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인물발굴] 오사카 민족학교 백두학원 창립자 曺圭訓 : 월간조선

오사카시 스미요시쿠 오리 오노 2-3-13번지(大阪市住吉?遠里小野2-3-13). ‘백두학원 건국학교’(白頭學院建國學校)에서는 재일동포들이 ‘나는 한국인’이란 사실을 배운다. 백두학원은 한국의 국정(國定)교과서를 공부할 수 있는, 일본에서 단 4개뿐인 민족학교 가운데 하나다.

백두학원은 한국에서는 생소하지만, 일본에선 꽤 유명한 학교다. 일본 정부가 정규학교 법인으로 인가를 내준 최초의 민족학교, 197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이른바 ‘중립(中立) 교육’을 고집했다. 일본과 재일(在日)동포 사회의 리더들을 다수 배출한 민족교육의 명문(名門)으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백두학원 창립자는 제주도 출신의 재일동포 1세 조규훈(曺圭訓·1906~ 2000년) 선생이다. 그런데 개교 64년, 1만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한 이 학교 안에서 이젠 조 선생을 기억하는 이를 찾을 수 없다. 1회 졸업생조차 이름은 알고 있지만 얼굴은 모른다고 했다. 선생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교사와 지인(知人)들은 거의 사망했거나 고령(高齡)으로 인해 인터뷰가 불가능했다. 조 선생의 이력을 보니 민단의 제7~8대 중앙단장을 지냈다는데, 팔순(八旬)을 넘긴 민단 원로들마저 “무슨 일 하던 사람이냐”고 되묻는다.

“민족운동하는 아버지 때문에 가족들 희생”(장남)

설립 초기 백두학원 학생들이 오사카 전철 스미모토초역 플랫폼을 나와 등교하고 있다.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던 재일동포 고인(故人)을 사후(死後) 10년이 지나 취재하는 일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히는 듯했다. 증언자 한 명 찾기도 벅찼다. 지지부진하던 취재 도중 2009년 11월 간사이코긴(關西興銀)의 이정림(李正林·70) 전(前) 이사장이 ‘조규훈 현창(顯彰)준비회’를 조직했다는 제보를 접했다. 간사이코긴은 경북 경산 출신의 재일동포 1세 이희건(李熙健)씨가 오사카에서 창립한 민족금융사로 1982년 한국에서 신한은행을 세운 모체(母體)다. 이정림 전 이사장의 말이다.

“그저 오사카에 민족학교를 세운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여러 경로로 조사해 보니 정말이지 훌륭한 사회봉사자이자 애국애족자(愛國愛族者)였습니다. 지금까지 왜 이분의 공적이 묻혀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조규훈.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사후 10년에서야 그에게 훈장을 주자는 모임이 결성된 것일까. 일본에서 가장 오랜 전통의 전일제(全日制) 민족학교를 세운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학교 졸업생들조차 그의 존재를 생소해하며, 두 차례 단장을 지냈는데도 민단의 원로들마저 ‘모르는 사람’으로,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고, 이 사실 자체만으로 보자면 뭔가 결격이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의심도 들었다.

2010년 4월 7일 마침내 생전 조규훈 선생과 동고동락(同苦同樂)했던 증언자들을 만나는 기회가 생겼다. 이날 백두학원 이사장 이·취임식에 참가하기 위해 조 선생의 장남 성현(成鉉·72)씨와 4남 명현(明鉉·61)씨가 각각 사이타마(埼玉)와 도쿄(東京)에서 오사카(大阪)로 온 것이다. 그날 저녁 두 아들과 더불어 과거 고베(神戶)에서 조 선생의 부하 직원으로 있었던 황치준(黃致俊·84)씨를 만날 수 있었다. 두 아들은 부친에 대해 부정적인 말부터 꺼냈다.

“민족운동을 하는 아버지 때문에 가족들이 희생됐습니다. 입만 떼면 ‘민족 민족’이라 말씀하시는데 그 민족 소리 정말이지 지긋지긋했습니다.”(명현씨)

“사업이 한창 번창할 때 어머니가 스커트 한 벌 사 달라니까 ‘왜 그런 사치를 부리느냐’고 타박하시던 분이 우리 아버지였어요. 나중에 사업이 망하고 나서는 ‘거봐라 그때 스커트 못 입어 봤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니까 지금 그게 좋은 줄도 모르잖니’, 이렇게 농담을 하시는데 결코 웃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성현씨)

조규훈 선생이 생전에 구술(口述)로 남긴 A4용지 6장 분량의 회고담과 아들들의 증언을 토대로 선생의 일생을 요약하면 이렇다.

민단 단장 취임 때 ‘재계 1인자의 데뷔’로 기술

조규훈 선생이 자신의 회사 하리마산업에 고용한 한국인들의 일하는 모습. 조 선생 회사의 직원들은 세무와 기술자를 제외한 대부분이 일제시대 징용자 출신의 한국인들이었다.

