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폐합 대상기관을 2년 만에 최우수 기관으로 바꾼 주역
⊙ 1971년 통일벼 개발로 식량 자급 시대 열어
⊙ 새 정부 출범 당시 존폐 위기에서 간신히 제외
⊙ 수요자 중심 연구로 농업인 만족도 2007년 59%에서 2009년 71.2%로 향상
⊙ 한국 농업 기술은 美 오바마 대통령이 공인할 만큼 세계적 수준
김재수
⊙ 1957년 경북 영양 출생.
⊙ 경북고, 경북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경제학·미국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중앙대 경제학 박사.
⊙ 제21회 행정고시 합격. 농진청 종자관리소장, 농림부 농산물유통국장, 주미대사관 농무관,
농업연수원장,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장, 농림수산식품부 기획조정실장 역임.
⊙ 저서: <미국 농업정책과 한국 농업의 미래> <한국음식 세계인의 식탁으로>.
⊙ 상훈: 대통령표창, 근정포장, 홍조근정훈장.
⊙ 1971년 통일벼 개발로 식량 자급 시대 열어
⊙ 새 정부 출범 당시 존폐 위기에서 간신히 제외
⊙ 수요자 중심 연구로 농업인 만족도 2007년 59%에서 2009년 71.2%로 향상
⊙ 한국 농업 기술은 美 오바마 대통령이 공인할 만큼 세계적 수준
김재수
⊙ 1957년 경북 영양 출생.
⊙ 경북고, 경북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경제학·미국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중앙대 경제학 박사.
⊙ 제21회 행정고시 합격. 농진청 종자관리소장, 농림부 농산물유통국장, 주미대사관 농무관,
농업연수원장,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장, 농림수산식품부 기획조정실장 역임.
⊙ 저서: <미국 농업정책과 한국 농업의 미래> <한국음식 세계인의 식탁으로>.
⊙ 상훈: 대통령표창, 근정포장, 홍조근정훈장.
우리 국민에게 각인된 농촌진흥청의 상징적 이미지는 ‘통일벼’일 것이다. 한국을 보릿고개에서 구제한 이 ‘기적의 볍씨’가 탄생한 곳이 농진청인 까닭이다.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평가원이 공동으로 선정한 ‘국가 연구개발 50년 10대 성과 사례’ 중 통일벼는 단연 최고로 꼽혔다. 통일벼 개발은 한글 창제 이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돼 왔으며, 녹색혁명으로 일컬어져 왔다.
국민을 기아(飢餓)로부터 해방시키며 식량자급 시대로 이끈 것이 통일벼지만 양보다 질을 따질 정도로 먹을거리가 풍성해지면서 통일벼의 존재는 잊혀 갔다. 그와 더불어 농진청도 국민들의 의식 밖으로 밀려났다.
그 때문이었을까. 2008년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농진청은 존폐 위기에 처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부 조직개편안을 짜면서 농진청을 통폐합 대상에 올린 것이다. 갑론을박이 지속됐다. 결국 폐지 대상에서는 제외됐지만 농민과 더불어 농진청 직원들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언제 또다시 존폐 논란에 휩싸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지난 3월 19일. 농진청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2009 정부업무평가’에서 39개 중앙행정기관 중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다.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2년 연속 7건씩 선정되는 등 외부기관 평가 결과 23개 부문에서 우수기관으로 뽑혔다. 또한 지난 2월 3일 청와대에서 개최된 ‘제7차 녹색성장위원회’에서 ‘녹색기술 개발과 현장실용화’를 보고하여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사라질 뻔한 기관이 불과 2년여 만에 화려하게 부활한 셈이다. 그 사이 농진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농진청 본청을 찾았다.
옥수수 수염음료, 쌀 막걸리도 농진청이 원천기술 가져
농진청은 1962년에 설립된 농업 연구·지도기관이다. 농업과학원, 식량과학원, 원예특작과학원, 축산과학원 등 4개의 부속 기관을 갖고 있으며, 직원 1800여 명이 근무 중이다. 이 중 1200여 명(박사급 800명)이 연구직이다. 전 직원의 60%가 R&D(연구개발) 분야에 종사하는 연구원인 동시에 공무원 신분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특수 조직의 수장이 김재수(金在水) 청장이다. 고시 출신인 그는 30여 년 동안 농림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 청장은 지난해 1월 취임했다.
―농진청이 부처 통폐합 대상에 올랐을 때 김 청장은 농식품부에 있었는데, 그때 이 문제를 어떻게 봤나요.
