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초대 미스코리아 출신 로비스트 姜貴熙 : 월간조선

“테제베 측 에이전트였지만 국익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1단계 개통식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초청받지 못해 서운하고 씁쓸합니다.”

경부고속철도 2단계 구간(대구-부산) 개통식이 있던 10월 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경부고속철도 전 구간 개통을 기념해 며칠 후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한 강귀희(姜貴熙)씨였다. 그는 “고속철도 건설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대역사가 완성돼 감회가 남다르지만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속상해서 한잔했다”고 털어놓았다. 취기가 살짝 올라 있었다.

초대 미스코리아로 유명한 강씨는 한국에 고속철도를 수출한 프랑스 알스톰사(社·테제베 제조사) 측 에이전트이자 로비스트였다. 그는 한국에서 고속철도 도입이 거론되던 1983년부터 10여 년 동안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했다. 독일, 프랑스, 일본이 자국의 고속열차를 한국에 판매하기 위해 치른 총성 없는 전쟁터, 그 한복판에 그가 있었다. 이체, 테제베, 신칸센을 자존심으로 내건 3국의 치열한 막후 경쟁에서 그는 프랑스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강씨는 “알스톰사로부터 ‘어느 쪽 에이전트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한국에 유리한 조건을 달아 테제베가 선정되도록 힘썼는데, 우리나라는 외국과 달리 로비스트에 대한 인식이 나빠 그 부분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익보다는 국익을 위해 노력한 부분을 인정해 주지 않아 서운하다는 얘기였다. 다수의 철도 전문가들로부터 “차량 선정 당시 알스톰사는 기술이전과 차관 부분에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들어 온 터라 로비스트로서 그의 활약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11월 초, 남산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강씨를 만났다. 방송인 이다도시의 억양을 연상케 하는 밝고 활달한 목소리와 화사한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 며칠 전 수화기를 타고 전해지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맛있고 특별한 점심을 먹자”며 양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하더니 가방에서 보르도산(産) 와인을 한 병 꺼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상대까지 기분 좋게 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UAE 원전 입찰에 참여

초대 미스코리아로 당선된 직후의 모습.

―건강해 보이네요.

“요즘 룸바를 배우고 있어요. 전에는 자이브를 했지요. 젊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일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그게 제 건강 비결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도 일을 한다는 건 여전히 로비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럼요.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입찰에도 참여했는걸요. 프랑스의 원자력 전문 회사인 아레바(AREVA)가 한국과의 공동 수주를 원해 제가 가교 역할을 하려 뛰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한국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는 점에서 좀 아쉬워요.”

아레바는 세계 우라늄 광산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세계 최대 원자력 전문 기업. 세계 최고의 핵폐기물 처리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강씨는 이 회사 CEO인 안 로베르종(Anne Lauvergeon)과의 오랜 인연 때문에 일을 도모하게 됐다고 한다.

“안 로베르종은 미테랑 대통령 당시 경제수석을 지낸, 아주 똑똑한 여자예요. 빌 게이츠를 능가하는 부자이기도 하고요. 2006년 <포브스>가 전 세계 여성 중 가장 영향력 있는 8인 중 하나로 꼽았죠. 유럽에서는 두 번째, 프랑스에서는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여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스타 CEO죠. 저와는 1990년대부터 알고 지냈고, 고속철도 때문에 친해졌습니다. 경부고속철도 차량 입찰 당시 크레송(Edith Cresson) 수상과 함께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지요.”

프랑스의 아레바 그룹과 한국은 사전 조율이 안돼 UAE 원전 입찰 당시 경쟁자가 됐다. 강씨에 따르면 “규모나 기술면에서 아레바가 90% 수주를 자신했는데, 막판 가격경쟁에서 한국에 밀려 패배했다”고 말했다.

―한국과 프랑스가 파트너십으로 윈윈할 수 있는 조건이란 무엇이었죠.

