 모금 전문회사의 컨설팅을 받아 타당성을 검증한 뒤 캠페인을 시작했고 기부금을 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발전에 대해 진지한 의사소통을 하는 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어요. 국내대학 최초로 ‘기부자 권리 헌장’을 제정, 공포해 모금에서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고 있지요.”
충북 오송에 의·생명공학연구소 건립 중
이 총장은 단과대학별로 나뉜 교양교육을 대학 차원에서 집중 관리하는 교양교육원을 세우고, 사회봉사단을 만드는 것 외에 약학대학, 디자인 스쿨, 미디어 스쿨을 신설하는 등 새로운 교육 개혁안도 마련했다. 지금까지 고려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뒤집어 말해 자연과학이나 공과대학이 상대적으로 뒤진다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인문학도 분야 간 통섭을 통해 새로운 학문적 가치를 창출하려는 총장의 의지를 담았다.
예를 들어 미디어 스쿨은 기존 언론학부를 확대, 개편해 영화나 인터넷 등 뉴미디어까지 총괄해 다루게 되며 디자인 스쿨은 기존의 조형학부에 산업디자인, 패션디자인, 조경학까지 합쳤다. 약학대학은 기존의 의학, 생명과학에 약학까지 연결, 올해부터 세종캠퍼스에서 첫 신입생을 뽑는다.
“전통적인 학문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학문과정을 도입, 대학의 외연을 넓히고자 합니다.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 변화에 좀 더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대학이 되고자 합니다. 아울러, 충북 오송 생명과학단지 내 3만3000㎡ 터에 450억원을 투자, 의·생명공학연구소를 건립 중입니다. 신약개발과 줄기세포 연구 등 차세대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기반이 될 거예요.”
생명공학은 21세기 산업을 이끌어갈 분야다. 이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산업현장에 신선한 학문역량이 유입되고, 산업현장에 축적된 경험이 학문세계에 유입되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이 총장은 “의·생명공학연구소는 지역의 산업적·기술적 기반과 대학의 학문역량을 결합해 새로운 산학연(産學硏)연합체의 모델로 만들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성공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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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 시절의 이기수 총장. 그는 “어린 시절, 대한민국에 고려대밖에 없는 줄 알았다”고 말한다. |
“제 삶을 되돌아볼 때, 처음으로 꿈을 품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당시 너무 어려 인생의 목표니 하는 거창한 이름은 못 붙이지만,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어린 아들이 걱정돼 만류하던 어머니를 뒤로하고 저는 겁도 없이 도회지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지요. 50년이 흐른 지금, 제가 그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가끔 되돌아봅니다. 아마 평생 농사를 짓고 살지 않았을까요?”
이 총장은 진주 배영초등학교로 전학해 진주중 3년을 보태 4년간을 진주에서 살았다. 이후 부산 동아고로 유학해 4촌 형님 집에서 3년을 지냈다. 그리고 1965년 고려대 법대로 진학하며 상경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로 부지런하다. 그 역시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일어나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 이런 ‘얼리버드(early bird)’ 습관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익혔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오후 하동의 집을 찾아 어머니를 뵙고 월요일 새벽 4시반쯤 진주행 버스를 타야 했다.
“몇 시에 잠자리에 들었든 새벽 3시에 눈을 뜨고 책상 앞에 앉아 그날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계획합니다. 대략 오전 7시까지 저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결혼한 뒤 얼마 동안은 아내조차 제가 새벽에 일어나는지 몰랐죠.”
―새벽에 하는 일은요.
“젊은 시절엔 제 전공인 상법(商法)과 관련된 글을 쓰거나 《고시계》 등에 원고를 썼어요. 그 원고들이 차곡차곡 쌓여 연구서가 됐지요. 지인들이 ‘사람 만나길 좋아하는 사람이 언제 책을 썼느냐’며 깜짝 놀라지요. 요즘엔 하루 동안 처리해야 하는 업무 편지나 이메일 답신, 강의 준비를 하고 연설문도 살펴봅니다.”