“통일벼 개발 등 그간 일궈낸 성과와 실적을 간과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향후 미국 경제를 이끌 5대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농업기술을 지목했고, 일본도 농업을 국가 경제 강화 핵심 분야 중 하나로 선정, 언론에서 연일 특집으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의 공통점은 농업 강국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농업 기반 없이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는 없어요. 식량 공급이 안정돼야 산업도 발전하게 마련이죠.”
―농진청 통폐합 발상부터 잘못됐다는 얘기인가요.
“제가 알기로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에는 농업을 제대로 아는 인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농진청을 대다수 국민이 알고 있듯 단순히 벼 증산 기술을 연구하는 곳 정도로 이해했을 거예요. 농진청은 식량 증산 기술은 물론 건강과 미용에 좋은 기능성 식품, 동식물을 이용한 신의약 소재 등 제2의 녹색혁명을 이끌 농산업 분야를 총망라해 연구개발하고 있는 곳입니다.”
김 청장의 말처럼 우리 국민 대다수는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유명 옥수수 수염 음료나 쌀 막걸리, 누에 관련 건강보조 식품 등의 원천기술을 농진청이 개발한 것이라고 하면 “정말이냐”며 놀란다. 농진청이 개발한 신품종 장미나 딸기 덕분에 농업인들이 일본이나 유럽에 지출해야 하는 로열티가 연 수억 원씩 절감되고 있다는 것도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그러니 현재 연구 진행 중이거나 이미 개발돼 임상 시험 단계에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턱이 없다.
세계 최초로 실크 인공고막 소재도 개발
―국민들은 농진청의 상징적 이미지로 여전히 ‘통일벼’를 떠올립니다.
“농진청은 업무 특성상 자연과학 전공자들이 많았고, 지금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농대 졸업 후 연구에 치중해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지요. 그러다 보니 과거 30년 동안은 통일벼 개발 등으로 박수를 받았지만 이제는 시대 흐름에 맞춰 기능성 식품과 도시농업 개발 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걸 간과한 것이죠. 농진청 이미지가 이분들과 함께 ‘통일벼’로 고착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 후 시대 흐름에 맞춰 빠르게 적응했고, 지금은 농업기술을 선도해 나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농진청은 그동안 우리 농산물에서 항산화ㆍ항당뇨ㆍ항암 효과를 내는 유전자를 발굴했고, 이들 농산물에서 추출한 성분을 다양한 기능성 식품과 식의약용 소재로 활용하기 위해 산업체와 공동으로 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돼지 껍질과 감귤 껍질 등 농축산물 부산물을 이용한 새로운 농가 소득원을 창출하기도 했다. 돼지 껍질에서 저분자 콜라겐 단백질을 분리해 뼈 성장 촉진 물질을 개발했고, 감귤 껍질에서 인공피부 등 의료용ㆍ산업용 소재로 활용할 수 있는 감귤 젤을 추출했다.
누에나 곤충, 돼지 등에서도 고부가가치 신기능성 소재를 발굴했다. 세계 최초로 누에고치를 이용해 인공고막용 실크 소재를 개발했고, 바이오장기용 형질전환 복제돼지를 개발해 생산 시스템까지 갖춰 놓은 상태다. 실크 인공고막용 소재는 인체에 가장 친화적이고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농진청은 이 소재에 대한 지적재산권 확보를 위해 한국,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등 국내외 5개국에 특허 출원했고, 조기 실용화를 위해 임상시험을 추진 중이다. 농진청 측은 “현재 세계 인공고막 시장은 2500억원 규모로, 실크 인공고막은 2013년부터 상용화될 예정”이라며 “이때가 되면 연간 150억원의 농가 소득과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형질전환 복제돼지의 경우 “2020년이면 130억 달러 규모의 장기이식 시장이 형성돼 형질전환 복제돼지가 녹색성장의 주역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 밖에 식·약용 곤충 개발, 봉독(蜂毒)을 이용한 동물용 천연항생제 연구개발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연구는 첨단, 홍보는 1차 산업 수준
―그렇다면 홍보 전략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농진청이 연구 중심이다 보니 그동안 홍보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농진청 고객을 농업인으로 한정하고 농업 전문지나 농민들만 상대로 홍보했으니 국민에게 다가갈 기회가 없었죠. 농업을 IT, BT, NT 등의 첨단과학과 접목시켜 연구하면서도 홍보는 1차 산업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겁니다. 이 역시 연구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 빚은 결과죠. 앞으로는 좀 더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국민들에게 다가갈 계획입니다.”
