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東源 원장 시절 내부에서 ‘원장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 제기돼”
⊙ “金大中 정권 시절 활동의 자유 보장받은 좌파세력, 국가공권력·국가안보·對共 경각심
약화시키는 데 성공”
⊙ “2001년 인천공항에 나타난 宋斗律, 국정원과 이틀간 승강이 끝에 독일로 되돌아가”
⊙ “李秀一 전 국정원 차장 자살 직전 ‘약속 위반으로 당할 일이 너무 괴롭다’고 말해”
⊙ “도청 관련 모든 진실 다 밝히면 우방과의 국제관계는 물론 당시 권력 실세들 평지풍파 일 수도…”
⊙ “도청에 대해 할 말 많지만 모든 비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
金銀星
⊙ 1945년 출생.
⊙ 용산高, 서울大, 동국大 대학원 졸업.
⊙ 1971년 중앙정보부 入社, 안기부 대전지부장·국회 정보위원·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
국내담당 차장 역임.
⊙ “金大中 정권 시절 활동의 자유 보장받은 좌파세력, 국가공권력·국가안보·對共 경각심
약화시키는 데 성공”
⊙ “2001년 인천공항에 나타난 宋斗律, 국정원과 이틀간 승강이 끝에 독일로 되돌아가”
⊙ “李秀一 전 국정원 차장 자살 직전 ‘약속 위반으로 당할 일이 너무 괴롭다’고 말해”
⊙ “도청 관련 모든 진실 다 밝히면 우방과의 국제관계는 물론 당시 권력 실세들 평지풍파 일 수도…”
⊙ “도청에 대해 할 말 많지만 모든 비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
金銀星
⊙ 1945년 출생.
⊙ 용산高, 서울大, 동국大 대학원 졸업.
⊙ 1971년 중앙정보부 入社, 안기부 대전지부장·국회 정보위원·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
국내담당 차장 역임.
지난 5월 1일 오전 성남중앙도서관(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소재) 정문 중앙로. 갈색 작업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며 나타났다. 金大中(김대중) 정권 당시 정치권이나 공직, 기업, 언론 등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사람의 ‘힘’을 익히 들어 잘 알 것이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이 남성은 2001년 11월 ‘진승현 게이트’로 구속되기 전까지 당대 권력 최고 실세 중 한 명이었던 金銀星(김은성·64)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도 그동안 수십 차례. 記者(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무리한’ 부탁을 한 적도 있었다. 2006년 7월 그의 막내딸이 자살했을 때 “인터뷰하자”고 요청을 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3년이란 세월이 흐르자 그의 마음에 작은 변화가 왔다.
“뭐가 그리 궁금하오? 나 같은 죄인이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소. 할 말도 없고 들을 말도 없을 거요. 그간의 사정을 고려해 국가보안상 답변하기 어려운 것을 제외하고 간단한 질문에는 응하겠소.”
인터뷰 허락을 얻은 후 산책을 겸한 본격적인 ‘대화’가 이뤄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그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뭔가를 보여줬다.
“올해 3월 자격증 하나 땄소. 민간단체에서 주는 ‘건강관리사’ 자격증이오. 병원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하려면 필요하지. 돈을 벌어야 먹고사는데 막상 어디 취직할 데도 없고…. 자격증이라도 따려고 도서관에 종종 들러요. 사실 2005년에 유기농 기능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는데 일이 터지는 바람에 놓쳐버렸죠.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실기시험을 앞둔 그해 10월, 불법도청 사건으로 구속돼 시험을 못 봤어요.”
그가 건넨 자격증에는 ‘건강관리사 김은성’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실세 차장 김은성’이 이제 ‘밥’을 걱정하는 ‘소시민 김은성’으로 변해 있었다. 권력의 뒤안길에 서 있는 그에게서 ‘잊힌 존재’의 허무함이 잔뜩 묻어났다.
―한쪽 다리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감옥에 있을 때 관절염을 앓았어요. 출소 후 수술을 했는데도 낫지 않아요. 이렇게 다리를 절며 인생을 마감해야 할 듯합니다.”
김은성 전 차장은 2001년 12월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진승현 게이트’로 구속돼 1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진승현 게이트란 MCI코리아 부회장이었던 진승현씨가 금융기관으로부터 2300여 억원을 불법대출받고 주가를 조작해 비자금을 조성한 후 정관계에 로비했다는 사건을 말한다. 김은성씨는 실형을 받고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후 가석방됐다.
김씨는 2005년 10월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으로 다시 囹圄(영어)의 신세가 됐다. 그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1년6월형을 선고받은 후 복역하던 중 막내딸까지 잃게 된다. ‘아버지 없는 결혼식’을 치렀던 그의 막내딸이 결혼 후 한 달 만에 세상과 인연을 끊은 것이다. 김은성씨는 딸의 자살로 잠시 출소했으나 6개월 뒤 다시 수감됐다가 2007년 7월 출소했다.
도청 사건으로 30년 명예 虛事
김은성씨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 것은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이었다. 그는 30년간의 정보원 생활을 허사로 날려버린 ‘도청 사건’에 할 말이 많은 듯했다.
―2005년 검찰의 불법도청 조사 초기 도청 사실을 부인하다가 나중에 시인했습니다. 처음부터 도청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뭡니까.
“국정원이 정보기관으로 생명을 유지하려면 도청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05년 8월 당시 金昇圭(김승규) 국정원장이 불법감청 사실을 국민 앞에 시인하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즉각 林東源(임동원), 辛建(신건) 전임 원장에게 강력히 항의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며칠 후 전임 국정원장단이 김승규 원장을 항의방문했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어요.”
