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는 나세르를 계승하여 혁명의 원대한 목표인 통일 아랍국가를 건설하고자 힘을 썼다. 그러나 꿈은 아름다우나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카다피는 현실감 떨어지는 아랍민족주의와 격정적인 反서구 大義에 자승자박하여 지난 40년간 국가 경제 개발에 써야 할 오일머니를 리비아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거창한 구호에 날려 보냈다.
朴炫度 서강대 종교연구소 책임연구원
카다피는 현실감 떨어지는 아랍민족주의와 격정적인 反서구 大義에 자승자박하여 지난 40년간 국가 경제 개발에 써야 할 오일머니를 리비아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거창한 구호에 날려 보냈다.
朴炫度 서강대 종교연구소 책임연구원
- 지난 9월 23일 카다피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96분간에 걸쳐 장광설을 늘어놨다. 연설 도중 물을 마시는 카다피. 뒤에 앉은 총회의장인 알리 트레키 전 리비아 외무장관도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혁명, 무슬림 원리주의 혁명을 꿈꾸는 中東(중동)의 미친개(mad dog of the middle east).”
1986년 4월 9일 기자회견에서 리비아의 거듭된 테러 행위에 진저리가 난 로널드 레이건 美(미) 대통령이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를 지칭한 말이다.
레이건은 카다피를 野蠻人(야만인, barbarian), 믿을 수 없는 인간(flaky), 狂信徒(광신도, zealot)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반면 카다피를 지지하거나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를 혁명戰士(전사), 反(반)제국주의 투사, 심지어 영웅으로 推仰(추앙)한다.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카다피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체어맨 초이(카다피가 崔元碩 동아건설 회장을 부르던 호칭)’가 진두지휘한 동아건설의 리비아 대수로 사업을 세계 8대 不可思議(불가사의)로 극찬한 국가원수, 사막 지하에서 끌어 온 물이 콸콸 쏟아지자 그 속에서 춤추던 리비아 국민들의 지도자로 刻印(각인)되어 있다. ‘체어맨 초이’의 말에 따르면 대수로 공사로 인해 親北(친북)에서 親韓(친한)으로 돌아선 사람이다.
격정적인 長廣舌(장광설), 미녀 무장경호원, 유목민 텐트생활, 스누피 모자 같은 독특한 패션 스타일, 그리고 이탈리아가 처형한 리비아 독립투쟁의 영웅 우마르 알 무흐타르(Umar al-Mukhtar, 18 62~1931)의 사진을 가슴에 달고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세간의 주목을 끈 카다피는 다양한 이미지와 눈에 띄는 생활습속으로 끊임없이 화제를 생산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오랜 적개심을 한 수 접으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1942년 시르트(Sirte) 사막에서 가난한 베드윈, 즉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카다피의 이름은 무암마르다. 카다피는 카다파 부족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랑아, 惡漢, 사막의 使徒
서구 언론에서 험한 政治歷程(정치역정)의 카다피를 묘사하는 단어 중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 浮浪兒(부랑아, pariah)다. 혁명가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70~80년대에 그는 反西歐(반서구) 제국주의 혁명을 수출하고 이식하기 위해 전 세계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알제리, 시리아, 이집트 등 여러 국가와 아랍 통일국가를 모색했고, 가나, 감비아, 모로코, 소말리아, 수단, 에티오피아, 튀니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애를 썼다. 우간다와 차드에 派兵(파병)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 개입할 뿐 아니라 레바논, 요르단 내 테러활동을 후원했다. 또 미국 팬암과 프랑스의 UTA 등 민간 항공기를 폭파하기도 했다.
오지랖이 넓어 일은 많이 벌였지만 所期(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 채 남은 것은 惡漢(악한) 이미지뿐이다.
사막은 카다피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혁명 직후 그와 주변 인물들을 직접 인터뷰한 책으로 현재까지 중요한 카다피 전기로 인정받는 이탈리아 작가 비앙코의 <사막의 使徒(사도) 카다피(Kadhafi, Messager du De、sert)>에 따르면 카다피가 취하는 모든 선택, 결정, 행동의 저변에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복종하는 무한하고, 완전하며 절대적인 사막인의 자유가 흐르고 있다.
자신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거나 아첨 받는 것을 혐오하고, 모든 일을 협의해서 하기에 그는 결코 권위적일 수 없다. 이런 그의 심성이 사막에서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의 행동 면모는 책의 내용과 크게 다르다. 정권을 잡은 지 얼마 안된 1970년대 초반에 리비아 거리 곳곳에는 “권위를 지닌 자에 복종하라” “牧者(목자)는 양떼를 인도한다”라는 내용의 포스터가 나붙었고, 아첨을 싫어한다지만 측근 음악가 무함마드 하산이 1976년에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에 견주어 그를 ‘아라비아 사막의 사도’로 부른 노랫말을 썼다.
가난한 유목민의 아들
어쩌면 그가 어린 시절 사막에서 배운 것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텐트생활이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리비아 全(전) 국민이 집을 소유할 때까지 텐트에서 지내겠다는 것이 카다피의 다짐이다.
그의 텐트 사랑은 유달라, 외국 순방길에서도 호텔 대신 텐트를 치고 지낸다. 이번 미국行(행)에서만 뉴욕 시민의 거센 반발로 텐트 숙박이 무산됐을 뿐, 2007년 파리, 2008년 로마, 모스크바 방문 때에는 모두 베드윈 전통대로 텐트에서 묵었다.
潘基文(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아프리카 순방 때 리비아에서 카다피를 만났는데, 그 장소가 텐트였다. 면담 도중 텐트 안으로 날아들어 온 不請客(불청객) 파리는 직접 잡고, 쥐는 수행원들에게 잡으라고 지시를 내리는 통에 잠시 대담이 중단됐다고 한다.
카다피의 아버지는 가난한 유목민이었지만 유일한 아들이 비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보냈다. 아버지의 평가에 따르면 카다피는 知的(지적) 능력이 뛰어났고, 가족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녔으며,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다고 한다.
사막을 떠나 약 30km 떨어진 시르트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가난했기에 모스크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가난보다 그를 더 괴롭혔던 것은 베드윈에 대한 사회적 냉대였다. 늦게 입학한 관계로 또래보다 나이가 더 많았던 어린 카다피는 급우들에게 베드윈임을 드러내놓고 다녔고, 친구들은 그의 당당함과 우수한 성적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세브하(Sebha) 중학교에서는 시위를 주도하다 퇴학을 당했다.
청소년기 카다피를 사로잡은 것은 이집트의 나세르(Nasser, 1918~1970)였다. 1952년 7월 23일 나세르 중령은 자유장교단을 이끌고 무함마드 알리 王政(왕정)을 전복, 공화정을 세운 혁명가다. 1970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앞세워 서구식 자본주의도 소련식 공산주의도 아닌 아랍식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
적극적 중립정책으로 유명한 그의 외교노선은 미국과 소련 모두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要諦(요체)지만 反(반)이스라엘, 반서구적 태도로 인해 소련과 더 가까운 길을 걸었다.