김 청장은 “농진청이 국민과 소통하지 못한 것은 홍보뿐만 아니라 연구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실용성보다는 연구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연구실 밖 현장을 소홀히 한 결과라고 했다. 김 청장은 지난해 1월 청장 취임과 동시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농촌진흥청’을 만들겠다고 선언,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지난 2년여 동안 농진청에 크고 작은 변화가 많았던데요.
“농진청은 2008년 존폐 위기에서 벗어난 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우선 기존 9개 소속기관을 4개로 통폐합했고, 전 직원의 업무 역량을 전ㆍ후반기로 나누어 철저히 평가했죠. 이 과정에 298명의 직원들이 스스로 나가거나 보직 해임 방식으로 퇴출됐습니다. 정기 종합평가에서 하위 10%의 직원은 보직 해임시켰고, 하위 20%에는 경고 메시지를 보냈으며, 하위 50%의 직원에게는 재교육 기회를 주는 식이었죠.”
인적쇄신을 위한 이 평가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농진청 관계자는 “일반 기업처럼 엄격한 역량 평가를 시행하자 초기엔 일부 직원들이 ‘정권을 위한 평가’라며 국회에 나가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대다수 직원은 객관적 지표를 기준으로 한 만큼 공정한 평가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매주 1시간씩 청장이 민원전화받아
일하는 방식도 현장과 실용화가 강조된 ‘수요자 중심’으로 바뀌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생활공감 녹색기술 대전’이라는 이벤트를 마련해 300여 건의 생활 밀착형 녹색기술을 발굴했고, 분야별 전문가가 농촌 현장을 직접 방문해 농업인의 요구 사항을 해결해 주는 ‘녹색기술현장지원단’을 운영했다. 농진청 1개 과가 3개 마을과 자매결연을 하는 ‘1과(課)3촌(村)’ 운동과 한 마을에 한 가지 기술을 지도하는 ‘1촌(村)1기(技)’ 운동도 펼쳤다. 기존의 민원 처리 기관인 ‘고객지원 콜센터’ 기능도 일주일에 한 시간씩 청장이 직접 민원 상담을 하는 방식으로 강화했다.
39개 국내외 대학, 산업체ㆍ연구기관 등과 연구협력 MOU(양해각서)를 추진하고, 외부에서 첨단기술 인력 70여 명을 특별 채용했다. 그 결과 2007년 59% 수준이었던 농업인 영농기술 활용 만족도가 2009년에는 71.2%로 대폭 향상됐다. 국유 특허 2086건 중 농진청 보유 특허가 54%나 되는 성과도 냈다.
―기관장이 민원 전화를 직접 받는 곳은 농진청이 유일할 것 같네요.
“매주 목요일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한 시간씩 받습니다. 실무자들이 받으면 왜곡 보고되는 경우가 많아 직접 들어보고자 나섰죠. 받다 보니 해야 할 일이 참 많더군요.”
―주로 어떤 민원이던가요.
“통계를 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귀농 교육 서적은 현장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니 보완해 달라, 사업자 선정을 위한 서류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환경 규제가 심해 내 집 지붕도 함부로 못 고친다 등 별의별 민원이 다 들어오더군요. 제가 받은 민원 중에는 농촌에 규제가 너무 심하다는 하소연이 가장 많았습니다. 농지, 환경, 식품 위생 등 각 분야에 규제가 많아 농촌서 살기 힘들고 불편하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올해부터는 직원들을 상대로 ‘1000건 규제 발굴하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요.”
농진청은 김 청장을 비롯해 4개 소속 기관장들이 각자 다른 요일에 한 시간씩 ‘해피 콜’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청장이 직접 민원 전화를 받고 나서 민원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고 한다. 청장이 직접 받은 민원은 빨리 해결되는데 일반 직원이 받은 민원은 늦다는 소리가 나올까 봐 누구든 그때그때 해결해 주려다 보니 전체적으로 빨라졌다는 것이다.
굶주림 해방에 기여한 ‘키 작은 밀’은 한국 토종 밀 교배 종자
FAO(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종자관리소 소장을 지낸 경력 때문인지 김 청장은 농진청 산하 농업유전자원센터에 애정이 많다. 농업유전자센터는 27만여 종의 유전자원이 보관돼 있는 국제기구 공인 유전자 보관소다. 그는 “유전자원 보유량 순이 곧 강대국 순”이라며 “토종 유전자원 보존은 물론 해외 유전자원도 부지런히 수집해야 한다”고 말했다.
