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의 熱戰, 한국의 이념적 內戰의 본질은 같아
⊙ 젤렌스키, 한국의 성장 발전을 흠모… 자유민주문명인 西歐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 자유민주문명 국가로 재탄생하는 데 실패한 러시아, 反動으로 退行
⊙ ‘역사의 종언’의 종언… 시진핑의 중국, 푸틴의 러시아가 覇權 야욕 불태워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 젤렌스키, 한국의 성장 발전을 흠모… 자유민주문명인 西歐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 자유민주문명 국가로 재탄생하는 데 실패한 러시아, 反動으로 退行
⊙ ‘역사의 종언’의 종언… 시진핑의 중국, 푸틴의 러시아가 覇權 야욕 불태워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 수도 키이우에 남아 항전을 지휘하고 있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젤렌스키 유튜브 캡처
치열했던 3·9 대선(大選)이 끝났다. 윤석열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투표 직전 여론조사에서는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신승(辛勝)이었다. 예상이 빗나갔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모로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3·9 대선의 전체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다. 3·9 대선은 정당 간의 통상적인 정권 다툼이 아니었다는 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저변에는 대한민국의 앞으로의 총체적 향방을 둘러싼 거대한 격돌이 있었다.
그 함의는 공교롭게도 한국에서의 3·9 대선 선거전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와중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시사(示唆)해주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전체주의적 반동(反動)으로 퇴행(退行)하고 있는 국가가 자유민주문명으로 향하고 있는 나라를 침공한 것이다.
“우리는 西歐의 理想을 위해 죽어가고 있다”
3·9 대선 선거전 당시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라의 일” 운운했다. 그러면서 “중국도 북한도 자극해선 안 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사실 대다수 서구 언론 등이 전망했듯이 단기간에 우크라이나의 항복으로 끝났다면 그런 논리가 한국의 대선전(大選戰)에서 위력을 발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아무 상관없는 남의 나라 일이 이미 아니었다. 더욱이 우리가 반드시 수호해야 할 문명적 가치가 무력(武力)으로 직접적 침공을 당한 사태였다. 그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기적과 번영은 위대한 지도자와 국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노력이라는 것을 빼면 자유민주문명의 일원이 됐다는 게 가장 결정적인 힘이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자유민주 대한민국 건국과 한미(韓美) 동맹의 수립은 예언적 위업이었다. 그리고 이후 수많은 진통을 겪으면서도 대한민국은 근본적으로 자유민주문명권 일원의 자리를 지켰다.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은 이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서구(西歐) 각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초기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두고 ‘코미디언 출신의 초보 정치인’ 운운하는 비웃음이 있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의 최고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였다. 더욱이 그는 집권한 뒤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언급하며 한국을 모범으로 삼아 우크라이나도 그렇게 발전하게 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이승만과 박정희(朴正熙)에 대해서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성장 발전을 알고 흠모할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문명인 서구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단순한 초보가 아니었다.
더욱이 쳐들어가면 바로 도망칠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그는 결연한 의지로 침공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 세계를 움직였다. 피신을 제안하는 미국에 대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신처가 아니라 탄약”이라고 했으며 EU정상회의에 화상으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 “우리는 서구의 이상(理想)을 위해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장엄했다.
자유민주문명의 가치 수호와 관련된 문제
우크라이나의 싸움은 그냥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 이론으로만 헤아릴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의 세계,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의 번영과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했던 자유민주문명의 가치 수호와 관련된 문제다. 어떻든 무조건 전쟁 없는 평화가 좋으며 패권(覇權)의 야심을 불태우는 자들이 아무리 도발을 가해와도 그래도 그저 자극하지 않고 달래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민주문명은 그따위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지구 반대편에서 열전(熱戰)으로 자유민주문명과 반동적 전체주의 패권국가가 싸우는 와중에 대한민국에선 대선이 진행되었다. 한국의 대선은 무기를 든 열전은 아니었지만 문명적 가치, 이념적 가치의 차원에선 또 전면적인 내전(內戰)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의 3·9 대선은 일단 윤석열 당선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신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격돌이 문명적 가치, 이념적 가치의 타협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단지 선거만 끝났을 뿐이다. 가치 수호를 위한 싸움은 더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다.
문명적 성취는 그냥 물질적 성취가 아니다. 물질적 성취와 정신적 구현이 따로 가는 문명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삶이 그렇듯 문명은 물질적 성취임과 동시에 이념적 가치의 구현이다.
고대(古代)에 최초의 몇몇 문명이 등장한 이래 세계 도처에서 크고 작은 문명들이 명멸해왔다. 지역별로, 그리고 시대별로 나름의 성취를 이룩하고 또 유산을 남겼다. 그런데 지금은 그 각각의 구분을 넘어서는 문명이 자리 잡았다. 근대문명이다. 출발은 서구의 근대에서부터였다. 그래서 시작점에서 보자면 분명히 서구문명이지만 근대문명은 더 이상 서구만의 것이 아니다. 하나의 보편문명이다.
