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동포 3세, 마케팅 컨설턴트와 학원사업으로 富 일궈
⊙ 미공개 자료 정리 등 할 일 태산
⊙ 6만 점의 고지도·고서적·그림·도자기 등 세상에 모습 드러내기 기다리는 보물들 즐비
金惠靜
⊙ 1946년생.
⊙ 일본 도쿄공립여대 일문학과 졸업.
⊙ 현 경희대 석좌교수, 혜정문화연구소장, 혜정박물관장.
⊙ 미공개 자료 정리 등 할 일 태산
⊙ 6만 점의 고지도·고서적·그림·도자기 등 세상에 모습 드러내기 기다리는 보물들 즐비
金惠靜
⊙ 1946년생.
⊙ 일본 도쿄공립여대 일문학과 졸업.
⊙ 현 경희대 석좌교수, 혜정문화연구소장, 혜정박물관장.
- 김혜정 관장이 1737년 프랑스의 당빌(J.B 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지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가 독립적으로 그려진 최초의 서양 고지도다.
‘여걸(女傑)’. 김혜정(金惠靜·64) 경희대 혜정박물관장 겸 석좌(碩座)교수와 이야기하는 내내 이 두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재일(在日)동포 3세로 태어나 30대 초반의 나이에 우리 돈으로 수백억원대의 재산을 일군 여자, 평생 6만여 점의 고지도(古地圖)와 도서, 도자기, 글씨 등을 모으고 그걸 쾌척(快擲)한 여자, 믿었던 측근에게 700억원대의 재산을 사취(詐取)당했던 얘기를 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자, “여자에게 가장 큰 훈장은 ‘사회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여자,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누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여자, 그런 자기 자신을 두고 “나보고 몬스터(monster·괴물)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라며 깔깔거리고 웃는 여자―‘여걸’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준비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관장의 말에 의하면, ‘여걸’로서의 자질은 어린 시절부터 보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면 그의 주위에 자연스럽게 친구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싸 준 계란말이 같은 반찬들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어요. 어머니가 잘 깎아서 필통에 넣어 준 연필도 친구들이 달라고 하면 나누어 줘서 필통에는 몽당연필만 남아 있곤 했죠.”
누군가에게 뭔가 나누어 주는 일, 그리고 사람 사귀는 일을 좋아하는 성품은 그때부터 비롯됐던 셈이다. 그에게 베푸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 김천수(金天守) 전(前) 일본 고마자와(駒潭)대학 교수였다. 그에게 혜정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원래 할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은 희숙(熙淑)이었어요. ‘밝을 희(熙)’자가 여자에게는 너무 센 이름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맑을 숙(淑)’자를 함께 넣어 이름을 지어 주셨죠.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는 세상에 베풀면서 조용히 사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은혜 혜(惠)’ 자와 ‘고요할 정(靜)’ 자를 써서 혜정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그래서 김 관장은 김혜정이라는 이름과 김희숙이라는 이름을 함께 쓴다. 명함에도 ‘金惠靜’이라는 이름 뒤에 ‘熙淑’이라는 이름을 병기(倂記)하고 있다.
김 관장의 집안은 원래 충남 아산의 한학자 집안이었다. 대대로 자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김 관장의 증조부가 점쟁이에게 “자식을 외국으로 보내야 대(代)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할아버지를 일본으로 보냈다. 그게 1900년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할아버지는 엄격했던 증조부를 꺼려 일본에 주저앉았다. 어린 시절 김 관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책 읽는 모습, 신문지에 붓글씨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났다.
“집에서 신문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신문을 읽은 후에는 신문지에 붓글씨 연습을 해서 신문이 늘 새카맣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죠.”
젊은 시절 아사히신문 기자를 하기도 했던 아버지는 김 관장의 표현에 의하면 무척이나 튀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술을 가르쳐 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술을 참 좋아하셨어요. 고(高) 2때 술에 얼큰히 취해 들어오셔서는 ‘정아, 아빠랑 맥주 한 잔 할래?’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어이구, 그게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셨죠. 내가 ‘난, 맥주 못하는데…’라고 하자 아버지는 ‘좋은 거다’라며 권하시더군요. 한 잔 마셨는데, ‘이 쓴 걸 뭐 하러 마시나’ 싶었어요.
아버지는 기타를 참 잘 치셨어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기타를 연주하곤 하셨죠. 내가 대학에 입학하자, 골프채를 사 주기도 하셨어요. 아버지는 내게 우상이었어요.”
대학 2학년 때 佛고지도 처음 구입
―술은 잘합니까.
“옛날에는 많이 했죠. 위스키 700mL짜리 반 병 정도…. 주는 대로 먹다가 뻗은 적도 있어요. 술을 많이 먹으면 실수가 많아서 문제죠.”
―무슨 실수입니까.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술김에 오케이를 해 버리는 거예요. 하지만 술김에 한 약속이라고 안 지킬 수 있나요. 지켜야죠. 난 ‘내가 얘기한 것은 곧 법(法)’이라는 생각으로 약속은 꼭 지키면서 살아왔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큰 약속은 아무리 노력해도 못 지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그건 용서받을 수 있지요. 하지만 내가 지킬 수 있는 작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죠.”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 관장은 도쿄공립여대 국문학과(일문학과)에 진학했다. 학교는 도쿄의 간다(神田) 신보초(神保町)에 있었다. 간다에는 지금도 유명한 고서점(古書店)거리가 있다. 김 관장의 회고다.
“강의를 땡땡이치고, 헌책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죠. 내게 대학은 도쿄공립여대 캠퍼스가 아니라, 간다의 헌책방이었어요. 책들을 뒤지고, 나이 든 서점 주인 아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간다 거리는 참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어요.”
김 관장이 생애 최초로 지도를 구입한 곳도 간다의 헌책방이었다.
“대학 2학년 때, 한 고서점에서 1750년대에 프랑스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발견했어요. 처음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에 빨려 들어갔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용돈에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졸라서 타낸 돈으로 결국 지도를 사고 말았어요. 그때 가정부 월급이 8000엔쯤 했는데, 6만 엔 정도 주고 샀던 것 같아요.”
―신춘문예에 도전해 볼 생각은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내 재능이 그럴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 후에도 틈틈이 글을 쓰고는 있지만, 어디 내놓을 만한 것은 못 되죠.”
졸업 후 그녀가 택한 것은 문학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마케팅 컨설팅 업체를 차린 것이다.
“아쓰코라는 선배 언니가 신주쿠레스토랑기획이라는 외식(外食)컨설팅 업체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 언니가 하는 것을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 관장은 산업능률대 강의를 청강(聽講)하면서 마케팅에 대해 공부하는 한편, ‘간다통상마케팅리서치센터’를 설립했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3~4명의 직원과 전화기 두 대를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내 인생은 詩이자 드라마
―아버지가 반대는 안 했나요.
“내가 엉뚱한 걸 아니까, 그리고 대학 시절 사랑했던 남자가 죽은 후 나도 따라 죽겠다고 약을 먹었다가 나흘 만에 깨어난 적이 있어서인지, 아버지는 내가 하겠다는 일을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라, 그리고 네가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은 조용히 갚아라’, 그게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랑했던 남자’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극좌파(極左派) 대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하던 시절이었지만, 도쿄공립여대는 그런 소란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어요. 학교 입구에는 대학생들이 줄을 지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였어요. 도쿄대 법대생이었죠. 나중에 내가 사업할 때, 법조계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었어요.”
김 관장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김 관장은 안경을 벗어 눈물을 닦았다.
“내 인생이 시(詩)고, 드라마지….”
여걸로만 느껴지던 그도 이 대목에서는 ‘여인’이고 ‘문학소녀’였다. ‘시’이고 ‘드라마’라는 젊은 날의 사랑 이야기를 더 묻고 싶었지만, 여기서 지체할 수 없어 사업 얘기로 나갔다.
