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아프간 철수로 全 세계 어디에서도 전쟁 벌이지 않는 나라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어디서도 전쟁 벌일 수 있게 돼
⊙ 영국 등 유럽, 對中 견제의 助演이 아니라 主演
⊙ 지난 8월 미국 증시에 중국 관련 기업은 하나도 上場 안 돼… 금융 디커플링 시작
⊙ 한국만 ‘중국 패권론’에 현혹… 중국을 통한 反美정서 해소용인가?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前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 영국 등 유럽, 對中 견제의 助演이 아니라 主演
⊙ 지난 8월 미국 증시에 중국 관련 기업은 하나도 上場 안 돼… 금융 디커플링 시작
⊙ 한국만 ‘중국 패권론’에 현혹… 중국을 통한 反美정서 해소용인가?
劉敏鎬
1962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일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 졸업(15기) / 前 딕 모리스 선거컨설팅 아시아 담당. 《조선일보》 《주간조선》 등에 기고 / 現 워싱턴 에너지컨설팅 퍼시픽21 디렉터 / 저서 《일본직설》(1·2), 《백악관의 달인들》(일본어), 《미슐랭 순례기》(중국어) 등
-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14일 브뤼셀에서 열린 NATO 정상회의에 참석, 중국·러시아 견제를 위해 회원국들이 협력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사진=AP/뉴시스
‘가속도가 붙는 시대와 그에 맞서는 준비를…’.
유럽의 대표적인 지성(知性) 중 하나인 프랑스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가 최근 언론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세상 스피드가 예상을 뛰어넘어 엄청 빨라지고 있으며 신속한 대응이 절실하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갑자기 글로벌 뉴스 헤드라인으로 등장한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미국과 서방 쪽의 부실한 대응을 지적한 글이다.
아탈리는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무너질 때의 일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조지 H. 부시 미국 대통령은 독일 통일이 10년 뒤에야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동서독 통합은 부시 발언 이후 불과 1년 만에 이뤄졌다. 탈레반의 카불 입성도 원래 1년 이상 걸릴 것으로 전망했지만, 미군 철수가 이뤄지는 순간 함락됐다.
아탈리는 냉전(冷戰) 종식 이후 나타난 변화를 보면서, 글로벌 시대의 스피드가 앞으로 한층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예를 들어 2050년으로 예상되는 파멸적인 지구 온난화(溫暖化)도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4년 뒤인 2025년에 닥칠 수 있고, 미군의 나토(NATO) 철수도 미국 이익에 맞춰 한순간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변이(變異) 바이러스 확산, 중국의 타이완(臺灣) 침공도 스피드를 더해가는 발등의 불이라고 경고한다.
탈레반의 카불 점령 소식도 마찬가지다. 지난 8월 15일부터 난리를 치면서 글로벌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더니, 9월 1일 이후 갑자기 해외토픽 수준 뉴스로 뚝 떨어졌다. 여성 인권 문제와 관련된 탈레반의 폭정(暴政) 소식이 줄을 잇고 있지만, 9월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이라크·시리아 관련 뉴스가 그러했듯이, 미국인 집단 참수(斬首) 같은 좀 더 충격적인 ‘핏빛’ 뉴스가 없는 한 앞으로 탈레반 관련 뉴스는 해외토픽 수준에 머물다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탈레반도 결국 다시 미국을 찾게 될 것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일단락되면서 그 이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언제나처럼 반미(反美)를 외치는 사람들은 미국의 권위 추락과 미군에 대한 불신(不信)을 강조하면서 ‘미국 황혼론’에 무게를 두는 듯하다. 2001년 9·11 동시 테러 이후 20년이나 이어져온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영향력·지도력이 급추락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과연 그럴까?
북한·쿠바·필리핀·베트남·이란·이라크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미국과 전쟁을 벌였거나 갈등 관계에 있는 나라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슈퍼 파워 미국을 물리쳤다는 국가적 자부심이 넘치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그런 승리감의 이면(裏面)에는 초라한 현실이 드리워져 있다. 물리적으로 쫓아내기는 했지만,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됐다. 미국과 관계 맺었을 때보다 더 나쁜 현실만 밀려왔고, 미래는 한층 더 나빠질 전망이다. 돌고 돌아,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나라들은 미국과 다시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싫어서 쫓아내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라가 미국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해 당분간 큰소리를 치겠지만, 3800만 국민의 밥그릇을 채우려면 그들도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하기 위해 목을 매게 될 것이다.