문명은 퍼져나가고 모방하고 그러면서 변모하고 또 성장한다. 문명의 역사란 본래 그러하다. 문명에는 저작권이 없다. 서구문명 자체부터가 그렇다. 서구문명의 뿌리에는 그리스-로마 고전문명과 기독교문명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서구인들은 종족적·민족적으로는 고대의 바로 그 주역들의 직접적 후예가 아니다. 그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새로운 주역들이 학습하고 수용하면서 문명적 성장을 했다. 그리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또 다른 문명적 성취를 하게 됐다. 평탄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안팎으로 격렬한 진통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획기적인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자유의 문명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가 성장하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가 일반적 원리로 자리 잡아갔다. 과학기술이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고 산업혁명이 이루어져 갔다. 이 각 영역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가 서로를 이끌며 하나로 엮여 있었다. 그런데 이념적 가치관의 차원에서 핵심적 견인차는 ‘자유’였다. 근대문명은 자유의 문명이다.
산업혁명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시장경제 원리의 강력한 작동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를 위해선 생각의 자유, 소유권과 이익 추구의 자유가 중요했다. 자유의 원칙이 힘을 발할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그것을 보증하는 게 필요했다. 중세적 신분질서가 퇴장하고 민주주의가 성장하면서 그 같은 흐름은 강화됐다.
민주주의는 처음에는 폭주했다. 그러나 긴 역사적 흐름에서 보자면 자유와 민주주의는 하나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는 단지 정체의 한 형태이지만 자유와 만나고 그것을 뒷받침하게 되면서 자유의 힘이 만개하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래서 근대문명은 ‘자유민주문명’이다.
나라마다 구체적 전개 양상에서 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큰 차원에서 보자면 서구 근대문명의 성장은 자유를 머리와 심장으로 하여 성장하고 발전해갔다. 그리고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하고 힘을 갖추면서 세계를 석권해갔다. 비(非)서구권의 후발국(後發國)들은 서구 국가들의 그 힘과 조우(遭遇)하면서 근대문명을 만나게 됐다.
적극적 수용도 있었다. 더 많이는 일단은 고통이 먼저이긴 했다. 그래서 저항도 있었다. 그러나 긴 역사적 시야에서 보자면 근대문명과의 만남과 수용은 근본적으로는 결코 불행이 아니었다. 자유민주문명은 후발 후진 지역의 사람들에게 생존조건과 인간적 대우에서 그 이전보다는 어떻든 더 나은 삶이 시작될 수 있게 했다.
자유민주문명의 선봉이 된 독일
2월 27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연방의회 특별회의에서 “2022년 2월 24일은 유럽 대륙의 역사에서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고 했다. 2월 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날이었다. 2월 27일 베를린 시내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는 시위가 있었다. 50만 인파가 집결했다.
독일의 전임(前任) 메르켈 총리는 매우 친(親)러시아적이었다. 탈(脫)원전을 밀어붙이고 러시아로부터의 가스관을 설치해 대량으로 수입하도록 했다. 러시아는 덕분에 큰 이익을 보았다. 미국의 반대가 만만찮았지만 메르켈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독일과 러시아의 그 사이좋은 동반관계가 깨졌다. 메르켈은 NATO방위분담금도 마지못해 올렸었다. 그랬던 독일이 이제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설 뿐 아니라 독일 국방비를 전체 GDP의 2%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戰犯國)으로서의 트라우마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적극적인 국방비 증가는 가능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스스로 삼가기도 했지만 안보는 미국 주도의 NATO체제에 그냥 저비용으로 편승하자는 정도가 대세였다. 그랬던 독일을 러시아가 애써 자극해 전면적인 재무장의 길로 나서도록 한 셈이 되었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독일이 서구 진영 수호의 전면에 나선 셈이 됐다는 것이다. 독일은 서구 근대문명 발전사에서 보면 후발국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영미나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리 자유민주주의가 활발하게 성장한 경우가 아니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했다. 그 정서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야기하는 한 원인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나치는 전체주의적 폭주의 극한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독일을 변화시킨 자유문명의 힘
그랬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으로 재성장을 시작하고 오랜 냉전(冷戰)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동서독이 마침내 통일이 될 당시 영국의 대처 총리는 극언까지 하며 독일 통일에 반대했다. 통일 독일이 다시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깨뜨리는 말썽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였다. 하지만 통일 독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반의 오해(?)와는 달리 통일 독일은 국제정치적으로는 지나칠 정도로 얌전했다. 미국이 독일의 방위비 분담에 불만을 터트릴 만큼이었다.
그랬다. 독일은 더 이상 양차대전을 일으킨 과거의 독일이 아니었다. 얄미우리만치 경제에만 몰두했다. 과거 나폴레옹은 영국인들을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상인’이라고 했으며 히틀러는 미국인들을 또 그렇게 비판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독일이 그랬다. 독일은 더 이상 군사적 패권의 야심을 불태우는 나라가 아니었다. 자유민주문명의 힘이 그렇게 만들었다.
