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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논객 임명묵의 ‘역사로 세계 읽기’ ⑩ 중동 전쟁 주도하는 이스라엘 우익의 실체

유대 민족주의와 시장자유주의 결합… 1977년 이후 정치 주도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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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전쟁, ‘지도자의 권력욕’과 ‘국민의 평화’라는 이분법으로는 설명 불가능
⊙ 벤구리온·골다 메이어 등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시온주의자들이 이스라엘 건국 주도
⊙ 자보틴스키, 자본주의·민족주의 성향의 수정시온주의 창안
⊙ 베긴, 종교적 보수주의자·시장자유주의자·하층 노동자·자영농 포섭해 우익 시온주의 세력 구축
⊙ 네타냐후, 안보지상주의자·정착촌 거주자·종교정당·구소련 출신 유대인 묶어 ‘우익 빅텐트’ 유지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2022년 4월 20일 예루살렘에서 시위를 벌이는 이스라엘 우익 세력. 사진=AP/뉴시스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통치 집단이자 무장조직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전격적으로 기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 한 해를 꼬박 채웠다. 1000명에 가까운 민간인 피해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본토를 공격한 하마스의 공세는 곧 이스라엘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소탕을 목표로 가자 지구에 진입하여, 역시 4만 명 이상의 민간인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고 작전을 계속했다. 대부분의 국제 여론이 이스라엘을 만류하며 휴전을 촉구했지만, 전쟁은 계속 확대되어만 갔다.
 
  올해 4월에는 이스라엘의 시리아 주재 이란 영사관 타격을 계기로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 본토 타격이 오갔다. 전쟁은 9월에 레바논 남부의 시아파 정당이자 무장조직 헤즈볼라를 상대로도 확대되었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의 수장인 하산 나스랄라를 제거하고 레바논 국경을 넘어 군을 이동시켰다. 10월 16일에는 이스라엘 제1의 전쟁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하마스의 수장 야히야 신와르까지 제거했다. 그러나 전쟁은 여전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10월 1일에는 이란이 이스라엘을, 10월 26일에는 이스라엘이 이란을 타격하며 분쟁은 점점 ‘일상화’되고 있다.
 
 
  전쟁의 장기화
 
  사실 전쟁 장기화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물론 현재도 이스라엘이 강대한 무력(武力)을 바탕으로 이전처럼 주변국을 압도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전 이스라엘이 중동(中東) 전쟁에서 거둔 놀라운 승전은 모두 번개 같은 작전을 통한 단기전의 승리였다. 즉 이스라엘은 장기전에 대한 지구력 시험을 해본 바가 전혀 없다. 국제 여론의 냉대, 관광객 방문과 해외 투자의 급감, 청년 인구가 경제 활동 대신 군사 작전에 투입되어야 하는 부담 등 이스라엘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짐을 지고 결승점이 보이지 않는 장거리 달리기를 뛰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데도 어째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끝낼 일말의 여지도 내비치지 않는 것일까?
 
  이에 관하여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권력욕’이 흔히들 전쟁 장기화의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언급된다. 애초 네타냐후 정권은 전쟁 이전부터 사법부 개혁과 권력 집중 문제로 야당과 시민 사회의 커다란 반발에 직면했었다. 게다가 본인의 비리 스캔들을 둘러싼 조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실각 후 투옥을 의미한다. 즉 권력자 개인의 안위를 위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전쟁에 이스라엘 국민과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일례로, 9월 29일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하산 나스랄라 사살 이후 네타냐후의 지지율이 8%나 상승하여 43%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다시 말해 국민의 3분의 1은 네타냐후와 전쟁 지속을 지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중도층도 ‘전쟁을 잘한다면’ 네타냐후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평화를 원하는 국민’과 ‘전쟁을 원하는 네타냐후’라는 이분법에 대한 중요한 반례(反例)라고 할 수 있다. 네타냐후는 장기전에 따라오는 막대한 부담을 감수하고도 전쟁 지속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국민의 상당한 지지를 등에 업었기에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다면 전쟁 장기화의 원인을 알기 위한 질문이 바뀔 필요가 있다. 네타냐후와 그의 정당인 리쿠드당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우익의 심리는 무엇일까?
 
