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투를 바꾸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리고 배급제에서 생활했던 습관대로 제비 새끼마냥 입만 벌리고 누가 먹여주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그래야 사람들과 융화하고,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을 바꿀 수 있어요.”(농협 과장 安明哲)
“정착금이 많고 적음을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받아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죠.”(‘요덕 스토리’ 감독 鄭成山)
“남한의 젊은 세대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단 사실에 실망했고, 교수나 대학원생들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고 존칭을 쓰는 데 엄청난 스트레스와 큰 충격을 받았어요.”(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金光進)
“정착금이 많고 적음을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받아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죠.”(‘요덕 스토리’ 감독 鄭成山)
“남한의 젊은 세대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단 사실에 실망했고, 교수나 대학원생들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고 존칭을 쓰는 데 엄청난 스트레스와 큰 충격을 받았어요.”(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金光進)
지난해까지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 수가 1만5000명을 넘어섰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 수는 2809명으로 2007년 2544명에 비해 10.4% 늘었다. 국내에 들어오는 탈북자는 1995년 북한 대홍수로 촉발된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늘기 시작해 2002년부터 연간 1000명을 넘어섰고, 2006년에는 처음으로 2000명을 돌파했다. 2007년 2월까지 국내에 입국한 전체 탈북자 수가 1만명을 넘어선 데 이어 지난해까지 모두 1만5057명이 국내에 들어왔다.
국내에 들어오는 탈북자의 수는 증가 추세에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탈북자들의 남한사회 정착은 쉽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북한인권정보센터가 통일부에 제출한 ‘2008 북한이탈주민 경제활동 실태조사: 취업·실업·소득’ 보고서에 따르면 15세 이상 탈북자 361명을 조사한 결과, 한국에 정착한 뒤 취업해 경제활동을 하는 탈북자의 월평균 근로소득은 93만7000원에 불과했다. 취업자 중 일용직 근로자는 42%, 실업률도 9.5%에 이르러 직업의 안정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탈북자들은 나이·학력·기술·경력 등에서 남한 사람들과 경쟁하기가 어려워 취직이 잘 안 되고, 취직하더라도 제조업 공장이나 식당 같은 단순 노무직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탈북자들이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적으로 사회에 진출한 탈북자들이 있다. 이들은 “통일이 되면 고향에 떳떳하게 돌아가기 위해 이를 사리물었다”며 “정부가 뭘 해주길 바라지 말고, 목숨을 걸고 탈북했던 각오로 스스로 노력하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탈북자들을 만나 그들의 성공 비결을 들어봤다.
북한음식 전문점 대표 金勇
귀순 가수, 방송인, 사업가 등으로 알려진 金勇(김용·49)씨를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북한음식 전문점 ‘모란각’에서 만났다. 모란각 입구에는 그가 연예활동 당시 찍었던 사진이 가득했고, 사무실에는 최근 홈쇼핑과 인터넷 쇼핑몰 등에 판매하고 있는 평양냉면과 만두, 불고기, 명태식해, 비빔장 등의 샘플이 전시돼 있었다.
김용씨는 지난 1991년 러시아와 스위스, 독일 등 9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평북 강계가 고향인 그는 자강도체육단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활동하다 2·16(김정일의 생일이 2월 16일이다)예술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평양 영화 및 방송음악단과 평양 국립교향악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가수 활동을 하면서 김책공업대학에 진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중앙당 산하기관인 백두산건축연구원 105호실 책임지도원으로 활동하며 ‘당에서 공식적으로 할 수 없는 은밀한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한국에 들어온 뒤에는 북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수, 방송인으로 활동하다 1996년 은행에서 5000만원의 대출을 받아 경기도 일산에 북한음식 전문점 ‘모란각’을 열었다. 자강도체육단 막내선수 시절 요리사 할아버지를 도와 선수들 식사를 책임졌던 요리 실력을 바탕으로 남한에서 방송리포터 일을 하면서 전국의 실향민들이 운영하는 북한음식점을 샅샅이 훑은 게 도움이 됐다.
하지만 20년 전 배웠던 기억만으론 뭔가 부족했다. 평양냉면 고유의 맛을 내기 위해 간장이란 간장은 전부 사다가 육수를 내봤고, 실향민들로부터 조언을 구하는 등 끊임없이 맛을 연구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평양냉면 맛을 내는 데 성공해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국내와 미국 뉴욕·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샌프란시스코와 일본 도쿄 등지에 모두 98개의 체인점을 열면서 ‘탈북 사업가 1호’란 별칭과 함께 승승장구했다. 그가 북한 음식점으로 성공하자 탈북자들이 너도나도 북한 음식점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본주의를 몰랐다”
그러나 그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처음 들어와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수억원의 사기를 당했고, 믿고 도와줬던 탈북자들에게 돈을 떼이기도 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수십억원의 빚을 떠안는 등 그의 삶은 浮沈(부침)의 연속이었다. 연 매출 수백억원에 달하던 프랜차이즈 기업 모란각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을 묻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땐 자본주의를 잘 몰랐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격으로 열정적으로 사업을 확장했어요. 제 능력은 생각도 않고, 雨後竹筍(우후죽순)으로 전국에 ‘모란각’ 체인점 98개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지역마다 맛이 다 달라 똑같은 맛을 낼 수가 없게 됐어요. 북한음식 맛은 금방 세수하고 나온 화장 안 한 여자 얼굴처럼 담백한데 여기는 맛이 맵고 짜고 각 지역 체인점마다 맛이 다 다른 겁니다. 주방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래야 장사가 된다는 거예요. 손님들 사이에서 ‘북한음식이 뭐 이래!’라는 비난이 들리기 시작했죠.”
북한음식 고유의 맛을 낼 수 없게 되자 사업은 점차 기울었다. 수십억원의 빚을 지게 되면서 한때 모란각을 팔까 고민했지만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種子(종자)를 베고 잔다’는 말처럼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한다. 그 뒤 컨설팅 회사에 자문해 체인점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능력의 한계를 배운 거죠. IMF 때 대기업들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구조조정을 했듯 ‘모란각’이란 브랜드를 건지고, 북한음식의 산 증인으로 남기 위해 체인점을 줄였어요. 모란각을 만드는 데 3~4년 걸렸다면, 줄여나가는 데는 6~7년이 걸렸어요.”
김용씨는 98개의 체인점 가운데 일산 본점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지점 등 2곳을 제외한 나머지 96개 체인점을 모두 정리하고, 평양냉면과 만두, 갈비찜, 불고기, 순대, 김치 등을 인터넷 쇼핑몰과 홈쇼핑 등에서 판매하는 ‘모란봉물산’을 운영하고 있다. 수십억원의 빚과 연체된 4억여 원의 세금도 모두 갚았다고 한다. 그는 “현재 CJ·롯데·현대·GS·농수산홈쇼핑 등 5개 홈쇼핑에서 냉면 판매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간 매출 규모를 묻자 “사업상 비밀”이라고 했다.
“빨리 세금 내서 빚 갚아야죠”
그는 존경하는 인물로 故(고)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꼽았다. 그의 사무실엔 울산 현대중공업을 방문했을 때 정 회장이 “고향 까마귀가 왔다”며 그를 불러 직접 준 기념패가 있었다.
“정주영 어르신이 절 부르시더니 ‘나는 여기(남한) 와서 10여 년 동안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고생했는데 너는 2~3년 만에 이만큼 성장했으니 정주영보다 낫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어르신은 無(무)에서 有(유)를 창조하신 분이잖아요. 그 어르신이 소 한 마리 가지고 남한에 내려오셨다가 소떼를 몰고 북한 고향을 방문했던 것처럼 저도 통일돼서 고향에 돌아갈 때 당당하고 떳떳하게 돌아가고 싶어요.”
앞으로의 꿈을 묻자 그는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통일이 되면 모든 것을 남한 사람들이 다 할 수는 없어요. 북한과 남한을 모두 체험해본 우리 같은 탈북자들이 할 몫이 있습니다. 그 전에 이곳에서 정치를 배워줘야(가르쳐줘야) 합니다.”
남한사회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 탈북자들에게 해줄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합니다. 김용이 냉면집으로 성공했다고 하니까 다들 좇아서 냉면집을 차리려고 하는데, 조급하게 욕심부리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하지 않는 힘든 일을 멕시칸들이 했어요. 일본에선 조선인이 일본인들이 내다 버리는 소 내장을 주워다 팔아서 돈 벌었어요. 탈북자들은 왜 건설현장에 안 가고, 힘든 일 안 하려고 합니까. 실향민들은 맨발로 월남해서 잘살아 가는데 왜 우리가 고향 선배들 못 따라갑니까.
정부에서 안 도와준다고 불평할 게 아니라 남들이 하지 않는 힘든 일을 찾아서 땀 흘려 일해야 해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다 잘삽니까. 여기서 태어나서 대학 선후배 있는 사람도 살기 힘든데 탈북자가 감히! 나라에서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정착금 받았으면 빨리 다음 탈북자에게 돌려줘야 할 거 아닙니까. 빨리 세금 내서 빚 갚아야죠. 부모 형제 남겨두고 목숨 걸고 왔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고, 못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피아니스트 金哲雄
오는 4월 전 세계 음악인들이 그리는 꿈의 무대인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갖게 될 탈북 피아니스트 金哲雄(김철웅·35)씨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백제예술대 내 백암아트홀에서 만났다.
노동당 고위 간부였던 아버지와 대학교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8세 때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해 14년 동안 수학했다. 대학을 수석 졸업한 뒤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한 뒤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국립교향악단 수석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다. 북한 최고 예술경연인 ‘2·16예술상 전국 개인경영’에서 피아노 부문 1위를 차지했고, 러시아에서는 차이코프스키 개인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입상했다고 했다.
그가 북한에서 최고의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탈북을 결심한 것은 피아노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유학 시절 접한 팝 피아니스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곡에 매료돼 이를 애인에게 들려주려고 연습하다 적발돼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가 북한을 떠난 이유를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러시아 유학 시절 받은 문화적 충격이 컸어요. 북한에서는 클래식 음악 외에는 어떤 음악도 연주할 수 없어요. 그것도 1900년대 이전 작품만 가능해요. 그 전에는 북한이 이상하단 생각을 전혀 못했지만 피아니스트로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연주할 수 없단 사실에 탈북을 결심하고, 조사 받은 지 3일 만에 탈출했어요.”
