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尙洙
⊙ 1935년생. 명지대 가정학과 졸업. 한국수공예학원, 수림원 자수연구원장 역임.
제6회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
⊙ 現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 1935년생. 명지대 가정학과 졸업. 한국수공예학원, 수림원 자수연구원장 역임.
제6회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
⊙ 現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초등학교 때 광복을 맞은 소녀가 있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수(繡)’를 놓을 예정이니 집에서 수놓을 천을 가져오라고 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포목 장사를 했던 소녀의 어머니는 고운 목원단을 내놓았다. 소녀는 그 위에 선생님이 준 탐스러운 모란꽃 도안의 수를 놨다. 특별한 기술은 없었다. 그냥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바늘을 꽂았다. 소녀의 ‘작품’은 최우수작으로 뽑혀 교실 뒷벽에 걸렸다. 친구들이 예쁘다고 야단이었다. 소녀의 어깨가 괜히 들썩였다.
그로부터 60년을 훌쩍 넘긴 지난 6월 4일, 그 소녀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무형문화재 회관에서 시연 행사를 열었다. 고사리 같았던 손은 세월의 흔적을 비켜 나가지 못하고 주름이 듬성듬성해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한상수(韓尙洙) 선생이다. 그는 실용취미 정도로 취급받아 온 자수를 공예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공을 인정받아, 1983년 자수 부문에서는 최초로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초등학교 교실 뒷벽을 보면 이상하게 뿌듯한 거예요. 그때는 몰랐지요. 이런 인생을 살게 될지.”
곱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몇 초의 침묵 뒤, 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속상해, 정말. 요즘은 속상해요.”
―뭐가요.
“아름다운 경치나 물건을 보면 ‘수놓은 듯이 아름답다’고 표현하잖아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 수인데, 이제는 다 사라지고 있어요. 모든 사람이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지켜야 하는 소중한 우리 것인데요.”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나요.
“몇몇 대학에 자수과가 있어 명맥을 유지했는데, 요즘은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입학하는 학생이 아무도 없어서 없앴다고 합니다. 대학에서 자수과가 없어지면서, 자수가 단순 바느질 정도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색상, 도안, 패턴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고유의 예술인데, 하대(下待)당하는 것 같아 속이 상합니다. 2년짜리 기예학과를 만들어 염색과 수를 가르치고 싶어요.”
국내의 자수, 사양길에 접어들어 안타까워
―여기저기에 여전히 수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중국, 베트남에서 들여온 싼 자수를 사용하는 거지요. 중국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 전통의 한국 수는 사양길로 접어들었어요. 이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걱정됩니다. 중국하고 일본은 예부터 줄곧 수를 발전시켜 오고 있습니다. 자수(刺繡)는 일본 말이고, 중국에서는 수화(繡花)라고 해요. 우리는 그냥 ‘수’라고 합니다. 중국은 싼 인건비를 앞세워 산업 자수로 발전시켰습니다. 중국 내에 작가가 많고, 외국 수출품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생산합니다. 일본 자수는 자연스러운 색감이 특징인데, 주로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 장식이자 액자용으로 사용됩니다. 과거의 자수 기법에 신기법을 더해 새로운 자수 기법을 창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머물러 있고, 그나마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죠. 수를 미술로서 승화시키고, 전 세계에 ‘한국의 수가 제일이다’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제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갔다. 카랑카랑하고 똑 부러진 목소리. 정말 그가 이 목표를 위해 남은 생(生)을 바칠 것이라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일본의 수법은 124가지, 한국은 30가지뿐
수는 바늘귀에 실이나 장식품을 꿰어 어떤 재질의 표면에 일정한 침법(針法)을 응용해 그림이나 글자 등을 새겨 넣은 공예미술품이다. 바늘땀의 흔적에 의해 입체적으로 구성된 수 무늬가 조형과 문양, 색채, 질감을 표현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여인네라면 누구든 이 수를 했다. 보료, 베개, 방석을 만들었다. 곱게 수를 놓은 한복을 입기도 했다. 수가 완성되는 과정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 도안을 구상하여 수본(繡本)을 만들고, 수본에 어울리는 천을 구한다. 능력이 되면 천을 직접 짜기도 한다. 여기에 색을 구상하여 염색을 한다. 가령 같은 금색이라고 해도 순금실, 가금실 등 종류가 여럿이다. 어떤 종류의 실로, 어떤 수법으로 놓을 것인가는 수를 놓는 사람의 역량이다.
