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국회 인권포럼의 ‘올해의 인권상’ 수상자 全堤用 선장 : 월간조선

1985년 11월 14일 늦은 오후 태양이 수평선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全堤用(전제용·당시 44세) 선장이 이끄는 원양어선 ‘광명87호’는 9개월간의 항해 끝에 滿船(만선)을 이루고 부산항으로 歸港(귀항) 중이었다.

광명87호는 싱가포르에서 보급과 최종 점검을 끝낸 터라 항해에 필요한 최저 속력과 최소 操舵(조타)만을 유지한 채 홀가분하게 출발했다. ‘캡틴 전’은 선원들에게 항해에 필요한 모든 지시를 끝내 놓고 선장실에서 항해일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9개월여의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라 스스로도 꽤 들떠 있었다.

‘캡틴’이 짧은 회상에 잠겨 있을 때 다급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항로 見視(견시)를 하고 있던 이등항해사였다.

“전방에 木船(목선)이 구조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난민인 것 같습니다.”

‘캡틴’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5t 남짓 돼 보이는 낡은 목선 한 척에서 누군가 흰 천을 휘두르고 있었다. 구조요청이었다.

“배를 돌려라”

‘캡틴’은 간부 선원들을 선장실로 집합시켰다.

자신이 이끄는 배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다른 배의 위급상황을 돕는 것은 선장의 의무다. 여느 때라면 고민할 이유도 없었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구조를 요청하는 배는 소문으로만 듣던 베트남 보트피플(Boat People)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베트남戰(전)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월맹(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지 11년이 지났을 때였다.

당시 정부나 회사 측으로부터 “난민을 발견하더라도 구조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구조해 봤자 문제만 생길 것”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베트남 보트피플은 美(미) 해군조차 꺼리는 ‘애물단지’라는 소문도 있었다.

전제용 선장은 대만과 한국, 일본을 잇는 항로에서 베트남 보트피플이 자주 발견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들과 부닥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구조하여 부산항으로 입항하면 더 이상 배를 탈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서슬 퍼런 국가안전기획부 요원들에게 모진 訊問(신문)도 받게 될 것이 뻔했다.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광명87호는 목선을 지나쳤다. 그런데 돌풍을 동반한 비가 내리면서 해상에는 白波(백파)가 가득 일고 있었다. 더 지체되면 그들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캡틴’은 간부 선원들에게 물었다.

“저 목선에는 베트남 난민들이 타고 있을 것이다. 보다시피 저 낡은 목선으로 이 파도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저들을 구하면 나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고초를 겪게 될 거야. 자칫하면 다시는 배를 타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일은 선장 혼자서 결정할 일이 못 되니 너희의 의견은 어떤지 말해 봐라.”

선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간부 선원들의 항의가 터져 나왔다.

“아니, 선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는 선장님 지시만 따릅니다. 선장님이 배에서 내리면 저희도 내립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그런 거 무서워하면서 살았습니까? 빨리 구해야지 이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이소!”

난민들을 구조하겠다고 결심하고 반대하는 선원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던 전 선장은 선원들의 의견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배를 돌려라.”

‘캡틴’은 이미 지나쳐 온 항로를 되돌려 낡은 목선으로 향했다. 그는 일등항해사와 기관사를 목선으로 내려보냈다. 그들은 “배에 구멍이 나 물이 차오르고 있으며 연료와 주·부식도 떨어진 상태”라고 보고했다. 전 선장은 선원 전원을 동원해 구조에 나섰다. 5t 남짓한 낡은 목선에서 원양어선 ‘광명87호’로 구조된 베트남 난민은 모두 96명이었다.

국회, ‘올해의 인권상’ 수상 결정

부산항에 도착한 베트남 보트피플의 모습. 사진 아래에 영문으로 ‘이 아이들은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몇몇 노인들은 이미 돌아가셨다’고 돼 있다.

