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이후 교회가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 ‘해방신학’ 비판
⊙ 프란치스코 교황 “일생을 바쳐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 하신 분”
⊙ 신자들은 “산토 수비토(Santo subito·바로 성인으로 추대), 베네딕토!” 외쳐
⊙ 장례미사 후 귀국하니 善終 전 보내신 크리스마스 카드가 반겨
鄭鍾休
1950년생. 전남대 법학과 졸업, 일본 교토대 대학원 법학박사 / 前 전남대 로스쿨 교수·법과대학장, 駐교황청 한국대사, 한국민사법학회장, 한국법사학회장,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 역임. 現 전남대 명예교수, 꽃동네대 석좌교수
⊙ 프란치스코 교황 “일생을 바쳐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 하신 분”
⊙ 신자들은 “산토 수비토(Santo subito·바로 성인으로 추대), 베네딕토!” 외쳐
⊙ 장례미사 후 귀국하니 善終 전 보내신 크리스마스 카드가 반겨
鄭鍾休
1950년생. 전남대 법학과 졸업, 일본 교토대 대학원 법학박사 / 前 전남대 로스쿨 교수·법과대학장, 駐교황청 한국대사, 한국민사법학회장, 한국법사학회장,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 역임. 現 전남대 명예교수, 꽃동네대 석좌교수
- 향년 95세로 선종한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의 시신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돼 있다. 사진=정종휴 전 대사
2022년의 마지막 날, 은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종(善終)하셨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황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분 영혼이 영원한 성부(聖父)께 가심으로써 우리 인류는 ‘21세기의 현인(賢人)’을 잃었다.
95세셨으니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 없이 장수하신 셈이지만, 막상 서거 소식을 듣고 나니 상실감과 허전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연도)를 드리고 교황님 영혼의 천상 영복을 비는 지향을 담아 묵주기도를 드렸다. 멍한 상태에서 장례미사는 1월 5일 오전 9시30분 성 베드로 대광장에서 봉헌된다는 뉴스를 들었다.
전임 교황은 사제 서품 71년 동안 수많은 논문, 66권의 저서, 3종의 회칙, 4종의 권고를 내셨다. 인간에게 진정 자유, 평화, 행복을 원하면 하느님을 믿으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라고, 그리고 그 행동원리로서의 십계명을 따르라고, 십계명은 하느님을 향해 네라고 하는 대답이라고 하셨다. 선종 직전의 당신의 삶은 마지막 말 한 마디로 귀결되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급히 가방을 꾸렸다. 코로나19 봉쇄로 근 3년 막혀 있던 인천-로마 직항편(1월 3일 14:05)에 몸을 실었다. 탑승하고 보니 2021년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취임한 유흥식 추기경은 휴가를 마치고 로마로 귀임하는 길이었고, 염수정 추기경, 한국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등 한국 천주교 대표단도 보였다.
로마까지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 하늘길이 막혀 중국, 중앙아시아, 튀르키예(터키) 쪽을 통하느라 다른 때보다 2시간 이상 더 걸렸다.
교황의 빨간 구두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하니 한국 천주교대표단을 영접하러 추규호 주 교황청 한국대사 등 대사관 관계자들이 나와 있었다. 유흥식 추기경을 모시러 온 차량을 통해 이동하게 되었다. 유 추기경은 내가 묵을 호텔에 날 먼저 내려주고 떠났다.
1월 4일 새벽 5시경 산보 삼아 바티칸 성 베드로 대광장 쪽으로 나가보았다. 벌써 여러 곳에 조문객이 무리 지어 있는 게 아닌가. 늑장 부리다간 몇 시간씩 기다릴 것 같아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나갔다. 입장하려는 조문객들의 줄은 아직 길지 않았다. 가방검사와 검색대 통과 후 7시40분경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섰다. 입구에서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서명이 든 사진을 나누어주었다.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 안치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유해 앞에 모두들 머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고 조의를 표했다. 나는 거룩한 교황의 유해 바로 앞에서 기도드릴 수 있었다. 유해를 보니 ‘검은 구두’였다. 재위 중 ‘빨간 구두’를 신어 매스컴에서 ‘프라다 패션’이라 입방아를 찧어도 교황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실은 예수의 흘린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이어서였고 그게 오랫동안 교황의 관행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사라진 관행을 살린 것뿐이었다.
