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金成東의 인간탐험] 조선일보 칼럼 접은 ‘검투사’ 柳根一 : 월간조선

巨人(거인)은 작았다. 柳根一(류근일) 前 <조선일보> 주필. 그의 외침이 세인의 가슴에 깊이 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작음 때문이다. 낮춤 때문이다. 세상은 그의 외침을 천둥소리로 듣지만,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지만 나직하다. 162cm 키에 몸무게 50kg인 이 사내의 조선일보를 통한 외침은 지난 25년여 동안 우리 사회의 큰 울림으로 존재해 왔다. 때론 그의 외침이 소란스러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나, 그것은 그의 외침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부정 세력에 대해서는 비수로 꽂히곤 했기 때문이었다.

해서 ‘검투사’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 12월 23일자를 마지막으로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류근일 칼럼’의 문을 닫았다. 마지막 칼럼의 제목과 부제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기적(奇蹟)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리.

한국인은 원래 기적의 민족 이 시련 거뜬히 이겨내기를…

25년 연재한 칼럼 마치며 간절히 소망하고 기원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극좌파를 향한 날선 劍(검)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신문에 정기적으로 연재하던 칼럼을 멈출 뿐이지 앞으로도 그의 글쓰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그가 칼럼 연재를 그만두겠다고 한 닷새 후인 구랍 28일 경기도 분당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아갔다. 거실에는 조선일보 칼럼을 끝낸 후 知人(지인)들이 보낸 난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는 1월 2일 필리핀으로 출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큼지막한 접시를 은박지로 싼 재떨이가 시선을 끌었다. 적어도 담배 두 갑 정도에서 나오는 꽁초는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크기였다.

―담배는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했습니까.

“대학 1학년 때부터였죠.”

―건강 때문에 담배를 많이 끊던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끊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죠. 내가 감옥에 세 번째 들어갔을 때가 기회였는데 하필이면 그곳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金相賢(김상현), 趙尹衡(조윤형) 등 당시 유신 반대로 투옥됐던 분들을 만났어요. 안양교도소였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 그분들은 ‘지도’(교도소 내에서 모범수로서 교도관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편집자 주) 역할로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분들이 자꾸 담배를 건네는 바람에 못 끊었어요. 특히 김상현씨가.”

류 주필은 세 번에 걸쳐 8년3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첫 번째 감옥생활은 대학 2학년 때인 1957년이다. 서울대 정치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문리대 신문에 ‘무산대중을 위한 일고찰’이란 글을 게재했다가 未決囚(미결수)로 4개월여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맛보았으니 이젠 중도의 사회민주주의를 한번 해보자는 주장이 실린 글이었다고 한다.

감옥과의 인연

류근일 주필의 부친(류응호)이 경성대학 교수 시절 제자들과 안양의 포도원에서 찍은 기념사진. 맨 오른쪽 양복 입은 이가 류 주필의 부친이다.

그 사건은 6·25 전쟁 이후 최초의 좌파 관련 사건이었다. 미결수로 복역하던 그는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법원은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다르다. 우리 헌법과 충돌하지 않는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의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기 전, 미결수 신분으로 軍(군)에 입대했던 그는 제대를 1년 앞두고 4·19를 만났다. 군 제대 후 교수들의 ‘퇴학 취소’결의로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입학한 그는 후배들의 통일운동 참여 제안을 받아들였다. 통일운동 참여 직후 5·16을 만났고, 군사정부는 ‘특수범죄 처벌을 위한 특별법 6조’라는 소급법을 만들어 류 주필에게 15년을 선고했다. 그 후 류 주필은 감옥에서 7년3개월을 보냈다. 24세에 교도소에 들어가 31세에 세상으로 다시 나왔다.

감옥과 류 주필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2년에 유신이 선포됐을 때 그는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1974년에 학생운동을 하는 후배들이 신문사로 그를 찾아왔다. 대대적인 反(반) 유신 데모를 계획한다는 것이었다. 류 주필은 그들에게 이런 조언을 해 주었다고 한다.

“내 경험으로 볼 때 빨갱이로 몰리면 가장 곤란하더라. 그러니 색깔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도저히 빨갱이로 낙인 찍을 수 없는 尹潽善(윤보선), 咸錫憲(함석헌), 千寬宇(천관우) 같은 분들을 지도부로 모셔라.”

이 조언은 류 주필에게 또 한 번의 감옥생활을 체험하게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이 류 주필을 찾아와 학생 접촉 사실을 자수하면 불문에 부치겠다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류 주필은 1974년 4월 초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6국으로 연행됐다. 서울 용산 삼각지 국방부 구내에 있는 군사재판정으로 끌려갔다. 그 재판정에는 李哲(이철), 柳寅泰(유인태), 羅炳湜(나병식) 등 당시 서울대생들과 金芝河(김지하), 이현배 등 선배급들이 굴비처럼 엮여 끌려나와 있었다. 훗날 ‘민청학련 사건’으로 일컬어진 사건에 류 주필도 연루된 것이다. 류 주필은 1심에서 무기, 대법원에서 20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 사건이 인권단체 등의 문제 제기로 국제문제화하자 유신 정권은 1975년 2월 15일 구속정지 형식으로 류 주필 등 이 사건 연루자들을 석방했다.