反動으로 향하는 러시아
하지만 러시아는 거꾸로 갔다. 푸틴 시대가 이어지는 동안 러시아에는 극우(極右) 이데올로그들이 발호했다. 이들은 서구의 자유민주문명을 타락으로 본다. 러시아는 과거 비잔틴제국 문명을 상속한 나라이며 그 전통으로 복귀하는 게 옳다고 주창한다. 러시아정교회와 차르통치가 정교일치(政敎一致)로 하나가 되어 지켰던 정신문화 회복을 말한다. 소련 시절을 위세를 떨쳤던 영광스러운 시대로 여기는 분위기도 나타났다. 그러면서 위협적으로 힘을 행세하려는 행태가 나타났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네오나치’를 운운하며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서구세계 도처에는 네오나치가 조금씩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유의미한 사회적·정치적 세력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나치에 버금가는 극우 민족주의·국가주의 정서가 팽배한 나라는 사실은 다름 아닌 러시아다. 러시아는 자유민주문명 국가로 재탄생하고 성장하는 데 실패했다. 푸틴 러시아의 정치문화는 반동으로 향하고 있다.
러시아의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대치의 자세는 역사적으로도 뿌리가 깊다. 과거 표트르 대제 때 서구화의 개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쉬이 변화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빈 체제를 수립할 당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제안으로 1815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간에 신성(神聖)동맹이 체결됐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세력균형 체제였다. 그런데 신성동맹은 이념적 내용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마디로 근대를 거부하는 반동체제였다. 신성동맹의 핵심은 프랑스혁명이 상징하는 근대적 이념의 거부였다.
프랑스혁명의 폭주의 상흔은 간단치 않았다. 하지만 그 같은 진통과는 별도로 근대문명의 등장과 성숙은 잠시는 멈출 수 있어도 결국에는 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완강했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도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로 나눠졌다. 이렇게 굳어져 간 러시아의 정치문화적 특성은 볼셰비키혁명과 이후의 소련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레닌의 정치론은 서구적인 게 아니었다. 그의 민주집중제론은 차르 러시아의 전제주의적 정치문화에 더 많이 닿아 있었다. 소련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체제는 이념의 간판만 사회주의였을 뿐 신성동맹의 재현이었다.
제국 러시아에 서구식 근대화는 타락일 뿐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입장에서 서구식 근대체제란 타도해야 할 자본주의 이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자유의 문명’은 적(敵)이었다. 푸틴의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으로는 근대 자유민주주의적 성숙이 전혀 이뤄지지 못한 가운데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만 강해지고 있다.
미어샤이머가 옳았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한 뿌리이며 독립국이었던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논리로 2014년에는 크름반도를 침공해 점령했으며 지금은 우크라이나를 또 침공했다. 그런데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가인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3월 1일 주간지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2008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나토에 가입시킬 의사를 밝힌 것(조지 W. 부시 정부 시절 나토의 부쿠레슈티 선언)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 같은 논리는 푸틴 러시아에 있어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활용됐다. 러시아 외무부의 트위터 계정은 3월 1일 미어샤이머가 2014년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병합하고 돈바스 지역에서 친 러시아 반군 세력이 일어섰을 때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을 공유했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왜 서구의 책임인가’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미어샤이머는 그 글에서 “문제의 근원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대”이며 “미국과 유럽 동맹들이 이 위기의 대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미어샤이머는 푸틴의 나팔수라는 비난을 받았다.
물론 미어샤이머는 결코 푸틴의 나팔수가 아니며 매우 냉철하다. 미어샤이머는 우크라이나가 1990년대 초 구(舊)소련에서 독립한 후 자국(自國) 영토에 배치한 핵무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할 때, 거의 드물게 그 결정을 비판했다. 바로 국경을 인접한 러시아가 핵무기를 앞세울 경우 대응할 억지 수단을 잃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미어샤이머가 옳았다. 그의 우려는 2014년 크름반도 병합, 동부 우크라이나 내전을 비롯한 러시아의 개입으로 입증되었다.
西歐로의 편입을 갈망하는 東歐
현실주의적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현실은 현실대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헤아림은 감상적이어선 안 된다. 감상에 치우치면 판단을 그르치고 판단을 그르치면 위험해진다. 개인이든 국가든 다 마찬가지지만 국가적 차원에선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국가는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는 낙관을 불허하는 위험을 언제나 안고 있다. 낙관주의가 위험을 부르기 일쑤며 결코 낙관하지 않는 조심성이 위험의 현실화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은 분명 유용하다. 그러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계와 국제정치의 모든 것에 대한 답은 아니다.
구소련권 많은 나라들은 서구의 일원이 되고자 갈망하고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서구의 자유민주문명이 바로 번영과 인간다운 삶의 열쇠임을 목격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만약 러시아가 그만한 매력을 보여주었으면 그 나라들도 러시아의 영향권으로부터 마냥 벗어나려고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소련권 나라들이 NATO와 EU에 가입하려는 것은 미국과 서구가 협박하고 강제해서가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NATO와 EU에 어쨌든지 들어가고 싶어 한다. 이유는 러시아가 싫기 때문이며 미국과 서구와의 관계가 이득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적나라하게는 러시아를 위협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역사적 상흔도 있다.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 대기근
1932~1933년에 소련 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당시 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다. 우크라이나어로 홀로도모르(Holodomor)로 일컫는 기근이었다. 그런데 의미는 그냥 기근이 아니다. “기아로 인한 살인(Killing by hunger)”이라는 뜻이다. 자연발생적인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자행한 책임자가 있다는 의미다. 바로 혁명 러시아와 소련에 의한 사태였다.