김 관장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는 일본에서도 외식산업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때였다. 외국계 프랜차이즈체인[franchise chain·상품의 유통·서비스 등에서 프랜차이즈(특권)를 가지는 모기업(프랜차이저)이 체인에 참여하는 독립점(프랜차이지를 조직하여 형성)이 되는 연쇄기업]이나 레귤러체인[regular chain·동일자본에 속하는 많은 점포가 각지에 분산해 있으면서 중앙본부의 통일적 관리를 받고 있는 대규모 소매조직] 형태의 외식업소들이 일본에 막 상륙할 무렵이었다.
―문학을 전공했는데, 마케팅 컨설팅을 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마케팅은 과학입니다. 그때는 일본도 앞뒤 모르고 달리던 시절이었어요. 누가 가게를 열겠다고 자문을 구하면, 우리 직원들이 나가서 가게를 열려는 곳 인근 역이나 상가의 출입구별 유동(流動)인구를 시간대별로 파악했어요. 그런 게 통했어요. 나는 지금도 식당에 들어가면 테이블 수를 셉니다. 그리고 메뉴판을 보면 매출액이 머리에 그려지죠.”
김 관장은 “한 3년 지나니까 민단(民團)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5~6년쯤 지난 후에는 자리를 잡게 됐다”고 말했다.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 사업자금이 부족해도 기획서에 우리 회사 사인이 들어가 있으면 은행에서 두말없이 대출을 해 줄 정도였다”고 김 관장은 회상했다.
“부동산은 손대지 않는다”
―돈은 얼마나 벌었습니까.
김 관장은 돈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하기를 꺼렸다. 그가 고지도 등을 구입하는 데 들어간 비용, 그가 기증한 고지도나 고문헌 등의 액수에 대한 질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 관장은 “당시 내가 1시간 컨설팅해 주는 비용이 변호사가 1시간 상담하는 비용보다 비쌌다”고만 말했다. 컨설팅 외에 직접 독자적인 브랜드를 가지고 외식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김 관장이 일본에서 벌인 사업 가운데는 학원사업도 있었다.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된 동기가 재미있다.
“9살 아래인 여동생이 고아(孤兒)인 11살 연상의 가정교사하고 사랑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난 아버지가 그런 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역시 딸의 일에는 어쩔 수 없었나 봐요. 결국 동생은 그 가정교사와 결혼하려 집을 나갔고, 아버지와는 의절(義絶)하게 됐어요.
동생 부부에게 ‘뭐 해서 먹고살 거냐’고 했더니 제부(弟夫)가 ‘애들 가르치는 것은 자신 있다’고 하더군요. 일본도 교육열이 높아 학원사업이 잘되지만, 그때만 해도 체계적인 학원사업이 없을 때였어요. 해볼 만하다 싶어서 형제들이 출자(出資)해서 학원을 차렸지요.”
일본 사이마타현 사이마타시 가와구치 역전(驛前)에서 시작한 이 학원은 지금 일본 전국에 1000여 개 학원과 7만명의 수강생을 거느린 큰 학원그룹(태양학원, 영광학원)으로 성장했다. 재일교포가 설립한 학원으로 일본 증시(證市)에 상장(上場)된 유일한 학원이라고 한다. 학원 운영은 동생들이 주로 맡아 왔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학원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나요.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학생들 잘 가르칠 생각만 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학원이 한창 성장할 때에도 우리는 부동산에 손대지 않았어요. 빚내서 땅을 사고 빌딩을 올리면 계산이 안 맞아요. 부동산에 손댔던 학원들은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함께 무너졌죠.”
우산팔이 소년에 대한 기억
청년사업가로 재일동포 사회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1971년 7월, 한국에서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정부는 각국에서 성공한 해외동포들을 초청했는데, 김 관장도 여기에 포함됐다. 참석자들 가운데 최연소였다. 생전 처음 방문한 고국은 너무나 가난했다.
“그때만 해도 일본과는 천양지차였어요. 무지 못살고, 불결하고…. 서울 한남동 외무부 장관 공관에서 참석자들을 위한 파티가 열렸는데, 일본에서 사교파티에 많이 참석해 본 내 눈에는 모든 게 어수룩하게만 보였어요.”
일행은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 묵었다. 여기서 김 관장은 평생 잊지 못할 한 소년과 만났다.
“호텔 근처로 산책을 나갔는데, 소낙비가 쏟아졌어요. 비닐우산들을 옆에 낀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이 우산을 사라고 왔어요. 한 개에 50원이었는데, 100원짜리 동전을 내 주고 거스름돈을 받았어요. 안 그래도 됐는데, 지금 같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는 늘 사회를 위한 기여를 강조하면서도 ‘공짜는 없다’는 것도 강조하셨어요. 그 가르침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거스름돈을 받고 만 것 같아요. 지나 놓고 나니 참 후회되는 일이에요. 눈망울이 무척 초롱초롱한 아이였는데, 그 눈빛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어요. 나중에 내가 귀국하게 된 데는 그 아이에 대한 기억도 크게 작용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뵈었습니까.
“물론이죠. 작고 새카만 분이었어요.”
―직접 이야기는 못해 보셨나요.
“아유. 어떻게…. 악수만 했죠.”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김 관장은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로 내려갔다. 하수시설이 잘 안되어 있어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아랫도리를 드러낸 꼬마들이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조카가 왔다고 외삼촌 집안은 물론이고 온 동네가 떠들썩했어요. 그때는 재일동포가 귀국했다고 하면 대공(對共)관계 문제점이 없나 해서 경찰에서 나왔는데, 내가 가지고 간 대통령취임식 참석 기념메달과 행사 자료들을 보고는 정중히 인사를 하더군요.”
김 관장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외할머니를 초청했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얼마 후 외할머니가 일본으로 왔다. 김 관장은 시어머니(김 관장의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외할머니를 13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
1983년 50억 엔 들고 귀국
31살 때, 김 관장은 요코하마의 고급 주택가에 저택을 지었다. 득의만만하던 시절이었다.
“하고 싶은 일들은 다 해 보았던 것 같아요. 샤갈, 로랑생, 위트릴로, 이중섭의 그림도 사 모으고, 보석도 사고….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우. 하하하.”
2년 후 그 집은 소실(燒失)됐다. 영국여행을 갔을 때 구입한 골동품 스탠드가 과열되어 불이 난 것이다. 별장에 가 있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는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집과 함께 33살 때까지의 내 삶의 추억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어요. 어린 시절의 추억들도…. 박 대통령 취임식 기념메달도 그때 불에 타서 사라졌지요. 한편으로는 그 화재를 계기로 ‘네가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을 조용히 갚아라, 그래야 네 인생도 행복해질 것이다’라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다시 돌아보게 됐죠. 어쩌면 아버지는 딸의 사업이 너무 잘나가는 것을 불안해했는지도 모르겠어요.”
1983년 김혜정 관장은 외할머니를 모시고 귀국했다.
“외할머니는 일본 땅에 살다가 돌아가시면 화장(火葬)을 해야 한다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셨어요. 죽어서 고향 땅에 묻히겠다며, 제가 어렵게 취득해 드린 외국인등록증을 일본정부에 반납해 버리기까지 했어요. 외할머니를 모시고 들어오면서,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도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귀국하면서 김 관장이 들고 들어온 돈이 50억 엔이었다고 한다. 김 관장은 “당시 환율로 137억원쯤이었다. 누군가 내게 서울 반포에 있는 팔래스호텔을 사라고 권했는데, 그 호텔은 그때 돈으로 80억원쯤이었다”고 회상했다.
혜정원
김 관장은 1985년 제주도 함덕에 정신박약아(정박아) 보호시설인 ‘혜정원- 아가의 집’을 만들었다.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은 1988년.