―감옥생활 다 합치면 8년3개월인데, 억울하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이걸 억울하다고 생각해야 하나? 안타까운 것은 내가 정식재판을 받아서 징역을 산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죠. 내가 정상적인 재판을 받은 것은 1957년 필화사건 때 1심, 2심밖에 없어요. 그때는 전부 무죄를 받았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보십니까.

“1957년 필화사건 때문에 공안당국이나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 확고한 고정관념이 생긴 거예요. 1980년대에는 수많은 사람이 형무소에 들어갔잖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는지 세상에서는 잘 몰라요. 그런데 나는 6·25 전쟁 이후 최초의 좌파 성향 사건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확고부동한 딱지가 붙은 거예요. 여차하면 걸려들어가는 거였죠.”

北의 부친은 反動, 南의 아들은 容共

서울대 문리대 필화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류 주필(가운데). 1958년 4월 1일 열린 재판정에서의 모습이다.

류근일 주필의 서재 한 곳에는 부친(柳應浩·류응호)이 경성대학에서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과 찍은 기념사진이 담겨있는 작은 액자가 있다. 류 주필의 부친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경성제대와 동경제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 서울대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다가 6·25 때 越北(월북) 김일성대학 교수를 지냈다. 1959년 말께 간첩 혐의로 숙청돼 함경도로 쫓겨난 지 10여 년 후 김형직사범대로 복직했다가 1994년에 작고했다고 한다. 류 주필의 부친은 김형직사범대에 복직해 영어를 가르쳤지만, 작고할 때까지 주변의 감시를 받는 신세였다고 한다.

북한에 있는 부친은 ‘反動(반동)’으로 고생하고 남한에 있는 아들은 ‘容共(용공)’으로 몰려 청춘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또 그 ‘용공 혐의자’의 아들인 류 주필의 3남 현태씨는 2004년 盧武鉉(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때 탄핵찬성 카페를 만들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된 일이 있었다. 내리 3대가 고통을 받은 셈이다. 류 주필은 이런 가족의 불행을 “한반도의 삶이 그런 거지 뭐”라고 말한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가 없어요. 한반도의 삶이 그런 거예요. 인텔리들의 문제는 매사를 복잡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1991년에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8·15광복과 6·25를 전후한 이야기였는데, 일제시대 형사 출신으로 국회의원까지 지낸 사람 역할을 맡은 탤런트 박근형씨가 박상원씨한테 이러는 거예요. ‘이봐, 이렇게 갈라섰을 때는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하는 거야’, 그게 굉장히 의미 있는 이야기예요. 인텔리들은 그걸 잘 못해요. 요리조리 넘나들다 나중에는 양쪽에서 다 버림받죠. 광복 후 중간파처럼 있다가 6·25가 발발하니까 ‘에라 할 수 없다’ 하고 북으로 붙었다가 ‘너는 부르주아야’ 하고 버림받고. 그게 인텔리의 자업자득이죠. 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야 남쪽의 우리 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겠죠. 자기가 좋다고 해서 갔는데 거기서 그 험한 꼴을 당했으니 정말 죽을 맛이겠죠.”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언제나 확실하게 자신의 소속을 가졌습니까.

“민주화 운동 때는 섞이기도 했죠.”

도서관에서 만난 사회민주주의

―부친의 영향으로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관심 가졌고,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없었어요. 그걸 자세히 이야기할 게요. 대학 1학년 들어가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정치학도다, 정치학도는 노선과 이념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당시 서울대 도서관에는 당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방대한 사회주의 서적들이 있더라고요. 온건 사회민주주의 서적부터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까지 영문으로 된 책자가 수도 없이 많았어요. 한마디로 정치학도인 나로서는 寶庫(보고)였죠.”

―어떤 책부터 읽었습니까.

“이것저것 읽는데 내 마음에 딱 와서 닿는 게 있었어요. ‘자본주의를 개혁하자, 개혁하는데 볼셰비키 극좌는 안 좋다. 의회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복수정당제를 유지하면서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합법적으로 추구하는 길이 있다. 그게 사회민주의주다’하는 내용이었어요. 내가 천성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전체주의나 집단주의를 싫어하거든요.”

―젊은 사람들에게는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더 매력적인 것 아닌가요.

“나는 자유당도 싫고 공산당 독재는 내가 그 체제에서 못 살 것 같아서 싫어했어요. 그러니까 사회민주주의가 딱 나한테 들어와 버린 거죠. 사회민주주의와의 만남은 내 평생에 굉장한 행운이었어요.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만나기 전에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부터 먼저 봤다거나, 마오쩌둥(毛澤東)의 좌파적 민중주의를 먼저 봤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처음에 머릿속에 입력된 게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였죠. 그게 나를 구한 거죠.”