“아레바는 원자력 부분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기술과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UAE 원전을 수주할 경우 건설 하청을 한국에 주기로 했고, 핵폐기물 처리기술도 전수시켜 주기로 약속했었죠. 1조3000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원자력 시장을 공략할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는데, UAE 원전 입찰경쟁으로 관계가 서먹해져서 아쉬워요.”

―사전조율에 실패한 까닭은 뭔가요.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한국이 수주했으니 성공적으로 건설해 더 큰 원전을 수주하는 좋은 기반이 되었으면 합니다.”

강씨는 국제 로비스트 외에 “자동차 매연감소 부품 및 유통회사도 운영하고 있다”며 “녹색산업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 마지막 남은 꿈”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좀 편안하게 쉬어도 되지 않습니까.

“일하지 않으면 저는 폭삭 늙어 버릴 거예요. 뭔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내 삶의 에너지거든요. 솟구치는 그 의욕 때문에 삶이 평탄치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삶

1990년 파리 남부 베르사유궁 근처 생농에 있던 자택에서 신현확 전 총리(왼쪽에서 세 번째)와 함께.

강씨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딸로 자란 그는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열린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출전해 1등상을 받았다. 숙명여대 영문과 2학년에 재학 중일 때였다.

―미스코리아 대회에는 어떻게 출전하게 된 겁니까.

“경북여고 선배 언니가 출전한다고 해서 구경 갔다가 대회 관계자에게 픽업됐어요. 심사위원 한 분이 현장에서 저를 보고 ‘진짜 미인이 여기 있었구먼’ 하며 예심을 통과시켜 얼떨결에 본선 무대에 오르게 됐죠. 미인대회는 기생들이나 나가는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라 대학 총장님의 허락을 받고 출전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 미인으로 뽑히면서 굴곡진 그의 인생이 시작됐다. 대학 교무과에는 그를 부인이나 애첩으로 삼으려는 고관대작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고운 외모와 달리 당찬 성격의 그는 권력과 돈으로 자신을 매수하려는 자들을 비웃듯 가난한 상이군인과 결혼했다.

―좋은 혼처를 두고 상이군인을 택했으니 어머님 반대가 심했겠는데요.

“대단하셨죠. 사흘 밤낮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우셨습니다. 어머니 설득하느라 저도 쓰러질 지경이었죠. ‘사람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마시라, 한번 아파 본 사람만이 병든 사람 속을 더 잘 아는 법’이라며 탄식하고 애원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그러고도 잘살지 못했으니 어머니께 죄인이죠.”

―남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어머니가 대구에서 하숙집을 했어요. 그 집에 최씨 아주머니라는 분이 살았는데, 이분이 상이군인회에 물건을 납품하고 있었어요. 하루는 이 아주머니가 제 방으로 찾아와 몹시 곤혹스런 표정으로 상이군인회에 신동욱이라는 젊은이가 있는데 날마다 저를 소개해 달라고 조른다는 거였습니다. 거절하면 아주머니 밥줄이 끊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 번 만나 주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나갔다가 첫눈에 반했어요. 뭔가 결핍이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동정심이었습니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씐 사랑의 콩깍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의 여자 문제와 폭언으로 초반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결혼 생활은 아이 둘을 낳고 파경을 맞았다.

―대학 재학 중에 결혼을 한 건가요.

“아니오, 졸업한 후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월반을 한 데다 고등학교 재학 중 검정고시로 대입시험을 치러 남들보다 졸업이 빨랐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파리 한식당 열라고 제의

유럽 최초의 한식당 ‘르 서울’은 파리 엘리제궁 앞에 있었다.

이혼 후 강씨는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미군을 상대로 선물 포장 대행업을 한 것이 비즈니스의 시작이었다.

―텔레타이프(통신기기) 수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들었는데, 기술이 있었습니까.