그는 2001년 북한을 탈출, 중국 국경지역에서 생전 처음 농사일을 했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는 벌목공으로 일했다. 그러다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단 소식을 듣고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의 도움을 받아 몰래 중국을 탈출하려다 공항에서 적발돼 北送(북송)되는 열차에서 화장실 창문을 통해 탈출했다. 중국 네이멍구(內蒙古·내몽고)에서 붙잡혀 북송돼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고문을 받을 때도 손을 겨드랑이에 꼭 끼고 손만은 다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 탈출했는데 손을 다치면 피아노를 칠 수 없단 생각에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12월 한국에 들어왔지만 그를 바라보는 남한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처음엔 남의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었어요. 시선이 차가웠고, 언어도 낯설었죠. 탈북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어요.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선 말투부터 바꿨어요. 드라마를 열심히 보면서 어투나 억양 등을 따라 했어요.”
“탈북 청소년들이 걱정”
그러나 그는 탈북자란 사실이 오히려 득이 되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한세대에 出講(출강)했고, 현재는 백제예술대 음악과 외래강사를 맡고 있다.
“한국에도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탈북자라고 하니까 오히려 PR이 잘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탈북 피아니스트’란 수식이 싫었지만 지금은 제가 말하고 다녀요. (음악 분야에서) 동질성을 찾다 보면 서로 너무나 같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탈북자란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온 것 같아요.”
김철웅씨는 2007년에는 호주 멜버른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지난해 9월부터 미국 뉴욕과 보스턴, 워싱턴 DC에서 순회 공연을 가지며 쇼팽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자신이 직접 편곡한 ‘아리랑 소나타’를 선보였다. 이어 10월에는 미국 국무부의 프랭클린 룸에서 북한곡 ‘환희의 노래’ 등을 연주해 청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고, 주미 폴란드대사관에서도 연주했다. 그리고 오는 4월 드디어 그가 꿈에 그리던 뉴욕 카네기홀에 서게 됐다.
피아노가 갖는 의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음악은 제 언어입니다. 음악으로 말하고 싶어요. 북한 인권문제는 캠페인이나 데모보다 문화적 접근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지난해 초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공연은 북한사람들에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을 겁니다. 앞으로 ‘김철웅 장르’를 만들고 싶어요. 남과 북이 하나될 수 있는 아리랑 변주곡 등 통일음악 장르를 개척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통일이 15분만이라도 앞당겨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는 올해 가을쯤 8살 연하의 연인과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결혼 뒤에는 국내에서 3년 정도 더 활동한 뒤 미국 예일대나 줄리어드 음대에서 유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철웅씨는 탈북 청소년들을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기가 원해서 온 게 아니잖아요. 부모를 따라서 왔는데 한창 민감한 나이에 상처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통일시대의 미래예요. 꿈을 꾸는 자만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요. 그 꿈을 향해 포기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남 탓하기 전에 자기에게서 희망을 찾았으면 해요. 북한에서의 처지가 달랐을 수 있지만 한국에 왔을 때는 두 주먹뿐인 건 다 마찬가지잖아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면 삶이 긍정적으로 변하더라고요.
남한 분들의 탈북자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탈북자들의 적응과정이 곧 통일정책일 수 있어요. 탈북자들이 무얼 뺏으러 왔다는 인식보다는 통일시대에 잘 활용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해줬으면 좋겠어요.”
저녁식사 시간을 훌쩍 넘겨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인터뷰를 계속한 김철웅씨는 생태탕 한 그릇을 후딱 비우고, 연주회 연습을 해야 한다며 바삐 연습실로 돌아갔다.
한의사 石英丸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앞에 위치한 ‘100년 한의원’에 들어서자 한약 달이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다. 게시판에는 石英丸(석영환·44) 원장이 탤런트 전원주·고수·김재원·강지환·이다혜씨, 개그맨 정준하·박수홍씨 등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방송출연 사진, 의료봉사활동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오후 6시에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했지만 환자가 끊이지 않아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석씨는 평양의학대학 고려의학부를 졸업하고, 국가 한방연구기관인 동의과학원 연구원, 청암산 기초의학연구소에서 심혈관 및 노화방지 연구원으로 근무한 뒤 사회안전부 88호 종합병원에서 진료부장으로 근무하다 1998년 10월 강원도 철원 북방한계선을 넘어 귀순했다.
병원이 청와대 인근에 위치해 있고, 입소문이 나면서 지금은 전직 장관에서부터 고위 공무원, 의원 보좌관, 연예인 등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지만 석씨는 귀순 초기 북한에서 종합병원 진료부장까지 지낸 경력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경희대에서 통일부·교육부·복지부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실력 테스트를 받아 학력이 인정됐고, 1999년 10월 마침내 한의사 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시험 자격은 주어졌지만 북한에서의 용어와 남한 용어가 달랐고, 시험도 전혀 생소했다. 북한에서는 객관식 시험이 없다고 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찾아간 건강식품 회사에서는 노인들 앞에서 강연을 하라고 했지만 결국은 약장사였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시험공부에만 매달리기로 했다. 영세민 아파트에 살면서 독서실에 다닐 돈을 아끼기 위해 양천구청이나 구로구청 도서관에 다니면서 구청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책을 팠다. 하지만 석씨는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나 한의사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석씨는 당시의 생활을 ‘돼지생활’이라고 회고했다.
“처음엔 많이 울었어. 비 올 때 제일 서럽지. ‘말이 통하는 이방인’이라고 느꼈어. 남자 혼자 살면 생활 뻔한 거 아냐. 돼지생활이었지. 공부는 하러 다녔지만 합격해도 갑갑한 거 아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데 합격해도 어디에 취직하나 기약 없는 생활이었지. 1년 동안은 내가 여기에 왜 왔나 싶더라고. 영세민 아파트에서 만난 코가 새빨간 술주정뱅이가 내가 탈북자인 걸 알고는 ‘열심히 사세요’ 그러는 거야. 속에서 천불이 났지.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이다. 나 때문에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통일되면 떳떳한 마음으로 돌아가야지’라고 마음 먹었어.”
청와대 인근에 한의원 개원
석씨는 2002년 세 번째 도전 만에 한의사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시험에 합격했어도 취직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때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이가 종로에서 웅선클리닉을 운영하던 홍성재 원장이었다. 석영환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홍성재 원장은 내가 한국에 정착하는 데 ‘햇빛’이고, 씨앗이 싹틀 수 있도록 키워준 ‘물방울’과 같은 분이었어. 웅선클리닉에 방 한 칸을 내주셔서 한의원을 개원할 수 있었어. 그분에게서 한국 사회를 배웠고, 경영 마인드를 익혔지. 그리고 1년여 만인 2003년에 이곳으로 옮겨올 수 있었지.”
그는 청와대 인근에 병원을 개원한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고 했다.
“남한사회에서 탈북자 이미지가 못 살고 못 배운 이미지잖아. 병원은 입소문이거든. 그때 남한 의사 친구들이 ‘청와대 앞에 개원하면 둘 중 하나다. 고위 공무원들이 오면 살고, 안 오면 죽는 거다’라고 하는 거야. 다행히 운 좋게 살아남았지.”
입소문을 타면서 환자가 늘었고, 각종 방송에도 출연했다. 또 <김일성 건강 장수법>이란 책을 내고 5가지 한약재를 달인 물에 목욕하는 ‘오목수 요법’, 32가지 한약재를 베고 자는 ‘신선베개요법’, 등에 꿀을 바르고 자는 ‘봉밀요법’, 백두산의 눈보라 소리로 기를 수련하는 음악명상법, 추운 숲에서 잠자는 ‘동면요법’ 등을 소개했다. 이 밖에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 <북한의 의료실태> <등산도 하고 산삼도 캐고> 등의 책을 펴냈다. 연간 소득 규모를 묻자 신고액이 8억여 원에 이른다고 했다. 성공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영향일 거야. 아버지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경호실 상좌(중령과 대령 사이 계급)였거든. 덕분에 자신감이 컸고, 뱃심도 커서 웬만한 사람 앞에서는 떨질 않아. 그래서 내 말투가 좀 버릇없지. 아버지 영향으로 세상을 보는 눈도 생겼고, 처세술도 익혔어. 자신감을 갖고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부지런히 하면 복이 돼 돌아오기 마련이야.”
앞으로의 꿈을 묻자 그는 김용씨와 마찬가지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경복궁 앞에는 일본인이나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 중국에 가면 동인당이 있듯 한국에 가면 ‘100년 한의원’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앞으로 한방과 양방, 치과 등을 개설할 계획이야. 병원을 바탕으로 정주영 회장처럼 글로벌 기업을 만드는 게 꿈이야.”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조언을 당부했다.
“내가 한의사가 아니었다면 남들 안 하는 3D 업종에 종사했을 거야. 일본에서는 똥 푸는 일로 돈 번 사람도 있어. 남들 하지 않는 일 하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찾는 거지. 내가 본 탈북자 중 한 분은 막노동을 하면서 1년 만에 몇 천만원을 번 분도 있어. 몸만 건강하고, 부지런하면 못할 일이 뭐가 있어. 어떤 일이든 쥐구멍만한 구멍 하나만 있으면 뚫려. 막말로 부모 형제 남겨두고 목숨 걸고 왔는데 못할 일이 뭐가 있어.
그리고 남한 사람들도 탈북자들 바라볼 때 저 혼자 살겠다고 가족들 버리고 온 놈들이란 시각은 버려야 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탈북자들의 심정을 어떻게 알겠어.”
석씨는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북한 가족 생각이 떠오른 듯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탈북 여성 1호 박사 李愛蘭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에서 <1990년 전후 북한 주민의 식생활 양상 변화>란 논문으로 탈북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 李愛蘭(이애란·45)씨를 서울 종로구 숭인동 서울전문학교에서 만났다. 이곳에서 호텔조리학과 학생들에게 북한 요리과정을 가르치고 있는 이씨는 3월부터 교수로 임용된다고 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녀는 조부모가 6·25 전쟁 중 월남한 지주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10살 때 함경남도 삼수군 관동리로 추방됐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에서 월남자 가족이란 이유로 온갖 차별과 멸시 속에서 생활했다. 양강도 혜산 경공업전문학교를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 경공업대학 식료공학부를 졸업한 뒤 혜산 과학기술위원회에서 품질감독원으로 근무하다 의사인 남편과 결혼했다.