전제용 선장에게 구조된 베트남 난민 96명은 부산 난민구호소에서 1년6개월여간 머물다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제3국으로 떠났다. 전씨의 이야기는 당시 구조된 베트남 난민 중 한 명이었던 피터 누엔(65) 씨가 2002년에 생명의 은인인 전씨를 찾고, 그들의 사연을 미국 내 韓人(한인) 사회와 베트남인 사회에 전하면서 알려졌다. 국회 인권포럼은 전제용 선장을 ‘올해의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전제용 선장 유엔 난센상(UN Nansen Award)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유엔 난센상’은 유엔에서 난민 구호에 크게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상으로, 일생을 난민 구호에 바친 노르웨이의 프리초프 난센의 이름을 따 제정됐다. 매년 세계 난민의 날인 6월 20일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상식이 열리며, 수상자에게는 메달과 상금으로 美貨(미화) 10만 달러가 수여된다. 스페인의 국왕 후안 카를로스, 作故(작고)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이 수상한 바 있으며, 지난해에는 20년간 아프리카와 중동 등지에서 지뢰 제거에 공헌한 영국의 크리스 클락이 수상했다.

국회 인권포럼 대표 黃祐呂(황우여·한나라당) 의원에게 ‘전제용 선장 유엔 난센상 추진위원회’의 진행상황에 대해 물었다.

―전제용 선장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당시 구조됐던 베트남 난민들이 ‘리틀 사이공 재단’을 만들었어요. 그중 많은 분이 망명한 국가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했더군요. 그분들이 전제용 선장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난센상 수상 후보로 추천을 했는데, 얘기를 들어 보니까 민간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함께 발 벗고 나서게 됐죠.”

―국회 인권포럼에서 전 선장에게 ‘올해의 인권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이 사건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이 지난해 말입니다. 너무 늦게 알려졌어요. 20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분은 분명히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의 인권상’ 수상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전 선장의 미담이 널리 알려지길 기대합니다.”

―전 선장 난센상 수상 추진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백방으로 뛰고 있습니다만, 너무 오래된 일이 아니냐는 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고 숨어 있는 선한 사람들이 많아요. 선행을 감추다 보니 일찍 알려지지 못한 거죠. 요즘이야 난민에 대한 개념이나 인식이 뚜렷하니까 그들을 구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전 선장이 이번에 난센상을 수상한다면 전 세계가 한국인의 따뜻한 정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난민들을 무인도에 내려놓고 오라”

전제용 선장의 美談(미담)이 24년 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경남 통영에 있는 전씨의 자택에서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멍게 양식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보트피플을 만나면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평소 가졌습니까.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본능적으로 구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사실 그때 다른 배들이 먼저 구할 수도 있었어요. 인도양에서 대만이나 한국, 일본으로 올라오는 항로는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죠. 구조한 난민들에게 들어 보니 여러 척의 배가 구조 요청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고 해요.”

―5t 남짓한 목선에 96명이 타는 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도 놀랐어요. 내려가 보니 魚艙(어창)에 사람이 포개지듯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쪽이 열대지방이다 보니, 사람들이 4~5일간 쪼그려 앉아 있느라 오금에 땀띠가 다 나 있더라고요.”

전씨는 구조한 베트남 난민들에게 自初至終(자초지종)을 물었다고 한다.

“자기들은 이 항로로 나가면 어느 나라 배든지 구조하는 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얼마 안돼서 배가 고장 났다고 해요. 그 사람들이 항해술이 있겠어요, 海圖(해도)가 있겠어요? 무작정 돈을 모아 낡은 배 한 척을 사서 해 뜨는 방향을 보고 동쪽인가 보다 하고 배를 몰고 나왔대요. 자기들도 그 배에 몇 명이 탔는지 모르더군요. 저도 많아야 열댓 명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구조하고 보니 96명이나 되어 기가 막히더라고요.”