“원래는 고아원을 하고 싶었어요. 1971년 귀국했을 때 로얄호텔 앞에서 만났던 우산팔이 소년에게 제가 가진 것을 제대로 나누어 주지 못했다는 찜찜함이 늘 마음속에 있었거든요.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정박아 시설을 원하더군요.”
똥오줌도 제대로 못 가리는 정박아들 때문에 정박아 수용시설이라면 불결하고 체벌(體罰)이 횡행하던 시절, 김 관장은 일본의 사회복지시설을 본떠 새로운 차원의 복지시설을 만들려 애를 썼다. 5000여 평의 부지에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지만, 적정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 40명만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 외부에서 통학하면서 혜정원에서 공부하는 정박아들이 35명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1명이 정박아 14명을 돌보는데, 우리는 40명의 정박아를 32명이 돌봅니다. 청소부들도 여럿 고용하고 있는데, 정박아들이 똥오줌을 못 가리기 때문에 이를 그때그때 치우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문을 열 때부터 직원들에게 ‘절대로 애들을 때리지 마라. 애들을 때리는 사람은 그 순간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혜정원의 또 하나 자랑은 투명한 경영이다.
“혜정원에서 후원자들이 보내왔다면서 밀감을 보내오는 경우가 있어요. 나는 그걸 다 돌려보냅니다. 혜정원 앞으로 들어온 것은 밀감 하나, 동전 하나도 혜정원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있지만, 결제한 적도, 돈을 만진 적도 없습니다. 시설장과 사무국장이 규정에 따라 처리하고, 투명하게 그 내역을 공개하고 있어요.”
이사진 구성도 마찬가지. 이사진 가운데 김 관장의 친인척은 한 사람도 없고, 시설장은 제주지역의 학교에서 교장을 지내고 정년퇴임한 인사 가운데서 공채하고 있다는 것이 김 관장의 설명이다. 김 관장에 의하면, 그에게 혜정원 경영은 ‘사회사업’이 아니라 ‘봉사’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일 뿐이죠.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혜정원 아이들을 보면 내 자식 같아요. 혜정원에 갔을 때 ‘혜정 엄마!’라면서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어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에 ‘금이야 은이야 하면서 키웠더니, 정박아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고 타박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고집부리면서 그렇게 한 네가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고 하세요.”
“내 주위에 ×파리가 왜 그렇게 많이 꼬였는지…”
하지만 돈 많은 30대 처녀 사업가에게 고국은 마냥 좋기만 한 땅은 아니었다. 사람 좋아하고, 남이 도와 달라는 얘기를 하면 거절 못하는 성격 때문에 사기도 많이 당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억하기 위한 사업을 벌이기 위해 충남 아산과 제주에 산 땅을 명의신탁(名義信託)해 놓았다가 몽땅 사취당하는 바람에 700억원대의 손실을 입기도 했다. 알고 지내던 검사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며 추천한 사람들을 주위에 앉혀 놓았다가 당한 사고였다. 그 후 그는 제주에 남아 있던 땅들을 별장만 남겨 놓고 모두 혜정원에 기부한 후 서울로 올라왔다.
700억원, 보통사람들은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재산을 잃었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지나가는 말처럼 “내 주위에 ×파리가 왜 그렇게 많이 꼬였는지…”라고 내뱉는 것이 전부였다.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학연구원장과의 짧은 결혼생활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에 대해 김 관장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얘기 끝에 “(해외의 독도 관련 자료나 고문헌 수집을) 누군 자기 혼자서 다 하고 다닌 것처럼 말하더라”면서 깔깔대고 웃는데, 그 ‘누구’가 최 원장을 가리키는 것이려니 짐작할 뿐이다.
대신 1980년대 중반부터 김 관장은 고지도 수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그가 고지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시절부터였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갖고 싶어서”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돈을 벌게 되면서 고지도는 물론, 고서적, 도자기, 각국 민예품 등을 모으던 그는 이 무렵부터 고지도, 특히 동해(東海)와 독도와 관련된 고지도와 아시아지도들을 중점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도가 아름다워서 사 모으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지도의 내용들을 보게 됐어요.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지도, 지금과는 다른 지명(地名)을 보면서 ‘이건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를 들어 일본서 나고 자란 나는 동해도 당연히 일본해(日本海)로 알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고지도들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동해는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는 ‘Ocean Oriental’ ‘Oceanus Chinensis’ 등으로 표기되다가,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Gulf of Corea’ ‘Sea of Corea’ ‘Eastern or Corea Sea’ 등으로 표기되었어요.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우세해지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Sea of Japan’이나 ‘Japan Sea’로 바뀌고, 우리의 국권을 빼앗기는 20세기 초반부터는 그게 굳어지게 됐어요.”
“물건을 사면서 값을 깎는 법이 없다”
“지도를 모으는 과정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더니 김 관장은 웃었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수집 초창기의 일인데, 누가 물건을 가져왔어요. 아무리 봐도 그가 부른 가격에 값할 만한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두말 않고 그가 달라는 대로 다 주었어요. 나는 물건을 사면서 값을 깎는 법이 없어요. 물건을 가져온 사람을 앞에 두고 값을 깎으면서 창피 줘서 적(敵)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몇 번 그렇게 했더니, 그 다음에는 좋은 물건이 나오면 내게 꼭 연락을 해 오더군요. 지금은 그 사람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라도 ‘당신, 그때 나를 속였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문득 ‘500금(金)을 주고 죽은 말의 뼈를 샀다(死馬骨 五百金·사마골 오백금)’는 고사(故事)가 생각났다. 옛날 중국에서 임금의 명을 받아 천리마를 사려던 신하가 그 말이 죽은 것을 알자 그 뼈를 500금을 주고 샀다. 임금은 그를 질책했지만, 이 소문을 들은 말 장수들은 그 후 “천리마라고 하면 죽은 말의 뼈도 저렇게 거금을 주고 사는데, 살아 있는 천리마의 경우는 오죽하랴” 하는 생각에서 다투어 천리마를 구해 끌고 왔다는 얘기다.
김 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했지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여걸이다.
지도에 얽힌 김 관장의 얘기는 계속된다.
“몇 년 전, 비오는 날 젊은이 두 사람이 찾아왔어요. 미국에서 출판업을 하는데 우리 정부로부터 동해나 독도 관련 고지도들을 수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수소문 끝에 영국에 있는 다니엘이라는 지도상을 찾아갔대요. 다니엘이 내놓은 지도목록을 보면서 ‘이게 진품(眞品)이라는 걸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이걸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 1명, 일본에 2명, 미국에 2명, 중국에 1명 정도다. 당신은 한국인이니 경희대의 김혜정 박사를 찾아가면 될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필립스라는 지도상을 찾아갔더니 그 사람도 똑같은 얘기를 하더래요.
“지도는 나의 영혼”
그에게 동해나 독도 표기 고지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어요. 그랬더니 1년쯤 뒤에 뉴욕에서 발간되는 교포신문에 내가 해 준 얘기를 자기의 주장인 것처럼 해서 발표했더군요. 그리고 금년 5월 국립중앙도서관에 혜정고지도실을 개관하는데 지도를 사라며 나타났더군요. 사람들이 참 약삭빨라요.”
김 관장과 함께 혜정박물관의 지도전시실을 돌아보았다. 고지도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고지도를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김 관장의 얘기가 빈말이 아니었다. 특히 1660년에 그려진 양반구도(兩半球圖·지구의 동반구와 서반구를 나누어 표시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도)와 1707년에 나온 G.드 릴(G. De L'Isle)의 양반구도가 눈길을 끌었다. ‘내게 돈이 있으면, 나도 저런 지도를 수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런 지도는 얼마쯤 합니까.
김 관장이 손사래를 쳤다.