교황과의 인연들
나는 무릎을 꿇고 매일 하는 ‘9일 기도’를 고인의 천상 영복을 비는 청원을 담아 바쳤다. 이어서 14세기 스웨덴의 성녀 비르짓다의 ‘15기도’라는 예수 수난을 묵상하는 기도를 바쳤다.
〈오, 예수님!
주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저희의
냉정함을 극복하도록 하소서.
올리브 산에서의 주님의 거룩한
수난을 묵상하고
그 신심의 기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총을
강물처럼 쏟아 주소서.
주님께 간구하오니 적어도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제 영혼과 마음으로 주님께서
올리브 산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함으로써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통회(痛悔·몹시 뉘우침) 개과(改過·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주님과 일치하게 해주소서.(하략)〉
만감이 교차하였다. 교황과의 31년간의 크고 작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1990년 독일 가기 직전 일본 교수 한 분이 쓴 논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여러 해 동안 요셉 라칭거[베네딕토 교황의 세속명] 추기경의 이름을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어학 과정이던 만하임의 한 성당 성물판매점에서 ‘라칭거 레포트’로 유명한 추기경의 대담집을 찾지 못했더라면, 그 후 뮌헨대학에서 “다음 주 수요일 당신이 좋아하는 라칭거 추기경의 미사가 있다”는 스페인 친구의 귀띔이 없었더라면, 라칭거 사제서품 40년 기념 미사 후 인사를 드리지 않았더라면, 로마로 편지를 쓰라는 추기경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다음 해 로마에서 독일 순례객들을 위한 라칭거 추기경 집전의 미사에 참례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전임 교황의 인연이 이어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
장례미사
‘21세기 현인’의 유해 앞에서 40분 남짓 무릎 꿇고 기도하다 교황청 뜰로 나왔다. 국무원에 잠시 들렀다가 밖으로 나왔다. 순례자의 삼위일체 성당의 저녁 미사에 참례했다. 베네딕토 전임 교황에 의해 미국 세인트루이스 교구장 재임 중 바티칸 최고법원장에 임명된 버크 추기경 집전의 대미사였다.
미사 후 제의(祭衣)방으로 들어갔다. 버크 추기경께 인사를 드렸다. “추기경님, 6년 전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 행사 때 파티마에서 뵈었어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를 알아보셨다. 성당을 나서는데 장례미사 취재차 여러 나라에서 온 저널리스트들이 보였다. 많은 이가 이구동성으로 ‘성인(聖人) 교황’ ‘교회의 스승’ ‘21세기의 천재 신학자’ ‘종합의 천재’의 선종을 애도하고, 앞으로도 부디 이러한 뛰어난 교황이 나오기를 염원하였다.
1월 5일 오전 9시30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장례미사가 봉헌되었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보니 8시10분. 어제에 이어 9일기도를 바쳤다. 8시40분경 주교단이 입장하고, 8시45분경 ‘교황의 신사’들이 양쪽으로 6명씩 베네딕토 16세가 잠든 관을 제대 옆으로 천천히 옮겨, 광장 제대 앞에 안치했다.
미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하고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집전했다. 베네딕토 16세의 개인비서 게오르그 겐스바인 대주교가 그의 관에 성경을 펼쳐놓았다. 8시50분이 되자 참가자 모두 묵주의 기도 ‘고통의 신비’를 바쳤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장례미사는 125명의 추기경과 400여 명의 주교, 3700여 명의 사제들이 공동 집전했다. 그리고 신자 6만여 명이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웠다.
‘공회의의 정신’ ‘공회의의 망령’
세속명 요셉 라칭거, 제265대 교황,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종신인 교황직을 사임한 베네딕토 16세는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이미 수없이 많은 기사가 있다. 장점이건 단점이건 부풀린 과장도 많고 축소도 많다. 현재 가톨릭교회 전체와 온 인류가 처한 정신 상황과 관련하여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모두가 전임 교황이 생전 치열하게 싸운 것들이다.
