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리카에 망고나무 심는 ‘희망고’ 운동 벌여
⊙ 해남에서 전쟁 고아 수천 명 돌봤던 부모 밑에서 자라
⊙ 옷로비 사건 때 곤혹… 가치있는 일 하는 것이 소망
李光熙
⊙ 1952년생. 이화여대 비서학과 졸업. 국제복장학원 졸업. 1986년 ‘이광희 부티크’ 개업.
홍콩 <아시아위크>지 선정 한국의 최고 여성복 디자이너, 대한민국 디자인대상 산업포장 수상.
⊙ 現 이광희 부티크 운영
⊙ 해남에서 전쟁 고아 수천 명 돌봤던 부모 밑에서 자라
⊙ 옷로비 사건 때 곤혹… 가치있는 일 하는 것이 소망
李光熙
⊙ 1952년생. 이화여대 비서학과 졸업. 국제복장학원 졸업. 1986년 ‘이광희 부티크’ 개업.
홍콩 <아시아위크>지 선정 한국의 최고 여성복 디자이너, 대한민국 디자인대상 산업포장 수상.
⊙ 現 이광희 부티크 운영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을 완전히 잘못봤다.
기자가 생각한, 세상의 잣대로 본 그는 진짜가 아니었다. 화려한 직업과 이름 석 자가 어우러져 만든 허상(虛像)에 불과했다.
패션디자이너 이광희(李光熙).
그는 소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성복 디자이너다. 전(前)·현직(現職) 영부인들이 그의 옷을 입었거나, 입고 있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金潤玉) 여사가 첫 미국 순방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올 때 입었던 분홍색 치마 정장이 그의 작품이다. 김 여사와 워낙 잘 어울렸던 탓에 디자이너가 누구냐에 관심이 쏠렸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내로라하는 재벌가(家) 안주인들, 국회의원이나 CEO 부인, 외교관 부인, 여성 최고 경영자들이 그의 단골이다. 홍콩의 <아시아위크>지(誌)는 그를 ‘한국 최고의 여성복 디자이너’로 꼽았다. ‘이광희’라는 이름 석 자는 대한민국의 최고위층, 그리고 럭셔리를 상징하는 대명사다.
하지만 이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 그의 진면목를 알기 어렵다.
핸드백을 들지 않는 디자이너
디자이너 이광희는 핸드백을 들지 않는다. 백 안에 넣을 물건이 없어서다. 신용카드 한 장과 비상금 3만원, 휴대폰이 전부다. 그나마 휴대폰은 유학 간 아들과 통화하고자 몇 년 전에 마련했다. 화장을 잘 하지 않아 집에 화장대가 없다. 반지, 귀걸이, 목걸이 등 장신구를 즐겨 하지 않는다. 정장 스커트에 검정 운동화를 신고 작업실을 누빈다. 가장 여성스러운 옷을 만든다고 평가받는 디자이너가 이렇다니, 아이러니하다. 디자이너 이광희는 이런 여자다.
요즘 이광희씨를 살아 숨쉬게 하는 원동력은 ‘망고나무’다. 그는 지난 2009년 9월 외교통상부 산하에 ‘희망의 망고나무’(이하 희망고)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하고 아프리카에 망고나무 심어 주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윤옥 여사와 이어령(李御寧) 전 문화부 장관, 나경원(羅卿瑗)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용진(鄭溶鎭) 신세계 부회장, 김진홍(金鎭洪) 목사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지난 2010년 11월에는 이를 위해 대대적인 자선 패션쇼를 열었다.
지난 12월 11일, 서울 남산에 위치한 ‘이광희 부티크’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대뜸 “사진 촬영을 먼저 하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예쁘게 보이고 싶어 모처럼 화장을 했는데 영 불편하다”고 했다.(실제로 그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양해를 구한 뒤 화장을 지운 채로 인터뷰에 응했다.)
아이보리색 목폴라 니트에 옅은 갈색 체크무늬 재킷, 짙은 갈색 치마를 입은 그는 촬영 내내 쑥스러워했다. 넘어지면 톡 부러져 버릴 것 같은 가느다란 발목에 40kg이나 될까 싶은 가녀린 몸매가 퍽 여성스러웠다. 40대(代)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동안(童顔)이었다.
국내 정상의 톱디자이너는 자리에 앉자 마자 ‘망고나무’ 얘기를 꺼냈다.
“제가 망고나무 심잖아요. 요즘은 그 생각밖에 없어요. 나무가 빨리 자라서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어요. 어서 더 많이 심어야 할텐데….”
그가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말을 이었다. 이광희씨가 망고나무를 심게 된 계기는 탤런트 김혜자(金惠子)씨와 얘기를 나누면서부터다.‘월드비전’의 친선대사로 활동 중인 김씨는 평소 알고 지낸 이광희씨에게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가자고 했다. 이씨는 처음에 ‘우리나라에도 도와줄 사람이 많은데 왜 이역만리 떨어진 아프리카까지 가느냐’고 생각했단다.
사실 그에게 아프리카는 상당히 로맨틱한 곳으로 인지됐었다. 아프리카 케냐의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한 <아웃오브 아프리카>(1986년作)를 인상 깊게 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 나라 정도였다.
그렇게 이광희씨는 지난 2009년 3월에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톤즈 지역으로 떠났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이륙 시도를 하는 순간 그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탤런트 김혜자씨와 수단 방문한 것이 계기
이광희씨의 얘기다.
“비행기 안에서 밖을 보니 온통 흙으로 뒤덮여 있었어요. 풀 한 포기 없는 말 그대로 척박한 땅이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가 아프리카 건기(乾期)여서 상황이 더욱 안 좋았던 거예요. 우기(雨期)에는 그나마 잡초 때문에 푸릇푸릇이라도 한데 말이죠. 시장에 갔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좌판에 널린 양파와 망고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망고 몇 개는 보통 수단 사람들의 한 달 월급과 맞먹을 정도로 비싸다는 거예요. 도대체 하늘 아래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 수 있는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일단 가 보면 안다’고 했던 김혜자 선생 얘기가 딱 맞았습니다.”
―망고 생각은 어떻게 했나요.
“현지 사람들에게 들어 보니 망고가 그렇게 유용(有用)할 수 없었습니다. 일년에 두 번 열매를 맺기 때문에 식량이 되고 땔감으로 사용할 수 있대요. 열대성 기후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딱히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고, 다 자란 나무는 큰 그늘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게 한다고 했습니다. 한 번 심으면 100년을 간다고 해서 결정했어요.”
망고나무 묘목은 한 그루에 15달러 안팎이었다. 이씨는 그 길로 나가 묘목 100그루를 사서 심어 줬다.
현재까지 1만5100그루 심어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망고나무뿐이었다. 원체 얌전한 그이지만 ‘사고’를 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망고나무를 심을 요량으로 사단법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제가 워낙 물러 터졌어요. 일을 잘 안 벌리는 편이지만 안쓰럽다고 생각하고 발만 동동 구르면 안 될 것 같아서 재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월드비전과 함께 아프리카에 망고나무를 보내기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고 법인을 만들었어요.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너무 힘들었는데 그냥 일을 저질러 놓고 보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했어요.”
