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트럼프 시대 대비하는 한편 중국과 물밑대화, 나토·동남아 국가들과 군사협력 등 ‘플랜 B’ 가동
⊙ 윤석열-바이든의 ‘워싱턴 선언’, 트럼프 당선으로 휴짓조각 될 위기
⊙ 트럼프, 중국 견제 위해 김정은과 빅딜 나설 수도
⊙ “강의식 설교 대신 짧게 말하고, 주의·주장이 아니라 실질적 得失 염두에 둔 언행 중요”(일본 외무성, ‘트럼프 취급 설명서’)
⊙ 이시바, ‘아시아판 나토 결성, 괌 미군기지 내 자위대 상주’ 주장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 윤석열-바이든의 ‘워싱턴 선언’, 트럼프 당선으로 휴짓조각 될 위기
⊙ 트럼프, 중국 견제 위해 김정은과 빅딜 나설 수도
⊙ “강의식 설교 대신 짧게 말하고, 주의·주장이 아니라 실질적 得失 염두에 둔 언행 중요”(일본 외무성, ‘트럼프 취급 설명서’)
⊙ 이시바, ‘아시아판 나토 결성, 괌 미군기지 내 자위대 상주’ 주장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미국 대선에서 압승했다. 공화당은 연방 상·하원 선거에서도 승리해 원내 다수당이 됐다. 대통령과 상·하원 모든 자리를 공화당이 차지하는 이른바 ‘트리플 레드(Triple Red)’ 탄생이다. 사법부 최고봉인 연방대법원의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保守) 성향이란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미국의 모든 권력이 통째로 공화당, 나아가 트럼프 손안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입장에서는 나라가 망했다고 탄식하겠지만, 공화당 지지자들의 입장에서는 모처럼 하나 된 리더십이 탄생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선거 결과를 대하면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어떻게 트럼프가 승리했는지, 그것도 압승을 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한국 신문·방송 대부분은 ‘트럼프=거짓말과 인종차별의 화신(化身)’처럼 보도했다. 트럼프를 지지하거나 찬성하는 듯한 보도 자체가 정의에 반하는 것 같은 분위기도 팽배했다. 미국 내 실제 상황도 모르고 편향적인 리버럴 미디어만 따라가다가, 2016년에 이어 또다시 ‘오보(誤報)’를 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나 CNN 같은 리버럴 미디어만 보면, 트럼프는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할 ‘악(惡)’ 그 자체다. 그러나 트럼프는 악마도 천사도 아니다. 주장과 표현이 강하고 원초적일 뿐, 크게 보면 다른 정치가와 오십보백보다. 선악·도덕·윤리 같은 잣대로 쉽게 평가할 정치인이 아니다.
‘PC 공장’ 돼버린 리버럴 미디어
20세기 말 이후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미국 리버럴 미디어는 인종·지역·다양성에 기초한 ‘정치적 올바름(PC) 공장’이 돼버린 지 오래다. 리버럴 미디어의 대명사인 《뉴욕타임스》를 보면 일선 기자 대부분이 아시아·히스패닉·흑인·여성들이다. 이들은 소수자(minority) 인권과 다양성이란 명분으로 과거 주류이던 백인을 공격하거나 미국 역사를 파괴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처음에는 여기 공감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며 그 독선과 아집에 지치게 된다.
대통령 선거 막판인 11월 초 실시된 여론조사는 리버럴 미디어의 뒤틀린 자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카멀라 해리스 승리, 트럼프 낙선’이 그 최종 결론이었다. 국내 언론도 ‘해리스 대세론’을 열심히 따라 보도했다. 그러나 미국인 절대다수는 여기에 놀아나지 않았다. 리버럴 미디어의 엉터리 주장에 이미 면역력이 강해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깊고도 넓은 나라다. 도시를 기반으로 한 리버럴 미디어가 주장하는 PC에 반대하는 중도·보수세력의 ‘안티 PC’도 많다. 그들의 존재가 잘 안 보인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판단력에 기초해 살펴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답은 항상 현장과 자기 자신에게 있다. 남이 던져주는 어설픈 정보보다, 본인이 판단해서 얻은 현장의 단서 하나가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
리버럴 미디어의 ‘트럼프 악마화’는 트럼프가 2기 임기를 시작하는 2025년 1월 이후 한층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런 미국 리버럴 미디어를 맹종하다 보면 트럼프뿐 아니라 미국도 악으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수록 ‘현장의 목소리’에 기초한 스스로의 판단이 중요하다.
