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동행취재

중·고교 교사들과 통일 독일 현장에 가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통일 준비를 하는 것”

글 : 이하원  조선일보 외교담당 에디터  may2@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통일과나눔 주최 ‘2024 교사 독일 통일 연수’ 동행 취재
⊙ “지금부터 통일 비용 이야기를 해서 진을 뺄 필요 없다”(이은정 베를린자유대 교수)
⊙ “독일 통일은 자유 바라는 동독의 시민혁명으로 이루어져… 북한에도 자유의 바람 불어넣는 것이 중요”(베르너 페니히 교수)
⊙ 베를린 장벽 붕괴 시작된 본 홀머 슈트라세에는 당시 동독 주민들의 이동경로와 시간 표시한 표식 세워
⊙ 잡초 무성한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에선 대사 대리가 반바지 차림으로 이삿짐 옮겨

李河遠
1968년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 졸업 / 《조선일보》 워싱턴·도쿄 특파원, 국제부장, TV조선 정치부장·메인뉴스 앵커 역임. 現 《조선일보》 논설위원 / 저서 《남북한과 미국, 변화하는 3각관계》 《조용한 열정, 반기문》(공저) 《세계를 알려면 워싱턴을 읽어라》 《시진핑과 오바마》 《사무라이와 양키의 퀀텀점프》
드레스덴에서 마지막 날 일정을 마친 연수단. 사진=이하원
  2024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이사장 이영선)이 주최한 ‘2024 교사 독일 통일 연수’를 동행 취재했다. 이번 연수는 중·고등학교의 사회, 역사, 윤리 과목 교사들이 동서독 통일 과정과 통일 후 변화를 직접 체험하고, 교육 현장에서 활용할 목적으로 기획됐다.
 
  이 프로그램에는 318명의 지원자 중에서 연수 후 수업 활용 계획을 바탕으로 선발된 20명의 교사가 참여했다. 선발된 교사들은 7월 28일 인천에서 사전교육을 받은 후 다음 날 출발, 8월 7일까지 9박 11일 동안 독일 전역의 통일 관련 역사 현장을 탐방했다. 동서독 장벽이 처음 무너진 베를린, 미국·영국·소련이 전후 처리를 논의한 포츠담, 동서독 장벽이 보존된 헬름슈타트 지역, 군사기지에서 관광지로 변모한 작센안할트 브로켄산, 동서독 단절을 막은 문화유산이 있는 바이마르, 동독 시민혁명의 발원지 라이프치히, 통일 후 상전벽해로 변한 공업도시 드레스덴이 주요 연수 대상이었다.
 
 
  아직도 서울–베를린 직항 없어
 
  연수의 시작은 인천공항에 인접한 송도에서의 사전교육이었다. 이영선 통일과나눔 이사장이 직접 교사들에게 이번 연수의 목적과 의의를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교사들이 독일 통일의 경험을 한국 통일 교육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달라”고 했다. 그는 학생들이 통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적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7월 29일 인천공항을 출발한 루프트한자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까지 약 14시간을 날아갔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상공을 통과할 수 없게 돼 우회 항로를 이용하다 보니 전쟁 전보다 약 2시간이 더 걸렸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 연결되는 루프트한자 비행기는 약 1시간 이상 늦게 출발했다. 결국 연수단이 베를린의 호텔에 체크인한 시각은 7월 30일 새벽 1시를 넘겼다. 한국과 독일은 수교한 지 141년이 됐지만, 아직도 서울-베를린 직항이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는 교사들이 많았다.
 
  7월 30일 독일 현지에서의 첫 일정은 베를린자유대학교 이은정 한국학연구소장의 강의로 시작됐다. 베를린자유대는 통일 전 서독을 상징하는 대학으로, 현재는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이은정 교수는 1984년 서독으로 유학, 괴팅겐대학에서 정치사상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베를린자유대에 부임한 후 역사문화학부 학장, 동아시아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어로 된 《독일 통일 총서》를 펴내는 데 기여해 201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2016년 독일 베를린학술원 정회원으로 선출됨으로써 학자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 프로이센왕립아카데미로 시작해 3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베를린학술원에서 아시아 국가의 학자가 정회원으로 선출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통일을 어렵게 여기지 말아야”
 
  이은정 교수는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 설명하며 독일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독일의 분단과 통일 과정 강의에서 “통일을 어렵게 여기지 마라”고 했다. 그는 “통일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세요. 학생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통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 ‘한국은 내가 가서 살고 싶은 나라다’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독일이 통일될 때처럼 북한 사람들이 남한을 선택하게 하면 통일이 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강의 후 연수에 참석한 교사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진요한 충남 삼성고 교사)
 
  “법치(法治)국가의 원칙에 맞춰서 해야 한다. 한국에서 탈북민 학교를 짓는데 지역 주민들이 반대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가 탈북자와 그 아이들을 보듬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로 오는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북한 인권을 얘기하려면 무엇보다 탈북민들이 잘 정착하도록 해야 한다.”
 