우연히 미국에 있는 친척들과 연락이 닿아 1997년 8월 남편에게는 미처 탈북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생후 4개월 된 아들을 안고 탈북해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그해 10월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남편도 없이 여자 혼자 아기를 키우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강남의 한 호텔에서 하루 9시간 넘게 청소를 했지만 손에 쥐는 돈은 50만원에 불과했다. 교통비와 식비, 집세를 제하면 아들 분유 값도 안됐다. 통일부와 복지부의 소개로 연금관리공단에 일자리를 부탁하고 8개월을 기다렸지만 “탈북자는 안 받는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사흘을 엎드려 펑펑 울었어요. 울다 생각해보니 내가 스스로 노력해야지 통일부만 믿고 8개월을 보낸 게 황당했어요. 생활정보지에서 보험설계사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1999년 4월 삼성생명에 입사했어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보험회사 다니면 빚지고, 사기꾼 되고, 바람피운다’며 만류하는 거예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쫓겨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첫 월급으로 80만원을 받았어요. 너무 고마웠죠. 그땐 한 달에 100만원 버는 게 최대 소망이었어요. 그 돈이면 아들 교육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죠.”
어린 아들 생각에 열심히 뛰었더니 두 번째 달에는 168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보험회사는 ‘도를 닦는 곳’이었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 10명 중에 8명은 명함을 내밀면 낯빛이 바뀌면서 면박을 줘요. 상처 받고 많이 울었죠. 아침에 세수할 때마다 거울을 보고 자기최면을 걸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신경질 내지 않을 만한 시간을 찾아 전화를 걸어 상품 소개를 했어요. 매너 없이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친절하게 대했어요. 나중엔 그런 분들이 우량 고객이 되기도 했어요.”
보험사원으로 월 2700만원 벌기도
그녀는 전국 6만여 명의 삼성생명 보험설계사 중 9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월급 100만원이 최대 소망이었던 그녀는 제일 많이 받았을 때 월 2700만원까지 받았다고 했다.
2001년 이화여대에서 장학금 제안을 받고, 식품영양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게 낯설었다. 특히 영어는 그녀가 공부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한다.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밤낮 없이 공부에 매달렸다. 2003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재차 장학금을 받아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논문이 잘 안될 때는 한강에 가서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책임을 감당 못하면 다른 사람이 받을 장학금을 가로챈 게 되니까 피해를 주는 거잖아요. 탈북자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들과 비슷하게 하면 못한다고 여기고, 남들보다 훨씬 잘하면 비슷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으니까요.”
지난 18대 총선에서 실향민과 탈북자들로 이뤄진 국민실향안보당의 대변인 및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한 바 있는 이애란씨는 정부의 탈북자 정책에 대한 비판도 쏟아냈다.
“지금은 탈북자들을 전부 대학에 보내주지만, 대학을 나와서도 취업을 못하는 애들이 많아요. 대학입학 자격을 더 강화해서 진짜 실력자를 가려 뽑아야 해요. 통일 이후에 쓸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실력자를 선발해 대학 등록금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지원해주고, 공기업이나 대기업 취업 할당제나 인턴제도를 도입해 일할 기회를 줘야 해요. 그런 경험이 있어야 통일 후에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일할 때 보조 업무라도 할 수 있잖아요.”
탈북 당시 생후 4개월이었던 아들은 어느덧 초등학교 6학년이 됐다. 북한을 전혀 모르는 아들이지만 탈북자란 ‘주홍글씨’는 그의 이마에도 깊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탈북자란 사실을 숨기고 있어요. 아이들은 탈북자들을 가리켜 ‘거지’라고 손가락질하니까요. 북한 출신이란 사실만으로 무능력자 취급 받아요. 정치제도를 잘못 만나 못사는 나라에서 왔을 뿐인데도 말이죠. 그런 부분에서 아이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아요.”
농협 과장 安明哲
安明哲(안명철·40)씨는 1969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어나 홍원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홍원농업전문학교 1학년을 다니다 1987년 수용소 경비대에 입대했다. 훈련을 마친 후 정치범 가족들을 영원히 가두는 국가안전보위부 13호 수용소(함북 온성)와 22호 수용소(함북 회령)의 경비대 운전병으로 근무하다 1994년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 중국을 거쳐 그해 9월 남한으로 귀순했다.
그는 한번 끌려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는 종신수용소인 ‘완전통제구역’에서 8년간 근무했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비밀처형과 생체실험 등의 잔혹한 참상을 전 세계에 최초로 폭로했다.
그는 완전통제구역의 실상을 폭로한 <완전통제구역>이란 책을 출간했고, 15호 수용소(함남 요덕) 출신 강철환씨 등과 함께 1999년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에 대해 증언한 데 이어, 2007년 6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난 신동혁씨와 함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증언했다.
안명철씨는 농협 과장 명함과 2008년 11월 16일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완전 철폐를 목표로 창립한 ‘자유북한 캠페인’ 대표 명함을 함께 건넸다.
지금은 어엿한 은행원이지만 그 역시 한국에 온 직후에는 외로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폐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탈북자 조사기관인 대성공사에서 주민등록증도 없이 나와 경기도 남양주경찰서 관할의 한 여관에서 6개월 동안 지냈던 생활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한 3년은 거의 술독에 빠져 살았어요.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에, 남한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요. 아는 사람 한 명도 없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죠. 밤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새우깡 하나 놓고 매일 글라스로 소주 대여섯병을 비웠어요. 폐인처럼 살았죠.”
술기운에 간신히 잠이 들어도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악몽은 한국에 들어온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괴롭힌다고 했다.
“경비대들이 나를 잡으러 쫓아오는 모습과 정치범 중 맞아서 외눈이 된 김경찬이 공개 처형당했던 모습, 수용소 죄수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꿈에 나와요.”
주민등록증 발급이 늦어지는 바람에 간첩으로 몰리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했다.
“하루는 여관 앞의 까치다방이란 곳에 갔어요. 커피는 대성공사에서 마셔봤지만 쌍화차란 건 그때 처음 봤어요. 맛을 보니까 한약냄새 나고 영 이상하더라고요. 다방 아가씨가 중국 사람이냐고 묻기에 아니라고 했는데 다방 주인이 간첩이라고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파출소에서 경찰관이 나왔죠. 주민등록증이 없으니까 남양주경찰서까지 끌려갔죠. 거기서 보안과 형사들을 만나서야 신원이 확인돼 풀려났어요.”
지점장 승진시험 준비 중
여관 주인의 비닐하우스에서 3개월 가량 농사를 돕다가 경찰서에서 인근 농협에 일자리를 알선해줬다고 했다. 처음엔 농협 면세유 주유소에서 기름을 배달했고, 비료나 채소박스 나르는 막일을 했다. 3년여 배달을 했는데 처음 1년 동안은 월급이 60만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월급이 제가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하는) 강연 다니면서 버는 돈보다 훨씬 적었어요. 한번 강연에 20만~30만원을 받았는데, 처음엔 초청이 많아서 강연회 수입이 월 500만원이 됐으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 강연으로 먹고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강연은 한때지만 농협은 평생직장이잖아요. 그래서 일 배우는 데 전력을 쏟기로 했죠.”
열심히 일을 배운 덕에 농협의 쌀 공판장에서 일을 하게 됐고, 하나로마트에서 지배인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언어가 문제였다. 그는 당시 자신은 ‘동물원 원숭이’였다고 했다.
“말이 이상하니까 직원들이 다 저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는 거예요. 한 농협 고객이 직원 중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민원을 넣는 바람에 하루는 직원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전무가 저더러 ‘당장 말을 바꾸라’고 면박을 줬어요. 그래서 TV 보고 말을 따라 하면서 계속 바꾸려고 했죠. ‘사람 아는 게 재산’이란 생각에 사람을 사귀고 말도 배우려고 스키·스킨스쿠버·축구·야구·수영·산악회 등 직장 동호회란 동호회는 다 가입했어요. 동호회비로 80만원이 나가 나중엔 축구와 산악회만 하게 됐어요.”
1996년부터는 직장에 다니면서 건국대 야간 경영정보학과에서 공부를 했다. 이듬해 후배의 소개로 현재의 아내를 만나 삶의 희망을 찾았다고 한다. 술을 줄이니 돈도 모이더라고 했다. 1998년 결혼해 현재는 딸 둘을 낳았다고 한다. 2001년부터는 정식 은행원이 돼 출납부터 대부업무를 보게 됐고, 현재는 지점 과장으로서 기획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요즘 지점장 승진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올해 경기도에서 농협 승진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이 2800명이에요. 그중 130등 안에 들어야 하는데 공부해야 할 과목이 만만치 않아요. 특히 신용과 경제 과목이 어렵죠. 빠른 사람은 3년, 보통은 5년 정도 공부를 해야 합격할 수 있어요. 지난해 10월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일 끝나고 고시원에 가서 새벽 2~3시까지 공부하고 있어요.”
매일 격무에 시달리고, 새벽까지 공부해야 하지만 그는 지난해 11월 16일 ‘자유북한 캠페인’을 창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그가 직접 경험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인권유린 실태를 널리 알려 전 세계가 북한을 압박해 수용소를 완전 철폐토록 하는 것이 단체 설립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그는 탈북자들에게는 먼저 말투부터 바꾸고, 스스로 노력하라고 조언했다.
“말투를 바꾸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리고 배급제에서 생활했던 습관대로 제비 새끼마냥 입만 벌리고 누가 먹여주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그래야 사람들과 융화하고,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을 바꿀 수 있어요.”
뮤지컬 ‘요덕 스토리’ 감독 鄭成山
“제 삶의 모토는 ‘不狂不及(불광불급)’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거죠. 돈이 뭔지 정말 형처럼 믿고 따랐던 사람도 돈 앞에서는 돌아서고, 사무실에 깡패가 몰려와 난동을 부렸어도 전 돈을 벌면 이걸 가지고 또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15호 정치범수용소(함남 요덕)의 참상을 담은 뮤지컬 ‘요덕 스토리’를 연출한 鄭成山(정성산·40) 감독은 이 작품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불과 몇 시간 거리인 북녘 땅에서 이처럼 참혹한 인권유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2006년 3월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시작된 공연은 연일 대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좌파들은 정씨의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집까지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지며 테러 위협을 일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씨는 좌파들의 위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세를 몰아 그해 7월까지 지방 공연에 나섰지만 서울에서와 같은 흥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 공연에 1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사람만 믿고 공연을 준비하다가 이마저 제대로 되지 않아 사채 4000만원을 끌어다 쓰고,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의 적금을 깨 2000만원을 가져다 미국 뉴욕과 LA 등에서 공연을 강행했지만 결국 7억여 원의 빚더미만 떠안게 됐다고 했다.
출연료를 못 받은 배우들은 노동부에 그를 고발했고, 그는 수차례 노동부에 불려가 해명을 해야 했다. 그는 ‘요덕 스토리’로 흥했다가 망한 꼴이 됐다. 하지만 그는 시련을 겪으면서 더 단단해지고 강해졌다고 했다.