“결혼 후 살림만 한 여자에게 그런 고난이도의 기술이 있을 리 없었죠. 기술이야 기술자를 데려다 쓰면 해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물 포장 대행과 텔레타이프 수리 사업으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다. 3년 만에 금의환향한 그는 세계여행을 떠났고, 프랑스 파리에 매료됐다.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할 요량으로 이번에는 프랑스로 날아가 파리에 있는 패션 디자인 스쿨 세 갈리라빈(에스모드 전신)에 입학했다. 1971년,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프레타 포르테 무대에 함께 섰던 한국 패션계 거두 노라노 여사(왼쪽에서 세 번째)와 함께.

―갑자기 패션 공부를 하게 된 동기가 있나요.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있던 분야라 베트남에서 돌아와 국제복장학원에 다녔어요. 그리고 그곳 원장님의 권유로 프랑스 유학을 가게 된 것이고요.”

프랑스어에 서툰 늦깎이 유학생은 2년 만에 세 갈리라빈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당시 이 소식은 국내에도 전해져 중앙 일간지에 소개됐다. 패션 유학생이 드문 시절인 데다 초대 미스코리아라는 타이틀이 있어서 고국에 양장점을 내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세 갈리라빈 졸업 후 운 좋게 한국 패션계의 선구자인 노라노 여사와 함께 프레타 포르테 무대까지 올라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강씨는 이후 패션이 아니라 요식업에 뛰어들었다. 파리 엘리제궁 앞에 유럽 최초의 한식당 ‘르 서울’을 오픈한 것이다. 엘리제궁 앞은 명품 숍들이 즐비해 임차료 수준이 최고인 곳이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화려하게 디자이너로 데뷔한 셈인데, 왜 패션 사업을 하지 않고 식당을 하게 되었습니까.

“프레타 포르테 이후 노라노 여사께서는 한국으로 돌아오라 했지만 세계무대에서 일하고 싶어 파리에 남았습니다. 유명 부티크에 디자이너로 들어갈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정보부에서 한식당을 내려고 하니 운영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해 왔어요. 당시 파리에는 한국 사람보다 북한 사람의 출입이 잦았는데, 북한이 식당까지 내려고 하니 우리 쪽에서 선수를 치려는 것이었어요. 정보부 고용원이 되기 싫어 내 힘으로 식당을 운영하겠다며 목이 좋은 곳을 골라 오픈하게 됐죠. 좀 무리했습니다.”

중장비 중개로 로비스트 활동 시작

이제는 세계 최대 원자력 전문 기업 아레바의 총수가 된 안 로베르종과 아레바 본사에서.

파리의 유일한 한식당 ‘르 서울’은 손님이 없어 초기에는 고전했다. 대한항공이 파리 직항노선을 개설하고, 중동에 건설 붐이 일면서 부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지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부터는 자리가 늘 만원이었다. 엘리제궁 앞에 있다 보니 동양의 특별한 맛을 보기 위해 프랑스 정·관계 인사들도 제법 드나들었다. 미테랑 대통령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인맥이 되었다. 그는 “당시 ‘르 서울’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민간 외교의 장(場)이었다”고 말했다.

“‘르 서울’은 프랑스 교포들의 향수를 달래 주는 공간이자 한불(韓佛) 정치·문화·사업 교류를 위한 외교 1번지였어요. 업무차 파리에 오는 한국인이라면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었죠.”

로비스트로서의 삶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싹텄다. 강씨는 “대사관 직원이 포클레인사(社)에 수출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던 미스터 용을 제게 소개한 것이 로비스트의 길을 가게 된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미스터 용은 프랑스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한국 사람이었어요. 용씨는 대사관 직원으로부터 나를 소개받자 느닷없이 ‘한국의 건설 회사 중에 아는 분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중동건설 붐이 일면서 ‘식당에 다녀간 분들이 꽤 있다’고 했더니 긴 한숨을 쉬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날 미스터 용이 강씨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대충 이랬다.