―희망의 망고나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요.
“망고나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았고 이왕이면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냥 딱 이거다 싶었습니다. 희망고(himango)로 지었어요. 예전에 신문고(申聞鼓)처럼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세상에 알리고 싶기도 했어요. 이름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희망~고(go)라는 뜻도 되고요.”
남편 홍성태(洪性泰)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와 앉은 자리에서 단박에 법인명을 정했단다. 이 재단은 패션쇼, 티셔츠 판매, 전시(展示) 등으로 모은 성금으로 망고나무 묘목을 준비한다. 묘목은 톤즈 지역 사회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 가정에 공평하게 나눠진다. 기부자의 이름이 망고나무에 이름표로 붙는다. 김윤옥 여사의 이름이 수단의 망고나무에 나부낀 것도 이 때문이다.
3만원이면 묘목 한 그루를 살 수 있다. 이 묘목 한 그루는 한 가정을 살린다. 현재 1만5100그루의 나무가 심어졌다. 망고가 첫 열매를 맺기까지는 4년이 걸린다.
이광희씨의 자선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92년부터 무의탁 노인, 소년·소녀 가장, 심장병 어린이, 북한 어린이 돕기 패션쇼 등을 매년 열어 왔다. 그가 고급 옷을 만드는 이유가 ‘돕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 받아
사실 기자는 패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해서 이광희씨를 만나러 가면서 전문 용어라도 나오면 어쩌나 긴장을 했다. 정작 그는 “패션을 잘 모르는 기자라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그저 살아온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자고 했다.
‘디자이너 이광희’를 이해하는 첫 번째 키워드는 어머니다. 어머니를 쏙 빼닮은 그는 손재주도 어머니께 물려받았다.
이광희씨는 “내 삶의 숙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씀을 하나라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故) 이준묵(李俊默) 목사와 고 김수덕 여사의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해남의 등대’로 불렸던 고 이 목사는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그는 땅끝 해남 마을에서 평생 목회 활동을 했다. 1953년에 ‘해남등대원’을 설립해 50여 년 동안 전쟁 고아 수천 명을 돌봤다. 이들 중에서 대학총장, 교수, 군장성, 종교인이 나왔다. 고 이준묵 목사는 이 공로로 1999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간호사 출신인 고 김수덕 여사는 구십 평생을 남편과 함께했다. 고 함석헌(咸錫憲) 선생이 생전에 가장 존경하는 여인으로 꼽았던 분이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그이니, 어찌 보면 ‘봉사 DNA’가 뼛속 깊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광희씨는 ‘희망고’ 운동을 하기 전까지 가급적 두 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분들의 고귀한 삶을 따라가기 어렵고, 또 ‘목사 딸이 옷 만들어?’라는 세간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나이 든 분들에게 여전히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준묵 목사 딸’이다.
얼마 전 김동길(金東吉) 교수를 공식석상에서 만났는데, 이씨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면서 “얘가 말이야. 그 해남 이준묵 목사 딸이야”라고 했단다.
어렸을 때 함석헌 선생과 함께했던 기억
이광희씨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혼자 방에서 책 보고, 조용히 지냈던 게 전부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고 함석헌 선생과 ‘함께 놀았던’ 일이다.
“함석헌 선생이 일년에 한 달 정도를 저희 집에서 지내셨습니다. 같이 숨바꼭질하고, 저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던 게 기억나요. ‘이름에 빛광(光)자를 써서 그런가 눈이 초롱초롱하다’며 저를 예뻐해 주셨습니다. 함 선생은 저희 어머니 음식을 ‘참음식’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솜씨도 좋았고, 모든 사람을 지극 정성으로 대접하셨거든요.”
그의 어머니는 손님이 올 때면 전날, 이부자리를 풀 먹여서 전부 다렸다. 새벽 일찍 일어나 물을 데워 손님을 대접했다. 어머니는 한평생을 고아들을 기르고 나병환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이광희씨의 얘기다.
“어머니는 모든 사람을 ‘장한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디자이너가 됐다고 자랑스러워한 적이 없어요. 사람이 무엇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냥 태어난 그대로 장한 존재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먹고 살아야 돼’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이라는 게 사랑을 말해요. 그래서 고아들을 보면 늘 마음이 짠하다고 하셨어요. ‘사람’을 못 먹고 살까봐요.”
―남들을 돌보다 보면 정작 자기 자식에게는 소홀하지 않나요.
“그냥 어머니께는 모든 사람이 다 소중했어요. 가끔 서울에 있는 저희 집에 오셔서 일한다고 살림을 잘 못하는 저 대신에 집 청소를 하셨어요. 한 번은 어머니가 아주 고운 새 한복을 입고 오셨어요. ‘엄마, 웬 새옷이야?’ 하고 물었죠. 알고 보니 제 지하 작업실에 버린 천을 가져가서 옷을 지어 입으셨던 거예요. 곰팡이가 피어서 버린 천이었는데. 평생을 한복 세 벌로 지냈지만 곱고 정갈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삶을 고뇌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광희씨는 십여 년 전, 아흔이 된 어머니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단다. 어머니는 “내가 지금 무슨 선(線)에 서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에게 선악(善惡)의 길이 있는데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고민 중이다”고 했단다.
조숙했던 이화여고 학생
전남여중을 나온 이광희씨는 이화여고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큰아버지가 당시에 알아주는 거부(巨富)였다. 아버지의 유일한 형인 그는 호남 나주비료공장과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공장인 아세아자동차를 설립한 고 이문환(李文煥)씨다. 이들 형제지간은 어떤 형제보다 사이가 돈독했다. 이문환씨는 애시당초부터 동생에게 “너는 영(靈)의 지도자가 되라. 나는 육(肉)의 지도자가 되어 너를 돕겠다”고 했다.
이광희씨는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여고(女高) 시절부터 꽤 조숙했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등 ‘가치’에 대한 고민을 일찌감치 시작했다. 여고 시절 언젠가는 일주일 동안 말을 안하고 산 적이 있다. 스스로 하는 ‘침묵 훈련’이었다.
이씨는 “어른들이 쓸데없이 말을 내뱉고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며 “말을 안 하고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싶어 그런 일을 했다”고 했다.
이광희씨는 말이 없는 편이다. 상류층 부인들을 상대해서 ‘입조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다. 이번에 ‘희망고’를 하면서도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들이 훈련됐어요. 기관지가 약하고 그냥 말을 잘 하지 않아요. ‘희망고’를 론칭할 때에 여러 일이 많았어요.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정도로요. 그때 목이 아파서 물리적으로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때 말했으면 불거질 수 있었던 문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 없어졌거든요. 침묵한 것이 잘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또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당할 때에 거의 침묵한다.
오죽하면 그의 오랜 단골이었던 모 회장 부인이 몇 마디를 던진 이광희씨에게 이러더란다. “이 선생 이제 말한다. 너무 좋다”고.
기온이 45도까지 치솟는 아프리카에서도 그랬다. 동행(同行)한 김혜자씨가 “자기는 안 더워?”라고 물었다. 그는 “덥죠”라고 했다. 원체 아무 말이 없으니 주변에서 의아해서 물어본 거였다. 이광희씨는 “40도 넘는 나라에 오면 더운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싶어 말을 안 했다”고 한다.