―그 사회민주주의와의 만남 때문에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엄혹한 사회에서 당국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사회주의다, 容共(용공)이다 이렇게 봤지만 사실 주관적으로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주장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단절이 아니라 연장선상에 있다. 점진적 개혁이 더 좋은 거다. 혁명이라는 것은 결과가 더 나쁠 수도 있다. 전체주의 극좌는 극우 못지않게 나쁜 것이다’하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봤기 때문에 당시 나는 나를 왜 용공으로 모는지 이해를 못했던 거죠. 내가 착각했던 것은 현실정치 세계와 책상 위의 세계는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거였어요. 곤욕을 치르기는 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내가 안전한 길(사회민주주의)로 들어선 거였죠. 법정에 서서도 판사가 ‘아버지의 사상을 따른 게 아니냐’하는 질문이 있었는데 이렇게 답했어요. ‘아버지로서는 존경하지만 정치이념까지 아버지를 따라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있다’고 말이죠.”

―젊은 시절 만난 사회민주주의의 뿌리와 핵심은 지금도 붙들고 계신 겁니까.

“‘나의 이념과 사상은 이거다’하는 것은 벗어났어요. 사회민주주의가 좋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안에 갇히는 건 싫어요. 인간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결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경제정책, 다시 말해 시장이 실패할 경우에는 국가가 개입해서 시장의 질서를 교정해야 된다, 복지를 중요시해야 된다 하는 문제는 자유주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참작할 필요가 있다고 보죠.

나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때 완벽하지 못한 나라는 인간 존재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정형화하고 싶지는 않아요. 자유, 평등, 박애 이거면 돼요. ‘주의’자는 붙이고 싶지 않아요.”

“석 달 후에 돌아온다”며 떠났던 부친

2008년 9월 30일 오전 한국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공정언론시민연대 창립 및 기념 포럼이 열리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재교 공동대표, 성병욱 공동대표, 김우룡 공동대표, 류 주필.

다시 류 주필의 부친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갔다. 敵(적) 치하에서 서울대 문리대 학장을 하던 류 주필의 부친이 평양으로 떠난 때는 1950년 7월경이라고 한다. 4대 독자인 류 주필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부친이 평양으로 가실 때 뒷모습을 지켜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가요.

“그럼요. 륙색을 지고. 모자 하나 쓰고 ‘나 석 달 후에 온다’면서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배웅했죠. 아버지는 한마디로 세상에 휩쓸려 당신 인생을 완전히 휴지처럼 구기신 분이에요.”

―부친이 당시 갖고 있던 사회주의에 관한 이념의 깊이는 어느 정도였다고 보십니까.

“주관적인 마음속의 이념을 위주로 말할 때 다르고 객관적으로 어느 편에 섰느냐를 위주로 말할 때 다른데, 후자의 경우는 노동당에 입당을 했으니까 극좌까지 간 거죠.

그런데 아버지를 아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내가 아는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정상적인 민주주의 상태에서는 극좌로 갈 수는 없는 분이었다고 봐요. 자유주의자이고 호방하고 놀기 좋아하셨죠. 예술, 야구 좋아하시는 분이 볼셰비키가 될 수는 없는 법이죠. 북한에서도 그것 때문에 숙청을 당한 것으로 봐요.”

류 주필 부친의 知人(지인) 중에는 洪璡基(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 있다. 류 주필의 부친이 경성제대에 재학 중일 때 홍 회장과 류 주필의 부친은 李王職(이왕직) 재단의 장학금을 함께 받은 사이였다고 한다. 류 주필은 5·16쿠데타 후 두 번째 감옥에 가게 됐을 때 그곳에서 홍 회장을 만났다고 한다. 홍 회장은 4·19 혁명 당시 내무장관으로 있다가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다. 먼저 석방돼 세상으로 나간 홍 회장은 훗날 류 주필이 석방되자 중앙일보에 취직을 시켰다.

―홍진기 회장도 아버님 이야기를 해주던가요.

“홍 회장님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아시는 분들로부터는 한 번도 ‘네 아버지는 빨갱이’라고 하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류 주필이 북한에 있는 부친의 소식을 들은 것은 金泳三(김영삼) 정부 시절이었다. 1992년에 脫北(탈북)한 김형직사범대학 교수 출신의 김현식씨를 만나서였다. 김형직사범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던 김씨는 류 주필에게 류 주필의 부친이 숙청됐던 사실 등을 들려주었다.

―부친이 숙청당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은 對南(대남)공작 필요성 때문인 것으로 짐작되는데, 류 주필께는 공작 차원에서 접근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한 것 같아요. 남북회담이 평양에서 열릴 때 기자들이 따라가잖아요. 그중 한두 사람을 통해서 전화로 연락받은 일이 있어요. 안내원이 하루는 다가오더니 ‘나는 류근일 부친의 제자인데 여기 잘 계시다고 전해달라’고 그러더라는 거예요. ‘여기 네 아버지가 인질로 잡혀 있어’하고 경고를 보낸 거죠. 그렇게는 했지만 공작적 차원에서 나한테 직접 접근해오지는 않았어요.”

―부친의 사망소식은 어떻게 들었습니까.