현재 일본은 124가지의 수법이, 한국은 30가지의 수법이 있다. 한국의 수가 그만큼 발전이 더디다는 증거다. 수를 놓다가 뜻한 대로 되지 않으면 풀고, 다시 놓기를 반복한다. 도화지 대신에 ‘천’이라는 무(無)에 유(有)를 그려내는 종합예술작품이다. 우리네 선조는 다양한 품종과 미려한 색채, 훌륭한 문양을 만들고, 정교한 침법으로 이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수는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한상수 선생은 “미술은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창작품으로 인정받지만, 수는 무작정 남의 것을 따라 하는 모방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그의 인생은 ‘수’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한상수 선생이 본격적으로 수를 배운 것은 한국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이었다. 제주도가 고향인 한 선생이 부산으로 피란을 갔는데, 그곳에서 일본 도쿄미술대학 자수과를 졸업한 자수연구가 조정호 이화여대 가정과 교수(작고)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됐다. 조 교수는 그에게 “수에 소질이 있다”고 했고, 그는 조 교수의 수하생으로 수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선생의 얘기다.
“굳이 따지자면 일제시대에 방직회사를 다녔던 어머니로부터 끼를 물려받지 않았나 싶어요. 어머니가 설에 옷을 지으면, 옆에서 인두로 옷을 다리는 일을 도맡아 했어요. 그때부터 막연하게 의상에 대해, 수에 대해 관심이 컸었지요”
그는 열아홉에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선)에 입선(入選)했고, 조정호 교수를 따라다니면서 본격적인 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때 여고 교사가 되려고 했지만,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하려면 얽매이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포기했다. 대신 그는 1963년부터 ‘수림원 자수연구소’를 열어 자수 기술자들을 양성하고, 국내에 자수를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했다. 한 선생의 얘기에 따르면, 이때까지만 해도 전쟁복구 작업에 한창이던 국내에는 ‘전통’이니, ‘옛것 살리기’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수를 놨던 ‘안주수’
“수를 놓아 보니 도대체 ‘우리 전통의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습니다.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예전 자료를 뒤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유물을 수집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전통 수라는 것은 ‘조선수’를 말하는 것이더라고요.”
―수라는 것이 그렇게 종류가 많은가요.
“궁에서 필요에 의해 조달해 오던 궁수(宮繡), 전라남도 순창에서 집단으로 수를 놨던 민수, 평안남도에서 전해져 온 안주수 등이 있더군요. 남자들이 단체로 수를 놨다는 얘기를 들어봤나요? 과거에 한 마을 전체에서 남자들이 수를 놨는데, 그것이 안주수더군요. 우리나라 정승들 중에 귀향을 간 일부가 무료함을 달래고자 수를 시작했는데, 그 사람들이 평안남도 안주에 정착해서 이것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수를 임금이 높이 평가해서, 왕에게 진상을 하게 됐고요. 3대(代)째 이북에서 안주수를 이어 온 오형률씨를 1970년대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오씨는 6·25 때 월남해 해군 마크를 수놔 주면서 연명했다고 하더군요. 우리의 수가 생각보다 훨씬 전통이 깊고, 배울수록 새로운 개척의 세계였습니다.”
한상수 선생은 이때부터 우리 자수의 맥을 잇겠다는 생각 하나로 전국의 자수 자료를 수집해 <이조의 자수>, <흉배> 등의 서적을 발간하며 전통 자수의 개념을 확립했다. 또 1973년에 ‘수림원 자수전시관’을 열어 한국의 수 문화를 일반 대중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여러 사람과 함께 유물을 전시하면서 조선조 자수를 알렸다. 그의 이름을 딴 개인전은 1964년부터 거의 매년 열렸다.
도대체 얼마나 수에 푹 빠졌으면 이런 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 한상수 선생은 스스로 “수에 미쳐 산 60년이었다”며 웃었다.