백지 위에 자신의 미래상을 적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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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수 총장의 수첩에 적힌 메모. 총장 퇴임을 앞두고 새로운 인생의 삼모작을 준비하며 ‘도전’을 꿈꾼다. |
“수첩에다 세세한 일일계획표를 세우고 항상 가슴에 품고 끊임없이 진행상황을 체크합니다. 전에 만났던 사람에 대한 기록을 해 두면 다시 만날 때에 개인적인 상황을 알게 돼 더욱 친근감을 갖게 되지요. 또 만남의 목표를 잘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됐어요. 어떤 사안에 대한 시비가 있을 경우에도 기록은 그 무엇보다도 좋은 길잡이가 됩니다.”
이 총장은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다. 장기, 단기계획을 세우고 착실히 준비하며 도전한다. 그래서 바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만만치 않아요. 젊은 시절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만약 현실을 벗어나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싶다면 이런 방법을 제안하고 싶어요.
첫째, 지금 당장 종이를 꺼내 자신이 꿈꾸는 3년 후의 미래, 5년 후의 미래, 10년 후의 미래상을 적어 보세요. 그리고 각각의 옆에는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적으세요.
둘째, 각각의 미래상 옆에 적어 넣은 ‘필요한 노력’을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세요. 인생을 바꾸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제가 굳게 믿는 것 중 하나는, 운명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불가항력으로 정해진 일이란 없으며, 운명이란 사람이 만들어낸 실체 없는 개념일 뿐입니다. 언제나 노력한 만큼 되돌아오는 것이니 꿈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노력이 부족함을 탓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일은 오늘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어요.
셋째, 오늘부터 실천에 옮기는 그것은 나에게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이어야만 하고 더불어 현실성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아마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실패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곧바로 훌훌 털어버리세요.”
아내·아들·딸, 며느리·사위까지 고려대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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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수 총장과 부인 조효임 서울교대 교수. |
이후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고려대로 돌아왔다. 학생처장, 기획처장 등을 맡아 온 이 총장은 한국법학교수회장, 한국독일학회장, 한국저작권법학회장 등을 맡는 등 학회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특히 그는 “사람이 자산(資産)”이라며 폭넓은 인맥을 쌓아 온 것으로 유명하다. 4년 선배인 이명박 대통령과 대선(大選) 당일 통화할 정도로 절친하지만 주차장 정리요원, 식당 직원 등 학교 직원과도 마주칠 때마다 악수를 청한다.
강의를 끝낼 때 제자들에게 “언제 어딜 가든 나한테 연락해 해결될 것 같다 싶으면 연락하라”고 당부해 제자들 사이에는 ‘인심 후한 맏형’이란 소리도 듣는다.
고려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가족들도 모두 ‘고대 동문’으로 만들었다. 아들 딸은 물론, 며느리 사위까지다. 서울대를 나온 아내 조효임(曺效任) 서울교대 교수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나와 결국 ‘고대 가족’이 됐다.
“고려대에 입학하면 돈이 필요 없어요. 선배들이 술, 밥을 다 사주니까요. 막걸리를 마시며 고려대 교가부터 응원가까지 다 가르칩니다. 그런 끈끈함이 몸에 배어서 단결력으로 표출됩니다. 글로벌 사회에서도 네트워킹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요? 그런 점에서 고려대는 다른 대학과 다르죠.”