플랜 B의 시대
트럼프 2.0 시대는 ‘플랜 B 시대’다. 이미 트럼프 1.0 시대에 부분적으로 경험했지만, 플랜 A, 즉 기존 정책이나 1차 원안(原案)만으로는 대처하기 어렵다. 트럼프-김정은 직접 회담에서 보듯, 한반도 안보에 대한 기존의 정책들이 두 사람 사이 ‘딜(deal)’에 의해 한순간 떠내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이런 쓰나미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면, 기존의 약속·환경·상황이 아예 실종될 것에 대비한 플랜 B가 필수적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트럼프는 선도 악도 아니다. 미국 국민의 절대 지지하에 탄생한 대통령, 미국의 국익(國益)을 극대화하려는 지도자일 뿐이다. 다만 ‘세계경찰’을 표방해 온 기존의 미국 대통령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위화감(違和感)이 들 뿐이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악당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기존의 한반도 안보, 그리고 경제·외교는 ‘굳건한 한미동맹’이라는 플랜 A를 기반으로 해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정치관과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할 때, 트럼프 2.0 시대에도 과연 플랜 A가 기능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2023년 4월 한미 정상, 즉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내놓은 ‘워싱턴 선언’은 북한이 전쟁이나 핵도발을 감행할 경우 동맹국인 미국이 직접 나서 핵으로 대응하겠다는 선언이다. 이에 따라 핵협의그룹(NCG) 신설, 전략핵잠수함(SSBN) 등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인 한반도 배치 등이 이뤄졌다. 한미동맹에 근거한 플랜 A에 의하면 북한의 핵공격은 자멸(自滅)을 의미한다.
기로에 선 ‘워싱턴 선언’
문제는 트럼프 2.0 시대에도 ‘워싱턴 선언’이 지켜지겠느냐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이 ‘미국 의회가 보장하는 한미동맹’이라는 식의 보도에 익숙할 듯하다. 트럼프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려 해도 미 의회가 막을 것이란 주장이다. 오해이자 착각이다.
트럼프가 어떤 정책을 강행할 경우, 미국 의회도 대통령의 생각에 맞춰나갈 수 있다. ‘트리플 레드’는 트럼프가 성취해 낸 정치적 위업이기도 하다. 공화당 의원 가운데 트럼프에 반대할 사람은 극히 드물다. 트럼프 1.0 시대와 달리 트럼프 2.0 시대에 트럼프는 의회와의 협조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만이 아니라 미국 의회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한반도 안보와 미래를 남의 나라 의회에 맡기려는 생각 자체가 너무도 순진하다.
한국인 대부분이 걱정하는 것처럼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 ‘북핵 딜’이 이뤄지면 ‘워싱턴 선언’은 휴짓조각이 돼버릴 수 있다. 트럼프가 김정은과 다시 만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메리카 퍼스트’를 이해한다면, 두 사람이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데 방점을 둘 필요가 있다. 트럼프 스스로 해결사로 나설 의향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미국 대통령 가운데 어떤 국제문제에 해결사로 직접 나선 인물은 극히 드물다. 잘못될 경우 대통령 본인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정부 조직이나 전문가들을 통한 협상이 대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국무부는 ‘입’, 국방부는 ‘주먹’의 역할을 해왔다.
트럼프는 기존의 그 같은 해결 방식에 반대한다. 그것은 느리기도 하지만, 관료나 전문가가 협상하는 과정에서 미국 국익이 무시될 수 있다면서, 대통령 본인이 직접 나서 챙겨야 한다는 것이 트럼프의 생각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포퓰리즘 정치의 전형적인 모델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인은 트럼프의 그 같은 ‘정면대응 결의’에 박수를 보낸다.
트럼프, 한국 패싱하고 김정은과 합의할 수도
트럼프의 상징이기도 한 ‘아메리카 퍼스트’는 트럼프 본인이 직접 나서 ‘미국 국익’을 실천·확장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른바 톱다운(top-down) 방식 리더십이다.
‘대통령보다 잘난 사람은 필요 없다’는 말은 11월 6일 이후 사실상 시작된 트럼프 2.0 시대 참모 인선의 기준이다. 자신을 지지해 줄 충복(忠僕), 팔다리만 필요할 뿐, 머리와 입은 본인이 맡겠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북핵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일사천리로 처리될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의 ‘팔방미인 뚜쟁이 외교’ 때문에 트럼프는 자신의 생각만 믿을 뿐 한국의 제안이나 조언을 멀리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대통령이 전임자 문재인과 다르다고 아무리 설득해 봤자 ‘그 밥에 그 나물’로 여길 것이다.
트럼프가 마음만 먹으면 트럼프-김정은 라인은 언제든지 다시 이어질 수 있다. 김정은이 어떤 메뉴를 준비할지 모르겠지만, 트럼프 입맛을 돋우는 식단이라면 아예 한국을 논외로 제쳐놓고 진행될 가능성도 높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변방의 변수(變數)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 푸틴을 상대로 한 협상이 트럼프의 주된 메뉴가 될 것이다. 2400여 년 전 아테네가 작은 섬의 도시국가 멜로스(Melos)를 전멸시킬 당시 던진 말은 우크라이나 해법의 모범답안이 될 수 있다.