그 무렵 장비 제조사인 포클레인사는 한국 기업 때문에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한국 기업들이 구형(舊形) 장비를 고가(高價)에 구매해 가고 있어서였다. 한국 기업들은 장비에 대한 사전 지식은 물론 기술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신형 장비를 권장하는데도 굳이 구형을 찾았다. 포클레인사 입장에서는 고물을 좋은 가격에 처분할 수 있으니 호재였지만, 한국 기업들로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국 피가 흐르는 용씨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강씨 역시 한국 기업이 현지 시세를 몰라 손해를 보고 있다니 걱정이었다. 미스터 용은 그 자리에서 그에게 “한국 기업들을 상대로 하는 중장비 무역 회사를 하나 차리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한국 기업들은 좋은 물건을 싸게 사서 좋고, 우리는 중간에서 연결해 주고 차익을 챙길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중장비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또 남에게 물건을 파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강씨지만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곧 파리의 번화가인 샹젤리제 거리 뒤편에 중장비 비즈니스를 위한 사무실을 냈다. 그는 “돈을 벌겠다는 욕심보다 우리 기업들이 어렵게 벌어들인 달러를 본의 아니게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결심한 것”이라고 말했다.

―식당과 중장비 중개무역을 병행한 건가요.

“한동안은 병행하느라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뛰어다녔어요. 식당 일 보랴, 장비회사 운영하랴 정신이 없었죠. 밤에는 생소한 중장비에 대해 공부하느라 뜬눈으로 보내기 일쑤였어요.”

미스코리아가 어쩌다 이런 일까지…

파리 생농의 집으로 놀러온 신성일·엄앵란 부부와 골프를 즐기던 모습.

그는 르노사(社), 포클레인사, 포탄사 등 프랑스 3대 장비 회사의 제품을 동아건설, 현대건설, 대우건설 등에 소개했다. 사업 초기 무작정 건설사 장비 수입 담당관을 찾아다닐 때는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도 많이 당했다. 그가 초대 미스코리아라는 것을 알아보고 “어쩌다 이런 일까지 하게 됐느냐”며 혀를 차는 이도 있었다.

―식당 사장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자존심 상할 일이 많았겠습니다.

“1970년대 한국 기업들은 프랑스보다 독일 장비에 익숙해 있었어요. 제가 프랑스 장비를 소개하면 대부분의 구매 담당자들은 ‘뭘 믿고 사라는 거냐’는 투였죠. 모멸감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귀부인도 아니고, 르 서울의 주인도 아니며, 물건이나 팔려고 온 세일즈 우먼은 더 더욱 아니다. 나는 당당한 사업가다’를 외치며 스스로를 다독여 세우곤 했죠.”

건설현장을 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열사의 나라까지 탐방하는 노력 끝에 르노사의 28톤급 트럭 68대를 동아건설에 납품하는 첫 거래를 성사시켰다. 이후 국내 굴지의 건설기업들이 그를 통해 프랑스산 장비를 구입했다.

장비 중개업자로서 탄탄한 위치를 구축한 1970년대 말에는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을 찾아가 “이젠 장비를 구입만 하지 말고 직접 생산해 보라”고 건의했다. 프랑스 장비회사와의 기술제휴를 권장한 것이다.

―당시 정 회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깜짝 놀라셨죠.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봉제나 가발, 섬유 등 노동집약적 산업만 존재하고 있었어요. 최첨단 중장비 개발이나 기술제휴는 감히 꿈조차 꾸기 어려울 정도로 낙후돼 있었습니다.”

타고난 사업가이자 승부사인 정 회장은 순간적으로 놀라면서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판단했다. 반신반의하면서 강씨에게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하도록 맡겼다. 제휴 상대는 타워크레인을 제조하는 포탄사였다.

―포탄사 측에서도 기술제휴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한 건가요.

“수십 년 동안 연구해 개발한 기술을 돈 몇 푼에 넘겨주는 멍청한 기업은 없죠. 그런 기업을 설득하는 게 로비스트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운 좋게도 때마침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 주택건설 프로젝트에 필요한 타워크레인 86대를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포탄사 측에 이 엄청난 물량을 구매한다는 조건을 걸어 그중 일부만이라도 기술제휴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졸랐죠.”