―불법감청 행위를 한 정보기관이 국민 앞에 잘못을 고백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정치적 목적 없이 순수한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면 이해를 해요. 하지만 전현직 간부직원들이 사법처리받는 과정에서 뭔가 또 다른 손이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국정원의 역할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도 곳곳에서 나왔어요. 국정원 후배들로부터 ‘도무지 일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2005년 10월 ‘긴급체포’ 형식으로 검찰에 붙잡혀 가셨죠.
“그런 식으로 검찰에 불려 가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제가 도청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니까 겁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막상 검찰조사를 받아 보니 제가 밖에서 듣던 정보와는 딴판이었어요. 검찰은 이미 70~80건에 가까운 불법감청 시인 진술서와 R-2 장비(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카스(휴대폰 감청장비) 사용지침서 등 도청증거를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신건 전임 원장이 김대중 정부 말기에 도청장비를 폐기한 사실을 검찰에서 시인한 진술들이 많았습니다. 이 말은 정보기관 首長(수장)이 도청행위를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어요.”
―도청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군요.
“검찰의 수사 의지가 아주 강했어요.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국정원의 위상과 업무내용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해외 정보기관으로부터 불신을 받아 정보협력체계까지 이완될 우려도 보였습니다. 조직에 30여 년을 몸담은 제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검찰 측에 제안을 했어요. ‘국정원 직원 소환을 최소로 하고 모든 책임을 내게 국한해 주면 검찰조사에 적극 임하겠다’고 했지요.”
―2001년에 이어 또다시 처벌받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까.
“연일 수많은 국정원 전현직 간부와 직원들이 검찰에 소환돼 밤중까지 조사받고 모욕을 당하는 광경을 눈뜨고 볼 수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구속이니 형사처벌이니 등은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제게 똑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 해도 그때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검찰조사에서 저까지 도청사실을 시인하자 당시 국정원 선후배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어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실과 다른 점이 너무 많지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군요.”
“구체적 진술했다면 기소 어려웠을 것”
―불법도청 사건 당시 국정원이 오랫동안 국내 저명인사들을 도청해 온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도청범위는 어디까지였습니까.
“솔직히 도청 부분에 대해 말 못한 부분이 아직도 많아요. 만약 국가안보나 國益(국익) 관련 내용을 검찰에서 진술했다면 사건의 파장은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하지만 최후의 비밀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었어요. 도청과 관련해 모든 진실을 다 밝히면 우방과의 국제관계는 물론 당시 권력 실세들에까지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죄인이 될지언정 역사의 죄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지요. 모든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국가안보나 국익 관련 내용이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도청해야 하는 겁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에서 도청·해킹·크래킹(상대방의 컴퓨터를 해킹해 저장자료를 삭제하는 불법행위) 등의 기술경쟁이 치열히 벌어지고 있어요. 산업스파이·테러·마약·인질·위폐·무기거래 등 모든 국제범죄에는 통신장비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통신수단을 활용한 신속한 대응 없이는 실효성을 잃게 됩니다. 물론 국가안보가 목적이라도 수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감옥에 간 겁니다.”
김은성 전 차장은 “불법도청이라는 틀에 갇혀 국익을 위한 감청행위가 제한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목표가 뚜렷하고 적대성과 위험성이 확실하고 위중할 때 감청을 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를 가지고 합법이냐 위법이냐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법을 따지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최근 미국 CIA가 알카에다 조직원을 고문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는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현재 국내법 중에서 도청을 금지하는 통신비밀보호법은 현장 중심으로 융통성 있게 바뀌어야 해요. 金泳三(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 초 개혁차원에서 폐기했던 국가보안법 중 찬양고무죄를 정권이양 1년을 앞두고 야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복시킨 사실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5년 11월 불법도청 사건 당시 조사를 받던 李秀一(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청 사건이 여러 사람 죽였지요. 제 딸이 자살한 것은 물론 저의 국정원 차장 후임이었던 이수일씨가 세상을 등지고 하늘로 갔습니다. 이수일 차장이 자살하기 며칠 전 담당 검사가 구치소에 있던 제게 ‘지금 이 차장을 조사 중인데 세상 무너질 정도로 한숨을 쉬는 등 이상하다’며 ‘면담기회를 줄 테니 만나 보라’고 하더군요.
검찰 조사실에서 만난 이 차장은 제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으나 약속 위반으로 당할 일이 너무 괴롭다. 국정원에 온 것이 너무 후회된다’고 했어요. 자포자기하는 태도를 보이며 지극히 불안해 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저도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들었는지 몰라요. 며칠간 단식과 면회중지도 했어요.”
“당시 생각하면 지금도 잠 못 자”
―이수일 차장이 언급한 ‘약속위반으로 당할 일이 괴롭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저 또한 구속돼 조사를 받는 상황이었기에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청 사건 이후 국정원은 불법감청을 전혀 안 합니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게 만들어 놨죠. 테러 등에 대해서는 반드시 감청해야 합니다. 사실 전화도청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화를 통해서는 핵심정보를 얻지 못해요.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전화를 통해 핵심 정보를 얘기합니까. 국제범죄에 대해서는 전화 감청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할 수 있어야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팩스나 이메일 등은 물론이고 타이핑 치는 소리를 듣고도 어떤 내용을 입력하는지 알아낼 수 있어야 해요.”
―진승현 게이트, 파크뷰아파트 특혜분양 관련 탄원서, 도청사건 등으로 두 차례 구속됐습니다. 현직에 있으면서 너무 많은 일에 관여한 것 아닙니까.
“국민들께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당시 언론 보도 중에는 상당부분 진실이 왜곡된 것이 많아요.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만 봐도 그래요. 2002년 사건이 터지면서 제가 언론에 폭로한 것처럼 보도됐지만 제가 재판장에게 보낸 탄원서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에 의해 외부로 유출된 겁니다. 탄원서는 저의 재판과 관련해 재판장이 국정원의 업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만든 것에 불과해요.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못 잡니다. 일부 세력이 언론을 이용해 저를 정보기관 출신답지 않게 업무상 획득한 내용을 폭로하는 비열한 사람으로 몰고 갔어요. 교도소 생활보다 이 같은 오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훨씬 컸어요.”