순혈주의는 고려대 망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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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튀빙겐대 유학시절. 왼쪽부터 이기수 총장, 둘째 수진, 첫째 병준, 부인 조효임 교수. |
“고려대 교수 중에서 고려대 학부출신이 몇 %인지 아세요? 아니, 연세대는 얼마인지 아세요? 78%쯤 됩니다. 서울대는 90%가 넘지요. 고려대는 안암캠퍼스 60.9%, 세종캠퍼스 50.8% 안팎입니다. SKY 대학 중에서 고려대가 타대학 출신에 대해 가장 개방적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고려대 순혈주의 타파를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유전학에 근친교배라는 말이 있지요.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대 출신들로만 교수를 구성하면 서로 비판을 하지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발전을 못합니다. 새로운 이론과 학설을 받아들일 여지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지요. 교수를 채용할 때 고려대 학부 출신은 최대한 억제하고 그 대신 한국대학 중에서 비 고려대 출신과 해외대학 출신을 집중적으로 뽑았습니다. 순혈주의는 단과대학 중에서도 의과대학이 가장 심한데, 이 역시 고려대 출신을 가급적 배제하고 해외에서 공부하지 않은 이는 페널티를 주려고 해요.”
―반발은 없습니까.
“왜 없겠어요. 외국 서적도 국내에서 다 보고, 해외 학술지에 논문도 쓰니 외국에 갈 필요가 없다는 식인데, 일본의 예를 들어 볼게요. 제가 1970년대에 독일에 유학 가서 공부해 보니, 1800년대 말 일본 학자들이 독일로 유학 가 박사논문을 많이 썼더군요. 와세다대의 경우 126년 전에 독일인 교수 7명이 영어로 수업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은 그렇게 노력했어요. 그런데 요즘 일본 대학의 논문을 보면, 참고문헌이 미국이나 독일 서적 하나 정도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어요. 대개가 자기들끼리 서로 주고받는데 우물 안 개구리가 됐어요. 국제적 기준이 뭔지 모르게 된 것이지요.
저는 의대교수들에게 이대로 가다간 나라 망한다고 말합니다. 고려대 의대 망하고, 대한민국 의료 다 망하고, 나라도 망해요. 스스로 세계 최고라 생각해서 제자를 외국에 안 보내고 고려대 출신들끼리 먹고살겠다? 이것은 안 됩니다.”
이 총장은 독일 유학시절을 잊지 못한다.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장학생으로 1977년 9월 튀빙겐대에 진학했다. 32살 때의 일이다.
장학금만으로 생활을 꾸려 가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와 동생의 도움을 받았지만 충분하지 못해 여름방학 때는 6주씩 세 번 벤츠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해 책값을 벌었다.
“15년이 지난 뒤 아들 역시 튀빙겐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딸과 사위 역시 튀빙겐대에서 1년간 수학하기도 했어요. 저랑 아들이랑 지도교수가 같아요. 부자(父子)가 같은 대학, 같은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연은 온 세상을 둘러봐도 흔하지 않을 겁니다. 아내 역시 튀빙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죠. 우리 가족 모두 튀빙겐에서 공부한 동창입니다.”
상법·기업법 영역에서 독보적 위치
이 총장은 독일에서 귀국해 1989년 어음수표법을 시작으로 회사법, 상법총칙, 상행위법 등 상법 관련 여러 학술서를 집필했고 특히 독일의 상법이론을 국내에 본격 소개했다. 전통적인 상법 이외에 경제법, 국제거래법, 지적재산권법 등 기업 관련 법 영역에서도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다.
그러나 선거와 인연이 적었다. 총장 선거에 네 번이나 도전했다. 선거를 치르며 동료 교수들과 송사(訟事)를 겪기도 했다. 결국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저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현실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좋은 행동일지라도 자신의 능력범위 밖의 일이라면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나지 않아요. 총장 예비선거에서 1등을 하고도 결선에서 진 일이 있어요. 저를 도와준 동료 교수들이 펑펑 울며 낙담했지만, 오히려 제가 달래야 했어요. 아무리 실패해도 나쁘게만 보지 않으려 했어요.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함께하는 법이니까요. 실패만 바라보지 말고 긍정적인 면을 보려 노력했어요.”
이 총장은 이런 말도 했다.