<1906년 12월 16일 제주도 조천읍 신촌리 출생, 어린 시절 교육자였던 아버지는 독립운동 하겠다며 집 나간 뒤 실종, 곧이어 어머니는 병사(病死), 친척집을 전전하다 1923년 홀몸으로 일본 고베(神戶)로 건너와 고무공장에 취직, 22세 때 사업자금 5000엔으로 독립, 1941년 고무공장 인수 뒤 ‘하리마산업’(播磨産業) 창업, 1945년 9월 20일 한국인 징용자들을 모아 민족 사회사업단체 ‘백두동지회’ 결성, 1946년 3월 오사카(大阪)에 민족학교 ‘백두학원’ 창립, 1949년 1월 도쿄(東京) 주일한국대표부 설립 당시 1300만 엔 원조, 1949년 6월~1950년 3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7대·8대 중앙단장 역임…. 2000년 7월 18일 사이타마현 히다카시(埼玉懸日高市)에서 향년 94세로 사망.>

조 선생은 상당한 재력(財力)을 갖고 있던 사업가였다. <민단20년사>(1967년 재일민단 발간)는 1949년 제7대 중앙단장에 취임하는 그를 “재계 제1인자의 데뷔”라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당시 43세의 창창한 사업가였던 그는 효고현(兵庫縣)을 무대로 고무와 방적, 레코드, 제재소, 철공, 기계, 선박, 유리, 세탁 등 방대한 분야의 사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 또 사재(私財)를 털어 민족학교인 백두학원을 운영하고, 고베의 가와사키중공업 부속병원을 사들여 태평양전쟁 피해자 원호(援護)사업을 지원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열심이었다.

이력에서 보이듯 조 선생은 누구보다 화려한 청년기를 보낸 반면, 인생 후반 50년은 공란(空欄)으로 남겨져 있었다. 민단을 비롯한 재일동포사회의 공식무대에서 그의 활동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와 관련한 기록물은 본인이 1993년 9월 구술로 남긴 회고담과 1986년 11월 <통일일보>(統一日報)와의 인터뷰, 60여 년 전 백두학원을 찍은 낡은 필름 한 롤이 전부였다.

조규훈이란 이름이 재일동포와 일본 사회의 표면에 등장한 건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7월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일에서 비롯됐다. 그가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온 친척의 부탁을 거절하자 그 친척은 일본 당국에 “조규훈은 공산당원”이라고 밀고를 했다. 고베 헌병대에 불려갔지만 사흘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그때 헌병대장이 석방되는 조 선생을 붙들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나쓰야마(夏山·조규훈의 일본 명) 사장, 효고현에 20세 전후(前後)의 조선인 징용자(徵用者)들이 2000명쯤 있는데 연일 파업을 해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칼로 협박도 하고 본보기로 가해를 해 봐도 완강하게 버티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당신은 조선인 사업가 아니오? 당신이라면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 제발 부탁 좀 합시다.”(조 선생 회고담에서)

한국인 징용자들 불러 밥 대접

청년 시절 조규훈의 모습.

조 선생은 일제(日帝)시대 때 일본 본토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몇 안되는 한국인 중 하나였다. 조센진(朝鮮人)이라는 이유 때문에 정식으로 인가(認可)를 받고 한 건 아니었지만 1941년부터 고베 다카토리(鷹取)에서 수십 명의 동포들을 밑에 두고 고무공장을 경영했다. 또 효고현 서쪽에 있는 우네(有年)의 숲을 통째로 사서 벌목(伐木)사업까지 벌이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재일동포에게는 사업주 인가를 내주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그는 상당히 끈기가 있고 일본인 사회에서도 신용을 얻었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헌병대장이 말한 징용동포들은 가와사키제철소(川崎製鐵所)에서 일하고 있었다. 제철소를 찾아간 그는 징용동포들의 처참한 노동 실태를 목격했다. 스무 살 남짓의 청년들에게 배급되는 식량은 형편없이 적었고, 안전장치는커녕 변변한 작업복도 입지 못한 채 위험한 막노동터로 내몰리고 있었다. 징용동포들은 이런 불합리한 노동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 고용주는 완력으로 그들을 핍박하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고 있었다. 조 선생은 징용자 대표인 박구회(朴球會)씨를 만나 설득을 시도했다.

“전쟁 통이라 물자가 부족하니까 파업해 봐야 얻을 게 없지 않소. 애꿎게 우리 청년들만 더 다칩니다. 일이 끝나면 우리 공장으로 오시오. 다행히 내가 비축해 놓은 쌀이 있으니 저녁밥 정도는 줄 수 있소.”

