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분(朴正熙)에 대해 신앙을 가졌지만, 그분은 국가를 위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오. 시행착오가 있었든 없었든 그분의 마음엔 항상 국가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부모도 나한테 그런 정성을 보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분은 국가를 위해 신앙적으로 일했고, 나는 그분을 위해 신앙적으로 일했고….”
오효진
⊙ 1944년 충북 청원 출생.
⊙ 서울대 국문과, 同 대학원 국문학 석사. 美 스프링힐스대 언론연구과정 수료,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 수료.
⊙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MBC 보도국 사회부 기자, 조선일보 사회부장,
서울방송 보도국장ㆍ도쿄지국장ㆍ편성이사, 정부 공보실장 겸 대변인, 청원군수 역임.
⊙ 저서: <오효진의 인간탐험> <개망초의 행복> <인터뷰의 황제가 되는 길>.
오효진
⊙ 1944년 충북 청원 출생.
⊙ 서울대 국문과, 同 대학원 국문학 석사. 美 스프링힐스대 언론연구과정 수료,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 수료.
⊙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MBC 보도국 사회부 기자, 조선일보 사회부장,
서울방송 보도국장ㆍ도쿄지국장ㆍ편성이사, 정부 공보실장 겸 대변인, 청원군수 역임.
⊙ 저서: <오효진의 인간탐험> <개망초의 행복> <인터뷰의 황제가 되는 길>.
1986년 10월경이었다. 3共(공)의 핵심인물로 在野(재야)에 묻혀 입을 다물고 있는 李厚洛(이후락·1924~2009) 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는 것이 언론계의 커다란 과제 중의 하나였다. 우선 그는 10월유신과 金大中(김대중) 납치사건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었고, 평양에 다녀와 남북대화를 이끌어낸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어서, 많은 비화와 비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언론기관이든 그의 입을 열게만 하면 대특종을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많은 언론기관과 언론인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어디도, 누구도, 그 뜻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는 그와 莫逆(막역)하게 지낸 사람을 중간에 넣어서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실패했다더라, 또 누구는 그가 경영하던 島坪窯(도평요)에 가서 며칠간을 서성였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왔다더라 하는 얘기들이 내 귀에 들어왔다.
당시 나는 月刊朝鮮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그가 칩거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도평리에 있는 도평요에 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그 근처를 한 바퀴 돌고 그냥 돌아왔다. 대책 없이 문을 두드렸다간 실패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모한 짓을 하는 대신, 사무실에 앉아서 편지를 썼다.
이런 경우 전화로 하면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쉽다. 상대방이 선입관 때문에 전화를 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편지로는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도 있고 차분하게 설득할 수도 있다.
“오 동지요? 우리 점심이나 합시다”
나는 많은 성공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들이 겉으로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쁘지만 사실은 참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일과의 대부분을 결재하랴, 회의하랴, 현장방문하랴, 행사에 참석하랴, 왔다갔다 하면서 부산하게 보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외롭다. 스스럼없이 찾아와서 부담 없는 얘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이다.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그들은 바쁜 가운데서 외로움에 떨고 있었다. 심지어 현대그룹의 鄭周永(정주영) 회장마저도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상대가 없었다. 무슨 말만 하면 회사에 소문이 나서 벌컥 뒤집히고, 또 기자들에게 알려지면 미디어가 시끄러워진다. 그래서 정 회장의 말년에 내가 그의 말동무가 돼서 한동안 가까이 지낸 적도 있다.
내가 이후락 前(전) 부장에게 쓴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장님,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또 얼마나 하실 말씀이 많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무에게도 속엣말을 하실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저는 부장님의 그런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는 부장님 옆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편안히 듣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결코 부장님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 놓고 내가 어떤 사람이며, 그동안 아무아무랑 인터뷰를 해왔고, 그분들과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써서 신뢰감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맺었다.
‘혹시 평소에 혼자 점심을 잡수시면 저랑 함께 드시면 어떻겠습니까? 기다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올 것이 왔다. 따르릉, 내 책상 위의 전화가 울었다. 이런 소리가 들렸다.
“오 동지요? 나 이후락이요. 우리 점심이나 합시다.”