“실패는 성공의 전제조건과 같아요. 실패해 보지 않은 사람은 성공할 수 없고, 설사 운이 좋아 단번에 성공하더라도 머지않아 다시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우리는 젊은 시절, 되도록 많은 실패를 해 봐야 합니다. 실패를 여러 번 해 보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길을 알 수 있게 돼요. 그래서 조상들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젊어 실패는 사서도 한다. 그러나 같은 것으로 두 번 실패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보니, 이 총장에겐 실패의 경험이 적지 않다. 고교 입시에서 1차에 낙방했고 대입도 재수했다. 사법시험에 도전해 떨어진 경험도 있다. 유학도 남들보다 늦어 서른둘에 갔다. 거기다, 총장 선거 4수(修)까지 그의 일생은 실패와 도전으로 가득하다.
“젊은이들에게 ‘실패해도 절대 좌절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좌절은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지만 실패했다고 무너지면 그때야말로 진짜 실패자로 사라져 갑니다. 역사의 위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서 결국 성공을 이뤄낸 사람들입니다.”
그의 좌우명은 만도내근(萬道耐勤)이다. 모든 일을 행함에서 인내와 근면, 성실로 임한다는 뜻이다.
“제 삶이 항상 꿈과 일치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어요. 제 삶은 도전과 실패, 그리고 간혹 있었던 성공이 함께 어우러진 것입니다. 전 좌절하거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늘 ‘만도내근’이란 글귀를 새기고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꿈에 다가가는 지름길입니다.”
누가 들어갔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나왔느냐를 따지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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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연전을 앞두고 고려대 응원단과 함께한 이기수 총장. |
―총장취임 후 새롭게 마련한 입시제도는 무엇인가요. 그 결과, 우수 학생들이 얼마나 진학했는지 궁금합니다.
이 총장은 현재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도 겸하고 있다. 대학교육의 관리자이기도 한 것이다.
“대학 입학 제도는 단순히 대학의 신입생을 선발하는 연례 행사일 수 없습니다. 전국의 모든 초·중·고교의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이 대입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들이 어떤 방식으로 선발을 하느냐 하는 것은 이 나라 교육의 방향을 좌우하는 실로 중차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대입제도에는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심오한 교육철학이 담겨야 한다고 봅니다. 총장 취임 후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 것이 입학사정관 제도를 본격 도입했다는 사실입니다.”
―입학사정관 전형에 어떤 교육철학이 담겨 있나요.
“우선 초·중·고교의 공교육을 정상화하자는 취지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대학들은 오랫동안 수능을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해 왔습니다. 수능은 그 자체로는 좋은 시험입니다. 문제는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많은 학생이 학원이나 과외 등 사교육 쪽에 의존한다는 사실입니다. 밤늦게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정작 학교에 와서는 피곤한 나머지 졸게 되는 것이지요. 학교 선생님에 대한 존경도 사라지고 인성교육 또한 제대로 할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학교교육, 즉 공교육을 살리지 않고서는 우리의 미래가 없습니다. 공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학교생활의 내용이 입시에 그대로 반영돼야 합니다. 입학사정관 제도는 선생님들이 작성한 생활기록부와 학교 내신 성적을 위주로 학생을 선발합니다. 입학사정관 제도가 완전하게 확립되면 사교육은 사라지고 공교육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점수보다는 잠재력을 위주로 뽑는다는 취지도 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지금 우리는 산업화 시대를 넘어 지식과 창의, 그리고 감성이 승부를 좌우하는 후기 지식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기계로 움직이던 산업화 시대에는 점수 1~2점의 차이가 중요할 수도 있어요. 지금은 아닙니다. 물론 점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다양한 특성과 숨겨진 잠재력, 그리고 창의성 등도 매우 중요해요. 이런 것들은 정량 평가로 점수화하기 어렵습니다. 각 개인의 장점을 충분히 반영해 미래의 인재를 뽑자는 것이 입학사정관 제도의 취지죠.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유럽 등 거의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입학사정관 제도를 확대 실시하고 있어요.”