  ― 한국의 젊은 층이 잘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통일 준비고, 북한 주민들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박남주 서울 명일중 교사)
 
  “어떻게 통일이 올지 모르기에 순간순간의 판단이 중요하다. 통일과 관련된 변화가 왔을 때 어떻게 잘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독일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은 ‘독일이 역사에서 죄를 많이 지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했다.”
 
  이은정 교수는 이런 얘기도 했다.
 
  “1984년 독일에 유학 와 보니 동독에 대해서는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일반 시민에게 동독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내가 국경을 보여달라고 졸라야 했다. 그러나 통일이 닥쳤을 때 아무도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다. 통일이 닥치면 하게 돼 있다. 지금부터 통일 비용 이야기를 해서 진을 뺄 필요가 없다.”
 
 
  베를린 장벽 붕괴 시작된 본 홀머 슈트라세
 
베를린 장벽이 처음 무너진 본 홀머 슈트라세. 장벽 붕괴 당시의 사진들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전시해 놓고 있다.
  이 교수의 강의가 끝난 후 연수단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처음 무너진 본 홀머 슈트라세를 찾았다.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독일 통일과 동독 민주화의 중요성을 기리는 역사적 장소다. 이곳은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가 국경을 개방한 후,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이 서베를린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실질적으로 경험한 첫 장소다. 독일 정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순간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시간대별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표지판을 설치해두었다. 이 표지들은 당시 동독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이동한 경로와 그들이 통과했던 순간을 기록하며, 그날의 역사적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연수단은 이날 서독으로 행진하는 사람들처럼 비슷한 자세를 취하며 통일의 현장을 느끼려고 했다.
 
  연수단은 베를린의 주독일 대사관도 방문했다. 교사들을 맞이한 임상범 주독일 대사는 특강을 열어 “독일은 EU(유럽연합) 5억 인구 중 16%, EU GDP(국내총생산)의 25%를 차지하는 나라인데, 분단을 먼저 극복한 나라로서 대한민국의 통일 비전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원재 통일관은 “동서독의 심리적 격차가 지속하면서 여전히 동독 지역에서 ‘2등 국민’이라는 말이 나오는 현상을 극복하는 일이 과제”라고 했다.
 
  연수 이틀째인 7월 31일 이은정 교수와 함께 근무하는 베르너 페니히 교수의 특강이 있었다. 이 교수와 《독일 통일 총서》를 집필한 페니히 교수는 ‘자유’와 관련된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일 통일은 자유를 바라는 동독의 시민혁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서독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 방송 등을 통해 많은 정보를 동독에 보냈습니다. 북한에도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수단은 이날 오후, 스파이들이 교환되었던 그로니케 다리를 방문해 분단과 통일의 현장을 체험했다. 이어 미국, 소련, 영국의 지도자들이 2차 세계대전 종전 방안을 논의했던 포츠담 회담이 열린 시칠리엔 호프 궁전도 방문했다. 2000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을 방문한 기자는 휴대폰 QR 코드를 활용, 한국어 안내를 들어가며 역사적인 장소를 둘러보았다. 한국어 안내는 2015년 김재신 당시 주독일 대사의 주도로 이뤄졌다고 한다.
 
 
  국경박물관과 크베들린부르크
 
헬름슈타트 지역의 동서독 옛 접경 지역 모습. 당시의 모습을 일부 보존해놓았다.
  8월 1일, 교사들은 독일 동서독 국경 지역인 니더작센주 마리엔본 국경박물관에 이어 동서독 시절 철조망과 초소 등이 그대로 보존된 헬름슈타트 지역의 훼텐슬레벤 마을을 방문했다. 과거 동서독 접경 지역에 위치한 이 마을은 비슷한 배경의 경기도 파주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곳이다. 30도가 넘는 땡볕 아래, 교사들은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가며 당시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할 때 겪었던 어려움과 위험을 직접 체험했다.
 
