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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논객 임명묵의 ‘역사로 세계 읽기’ ⑤ 간략하게 읽는 중동 지정학 100년

바이든, 중동에서도 ‘정치적 올바름’ 추구하다가 中·러 진출 허용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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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이란 충돌은 이스라엘의 초조감과 이란의 ‘지정학적 여유’의 소산
⊙ 중동의 脫미국, K-컬처 한국에 기회일 수도
⊙ 1970년대 이후 ‘정체성 정치’ ‘정치적 이슬람’이 서구적 근대화, 세속적 아랍주의 대체
⊙ ‘아랍의 봄’ 이후 사우디-이란 중심으로 한 ‘중동 냉전’ 시작
⊙ 이스라엘, 아랍 신세대 등장에 힘입어 ‘아브라함협정’ 체결했으나 가자 전쟁으로 무산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작년 12월 12일 하마스에 살해된 희생자 유가족들이 이스라엘 텔아비브 북쪽 크파르 사바의 묘지 밖 납치 인질의 귀환을 촉구하는 내용의 벽화 앞에 앉아 있다. 사진=AP/뉴시스
  4월 13일, 한 줄의 뉴스가 세계 전역을 강타했다.
 
  “이란,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 발사!”
 
  4월 1일에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이란 영사관에 가한 공격에 대한 이란의 보복 공습이었다. 비록 상당수 발사체가 이스라엘 방공망(防空網)에 의해 요격(邀擊)되었지만, 중동(中東) 최대 군사 강국 중 하나이자 전 세계 반미(反美) 연대(連帶)의 중심인 이란의 이스라엘 직접 공격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안 그래도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시작된 가자 전쟁으로 중동의 군사적 긴장감이 극도로 올라가 있던 상황에서 ‘제5차 중동 전쟁’의 가능성이 논의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질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어쩌다가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었는가’이다. 중동 문제의 역사적 기원을 짚어보면서, 오늘날 중동의 지정학적(地政學的) 격변을 살펴보면, ‘제5차 중동 전쟁’ 같은 무서운 말보다는 사뭇 다른 그림의 사태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의 해체
 
  1914년부터 1948년까지 중동 지역은 제국의 해체라는 기나긴 진통을 겪었다.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은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경쟁인 ‘그레이트 게임’의 주무대가 되었다. 영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 국가도 막대한 상업적 이권과 지정학적 이득을 노렸다. 유럽 세력은 이 과정에서 제국 내부의 기독교나 유대교를 믿는 소수(少數)민족들을 협력자로 확보하는 전술을 이용했다. 소수민족에 자치권을 부여하여 느슨한 통치를 추구하는 제국 정치가 이제 ‘매판(買辦) 자본’을 앞세운 열강의 세력권 분할에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제국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지만,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얽히고설킨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그로 인해 가중되는 분리주의 압력은 이미 통제 바깥에 있는 문제였다. 영국과 러시아가 독일에 맞서 연합을 결성하고, 1907년에 오랜 경쟁 무대였던 페르시아를 분할했다. 다음 차례는 오스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오스만은 독일이 내미는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결국에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는 중동으로도 옮아갔다. 오스만 제국은 영국에 맞서 이라크와 이집트에서 싸웠다. 제국의 안전한 후방이라 생각했던 아라비아가 최전선이 되었다. 한편 북쪽에서 오스만군과 러시아군의 추격전은 이란으로 옮아 붙었고, 중립을 표방한 이란도 전쟁터가 되어 기근과 전염병이 횡행하는 대혼란이 펼쳐졌다.
 

  막강한 유럽 제국주의 열강과 허약한 중동의 전통 제국은 너무나 명확히 보이는 비교 대상이었다. 유럽에서 공부한 근대주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유럽을 모방하여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아 근대와 계몽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낡은 제국 질서와 종교적 믿음을 깨버리고, 과학의 정신을 받아들인 국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믿음이 번져나갔다. 그래도 오스만에서는 근대정신을 받아들이되 제국을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에 의해 그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모든 아랍의 통합’
 