첫째, ‘공의회의 정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피곤한 현대인들에게 수월하게 신앙을 전할 수 있는 수많은 사목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공의회의 정신’이란 이름으로 교회를 파괴하는 일이 많았다. 교리가 무너졌고, 전례가 파괴되었고, 신학교, 사제직, 수도원이 무너져 내려갔다. 사제 서품 후 환속자는 늘어나고, 성소 지망자는 줄어들고, 개종자도 줄어들고, 수도회 입회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성당과 수도원 어디를 봐도 거룩함이 사라져 갔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공의회의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개혁이라는 게 실은 ‘공의회의 정신(Geist des Konzils)’이라기보다는 ‘공의회의 망령(Konzils-Ungeist)’이라 했다. 바오로 6세의 말처럼 ‘자기 비판’에서 ‘자기 파괴’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했다. 생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공의회 이후의 잃어버린 것의 회복을 주장했다. 흔쾌한 찬성과 격렬한 반발이 뒤따랐다.
둘째, 진보 신앙. ‘진보와 자유’는 근대(近代)의 구호이다. 하지만 무엇이 진보인가? 진보의 개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인식의 진보, 즉 깨달음이다. 오늘날 우리는 DNA, 즉 생명의 구조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는 것은 곧 힘이다. 그런데 이게 맞는가? 내가 파괴할 수 있으면 그것이 진보인가? 생명을 만들고, 선별하고, 또 처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진보인가? 지식을 통한 인간의 힘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하지만 그 윤리적 측면에 대한 성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보’를 살리려면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성찰, 인류 전체의 양심 성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방신학 비판
셋째, 공산주의. 베네딕토 16세가 2007년 반포한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 In Hope, we were saved)〉는 역대 교황의 사회 교리의 가르침 중 가장 뛰어난 사목교서다. 마르크스에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훈을 가장 잘 적시(摘示)하고 있다.
믿음 없는 사회 참여 사제들이 예수님의 강생구속[降生救贖·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됨’[강생]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 보속(補贖)했으므로 누구든지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이 불의(不義)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십자가상에서 수난받고 돌아가신 것 역시 정치적인 이유에서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베네딕토 전임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신 이유가 사회의 구조개혁이나 체제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프랑스 혁명은 일종의 부르주아 혁명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완전한 세상을 이끌기는커녕 비참한 파괴만을 남겼다. 하느님 없이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 인간만의 나라는 반드시 ‘전도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영원히 지속될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사람은 거짓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외적인 체제나 시스템만으로 결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이러한 종류의 희망은 거짓에 불과하다. 구원은 인간의 내면이 사랑으로 채워질 때 가능하다.
해방신학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민중들로부터 나와 저절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부유한 서방 세계에서 태어나거나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해방신학을 맨 처음 만들어낸 신학자들은 유럽인들이다. 남미에서 그것을 권장한 신학자들은 유럽인이거나 유럽의 대학에서 교육받은 이들이다. 이들의 설교 언어인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 뒤에서 독일, 프랑스, 영미의 사고를 느끼게 된다. ‘해방신학은 선진 서방에서 만들어진 신화(神話)와 유토피아가 제3세계에 수출된 것’의 일부에 불과하다.
넷째, 죽음의 문화. 모든 것이 연결된 것이다. ‘신 없는 휴머니즘’(앙리 드 뤼박)은 이른바 지상낙원이라는 프로젝트로 애초부터 파멸을 선고받은 상태이다. 작금의 포스트휴머니즘은 배 속의 생명 살해(낙태), 안락사, 자살 방조, 동성애라는 생명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를 장착한 것으로 현대인의 온갖 불행과 절망의 원인이다. 우리는 성과 출산의 분리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한 남자와 한 여자여야 한다는 자연법칙이 무너지고,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관계도 똑같은 것으로 취급된다면, 그것은 사람이란 존재를 만드는 형식의 기본 틀마저도 손상시키는 것이다.
교황이 집전한 장례미사
9시30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장례미사가 시작되었다. 미사 경문은 대부분 라틴어였다. 하나같이 그레고리안 성가였다.
제1독서는 “불행하여라, 자기네 계획을 주님 모르게 깊이 숨기는 자들!”과 “거꾸로 행동하는 너희들!”을 질타하는 이사야 예언서(29, 16~19)였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는 시편이 이어지고, 제2독서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다”는 베드로의 첫째 서간(1,3~9)이 뒤따랐다.