“아버지와는 몇 차례 서신 교환이 있었어요. 어느 날 이복여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죠. 그 소식을 듣고 장례도 못 치르고 祭床(제상) 앞에서 哭(곡)도 할 수 없는 내 신세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아버지께선 84세에 돌아가셨어요. 아들로선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적절한 시기에 돌아가신 것 같아요. 저놈들한테도 인내에 한계가 왔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내가 親(친)김정일 글을 쓸 것이냐? 쓸 수 없는 게 분명하죠.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함경도로 다시 가야 하는 데 그 무렵에 돌아가신 거죠.”

―부친의 사망 소식을 알려준 이복여동생과는 지금도 연락을 합니까.

“내가 들은 정보를 종합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편에게 이혼당한 후 떠돌다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류 주필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화제를 돌렸다.

知的인 글 포기하다

2003년 2월 25일 열린 정년 퇴임식에서 퇴임인사를 하고 있는 류 주필.

류 주필은 조선일보에서 2003년 2월 정년 퇴임한 후 1년7개월 간 ‘류근일 칼럼’을 쉰 적이 있다.

―칼럼을 쉬었다가 다시 쓸 때는 어떤 각오였습니까.

“정년 퇴임 후 1년7개월 동안 영국과 필리핀에 있었어요. 그때는 ‘아, 이제 속세를 떠나자. 죽을 준비나 하고 道(도)나 닦아야지’그런 생각으로 끝낸 거예요. 마침 내가 영국으로 가면서 이사도 하고 전화번호도 바뀌었어요. 아무도 내 소식을 모르게 증발한 셈이 된 거죠.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류근일이 스님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대요. 내가 평소에 그런데 관심을 표명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영국에서 인터넷에 들어가 봤어요. 세상 돌아가는 게 나를 격분하게 하고, 그로 인해 치솟는 울분에 잠이 안 올 정도로 후끈 오르더라고요.”

그는 그 당시의 정황들이 떠오르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필리핀에 있다가 귀국했는데 조선일보 사장이 칼럼을 다시 쓰라는 거예요.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그 울분을 어떻게 못하겠더라고요. 아무리 정년퇴직을 했지만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은 아니거든요. 안에 있던 게 폭발하더라고요. 그 이전에는 내가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글을 쓰려고 애를 썼어요. 지적으로 쓰려고 애를 썼는데 다시 쓸 때는 그게 안 되더라고요. 막 폭포수처럼 나오는데 나도 주체를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검투사라는 별명을 얻은 거군요.

“그런 것 같아요. 울분이 (손으로 목을 가리키며) 여기까지 찼으니까 이게 적절히 제어가 안 되고 폭발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文士(문사)라는 기분보다는 戰士(전사)라는 기분이 들더라고. 휴화산이 다시 활화산이 됐던 거죠.”

―어떤 사람들은 같은 우파인데도 ‘보수인 내가 봐도 너무 날이 서 있어서 겁이 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어떤 분들은 ‘류 주필 때문에 조선일보 보는 맛이 난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칼럼을 다시 쓰면서 386들과 좌파 운동하다 자유주의 운동으로 전향한 그룹을 만나게 됐어요. 洪晋杓(홍진표), 申志鎬(신지호) 같은 그룹들이죠. 코드가 맞더라고요. 나는 우리 사회가 좌편향으로 가는 물줄기를 바꾸는데 그 그룹들이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그렇게 가다가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이 완패하면서 사회 분위기가 바뀌더군요. 나에 대해 ‘너무 하는 것 아냐, 왜 그렇게 펄펄 뛰어. 세상 흐름과 동떨어져 가는 것 아냐’ 이렇게 말하던 사람들이 지방선거 후에는 그런 이야기를 안 하더군요.”

세무조사와 정권의 退社 압력

―그렇게 울분에 차서 쓰셨다면서 어떻게 해서 마지막 칼럼에는 “칼럼을 쓰는 내내 행복했다”고 하신 겁니까.

“내가 행복했다는 것은 울분에 차서 썼던 것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규모의 열렬한 팬들이 있었다는 것,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의 잘못되는 것을 교정, 물줄기를 바꾸려고 한 것이 어느 정도 성취됐다는 것, 정권이 교체되면서 그런 세월이 다 보람 있다고 느꼈다, 그런 뜻이죠.”

―그렇게 세게 쓰면서 야, 이것 때문에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은 없었습니까.

“조선일보가 좋은 점은 운동장을 주고 그 다음부터는 참견을 안 한다는 겁니다. 외부에서는 어떻게 보는지 모르지만 사실 조선일보만큼 필자에게 재량권을 부여하는 신문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金大中(김대중) 고문, 류근일 등등 필자들은 마음껏 쓴 거예요.”

―그런 것들은 김대중과 유근일이라는 巨木(거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요?

“처음부터 거목인지 아닌지는 모르잖아요? 鮮于輝(선우휘) 주필이 그랬어요. ‘조선일보는 일일이 상관 안 해. 그러나 보긴 보지’.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하라는 말이죠. 그러나 시시콜콜 간섭은 안 한다는 이야기예요. 지시,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지켜보는 거죠. 테두리 안에서 마음껏 놀라는 거죠.”