―본사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조치를 끝내고 본사에 전신을 쳐서 모스 부호로 ‘베트남 난민 96명을 구조했다’고 알렸죠. 그 후에 회신이 오는데 난민을 싣고 부산에 오지 말라는 거야. 물에다 집어던질 수도 없고 어쩌란 말인지? 선장은 自船(자선)의 위험이 없는 이상, 이유를 막론하고 他船(타선)의 위급한 상황을 구조할 의무가 있어요. 본사에서 전신이 수차례 왔는데 마지막에 ‘난민들을 무인도에 내려놓고 오라’고 해요. ‘말이 무인도지 이 사람들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했더니 회사에서는 ‘뗏목을 만들어서 태워 보내라’고 하더군요.”

전제용 선장은 감정이 복받치는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어 갔다.

“본사로부터 하도 들볶이다 보니 뭐라 말할 여력이 없어서 갑판장을 불렀어요. 원양어선에는 비상용으로 나무판자를 여유 있게 싣고 다녀요. 그리고 다 쓰고 빈 윤활유 드럼통도 있고요. 그런 것으로 뗏목을 만들라고 지시했어요. 갑판장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요. 선장 지시니까 감히 반항은 못하고 만들기 시작해요.

조타실 위에서 그걸 쳐다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한심하고, 화가 나더군요. 속으로 ‘내가 저걸 만들라고 시키다니,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갑판장을 불러 그만두게 하고 본사에 ‘무조건 나는 부산으로 간다’고 전문을 쳤어요. 한참 후에 본사에서 ‘전 선원과 난민 신변 안전을 유지하면서 무사 귀환을 기원함’이라는 전문이 왔어요.”

“Thank you, captain!”

구조된 베트남 난민들이 전 선장과 선원들에게 만들어 준 카드.

수평선 끝에서 부산항이 보이기 시작하자 전제용 선장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자신이 겪을 고초에 대해서는 이미 각오를 한 터였다. 그러나 젊은 선원들이 행여 생계라도 잃게 될까 걱정이 앞섰다. 기껏 구한 베트남 난민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도 염려스러웠다.

배가 부산항으로 접근하자 선원들은 입항 준비로 부산했다. 그때 베트남 난민들이 선장 주위로 몰려들었다.

“Thank you, captain!”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 선장의 주위를 떠날 줄 몰랐다. 한 소녀가 선장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그것은 공책을 찢어 만든 카드 두 장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라고 써진 카드는 색실로 수놓여 있었고, 선원들에게 빌린 색연필로 예쁘게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캡틴’의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입항 절차가 완료되고 ‘캡틴’과 선원들은 난민들과 함께 부산항에 내린 즉시 외무부·법무부·안기부의 조사를 받았다. 부산 난민캠프 옆 사무실에서 안기부 요원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전 선장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난민 구조 대가로 금품을 제공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전제용 선장의 말이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당당하게 조사받았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타나 고문은 없었지만 ‘언어폭력’을 많이 당했어요. ‘난민들에게 돈을 얼마 받고 구해 줬느냐, 네가 난민 여자들과 性的(성적) 접촉을 하지는 않았느냐’는 식이었어요. 당시 내가 선원들한테 그랬어요. ‘난민들에게 너희가 베풀더라도, 동전 한 푼이라도 받지 마라. 그거 하나 받으면 평생 신세 망친다’고 말이죠. 그때 선원들이 10센트짜리 하나라도 안 받았던 것이 다행이었죠.”

구조된 난민 중 한 사람이 전제용씨에게 보내온 가족사진. 뒷면에 ‘이것은 우리 가족의 사진입니다. 당신에게 이 사진을 보내고 싶었고, 앞으로도 더 자주 연락하길 바랍니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실직

―그 일이 있고 난 후 직장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거야 각오하고 있었죠. 나는 서류만 간단히 챙겨서 보고하러 회사에 들어갔어요. 회사에서는 ‘전 선장, 그동안 고생 많았어. 배는 다른 사람이 맡아서 일본으로 갈 거니까 전 선장은 신경 쓰지 말고 집에서 편히 쉬어’라는 겁니다.