대기근의 피해는 끔찍했다. 희생자 수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다. 대체로는 350만 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나 니얼 퍼거슨은 최소 110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했다.
소련은 혁명 후 농업집단화 정책을 밀어붙이며 농촌의 반동적 풍토를 척결한다며 대대적으로 쿨락(부농) 숙청을 감행했다. 그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 바로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전통적으로 쿨락이 많았다. 그런 만큼 저항도 가장 심했다. 집단화로 뺏길 자기의 재산을 스스로 미리 파괴해버릴 정도였다. 이때부터 농업 생산력이 급감해가기 시작했다.
그 후유증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전쟁을 하면서 폭발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소련군 식량의 대부분을 감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더 철저하게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농부가 수확한 식량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그 결과였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우크라이나는 거슬러 올라가자면 푸틴의 주장처럼 러시아와 같은 뿌리를 갖는다. 그러나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의 만행은 그 연(緣)을 파괴했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했다.
달래기만으로는 안 된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헤아리는 건 항상 견지해야 할 자세다. 하지만 한계선이 있다. 넘지 않아야 할 선,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조차 마냥 달래는 것은 세력 균형도 현실주의적 현명함도 아니다. 도발을 더 부추기는 유혹의 작용이 될 뿐이다. 깡패가 행패를 부릴 때 내세우는 가장 상투적인 주장이 자신을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이 옳다며 깡패를 달래는 건 더 방자해지게 하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서구는 사실 역사적으로 그런 경험을 이미 했다. 히틀러가 초기에 야심을 드러냈을 때도 마냥 양보를 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뮌헨협정이라는 평화협정을 맺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 협정은 결국 히틀러의 야욕에 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평화는 단순히 세력 균형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세력 균형론에 의한 평화는 적대적 상대도 냉철한 현실주의적 타산을 항상 견지할 것이라는 논리적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인간은 마냥 합리적이고 냉철한 존재가 아니다. 욕망이 있고 들뜨기도 하며 사고를 친다. 히틀러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선을 넘었다. 푸틴은 어떨 것인가?
이제 사람들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개별 국가’가 먼저 주어진 현실이다. 지구상 200여 개 나라 가운데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는 것은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규정력이다. 국민국가 없는 세계시민이란 뿌리 없는 초목처럼 현실성이 없다. 하지만 개별 국가를 넘어선 ‘세계’ 또한 분명한 ‘현실’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단순히 지리적 범위가 아니다. 인접성의 차원이 아니다. 이제 ‘세계’는 시스템이며 이념이다.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렇게 됐다. 그 중심은 ‘자유민주문명’이다. 이를 중추로 하여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현실적 실체로서 작동하고 있다.
칸트는 국민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당시 세계시민론과 영구평화론을 주창했다. 1795년 《영구평화를 위하여》에서였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영구평화는 영구히 없다.
칸트의 주창 불과 몇 년 뒤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양대 진영 간의 대전(大戰)을 억제한 것은 냉전이라는 아슬아슬한 무장평화였다. 하지만 칸트의 논리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유민주 진영만의 상황으로 보자면 칸트적 평화라 할 만했다. 자유민주 진영 국가들끼리의 전쟁은 없었다.
‘역사의 종언’의 종언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면서 잠깐은 진영 간 대결이 ‘역사의 종언(終焉)’을 고하고 자유민주주의적 평화의 시대가 오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역사의 종언이 종언을 고했음”을 느끼고 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랬던 것처럼 국지적(局地的) 지배자들이 패권 확장의 야망을 불태우는 양상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의 중공, 푸틴의 러시아가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자유민주문명에 입각한 세계질서의 소중함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분노를 보이며 러시아를 규탄하는 대열에 나섰다. 절대다수의 나라들이 푸틴 러시아의 망동(妄動)을 규탄하고 제재를 가하는 데 일제히 동참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양식(良識)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국제적인 경제제재는 세계경제체제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낙관은 깨지고 이상주의적 구상의 한계도 분명해졌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유민주문명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안정의 중요성은 재인식되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은 한국에도 의미가 각별하다. 한국은 건국 3년 만에 공산권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몰렸다. 만약 당시 유엔 결의에 따른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의 참전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그때 사라졌을 것이다. 미국이 한미 동맹 체결을 약속하지 않고 6·25전쟁을 끝내버렸다면 한국의 이후 운명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6개국의 참전도, 그리고 한미 동맹도 결코 마냥 현실주의적 선택인 것은 아니었다. 자유민주 진영의 이념적 가치에 따른 결단이었다.
지금 그 역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선 국가 간의 열전으로, 그리고 한국에선 일차적으로는 국내정치적 격돌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적 차원과 국내정치적 차원은 이미 하나가 돼 있다. 한국에서 국내적 이념대립은 중공과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응자세 문제와 직결돼 있다.
이번 승리는 낙동강 방어선일 뿐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는 동유럽 지역 이상으로 긴박하다. 동아시아는 지금 점점 더 고위험의 화약고가 돼가고 있다. 중공은 중국몽(中國夢)을 앞세우고 옛 중화(中華)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며 나서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그에 편승하려는 언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번 선거를 통해 그 폭주는 일단 저지했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다. 비유컨대 이번의 승리는 낙동강방어선일 뿐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겨낼 것이다.