‘강자(强者)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멋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약자(弱者)는 그들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The strong do what they can, and the weak suffer what they must).’
딜의 기본이지만, 변수가 많을수록 결론을 내기 어려워진다. 핵심 당사자끼리의 신속한 결정이 딜의 요체(要諦)다. 결과가 어떻게 내려지는지에 따라 생사(生死)가 갈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딜의 당사자는 자신이 중시하는 결론에 충실할 뿐, 타인은 안중에도 없다.
‘트럼프 취급 설명서’
11월 6일 이후 나타난 변화와 상황을 고려할 때, 한미동맹에 기초한 플랜 A는 트럼프 2.0에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플랜 B가 있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지금 한국 정부에 플랜 B가 있기나 한지 의문이다. ‘트리플 레드’를 기반으로 한 ‘절대 1강 트럼프 2.0’에 어울릴 플랜 B는 무엇일까? 이웃 일본의 움직임을 보면 한반도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플랜 B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는 트럼프 1.0 당시 미국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친구로 통했다. 트럼프 본인도 그렇겠지만, 현재 일본인 대부분은 세상을 떠난 ‘아베 레거시’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베는 2016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지 9일 만에 뉴욕 트럼프 타워를 공식 방문, 당시 트럼프 당선자와 만난 최초의 외국 정상이 됐다. 아직 트럼프가 대통령으로서 공식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이 ‘무례한 방문’을 계기로 두 사람 간의 끈끈한 우정이 시작됐다.
아베가 남긴 외교 레거시 덕분이지만, 트럼프 2.0 시대가 열리자마자 일본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 당선 확정 이틀 뒤, 일본 외무성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에게 ‘트럼프 취급 설명서(トランプ取扱説明書)’라는 제목의 긴급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아베가 축적해 놓은 트럼프와의 사교법(社交法)이 주된 내용이다. 이 프레젠테이션은 주미 일본 대사관 관계자, 트럼프-아베 정상회담 당시 통역을 했던 일본 외교관의 체험과 조언에 바탕을 두었다.
‘트럼프 취급 설명서’의 핵심은 ‘강의식 설교가 아니라 짧게 말하고, 핵심을 얘기하되 주의·주장이 아닌 실질적인 득실(得失)을 염두에 둔 언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참모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 하에 즉석 결정을 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어가 있다.
이시바, 트럼프와 케미는 안 맞지만…
트럼프는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사람이다. 실내형인 애연가·애주가에 비해 실외형 취미에 관심이 많다는 의미다. 필자가 아는 한 이시바는 먹다 남은 만두를 양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먹을 ‘20세기형 인물’이다. 근검절약이라는 일본적 가치에 충실한 서민형 정치인이다. 트럼프나 아베의 눈으로 보면 ‘촌놈 정치인’의 전형(典型)이다.
트럼프와 이시바는 흔히 하는 말로 ‘케미’가 맞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는 입버릇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된다(~しなければならない)’는 표현을 자주 쓴다. 강한 책임감과 결의의 발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보면 ‘꽉 막힌 책상머리 범생이’ 같은 느낌을 준다.
이시바의 캐릭터는 융통성 있고, 적당히 넘어가면서 웃음을 만드는 아베의 방임형 캐릭터와는 다르다. 하지만 트럼프 2.0에 대한 이시바, 아니 일본의 준비는 치밀하고 정교하다. 개인적 케미의 문제가 아니라 국사(國事)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트럼프 1.0 당시 미국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했던 몇 안 되는 서방 국가 중 하나다. 트럼프가 요구하는 대로 주일미군 주둔 비용을 대폭 늘렸고, 방위비도 국내총생산의 2% 이상으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미일 정상회담이 이뤄지면,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할 것이다. ‘반미(反美)면 좀 어떠냐’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낯간지럽고도 굴욕적인 행동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 미일동맹을 기초로 한 플랜 A의 효능과 가치를 믿고 있고, 믿으려 한다.
트럼프, 김정은·푸틴 이용해 중국 견제하려 할 것
한국 신문·방송을 보면,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만남에 올인할 것처럼 보인다. 착각이고 과장일 뿐이다. 북핵은 트럼프 군사·외교정책 우선 순위 다섯 손가락 밖에 있다.
트럼프건 바이든이건, 2028년 대선에서 당선될 차기 대통령이건 간에, 미국 대통령에게 가장 큰 군사·외교·경제 현안은 중국이다. 크게 볼 때 북핵 문제는 중국의 하부 변수에 불과하다.