  박남주 교사는 “동독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 이중, 삼중 벽을 만들어 통제했지만, 이를 넘어 탈출하려는 동독인들의 의지와 절박함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울산 신언중 송건우 교사는 “독일 연수를 통해 접경 지역이 연결 공간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는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업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이후 교사들은 작센안할트주의 크베들린부르크로 이동했다. 독일 ‘로맨틱 가도’ 중 하나로 독일 도시의 매력을 잘 간직하고 있는 크베들린부르크는 2만5000명 규모의 소도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와 성곽 등 중세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크베들린부르크는 동독 시절에는 부유층 주택이 많다는 이유로 철거될 위기에 처했었으나, 현재는 독일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대구 함지고 강신재 교사는 “하루속히 통일돼야 북한의 문화유산이 제대로 보호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 배운 지식만으로 교육해왔는데 앞으로는 생생하게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김진범(김포시 양곡고) 교사는 “학교에 탈북 학생들이 재학 중인데, 통일 후 어떻게 북한의 주요 유산을 보호하고 활용할지에 대해 얘기해보겠다”고 했다.
 
 
  군사기지에서 관광지로 변모한 브로켄산
 
브로켄산 증기 기관차역에서. 브로켄산은 분단 시절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첩보 시설이 있던 곳이다.
  연수 6일 차인 8월 2일 연수단이 방문한 작센안할트주 브로켄산은 그동안 버스만 타고 다닌 연수단에게 증기 기관차를 타는 색다른 추억과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이다.
 
  브로켄산은 독일의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명승지였으나 분단 후 동독이 소련과 함께 서독은 물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를 감청하는 기지로 활용됐다. 통일 후엔 독일 비밀경찰 슈타지 시설이 있던 곳은 박물관으로, 송신탑은 호텔로 바뀌었다. 이날 1141m의 브로켄산을 증기 기관차를 타고 올라간 교사들은 동독의 중요한 군사기지가 식물 1500종을 관찰하며 하이킹을 즐기는 생태 관광 공원으로 바뀐 데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독일이 통일된 후 그랬던 것처럼, 북한의 군사기지도 하루속히 한국의 관광지로 변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수 참가자들은 동독의 최전방 군사 첩보 시설이 통일 후 관광지로 변하는 과정을 안내한 프리타트 크놀레 전 니더작센주 국립공원 관광홍보국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놀레 전 국장은 “슈타지가 1980년대 중반 이곳에 군사기지를 지었을 때, 동서독이 몇 년 후에 통일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교사들은 분단 시기 냉전의 상징이 통일 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생태공원으로 재탄생한 데 대해 주목했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중학교 강미성 교사는 “휴전선 인근 학교여서 통일 관련 DMZ 개발에 관심이 많다”며 “개학 후 통일 교육을 할 때 학생들과 브로켄산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강원도 철원군 김화여자중학교 최춘식 교사는 “증기 기관차가 동독의 군사기지였던 곳을 올라갈 때 분단으로 ‘철마’가 멈춘 월정리역을 떠올렸다”며 “앞으로 브로켄산역과 비교해가며 수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작된 바이마르
 
  브로켄산을 내려온 연수단은 저녁 무렵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바이마르는 괴테와 쉴러 등 독일 문학의 거장들이 활동했던 곳으로, 1919년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한 도시다. 바이마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우하우스 건축과 전통문화를 보존하며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짐을 풀고 바이마르 중심지로 나가자 유서 깊은 곳에서 한여름 저녁의 정취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바우하우스박물관은 바우하우스대학에서 약간 떨어져 국민극장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제국이 붕괴하면서 탄생했다. 1918년 11월 9일 킬 군항에서 수병(水兵)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해버렸다. 이때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득세했고 1919년 바이마르에서 새 헌법이 제정되며 공식적으로 공화국이 출범했다. 8시간 노동, 실업보험 도입, 아파트 건설 등으로 각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켰지만 경제 위기 속에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는 민주 세력의 분열과 극단 세력의 부상을 막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925년 대통령 선거에서 독일 제국 육군참모총장 출신으로 왕정 복고파 세력인 파울 본 힌덴부르크가 당선, 우익 민족주의 세력이 뭉치기 시작했다.
 