“돈으로 따지지 말아요. 따져 본 적도 없어요.”
그래도 ‘저건 얼마나 할까’ 하는 속물적(俗物的)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다시 물어보자 김 관장은 에둘러 얘기했다.
“2003년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509년에 나온 양반구도가 1150만 달러(250억원)에 팔린 적이 있어요. 최초로 아메리카대륙을 ‘아메리카’라고 표기한 지도죠.”
‘꼭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크리스티나 소더비에 나가면, 수백만 달러를 호가(呼價)할 지도는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가장 아끼는 지도는 무엇입니까.
“다 애착이 가죠. 돈의 문제가 아니에요. 모든 지도는 다 내 영혼이나 다름 없어요. 더하고 덜한 게 없죠.”
혜정박물관에는 서양 고지도만 있는 게 아니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경기도·강원도·함경도 지도는 2008년 보물 제1598호로 지정됐다. 산계(山系)·수계(水系)·섬 등 지형과 지명, 역참 등이 정교하게 묘사된 이 지도를 가리키면서 김 관장은 입에 침이 마르게 조상들의 슬기를 찬양했다.
“보세요. 우리 지도에는 경도(經度)도 위도(緯度)도 없지만, 얼마나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려졌어요? 그만큼 우리 민족이 슬기롭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혜정박물관에는 천문도도 있다. 1677년 일본의 천문역학자 시부가와 하루미(保井春海)가 그린 천문분야지도(天文分野之圖)와 그 모사품이 그것이다.
“이건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참조해 만든 천문도예요. 시부가와는 여기 적은 글에서 ‘이 천문도를 만들기 위해 여러 나라의 천문도를 참조했는데, 그중 조선의 것이 가장 정확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여러 해 전에 일본에 갔을 때 꼭 사고 싶었던 것을 못 사서 늘 아쉬워했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모사품과 함께 시장에 나온 것을 사들였어요. 아마 저와 만날 인연(因緣)이었나 봐요.”
비에 젖은 가죽조각 같은 것이 박물관 한쪽 벽에 걸려 있었다. 김 관장이 물었다.
―저게 뭐 같아 보여요?
“글쎄요.”
―1200년 전 잉카에서 만든 지도예요.
1년에 4개월은 지도 사러 외국에 나가
지도마다 신기하고, 발길을 잡는다.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한 지도, 한반도를 섬으로 묘사한 지도,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한 지도…. 그대로 있다가는 하루로도 모자랄 것 같다.
수장고(收藏庫)도 돌아보았다. 미처 정리가 되지 않은 지도들이 줄줄이 세워져 있는가 하면, ‘안중근’ ‘박영효’라는 표찰이 붙은 함(函)들도 보였다. 그림, 도자기, 민예품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보였다. 그것들이 “우리도 햇볕을 보게 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여기 있는 수집품들이 도대체 몇 점이나 됩니까.
“글쎄요, 한 5만~6만점 되나요.”
―액수로 치면 얼마나 되나요.
김 관장은 틈만 나면 돈으로 그의 수집품을 계산하려 드는 이 속물을 잡아끌고 사무실 한편으로 갔다. 거기에도 액자를 해 넣은 지도들이 서 있었다. 김 관장은 그중에서 엽서 4개 크기 정도 되는 지도를 들어 보였다. 1795년 프랑스에서 나온 아시아지도였다.
“이건 200만 엔을 주고 샀어요. 난 대개 엔화(貨)로 물건을 사다 보니 원화로는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 가지고 들어오면 직원들이 환율을 따져 보고 ‘몇 천만원이다’라며 놀라는데, 난 그런 식으로 따져 본 적이 없어요.”
김 관장이 고지도에 값을 매기는 것을 질색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러면 국내외 골동상들이 부르는 지도값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기자도 궁금하고, 독자들도 궁금해할 것을….
지금도 김 관장은 1년에 3분의 1 정도는 지도를 사러 외국으로 나가는데, 지도구입 비용뿐 아니라 항공료, 숙박비 등을 포함해서 한 번 외국에 나가면 몇 억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제는 30년 이상 알고 지낸 외국의 지도상들이 좋은 물건이 나왔다고 연락을 해 옵니다. 제가 고지도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때 코흘리개였던 지도상의 아들이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그냥 구경만 하고 와야지’라고 다짐하고 나가도 물건을 보면, ‘지금 안 사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랴’ 싶어서 사지 않고는 못 배겨요. 그러면 일본에 있는 동생들에게 ‘빨리 돈을 보내라’고 전화를 합니다. 금년 4월에도 유럽을 돌면서 1600년대에 나온 지도 3점을 비롯해 세계지도·아시아지도를 6점 구입해 왔어요.”
김 관장은 동해나 독도 표기와 관련된 지도들을 많이 수집, 아직도 국제적으로 ‘일본해’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많은 ‘동해’의 표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수집한 지도 중에는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한 지도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제2의 이완용’이 될 수는 없다”
“2002년 네덜란드에 지도를 사러 갔다가 ‘한국해’ ‘동해’라고 표기된 지도뿐 아니라, ‘일본해’라고 표기된 지도도 다수 발견했어요. 이걸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평소 오라버니로 모시고 있는 김세택(金世澤) 전 대사(제주도 출신으로 주오사카 총영사, 주싱가포르·덴마크대사 역임)께 전화를 걸었어요.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사라, 마라’ 얘기는 않고, ‘그거, 중요한 거지’라고만 하시더군요. 한국해라고 표기됐건, 일본해라고 표기됐건 가리지 않고 60여 점을 사서 들여왔어요.”
일본의 한 대학에서는 김 관장에게 자기 대학에 그동안 수집한 지도를 기증해 주면 그에 상당하는 돈과 함께 교수로 모시겠다고 제의해 온 적도 있다고 한다. 김 관장은 “내가 비록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나는 한국 땅에서 한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죽어야 할 사람이다. ‘제2의 이완용(李完用)’이 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김 관장이 경희대에 그의 수집품들을 기증한 것은 2001년이었다. 당시 몇몇 대학에서도 그의 수집품들을 유치하려 접촉해 왔지만, 가까이 지내던 박건우(朴健雨) 전 주미대사, 김세택 전 대사 등이 경희대 기증을 권유했다고 한다. 김 관장은 조영식(趙永植) 경희대 설립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의 철학에 공감, 경희대에 500여 점의 지도를 비롯해 1000여 점의 고지도와 지도첩, 고지도 관련 사료(史料) 등을 기증했다. 이는 300여 점의 고지도 및 관련 사료를 소장한 대영박물관, 140여 점을 소장한 미국 남가주대(USC)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한다.
조영식 경희대 설립자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김 관장을 석좌교수로 추대하고, 혜정박물관을 단독 건물로 지어 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혜정박물관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경희대 국제캠퍼스 도서관 건물 4층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신세다. 조영식 설립자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박물관 건립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래서일까? 김 관장은 혜정박물관에 기증한 이후 수집한 고지도 등은 경희대에 기증이 아니라 기탁(寄託)해 놓고 있다.
“혜정문화재단 설립, 지도학자 양성하겠다”
김문수(金文洙) 경기도지사가 고지도박물관 건립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정문 앞에 있는 경기도 소유 토지 1000평과 경희대 소유 토지 450평의 땅에 박물관을 세우고, 경기도가 300억원의 건립비용을 지원하는 방안이 검토됐는데, 대학 측이 그 땅에 상업용 건물을 올리기로 하면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김 관장의 설명이다. 김 관장은 그런 대학 측이나, 기증자료를 ‘1점당 얼마’ 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공무원들의 행태에 대해 아쉬워했다.