복음 말씀은 루가 복음에 나오는 ‘천국 1호 입장’ 도둑의 이야기였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시오”라고 예수를 모독했다.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는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면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 39~46)
이 애틋한 스토리의 복음에 이곳저곳에서 조용한 감탄의 호흡이 들리는 듯했다.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처럼 우리도 스러지지 않는 사랑을 다시 한 번 보여주기 위해 감사의 향유와 희망의 유향을 들고 여기에 모였다”면서 “일생을 바쳐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 하신 분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분을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 맡기자”고 했다.
“산토 수비토, 베네딕토!”
신자들의 기도 첫 번째는 독일어로 “주님 안에 잠든 베네딕토 교황을 빛과 평화의 나라에서 받아주시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장례미사 후 마지막 인사와 고별식이 이어졌다. 조용히 미사에 참례했던 사람들도 큰 박수를 쳤다.
“산토 수비토(Santo subito), 베네딕토!” “산토 수비토, 베네딕토!”
이런 크고 작은 외침도 있었다. ‘산토 수비토’는 ‘바로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라’는 뜻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종이 엄숙하게 울리는 가운데, 교황의 관은 대성당 안으로 옮겨졌다. 장례미사의 전체적인 톤은 정숙하고 조용했다. 이데올로기적 외침이 전혀 없는 진정한 레퀴엠(장례미사)이었다고 할까.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의 관은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됐다. 성 요한 23세 교황과 자신의 전임자였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묻힌 자리다. 교황청은 1월 8일부터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묘지를 일반에 공개했다.
미사 후 광장 제대 쪽으로 가니 이탈리아와 독일의 대표단, 벨기에 국왕, 헝가리 대통령과 총리 등 ‘개인 자격으로 온 귀빈들’, 레겐스부르크 교황 베네딕토 16세 연구소, 교황의 제자들 등 독일에서 온 조문객이 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헝가리를 대표하여 교황청에 8년째 상주 중인 합스부르크 에두와르도 대사도 보였고, 대만 대사도 보였다.
독일 태생의 거인들과 나란히 선 ‘천재’
독일 바이에른 시골의 소박한 사람들의 아들로 태어난 요셉 라칭거는 한 세기의 전기를 썼다. 영국의 역사가 피터 왓슨이 독일인 가운데 베토벤, 휠덜린, 칸트와 같은 거인들과 나란한 ‘천재’로 꼽은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베네딕토 16세보다 더 혹독하게 공격받은 교회 지도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말고는 없었다.
지구 전체에 걸쳐 베네딕토 16세 교황만큼 많은 사람이 경청한 예가 없다. 그 말씀을 세계 신문들이 1면에서 다루었다. 재위 첫해에만 베네딕토 교황을 에워싸며 모인 사람들이 거의 400만 명에 이르렀다. 이것도 기록이다. 교황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까지 상상할 수도 없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이 세기(世紀)에 베네딕토 16세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터다.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의 정신이 세대에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위대해지고 막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리라”라고 했다.
교황 선종 다음날 미사에서 베네딕토 교황 재임 8년을 “교회가 내적인 힘을 강화하고 영혼의 힘을 기르는 대피정(大避靜) 같은 시간이었다”고 한 정순택 대주교의 강론도 심상치 않다.
교황의 마지막 카드
장례미사 후의 일정은 풍성했다. 호텔을 나와 브리짓 하우스(Casa di Brigida)로 숙소를 옮겼다. 로마 한복판 파르네세 광장에 있는 수도원 숙소로 ‘15기도’로 유명한 스웨덴의 비르짓다 성녀가 직접 세운 수도원이다.
딱 30년 전인 1992년 4월 라칭거 추기경을 두 번째 뵈었을 때도 묵었던 곳이다. 날마다 전통 미사에 참례했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추기경의 관저도 보고 저녁식사도 함께 했다. 교황청 국무원장 파롤린 추기경과의 면담도 화기애애했다. 옛 대사관 가족들과도 저녁을 함께 했고, 옛 외교관 동료들도 보았고, 성당에 들어가면 아직 모셔져 있는 성탄 구유도 눈여겨보았다.