1984년 국내 최초의 자수장 인간문화재 지정
“인간문화재가 되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어요. 우연히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수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거예요. 결혼을 해서 임신 중에도 수를 놓고, 출산을 하고 삼칠일만 되면 학원에 나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냈지요.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수를 놓아 가며 대충 끼니를 때우고, 수틀 밑에서 쪼그려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수를 놓느라 젊은 시절을 다 보냈지요.”
사람이 하나에 푹 빠지면 결국 그 빛을 보게 되는 것일까. 그가 본격적으로 수를 시작한 지 28년째인 1981년, 그의 작품은 제6회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84년,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됐다. 자수 부문에서 인간문화재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얘기다.
“인간문화재에 지정됐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공방 뒤뜰에서 발버둥치면서 울었어요. 그동안 수에 미쳐 사느라 정말 포기한 것들이 많았거든요. 친정 엄마가 애들 양육이며 가정살림을 도맡아 하셨고, 저는 수를 놓는다고 제 또래 여자들의 삶과 동떨어지게 살았었어요. ‘어머니, 됐어요. 저 이제 나라의 녹을 먹게 됐어요’라고 울면서 전화를 드렸어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어머니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왜 자수 부문에선 인간문화재가 그동안 배출되지 않았나요.
“수가 어렵고요. 또 예전에는 부유한 가문의 신여성들이 수를 놨어요. 그러다 보니 절실하게 연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파를 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멋내는 용도로 수를 취급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니 수를 널리 알려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아하게 앉아서 수를 놓는 것이 미덕이라는 식으로 여겨져서 그동안 수가 제대로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여성들이 주로 하다 보니, 여자들끼리의 은근한 알력이랄까요. 그런 것도 수가 널리 퍼지는 데 걸림돌이 된 것 같고요.”
인간문화재의 지정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컸지만, 그는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인간문화재가 최종 목표가 아니었던 만큼, 우리나라의 수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그는 전수장학생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일본 자수에 비해 우리의 것이 한참 뒤처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1985년 일본 대사의 부인이 기모노 위에 자수를 떠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한상수 선생은 이 때문에 대사관에 가게 됐고, ‘천수국수장’이라는 작품을 알게 됐다. ‘천수국수장’은 일본의 성덕 태자가 서기 622년 서거한 이후에 그의 왕비가 태자를 추모해, 평소에 태자가 설법하던 천수국의 모습을 수로 뜬 작품이다. 백제인이 총감독을 하고, 고구려인의 밑그림 위에 일본 궁에 있던 여자들이 수를 놓아 완성한 작품인데, 현재 일본 나라박물관에 일본 국보로 소장돼 있다. ‘천수국수장’은 우리나라의 자수 미술이 일본으로 전파돼, 양국 간에 문화 교류가 이뤄졌다는 증거다. 한상수 선생은 이 사실을 알고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 고금자수교류전을 열어 일본과의 교류를 꾀했다. 그런데 일본에 갈 때마다 그의 아쉬움은 커져 갔다.
수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목표
한상수 선생의 얘기다.
“일본은 이때 벌써 고유의 자수기법에 서양자수를 접목시켜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자수인의 숫자가 많고, 직물법, 수법 등이 다양했어요. 우리나라는 40년이 넘도록 진보되지 않고, 예전의 것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거든요. 지금이라도 우리의 것을 찾아서 발전시키는 데 모든 힘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베개 하나, 방석 하나, 옷 귀퉁이 하나하나에 모두 수를 넣을 수 있거든요.”
―궁극적인 목표는 뭔가요.
“수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일입니다. 또 중국, 일본 수에 버금가게 한국의 수가 제일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명예롭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잊혀 가는 것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여전히 자수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있어요. 그런데 이에 걸맞은 지원, 또 자수에 대한 인식이 받쳐 주지 않아 정말 안타깝습니다.”
한상수 선생의 ‘수 외길 인생’은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2남1녀를 뒀는데, 모두 수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외동딸 김영란 건국대 겸임교수와 손녀 김현진·현지씨가 각각 중요무형문화재 이수자와 전수장학생으로 지정돼 뒤를 잇고 있다. 장남과 차남은 각각 자수 행사 기획, 박물관 관리 등을 도맡아 어머니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다.