돈 많은 부인의 핀잔 듣고 톱 브랜드 꿈꿔
그는 별로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다. ‘시집 잘 가려고 꼭 대학에 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해서 가장 실용적으로 보이는 ‘비서학과’를 선택했다. 가정학과를 최고로 치던 시절이었다.
“제가 운동권 기질이 있나 봐요. 그런 생각으로 비서학과에 갔는데 저랑은 잘 맞지 않더군요.”
―왜요.
“타이핑 수업이 정말 싫었거든요. 1분에 200타를 치면 어떻고, 300타를 치면 어떻나 싶었어요. 참 우습죠?(웃음)”
그는 타이핑 시험을 치러 가지 않았다. 결국 대학을 졸업하고 국제복장학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옷 만드는 법을 배우고 1979년, 하얏트 호텔 지하에 의상실을 열었다. 보증금 800만원에 7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다른 의상숍을 인수하면 권리금을 내야 해서 호텔 지하에 둥지를 틀었다. 자작부인이라는 뜻의 ‘바이카운터스(viscountess)’를 간판으로 내걸었다. “어려운 영어로 간판 다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당신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 드립니다’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여성을 가장 돋보이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옷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는 “여성, 남성의 차이를 두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충분히 여성스러우면서도 남자와 똑같이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했다.
어느 날, 돈 많은 부인이 매장에 와서 툴툴거렸다. 유명 브랜드가 아니어서 그런지 옷이 후지다는 식(式)이었다. 그때 그는 나중에 100만원짜리 투피스를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다. 정장 한 벌에 30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이광희씨는 ‘옷’만 만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오로지 옷에만 매달렸다. 그의 옷은 부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탤런트 원미경(元美京)이 ‘사랑과 야망’이라는 드라마(MBC)에 입고 나오면서부터다. 캐릭터상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필요했던 원씨는 이광희씨에게 부탁해 옷을 사 갔다. 이 옷은 빅히트를 쳤다. ‘이광희’라는 이름 석 자가 알려졌다. 그의 옷을 ‘카피’하는 바람에 낭패도 많이 봤다.
1986년, ‘이광희 부티크’ 열어
이광희씨는 1986년에 남산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광희 부티크’를 열었다. ‘석양이 좋아서’ 이 외딴 곳에 의상숍을 열었다.
그의 얘기다.
“강남으로 갈 재력이 안됐고 제가 사람 많은 곳을 워낙 싫어해요. 게다가 남산에서 보는 석양이 정말 좋았어요. 그 석양을 매일 보고 싶어서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목 좋은 곳에 숍을 내지 않나요.
“그러니까. 제가 이래요. 그때 강남에 냈으면 완전 부자 됐을 거예요. 호호. 저한테는 가치가 굉장히 중요해요. 어떤 일의 의미, 그 가치, 그런 것들이….”
―사람과의 관계가 힘든데 어떻게 디자이너를 업(業)으로 삼았죠?
“힘들어요, 실은. 날마다 전쟁을 치르죠. 그냥 뭐랄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몇 초 뒤, 그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똑 떨어졌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지난날들,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기억, 또 그를 지탱해 온 경험들이 오버랩된 듯 보였다. 잠시 인터뷰가 중단됐다. 얼마 뒤, 그가 감정을 추스르고 말을 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여러가지를 되돌아볼 수 있어서 좋아요. 여러 힘든 일 속에서 잘 버티게끔, 이런 낙천적인 성격을 갖게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요. 그냥 매일 ‘오늘은 그만두리라’ 하면서 일을 해요. 사람과 사람, 또 여러 관계들이 버겁기도 하고요. 저에게는 가치가 중요해서 일을 하는 이유를 늘 찾아요. 어느 날 찾은 듯싶다가 또 아닌가 싶어 회의가 들고, 또 찾고…. 모르겠어요. 망고나무가 제게 그런 의미가 되어줄는지요.”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디자이너 이광희는 소녀의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다. 목소리가 유달리 작지만, 웃을 때는 10대 소녀처럼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녹록지 않았던 삶과 고뇌가 함께 느껴졌다.
이광희는 한마디로는 딱히 설명이 안되는 사람이다. 물론 앞으로 그가 디자이너를 그만둘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는 꽤 발랄하고 명랑한 사람이다. 무지개처럼 여러 색을 가진 여자다.
남산에 오픈한 ‘이광희 부티크’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당시 투피스 한 벌에 200만~300만원(그의 옷은 지금도 이 가격이다)일 정도로 고가(高價)였지만, 장안에 내로라하는 안주인들이 앞다퉈 그를 찾았다. 비결이 뭘까.
그의 답은 심플했다.
“기대치 이상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최고의 물건을 만들고 싶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격이 물건의 가치를 정해 주니까요. 고객들 보기에 그 값을 내고 사도 좋을 만하지 않았을까.”
디자이너 이광희를 이해하는 두 번째 키워드는 ‘원칙’이다. 그는 숍을 오픈할 때부터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은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그는 예약제로 고객들을 맞이했다. 약속을 정하지 않고 불쑥 찾아오는 고객들은 만나지 않았다. “건방져서가 아니라 고객들 한 명 한 명에게 충실히 대하고 싶어서 이렇게 했다”고 했다. 하지만 낭패도 겪었다. 예약 없이 찾아온 ‘사모님’으로부터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느냐”고 호통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철저하게 가격 정찰제를 실시했다. 아는 사람이라고 가격을 깎아 주지 않았다. 물론 옷을 선물하지 않았다. 대졸(大卒) 사원을 매장에 배치했다.
단 한 번도 재벌가 중매 서 본 적 없어
그가 지킨 또 하나의 원칙은 ‘사람을 연결시켜 주지 않는 것’이었다. 고급 부티크는 으레 부인들의 ‘사교의 장(場)’으로 통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철저하게 배격했다.
그에게 “좋은 자리 있으면 중매를 서 보라”는 문의가 많았다. 그는 그때마다 “저는 그거는 잘 못해요”라며 슬쩍 빠졌다.
우리나라의 정상급 디자이너로 활동했을 때가 30대였다. 사실 장안의 으리으리한 사모님들이 오면 움츠러들 수도 있는 나이다. 하지만 그는 주눅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이광희씨의 얘기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려운데 얼마나 겁을 먹겠어요. 등에서 식은 땀이 주루룩 흐르죠. 제가 흥얼흥얼 혼자 노래를 잘하는데 스스로에게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서 그랬나 봐요. 고객이 오면 일단 화장실에 가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다음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나와요(웃음).”
―정말 적성에 안 맞네요.
“아휴 안 맞죠. 정말로. 옷 만드는 것은 정말 자신이 있는데 비즈니스를 못하는 거예요. 누구랑 누구를 연결시켜 줘야겠다, 저 사람이 나한테 도움이 될 테니 잘보이자는 생각 자체가 안 드는 거 있잖아요. ‘나는 그냥 옷만 만들자. 열심히 하다 보면 되겠지’싶은 심정으로 이날까지 살아왔어요. 내일이 없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렇게 일을 했어요.”