내가 그의 여린 마음 한가운데를 찔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도평요의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주머니 한 분이 메밀국수를 삶아 내왔다. 생각한 대로 썰렁한 거실 겸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날도 혼자 점심을 들었을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이것도 因緣(인연)입니다. 만나고 싶다고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만나기 싫다고 안 만나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인연이 있어서 만난 겁니다.”
아폴로 눈병 앓던 李厚洛
그가 權座(권좌)에서 물러나 인생무상에 빠졌던 탓일까, 불교에 심취해 그 신도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만남을 인연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슬쩍 떠봤다.
―이런 곳에서 寂寂(적적)하시겠습니다.
예상치 않은 대답이 나왔다.
“날 보고 굉장히 외롭겠다고 하는데 합당치 않은 소리요. 난 參禪(참선)을 한다고요. 이렇게 오 동지하고 얘기를 하면서도 참선을 하고, 불꽃을 보면서도 참선을 해요. 내가 말을 하면 불꽃이 대답을 해요. 참선을 할 때 나는 화두를 是甚?(시심마-이 뭐꼬?)로 정하고 시심마, 시심마, 하고 물어요.”
외로운 걸 부정하는 건지, 긍정하는 건지, 아니면 초월했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 근본 바탕은 외로운 것에서 출발한 것 같았다.
나는 그와의 인간적인 신뢰를 쌓기 위해서 이런 禪問答(선문답)을 하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내가 묻고 싶은 말, 예를 들면 維新(유신)이라든가, 김대중 납치사건 같은 건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졌다. 그도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마침 그는 그때 유행하던 아폴로 눈병을 앓고 있었다. 회사에 돌아와 나는 당시 藥師(약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이었던 李祥羲(이상희)씨를 만났다. 이 의원이 아폴로 눈병의 秘方(비방)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특효약을 지어 달래서 이후락 전 부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특효약을 지어 놨는데 가져다 드렸으면 좋겠다고. 물론 “어서 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만날 빌미를 만드느라고 특효약(사실 약효는 잘 모르지만)을 지어 왔던 것이다.
그날이 1986년 11월 6일이었다. 우리는 구면으로 어느 정도 신뢰관계가 구축돼서 대화를 터놓을 상대가 됐다. 우리는 역시 도평요에서 마주 앉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무서운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라고 그렇게들 알려져 있죠?”
나도 서슴없이 대답했다.
―예, 그게 사실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勢道家(세도가)로도 알려졌지요.
이젠 그도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지요. 그걸 두고 피하고 숨기고 그러고 싶지 않아요. 아는 건 안다, 모르는 건 모른다, 말 못할 건 못 하겠다 하고 대답할 테니, 자 그럼 시작해 봅시다.”
“朴正熙 대통령을 신앙으로 모셨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우리들의 얘기는 이튿날까지 꼬박 이틀간 계속됐다. 그때 있었던 인터뷰 가운데 그의 인간성을 나타내는 부분을 몇 군데 인용한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그만두실 때 “나는 박정희敎(교)의 信者(신자)”라는 말씀을 하셨죠?
“예,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대통령을 신앙으로 모셔야지, 믿어서 될까 안될까 이런 마음이 있어선 안됩니다. 나는 신앙적으로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을 모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잘 아실 텐데요. 그렇게 신앙적으로 모실 만큼 특출하고 훌륭한 분이셨나요?
“결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그런 사람도 일단 신앙적으로 모셔야지, 그 사람의 인격을 봐 가면서 모셔선 안됩니다. 또 지금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분을 證據(증거)하는 박정희교의 교인 노릇을 하겠어요. 나는 그분에 대해 신앙을 가졌지만, 그분은 국가를 위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오. 시행착오가 있었든 없었든 그분의 마음엔 항상 국가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부모도 나한테 그런 정성을 보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분은 국가를 위해 신앙적으로 일했고, 나는 그분을 위해 신앙적으로 일했고….”
이렇게 박정희교의 독실한 신자가 삼선개헌안이 통과된 지 사흘만인 1969년 10월 21일, 金炯旭(김형욱)씨와 암투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또 김대중 납치사건의 책임을 지고 1973년 2월 중앙정보부장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이른바 烹(팽)을 당한 것이다.
―어쨌던 그것(尹必鏞 사건)이 계기가 돼서 대통령으로부터 失寵(실총)하게 됐고, 그것이 불안해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는 설이 있습니다.