 
  시온주의 창시자 헤르츨
 
시온주의의 창시자 테오도어 헤르츨.
  이스라엘은 시온주의 사상을 기초로 건국된 국가이며, 당연하게도 현대 이스라엘 정치 세력 모두 시온주의의 역사 위에서 만들어졌다. 흔히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인을 향한 유대인의 억압과 차별, 나아가 유대교라는 종교와도 결부되어 인식되지만, 실제 시온주의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시온주의는 프랑스 전국을 뒤흔든 반(反)유대주의 논쟁인 ‘드레퓌스 사건’을 목도한 오스트리아 제국 출신의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이 창시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유럽 각국에 아무리 잘 동화되더라도, 유럽인들은 유대인을 계속해서 차별하는 현실에 충격을 받아 유대인들만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이 국가를 세울 곳은 오랜 세월 전에 떠나온 그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이었다. 헤르츨은 오스만 제국을 찾아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고 싶다고 설득을 하기도 했고, 1897년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세계 시온주의 대회를 개최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영국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공백을 노린 시온주의자들의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아세톤 제조법을 개발하여 영국의 명사(名士)가 된 하임 바이츠만은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를 설득하였다. 이 결과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일을 지지하겠다는 밸푸어 선언이 등장했다. 밸푸어 선언 이후 계속된 유대인의 이주, 이스라엘 건국 시도가 아랍인들을 자극하여 현대 팔레스타인 분쟁이 시작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어떻게 건국할지를 둘러싸고 시온주의 이념은 본격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했고, 각각 이스라엘 좌익과 우익을 형성하는 노동시온주의와 수정시온주의의 대결로 이어진다.
 
 
  노동시온주의와 수정시온주의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벤구리온. 사진=퍼블릭 도메인
  시온주의에서 처음 주도권을 쥔 이들은 좌익인 노동시온주의자들이었다.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인물인 다비드 벤구리온, 골다 메이어, 모셰 다얀 등이 모두 좌익 정당 마파이 출신이었다. 유럽 사회주의의 한 갈래인 노동시온주의는 토지 국유화(國有化)와 키부츠로 대표되는 협동농장 체제, 공공 주택과 국민 복지를 추구했으며, 유대인 노동계급에 의한 팔레스타인 개척과 유대교의 영향이 없는 세속적 민족주의를 신조로 삼았다. 외교적으로는 영국에 최대한 협력하여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는 중동 전쟁의 연속적인 승리를 이끌며 민족의 수호자라는 영예도 얻어냈고, 이스라엘 노동총연맹인 ‘히스타드루트’를 통해 국가 경제 전체를 관장하며 30년의 장기 집권을 이루어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길을 걸어간 노동시온주의와 달리 우익인 수정시온주의는 중동부 유럽에서 폭발한 민족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수정시온주의의 창시자는 당시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우크라이나의 항구 도시 오데사 출신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였다.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는 벤구리온. 뒤에 헤르츨의 초상이 걸려 있다.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모두 다스렸던 광대한 러시아 제국에는 전 세계 유대인의 40%를 차지하는 500만의 유대인 인구가 거주했다. 동유럽의 도시 공간에는 일찍부터 상공업에 종사하며 근대 교육을 받은 유대인 집단이 다수 거주했는데, 이들은 제국 정부에는 불신을 샀고, 슬라브계 도시민이나 농민에게는 자신들을 약탈하고 착취하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차르 전제정(專制政)이 위기에 처하고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 많은 군중이 애꿎은 유대인에게 화살을 돌려 약탈과 살해를 일삼았다. 이 같은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 폭동을 일컬어 ‘포그롬’이라고 한다.
 
 
  급진 민족주의자 자보틴스키
 
이스라엘 우익의 뿌리 제브 자보틴스키.
  포그롬에 직면한 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은 민족 평등을 외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 이끌렸다.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 지식인들은 히브리어나 이디시어보다 독일어와 러시아어로 더 자주 소통하고, 도스토옙스키와 레닌을 읽는 동유럽 인텔리겐치아 세계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일부는 러시아 사회주의도 유대인을 계속 차별하고 불신할 수밖에 없다며, 오스트리아에서 발전한 시온주의를 선택했다. 벤구리온을 포함한 숱한 노동시온주의 지도자들도 러시아 제국 출신으로 시온주의자가 된 인물들이었다.
 