한상수 선생은 이외에도 ‘수림원 자수연구소’와 ‘한상수자수공방’을 운영하며 학생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자수 강좌를 열어 자수의 생활화를 꾀하는 중이다. 인터뷰하는 중에 몇몇 일본인들이 선생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일본에서 한국의 ‘수’를 공부하기 위해 일부러 찾은 학생들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요즘 한식의 세계화가 이슈가 됐듯이 언젠가는 한국 수의 세계화가 세인들의 관심을 받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한국 전통에 21세기의 신기법을 합친 새로운 수를 창조하면 어떨까요?”⊙
사진 : 이태훈
그로부터 60년을 훌쩍 넘긴 지난 6월 4일, 그 소녀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무형문화재 회관에서 시연 행사를 열었다. 고사리 같았던 손은 세월의 흔적을 비켜 나가지 못하고 주름이 듬성듬성해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한상수(韓尙洙) 선생이다. 그는 실용취미 정도로 취급받아 온 자수를 공예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공을 인정받아, 1983년 자수 부문에서는 최초로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초등학교 교실 뒷벽을 보면 이상하게 뿌듯한 거예요. 그때는 몰랐지요. 이런 인생을 살게 될지.”
곱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몇 초의 침묵 뒤, 그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속상해, 정말. 요즘은 속상해요.”
―뭐가요.
“아름다운 경치나 물건을 보면 ‘수놓은 듯이 아름답다’고 표현하잖아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 수인데, 이제는 다 사라지고 있어요. 모든 사람이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지켜야 하는 소중한 우리 것인데요.”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나요.
“몇몇 대학에 자수과가 있어 명맥을 유지했는데, 요즘은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입학하는 학생이 아무도 없어서 없앴다고 합니다. 대학에서 자수과가 없어지면서, 자수가 단순 바느질 정도로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색상, 도안, 패턴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고유의 예술인데, 하대(下待)당하는 것 같아 속이 상합니다. 2년짜리 기예학과를 만들어 염색과 수를 가르치고 싶어요.”
국내의 자수, 사양길에 접어들어 안타까워
―여기저기에 여전히 수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중국, 베트남에서 들여온 싼 자수를 사용하는 거지요. 중국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 전통의 한국 수는 사양길로 접어들었어요. 이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걱정됩니다. 중국하고 일본은 예부터 줄곧 수를 발전시켜 오고 있습니다. 자수(刺繡)는 일본 말이고, 중국에서는 수화(繡花)라고 해요. 우리는 그냥 ‘수’라고 합니다. 중국은 싼 인건비를 앞세워 산업 자수로 발전시켰습니다. 중국 내에 작가가 많고, 외국 수출품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생산합니다. 일본 자수는 자연스러운 색감이 특징인데, 주로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 장식이자 액자용으로 사용됩니다. 과거의 자수 기법에 신기법을 더해 새로운 자수 기법을 창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머물러 있고, 그나마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죠. 수를 미술로서 승화시키고, 전 세계에 ‘한국의 수가 제일이다’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제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갔다. 카랑카랑하고 똑 부러진 목소리. 정말 그가 이 목표를 위해 남은 생(生)을 바칠 것이라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일본의 수법은 124가지, 한국은 30가지뿐
수는 바늘귀에 실이나 장식품을 꿰어 어떤 재질의 표면에 일정한 침법(針法)을 응용해 그림이나 글자 등을 새겨 넣은 공예미술품이다. 바늘땀의 흔적에 의해 입체적으로 구성된 수 무늬가 조형과 문양, 색채, 질감을 표현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여인네라면 누구든 이 수를 했다. 보료, 베개, 방석을 만들었다. 곱게 수를 놓은 한복을 입기도 했다. 수가 완성되는 과정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 도안을 구상하여 수본(繡本)을 만들고, 수본에 어울리는 천을 구한다. 능력이 되면 천을 직접 짜기도 한다. 여기에 색을 구상하여 염색을 한다. 가령 같은 금색이라고 해도 순금실, 가금실 등 종류가 여럿이다. 어떤 종류의 실로, 어떤 수법으로 놓을 것인가는 수를 놓는 사람의 역량이다.