  영국이 성지(聖地) 메카를 통치하는 후세인 빈 알리와 협약을 맺은 결과,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랍 대봉기가 시작되었다. 대다수 아랍인은 이 봉기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튀르크인’과 ‘아랍인’이 이제 각자의 길을 걸어야만 함이 분명해졌다. 이후 튀르키예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 제국 대신에 신생 민족 국가인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했다. 이란에서는 1921년 쿠데타를 일으킨 레자 칸이 허울뿐이던 카자르 왕조를 폐하고 ‘레자 샤’로 즉위하며 새로운 팔레비 왕조를 개창했다. 아타튀르크와 레자는 모두 과거 보편적 정통성의 근거가 되어주던 이슬람의 언어를 내려놓고 튀르크와 이란이라는 민족의 언어를 채택하며 강력한 유럽식 근대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아랍에서 튀르키예와 이란과 같은 국민 국가가 등장하기까지는 약 2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영국이 이집트와 이라크를, 프랑스가 시리아를 위임통치하면서 아랍의 독립 정부 등장을 유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티 알 후스리를 비롯한 걸출한 아랍 민족주의 사상가들이 이 시기에 활약하며 ‘모든 아랍의 통합’을 외쳤다. 이들은 수십 개의 정치체로 쪼개져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통일을 완수한 독일을 모범으로 삼았다. 아랍 또한 기독교, 이슬람, 수니파, 시아파, 수많은 부족과 지역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正體性)을 지니고 있지만, 종국에는 언어에 근거한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 내다본 것이다. ‘종교 대신에 민족’은 과학과 계몽 정신을 받아들이는 데도 더 적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독일의 도전, 미국과 소련의 반대로 마침내 종식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원하는 통일 아랍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아랍인은 너무나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고, 그 내부의 다양성도 엄청났다. 이해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독립 과정에서 숱한 잡음과 조정, 충돌을 거치며 결과적으로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 예멘,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국가들이 출현했다(일부 걸프 국가들은 1971년 독립).
 
  이들 신생 아랍국가 대부분은 공격적인 아랍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전통 지향의 왕정(王政)이 국체(國體)의 대세였다. 대체로 이들 엘리트는 영국, 프랑스 정부와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한 다양한 연줄을 지니고 있었다.
 
 
  세속적 아랍주의의 등장과 몰락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은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사태를 진전시킨 것은 유럽에서의 학살을 피해 온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건국이었다. 이스라엘 건국을 용납할 수 없었던 아랍 연맹이 팔레스타인에 지원 병력을 파병하며 제1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열되어 있던 아랍 연맹군은 이스라엘에 참패를 거듭했다.
 
  이 사건은 보수적 통치에 환멸을 느낀 숱한 아랍 엘리트를 급진화시켰다. 이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비호를 받는 보수적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단호한 행동으로 아랍인의 신속한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쿠데타를 통해 1954년에 집권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를 필두로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도 급진 민족주의 정부가 등장했다. 특히 나세르는 벼랑 끝 전술을 통해 소련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 수에즈운하 국유화(國有化)를 달성하고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패배시키면서 아랍 세계의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미국은 이후 나세르의 친소적(親蘇的) 행보를 경계했지만, 나세르는 ‘아랍 사회주의’와 반제국주의를 내세우며 소련의 문을 계속 두드렸다. 소련은 엔지니어를 파견하고 기술 교육을 제공하며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1960년대가 되었을 때는 바야흐로 ‘중동 냉전(冷戰)’의 구도가 자리를 잡았다. 한쪽에는 친소 성향의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의 아랍 사회주의 정권이 있었다. 다른 편에는 이란, 튀르키예, 이스라엘로 구성된 비아랍 친미 정권과 미국이 비호해주는 사우디와 요르단 등의 아랍 왕정들이 있었다. 이 중 아랍의 대표 국가인 이집트와 사우디는 각각 남예멘과 북예멘을 지원하며 격돌했다.
 
  그러나 아랍 사회주의와 범(汎)아랍 단결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8년에 이집트와 시리아는 하나의 ‘아랍 연합 공화국’을 이루어 아랍 통일을 시도했으나, 시리아가 3년 만에 탈퇴하며 무산되었다. 한편 소련은 아랍을 번영의 길로 이끌어줄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고 아랍 사회주의의 성과는 초라했다. 예멘 내전으로 국력을 소진한 나세르는 허장성세로 대응했으나, 1967년에 이 틈을 노린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 전쟁도 이집트의 참패로 끝났다. 사회주의와 범아랍 통합, 비동맹 운동 등을 핵심으로 하는 ‘나세르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랍인’이라는 정체성은 사라지고…
 
  마침내 1973년 시리아와 이집트 연합군이 제4차 중동 전쟁에서 패배를 하면서 중동의 한 시대가 끝났다. 이미 나세르의 후임자 안와르 사다트는 소련 고문단을 추방하고 미국 진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친소 정부는 더 내향적으로 변했다. 반면 제4차 중동 전쟁 여파로 시작된 석유 파동으로 엄청난 오일머니가 걸프 지역의 산유국들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아랍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걸프 지역의 국가들이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 속에서 번영하기 시작했다.
 