―국정원 재직 당시 對共(대공)정책과 수사를 책임졌던 국내정보 책임자로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다고 봅니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직후 국가보안법 개폐론이 등장하고 햇볕정책이 물밀듯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정보와 보안활동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국민의 정부’를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저는 햇볕정책만을 놓고 김대중 정부를 좌경으로 모는 것은 다소 억지라고 생각해요. 사실 남북대화는 3공화국 시절 중앙정보부의 남북조절위원회를 시작으로 정권마다 방법만 달리했을 뿐 지속돼 왔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좌경화돼서 對北(대북) 유화정책을 취했다고는 볼 수 없어요. 햇볕정책보다 남과 북의 대화속도, 북측에 대한 일방적 지원이 문제였지요.”
“宋斗律은 거물 간첩, 증거 있다”
김은성 전 차장은 “김대중 정부의 성격은 대북정책보다 국내 좌파를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정책방향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햇볕정책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은 국내 좌파들에게 급격히 자유스러운 활동 공간을 보장해 줬어요. 이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혼란이 가중됐지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은 좌파세력들은 국가 공권력을 무너뜨렸고, 궁극적으로 국가안보와 국민들의 대공 경각심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행태가 盧武鉉(노무현) 정부 때 고착화됐고, 그 세력들이 지금 현 정부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어요.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 특히 국내부서에서는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요원들이 많았습니다. ‘간첩을 잡는 것이 오히려 정부에 부담을 주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한탄이 흘러나왔죠. 그런 와중에 유화적인 대북정책에 반대하는 분위기도 물밑에서 흘렀는데, 한 조직 내에 두 기류가 공존하면서 발생하는 길항작용(상반되는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동해 효과를 상쇄시키는 작용)이 상당했어요.”
그는 그런 실질적인 사례를 2001년 在獨(재독)학자 宋斗律(송두율)이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라고 했다.
“그해 송두율이 인천공항에 나타나자 청와대와 국정원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에서는 그를 연행해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죠.”
―국정원 전체 분위기가 그랬습니까.
“송두율을 반드시 잡아넣어야 한다는 분위기는 수사국이 제일 강했지요. 직원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비슷했습니다. 송두율은 북한의 거물 간첩입니다. 우리는 증거를 다 가지고 있었어요. 당시 국회 정보委(위)에 참석해 ‘송두율은 간첩이다,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사전에 보고한 적도 있습니다.”
―공항에 입국한 송두율은 어떻게 됐습니까.
“송두율은 이틀 동안 우리 측과 치열한 논리싸움을 벌이며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했어요. 우리는 그에게 ‘준법각서를 쓰고 조사를 받아라’고 했고, 그는 독일 시민권자임을 내세워 ‘조사를 안 받겠다’고 맞섰어요.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어요. ‘위에서 송두율 조사에 부정적’이라는 입장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위’라면 어디를 말하는 겁니까.
“국정원의 위가 어디겠습니까. 뻔하지 않아요?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제가 송두율에게 ‘준법각서를 쓰면 국내입국을 허락하고 국정원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조사를 한다’는 내용의 타협안을 냈어요. 그런데 송두율이 ‘그것도 못하겠다’며 ‘독일로 되돌아가겠다’는 겁니다. 결국 송두율은 공항에 이틀 동안 있다가 가버렸습니다. 그 후 2003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당당히 입국해 검찰조사를 받고 재판까지 받았습니다.”
―송두율 사건으로 청와대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았습니까.
“수사관들의 의지가 강했고 증거가 명확했기 때문에 특별한 불이익은 없었습니다.”
‘林東源 국정원장 조사설’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얼마 전 KAL기 폭파범 金賢姬(김현희)씨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국정원을 ‘親北(친북)조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김현희씨는 국정원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김대중 정권 당시 무분별한 訪北(방북)활동이나 인적·물적 교류가 이뤄졌어요. 국정원도 자체적으로 정보·보안활동을 벌여 문제점을 발견하고 대책을 마련했어요. 하지만 한계가 있었지요.
국법질서가 보호되는 속에서 북측과 대화를 추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안보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특히 햇볕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국정원의 대공수사기능이 크게 위축돼 조직해체설까지 나돌았어요. 대공요원들의 동요가 심했습니다. 그 화살이 당시 임동원 원장에게 향했던 적이 있습니다.”
―요원들이 국정원장에게 반기를 든 겁니까.
“제가 그 일에 연루돼 있다며 곤욕을 치렀습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여름쯤의 일입니다. 당시 현대가 북한 개성지역에 공단을 짓겠다며 설치던 때였어요. 국정원 국내부서에서 ‘개성공단 설치’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습니다. 임동원 원장이 어느 날 저를 부르더니 개성공단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더군요. 그 일이 있고 2~3일 후 다시 임 원장이 저를 불렀어요. 자리에 앉자마자 원장이 제게 종이 한 장을 건네며 읽어 보라고 하더군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까.
“상상도 못할 내용이 적혀 있더군요. 제가 국정원 간부들에게 ‘친북성향의 임동원 원장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국정원 차장인 제가 어떻게 직속상관인 국정원장을 조사할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내용이었어요. 저를 음해하는 세력이 작성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조사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죠. 문건의 내용은 ‘김은성 차장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돼 있었는데, 사실관계가 모두 틀렸어요. 그 무렵 韓光玉(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이 저를 부르더니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느냐’며 나무라더군요. 저는 억울했습니다만 나중에 조사결과가 나오자 오해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국정원 내부에서 임동원 원장을 이상하게 보는 시각이 없지 않았어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국정원 내부에서 ‘원장 체포설’ 등이 제기된 걸로 압니다.