“저쪽에선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고 있는데 그래도 난 사글세지만 집이 있고, 굶지 않고 살고 있으니 가진 게 많다고 생각했어요.
세상 사람들 열이면 열 다 돈을 좇지만 누군가는 북한 동포들의 저 참혹한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어요. 꿈에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계속 보여요. 외롭고, 힘들었지만 언젠가는 우리 북한 동포들이 알아주리라 믿어요.”
미국 공연으로 빚더미에 앉았지만 그는 <워싱턴 포스트>, <월 스트리트 저널>,, CNN 등 미국 언론이 ‘요덕 스토리’의 내용을 크게 보도해 북한의 인권유린 실상을 세계에 알렸다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으니 미련은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포장마차, 술집 삐끼(호객꾼), 편의점이나 주유소 아르바이트, CF 촬영현장 진행, 병원에서 시체 닦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북한 냉면과 된장을 취급하는 ‘오마니식품’이란 회사를 차렸다가 망하기도 했죠. 한국에 들어온 뒤 14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굴곡이 심했지만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어요. 처음엔 대체 여기에 왜 왔을까 정체성에 심한 갈등을 느꼈죠. 그러다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작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요덕 스토리’를 공연하고 나서 북쪽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 없어졌어요.”
‘삐라 한 장이 총칼보다 무섭다’
그는 지난해 4월에는 조카들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2남 4녀 중의 막내인 그는 1994년 탈북해 중국·베트남·홍콩을 거쳐 이듬해인 1995년 1월 한국에 정착했지만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누나들과 형은 어디로 끌려갔는지조차 모르고, 돌봐줄 사람 없는 어린 조카들이 결국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이 가족사의 비극을 뮤지컬로 무대에 올리겠다고 했다. 그는 문화·예술에 대한 신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북한 인민무력부 적공국 현관에는 ‘삐라 한 장이 총칼보다 무섭다’란 글귀가 적혀 있어요. 그만큼 선전·선동이 무섭다는 거죠. 전 문화·예술의 힘이 총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요. 문화·예술로 북한 동포들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그로써 저들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는 지난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다비드 스타 픽쳐스’란 공연기획사를 설립했다. 그는 기획사 이름에 대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듯 김정일이란 골리앗과 싸우는 상징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성산씨는 오는 3월 19일부터 5월 3일까지 경기도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뮤지컬 ‘위대한 쇼’를 공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잘생긴 평양의 미남 장교들과 섹시한 서울의 미녀들이 펼치는 유쾌한 로맨틱 뮤지컬이라고 했다. 앞으로의 꿈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 긍정의 힘을 믿어요. 10년 뒤에는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있지 않을까요. 전 북한에 대해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요. 북한 관련 소재로 성공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북한 관련 작품을 만들 생각이에요. 독일은 통일 10년 전부터 끊임없이 통일 문화를 전파시키도록 노력했어요. 남북 통일에 대해 긍정적 생각을 갖고, 통일시대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리더가 되고 싶어요. 또 일본과 미국 등을 상대로 글로벌 경쟁을 하고 싶습니다.”
선배 탈북자로서 조언을 당부하자 그는 탈북자가 통일시대의 주역이란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통일시대의 주역이에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통일된 북한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보여질 겁니다. 우리는 누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왔으니까 정착금이 많고 적음을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받아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죠. 남한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사회예요. 현실을 부정하지도 말고, 안주하지도 말고 끊임없이 긍정적으로 도전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NK지식인연대 대표 金興光
북한에서 전문직 경력이 있는 탈북자들로 구성된 ‘NK(North Korea)지식인연대’가 지난해 10월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창립식을 가졌다. 이 단체에는 북한에서 대학교수나 연구사, 기자, 작가, 교사, 의사, 약사, 당기관 등 전문분야에 종사했던 사람 위주로 4년제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탈북자 157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NK지식인연대의 초대 대표를 맡은 金興光(김흥광·49)씨를 서울시 중구 신당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김책공업대학에서 컴퓨터 운영체계를 전공했다. 연구원 과정과 대학교원 과정을 마치고, 함흥 전자계산기전문학교·전자계산기단과대학·함흥 컴퓨터기술대학 강좌장, 함흥 공산대학 강좌장 겸 컴퓨터 실장을 역임했다. 2003년 탈북해 2004년 한국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대학교수로 강좌장까지 지냈지만 남한에서 교수 자리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막막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에서의 경력이 있으니까 누군가 날 찾아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찾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어요. 생활정보지를 뒤져 일자리를 알아봤죠. 전공을 조금이라도 살려 인터넷을 연결하는 업체에 취업하려고 했더니 그마저도 나이가 많다고 퇴짜를 놓으려 하는 거예요. 6일 교육을 받은 뒤 병원이나 회사, 가정집 등에 인터넷을 연결하는 일을 시작했죠.”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꼬박 일하면 연장수당을 포함해서 월급으로 18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컴퓨터 운영체계 전공을 살려 한국정보교육센터에서 6개월 동안 보안 솔루션(solution)을 연구한 뒤 2005년부터는 한신대 초빙교수로 컴퓨터 운영체계 개론 수업을 맡아 진행했다.
강단에 다시 설 때 감격의 눈물 흘려
그는 “강단에 다시 선 감격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말을 하기 시작하니까 강의실이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다고 했다. 말투도 함경도 말씨에 컴퓨터를 ‘콤퓨타’라고 발음하는 등 용어를 다르게 쓰니까 수업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녹음해서 들어보고, 남한의 이종사촌 누님의 조언을 받아서 말투를 고쳐나갔다.
그 뒤 2006년 5월부터 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후원회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탈북자들의 민원상담 등 탈북자의 정착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한국에 들어온 탈북 지식인들이 처한 상황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했다.
“북에서 연구사로 일한 한 여성 과학자가 사회복지관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단순 도우미로 활동하는 모습도 봤고, 북에서 대학교수였던 사람이 주유소에서 주유원으로 일하는 모습도 봤어요. 탈북 지식인들이 북한에서의 경험과 남한에서의 새로운 배움을 결합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은 NK지식인연대의 창립선언문에 그대로 반영됐다. 이들은 창립선언문에서 “북한에서의 체험과 남한에서의 배움을 통해 북한을 내부적·외부적 시각에서 다 고찰해 본 탈북 지식인들의 선구자적 역할은 남북 통일과 북한의 발전을 위해 매우 절실하다”며 “북한의 침체를 극복하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전략과 구체적인 방도를 연구해 북한의 미래에 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구체적 사업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통일에 대한 준비는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초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 선도자로서의 사명의식을 갖고 경계인으로서의 북한 및 통일 관련 학술연구활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또 북한개혁방송(민간 라디오 방송)과 계간지인 <북한사회> 등 잡지 발행, 해외 한인사회 순회 강연 등 국제적인 커뮤니티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유도할 계획입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金光進
서울 강남구 도곡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에서 만난 金光進(김광진·42) 선임연구원은 훤칠한 키에 말투가 차분했다. 고향을 묻자 그는 “이름도 여기 와서 바꾼 이름이에요. 북한에 아직 부모님이나 가족이 많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얘기하기가 그래요. 평양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정도로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이 북한에 노출될 만한 질문에는 대답을 피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는 평양외국어학원에 수석 입학한 뒤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평양컴퓨터대학에서 6년간 교원으로 활동했고, 2002년 해외 무역대표부에 파견돼 김정일의 ‘혁명자금’(개인 통치 자금) 마련 및 관리 업무를 담당했었다고 한다.
탈북하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북한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며 “북한의 상투적 수법에 걸려 탈북하게 됐다”고 말했다.
“해외에 파견돼서 일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됐어요. 북한이 사람을 처벌하고 제거하는 상투적 수법이 있어요. 남한의 안기부(국가정보원의 전신)와 연결됐다든가 미국 CIA나 일본 정보기관의 프락치란 딱지를 붙이는 경우가 많아요. 평소 북한 체제나 정권에 대한 비판을 자주 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저를 지목해서 북한 정보가 많이 새나간다는 보고가 올라갔다는 걸 알고 탈출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는 2004년 2월 한국에 들어온 뒤 김정일의 개인 통치자금을 마련·관리한 경력이 인정돼 그해 국책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됐다. 이곳에서 북한의 금융·재정 문제를 비롯해 북한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2007년 12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의 외화관리시스템 변화 연구’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국민대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그 역시 처음 한국에 들어와서는 언어소통의 장애, 문화적 차이, 정체성의 혼란 등을 겪었다고 했다. 특히 남한의 젊은 세대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단 사실에 실망했고, 교수나 대학원생들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고 존칭을 쓰는 데 엄청난 스트레스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은 겉으로는 反美(반미) 제국주의와 싸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한민국과의 대결이나 경쟁이 가장 핵심적이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주석’이니 ‘위원장’이니 존칭을 자연스럽게 쓰고, 만약 그렇게 쓰지 않으면 오히려 거부감을 갖는 것 같고, 분위기가 썰렁할 정도였어요. 정말 진심으로 존경심을 갖고 얘기하는 것 같아서 충격적이었죠.”
탈북자 가운데 국회의원, 구의원이 나와야
통일 준비 과정에서 탈북자들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통일이 되면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다 할 수는 없어요. 북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그래요. 남한이 완전히 점령·통치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면 곤란합니다. 남북한 사람들의 간극을 줄이고 융화시킬 수 있는 가교의 역할을 남북한을 모두 체험한 탈북자들이 할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치 시스템을 빨리 배워야 하고, 정치뿐만 아니라 금융·무역·회계 등 경제분야에서도 그래요. 그래서 탈북자 가운데 국회의원·시의원·구의원이 나와야 합니다.”
탈북자의 성공적 정착을 위한 고언을 부탁하자 이렇게 말했다.
“죽을 각오로 생사를 걸고 그 많은 가족과 친지, 그리고 자신의 피해를 각오하고 왔는데 정말 이를 악물고 성공해야 해요.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마음대로 공부할 기회, 자유를 누릴 기회, 인간다운 삶을 누릴 기회가 없어요. 그 사람들 생각해서라도 그 사람들 몫까지 해야 합니다. 특히 공부만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남북한의 음악 교육
김철웅씨는 음악 교육만큼은 북한이 남한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북한의 음악교육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북한은 어린 시절부터 국가가 각 지역에서 최고의 엘리트를 선발해서 대학에서 심혈을 기울여 교육을 시킵니다. 남한에서는 어느 학교에 가도 음대가 있고, 피아노만 있으면 누구나 피아노를 칠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아무나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습니다.