열광적인 나세르 지지자
카다피는 열광적인 나세르 지지자였다. 그는 당시 리비아 이드리스 왕정이 금지한 나세르의 <혁명철학> 등 禁書(금서)를 읽고, 이집트 당국이 나세르의 혁명을 선전하기 위해 전 아랍지역에 송출한 ‘아랍의 소리’ 라디오 방송을 애청하며 혁명을 꿈꾸기 시작했다. 불과 16세 때 일이다.
그는 친한 친구들과 혁명사상을 함께 공부하며 리비아의 부패한 왕정을 전복하고 나세르가 주창한 것처럼 서구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에도 여전히 서구에 의존하면서 여러 나라로 뿔뿔이 갈라진 아랍국가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공유했다.
카다피는 힘이 있어야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깨닫고 1963년 고등학교 졸업 후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이듬해 나세르를 본받아 자유통일장교단을 결성했다. 군에 있으면서 그는 벤가지(Benghazi)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1966년에는 영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때 그는 리비아의 유명한 石油商(석유상)이 카지노에서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도박하는 모습을 보고는 “우리 돈을 훔쳐다가 한다는 짓이 기껏 이 짓이야!”라며 분노를 표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식민지 시대(1911~1943년)를 거쳐 2차대전 후인 1949년 유엔총회가 독립을 결의하고 1951년 독립국가로 출범한 리비아 왕국은 1956년 12월 産油國(산유국)이 됐다. 그러나 무능한 이드리스(1889~1983) 국왕은 석유로 인한 國富(국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미국과 영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면서 열강의 입김에 휘둘린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정부 시위의 주축은 학생이었고, 주동자는 카다피였다. 카다피는 軍內(군내) 자유통일장교단 외에도 민간 차원의 혁명 조직을 비밀리에 결성했다. 이 두 조직은 카다피만 알고 있을 뿐 군과 민간 조직원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다. 카다피는 조직을 결성할 때 출신성분은 따지지 않았다.
軍(군) 상관들은 카다피를 몽상가로 간주해 그의 혁명의지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1969년 3월 혁명모의가 발각됐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별 제재 없이 넘어갔다.
27세의 대위, 쿠데타로 대권 잡아
결국 그로부터 6개월 뒤인 8월 31일 밤에 시작된 군사혁명은 9월 1일 새벽 성공했다. 27세의 카다피 대위가 리비아의 大權(대권)을 쥔 것이다.
나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아랍 사회 전통에 비춰보면 파격 중의 파격인 어린 지도자였다. 37세에 즉위한 요르단 압둘라 국왕이나 35세에 집권한 시리아의 바샤르 대통령보다 무려 10년이나 더 어린 나이에 대권을 접수했으니 말이다.
혁명이 성공한 후 그는 다른 군사혁명가들과 달리 별을 달지 않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대령으로 진급, 오늘날까지 이 계급을 유지하고 있다.
카다피의 군사혁명은 나세르의 정신을 계승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스승 나세르는 카다피 혁명 다음해에 사망했고, 혈기왕성한 나이에 지도자가 된 ‘나세르주의의 고아’ 카다피는 스승의 빈자리를 스스로 메우고자 盡力(진력)한다.
정권이 안정되면서 그는 자신의 국정철학을 담은 3권의 <그린북>(Green Book)을 발행한다. 제1권은 <민주주의 문제 해결책>(1975년 발행), 제2권은 <경제문제의 해결책>(1978년 발행), 제3권은 <제3 보편이론의 사회적 기반>(1981년 발행)이다.
이 책의 모델은 나세르가 1954년에 발행한 <혁명철학>과 마오쩌둥(毛澤東)의 <마오쩌둥 어록>(일명 <레드북>)이다. 카다피의 사상이 나세르의 혁명철학과 크게 다른 점은 나세르는 汎(범)아랍주의를 강조한 반면, 카다피는 거기에 아프리카까지 포함했다는 점이다.
대단히 거창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린북>은 카다피의 語錄(어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권에 나오는 흑인에 대한 카다피의 생각을 보자.
“뜨거운 태양 아래 일하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흑인들과 달리 다른 인종들은 피임, 결혼제한, 직장일 등으로 인해 인구가 줄고 있다”.
여성에 대한 생각은 평범하다 못해 실소가 나온다.
“여자(woman)는 여성(female)이고 남자(men)는 남성(male)이다. 산부인과 의사에 따르면 여자는 매달 월경을 하는 반면 남자는 남성이기에 생리를 하지 않고 생리통도 없다.”
문제는 이렇게 지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새로운 사실도 아닌 말들을 지도자의 통치이념과 생각으로 여기고 국민들이 반드시 읽고 암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중민주주의를 가장한 전체주의
카다피는 1973년 관료체제와 지식층을 와해시키고자 주와라에서 5가지 원칙을 발표한다.
첫째, 모든 법을 효력정지하고 이슬람법을 실행한다. 둘째, 부정한 정치인을 축출한다. 셋째, 혁명을 수호할 민병대를 조직한다. 넷째, 행정혁명. 다섯째, 문화혁명.
이 중 다섯 번째 문화혁명은 논란을 일으켰다. 종교적 신앙을 지닌 카다피가 무신론자 마오쩌둥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의혹과 오해,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과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계속 문화혁명이라는 말을 썼다.
그가 말한 문화혁명이란 관료주의와 이기주의를 제거하는 대중혁명이다. 대중혁명은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구현된다. 1977년 그는 리비아를 알-자마히리야(al-Jamahiriyyah), 즉 大衆國家(대중국가)라는 新造語(신조어)로 부르며 모든 국민이 일종의 확대된 반상회, 또는 지방자치회와 같은 조직에 참가하여 의견을 내고, 이를 위원회가 수렴하여 최종적으로 카다피에게까지 전해지고 실행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한다.
그는 이를 투표로 대표를 뽑아 민의를 대변하는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완벽한 민주주의라고 한다. 가장 기초단위로 기초대중의회가 있고, 그 위에는 기초대중의회에서 올라온 안건을 다루는 총대중의회가 있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이 제도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 시민사회에서 실행된다면 대단히 훌륭한 결과를 산출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카다피의 리비아는 言路(언로)가 막힌 권위주의 통치체제다. 이런 사회에서 카다피식 대중참여 직접민주주의는 全體主義(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의제나 안건이 민의를 수렴해서 상향식으로 전해지기보다는 통치자가 내려주고 대중은 승인하는 역할을 하는 데 만족하는 하향식 제도로 전락하고 만다.
카다피는 “사막에서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모두가 두려움 없이 사람들을 대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리비아에서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카다피뿐이다.
2002년 기초대중의회에서 민주적 개혁을 요구했던 파트히 알 자흐미는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이것이 카다피가 말하는 대중참여 직접민주주의의 현실이다.
지난 6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이 죽은 후 카다피는 현재 세계 최장기 집권자다. 미 국무부는 리비아 국민의 10~20%가 혁명위원회를 위해 비밀정보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공포정치 속에 경제발전과 복지 증진에 노력
카다피 정권은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혁명 정신에 어긋나는 반대자나 비판자를 제거한다. 국내 거주 인사는 물론 해외 거주 리비아인들까지 처단 대상에 포함한다. 명색이 대중참여 정치이기에 정당은 불법이다. 언론이라고는 官制(관제)언론뿐이다. 당연히 노동조합이나 NGO도 없다. 비판적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카다피가 40년 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는 혁명 이전과 비교해서 혁명 이후 리비아의 생활수준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독립하던 해인 1951년 리비아는 세계 最貧國(최빈국) 중 하나로 국민소득이 1인당 25달러에 불과했다. 지금은 1만4000달러에 이른다. 석유의 힘이다.