―입학사정관 제도 도입 이후 신입생들의 성적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내신등급이나 수능성적을 기준으로 보면 입학사정관제로 입학한 신입생들의 성적이 정시 입학생보다 떨어집니다. 성적보다는 잠재력이나 창의성 또는 인성을 보고 뽑았으니까요. 입학사정관제로 선발된 학생들의 대학 입학 후 평점에는 매우 의미 있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즉, 1학년 때에는 수능 위주의 정시모집 학생보다 다소 낮지만 향상 속도가 빨라 2학년 이후에는 정시모집 신입생보다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고교등급제는 결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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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수 총장은 사회봉사단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강의실에서 배울 수 없는 살아있는 지식을 익히도록 했다. 사진은 사회봉사단 학생들과 연탄을 옮기는 모습. |
그러나 대교협(당시 회장은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자체조사 뒤 “고교등급제는 안 한 것으로 판단한다”며 고려대의 손을 들어줬고, 교과부도 대교협 관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총장의 말이다.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전형과정은, 정확히 따지면 수십대 1에 달하는 지원자를 학교생활부를 기준으로 17배수 정도로 가리는 1단계 절차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고려대는 이 과정에서 수험생의 출신 고교를 차별한 사실이 일절 없습니다. 고교별로 다른 점수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고교등급제라는 일부의 지적에 동의할 수 없어요. 잘 아시는 대로 교육과정개편(7차 교육과정)으로 요즘 고교는 선택과목이 많습니다. 서로 다른 과목이다 보니 등급도 천차만별이죠. 교사에 따라 시험문제를 쉽게, 또는 어렵게 출제하는 바람에 표준편차에서도 큰 차이가 납니다. 이를 과목별로 표준화했는데, 불합격한 24명의 학부모들이 이의를 제기해 소송에 이른 것입니다. 이들은 내신등급이 높은데도 1단계에서 떨어졌다면서 항의하고 있지만 학생부상에 기재되어 있는 내신 성적기준 등급과 과목별 표준화를 거친 내신등급은 서로 다른 것이고 또한 당시 1단계 전형에서는 내신등급과는 무관한 비교과도 10%를 반영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교육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말씀드리지만 고교등급제는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마다 학력 격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를 입학사정에서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은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입학사정관제가 과연 공정한가를 두고 말들이 있습니다.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 대학들도 우리 사회에서 대학의 결정과 절차를 그대로 받아들여 줄지를 내심 걱정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입학사정관들이 원래의 취지대로 자신의 판단을 믿기보다는 객관적인 수치나 실적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입학사정관제를 거친다면 외부에서 보기에 비슷한 수준의 대학이라고 하더라도, 상반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포용성을 갖춰야 합니다. 그것은 과정의 공정성이지 결과의 공정성이 돼서는 안 됩니다.”
대학에 맡기는 게 가장 이상적 입시제도
고려대는 올해 입시의 지역우수인재 전형에서 지난해 학교별 1명이던 추천인원을 2명으로 늘렸다. 또 입학사정관 전형 비율을 늘리는 대신 복잡한 전형 수도 줄였다.
“우리 대입제도는 여러 주체의 의견에 영향을 받다 보니 너무 복잡해진 것이 문제입니다. 고려대만 해도 2011학년도 전형방식이 스무 개가 넘습니다. 수험생 입장에서 볼 때, 3~4개 대학, 3~4개 학과군을 생각한다 해도 최소 100여 개의 전형절차를 따져 봐야 합니다. 여기에 드는 시간적·금전적 비용이 상당합니다.
그런 전형절차를 거친 학생들이 단순한 절차를 거쳤던 과거보다 얼마나 우수한지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전형의 다양성과 학생들의 선택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국 대학 차원에서 표준화된 몇 가지 절차를 마련해 두고, 이를 대학마다 선택해서 사용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입시제도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대학에 맡기는 것이지요. 대학의 건학이념에 맞는 인재를 뽑는 게 가장 좋지요. 고려대는 교육구국이 건학이념이니까 당장의 실력보다는 리더십과 학창시절의 독자성, 자기개발 노력을 중심으로 뽑고 싶어요.”