고지도박물관 건립이 지지부진해지면서 김 관장은 현재 200억원대의 기금(基金)으로 공익(公益)재단인 혜정문화재단을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아무래도 학교 안에 있다 보니 한계가 많아요. 혜정문화재단에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키우는 일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해서 박물관학과와 지도학과를 설치, 고지도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인력부터 키워 내려고 합니다. 아울러 재단의 홀로서기를 위해 고지도를 활용한 캐릭터상품 개발과 판매 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관장이 수집한 지도들은 경희대에만 소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금년에 문을 연 국립중앙도서관 혜정고지도실에는 그가 수집한 고지도 영인본(影印本) 60여 점이, 작년 12월 개관한 경찰대 고지도전시관에는 동해와 독도 관련 고지도 영인본 6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2012년 개관할 예정인 부산 국립해양박물관에서도 전시유물 확보 차원에서 도움을 요청해 와 검토 중이라고 한다.
헤어지기 전 김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더 남은 욕심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제 이름을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죠. 난 내가 그동안 모은 고지도 등을 통해 제 이름이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학교, 경기도, 서울시, 국가, 누구라도 좋습니다. 제가 평생 수집한 고지도 등을 제대로 보관, 전시, 연구해 줄 수 있는 주체(主體)가 있다면, 다 내놓을 생각이에요.”
문득 그의 이름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혜정(惠靜)·희숙(熙淑).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했던가. 여자로서 고요하고 평범한 삶은 아니었지만, 밝고 맑게, 소외된 사람과 이 사회와 나라에 베푸는 삶을 산 사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의 이름에 담은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라고 할까.⊙
김 관장의 말에 의하면, ‘여걸’로서의 자질은 어린 시절부터 보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면 그의 주위에 자연스럽게 친구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싸 준 계란말이 같은 반찬들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어요. 어머니가 잘 깎아서 필통에 넣어 준 연필도 친구들이 달라고 하면 나누어 줘서 필통에는 몽당연필만 남아 있곤 했죠.”
누군가에게 뭔가 나누어 주는 일, 그리고 사람 사귀는 일을 좋아하는 성품은 그때부터 비롯됐던 셈이다. 그에게 베푸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 김천수(金天守) 전(前) 일본 고마자와(駒潭)대학 교수였다. 그에게 혜정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원래 할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은 희숙(熙淑)이었어요. ‘밝을 희(熙)’자가 여자에게는 너무 센 이름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맑을 숙(淑)’자를 함께 넣어 이름을 지어 주셨죠.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는 세상에 베풀면서 조용히 사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은혜 혜(惠)’ 자와 ‘고요할 정(靜)’ 자를 써서 혜정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그래서 김 관장은 김혜정이라는 이름과 김희숙이라는 이름을 함께 쓴다. 명함에도 ‘金惠靜’이라는 이름 뒤에 ‘熙淑’이라는 이름을 병기(倂記)하고 있다.
김 관장의 집안은 원래 충남 아산의 한학자 집안이었다. 대대로 자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김 관장의 증조부가 점쟁이에게 “자식을 외국으로 보내야 대(代)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할아버지를 일본으로 보냈다. 그게 1900년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할아버지는 엄격했던 증조부를 꺼려 일본에 주저앉았다. 어린 시절 김 관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책 읽는 모습, 신문지에 붓글씨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났다.
“집에서 신문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신문을 읽은 후에는 신문지에 붓글씨 연습을 해서 신문이 늘 새카맣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죠.”
젊은 시절 아사히신문 기자를 하기도 했던 아버지는 김 관장의 표현에 의하면 무척이나 튀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술을 가르쳐 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술을 참 좋아하셨어요. 고(高) 2때 술에 얼큰히 취해 들어오셔서는 ‘정아, 아빠랑 맥주 한 잔 할래?’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어이구, 그게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셨죠. 내가 ‘난, 맥주 못하는데…’라고 하자 아버지는 ‘좋은 거다’라며 권하시더군요. 한 잔 마셨는데, ‘이 쓴 걸 뭐 하러 마시나’ 싶었어요.
아버지는 기타를 참 잘 치셨어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기타를 연주하곤 하셨죠. 내가 대학에 입학하자, 골프채를 사 주기도 하셨어요. 아버지는 내게 우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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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제작자로 꼽히는 호만이 제작한 양반구 세계지도. 김혜정 관장은 서양 고지도의 아름다움에 반해 고지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대학 2학년 때 佛고지도 처음 구입
―술은 잘합니까.
“옛날에는 많이 했죠. 위스키 700mL짜리 반 병 정도…. 주는 대로 먹다가 뻗은 적도 있어요. 술을 많이 먹으면 실수가 많아서 문제죠.”
―무슨 실수입니까.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술김에 오케이를 해 버리는 거예요. 하지만 술김에 한 약속이라고 안 지킬 수 있나요. 지켜야죠. 난 ‘내가 얘기한 것은 곧 법(法)’이라는 생각으로 약속은 꼭 지키면서 살아왔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큰 약속은 아무리 노력해도 못 지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그건 용서받을 수 있지요. 하지만 내가 지킬 수 있는 작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죠.”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 관장은 도쿄공립여대 국문학과(일문학과)에 진학했다. 학교는 도쿄의 간다(神田) 신보초(神保町)에 있었다. 간다에는 지금도 유명한 고서점(古書店)거리가 있다. 김 관장의 회고다.
“강의를 땡땡이치고, 헌책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죠. 내게 대학은 도쿄공립여대 캠퍼스가 아니라, 간다의 헌책방이었어요. 책들을 뒤지고, 나이 든 서점 주인 아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간다 거리는 참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어요.”
김 관장이 생애 최초로 지도를 구입한 곳도 간다의 헌책방이었다.
“대학 2학년 때, 한 고서점에서 1750년대에 프랑스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발견했어요. 처음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에 빨려 들어갔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용돈에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졸라서 타낸 돈으로 결국 지도를 사고 말았어요. 그때 가정부 월급이 8000엔쯤 했는데, 6만 엔 정도 주고 샀던 것 같아요.”
―신춘문예에 도전해 볼 생각은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내 재능이 그럴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 후에도 틈틈이 글을 쓰고는 있지만, 어디 내놓을 만한 것은 못 되죠.”
졸업 후 그녀가 택한 것은 문학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마케팅 컨설팅 업체를 차린 것이다.
“아쓰코라는 선배 언니가 신주쿠레스토랑기획이라는 외식(外食)컨설팅 업체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 언니가 하는 것을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 관장은 산업능률대 강의를 청강(聽講)하면서 마케팅에 대해 공부하는 한편, ‘간다통상마케팅리서치센터’를 설립했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3~4명의 직원과 전화기 두 대를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었다.
내 인생은 詩이자 드라마
―아버지가 반대는 안 했나요.
“내가 엉뚱한 걸 아니까, 그리고 대학 시절 사랑했던 남자가 죽은 후 나도 따라 죽겠다고 약을 먹었다가 나흘 만에 깨어난 적이 있어서인지, 아버지는 내가 하겠다는 일을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라, 그리고 네가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은 조용히 갚아라’, 그게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랑했던 남자’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극좌파(極左派) 대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하던 시절이었지만, 도쿄공립여대는 그런 소란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어요. 학교 입구에는 대학생들이 줄을 지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였어요. 도쿄대 법대생이었죠. 나중에 내가 사업할 때, 법조계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었어요.”
김 관장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김 관장은 안경을 벗어 눈물을 닦았다.
“내 인생이 시(詩)고, 드라마지….”
여걸로만 느껴지던 그도 이 대목에서는 ‘여인’이고 ‘문학소녀’였다. ‘시’이고 ‘드라마’라는 젊은 날의 사랑 이야기를 더 묻고 싶었지만, 여기서 지체할 수 없어 사업 얘기로 나갔다.