이튿날부터 매일같이 조 선생의 다카토리 공장에는 징용동포들이 몰려들었다. 나중에는 집에까지 불러 밥을 먹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던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갑작스런 변화였다. 패전국 일본은 무(無)정부 상태를 방불케 하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일본의 주요도시와 기반시설들은 폭격을 맞은 그대로 방치돼 있었고, 사회질서는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의식주와 직결되는 경제생활은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물가와 실업률은 눈 뜨고 나면 올랐다. 굶는 일본인들이 속출하던 당시 일본에 아예 생활기반이 없던 200만명 이상의 재일동포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동포의 태반이 아사(餓死) 상태”(1949년 10월 15일 자 재일동포신문 <민주신문>)에 놓여 있었고, 갈 데 없어진 징용자들은 유랑하기 일쑤고 일부는 약탈을 일삼기까지 했다.

이런 비참한 동포들의 처지를 목격한 조 선생은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그는 해방 직후 벌목장이 있던 우네의 산속에 파묻혀 2주일 동안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회고담에서 그는 당시의 결심을 이렇게 술회했다.

일본 패전 후 오히려 사업 확장

백두동지회 회원들이 동지회를 결성한 뒤 태극기를 휘날리며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지금은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조국의 젊은 징용자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들은 지금 조국에 돌아가 봐야 할 일도 없고 혁명가나 정치가들의 앞잡이로 이용될 뿐이다. 일본은 패전했다고는 하나 기술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일본에 남아 기술을 익힌 다음 귀국해서 조국 재건의 최전선에서 뛰는 게 중요하다. 지금이야말로 젊은이들과 함께 조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때인 것이다.”

조 선생의 생각은 징용자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구상은 곧바로 실행으로 옮겨졌다. 결행일은 해방 후 첫 추석날이었던 9월 20일. 조 선생은 고베 마이코(神戶舞子) 자택에 60여명의 징용자 대표들을 초대했다.

그날 저녁 조 선생과 징용자들은 조국 부흥을 실천하는 모임을 만들기로 뜻을 모으고, ‘백두동지회’(白頭同志會)를 결성했다. 결의문에는 “조국의 산업과 문화건설을 위하여 선혈(鮮血)을 흘려 굳게 맹세한다”고 썼다. 모임의 이름 백두에는 동지들의 머리가 하얗게 샐 때까지 조국을 위해 살겠다는 뜻을 담았다. 동지회가 채택한 강령은 다음의 3가지였다.

<하나, 우리는 일치단결할 것을 맹세한다.

하나, 우리는 조국과 민족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하나, 우리는 조국 건설의 밑거름이 될 것을 맹세한다.>

당시 조 선생의 자택에는 가족을 포함해 70명 가량이 숙식을 하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재일본 한국인회관 겸 합숙소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바로 거기서 조국과 민족 부흥을 위한 애국단체인 백두동지회를 결성했고, 동지들은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그 뜻을 다짐했던 것이다.

조 선생은 우선 동지회원들을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들에 직원으로 채용했다. 독일인과 일본인 기술자 몇 명을 제외한 회사의 모든 직원은 한국인 징용자들이었다. 당시 하리마산업에 채용된 황치준(고베 거주)씨는 그때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저는 미성년근로봉사단에 응모해 일본에 왔습니다. 말이 좋아 봉사단이지 품삯도 없는 공짜 징용이었으니 완전히 속았던 셈입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모두들 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죠. 그때 징용자들 사이에서는 조규훈 선생을 찾아가면 일자리를 준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제가 속한 중대원 60명 가운데 일본에 남은 13명이 백두동지회에 가담했고, 저 역시 하리마고무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동지들은 1000명이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백두학원-건국학교 설립

조규훈 선생이 1946년 3월 오사카에서 설립한 민족학교 ‘건국여자고등학교’ 간판.

황치준씨에 따르면 동지회원들은 오후 3~4시까지는 공장에서 일하고 그 뒤에는 전문가와 함께 실습을 하며 기술을 익혔다.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고무 제품은 만드는 족족 팔려 나갔다. 한때 농사용 고무장화 가격이 교사의 1개월치 월급인 150엔까지 폭등했는데, 그마저도 없어서 못 팔았다고 한다. “해방 무렵 히로시마(廣島)에서 부산(釜山)까지 오는 연락선 뱃삯이 50엔이었다”(황칠복·黃七福 전 오사카민단단장·88)는 증언에 비춰 보면 당시 고무산업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조규훈 선생이 돈을 버는 목적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조국 부흥의 기반이 될 산업, 그 기본인 기술을 동포들에게 전수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자신의 생산공장에서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체계적인 기술을 전수하려면 공업학교나 기술훈련소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마침 백두학원의 초대 교장을 맡게 될 이경태(李慶泰·1911~1999)씨와의 만남이 이뤄진다. 당시 우네 벌목장의 관리인이었던 김진택(金鎭澤)씨가 자신의 처남인 이경태씨를 소개한 것이다. 오사카에 살고 있는 김씨의 아들 신기(信基·65)씨의 증언이다.