―金大中 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할 때 金大中 고문, 趙甲濟(조갑제) 전 月刊朝鮮편집장, 류 주필을 내보내라고 했을 때 조선일보측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전달받은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나중에 알았어요. 方相勳(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법정최후진술에서 그 이야기를 해서 알았어요.”

―주변에서 소문으로도 듣지 않았나요.

“소문도 없었어요.”

―혹시 법정최후진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미안한 감은 없었나요?

“있었죠. 본인들은 개의치 않지만 지금도 그걸 미안하게 생각해야죠. 사장이 기소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할 때 그러면 아마 세상 상식으로는 그런 상황에서 류근일, 김대중이가 세게 쓸 수 없다고들 생각할 거야.

그런데 그 당시 계속 세게 썼어요. 일설에 의하면 당국자들이 ‘저 사람 자기 회사 사장 감옥에서 나오지 않길 바라는 모양이야’하는 이야기도 있었답니다. 하여간 글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안 하고 나갔어요. 그것이 구속된 양반한테는 미안하지만 저는 방 사장도 우리가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대견하게 생각했을 거라고 믿는 거죠.”

류근일 주필은 인터뷰 도중 혈압약을 먹었다.

―혈압은 어느 정도입니까.

“심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 먹어야 된답니다.”

―세상이 혈압을 올린 건 아닙니까.

“세상이 혈압을 올리기도 하죠.”

―앞으로 글쓰기는 인터넷 공간에서만 할 겁니까.

“지금 어디서 하겠다는 계획은 없어요. 물 흐르는 대로 기회가 닿는 대로 쓸 생각이에요. 사회·정치적으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많이 있고, 할 수도 있고, 할 용의도 있고, 열정도 있습니다. 그게 없어져서 글을 끝낸 게 아니라 내가 글을 끝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너무 오래 쓴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곳에 25년을 써 왔어요. 신문의 편집 측면에서 봐도 내가 사양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지면쇄신이라는 게 있잖아요. 지면도 바꾸고 사람도 바꾸고 그런 차원에서 변화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일단 칼럼을 마감한 겁니다. 막연하나마 다른 방법이 있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요.”

―주필의 칼럼은 중독성이 강한데, 많은 분들이 한동안 주필의 공백을 크게 느낄 것 같습니다.

“호감 반응 독자분들이 아쉽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분들도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실 거예요.”

시장에 뛰어들고 싶었다

―1981년에 중앙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옮길 때 중앙일보 홍 회장으로부터 야단맞지는 않았습니까.

“홍 회장님과의 인연을 끊기가 상당히 힘들었죠. 진노하셨어요.

그게 이렇게 된 거예요. 내가 그때 중앙일보에 12년째 있었거든요. 거기 있어도 되지만 어떤 변화를 갖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당시 조선일보 선우휘 주필께서 보자고 해서 만났어요. 당시 선우휘 논설고문께서 ‘조선일보로 올 수 있느냐’그래서 ‘왜 그러는데요’했더니 ‘거기 있을 만큼 있었으니까 한 번 배를 갈아타보라’그래요. 그런데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중앙일보에서 트러블이 있었습니까.

“전혀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때 나는 시장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앙일보에서는 내가 상당히 보호를 받는 입장이었어요. ‘보호 받는 입장이 아니라 시장에 뛰어들어 풍찬노숙하면서 내 상품성을 발휘해 보리라, 발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조선일보에 왔어요. 조선일보에 와서 보니까 여긴 완전히 시장이에요. ‘네 재주껏 해봐라. 네 멋대로 써봐라’하는 거였죠. 아슬아슬한 정치 관련 글을 쓰는 걸 보면서 ‘아? 이거 여기는 시장이구나’ 그래서 제 물을 만난 것 같더라고요.”

―중앙일보에 있을 때는 글을 조심해서 쓴 겁니까.

“외신 쪽을 주로 썼죠. ‘너는 당분간 이런 것 쓰지 말고 이런 거 해’하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던 거죠. 베트남전, 중동전 해설 같은 걸 썼죠. 그렇지만 국내 정치의 핵심, 뇌관을 건드리는 것은 쓰지 못했죠. 그런데 조선일보로 오니까 정치도 쓰라는 거야.”

―중앙일보 계실 때도 정치 관련 칼럼을 쓰고 싶은 열망은 있었습니까.

“상당히 강하게 있었죠.”

―12년간 그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었던 거네요.

“완전히 잠수하고 있었던 거죠.”

<지성과 반지성> 저자와의 대화에서 저자인 류 주필(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발언을 토론자들이 경청하고 있다.

초기 李明博 정부는 좌파 속성 몰랐다

조선일보 칼럼 마감 후 류근일 주필이 받은 난 화분 중에는 李明博(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화분도 눈에 띄었다. 난에 걸린 리본에는 ‘계속되는 건필을 기대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10년 동안 左(좌)로 가 있던 우리 사회를 이명박 정부 들어서 右(우)로 이동시키려 하고 있지만 지난 정권들이 사회 곳곳에 박아놓은 대못을 뽑는 일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권이 출발한 지 1년여가 가까워서야 고급 공무원들의 사표를 받는 등 人的(인적)개혁에 들어갔는데, 그동안 정치 사회문제를 주제로 오랫동안 칼럼을 써 온 분으로서 보시기에 이명박 정권이 잘될 것 같습니까.