“키 작은 밀을 개발해 ‘녹색혁명의 아버지’로 불려온 노먼 볼로그 박사 아시죠. 이 박사가 키 작은 밀을 개발하기 위해 교배에 사용한 밀이 토종 한국 밀입니다. 이 박사가 자연재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이 밀을 개발해 세계 10억 인구를 기아로부터 구제했죠. 이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고요. 오늘날 미국은 유전자원 보유량에서 1위 국가지만, 사실 토종 유전자원은 많지 않은 나라입니다. 일찍이 유전자원의 가치를 인식하고 1860년대부터 더플백을 메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결과 오늘날 세계 최강의 유전자 왕국이 됐죠.”
한국은 유전자원 보유량 27만여 종으로 세계 6위이며, 미국은 50만여 종으로 1위다. 하지만 자생식물만으로 보면 한국과 미국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이 많은 한국은 세계 최다 자생식물의 보고(寶庫)다. 한국에는 자생식물이 8700여 종에 이르며 이 중 한약재로 쓰이는 식물이 2000여 종이나 된다. 세계 어디에도 이렇듯 식물이 많은 나라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관리에 소홀해 그동안 외국으로 유출되거나 자연적으로 사라진 식물이 수도 없이 많다. 그나마 유전자원을 보유해 오던 국내 종자회사들은 IMF 때 도산하거나 해외 메이저 회사들에 합병됐다. 당시 개방을 주장한 경제학자들은 해외 기업에 인수합병되면 R&D 투자도 늘고 고용도 창출될 것으로 여겼으나 종자 분야에 관한 한 그것은 착각이었다. 인수합병으로 유전자원을 확보한 해외 종자 회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한국에서 철수했다.
“종자 회사들이 없어지면서 한국에는 육종하는 사람도 점차 줄었어요. IMF 전까지만 해도 50여 명의 전문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10여 명에 불과합니다. 일자리가 없어지니까 대학에서도 육종을 공부하려는 학생이 없어요.”
세계는 종자 전쟁 중
식량 위기에 대비해 선진국들은 치열한 종자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의 대규모 종자 회사들은 GM(유전자조작) 작물은 말할 것도 없고, 병충해에 강한 것, 생산 증대에 유리한 것 등 여러 종자를 개발하고 있다. 그중에는 터미네이터 종자로 불리는 품종이 있는데, 이 종자는 채종이 안 되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이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매번 종자 보유 회사에 고가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씨앗을 구매해야 한다. 김 청장은 “종자 전쟁이 심각한데, 한국은 이 분야에 대한 인식이 약해 걱정”이라고 했다.
그나마 이 분야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곳이 농진청이다. 농업유전자원센터는 올해 국제생물다양성연구소로부터 국제 유전자 보관소로 공인받은 데 이어 국제유전자원협력훈련센터 인증을 받았다. FAO 식량농업식물유전자원 국제조약에 가입하는 등 종자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기반을 착실히 구축해 가고 있다. 김 청장은 “종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연간 120~200종의 토종 자원이 자연생태계가 파괴되거나 우리가 챙기지 않아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국 바닷가 섬으로 가보니까 할머니들이 검은 봉지에 묶어놓은 희귀 작물 씨앗들이 많더군요. 할머니들이 자기만 아는 종자를 관리하고 있는 셈인데,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이들 종자도 사라질 겁니다. 그래서 농진청은 올해 3월부터 전 국민을 상대로 토종 종자 수집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제 3주 정도 됐는데, 상당히 많은 분이 참여하고 있어서 앞으로 캠페인을 좀 더 확대할 계획이에요.”
한국은 자생식물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 우성이 많다. 김 청장은 “5000년 역사에도 사라지지 않고 생존해 왔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농진청이 토종 종자 수집 못지않게 신경 쓰는 사업은 도시민의 귀농(歸農)ㆍ귀촌(歸村) 교육이다. 최근 들어 도시민들 사이에 ‘귀농 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귀농 열풍이 불면서 농식품부를 비롯해 유관 기관과 단체들이 귀농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저희는 도시 직장인들을 위해 서울역에서 야간교육을 하고 있는데, 참가자들이 전직 대기업 임원, 중소기업 경영자, 경찰관, 기자 등 다양해서 놀랐습니다. 수강생 대부분이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분들이었어요. 도시 낙오자가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런 점에서 귀농 열풍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농진청은 육군본부와 MOU를 체결, 전역자를 대상으로 한 귀농 교육도 하고 있다. 김 청장은 “작년에 처음으로 전역자 30명을 대상으로 귀농 교육을 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고 말했다.