  오데사에서 배를 타고 189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시작한 자보틴스키도 이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운동인 리소르지멘토를 성공시켜 대륙 반대편 식민지 조선에서도 민족 부흥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가리발디, 마치니, 카보우르에 열광한 청년 자보틴스키는 러시아로 돌아와 끔찍한 포그롬을 마주했고, 헤르츨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러시아 제국을 대표하는 시온주의 지식인으로 각성했다. 그는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름도 러시아식인 블라디미르에서 히브리어로 늑대를 뜻하는 제브(Ze’ev)로 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기회가 주어지자, 자보틴스키는 영국을 도와 유대인이 전투에 참여한다면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의 외교적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각성과 군사적 훈련을 이룬 유대인 집단을 만들 수 있다며 유대인 부대 창설을 주도했다.
 
  자보틴스키는 이후 영국이 국제연맹을 통해 설치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활동하며 시온주의 정치 논쟁에 참여했다. 그는 유대인의 민족 공간은 요르단강 양안(兩岸)을 포괄하기 때문에 영국이 정해준 경계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유대인의 민족정신도 ‘상인(商人) 정신’에 있기에 유대인 공동체의 가치도 노동계급 중심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중산층 중심의 자유시장경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영국과 최대한 협력을 추구하고 노동자 정치를 옹호한 주류 노동시온주의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노선이었다.
 
 
  수정시온주의의 파쇼화
 
  자보틴스키는 수정시온주의 그룹을 결성하고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개시했다. 1923년에 자보틴스키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아랍인 갈등이 격화되자 민병대 조직인 베타르를 설립해 조직원을 모으며 후속 세대를 길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사태 전개가 계속해서 악화되며 수정시온주의는 자보틴스키의 당초 생각에서 훨씬 멀어져 갔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 모든 곳에서 반유대주의를 폭발시켰고,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된 러시아 혁명과 내전(內戰)으로 무고한 유대인이 파리처럼 죽어나갔다. 이런 와중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주의 국가는 무기력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고, 러시아의 레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이끄는 반자유주의 대중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자보틴스키는 19세기 낭만주의 속에서 청년기를 보냈지만, 그를 따르는 후배들은 총력전, 혁명,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20세기의 무시무시한 언어와 함께 성장했다.
 
  아바 아히메이르, 유리 즈비 그린베르크와 같은 신세대 수정주의자들은 곧 최대주의(最大主義) 계파를 만들어 자보틴스키의 사상을 더욱 급진화시켰다. 그들은 레닌의 공산주의는 혐오했지만,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쓰고 피를 흩뿌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 레닌주의 전술은 배울 가치가 있다고 봤으며, 무기력한 이탈리아 대중이 무솔리니라는 지도자를 만나 각성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상찬(賞讚)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을 이러한 초(超)민족주의자로 각성시켜서 아랍인을 몰아내고,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 국토)’에서 유대 국가를 소생시키는 ‘민족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대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런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는 선배인 자보틴스키였으나, 자보틴스키는 파시즘에 진심으로 경도되는 후배들에 경악하며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테러리스트 베긴
 
1939년 팔레스타인 영국 경찰의 지명수배자 포스터. 맨 왼쪽이 베긴이다.
  1930년대 들어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에서 집권하고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더욱 극심해지자, 수정시온주의자들과 영국의 관계도 더욱 악화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자들은 유럽의 유대인이 반유대주의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민족의 고향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이민을 철저히 제한하고 있었다.
 
  근대적 역량이 더 뛰어난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 살지 않는 시리아의 부재(不在) 지주에게서 토지를 매입해 정착촌을 만들었고, 도시 상공업에서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생존권의 위협이자 유럽 식민주의의 재림(再臨)으로 여겨졌다.
 
  대영 제국의 무역과 에너지 네트워크에서 중동이 갖는 중요성을 생각할 때 영국 정부는 아랍인의 여론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 이주를 제한하고, 토지를 둘러싼 아랍인과 유대인의 폭력을 모두 억누르며 어떻게든 다민족(多民族) 공존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양측 모두 만족할 수 없는 해법이었다. 수정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의 폭력과 위임통치령 정부 모두에 맞서는 공격적인 자경단 이르군과 레히를 만들며 대응했다. 이 집단은 아랍인 촌락을 공격하고, 영국 관공서와 주요 인물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 이르군의 지도자 중에는 소련의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폴란드계 유대인 메나헴 베긴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새로 만들어진 국제연합(UN)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이 가시화되었을 때도 베긴과 이르군의 반아랍, 반영(反英) 투쟁은 계속되었다.
 