“이명박 정부 하기 나름이에요. 좌파들과의 싸움을 잘하면 나름대로 투자한 만큼의 성과가 있는 것이고, 싸움을 잘못하면 실수한 만큼 후퇴가 있는 거예요.

그걸 전제로 이야기할 때 집권 초기 이명박 정권이 사태를 안이하게 본 것 같아요. 그러나 촛불사태를 겪으면서 이명박 정부나 정권이 보다 선명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하는 說(설)이 있어요.

정권에 참여한 분들이 ‘정치는 싸움의 세계다, 싸움할 때는 장수의 기개로 싸워야 한다, 장수의 기개는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거다’하는 생각을 가져야죠. 모든 걸 버리고 목숨을 던질 각오로 진용을 튼튼히 짜고 그 진용으로 脫(탈)좌파 개혁을 어떤 시련이 있어도 밀고 나가겠다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시민사회나 국민들이 감동할 수 있을 겁니다.”

―이명박 정부가 좌와 우의 싸움이라는 전선을 보지 못함으로써 국정 초반을 어렵게 끌어온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좌파의 속성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서 말만 잘하면 봐줄 줄 알았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말 잘한다고 봐주지 않아요.”

―지금은 이명박 정부가 戰線(전선)을 제대로 잡고 가는 것으로 보십니까.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와대, 내각 등 집권세력이 동지적 결합으로 똘똘 뭉쳐 있느냐, 그게 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아요. 이게 과연 팀이냐. 아니면 오소리 잡탕 모아놓은 것이냐. 후자의 경우는 싸움이 안 되죠. 팀을 강하게 짜야 해요.”

―현재 청와대 참모진이 과거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에서 보좌했던 팀만도 못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적자원 문제가 아니라 팀워크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 말을 이어서 하면 권력의 진용을 튼튼히 짜는 것이 첫째고, 두 번째는 정치적 연합입니다. 보수면 보수세력의 여러 그룹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폭넓은 연합의식을 가져야죠. 지금 朴槿惠(박근혜), 李會昌(이회창)씨는 우파로 볼 수 있는데 최소한 그분들과 敵(적)은 되지 말아야죠. 세 번째는 시민사회 세력이 좌파의 대못을 뽑고 자유대한민국의 기본 가치관을 앞으로도 계속 끌고 나가기 위한 운동이 더 필요한 거죠. 이 세 가지가 안타깝지만 착착 진행되는 것 같지가 않아 좀 걱정스럽기는 합니다.”

감옥에서 만난 서양철학

2000년 4월 21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사단법인 4월회(회장 이재후)와 4·19문화상 운영위원회가 공동 주관하는 제1회 4·19문화상을 수상한 류 주필.

―뉴라이트 운동에도 관여하셨는데 지난 4년간의 뉴라이트 운동을 평가하는 시각 중에는 너무 정치화한 것 아닌가 하는 비판도 있습니다.

“저는 조금 관용을 가지고 보는 편인데요. 운동이 분화되는 경우라면 괜찮습니다. 정치로도 진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계속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분화하는 것은 괜찮다고 봐요. 그런데 대한민국을 수호한다는 선을 떠나서 구체적으로 당권 투쟁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지하는 것은 안 된다고 보죠.”

―좌파의 대척점으로서의 뉴라이트 운동은 성과를 얻었다고 보십니까.

“얻었죠. 사회의 좌파 트렌드를 일단 바꾸는 데는 상당한 기여를 했어요. 그런데 단기적인 정권교체 목표 달성 후 안티 운동으로서는 성공을 했는데 앞으로 무엇을 만들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혼선이 있죠. 이제는 뉴라이트라는 단체 명칭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뉴라이트 운동이 발전적 변형의 시점을 맞고 있지 않는가 싶어요.”

―감옥 안에서 만난 분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김지하씨죠. 훌륭했어요. 홍진기 회장하고도 인연이 깊죠.”

―김지하씨하고는 그 이전부터 알았던 사이였습니까.

“시 ‘五賊(오적)’을 발표하기 전인데, 중앙일보 다닐 때였어요.”

―요즘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돼 함께 고생했던 분들과는 거리가 좀 멀어졌겠네요.

“좀 멀어졌어요. 멀어졌다는 게 다른 뜻이 아니고 교류가 줄어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민청학련 세대만 해도 괜찮은 사람들이에요. 유인태, 이철 다 괜찮은 사람들이에요. 다만 내 입장에서는 그 사람들이 386들의 잘못된 노선을 딱부러지게 정면으로 비판을 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그걸 안 하고 편의논리, 진영논리로 가는데 나는 그게 싫은 거예요.”

―정치하는 분들 입장에서야 386을 정면 비판했다가는 커다란 지원세력을 잃는 건데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죠. 나는 개인의 지성과 양심에 입각해서 어느 상대방을 향해서도 발언을 하는 입장이지.”

