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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주한대사 인터뷰 | ‘찌링 보툼 랑세이’ 주한 캄보디아왕국 대사

“총칼 대신 토지 소유권으로 농민을 잘사는 길로 인도했다”

글 : 류종수  연세대 보건대학원 겸임교수·서울의과학연구소(SCL Healthcare Group)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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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인이냐 공직이냐 갈림길에 놓였을 때, 아버지 “사랑하는 딸 찌링아! 큰돈 버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서 일해라”
⊙ 호주 유학 후 민간기업에서 일하다가 캄보디아 토지개혁 사업 참여… 우정통신부·외교부 차관 거쳐 37세 때 주한대사로 부임
⊙ “캄보디아 新婦만 8000명, 캄보디아인 5만 명이 한국에 거주”
⊙ “年평균 6% 성장… 100% 투자 지분 보장, 100% 수익 송금 보장”

柳鐘守
1962년생. 연세대 보건학 박사 / 美뉴욕플러싱 YMCA 이사장, 뉴욕가톨릭재단 부총장, 유엔재단 새천년개발사업 고문, 現 바레인왕국 국가보건의료최고위원회 고문, 남미개발은행(IDB) 남미국가 진단검사역량 강화사업 수석책임역, 서울의과학연구소(SCL) 국제사업 고문, 연세대 보건대학원 초빙교수

[편집자 註]
필자는 연세대 의료원-서울의과학연구소와 함께 세계은행의 국가 건강보험 전산화 시스템 자문 사업, 중남미개발은행(IDB)의 남미국가 COVID-19 진단검사 역량 강화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하는 중남미·동남아시아 지역 대사들과 만나 협의를 진행하는 것이 업무의 큰 부분이다. 주한대사들이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 대사들이 전하는 지구촌 국가들의 오늘을 《월간조선》 독자들과 나누려고 한다.
  지난 9월 11일 부임 1년을 맞은 찌링 보툼 랑세이 주한캄보디아대사를 서울 연희동 대사관저에서 만났다. 지난해 서울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녀는 만 37세, 대한민국에 부임한 최연소 대사 기록을 세웠다.
 
  연세대학교 북문 쪽 기숙사 뒤편에 위치한 대사관저는 나무들이 무성한 산자락 바로 아래였다. 응접실 소파에 앉으니 새파란 가을 하늘과 잘 정리된 잔디밭이 한눈에 들어왔다.
 
  랑세이 대사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그녀는 29세에 공직 생활을 시작해 캄보디아 우정통신부 차관보와 차관으로 6년 동안 일했다. 35세에 외교부로 자리를 옮겨 차관보와 차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주재 대사로 파견됐다.
 
  랑세이 대사는 캄보디아의 외교부 차관으로 양국 간 FTA 협상을 타결 지었고, 7개월 후 주한캄보디아대사로 부임했다.
 
  캄보디아가 아무리 개발도상국가이긴 하지만 이런 고속 출세가 여성인 그녀에게 가능했던 이유는 뭘까? 30대 후반의 미혼 여성 대사와 긴 인터뷰를 이어가면서, 그녀에게 가졌던 내 선입견은 모두 깨졌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금수저’가 아니었다.
 
  캄보디아의 가장 가난한 지역사회에서 그녀 스스로 맨손으로 쌓아 올린 성공 스토리의 비밀을 그녀는 내게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캄보디아 개황 (CIA 월드팩트북)
 
  ·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 국가원수: 노르돔 시하모니 (2004년부터 재위)
  · 총리: 훈센 (1985년부터 재임)
  · 수도: 프놈펜
  · 1인당 실질 GDP: 4200달러 (2020년 추정)
  · GDP: 220억9000만 달러 (2017년 추정)
  · 경제성장률: 6.9% (2017년 추정)
  · 국토면적: 18만1035㎢
  · 인구: 1671만3015명 (2022년 추정)
  · 종교: 불교(공인) 97.1%, 이슬람 2%, 기독교 0.3%, 기타 0.5% (2019년 추정)
 
  증조부, 공부하기 위해서 동자승이 돼
 
  “우리 집안은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 뭔가 이뤄내야 한다는 성취욕은 강했습니다. 증조할아버지는 글을 배우려고 사찰의 동자승(童子僧)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셨고, 아버지는 공병 장교로 근무하고 계십니다.”
 
  랑세이 대사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캄보디아에서 다녔다.
 