로마에 가면 늘 찾았던 비아 아피아 안티카(Via Appia Antica)라는 고대 로마의 길도 산보했다. 판테온, 나보나 광장, 트레비의 분수, 스페인 광장 같은 곳을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사람들로 와글와글한 낮, 하루가 저물어가는 저녁 무렵에도 가보았고, 그리스도교 역사의 변곡점이 되는 전투로 유명한 폰테 밀비오(Ponte Milvio)라는 유서 깊은 다리도 건넜다 돌아왔다. 여러 날 전부터 계획하고 갔던 과거 어느 때보다 충실한 일정이었다. 아쉬움과 허전함을 추스르며 1월 10일 저녁 10시의 서울 항공편에 오르니 염수정 추기경의 모습이 보였다.
“은퇴 후 한 번도 못 뵌 추기경님을 지난주에도 뵙고 오늘도 뵙다니 이것도 선종하신 베네딕토 교황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네요.”
1월 11일 저녁 인천에 도착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한데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성탄카드가 와 있지 않은가? 선종하시기 직전에 보내신, 내가 보낸 연하장에 대한 답장이었다.
“크리스마스 인사에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모든 분에게 복된 은총, 충만하고 평화로운 새해를 기원합니다.”
‘21세기의 현인’이 선종하시기 전 보내신 선물을 선종하신 후 받은 것이었다.⊙
95세셨으니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 없이 장수하신 셈이지만, 막상 서거 소식을 듣고 나니 상실감과 허전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연도)를 드리고 교황님 영혼의 천상 영복을 비는 지향을 담아 묵주기도를 드렸다. 멍한 상태에서 장례미사는 1월 5일 오전 9시30분 성 베드로 대광장에서 봉헌된다는 뉴스를 들었다.
전임 교황은 사제 서품 71년 동안 수많은 논문, 66권의 저서, 3종의 회칙, 4종의 권고를 내셨다. 인간에게 진정 자유, 평화, 행복을 원하면 하느님을 믿으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진리라고, 그리고 그 행동원리로서의 십계명을 따르라고, 십계명은 하느님을 향해 네라고 하는 대답이라고 하셨다. 선종 직전의 당신의 삶은 마지막 말 한 마디로 귀결되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급히 가방을 꾸렸다. 코로나19 봉쇄로 근 3년 막혀 있던 인천-로마 직항편(1월 3일 14:05)에 몸을 실었다. 탑승하고 보니 2021년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취임한 유흥식 추기경은 휴가를 마치고 로마로 귀임하는 길이었고, 염수정 추기경, 한국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등 한국 천주교 대표단도 보였다.
로마까지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 하늘길이 막혀 중국, 중앙아시아, 튀르키예(터키) 쪽을 통하느라 다른 때보다 2시간 이상 더 걸렸다.
교황의 빨간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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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아가니 입구에서 참배객에게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서명이 든 사진을 나누어주었다. |
1월 4일 새벽 5시경 산보 삼아 바티칸 성 베드로 대광장 쪽으로 나가보았다. 벌써 여러 곳에 조문객이 무리 지어 있는 게 아닌가. 늑장 부리다간 몇 시간씩 기다릴 것 같아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나갔다. 입장하려는 조문객들의 줄은 아직 길지 않았다. 가방검사와 검색대 통과 후 7시40분경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섰다. 입구에서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서명이 든 사진을 나누어주었다.
대성당 중앙 제대 앞에 안치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유해 앞에 모두들 머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고 조의를 표했다. 나는 거룩한 교황의 유해 바로 앞에서 기도드릴 수 있었다. 유해를 보니 ‘검은 구두’였다. 재위 중 ‘빨간 구두’를 신어 매스컴에서 ‘프라다 패션’이라 입방아를 찧어도 교황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실은 예수의 흘린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이어서였고 그게 오랫동안 교황의 관행이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사라진 관행을 살린 것뿐이었다.
교황과의 인연들
나는 무릎을 꿇고 매일 하는 ‘9일 기도’를 고인의 천상 영복을 비는 청원을 담아 바쳤다. 이어서 14세기 스웨덴의 성녀 비르짓다의 ‘15기도’라는 예수 수난을 묵상하는 기도를 바쳤다.