“직업 군인들의 경우 전역 후 취업 교육을 받는다 해도 취업률이 48%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52%는 실업자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분들이 농촌으로 가면 마을 지도자가 됩니다. 평생 훈련 교육을 한 분들이라 리더십이 있고, 농촌 지역에 익숙해 적응도 빠르지요.”
―한국 농업기술은 현재 세계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전 세계 농업기술을 수치화해서 100이라고 했을 때 한국은 69 정도로 세계 5위권입니다. 미국이 96으로 1위이고, 캐나다는 우리보다 한 단계 낮죠. 벼 농사 부문은 한국이 압도적으로 1위이고, 육종 재배 기술, 식량 증대 기술 또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성공모델로 언급했을 정도지요.”
농업 기술 개발도상국에 수출
국가나 국민이 농업기술에 무관심할 때 미래 식량 공급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필리핀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1960~70년대만 해도 필리핀은 세계에서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였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에 벼 재배 기술을 전수할 정도로 식량 증대 기술에서도 앞서 나갔다. 사실 통일벼도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와의 공동연구 없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30년이 흐른 지금 필리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쌀을 수입하는 국가로 전락했다.
―국내 농업 기술을 개발도상국에 수출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등 농업 의존도가 높은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우리 기술을 제공해 달라는 ‘러브콜’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 네팔,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등과는 이미 농업기술 협력 강화를 위한 MOU를 체결한 상태지요.”
농진청은 개발도상국 12개 국가와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고, 글로벌 청년리더를 양성해 파견하는 등 국제농업 기술협력 강화를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 그 밖에 농진청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김 청장은 일을 즐기는 타입인 듯 에너지가 넘쳤다. 농진청의 한 직원은 김 청장에 대해 “미국에서 농무관 생활을 했고, FAO에서 파견 근무를 한 데다 기관장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글로벌 CEO 마인드로 무장한 분”이라며 이렇게 평했다.
“그동안 우린 왜 우리 기관이 없어져야 하는 조직으로 낙인찍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장님 같은 분이 오신 것은 여러 가지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고민도 많았는데 이제는 ‘우리도 열심히 하니까 1등이 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일할 기운이 납니다.”⊙
국민을 기아(飢餓)로부터 해방시키며 식량자급 시대로 이끈 것이 통일벼지만 양보다 질을 따질 정도로 먹을거리가 풍성해지면서 통일벼의 존재는 잊혀 갔다. 그와 더불어 농진청도 국민들의 의식 밖으로 밀려났다.
그 때문이었을까. 2008년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농진청은 존폐 위기에 처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부 조직개편안을 짜면서 농진청을 통폐합 대상에 올린 것이다. 갑론을박이 지속됐다. 결국 폐지 대상에서는 제외됐지만 농민과 더불어 농진청 직원들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언제 또다시 존폐 논란에 휩싸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지난 3월 19일. 농진청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2009 정부업무평가’에서 39개 중앙행정기관 중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다.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2년 연속 7건씩 선정되는 등 외부기관 평가 결과 23개 부문에서 우수기관으로 뽑혔다. 또한 지난 2월 3일 청와대에서 개최된 ‘제7차 녹색성장위원회’에서 ‘녹색기술 개발과 현장실용화’를 보고하여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사라질 뻔한 기관이 불과 2년여 만에 화려하게 부활한 셈이다. 그 사이 농진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농진청 본청을 찾았다.
옥수수 수염음료, 쌀 막걸리도 농진청이 원천기술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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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장기이식용 무균 복제돼지 ‘지노’. |
이 특수 조직의 수장이 김재수(金在水) 청장이다. 고시 출신인 그는 30여 년 동안 농림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 청장은 지난해 1월 취임했다.
―농진청이 부처 통폐합 대상에 올랐을 때 김 청장은 농식품부에 있었는데, 그때 이 문제를 어떻게 봤나요.
“통일벼 개발 등 그간 일궈낸 성과와 실적을 간과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향후 미국 경제를 이끌 5대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농업기술을 지목했고, 일본도 농업을 국가 경제 강화 핵심 분야 중 하나로 선정, 언론에서 연일 특집으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의 공통점은 농업 강국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농업 기반 없이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는 없어요. 식량 공급이 안정돼야 산업도 발전하게 마련이죠.”
―농진청 통폐합 발상부터 잘못됐다는 얘기인가요.
“제가 알기로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에는 농업을 제대로 아는 인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농진청을 대다수 국민이 알고 있듯 단순히 벼 증산 기술을 연구하는 곳 정도로 이해했을 거예요. 농진청은 식량 증산 기술은 물론 건강과 미용에 좋은 기능성 식품, 동식물을 이용한 신의약 소재 등 제2의 녹색혁명을 이끌 농산업 분야를 총망라해 연구개발하고 있는 곳입니다.”