  “중학교까지 저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암기식 교육 위주였는데, 저는 수업에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공부가 부담스러웠어요.”
 

  그녀는 호주에 이민 간 고모의 초청으로 호주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녀 인생의 반전(反轉)은 여기서 시작됐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공부를 잘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수학, 물리, 화학,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적을 냈어요. 호주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영국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 토론과 논리 개발, 발표 위주의 수업이 제게 맞았습니다. 저는 영국식 교육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탁월한 영어 구사 능력을 가진 그녀는 글로벌 교육 회사의 캄보디아 지사장으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 “나라를 위해 일하라”
 
  이때 그녀는 훈센 총리가 열정적으로 추진한 국가 토지개혁 사업에 동참했다. 전국의 국유지(國有地) 중에서 민간이 경작 중인 토지를 개인에게 불하(拂下)해주는 사업이었다. 1년 정도 현지 조사, 평가단원으로서 농촌과 산촌 밀림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회사의 양해를 얻어 두 가지 일을 병행했다.
 
  나라 일을 하며, 회사 일까지 잘 해내는 지사장에게, 회사는 공공 활동은 포기하고, 캄보디아 지사와 아시아 지역 사업개발 책임까지 맡아서 회사 업무에만 전념해줄 것을 요구했다.
 
  회사 측은 고위 공무원 급여의 수십 배에 달하는 연봉을 제시했다고 한다. 수도 프놈펜에 위치한 큰 집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연봉이었다. 27세의 젊은 비즈니스 여성 랑세이는 갈림길에 섰다.
 
  “아버지는 세 딸에게는 경영 쪽의 일을 하도록 권유했고, 아들은 군대에서 공병 장교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뜻대로 경제·경영학을 공부하고 개인 기업에서 일하게 됐어요. 이윤 추구냐, 공직이냐 고민할 때 아버지는 뜻밖에 ‘나라를 위하여 일하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랑하는 딸 찌링아! 큰돈 버는 것보다 나라를 위해서 일해라.’”
 
  그녀가 뛰어들었던 토지개혁 사업은 개발이 금지된 오지(奧地)의 국유지에서 불법 경작하는 농민이나 화전민(火田民)들을 심사해 그들에게 땅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사업이었다. 농민들에게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땅의 소유권을 부여하는 토지개혁 사업이었다. 한편으로는 빈농(貧農)들을 긴급 구제하는 복지 사업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그녀는 현장 심사요원으로 캄보디아의 산촌과 농촌 오지를 누볐다. 흔한 말로 고생을 사서 하며 일했다고 한다.
 
 
  훈센 총리 아들과 토지개혁 사업
 
토지개혁 사업 당시 부상을 당했다가 현장으로 복귀하는 찌링 보툼 랑세이 대사. 손에 들고 있는 통은 구명조끼 대신 사용하기 위한 빈 플라스틱 통이다.
  부정부패 없이 토지개혁 사업을 신속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훈센 총리는 자신의 둘째 아들 훈마닛에게 사업의 총괄 책임을 맡겼다. 훈마닛은 현재 캄보디아 군사정보부(한국의 국정원)의 최고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훈센 총리의 둘째 아들인 훈마닛 특별보좌관은 중앙과 지방 정부의 공무원들 외에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19명의 젊은 인재를 선발했다. 훈마닛이 발탁한 19명의 청년 지도자 가운데 여성은 랑세이 대사 한 명뿐이었다.
 
  랑세이 대사는 훈마닛 특별보좌관의 지휘 아래 현장 심사요원으로 일했다. 영국 대학 기숙사에서 살던 그녀는 한순간에 캄보디아 산간 오지와 외딴 농촌에 던져졌다. 수세식 화장실에서 구더기가 들끓는 푸세식 뒷간으로, 포근한 침대에서 빈대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농가의 짚더미 숙소로, 문명에서 야만으로….
 
  게다가 그녀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생활고에 찌든 빈농, 화전민들이었다. 그들은 이 우아한 여성 일꾼이 언제 백기(白旗)를 들고 떠날 것인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제가 어린 시절 군인 아버지께서는 강한 정신을 갖도록 교육을 했습니다. 어려운 집안에서 살다가 호주 유학 기회를 얻었지만, 대학·대학원은 모두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어요. 더구나 캄보디아의 앞날을 결정할 토지개혁 사업을 추진한다는 강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중도에 포기하겠어요.”
 