〈오, 예수님!
주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저희의
냉정함을 극복하도록 하소서.
올리브 산에서의 주님의 거룩한
수난을 묵상하고
그 신심의 기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총을
강물처럼 쏟아 주소서.
주님께 간구하오니 적어도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제 영혼과 마음으로 주님께서
올리브 산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함으로써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통회(痛悔·몹시 뉘우침) 개과(改過·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주님과 일치하게 해주소서.(하략)〉
만감이 교차하였다. 교황과의 31년간의 크고 작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1990년 독일 가기 직전 일본 교수 한 분이 쓴 논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여러 해 동안 요셉 라칭거[베네딕토 교황의 세속명] 추기경의 이름을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어학 과정이던 만하임의 한 성당 성물판매점에서 ‘라칭거 레포트’로 유명한 추기경의 대담집을 찾지 못했더라면, 그 후 뮌헨대학에서 “다음 주 수요일 당신이 좋아하는 라칭거 추기경의 미사가 있다”는 스페인 친구의 귀띔이 없었더라면, 라칭거 사제서품 40년 기념 미사 후 인사를 드리지 않았더라면, 로마로 편지를 쓰라는 추기경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다음 해 로마에서 독일 순례객들을 위한 라칭거 추기경 집전의 미사에 참례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전임 교황의 인연이 이어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
장례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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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과 필자. |
미사 후 제의(祭衣)방으로 들어갔다. 버크 추기경께 인사를 드렸다. “추기경님, 6년 전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 행사 때 파티마에서 뵈었어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를 알아보셨다. 성당을 나서는데 장례미사 취재차 여러 나라에서 온 저널리스트들이 보였다. 많은 이가 이구동성으로 ‘성인(聖人) 교황’ ‘교회의 스승’ ‘21세기의 천재 신학자’ ‘종합의 천재’의 선종을 애도하고, 앞으로도 부디 이러한 뛰어난 교황이 나오기를 염원하였다.
1월 5일 오전 9시30분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장례미사가 봉헌되었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보니 8시10분. 어제에 이어 9일기도를 바쳤다. 8시40분경 주교단이 입장하고, 8시45분경 ‘교황의 신사’들이 양쪽으로 6명씩 베네딕토 16세가 잠든 관을 제대 옆으로 천천히 옮겨, 광장 제대 앞에 안치했다.
미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하고 추기경단 단장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집전했다. 베네딕토 16세의 개인비서 게오르그 겐스바인 대주교가 그의 관에 성경을 펼쳐놓았다. 8시50분이 되자 참가자 모두 묵주의 기도 ‘고통의 신비’를 바쳤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장례미사는 125명의 추기경과 400여 명의 주교, 3700여 명의 사제들이 공동 집전했다. 그리고 신자 6만여 명이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웠다.
세속명 요셉 라칭거, 제265대 교황,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종신인 교황직을 사임한 베네딕토 16세는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이미 수없이 많은 기사가 있다. 장점이건 단점이건 부풀린 과장도 많고 축소도 많다. 현재 가톨릭교회 전체와 온 인류가 처한 정신 상황과 관련하여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모두가 전임 교황이 생전 치열하게 싸운 것들이다.
첫째, ‘공의회의 정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피곤한 현대인들에게 수월하게 신앙을 전할 수 있는 수많은 사목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공의회의 정신’이란 이름으로 교회를 파괴하는 일이 많았다. 교리가 무너졌고, 전례가 파괴되었고, 신학교, 사제직, 수도원이 무너져 내려갔다. 사제 서품 후 환속자는 늘어나고, 성소 지망자는 줄어들고, 개종자도 줄어들고, 수도회 입회자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성당과 수도원 어디를 봐도 거룩함이 사라져 갔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공의회의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개혁이라는 게 실은 ‘공의회의 정신(Geist des Konzils)’이라기보다는 ‘공의회의 망령(Konzils-Ungeist)’이라 했다. 바오로 6세의 말처럼 ‘자기 비판’에서 ‘자기 파괴’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했다. 생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공의회 이후의 잃어버린 것의 회복을 주장했다. 흔쾌한 찬성과 격렬한 반발이 뒤따랐다.