―처음 감옥에 갔을 때 서양철학에 깊이 빠지셨다면서요.

“서양철학을 보니까 눈이 뜨입디다. 역사의 파노라마를 본 거죠. 사회주의,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런 것만 보다가 서양철학을 보니까 ‘아차, 이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단기적인 이슈가 아니라 거대한 장기적 흐름이 있구나, 이 틀을 모르고 내가 어린 나이(20세)에 너무 한쪽으로만 파고 들어온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나더라고요. 운동하기 전에 서양철학사를 한 번 보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에 겁이 나더라고요. ‘내가 양심에 비춰서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뭘 모르면서 한 것은 아닌가, 겸손해야 되겠다, 공부는 끝이 없구나’ 이걸 깨달으면서 식은땀을 흘렸어요.”

―어떤 깨달음이었습니까.

“소위 말하는 ‘주의’라는 것에 몰두하는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간론, 문명론 그런 걸 먼저 공부하고 했어야 했던 거죠. 순서가 바뀌었던 거예요.”

글쓰기는 인간의 총량 그 자체

―조선일보를 정년퇴임할 때까지 200자 원고지에 직접 글을 쓰다가 지금은 컴퓨터로 글을 쓰시는데, 원고를 원고지에 쓸 때와 컴퓨터로 작성할 때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 전에 육필로만 쓸 때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어요. ‘인간의 숨결이 스며드는 글은 직접 쓰는 거다’라고 말이죠. 그런데 요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쓰니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더라고. 지금은 ‘어떻게 그렇게 손목 아프게 원고지에 일일이 썼던가. 이렇게 좋은 것이 있는데’하는 생각이 들어요.”

―글에서 힘이 빠진다는 느낌은 없습니까.

“안 그래요. 컴퓨터로 쓰면서 예전에 육필로 쓸 때보다 더 세게 쓰지 않습니까.”

―육필로 쓸 때는 감정을 농축해가면서 쓸 수 있지만 컴퓨터로 작업을 할 때는 그 농축 정도가 옅어지면서 오히려 감정이 더 폭발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에 키보드는 도구에 불과하더라고요. 손가락이나 키보드나 다 도구예요. 괜히 낭만적으로, 신비주의적으로 ‘육필로 쓰는 게 인간적이다’ 그러는 거죠.”

―주필에게 글쓰기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총량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어느 정도의 총량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대로 나오는 게 글이라고 봅니다. 인격 자체가 나오고 지식의 총량이 나오고 열정의 총량이 나옵니다. 영혼의 투영도 되고요. 단순히 재주로 글을 써서는 안 되고, 온몸을 던지는 글을 써야죠. 인격, 열정, 정서, 실력, 사색, 고민 이런 게 전부 나오는 게 글이고 그렇게 써야 한다고 봅니다. 손가락 끝으로 살랑살랑 마사지하듯 쓰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글은 아무리 현학적이라 하더라도 감동을 못 받겠더라고요.”

―쓴 글 중에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지나침에 대한 반발’을 해오셨다고 하셨는데요.

그 동안은 권위주의와 극좌에 대한 반발로 살아오셨는데 앞으로는 어느 쪽에 대한 반발로 살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앞으로도 상당 기간은 극좌에 대한 반발이 계속돼야 할 것 같아요. 지식인들이 극우와 극좌를 똑같은 거리에 두고 그 중간에 딱 서서 비판하는데, 말하자면 면피용이에요.

이제 우익 쿠데타, 우익 일당독재 이런 걱정은 사라졌다고 봐요. 우파는 민주화됐어요. 우파는 민주화에 승복을 했어요. 그런데 극좌는 아직 민주화에 승복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 상당 기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위협과 도전과 불복은 극좌에서 온다고 봐요. 위험은 그쪽에서 오는 거예요. 김정일이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극우였던 적이 없다

―주필이 아무리 거부해도 일부에서는 주필을 극우라고 칭하는 게 현실입니다. 극우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 감정 상하지는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유사 이래 항상 있는 거예요. 심지어는 아주 극소수지만 지금의 우파에도 ‘한 번 빨갱이는 영원한 빨갱이다. 류근일이는 빨갱이다’ 그런 사람이 있어요. 나는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아요. 말이 안 통하니까요. 내가 언제 우익 일당독재와 폭력적 권위주의 편에 섰으며 그걸 주장했습니까. 나는 오히려 거기에 저항을 했어요. 그런 내 인생을 생각할 때 나에게 극우를 붙이는 것은 웃기는 얘기죠.”

―우파적이든 좌파적이든 언론인은 권력 앞에서 어떤 스탠스를 가져야 할까요.

“언론인은 권력과 나란히 서면 안 됩니다. 권력을 비판해야죠. 비판해야 하는데 언론이 지켜야 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 하나는 계속 붙들고 갑니다. 특정 권력, 좌파정권은 좌파정권이라서 반대를 하지만 비록 우파정권이라고 하더라도 권력 그 자체와 한통속이 되는 것은 언론인으로 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상처를 입는 것이다”고 한 적이 있는데 살아오면서 상처를 많이 입었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처를 뛰어넘는 자질이 좀 더 있나 봐요. 나는 불교도는 아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를 받아들여요. 결국은 자기 탓이라는 거죠. 그런데 잠재의식에는 상처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내가 감옥생활 한 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겉으로 보긴 그래도 술 한잔 먹고 내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비감스런 생각도 들어요. 이런 기구한 팔자가 있나, 하는.”

