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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논객 임명묵의 ‘역사로 세계 읽기’ ④ ‘고민하는 이슬람공화국’ 이란

이란, 중·러와 밀착하되 문화 통제 완화로 청년층 달래기 나서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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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류를 ‘퇴폐적 서구 문화’와 다르다고 봐… 한류 매개로 한 양국 관계 증진 가능
⊙ 최근 이란 정부의 사회 통제 완화는 체제 생존에 대한 자신감의 반영
⊙ 레자 칸과 모하마드 레자, 서구식 근대화 혁명 추구했으나 실패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테헤란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젊은 여성들. 머리카락을 덮을 듯 말 듯 히잡을 착용한 모습들이 인상적이다. 사진=임명묵
  “신(神)의 이름으로,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테헤란 전철의 노선 기점에서 차분한 목소리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전철이 시내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차분함은 사라진다. 인구 2000만 명을 자랑하는 중동(中東) 최대의 도시인 테헤란의 지하철은 매일매일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지옥철이다. “내립시다” 하면서 군중 사이를 비집고 나가는 사람들, 내리는 인파에 밀리면 다시 못 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 앞에서 비키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승객들의 전투가 반복된다. 그러더니 갑자기 옷가지를 잔뜩 들고 다니며 열차를 더욱 혼돈으로 만드는 행상인들의 열창이 시작된다.
 
  이 풍경을 보면, 이란 바깥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호메이니의 매서운 눈이 내려다보며 혁명수비대가 곳곳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란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미지인지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이란은 사막에서 사람들이 낙타로 이동하는 폐쇄된 국가가 아니다. 무선 이어폰을 끼고 힙합을 듣는 청년들이 지하철을 타고 분주히 움직이는 현대 국가다.
 
  물론 그렇다고 ‘이슬람공화국’이라는 현실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여행객 입장에서는 여행의 큰 즐거움인 현지 특색의 술을 마실 수 없는 것이 뼈아프다. 이란은 샤리아(이슬람 법)에 따라서 주류(酒類) 판매를 금지하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혁명의 지도자인 호메이니와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의 초상화도 이곳이 이슬람공화국임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초상화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분주히 그들의 일상을 살아간다. 어떤 것이 진짜 이란의 모습일까? 이제는 히잡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머릿결을 뽐내는 세련된 여성들이 이란을 대표할까, 아니면 검은색 차도르를 뒤집어쓰고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여성들이 이란을 대표할까? 더 중요한 질문이 뒤따른다. 이란의 현실을 규정하는 이슬람공화국이라는 독특한 체제는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란의 고종’ 나세르 앗딘 샤
 
테헤란 남부 근교 도시인 레이에 위치한 샤 압둘 아짐 모스크. 1905년 카자르 샤의 폭정으로부터 피란한 성직자와 군중이 이곳에서 이란 입헌 혁명의 불씨를 댕겼다. 사진=임명묵
  이란의 근대사는 19세기의 카자르 왕조로 시작한다. 근세 이란의 대제국이었던 사파비 제국은 이란을 시아파 국가로 만들고 번영하는 도시를 세웠지만, 18세기에 유목민의 침입을 받고 멸망했다. 80년의 혼란기를 수습한 왕조가 카자르 왕조였다. 하지만 카자르는 난립하는 유목민 부족을 억제할 수 없는 무늬만 통일왕조에 가까웠다. 중앙 권력의 존재감이 희미해지자, 시아파 이슬람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성직자들이 사회를 이끌기 시작했다. 18세기 이래로 시아파 성직자들은 국가 권력의 빈자리를 메우며 사회 구성원에게 규범을 부과했고, 송사(訟事)를 중재했다. 한미한 집안의 사람도 경전 공부를 통해 성직자가 될 수 있었으니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실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과 과학, 군대를 지닌 서구 열강이 이란에 찾아오면서 그들을 상대하는 일은 중앙 정부의 몫이 되었다. 물론 첫 만남은 좋지 못했다. 러시아는 전쟁을 통해 코카서스를 강탈해갔고, 영국은 함대를 몰고 와 카자르 정부를 협박했다. 이란은 유라시아 패권(覇權)을 놓고 다투는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의 핵심 전장이 되었고, 양국은 경쟁적으로 이란의 상업 이권을 침탈해갔다.
 