디자이너 이광희는 손님들과 여태까지 전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 이런 원칙주의의 바탕은 책임감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또 외풍(外風)이 몰아쳐도 내가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때 개인적으로 큰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그는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다.
이런 성격이다 보니 남들과 정반대(?)의 길을 가기도 한다.
고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는 꽤 오랫동안 그에게 옷을 해 갔다. 전남 출신인 큰아버지가 그의 후원자였다. 좀처럼 외부에서 옷을 가봉하지 않는 그가 이 여사를 뵙기 위해 자택을 찾았다. 집 앞에는 축하 화환이 즐비했다. 이광희씨는 할 일만 딱하고 뒤돌아섰다. ‘청와대에 들어가니 이제 그만 해 드려도 되겠구나’싶더란다. 남들은 조금이라도 권력자에게 줄을 대려고 노력하는데 그는 반대였다.
DJ의 최측근이었던 모 국회의원 부인이 하루는 이런 소리를 했다.
“아야, 너는 워째 사모님 옷 좀 해 드리지 그런다냐.”
이광희씨는 그냥 웃었다. “다른 분들이 많이 해 드릴 텐데요, 뭐”라고 답했다.
옷로비 사건 때 곤혹
부(富)와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 그의 부티크를 찾았던 만큼, 난처한 순간은 많았다. 고가의 옷을 팔기 때문에 그의 숍은 ‘과소비의 상징’으로 인식되곤 했다. 정보원들이 부티크 앞에 주차된 차 번호를 적어간다는 둥 많은 얘기들이 나돌았다.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그가 크게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1999년, 옷로비 사건 때였다. 옷로비 사건이 언론에서 이슈로 떠오르는 와중에 모 일간지에서 ‘남산에 있는 L디자이너’를 언급했다. 내용은 가관이었다. L디자이너가 고위층에 옷로비를 했고, 그의 옷은 한 벌에 400만~500만원이라는 얘기였다. 남산에 의상실을 가진 L디자이너는 이광희씨뿐이었다.
참는 데는 이골이 난 그지만, 정말 이때는 암담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광희씨는 “내 20년의 디자이너 생활이 물거품 되는 순간이었다”며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보도를 한 모 일간지의 데스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그 길로 신문사 편집국에 찾아갔다.
이광희씨의 얘기다.
“일개 옷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신문사에 따지러 가요? 더구나 제 성격에요.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제가 재벌가 아들, 딸 중매를 하거나 사람들을 서로 소개시켜 줬다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또 제가 평생 옷을 선물한 적이 없으니까, 혹시 나한테 옷 받았다는 사람 있으면 장안을 뒤져서 찾아오라고 했어요. 편집국을 등지고 걸어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라고요.(웃음)”
결국 얼마 뒤에 옷로비 사건은 그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관련자들의 거짓 증언이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지만, 어디에서도 ‘이광희’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석 달 동안, 그 많던 손님은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와 인터뷰를 하는 시간이 꽤 지났다. 그는 난처한 대목에서도 나긋나긋,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까르르 웃을 때는 소녀 같았다.
튀지 않는 스타일 좋아하는 김윤옥 여사
―전직 대통령 부인들은 거의 다 다녀갔지요?
“김윤옥 여사, 이희호 여사, 김옥숙(金玉淑) 여사 등이 다녀가셨어요. 저는 어느 분이 다녀갔다고 얘기하는 편이 아닌데 시간이 지나니까 많이 알려지네요. 예전과는 달리 많이 편한 세상이 됐고, 이제는 영부인들의 패션이 중요하게 됐잖아요.”
―그분들 스타일이 어떤가요.
“김윤옥 여사는 한 사람의 옷만 고집해서 입지 않으세요. 여러 브랜드의 옷을 다양하게 소화하시죠. 우아하고 튀지 않는 스타일을 즐기세요. 파스텔톤이나 곤색(일본어·감색)을 좋아하세요. 아무래도 공식 석상에서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좋아하시죠. 자기 관리가 철저한 만큼 몸매 관리도 철저하고, 굉장히 멋쟁이세요. 이희호 여사님은 단정한 일자 라인 스커트를 좋아하셨어요.”
―예전과 비교하면 요즘 옷 입는 트렌드가 달라졌죠.
“예전에는 홈웨어 같은 롱 드레스를 입었어요. 요즘은 무릎 아래 길이의 스커트를 입고, 아무래도 조금씩 과감해지죠. 과감해진다기보다는 뭐랄까, 좀 더 다양하게 옷을 입는 분들이 많아요. 재계나 문화계 여성 CEO들의 경우가 그래요.”
―본인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옷을 만들 때에는 여성스럽고 발랄한 것, 그러면서 우아한 것을 좋아해요. 아무래도 파스텔톤의 깊이 있고 무게감 있는 색을 좋아해요. 가끔은 제가 너무 깊이와 무게를 추구하니까 어려운 일들이 생기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깊이라는 것이 계속 파 들어 가야 하는 것인데, 계속 파면 파이고 아프잖아요.(웃음) 회색, 갈색, 감색이 합해지면 멋스러워져요. 하지만 저는 디자이너이고 컬렉션이 있으니까 원색이나 다양한 장르를 함께해요.”
―평소에 본인이 가장 즐기는 복장은 뭔가요.
“후드 재킷에 트레이닝 복이요.(웃음) 사실 집에 있을 때에 잠옷 바람이나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있어요. 남편이 신기하게 생각해요. 예전에 부부 동반으로 만났는데 다른 부인들이 제가 어떤 옷을 평소에 입는지 궁금해하셨어요. 아무래도 디자이너니까 집에서도 근사하게 입고 있을 것 같고 그런 거죠. 한 교수님이 부인에게 ‘되게 수수해. 그냥 추리닝 입고 다니던데’라고 말해서 다 같이 웃었어요.”
별명은 ‘둔순이’
실제로 이날 이광희씨는 납작한 검정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장신구는 일절 착용하지 않았다. 그는 “장신구를 보면 예쁘기는 한데 정작 별로 갖고 싶지가 않다”고 했다.
디자이너 이광희를 이해하는 세 번째 코드는 ‘아날로그’다. 그는 요즘 사람이 아니다. 운전을 할 줄 모르고, 컴퓨터를 켜는 법을 모른다. 친하게 지내는 디자이너가 없고, 딱히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없다. 남편 홍성태 교수와 주로 대화 하거나, 그냥 혼자 있기를 즐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초저녁잠이 많아서 밤 9시면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저녁 모임에 참석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패션쇼를 할 때에는 새벽 3시에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할 정도로 새벽형 인간이다.
혼자 있을 때에는 주로 책을 읽는다. 집에서 뒹굴뒹굴 책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추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부르는 그의 별명은 ‘둔순이’다. 감각이 둔하다고 붙여 준 별명이다. 옷 만들기를 제외하고는 퍽 재미없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는 아무 불만이 없다. 어찌 보면 그의 옷은 그의 이런 모습을 꼭 닮았다.