“지금 얘기하면 국제적인 파동이 일어납니다. 하여튼 헬리콥터가 뜨고 미국이 살려주고 그런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물러난 건 물론 대통령께서 새 사람을 쓰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지만, 나하고 박 대통령하고 인연이 다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대통령은 사람 쓰는 데 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그토록 희생적으로 分身(분신)처럼 일한 분을 박 대통령은 한 번 해임하고 나선 그렇게 모른 척하고 내박쳤을까요?
“그건 다 내 잘못 때문이지요. 내가 욕 먹을 일을 했는데 만약 그분이 날 커버해 주면 어떻게 되겠어요. 결정적인 게 김대중 사건입니다. 그걸 내가 했다고 다 알려져 있는데 나를 감쌀 수는 없잖아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선 끝내 함구
―실장께서 박정희 대통령의 惡役(악역)배우란 말이 있던데요?
“다 그럴 수 있는 거지. 여하튼 나는 박 대통령을 모신 것을 한평생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김대중 사건에 대해서는 끝내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다 할 수 없어 답답하다고만 했다. 그러나 이른바 10월유신에 대해선 소신을 가지고 말했다.
―‘유신 잔당’에 대해 비난도 하고 추궁도 하고 그러는데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를 유신 잔당이라고 하고 책임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난 조금도 반발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그런 비판을 당연히 받아들여야지요.”
―유신 때는 실장께서 발의도 하고, 궁정동에서 실무팀이 작업을 할 때 리드도 하고, 중간 체크도 하셨다죠. 사람들은 실장을 유신의 주역이라고 믿는데요.
“예, 주역이었죠. 나는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이 다음에 시간이 흐르면 꼭 얘기를 하겠습니다.”
박 대통령이 3선개헌을 하지 않고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류하는 게 옳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옳은 말이요. 그러나 그 당시 최고지도자의 뜻이 그랬고,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그 길을 택한 겁니다.”
그러나 이 대답이 마음에 걸렸던지 그 이튿날 우리가 다시 도평요에서 만났을 때 대뜸 이 얘기부터 꺼냈다.
“그 질문 생각이 나서 내가 어젯밤에 잠을 못 잤소!”
말은 안 했지만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이 불행한 종말을 맞게 되고, 나라도 수렁에 빠지게 된 데 대한 一抹(일말)의 책임과 후회를 느끼는 것 같았다.
손에 쥔 청산가리 캡슐이 녹아
이후락 전 부장은 평양에 가서 金日成(김일성)과 만났을 때의 비화도 소개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4층에서 문이 열리는데 보니까 김일성이 마중을 나와서 손을 내밀더만. 나도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미는데, 여차하면 입에 넣을라고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어서 캡슐이 녹아가지고 손에서 안 떨어져요. 그래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캡슐을 뗀 다음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지요. 그때 내 태도가 수상했던지 김일성이 멈칫합디다.
김일성이 프에블로 사건 때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한 모양입디다. 자기는 박 대통령이 일본과 미국의 충동을 받아 北侵(북침)할까 봐 걱정했다고. 그러고 나서 1·21 사태에 대해 일종의 사과를 할려고 생각했던 모양입디다. 김일성이 ‘소위 청와대 사건에 대해선 대단히 미안하게 됐다. 내가 박 대통령이라도 아마 화가 났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지시한 것도 아니고, 몇몇 과격분자가 저지른 것인데, 그 사람들은 다 철직(해임)시켰다. 그리고 6·25와 같은 일도 앞으론 없을 것이다’ 이렇게 사과를 하더구먼.
김일성이 ‘우리도 공산주의 할라고 한 게 아니라 폭격에 폐허가 된 걸 건설할라고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고 하다가 공산주의가 됐다’ 이런 식으로 얘길 해요.”