미국이 옳은지 그른지를 물으며 단죄(斷罪)하는, 정의(正義)의 세계관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혹자는 이에 대해 박수를 치고 존경의 눈으로 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국내에서도 가닥을 잡기 어려운 정의론이 국제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다고 믿는 발상 자체가 신기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부모·자식 간 관계조차 막장으로 가는 시대다.
미국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이 악마인지 천사인지 여부는 논외 사항일 뿐이다. 미국이 천사는 아니겠지만, 악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현실을 무시하고 흑백 논리로 미국을 본다면, ‘우리끼리 주체의 나라’만이 유일한 대안(代案)이 될 것이다.
미국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 중국
‘중국’은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글로벌 뉴스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21세기로 들어선 이후 중국은 줄곧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해왔기에 사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중국은 ‘미국과 정면으로 부딪칠 나라’가 됐다는 점에서 이전과 상황이 다르다. 이제는 쿠션 없이 ‘미국과 정면으로 부딪칠 나라’가 중국이란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하면서 미국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전쟁을 벌이지 않는 나라가 됐다. 발칸반도·중동(中東)·아프리카 등 거의 전 세계를 무대로 미군이 전쟁을 벌이던 상황은 역사 속 아스라한 기억으로 사라져버리는 듯하다.
‘전쟁광(戰爭狂) 미국’이 사라졌으니 마침내 지구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정반대다. ‘평화의 미국’은 이제 언제 어디에서라도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됐다. 앞으로도 미국과 무관하게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결국 대부분이 ‘해결사 미국’에 손을 내밀 것이다. 전쟁 당사국(當事國)만이 아니라 주변국이나 이해 관련국이 미국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당분간 그런 요청에 무심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후유증’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미국의 적(敵)’으로 부상(浮上)한 중국이 거부의 배경에 있다. 미국에 있어서 중국은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다. 미국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미국의 다음 전쟁
역사를 통해 보면, 패권(覇權)국가는 지구상 어딘가에서 항상 전쟁을 벌인다. 영향력이나 영토 확장만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긍정적 효과와 결과가 패권국가로 나아가게 하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해왔다. 전쟁을 통해 내부를 통일하고, 군수(軍需)산업을 통한 경제 활성화가 가능하다. 전쟁이 진행되는 국가는 출산율도 높다는 것이 상식이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본능 때문에 인간은 가능한 한 많은 자식을 남기려 한다.
고대(古代) 로마를 보자. 기원전 1세기 황제 아우구스투스 등장 이래 476년 멸망할 때까지 서로마 역사 전체가 전쟁의 역사다. 변방 정복과 영토 확장이 로마 황제와 역사의 자화상이다. 로마가 공화정 이후 500년 넘는 동안 대제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끊임없는 전쟁이었다.
로마처럼 미국도 전쟁으로 얼룩진 나라다. 독립 쟁취, 영토 확장, 자원 확보, 인구 증가, 문화 확산에 이르는 미국이란 나라의 배경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자리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국의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다음 전쟁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국지적(局地的) 차원의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닌,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 국익(國益)에 직접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일본의 중국 점령을 묵인해주려 했던 미국
지난 8월 15일, 일본 NHK는 진주만 공격 직전까지의 국제 정세에 관한 흥미로운 방송 한 편을 내보냈다. 미국에서 최근 발견된 당시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가 쓴 일기를 기초로 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다. 최근 일본과 타이완의 우호관계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 이런 방송이 나오게 된 이유일지 모르겠다.
방송의 핵심은 일본에 대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자세다. 장제스 일기와 당시 비밀문서를 통해 밝혀졌지만, 미국은 당초 일본의 중국 점령을 인정하려 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한 달 전,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이 만든 대일(對日) 잠정협정안이 근거다. 협정안은 일본에 보내기 직전에 유럽 우방국에서 먼저 회람(回覽)됐다. 이의(異意)가 없을 경우 곧바로 일본에 전달될 협정안이었다.
협정안 내용은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하라’는 요구가 핵심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석유 금수(禁輸) 조치에 맞서 동남아시아 석유생산국들을 무력(武力) 점령한 상태였다. 미국은 일본이 물러나면 거기에 따른 보상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협정안에 대해 유럽 국가 대부분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이권(利權)에 민감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오히려 협정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단 한 나라가 맹렬히 반대했다. 영국의 처칠 총리다. 그는 곧바로 루스벨트에게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처칠이 반대한 것은 협정안 이면에 있는 핵심 사안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미국이 제시한 협정안에는 일본군의 중국 철수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묵시적(默示的)으로 일본군의 중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중국을 넘겨주고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자는 것이 루스벨트의 당초 생각이었다. 처칠은 이런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일본에 중국을 넘겨줄 경우 일본이 당장은 더 이상의 침략을 멈추겠지만, 장차 동남아시아 전체를 요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장제스 일기를 통해 밝혀졌지만, 당시 처칠이 루스벨트에게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중국 측의 끈질긴 외교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을 통한 항일(抗日) 외교에 매달렸다. 그는 미국·영국의 참전 없이는 중국이 결국 일본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장제스는 여러 차례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의 대일 참전을 호소하지만 루스벨트는 무심하게 대했다.