자유민주문명에는 약점이 있다. 어수룩하기도 하고 방만하기도 하다. 방만함은 이완과 타락을 가져온다. 윤리적 일탈이 있고 복에 겨운 문화적 혼돈도 있다. 그러나 그 어수룩함은 동시에 강점이다. 어수룩함 안에 오히려 건강한 힘이 있다. 그 점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들은 자유를 피곤해하고 일사불란함을 바라곤 한다. 거기에 전체주의적 유혹이 도사린다. 그러나 일사불란함은 잠깐의 힘이다. 경직은 균열을 가져오며 단단한 것은 금이 가면 깨진다. 하지만 부드러운 것은 금이 가서 깨지는 법은 없다.
자유민주문명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게 이 문명의 본질적 특성이다. 하지만 이 근대문명은 위대한 성취다. 그리고 일사불란한 전체주의보다는 더 강하다. 이길 것이다. 그러나 위협에 맞서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그런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3·9 대선의 전체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다. 3·9 대선은 정당 간의 통상적인 정권 다툼이 아니었다는 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저변에는 대한민국의 앞으로의 총체적 향방을 둘러싼 거대한 격돌이 있었다.
그 함의는 공교롭게도 한국에서의 3·9 대선 선거전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와중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시사(示唆)해주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전체주의적 반동(反動)으로 퇴행(退行)하고 있는 국가가 자유민주문명으로 향하고 있는 나라를 침공한 것이다.
“우리는 西歐의 理想을 위해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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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페이스북 홈페이지.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세계를 방어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
사실 대다수 서구 언론 등이 전망했듯이 단기간에 우크라이나의 항복으로 끝났다면 그런 논리가 한국의 대선전(大選戰)에서 위력을 발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아무 상관없는 남의 나라 일이 이미 아니었다. 더욱이 우리가 반드시 수호해야 할 문명적 가치가 무력(武力)으로 직접적 침공을 당한 사태였다. 그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기적과 번영은 위대한 지도자와 국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노력이라는 것을 빼면 자유민주문명의 일원이 됐다는 게 가장 결정적인 힘이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자유민주 대한민국 건국과 한미(韓美) 동맹의 수립은 예언적 위업이었다. 그리고 이후 수많은 진통을 겪으면서도 대한민국은 근본적으로 자유민주문명권 일원의 자리를 지켰다.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은 이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서구(西歐) 각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초기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두고 ‘코미디언 출신의 초보 정치인’ 운운하는 비웃음이 있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의 최고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였다. 더욱이 그는 집권한 뒤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언급하며 한국을 모범으로 삼아 우크라이나도 그렇게 발전하게 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이승만과 박정희(朴正熙)에 대해서도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성장 발전을 알고 흠모할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문명인 서구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단순한 초보가 아니었다.
더욱이 쳐들어가면 바로 도망칠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그는 결연한 의지로 침공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 세계를 움직였다. 피신을 제안하는 미국에 대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신처가 아니라 탄약”이라고 했으며 EU정상회의에 화상으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 “우리는 서구의 이상(理想)을 위해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장엄했다.
자유민주문명의 가치 수호와 관련된 문제
우크라이나의 싸움은 그냥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 이론으로만 헤아릴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의 세계,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의 번영과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했던 자유민주문명의 가치 수호와 관련된 문제다. 어떻든 무조건 전쟁 없는 평화가 좋으며 패권(覇權)의 야심을 불태우는 자들이 아무리 도발을 가해와도 그래도 그저 자극하지 않고 달래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민주문명은 그따위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지구 반대편에서 열전(熱戰)으로 자유민주문명과 반동적 전체주의 패권국가가 싸우는 와중에 대한민국에선 대선이 진행되었다. 한국의 대선은 무기를 든 열전은 아니었지만 문명적 가치, 이념적 가치의 차원에선 또 전면적인 내전(內戰)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의 3·9 대선은 일단 윤석열 당선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신승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격돌이 문명적 가치, 이념적 가치의 타협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단지 선거만 끝났을 뿐이다. 가치 수호를 위한 싸움은 더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다.
문명적 성취는 그냥 물질적 성취가 아니다. 물질적 성취와 정신적 구현이 따로 가는 문명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 삶이 그렇듯 문명은 물질적 성취임과 동시에 이념적 가치의 구현이다.
고대(古代)에 최초의 몇몇 문명이 등장한 이래 세계 도처에서 크고 작은 문명들이 명멸해왔다. 지역별로, 그리고 시대별로 나름의 성취를 이룩하고 또 유산을 남겼다. 그런데 지금은 그 각각의 구분을 넘어서는 문명이 자리 잡았다. 근대문명이다. 출발은 서구의 근대에서부터였다. 그래서 시작점에서 보자면 분명히 서구문명이지만 근대문명은 더 이상 서구만의 것이 아니다. 하나의 보편문명이다.