몇 달 전, 고객 한 명이 30년쯤 전에 그가 만든 옷을 수선하러 왔다.
“와, 정말 그때 놀랐어요. 지금 봐도 입을 만하다면서 수선을 맡기셨습니다. ‘이거는 수선이 아니라 교환을 해야겠어요’라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어요. 제 옷이 그만큼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다는 얘기잖아요. 해외 명품은 버려도 제 옷은 버리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 뿌듯하고 자부심이 들죠.”
인터뷰가 끝나고 며칠 뒤, 그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왔다.
“정 기자님, 인터뷰하고 후회 많이 했어요. 제가 너무 쓸데없이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아서요. 망고나무 얘기를 주로 써 주세요.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라서 제 얘기를 하기가 좀 그래요. 많은 사람이 망고나무 후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써 주세요.”
앳된 얼굴이지만, 30년 넘게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로 군림하고 있는 사람의 얘기 치고는 너무 소박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그의 부모의 고귀한 삶에 그는 한발짝 다가서고 있는지 모른다.⊙
기자가 생각한, 세상의 잣대로 본 그는 진짜가 아니었다. 화려한 직업과 이름 석 자가 어우러져 만든 허상(虛像)에 불과했다.
패션디자이너 이광희(李光熙).
그는 소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성복 디자이너다. 전(前)·현직(現職) 영부인들이 그의 옷을 입었거나, 입고 있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金潤玉) 여사가 첫 미국 순방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올 때 입었던 분홍색 치마 정장이 그의 작품이다. 김 여사와 워낙 잘 어울렸던 탓에 디자이너가 누구냐에 관심이 쏠렸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내로라하는 재벌가(家) 안주인들, 국회의원이나 CEO 부인, 외교관 부인, 여성 최고 경영자들이 그의 단골이다. 홍콩의 <아시아위크>지(誌)는 그를 ‘한국 최고의 여성복 디자이너’로 꼽았다. ‘이광희’라는 이름 석 자는 대한민국의 최고위층, 그리고 럭셔리를 상징하는 대명사다.
하지만 이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 그의 진면목를 알기 어렵다.
핸드백을 들지 않는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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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고’를 후원한 김윤옥 여사의 이름표가 망고나무에 달렸다. |
요즘 이광희씨를 살아 숨쉬게 하는 원동력은 ‘망고나무’다. 그는 지난 2009년 9월 외교통상부 산하에 ‘희망의 망고나무’(이하 희망고)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하고 아프리카에 망고나무 심어 주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윤옥 여사와 이어령(李御寧) 전 문화부 장관, 나경원(羅卿瑗)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용진(鄭溶鎭) 신세계 부회장, 김진홍(金鎭洪) 목사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여했다. 지난 2010년 11월에는 이를 위해 대대적인 자선 패션쇼를 열었다.
지난 12월 11일, 서울 남산에 위치한 ‘이광희 부티크’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대뜸 “사진 촬영을 먼저 하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예쁘게 보이고 싶어 모처럼 화장을 했는데 영 불편하다”고 했다.(실제로 그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양해를 구한 뒤 화장을 지운 채로 인터뷰에 응했다.)
아이보리색 목폴라 니트에 옅은 갈색 체크무늬 재킷, 짙은 갈색 치마를 입은 그는 촬영 내내 쑥스러워했다. 넘어지면 톡 부러져 버릴 것 같은 가느다란 발목에 40kg이나 될까 싶은 가녀린 몸매가 퍽 여성스러웠다. 40대(代)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동안(童顔)이었다.
국내 정상의 톱디자이너는 자리에 앉자 마자 ‘망고나무’ 얘기를 꺼냈다.
“제가 망고나무 심잖아요. 요즘은 그 생각밖에 없어요. 나무가 빨리 자라서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어요. 어서 더 많이 심어야 할텐데….”
그가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말을 이었다. 이광희씨가 망고나무를 심게 된 계기는 탤런트 김혜자(金惠子)씨와 얘기를 나누면서부터다.‘월드비전’의 친선대사로 활동 중인 김씨는 평소 알고 지낸 이광희씨에게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가자고 했다. 이씨는 처음에 ‘우리나라에도 도와줄 사람이 많은데 왜 이역만리 떨어진 아프리카까지 가느냐’고 생각했단다.
사실 그에게 아프리카는 상당히 로맨틱한 곳으로 인지됐었다. 아프리카 케냐의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한 <아웃오브 아프리카>(1986년作)를 인상 깊게 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 나라 정도였다.
그렇게 이광희씨는 지난 2009년 3월에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톤즈 지역으로 떠났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이륙 시도를 하는 순간 그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탤런트 김혜자씨와 수단 방문한 것이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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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희씨는 지난 2009년 3월, 탤런트 김혜자씨와 수단을 찾았다. |
“비행기 안에서 밖을 보니 온통 흙으로 뒤덮여 있었어요. 풀 한 포기 없는 말 그대로 척박한 땅이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가 아프리카 건기(乾期)여서 상황이 더욱 안 좋았던 거예요. 우기(雨期)에는 그나마 잡초 때문에 푸릇푸릇이라도 한데 말이죠. 시장에 갔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좌판에 널린 양파와 망고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망고 몇 개는 보통 수단 사람들의 한 달 월급과 맞먹을 정도로 비싸다는 거예요. 도대체 하늘 아래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 수 있는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일단 가 보면 안다’고 했던 김혜자 선생 얘기가 딱 맞았습니다.”
―망고 생각은 어떻게 했나요.
“현지 사람들에게 들어 보니 망고가 그렇게 유용(有用)할 수 없었습니다. 일년에 두 번 열매를 맺기 때문에 식량이 되고 땔감으로 사용할 수 있대요. 열대성 기후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딱히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고, 다 자란 나무는 큰 그늘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게 한다고 했습니다. 한 번 심으면 100년을 간다고 해서 결정했어요.”
망고나무 묘목은 한 그루에 15달러 안팎이었다. 이씨는 그 길로 나가 묘목 100그루를 사서 심어 줬다.
현재까지 1만5100그루 심어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망고나무뿐이었다. 원체 얌전한 그이지만 ‘사고’를 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망고나무를 심을 요량으로 사단법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제가 워낙 물러 터졌어요. 일을 잘 안 벌리는 편이지만 안쓰럽다고 생각하고 발만 동동 구르면 안 될 것 같아서 재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월드비전과 함께 아프리카에 망고나무를 보내기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고 법인을 만들었어요. 처음 해 보는 일이라서 너무 힘들었는데 그냥 일을 저질러 놓고 보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했어요.”
―희망의 망고나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요.
“망고나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할 것 같았고 이왕이면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냥 딱 이거다 싶었습니다. 희망고(himango)로 지었어요. 예전에 신문고(申聞鼓)처럼 그들의 어려운 사정을 세상에 알리고 싶기도 했어요. 이름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희망~고(go)라는 뜻도 되고요.”