  30도를 훌쩍 뛰어넘는 더위를 무릅쓰고, 전기·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산간벽지와 오지를 찾아다녔다. 오지의 주민들을 따뜻하게 포용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심사하겠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산골 현장에서 직원들과 큰 나무 밑에서 회의를 하던 중 나무의 큰 가지 하나가 부러졌어요. 나뭇가지가 저를 후려쳐 뼈들이 어그러지면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프놈펜으로 후송되어갔어요. 석 달 가까이 기억력을 정상으로 회복하지 못하는 큰 사고였습니다. 다행히 척추나 머리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아, 다시 토지개혁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 년 만에 수백 명의 직원을 지휘하는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랑세이 대사는 그 시절의 사진 한 장을 내게 보여주었다. 오른쪽 팔에 깁스를 한 그녀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이었다. ‘왼손에 든 노란 통은 물통이냐?’고 물었더니 “구명조끼 대신 들고 탄 빈 통”이라고 했다.
 
  랑세이 대사의 강인한 눈매는 험난한 토지개혁 사업 경험에서 만들어진 듯했다.
 
  “우리는 총과 칼을 든 구속이 아닌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는 방법으로, 농민들을 보다 평등하고 부유하게 사는 길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는 빈농들에게 토지를 안겨줌으로써 캄보디아를 보다 나은 나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호주와 영국에서 공부한 경제학 원리에 합치하는 일이었습니다.”
 
 
  킬링필드
 
캄보디아 뚜얼슬랭 학살박물관. 이 박물관은 1975년 집권한 크메르루주가 비밀 감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사진=조선DB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화혁명(1966~1976년) 시절 오지로 하방(下放)되었던, 시진핑(習近平) 같은 중국 지도자들이 떠올랐다.
 
  중국에 극좌(極左) 모험주의로 치달았던 문화혁명이 있었다면, 캄보디아에는 킬링필드가 있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정권(1975~1979년)은 5 년 동안 사회 정화와 농촌화를 위해 수백만 명의 자본가와 지식인, 그중에서 도시 중산층을 집중적으로 섬멸했다. 크메르루주가 집권한 1975년 당시 캄보디아의 인구는 750만 명. 이 가운데 적게는 150만 명에서 300만 명이 크메르루주의 처형, 집단화에 따른 기근으로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 정권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다. 하지만 독일인들에게 유대인은 다른 인종이었고,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유대인 혐오의 연장선상에서 유대인 학살이 이뤄졌다.
 
  크메르루주는 이민족도 아닌 내 동족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이 공산화 과정에서 수천만 명을 집단 학살 또는 아사(餓死)시켰다고 하지만, 인구비례로 따지면 크메르루주의 학살에 한참 못 미친다.
 
  크메르루주는 마오쩌둥주의를 추종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통이론에서 보면 조악하기 그지없는 이데올로기를 신봉했다. 산업화로 가기 위한 농업의 집단화가 아니라 ‘원시(原始) 농업 공산 사회’로 돌아가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서구의 어느 공산 사회에서도 볼 수 없는 ‘농업화’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도시는 모든 탐욕과 악(惡)이 모인 소돔과 고모라였다. 모두가 삽 들고 곡괭이 들고 공동 소유의 땅을 갈아서 곡물을 생산하고, 그걸 공평하게 나눠 먹는 사회가 크메르루주의 이상향(理想鄕)이었다.
 
  크메르루주의 ‘홍위병(紅衛兵)’인 10대 소년·소녀들은 전국을 돌며 집단 학살의 선봉이 됐다. 영화 〈킬링필드〉에서 보듯이 혁명의 적들을 가려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는 사람들을 골라내서 죽였다. 총알이 아까워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워 죽였다.
 
 
  캄보디아의 ‘바링허우’ 세대
 
찌링 보툼 랑세이 대사는 자신이 관리하는 코뮨의 진흙길을 포장하는 사업을 성사시켰다.(왼쪽이 랑세이 대사)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끝난 후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을 ‘바링허우(八零後)’라고 부른다. 랑세이 대사는 캄보디아의 ‘바링허우’ 세대다. 크메르루주의 대학살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그 시기가 남긴 트라우마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크메르루주는 문화혁명 시절의 중국공산당처럼 대학살을 통해 캄보디아가 일어설 수 있는 물적·인적 토대를 모조리 쓸어내 버렸다. 똑똑한 놈, 잘난 놈, 경제에 보탬이 될 놈을 다 학살해버렸다.
 