“국가최고 안보기관으로서, 햇볕정책을 추진한 정권에 대한 오해와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햇볕정책을 놓고 내부에서 공감대 형성이 안돼 요원들 간에 심한 격론이 벌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심지어 대공수사국 요원들이 남북회담을 하러 서울에 온 북측 인사들의 신변보호 업무를 맡게 되자 ‘간첩 잡는 요원이 간첩을 보호하다니 말이 안된다’며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복잡한 분위기에서 ‘임동원 원장 조사설’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한 후에도 국정원 내부에는 햇볕정책 반대론자들이 많았어요.”
국정원 간부들 개성공단 설치에 반대
―개성공단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된 겁니까.
“사실 저도 그런 움직임을 전혀 몰랐어요. 나중에 내부 보고서를 보고 알게 됐지요. 정상회담 직후 나타난 조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국장급 참모들에게 견해를 물어봤더니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당시 주류 언론은 개성공단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국정원 국내부서의 비판은 훨씬 강했어요.
저는 개성공단의 문제점에 대해 당시 임동원 원장에게 몇 가지를 보고했습니다. ‘법적·제도적 장치가 부족하고 개성공단에 입주할 우리 국민의 안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했지요. 하지만 임 원장은 ‘이러저러해서 공단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개성공단은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한의 金正日(김정일)이 공업지구건설에 합의하고 국정원 등이 지원하면서 시작됐다.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2002년 8월 개성공단 착공에 정식으로 합의했고 그해 11월 개성공업지구법 발표, 12월에 착공식을 가졌다. 2009년 5월 현재 개성공단에 일하던 남측 직원 한 명이 북한 당국에 억류돼 있으나 우리 정부당국은 억류자의 신변 안전 여부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남북관계가 경색돼 가고 있습니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북측이 강하게 나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남북관계 전문가가 아닙니다. 다만 북측의 강경한 태도는 남북관계를 과거와 같은 긴장관계로 만들어 놓고 그 파장에 따라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내적으로는 지난 10년간에 걸친 남북화해 무드로 이완됐을 수도 있는 북한 내부를 다시 조여 김정일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향후 가장 큰 변수는 북한이 내놓은 카드를 그대로 실행하느냐, 그리고 미국이 언제까지 북한을 인내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도청사건에 연루돼 처벌받았던 임동원·신건 전 원장은 사면복권돼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실형까지 살았음에도 여전히 복권되지 않고 있는데 억울하지 않습니까.
“불법감청은 내 책임하에 이뤄졌고 직원들은 저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조직과 조직원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느껴 보국훈장을 반납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반려됐습니다만. 두 전직 원장이 赦免(사면)됐다고 해서 ‘나만 희생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결정한 것을 놓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신건 원장은 지난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신건 원장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할 말이야 많지만 지금으로서는 신 원장에게 축하한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김은성의 뒷모습
―두 번의 구속과 막내딸의 자살 등으로 불행이 잇달아 찾아왔는데….
“신앙이 없었다면 저도 지금쯤 이 세상에 없었을지 몰라요. 요한복음의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수시로 명상하고 있어요. 막내딸은 유난히 저를 따랐어요. 그런 딸자식의 결혼식에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있는 바람에 참석을 못했으니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아버지로서 딸에게 몹쓸 짓을 한 거죠. 딸과 보낸 추억이 떠오를 때면 견디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에요. 기분이 다운될 때는 급히 병원에 달려가야 합니다. 지금 복용하고 있는 신경안정제로는 안되거든요.
옛날에는 슬픈 영화만 봐도 눈물이 나오곤 했는데 최근 몇 년간 험한 꼴을 너무 많이 당해 눈물이 말랐는지 지금은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눈에서 눈물이 아예 안 나와 요즘 안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죽은 딸이 살아있을 때 잘 대해주지 못해 너무 후회됩니다. 기자 양반도 가족이나 주위 이웃을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계획은.
“선교용 수필집을 쓸 예정입니다. 비록 다리는 불편하지만 일을 할 능력과 의지가 있기 때문에 조그만 일거리라도 생기면 곧장 시작할 겁니다.”
김은성씨는 “인터뷰 내용이 왜곡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써 달라”며 성남중앙도서관 언덕길을 걸어갔다. 그는 “지금의 모습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며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에 어깨가 들쑥날쑥….
사람은 누구에게나 슬픈 뒷모습이 있다. 나이가 들고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슬픔은 더욱 진해진다.⊙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이란?
金泳三·金大中 정권의 국정원, 사회 저명인사 무차별 도청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이란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 국가정보원이 사회 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불법감청한 사건을 말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 내 비밀도청팀 ‘미림’이 움직였고, 김대중 정권 당시에는 과학보안국이 도청을 주도했다. 도청팀은 정계·재계·언론계 핵심 인사 700여 명의 私的(사적) 대화를 무작위로 도청했다.
정보기관의 불법도청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계기는 미림팀장으로 활동했던 공운영씨에 의해서였다. 공씨는 1999년 당시 국정원에서 직권면직되자 신변보호용으로 자신이 보관 중이던 도청테이프 274개와 녹취록을 몰래 들고 나왔다. 공씨는 1999년 도청테이프 중 하나인 ‘삼성 관련 X파일’ 도청테이프를 재미교포 박인회씨에게 건네주고, 박씨와 함께 삼성 측에 거액을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공씨는 국정원으로부터 자신이 퇴직 후 설립한 통신업체 ‘인우통신’ 설립 때 도움을 받았다.