장래 꿈은 수학선생님
그는 인간 컴퓨터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계산이 정확하고 앞을 잘 내다봤다. 어쩌면 어릴 적 소양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그의 취미가 수학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초보적인 대수와 기하학을 나 혼자 터득했습니다. 우리 친척 한 분이 계셨는데 신식 학문을 하지 않고 漢文(한문)을 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수학을 또 그렇게 좋아하세요. 둘이 만나면 수학 문제를 내고 푸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중학(울산농업) 다닐 때도 수학에 취미가 있어서 장래 꿈이 수학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또 영어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군에 가서 배운 영어로 출세길을 달렸다. 열아홉 살에 울산농업을 졸업한 그는 규슈에 있는 다치아라이(大刀洗)비행학교에 들어가서 6개월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하얼빈으로 가서 후반기 교육을 받을 때, 그는 이솝우화를 손에 쥐게 된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때 그의 취미는 영어공부였다. 그는 그 실력으로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하게 됐다. 그는 정보장교로 미국 CIA와 연관을 맺고 정보통이 돼서 소장으로 제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수학적 소양을 십분 발휘해서 박 대통령을 보필하는 일에 열중했고,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박정희 대통령 측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가 그렇게 일편단심으로 나라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하지만, 아직 그의 출중한 머리와 능력을 긍적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살아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유명을 달리해서도 계속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그러니 그는 정말 박정희교의 충실한 신도임이 틀림없다. 그가 모셨던 신앙의 敎主(교주) 박 대통령에게 累(누)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명복을 빈다(당시 오효진 기자의 인터뷰는 月刊朝鮮 1986년 12월호에 <오효진의 인간탐험-비밀의 주인공 이후락>이란 제목으로 실렸다-편집자 주).⊙
어느 언론기관이든 그의 입을 열게만 하면 대특종을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많은 언론기관과 언론인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어디도, 누구도, 그 뜻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는 그와 莫逆(막역)하게 지낸 사람을 중간에 넣어서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실패했다더라, 또 누구는 그가 경영하던 島坪窯(도평요)에 가서 며칠간을 서성였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왔다더라 하는 얘기들이 내 귀에 들어왔다.
당시 나는 月刊朝鮮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그가 칩거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도평리에 있는 도평요에 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그 근처를 한 바퀴 돌고 그냥 돌아왔다. 대책 없이 문을 두드렸다간 실패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모한 짓을 하는 대신, 사무실에 앉아서 편지를 썼다.
이런 경우 전화로 하면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쉽다. 상대방이 선입관 때문에 전화를 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편지로는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도 있고 차분하게 설득할 수도 있다.
“오 동지요? 우리 점심이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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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刊朝鮮 1986년 12월호에 실린 필자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인터뷰 기사. |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그들은 바쁜 가운데서 외로움에 떨고 있었다. 심지어 현대그룹의 鄭周永(정주영) 회장마저도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상대가 없었다. 무슨 말만 하면 회사에 소문이 나서 벌컥 뒤집히고, 또 기자들에게 알려지면 미디어가 시끄러워진다. 그래서 정 회장의 말년에 내가 그의 말동무가 돼서 한동안 가까이 지낸 적도 있다.
내가 이후락 前(전) 부장에게 쓴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장님,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또 얼마나 하실 말씀이 많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무에게도 속엣말을 하실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저는 부장님의 그런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는 부장님 옆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편안히 듣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결코 부장님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 놓고 내가 어떤 사람이며, 그동안 아무아무랑 인터뷰를 해왔고, 그분들과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써서 신뢰감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맺었다.
‘혹시 평소에 혼자 점심을 잡수시면 저랑 함께 드시면 어떻겠습니까? 기다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올 것이 왔다. 따르릉, 내 책상 위의 전화가 울었다. 이런 소리가 들렸다.
“오 동지요? 나 이후락이요. 우리 점심이나 합시다.”
내가 그의 여린 마음 한가운데를 찔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도평요의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주머니 한 분이 메밀국수를 삶아 내왔다. 생각한 대로 썰렁한 거실 겸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날도 혼자 점심을 들었을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이것도 因緣(인연)입니다. 만나고 싶다고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만나기 싫다고 안 만나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인연이 있어서 만난 겁니다.”
아폴로 눈병 앓던 李厚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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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락 전 부장이 말년을 보낸 경기도 광주의 도평요. |
나는 식사를 하면서 슬쩍 떠봤다.
―이런 곳에서 寂寂(적적)하시겠습니다.
예상치 않은 대답이 나왔다.
“날 보고 굉장히 외롭겠다고 하는데 합당치 않은 소리요. 난 參禪(참선)을 한다고요. 이렇게 오 동지하고 얘기를 하면서도 참선을 하고, 불꽃을 보면서도 참선을 해요. 내가 말을 하면 불꽃이 대답을 해요. 참선을 할 때 나는 화두를 是甚?(시심마-이 뭐꼬?)로 정하고 시심마, 시심마, 하고 물어요.”