 
  베긴, 우익 연합 구축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전체 유대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나치 패배 이후에도 그칠 기미가 없던 반유대 폭력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새로운 유대인 난민의 물결로 이어졌다. 일가족이 홀로코스트로 몰살당한 베긴은 자보틴스키 사상에 영감을 받아 유대인의 민족 공간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제1차 중동 전쟁 당시 이르군 대원들은 아랍인 촌락을 공격하고 적극적인 민간인 추방에 나서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에 불을 붙였다.
 
  그러다 일단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승전을 통해 생존을 보장받자 베긴은 자신의 노선을 선회했다. 그는 아히메이르와 같은 최대주의 극우(極右)와 거리를 두며, 무장 민병대의 지도자에서 선거 민주주의 체제에 적응하는 대중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베긴은 1940년 사망한 자보틴스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그의 사상을 주도적으로 해석, 수정시온주의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노동시온주의자들의 마파이당에 맞서 우익 정당 헤루트를 결성한 베긴은 좌익의 절대적 우위에도 굴하지 않고 이스라엘 우익 전체를 대표하며 정당 연합을 이끌었다. 1965년에 만들어진 정당 연합 가할은 1973년에 리쿠드로 계승되었고, 베긴의 지휘 아래 우익은 계속해서 세력을 넓혀나갔다. 베긴은 집권 여당의 세속주의와 사회주의에 맞서는 종교적 보수주의자들과 시장자유주의자들을 연합시켰고, 체제에서 소외된 하층 노동계급과 키부츠에 소속되지 않은 자영농(自營農)을 끌어들였다. 아랍계 유대인(미즈라힘)도 우익 연합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더 보수적이었고, 좌익 노동당이 자신들을 멸시한다며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30년 만에 집권 성공한 이스라엘 우익
 
베긴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카터 미국 대통령,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반면 좌익은 30년의 집권을 거치며 점차 분열하고 있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의 대승(大勝)이 그 계기였다. 나세르가 주도하는 아랍 연합군을 선제(先制)공격으로 분쇄한 이스라엘은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나아가 이집트의 영토인 시나이 반도까지 점령했다.
 
  좌익 내부에서는 이 새로운 영토를 어떻게 통치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없었다. 안보주의자들은 국토 종심을 확보해야 한다며 정착촌 건설을 지지했다. 외교적 온건파들은 국제법 위반을 우려하며 조심스레 철수를 고려했다. 당내 분열에 장기 집권에 따라오는 부패 스캔들까지 겹치며 노동당 세력은 약화되었다. 1977년 베긴의 리쿠드는 마침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며 30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1983년까지 이어진 베긴의 집권기, 이스라엘은 파격 행보를 거듭했다. 베긴은 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와 맞닿은 세계적인 시장 자유화의 흐름에 합류하여 이스라엘 경제의 사회주의적 색채를 없애는 전면적 개혁을 시작했고, 국가 정체성(正體性)에서도 유대교를 더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지지자들의 바람에 응답했다.
 
  가장 놀라운 일은 1978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와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나 협정을 맺고, 이집트의 영토인 시나이 반도를 돌려준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역사적 연고(緣故)를 주장하는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며 옛 민병대 지도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는 팔레스타인 투쟁 조직인 PLO와 야세르 아라파트를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떠오르게 한다며 경멸했고, 이를 제압하겠다고 1982년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며 이스라엘을 지정학적(地政學的) 수렁에 다시 빠트렸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스라엘 사회의 변화
 
  베긴 이후에 리쿠드는 간헐적으로 노동당에 정권을 넘겨주긴 했어도 대체로 지배적인 여당으로 남았다. 이스라엘 경제는 키부츠 사회주의에서 혁신 기업이 쏟아져 나오는 스타트업 자본주의로 변신했다.
 