문명은 퍼져나가고 모방하고 그러면서 변모하고 또 성장한다. 문명의 역사란 본래 그러하다. 문명에는 저작권이 없다. 서구문명 자체부터가 그렇다. 서구문명의 뿌리에는 그리스-로마 고전문명과 기독교문명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서구인들은 종족적·민족적으로는 고대의 바로 그 주역들의 직접적 후예가 아니다. 그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새로운 주역들이 학습하고 수용하면서 문명적 성장을 했다. 그리고 근대에 접어들면서 또 다른 문명적 성취를 하게 됐다. 평탄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안팎으로 격렬한 진통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획기적인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자유의 문명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가 성장하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가 일반적 원리로 자리 잡아갔다. 과학기술이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고 산업혁명이 이루어져 갔다. 이 각 영역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가 서로를 이끌며 하나로 엮여 있었다. 그런데 이념적 가치관의 차원에서 핵심적 견인차는 ‘자유’였다. 근대문명은 자유의 문명이다.
산업혁명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시장경제 원리의 강력한 작동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를 위해선 생각의 자유, 소유권과 이익 추구의 자유가 중요했다. 자유의 원칙이 힘을 발할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그것을 보증하는 게 필요했다. 중세적 신분질서가 퇴장하고 민주주의가 성장하면서 그 같은 흐름은 강화됐다.
민주주의는 처음에는 폭주했다. 그러나 긴 역사적 흐름에서 보자면 자유와 민주주의는 하나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는 단지 정체의 한 형태이지만 자유와 만나고 그것을 뒷받침하게 되면서 자유의 힘이 만개하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래서 근대문명은 ‘자유민주문명’이다.
나라마다 구체적 전개 양상에서 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큰 차원에서 보자면 서구 근대문명의 성장은 자유를 머리와 심장으로 하여 성장하고 발전해갔다. 그리고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하고 힘을 갖추면서 세계를 석권해갔다. 비(非)서구권의 후발국(後發國)들은 서구 국가들의 그 힘과 조우(遭遇)하면서 근대문명을 만나게 됐다.
적극적 수용도 있었다. 더 많이는 일단은 고통이 먼저이긴 했다. 그래서 저항도 있었다. 그러나 긴 역사적 시야에서 보자면 근대문명과의 만남과 수용은 근본적으로는 결코 불행이 아니었다. 자유민주문명은 후발 후진 지역의 사람들에게 생존조건과 인간적 대우에서 그 이전보다는 어떻든 더 나은 삶이 시작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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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츠 독일 총리는 2월 27일 의회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지지를 선언했다. 사진=AP/뉴시스 |
독일의 전임(前任) 메르켈 총리는 매우 친(親)러시아적이었다. 탈(脫)원전을 밀어붙이고 러시아로부터의 가스관을 설치해 대량으로 수입하도록 했다. 러시아는 덕분에 큰 이익을 보았다. 미국의 반대가 만만찮았지만 메르켈은 그렇게 했다. 그런데 독일과 러시아의 그 사이좋은 동반관계가 깨졌다. 메르켈은 NATO방위분담금도 마지못해 올렸었다. 그랬던 독일이 이제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설 뿐 아니라 독일 국방비를 전체 GDP의 2%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戰犯國)으로서의 트라우마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적극적인 국방비 증가는 가능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스스로 삼가기도 했지만 안보는 미국 주도의 NATO체제에 그냥 저비용으로 편승하자는 정도가 대세였다. 그랬던 독일을 러시아가 애써 자극해 전면적인 재무장의 길로 나서도록 한 셈이 되었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독일이 서구 진영 수호의 전면에 나선 셈이 됐다는 것이다. 독일은 서구 근대문명 발전사에서 보면 후발국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영미나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리 자유민주주의가 활발하게 성장한 경우가 아니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했다. 그 정서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야기하는 한 원인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나치는 전체주의적 폭주의 극한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독일을 변화시킨 자유문명의 힘
그랬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으로 재성장을 시작하고 오랜 냉전(冷戰)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동서독이 마침내 통일이 될 당시 영국의 대처 총리는 극언까지 하며 독일 통일에 반대했다. 통일 독일이 다시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깨뜨리는 말썽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였다. 하지만 통일 독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반의 오해(?)와는 달리 통일 독일은 국제정치적으로는 지나칠 정도로 얌전했다. 미국이 독일의 방위비 분담에 불만을 터트릴 만큼이었다.
그랬다. 독일은 더 이상 양차대전을 일으킨 과거의 독일이 아니었다. 얄미우리만치 경제에만 몰두했다. 과거 나폴레옹은 영국인들을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상인’이라고 했으며 히틀러는 미국인들을 또 그렇게 비판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독일이 그랬다. 독일은 더 이상 군사적 패권의 야심을 불태우는 나라가 아니었다. 자유민주문명의 힘이 그렇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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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1세. |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네오나치’를 운운하며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서구세계 도처에는 네오나치가 조금씩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유의미한 사회적·정치적 세력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나치에 버금가는 극우 민족주의·국가주의 정서가 팽배한 나라는 사실은 다름 아닌 러시아다. 러시아는 자유민주문명 국가로 재탄생하고 성장하는 데 실패했다. 푸틴 러시아의 정치문화는 반동으로 향하고 있다.