강씨는 양국이 윈윈할 수 있는 갖가지 전략을 제시하며 끈질기게 매달렸다. 결국 86대의 타워크레인 중에서 18대만 완성품으로 사고, 나머지는 기술제휴를 받아 한국에서 직접 제작하기로 최종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 현대(현대중공업)가 세계적인 중장비 제조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은 이때 성사된 기술제휴 덕분”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온 이순자 여사에게 루비 달린 진주목걸이 선물

알스톰사 임직원과 함께 생농 집을 찾은 캬리오 한국 지사장 부부와 함께. 맨 왼쪽이 호기춘씨다.

“마담 강, 한국이 고속철도를 유치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해요?”

1983년 봄, 알스톰사(社)의 자크 시잔 사장이 ‘르 서울’에 찾아와 강씨에게 물었다. 르노사의 해외 담당 헨디케 사장으로부터 강씨를 소개받은 직후였다. 그 무렵 강씨는 르노사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고속철도를 유치할 의향이 있다는 정보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던 시기라 그는 시잔 사장의 방문 목적을 금방 알아차렸다. 시잔은 강씨를 통해 한국 고속철도 정보를 얻고 싶었던 것. 강씨와 테제베의 인연 역시 ‘르 서울’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 무렵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유럽 7개국 순방길에 올라 파리에 들른 것으로 압니다.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저는 숙소에 조그만 봉투를 하나씩 돌렸습니다. 국가 발전을 위해 1차 공산품 수출 일변도에서 벗어나 중공업으로 눈을 돌려야 하고, 한국의 우수한 인력과 프랑스의 첨단기술을 접목시켜 세계로 진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류와 코냑 한 병이었지요.”

―당시 영부인이었던 이순자(李順子) 여사에게 최고급 보석을 선물했다면서요.

“버마산 루비가 달린 9mm짜리 최고급 진주 목걸이였지요. 세트로 다이아몬드가 박힌 루비 반지를 추가해 선물했습니다. 이 여사께서는 처음에 부담스러워하더니 어떤 청탁이나 조건 때문이 아님을 확인하고 기분 좋게 받으시더군요.”

강씨는 이 사실을 1998년에 출간한 자서전에 기술했다가 이순자 여사 측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그는 당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선물한 적이 없는 것으로 둘러댔으나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전 대통령 부부가 다녀간 후 얼마 안 있어 손수익 교통부 장관이 그를 찾아왔다. 대통령의 지시임을 전제로 한 그의 주된 관심은 고속철도였다. 그는 여러 외교채널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알스톰사의 시잔 사장은 그와 정식으로 에이전트 계약을 하자고 제안했다.

―계약조건은 어땠습니까.

“상당히 까다로웠습니다. 2년마다 갱신하도록 되어 있었고, 성과가 별로 없으면 2년 후 계약이 자동 소멸되도록 돼 있었죠. 일이 성사될 경우 에이전트가 받는 수수료는 수주비용의 5%였습니다. 이 수수료에는 3% 이상의 정치자금과 경비까지 포함돼 있었죠.”

김옥숙 여사, “언니 염려하지 말아요”

고속철도 입찰 당시 크레송 수상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자크 시잔 알스톰 사장과 안 로베르종 수석.

정권이 노태우(盧泰愚) 대통령으로 교체되면서 한국 고속철도 건설은 급물살을 탔다. 고속철도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는 등 구체화된 것이다. 때마침 김창근 교통부 장관이 프랑스를 방문하자 강씨는 이를 놓치지 않고 알스톰사의 회장과 만나도록 주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테제베 외에 다른 경쟁 고속철도는 없었다고 한다. 속도나 기술면에서 이체나 신칸센은 테제베를 따라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테제베는 350km를 시험 가동하고 있는 데다 스페인, 영국, 벨기에, 미국 텍사스 등에서 12년 무사고로 운행 중이었다. 한마디로 기술력이 세계적으로 검증된 고속철도였다.