남편 홍성태(洪性泰)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와 앉은 자리에서 단박에 법인명을 정했단다. 이 재단은 패션쇼, 티셔츠 판매, 전시(展示) 등으로 모은 성금으로 망고나무 묘목을 준비한다. 묘목은 톤즈 지역 사회에서 정한 규칙에 따라 가정에 공평하게 나눠진다. 기부자의 이름이 망고나무에 이름표로 붙는다. 김윤옥 여사의 이름이 수단의 망고나무에 나부낀 것도 이 때문이다.
3만원이면 묘목 한 그루를 살 수 있다. 이 묘목 한 그루는 한 가정을 살린다. 현재 1만5100그루의 나무가 심어졌다. 망고가 첫 열매를 맺기까지는 4년이 걸린다.
이광희씨의 자선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92년부터 무의탁 노인, 소년·소녀 가장, 심장병 어린이, 북한 어린이 돕기 패션쇼 등을 매년 열어 왔다. 그가 고급 옷을 만드는 이유가 ‘돕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 받아
사실 기자는 패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해서 이광희씨를 만나러 가면서 전문 용어라도 나오면 어쩌나 긴장을 했다. 정작 그는 “패션을 잘 모르는 기자라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그저 살아온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자고 했다.
‘디자이너 이광희’를 이해하는 첫 번째 키워드는 어머니다. 어머니를 쏙 빼닮은 그는 손재주도 어머니께 물려받았다.
이광희씨는 “내 삶의 숙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씀을 하나라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故) 이준묵(李俊默) 목사와 고 김수덕 여사의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해남의 등대’로 불렸던 고 이 목사는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다.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그는 땅끝 해남 마을에서 평생 목회 활동을 했다. 1953년에 ‘해남등대원’을 설립해 50여 년 동안 전쟁 고아 수천 명을 돌봤다. 이들 중에서 대학총장, 교수, 군장성, 종교인이 나왔다. 고 이준묵 목사는 이 공로로 1999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간호사 출신인 고 김수덕 여사는 구십 평생을 남편과 함께했다. 고 함석헌(咸錫憲) 선생이 생전에 가장 존경하는 여인으로 꼽았던 분이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그이니, 어찌 보면 ‘봉사 DNA’가 뼛속 깊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광희씨는 ‘희망고’ 운동을 하기 전까지 가급적 두 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분들의 고귀한 삶을 따라가기 어렵고, 또 ‘목사 딸이 옷 만들어?’라는 세간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나이 든 분들에게 여전히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준묵 목사 딸’이다.
얼마 전 김동길(金東吉) 교수를 공식석상에서 만났는데, 이씨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면서 “얘가 말이야. 그 해남 이준묵 목사 딸이야”라고 했단다.
어렸을 때 함석헌 선생과 함께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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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는 이광희에게 새로운 사명감을 부여했다. |
“함석헌 선생이 일년에 한 달 정도를 저희 집에서 지내셨습니다. 같이 숨바꼭질하고, 저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던 게 기억나요. ‘이름에 빛광(光)자를 써서 그런가 눈이 초롱초롱하다’며 저를 예뻐해 주셨습니다. 함 선생은 저희 어머니 음식을 ‘참음식’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솜씨도 좋았고, 모든 사람을 지극 정성으로 대접하셨거든요.”
그의 어머니는 손님이 올 때면 전날, 이부자리를 풀 먹여서 전부 다렸다. 새벽 일찍 일어나 물을 데워 손님을 대접했다. 어머니는 한평생을 고아들을 기르고 나병환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이광희씨의 얘기다.
“어머니는 모든 사람을 ‘장한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디자이너가 됐다고 자랑스러워한 적이 없어요. 사람이 무엇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냥 태어난 그대로 장한 존재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먹고 살아야 돼’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이라는 게 사랑을 말해요. 그래서 고아들을 보면 늘 마음이 짠하다고 하셨어요. ‘사람’을 못 먹고 살까봐요.”
―남들을 돌보다 보면 정작 자기 자식에게는 소홀하지 않나요.
“그냥 어머니께는 모든 사람이 다 소중했어요. 가끔 서울에 있는 저희 집에 오셔서 일한다고 살림을 잘 못하는 저 대신에 집 청소를 하셨어요. 한 번은 어머니가 아주 고운 새 한복을 입고 오셨어요. ‘엄마, 웬 새옷이야?’ 하고 물었죠. 알고 보니 제 지하 작업실에 버린 천을 가져가서 옷을 지어 입으셨던 거예요. 곰팡이가 피어서 버린 천이었는데. 평생을 한복 세 벌로 지냈지만 곱고 정갈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삶을 고뇌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광희씨는 십여 년 전, 아흔이 된 어머니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단다. 어머니는 “내가 지금 무슨 선(線)에 서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사람에게 선악(善惡)의 길이 있는데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고민 중이다”고 했단다.
조숙했던 이화여고 학생
전남여중을 나온 이광희씨는 이화여고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큰아버지가 당시에 알아주는 거부(巨富)였다. 아버지의 유일한 형인 그는 호남 나주비료공장과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공장인 아세아자동차를 설립한 고 이문환(李文煥)씨다. 이들 형제지간은 어떤 형제보다 사이가 돈독했다. 이문환씨는 애시당초부터 동생에게 “너는 영(靈)의 지도자가 되라. 나는 육(肉)의 지도자가 되어 너를 돕겠다”고 했다.
이광희씨는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여고(女高) 시절부터 꽤 조숙했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등 ‘가치’에 대한 고민을 일찌감치 시작했다. 여고 시절 언젠가는 일주일 동안 말을 안하고 산 적이 있다. 스스로 하는 ‘침묵 훈련’이었다.
이씨는 “어른들이 쓸데없이 말을 내뱉고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며 “말을 안 하고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싶어 그런 일을 했다”고 했다.
이광희씨는 말이 없는 편이다. 상류층 부인들을 상대해서 ‘입조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다. 이번에 ‘희망고’를 하면서도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들이 훈련됐어요. 기관지가 약하고 그냥 말을 잘 하지 않아요. ‘희망고’를 론칭할 때에 여러 일이 많았어요.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정도로요. 그때 목이 아파서 물리적으로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때 말했으면 불거질 수 있었던 문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 없어졌거든요. 침묵한 것이 잘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또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당할 때에 거의 침묵한다.
오죽하면 그의 오랜 단골이었던 모 회장 부인이 몇 마디를 던진 이광희씨에게 이러더란다. “이 선생 이제 말한다. 너무 좋다”고.
기온이 45도까지 치솟는 아프리카에서도 그랬다. 동행(同行)한 김혜자씨가 “자기는 안 더워?”라고 물었다. 그는 “덥죠”라고 했다. 원체 아무 말이 없으니 주변에서 의아해서 물어본 거였다. 이광희씨는 “40도 넘는 나라에 오면 더운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싶어 말을 안 했다”고 한다.
돈 많은 부인의 핀잔 듣고 톱 브랜드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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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고 이준묵 목사와 어머니 고 김수덕 여사와 함께. |
“제가 운동권 기질이 있나 봐요. 그런 생각으로 비서학과에 갔는데 저랑은 잘 맞지 않더군요.”
―왜요.