평양음대에 선발되면 각종 혜택이 주어지는데 우선 10년간의 군복무가 면제되고, 북한 내의 공연 티켓은 모두 공짜예요. 일반인들이 다니지 못하는 대사관거리도 마음대로 통행할 수 있어요. 그런데 평양음대에 입학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졸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국가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하기 때문에 중도에 계속 탈락시켜요. 중도 탈락하면 아무 것도 못돼요.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매달리죠.”
귀순 뒤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에게 남한의 음악 교육은 어떻게 비쳤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제일 싫은 것은 피아노를 치기 싫어하는 애들한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겁니다. 여기 부모들은 아이들이 音(음)을 조금만 주절거려도 우리 애가 음악적 천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한계가 어디까지인 줄 빨리 알고, 빨리 포기할 줄 아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전 재능이 보이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빨리 轉科(전과)하라고 합니다. 부모가 피땀 흘려 번 돈이 아깝잖아요. 또 재능은 있는데 연습을 안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요즘 애들은 入試(입시) 때는 정말 잘 쳐요. 그런데 입학하고 나서는 연습을 안 해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진정한 음악을 위한 음악을 해야 하는데 입시를 위한 연습이 되는 거죠.”
김철웅씨는 남한의 學緣(학연) 중시 풍조도 비판했다. 특히 보수적인 클래식계는 장벽이 더 높다고 했다.
“음악은 자유로워야 하는데 남한 학생들의 피아노 연주 소리만 들어도 누구의 제자인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음악인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만의 음악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붕어빵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는 출신학교를 너무 따져요. 제 주변의 음악 하는 친구들만 봐도 숱한 돈 들고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유학 갔다 와서 강사 자리 하나 못 따고 절절 매는 사람들 많아요. 저한테 강사 자리 부탁하는 이력서가 이만큼 쌓여있어요. (그는 엄지와 검지로 3㎝ 정도를 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울대, 연대 출신 아니면 힘들잖아요. 그런 점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탈북자 피아니스트인 제가 오히려 속 편하죠.”
국내에 들어오는 탈북자의 수는 증가 추세에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탈북자들의 남한사회 정착은 쉽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북한인권정보센터가 통일부에 제출한 ‘2008 북한이탈주민 경제활동 실태조사: 취업·실업·소득’ 보고서에 따르면 15세 이상 탈북자 361명을 조사한 결과, 한국에 정착한 뒤 취업해 경제활동을 하는 탈북자의 월평균 근로소득은 93만7000원에 불과했다. 취업자 중 일용직 근로자는 42%, 실업률도 9.5%에 이르러 직업의 안정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탈북자들은 나이·학력·기술·경력 등에서 남한 사람들과 경쟁하기가 어려워 취직이 잘 안 되고, 취직하더라도 제조업 공장이나 식당 같은 단순 노무직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탈북자들이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적으로 사회에 진출한 탈북자들이 있다. 이들은 “통일이 되면 고향에 떳떳하게 돌아가기 위해 이를 사리물었다”며 “정부가 뭘 해주길 바라지 말고, 목숨을 걸고 탈북했던 각오로 스스로 노력하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각 분야에서 성공한 탈북자들을 만나 그들의 성공 비결을 들어봤다.
북한음식 전문점 대표 金勇
 |
| 김용 |
김용씨는 지난 1991년 러시아와 스위스, 독일 등 9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평북 강계가 고향인 그는 자강도체육단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활동하다 2·16(김정일의 생일이 2월 16일이다)예술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평양 영화 및 방송음악단과 평양 국립교향악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가수 활동을 하면서 김책공업대학에 진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중앙당 산하기관인 백두산건축연구원 105호실 책임지도원으로 활동하며 ‘당에서 공식적으로 할 수 없는 은밀한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한국에 들어온 뒤에는 북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수, 방송인으로 활동하다 1996년 은행에서 5000만원의 대출을 받아 경기도 일산에 북한음식 전문점 ‘모란각’을 열었다. 자강도체육단 막내선수 시절 요리사 할아버지를 도와 선수들 식사를 책임졌던 요리 실력을 바탕으로 남한에서 방송리포터 일을 하면서 전국의 실향민들이 운영하는 북한음식점을 샅샅이 훑은 게 도움이 됐다.
하지만 20년 전 배웠던 기억만으론 뭔가 부족했다. 평양냉면 고유의 맛을 내기 위해 간장이란 간장은 전부 사다가 육수를 내봤고, 실향민들로부터 조언을 구하는 등 끊임없이 맛을 연구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평양냉면 맛을 내는 데 성공해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국내와 미국 뉴욕·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샌프란시스코와 일본 도쿄 등지에 모두 98개의 체인점을 열면서 ‘탈북 사업가 1호’란 별칭과 함께 승승장구했다. 그가 북한 음식점으로 성공하자 탈북자들이 너도나도 북한 음식점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본주의를 몰랐다”
그러나 그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처음 들어와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수억원의 사기를 당했고, 믿고 도와줬던 탈북자들에게 돈을 떼이기도 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수십억원의 빚을 떠안는 등 그의 삶은 浮沈(부침)의 연속이었다. 연 매출 수백억원에 달하던 프랜차이즈 기업 모란각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을 묻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땐 자본주의를 잘 몰랐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격으로 열정적으로 사업을 확장했어요. 제 능력은 생각도 않고, 雨後竹筍(우후죽순)으로 전국에 ‘모란각’ 체인점 98개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지역마다 맛이 다 달라 똑같은 맛을 낼 수가 없게 됐어요. 북한음식 맛은 금방 세수하고 나온 화장 안 한 여자 얼굴처럼 담백한데 여기는 맛이 맵고 짜고 각 지역 체인점마다 맛이 다 다른 겁니다. 주방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래야 장사가 된다는 거예요. 손님들 사이에서 ‘북한음식이 뭐 이래!’라는 비난이 들리기 시작했죠.”
북한음식 고유의 맛을 낼 수 없게 되자 사업은 점차 기울었다. 수십억원의 빚을 지게 되면서 한때 모란각을 팔까 고민했지만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種子(종자)를 베고 잔다’는 말처럼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한다. 그 뒤 컨설팅 회사에 자문해 체인점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능력의 한계를 배운 거죠. IMF 때 대기업들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구조조정을 했듯 ‘모란각’이란 브랜드를 건지고, 북한음식의 산 증인으로 남기 위해 체인점을 줄였어요. 모란각을 만드는 데 3~4년 걸렸다면, 줄여나가는 데는 6~7년이 걸렸어요.”
김용씨는 98개의 체인점 가운데 일산 본점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지점 등 2곳을 제외한 나머지 96개 체인점을 모두 정리하고, 평양냉면과 만두, 갈비찜, 불고기, 순대, 김치 등을 인터넷 쇼핑몰과 홈쇼핑 등에서 판매하는 ‘모란봉물산’을 운영하고 있다. 수십억원의 빚과 연체된 4억여 원의 세금도 모두 갚았다고 한다. 그는 “현재 CJ·롯데·현대·GS·농수산홈쇼핑 등 5개 홈쇼핑에서 냉면 판매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간 매출 규모를 묻자 “사업상 비밀”이라고 했다.
“빨리 세금 내서 빚 갚아야죠”
그는 존경하는 인물로 故(고)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꼽았다. 그의 사무실엔 울산 현대중공업을 방문했을 때 정 회장이 “고향 까마귀가 왔다”며 그를 불러 직접 준 기념패가 있었다.
“정주영 어르신이 절 부르시더니 ‘나는 여기(남한) 와서 10여 년 동안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고생했는데 너는 2~3년 만에 이만큼 성장했으니 정주영보다 낫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어르신은 無(무)에서 有(유)를 창조하신 분이잖아요. 그 어르신이 소 한 마리 가지고 남한에 내려오셨다가 소떼를 몰고 북한 고향을 방문했던 것처럼 저도 통일돼서 고향에 돌아갈 때 당당하고 떳떳하게 돌아가고 싶어요.”
앞으로의 꿈을 묻자 그는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통일이 되면 모든 것을 남한 사람들이 다 할 수는 없어요. 북한과 남한을 모두 체험해본 우리 같은 탈북자들이 할 몫이 있습니다. 그 전에 이곳에서 정치를 배워줘야(가르쳐줘야) 합니다.”
남한사회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 탈북자들에게 해줄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합니다. 김용이 냉면집으로 성공했다고 하니까 다들 좇아서 냉면집을 차리려고 하는데, 조급하게 욕심부리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하지 않는 힘든 일을 멕시칸들이 했어요. 일본에선 조선인이 일본인들이 내다 버리는 소 내장을 주워다 팔아서 돈 벌었어요. 탈북자들은 왜 건설현장에 안 가고, 힘든 일 안 하려고 합니까. 실향민들은 맨발로 월남해서 잘살아 가는데 왜 우리가 고향 선배들 못 따라갑니까.
정부에서 안 도와준다고 불평할 게 아니라 남들이 하지 않는 힘든 일을 찾아서 땀 흘려 일해야 해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다 잘삽니까. 여기서 태어나서 대학 선후배 있는 사람도 살기 힘든데 탈북자가 감히! 나라에서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정착금 받았으면 빨리 다음 탈북자에게 돌려줘야 할 거 아닙니까. 빨리 세금 내서 빚 갚아야죠. 부모 형제 남겨두고 목숨 걸고 왔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고, 못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피아니스트 金哲雄
 |
| 김철웅 |
노동당 고위 간부였던 아버지와 대학교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8세 때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해 14년 동안 수학했다. 대학을 수석 졸업한 뒤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한 뒤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국립교향악단 수석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다. 북한 최고 예술경연인 ‘2·16예술상 전국 개인경영’에서 피아노 부문 1위를 차지했고, 러시아에서는 차이코프스키 개인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입상했다고 했다.
그가 북한에서 최고의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탈북을 결심한 것은 피아노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유학 시절 접한 팝 피아니스트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곡에 매료돼 이를 애인에게 들려주려고 연습하다 적발돼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가 북한을 떠난 이유를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러시아 유학 시절 받은 문화적 충격이 컸어요. 북한에서는 클래식 음악 외에는 어떤 음악도 연주할 수 없어요. 그것도 1900년대 이전 작품만 가능해요. 그 전에는 북한이 이상하단 생각을 전혀 못했지만 피아니스트로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연주할 수 없단 사실에 탈북을 결심하고, 조사 받은 지 3일 만에 탈출했어요.”