―당시 알스톰사는 한국 고속철도 차량 수주에 사활을 걸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알스톰사는 내부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위기였어요. 한국 고속철도 건을 따내지 못하면 매각되거나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지요. 이 때문에 테제베 한국 수출 총사령탑을 미테랑 대통령이 직접 맡았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면 아래 있던 이체와 신칸센이 드러내 놓고 수주경쟁에 뛰어들었다. 강씨는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입찰에 유리한 정보를 부지런히 수집했다. 서울에 오면 명동에 있는 한 특급호텔에 머물렀는데,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통화 내역까지 정보부가 감시하고 감청했다. 강씨는 “과일 이름을 암호화해 통화했다”고 밝혔다.

―1991년부터 시작된 입찰이 다섯 번이나 유찰된 것으로 압니다.

“1차 입찰 결과 테제베 점수가 가장 높았는데 유찰이 됐어요. 그 뒤로도 4번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 유찰이 됐지요. 세계 공개입찰 역사상 5회 유찰은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정·관계의 개입이 있었던 것인가요.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온 포항제철의 박태준(朴泰俊) 회장, 김윤환(金潤煥) 의원, 김종필(金鍾泌) 의원은 신칸센 편을 들었고, 북방외교를 강조한 박철언(朴哲彦) 장관, 독일과 잠수함 사업을 추진 중이던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 회장 등은 이체 편을 들었지요. 테제베만 지원군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강씨는 불안한 마음에 정치권에 줄을 대려 경북여고 후배이자 당시 영부인이었던 김옥숙(金玉淑) 여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김 여사에게 테제베의 우수성과 안정성, 견고함 등을 자신있게 설명한 후 대통령께서 심사숙고해 주기를 간절히 부탁했다. 김 여사는 “언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김종인 수석도 테제베가 아주 좋다고 보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은 순리대로 판가름이 나겠지요”라고 말했다. 강씨는 “그 마음이 고마워 일이 성사되면 3%의 정치자금(약 400억원)을 주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강씨의 이야기다.

“노태우 정권 때 낙찰이 되었다면 그 돈은 김옥숙 여사에게 갔을 거예요. 그런데 최종 낙찰 권한이 문민정부로 넘어가면서 없던 일이 되었지요.”

―그럼, 정치권에 로비할 자금으로 책정한 그 돈은 끝내 누구에게 갔습니까.

“정권교체 후 김영삼 대통령에게 주려고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자신에게 줄 돈이 있으면 가격을 더 내리라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었죠. 결국 그 돈은 누구에게도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알스톰사를 설득해 기술이전을 좀 더 많이 하고, 차관 이율을 더욱 낮추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낙찰을 받았습니다. 애초에 제가 받기로 한 커미션도 2%에서 1%로 깎았고 나중에는 아예 받지 않겠다고 했지요.”

테제베 낙찰 후 받은 커미션 100억원 넘어

25억 달러의 입찰가격을 고집한 알스톰사는 마지막 6차 입찰에서 3억 달러를 인하해 최종 22억 달러에 낙찰받았다.

―알스톰사를 어떻게 설득한 건가요.

“한국을 발판으로 거대한 중국 시장을 잡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좀 손해를 보더라도 경부고속철도 건을 받드시 수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중국으로 날아가 시장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도 했지요.”

―이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커미션은 140만 달러 정도 받았다고 밝혔는데 정말 그게 다였습니까.

“커미션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가격을 낮춘 상황이라 저로서는 그동안 들어간 경비 외에 더 이상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가격을 낮춘 것 때문에 낙찰을 받은 것이어서 알스톰사 측이 나중에 수주액의 1%를 커미션으로 챙겨 주어 받았습니다. 우리 돈으로 100억원이 넘는 돈이었죠.”

―그런데 2000년 초 알스톰사가 경부고속철도 차량 선정 과정에 또 다른 로비스트를 고용해 불법 로비를 했다는 의혹에 휩싸였습니다.

“당시에는 저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알스톰사 한국 지사장인 캬리오와 부인 호기춘씨가 제가 포기한 커미션 1%를 챙기기 위해 꾸민 일이더군요. 캬리오 부부는 알고 지낸 분들이지만 로비스트로 활동했다는 재미교포 최만석씨는 전혀 안면이 없는 분이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나중에 로비스트 경험이 전혀 없는 인물로 밝혀졌죠?”