“타이핑 수업이 정말 싫었거든요. 1분에 200타를 치면 어떻고, 300타를 치면 어떻나 싶었어요. 참 우습죠?(웃음)”
그는 타이핑 시험을 치러 가지 않았다. 결국 대학을 졸업하고 국제복장학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옷 만드는 법을 배우고 1979년, 하얏트 호텔 지하에 의상실을 열었다. 보증금 800만원에 7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다른 의상숍을 인수하면 권리금을 내야 해서 호텔 지하에 둥지를 틀었다. 자작부인이라는 뜻의 ‘바이카운터스(viscountess)’를 간판으로 내걸었다. “어려운 영어로 간판 다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당신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 드립니다’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여성을 가장 돋보이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옷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는 “여성, 남성의 차이를 두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충분히 여성스러우면서도 남자와 똑같이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했다.
어느 날, 돈 많은 부인이 매장에 와서 툴툴거렸다. 유명 브랜드가 아니어서 그런지 옷이 후지다는 식(式)이었다. 그때 그는 나중에 100만원짜리 투피스를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다. 정장 한 벌에 30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이광희씨는 ‘옷’만 만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오로지 옷에만 매달렸다. 그의 옷은 부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탤런트 원미경(元美京)이 ‘사랑과 야망’이라는 드라마(MBC)에 입고 나오면서부터다. 캐릭터상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필요했던 원씨는 이광희씨에게 부탁해 옷을 사 갔다. 이 옷은 빅히트를 쳤다. ‘이광희’라는 이름 석 자가 알려졌다. 그의 옷을 ‘카피’하는 바람에 낭패도 많이 봤다.
1986년, ‘이광희 부티크’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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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대 재학시절의 이광희씨. |
그의 얘기다.
“강남으로 갈 재력이 안됐고 제가 사람 많은 곳을 워낙 싫어해요. 게다가 남산에서 보는 석양이 정말 좋았어요. 그 석양을 매일 보고 싶어서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목 좋은 곳에 숍을 내지 않나요.
“그러니까. 제가 이래요. 그때 강남에 냈으면 완전 부자 됐을 거예요. 호호. 저한테는 가치가 굉장히 중요해요. 어떤 일의 의미, 그 가치, 그런 것들이….”
―사람과의 관계가 힘든데 어떻게 디자이너를 업(業)으로 삼았죠?
“힘들어요, 실은. 날마다 전쟁을 치르죠. 그냥 뭐랄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몇 초 뒤, 그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똑 떨어졌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지난날들,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기억, 또 그를 지탱해 온 경험들이 오버랩된 듯 보였다. 잠시 인터뷰가 중단됐다. 얼마 뒤, 그가 감정을 추스르고 말을 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여러가지를 되돌아볼 수 있어서 좋아요. 여러 힘든 일 속에서 잘 버티게끔, 이런 낙천적인 성격을 갖게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요. 그냥 매일 ‘오늘은 그만두리라’ 하면서 일을 해요. 사람과 사람, 또 여러 관계들이 버겁기도 하고요. 저에게는 가치가 중요해서 일을 하는 이유를 늘 찾아요. 어느 날 찾은 듯싶다가 또 아닌가 싶어 회의가 들고, 또 찾고…. 모르겠어요. 망고나무가 제게 그런 의미가 되어줄는지요.”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디자이너 이광희는 소녀의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다. 목소리가 유달리 작지만, 웃을 때는 10대 소녀처럼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녹록지 않았던 삶과 고뇌가 함께 느껴졌다.
이광희는 한마디로는 딱히 설명이 안되는 사람이다. 물론 앞으로 그가 디자이너를 그만둘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는 꽤 발랄하고 명랑한 사람이다. 무지개처럼 여러 색을 가진 여자다.
남산에 오픈한 ‘이광희 부티크’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당시 투피스 한 벌에 200만~300만원(그의 옷은 지금도 이 가격이다)일 정도로 고가(高價)였지만, 장안에 내로라하는 안주인들이 앞다퉈 그를 찾았다. 비결이 뭘까.
그의 답은 심플했다.
“기대치 이상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최고의 물건을 만들고 싶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격이 물건의 가치를 정해 주니까요. 고객들 보기에 그 값을 내고 사도 좋을 만하지 않았을까.”
디자이너 이광희를 이해하는 두 번째 키워드는 ‘원칙’이다. 그는 숍을 오픈할 때부터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은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그는 예약제로 고객들을 맞이했다. 약속을 정하지 않고 불쑥 찾아오는 고객들은 만나지 않았다. “건방져서가 아니라 고객들 한 명 한 명에게 충실히 대하고 싶어서 이렇게 했다”고 했다. 하지만 낭패도 겪었다. 예약 없이 찾아온 ‘사모님’으로부터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느냐”고 호통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철저하게 가격 정찰제를 실시했다. 아는 사람이라고 가격을 깎아 주지 않았다. 물론 옷을 선물하지 않았다. 대졸(大卒) 사원을 매장에 배치했다.
단 한 번도 재벌가 중매 서 본 적 없어
그가 지킨 또 하나의 원칙은 ‘사람을 연결시켜 주지 않는 것’이었다. 고급 부티크는 으레 부인들의 ‘사교의 장(場)’으로 통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철저하게 배격했다.
그에게 “좋은 자리 있으면 중매를 서 보라”는 문의가 많았다. 그는 그때마다 “저는 그거는 잘 못해요”라며 슬쩍 빠졌다.
우리나라의 정상급 디자이너로 활동했을 때가 30대였다. 사실 장안의 으리으리한 사모님들이 오면 움츠러들 수도 있는 나이다. 하지만 그는 주눅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이광희씨의 얘기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려운데 얼마나 겁을 먹겠어요. 등에서 식은 땀이 주루룩 흐르죠. 제가 흥얼흥얼 혼자 노래를 잘하는데 스스로에게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서 그랬나 봐요. 고객이 오면 일단 화장실에 가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다음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나와요(웃음).”
―정말 적성에 안 맞네요.
“아휴 안 맞죠. 정말로. 옷 만드는 것은 정말 자신이 있는데 비즈니스를 못하는 거예요. 누구랑 누구를 연결시켜 줘야겠다, 저 사람이 나한테 도움이 될 테니 잘보이자는 생각 자체가 안 드는 거 있잖아요. ‘나는 그냥 옷만 만들자. 열심히 하다 보면 되겠지’싶은 심정으로 이날까지 살아왔어요. 내일이 없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렇게 일을 했어요.”
디자이너 이광희는 손님들과 여태까지 전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 이런 원칙주의의 바탕은 책임감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또 외풍(外風)이 몰아쳐도 내가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때 개인적으로 큰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그는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았다.
이런 성격이다 보니 남들과 정반대(?)의 길을 가기도 한다.
고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는 꽤 오랫동안 그에게 옷을 해 갔다. 전남 출신인 큰아버지가 그의 후원자였다. 좀처럼 외부에서 옷을 가봉하지 않는 그가 이 여사를 뵙기 위해 자택을 찾았다. 집 앞에는 축하 화환이 즐비했다. 이광희씨는 할 일만 딱하고 뒤돌아섰다. ‘청와대에 들어가니 이제 그만 해 드려도 되겠구나’싶더란다. 남들은 조금이라도 권력자에게 줄을 대려고 노력하는데 그는 반대였다.