그러자 장제스는 처칠에게 주목했다. 그는 영국을 통해 미국을 우회 설득하는 외교에 주력했다. 그는 처칠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일본군의 공격 능력과 확전(擴戰) 가능성을 경고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만약 처칠이 아니었다면, 처칠에게 끈질기게 편지를 보낸 장제스 외교 수완이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 루스벨트의 협정안이 수정 없이 도쿄에 전달됐다면, 일본은 동남아시아 이권을 포기하고 중국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면 진주만 기습 공격도 없었고, 결국 미국과의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이익이 보장되는 선에서 일본의 중국 지배는 영원히 인정됐을 것이다. 물론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남았을 것이다. 장제스야말로 일본으로부터 중국과 조선을 지켜낸 최고 공로자라 볼 수 있다.
진주만 공격 다음 날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서 ‘미국이 전쟁에 들어가는데 중국도 협력해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받았다. 장제스는 당시의 소회를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중국의 항일전략 성과는 최고 정점(頂點)에 서 있다. 대일전쟁에 미국·영국이 참가하게 됐다는 것은 중국의 국가적 행운이다.”
1940년대 일본과 오늘날 중국
아프가니스탄 이후 글로벌 상황을 보면 중국이란 나라가 키워드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물론 유럽 선진국가들도 중국을 직접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5일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해군기지에 영국 항공모함 퀸엘리자베스호가 입항했다. 24년 만의 일본 방문인데, 남중국해를 무대로 한 미국·일본 합동군사훈련을 위해 들른 것이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전 상황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만주와 중국이 21세기 타이완과 일본 센카쿠(尖閣)열도로 바뀌었을 뿐, 기본 구도는 똑같다.
21세기 중국 처지에서 보면, 진주만 공격 직전의 일본보다 더 나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80년 전 미국은 당초 일본에 중국을 넘겨준 뒤 평화와 상호 간 이권 보호를 받아내려 했다. 지금은 영국 등 유럽이 아예 처음부터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어서 미국이 적당히 타협할 수 없다. 미국이 타이완과 센카쿠를 중국에 넘겨주려 할 경우, 일본은 물론 유럽이 반발할 것이다. 동맹국의 의사를 중시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은 아직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홍콩에 이어 타이완·센카쿠열도가 중국에 넘어가게 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중국 지배권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2021년 남중국·동중국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디커플링 자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이해관계에 있는 유럽도 반중(反中) 전선에서 결코 조연(助演)은 아니다. 당당한 주연(主演)이다. 미국이 요청해 유럽의 반중전선이 구축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동남아시아 이권과 더불어 위구르·홍콩 문제를 지켜보면서, 유럽이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원하게 된 것이다.
‘중국 패권론’
이렇듯 미국과 유럽이 힘을 합쳐 중국에 대적(對敵)하고 있지만, ‘중국 패권론’을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실패 이후 미국의 추락을 틈타 중국이 급부상할 것이란 전망이 곳곳에서 나온다. 탈레반과의 협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지하자원을 획득하는 등 중국의 외교·경제적 영향력이 중앙아시아 전체로 확대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부분적으로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중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을 잡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그럴 능력도, 의향도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한국은 드물게 ‘중국 패권론’을 믿고 따르는 나라 중 하나다. 필자가 보면 OECD 선진국 가운데 한국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독특한 정서이자 해석이다. 중국을 통한 반미감정 해소라는 기묘한 심리라고나 할까?
‘중국 패권론’을 강조할 경우 ‘미국 황혼론’도 자연히 따라온다. 언제부턴가 쑥 들어갔지만, ‘G2’라는 말이 한국 언론의 시사용어로 유행한 적이 있다. 미국과 중국을 동등한 글로벌 패권 주자로 대하는 것이 G2 개념의 핵심이다.
G2는 원래 오바마 집권 2기 때 민주당 일부에서 흘러나온 개념인데,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책임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후변동·환경·난민·인권 같은 영역에서 중국도 미국에 준하는 정도의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중국은 G2라는 표현 자체를 싫어한다. G2는 한국에서 한동안 통용되던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최근 중국 총리 리커창(李克强)도 실토했지만, 2021년 중국에는 월(月)수입 150달러 이하의 인구가 6억명에 달한다. 그런 수준의 나라를 미국과 대등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미국을 넘어서는 슈퍼 파워가 될 것이라며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던 나라가 한국이다.