김 청장의 말처럼 우리 국민 대다수는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유명 옥수수 수염 음료나 쌀 막걸리, 누에 관련 건강보조 식품 등의 원천기술을 농진청이 개발한 것이라고 하면 “정말이냐”며 놀란다. 농진청이 개발한 신품종 장미나 딸기 덕분에 농업인들이 일본이나 유럽에 지출해야 하는 로열티가 연 수억 원씩 절감되고 있다는 것도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그러니 현재 연구 진행 중이거나 이미 개발돼 임상 시험 단계에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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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진흥청은 지난해 12개 개발도상국과 농업 기술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
세계 최초로 실크 인공고막 소재도 개발
―국민들은 농진청의 상징적 이미지로 여전히 ‘통일벼’를 떠올립니다.
“농진청은 업무 특성상 자연과학 전공자들이 많았고, 지금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농대 졸업 후 연구에 치중해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지요. 그러다 보니 과거 30년 동안은 통일벼 개발 등으로 박수를 받았지만 이제는 시대 흐름에 맞춰 기능성 식품과 도시농업 개발 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걸 간과한 것이죠. 농진청 이미지가 이분들과 함께 ‘통일벼’로 고착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 후 시대 흐름에 맞춰 빠르게 적응했고, 지금은 농업기술을 선도해 나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농진청은 그동안 우리 농산물에서 항산화ㆍ항당뇨ㆍ항암 효과를 내는 유전자를 발굴했고, 이들 농산물에서 추출한 성분을 다양한 기능성 식품과 식의약용 소재로 활용하기 위해 산업체와 공동으로 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또한 돼지 껍질과 감귤 껍질 등 농축산물 부산물을 이용한 새로운 농가 소득원을 창출하기도 했다. 돼지 껍질에서 저분자 콜라겐 단백질을 분리해 뼈 성장 촉진 물질을 개발했고, 감귤 껍질에서 인공피부 등 의료용ㆍ산업용 소재로 활용할 수 있는 감귤 젤을 추출했다.
누에나 곤충, 돼지 등에서도 고부가가치 신기능성 소재를 발굴했다. 세계 최초로 누에고치를 이용해 인공고막용 실크 소재를 개발했고, 바이오장기용 형질전환 복제돼지를 개발해 생산 시스템까지 갖춰 놓은 상태다. 실크 인공고막용 소재는 인체에 가장 친화적이고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농진청은 이 소재에 대한 지적재산권 확보를 위해 한국,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등 국내외 5개국에 특허 출원했고, 조기 실용화를 위해 임상시험을 추진 중이다. 농진청 측은 “현재 세계 인공고막 시장은 2500억원 규모로, 실크 인공고막은 2013년부터 상용화될 예정”이라며 “이때가 되면 연간 150억원의 농가 소득과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형질전환 복제돼지의 경우 “2020년이면 130억 달러 규모의 장기이식 시장이 형성돼 형질전환 복제돼지가 녹색성장의 주역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 밖에 식·약용 곤충 개발, 봉독(蜂毒)을 이용한 동물용 천연항생제 연구개발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연구는 첨단, 홍보는 1차 산업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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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5월 이명박 대통령과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참관한 가운데 양국의 대표가 녹색산업 분야 협력을 위한 MOU 체결에 사인하고 있는 모습. |
“농진청이 연구 중심이다 보니 그동안 홍보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농진청 고객을 농업인으로 한정하고 농업 전문지나 농민들만 상대로 홍보했으니 국민에게 다가갈 기회가 없었죠. 농업을 IT, BT, NT 등의 첨단과학과 접목시켜 연구하면서도 홍보는 1차 산업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겁니다. 이 역시 연구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 빚은 결과죠. 앞으로는 좀 더 다양한 채널을 통해 국민들에게 다가갈 계획입니다.”
김 청장은 “농진청이 국민과 소통하지 못한 것은 홍보뿐만 아니라 연구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실용성보다는 연구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연구실 밖 현장을 소홀히 한 결과라고 했다. 김 청장은 지난해 1월 청장 취임과 동시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농촌진흥청’을 만들겠다고 선언,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지난 2년여 동안 농진청에 크고 작은 변화가 많았던데요.