  이 중요한 시기, 1848년부터 1896년까지 재위한 군주인 나세르 앗딘 샤는 ‘이란의 고종’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무능했다. 나세르 앗딘 샤는 군주권을 침해할 모든 근대적 개혁을 거부했고, 이란의 중요한 상업 이권을 헐값에 넘긴 대가로 유럽산 사치품을 잔뜩 구매하고 호화 궁전을 지었다.
 
  그래도 변화의 기운은 꿈틀대고 있었다. 개혁적 성직자들도 군주제의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소수지만 유럽식 교육을 받은 이들과 러시아를 오가는 노동자들도 근대적 세력으로 성장했다. 근대적 민족주의와 정치 운동을 발전시킨 이들은 1905년 러시아를 상대로 한 일본의 승리 소식을 들으며 전율했다. 이란을 침탈하는 열강 러시아를 무찌른 극동의 일본이 이란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었다. 일본의 승리에 자극받은 이들은 군중을 동원해 군주제를 압박했고, 입헌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란 입헌 혁명이다.
 
 
  레자 칸의 등장
 
군인 출신으로 팔레비 왕조를 창시한 레자 칸.
  입헌 혁명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의회에서 급진파와 보수파가 갈등하는 사이에 영국과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카자르 샤의 권위가 복원되었다. 하지만 반혁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적국으로 맞붙게 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상대방 군대를 추격한다고 이란 영토에서까지 싸웠다. 무역로가 단절되고 국토가 전쟁터가 되면서 안 그래도 취약했던 이란 정부는 아예 무너지다시피 했고 기근과 전염병이 이란을 휩쓸었다.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북쪽에서는 공산주의의 위협이라는 새로운 적도 등장했다. 이런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코사크 여단’의 지휘관 레자 칸이었다. 군대로 테헤란을 장악한 레자 칸은 소련 공산주의를 철저히 막겠다며 영국을 안심시켰고 이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1925년 팔레비 왕조를 개창하며 ‘레자 샤’가 된 그의 롤모델은 2년 전 오스만 제국의 폐허에서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한 아타튀르크였다. 레자 샤는 아타튀르크처럼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반대자를 철권으로 억누르며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레자 샤는 여전히 강성한 유목민 부족을 전차와 전투기라는 신무기로 압도하고, 영국이 가져가는 몫에 비하면 턱없이 적긴 했지만 석유 수출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철도를 비롯한 근대 인프라를 건설했다. 레자 샤는 이슬람 이전 고대 페르시아의 과거를 내세우며 서구적 민족주의에 가깝게 국가를 개조하고자 했고, 테헤란을 현대 도시로 만들었으며, 국민들, 특히 여성들에게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벗고 서구식 복장을 입도록 강요했다. 개발을 위한 동원과 갑작스러운 문화 변화의 충격에 성직자와 보수적 국민들은 반발했지만 레자 샤의 철권을 당해내기에는 힘이 너무 약했다.
 
 
  모하마드 레자와 모사데크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레자 샤를 무너뜨린 것은 국내 정책이 아니라 외교 정책이었다. 19세기 이란을 지배한 영국과 러시아에 대해 반발한 그는 히틀러의 독일에 호감을 보였다. 1941년 독일이 소련과도 전쟁에 돌입하자, 영국과 소련은 친독일 이란의 존재를 묵인할 수 없었다. 영국군과 소련군은 레자 샤를 몰아내고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모하마드 레자는 아버지를 향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온갖 성격적 결함이 있었고, 이란과 같은 거대하고 복잡한 국가를 다스리기에는 능력이 한참 모자랐다.
 