  경제 위기 속에서 실업 연금 0.1% 인상을 두고 민주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됐다. 0.1%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며 민주주의를 수호할 정치 세력은 분열했다. 결국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바이마르 체제는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의지가 결여된 상황에서 극단 세력이 발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오늘날 독일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정당에 예산을 지원하지 않는 등 바이마르 공화국의 교훈을 반영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기민당의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과 사민당의 에버트 재단은 독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노력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현대 독일의 중요한 방어막이 되고 있다.
 
  이은정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본(Bonn)은 바이마르(Weimar)가 아니다”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나치 지도자 히틀러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바이마르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1948~49년 독일연방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의 단점을 체계적으로 보강했다고 했다. 반민주 세력이 민주주의를 저해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차단한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대의민주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동서독 양측에서 존경받은 괴테
 
  7일 차인 8월 3일 아침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을 찾았다. 이 도서관은 고풍스러운 본관인 초록성과 현대적인 신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힌다. 초록성은 로코코 양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니, 일름강 주변의 풍경이 고즈넉했다. 신관과 초록성은 지하 장서고와 열람실을 통해 연결돼 있었다. 습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지하 서고를 통해 신관으로 건너가자 사방이 모두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나타났다. ‘지혜의 숲’으로 불릴 만한 공간이었다.
 
  괴테는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의 관리자이자 큐레이터로서 도서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괴테는 도서관의 장서를 확충하고 문학적, 학문적 연구를 장려하며 도서관을 문화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현재 이 도서관은 100만 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여성의 지적 권리와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데 기여한 곳으로 인정받고 있다.
 
  괴테는 서독과 동독 모두에서 중요한 문화적 유산으로 여겨졌다. 서독은 괴테의 자유와 개혁 정신을 높이 평가, 서구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기렸다. 동독은 괴테를 시대를 앞서가는 혁명적 인물로 보고,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이상에 걸맞은 ‘진보적 사상가’로 해석했다. 동서독은 자신들의 이념적 입장에 맞게 괴테를 국가 통합과 정체성(正體性) 강화에 활용했는데 결과적으로 괴테는 분단된 독일에서 공통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서독 분단 시대에도 괴테에 대해서는 공동 연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은정 교수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 통일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이마르 견학이 필요하다고 했다.
 
 
  촛불 시위 시작된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앞에서. 동독 붕괴 직전 대중 시위가 시작된 곳이다.
  연수단은 바이마르를 떠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 이동했다. 이곳은 나치 독일 시절 20만 명 이상의 수용자가 감금돼 5만6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악명 높은 수용소다. 수용소에서는 반사회적 존재로 간주된 수용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의료 실험과 학대가 자행됐다. 연수단은 수용소 내의 화장(火葬) 장치, 1인 독방 등 잔존해 있는 시설을 둘러보며 북한의 수용소를 떠올렸다.
 
  이은정 교수는 부헨발트의 추모비를 설명하며 “이곳은 인권과 인간 존엄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장소”라며 눈물을 흘렸다. 충남 삼성고 진요한 교사도 눈시울을 붉혔다. 서울 옥정중 이상석 교사는 “부헨발트 수용소 견학 경험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북한 인권의 실상을 알려주면 학생들이 통일의 필요성을 느낄 것 같다”고 했다.
 
  8월 4일, 연수단은 독일 통일의 상징적인 도시 중 하나인 라이프치히를 방문했다. 라이프치히는 동독 시민혁명의 발원지로,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월요일 촛불 시위는 독일 통일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돼 있다.
 
  교사들은 니콜라이 교회를 직접 찾아 당시의 상황을 느껴보려 했다. 동독 주민들이 촛불 시위를 통해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것처럼, 북한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이은정 교수는 “니콜라이 교회 시위는 독일 통일로 가는 작은 불씨 역할을 했다”며 “북한에서도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1989년 동독의 갈탄 오염 문제가 주민들의 시위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갈탄 과다 사용으로 인한 환경오염이 이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위협했는데, 이는 동독 정부에 대한 불만과 저항으로 이어져 결국 동독의 붕괴로 이어졌다고 했다.
 