“농진청은 2008년 존폐 위기에서 벗어난 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우선 기존 9개 소속기관을 4개로 통폐합했고, 전 직원의 업무 역량을 전ㆍ후반기로 나누어 철저히 평가했죠. 이 과정에 298명의 직원들이 스스로 나가거나 보직 해임 방식으로 퇴출됐습니다. 정기 종합평가에서 하위 10%의 직원은 보직 해임시켰고, 하위 20%에는 경고 메시지를 보냈으며, 하위 50%의 직원에게는 재교육 기회를 주는 식이었죠.”
인적쇄신을 위한 이 평가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농진청 관계자는 “일반 기업처럼 엄격한 역량 평가를 시행하자 초기엔 일부 직원들이 ‘정권을 위한 평가’라며 국회에 나가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대다수 직원은 객관적 지표를 기준으로 한 만큼 공정한 평가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매주 1시간씩 청장이 민원전화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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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진청은 지난해 4월 생활공감 녹색기술대전을 개최해 300여 건의 생활 밀착형 녹색기술을 발굴했다. |
39개 국내외 대학, 산업체ㆍ연구기관 등과 연구협력 MOU(양해각서)를 추진하고, 외부에서 첨단기술 인력 70여 명을 특별 채용했다. 그 결과 2007년 59% 수준이었던 농업인 영농기술 활용 만족도가 2009년에는 71.2%로 대폭 향상됐다. 국유 특허 2086건 중 농진청 보유 특허가 54%나 되는 성과도 냈다.
―기관장이 민원 전화를 직접 받는 곳은 농진청이 유일할 것 같네요.
“매주 목요일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한 시간씩 받습니다. 실무자들이 받으면 왜곡 보고되는 경우가 많아 직접 들어보고자 나섰죠. 받다 보니 해야 할 일이 참 많더군요.”
―주로 어떤 민원이던가요.
“통계를 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귀농 교육 서적은 현장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니 보완해 달라, 사업자 선정을 위한 서류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환경 규제가 심해 내 집 지붕도 함부로 못 고친다 등 별의별 민원이 다 들어오더군요. 제가 받은 민원 중에는 농촌에 규제가 너무 심하다는 하소연이 가장 많았습니다. 농지, 환경, 식품 위생 등 각 분야에 규제가 많아 농촌서 살기 힘들고 불편하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올해부터는 직원들을 상대로 ‘1000건 규제 발굴하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요.”
농진청은 김 청장을 비롯해 4개 소속 기관장들이 각자 다른 요일에 한 시간씩 ‘해피 콜’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청장이 직접 민원 전화를 받고 나서 민원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고 한다. 청장이 직접 받은 민원은 빨리 해결되는데 일반 직원이 받은 민원은 늦다는 소리가 나올까 봐 누구든 그때그때 해결해 주려다 보니 전체적으로 빨라졌다는 것이다.
굶주림 해방에 기여한 ‘키 작은 밀’은 한국 토종 밀 교배 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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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월 취임한 김재수 청장은 ‘수요자 중심의 실용화 연구’를 선언, 연구원들에게 현장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
“키 작은 밀을 개발해 ‘녹색혁명의 아버지’로 불려온 노먼 볼로그 박사 아시죠. 이 박사가 키 작은 밀을 개발하기 위해 교배에 사용한 밀이 토종 한국 밀입니다. 이 박사가 자연재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이 밀을 개발해 세계 10억 인구를 기아로부터 구제했죠. 이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고요. 오늘날 미국은 유전자원 보유량에서 1위 국가지만, 사실 토종 유전자원은 많지 않은 나라입니다. 일찍이 유전자원의 가치를 인식하고 1860년대부터 더플백을 메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결과 오늘날 세계 최강의 유전자 왕국이 됐죠.”
한국은 유전자원 보유량 27만여 종으로 세계 6위이며, 미국은 50만여 종으로 1위다. 하지만 자생식물만으로 보면 한국과 미국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이 많은 한국은 세계 최다 자생식물의 보고(寶庫)다. 한국에는 자생식물이 8700여 종에 이르며 이 중 한약재로 쓰이는 식물이 2000여 종이나 된다. 세계 어디에도 이렇듯 식물이 많은 나라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관리에 소홀해 그동안 외국으로 유출되거나 자연적으로 사라진 식물이 수도 없이 많다. 그나마 유전자원을 보유해 오던 국내 종자회사들은 IMF 때 도산하거나 해외 메이저 회사들에 합병됐다. 당시 개방을 주장한 경제학자들은 해외 기업에 인수합병되면 R&D 투자도 늘고 고용도 창출될 것으로 여겼으나 종자 분야에 관한 한 그것은 착각이었다. 인수합병으로 유전자원을 확보한 해외 종자 회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한국에서 철수했다.