카다피의 혁명 이전에도 리비아는 산유국이었다. 하지만 리비아의 석유를 통제하는 것은 석유회사들이었다. 1958년 당시 리비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드리스 왕정으로부터 양도권을 얻은 42개 석유회사 소유였다.
왕정은 석유회사로부터 상당한 배당금을 받았지만 경제발전에 노력하지 않았다. 산업 발전 없이 부동산 투기가 시작됐다. 도시 빈민은 늘어가고, 농목축업은 피폐해졌으며, 교육·국민보건 등 삶의 질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리비아에는 대학졸업자가 10명이 되지 않았고, 독립 후에도 교육 정도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1956년에 중등학생은 2525명(여학생 25명), 문과대 입학생은 31명에 불과했다.
카다피의 혁명은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카다피는 외국 석유회사의 횡포를 막고 점차 석유산업을 장악했다. 혁명이 발발하던 1969년 11억 달러였던 석유수입이 5년 후인 1974년에는 80억 달러가 됐다.
카다피는 이렇게 증가한 수입을 국민복리·교육·농목축업 및 산업개발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1990년대 동아건설이 이룬 大水路(대수로) 공사의 기적도 이 시기에 카다피 혁명정부가 기본 구상을 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석유 수입을 국민을 위해 쓰면서 정작 자신은 텐트생활을 즐기는 검소한 爲政者(위정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혁명 직후 그를 싫어했던 사람은 혁명 이전에 부유했던 사람들이었다. 카다피가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혁명 이전에 無産者(무산자)였던 계층과 젊은층의 카다피에 대한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혁명 이후 리비아인들은 이전보다 더 잘 먹고, 더 건강하고, 더 잘 배우고, 더 좋은 집에서 살게 됐다. 중동·아프리카를 통틀어 걸프국가를 제외한다면 리비아가 단연 가장 잘사는 나라에 속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리비아 국민들은 자부심을 느낀다. 이러한 자부심이 카다피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족주의와 反관료주의로 대중 인기 얻어
과거 리비아를 식민지배했던 이탈리아에 대한 강경 발언도 그의 인기를 높였다. 이탈리아 식민통치기간 동안 리비아는 국민의 절반이 죽거나 망명을 떠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카다피는 혁명 이후 이탈리아인들을 축출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리비아 내 이탈리아 전몰군인 유해를 무덤에서 모두 파내어 가져가게 했다. 리비아 국민들은 이를 보면서 후련해 했다.
여기에 더해 카다피는 석유를 국유화하고, 리비아 내 미국과 영국군 기지를 폐쇄했다. 그의 석유 국유화는 아랍산유국들의 자원민족주의를 자극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석유 무기화를 실천에 옮겼다.
혁명 이후 카다피가 보여준 리비아의 발전상과 검약한 생활, 서구에 굴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 등은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과 같은 공포정치와 더불어 지난 40년간 그가 최고 권력자로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다.
어쩌면 생각나는 대로 과감하게, 눈치 보지 않고 하고픈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대중은 희열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올 2월 카다피는 석유 수입을 관료를 거치지 않고 국민에게 직접 주는 계획을 지지해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깊이 뿌리 박힌 관료들의 부패를 일소하려면 각료를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아예 정부를 없애고 국민들이 직접 꾸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놀란 관리들은 “인플레가 심화되고 각종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한다”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카다피는 “이들이 현재의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고 질타했다.
국민들이 누구 편을 들지는 明若觀火(명약관화)한 일이다. ‘국민이 직접 꾸려가는 정부’는 카다피의 오랜 생각이라지만, 엄밀히 따지면 현재의 어려움은 국외정치에 개입한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를 관료주의 탓으로 돌리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는 모습에서 그가 40년 동안 정권을 유지해 온 노하우를 본다.
생각 다른 외국 국가원수에 테러 위협
카다피는 국내 정치에만 만족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세르를 계승하여 혁명의 원대한 목표인 통일 아랍국가를 건설하고자 힘을 썼다.
서구 열강이 그어 놓은 국경선에 따라 만들어진 분열된 아랍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아랍민족주의 실현의 꿈을 비현실적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비전 있는 정치지도자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를 실현해 나가기 위한 차분하고 치밀한 과정이 없었다. 카다피는 꿈은 아름다우나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혁명 동료들은 한결같이 카다피가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카다피는 듣기보다는 말하는 쪽으로, 그것도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바뀐 듯하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이 먹히지 않으면 폭력적 언어나 행위로 상대를 응징하는 방법을 쓴다.
쪼개진 아랍 세계를 다시 묶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정성이 필요하나 카다피는 이를 급하게 밀어붙였고, 그를 믿지 못하는 아랍국 首長(수장)들은 끝없이 의심했다.
나세르 死後(사후) 이집트의 대권을 쥔 사다트는 1972년 카다피와 부분적으로나마 이집트와 리비아의 통합에 찬성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은 사다트가 맡되 국방장관은 자신이 맡겠다는 카다피를 못 미더워했고, 결국 통합은 물거품이 됐다.
사다트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카다피가 미심쩍었다. 가장 가깝다는 두 나라가 이러했으니 다른 아랍 국가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범아랍 민족주의 실현에 실패한 카다피는 이후 자신의 뜻에 동조하지 않거나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미온적이고 서구에 휘둘리는 아랍국가들에 대해 섬뜩한 말을 내뱉는다.
“나는 책임지고 아랍 지도자들에 대해 테러를 시작할 것이다. 그들을 위협하고 관계도 끊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 목을 하나하나 자르고 싶다.”
서방과의 화해 시도
카다피의 범아랍 통일은 반서구, 반이스라엘과 不可分(불가분)의 관계다. 그는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점령을 9차 십자군 원정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제10차 십자군 원정으로 간주한다. 이스라엘을 중세 예루살렘에 십자군이 세웠던 라틴왕국의 再現(재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카다피의 역사관이 인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종 테러를 후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1972년 뮌헨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검은 9월단, 요인 암살과 항공기 폭파에 연루된 팔레스타인 테러분자 아부 니달 조직 등을 후원했다. 그는 터키 여성 한 명과 미군 두 명이 죽고 50여 명의 미군을 비롯해서 모두 230명이 부상한 1986년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파사건의 배후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리비아 공습을 단행했다. 카다피는 양녀를 잃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카다피가 자행한 수많은 암살, 폭파 사건 중에서도 가장 반인륜적인 것은 1988년 크리스마스 귀성객을 태우고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을 날던 미국 팬암 103 항공기를, 이듬해 아프리카 니제르 사막 상공에서 프랑스 민간 UTA 772 항공기를 폭파해 각각 270명(미국인 190명), 170명의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민항기 폭파사건은 리비아에 유엔 경제제재라는 큰 짐을 안겨다 주었다. 이는 수출의 95%를 차지하는 원유가의 하락으로 인한 수입 감소 및 경제 악화와 국내 정치 불만 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자원을 외교의 무기로 활용
여기에 더해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카다피는 25년 동안 지속해 온 반서구 정책을 누그러뜨리고 화해에 나섰다. 민항기 폭파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에 나선 것이다.