공씨가 접한 도청 정보들의 파괴력 때문에 국정원은 공씨를 쉽게 대할 수 없었다. 공씨는 千容宅(천용택) 당시 국정원장 관련 내용이 담긴 ‘천용택 테이프’를 건네주는 대가로 통신사업 이권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정원의 불법도청 테이프와 녹취록 일부(일명 안기부 X파일)가 2005년 언론에 보도되면서 불법도청 사건은 검찰 수사로 확대됐다. 당시 月刊朝鮮(2005년 9월호)은 시중에 단편적으로 떠돌던 안기부 X파일 전문을 단독으로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X파일은 1997년 대선 당시 洪錫炫(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李鶴洙(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이 만나 대선자금 지원 방안을 논의하는 내용을 포함해, 정관계 인사들의 사적 대화 내용을 담고 있다.
2005년 당시 駐美(주미)대사로 재직 중이었던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이 일로 대사직을 그만뒀고 2007년에는 삼성그룹 법무팀장 출신인 金勇澈(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 내역을 폭로하는 일도 벌어졌다.
불법도청 사건으로 여러 사람이 사법처리됐다. 2005년 11월 불법도청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던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은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신건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은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막내딸이 자살했다. 미림팀장 공운영씨는 도청자료를 이용해 삼성그룹에서 돈을 뜯어내려 한 혐의가 인정돼 징역 1년6월형을 받았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안기부 X파일 공개했던 月刊朝鮮 측은 1심과 2심에서 선고유예를 받고 현재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 중이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도 그동안 수십 차례. 記者(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무리한’ 부탁을 한 적도 있었다. 2006년 7월 그의 막내딸이 자살했을 때 “인터뷰하자”고 요청을 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3년이란 세월이 흐르자 그의 마음에 작은 변화가 왔다.
“뭐가 그리 궁금하오? 나 같은 죄인이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소. 할 말도 없고 들을 말도 없을 거요. 그간의 사정을 고려해 국가보안상 답변하기 어려운 것을 제외하고 간단한 질문에는 응하겠소.”
인터뷰 허락을 얻은 후 산책을 겸한 본격적인 ‘대화’가 이뤄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그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뭔가를 보여줬다.
“올해 3월 자격증 하나 땄소. 민간단체에서 주는 ‘건강관리사’ 자격증이오. 병원에서 허드렛일이라도 하려면 필요하지. 돈을 벌어야 먹고사는데 막상 어디 취직할 데도 없고…. 자격증이라도 따려고 도서관에 종종 들러요. 사실 2005년에 유기농 기능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는데 일이 터지는 바람에 놓쳐버렸죠.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실기시험을 앞둔 그해 10월, 불법도청 사건으로 구속돼 시험을 못 봤어요.”
그가 건넨 자격증에는 ‘건강관리사 김은성’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실세 차장 김은성’이 이제 ‘밥’을 걱정하는 ‘소시민 김은성’으로 변해 있었다. 권력의 뒤안길에 서 있는 그에게서 ‘잊힌 존재’의 허무함이 잔뜩 묻어났다.
―한쪽 다리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감옥에 있을 때 관절염을 앓았어요. 출소 후 수술을 했는데도 낫지 않아요. 이렇게 다리를 절며 인생을 마감해야 할 듯합니다.”
김은성 전 차장은 2001년 12월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진승현 게이트’로 구속돼 1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진승현 게이트란 MCI코리아 부회장이었던 진승현씨가 금융기관으로부터 2300여 억원을 불법대출받고 주가를 조작해 비자금을 조성한 후 정관계에 로비했다는 사건을 말한다. 김은성씨는 실형을 받고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후 가석방됐다.
김씨는 2005년 10월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으로 다시 囹圄(영어)의 신세가 됐다. 그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1년6월형을 선고받은 후 복역하던 중 막내딸까지 잃게 된다. ‘아버지 없는 결혼식’을 치렀던 그의 막내딸이 결혼 후 한 달 만에 세상과 인연을 끊은 것이다. 김은성씨는 딸의 자살로 잠시 출소했으나 6개월 뒤 다시 수감됐다가 2007년 7월 출소했다.
도청 사건으로 30년 명예 虛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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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부시절 직원들이 도청에 나섰다가 곤욕을 치른 국가정보원. |
―2005년 검찰의 불법도청 조사 초기 도청 사실을 부인하다가 나중에 시인했습니다. 처음부터 도청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뭡니까.
“국정원이 정보기관으로 생명을 유지하려면 도청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05년 8월 당시 金昇圭(김승규) 국정원장이 불법감청 사실을 국민 앞에 시인하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즉각 林東源(임동원), 辛建(신건) 전임 원장에게 강력히 항의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며칠 후 전임 국정원장단이 김승규 원장을 항의방문했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어요.”
―불법감청 행위를 한 정보기관이 국민 앞에 잘못을 고백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정치적 목적 없이 순수한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면 이해를 해요. 하지만 전현직 간부직원들이 사법처리받는 과정에서 뭔가 또 다른 손이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국정원의 역할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도 곳곳에서 나왔어요. 국정원 후배들로부터 ‘도무지 일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2005년 10월 ‘긴급체포’ 형식으로 검찰에 붙잡혀 가셨죠.
“그런 식으로 검찰에 불려 가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제가 도청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니까 겁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막상 검찰조사를 받아 보니 제가 밖에서 듣던 정보와는 딴판이었어요. 검찰은 이미 70~80건에 가까운 불법감청 시인 진술서와 R-2 장비(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카스(휴대폰 감청장비) 사용지침서 등 도청증거를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신건 전임 원장이 김대중 정부 말기에 도청장비를 폐기한 사실을 검찰에서 시인한 진술들이 많았습니다. 이 말은 정보기관 首長(수장)이 도청행위를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어요.”
―도청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군요.
“검찰의 수사 의지가 아주 강했어요.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국정원의 위상과 업무내용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해외 정보기관으로부터 불신을 받아 정보협력체계까지 이완될 우려도 보였습니다. 조직에 30여 년을 몸담은 제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어 검찰 측에 제안을 했어요. ‘국정원 직원 소환을 최소로 하고 모든 책임을 내게 국한해 주면 검찰조사에 적극 임하겠다’고 했지요.”