“종자 회사들이 없어지면서 한국에는 육종하는 사람도 점차 줄었어요. IMF 전까지만 해도 50여 명의 전문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10여 명에 불과합니다. 일자리가 없어지니까 대학에서도 육종을 공부하려는 학생이 없어요.”
세계는 종자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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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진흥청은 전체 직원의 60%가 연구원이다. |
그나마 이 분야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곳이 농진청이다. 농업유전자원센터는 올해 국제생물다양성연구소로부터 국제 유전자 보관소로 공인받은 데 이어 국제유전자원협력훈련센터 인증을 받았다. FAO 식량농업식물유전자원 국제조약에 가입하는 등 종자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기반을 착실히 구축해 가고 있다. 김 청장은 “종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연간 120~200종의 토종 자원이 자연생태계가 파괴되거나 우리가 챙기지 않아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국 바닷가 섬으로 가보니까 할머니들이 검은 봉지에 묶어놓은 희귀 작물 씨앗들이 많더군요. 할머니들이 자기만 아는 종자를 관리하고 있는 셈인데,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이들 종자도 사라질 겁니다. 그래서 농진청은 올해 3월부터 전 국민을 상대로 토종 종자 수집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제 3주 정도 됐는데, 상당히 많은 분이 참여하고 있어서 앞으로 캠페인을 좀 더 확대할 계획이에요.”
한국은 자생식물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 우성이 많다. 김 청장은 “5000년 역사에도 사라지지 않고 생존해 왔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농진청이 토종 종자 수집 못지않게 신경 쓰는 사업은 도시민의 귀농(歸農)ㆍ귀촌(歸村) 교육이다. 최근 들어 도시민들 사이에 ‘귀농 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귀농 열풍이 불면서 농식품부를 비롯해 유관 기관과 단체들이 귀농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저희는 도시 직장인들을 위해 서울역에서 야간교육을 하고 있는데, 참가자들이 전직 대기업 임원, 중소기업 경영자, 경찰관, 기자 등 다양해서 놀랐습니다. 수강생 대부분이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분들이었어요. 도시 낙오자가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런 점에서 귀농 열풍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농진청은 육군본부와 MOU를 체결, 전역자를 대상으로 한 귀농 교육도 하고 있다. 김 청장은 “작년에 처음으로 전역자 30명을 대상으로 귀농 교육을 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고 말했다.
“직업 군인들의 경우 전역 후 취업 교육을 받는다 해도 취업률이 48%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52%는 실업자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분들이 농촌으로 가면 마을 지도자가 됩니다. 평생 훈련 교육을 한 분들이라 리더십이 있고, 농촌 지역에 익숙해 적응도 빠르지요.”
―한국 농업기술은 현재 세계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전 세계 농업기술을 수치화해서 100이라고 했을 때 한국은 69 정도로 세계 5위권입니다. 미국이 96으로 1위이고, 캐나다는 우리보다 한 단계 낮죠. 벼 농사 부문은 한국이 압도적으로 1위이고, 육종 재배 기술, 식량 증대 기술 또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성공모델로 언급했을 정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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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농촌진흥청에서 젊은 연구원들과 함께한 김재수 청장. |
농업 기술 개발도상국에 수출
국가나 국민이 농업기술에 무관심할 때 미래 식량 공급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필리핀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1960~70년대만 해도 필리핀은 세계에서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였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에 벼 재배 기술을 전수할 정도로 식량 증대 기술에서도 앞서 나갔다. 사실 통일벼도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와의 공동연구 없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30년이 흐른 지금 필리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쌀을 수입하는 국가로 전락했다.
―국내 농업 기술을 개발도상국에 수출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등 농업 의존도가 높은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우리 기술을 제공해 달라는 ‘러브콜’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 네팔,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등과는 이미 농업기술 협력 강화를 위한 MOU를 체결한 상태지요.”
농진청은 개발도상국 12개 국가와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고, 글로벌 청년리더를 양성해 파견하는 등 국제농업 기술협력 강화를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 그 밖에 농진청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김 청장은 일을 즐기는 타입인 듯 에너지가 넘쳤다. 농진청의 한 직원은 김 청장에 대해 “미국에서 농무관 생활을 했고, FAO에서 파견 근무를 한 데다 기관장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글로벌 CEO 마인드로 무장한 분”이라며 이렇게 평했다.
“그동안 우린 왜 우리 기관이 없어져야 하는 조직으로 낙인찍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장님 같은 분이 오신 것은 여러 가지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고민도 많았는데 이제는 ‘우리도 열심히 하니까 1등이 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일할 기운이 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