외로운 걸 부정하는 건지, 긍정하는 건지, 아니면 초월했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 근본 바탕은 외로운 것에서 출발한 것 같았다.
나는 그와의 인간적인 신뢰를 쌓기 위해서 이런 禪問答(선문답)을 하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내가 묻고 싶은 말, 예를 들면 維新(유신)이라든가, 김대중 납치사건 같은 건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졌다. 그도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마침 그는 그때 유행하던 아폴로 눈병을 앓고 있었다. 회사에 돌아와 나는 당시 藥師(약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이었던 李祥羲(이상희)씨를 만났다. 이 의원이 아폴로 눈병의 秘方(비방)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특효약을 지어 달래서 이후락 전 부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특효약을 지어 놨는데 가져다 드렸으면 좋겠다고. 물론 “어서 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만날 빌미를 만드느라고 특효약(사실 약효는 잘 모르지만)을 지어 왔던 것이다.
그날이 1986년 11월 6일이었다. 우리는 구면으로 어느 정도 신뢰관계가 구축돼서 대화를 터놓을 상대가 됐다. 우리는 역시 도평요에서 마주 앉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무서운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라고 그렇게들 알려져 있죠?”
나도 서슴없이 대답했다.
―예, 그게 사실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勢道家(세도가)로도 알려졌지요.
이젠 그도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지요. 그걸 두고 피하고 숨기고 그러고 싶지 않아요. 아는 건 안다, 모르는 건 모른다, 말 못할 건 못 하겠다 하고 대답할 테니, 자 그럼 시작해 봅시다.”
“朴正熙 대통령을 신앙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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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3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의 충남도청 시찰에 수행한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왼쪽). |
―대통령 비서실장을 그만두실 때 “나는 박정희敎(교)의 信者(신자)”라는 말씀을 하셨죠?
“예,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대통령을 신앙으로 모셔야지, 믿어서 될까 안될까 이런 마음이 있어선 안됩니다. 나는 신앙적으로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을 모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잘 아실 텐데요. 그렇게 신앙적으로 모실 만큼 특출하고 훌륭한 분이셨나요?
“결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그런 사람도 일단 신앙적으로 모셔야지, 그 사람의 인격을 봐 가면서 모셔선 안됩니다. 또 지금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분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분을 證據(증거)하는 박정희교의 교인 노릇을 하겠어요. 나는 그분에 대해 신앙을 가졌지만, 그분은 국가를 위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오. 시행착오가 있었든 없었든 그분의 마음엔 항상 국가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부모도 나한테 그런 정성을 보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분은 국가를 위해 신앙적으로 일했고, 나는 그분을 위해 신앙적으로 일했고….”
이렇게 박정희교의 독실한 신자가 삼선개헌안이 통과된 지 사흘만인 1969년 10월 21일, 金炯旭(김형욱)씨와 암투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또 김대중 납치사건의 책임을 지고 1973년 2월 중앙정보부장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이른바 烹(팽)을 당한 것이다.
―어쨌던 그것(尹必鏞 사건)이 계기가 돼서 대통령으로부터 失寵(실총)하게 됐고, 그것이 불안해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는 설이 있습니다.
“지금 얘기하면 국제적인 파동이 일어납니다. 하여튼 헬리콥터가 뜨고 미국이 살려주고 그런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물러난 건 물론 대통령께서 새 사람을 쓰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지만, 나하고 박 대통령하고 인연이 다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대통령은 사람 쓰는 데 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그토록 희생적으로 分身(분신)처럼 일한 분을 박 대통령은 한 번 해임하고 나선 그렇게 모른 척하고 내박쳤을까요?
“그건 다 내 잘못 때문이지요. 내가 욕 먹을 일을 했는데 만약 그분이 날 커버해 주면 어떻게 되겠어요. 결정적인 게 김대중 사건입니다. 그걸 내가 했다고 다 알려져 있는데 나를 감쌀 수는 없잖아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선 끝내 함구
―실장께서 박정희 대통령의 惡役(악역)배우란 말이 있던데요?
“다 그럴 수 있는 거지. 여하튼 나는 박 대통령을 모신 것을 한평생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김대중 사건에 대해서는 끝내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다 할 수 없어 답답하다고만 했다. 그러나 이른바 10월유신에 대해선 소신을 가지고 말했다.