김정은이 미국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시진핑(習近平)이 불쾌해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미북관계가 좋아질 경우 중국에 대한 김정은의 자세도 급변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김정은이 지금 반미(反美) 노선을 걷고 있는 것에서 표변해 반중(反中) 정서를 표출할 수도 있다. 트럼프의 입장에서 김정은은 미국이 중국에 맞서는 데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시진핑으로서는 푸틴-김정은 밀월(蜜月) 관계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은 김정은을 중국 영향권 내에 ‘영원히’ 묶어두고 싶어 한다. 북한이 미국·일본에 맞서는 중국의 방패나 창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미국이나 러시아로 돌아다닐수록 시진핑에게는 불리하다.
트럼프가 푸틴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인 것도 대중(對中) 견제정책의 연장선에서 판단해야 한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분명히 반인륜적·반문명적이다. 그러나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국(大國) 러시아의 푸틴을 달래면서 중국 견제에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젤렌스키의 생각만 따라가다가는 미국의 국익이 손상될 수도 있다.
트럼프에게는 세습 독재자 김정은이건 전범(戰犯) 푸틴이건 누구나 딜의 상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시진핑은 ‘결코’ 딜의 대상이 아니다. 미국과 무엇을 주고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제압하겠다는 것이 시진핑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일본도 중국을 현실적·직접적 위협이라고 보고 있다. 아니,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미국보다도 더 강하다. 트럼프와 일본의 공동이익은 반중(反中)이란 공통분모에서 출발한다.
일본은 이미 플랜 B 가동 중
흔히 일본인들은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가 다르다고 말한다. 겉보기에는 상냥하고 밝지만, 속마음까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일본에 1년 이상 살아도 마음을 트고 지낼 만한 일본인 친구 하나 만나기 어렵다. 만난 지 1시간이면 마음을 여는 친구가 될 수 있는 한국인들과는 다르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미일동맹에 바탕을 둔 플랜 A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플랜 A가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일본은 빠르면 11월 중으로 트럼프-이시바 회담에 앞서 이시바-시진핑 회담을 성사시킬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미국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만, 미국의 사실상 적인 중국과의 관계도 결코 경시하지 않는다. 일본은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플레이어(Player)’로 참가한 전력(前歷)을 갖고 있다. 일본은 국제정치 속 변수(變數)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상수(常數)로 활약해 왔다. 미일관계가 한계에 달할 경우, 언제라도 중국과 손을 잡을 수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에게 미일동맹이라는 플랜 A는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 이념이거나 목적은 아니다.
일본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플랜 B를 ‘이미’ 가동하고 있다. 트럼프 1.0 시대부터 동맹에 준하는 다양한 군사·외교관계를 확장해 왔다. 나토 및 동남아 국가들과의 군사협력이 그 예다.
한국에서는 일본과 합동군사훈련이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법석을 떨지만, 일본은 호주·뉴질랜드, 이탈리아·영국·프랑스·독일·스웨덴·폴란드, 인도·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 등과 정기적으로 합동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과의 개별적 군사협력 방안에 대한 뉴스도 거의 매주 나오고 있다.
이시바는 평소부터 ‘아시아판 나토’ 결성과 괌 미군기지 내 자위대 상주를 주장해 왔다. 실현 가능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본은 아시아 전체를 염두에 둔 반중 군사·외교·안보 구조를 만들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일본 120억 달러, 한국은 3억 달러 지원
반면에 한국은 여전히 플랜 A에 바탕을 둔 북핵 대응과 한미동맹에만 매달리고 있다. 1만 명 이상의 북한군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립 서비스로 일관하고 있다. 아마 대다수 국민들은 물론 유력 정치인들마저 ‘왜 우리가 머나먼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야 하느냐?’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전쟁에 개입하고 싶어 하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유럽은 물론 일본도 자신이 어려워질 때에 대비한 ‘보험’으로 생각하고 우크라이나를 적극 돕고있다.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줄 수 있다는 것이 국제정치의 철칙이다.
일본은 나토와 함께하는 플랜 B라는 관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플랜 A, 즉 한미동맹 하나에 모든 것을 걸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강 건너 불’로 여기고 있다.
2024년 초 기준으로 일본은 120억 달러의 지원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미국은 800억 달러, 독일은 250억 달러를 제공했다. 한국이 제공한 액수는 3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G7에 버금가는 G8, G9 후보로 꼽히는 나라지만, 우크라이나에는 개발도상국 수준의 지원만 하고 있는 것이다.
종전 후 우크라이나 복구사업에는 약 6000억 달러가 투자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첨단 무기 시험장이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21세기 들어 최대 규모의 글로벌 건설 붐이 일어날 것이다. 유럽은 물론 일본도 달려들 것이다.
현재 일본은 영국·이탈리아와 함께 최첨단 전투기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일본은 2030년대 이후 한 대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첨단 전투기를 유럽과 전 세계에 판매할 예정이다. 현행 일본법에 상살용 무기 수출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공동 생산한 전투기를 영국·이탈리아를 통해 우회 판매하면 된다. 꼼수처럼 여겨지겠지만 말이다.