  1975년에 발발한 레바논 내전(內戰)으로 중동에서는 민족주의와 미소 냉전이 아니라 다양한 종파, 부족, 종교 정체성이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기독교인, 수니파, 시아파가 어지럽게 섞여 있는 레바논은 종파-종교 세력 간의 협상으로 운영되는 국가였다. 정체성 집단 간의 균형이 깨진 레바논이 내전에 돌입한 결과, ‘아랍인’이 아닌 다른 정체성에 따른 이합집산이 전면에 부상했다.
 
  이런 다양한 정체성 운동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조류는 ‘정치적 이슬람’이라고도 불리는 이슬람주의다.
 
  이슬람 종교법(宗敎法)인 샤리아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는 대중운동인 이슬람주의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실체가 확실한 사상이었다. 그럼에도 1960년대까지 튀르키예, 이란, 아랍을 막론하고 중동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사상은 세속적 민족주의였다. 그러나 잘못된 경제 정책, 사회 혼란, 연이은 패전 등이 이어지며 대안을 찾는 사상가들이 계속해서 힘을 얻었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사이드 쿠틉이라는 사상가의 영향으로 급진화되었고,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도 탄압 속에서 지하 활동을 계속했다. 물론 이슬람주의가 세계사의 중심에 등장한 계기는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었다. 대중 혁명을 통해 샤리아에 따라 통치되는 국가를 건설한 사건은 중동 전체에 영감과 충격을 동시에 주었다.
 
  1979년 이후 중동의 역사는 이슬람주의의 도전과 정권의 응전이라는 구도로 흘러갔다. 같은 해 사우디의 극단주의 조직이 메카를 점령하며 불길은 걸프 지역으로 옮아 붙었다. 사우디 왕실은 국내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극도로 보수적인 와하비즘을 더욱 강화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이를 국내 불만 분자들의 눈길을 돌릴 좋은 기회라고 여겨 불만 분자들을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호메이니가 외친 혁명을 막고자 사우디의 지원을 받아 이란을 침공했다. 8년간 이어질 참혹한 이란-이라크 전쟁의 시작이었다. 기존 미소 냉전의 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체제와 진영을 막론하고 이슬람주의에 대한 탄압이 거세졌다.
 
 
  ‘아랍의 봄’과 ‘중동 냉전’
 
  이란의 도전은 가라앉았다. 혁명 열기가 가라앉은 이란은 국내의 보수-개혁 갈등과 국가 재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의 불씨는 여전히 남았다. 소련군을 몰아낸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슬람주의 성향의 탈레반 정부가 집권하여 근대적 요소를 척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프간의 전장에서 훈련된 전사들이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귀환하여 미국과의 무장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이들에 맞서기 위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대책 없이 파괴하면서 이슬람주의 확산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버렸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중동 전역에서 반미 정서의 급격한 확산을 불러왔다. 아프가니스탄과 달리 중동의 중핵에 위치한 이라크는 종파, 종교 갈등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혼란의 땅이 되었다.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2011년에 일어난 아랍 권위주의 정권의 연쇄 붕괴가 일어나자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벌어진 일들이 다른 국가로도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이집트는 무슬림 형제단이 집권했다가 세속주의 군부(軍部)가 다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예멘에서는 남북, 부족, 종파에 따라 얽히고설킨 갈등이 폭발해 내전이 일어났다.
 
  가장 끔찍한 접전지는 시리아와 이라크였다. 양국의 시아파, 알라위파, 기독교에 대항한 수니파 동맹은 다에쉬(IS)라는 초유의 극단주의 무장 세력으로 진화했다. 중동이라는 지정학적 요충지에서 발생한 대혼란은 외부 세력의 개입을 불러왔다. 이란은 시아파 단체들과 연계를 강화하여 이스라엘과 미국을 압박하고자 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사우디는 반(反)이란 연대를 구축(構築)하여 싸움에 나섰다. 러시아, 튀르키예, 미국, 이스라엘까지 개입한 이란과 사우디의 ‘중동 냉전’이 10년 가까운 세월 이어졌다.
 