  모하마드 레자는 함량 미달이었지만 냉전(冷戰) 덕분에 강력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1946년, 소련의 스탈린이 이란 북부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며 분리주의를 선동하자 영국과 미국은 소련의 적화(赤化) 시도를 경계하며 이란 정부를 지원했다. 안 그래도 레자 샤 시기의 산업화를 통해 노동자 인구가 크게 늘어 사회주의가 확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튀르키예와 이란을 중동에서 소련의 남하를 막는 방파제로 삼기로 결심하고 이란 왕정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화를 추구하는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였다. 모사데크는 대다수가 영국으로 흘러가는 석유 수출금을 이란의 근대화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며 국유화(國有化)를 선언했고, 왕정 대신 총리와 의회 중심으로 권력을 재편하려고 했다. 이를 공산주의 팽창 기도로 오인(誤認)한 영국과 미국은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크를 제거했다. 레자 샤 시기에 민족주의적 근대화 정권으로 인식되던 팔레비 왕조는 모사데크 쿠데타 이후 제국주의자들의 꼭두각시로 평판이 급속하게 추락했다. 미국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5·16 군사혁명 직후 사회주의자로 의심하였지만, 곧 의심을 풀고 신뢰를 쌓아갔던 한국의 상황과는 대조된다.
 
 
  백색 혁명
 
1970년대 이란 여대생들의 모습.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래도 미국의 보호와 투자 아래에서 강력한 권력을 다시 쥐게 된 모하마드 레자의 꿈은 원대했다. 1963년, 그는 성직자라는 ‘흑색 반동’을 서구 문명의 빛이 주도하는 ‘백색 혁명’으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며 대대적인 경제 개발과 사회 개혁 프로젝트를 추구했다.
 
  문제는 이 프로젝트가 겉만 번지르르한 반면 속은 부실했던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데 있었다. 성급하게 추진된 토지개혁은 기존의 농촌 질서를 파괴하기만 했지 자영농이 중심이 된 근대적 농촌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제조업에 투자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란 제품을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상품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모하마드 레자에게 있어 1970년대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1971년 그는 페르시아 제국 건국 25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벌였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오일머니가 쇄도하자 이란을 훗날 세계 5대 강국으로 만들겠다고 천명하며 핵 개발 프로그램까지 시작했다. 그러나 모하마드 레자가 전시하는 화려한 거대 프로젝트 이면에서 농촌은 피폐해지고 있었고 도시의 슬럼가는 계속 팽창하고 있었다. 이란 도시 사회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바자르(시장) 소상공인들도 팔레비식 근대화에 큰 불만을 느꼈다.
 
  팔레비의 불완전한 근대화는 반대자를 결집시켰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은 ‘사바크’라는 비밀경찰을 부리는 왕정에 혐오감을 느꼈다. 석유 산업을 중심으로 급팽창한 산업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정당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반대자는 이슬람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자유주의자들의 근대적 정치 관념, 사회주의자들의 계급 평등의 이상, 이슬람 성직자들의 신앙의 언어는 서로 지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폭풍을 만들고 있었다. 이 중에서 프랑스에서 접한 서구 좌파 사상을 이슬람의 언어와 결합한 사상가 알리 샤리아티와 ‘성직자에 의한 통치’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킨 루홀라 호메이니의 글들은 민간 사회 및 성직자 사회에 회람되며 지지자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이슬람 혁명
 
1978년 이란 혁명 당시 시위대는 호메이니의 사진을 앞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1978년에 정부에 대한 불만은 대중적 봉기로 폭발했다. 이전의 산발적 봉기와 달리 이번 봉기는 전국적인, 나아가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다양한 계층, 이념에 걸친 반-군주정 동맹을 형성하며 정권을 압박했다. 결국 1979년에 샤가 항복하고 망명을 떠나면서 54년에 걸친 팔레비 왕조는 종식되었다. 이제 질문은 그 이후에 어떤 정부를 만들 것인지로 바뀌었다.
 