인터뷰 말미에 류 주필이 필자에게 물었다.

“김 형 보기에 나한테 극우적인 요소가 있어 보입니까?”

필자의 입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뇨”라는 대답이 나왔다.

인터뷰가 끝났을 때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류근일 전 주필의 대표 칼럼

戰艦 12척은 남아 있다

류근일 전 주필은 자신이 쓴 칼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조선일보를 퇴직했다가 다시 칼럼을 쓰기 시작한 후인 2004년 11월 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戰艦 12척은 남아 있다>를 꼽았다. 노무현 정권이 한창 기세등등하던 시절, 새로운 자유주의 우파세력의 출현을 고대하는 이 칼럼이 게재될 무렵 뉴라이트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국보법 폐지, 언론법 개악, 사학법 개악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의 기둥뿌리를 뽑자는 것이다. 국보법 폐지로 김정일에 대한 최후의 방파제를 제거하고, 사립학교법 개악으로 宗立(종립) 학교들을 통째로 빼앗고, 언론법 개악으로 조선일보·동아일보를 죽여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를 빈 깡통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 텅 빈 황야에 새로운 점령군이 진주하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점령군―그것은 곧 ‘대한민국은 애당초 태어나선 안 될 친일·친미 민족반역 세력의 분열주의 정권’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공공부문은 이미 그런 사람들이 편지를 통해 “우리의 도구가 되어달라”고 당부하거나 협박한 쪽에 넘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교육계, 언론계, 종교계, 경제계에는 아직도 ‘반민족 세력’이 집요하게 버티고 앉아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변혁에 한사코 저항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이 院外(원외) 홍위병과 함께 院內(원내) 다수의석까지 차지했으니, 사회변혁과 국가 정체성 변혁의 탄탄대로가 활짝 열려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변혁의 불도저는 이미 질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저 막가는 말버릇 하며, 저 저승사자 같은 섬뜩함을 보라. 국민 다수가 반대하든 말든, 종교계 賢者(현자)들이 걱정스럽게 충고를 하든 말든,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유권적인 판단을 내리든 말든, 저들은 “헌법 위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곧 정의”라며 숙청의 지하드(聖戰)를 무자비하게 밀어붙이겠다는 기세다. 결국 이 나라의 운명은 또다시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의 한 치 틈새도 없는 일대 결전, 일대 아마겟돈(Armageddon)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이런 총소리만 없는 백병전의 이쪽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명색이 야당이라는 한나라당은 목숨을 던질 생각도, 싸움의 노하우도, 자기 정체성도 없는 기회주의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절실한 것은 한나라당 같은 것 말고, 저 널뛰는 세력을 저지할 ‘낙동강 교두보’를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충무공의 ‘아직 남아 있는 전함 12척’ 같은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절박한 소망을 애국 기독교계와, 이제는 생각이 바뀐 ‘자유주의 386’, 아니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자유주의 486’ 세대에 한번 걸어보려 한다.

천주교와 개신교 지도층은 이미 북한 인권문제와 사립학교법 개악을 앞두고 ‘나라를 위한 기도회’ 등 중대결단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 이래 기독교를 함부로 건드린 세력은 거의 예외 없이 패배했다. 기독교는 순교의 신앙이며 부활의 신앙이기에, 한국의 애국 기독교 세력을 섣불리 건드린 ‘선무당 변혁가’들은 스스로 自害(자해)의 뇌관에 불을 댕긴 꼴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자유주의 486’ 또한 ‘주사파 386’의 약점과 정체를 누구보다도 환히 꿰뚫어보고 있는 그들의 天敵(천적)이다. 80년대에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받들다가 한 번도 분명하게 전향을 선언한 바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끗발을 잡더니 국보법 폐지에 앞장서고, 미국 의회의 북한 인권법 통과를 시비하는 그들, 누가 자기들의 정체를 물으면 ‘색깔론’이라고 길길이 뛰면서도 남을 향해서는 걸핏하면 ‘보수꼴통’ ‘수구냉전’이라며 ‘역(逆) 색깔론’을 펴는 그들, 그런 그들의 아킬레스腱(건)에, 그들의 천적 ‘자유주의 486’은 예리한 비수를 던져야 한다.

이 대한민국 21세기의 ‘낙동강 전투’에서 애국 기독교 세력과 ‘자유주의 486’은 이제 방어전 아닌 공격전으로 과감히 치고 나가야 한다. ‘민족민주’라는 방패막이 뒤에 숨어 있던 ‘위수김동’ 증후군이 알몸을 드러내도록, ‘80년대 그들’에 대한 진상규명부터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이 반격전에 “솥단지를 들고 시위하고 싶다”는 영세 시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연결할 때, 2004년 가을은 마침내 한 편의 막판 뒤집기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전함 12척’은 분명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