―2001년에 이어 또다시 처벌받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까.
“연일 수많은 국정원 전현직 간부와 직원들이 검찰에 소환돼 밤중까지 조사받고 모욕을 당하는 광경을 눈뜨고 볼 수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구속이니 형사처벌이니 등은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제게 똑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 해도 그때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검찰조사에서 저까지 도청사실을 시인하자 당시 국정원 선후배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어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실과 다른 점이 너무 많지만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군요.”
“구체적 진술했다면 기소 어려웠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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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1월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김대중 정부 시절 불법도청 관련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솔직히 도청 부분에 대해 말 못한 부분이 아직도 많아요. 만약 국가안보나 國益(국익) 관련 내용을 검찰에서 진술했다면 사건의 파장은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하지만 최후의 비밀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었어요. 도청과 관련해 모든 진실을 다 밝히면 우방과의 국제관계는 물론 당시 권력 실세들에까지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죄인이 될지언정 역사의 죄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지요. 모든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국가안보나 국익 관련 내용이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면 도청해야 하는 겁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에서 도청·해킹·크래킹(상대방의 컴퓨터를 해킹해 저장자료를 삭제하는 불법행위) 등의 기술경쟁이 치열히 벌어지고 있어요. 산업스파이·테러·마약·인질·위폐·무기거래 등 모든 국제범죄에는 통신장비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통신수단을 활용한 신속한 대응 없이는 실효성을 잃게 됩니다. 물론 국가안보가 목적이라도 수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감옥에 간 겁니다.”
김은성 전 차장은 “불법도청이라는 틀에 갇혀 국익을 위한 감청행위가 제한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목표가 뚜렷하고 적대성과 위험성이 확실하고 위중할 때 감청을 해야 합니다. 이런 행위를 가지고 합법이냐 위법이냐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법을 따지다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최근 미국 CIA가 알카에다 조직원을 고문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이는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현재 국내법 중에서 도청을 금지하는 통신비밀보호법은 현장 중심으로 융통성 있게 바뀌어야 해요. 金泳三(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 초 개혁차원에서 폐기했던 국가보안법 중 찬양고무죄를 정권이양 1년을 앞두고 야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복시킨 사실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5년 11월 불법도청 사건 당시 조사를 받던 李秀一(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청 사건이 여러 사람 죽였지요. 제 딸이 자살한 것은 물론 저의 국정원 차장 후임이었던 이수일씨가 세상을 등지고 하늘로 갔습니다. 이수일 차장이 자살하기 며칠 전 담당 검사가 구치소에 있던 제게 ‘지금 이 차장을 조사 중인데 세상 무너질 정도로 한숨을 쉬는 등 이상하다’며 ‘면담기회를 줄 테니 만나 보라’고 하더군요.
검찰 조사실에서 만난 이 차장은 제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으나 약속 위반으로 당할 일이 너무 괴롭다. 국정원에 온 것이 너무 후회된다’고 했어요. 자포자기하는 태도를 보이며 지극히 불안해 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저도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들었는지 몰라요. 며칠간 단식과 면회중지도 했어요.”
“당시 생각하면 지금도 잠 못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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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0월 신건 당시 국정원장이 도청 관련 문제로 국회정보위원회에 출석한 모습. |
“저 또한 구속돼 조사를 받는 상황이었기에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청 사건 이후 국정원은 불법감청을 전혀 안 합니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게 만들어 놨죠. 테러 등에 대해서는 반드시 감청해야 합니다. 사실 전화도청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화를 통해서는 핵심정보를 얻지 못해요.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전화를 통해 핵심 정보를 얘기합니까. 국제범죄에 대해서는 전화 감청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할 수 있어야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팩스나 이메일 등은 물론이고 타이핑 치는 소리를 듣고도 어떤 내용을 입력하는지 알아낼 수 있어야 해요.”
―진승현 게이트, 파크뷰아파트 특혜분양 관련 탄원서, 도청사건 등으로 두 차례 구속됐습니다. 현직에 있으면서 너무 많은 일에 관여한 것 아닙니까.
“국민들께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당시 언론 보도 중에는 상당부분 진실이 왜곡된 것이 많아요.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만 봐도 그래요. 2002년 사건이 터지면서 제가 언론에 폭로한 것처럼 보도됐지만 제가 재판장에게 보낸 탄원서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에 의해 외부로 유출된 겁니다. 탄원서는 저의 재판과 관련해 재판장이 국정원의 업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만든 것에 불과해요.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못 잡니다. 일부 세력이 언론을 이용해 저를 정보기관 출신답지 않게 업무상 획득한 내용을 폭로하는 비열한 사람으로 몰고 갔어요. 교도소 생활보다 이 같은 오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훨씬 컸어요.”
―국정원 재직 당시 對共(대공)정책과 수사를 책임졌던 국내정보 책임자로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다고 봅니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직후 국가보안법 개폐론이 등장하고 햇볕정책이 물밀듯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정보와 보안활동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국민의 정부’를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저는 햇볕정책만을 놓고 김대중 정부를 좌경으로 모는 것은 다소 억지라고 생각해요. 사실 남북대화는 3공화국 시절 중앙정보부의 남북조절위원회를 시작으로 정권마다 방법만 달리했을 뿐 지속돼 왔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좌경화돼서 對北(대북) 유화정책을 취했다고는 볼 수 없어요. 햇볕정책보다 남과 북의 대화속도, 북측에 대한 일방적 지원이 문제였지요.”