결국 카다피와 서구의 상호 이해가 맞아떨어져 리비아는 핵무기 개발 포기를 선언했다. 미국은 그 보상으로 지난 2006년 5월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리비아를 삭제하고 25년간 단절되었던 양국 간 국교 정상화를 선언했다.
이탈리아는 1911년부터 1943년까지 30여 년간에 걸쳐 리비아를 식민지배한 보상금으로 25년간 50억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2008년 8월 협정을 체결했다. 카다피는 이탈리아를 식민과거를 청산한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로 치켜세웠다.
그렇다고 해서 카다피가 완전히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핵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미국과 씨름하는 이란과 북한을 보면서 괜히 일찍 미국에 굴복했다는 자괴감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는 국교가 정상화되면 미국으로부터 첨단 무기나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워싱턴이 콧방귀도 안 뀌자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고 나섰다. 지난해 11월 카다피는 러시아를 방문해 크렘린 정원에 텐트를 쳤다. 러시아로 떠나기 전날 그는 “리비아와 미국은 친구도 敵(적)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카다피가 이런 행보를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리비아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하는 서구 국가들의 움직임에 힘입은 바 크다. 이탈리아가 적극적인 식민보상을 하는 것도, 영국이 팬암기 폭파범을 암 투병을 이유로 석방한 것도 리비아의 자원에 대한 탐욕 때문이다. 머리 회전 빠른 카다피는 이런 국제정세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카다피는 현실감 떨어지는 아랍민족주의와 격정적인 반서구 大義(대의)에 自繩自縛(자승자박)하여 지난 40년간 국가 경제 개발에 써야 할 오일머니를 리비아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거창한 구호에 날려 보냈다.
만일 그 돈과 정열과 시간을 리비아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에 쏟아 부었더라면 오늘날 1만4000달러 수준인 리비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적어도 두 배 이상 올라 있을 것이다.
석유는 언젠가 떨어질 것이므로 불확실한 미래를 식량자급이 가능한 농업에서 찾고자 시작한 대수로 공사(G.M.R. Great Man-Made River)처럼 국내 현안에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면 리비아는 얼마나 더 나은 나라가 되었을까?
몽상에 몰두하는 지도자
그러나 여전히 카다피는 경제발전에 도움이 안되는 꿈을 꾸고 있다. 아랍민족주의 열기는 식었지만 카다피는 여전히 ‘USA’라는 꿈을 꾸고 있다. 여기서 USA란 범아프리카연합(United States of Africa)이다.
리비아 국민들은 왜 리비아가 다른 아프리카와 연합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있지만, 카다피는 이에 아랑곳 않고 작년에 스스로를 ‘아프리카 왕 중의 왕’이라고 선포했다. 올 2월 그는 아프리카연합(AU) 의장으로 선출됐다.
서구와 화해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反美(반미)의 化身(화신) 차베스와 짝을 이뤄 “부유한 국가들의 제국주의에 맞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조직을 만들자”면서 ‘남쪽의 NATO’라는 의미의 SATO(NATO for the South)를 제안하고 있다.
지속되는 그의 비현실적인 꿈이 大(대)정치인의 위대한 비전이라기보다는 과대망상증이나 자기과시욕으로만 보이는 이유는 그의 言行(언행)이 신중하지 못해 신뢰감을 주는 데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9월 유엔 총회에서 제한시간 15분을 훌쩍 뛰어넘은 96분간 발언한 내용을 보면 그 언행의 경박함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본론으로만 들어가는 데 무려 17분이나 걸린 그의 연설은 서로 관련 없는 주제들이 대책 없이 엉켜있다. 존 F 케네디 前(전) 미국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을 다시 철저하게 수사할 것을 요구하고, 돼지독감이 실험실에서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으며, 각국 정상들이 비행기 피로감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고 알카에다의 공격에 대한 근심을 덜기 위해 유엔본부를 리비아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미국민이 아프리카의 아들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잘한 일이며, 그가 오래 집권하길 바란다고 하는 등 한 나라의 지도자가 한 말인지 아니면 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한 戱劇人(희극인)의 농담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또 강대국 이익만 보호하는 유엔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 유엔 헌장을 찢어버렸다.
그의 오랜 혁명의 동지요 오른팔이었던 잘루드도 카다피의 선동적인 언사에 비판적이었다가 결국 권력 핵심부에서 밀려났으니, 누가 좌충우돌 격정적 카다피를 제지할 수 있을까.
정치구호 속에 나라 망가져
16세에 혁명을 꿈꾸고 조직하여 더 공부하고 배워야 할 나이인 27세 때 대권을 쥔 카다피는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였다.
현명함은 왕성한 혈기에 가렸고, 참된 이슬람교가 모든 약자를 보호한다는 이슬람 사회주의 이상에 눌려 경제적 안목은 사라졌다. 최근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겠다는 발표는 이상적 이슬람 사회주의의 모순을 40년이 지나서야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중참여 직접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의 폐해를 수정 보완하기보다는 권위주의를 전체주의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부족주의를 깨겠다고 했지만 리비아는 카다피와 그의 가족, 측근이 요직을 장악하고 富(부)를 향유하는 나라가 됐다.
범아랍주의를 거부한 아랍 형제국들처럼 그의 리비아도 결국 중동의 깨기 힘든 전통인 父子(부자) 세습의 길로 들어선 것 같다.
자국민의 어려움을 보살피지 않고 거창한 국제 정치 구호에만 매달려온 카다피의 혁명정권 40년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리비아 국민들은 어떻게 볼까?
지금은 삭제되어 사라진 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잘 드러난다. 리비아의 통신산업을 카다피의 큰 아들 무함마드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보라.
<어떤 사람이 내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위해서, 그리고 예언자를 생각하며 10번씩 기도하고 이 메시지를 1000명에게 보내자”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어.
나는 말했지. “난 가난해. 가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그런데 문자메시지는 1건당 245원이나 들어. 1000개면 24만5000원이야. 내가 왜 가자 사람들을 생각해야 하지? 내 월급은 24만5000원도 안되는데 말이야.”>
이 동영상 속의 話者(화자)의 모습은 카다피와 리비아 국민들 간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유도 빵도 보장하지 못하고 구호만 선명한 혁명, 피만 끓게 하는 선동과 투쟁은 최소한의 인간적 행복을 앗아갈 뿐이다. 석유추정 매장량 450억 배럴로 세계 9위, 석유생산량 세계 18위, 천연가스 생산량 148억㎥로 세계 34위, 추정 매장량 1조4000억㎥로 세계 22위의 자원富國(부국) 리비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이 나라가 40년 동안 제대로 도약하지 못한 것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정치구호에 스스로를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래서 준비가 된 현명한, 신중한 지도자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카다피가 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카다피는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유엔총회 연설로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그는 전반적으로 현실을 읽고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국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틴(Isratine)’이라는 나라를 구성하도록 하자는 그의 최근 제안은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던 종래의 생각과 비교하면 진일보한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자국의 석유 고갈에 대비해 과거부터 추진해 왔던 식량자급화 사업을 계속 추진하는 한편, 두바이처럼 외국투자를 유치하고, 관광과 금융을 육성하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모두 1200억 달러를 들여 대규모 공공 주택과 도로를 건설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문제는 많지만 점진적으로나마 자본주의 요소가 리비아에 도입되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리비아의 민주화도 빠르게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카다피의 마지막 사명은 그가 <그린북>에서 금기시했던 개인소유를 정착시키는 일일 것이다. 핵을 포기하고 실리를 찾은 그니까, 화끈하니까, 한다면 하니까, 할 것 같다. 리비아가 시장경제로 가는 길에 우리가 동행하고, 리비아의 변화가 한반도 북녘에도 깨달음을 전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1986년 4월 9일 기자회견에서 리비아의 거듭된 테러 행위에 진저리가 난 로널드 레이건 美(미) 대통령이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를 지칭한 말이다.