  랑세이 대사 세대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비극이 쓸고 간 캄보디아 땅에 던져졌다. 화성보다 척박한 땅이지만, 외국에서 공부하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읽는 젊은이들에게는 그들의 역량에 맞는 일이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다. 랑세이 대사의 눈부신 도약은 크메르루주의 학살과 몰락이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가능했던 셈이다.
 
  랑세이 대사는 우정통신부 차관으로 일할 때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한 번은 5일간의 휴가를 내어 혼자 제주도를 여행했다. 제주도의 하늘과 바다, 올레길과 제주의 음식에 반했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고위 공무원들은 정당에 소속되어 있다. 고위 공무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지역 주민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정치적인 지지를 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랑세이 대사가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에 익숙한 필자의 머리로는 확연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캄보디아식 정치 제도다.
 
  고위 공직자가 관리해야 할 지역을 코뮨이라고 부른다. 랑세이 대사의 코뮨은 수도 프놈펜에서 한 시간가량 거리의 농촌 지역에 있다. 주민 5000명이 그녀의 책임하에 있다.
 
  그녀의 코뮨은 강 중간에 길게 늘어진 삼각주의 섬이다. 땅이 비옥해서 농산물의 질이 좋다고 한다. 주머니가 넉넉한 이 지역 주민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낮은 편이라고 한다.
 

  랑세이 대사는 프놈펜에서 일할 때 주말마다 자신의 코뮨을 찾아 주민들의 민원을 청취하고, 불편을 해결해주는 일을 했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공개한 성공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비만 내리면 수레바퀴가 진흙 수렁에 빠져, 농작물을 배가 들어오는 항구까지 운송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팔을 걷어붙이고 17km나 되는 흙길을 시멘트로 포장했습니다.”
 
  국가 토지개혁 사업을 위해 캄보디아 오지를 구석구석 누비며 주민들의 어려움들을 해결하던 경험이 코뮨 관리에서 곧바로 활용됐음은 물론이다.
 
  “먼저 중앙정부를 설득해 적은 예산으로 자갈길부터 만들었어요. 그다음에 다시 정부 예산을 끌어들여서 시멘트로 포장했습니다.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가장 적은 비용으로 공사해줄 업체를 찾는 데도 관여했습니다. 포장도로의 길이가 17km니까 작은 사업은 아니죠. 저는 인프라 구축이 지역 주민들의 소득 수준 향상에 가장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코뮨 주민들의 지지를 돈과 환심을 끄는 선물로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코뮨 근처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도로가 만들어진다는 정보를 듣고, 그 다리와 도로가 자신의 코뮨을 지나가도록 노선을 변경하는 데 성공한 일도 있다. 이 일로 ‘랑세이 코뮨’의 땅값이 10배로 뛰어올랐다.
 
  “국가 토지개혁 사업을 함께했던 선배가 국토개발부 고위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찾아가서 공공사업의 목적에 위반되지 않는다면, 그 다리가 우리 지역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설득했죠. 사무실로 수십 번을 찾아가고, 전화 통화도 셀 수 없이 했습니다. 결국 제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땅값이 뛰어올라 주민들이 너무 좋아했지요. 저는 그 지역에 단 한 평의 땅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코뮨에 땅을 사두었으면 지금 엄청난 부자가 됐겠죠. 그랬다면 지금의 저는 있을 수 없겠죠.”
 
 
  캄보디아 신부 8000명
 
  두 시간 정도 예상했던 인터뷰가 세 시간이 넘어가는 데도, 랑세이 대사는 에너지가 넘치는 목청으로 말을 이어갔다.
 
  캄보디아는 2022년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의 의장국이다. 랑세이 대사는 2022년 후반기 한국 주재 아세안 10개국 대사들의 대표를 맡고 있다. 캄보디아 본국과 주변국, 한국에서 열리는 다양한 모임에 참석하느라 분주하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캄보디아인은 5만 명 정도. 한국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신부(新婦)가 8000여 명이다.
 