“宋斗律은 거물 간첩, 증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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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정권 시절 한국에 입국해 재판을 받았던 재독 학자 송두율씨. 국정원은 그가 북한의 거물간첩이라는 물증을 갖고 있다고 한다. |
“햇볕정책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은 국내 좌파들에게 급격히 자유스러운 활동 공간을 보장해 줬어요. 이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혼란이 가중됐지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은 좌파세력들은 국가 공권력을 무너뜨렸고, 궁극적으로 국가안보와 국민들의 대공 경각심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행태가 盧武鉉(노무현) 정부 때 고착화됐고, 그 세력들이 지금 현 정부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어요.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 특히 국내부서에서는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요원들이 많았습니다. ‘간첩을 잡는 것이 오히려 정부에 부담을 주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한탄이 흘러나왔죠. 그런 와중에 유화적인 대북정책에 반대하는 분위기도 물밑에서 흘렀는데, 한 조직 내에 두 기류가 공존하면서 발생하는 길항작용(상반되는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동해 효과를 상쇄시키는 작용)이 상당했어요.”
그는 그런 실질적인 사례를 2001년 在獨(재독)학자 宋斗律(송두율)이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라고 했다.
“그해 송두율이 인천공항에 나타나자 청와대와 국정원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에서는 그를 연행해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죠.”
―국정원 전체 분위기가 그랬습니까.
“송두율을 반드시 잡아넣어야 한다는 분위기는 수사국이 제일 강했지요. 직원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비슷했습니다. 송두율은 북한의 거물 간첩입니다. 우리는 증거를 다 가지고 있었어요. 당시 국회 정보委(위)에 참석해 ‘송두율은 간첩이다,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사전에 보고한 적도 있습니다.”
―공항에 입국한 송두율은 어떻게 됐습니까.
“송두율은 이틀 동안 우리 측과 치열한 논리싸움을 벌이며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했어요. 우리는 그에게 ‘준법각서를 쓰고 조사를 받아라’고 했고, 그는 독일 시민권자임을 내세워 ‘조사를 안 받겠다’고 맞섰어요.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어요. ‘위에서 송두율 조사에 부정적’이라는 입장이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위’라면 어디를 말하는 겁니까.
“국정원의 위가 어디겠습니까. 뻔하지 않아요?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제가 송두율에게 ‘준법각서를 쓰면 국내입국을 허락하고 국정원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조사를 한다’는 내용의 타협안을 냈어요. 그런데 송두율이 ‘그것도 못하겠다’며 ‘독일로 되돌아가겠다’는 겁니다. 결국 송두율은 공항에 이틀 동안 있다가 가버렸습니다. 그 후 2003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당당히 입국해 검찰조사를 받고 재판까지 받았습니다.”
―송두율 사건으로 청와대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았습니까.
“수사관들의 의지가 강했고 증거가 명확했기 때문에 특별한 불이익은 없었습니다.”
‘林東源 국정원장 조사설’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얼마 전 KAL기 폭파범 金賢姬(김현희)씨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국정원을 ‘親北(친북)조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김현희씨는 국정원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김대중 정권 당시 무분별한 訪北(방북)활동이나 인적·물적 교류가 이뤄졌어요. 국정원도 자체적으로 정보·보안활동을 벌여 문제점을 발견하고 대책을 마련했어요. 하지만 한계가 있었지요.
국법질서가 보호되는 속에서 북측과 대화를 추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안보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특히 햇볕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국정원의 대공수사기능이 크게 위축돼 조직해체설까지 나돌았어요. 대공요원들의 동요가 심했습니다. 그 화살이 당시 임동원 원장에게 향했던 적이 있습니다.”
―요원들이 국정원장에게 반기를 든 겁니까.
“제가 그 일에 연루돼 있다며 곤욕을 치렀습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여름쯤의 일입니다. 당시 현대가 북한 개성지역에 공단을 짓겠다며 설치던 때였어요. 국정원 국내부서에서 ‘개성공단 설치’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습니다. 임동원 원장이 어느 날 저를 부르더니 개성공단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더군요. 그 일이 있고 2~3일 후 다시 임 원장이 저를 불렀어요. 자리에 앉자마자 원장이 제게 종이 한 장을 건네며 읽어 보라고 하더군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까.
“상상도 못할 내용이 적혀 있더군요. 제가 국정원 간부들에게 ‘친북성향의 임동원 원장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국정원 차장인 제가 어떻게 직속상관인 국정원장을 조사할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내용이었어요. 저를 음해하는 세력이 작성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조사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죠. 문건의 내용은 ‘김은성 차장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돼 있었는데, 사실관계가 모두 틀렸어요. 그 무렵 韓光玉(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이 저를 부르더니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느냐’며 나무라더군요. 저는 억울했습니다만 나중에 조사결과가 나오자 오해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국정원 내부에서 임동원 원장을 이상하게 보는 시각이 없지 않았어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국정원 내부에서 ‘원장 체포설’ 등이 제기된 걸로 압니다.
“국가최고 안보기관으로서, 햇볕정책을 추진한 정권에 대한 오해와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햇볕정책을 놓고 내부에서 공감대 형성이 안돼 요원들 간에 심한 격론이 벌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심지어 대공수사국 요원들이 남북회담을 하러 서울에 온 북측 인사들의 신변보호 업무를 맡게 되자 ‘간첩 잡는 요원이 간첩을 보호하다니 말이 안된다’며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복잡한 분위기에서 ‘임동원 원장 조사설’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한 후에도 국정원 내부에는 햇볕정책 반대론자들이 많았어요.”
국정원 간부들 개성공단 설치에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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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도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개성공단. 2000년 당시 국정원 국내부서 고위인사들은 개성공단 추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
“사실 저도 그런 움직임을 전혀 몰랐어요. 나중에 내부 보고서를 보고 알게 됐지요. 정상회담 직후 나타난 조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국장급 참모들에게 견해를 물어봤더니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당시 주류 언론은 개성공단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국정원 국내부서의 비판은 훨씬 강했어요.