  인구 구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종교적인 유대인 인구가 계속 성장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1967년 전쟁 이후 점령한 팔레스타인 영토에 진입해 원주민을 내쫓고 정착촌을 만들어 유권자 그룹을 형성했다. 결정적으로 소련이 해체되자 구(舊)소련 유대인들의 새로운 이민 물결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종교적이진 않았지만, 사회주의 체제와 관련된 모든 것에 치를 떨며 리쿠드를 지지했다. 하지만 우익은 저변이 넓어진 만큼 이념적으로 더 다양해졌다. 베긴이 이끄는 중도 우파 연합은 네타냐후가 힘겹게 묶어내는 우익 빅텐트로 바뀌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스라엘 우익에 계속해서 커다란 도전을 가하기 시작했다. 1987년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점령 통치에 맞서는 저항 운동인 인티파다를 시작했다. 1993년 당시 집권 노동당의 총리인 이츠하크 라빈은 아라파트와 만나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며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네타냐후는 오슬로 협정이라는 현실에 적응하고자 했던 중도 우파였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오슬로 협정을 거부하던 우익 강경파들은 분개했다. 영토에서 민족의 공간이나 종교적 사명을 투영하는 이들이 보기에 ‘에레츠 이스라엘’의 영토를 한 점이라도 줄이는 시도는 용납이 안 됐다. 결국 라빈이 극우에게 암살당하며 협상을 통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은 요원해졌다.
 
 
  네타냐후의 딜레마
 
2023년 12월 26일 가자 지구 전선을 시찰하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작년 10월 하마스의 도발 이후 그는 전쟁을 계속 확대해 나가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2009년부터 집권 2기를 시작한 네타냐후는 여러 딜레마에 대처해야만 했다. 군소(群小) 정당의 존재감이 커지며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에서 연정(聯政) 탈퇴를 무기로 여당에 강경책을 강요할 수 있게 되었다. 정착촌의 역사가 장기화되면서, 팔레스타인 영토를 고향으로 삼는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정부 수립을 핵심으로 하는 ‘두 국가 해법’을 절대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네타냐후는 이념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미스터 안보’라는 별명을 얻으며 지지를 얻어낸 그는 어떻게든 이스라엘 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아랍의 봄 이후 아랍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이란이 세력을 확장하자, 그는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란의 위협에 공동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트럼프 정권의 지지를 받아 아랍 왕정(王政)들과 외교 관계를 구축하고, 아랍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렇게 맺어진 아브라함 협정은 네타냐후의 외교적 쾌거로 여겨졌다. 장차 아랍의 대표국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면 이제 누구도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네타냐후의 계산에는 이스라엘의 봉쇄와 점령 속에서 열악한 삶을 이어가며 극단주의 조직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팔레스타인인의 처우 문제가 빠져 있었다.
 
  예루살렘과 서안 지구에 종교적 사명을 투영하며 ‘유대교의 공간’을 구축하고자 했던 종교적 시온주의자들도 문제였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아랍인의 성지를 도발하는 행동을 계속하자 아랍인의 여론은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아랍 왕정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 방안을 내놓으라고 촉구하며 이스라엘과의 관계 수립을 주저했다. 이러다 마침내 2023년 10월 7일 네타냐후의 모든 계획을 좌절시킬 하마스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이스라엘은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게 되었다.
 
 
  우익, 이스라엘 정치의 지배 세력이 됐지만…
 
  자보틴스키에서 베긴을 거쳐 네타냐후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우익의 역사는 이번 전쟁이 ‘지도자의 권력욕’과 ‘국민의 평화’라는 이분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77년 베긴의 승리 이래로 이스라엘 정치의 지배적 세력은 우익이 되었다. 이들은 종교적 보수주의와 민족적 사명감을 공유하고 있다. 종교적 시온주의자들은 유대교 경전과 마사다 요새의 항전(抗戰)을 인용하고, 민족주의자들은 포그롬과 홀로코스트, 중동 전쟁의 기억을 계속해서 소환한다.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진영도 마찬가지다. 하마스의 이슬람 원리주의가 주민들을 전쟁의 참화로 끌어들였다고 하지만, 야히야 신와르의 최후의 순간을 담은 영상이 아랍권 인터넷에 공유(共有)되며 진정한 순교자와 영웅의 모습으로서 추앙되고 있다.
 
  전쟁, 혹은 항전을 향한 지지가 계속되며, 지금의 갈등은 무수한 피를 더 많이 뿌리고 양측 모두가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가운데 이스라엘 우익에 대한 세속적·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도전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방향성과 어지러운 중동 정세 속에서 이스라엘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안보 정책, 그리고 정착촌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해결책을 모두 제시하지 않는 이상 그 도전이 결실을 얻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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