이들은 문민정부 시절 정·관계에 불법 로비를 한 대가로 알스톰사로부터 129만 달러(당시 한화 110억원)를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 중 호씨는 검찰에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고 보석으로 풀려났고, 최씨는 미국으로 도주해 수배를 받던 중 암 투병으로 사망했다. 알스톰 한국 지사장이었던 캬리오는 파면당했다.

강씨는 “나는 합법적인 로비를 했기 때문에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알스톰사의 한국 고속철도 수주에 10년의 세월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범법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국익을 위해 저의 모든 이익을 포기해 가며 일했지요. 한국 고속철도 기술이 해외에 수출할 정도로 발전하게 되기까지는 제가 기여한 부분도 있다고 자부합니다.”

연하의 남자 만나 연애하고 싶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강씨는 1995년 25년 간의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영구 귀국했다. 이후 자연식품과 자연화장품을 판매하는 다단계 회사를 차리는 등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사기 사업가에게 휘말려 수십억 원을 갈취당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 힘들게 모은 재산을 털어먹었다”고 말했다. 동물적인 사업감각과 저돌적인 추진력 뒤에 뜻밖에도 아이같이 여린 구석이 숨어 있었다.

―이혼 이후 지금껏 혼자인 것으로 압니다. 왜 재혼을 하지 않았습니까.

“겉으로 보기에 제가 고집이 세고 강해 보이니까 남자들이 접근을 안 해요.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인데 말이죠. 농담이고, 솔직히 일 때문에 남자를 만날 겨를이 없었어요. 두 아이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남자를 멀리해 온 부분도 있고요.”

남편과의 이혼 당시 시댁에 두고 온 두 아이는 어느덧 중년의 사업가로 성장했다. 파리에 유학을 오면서 함께 생활하게 된 장녀 신은주씨는 금융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신씨는 ‘부모’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 출신의 사업가 유주용씨와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다.

―린다 김 사건 때문인지 여성 로비스트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이 많습니다.

“그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로비스트가 아닙니다. 로비스트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거든요. 그분을 여성 로비스트의 표본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공인된 미인이었던 만큼 유혹도 많았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르 서울’을 운영할 때 오신 정부 고위층 인사 중 따로 식사를 하자며 데이트 신청을 하는 분이 더러 있기는 했습니다만, 바빠서 응대해 줄 여력이 없었어요. 또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이신 박영옥(朴榮玉) 여사께서 해 주신 충고도 있고 해서 몸가짐에 나름 신경을 쓰기도 했습니다.”

―박영옥 여사가 어떤 충고를 했습니까.

“‘사내라는 것들은 차 마시자 캐서 마시면 손 잡았다 카고, 손 한 번 잡아 보자 캐서 잡히주면 입 맞추었다 카고, 입 맞추자 캐서 입술 내밀어 주면 잤다고 떠벌리는 인간들’이라고 하데요. 그러니 한국 사내들한테는 추호도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며 연애를 하고 싶거든 차라리 불란서 남자랑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얼마 후 김종필 전 총리가 식당을 찾았다. 그러곤 대사관 직원을 시켜 강씨와 밖에서 따로 만나 식사를 하고 싶다고 전해 왔다. 그는 부드럽게 거절했고, 이 사실이 박영옥 여사에게 전해졌는지 전화로 “강귀희 니 잘 버텼는갑드라, 잘했데이”하고 칭찬해 주었다고 한다.

―여전히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데, 연애하고 싶은 마음 없습니까.

“예전에는 없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간절해요. 제가 정신 연령이 좀 어리니까 15~20세 쯤 어린 연하의 남자면 좋겠어요. 이젠 아이들도 같이 늙어 가는 처지니까 주책이라고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기자에게 “좋은 사람 만나야 하니 제발 나이는 밝히지 말아 달라”며 와인 한 병을 선물했다.⊙

사진 : 서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