 
  ‘걸프 소국’들과 신세대의 등장
 
UAE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 약동하는 새로운 중동의 상징이다. 사진=삼성물산
  하지만 중동의 다른 지역에서는 잔혹한 내전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21세기부터 이어진 고유가(高油價)는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와 두바이, 카타르의 도하를 그야말로 천지개벽시켰다. 항공 교통이 기록적으로 팽창하면서, 지리적 요충지(要衝地)에 있는 걸프만의 소국들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이어주는 최고의 허브(hub)로 부상(浮上)했다.
 
  여전히 왕정을 고수하는 이 국가들은 서구의 민주주의와 인권 담론을 거부하고, ‘아시아적 가치’에 따라 초현대 국가를 건설한 싱가포르를 모델로 삼아 ‘이슬람적 가치’가 유지되는 미래 체제를 건설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는 이 국가들을 낮추어 보는 회의론(懷疑論)이 팽배했으나, 걸프 국가들은 생존을 넘어 성공을 입증해 보이며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한 아랍 청년들에게 두바이와 도하의 쇼핑몰은 나세르가 지켜보는 열병식(閱兵式)이나 무슬림 형제단의 대중집회보다 더 ‘미래’를 대표하는 상징이 될 터였다.
 
  2020년대가 되었을 때 1970년대에 시작된 정체성 전쟁은 이미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중동의 신세대는 세속주의-이슬람주의, 수니-시아 등의 정체성 갈등에 점차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정치 변동에 따른 혼란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인터넷으로 세계와 연결된 이들은 더 현대적인 감각을 충족시켜줄 새로운 문화를 직접 생산하고 있었다.
 
  ‘중동 MZ 세대’의 등장은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으로 하여금 아랍에미리트를 벤치마킹하여 전통 가치와 현대성을 조화하는 ‘비전 2030 계획’을 발표하게 했다. 이란에서는 이슬람 공화국의 문화 통제에 반발하는 대대적인 저항 운동을 촉발시켰다. 사우디-이란, 수니-시아 갈등보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구도에 집착하는 기성세대와 새로운 구도를 원하는 청년층의 갈등이었다.
 
 
  네타냐후의 ‘오산’
 
  이스라엘이 파고든 곳도 이 변화였다. 네타냐후 정부는 이란을 압박하기 위해 아랍에미리트와 수교(修交)하는 아브라함 협정을 맺었다. 아브라함 협정은 이제 아랍 국가들이 범아랍주의나 이슬람주의 같은 이념 대신 안정과 현대화를 원한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네타냐후는 최종적으로 사우디와 수교하여 중동에 안착하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경제난과 세대 갈등으로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체제가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이자 이 전략은 더욱 타당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네타냐후의 계산은 오산(誤算)으로 드러났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이스라엘이 원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일단 중동을 둘러싼 세계 지정학도 변하고 있었다. 소련이 사라지고 미국은 이슬람주의를 막아서고 중동 지역의 안보를 관리하는 유일한 패권국(覇權國)으로 자리매김했지만, 21세기 미국의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면서 안정적인 대중동 정책의 수립이 불가능해졌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핵합의를 통해 지역 질서를 재건하고자 했으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중단시키고 사우디와 협력을 강화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반대로 무함마드 빈 살만을 ‘국제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며 사우디와의 관계를 최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페미니즘, 성(性)소수자 등 정치적 올바름 이슈가 외교 정책에서도 주요 의제로 등장하자, 보수적 이슬람이 강고한 중동 지역에서는 커다란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동의 분노 일깨운 가자 전쟁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불만이 팽배해질 때 러시아와 중국이 나타났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서 이란과 힘을 합쳐 아사드 정부를 구원하며 힘을 과시했고, ‘러시아는 국내의 무슬림 전통도 존중하는 보수적 국가’라고 홍보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가 아랍에미리트·사우디와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미국은 러시아의 주요 수입원인 에너지 수출을 억제해 러시아의 전쟁 수행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걸프 국가들과 산유국(産油國) 연대를 강화하여 미국에 맞섰다. 중국은 수출국이 아니라 방대한 에너지를 수입하는 수입국으로서 영향력을 확보했다. 중국은 제조업 상품과 인프라 건설을 에너지 자원과 교환하는 핵심 무역 상대국으로 부상하며 전후 재건과 현대화 프로젝트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중국은 자신의 입지를 활용하여 이란과 사우디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는 중재자가 되겠다고 나섰고, 두 국가는 7년 만에 외교 관계를 회복했다.
 