당시 잡아 온 고기는 배에 실린 그대로 일본으로 수출됐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보낸다는 거야. 별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요.

당시만 해도 원양어업 회사가 몇백 개나 됐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이나 마찬가지라 이력서를 넣으면 누가 누군지 다 알아요. ‘아, 저 말썽꾸러기’ 그렇게 낙인이 찍혀 30개월을 놀았어요.”

―그 후 어떻게 됐습니까.

“어느 날 한 지인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 회사에서 선장을 뽑으니까 지원해 보라고 해요. 내가 ‘말은 고마운데, 원양어선 쳐다만 봐도 피곤하다’며 마다했죠. 그래도 그분이 무조건 넣으라고 해서 그냥 넣어 봤어요.

그런데 그 회사 회장님이 날 만나자고 해요. 그분이 내 이력서를 보더니 ‘전 선장, 얘기 잘 들었다. 이렇게 보니 듬직하네’ 그래요. 그러더니 ‘전 선장, 우리 각하(전두환 당시 대통령)하고 한 宗氏(종씨) 아닌가?’라고 해요. 내가 ‘종씨라도 본이 있고 파가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더니 회장님이 ‘아, 됐어. 각하하고 성이 종씬데 더 볼 거 없다. 당장 일 시작해라’ 하더군요.

알고 보니 내가 맡을 배가 造船(조선) 중이었어요. 당장 조선소에 내려가서 감독을 맡았지요.

내가 난민들 구조한 바람에 2년반 동안 인생 공부했지만, 그 바람에 내가 新造船(신조선) 선장이 된 거예요. 새 배의 선장이 되는 것은 선장 하면서 평생 할까 말까거든. 그 배를 5년간 탔어요.”

구조된 사람은 ‘96명 반’

피터 누엔이 베트남어로 쓴 자서전 ‘오션 하트’.

베트남 난민들을 대표해 전제용 선장을 수소문했던 피터 누엔 씨는 구조 당시에도 난민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그는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중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 통역장교로 징집돼 주로 미군이 ‘베트콩’을 신문할 때 통역을 맡았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졸지에 반역자로 몰려 7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석방 후에도 그는 출신성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척당했다.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베트남에 남겨둔 채 낡은 목선을 타고 본국을 탈출했다.

당시 부산으로 항해하는 동안 전제용 선장은 피터 누엔 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며 정이 들었다고 한다. 피터 누엔 씨는 전 선장에게 “미국에서 돈을 벌어 가족들을 데려갈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피터 누엔 씨는 자신의 말대로 그의 가족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전 선장과 피터 누엔 씨가 재회를 하게 된 것은 2002년 무렵이었다. 누엔 씨가 의료기술자로서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 근무했는데, 그 병원에 함께 근무하던 한국계 간호사 김순자씨가 한국을 방문하는 길에 전 선장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전제용 선장의 얘기다.

“피터 누엔 씨와 연락이 된 후 서로 편지 왕래만 하다가 2004년 누엔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내가 미국으로 가면 당시 난민들을 다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미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일이 확대돼 LA한인회와 베트남인회가 합동으로 환영회를 열어 줬어요. 2006년에는 피터 누엔 씨가 자신이 구조되기까지의 과정, 미국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 등을 담은 자서전을 출판한다고 해서 다시 한 번 갔지요.”

전제용 선장이 피터 누엔을 구조했을 당시 사진.

―19년 만에 재회한 기분이 어땠습니까.

“누엔 씨가 환영회에서 나에게 술을 한 잔 따르면서 하는 말이, ‘당시 캡틴이 나에게 줬던 위스키 한 잔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말로 다 하겠는가’라고 하는데 코끝이 찡하더라고요.”

―피터 누엔 씨 외에 특히 기억에 남는 난민이 있습니까.