  정국을 주도한 이는 파리에서 귀환한 호메이니를 위시한 성직자들이었다. 성직자들은 팔레비 국가가 방치하다시피 한 농촌과 도시 빈민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시가지 곳곳에 자리한 모스크는 사회적 네트워크와 복지를 제공했다. 농촌에서 이주해온 빈민들은 금요일 기도에서 물라(mollah·성직자)들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언어와 이념을 학습했다. 그들은 서구화(西歐化)로 인한 문화적 격변에 분개하고 이슬람의 본래적 메시지인 평등의 유토피아를 이룩해야 한다고 믿으며 급진화되었다. 호메이니와 성직자들은 이란이 앞으로 신의 율법으로 통치되는 ‘이슬람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속의 정부는 신의 원칙과 그 원칙을 해석하는 물라들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서구와의 연결로 인하여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제국주의와 모사데크를 전복(顚覆)시킨 쿠데타는 서구에 대한 뿌리 깊은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마지막 주요 세력인 산업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선택이 중요해졌다. 소련은 이들에게 성직자들과 협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소련은 성직자들만으로는 이미 근대화된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을 것이기에, 근대적 세력인 사회주의자들을 동맹으로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내다보았다.
 
 
  이슬람공화국의 개혁과 반동
 
이란의 종교 도시 콤(Qom)의 거리를 걷는 몰라(성직자). 전 세계 시아파 공동체의 중심 도시인 콤은 시아파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는 수많은 학생을 끌어들이는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대다수 이란 시민들은 필자가 콤에 갔다고 하면 “대체 그런 곳에 무엇을 보러 가느냐?”고 의아해하기도 했다. 사실 콤의 시민들도 “너 무슬림이야? 여기 왜 왔어?”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진=임명묵
  하지만 사태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전면 침공했다. 혁명의 열기가 이라크의 시아파에 전염될 것을 우려하고, 혁명의 혼란에 빠진 이란의 상황을 이용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라크의 침공은 혁명 정권을 오히려 공고히 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시아파 순교 정서와 페르시아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혁명 정권에 반대하던 이들까지도 결집하여 ‘성스러운 방위 전쟁’에 나섰다. 외침에 맞선 단결의 분위기 속에서 혁명 정부는 반대자를 숙청하며 이란을 확고한 이슬람공화국으로 만들어냈다.
 
  성직자들이 근대 국가를 통치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은 철저한 오산(誤算)으로 드러났다. 1989년, 혁명의 지도자 호메이니가 죽었을 때 이란은 혁명의 혼란과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슬람공화국은 팔레비 왕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전쟁의 경험을 활용해 미완(未完)의 근대화를 자신들의 손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혁명 시에 확산된 사회주의 언어를 거두고, 이슬람은 시장경제와 소유권을 존중한다는 해석을 내보냈다. 정부는 이전의 과시적 프로젝트 대신에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교육·보건·토지개혁 프로젝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혁명이 일어난 1979년부터 2000년까지,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영아 사망률과 문맹률을 극적으로 떨어트리고 평균수명과 여성 교육을 큰 폭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이슬람 혁명의 에너지는 문화 영역에서 계속해서 논쟁을 만들었다. ‘문화 혁명’이 선언되면서 이슬람의 정신에 맞지 않는 ‘서구 퇴폐 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많은 지식인이 일자리를 잃거나 망명을 떠나야 했다. 검열과 숙청, 투옥과 처형이 잇따랐다.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다시 의복이었다. 특히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 착용이 의무화되었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처벌이 이어졌다. 1989년 호메이니 사후(死後)에 시장 자유화와 경제 현대화는 큰 폭에서 진전되었지만, 문화 통제는 언제나 이슬람공화국의 정체성(正體性)을 상징하는 이슈로 남게 되었다.
 