러시아의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대치의 자세는 역사적으로도 뿌리가 깊다. 과거 표트르 대제 때 서구화의 개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쉬이 변화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빈 체제를 수립할 당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제안으로 1815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간에 신성(神聖)동맹이 체결됐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세력균형 체제였다. 그런데 신성동맹은 이념적 내용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마디로 근대를 거부하는 반동체제였다. 신성동맹의 핵심은 프랑스혁명이 상징하는 근대적 이념의 거부였다.
프랑스혁명의 폭주의 상흔은 간단치 않았다. 하지만 그 같은 진통과는 별도로 근대문명의 등장과 성숙은 잠시는 멈출 수 있어도 결국에는 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완강했다.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도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로 나눠졌다. 이렇게 굳어져 간 러시아의 정치문화적 특성은 볼셰비키혁명과 이후의 소련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레닌의 정치론은 서구적인 게 아니었다. 그의 민주집중제론은 차르 러시아의 전제주의적 정치문화에 더 많이 닿아 있었다. 소련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체제는 이념의 간판만 사회주의였을 뿐 신성동맹의 재현이었다.
제국 러시아에 서구식 근대화는 타락일 뿐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입장에서 서구식 근대체제란 타도해야 할 자본주의 이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자유의 문명’은 적(敵)이었다. 푸틴의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으로는 근대 자유민주주의적 성숙이 전혀 이뤄지지 못한 가운데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만 강해지고 있다.
미어샤이머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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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어샤이머 교수. 사진=조선DB |
그의 이 같은 논리는 푸틴 러시아에 있어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활용됐다. 러시아 외무부의 트위터 계정은 3월 1일 미어샤이머가 2014년 러시아가 크름반도를 병합하고 돈바스 지역에서 친 러시아 반군 세력이 일어섰을 때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을 공유했다. ‘우크라이나 위기는 왜 서구의 책임인가’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미어샤이머는 그 글에서 “문제의 근원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대”이며 “미국과 유럽 동맹들이 이 위기의 대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미어샤이머는 푸틴의 나팔수라는 비난을 받았다.
물론 미어샤이머는 결코 푸틴의 나팔수가 아니며 매우 냉철하다. 미어샤이머는 우크라이나가 1990년대 초 구(舊)소련에서 독립한 후 자국(自國) 영토에 배치한 핵무기를 자발적으로 포기할 때, 거의 드물게 그 결정을 비판했다. 바로 국경을 인접한 러시아가 핵무기를 앞세울 경우 대응할 억지 수단을 잃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미어샤이머가 옳았다. 그의 우려는 2014년 크름반도 병합, 동부 우크라이나 내전을 비롯한 러시아의 개입으로 입증되었다.
西歐로의 편입을 갈망하는 東歐
현실주의적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현실은 현실대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헤아림은 감상적이어선 안 된다. 감상에 치우치면 판단을 그르치고 판단을 그르치면 위험해진다. 개인이든 국가든 다 마찬가지지만 국가적 차원에선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국가는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는 낙관을 불허하는 위험을 언제나 안고 있다. 낙관주의가 위험을 부르기 일쑤며 결코 낙관하지 않는 조심성이 위험의 현실화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은 분명 유용하다. 그러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계와 국제정치의 모든 것에 대한 답은 아니다.
구소련권 많은 나라들은 서구의 일원이 되고자 갈망하고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서구의 자유민주문명이 바로 번영과 인간다운 삶의 열쇠임을 목격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만약 러시아가 그만한 매력을 보여주었으면 그 나라들도 러시아의 영향권으로부터 마냥 벗어나려고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소련권 나라들이 NATO와 EU에 가입하려는 것은 미국과 서구가 협박하고 강제해서가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NATO와 EU에 어쨌든지 들어가고 싶어 한다. 이유는 러시아가 싫기 때문이며 미국과 서구와의 관계가 이득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적나라하게는 러시아를 위협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역사적 상흔도 있다.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 대기근
1932~1933년에 소련 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당시 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다. 우크라이나어로 홀로도모르(Holodomor)로 일컫는 기근이었다. 그런데 의미는 그냥 기근이 아니다. “기아로 인한 살인(Killing by hunger)”이라는 뜻이다. 자연발생적인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자행한 책임자가 있다는 의미다. 바로 혁명 러시아와 소련에 의한 사태였다.
대기근의 피해는 끔찍했다. 희생자 수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다. 대체로는 350만 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나 니얼 퍼거슨은 최소 110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했다.
소련은 혁명 후 농업집단화 정책을 밀어붙이며 농촌의 반동적 풍토를 척결한다며 대대적으로 쿨락(부농) 숙청을 감행했다. 그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이 바로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전통적으로 쿨락이 많았다. 그런 만큼 저항도 가장 심했다. 집단화로 뺏길 자기의 재산을 스스로 미리 파괴해버릴 정도였다. 이때부터 농업 생산력이 급감해가기 시작했다.
그 후유증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전쟁을 하면서 폭발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소련군 식량의 대부분을 감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더 철저하게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농부가 수확한 식량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그 결과였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우크라이나는 거슬러 올라가자면 푸틴의 주장처럼 러시아와 같은 뿌리를 갖는다. 그러나 러시아혁명과 스탈린의 만행은 그 연(緣)을 파괴했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했다.