김 관장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는 일본에서도 외식산업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때였다. 외국계 프랜차이즈체인[franchise chain·상품의 유통·서비스 등에서 프랜차이즈(특권)를 가지는 모기업(프랜차이저)이 체인에 참여하는 독립점(프랜차이지를 조직하여 형성)이 되는 연쇄기업]이나 레귤러체인[regular chain·동일자본에 속하는 많은 점포가 각지에 분산해 있으면서 중앙본부의 통일적 관리를 받고 있는 대규모 소매조직] 형태의 외식업소들이 일본에 막 상륙할 무렵이었다.
―문학을 전공했는데, 마케팅 컨설팅을 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습니까.
“마케팅은 과학입니다. 그때는 일본도 앞뒤 모르고 달리던 시절이었어요. 누가 가게를 열겠다고 자문을 구하면, 우리 직원들이 나가서 가게를 열려는 곳 인근 역이나 상가의 출입구별 유동(流動)인구를 시간대별로 파악했어요. 그런 게 통했어요. 나는 지금도 식당에 들어가면 테이블 수를 셉니다. 그리고 메뉴판을 보면 매출액이 머리에 그려지죠.”
김 관장은 “한 3년 지나니까 민단(民團)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5~6년쯤 지난 후에는 자리를 잡게 됐다”고 말했다.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 사업자금이 부족해도 기획서에 우리 회사 사인이 들어가 있으면 은행에서 두말없이 대출을 해 줄 정도였다”고 김 관장은 회상했다.
“부동산은 손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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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정 관장이 혜정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한국 관련 고지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 관장은 돈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하기를 꺼렸다. 그가 고지도 등을 구입하는 데 들어간 비용, 그가 기증한 고지도나 고문헌 등의 액수에 대한 질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 관장은 “당시 내가 1시간 컨설팅해 주는 비용이 변호사가 1시간 상담하는 비용보다 비쌌다”고만 말했다. 컨설팅 외에 직접 독자적인 브랜드를 가지고 외식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김 관장이 일본에서 벌인 사업 가운데는 학원사업도 있었다.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된 동기가 재미있다.
“9살 아래인 여동생이 고아(孤兒)인 11살 연상의 가정교사하고 사랑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난 아버지가 그런 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역시 딸의 일에는 어쩔 수 없었나 봐요. 결국 동생은 그 가정교사와 결혼하려 집을 나갔고, 아버지와는 의절(義絶)하게 됐어요.
동생 부부에게 ‘뭐 해서 먹고살 거냐’고 했더니 제부(弟夫)가 ‘애들 가르치는 것은 자신 있다’고 하더군요. 일본도 교육열이 높아 학원사업이 잘되지만, 그때만 해도 체계적인 학원사업이 없을 때였어요. 해볼 만하다 싶어서 형제들이 출자(出資)해서 학원을 차렸지요.”
일본 사이마타현 사이마타시 가와구치 역전(驛前)에서 시작한 이 학원은 지금 일본 전국에 1000여 개 학원과 7만명의 수강생을 거느린 큰 학원그룹(태양학원, 영광학원)으로 성장했다. 재일교포가 설립한 학원으로 일본 증시(證市)에 상장(上場)된 유일한 학원이라고 한다. 학원 운영은 동생들이 주로 맡아 왔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학원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나요.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학생들 잘 가르칠 생각만 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학원이 한창 성장할 때에도 우리는 부동산에 손대지 않았어요. 빚내서 땅을 사고 빌딩을 올리면 계산이 안 맞아요. 부동산에 손댔던 학원들은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함께 무너졌죠.”
우산팔이 소년에 대한 기억
청년사업가로 재일동포 사회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1971년 7월, 한국에서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정부는 각국에서 성공한 해외동포들을 초청했는데, 김 관장도 여기에 포함됐다. 참석자들 가운데 최연소였다. 생전 처음 방문한 고국은 너무나 가난했다.
“그때만 해도 일본과는 천양지차였어요. 무지 못살고, 불결하고…. 서울 한남동 외무부 장관 공관에서 참석자들을 위한 파티가 열렸는데, 일본에서 사교파티에 많이 참석해 본 내 눈에는 모든 게 어수룩하게만 보였어요.”
일행은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 묵었다. 여기서 김 관장은 평생 잊지 못할 한 소년과 만났다.
“호텔 근처로 산책을 나갔는데, 소낙비가 쏟아졌어요. 비닐우산들을 옆에 낀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이 우산을 사라고 왔어요. 한 개에 50원이었는데, 100원짜리 동전을 내 주고 거스름돈을 받았어요. 안 그래도 됐는데, 지금 같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는 늘 사회를 위한 기여를 강조하면서도 ‘공짜는 없다’는 것도 강조하셨어요. 그 가르침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거스름돈을 받고 만 것 같아요. 지나 놓고 나니 참 후회되는 일이에요. 눈망울이 무척 초롱초롱한 아이였는데, 그 눈빛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어요. 나중에 내가 귀국하게 된 데는 그 아이에 대한 기억도 크게 작용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뵈었습니까.
“물론이죠. 작고 새카만 분이었어요.”
―직접 이야기는 못해 보셨나요.
“아유. 어떻게…. 악수만 했죠.”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김 관장은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로 내려갔다. 하수시설이 잘 안되어 있어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아랫도리를 드러낸 꼬마들이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조카가 왔다고 외삼촌 집안은 물론이고 온 동네가 떠들썩했어요. 그때는 재일동포가 귀국했다고 하면 대공(對共)관계 문제점이 없나 해서 경찰에서 나왔는데, 내가 가지고 간 대통령취임식 참석 기념메달과 행사 자료들을 보고는 정중히 인사를 하더군요.”
김 관장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외할머니를 초청했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얼마 후 외할머니가 일본으로 왔다. 김 관장은 시어머니(김 관장의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외할머니를 13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
1983년 50억 엔 들고 귀국
31살 때, 김 관장은 요코하마의 고급 주택가에 저택을 지었다. 득의만만하던 시절이었다.
“하고 싶은 일들은 다 해 보았던 것 같아요. 샤갈, 로랑생, 위트릴로, 이중섭의 그림도 사 모으고, 보석도 사고….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우. 하하하.”
2년 후 그 집은 소실(燒失)됐다. 영국여행을 갔을 때 구입한 골동품 스탠드가 과열되어 불이 난 것이다. 별장에 가 있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는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집과 함께 33살 때까지의 내 삶의 추억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어요. 어린 시절의 추억들도…. 박 대통령 취임식 기념메달도 그때 불에 타서 사라졌지요. 한편으로는 그 화재를 계기로 ‘네가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을 조용히 갚아라, 그래야 네 인생도 행복해질 것이다’라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다시 돌아보게 됐죠. 어쩌면 아버지는 딸의 사업이 너무 잘나가는 것을 불안해했는지도 모르겠어요.”
1983년 김혜정 관장은 외할머니를 모시고 귀국했다.
“외할머니는 일본 땅에 살다가 돌아가시면 화장(火葬)을 해야 한다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셨어요. 죽어서 고향 땅에 묻히겠다며, 제가 어렵게 취득해 드린 외국인등록증을 일본정부에 반납해 버리기까지 했어요. 외할머니를 모시고 들어오면서,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도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귀국하면서 김 관장이 들고 들어온 돈이 50억 엔이었다고 한다. 김 관장은 “당시 환율로 137억원쯤이었다. 누군가 내게 서울 반포에 있는 팔래스호텔을 사라고 권했는데, 그 호텔은 그때 돈으로 80억원쯤이었다”고 회상했다.
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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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정원에서 정박아를 돌보는 김혜정 관장. |
“원래는 고아원을 하고 싶었어요. 1971년 귀국했을 때 로얄호텔 앞에서 만났던 우산팔이 소년에게 제가 가진 것을 제대로 나누어 주지 못했다는 찜찜함이 늘 마음속에 있었거든요.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정박아 시설을 원하더군요.”