일본이 유럽을 상대로 전개하고 있는 플랜 B는 단순히 외교·안보 측면에서 플랜 A의 대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확장 수단이기도 하다.
한국의 플랜 B는 무엇인가
바이든은 재임 중 세 번이나 ‘대만 유사시 미군 개입’을 천명했다. 하지만 트럼프 2.0 시대에 들어서면서 바이든의 약속과 결의는 물거품이 돼가고 있다.
현재 대만은 나름대로의 플랜 B, 아니 플랜 C, 플랜 D 준비로 날밤을 새우고 있다. 워싱턴에서 대만 로비가 줄을 잇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국의 플랜 B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워싱턴 선언’ 하나에 매달려왔지만, 만약 트럼프가 이를 무시할 경우의 플랜 B는 무엇인가? 좋든 싫든, 트럼프를 악마로 보든 천사로 보든, 강대국 아테네에 속절없이 짓밟힌 멜로스의 처지는 우크라이나, 대만, 그리고 한국의 현실과 오버랩되고 있다.⊙
선거 결과를 대하면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어떻게 트럼프가 승리했는지, 그것도 압승을 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한국 신문·방송 대부분은 ‘트럼프=거짓말과 인종차별의 화신(化身)’처럼 보도했다. 트럼프를 지지하거나 찬성하는 듯한 보도 자체가 정의에 반하는 것 같은 분위기도 팽배했다. 미국 내 실제 상황도 모르고 편향적인 리버럴 미디어만 따라가다가, 2016년에 이어 또다시 ‘오보(誤報)’를 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나 CNN 같은 리버럴 미디어만 보면, 트럼프는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할 ‘악(惡)’ 그 자체다. 그러나 트럼프는 악마도 천사도 아니다. 주장과 표현이 강하고 원초적일 뿐, 크게 보면 다른 정치가와 오십보백보다. 선악·도덕·윤리 같은 잣대로 쉽게 평가할 정치인이 아니다.
‘PC 공장’ 돼버린 리버럴 미디어
20세기 말 이후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미국 리버럴 미디어는 인종·지역·다양성에 기초한 ‘정치적 올바름(PC) 공장’이 돼버린 지 오래다. 리버럴 미디어의 대명사인 《뉴욕타임스》를 보면 일선 기자 대부분이 아시아·히스패닉·흑인·여성들이다. 이들은 소수자(minority) 인권과 다양성이란 명분으로 과거 주류이던 백인을 공격하거나 미국 역사를 파괴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처음에는 여기 공감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며 그 독선과 아집에 지치게 된다.
대통령 선거 막판인 11월 초 실시된 여론조사는 리버럴 미디어의 뒤틀린 자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카멀라 해리스 승리, 트럼프 낙선’이 그 최종 결론이었다. 국내 언론도 ‘해리스 대세론’을 열심히 따라 보도했다. 그러나 미국인 절대다수는 여기에 놀아나지 않았다. 리버럴 미디어의 엉터리 주장에 이미 면역력이 강해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깊고도 넓은 나라다. 도시를 기반으로 한 리버럴 미디어가 주장하는 PC에 반대하는 중도·보수세력의 ‘안티 PC’도 많다. 그들의 존재가 잘 안 보인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판단력에 기초해 살펴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답은 항상 현장과 자기 자신에게 있다. 남이 던져주는 어설픈 정보보다, 본인이 판단해서 얻은 현장의 단서 하나가 해결의 출발점이 된다.
리버럴 미디어의 ‘트럼프 악마화’는 트럼프가 2기 임기를 시작하는 2025년 1월 이후 한층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런 미국 리버럴 미디어를 맹종하다 보면 트럼프뿐 아니라 미국도 악으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수록 ‘현장의 목소리’에 기초한 스스로의 판단이 중요하다.
플랜 B의 시대
트럼프 2.0 시대는 ‘플랜 B 시대’다. 이미 트럼프 1.0 시대에 부분적으로 경험했지만, 플랜 A, 즉 기존 정책이나 1차 원안(原案)만으로는 대처하기 어렵다. 트럼프-김정은 직접 회담에서 보듯, 한반도 안보에 대한 기존의 정책들이 두 사람 사이 ‘딜(deal)’에 의해 한순간 떠내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이런 쓰나미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면, 기존의 약속·환경·상황이 아예 실종될 것에 대비한 플랜 B가 필수적이다.