중국산 전기자동차의 운명
미국이 중국과의 디커플링에 들어간 직후 그런 허황된 생각들은 사그라들었다.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디커플링 이후 중국의 경제 하락이 가속화되고 있다. 단기적 차원의 수출·수입 문제가 아니다. 장기적 차원에서 중국의 산업구조 자체가 서방 수준과 기준에 못 미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은 중국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 없이 버틸 수 없다. 희토류(稀土類) 같은 희귀 금속이 자주 거론되지만, 싸니까 중국산이 강할 뿐이다. 환경 파괴를 무시하고 값을 올릴 경우 미국의 선택권은 무궁무진하다. 노동 집약적 상품의 경우 중국 우위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력을 기초로 한 고(高)부가가치 상품은 다르다. 미국 협력, 나아가 미국 시장 없이는 도약할 수 없다.
간단한 예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전기자동차(EV)를 예로 들어보자. 배터리가 생명이라면서, 수많은 배터리 공장이 세계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한국 신문을 보면, 중국이 가장 앞선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 부분적으로 앞선 것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 정부가 제시하는 전기자동차 기준이다. 짧은 충전(充電)시간과 긴 구동력이 전부가 아니다. 특허권, 환경, 노사(勞使)관계, 사용 후 관리, 심지어 기업 내 여성 임원 비율에 관한 기준이 전기자동차에도 적용될 것이다.
10분 충전하면 1000km, 1만km를 달리는 전기자동차가 있다 해도 중국산이 미국의 수많은 기준을 뚫고 들어오기는 어렵다. 일단 중국 공산당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부될 수 있다. 100만원대 중국산 전기자동차도 나오는 판이니까, 개발도상국에서는 팔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시장도 아니고 돈이 될 수 없다.
전기자동차뿐 아니라 다른 기술 집약적 고부가가치 제품도 똑같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미국이나 서방 선진국에 중국산 전기자동차, 나아가 고부가가치 제품의 진입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 경우 미국에도 피해는 있다. 그러나 중국이 한층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고부가가치 상품 차단으로 연결될 디커플링이 계속되는 한 중국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美中 금융 디커플링 현실화
미국은 제조업과 무관한 금융·서비스 대국이다. 기축(基軸)통화인 달러를 통한 중국 기업에 대한 자본조달도 디커플링 이후 급추락하고 있다.
지난 8월, 뉴욕 주식시장에 신규 상장(上場)된 중국 관련 기업은 하나도 없다. 7월에는 1개가 있었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금융 디커플링이 현실화됐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중국 기업은 미국 금융시장에 상장해서 달러를 통해 기업 확장에 나서고 싶다. 그러나 디커플링 정책에 의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지난해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외국기업설명책임법’이 근거다. 회계와 관련해 미국식 기준을 엄밀히 적용하는 과정에서 상장 자체가 어렵게 된다. 기존 상장된 기업들도 미국식 회계 기준에 어긋날 경우 언제든지 퇴출(退出)될 수 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중국 정부는 외국에 상장하는 중국 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재무구조 규정을 한층 강화하는 과정에서 주가(株價) 폭락이 줄을 잇고 있다. 한국인 귀에도 익은 중국판 우버, 디디추싱(滴滴出行)은 좋은 본보기다. 지난 6월 뉴욕에 상장했지만, 한 달 만에 시가 총액 180억 달러가 폭락했다. 중국 정부가 해외 상장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5일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가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를 한국에 개방할 것이란 뉴스가 흘러나왔다. 영미권 5개국에만 문을 연, 일찍부터 일본이 눈독을 들인 정보공유동맹체가 ‘파이브 아이즈’다. 실현 여부는 지켜봐야겠지만 반중전선 참가를 전제로 한 개방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철수 일주일 만에 미국 의회가 대중동맹 강화에 나선 것이다.
‘중국 짝사랑’에 빠진 한국 정부의 자세를 보면 ‘파이브 아이즈’ 가입 기회를 준다고 해도 받을지 의문이다. ‘미군 정보 용병(傭兵)’ 운운하면서 ‘파이브 아이즈’ 가입에 결사반대라는 기묘한 데모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適者生存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조지 스펜서가 남긴 유명한 말 중 하나가 ‘적자생존(適者生存)법칙’이다. 스펜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적자생존법칙은 더 강하거나 더 개량된 것이 살아남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 열악한 상황하에서, 기존 제도에 맞춰가면서 생존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 선거가 반 년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차기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이후 밀려들 국제정치의 변화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대통령 때 벌어진 식의 글로벌 대변화를 만날 수도 있다. 미국이 일치단결할 경우, 소비에트 붕괴 같은 대사건이 중국이나 북한에 나타날 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아탈리가 지적했듯이, 부시가 10년 걸린다고 본 독일 통일도 1년 만에 이뤄졌다.