―교육당국의 ‘3불’(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본고사 금지) 정책과 관련, “대입 완전자율화를 위해 폐지 논의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되면 고교등급제와 본고사의 의미가 퇴색될 겁니다. 논란이 되는 것은 기여입학제입니다. 저는 기여입학제 도입이 시급하다는 생각입니다. 기여입학제라고 해서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는 수험생이나 그 부모로부터 돈을 받고 입학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죠. 고려대에 커다란 기부를 하신 분 중에는 고려대와 특별한 연관이 없는데도 선뜻 나서신 분도 있어요. 이런 분들에 대해 대학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2세, 3세 중에 우리 대학에 입학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으면, 정원외로 입학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물론 기본 수학(修學)능력은 갖춰야겠지요. 이런 조건과 상황에 맞는 이들이 몇 명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원천적으로 막아 놓고 있으면 대학기부를 활성화하는 데 정서적인 융통의 여지가 없게 됩니다.”
“요즘 경쟁과 효율 이야기하는 사람 왜 없나”
대교협은 2011학년도 4년제 대학 모집단위별 예상 합격선 정보를 공개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대교협 회장인 이 총장의 결단으로 가능했다.
대교협은 학생 수능성적과 내신 등을 입력한 뒤 특정 학과를 검색하면 해당 학과의 4년제 대학 예상 합격선과 합격 가능 여부, 상·하위 평균점수 등을 알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했다.
―각 대학과 학과별 수능 합격점, 학생부 합격기준, 평균점수 등을 공개하고 전형료도 내리겠다고 했는데요.
“고려대는 입시설명회를 통해 관련점수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도 대학서열화 논란이 뒤따르면서 쉽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수험생들이 대학이나 일선 고교보다 빠릅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대입 합격자들이 자신의 내신등급, 수능점수, 기타 비교과목 실적 등을 공개해 일종의 합격선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전형료의 경우 미래로 KU 전형이나 교육기회균등 전형은 전액 면제했고, 전형별로 합격단계에 따라 전형료 일부를 환불해 주고 있습니다. 다만, 전형료 인하는 전국대학 차원에서 고려해야 합니다. 입시과정과 운영에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큰 비용이 들어갑니다.”
―현 정부의 교육정책 기조가 대학 자율화, 규제 완화입니다. 실제 대학이 느끼는 체감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현 정부 출범 당시 기조는 경쟁과 효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경쟁·효율을 얘기하는 사람이 적어요. 마이스터고 졸업생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게 하라는 말밖에 없더군요. 고대생만이라도 경쟁과 효율을 통해 수월성 교육을 하고 싶어요. 삼성 이건희 회장 말대로 똑똑한 한 명이 십만, 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그런 인재를 키우는 대학을 만들고 싶어요. ‘똔똔이’ 인재 만들면 뭐가 되겠어요.”
“대통령 만든 대학 총장답다”
―대통령을 배출한 대학의 총장인데, 정부에 답답한 점이 많은가 봅니다.
“국민들이 530만 표 차로 대통령을 만들어 줬고, 국회도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도록 했는데 국민의 염원은 어디 가고 야당에 끌려다니는 형편입니다. 쇠고기 파동도 그렇지요. 답답해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대통령 만든 대학 총장답다’고 말합니다.
(교육이) 수월성 제고(提高)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 자율이 어딨나요. 등록금도 올리지 마라, 입시전형료 낮춰라, 등록금 카드 분할납부하라, 전부 규제만 합니다.”
화제를 바꿔 정치이야기를 꺼냈다. 그에게 “무상급식 논란이 크다”고 하자 “(무상급식 공약을 내는) 후보를 떨어뜨리는 국민운동이 전개돼야 한다”고 했다.
―유럽에선 복지정책을 놓고 경쟁합니다. 우리도 벌써 복지 논쟁이 불붙었는데요.