그는 2001년 북한을 탈출, 중국 국경지역에서 생전 처음 농사일을 했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는 벌목공으로 일했다. 그러다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단 소식을 듣고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의 도움을 받아 몰래 중국을 탈출하려다 공항에서 적발돼 北送(북송)되는 열차에서 화장실 창문을 통해 탈출했다. 중국 네이멍구(內蒙古·내몽고)에서 붙잡혀 북송돼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고문을 받을 때도 손을 겨드랑이에 꼭 끼고 손만은 다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 탈출했는데 손을 다치면 피아노를 칠 수 없단 생각에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12월 한국에 들어왔지만 그를 바라보는 남한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처음엔 남의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었어요. 시선이 차가웠고, 언어도 낯설었죠. 탈북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어요.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선 말투부터 바꿨어요. 드라마를 열심히 보면서 어투나 억양 등을 따라 했어요.”
“탈북 청소년들이 걱정”
그러나 그는 탈북자란 사실이 오히려 득이 되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한세대에 出講(출강)했고, 현재는 백제예술대 음악과 외래강사를 맡고 있다.
“한국에도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탈북자라고 하니까 오히려 PR이 잘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탈북 피아니스트’란 수식이 싫었지만 지금은 제가 말하고 다녀요. (음악 분야에서) 동질성을 찾다 보면 서로 너무나 같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탈북자란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온 것 같아요.”
김철웅씨는 2007년에는 호주 멜버른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지난해 9월부터 미국 뉴욕과 보스턴, 워싱턴 DC에서 순회 공연을 가지며 쇼팽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자신이 직접 편곡한 ‘아리랑 소나타’를 선보였다. 이어 10월에는 미국 국무부의 프랭클린 룸에서 북한곡 ‘환희의 노래’ 등을 연주해 청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고, 주미 폴란드대사관에서도 연주했다. 그리고 오는 4월 드디어 그가 꿈에 그리던 뉴욕 카네기홀에 서게 됐다.
피아노가 갖는 의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음악은 제 언어입니다. 음악으로 말하고 싶어요. 북한 인권문제는 캠페인이나 데모보다 문화적 접근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지난해 초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공연은 북한사람들에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을 겁니다. 앞으로 ‘김철웅 장르’를 만들고 싶어요. 남과 북이 하나될 수 있는 아리랑 변주곡 등 통일음악 장르를 개척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통일이 15분만이라도 앞당겨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는 올해 가을쯤 8살 연하의 연인과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결혼 뒤에는 국내에서 3년 정도 더 활동한 뒤 미국 예일대나 줄리어드 음대에서 유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철웅씨는 탈북 청소년들을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기가 원해서 온 게 아니잖아요. 부모를 따라서 왔는데 한창 민감한 나이에 상처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통일시대의 미래예요. 꿈을 꾸는 자만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어요. 그 꿈을 향해 포기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남 탓하기 전에 자기에게서 희망을 찾았으면 해요. 북한에서의 처지가 달랐을 수 있지만 한국에 왔을 때는 두 주먹뿐인 건 다 마찬가지잖아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면 삶이 긍정적으로 변하더라고요.
남한 분들의 탈북자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탈북자들의 적응과정이 곧 통일정책일 수 있어요. 탈북자들이 무얼 뺏으러 왔다는 인식보다는 통일시대에 잘 활용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해줬으면 좋겠어요.”
저녁식사 시간을 훌쩍 넘겨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인터뷰를 계속한 김철웅씨는 생태탕 한 그릇을 후딱 비우고, 연주회 연습을 해야 한다며 바삐 연습실로 돌아갔다.
한의사 石英丸
 |
| 석영환 |
석씨는 평양의학대학 고려의학부를 졸업하고, 국가 한방연구기관인 동의과학원 연구원, 청암산 기초의학연구소에서 심혈관 및 노화방지 연구원으로 근무한 뒤 사회안전부 88호 종합병원에서 진료부장으로 근무하다 1998년 10월 강원도 철원 북방한계선을 넘어 귀순했다.
병원이 청와대 인근에 위치해 있고, 입소문이 나면서 지금은 전직 장관에서부터 고위 공무원, 의원 보좌관, 연예인 등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지만 석씨는 귀순 초기 북한에서 종합병원 진료부장까지 지낸 경력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경희대에서 통일부·교육부·복지부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실력 테스트를 받아 학력이 인정됐고, 1999년 10월 마침내 한의사 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시험 자격은 주어졌지만 북한에서의 용어와 남한 용어가 달랐고, 시험도 전혀 생소했다. 북한에서는 객관식 시험이 없다고 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찾아간 건강식품 회사에서는 노인들 앞에서 강연을 하라고 했지만 결국은 약장사였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시험공부에만 매달리기로 했다. 영세민 아파트에 살면서 독서실에 다닐 돈을 아끼기 위해 양천구청이나 구로구청 도서관에 다니면서 구청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책을 팠다. 하지만 석씨는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나 한의사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석씨는 당시의 생활을 ‘돼지생활’이라고 회고했다.
“처음엔 많이 울었어. 비 올 때 제일 서럽지. ‘말이 통하는 이방인’이라고 느꼈어. 남자 혼자 살면 생활 뻔한 거 아냐. 돼지생활이었지. 공부는 하러 다녔지만 합격해도 갑갑한 거 아냐.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데 합격해도 어디에 취직하나 기약 없는 생활이었지. 1년 동안은 내가 여기에 왜 왔나 싶더라고. 영세민 아파트에서 만난 코가 새빨간 술주정뱅이가 내가 탈북자인 걸 알고는 ‘열심히 사세요’ 그러는 거야. 속에서 천불이 났지.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이다. 나 때문에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통일되면 떳떳한 마음으로 돌아가야지’라고 마음 먹었어.”
청와대 인근에 한의원 개원
석씨는 2002년 세 번째 도전 만에 한의사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시험에 합격했어도 취직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때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이가 종로에서 웅선클리닉을 운영하던 홍성재 원장이었다. 석영환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홍성재 원장은 내가 한국에 정착하는 데 ‘햇빛’이고, 씨앗이 싹틀 수 있도록 키워준 ‘물방울’과 같은 분이었어. 웅선클리닉에 방 한 칸을 내주셔서 한의원을 개원할 수 있었어. 그분에게서 한국 사회를 배웠고, 경영 마인드를 익혔지. 그리고 1년여 만인 2003년에 이곳으로 옮겨올 수 있었지.”
그는 청와대 인근에 병원을 개원한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다고 했다.
“남한사회에서 탈북자 이미지가 못 살고 못 배운 이미지잖아. 병원은 입소문이거든. 그때 남한 의사 친구들이 ‘청와대 앞에 개원하면 둘 중 하나다. 고위 공무원들이 오면 살고, 안 오면 죽는 거다’라고 하는 거야. 다행히 운 좋게 살아남았지.”
입소문을 타면서 환자가 늘었고, 각종 방송에도 출연했다. 또 <김일성 건강 장수법>이란 책을 내고 5가지 한약재를 달인 물에 목욕하는 ‘오목수 요법’, 32가지 한약재를 베고 자는 ‘신선베개요법’, 등에 꿀을 바르고 자는 ‘봉밀요법’, 백두산의 눈보라 소리로 기를 수련하는 음악명상법, 추운 숲에서 잠자는 ‘동면요법’ 등을 소개했다. 이 밖에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 <북한의 의료실태> <등산도 하고 산삼도 캐고> 등의 책을 펴냈다. 연간 소득 규모를 묻자 신고액이 8억여 원에 이른다고 했다. 성공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영향일 거야. 아버지께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경호실 상좌(중령과 대령 사이 계급)였거든. 덕분에 자신감이 컸고, 뱃심도 커서 웬만한 사람 앞에서는 떨질 않아. 그래서 내 말투가 좀 버릇없지. 아버지 영향으로 세상을 보는 눈도 생겼고, 처세술도 익혔어. 자신감을 갖고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부지런히 하면 복이 돼 돌아오기 마련이야.”
앞으로의 꿈을 묻자 그는 김용씨와 마찬가지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경복궁 앞에는 일본인이나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 중국에 가면 동인당이 있듯 한국에 가면 ‘100년 한의원’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앞으로 한방과 양방, 치과 등을 개설할 계획이야. 병원을 바탕으로 정주영 회장처럼 글로벌 기업을 만드는 게 꿈이야.”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조언을 당부했다.
“내가 한의사가 아니었다면 남들 안 하는 3D 업종에 종사했을 거야. 일본에서는 똥 푸는 일로 돈 번 사람도 있어. 남들 하지 않는 일 하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찾는 거지. 내가 본 탈북자 중 한 분은 막노동을 하면서 1년 만에 몇 천만원을 번 분도 있어. 몸만 건강하고, 부지런하면 못할 일이 뭐가 있어. 어떤 일이든 쥐구멍만한 구멍 하나만 있으면 뚫려. 막말로 부모 형제 남겨두고 목숨 걸고 왔는데 못할 일이 뭐가 있어.
그리고 남한 사람들도 탈북자들 바라볼 때 저 혼자 살겠다고 가족들 버리고 온 놈들이란 시각은 버려야 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탈북자들의 심정을 어떻게 알겠어.”
석씨는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북한 가족 생각이 떠오른 듯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탈북 여성 1호 박사 李愛蘭
 |
| 이애란 |
평양에서 태어난 그녀는 조부모가 6·25 전쟁 중 월남한 지주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10살 때 함경남도 삼수군 관동리로 추방됐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에서 월남자 가족이란 이유로 온갖 차별과 멸시 속에서 생활했다. 양강도 혜산 경공업전문학교를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 경공업대학 식료공학부를 졸업한 뒤 혜산 과학기술위원회에서 품질감독원으로 근무하다 의사인 남편과 결혼했다.
우연히 미국에 있는 친척들과 연락이 닿아 1997년 8월 남편에게는 미처 탈북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 생후 4개월 된 아들을 안고 탈북해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그해 10월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남편도 없이 여자 혼자 아기를 키우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강남의 한 호텔에서 하루 9시간 넘게 청소를 했지만 손에 쥐는 돈은 50만원에 불과했다. 교통비와 식비, 집세를 제하면 아들 분유 값도 안됐다. 통일부와 복지부의 소개로 연금관리공단에 일자리를 부탁하고 8개월을 기다렸지만 “탈북자는 안 받는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사흘을 엎드려 펑펑 울었어요. 울다 생각해보니 내가 스스로 노력해야지 통일부만 믿고 8개월을 보낸 게 황당했어요. 생활정보지에서 보험설계사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1999년 4월 삼성생명에 입사했어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보험회사 다니면 빚지고, 사기꾼 되고, 바람피운다’며 만류하는 거예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쫓겨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첫 월급으로 80만원을 받았어요. 너무 고마웠죠. 그땐 한 달에 100만원 버는 게 최대 소망이었어요. 그 돈이면 아들 교육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죠.”