  염돈재 전 국정원 차장은 《월간조선》 9월호에서 독일 통일이 동독 정권의 붕괴로 가능했다고 했다. 염 전 차장은 독일 통일이 서독의 동방 정책이나 화해 협력의 결과가 아니며 동독의 붕괴가 핵심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라이프치히를 둘러보며 느낀 것은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바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유의 바람을 계속 불어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괴테와 식사하는 느낌”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바흐 켈러’ 식당.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나오는 식당이다.
  이날 점심은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인 ‘아우어바흐 켈러’에서 했다. 이곳은 괴테가 학생 시절 자주 찾았던 식당으로, 그의 명작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곳이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조각상이 장식돼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부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파우스트의 명장면들이 그려진 벽화들로 가득했다. 누군가 “괴테와 함께 식사를 하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과장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식사 후 연수단을 태운 버스는 약 2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은정 교수가 드레스덴에 도착하자 “엘베강 너머를 보세요”라고 소리쳤다. 드레스덴은 엘베강을 따라 아름답게 펼쳐진 ‘독일의 피렌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도시다. 드레스덴성, 츠빙거 궁전, 젬퍼오페라하우스 등이 웅장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드레스덴은 통일 후 큰 변화를 겪은 동독의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다.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으나 통일 후 재건돼 독일의 대표적인 문화 도시로 자리 잡았다. 교사들은 이 교수의 안내로 드레스덴의 주요 명소를 둘러보며, 독일 통일이 이 도시와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직접 체험했다.
 
  드레스덴의 필수 관광지로 꼽히는 츠빙거 궁전은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웅장한 외관과 정교한 조각들로 연수단을 매료시켰다. 드레스덴의 또 다른 명소인 성모교회(Frauenkirche)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되었다가 통일 후 복원된 상징적인 건축물로, 연수단은 파괴됐을 당시의 검은 벽돌과 새롭게 건축될 때의 흰 벽돌이 섞인 성모교회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남북통일 후의 도시 재건에 대해서 얘기했다.
 
 
  도시 재건의 모델 드레스덴
 
  이은정 교수는 드레스덴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동독의 총리로 취임한 한스 모드로우 서기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모드로우는 1970년대부터 드레스덴에서 통일사회당(동독 공산당)의 서기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동독 총리로 취임해 통일 과정을 이끌었다. 이 교수는 “모드로우는 투표 조작 없이 당선됐는데, 이는 동독 주민들의 신망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드레스덴 중앙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차역 중 하나로 그 규모와 웅장함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역의 길이가 300m에 이르며 24개의 플랫폼을 갖추고 있었다. 건물 연면적이 8만㎡로 일제가 지은 옛 서울역보다 10배가 더 크다. 이곳은 통일 후 지하 1, 2층에 거대한 쇼핑몰을 조성해 상업적 공간과 교통 중심지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드레스덴이 50만 인구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역보다 더 월등한 시설과 기능을 갖춘 역을 갖고 있는 것은 도시 재건 측면에서 연구해볼 만한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3월 28일 드레스덴을 찾아 연설한 것은 한반도 통일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드레스덴 연설’에서 남북한 간의 화해와 협력, 인도적 지원, 경제 공동체 형성을 강조하며 한반도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연설은 남북 관계와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지만 북한은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드레스덴공과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황량한 분위기의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 모습. 대사관 직원들이 이삿짐을 나르고 있었다.
  서울로 귀국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돌아와 자유시간을 가졌을 때 이종원 통일과나눔 상임이사 등 관계자들과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이 있는 거리로 갔다. 주독 북한 대사관은 베를린의 번화가인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주변의 글린카슈트라세(Glinkastraße) 5-7번지에 위치해 있는데, 유독 이곳만 삭막한 풍경이었다. 대사관 건물은 5층, 6층 규모의 두 개 건물과 소형 운동장, 농구장 등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문 앞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불이 켜진 방도 없었다. 북한 대사관이 유엔 제재로 인해 외교적·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이날 대형 트럭이 대사관에 들어오자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이삿짐을 옮기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김철준 대사 대리를 포함한 남녀 3명이 평일 근무 시간에 짐을 옮기고 있었다. 김 대사 대리는 반바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이에 대해 베를린의 외교 소식통은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대부분 귀국했는데, 아마도 남아 있던 짐들을 보내려는 것 같다”고 했다.
 