저는 개성공단의 문제점에 대해 당시 임동원 원장에게 몇 가지를 보고했습니다. ‘법적·제도적 장치가 부족하고 개성공단에 입주할 우리 국민의 안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했지요. 하지만 임 원장은 ‘이러저러해서 공단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개성공단은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한의 金正日(김정일)이 공업지구건설에 합의하고 국정원 등이 지원하면서 시작됐다.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2002년 8월 개성공단 착공에 정식으로 합의했고 그해 11월 개성공업지구법 발표, 12월에 착공식을 가졌다. 2009년 5월 현재 개성공단에 일하던 남측 직원 한 명이 북한 당국에 억류돼 있으나 우리 정부당국은 억류자의 신변 안전 여부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남북관계가 경색돼 가고 있습니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북측이 강하게 나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남북관계 전문가가 아닙니다. 다만 북측의 강경한 태도는 남북관계를 과거와 같은 긴장관계로 만들어 놓고 그 파장에 따라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내적으로는 지난 10년간에 걸친 남북화해 무드로 이완됐을 수도 있는 북한 내부를 다시 조여 김정일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향후 가장 큰 변수는 북한이 내놓은 카드를 그대로 실행하느냐, 그리고 미국이 언제까지 북한을 인내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도청사건에 연루돼 처벌받았던 임동원·신건 전 원장은 사면복권돼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실형까지 살았음에도 여전히 복권되지 않고 있는데 억울하지 않습니까.
“불법감청은 내 책임하에 이뤄졌고 직원들은 저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조직과 조직원들에 대해 무한책임을 느껴 보국훈장을 반납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반려됐습니다만. 두 전직 원장이 赦免(사면)됐다고 해서 ‘나만 희생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결정한 것을 놓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신건 원장은 지난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신건 원장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할 말이야 많지만 지금으로서는 신 원장에게 축하한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김은성의 뒷모습
―두 번의 구속과 막내딸의 자살 등으로 불행이 잇달아 찾아왔는데….
“신앙이 없었다면 저도 지금쯤 이 세상에 없었을지 몰라요. 요한복음의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수시로 명상하고 있어요. 막내딸은 유난히 저를 따랐어요. 그런 딸자식의 결혼식에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있는 바람에 참석을 못했으니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아버지로서 딸에게 몹쓸 짓을 한 거죠. 딸과 보낸 추억이 떠오를 때면 견디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에요. 기분이 다운될 때는 급히 병원에 달려가야 합니다. 지금 복용하고 있는 신경안정제로는 안되거든요.
옛날에는 슬픈 영화만 봐도 눈물이 나오곤 했는데 최근 몇 년간 험한 꼴을 너무 많이 당해 눈물이 말랐는지 지금은 눈물이 나오지 않아요. 눈에서 눈물이 아예 안 나와 요즘 안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죽은 딸이 살아있을 때 잘 대해주지 못해 너무 후회됩니다. 기자 양반도 가족이나 주위 이웃을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계획은.
“선교용 수필집을 쓸 예정입니다. 비록 다리는 불편하지만 일을 할 능력과 의지가 있기 때문에 조그만 일거리라도 생기면 곧장 시작할 겁니다.”
김은성씨는 “인터뷰 내용이 왜곡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써 달라”며 성남중앙도서관 언덕길을 걸어갔다. 그는 “지금의 모습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며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에 어깨가 들쑥날쑥….
사람은 누구에게나 슬픈 뒷모습이 있다. 나이가 들고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슬픔은 더욱 진해진다.⊙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이란?
金泳三·金大中 정권의 국정원, 사회 저명인사 무차별 도청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이란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 국가정보원이 사회 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불법감청한 사건을 말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 내 비밀도청팀 ‘미림’이 움직였고, 김대중 정권 당시에는 과학보안국이 도청을 주도했다. 도청팀은 정계·재계·언론계 핵심 인사 700여 명의 私的(사적) 대화를 무작위로 도청했다.
정보기관의 불법도청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계기는 미림팀장으로 활동했던 공운영씨에 의해서였다. 공씨는 1999년 당시 국정원에서 직권면직되자 신변보호용으로 자신이 보관 중이던 도청테이프 274개와 녹취록을 몰래 들고 나왔다. 공씨는 1999년 도청테이프 중 하나인 ‘삼성 관련 X파일’ 도청테이프를 재미교포 박인회씨에게 건네주고, 박씨와 함께 삼성 측에 거액을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공씨는 국정원으로부터 자신이 퇴직 후 설립한 통신업체 ‘인우통신’ 설립 때 도움을 받았다.
공씨가 접한 도청 정보들의 파괴력 때문에 국정원은 공씨를 쉽게 대할 수 없었다. 공씨는 千容宅(천용택) 당시 국정원장 관련 내용이 담긴 ‘천용택 테이프’를 건네주는 대가로 통신사업 이권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정원의 불법도청 테이프와 녹취록 일부(일명 안기부 X파일)가 2005년 언론에 보도되면서 불법도청 사건은 검찰 수사로 확대됐다. 당시 月刊朝鮮(2005년 9월호)은 시중에 단편적으로 떠돌던 안기부 X파일 전문을 단독으로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X파일은 1997년 대선 당시 洪錫炫(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李鶴洙(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이 만나 대선자금 지원 방안을 논의하는 내용을 포함해, 정관계 인사들의 사적 대화 내용을 담고 있다.
2005년 당시 駐美(주미)대사로 재직 중이었던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이 일로 대사직을 그만뒀고 2007년에는 삼성그룹 법무팀장 출신인 金勇澈(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 내역을 폭로하는 일도 벌어졌다.
불법도청 사건으로 여러 사람이 사법처리됐다. 2005년 11월 불법도청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던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은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신건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은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막내딸이 자살했다. 미림팀장 공운영씨는 도청자료를 이용해 삼성그룹에서 돈을 뜯어내려 한 혐의가 인정돼 징역 1년6월형을 받았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안기부 X파일 공개했던 月刊朝鮮 측은 1심과 2심에서 선고유예를 받고 현재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