둘째, 진보 신앙. ‘진보와 자유’는 근대(近代)의 구호이다. 하지만 무엇이 진보인가? 진보의 개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인식의 진보, 즉 깨달음이다. 오늘날 우리는 DNA, 즉 생명의 구조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는 것은 곧 힘이다. 그런데 이게 맞는가? 내가 파괴할 수 있으면 그것이 진보인가? 생명을 만들고, 선별하고, 또 처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진보인가? 지식을 통한 인간의 힘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하지만 그 윤리적 측면에 대한 성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보’를 살리려면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성찰, 인류 전체의 양심 성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방신학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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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국무원장인 파롤린 추기경과 함께. |
믿음 없는 사회 참여 사제들이 예수님의 강생구속[降生救贖·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됨’[강생]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 보속(補贖)했으므로 누구든지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이 불의(不義)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십자가상에서 수난받고 돌아가신 것 역시 정치적인 이유에서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베네딕토 전임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신 이유가 사회의 구조개혁이나 체제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프랑스 혁명은 일종의 부르주아 혁명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완전한 세상을 이끌기는커녕 비참한 파괴만을 남겼다. 하느님 없이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 인간만의 나라는 반드시 ‘전도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영원히 지속될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사람은 거짓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외적인 체제나 시스템만으로 결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이러한 종류의 희망은 거짓에 불과하다. 구원은 인간의 내면이 사랑으로 채워질 때 가능하다.
해방신학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민중들로부터 나와 저절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부유한 서방 세계에서 태어나거나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해방신학을 맨 처음 만들어낸 신학자들은 유럽인들이다. 남미에서 그것을 권장한 신학자들은 유럽인이거나 유럽의 대학에서 교육받은 이들이다. 이들의 설교 언어인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 뒤에서 독일, 프랑스, 영미의 사고를 느끼게 된다. ‘해방신학은 선진 서방에서 만들어진 신화(神話)와 유토피아가 제3세계에 수출된 것’의 일부에 불과하다.
넷째, 죽음의 문화. 모든 것이 연결된 것이다. ‘신 없는 휴머니즘’(앙리 드 뤼박)은 이른바 지상낙원이라는 프로젝트로 애초부터 파멸을 선고받은 상태이다. 작금의 포스트휴머니즘은 배 속의 생명 살해(낙태), 안락사, 자살 방조, 동성애라는 생명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를 장착한 것으로 현대인의 온갖 불행과 절망의 원인이다. 우리는 성과 출산의 분리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한 남자와 한 여자여야 한다는 자연법칙이 무너지고,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관계도 똑같은 것으로 취급된다면, 그것은 사람이란 존재를 만드는 형식의 기본 틀마저도 손상시키는 것이다.
교황이 집전한 장례미사
9시30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장례미사가 시작되었다. 미사 경문은 대부분 라틴어였다. 하나같이 그레고리안 성가였다.
제1독서는 “불행하여라, 자기네 계획을 주님 모르게 깊이 숨기는 자들!”과 “거꾸로 행동하는 너희들!”을 질타하는 이사야 예언서(29, 16~19)였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는 시편이 이어지고, 제2독서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다”는 베드로의 첫째 서간(1,3~9)이 뒤따랐다.
복음 말씀은 루가 복음에 나오는 ‘천국 1호 입장’ 도둑의 이야기였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시오”라고 예수를 모독했다.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는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면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 39~46)
이 애틋한 스토리의 복음에 이곳저곳에서 조용한 감탄의 호흡이 들리는 듯했다.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처럼 우리도 스러지지 않는 사랑을 다시 한 번 보여주기 위해 감사의 향유와 희망의 유향을 들고 여기에 모였다”면서 “일생을 바쳐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 하신 분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분을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 맡기자”고 했다.
“산토 수비토, 베네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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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의 고향에서 온 독일 참배객들과 자리를 함께한 정종휴 전 대사. |
“산토 수비토(Santo subito), 베네딕토!” “산토 수비토, 베네딕토!”