앞서 강조했듯이, 트럼프는 선도 악도 아니다. 미국 국민의 절대 지지하에 탄생한 대통령, 미국의 국익(國益)을 극대화하려는 지도자일 뿐이다. 다만 ‘세계경찰’을 표방해 온 기존의 미국 대통령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위화감(違和感)이 들 뿐이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악당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기존의 한반도 안보, 그리고 경제·외교는 ‘굳건한 한미동맹’이라는 플랜 A를 기반으로 해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정치관과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할 때, 트럼프 2.0 시대에도 과연 플랜 A가 기능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2023년 4월 한미 정상, 즉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내놓은 ‘워싱턴 선언’은 북한이 전쟁이나 핵도발을 감행할 경우 동맹국인 미국이 직접 나서 핵으로 대응하겠다는 선언이다. 이에 따라 핵협의그룹(NCG) 신설, 전략핵잠수함(SSBN) 등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인 한반도 배치 등이 이뤄졌다. 한미동맹에 근거한 플랜 A에 의하면 북한의 핵공격은 자멸(自滅)을 의미한다.
기로에 선 ‘워싱턴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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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당선으로 2023년 4월 윤석열-바이든 대통령이 내놓은 ‘워싱턴 선언’은 휴짓조각이 될 위기에 처했다. 사진=연합뉴스 |
트럼프가 어떤 정책을 강행할 경우, 미국 의회도 대통령의 생각에 맞춰나갈 수 있다. ‘트리플 레드’는 트럼프가 성취해 낸 정치적 위업이기도 하다. 공화당 의원 가운데 트럼프에 반대할 사람은 극히 드물다. 트럼프 1.0 시대와 달리 트럼프 2.0 시대에 트럼프는 의회와의 협조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만이 아니라 미국 의회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한반도 안보와 미래를 남의 나라 의회에 맡기려는 생각 자체가 너무도 순진하다.
한국인 대부분이 걱정하는 것처럼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 ‘북핵 딜’이 이뤄지면 ‘워싱턴 선언’은 휴짓조각이 돼버릴 수 있다. 트럼프가 김정은과 다시 만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메리카 퍼스트’를 이해한다면, 두 사람이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데 방점을 둘 필요가 있다. 트럼프 스스로 해결사로 나설 의향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미국 대통령 가운데 어떤 국제문제에 해결사로 직접 나선 인물은 극히 드물다. 잘못될 경우 대통령 본인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정부 조직이나 전문가들을 통한 협상이 대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국무부는 ‘입’, 국방부는 ‘주먹’의 역할을 해왔다.
트럼프는 기존의 그 같은 해결 방식에 반대한다. 그것은 느리기도 하지만, 관료나 전문가가 협상하는 과정에서 미국 국익이 무시될 수 있다면서, 대통령 본인이 직접 나서 챙겨야 한다는 것이 트럼프의 생각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포퓰리즘 정치의 전형적인 모델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인은 트럼프의 그 같은 ‘정면대응 결의’에 박수를 보낸다.
트럼프, 한국 패싱하고 김정은과 합의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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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3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과 판문점에서 만났지만, 주로 김정은과의 만남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진=연합뉴스 |
‘대통령보다 잘난 사람은 필요 없다’는 말은 11월 6일 이후 사실상 시작된 트럼프 2.0 시대 참모 인선의 기준이다. 자신을 지지해 줄 충복(忠僕), 팔다리만 필요할 뿐, 머리와 입은 본인이 맡겠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북핵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일사천리로 처리될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의 ‘팔방미인 뚜쟁이 외교’ 때문에 트럼프는 자신의 생각만 믿을 뿐 한국의 제안이나 조언을 멀리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대통령이 전임자 문재인과 다르다고 아무리 설득해 봤자 ‘그 밥에 그 나물’로 여길 것이다.
트럼프가 마음만 먹으면 트럼프-김정은 라인은 언제든지 다시 이어질 수 있다. 김정은이 어떤 메뉴를 준비할지 모르겠지만, 트럼프 입맛을 돋우는 식단이라면 아예 한국을 논외로 제쳐놓고 진행될 가능성도 높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변방의 변수(變數)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 푸틴을 상대로 한 협상이 트럼프의 주된 메뉴가 될 것이다. 2400여 년 전 아테네가 작은 섬의 도시국가 멜로스(Melos)를 전멸시킬 당시 던진 말은 우크라이나 해법의 모범답안이 될 수 있다.
‘강자(强者)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멋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약자(弱者)는 그들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The strong do what they can, and the weak suffer what they must).’
딜의 기본이지만, 변수가 많을수록 결론을 내기 어려워진다. 핵심 당사자끼리의 신속한 결정이 딜의 요체(要諦)다. 결과가 어떻게 내려지는지에 따라 생사(生死)가 갈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딜의 당사자는 자신이 중시하는 결론에 충실할 뿐, 타인은 안중에도 없다.