‘K-자화자찬’ 덕분에 한국이 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듯하다. 중국 정부가 인터넷 계정 몇 개만 차단해도 K팝, K게임 전체가 요동친다. 성(城)을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단 하루면 충분하다.
주변 4강을 고려해볼 때, 적자생존법칙이 ‘영원히’ 필요한 곳이 한국일지 모르겠다. 강하고 개량된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미 던져진 기존 프레임에 맞춰가면서 열악한 환경을 하나둘 극복해나가는 것이 생존의 비결이다.⊙
유럽의 대표적인 지성(知性) 중 하나인 프랑스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가 최근 언론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세상 스피드가 예상을 뛰어넘어 엄청 빨라지고 있으며 신속한 대응이 절실하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갑자기 글로벌 뉴스 헤드라인으로 등장한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미국과 서방 쪽의 부실한 대응을 지적한 글이다.
아탈리는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무너질 때의 일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조지 H. 부시 미국 대통령은 독일 통일이 10년 뒤에야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동서독 통합은 부시 발언 이후 불과 1년 만에 이뤄졌다. 탈레반의 카불 입성도 원래 1년 이상 걸릴 것으로 전망했지만, 미군 철수가 이뤄지는 순간 함락됐다.
아탈리는 냉전(冷戰) 종식 이후 나타난 변화를 보면서, 글로벌 시대의 스피드가 앞으로 한층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예를 들어 2050년으로 예상되는 파멸적인 지구 온난화(溫暖化)도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4년 뒤인 2025년에 닥칠 수 있고, 미군의 나토(NATO) 철수도 미국 이익에 맞춰 한순간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변이(變異) 바이러스 확산, 중국의 타이완(臺灣) 침공도 스피드를 더해가는 발등의 불이라고 경고한다.
탈레반의 카불 점령 소식도 마찬가지다. 지난 8월 15일부터 난리를 치면서 글로벌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더니, 9월 1일 이후 갑자기 해외토픽 수준 뉴스로 뚝 떨어졌다. 여성 인권 문제와 관련된 탈레반의 폭정(暴政) 소식이 줄을 잇고 있지만, 9월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이라크·시리아 관련 뉴스가 그러했듯이, 미국인 집단 참수(斬首) 같은 좀 더 충격적인 ‘핏빛’ 뉴스가 없는 한 앞으로 탈레반 관련 뉴스는 해외토픽 수준에 머물다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탈레반도 결국 다시 미국을 찾게 될 것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일단락되면서 그 이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언제나처럼 반미(反美)를 외치는 사람들은 미국의 권위 추락과 미군에 대한 불신(不信)을 강조하면서 ‘미국 황혼론’에 무게를 두는 듯하다. 2001년 9·11 동시 테러 이후 20년이나 이어져온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영향력·지도력이 급추락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과연 그럴까?
북한·쿠바·필리핀·베트남·이란·이라크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미국과 전쟁을 벌였거나 갈등 관계에 있는 나라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슈퍼 파워 미국을 물리쳤다는 국가적 자부심이 넘치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그런 승리감의 이면(裏面)에는 초라한 현실이 드리워져 있다. 물리적으로 쫓아내기는 했지만,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됐다. 미국과 관계 맺었을 때보다 더 나쁜 현실만 밀려왔고, 미래는 한층 더 나빠질 전망이다. 돌고 돌아,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나라들은 미국과 다시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싫어서 쫓아내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라가 미국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해 당분간 큰소리를 치겠지만, 3800만 국민의 밥그릇을 채우려면 그들도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하기 위해 목을 매게 될 것이다.
미국이 옳은지 그른지를 물으며 단죄(斷罪)하는, 정의(正義)의 세계관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혹자는 이에 대해 박수를 치고 존경의 눈으로 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국내에서도 가닥을 잡기 어려운 정의론이 국제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다고 믿는 발상 자체가 신기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부모·자식 간 관계조차 막장으로 가는 시대다.
미국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이 악마인지 천사인지 여부는 논외 사항일 뿐이다. 미국이 천사는 아니겠지만, 악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현실을 무시하고 흑백 논리로 미국을 본다면, ‘우리끼리 주체의 나라’만이 유일한 대안(代案)이 될 것이다.