―‘유신 잔당’에 대해 비난도 하고 추궁도 하고 그러는데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를 유신 잔당이라고 하고 책임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난 조금도 반발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그런 비판을 당연히 받아들여야지요.”
―유신 때는 실장께서 발의도 하고, 궁정동에서 실무팀이 작업을 할 때 리드도 하고, 중간 체크도 하셨다죠. 사람들은 실장을 유신의 주역이라고 믿는데요.
“예, 주역이었죠. 나는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이 다음에 시간이 흐르면 꼭 얘기를 하겠습니다.”
박 대통령이 3선개헌을 하지 않고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류하는 게 옳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옳은 말이요. 그러나 그 당시 최고지도자의 뜻이 그랬고,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그 길을 택한 겁니다.”
그러나 이 대답이 마음에 걸렸던지 그 이튿날 우리가 다시 도평요에서 만났을 때 대뜸 이 얘기부터 꺼냈다.
“그 질문 생각이 나서 내가 어젯밤에 잠을 못 잤소!”
말은 안 했지만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이 불행한 종말을 맞게 되고, 나라도 수렁에 빠지게 된 데 대한 一抹(일말)의 책임과 후회를 느끼는 것 같았다.
손에 쥔 청산가리 캡슐이 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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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락 전 부장은 1972년 5월 김일성(오른쪽)과 만나 비밀협상을 했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4층에서 문이 열리는데 보니까 김일성이 마중을 나와서 손을 내밀더만. 나도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미는데, 여차하면 입에 넣을라고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어서 캡슐이 녹아가지고 손에서 안 떨어져요. 그래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캡슐을 뗀 다음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지요. 그때 내 태도가 수상했던지 김일성이 멈칫합디다.
김일성이 프에블로 사건 때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한 모양입디다. 자기는 박 대통령이 일본과 미국의 충동을 받아 北侵(북침)할까 봐 걱정했다고. 그러고 나서 1·21 사태에 대해 일종의 사과를 할려고 생각했던 모양입디다. 김일성이 ‘소위 청와대 사건에 대해선 대단히 미안하게 됐다. 내가 박 대통령이라도 아마 화가 났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지시한 것도 아니고, 몇몇 과격분자가 저지른 것인데, 그 사람들은 다 철직(해임)시켰다. 그리고 6·25와 같은 일도 앞으론 없을 것이다’ 이렇게 사과를 하더구먼.
김일성이 ‘우리도 공산주의 할라고 한 게 아니라 폭격에 폐허가 된 걸 건설할라고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고 하다가 공산주의가 됐다’ 이런 식으로 얘길 해요.”
장래 꿈은 수학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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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1일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 차려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빈소. |
“초등학교 때부터 초보적인 대수와 기하학을 나 혼자 터득했습니다. 우리 친척 한 분이 계셨는데 신식 학문을 하지 않고 漢文(한문)을 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수학을 또 그렇게 좋아하세요. 둘이 만나면 수학 문제를 내고 푸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중학(울산농업) 다닐 때도 수학에 취미가 있어서 장래 꿈이 수학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또 영어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군에 가서 배운 영어로 출세길을 달렸다. 열아홉 살에 울산농업을 졸업한 그는 규슈에 있는 다치아라이(大刀洗)비행학교에 들어가서 6개월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하얼빈으로 가서 후반기 교육을 받을 때, 그는 이솝우화를 손에 쥐게 된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때 그의 취미는 영어공부였다. 그는 그 실력으로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하게 됐다. 그는 정보장교로 미국 CIA와 연관을 맺고 정보통이 돼서 소장으로 제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수학적 소양을 십분 발휘해서 박 대통령을 보필하는 일에 열중했고,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박정희 대통령 측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가 그렇게 일편단심으로 나라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하지만, 아직 그의 출중한 머리와 능력을 긍적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살아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유명을 달리해서도 계속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그러니 그는 정말 박정희교의 충실한 신도임이 틀림없다. 그가 모셨던 신앙의 敎主(교주) 박 대통령에게 累(누)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명복을 빈다(당시 오효진 기자의 인터뷰는 月刊朝鮮 1986년 12월호에 <오효진의 인간탐험-비밀의 주인공 이후락>이란 제목으로 실렸다-편집자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