DJ의 최측근이었던 모 국회의원 부인이 하루는 이런 소리를 했다.
“아야, 너는 워째 사모님 옷 좀 해 드리지 그런다냐.”
이광희씨는 그냥 웃었다. “다른 분들이 많이 해 드릴 텐데요, 뭐”라고 답했다.
옷로비 사건 때 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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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디자이너인 그가 즐겨입는 옷은 트레이닝 복이다. |
그런 그가 크게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1999년, 옷로비 사건 때였다. 옷로비 사건이 언론에서 이슈로 떠오르는 와중에 모 일간지에서 ‘남산에 있는 L디자이너’를 언급했다. 내용은 가관이었다. L디자이너가 고위층에 옷로비를 했고, 그의 옷은 한 벌에 400만~500만원이라는 얘기였다. 남산에 의상실을 가진 L디자이너는 이광희씨뿐이었다.
참는 데는 이골이 난 그지만, 정말 이때는 암담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광희씨는 “내 20년의 디자이너 생활이 물거품 되는 순간이었다”며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보도를 한 모 일간지의 데스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그 길로 신문사 편집국에 찾아갔다.
이광희씨의 얘기다.
“일개 옷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신문사에 따지러 가요? 더구나 제 성격에요.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제가 재벌가 아들, 딸 중매를 하거나 사람들을 서로 소개시켜 줬다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또 제가 평생 옷을 선물한 적이 없으니까, 혹시 나한테 옷 받았다는 사람 있으면 장안을 뒤져서 찾아오라고 했어요. 편집국을 등지고 걸어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라고요.(웃음)”
결국 얼마 뒤에 옷로비 사건은 그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관련자들의 거짓 증언이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지만, 어디에서도 ‘이광희’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석 달 동안, 그 많던 손님은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와 인터뷰를 하는 시간이 꽤 지났다. 그는 난처한 대목에서도 나긋나긋,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까르르 웃을 때는 소녀 같았다.
튀지 않는 스타일 좋아하는 김윤옥 여사
―전직 대통령 부인들은 거의 다 다녀갔지요?
“김윤옥 여사, 이희호 여사, 김옥숙(金玉淑) 여사 등이 다녀가셨어요. 저는 어느 분이 다녀갔다고 얘기하는 편이 아닌데 시간이 지나니까 많이 알려지네요. 예전과는 달리 많이 편한 세상이 됐고, 이제는 영부인들의 패션이 중요하게 됐잖아요.”
―그분들 스타일이 어떤가요.
“김윤옥 여사는 한 사람의 옷만 고집해서 입지 않으세요. 여러 브랜드의 옷을 다양하게 소화하시죠. 우아하고 튀지 않는 스타일을 즐기세요. 파스텔톤이나 곤색(일본어·감색)을 좋아하세요. 아무래도 공식 석상에서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좋아하시죠. 자기 관리가 철저한 만큼 몸매 관리도 철저하고, 굉장히 멋쟁이세요. 이희호 여사님은 단정한 일자 라인 스커트를 좋아하셨어요.”
―예전과 비교하면 요즘 옷 입는 트렌드가 달라졌죠.
“예전에는 홈웨어 같은 롱 드레스를 입었어요. 요즘은 무릎 아래 길이의 스커트를 입고, 아무래도 조금씩 과감해지죠. 과감해진다기보다는 뭐랄까, 좀 더 다양하게 옷을 입는 분들이 많아요. 재계나 문화계 여성 CEO들의 경우가 그래요.”
―본인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옷을 만들 때에는 여성스럽고 발랄한 것, 그러면서 우아한 것을 좋아해요. 아무래도 파스텔톤의 깊이 있고 무게감 있는 색을 좋아해요. 가끔은 제가 너무 깊이와 무게를 추구하니까 어려운 일들이 생기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깊이라는 것이 계속 파 들어 가야 하는 것인데, 계속 파면 파이고 아프잖아요.(웃음) 회색, 갈색, 감색이 합해지면 멋스러워져요. 하지만 저는 디자이너이고 컬렉션이 있으니까 원색이나 다양한 장르를 함께해요.”
―평소에 본인이 가장 즐기는 복장은 뭔가요.
“후드 재킷에 트레이닝 복이요.(웃음) 사실 집에 있을 때에 잠옷 바람이나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있어요. 남편이 신기하게 생각해요. 예전에 부부 동반으로 만났는데 다른 부인들이 제가 어떤 옷을 평소에 입는지 궁금해하셨어요. 아무래도 디자이너니까 집에서도 근사하게 입고 있을 것 같고 그런 거죠. 한 교수님이 부인에게 ‘되게 수수해. 그냥 추리닝 입고 다니던데’라고 말해서 다 같이 웃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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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희씨는 지난 2010년 11월, 망고나무 성금모금을 위해 자선콘서트를 열었다. |
별명은 ‘둔순이’
실제로 이날 이광희씨는 납작한 검정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장신구는 일절 착용하지 않았다. 그는 “장신구를 보면 예쁘기는 한데 정작 별로 갖고 싶지가 않다”고 했다.
디자이너 이광희를 이해하는 세 번째 코드는 ‘아날로그’다. 그는 요즘 사람이 아니다. 운전을 할 줄 모르고, 컴퓨터를 켜는 법을 모른다. 친하게 지내는 디자이너가 없고, 딱히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없다. 남편 홍성태 교수와 주로 대화 하거나, 그냥 혼자 있기를 즐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초저녁잠이 많아서 밤 9시면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저녁 모임에 참석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패션쇼를 할 때에는 새벽 3시에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할 정도로 새벽형 인간이다.
혼자 있을 때에는 주로 책을 읽는다. 집에서 뒹굴뒹굴 책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추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부르는 그의 별명은 ‘둔순이’다. 감각이 둔하다고 붙여 준 별명이다. 옷 만들기를 제외하고는 퍽 재미없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는 아무 불만이 없다. 어찌 보면 그의 옷은 그의 이런 모습을 꼭 닮았다.
몇 달 전, 고객 한 명이 30년쯤 전에 그가 만든 옷을 수선하러 왔다.
“와, 정말 그때 놀랐어요. 지금 봐도 입을 만하다면서 수선을 맡기셨습니다. ‘이거는 수선이 아니라 교환을 해야겠어요’라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어요. 제 옷이 그만큼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다는 얘기잖아요. 해외 명품은 버려도 제 옷은 버리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 뿌듯하고 자부심이 들죠.”
인터뷰가 끝나고 며칠 뒤, 그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왔다.
“정 기자님, 인터뷰하고 후회 많이 했어요. 제가 너무 쓸데없이 얘기를 많이 한 것 같아서요. 망고나무 얘기를 주로 써 주세요.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라서 제 얘기를 하기가 좀 그래요. 많은 사람이 망고나무 후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써 주세요.”
앳된 얼굴이지만, 30년 넘게 대한민국 최고의 디자이너로 군림하고 있는 사람의 얘기 치고는 너무 소박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그의 부모의 고귀한 삶에 그는 한발짝 다가서고 있는지 모른다.⊙
박혜연
(2018-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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