“해방 직전 외삼촌(이 선생) 일가는 공습으로 가족 넷을 잃고선 아버지가 관리책임을 맡고 있던 우네 숲속으로 피신을 왔다고 합니다. 해방 이후에도 그곳에 머물렀는데 아버지가 조규훈 선생에게 외삼촌을 소개했고, 그때 두 분이 학교 설립에 의기투합했던 것입니다.”

19살 때 도일한 이경태 교장선생은 간사이대학(關西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다음, 오사카 하쓰시바상고(初芝商高)의 교사로 교단에 선 경험이 있었다. 조 선생은 회고담에서 이 선생과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경태 교장선생과 만난 건 해방되던 해 10월 초순이었어요. 만나 보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이 선생과 우리 회사 고무기술자 독일인 힐(Hill) 씨가 조를 이루면 공업학교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그 자리에서 이 선생에게 ‘자금은 내가 댈 테니 당신은 교육을 맡아 조국을 위해 함께 힘써 보지 않겠소’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로부터 바로 학교 건물을 물색하기 시작했고 오사카 스미요시구(住吉區)에서 한 폐교(廢校)를 찾아낸다. 전기회사인 간사이배전(關西配電)이 직영하던 전기공업학교 터였다. 조금만 수리하면 당장에라도 학교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조 선생은 200만 엔의 사재를 내서 부지와 건물을 구입하고 낡은 시설들을 수리했다. 이 선생과 만난 지 6개월쯤 지난 1946년 3월 드디어 학교가 섰다. 건국공업학교(남자학교)와 건국고등여학교(여자학교), 바로 백두학원(白頭學院)이었다. 법인명은 모체였던 백두동지회의 이름을 땄고, 학교명은 ‘조국을 세우자’는 염원을 담아 건국학교(建國學校)라 명명했다. 교내 곳곳에는 “건국의 종소리에 힘을 다해 새로운 우리나라 굳게 세우세”라는 슬로건들이 내걸렸다.

‘조국 부흥의 주춧돌’이 건학이념

초기 백두학원 학생들의 수업 광경.

조 선생의 건학이념은 백두학원 창립 취지문의 ‘조국부흥의 주춧돌이 되자’는 문구가 증언하고 있다. 창립 취지문의 핵심 부분을 원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재건하는 우리나라를 민주적 평화적 문화국가로 건설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사회에 기여한 민족교육을 위하여 재일동포 자제(子弟)에게 필요한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의 설치야말로 급무(急務) 중의 급무임을 통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은 그 기초인 초·중·고(初中高)의 기초교육 기관이 없고서는 도저히 소기의 목적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견지에서 유지일동과 상의하여 본 법인을 설립하여 재일동포의 자녀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조국 문화건설의 목적 달성에 기여하려 한다.”

남녀 학교를 병설(竝設)한 것은 당시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경우였다, 이 학교 창립자인 조규훈과 이경태 선생의 진보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업학교 과정에 입학한 남학생들에게는 기술을 습득해서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독려했고, 일반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한 여학생들에게는 지덕(知德)을 겸비한 신(新)여성으로서 시대의 재원(才媛)이 되라는 목표를 부여했다.

교사들은 하리마산업의 기술자였던 독일인 힐 씨와 영국인 스투케 씨 등 서양인들과 일본의 유명대학을 나온 교사 경험자들을 채용했다. 배움의 터전인 목조 교사에 교실은 4칸, 실험실을 갖췄고 164평 규모의 운동장도 완비했다. 개교 첫해 교사 15명에 동포 학생 300여명이 들어왔다. 비록 아담한 규모의 출발이었지만 백두학원의 창립은 그 이후 재일동포들에게 불어닥친 민족교육의 파동을 생각하면 결코 작지 않은 첫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일본 내 한국인 집단거주 지역에는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민족학교들이 생겨났다. 재일동포 부모 입장에서 해방민족의 자녀를 패전국민인 일본 학교에 보내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또 일제시대 때 자신들이 겪은 수모를 떠올리면 자녀를 일본학교에 보낸다는 건 ‘일본인의 노예’로 만드는 짓을 자초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동포들은 거리가 멀지라도 어떻게든 한국인이 운영하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한국어강습소를 찾아 보내려 했다.

민족학교 폐교

그런데 1948년 재일동포 민족교육에 날벼락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 그해 1월 일본 문부성이 <조선인 설립학교의 취급에 대해>(朝鮮人設立學校の取扱いについて)라는 시책을 발표한 것이다. 요지는 모든 한국인 학생들은 일본 학교에 취학할 의무가 있으며, 민족학교는 3월 말까지 일본 교육법에 준한 사립(私立)학교 인가를 신청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시책을 따르는 민족학교는 전무(全無)하다시피했다. 급기야 일본 정부는 4월 1일을 기해 야마구치현(山口縣)을 시작으로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던 민족학교들에 대해 강제 폐쇄 조치를 내린다.