레이건은 카다피를 野蠻人(야만인, barbarian), 믿을 수 없는 인간(flaky), 狂信徒(광신도, zealot)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반면 카다피를 지지하거나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를 혁명戰士(전사), 反(반)제국주의 투사, 심지어 영웅으로 推仰(추앙)한다.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카다피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체어맨 초이(카다피가 崔元碩 동아건설 회장을 부르던 호칭)’가 진두지휘한 동아건설의 리비아 대수로 사업을 세계 8대 不可思議(불가사의)로 극찬한 국가원수, 사막 지하에서 끌어 온 물이 콸콸 쏟아지자 그 속에서 춤추던 리비아 국민들의 지도자로 刻印(각인)되어 있다. ‘체어맨 초이’의 말에 따르면 대수로 공사로 인해 親北(친북)에서 親韓(친한)으로 돌아선 사람이다.
격정적인 長廣舌(장광설), 미녀 무장경호원, 유목민 텐트생활, 스누피 모자 같은 독특한 패션 스타일, 그리고 이탈리아가 처형한 리비아 독립투쟁의 영웅 우마르 알 무흐타르(Umar al-Mukhtar, 18 62~1931)의 사진을 가슴에 달고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세간의 주목을 끈 카다피는 다양한 이미지와 눈에 띄는 생활습속으로 끊임없이 화제를 생산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오랜 적개심을 한 수 접으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1942년 시르트(Sirte) 사막에서 가난한 베드윈, 즉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카다피의 이름은 무암마르다. 카다피는 카다파 부족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랑아, 惡漢, 사막의 使徒
서구 언론에서 험한 政治歷程(정치역정)의 카다피를 묘사하는 단어 중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 浮浪兒(부랑아, pariah)다. 혁명가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70~80년대에 그는 反西歐(반서구) 제국주의 혁명을 수출하고 이식하기 위해 전 세계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알제리, 시리아, 이집트 등 여러 국가와 아랍 통일국가를 모색했고, 가나, 감비아, 모로코, 소말리아, 수단, 에티오피아, 튀니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애를 썼다. 우간다와 차드에 派兵(파병)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 개입할 뿐 아니라 레바논, 요르단 내 테러활동을 후원했다. 또 미국 팬암과 프랑스의 UTA 등 민간 항공기를 폭파하기도 했다.
오지랖이 넓어 일은 많이 벌였지만 所期(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 채 남은 것은 惡漢(악한) 이미지뿐이다.
사막은 카다피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혁명 직후 그와 주변 인물들을 직접 인터뷰한 책으로 현재까지 중요한 카다피 전기로 인정받는 이탈리아 작가 비앙코의 <사막의 使徒(사도) 카다피(Kadhafi, Messager du De、sert)>에 따르면 카다피가 취하는 모든 선택, 결정, 행동의 저변에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복종하는 무한하고, 완전하며 절대적인 사막인의 자유가 흐르고 있다.
자신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거나 아첨 받는 것을 혐오하고, 모든 일을 협의해서 하기에 그는 결코 권위적일 수 없다. 이런 그의 심성이 사막에서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의 행동 면모는 책의 내용과 크게 다르다. 정권을 잡은 지 얼마 안된 1970년대 초반에 리비아 거리 곳곳에는 “권위를 지닌 자에 복종하라” “牧者(목자)는 양떼를 인도한다”라는 내용의 포스터가 나붙었고, 아첨을 싫어한다지만 측근 음악가 무함마드 하산이 1976년에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에 견주어 그를 ‘아라비아 사막의 사도’로 부른 노랫말을 썼다.
가난한 유목민의 아들
어쩌면 그가 어린 시절 사막에서 배운 것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텐트생활이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리비아 全(전) 국민이 집을 소유할 때까지 텐트에서 지내겠다는 것이 카다피의 다짐이다.
그의 텐트 사랑은 유달라, 외국 순방길에서도 호텔 대신 텐트를 치고 지낸다. 이번 미국行(행)에서만 뉴욕 시민의 거센 반발로 텐트 숙박이 무산됐을 뿐, 2007년 파리, 2008년 로마, 모스크바 방문 때에는 모두 베드윈 전통대로 텐트에서 묵었다.
潘基文(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아프리카 순방 때 리비아에서 카다피를 만났는데, 그 장소가 텐트였다. 면담 도중 텐트 안으로 날아들어 온 不請客(불청객) 파리는 직접 잡고, 쥐는 수행원들에게 잡으라고 지시를 내리는 통에 잠시 대담이 중단됐다고 한다.
카다피의 아버지는 가난한 유목민이었지만 유일한 아들이 비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보냈다. 아버지의 평가에 따르면 카다피는 知的(지적) 능력이 뛰어났고, 가족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녔으며,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다고 한다.
사막을 떠나 약 30km 떨어진 시르트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가난했기에 모스크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가난보다 그를 더 괴롭혔던 것은 베드윈에 대한 사회적 냉대였다. 늦게 입학한 관계로 또래보다 나이가 더 많았던 어린 카다피는 급우들에게 베드윈임을 드러내놓고 다녔고, 친구들은 그의 당당함과 우수한 성적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세브하(Sebha) 중학교에서는 시위를 주도하다 퇴학을 당했다.
청소년기 카다피를 사로잡은 것은 이집트의 나세르(Nasser, 1918~1970)였다. 1952년 7월 23일 나세르 중령은 자유장교단을 이끌고 무함마드 알리 王政(왕정)을 전복, 공화정을 세운 혁명가다. 1970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앞세워 서구식 자본주의도 소련식 공산주의도 아닌 아랍식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
적극적 중립정책으로 유명한 그의 외교노선은 미국과 소련 모두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要諦(요체)지만 反(반)이스라엘, 반서구적 태도로 인해 소련과 더 가까운 길을 걸었다.
열광적인 나세르 지지자
 |
| 아랍 민족주의의 선구자 나세르는 카다피의 본보기였다. |
그는 친한 친구들과 혁명사상을 함께 공부하며 리비아의 부패한 왕정을 전복하고 나세르가 주창한 것처럼 서구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에도 여전히 서구에 의존하면서 여러 나라로 뿔뿔이 갈라진 아랍국가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공유했다.