“눈앞의 이익을 좇아선 국가부채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입니다. 선진국 문턱에서 쓰러진 많은 외국 선례가 있지 않나요? 쇠고기 파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식자들은 다 거짓말인 줄 알았지만, 소용돌이에 매몰돼 버리고 말았어요. 서울시의회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 3분의 2를 차지하는데 오세훈(吳世勳) 시장이 소신을 펼치는 모습이 자랑스러워요. 그런 정치인이 많아야 합니다.”
오 시장도 고려대 법대 출신이다. 상법 전공인 이 총장이 민사소송법을 전공한 오 시장을 직접 가르치진 않았다고 한다. 이 총장은 “정말 국민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할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야 한다”고 했다.
이 총장은 고려대 출신 고시 합격자 친선모임인 ‘겸선회(兼善會)’에 참석해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겸선회 회장은 이귀남(李貴男) 법무장관이다.
“쇠고기 파동과 관련, 재판부가 ‘고의성이 없어’ 일부 무죄 판결을 했더군요. 전 어떻게 그런 판결을 할 수 있느냐고 했어요. 이래선 선진사회, 공정사회가 되기 어렵다, 당신들 제 역할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한다고 했어요. 지난 6·2 지방선거를 보세요. 그때 여당 찍으면 전쟁 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 유언비어가 표심에 영향을 줬습니다. 뭐하고들 있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하지만, 어디든 그렇지만, 잘 뭉친다는 고려대도 정치권에 들어가서는 여야로 나뉘어 반목하며 갈등하는 게 현실이다.
―고려대도 다 잘 뭉치는 것은 아닌가 보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있기 마련이지요.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에 가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출석을 잘 안 합니다. 출석을 해도 잠시 있다가 사라져요. 그런데 민주당 4명, 자유선진당 1명, 민노당 1명, 상임위원장 1명 등 7명의 야당 의원들은 끝까지 상임위를 지키고 보충질의까지 합니다. 상임위를 하는 데 3시간을 끄는데 그동안 한나라당 의원들은 한두 명이 있을까 말까입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만들어줬는데, 여당은 상임위는 물론 국정감사도 안 합니다. 그런데도 늘 바쁘다고 해요. 국회의원이 국회 일 말고 더 바쁜 게 있나요? 국가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질문도 안 하는 선량은 떨어뜨려야 합니다. 만일 기회가 닿으면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장을 하고 싶어요. 일 안 하는 국회의원 다 떨어내게요.”
‘고려대 學’을 강의
고려대가 2010년 2학기부터 고려대학교의 정신과 역사를 가르친다는 취지에서 ‘고려대 학(學·Korea University Studies)’ 과목을 개설했다. ‘고려대 학’은 선택 교양 강좌로, 강의는 고려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인권환 명예교수가 주로 맡고 있다. 그러나 과목 개설 아이디어를 낸 이기수 총장 역시 강단에 올라 몇 차례 수업을 진행했다.
전 학년 대상이며 주 50분간 수업하는 1학점짜리다. 학점은 매기지 않고 ‘합격 또는 불합격(pass or fail)’으로만 평가한다. 이를 두고 “대학교가 무슨 학문이냐”는 논란이 있었다.
―한국인에게 ‘고려대’는 어떤 대학입니까. ‘고려대 학’이란 우리 사회에서 어떤 학문이고, 어떤 학문이어야 합니까.
“이번에 개설한 ‘고대의 역사, 전통과 미래’는 전 사회를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고대생들에게 자신이 다니고 있고, 앞으로 마음의 고향이 될 고려대를 배우고 알아 가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 제시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 역사를 배워 한 민족의 흔적을 찾듯 고대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마련했어요. 그러한 강의 속에서 학생과 교수가 토론하고 연구하면서 ‘고려대 학’의 모습이 갖춰지리라 기대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고려대는 정의와 지성의 보람이며, 열정의 원천지라고 자부합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고려대가 국민에게 인식되기를 바라며, 모자란 점이 있다면 고려대는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
―고려대의 현재는 과거와 어떻게 다릅니까. 또 현재의 고려대는 또 어떤 미래를 꿈꿉니까.