똥오줌도 제대로 못 가리는 정박아들 때문에 정박아 수용시설이라면 불결하고 체벌(體罰)이 횡행하던 시절, 김 관장은 일본의 사회복지시설을 본떠 새로운 차원의 복지시설을 만들려 애를 썼다. 5000여 평의 부지에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지만, 적정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 40명만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 외부에서 통학하면서 혜정원에서 공부하는 정박아들이 35명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1명이 정박아 14명을 돌보는데, 우리는 40명의 정박아를 32명이 돌봅니다. 청소부들도 여럿 고용하고 있는데, 정박아들이 똥오줌을 못 가리기 때문에 이를 그때그때 치우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문을 열 때부터 직원들에게 ‘절대로 애들을 때리지 마라. 애들을 때리는 사람은 그 순간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혜정원의 또 하나 자랑은 투명한 경영이다.
“혜정원에서 후원자들이 보내왔다면서 밀감을 보내오는 경우가 있어요. 나는 그걸 다 돌려보냅니다. 혜정원 앞으로 들어온 것은 밀감 하나, 동전 하나도 혜정원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내가 이사장을 맡고 있지만, 결제한 적도, 돈을 만진 적도 없습니다. 시설장과 사무국장이 규정에 따라 처리하고, 투명하게 그 내역을 공개하고 있어요.”
이사진 구성도 마찬가지. 이사진 가운데 김 관장의 친인척은 한 사람도 없고, 시설장은 제주지역의 학교에서 교장을 지내고 정년퇴임한 인사 가운데서 공채하고 있다는 것이 김 관장의 설명이다. 김 관장에 의하면, 그에게 혜정원 경영은 ‘사회사업’이 아니라 ‘봉사’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일 뿐이죠.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혜정원 아이들을 보면 내 자식 같아요. 혜정원에 갔을 때 ‘혜정 엄마!’라면서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어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에 ‘금이야 은이야 하면서 키웠더니, 정박아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고 타박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고집부리면서 그렇게 한 네가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고 하세요.”
“내 주위에 ×파리가 왜 그렇게 많이 꼬였는지…”
하지만 돈 많은 30대 처녀 사업가에게 고국은 마냥 좋기만 한 땅은 아니었다. 사람 좋아하고, 남이 도와 달라는 얘기를 하면 거절 못하는 성격 때문에 사기도 많이 당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억하기 위한 사업을 벌이기 위해 충남 아산과 제주에 산 땅을 명의신탁(名義信託)해 놓았다가 몽땅 사취당하는 바람에 700억원대의 손실을 입기도 했다. 알고 지내던 검사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며 추천한 사람들을 주위에 앉혀 놓았다가 당한 사고였다. 그 후 그는 제주에 남아 있던 땅들을 별장만 남겨 놓고 모두 혜정원에 기부한 후 서울로 올라왔다.
700억원, 보통사람들은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재산을 잃었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지나가는 말처럼 “내 주위에 ×파리가 왜 그렇게 많이 꼬였는지…”라고 내뱉는 것이 전부였다.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학연구원장과의 짧은 결혼생활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에 대해 김 관장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얘기 끝에 “(해외의 독도 관련 자료나 고문헌 수집을) 누군 자기 혼자서 다 하고 다닌 것처럼 말하더라”면서 깔깔대고 웃는데, 그 ‘누구’가 최 원장을 가리키는 것이려니 짐작할 뿐이다.
대신 1980년대 중반부터 김 관장은 고지도 수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그가 고지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시절부터였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갖고 싶어서”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돈을 벌게 되면서 고지도는 물론, 고서적, 도자기, 각국 민예품 등을 모으던 그는 이 무렵부터 고지도, 특히 동해(東海)와 독도와 관련된 고지도와 아시아지도들을 중점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도가 아름다워서 사 모으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지도의 내용들을 보게 됐어요.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지도, 지금과는 다른 지명(地名)을 보면서 ‘이건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를 들어 일본서 나고 자란 나는 동해도 당연히 일본해(日本海)로 알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고지도들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동해는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는 ‘Ocean Oriental’ ‘Oceanus Chinensis’ 등으로 표기되다가,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Gulf of Corea’ ‘Sea of Corea’ ‘Eastern or Corea Sea’ 등으로 표기되었어요.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우세해지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Sea of Japan’이나 ‘Japan Sea’로 바뀌고, 우리의 국권을 빼앗기는 20세기 초반부터는 그게 굳어지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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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4년에 나온 일본지도. 동해가 ‘한국해(Corean Sea)’라고 표기되어 있다. |
“물건을 사면서 값을 깎는 법이 없다”
“지도를 모으는 과정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더니 김 관장은 웃었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수집 초창기의 일인데, 누가 물건을 가져왔어요. 아무리 봐도 그가 부른 가격에 값할 만한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두말 않고 그가 달라는 대로 다 주었어요. 나는 물건을 사면서 값을 깎는 법이 없어요. 물건을 가져온 사람을 앞에 두고 값을 깎으면서 창피 줘서 적(敵)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몇 번 그렇게 했더니, 그 다음에는 좋은 물건이 나오면 내게 꼭 연락을 해 오더군요. 지금은 그 사람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라도 ‘당신, 그때 나를 속였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문득 ‘500금(金)을 주고 죽은 말의 뼈를 샀다(死馬骨 五百金·사마골 오백금)’는 고사(故事)가 생각났다. 옛날 중국에서 임금의 명을 받아 천리마를 사려던 신하가 그 말이 죽은 것을 알자 그 뼈를 500금을 주고 샀다. 임금은 그를 질책했지만, 이 소문을 들은 말 장수들은 그 후 “천리마라고 하면 죽은 말의 뼈도 저렇게 거금을 주고 사는데, 살아 있는 천리마의 경우는 오죽하랴” 하는 생각에서 다투어 천리마를 구해 끌고 왔다는 얘기다.
김 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했지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여걸이다.
지도에 얽힌 김 관장의 얘기는 계속된다.
“몇 년 전, 비오는 날 젊은이 두 사람이 찾아왔어요. 미국에서 출판업을 하는데 우리 정부로부터 동해나 독도 관련 고지도들을 수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수소문 끝에 영국에 있는 다니엘이라는 지도상을 찾아갔대요. 다니엘이 내놓은 지도목록을 보면서 ‘이게 진품(眞品)이라는 걸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이걸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 1명, 일본에 2명, 미국에 2명, 중국에 1명 정도다. 당신은 한국인이니 경희대의 김혜정 박사를 찾아가면 될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필립스라는 지도상을 찾아갔더니 그 사람도 똑같은 얘기를 하더래요.
“지도는 나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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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에 나온 경기도 지도. 함경도, 강원도 지도와 함께 보물로 지정됐다. |
김 관장과 함께 혜정박물관의 지도전시실을 돌아보았다. 고지도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고지도를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김 관장의 얘기가 빈말이 아니었다. 특히 1660년에 그려진 양반구도(兩半球圖·지구의 동반구와 서반구를 나누어 표시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도)와 1707년에 나온 G.드 릴(G. De L'Isle)의 양반구도가 눈길을 끌었다. ‘내게 돈이 있으면, 나도 저런 지도를 수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런 지도는 얼마쯤 합니까.
김 관장이 손사래를 쳤다.
“돈으로 따지지 말아요. 따져 본 적도 없어요.”
그래도 ‘저건 얼마나 할까’ 하는 속물적(俗物的)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다시 물어보자 김 관장은 에둘러 얘기했다.
“2003년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509년에 나온 양반구도가 1150만 달러(250억원)에 팔린 적이 있어요. 최초로 아메리카대륙을 ‘아메리카’라고 표기한 지도죠.”