카다피는 힘이 있어야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깨닫고 1963년 고등학교 졸업 후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이듬해 나세르를 본받아 자유통일장교단을 결성했다. 군에 있으면서 그는 벤가지(Benghazi)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1966년에는 영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때 그는 리비아의 유명한 石油商(석유상)이 카지노에서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도박하는 모습을 보고는 “우리 돈을 훔쳐다가 한다는 짓이 기껏 이 짓이야!”라며 분노를 표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식민지 시대(1911~1943년)를 거쳐 2차대전 후인 1949년 유엔총회가 독립을 결의하고 1951년 독립국가로 출범한 리비아 왕국은 1956년 12월 産油國(산유국)이 됐다. 그러나 무능한 이드리스(1889~1983) 국왕은 석유로 인한 國富(국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미국과 영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면서 열강의 입김에 휘둘린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정부 시위의 주축은 학생이었고, 주동자는 카다피였다. 카다피는 軍內(군내) 자유통일장교단 외에도 민간 차원의 혁명 조직을 비밀리에 결성했다. 이 두 조직은 카다피만 알고 있을 뿐 군과 민간 조직원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다. 카다피는 조직을 결성할 때 출신성분은 따지지 않았다.
軍(군) 상관들은 카다피를 몽상가로 간주해 그의 혁명의지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1969년 3월 혁명모의가 발각됐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별 제재 없이 넘어갔다.
27세의 대위, 쿠데타로 대권 잡아
 |
| 미국 <타임>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카다피를 표지에 올렸다. |
나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아랍 사회 전통에 비춰보면 파격 중의 파격인 어린 지도자였다. 37세에 즉위한 요르단 압둘라 국왕이나 35세에 집권한 시리아의 바샤르 대통령보다 무려 10년이나 더 어린 나이에 대권을 접수했으니 말이다.
혁명이 성공한 후 그는 다른 군사혁명가들과 달리 별을 달지 않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대령으로 진급, 오늘날까지 이 계급을 유지하고 있다.
카다피의 군사혁명은 나세르의 정신을 계승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스승 나세르는 카다피 혁명 다음해에 사망했고, 혈기왕성한 나이에 지도자가 된 ‘나세르주의의 고아’ 카다피는 스승의 빈자리를 스스로 메우고자 盡力(진력)한다.
정권이 안정되면서 그는 자신의 국정철학을 담은 3권의 <그린북>(Green Book)을 발행한다. 제1권은 <민주주의 문제 해결책>(1975년 발행), 제2권은 <경제문제의 해결책>(1978년 발행), 제3권은 <제3 보편이론의 사회적 기반>(1981년 발행)이다.
이 책의 모델은 나세르가 1954년에 발행한 <혁명철학>과 마오쩌둥(毛澤東)의 <마오쩌둥 어록>(일명 <레드북>)이다. 카다피의 사상이 나세르의 혁명철학과 크게 다른 점은 나세르는 汎(범)아랍주의를 강조한 반면, 카다피는 거기에 아프리카까지 포함했다는 점이다.
대단히 거창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그린북>은 카다피의 語錄(어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3권에 나오는 흑인에 대한 카다피의 생각을 보자.
“뜨거운 태양 아래 일하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흑인들과 달리 다른 인종들은 피임, 결혼제한, 직장일 등으로 인해 인구가 줄고 있다”.
여성에 대한 생각은 평범하다 못해 실소가 나온다.
“여자(woman)는 여성(female)이고 남자(men)는 남성(male)이다. 산부인과 의사에 따르면 여자는 매달 월경을 하는 반면 남자는 남성이기에 생리를 하지 않고 생리통도 없다.”
문제는 이렇게 지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새로운 사실도 아닌 말들을 지도자의 통치이념과 생각으로 여기고 국민들이 반드시 읽고 암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중민주주의를 가장한 전체주의
 |
| 직접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카다피 체제의 본질은 대중민주주의를 가장한 공포정치다. |
첫째, 모든 법을 효력정지하고 이슬람법을 실행한다. 둘째, 부정한 정치인을 축출한다. 셋째, 혁명을 수호할 민병대를 조직한다. 넷째, 행정혁명. 다섯째, 문화혁명.
이 중 다섯 번째 문화혁명은 논란을 일으켰다. 종교적 신앙을 지닌 카다피가 무신론자 마오쩌둥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의혹과 오해,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과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계속 문화혁명이라는 말을 썼다.
그가 말한 문화혁명이란 관료주의와 이기주의를 제거하는 대중혁명이다. 대중혁명은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구현된다. 1977년 그는 리비아를 알-자마히리야(al-Jamahiriyyah), 즉 大衆國家(대중국가)라는 新造語(신조어)로 부르며 모든 국민이 일종의 확대된 반상회, 또는 지방자치회와 같은 조직에 참가하여 의견을 내고, 이를 위원회가 수렴하여 최종적으로 카다피에게까지 전해지고 실행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시한다.
그는 이를 투표로 대표를 뽑아 민의를 대변하는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완벽한 민주주의라고 한다. 가장 기초단위로 기초대중의회가 있고, 그 위에는 기초대중의회에서 올라온 안건을 다루는 총대중의회가 있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이 제도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 시민사회에서 실행된다면 대단히 훌륭한 결과를 산출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카다피의 리비아는 言路(언로)가 막힌 권위주의 통치체제다. 이런 사회에서 카다피식 대중참여 직접민주주의는 全體主義(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의제나 안건이 민의를 수렴해서 상향식으로 전해지기보다는 통치자가 내려주고 대중은 승인하는 역할을 하는 데 만족하는 하향식 제도로 전락하고 만다.
카다피는 “사막에서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모두가 두려움 없이 사람들을 대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리비아에서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카다피뿐이다.
2002년 기초대중의회에서 민주적 개혁을 요구했던 파트히 알 자흐미는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이것이 카다피가 말하는 대중참여 직접민주주의의 현실이다.
지난 6월 가봉의 봉고 대통령이 죽은 후 카다피는 현재 세계 최장기 집권자다. 미 국무부는 리비아 국민의 10~20%가 혁명위원회를 위해 비밀정보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공포정치 속에 경제발전과 복지 증진에 노력
카다피 정권은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혁명 정신에 어긋나는 반대자나 비판자를 제거한다. 국내 거주 인사는 물론 해외 거주 리비아인들까지 처단 대상에 포함한다. 명색이 대중참여 정치이기에 정당은 불법이다. 언론이라고는 官制(관제)언론뿐이다. 당연히 노동조합이나 NGO도 없다. 비판적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카다피가 40년 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는 혁명 이전과 비교해서 혁명 이후 리비아의 생활수준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독립하던 해인 1951년 리비아는 세계 最貧國(최빈국) 중 하나로 국민소득이 1인당 25달러에 불과했다. 지금은 1만4000달러에 이른다. 석유의 힘이다.
카다피의 혁명 이전에도 리비아는 산유국이었다. 하지만 리비아의 석유를 통제하는 것은 석유회사들이었다. 1958년 당시 리비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드리스 왕정으로부터 양도권을 얻은 42개 석유회사 소유였다.