“고려대의 미래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과거가 남긴 전통을 이어나가고 거기에 미래가 요구하는 정신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선진화의 시대로 나가고 있고, 지구촌은 글로벌화되었습니다. 이 속에서 고려대는 민족혼과 개척정신을 담은 세계 선도대학으로서 굳건히 전진할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고려대 입학한 지 두 달밖에 안된 김연아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자 “내가 고대 정신을 주입시킨 결과이며 고대가 김연아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서 조금 시끄러웠습니다. ‘고대 정신’이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나요.
“제가 김연아 선수에게 고려대에 오라고 권했더니 연아 부모님께서 ‘연아가 가고 싶은 대학에서 연락이 오니 기쁘고 너무 행복하다’고 하더군요. 대학은 교육기관이자 지도자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저는 연아에게 ‘스타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체육지도자의 길을 가라’고 했어요. 개척정신을 가르치는 고려대에서 지도자의 길을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교생 김연아’와 ‘고대생 김연아’는 전혀 다르지요. 고대생이 되어 빛을 발한 것이니 ‘이기수가 3개월 만에 애를 낳았다’고 언론에서 얘기하더라고요. 하하하.”
이 총장은 지난해 9월 6일 ‘고려대 학’ 첫 강의에서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기독교 교리전파 수단으로 만든 대학이다. 서울대는 일본이 침략의 방편으로 만든 관립대학”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러 왔었다.
“서울대는 일제 식민지의 역사적 아픔을 딛고 오늘날 세계적인 대학이 된 것이고,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종교적인 사명감에서 출발해 명문대학을 이루었습니다. 그에 비춰 고려대는 민족적인 성원과 교육구국 의지에서 출발했기에 그들과는 다른 자긍심을 가져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제자 오영식·신계륜·정재관·손창일 기억나
총장 집무실 책장에는 그가 쓴 상법 관련 서적이 가득했다. 그에게 상법학자로서의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퇴임 후 미국과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에서 각각 1년씩 보내 5년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제 인생 3모작의 45년 중 5년은 그렇게 연구하며 이후 40년을 준비하겠습니다. 기업을 둘러싼 민사, 상사(商事), 노동, 국제거래, 지적재산 등 모든 법률을 통틀어 종합서를 내는 게 학자로서의 꿈입니다.”
―평생을 가르치며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가 오영식(吳泳食) 군이에요. 총학생회장 출신인데 노무현 정부 때 국회의원을 했어요. 스승의 날이 되면, 꽃 한송이라도 들고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신계륜(申溪輪) 군도 생각이 나네요. 제가 육사 교관을 마치고 고려대로 돌아와 상법을 가르칠 때 처음 만났어요. 그 인연으로 ‘신계륜 후원회장’을 5년이나 했어요. 정재관 군 역시 1992년 총학생회장 출신입니다. 제가 학생처장 시절 만났는데, 학문하는 자세를 갖춘 학생이었어요. 제가 그 친구를 볼 때마다 공부하라고 권했더니 결국 학문의 길로 들어서 현재 조지워싱턴대 정치학과 교수로 있어요. 손창일 군도 총학생회장 출신입니다. 고려대 역사상 처음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이었어요. 법대를 다녔는데, 그에게도 늘 공부하라고 했었어요. 위스콘신 매디슨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헌법재판소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부 총학생회장 출신들이 우선 기억나네요.”
이 총장은 꿈을 향해 실패와 도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삶이란 늘 자신이 꾸는 꿈과 일치할 수 없는 법이다. 이 총장은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꿈과 현실 사이에서 늘 새로운 시도를 즐겨 왔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그 치열한 과정이야말로 펄떡이는 생의 오롯한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꿈을 지녀야 할까요? 세상에는 꿈과 목표를 완전히 상실한 채 그날그날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꿈에 한 발짝씩 더 다가가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우리의 삶을 갈라 놓는 열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