  부산, 안산, 목포, 대구, 창원 등 여러 거점 도시를 방문하여, 한국 주재 국민들을 돌보는 것이 대사의 큰 책무 중 하나다. 지역사회의 산업계·의료계 리더들을 부지런히 접촉하면서, 캄보디아인들을 잘 챙겨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은 성격이 온화하고 열심히 일해서 한국의 고용주들이 좋아합니다. 캄보디아 여성 8000명 정도가 한국 남성들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1만 명에 달하는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저출산 추세와 노동력 부족 현상을 한국 정부가 지혜롭게 잘 해결해나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캄보디아 대사로서 성심성의껏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베트남보다 매력적인 투자처”
 
캄보디아는 2021년 2월 3일 한국과 FTA를 체결했다.
  랑세이 대사는 한국과 캄보디아가 FTA 체결국임을 강조하면서, 한국 기업의 투자를 요청했다. 대사는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외국 투자자의 100% 지분을 보장하고, 이익을 100% 달러로 송금하도록 허용하는 나라는 캄보디아뿐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베트남보다 더 매력적인 투자처가 캄보디아·라오스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캄보디아는 자국 화폐인 리엘과 달러를 함께 사용합니다. 캄보디아 정부는 외국 기업의 100% 지분 투자를 허용합니다. 캄보디아에서 번 돈은 100% 달러로 외국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외국인이 투자하면 다년간 세금 혜택도 받을 수 있고,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에 부동산 투자 이익도 만들 수 있습니다. 개발도상국 중에서 캄보디아만큼 외국 투자가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시장은 드뭅니다. 세계은행이 2022년과 2023년 등 앞으로 연(年) 6%의 경제성장과 사회와 정치의 안정도가 높다고 보고서에 발표했습니다.”
 
  그녀는 “캄보디아인 90%가 백신 접종을 완료했다”며 “캄보디아 여행이 다른 지역 방문보다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앙코르와트 같은 세계적인 유적지에 한국분들이 많이 방문하지만, 캄보디아에는 이외에도 아름답고 조용한 해변 휴양지들이 별처럼 많습니다. 신비한 자연환경에서 가성비 높은 휴가를 즐기시려는 한국인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우리 캄보디아 대사관이 친절한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함께 세상을 밝히자’
 
찌링 보툼 랑세이 대사는 캄보디아 외교부 차관을 지냈다. 2019년 10월 아시아-유럽 공공외교 훈련 관련 행사에서 연설하는 찌링 대사.
  한국 대사로 3년의 임기를 마치면 랑세이 대사는 마흔 살을 맞게 된다. 40대의 10년은 무얼 하고 싶은지 물었다.
 
  “스티브 잡스가 얘기했던 것처럼 뒤를 돌아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어떤 미래로 연결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찍는 점들이 어떻게든 미래에 연결되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믿어야죠. 이를테면 배짱, 운명, 인연 같은 것들이요. 아무리 힘든 시간에도 내 별이 빛이 나게 하고, 다른 별들을 함께 빛나게 해서 세상을 밝혀야죠.”
 
  ‘함께 세상을 밝히자’는 그녀의 이야기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랑세이 대사는 자연 속에서 혼자 걸으면서 자신의 삶과 세상을 성찰한다고 했다. 대사관저 뒤편에 있는 안산이 그녀가 시간이 날 때마다 찾는 산책로다.
 
  “‘당신은 어마어마한 특혜를 누리고 있지 않으냐’는 시각이 저를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제게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옥죄는 ‘유리 천장’을 캄보디아와 한국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밝히기 위해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저는 늘 우리 캄보디아 국민들이 더욱 행복하고, 건강하고, 풍요해지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마 그녀는 40대의 10년 역시 캄보디아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을 것이다.
 
 
  결혼보다 국가
 
  마지막으로 미혼의 여성 대사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께서 결혼하라고 재촉하시지는 않나요?”
 
  랑세이 대사는 동양 남자의 투박한 질문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결혼하라고 많이 하셨지요. 저는 일에 빠지면 몰입합니다. 결혼하고 가정을 가지는 일이 내일의 우선순위에 올라온 적이 없습니다. 제 부모님도 이제 제가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하시는 거 같습니다.”
 
  ‘저는 국가를 위한 일들과 결혼했어요’라고 선언하는 랑세이 대사에게 짓궂은 질문을 더 할 수는 없었다.
 
  초고속으로 발전해가는 캄보디아의 국가 건설 속에서 그것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는 랑세이 대사. 자기 확신, 타인에 대한 배려,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섬세함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예리하고 상냥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다.
 
  한국에 거주하는 5만 캄보디아인. 어디서든 그 사람들을 만나면 내 형제처럼 한번 꼭 껴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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