왕정은 석유회사로부터 상당한 배당금을 받았지만 경제발전에 노력하지 않았다. 산업 발전 없이 부동산 투기가 시작됐다. 도시 빈민은 늘어가고, 농목축업은 피폐해졌으며, 교육·국민보건 등 삶의 질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리비아에는 대학졸업자가 10명이 되지 않았고, 독립 후에도 교육 정도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1956년에 중등학생은 2525명(여학생 25명), 문과대 입학생은 31명에 불과했다.
카다피의 혁명은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카다피는 외국 석유회사의 횡포를 막고 점차 석유산업을 장악했다. 혁명이 발발하던 1969년 11억 달러였던 석유수입이 5년 후인 1974년에는 80억 달러가 됐다.
카다피는 이렇게 증가한 수입을 국민복리·교육·농목축업 및 산업개발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1990년대 동아건설이 이룬 大水路(대수로) 공사의 기적도 이 시기에 카다피 혁명정부가 기본 구상을 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석유 수입을 국민을 위해 쓰면서 정작 자신은 텐트생활을 즐기는 검소한 爲政者(위정자)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혁명 직후 그를 싫어했던 사람은 혁명 이전에 부유했던 사람들이었다. 카다피가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혁명 이전에 無産者(무산자)였던 계층과 젊은층의 카다피에 대한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혁명 이후 리비아인들은 이전보다 더 잘 먹고, 더 건강하고, 더 잘 배우고, 더 좋은 집에서 살게 됐다. 중동·아프리카를 통틀어 걸프국가를 제외한다면 리비아가 단연 가장 잘사는 나라에 속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리비아 국민들은 자부심을 느낀다. 이러한 자부심이 카다피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족주의와 反관료주의로 대중 인기 얻어
 |
| 지난 6월 10일 이탈리아를 방문한 카다피(오른쪽). 그는 오른쪽 가슴에 이탈리아의 식민통치 시절 독립운동가 오마르 알 무크타르가 이탈리아 당국에 체포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부착했다. |
카다피는 혁명 이후 이탈리아인들을 축출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리비아 내 이탈리아 전몰군인 유해를 무덤에서 모두 파내어 가져가게 했다. 리비아 국민들은 이를 보면서 후련해 했다.
여기에 더해 카다피는 석유를 국유화하고, 리비아 내 미국과 영국군 기지를 폐쇄했다. 그의 석유 국유화는 아랍산유국들의 자원민족주의를 자극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석유 무기화를 실천에 옮겼다.
혁명 이후 카다피가 보여준 리비아의 발전상과 검약한 생활, 서구에 굴하지 않는 당당한 태도 등은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과 같은 공포정치와 더불어 지난 40년간 그가 최고 권력자로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다.
어쩌면 생각나는 대로 과감하게, 눈치 보지 않고 하고픈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대중은 희열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올 2월 카다피는 석유 수입을 관료를 거치지 않고 국민에게 직접 주는 계획을 지지해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깊이 뿌리 박힌 관료들의 부패를 일소하려면 각료를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아예 정부를 없애고 국민들이 직접 꾸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놀란 관리들은 “인플레가 심화되고 각종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한다”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카다피는 “이들이 현재의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고 질타했다.
국민들이 누구 편을 들지는 明若觀火(명약관화)한 일이다. ‘국민이 직접 꾸려가는 정부’는 카다피의 오랜 생각이라지만, 엄밀히 따지면 현재의 어려움은 국외정치에 개입한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를 관료주의 탓으로 돌리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는 모습에서 그가 40년 동안 정권을 유지해 온 노하우를 본다.
생각 다른 외국 국가원수에 테러 위협
 |
| 1972년 카다피(가운데)는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오른쪽)과 만나 아랍연방 구성에 합의했다. |
서구 열강이 그어 놓은 국경선에 따라 만들어진 분열된 아랍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아랍민족주의 실현의 꿈을 비현실적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비전 있는 정치지도자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를 실현해 나가기 위한 차분하고 치밀한 과정이 없었다. 카다피는 꿈은 아름다우나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혁명 동료들은 한결같이 카다피가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카다피는 듣기보다는 말하는 쪽으로, 그것도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바뀐 듯하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이 먹히지 않으면 폭력적 언어나 행위로 상대를 응징하는 방법을 쓴다.
쪼개진 아랍 세계를 다시 묶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정성이 필요하나 카다피는 이를 급하게 밀어붙였고, 그를 믿지 못하는 아랍국 首長(수장)들은 끝없이 의심했다.
나세르 死後(사후) 이집트의 대권을 쥔 사다트는 1972년 카다피와 부분적으로나마 이집트와 리비아의 통합에 찬성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은 사다트가 맡되 국방장관은 자신이 맡겠다는 카다피를 못 미더워했고, 결국 통합은 물거품이 됐다.
사다트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카다피가 미심쩍었다. 가장 가깝다는 두 나라가 이러했으니 다른 아랍 국가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범아랍 민족주의 실현에 실패한 카다피는 이후 자신의 뜻에 동조하지 않거나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미온적이고 서구에 휘둘리는 아랍국가들에 대해 섬뜩한 말을 내뱉는다.
“나는 책임지고 아랍 지도자들에 대해 테러를 시작할 것이다. 그들을 위협하고 관계도 끊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 목을 하나하나 자르고 싶다.”
서방과의 화해 시도
카다피의 범아랍 통일은 반서구, 반이스라엘과 不可分(불가분)의 관계다. 그는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점령을 9차 십자군 원정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제10차 십자군 원정으로 간주한다. 이스라엘을 중세 예루살렘에 십자군이 세웠던 라틴왕국의 再現(재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카다피의 역사관이 인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종 테러를 후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1972년 뮌헨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검은 9월단, 요인 암살과 항공기 폭파에 연루된 팔레스타인 테러분자 아부 니달 조직 등을 후원했다. 그는 터키 여성 한 명과 미군 두 명이 죽고 50여 명의 미군을 비롯해서 모두 230명이 부상한 1986년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파사건의 배후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리비아 공습을 단행했다. 카다피는 양녀를 잃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카다피가 자행한 수많은 암살, 폭파 사건 중에서도 가장 반인륜적인 것은 1988년 크리스마스 귀성객을 태우고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을 날던 미국 팬암 103 항공기를, 이듬해 아프리카 니제르 사막 상공에서 프랑스 민간 UTA 772 항공기를 폭파해 각각 270명(미국인 190명), 170명의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민항기 폭파사건은 리비아에 유엔 경제제재라는 큰 짐을 안겨다 주었다. 이는 수출의 95%를 차지하는 원유가의 하락으로 인한 수입 감소 및 경제 악화와 국내 정치 불만 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자원을 외교의 무기로 활용
여기에 더해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카다피는 25년 동안 지속해 온 반서구 정책을 누그러뜨리고 화해에 나섰다. 민항기 폭파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에 나선 것이다.
결국 카다피와 서구의 상호 이해가 맞아떨어져 리비아는 핵무기 개발 포기를 선언했다. 미국은 그 보상으로 지난 2006년 5월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리비아를 삭제하고 25년간 단절되었던 양국 간 국교 정상화를 선언했다.
이탈리아는 1911년부터 1943년까지 30여 년간에 걸쳐 리비아를 식민지배한 보상금으로 25년간 50억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2008년 8월 협정을 체결했다. 카다피는 이탈리아를 식민과거를 청산한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로 치켜세웠다.