미국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 중국
‘중국’은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글로벌 뉴스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21세기로 들어선 이후 중국은 줄곧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해왔기에 사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중국은 ‘미국과 정면으로 부딪칠 나라’가 됐다는 점에서 이전과 상황이 다르다. 이제는 쿠션 없이 ‘미국과 정면으로 부딪칠 나라’가 중국이란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하면서 미국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전쟁을 벌이지 않는 나라가 됐다. 발칸반도·중동(中東)·아프리카 등 거의 전 세계를 무대로 미군이 전쟁을 벌이던 상황은 역사 속 아스라한 기억으로 사라져버리는 듯하다.
‘전쟁광(戰爭狂) 미국’이 사라졌으니 마침내 지구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정반대다. ‘평화의 미국’은 이제 언제 어디에서라도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됐다. 앞으로도 미국과 무관하게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결국 대부분이 ‘해결사 미국’에 손을 내밀 것이다. 전쟁 당사국(當事國)만이 아니라 주변국이나 이해 관련국이 미국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당분간 그런 요청에 무심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후유증’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미국의 적(敵)’으로 부상(浮上)한 중국이 거부의 배경에 있다. 미국에 있어서 중국은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다. 미국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미국의 다음 전쟁
역사를 통해 보면, 패권(覇權)국가는 지구상 어딘가에서 항상 전쟁을 벌인다. 영향력이나 영토 확장만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긍정적 효과와 결과가 패권국가로 나아가게 하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해왔다. 전쟁을 통해 내부를 통일하고, 군수(軍需)산업을 통한 경제 활성화가 가능하다. 전쟁이 진행되는 국가는 출산율도 높다는 것이 상식이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본능 때문에 인간은 가능한 한 많은 자식을 남기려 한다.
고대(古代) 로마를 보자. 기원전 1세기 황제 아우구스투스 등장 이래 476년 멸망할 때까지 서로마 역사 전체가 전쟁의 역사다. 변방 정복과 영토 확장이 로마 황제와 역사의 자화상이다. 로마가 공화정 이후 500년 넘는 동안 대제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끊임없는 전쟁이었다.
로마처럼 미국도 전쟁으로 얼룩진 나라다. 독립 쟁취, 영토 확장, 자원 확보, 인구 증가, 문화 확산에 이르는 미국이란 나라의 배경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자리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국의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다음 전쟁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국지적(局地的) 차원의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닌,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 국익(國益)에 직접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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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회담에서 만난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는 미국을 대일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처칠을 활용했다. |
방송의 핵심은 일본에 대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자세다. 장제스 일기와 당시 비밀문서를 통해 밝혀졌지만, 미국은 당초 일본의 중국 점령을 인정하려 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한 달 전,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이 만든 대일(對日) 잠정협정안이 근거다. 협정안은 일본에 보내기 직전에 유럽 우방국에서 먼저 회람(回覽)됐다. 이의(異意)가 없을 경우 곧바로 일본에 전달될 협정안이었다.
협정안 내용은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하라’는 요구가 핵심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석유 금수(禁輸) 조치에 맞서 동남아시아 석유생산국들을 무력(武力) 점령한 상태였다. 미국은 일본이 물러나면 거기에 따른 보상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협정안에 대해 유럽 국가 대부분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이권(利權)에 민감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오히려 협정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단 한 나라가 맹렬히 반대했다. 영국의 처칠 총리다. 그는 곧바로 루스벨트에게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처칠이 반대한 것은 협정안 이면에 있는 핵심 사안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미국이 제시한 협정안에는 일본군의 중국 철수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묵시적(默示的)으로 일본군의 중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중국을 넘겨주고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자는 것이 루스벨트의 당초 생각이었다. 처칠은 이런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일본에 중국을 넘겨줄 경우 일본이 당장은 더 이상의 침략을 멈추겠지만, 장차 동남아시아 전체를 요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장제스 일기를 통해 밝혀졌지만, 당시 처칠이 루스벨트에게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중국 측의 끈질긴 외교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을 통한 항일(抗日) 외교에 매달렸다. 그는 미국·영국의 참전 없이는 중국이 결국 일본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장제스는 여러 차례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의 대일 참전을 호소하지만 루스벨트는 무심하게 대했다.
그러자 장제스는 처칠에게 주목했다. 그는 영국을 통해 미국을 우회 설득하는 외교에 주력했다. 그는 처칠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일본군의 공격 능력과 확전(擴戰) 가능성을 경고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만약 처칠이 아니었다면, 처칠에게 끈질기게 편지를 보낸 장제스 외교 수완이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 루스벨트의 협정안이 수정 없이 도쿄에 전달됐다면, 일본은 동남아시아 이권을 포기하고 중국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면 진주만 기습 공격도 없었고, 결국 미국과의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이익이 보장되는 선에서 일본의 중국 지배는 영원히 인정됐을 것이다. 물론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남았을 것이다. 장제스야말로 일본으로부터 중국과 조선을 지켜낸 최고 공로자라 볼 수 있다.