재일동포 민족학교에 대한 폐쇄조치는 일본 정부의 소수민족 차별 정책과 더불어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공산주의 세력 확산을 저지하겠다는 의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민족학교는 500여개 교에 학생수 5만명에 달했는데(1948년 4월 27일자 아사히신문), 대부분 조선인연맹(朝聯·현재의 조총련) 산하에 놓여 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탄생한 조련은 원래 이념을 초월한 범민족 재일동포 단체로 출발했으나, 이 무렵엔 공산주의자들이 조직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조련에서 탈퇴한 뒤 민단으로 옮아가 있었다.

당시 재일동포 사회의 판도는 공산주의 세력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다만 이때는 아직 한반도에 나라가 세워지기 전이라 ‘한국과 북조선’과 같은 분리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한국은 ‘조선’이란 용어로 통칭되고 있었다. 훗날 조련은 6·25동란을 거친 뒤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으로 개명, 북한 정권을 무조건 지지하는 친북(親北)단체로 변질됐다. 그 이후부터 일본에서 조선은 북한을 지칭하는 용어로 바뀐다.

민족학교로는 유일하게 문부성 정식 인가 받아

현재의 백두학원 모습. 중립교육을 표방하며 세워진 이 학교 교정에 태극기가 게양된 건 1977년 8·15기념식 때부터로, 재일동포 사회의 남북 체제경쟁에서 남쪽이 승리했음을 보여준다.

조련을 계승한 조총련의 탄생은 수백 개에 달하던 재일동포 민족학교가 조총련 산하로 자동 귀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도 일본 내에 조총련계 학교는 69개 교에 달하는 한편, 한국계 민족학교는 4개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한국계 민족학교가 북한계에 비해 수적인 열세를 띠게 된 건 해방 직후 재일동포 사회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민주진영이 공산진영에 압도된 결과에 기인한다.

여하튼 1948년 4월 일본 정부가 취한 교육파동으로 그 많던 민족학교가 일거에 폐쇄됐다. 일본 정부는 훗날 조총련계 학교들에 대해 자체 커리큘럼의 교육을 허가했으나, 끝내 ‘정규학교’ 인가는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백두학원이 민족학교로는 유일하게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정규학교’ 인가를 받아냈다. 언뜻 ‘얼마나 친일적(親日的)이었기에?’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과정을 뜯어보면 창립자가 애초부터 일본에서 법적으로 인정받는 학교를 만들려 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조 선생은 “어느 사회에 속해 있든 신원 확립은 기본”이란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일본 영토에 세운 학교니까 일본인 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백두학원의 창립준비 단계에서 오사카부(府)에 학교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오사카부는 전례(前例)가 없다는 핑계로 자격 심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신청서를 접수하고 3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때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이경태 교장 선생이 꾀를 냈다고 한다. 오사카부 교육청을 찾아가 교육법에 ‘일본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는 조문 하나만 삽입하면 되지 않겠냐고 줄기차게 주장했고, 이와 동시에 조규훈 선생은 법인 이사장의 명의로 일본 문부성에 “(백두학원은 학교)자격에 부합하는 시설을 갖추겠다”는 취지의 문건을 제출했다. 백두학원은 이러한 창립자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민족학교들이 전부 폐쇄되는 혼란 속에서 1949년 5월 유일하게 일본 정부가 인정한 정규학교, 외국인이 경영하는 학교로는 최초로 1조학교(1條學校·일본 교육법 제1조의 요건에 부합하는 학교라는 의미)의 자격을 얻었다.

조총련 협박 뿌리치고 민족학교 지켜 내

백두학원을 특징짓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 학교가 건학 때부터 ‘중립 교육’을 표방했다는 것이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대한민국, 북한 정권 어느 쪽도 편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일부 재일동포들은 “왜 빨갱이 학교를 취재하려 하느냐?” “간에 붙고 쓸개에 붙는 회색분자들”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백두학원 창립자인 조규훈 선생에 대해서도 “공산 좌파(左派)일 것”이라 미리 단정 짓는 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혼란기를 경험한 재일동포 1세들, 특히 백두학원을 잘 아는 이들의 증언은 달랐다. 민단 내에서도 열혈 반공(反共)주의자로 유명한 황칠복 전 오사카민단단장은 “조 선생은 조총련의 끈질긴 구애를 물리치면서 중립을 고수했던 분”이라며 “그 시기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조국의 분단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립을 선언한 것만으로 공산주의자라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백두동지회 회원 황치준씨도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증언했다.