 
  엇나간 미-이란 관계
 
테헤란의 구 이란 미국 대사관의 담장. 반미주의 벽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곳은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 학생 시위대가 점거하여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의 송환을 요구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미국 간첩 활동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사진=임명묵
  미국과의 관계도 중요했다. 이슬람공화국은 ‘미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을 체제의 근간으로 삼는 동시에 체제의 생존을 위해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무역에 온전히 합류하고자 줄타기를 계속했다. 1990년대 이후 이란 정치에서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문화 통제를 완화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자와 중동에서 반미(反美) 투쟁에 전념하고 문화 통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경쟁 구도가 자리를 잡았다.
 
  4년마다 선출되는 이란의 대통령은 1989년 이래로 최고 지도자로서 통치하는 알리 하메네이에 비해 실권(實權)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메네이와 복잡한 협상을 벌이며 국정 방향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개혁주의자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미국 대통령과 이란 대통령이 늘 합이 맞지 않으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 및 이란의 개방은 계속 좌절되어왔다. 이란의 하타미 대통령이 개방 의사를 비쳤을 때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란을 ‘악(惡)의 축’이라 비난한 것은 결정적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문제로 굽힐 의사가 없는 이란과 협상하기는 어려웠다.
 
  ‘악의 축 발언’ 사건으로 보수파들의 반미 구호가 큰 인기를 끌게 되었으며, 극우(極右)에 가까운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마디네자드 시기 이란은 핵 개발 프로그램을 공표하며 서방 세계로부터 대대적인 제재를 받게 되었다. 2011년 아랍 봉기로 중동에 혼란이 발생하자 이란은 세력 확장을 시도했고, 이로 인해 시작된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중동 냉전’은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다시 시작된 경제난과 2009년의 부정선거 논란이 겹치면서 보수파 정권은 다시 중도적인 로하니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로하니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정부와 핵 협상을 통해 이란 경제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2016년 민주당이 패배하고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핵 협상은 모두 취소되었다. 2020년에는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카셈 솔레이마니가 미국 공격에 의해 사망하며 개혁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보수파가 주도권을 잡고 미국, 유럽과 관계 개선을 사실상 포기한 이란은 대신 비슷한 상황을 공유하는 중국, 러시아와 손을 잡으며 유라시아 대륙 동맹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청년층의 불만
 
콤의 한 잡화점. 혁명의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현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그리고 미군의 드론 공습으로 사망한 후 순교자 반열에 오른 카셈 솔레이마니가 한 사진에 모여 있다. 사진=임명묵
  그러나 사회의 불만, 특히 청년 세대의 불만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팔레비의 불완전한 근대화는 이슬람 혁명의 지식인들을 만들어냈다. 이슬람공화국이 대폭 확충한 교육 기관에서는 훨씬 세속적인 자유주의자들이 길러졌다.
 
  팔레비 시기의 혼란과 혁명, 전쟁, 재건의 기억이 없는 청년들은 이제는 정부가 통제하는 인터넷을 VPN을 통해 접속하고, 기회가 되면 언제나 유학과 이민을 떠나 일신의 변화를 꾀하고자 한다. 여성들은 성(性)과 복장에 대한 통제에 일상의 불복종부터 공개적 저항까지 망라하며 목소리를 냈다. 경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미 제국주의에 맞서 이슬람 공동체를 지키자’는 정부의 메시지는 냉소(冷笑)를 불러일으켰다.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무기력감 속에서 사소한 불만은 정부에 대한 대규모 반발로까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폭발했다. 2009년 부정선거에 항의한 녹색운동, 2019년의 대규모 시위, 2022년에 발생한 ‘여성, 삶, 자유’ 운동은 이러한 저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하지만 청년층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체제는 견고하다. 세속화된 인구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이슬람은 다수 이란인의 삶에서 중요한 근간을 형성한다. 정부를 싫어하는 이도 많지만 미국을 더 싫어하는 이의 수도 상당하다.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이란과 자유롭고 세속적인 이란은 모두 오늘의 이란을 형성하는 모습이고, 이 둘은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도 때로는 신축적인 대응을 하며 사회적 불만을 관리한다. 반발은 폭력적으로 진압하지만, ‘그 뒤’도 언제나 생각하며 후속 조치가 이어지는 셈이다. 현재 이란의 거리에서는 히잡을 아예 쓰지 않는 여성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인터넷은 통제되지만 배달과 택시 애플리케이션은 삶의 필수적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이란 정부, 사회 통제 완화
 