진주만 공격 다음 날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서 ‘미국이 전쟁에 들어가는데 중국도 협력해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받았다. 장제스는 당시의 소회를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중국의 항일전략 성과는 최고 정점(頂點)에 서 있다. 대일전쟁에 미국·영국이 참가하게 됐다는 것은 중국의 국가적 행운이다.”
1940년대 일본과 오늘날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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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공모함 퀸엘리자베스호. 미국·일본과의 합동훈련에 참가했다. 사진=영국 국방부 |
지난 9월 5일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해군기지에 영국 항공모함 퀸엘리자베스호가 입항했다. 24년 만의 일본 방문인데, 남중국해를 무대로 한 미국·일본 합동군사훈련을 위해 들른 것이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전 상황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만주와 중국이 21세기 타이완과 일본 센카쿠(尖閣)열도로 바뀌었을 뿐, 기본 구도는 똑같다.
21세기 중국 처지에서 보면, 진주만 공격 직전의 일본보다 더 나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80년 전 미국은 당초 일본에 중국을 넘겨준 뒤 평화와 상호 간 이권 보호를 받아내려 했다. 지금은 영국 등 유럽이 아예 처음부터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어서 미국이 적당히 타협할 수 없다. 미국이 타이완과 센카쿠를 중국에 넘겨주려 할 경우, 일본은 물론 유럽이 반발할 것이다. 동맹국의 의사를 중시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유럽은 아직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홍콩에 이어 타이완·센카쿠열도가 중국에 넘어가게 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중국 지배권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2021년 남중국·동중국 바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디커플링 자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이해관계에 있는 유럽도 반중(反中) 전선에서 결코 조연(助演)은 아니다. 당당한 주연(主演)이다. 미국이 요청해 유럽의 반중전선이 구축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동남아시아 이권과 더불어 위구르·홍콩 문제를 지켜보면서, 유럽이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원하게 된 것이다.
‘중국 패권론’
이렇듯 미국과 유럽이 힘을 합쳐 중국에 대적(對敵)하고 있지만, ‘중국 패권론’을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실패 이후 미국의 추락을 틈타 중국이 급부상할 것이란 전망이 곳곳에서 나온다. 탈레반과의 협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지하자원을 획득하는 등 중국의 외교·경제적 영향력이 중앙아시아 전체로 확대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부분적으로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중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을 잡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그럴 능력도, 의향도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한국은 드물게 ‘중국 패권론’을 믿고 따르는 나라 중 하나다. 필자가 보면 OECD 선진국 가운데 한국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독특한 정서이자 해석이다. 중국을 통한 반미감정 해소라는 기묘한 심리라고나 할까?
‘중국 패권론’을 강조할 경우 ‘미국 황혼론’도 자연히 따라온다. 언제부턴가 쑥 들어갔지만, ‘G2’라는 말이 한국 언론의 시사용어로 유행한 적이 있다. 미국과 중국을 동등한 글로벌 패권 주자로 대하는 것이 G2 개념의 핵심이다.
G2는 원래 오바마 집권 2기 때 민주당 일부에서 흘러나온 개념인데,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책임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후변동·환경·난민·인권 같은 영역에서 중국도 미국에 준하는 정도의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중국은 G2라는 표현 자체를 싫어한다. G2는 한국에서 한동안 통용되던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최근 중국 총리 리커창(李克强)도 실토했지만, 2021년 중국에는 월(月)수입 150달러 이하의 인구가 6억명에 달한다. 그런 수준의 나라를 미국과 대등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미국을 넘어서는 슈퍼 파워가 될 것이라며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던 나라가 한국이다.
중국산 전기자동차의 운명
미국이 중국과의 디커플링에 들어간 직후 그런 허황된 생각들은 사그라들었다.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디커플링 이후 중국의 경제 하락이 가속화되고 있다. 단기적 차원의 수출·수입 문제가 아니다. 장기적 차원에서 중국의 산업구조 자체가 서방 수준과 기준에 못 미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은 중국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 없이 버틸 수 없다. 희토류(稀土類) 같은 희귀 금속이 자주 거론되지만, 싸니까 중국산이 강할 뿐이다. 환경 파괴를 무시하고 값을 올릴 경우 미국의 선택권은 무궁무진하다. 노동 집약적 상품의 경우 중국 우위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력을 기초로 한 고(高)부가가치 상품은 다르다. 미국 협력, 나아가 미국 시장 없이는 도약할 수 없다.