‘트럼프 취급 설명서’
11월 6일 이후 나타난 변화와 상황을 고려할 때, 한미동맹에 기초한 플랜 A는 트럼프 2.0에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플랜 B가 있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지금 한국 정부에 플랜 B가 있기나 한지 의문이다. ‘트리플 레드’를 기반으로 한 ‘절대 1강 트럼프 2.0’에 어울릴 플랜 B는 무엇일까? 이웃 일본의 움직임을 보면 한반도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플랜 B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는 트럼프 1.0 당시 미국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친구로 통했다. 트럼프 본인도 그렇겠지만, 현재 일본인 대부분은 세상을 떠난 ‘아베 레거시’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베는 2016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지 9일 만에 뉴욕 트럼프 타워를 공식 방문, 당시 트럼프 당선자와 만난 최초의 외국 정상이 됐다. 아직 트럼프가 대통령으로서 공식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이 ‘무례한 방문’을 계기로 두 사람 간의 끈끈한 우정이 시작됐다.
아베가 남긴 외교 레거시 덕분이지만, 트럼프 2.0 시대가 열리자마자 일본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 당선 확정 이틀 뒤, 일본 외무성은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에게 ‘트럼프 취급 설명서(トランプ取扱説明書)’라는 제목의 긴급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아베가 축적해 놓은 트럼프와의 사교법(社交法)이 주된 내용이다. 이 프레젠테이션은 주미 일본 대사관 관계자, 트럼프-아베 정상회담 당시 통역을 했던 일본 외교관의 체험과 조언에 바탕을 두었다.
‘트럼프 취급 설명서’의 핵심은 ‘강의식 설교가 아니라 짧게 말하고, 핵심을 얘기하되 주의·주장이 아닌 실질적인 득실(得失)을 염두에 둔 언행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참모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 하에 즉석 결정을 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어가 있다.
이시바, 트럼프와 케미는 안 맞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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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전 총리(왼쪽)와 이시바 현 총리는 출신 성분만큼이나 성격도 다르다. 사진=AP/뉴시스 |
트럼프와 이시바는 흔히 하는 말로 ‘케미’가 맞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는 입버릇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된다(~しなければならない)’는 표현을 자주 쓴다. 강한 책임감과 결의의 발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보면 ‘꽉 막힌 책상머리 범생이’ 같은 느낌을 준다.
이시바의 캐릭터는 융통성 있고, 적당히 넘어가면서 웃음을 만드는 아베의 방임형 캐릭터와는 다르다. 하지만 트럼프 2.0에 대한 이시바, 아니 일본의 준비는 치밀하고 정교하다. 개인적 케미의 문제가 아니라 국사(國事)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트럼프 1.0 당시 미국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했던 몇 안 되는 서방 국가 중 하나다. 트럼프가 요구하는 대로 주일미군 주둔 비용을 대폭 늘렸고, 방위비도 국내총생산의 2% 이상으로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미일 정상회담이 이뤄지면,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할 것이다. ‘반미(反美)면 좀 어떠냐’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낯간지럽고도 굴욕적인 행동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 미일동맹을 기초로 한 플랜 A의 효능과 가치를 믿고 있고, 믿으려 한다.
트럼프, 김정은·푸틴 이용해 중국 견제하려 할 것
한국 신문·방송을 보면,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만남에 올인할 것처럼 보인다. 착각이고 과장일 뿐이다. 북핵은 트럼프 군사·외교정책 우선 순위 다섯 손가락 밖에 있다.
트럼프건 바이든이건, 2028년 대선에서 당선될 차기 대통령이건 간에, 미국 대통령에게 가장 큰 군사·외교·경제 현안은 중국이다. 크게 볼 때 북핵 문제는 중국의 하부 변수에 불과하다.
김정은이 미국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시진핑(習近平)이 불쾌해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미북관계가 좋아질 경우 중국에 대한 김정은의 자세도 급변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김정은이 지금 반미(反美) 노선을 걷고 있는 것에서 표변해 반중(反中) 정서를 표출할 수도 있다. 트럼프의 입장에서 김정은은 미국이 중국에 맞서는 데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시진핑으로서는 푸틴-김정은 밀월(蜜月) 관계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은 김정은을 중국 영향권 내에 ‘영원히’ 묶어두고 싶어 한다. 북한이 미국·일본에 맞서는 중국의 방패나 창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미국이나 러시아로 돌아다닐수록 시진핑에게는 불리하다.
트럼프가 푸틴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인 것도 대중(對中) 견제정책의 연장선에서 판단해야 한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분명히 반인륜적·반문명적이다. 그러나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국(大國) 러시아의 푸틴을 달래면서 중국 견제에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젤렌스키의 생각만 따라가다가는 미국의 국익이 손상될 수도 있다.