이런 크고 작은 외침도 있었다. ‘산토 수비토’는 ‘바로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라’는 뜻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종이 엄숙하게 울리는 가운데, 교황의 관은 대성당 안으로 옮겨졌다. 장례미사의 전체적인 톤은 정숙하고 조용했다. 이데올로기적 외침이 전혀 없는 진정한 레퀴엠(장례미사)이었다고 할까.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의 관은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됐다. 성 요한 23세 교황과 자신의 전임자였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묻힌 자리다. 교황청은 1월 8일부터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묘지를 일반에 공개했다.
미사 후 광장 제대 쪽으로 가니 이탈리아와 독일의 대표단, 벨기에 국왕, 헝가리 대통령과 총리 등 ‘개인 자격으로 온 귀빈들’, 레겐스부르크 교황 베네딕토 16세 연구소, 교황의 제자들 등 독일에서 온 조문객이 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헝가리를 대표하여 교황청에 8년째 상주 중인 합스부르크 에두와르도 대사도 보였고, 대만 대사도 보였다.
독일 태생의 거인들과 나란히 선 ‘천재’
독일 바이에른 시골의 소박한 사람들의 아들로 태어난 요셉 라칭거는 한 세기의 전기를 썼다. 영국의 역사가 피터 왓슨이 독일인 가운데 베토벤, 휠덜린, 칸트와 같은 거인들과 나란한 ‘천재’로 꼽은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베네딕토 16세보다 더 혹독하게 공격받은 교회 지도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말고는 없었다.
지구 전체에 걸쳐 베네딕토 16세 교황만큼 많은 사람이 경청한 예가 없다. 그 말씀을 세계 신문들이 1면에서 다루었다. 재위 첫해에만 베네딕토 교황을 에워싸며 모인 사람들이 거의 400만 명에 이르렀다. 이것도 기록이다. 교황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까지 상상할 수도 없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이 세기(世紀)에 베네딕토 16세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터다.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의 정신이 세대에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위대해지고 막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리라”라고 했다.
교황 선종 다음날 미사에서 베네딕토 교황 재임 8년을 “교회가 내적인 힘을 강화하고 영혼의 힘을 기르는 대피정(大避靜) 같은 시간이었다”고 한 정순택 대주교의 강론도 심상치 않다.
교황의 마지막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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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이 2022년 말 정종휴 전 대사에게 보낸 연하장. ‘21세기의 현인’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
딱 30년 전인 1992년 4월 라칭거 추기경을 두 번째 뵈었을 때도 묵었던 곳이다. 날마다 전통 미사에 참례했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추기경의 관저도 보고 저녁식사도 함께 했다. 교황청 국무원장 파롤린 추기경과의 면담도 화기애애했다. 옛 대사관 가족들과도 저녁을 함께 했고, 옛 외교관 동료들도 보았고, 성당에 들어가면 아직 모셔져 있는 성탄 구유도 눈여겨보았다.
로마에 가면 늘 찾았던 비아 아피아 안티카(Via Appia Antica)라는 고대 로마의 길도 산보했다. 판테온, 나보나 광장, 트레비의 분수, 스페인 광장 같은 곳을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사람들로 와글와글한 낮, 하루가 저물어가는 저녁 무렵에도 가보았고, 그리스도교 역사의 변곡점이 되는 전투로 유명한 폰테 밀비오(Ponte Milvio)라는 유서 깊은 다리도 건넜다 돌아왔다. 여러 날 전부터 계획하고 갔던 과거 어느 때보다 충실한 일정이었다. 아쉬움과 허전함을 추스르며 1월 10일 저녁 10시의 서울 항공편에 오르니 염수정 추기경의 모습이 보였다.
“은퇴 후 한 번도 못 뵌 추기경님을 지난주에도 뵙고 오늘도 뵙다니 이것도 선종하신 베네딕토 교황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네요.”
1월 11일 저녁 인천에 도착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한데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성탄카드가 와 있지 않은가? 선종하시기 직전에 보내신, 내가 보낸 연하장에 대한 답장이었다.
“크리스마스 인사에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모든 분에게 복된 은총, 충만하고 평화로운 새해를 기원합니다.”
‘21세기의 현인’이 선종하시기 전 보내신 선물을 선종하신 후 받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