“동지회 사무실로 조선인연맹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습니다. 조 선생에게 백두학원을 자기네 산하로 들어오도록 요구했던 것이죠. 1948년 민족학교 폐쇄령 이후에는 안 들어오면 선생을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했습니다. 동지회원들이 조 선생 경호를 맡을 정도로 심한 협박을 받았지만, 끝내 거부하셨습니다.”

남북한의 극한 이데올로기 대결 양상에서 어느 한 편을 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건 상당히 힘든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조국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조만간 통일될 것이라는 해방 직후 한국인들의 보편적인 심정을 대변하는 자세였던 것이다. 조 선생의 중립 신조는 압도적이던 친북 분위기의 재일동포 사회에서 대한민국과의 연결고리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작용은 컸다. 중립 표방 이후 외부에서의 압박과 회유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학교 안에서는 학생들끼리 또 교사들끼리 서로 반목하며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7기 졸업생인 김영재(金英宰·76) 재일대한체육회 고문은 초창기 백두학원 풍경을 “대한민국파와 북한파로 나뉘어 매일같이 싸웠다. 학교가 아니라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묘사했다.

한국 정부 지원으로 폐교 면해

개교 이래 31년간 백두학원은 태극기도 인공기도 게양하지 않았다. 일개 학교를 넘어서 한국 정부와 북한 정권의 체제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그야말로 한반도의 축소판이었다. 교무실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보낸 각종 팸플릿이 나란히 진열돼 있었다. 우리 정부와 북한 간 ‘교육 보조금 지원 경쟁’도 벌어졌다. 백두학원이 대한민국 지지로 돌아서는 과정을 당시 오사카한국총영사였던 조일제(趙一濟·82)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재정난이 심각해 폐교 직전에까지 내몰렸습니다. 1975년 봄 초등학교 입학생이 고작 7명이었으니까요. 본국 정부에 ‘이대로 두면 일본 내 유일한 정규 민족학교가 사라지고 만다’ ‘재학생 90%가 한국 국적자인데 살려야 하지 않겠냐’며 재정지원을 신청했죠. 영사관과 민단 오사카본부가 나서 수차례 학교 정상화를 약속했지만 조총련의 방해공작과 교내 반대세력 때문에 어찌나 애를 먹었던지…. 1976년 10월 정부 예산을 받아 1년 가까이 밀린 교사 월급을 한꺼번에 지불하고, 교사들 앞에서 ‘앞으로도 통일한국을 대비해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야 하지 않겠느냐. 앞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백두학원을 책임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영사관뿐 아니라 민단 오사카본부도 백두학원에 대한 협력을 약속했다. 이듬해인 1977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개교 이래 한 번도 나부낀 적이 없던 백두학원 국기게양대에 주인이 생겼다. 태극기가 펄럭이기 시작한 것이다. 재일동포 사회의 남북 간 체제경쟁에서 남쪽이 승리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여하튼 존망의 위기에 빠져 있던 백두학원은 한국 정부의 지원에 의해 정상화될 수 있었다.

제주도에도 학교 설립

조규훈 선생이 세운 제주도 조천중학교의 옛 모습.

한편 1946년 백두학원을 창립하면서 조규훈 선생은 학교 경영은 이경태 교장선생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교사 월급을 비롯한 운영비 조달에만 관여했다. 학교 주변 반경 200m의 부지를 사서 학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조 선생은 백두학원을 세우던 그해 자신이 태어난 제주도 조천면에도 중학교를 세웠다. 건축에 필요한 설계도면과 자재 일체는 배편으로 보내왔다. 동향(同鄕) 출신인 이정림 ‘조규훈 현창준비회 회장’은 건축자재들이 제주 신촌리 앞바다로 들어오던 광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곱 살 때였지만 필름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랑 바다에 떨어진 부목들을 붙잡고 온종일 수영을 했으니까요. 창복환(昌福丸)이라 부르던 화물선에 뭔가 가득 실려 있었는데 동네 어른들 말씀이 학교 지을 때 쓸 자재라는 것이에요.”

지금도 조천중학교(朝天中學校) 교정에는 조규훈의 이름이 새겨진 건립기념비가 서 있다.

이 무렵 조 선생은 백두동지회의 사회공헌 활동도 정력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을 원호할 목적으로 고베 시내에 있던 가와사키중공업 부속 건물을 사들였고, 이곳에서 하루에 많게는 600명 이상의 환자들을 치료하고 무상(無償)급식을 실시했다고 한다. 원호사업은 하리마산업이 도산하는 1951년까지 계속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동지회 회원인 황치준씨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하리마산업은 여러 척의 선박을 갖고 있었어요. 주로 고무 원료들을 수입하는 용도로 썼는데, 종종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동남아산 과일을 가득 싣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백두동지회원들에겐 비상이 걸렸죠. 서너 명씩 짝을 지어 거리에 나가 전쟁 피해자들에게 과일을 공짜로 나눠 줬죠. 당시 우리 회사는 효고현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회사업을 하는 회사로 유명했습니다.”