어린 아들 생각에 열심히 뛰었더니 두 번째 달에는 168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보험회사는 ‘도를 닦는 곳’이었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 10명 중에 8명은 명함을 내밀면 낯빛이 바뀌면서 면박을 줘요. 상처 받고 많이 울었죠. 아침에 세수할 때마다 거울을 보고 자기최면을 걸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신경질 내지 않을 만한 시간을 찾아 전화를 걸어 상품 소개를 했어요. 매너 없이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친절하게 대했어요. 나중엔 그런 분들이 우량 고객이 되기도 했어요.”
보험사원으로 월 2700만원 벌기도
그녀는 전국 6만여 명의 삼성생명 보험설계사 중 9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월급 100만원이 최대 소망이었던 그녀는 제일 많이 받았을 때 월 2700만원까지 받았다고 했다.
2001년 이화여대에서 장학금 제안을 받고, 식품영양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게 낯설었다. 특히 영어는 그녀가 공부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한다.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밤낮 없이 공부에 매달렸다. 2003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재차 장학금을 받아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논문이 잘 안될 때는 한강에 가서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책임을 감당 못하면 다른 사람이 받을 장학금을 가로챈 게 되니까 피해를 주는 거잖아요. 탈북자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들과 비슷하게 하면 못한다고 여기고, 남들보다 훨씬 잘하면 비슷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으니까요.”
지난 18대 총선에서 실향민과 탈북자들로 이뤄진 국민실향안보당의 대변인 및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한 바 있는 이애란씨는 정부의 탈북자 정책에 대한 비판도 쏟아냈다.
“지금은 탈북자들을 전부 대학에 보내주지만, 대학을 나와서도 취업을 못하는 애들이 많아요. 대학입학 자격을 더 강화해서 진짜 실력자를 가려 뽑아야 해요. 통일 이후에 쓸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실력자를 선발해 대학 등록금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지원해주고, 공기업이나 대기업 취업 할당제나 인턴제도를 도입해 일할 기회를 줘야 해요. 그런 경험이 있어야 통일 후에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일할 때 보조 업무라도 할 수 있잖아요.”
탈북 당시 생후 4개월이었던 아들은 어느덧 초등학교 6학년이 됐다. 북한을 전혀 모르는 아들이지만 탈북자란 ‘주홍글씨’는 그의 이마에도 깊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탈북자란 사실을 숨기고 있어요. 아이들은 탈북자들을 가리켜 ‘거지’라고 손가락질하니까요. 북한 출신이란 사실만으로 무능력자 취급 받아요. 정치제도를 잘못 만나 못사는 나라에서 왔을 뿐인데도 말이죠. 그런 부분에서 아이들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아요.”
농협 과장 安明哲
 |
| 안명철 |
그는 한번 끌려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는 종신수용소인 ‘완전통제구역’에서 8년간 근무했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비밀처형과 생체실험 등의 잔혹한 참상을 전 세계에 최초로 폭로했다.
그는 완전통제구역의 실상을 폭로한 <완전통제구역>이란 책을 출간했고, 15호 수용소(함남 요덕) 출신 강철환씨 등과 함께 1999년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에 대해 증언한 데 이어, 2007년 6월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난 신동혁씨와 함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증언했다.
안명철씨는 농협 과장 명함과 2008년 11월 16일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완전 철폐를 목표로 창립한 ‘자유북한 캠페인’ 대표 명함을 함께 건넸다.
지금은 어엿한 은행원이지만 그 역시 한국에 온 직후에는 외로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폐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탈북자 조사기관인 대성공사에서 주민등록증도 없이 나와 경기도 남양주경찰서 관할의 한 여관에서 6개월 동안 지냈던 생활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한 3년은 거의 술독에 빠져 살았어요.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에, 남한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요. 아는 사람 한 명도 없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죠. 밤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새우깡 하나 놓고 매일 글라스로 소주 대여섯병을 비웠어요. 폐인처럼 살았죠.”
술기운에 간신히 잠이 들어도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악몽은 한국에 들어온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괴롭힌다고 했다.
“경비대들이 나를 잡으러 쫓아오는 모습과 정치범 중 맞아서 외눈이 된 김경찬이 공개 처형당했던 모습, 수용소 죄수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꿈에 나와요.”
주민등록증 발급이 늦어지는 바람에 간첩으로 몰리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했다.
“하루는 여관 앞의 까치다방이란 곳에 갔어요. 커피는 대성공사에서 마셔봤지만 쌍화차란 건 그때 처음 봤어요. 맛을 보니까 한약냄새 나고 영 이상하더라고요. 다방 아가씨가 중국 사람이냐고 묻기에 아니라고 했는데 다방 주인이 간첩이라고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파출소에서 경찰관이 나왔죠. 주민등록증이 없으니까 남양주경찰서까지 끌려갔죠. 거기서 보안과 형사들을 만나서야 신원이 확인돼 풀려났어요.”
지점장 승진시험 준비 중
여관 주인의 비닐하우스에서 3개월 가량 농사를 돕다가 경찰서에서 인근 농협에 일자리를 알선해줬다고 했다. 처음엔 농협 면세유 주유소에서 기름을 배달했고, 비료나 채소박스 나르는 막일을 했다. 3년여 배달을 했는데 처음 1년 동안은 월급이 60만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월급이 제가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하는) 강연 다니면서 버는 돈보다 훨씬 적었어요. 한번 강연에 20만~30만원을 받았는데, 처음엔 초청이 많아서 강연회 수입이 월 500만원이 됐으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 강연으로 먹고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강연은 한때지만 농협은 평생직장이잖아요. 그래서 일 배우는 데 전력을 쏟기로 했죠.”
열심히 일을 배운 덕에 농협의 쌀 공판장에서 일을 하게 됐고, 하나로마트에서 지배인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언어가 문제였다. 그는 당시 자신은 ‘동물원 원숭이’였다고 했다.
“말이 이상하니까 직원들이 다 저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는 거예요. 한 농협 고객이 직원 중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민원을 넣는 바람에 하루는 직원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전무가 저더러 ‘당장 말을 바꾸라’고 면박을 줬어요. 그래서 TV 보고 말을 따라 하면서 계속 바꾸려고 했죠. ‘사람 아는 게 재산’이란 생각에 사람을 사귀고 말도 배우려고 스키·스킨스쿠버·축구·야구·수영·산악회 등 직장 동호회란 동호회는 다 가입했어요. 동호회비로 80만원이 나가 나중엔 축구와 산악회만 하게 됐어요.”
1996년부터는 직장에 다니면서 건국대 야간 경영정보학과에서 공부를 했다. 이듬해 후배의 소개로 현재의 아내를 만나 삶의 희망을 찾았다고 한다. 술을 줄이니 돈도 모이더라고 했다. 1998년 결혼해 현재는 딸 둘을 낳았다고 한다. 2001년부터는 정식 은행원이 돼 출납부터 대부업무를 보게 됐고, 현재는 지점 과장으로서 기획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요즘 지점장 승진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올해 경기도에서 농협 승진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이 2800명이에요. 그중 130등 안에 들어야 하는데 공부해야 할 과목이 만만치 않아요. 특히 신용과 경제 과목이 어렵죠. 빠른 사람은 3년, 보통은 5년 정도 공부를 해야 합격할 수 있어요. 지난해 10월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일 끝나고 고시원에 가서 새벽 2~3시까지 공부하고 있어요.”
매일 격무에 시달리고, 새벽까지 공부해야 하지만 그는 지난해 11월 16일 ‘자유북한 캠페인’을 창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그가 직접 경험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인권유린 실태를 널리 알려 전 세계가 북한을 압박해 수용소를 완전 철폐토록 하는 것이 단체 설립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그는 탈북자들에게는 먼저 말투부터 바꾸고, 스스로 노력하라고 조언했다.
“말투를 바꾸려고 노력해야 해요. 그리고 배급제에서 생활했던 습관대로 제비 새끼마냥 입만 벌리고 누가 먹여주길 바라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그래야 사람들과 융화하고, 탈북자에 대한 선입견을 바꿀 수 있어요.”
뮤지컬 ‘요덕 스토리’ 감독 鄭成山
 |
| 정성산 |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15호 정치범수용소(함남 요덕)의 참상을 담은 뮤지컬 ‘요덕 스토리’를 연출한 鄭成山(정성산·40) 감독은 이 작품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불과 몇 시간 거리인 북녘 땅에서 이처럼 참혹한 인권유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2006년 3월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시작된 공연은 연일 대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좌파들은 정씨의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의 집까지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지며 테러 위협을 일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씨는 좌파들의 위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세를 몰아 그해 7월까지 지방 공연에 나섰지만 서울에서와 같은 흥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 공연에 1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사람만 믿고 공연을 준비하다가 이마저 제대로 되지 않아 사채 4000만원을 끌어다 쓰고,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의 적금을 깨 2000만원을 가져다 미국 뉴욕과 LA 등에서 공연을 강행했지만 결국 7억여 원의 빚더미만 떠안게 됐다고 했다.
출연료를 못 받은 배우들은 노동부에 그를 고발했고, 그는 수차례 노동부에 불려가 해명을 해야 했다. 그는 ‘요덕 스토리’로 흥했다가 망한 꼴이 됐다. 하지만 그는 시련을 겪으면서 더 단단해지고 강해졌다고 했다.
“저쪽에선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고 있는데 그래도 난 사글세지만 집이 있고, 굶지 않고 살고 있으니 가진 게 많다고 생각했어요.
세상 사람들 열이면 열 다 돈을 좇지만 누군가는 북한 동포들의 저 참혹한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어요. 꿈에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계속 보여요. 외롭고, 힘들었지만 언젠가는 우리 북한 동포들이 알아주리라 믿어요.”
미국 공연으로 빚더미에 앉았지만 그는 <워싱턴 포스트>, <월 스트리트 저널>,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포장마차, 술집 삐끼(호객꾼), 편의점이나 주유소 아르바이트, CF 촬영현장 진행, 병원에서 시체 닦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북한 냉면과 된장을 취급하는 ‘오마니식품’이란 회사를 차렸다가 망하기도 했죠. 한국에 들어온 뒤 14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굴곡이 심했지만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어요. 처음엔 대체 여기에 왜 왔을까 정체성에 심한 갈등을 느꼈죠. 그러다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작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요덕 스토리’를 공연하고 나서 북쪽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 없어졌어요.”