  이란의 위협에 맞서 아랍과의 연대를 도모한 네타냐후 입장에서 이는 불길한 일이었다. 이란이 아랍 국가들에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그들로서도 이스라엘과 협력을 추구할 필요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과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구 진공이 시작되며 네타냐후는 수렁에 빠졌다.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틱톡과 유튜브를 중심으로 실시간으로 퍼져나가는 가자지구의 참상은 세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중동 전역의 분노를 일깨웠다.
 

  게다가 미국조차도 이제는 전폭적인 지원을 보내기 쉽지 않게 되었다. 바이든은 중국과 러시아가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대통령 재선을 위해서 상황을 빠르게 안정시켜야 했다.
 
  이스라엘의 무리한 이란 영사관 공격은 이러한 막중한 압박감 속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 반면에 이란의 상대적으로 절제된 보복은 여전히 만연한 경제난과 국내 불만에서 오는 불안감과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서 온 심리적 여유가 복잡하게 결합된 결정이다. 과도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감내하기에 이란의 상황이 썩 좋지는 않다. 그러나 지정학적 압박은 상당히 해소되어 이스라엘 본토 공격이라는 파격적인 수를 두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脫미국 중동’?
 
  어쩌면 제국, 민족, 이념, 종교의 시대를 거쳐온 중동은 새로운 ‘탈미국 중동’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걸프 국가들의 성공은 비산유국에 적용하기 힘든 모델일지라 하더라도 어쨌든 이슬람적 가치와 물질적 근대화를 조화시키는 일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 패권에 도전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카타르는 2022년 월드컵 당시 성소수자 인권 논쟁에 휩싸이자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손님들을 환영하나, 그들 역시 우리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두바이는 런던에서 쫓겨난 러시아 부호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며 대러시아 제재의 우회로가 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한편 러시아는 중동을 유라시아의 남북을 잇는 물류의 교차로로 복원하겠다며 ‘국제남북운송회랑’ 프로젝트를 꺼내 들었다. 사우디는 자국의 초거대(超巨大) 네옴시티 프로젝트를 위해 중국의 자금 투자를 원한다고 구애하고 있다.
 
  반면 바이든 행정부는 ‘정치적 올바름’과 ‘이스라엘 지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중동에서 지지를 크게 상실했다. 올해 11월 있을 선거에서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이 실점(失點)을 단기간에 만회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골치 아픈 중동에서 벗어나 안보 자산을 ‘진짜 위협’인 중국이 있는 동아시아에 집중시키는 흐름이 더 가속화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지역이 ‘아랍의 봄’으로 초래된 혼란과 갈등을 당장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탈미국 중동’은 튀르키예, 사우디, 이란,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이 결부된 복잡한 지정학 경쟁이 본격화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리아와 예멘에서는 여전히 갈등이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 영향력의 축출을 원하는 이란 세력과 여전히 세력 균형자로서 미국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여타 아랍 국가의 의견 차이도 크다. 다만 어쨌든 당분간은 종파, 종족, 종교 간에 생사를 걸고 벌이는 싸움 대신에 무역, 물류, 자원의 주도권을 두고 벌이는 경쟁이 더 주류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갈등이 너무 장기화돼 다들 지쳐 있고, 특히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신세대가 원하는 방향도 정치적 안정과 현대화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기회 될 수도
 
  역설적으로 탈미국 중동이라는 현재 상황은 한국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중동에서 한국은 서구 국가들과 달리 제국주의나 기독교 같은 ‘문명의 충돌’ 이슈에서 무척 자유롭다. 또한 현재 중동 국가들이 원하는 국가 현대화에 필요한 기술과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K-POP 아이돌이 사우디에서 콘서트를 열 정도로 ‘현대적 아시아 문화’로서 K-컬처의 힘도 상당하다. 미국은 물론이고 서구 국가들이 점차 중동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워지는 가운데, 한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속화되는 공급망 위기를 고려하면, 여전히 한국이 의지하는 핵심적인 에너지 공급국인 중동과 협력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어쩌면 “청년들이 텅텅 빌 정도로, 다 중동에 갔다고 할 정도로”라고 중동과 한국의 협력을 독려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2015년 발언에 지금 다시 주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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