1949년 주일한국대표부 설치 때 1300만 엔 지원

조 선생은 1949년 1월 개설한 주일대한민국대표부 설치 때도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조 선생의 장남 성현씨는 그로부터 수개월 전 한국 정부 인사들이 고베의 마이코(舞子) 자택으로 찾아오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 날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나뭇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었습니다. 그날 정부의 높은 분들이 온다고 해서 이른 아침부터 집도, 백두동지회 사무실도 상당히 분주했습니다. 키가 큰 사람을 필두로 몇 명이 사이드카를 타고 들어올 때, 동지회 회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행사를 열어 줬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2층 제 방에서 지켜보고 있었죠.”

그날의 방문 기록은 조 선생도 회고담에 남겼다.

“정 공사라는 분이 ‘상담할 일이 있으니 자택으로 방문하고 싶다’는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만나 보니 주일대표부를 세우는 데 재정을 보태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마가 필요하냐 물었더니 500만 엔 정도면 최소한의 준비는 될 것 같다고 해서 ‘한 달 이내에 준비하겠다’고 답하고 그 자리에서 50만 엔을 건넸습니다.”

조 선생이 언급한 정 공사는 정한경(鄭翰景)이란 분으로 일제시대 때 미국에서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 안창호(安昌浩) 선생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다. 조 선생은 이 정 공사에게 친구 2명과 숙부로부터 지원받은 돈을 합해 1000만 엔을 전달했고, 실제 이듬해 1월 4일 주일대표부가 공식 개관했다.

주일대표부는 세이코(SEIKO)시계 본사 건물로 유명한 도쿄 긴자(東京銀座)의 핫토리(服部)빌딩 4층을 통째로 빌려 썼다. 그는 도쿄 메구로(目黑)에 대표부 관저를 구입할 때도 300만 엔을 지원했다고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 정부가 해방 후 처음으로 일본에 공관을 세우는 데, 그것도 도쿄의 최고중심지인 긴자에 태극기를 꽂는 데 조 선생의 공헌이 있었던 것이다.

민단 단장 출마

1978년 조규훈 선생이 손자들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 선생은 94년 생애 동안 본인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탄탄대로를 달리던 조 선생의 사업은 1949년부터 위기를 맞이한다. 주력업종이었던 고무사업이 휘청대기 시작한 것이다. 측근들이 회사자금을 횡령하거나 친척이 고무원료 수입자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가 하면, 직원 중에는 조 선생의 돈을 노리고 일본경찰을 찾아가 허위 밀고하는 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무렵 조 선생은 어찌된 영문인지 기울어 가는 자기 사업을 뒤로하고 민단 중앙단장에 입후보한다. 그는 “주일대표부의 부탁을 받고서”라고 출마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이유가 어찌됐건 민단 단장에 출마한 건 쉽게 이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럴 만큼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한 단초는 이 시기 재일동포 사회와 민단의 움직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초창기 민단은 극심한 내홍(內訌)을 겪고 있었다. 민단은 박열(朴烈·제1~5대) 초대 단장의 조선거류민단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해 9월 8일 민단을 ‘재일동포사회의 유일한 민주단체’로 공인했다.

그러나 박열이 단장 직에서 물러난 뒤 민단에서는 박열파와 아나키스트파(무정부주의자들), 공산주의파 등 여러 파벌로 나뉘어 치열한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이런 민단의 혼란상에 주일대표부도 가세해, 한때 초대 공사였던 정한경씨가 제6대 민단 단장에 선출된 적도 있다. 그러나 정씨는 단장에 선출됐지만 초창기 민단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불명예 퇴진하고 만다. 취임식조차 치르지 못한 채 선출 2개월 만에 자진 사퇴하고 만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일본 체류 자격이 만료됐다는 게 문제시됐지만, 실은 정 공사에 대한 민단 단원들의 극심한 반대가 퇴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지경이니 초창기 민단 조직이란 내일 당장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본국 정부 입장에서 민단이란 존재는 일본에서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조총련(당시엔 조선인연맹)과 맞서는 유일 조직으로서 어떻게든 살려내야만 했다.

그때 정부가 민단의 혼란상을 수습할 구원투수로 택한 사람이 바로 조규훈 선생이었다. 일본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인 자선사업으로 신망이 두터운 데다, 경제력까지 갖췄으니 조규훈만한 카드도 없었을 터다. 조 선생은 1949년 6월 8~9일 치러진 민단 단장 선거에서 430표를 얻어 무정부주의자인 원심창(元心昌)씨에 16표라는 근소한 차로 승리했다.