“구조 당시 임신 중인 여자가 있었는데 입덧과 멀미 때문에 식사를 못하고 있었나 봐요. 어느 날 배 위에서 나를 붙들고는 ‘아기가 배고파’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매일 귤을 줬어요. 2004년에 LA에서 보니까 그 아기가 벌써 대학에 다니더라고.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그때 구조된 사람이 ‘96명 반’이라고 했습니다.”

전제용씨는 당시 난민들에게 받은 카드를 비롯, 그들이 지금까지 보내온 편지와 사진들을 보관해 두고 있었다. 전씨에게 ‘유엔 난센상’ 수상 추진에 대해 물었다. 그는 웃으며 “넘볼 걸 넘봐야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친구들과 전화하고 편지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좋아요. 내가 당시에 떠내려가는 나뭇단을 본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봤는데 구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죠. 내가 불이익을 조금 받게 될지언정 사람 목숨의 가치하고 비교가 되나요.”⊙

▣ 보트피플이란?

150만명이 베트남 탈출

1975년 4월 30일, 北(북)베트남의 越盟軍(월맹군)이 南(남)베트남의 首都(수도) 사이공(現 호찌민)을 점령하면서 15년간 지속됐던 同族相殘(동족상잔)의 전쟁이 끝났다. 지상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에 승리를 거두며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던 북베트남 군대는 그 총칼을 국내로 돌려 대대적인 肅淸(숙청)을 시작했다.

미국과 협력한 남베트남 정부의 고위 인사들과 경제인들을 숙청하고 남베트남 군인 수백만 명을 사상개조학습이라는 명분으로 강제 수용했다. 남베트남 내에서 좌익, 게릴라 활동을 했던 親(친) 월맹 인사들도 대부분 숙청당했다.

공산정권을 거부한 베트남인들은 종전 직후부터 해외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철수하는 미군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던 1세대 난민들은 비교적 쉽게 미국 등 서방국가로 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하기 시작한 난민들은 조각배에 의지해 무작정 茫茫大海(망망대해)로 나갔다. 이들이 ‘보트피플(Boat people, 해상난민)’이다.

거친 바다에서 一葉片舟(일엽편주)는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지푸라기와도 같았다.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하지 않더라도 질병과 기근 등으로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고 해적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 가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구조되거나 제3국에 도착하더라도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베트남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내전 개입, 중국과의 전쟁 등으로 수십만 명의 난민이 추가로 발생했다. 월남전이 끝난 후 약 10년 동안 베트남을 탈출한 난민은 약 15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95만명이 생존해 제3국으로 이주했다. 이렇게 대량으로 발생한 난민이 국제문제로 불거지자 유엔은 난민고등판무관(UNHCR)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이들에 대한 난민자격 심사와 구호 등을 시작했다.

초기의 베트남 보트피플들은 정치적 이유로 본국을 탈출했지만, 점점 빈곤에 허덕이다 못해 본국을 탈출하는 경제적 난민이 증가했다. 한국,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은 적십자 등 국제단체가 관장하는 수용소를 설치해 이들을 관리했다.

통일 후 10년간 전쟁과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베트남은 1986년 12월 제6차 전당대회에서 ‘도이 모이(Doi Moi)’라는 경제쇄신 정책을 도입하고 개혁 개방을 선언했다. 이후 농업개혁, 대외 투자유치, 대규모 구조조정 등을 실시하고 중국(1991년), 한국(1992년), 미국(1995년)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경제발전을 시작했다. 보트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하는 난민도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베트남이 사회주의 이상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개혁정책과 시장개방에 나서자 목숨을 걸고 본국을 탈출했던 보트피플들이 달러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미국, 호주, 유럽 등지로 망명한 보트피플의 상당수가 현지에 정착해 재력을 쌓았고 자녀들의 교육수준도 높다.

베트남 정부는 해외거주 베트남인들에 대해 내국인과 같이 부동산을 매매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적극적인 수용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결과 해외동포들의 송금액이 20억 달러를 넘어섰고 국내 투자액도 5억 달러에 달하는 등 보트피플들이 이제는 베트남 본국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