트럼프에게는 세습 독재자 김정은이건 전범(戰犯) 푸틴이건 누구나 딜의 상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시진핑은 ‘결코’ 딜의 대상이 아니다. 미국과 무엇을 주고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제압하겠다는 것이 시진핑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일본도 중국을 현실적·직접적 위협이라고 보고 있다. 아니,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미국보다도 더 강하다. 트럼프와 일본의 공동이익은 반중(反中)이란 공통분모에서 출발한다.
일본은 이미 플랜 B 가동 중
흔히 일본인들은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가 다르다고 말한다. 겉보기에는 상냥하고 밝지만, 속마음까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일본에 1년 이상 살아도 마음을 트고 지낼 만한 일본인 친구 하나 만나기 어렵다. 만난 지 1시간이면 마음을 여는 친구가 될 수 있는 한국인들과는 다르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미일동맹에 바탕을 둔 플랜 A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플랜 A가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일본은 빠르면 11월 중으로 트럼프-이시바 회담에 앞서 이시바-시진핑 회담을 성사시킬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미국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만, 미국의 사실상 적인 중국과의 관계도 결코 경시하지 않는다. 일본은 20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플레이어(Player)’로 참가한 전력(前歷)을 갖고 있다. 일본은 국제정치 속 변수(變數)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상수(常數)로 활약해 왔다. 미일관계가 한계에 달할 경우, 언제라도 중국과 손을 잡을 수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에게 미일동맹이라는 플랜 A는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 이념이거나 목적은 아니다.
일본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플랜 B를 ‘이미’ 가동하고 있다. 트럼프 1.0 시대부터 동맹에 준하는 다양한 군사·외교관계를 확장해 왔다. 나토 및 동남아 국가들과의 군사협력이 그 예다.
한국에서는 일본과 합동군사훈련이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법석을 떨지만, 일본은 호주·뉴질랜드, 이탈리아·영국·프랑스·독일·스웨덴·폴란드, 인도·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 등과 정기적으로 합동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과의 개별적 군사협력 방안에 대한 뉴스도 거의 매주 나오고 있다.
이시바는 평소부터 ‘아시아판 나토’ 결성과 괌 미군기지 내 자위대 상주를 주장해 왔다. 실현 가능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본은 아시아 전체를 염두에 둔 반중 군사·외교·안보 구조를 만들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일본 120억 달러, 한국은 3억 달러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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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은 트럼프가 당선된 직후인 11월 10일 ‘트럼프 2기 행정부 대외정책과 한반도’ 간담회를 열었다. 사진=조선DB |
당연히 전쟁에 개입하고 싶어 하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유럽은 물론 일본도 자신이 어려워질 때에 대비한 ‘보험’으로 생각하고 우크라이나를 적극 돕고있다.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줄 수 있다는 것이 국제정치의 철칙이다.
일본은 나토와 함께하는 플랜 B라는 관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플랜 A, 즉 한미동맹 하나에 모든 것을 걸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강 건너 불’로 여기고 있다.
2024년 초 기준으로 일본은 120억 달러의 지원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미국은 800억 달러, 독일은 250억 달러를 제공했다. 한국이 제공한 액수는 3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G7에 버금가는 G8, G9 후보로 꼽히는 나라지만, 우크라이나에는 개발도상국 수준의 지원만 하고 있는 것이다.
종전 후 우크라이나 복구사업에는 약 6000억 달러가 투자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첨단 무기 시험장이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21세기 들어 최대 규모의 글로벌 건설 붐이 일어날 것이다. 유럽은 물론 일본도 달려들 것이다.
현재 일본은 영국·이탈리아와 함께 최첨단 전투기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일본은 2030년대 이후 한 대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첨단 전투기를 유럽과 전 세계에 판매할 예정이다. 현행 일본법에 상살용 무기 수출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공동 생산한 전투기를 영국·이탈리아를 통해 우회 판매하면 된다. 꼼수처럼 여겨지겠지만 말이다.
일본이 유럽을 상대로 전개하고 있는 플랜 B는 단순히 외교·안보 측면에서 플랜 A의 대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확장 수단이기도 하다.
한국의 플랜 B는 무엇인가
바이든은 재임 중 세 번이나 ‘대만 유사시 미군 개입’을 천명했다. 하지만 트럼프 2.0 시대에 들어서면서 바이든의 약속과 결의는 물거품이 돼가고 있다.
현재 대만은 나름대로의 플랜 B, 아니 플랜 C, 플랜 D 준비로 날밤을 새우고 있다. 워싱턴에서 대만 로비가 줄을 잇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국의 플랜 B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워싱턴 선언’ 하나에 매달려왔지만, 만약 트럼프가 이를 무시할 경우의 플랜 B는 무엇인가? 좋든 싫든, 트럼프를 악마로 보든 천사로 보든, 강대국 아테네에 속절없이 짓밟힌 멜로스의 처지는 우크라이나, 대만, 그리고 한국의 현실과 오버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