‘삐라 한 장이 총칼보다 무섭다’
 |
| 뮤지컬 ‘요덕 스토리’의 한 장면. |
“북한 인민무력부 적공국 현관에는 ‘삐라 한 장이 총칼보다 무섭다’란 글귀가 적혀 있어요. 그만큼 선전·선동이 무섭다는 거죠. 전 문화·예술의 힘이 총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요. 문화·예술로 북한 동포들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그로써 저들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는 지난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다비드 스타 픽쳐스’란 공연기획사를 설립했다. 그는 기획사 이름에 대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듯 김정일이란 골리앗과 싸우는 상징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성산씨는 오는 3월 19일부터 5월 3일까지 경기도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뮤지컬 ‘위대한 쇼’를 공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잘생긴 평양의 미남 장교들과 섹시한 서울의 미녀들이 펼치는 유쾌한 로맨틱 뮤지컬이라고 했다. 앞으로의 꿈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 긍정의 힘을 믿어요. 10년 뒤에는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있지 않을까요. 전 북한에 대해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요. 북한 관련 소재로 성공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북한 관련 작품을 만들 생각이에요. 독일은 통일 10년 전부터 끊임없이 통일 문화를 전파시키도록 노력했어요. 남북 통일에 대해 긍정적 생각을 갖고, 통일시대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리더가 되고 싶어요. 또 일본과 미국 등을 상대로 글로벌 경쟁을 하고 싶습니다.”
선배 탈북자로서 조언을 당부하자 그는 탈북자가 통일시대의 주역이란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통일시대의 주역이에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통일된 북한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보여질 겁니다. 우리는 누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왔으니까 정착금이 많고 적음을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받아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하죠. 남한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사회예요. 현실을 부정하지도 말고, 안주하지도 말고 끊임없이 긍정적으로 도전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NK지식인연대 대표 金興光
 |
| 김흥광 |
NK지식인연대의 초대 대표를 맡은 金興光(김흥광·49)씨를 서울시 중구 신당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김책공업대학에서 컴퓨터 운영체계를 전공했다. 연구원 과정과 대학교원 과정을 마치고, 함흥 전자계산기전문학교·전자계산기단과대학·함흥 컴퓨터기술대학 강좌장, 함흥 공산대학 강좌장 겸 컴퓨터 실장을 역임했다. 2003년 탈북해 2004년 한국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대학교수로 강좌장까지 지냈지만 남한에서 교수 자리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막막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에서의 경력이 있으니까 누군가 날 찾아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찾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어요. 생활정보지를 뒤져 일자리를 알아봤죠. 전공을 조금이라도 살려 인터넷을 연결하는 업체에 취업하려고 했더니 그마저도 나이가 많다고 퇴짜를 놓으려 하는 거예요. 6일 교육을 받은 뒤 병원이나 회사, 가정집 등에 인터넷을 연결하는 일을 시작했죠.”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꼬박 일하면 연장수당을 포함해서 월급으로 18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컴퓨터 운영체계 전공을 살려 한국정보교육센터에서 6개월 동안 보안 솔루션(solution)을 연구한 뒤 2005년부터는 한신대 초빙교수로 컴퓨터 운영체계 개론 수업을 맡아 진행했다.
강단에 다시 설 때 감격의 눈물 흘려
그는 “강단에 다시 선 감격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말을 하기 시작하니까 강의실이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다고 했다. 말투도 함경도 말씨에 컴퓨터를 ‘콤퓨타’라고 발음하는 등 용어를 다르게 쓰니까 수업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녹음해서 들어보고, 남한의 이종사촌 누님의 조언을 받아서 말투를 고쳐나갔다.
그 뒤 2006년 5월부터 통일부 산하 북한이탈주민후원회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탈북자들의 민원상담 등 탈북자의 정착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한국에 들어온 탈북 지식인들이 처한 상황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했다.
“북에서 연구사로 일한 한 여성 과학자가 사회복지관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단순 도우미로 활동하는 모습도 봤고, 북에서 대학교수였던 사람이 주유소에서 주유원으로 일하는 모습도 봤어요. 탈북 지식인들이 북한에서의 경험과 남한에서의 새로운 배움을 결합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은 NK지식인연대의 창립선언문에 그대로 반영됐다. 이들은 창립선언문에서 “북한에서의 체험과 남한에서의 배움을 통해 북한을 내부적·외부적 시각에서 다 고찰해 본 탈북 지식인들의 선구자적 역할은 남북 통일과 북한의 발전을 위해 매우 절실하다”며 “북한의 침체를 극복하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전략과 구체적인 방도를 연구해 북한의 미래에 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구체적 사업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통일에 대한 준비는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초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 선도자로서의 사명의식을 갖고 경계인으로서의 북한 및 통일 관련 학술연구활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또 북한개혁방송(민간 라디오 방송)과 계간지인 <북한사회> 등 잡지 발행, 해외 한인사회 순회 강연 등 국제적인 커뮤니티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유도할 계획입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金光進
서울 강남구 도곡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에서 만난 金光進(김광진·42) 선임연구원은 훤칠한 키에 말투가 차분했다. 고향을 묻자 그는 “이름도 여기 와서 바꾼 이름이에요. 북한에 아직 부모님이나 가족이 많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얘기하기가 그래요. 평양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정도로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이 북한에 노출될 만한 질문에는 대답을 피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는 평양외국어학원에 수석 입학한 뒤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평양컴퓨터대학에서 6년간 교원으로 활동했고, 2002년 해외 무역대표부에 파견돼 김정일의 ‘혁명자금’(개인 통치 자금) 마련 및 관리 업무를 담당했었다고 한다.
탈북하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북한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며 “북한의 상투적 수법에 걸려 탈북하게 됐다”고 말했다.
“해외에 파견돼서 일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됐어요. 북한이 사람을 처벌하고 제거하는 상투적 수법이 있어요. 남한의 안기부(국가정보원의 전신)와 연결됐다든가 미국 CIA나 일본 정보기관의 프락치란 딱지를 붙이는 경우가 많아요. 평소 북한 체제나 정권에 대한 비판을 자주 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저를 지목해서 북한 정보가 많이 새나간다는 보고가 올라갔다는 걸 알고 탈출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는 2004년 2월 한국에 들어온 뒤 김정일의 개인 통치자금을 마련·관리한 경력이 인정돼 그해 국책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됐다. 이곳에서 북한의 금융·재정 문제를 비롯해 북한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2007년 12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의 외화관리시스템 변화 연구’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국민대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그 역시 처음 한국에 들어와서는 언어소통의 장애, 문화적 차이, 정체성의 혼란 등을 겪었다고 했다. 특히 남한의 젊은 세대가 통일을 원하지 않는단 사실에 실망했고, 교수나 대학원생들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고 존칭을 쓰는 데 엄청난 스트레스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은 겉으로는 反美(반미) 제국주의와 싸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한민국과의 대결이나 경쟁이 가장 핵심적이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주석’이니 ‘위원장’이니 존칭을 자연스럽게 쓰고, 만약 그렇게 쓰지 않으면 오히려 거부감을 갖는 것 같고, 분위기가 썰렁할 정도였어요. 정말 진심으로 존경심을 갖고 얘기하는 것 같아서 충격적이었죠.”
탈북자 가운데 국회의원, 구의원이 나와야
통일 준비 과정에서 탈북자들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통일이 되면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다 할 수는 없어요. 북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그래요. 남한이 완전히 점령·통치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면 곤란합니다. 남북한 사람들의 간극을 줄이고 융화시킬 수 있는 가교의 역할을 남북한을 모두 체험한 탈북자들이 할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치 시스템을 빨리 배워야 하고, 정치뿐만 아니라 금융·무역·회계 등 경제분야에서도 그래요. 그래서 탈북자 가운데 국회의원·시의원·구의원이 나와야 합니다.”
탈북자의 성공적 정착을 위한 고언을 부탁하자 이렇게 말했다.
“죽을 각오로 생사를 걸고 그 많은 가족과 친지, 그리고 자신의 피해를 각오하고 왔는데 정말 이를 악물고 성공해야 해요.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마음대로 공부할 기회, 자유를 누릴 기회, 인간다운 삶을 누릴 기회가 없어요. 그 사람들 생각해서라도 그 사람들 몫까지 해야 합니다. 특히 공부만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남북한의 음악 교육
김철웅씨는 음악 교육만큼은 북한이 남한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북한의 음악교육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북한은 어린 시절부터 국가가 각 지역에서 최고의 엘리트를 선발해서 대학에서 심혈을 기울여 교육을 시킵니다. 남한에서는 어느 학교에 가도 음대가 있고, 피아노만 있으면 누구나 피아노를 칠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아무나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습니다.
평양음대에 선발되면 각종 혜택이 주어지는데 우선 10년간의 군복무가 면제되고, 북한 내의 공연 티켓은 모두 공짜예요. 일반인들이 다니지 못하는 대사관거리도 마음대로 통행할 수 있어요. 그런데 평양음대에 입학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졸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국가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하기 때문에 중도에 계속 탈락시켜요. 중도 탈락하면 아무 것도 못돼요.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매달리죠.”
귀순 뒤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에게 남한의 음악 교육은 어떻게 비쳤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제일 싫은 것은 피아노를 치기 싫어하는 애들한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겁니다. 여기 부모들은 아이들이 音(음)을 조금만 주절거려도 우리 애가 음악적 천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한계가 어디까지인 줄 빨리 알고, 빨리 포기할 줄 아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전 재능이 보이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빨리 轉科(전과)하라고 합니다. 부모가 피땀 흘려 번 돈이 아깝잖아요. 또 재능은 있는데 연습을 안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요즘 애들은 入試(입시) 때는 정말 잘 쳐요. 그런데 입학하고 나서는 연습을 안 해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진정한 음악을 위한 음악을 해야 하는데 입시를 위한 연습이 되는 거죠.”
김철웅씨는 남한의 學緣(학연) 중시 풍조도 비판했다. 특히 보수적인 클래식계는 장벽이 더 높다고 했다.
“음악은 자유로워야 하는데 남한 학생들의 피아노 연주 소리만 들어도 누구의 제자인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음악인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만의 음악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붕어빵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는 출신학교를 너무 따져요. 제 주변의 음악 하는 친구들만 봐도 숱한 돈 들고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유학 갔다 와서 강사 자리 하나 못 따고 절절 매는 사람들 많아요. 저한테 강사 자리 부탁하는 이력서가 이만큼 쌓여있어요. (그는 엄지와 검지로 3㎝ 정도를 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울대, 연대 출신 아니면 힘들잖아요. 그런 점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탈북자 피아니스트인 제가 오히려 속 편하죠.”
박혜연
(2018-02-17)
: 17
: 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