그렇다고 해서 카다피가 완전히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핵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미국과 씨름하는 이란과 북한을 보면서 괜히 일찍 미국에 굴복했다는 자괴감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는 국교가 정상화되면 미국으로부터 첨단 무기나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워싱턴이 콧방귀도 안 뀌자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고 나섰다. 지난해 11월 카다피는 러시아를 방문해 크렘린 정원에 텐트를 쳤다. 러시아로 떠나기 전날 그는 “리비아와 미국은 친구도 敵(적)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카다피가 이런 행보를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리비아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하는 서구 국가들의 움직임에 힘입은 바 크다. 이탈리아가 적극적인 식민보상을 하는 것도, 영국이 팬암기 폭파범을 암 투병을 이유로 석방한 것도 리비아의 자원에 대한 탐욕 때문이다. 머리 회전 빠른 카다피는 이런 국제정세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카다피는 현실감 떨어지는 아랍민족주의와 격정적인 반서구 大義(대의)에 自繩自縛(자승자박)하여 지난 40년간 국가 경제 개발에 써야 할 오일머니를 리비아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거창한 구호에 날려 보냈다.
만일 그 돈과 정열과 시간을 리비아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에 쏟아 부었더라면 오늘날 1만4000달러 수준인 리비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적어도 두 배 이상 올라 있을 것이다.
석유는 언젠가 떨어질 것이므로 불확실한 미래를 식량자급이 가능한 농업에서 찾고자 시작한 대수로 공사(G.M.R. Great Man-Made River)처럼 국내 현안에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면 리비아는 얼마나 더 나은 나라가 되었을까?
몽상에 몰두하는 지도자
 |
| 지난 2000년 아프리카-유럽정상회담에 참석한 카다피(왼쪽). 카다피는 아프리카 통합의 꿈에 몰두하고 있다. |
리비아 국민들은 왜 리비아가 다른 아프리카와 연합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있지만, 카다피는 이에 아랑곳 않고 작년에 스스로를 ‘아프리카 왕 중의 왕’이라고 선포했다. 올 2월 그는 아프리카연합(AU) 의장으로 선출됐다.
서구와 화해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反美(반미)의 化身(화신) 차베스와 짝을 이뤄 “부유한 국가들의 제국주의에 맞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조직을 만들자”면서 ‘남쪽의 NATO’라는 의미의 SATO(NATO for the South)를 제안하고 있다.
지속되는 그의 비현실적인 꿈이 大(대)정치인의 위대한 비전이라기보다는 과대망상증이나 자기과시욕으로만 보이는 이유는 그의 言行(언행)이 신중하지 못해 신뢰감을 주는 데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9월 유엔 총회에서 제한시간 15분을 훌쩍 뛰어넘은 96분간 발언한 내용을 보면 그 언행의 경박함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본론으로만 들어가는 데 무려 17분이나 걸린 그의 연설은 서로 관련 없는 주제들이 대책 없이 엉켜있다. 존 F 케네디 前(전) 미국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을 다시 철저하게 수사할 것을 요구하고, 돼지독감이 실험실에서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으며, 각국 정상들이 비행기 피로감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고 알카에다의 공격에 대한 근심을 덜기 위해 유엔본부를 리비아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미국민이 아프리카의 아들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잘한 일이며, 그가 오래 집권하길 바란다고 하는 등 한 나라의 지도자가 한 말인지 아니면 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한 戱劇人(희극인)의 농담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또 강대국 이익만 보호하는 유엔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 유엔 헌장을 찢어버렸다.
그의 오랜 혁명의 동지요 오른팔이었던 잘루드도 카다피의 선동적인 언사에 비판적이었다가 결국 권력 핵심부에서 밀려났으니, 누가 좌충우돌 격정적 카다피를 제지할 수 있을까.
정치구호 속에 나라 망가져
 |
| 동아건설의 리비아대수로 공사 현장. 카다피는 석유로 벌어들인 수입을 경제개발과 국민복지에 투입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
현명함은 왕성한 혈기에 가렸고, 참된 이슬람교가 모든 약자를 보호한다는 이슬람 사회주의 이상에 눌려 경제적 안목은 사라졌다. 최근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겠다는 발표는 이상적 이슬람 사회주의의 모순을 40년이 지나서야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중참여 직접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의 폐해를 수정 보완하기보다는 권위주의를 전체주의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부족주의를 깨겠다고 했지만 리비아는 카다피와 그의 가족, 측근이 요직을 장악하고 富(부)를 향유하는 나라가 됐다.
범아랍주의를 거부한 아랍 형제국들처럼 그의 리비아도 결국 중동의 깨기 힘든 전통인 父子(부자) 세습의 길로 들어선 것 같다.
자국민의 어려움을 보살피지 않고 거창한 국제 정치 구호에만 매달려온 카다피의 혁명정권 40년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리비아 국민들은 어떻게 볼까?
지금은 삭제되어 사라진 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잘 드러난다. 리비아의 통신산업을 카다피의 큰 아들 무함마드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보라.
<어떤 사람이 내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위해서, 그리고 예언자를 생각하며 10번씩 기도하고 이 메시지를 1000명에게 보내자”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어.
나는 말했지. “난 가난해. 가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그런데 문자메시지는 1건당 245원이나 들어. 1000개면 24만5000원이야. 내가 왜 가자 사람들을 생각해야 하지? 내 월급은 24만5000원도 안되는데 말이야.”>
이 동영상 속의 話者(화자)의 모습은 카다피와 리비아 국민들 간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유도 빵도 보장하지 못하고 구호만 선명한 혁명, 피만 끓게 하는 선동과 투쟁은 최소한의 인간적 행복을 앗아갈 뿐이다. 석유추정 매장량 450억 배럴로 세계 9위, 석유생산량 세계 18위, 천연가스 생산량 148억㎥로 세계 34위, 추정 매장량 1조4000억㎥로 세계 22위의 자원富國(부국) 리비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이 나라가 40년 동안 제대로 도약하지 못한 것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정치구호에 스스로를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래서 준비가 된 현명한, 신중한 지도자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카다피가 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카다피는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유엔총회 연설로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그는 전반적으로 현실을 읽고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국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틴(Isratine)’이라는 나라를 구성하도록 하자는 그의 최근 제안은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기던 종래의 생각과 비교하면 진일보한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자국의 석유 고갈에 대비해 과거부터 추진해 왔던 식량자급화 사업을 계속 추진하는 한편, 두바이처럼 외국투자를 유치하고, 관광과 금융을 육성하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모두 1200억 달러를 들여 대규모 공공 주택과 도로를 건설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문제는 많지만 점진적으로나마 자본주의 요소가 리비아에 도입되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리비아의 민주화도 빠르게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카다피의 마지막 사명은 그가 <그린북>에서 금기시했던 개인소유를 정착시키는 일일 것이다. 핵을 포기하고 실리를 찾은 그니까, 화끈하니까, 한다면 하니까, 할 것 같다. 리비아가 시장경제로 가는 길에 우리가 동행하고, 리비아의 변화가 한반도 북녘에도 깨달음을 전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