간단한 예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전기자동차(EV)를 예로 들어보자. 배터리가 생명이라면서, 수많은 배터리 공장이 세계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한국 신문을 보면, 중국이 가장 앞선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 부분적으로 앞선 것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 정부가 제시하는 전기자동차 기준이다. 짧은 충전(充電)시간과 긴 구동력이 전부가 아니다. 특허권, 환경, 노사(勞使)관계, 사용 후 관리, 심지어 기업 내 여성 임원 비율에 관한 기준이 전기자동차에도 적용될 것이다.
10분 충전하면 1000km, 1만km를 달리는 전기자동차가 있다 해도 중국산이 미국의 수많은 기준을 뚫고 들어오기는 어렵다. 일단 중국 공산당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부될 수 있다. 100만원대 중국산 전기자동차도 나오는 판이니까, 개발도상국에서는 팔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시장도 아니고 돈이 될 수 없다.
전기자동차뿐 아니라 다른 기술 집약적 고부가가치 제품도 똑같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미국이나 서방 선진국에 중국산 전기자동차, 나아가 고부가가치 제품의 진입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 경우 미국에도 피해는 있다. 그러나 중국이 한층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고부가가치 상품 차단으로 연결될 디커플링이 계속되는 한 중국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미국은 제조업과 무관한 금융·서비스 대국이다. 기축(基軸)통화인 달러를 통한 중국 기업에 대한 자본조달도 디커플링 이후 급추락하고 있다.
지난 8월, 뉴욕 주식시장에 신규 상장(上場)된 중국 관련 기업은 하나도 없다. 7월에는 1개가 있었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금융 디커플링이 현실화됐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중국 기업은 미국 금융시장에 상장해서 달러를 통해 기업 확장에 나서고 싶다. 그러나 디커플링 정책에 의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지난해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외국기업설명책임법’이 근거다. 회계와 관련해 미국식 기준을 엄밀히 적용하는 과정에서 상장 자체가 어렵게 된다. 기존 상장된 기업들도 미국식 회계 기준에 어긋날 경우 언제든지 퇴출(退出)될 수 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중국 정부는 외국에 상장하는 중국 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재무구조 규정을 한층 강화하는 과정에서 주가(株價) 폭락이 줄을 잇고 있다. 한국인 귀에도 익은 중국판 우버, 디디추싱(滴滴出行)은 좋은 본보기다. 지난 6월 뉴욕에 상장했지만, 한 달 만에 시가 총액 180억 달러가 폭락했다. 중국 정부가 해외 상장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5일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가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를 한국에 개방할 것이란 뉴스가 흘러나왔다. 영미권 5개국에만 문을 연, 일찍부터 일본이 눈독을 들인 정보공유동맹체가 ‘파이브 아이즈’다. 실현 여부는 지켜봐야겠지만 반중전선 참가를 전제로 한 개방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철수 일주일 만에 미국 의회가 대중동맹 강화에 나선 것이다.
‘중국 짝사랑’에 빠진 한국 정부의 자세를 보면 ‘파이브 아이즈’ 가입 기회를 준다고 해도 받을지 의문이다. ‘미군 정보 용병(傭兵)’ 운운하면서 ‘파이브 아이즈’ 가입에 결사반대라는 기묘한 데모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適者生存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조지 스펜서가 남긴 유명한 말 중 하나가 ‘적자생존(適者生存)법칙’이다. 스펜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적자생존법칙은 더 강하거나 더 개량된 것이 살아남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 열악한 상황하에서, 기존 제도에 맞춰가면서 생존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 선거가 반 년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차기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이후 밀려들 국제정치의 변화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대통령 때 벌어진 식의 글로벌 대변화를 만날 수도 있다. 미국이 일치단결할 경우, 소비에트 붕괴 같은 대사건이 중국이나 북한에 나타날 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아탈리가 지적했듯이, 부시가 10년 걸린다고 본 독일 통일도 1년 만에 이뤄졌다.
‘K-자화자찬’ 덕분에 한국이 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듯하다. 중국 정부가 인터넷 계정 몇 개만 차단해도 K팝, K게임 전체가 요동친다. 성(城)을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단 하루면 충분하다.
주변 4강을 고려해볼 때, 적자생존법칙이 ‘영원히’ 필요한 곳이 한국일지 모르겠다. 강하고 개량된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미 던져진 기존 프레임에 맞춰가면서 열악한 환경을 하나둘 극복해나가는 것이 생존의 비결이다.⊙