현재 일본은 124가지의 수법이, 한국은 30가지의 수법이 있다. 한국의 수가 그만큼 발전이 더디다는 증거다. 수를 놓다가 뜻한 대로 되지 않으면 풀고, 다시 놓기를 반복한다. 도화지 대신에 ‘천’이라는 무(無)에 유(有)를 그려내는 종합예술작품이다. 우리네 선조는 다양한 품종과 미려한 색채, 훌륭한 문양을 만들고, 정교한 침법으로 이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수는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한상수 선생은 “미술은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창작품으로 인정받지만, 수는 무작정 남의 것을 따라 하는 모방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그의 인생은 ‘수’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한상수 선생이 본격적으로 수를 배운 것은 한국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이었다. 제주도가 고향인 한 선생이 부산으로 피란을 갔는데, 그곳에서 일본 도쿄미술대학 자수과를 졸업한 자수연구가 조정호 이화여대 가정과 교수(작고)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됐다. 조 교수는 그에게 “수에 소질이 있다”고 했고, 그는 조 교수의 수하생으로 수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선생의 얘기다.
“굳이 따지자면 일제시대에 방직회사를 다녔던 어머니로부터 끼를 물려받지 않았나 싶어요. 어머니가 설에 옷을 지으면, 옆에서 인두로 옷을 다리는 일을 도맡아 했어요. 그때부터 막연하게 의상에 대해, 수에 대해 관심이 컸었지요”
그는 열아홉에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선)에 입선(入選)했고, 조정호 교수를 따라다니면서 본격적인 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때 여고 교사가 되려고 했지만,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하려면 얽매이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포기했다. 대신 그는 1963년부터 ‘수림원 자수연구소’를 열어 자수 기술자들을 양성하고, 국내에 자수를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했다. 한 선생의 얘기에 따르면, 이때까지만 해도 전쟁복구 작업에 한창이던 국내에는 ‘전통’이니, ‘옛것 살리기’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수를 놨던 ‘안주수’
“수를 놓아 보니 도대체 ‘우리 전통의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습니다.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예전 자료를 뒤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유물을 수집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전통 수라는 것은 ‘조선수’를 말하는 것이더라고요.”―수라는 것이 그렇게 종류가 많은가요.
“궁에서 필요에 의해 조달해 오던 궁수(宮繡), 전라남도 순창에서 집단으로 수를 놨던 민수, 평안남도에서 전해져 온 안주수 등이 있더군요. 남자들이 단체로 수를 놨다는 얘기를 들어봤나요? 과거에 한 마을 전체에서 남자들이 수를 놨는데, 그것이 안주수더군요. 우리나라 정승들 중에 귀향을 간 일부가 무료함을 달래고자 수를 시작했는데, 그 사람들이 평안남도 안주에 정착해서 이것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수를 임금이 높이 평가해서, 왕에게 진상을 하게 됐고요. 3대(代)째 이북에서 안주수를 이어 온 오형률씨를 1970년대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오씨는 6·25 때 월남해 해군 마크를 수놔 주면서 연명했다고 하더군요. 우리의 수가 생각보다 훨씬 전통이 깊고, 배울수록 새로운 개척의 세계였습니다.”
한상수 선생은 이때부터 우리 자수의 맥을 잇겠다는 생각 하나로 전국의 자수 자료를 수집해 <이조의 자수>, <흉배> 등의 서적을 발간하며 전통 자수의 개념을 확립했다. 또 1973년에 ‘수림원 자수전시관’을 열어 한국의 수 문화를 일반 대중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여러 사람과 함께 유물을 전시하면서 조선조 자수를 알렸다. 그의 이름을 딴 개인전은 1964년부터 거의 매년 열렸다.
도대체 얼마나 수에 푹 빠졌으면 이런 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 한상수 선생은 스스로 “수에 미쳐 산 60년이었다”며 웃었다.
1984년 국내 최초의 자수장 인간문화재 지정
“인간문화재가 되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어요. 우연히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수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거예요. 결혼을 해서 임신 중에도 수를 놓고, 출산을 하고 삼칠일만 되면 학원에 나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냈지요.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수를 놓아 가며 대충 끼니를 때우고, 수틀 밑에서 쪼그려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수를 놓느라 젊은 시절을 다 보냈지요.”
사람이 하나에 푹 빠지면 결국 그 빛을 보게 되는 것일까. 그가 본격적으로 수를 시작한 지 28년째인 1981년, 그의 작품은 제6회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84년,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됐다. 자수 부문에서 인간문화재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얘기다.