라슈트의 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눈 아르바이트생 마부브. 2008년생의 16세 청소년이다. 서구의 여느 청소년과도 구별할 수 없는 스타일을 자랑하지만 자신은 동시에 무슬림이라고 밝혔다. 사진=임명묵
  최근 이란 정부가 사회 통제를 완화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생존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과거에 체제가 행한 가혹한 통제는 대내외 위협에 대한 불안감의 반영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이란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중국과 러시아라는 우군을 확보했고, 심지어 라이벌 사우디아라비아와도 화해했다. 반면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대만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해야 하느라 중동에 이전처럼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문화 통제를 점차 완화해도 체제의 생존이 위협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벌’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이 대대적 자유화 개혁을 실시하니 이란 정부 입장에서는 문화 자유화를 향한 유인이 커진 셈이다.
 
  그렇기에 향후 이란은 지정학적으로는 중국·러시아와 밀착하면서 반미 연합을 공고히 하는 한편, 국내의 문화 정책은 점차적으로 개방하여 청년층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고 할 것이다.
 

  이때 의외로 한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대중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일찍부터 양국 문화는 이란 보수층에게서도 퇴폐적 서구 문화와는 달라서 허용해도 되는 ‘안전한’ 현대 대중문화로 부분적으로 인정받은 바가 있다. 이란에서 한류(韓流) 팬은 물론이고 일본 오타쿠를 만나는 것도 쉽다. 물론 근래에는 한류의 기세가 엄청나서 K-POP에 대한 비판도 시작되고 있지만, ‘미국 문화’보다 처우가 괜찮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과 이란의 정치적 악연이 거의 없는 것도 한국 문화와 제품이 이란에 수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화 강국 이란
 
  물론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한국은 미국 중심의 서방 동맹에, 이란은 중국·러시아 중심의 유라시아 연합에 더욱 결속하며, 양국의 무역은 급속히 어려워졌다. 당연히 한국이 미국 질서를 이탈하여 이란과 다시 무역을 큰 폭으로 늘리는 건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이럴수록 중요한 것이 문화다. 정부 간 관계는 어떻든, 한국 문화는 이란에서 막힘 없이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정학적 강경 노선과 문화적 온건 노선이 함께 갈 것이라는 전망은 정부 차원에서 경색된 양국 관계와 달리 민간 분야의 협력은 계속 활기를 띨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든다. 이러니 현재의 상황을 더욱 발전시킬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대중문화가 이란의 보수파가 우려하는 것처럼 ‘퇴폐적이고 유해한’ 문화가 아니라, 보수적 유교 윤리를 내재화하고 있는 ‘건전 문화’이기도 하다는 브랜딩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이나 프랑스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은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한국에서 이란 문화를 소개하는 일도 의미가 있다. ‘핵무기와 혁명수비대’ 이미지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란이 세계적인 영화 강국이라는 것은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상식이다. 이란 문화 예술에는 2500년에 달하는 페르시아 문명의 저력이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정부와 관계없이, 문화를 통해 동과 서를 중개할 수 있는 한국만의 역할을 머나먼 테헤란에서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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