‘꼭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크리스티나 소더비에 나가면, 수백만 달러를 호가(呼價)할 지도는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가장 아끼는 지도는 무엇입니까.
“다 애착이 가죠. 돈의 문제가 아니에요. 모든 지도는 다 내 영혼이나 다름 없어요. 더하고 덜한 게 없죠.”
혜정박물관에는 서양 고지도만 있는 게 아니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경기도·강원도·함경도 지도는 2008년 보물 제1598호로 지정됐다. 산계(山系)·수계(水系)·섬 등 지형과 지명, 역참 등이 정교하게 묘사된 이 지도를 가리키면서 김 관장은 입에 침이 마르게 조상들의 슬기를 찬양했다.
“보세요. 우리 지도에는 경도(經度)도 위도(緯度)도 없지만, 얼마나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려졌어요? 그만큼 우리 민족이 슬기롭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혜정박물관에는 천문도도 있다. 1677년 일본의 천문역학자 시부가와 하루미(保井春海)가 그린 천문분야지도(天文分野之圖)와 그 모사품이 그것이다.
“이건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참조해 만든 천문도예요. 시부가와는 여기 적은 글에서 ‘이 천문도를 만들기 위해 여러 나라의 천문도를 참조했는데, 그중 조선의 것이 가장 정확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여러 해 전에 일본에 갔을 때 꼭 사고 싶었던 것을 못 사서 늘 아쉬워했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모사품과 함께 시장에 나온 것을 사들였어요. 아마 저와 만날 인연(因緣)이었나 봐요.”
비에 젖은 가죽조각 같은 것이 박물관 한쪽 벽에 걸려 있었다. 김 관장이 물었다.
―저게 뭐 같아 보여요?
“글쎄요.”
―1200년 전 잉카에서 만든 지도예요.
1년에 4개월은 지도 사러 외국에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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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정박물관 수장고에는 고지도 외에도 수많은 민예품, 도자기, 고서적 등이 햇빛 보기를 기다리고 있다. |
수장고(收藏庫)도 돌아보았다. 미처 정리가 되지 않은 지도들이 줄줄이 세워져 있는가 하면, ‘안중근’ ‘박영효’라는 표찰이 붙은 함(函)들도 보였다. 그림, 도자기, 민예품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보였다. 그것들이 “우리도 햇볕을 보게 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여기 있는 수집품들이 도대체 몇 점이나 됩니까.
“글쎄요, 한 5만~6만점 되나요.”
―액수로 치면 얼마나 되나요.
김 관장은 틈만 나면 돈으로 그의 수집품을 계산하려 드는 이 속물을 잡아끌고 사무실 한편으로 갔다. 거기에도 액자를 해 넣은 지도들이 서 있었다. 김 관장은 그중에서 엽서 4개 크기 정도 되는 지도를 들어 보였다. 1795년 프랑스에서 나온 아시아지도였다.
“이건 200만 엔을 주고 샀어요. 난 대개 엔화(貨)로 물건을 사다 보니 원화로는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 가지고 들어오면 직원들이 환율을 따져 보고 ‘몇 천만원이다’라며 놀라는데, 난 그런 식으로 따져 본 적이 없어요.”
김 관장이 고지도에 값을 매기는 것을 질색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러면 국내외 골동상들이 부르는 지도값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기자도 궁금하고, 독자들도 궁금해할 것을….
지금도 김 관장은 1년에 3분의 1 정도는 지도를 사러 외국으로 나가는데, 지도구입 비용뿐 아니라 항공료, 숙박비 등을 포함해서 한 번 외국에 나가면 몇 억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제는 30년 이상 알고 지낸 외국의 지도상들이 좋은 물건이 나왔다고 연락을 해 옵니다. 제가 고지도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때 코흘리개였던 지도상의 아들이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그냥 구경만 하고 와야지’라고 다짐하고 나가도 물건을 보면, ‘지금 안 사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랴’ 싶어서 사지 않고는 못 배겨요. 그러면 일본에 있는 동생들에게 ‘빨리 돈을 보내라’고 전화를 합니다. 금년 4월에도 유럽을 돌면서 1600년대에 나온 지도 3점을 비롯해 세계지도·아시아지도를 6점 구입해 왔어요.”
김 관장은 동해나 독도 표기와 관련된 지도들을 많이 수집, 아직도 국제적으로 ‘일본해’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많은 ‘동해’의 표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수집한 지도 중에는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한 지도도 적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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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혜정박물관 개관식에서 김혜정 관장이 내빈들에게 전시품을 소개하고 있다. |
“‘제2의 이완용’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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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정박물관 수장고에서 외부에 공개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고지도들. |
일본의 한 대학에서는 김 관장에게 자기 대학에 그동안 수집한 지도를 기증해 주면 그에 상당하는 돈과 함께 교수로 모시겠다고 제의해 온 적도 있다고 한다. 김 관장은 “내가 비록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나는 한국 땅에서 한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죽어야 할 사람이다. ‘제2의 이완용(李完用)’이 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김 관장이 경희대에 그의 수집품들을 기증한 것은 2001년이었다. 당시 몇몇 대학에서도 그의 수집품들을 유치하려 접촉해 왔지만, 가까이 지내던 박건우(朴健雨) 전 주미대사, 김세택 전 대사 등이 경희대 기증을 권유했다고 한다. 김 관장은 조영식(趙永植) 경희대 설립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의 철학에 공감, 경희대에 500여 점의 지도를 비롯해 1000여 점의 고지도와 지도첩, 고지도 관련 사료(史料) 등을 기증했다. 이는 300여 점의 고지도 및 관련 사료를 소장한 대영박물관, 140여 점을 소장한 미국 남가주대(USC)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한다.
조영식 경희대 설립자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김 관장을 석좌교수로 추대하고, 혜정박물관을 단독 건물로 지어 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혜정박물관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경희대 국제캠퍼스 도서관 건물 4층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신세다. 조영식 설립자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박물관 건립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그래서일까? 김 관장은 혜정박물관에 기증한 이후 수집한 고지도 등은 경희대에 기증이 아니라 기탁(寄託)해 놓고 있다.
“혜정문화재단 설립, 지도학자 양성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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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중앙도서관 혜정고지도실 개관식에서 김 관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전시된 지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 끝은 김세택 전 대사. |
고지도박물관 건립이 지지부진해지면서 김 관장은 현재 200억원대의 기금(基金)으로 공익(公益)재단인 혜정문화재단을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아무래도 학교 안에 있다 보니 한계가 많아요. 혜정문화재단에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키우는 일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해서 박물관학과와 지도학과를 설치, 고지도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인력부터 키워 내려고 합니다. 아울러 재단의 홀로서기를 위해 고지도를 활용한 캐릭터상품 개발과 판매 등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관장이 수집한 지도들은 경희대에만 소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금년에 문을 연 국립중앙도서관 혜정고지도실에는 그가 수집한 고지도 영인본(影印本) 60여 점이, 작년 12월 개관한 경찰대 고지도전시관에는 동해와 독도 관련 고지도 영인본 6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2012년 개관할 예정인 부산 국립해양박물관에서도 전시유물 확보 차원에서 도움을 요청해 와 검토 중이라고 한다.
헤어지기 전 김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난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더 남은 욕심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제 이름을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죠. 난 내가 그동안 모은 고지도 등을 통해 제 이름이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학교, 경기도, 서울시, 국가, 누구라도 좋습니다. 제가 평생 수집한 고지도 등을 제대로 보관, 전시, 연구해 줄 수 있는 주체(主體)가 있다면, 다 내놓을 생각이에요.”
문득 그의 이름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혜정(惠靜)·희숙(熙淑).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했던가. 여자로서 고요하고 평범한 삶은 아니었지만, 밝고 맑게, 소외된 사람과 이 사회와 나라에 베푸는 삶을 산 사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의 이름에 담은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라고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