“인간문화재에 지정됐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공방 뒤뜰에서 발버둥치면서 울었어요. 그동안 수에 미쳐 사느라 정말 포기한 것들이 많았거든요. 친정 엄마가 애들 양육이며 가정살림을 도맡아 하셨고, 저는 수를 놓는다고 제 또래 여자들의 삶과 동떨어지게 살았었어요. ‘어머니, 됐어요. 저 이제 나라의 녹을 먹게 됐어요’라고 울면서 전화를 드렸어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어머니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왜 자수 부문에선 인간문화재가 그동안 배출되지 않았나요.
“수가 어렵고요. 또 예전에는 부유한 가문의 신여성들이 수를 놨어요. 그러다 보니 절실하게 연구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파를 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멋내는 용도로 수를 취급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니 수를 널리 알려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아하게 앉아서 수를 놓는 것이 미덕이라는 식으로 여겨져서 그동안 수가 제대로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여성들이 주로 하다 보니, 여자들끼리의 은근한 알력이랄까요. 그런 것도 수가 널리 퍼지는 데 걸림돌이 된 것 같고요.”
인간문화재의 지정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컸지만, 그는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인간문화재가 최종 목표가 아니었던 만큼, 우리나라의 수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그는 전수장학생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일본 자수에 비해 우리의 것이 한참 뒤처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1985년 일본 대사의 부인이 기모노 위에 자수를 떠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한상수 선생은 이 때문에 대사관에 가게 됐고, ‘천수국수장’이라는 작품을 알게 됐다. ‘천수국수장’은 일본의 성덕 태자가 서기 622년 서거한 이후에 그의 왕비가 태자를 추모해, 평소에 태자가 설법하던 천수국의 모습을 수로 뜬 작품이다. 백제인이 총감독을 하고, 고구려인의 밑그림 위에 일본 궁에 있던 여자들이 수를 놓아 완성한 작품인데, 현재 일본 나라박물관에 일본 국보로 소장돼 있다. ‘천수국수장’은 우리나라의 자수 미술이 일본으로 전파돼, 양국 간에 문화 교류가 이뤄졌다는 증거다. 한상수 선생은 이 사실을 알고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 고금자수교류전을 열어 일본과의 교류를 꾀했다. 그런데 일본에 갈 때마다 그의 아쉬움은 커져 갔다.
수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목표
한상수 선생의 얘기다.
“일본은 이때 벌써 고유의 자수기법에 서양자수를 접목시켜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자수인의 숫자가 많고, 직물법, 수법 등이 다양했어요. 우리나라는 40년이 넘도록 진보되지 않고, 예전의 것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거든요. 지금이라도 우리의 것을 찾아서 발전시키는 데 모든 힘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베개 하나, 방석 하나, 옷 귀퉁이 하나하나에 모두 수를 넣을 수 있거든요.”
―궁극적인 목표는 뭔가요.
“수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일입니다. 또 중국, 일본 수에 버금가게 한국의 수가 제일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명예롭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잊혀 가는 것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여전히 자수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있어요. 그런데 이에 걸맞은 지원, 또 자수에 대한 인식이 받쳐 주지 않아 정말 안타깝습니다.”
한상수 선생의 ‘수 외길 인생’은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2남1녀를 뒀는데, 모두 수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외동딸 김영란 건국대 겸임교수와 손녀 김현진·현지씨가 각각 중요무형문화재 이수자와 전수장학생으로 지정돼 뒤를 잇고 있다. 장남과 차남은 각각 자수 행사 기획, 박물관 관리 등을 도맡아 어머니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다.
한상수 선생은 이외에도 ‘수림원 자수연구소’와 ‘한상수자수공방’을 운영하며 학생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자수 강좌를 열어 자수의 생활화를 꾀하는 중이다. 인터뷰하는 중에 몇몇 일본인들이 선생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일본에서 한국의 ‘수’를 공부하기 위해 일부러 찾은 학생들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요즘 한식의 세계화가 이슈가 됐듯이 언젠가는 한국 수의 세계화가 세인들의 관심을 받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한국 전통에 21세기의 신기법을 합친 새로운 수를 창조하면 어떨까요?”⊙
사진 : 이태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