달래기만으로는 안 된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헤아리는 건 항상 견지해야 할 자세다. 하지만 한계선이 있다. 넘지 않아야 할 선,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조차 마냥 달래는 것은 세력 균형도 현실주의적 현명함도 아니다. 도발을 더 부추기는 유혹의 작용이 될 뿐이다. 깡패가 행패를 부릴 때 내세우는 가장 상투적인 주장이 자신을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이 옳다며 깡패를 달래는 건 더 방자해지게 하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서구는 사실 역사적으로 그런 경험을 이미 했다. 히틀러가 초기에 야심을 드러냈을 때도 마냥 양보를 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뮌헨협정이라는 평화협정을 맺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 협정은 결국 히틀러의 야욕에 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평화는 단순히 세력 균형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세력 균형론에 의한 평화는 적대적 상대도 냉철한 현실주의적 타산을 항상 견지할 것이라는 논리적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인간은 마냥 합리적이고 냉철한 존재가 아니다. 욕망이 있고 들뜨기도 하며 사고를 친다. 히틀러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선을 넘었다. 푸틴은 어떨 것인가?
이제 사람들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개별 국가’가 먼저 주어진 현실이다. 지구상 200여 개 나라 가운데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는 것은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규정력이다. 국민국가 없는 세계시민이란 뿌리 없는 초목처럼 현실성이 없다. 하지만 개별 국가를 넘어선 ‘세계’ 또한 분명한 ‘현실’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단순히 지리적 범위가 아니다. 인접성의 차원이 아니다. 이제 ‘세계’는 시스템이며 이념이다.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렇게 됐다. 그 중심은 ‘자유민주문명’이다. 이를 중추로 하여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현실적 실체로서 작동하고 있다.
칸트는 국민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당시 세계시민론과 영구평화론을 주창했다. 1795년 《영구평화를 위하여》에서였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영구평화는 영구히 없다.
칸트의 주창 불과 몇 년 뒤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양대 진영 간의 대전(大戰)을 억제한 것은 냉전이라는 아슬아슬한 무장평화였다. 하지만 칸트의 논리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유민주 진영만의 상황으로 보자면 칸트적 평화라 할 만했다. 자유민주 진영 국가들끼리의 전쟁은 없었다.
‘역사의 종언’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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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4일 베이징동계올림픽 때 만난 푸틴과 시진핑.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사진=AP/뉴시스 |
그런데 이런 상황이 자유민주문명에 입각한 세계질서의 소중함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분노를 보이며 러시아를 규탄하는 대열에 나섰다. 절대다수의 나라들이 푸틴 러시아의 망동(妄動)을 규탄하고 제재를 가하는 데 일제히 동참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양식(良識)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국제적인 경제제재는 세계경제체제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낙관은 깨지고 이상주의적 구상의 한계도 분명해졌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유민주문명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안정의 중요성은 재인식되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은 한국에도 의미가 각별하다. 한국은 건국 3년 만에 공산권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몰렸다. 만약 당시 유엔 결의에 따른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의 참전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그때 사라졌을 것이다. 미국이 한미 동맹 체결을 약속하지 않고 6·25전쟁을 끝내버렸다면 한국의 이후 운명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6개국의 참전도, 그리고 한미 동맹도 결코 마냥 현실주의적 선택인 것은 아니었다. 자유민주 진영의 이념적 가치에 따른 결단이었다.
지금 그 역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선 국가 간의 열전으로, 그리고 한국에선 일차적으로는 국내정치적 격돌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적 차원과 국내정치적 차원은 이미 하나가 돼 있다. 한국에서 국내적 이념대립은 중공과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응자세 문제와 직결돼 있다.
이번 승리는 낙동강 방어선일 뿐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는 동유럽 지역 이상으로 긴박하다. 동아시아는 지금 점점 더 고위험의 화약고가 돼가고 있다. 중공은 중국몽(中國夢)을 앞세우고 옛 중화(中華)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며 나서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그에 편승하려는 언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번 선거를 통해 그 폭주는 일단 저지했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다. 비유컨대 이번의 승리는 낙동강방어선일 뿐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겨낼 것이다.
자유민주문명에는 약점이 있다. 어수룩하기도 하고 방만하기도 하다. 방만함은 이완과 타락을 가져온다. 윤리적 일탈이 있고 복에 겨운 문화적 혼돈도 있다. 그러나 그 어수룩함은 동시에 강점이다. 어수룩함 안에 오히려 건강한 힘이 있다. 그 점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들은 자유를 피곤해하고 일사불란함을 바라곤 한다. 거기에 전체주의적 유혹이 도사린다. 그러나 일사불란함은 잠깐의 힘이다. 경직은 균열을 가져오며 단단한 것은 금이 가면 깨진다. 하지만 부드러운 것은 금이 가서 깨지는 법은 없다.
자유민주문명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게 이 문명의 본질적 특성이다. 하지만 이 근대문명은 위대한 성취다. 그리고 일사불란한 전체주의보다는 더 강하다. 이길 것이다. 그러나 위협에 맞서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