  현지 외교 소식통은 박남영 대사가 귀국한 후 신임 대사가 부임하지 않아 대사관은 최소 인원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최근 북한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군수품을 지원한 것이 알려져 독일과 북한과의 관계가 더 악화, 대사 부임이 늦어지고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독일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Bild)》에 따르면, 주독 북한 대사관은 지난 4월 15일 김일성 생일 축하 리셉션을 개최했다. 호스트는 대사 대리인 김철준 참사관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볼프강 노박 의원, 독일 공산당 대표인 토르스텐 쇠비츠 의원과 양국 간 경제협회 임원 등 소수의 인사가 초청받았다.
 
 
  대사관 건물 빌려 호스텔 영업
 
  주독 북한 대사관은 냉전 시기 동서독의 분단을 배경으로 한 북한 외교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유럽에서 최대 규모의 북한 대사관이 황량하게 된 것은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 베를린 행정법원은 북한 대사관 건물을 빌려 영업 중이던 ‘시티 호스텔’에 대해 영업 중단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호스텔 수익이 북한으로 유입돼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시티 호스텔 측은 2017년부터 임차료를 지불하지 않아 대북제재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이 호스텔은 2007년부터 운영됐는데, 2016년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발동된 유엔 안보리 결의 2321호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대북결의 2321호는 “북한 소유 해외 공관이 외교 또는 영사 활동 이외 목적에 사용되는 것을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 대사관을 빌려 호스텔 영업을 하던 튀르키예 회사 EGI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결국 영업 중단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한 외화벌이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차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송환된 뒤 사망한 미국인 오토 웜비어의 부모는 “전 세계에 숨겨진 북한 자산을 찾아내 책임을 묻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며 주독일 북한 대사관 부지의 호스텔을 지목한 바 있다. 북한은 호스텔 영업이 중단되고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확산되자 대사관을 축소 운영했는데 아직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대북제재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에 반박할 수 있는 사례로, 국제사회의 제재가 북한의 외교와 경제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독일 북한 대사관은 북한의 대유럽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이다. 냉전 시대인 1954년에 설치된 주독일 북한 대사관은 동서독 통일 전에는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한 외교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다. 김일성은 1984년 동독을 포함한 여러 동유럽 국가를 순방하며 베를린 주재 대사관을 거점으로 삼아 소련, 동독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김일성은 동독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와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며 공산주의 체제를 옹호했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상호 방문을 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1989년 동독 정권이 붕괴하고 호네커가 실각하면서 그들의 협력도 막을 내렸다. 김일성과 호네커는 1994년 나란히 사망했다.
 
 
  마지막 날 자정 넘어서까지 토론
 
베를린자유대 이은정 교수 강의 모습.
  귀국하기 전날인 8월 5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1층 로비에서 가진 토론회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계속됐다. 교사들은 이번 연수를 통해 독일 통일의 역사적 경험을 직접 체험, 학생들에게 통일의 중요성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김포 양화고 김진범 교사는 “이번 연수를 통해 느낀 것과 배운 것을 매년 35명의 학생에게 가르친다면 2500명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진요한 교사는 이은정 교수의 깊이 있는 강의와 현지 체험을 통해, 통일이 단순한 정치적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임을 실감하게 됐다고 했다. 태극기 손수건을 들고 참가한 태금령(남양주시 미금중) 교사는 “무엇보다 교사를 통일의 매개체로 인정하고, 통일 독일 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어준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 “이번 연수는 남은 교사 인생의 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8월 6일, 교사들은 베를린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연수에 참석한 교사들은 올해 말 다시 모임을 갖고 독일 통일 연수를 통해 배운 것을 어떻게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평가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연수단을 이끈 이종원 통일과나눔 상임이사는 “교사들이 이번 연수를 통해 얻은 교훈과 통찰이 앞으로의 통일 교육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1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정호    (2024-10-13) 찬성 : 1   반대 : 0
이런 계기와 기회를 많이 마련해야 한다. 정부 주도의 한계가 있으니 대기업 등에서 사회 기여 사업으로 추진한다면 명분도 있고 기업 이미지도 올라간다. 초등학교 교사들 미국, 영국 등으로 현지 1년씩 자식, 부인 데리고 가서 그 나라 초등학교 교재 가지고 영어 연수 하고와서 한국에서 방과후 직접 영어 가르치면 자유 민주주의 나라의 진수를 배워와서 전교조 같은 짓 하는 교사들 잘 타이르 텐데.. 우리가 20년전에 매년 200명씩만 보냈으면 우리나라 많이 변화 되었을 것을...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