“우리만 잘살아서 뭐 하느냐”

2010년 4월 7일 백두학원 이사장 이·취임식장에서 조규훈 선생의 지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조 선생의 3남 명현씨, 이정림 조규훈 현창준비회장, 조 선생의 장남 성현씨, 백두학원 7회 졸업생 프리라이터 고인봉씨.

조 선생은 6·25동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950년 3월 25일까지 민단 중앙단장을 지냈다. 조 선생 재임시 민단조직은 일본 전국 38개 지방본부 155개 지부에서 43개 지방본부 207개 지부로 확대됐다. 그는 민단이 전국 조직화를 갖추는 데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하리마산업은 조 선생이 민단 단장으로 나가 있던 시기에 계속 부진했다. 그가 복귀했을 때 경영사정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돼 있었다. 경영이 아무리 어려워도 백두학원에 대한 지원만은 계속했던 그였지만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조 선생은 1950년 가을 다카토리 공장에 있던 고무생산 기계들을 팔아 운영비를 지원한 것을 마지막으로 백두학원에서 손을 떼게 된다. 이로 인해 백두학원을 다녔던 그의 일곱 자녀들은 학교 식당 옆에 있던 다다미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조 선생을 아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그를 말한다.

“누구든 마음은 쉽게 먹지만 정작 행동으로 옮기기는 힘든 법입니다. 해방 후 혼란기는 더욱 그런 시기입니다. 그 어렵던 시기에 그야말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조국을 부흥시키겠다며 재일동포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민족학교를 세운 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묵직한 족적입니다.”(이정림 조규훈 현창준비회장)

“아버지에게 어머니 스커트 한 벌 사 주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했더니 ‘우리만 잘살아서 뭐하느냐, 모두가 좋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그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때 아버지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신념이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조 선생의 4남 명현씨)

2010년 4월 7일 저녁 백두동지회를 설립한 고베에서 55년 만에 재회한 백두동지회 창립회원 황치준씨와 조 선생의 3남 명현씨, 장남 성현씨(왼쪽부터).

“돌아가시기 몇 해 전 고향에 다녀오겠다며 300만 엔을 마련해 달라는데 거절하였습니다. 또 남 좋은 일 시키고 돈만 버리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재기해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할 것이라며 고향에 가지 않던 분이었는데, 맏아들인 제가 아버지께서 고향에 가 볼 마지막 기회를 매정하게 자르고 말았어요. 너무도 후회스럽습니다.”(조 선생의 장남 성현씨)

“자신을 자랑하지 않던 신사(紳士)로 기억합니다. 60여 년 전 조국에 돈이 아니라 기술을 보태겠다는 마음,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건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라 할 수 있죠. 그의 애국애족하는 마음은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일입니다.”(박득진·朴得鎭 <민단신문> 논설주간, 1986년 11월 조 선생과 인터뷰한 마지막 언론인)

“백두학원 1기 졸업생이고 모교에서 교사까지 지냈지만 조규훈 선생을 잘 모릅니다. 몇 년 전 저와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던 한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학교 주변을 서성이던 한 노인과 마주쳤는데 조 선생이었답니다. 학교 걱정을 하며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고 그래요. 본인이 세운 학교임에도 곁에서 맴돌아야 했던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아팠습니다.”(전영녀·全永女 백두학원 1기 졸업생)

“조 선생은 갈 데 없는 저희 징용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셨고, 아들처럼 대하며 신념을 심어 줬던 어른입니다. 돈 버는 일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야 하며, 돈에 자신을 걸지 말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해방 직후 하리마고무에서 배운 고무원료 배합기술로 평생을 잘살 수 있었습니다.”(황치준 백두동지회 회원)

희망의 찬가

2010년 4월 7일 저녁 조 선생의 두 아들과 백두동지회원 황치준씨는 55년 만에 백두동지회가 있던 고베 마이코 근방에서 재회했다. 청소년기에 형님 동생 하며 같은 집에서 동고동락했던 세 사람은 그날 밤 오랜 세월 가슴 깊이 묻어 뒀던 기억을 끄집어 내며 회포를 풀었다. 새벽녘까지 이야기 꽃을 피우던 가운데 맏형인 황씨가 하리마산업에서 일하던 시절 재일동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조규훈 선생은 백두레코드라는 음반사도 차렸는데,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일본에서는 음반을 낼 수 없었던 재일동포들의 한(恨)을 달래 줄 목적으로 세웠다. 1947년 첫 번째 음반 취입자는 훗날 일본에서 오바타미노루(小畑?)라는 예명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동포 가수 강영철(康永喆)이었다. 그날 밤 황치준씨는 63년 전 강영철이 한국어로 취입했던 ‘희망의 찬가(希望의 讚歌)’를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구성지게 불렀다.

<거칠은 풀밭을 씩씩하게 건너서 인제 왔다
우리들의 희망의 노래
불러라 우렁차게 춤 춰라 즐겁게
기다리고 기다린 자유의 노래와 창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